이 순간, 은범의 머릿속에는 온통 시연뿐이었다.그리고 그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시연이가 그랬잖아. 우리 문제는 해결되지 않을 거라고... 그것도 영원히.’ ‘그땐 왜 그런 말을 한 건지 이해가 안 됐지만, 이젠 알 것 같아.’ “하...”은범은 자조적으로 웃었다. “하하...”‘시연이가 맞았어. 우리 부모님은 나를 끝까지 놓아주지 않을 거야.’‘그리고 나는, 내가 부모님과 시연이 사이에서 균형을 맞출 수 있다고 착각했지.’ ‘결국, 부모님의 거짓말로 나는 시연이를 잃었어!’‘내일이 바로 시연의 결혼식이라고...’‘내가 부모님을 너무 믿은 탓에, 시연이는 고유건과 결혼하게 된 거라고!!’은범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하지만 차가운 공기가 그의 심장까지 얼어붙게 했다.“당신들은 내 사랑을 망쳤고, 내 마지막 신뢰까지 짓밟았어.”그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오늘 이 집을 나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야.”“은범아!!!”노은범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돌아서서 뛰쳐나갔다.강수희와 노수철은 다급히 그를 뒤쫓았다.“아들!! 은범아!!”하지만 두 사람이 어떻게 젊고 다리 긴 아들을 따라잡을 수 있겠는가?“흑...”강수희는 남편의 품에 쓰러지듯 안겼다.“어떡해요... 우리 이제 어떡해요...?”...은범은 차를 몰아 곧장 항구로 향했다. 그에게는 단 하나의 생각밖에 없었다.‘제남도로 가야 해! 시연이를 만나야 해!’‘시연이가 고유건과 결혼하는 걸 막아야 해!!’창문을 열지 않았음에도 차 안으로 차가운 바닷바람이 스며들었다.은범의 심장은 타들어 가는데, 몸은 얼어붙는 듯했다.심야라 도로는 한산했고, 은범은 곧바로 항구에 도착했다.하지만 이 시간에는 배가 다 끊긴 상태였다.‘어떡하지?’‘개인 요트?’그는 요트를 산 적이 없었다.은범은 서둘러 핸드폰을 꺼내 소연준에게 전화를 걸었다.“연준아, 나야. 혹시 요트 있어?”[내가 요트 같은 걸 가지고 있을 것 같아?]모든 부자가 요트를 소유하는 것은 아니다
[시연아, 시연아...]은범의 목구멍이 막힌 듯 답답했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저 시연의 이름만을 반복해서 부를 뿐.시연도 조용히 들으며 속으로 말하고 있었다. ‘은이야, 잘 있어.'그리고 2초 후, 먼저 전화를 끊었다. 묵묵히, 아무 말도 없이.진아는 조용히 시연을 살폈다. 친구는 베이스 메이크업을 한 얼굴이었지만, 그 위에는 건조한 흔적뿐이었다.시연은 울지 않았다.왜일까... 이 순간, 진아는 조금 마음이 쓰였다. 시연 때문이 아니라... 은범 때문이었다.시연은 얼굴을 들고 미소를 지었다.“선생님들, 통화 다 끝났어요. 계속해 주세요.”...하객들로 가득 찬 예식장.유건은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때, 주지한이 유건의 뒤로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형님, 노은범 사장님이 오셨습니다. 입구에서 경비들이 막고 있습니다.”그리고 잠시 망설이더니 덧붙였다.“그런데... 형수님이랑 통화한 것 같습니다.”‘오?’유건이 눈썹을 살짝 올렸다. “아직도 문 앞에 서 있어?”“네.”그렇다면, 시연은 은범을 만나러 가지도 않았고, 들어오라고 하지도 않은 것이었다.유건은 표정을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계속 지켜봐. 그 외에는 신경 쓰지 말고.”“네.”...오늘은 결혼식을 올리기에 더없이 좋은 길일이었다. G시에서 내려오는 전통에 따라, 유건은 친구들과 함께 사주단자와 혼서를 지참한 중매인을 대동하여 신부의 집을 찾아야 했다.한편, 신부 측에서는 가족과 친지가 모여 이들을 정중히 맞이하고, 집 앞 마당 한가운데 마련된 상 위에 가지고 온 사주단자와 혼서를 올려두게 된다.그러나 유건과 시연의 결혼식은 집이 아닌 제남도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여러 전통적인 절차를 생략하고, 신랑 측을 대표하여 신랑인 유건이 사람들 앞에서 직접 혼서를 낭독하기로 했다.“첫째, 오늘을 시작으로 신랑 신부 두 사람이 정식으로 인연 맺음을 하늘에 고합니다.”“둘째, 두 가문이 이제 하나 되어 화목하기를 기원합니다.”“셋째, 길러주신 양
유건과 달리, 시연은 잘 알고 있었다. 은범은 더 이상 다가오지 않을 것이었다.왜냐하면 은범은 단 한 번도 시연이 원치 않는 일을 강요한 적이 없었다.그라고 차창 너머로 시연은 은범의 눈빛을 읽었다. 그것은 그녀를 걱정하는 눈빛이었다.문득, 시연은 손을 들어 차창을 내렸다.“시연아!” 유건이 놀라 외쳤다. ‘지금 뭘 하려는 거지?’하지만 시연은 유건을 신경 쓰지 않았다. 은범이 그녀를 보았기 때문이었다.두 사람의 시선이 맞닿는 순간, 시연의 눈가가 촉촉해졌다.은범의 얼굴선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소리 없이 입을 달싹였다.“시연아.”시연은 눈물 어린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입 모양을 만들었다. ‘나... 잘... 지내고 있어.’은범은 그 의미를 이해했다. 가슴이 저리고 아팠고, 시연을 향해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은범이도 내 마음을 알았네...’시연은 손을 들어 가볍게 흔든 후, 다시 시선을 거두었다.이어서 살짝 고개를 숙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됐어요. 출발하세요.”“네, 사모님.”이제 시연은 ‘사모님’이었다. 그녀의 한마디에 차량 행렬이 움직이기 시작했다.유건은 눈물이 맺힌 시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눈물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그는 참지 못하고 비꼬듯 말했다.“그렇게 아쉬워?”“고유건 씨.” 시연이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 “당신은 전 여자 친구와 끌어안고, 심지어 함께 밤을 보내기도 하잖아요. 그런데 나는 친구와 멀리서 작별 인사도 못 해요? 사람이 너무 이중적이면 안 되죠.”유건은 순간 말문이 막혔는데, 반박하려다 멈췄다.“내가 언제...”하지만 곧 깨달았다. 자신이 할 말이 없다는 것을.결국 머쓱하게 콧방귀를 뀌었다. “그건 안았던 게 아니라, 장소미가 취해서 부축해 준 거야.”“흥.”시연은 차갑게 웃었다. “당신은 고 대표님이잖아요. 뭐든 변명할 수 있겠죠.” 유건은 또다시 말문이 막혔다. 가슴이 턱 막힌 듯했다.잠시 숨을 고르고 말했다.
“진주야!”은범의 어조가 한층 낮아졌다. 그에게 있어서는 나름의 단호한 표현이었다.“아직도 못 알아듣겠어? 내 일에 상관하지 말고 당장 가줘.”잠시 뜸을 들이더니 덧붙였다.“그리고 앞으로는 나를 찾지 마. 우리, 더 이상 만날 필요 없어.”이 말을 마친 그는 진주를 지나쳐 앞으로 걸어갔다.“잠깐만!”진주는 다급한 마음에 남자의 팔을 붙잡았다.은범은 전류가 흐르는 듯한 반응을 보이며 진주의 손을 뿌리쳤다.남자의 차가운 태도에 진주의 얼굴은 점점 더 창백해졌다. 그러고는 입술을 떨며 말했다.“왜 그래...? 우리, 잘 지내왔잖아... 내가 뭘 잘못했어? 내가 널 기분 나쁘게 했어?”진주의 말에 은범은 가늘게 눈을 떴다.그리고 깨달았다.‘왜 이제야 알았을까?’‘하진주는 늘 우리가 친구라면서 우리 부모님을 속이는 데 도움을 주겠다고 했어...’‘하지만 진실한 마음은 그렇지 않았어. 단순한 친구라면, 이런 표정을 지을 리 없을 테니까.’ “허...”은범은 비웃음을 흘렸다. ‘어쩐지, 시연이는 하진주를 딱 한 번 보고서 나와의 이별을 결심했어!’ ‘사실... 시연이는 이미 다 알고 있었던 거야...’‘우스운 건, 내가 시연이한테 해명하려 했던 거지!’ ‘나랑 하진주는... 아무런 관계도 아니라면서...’하지만 은범은 이제야 깨달았다. 애초에 자신에게 마음이 있는 여자를 곁에 두고 다닌 것이 잘못이었다.결국, 그는 시연에게 상처를 주었으니, 시연을 잃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하진주.”모든 것을 이해한 순간, 은범의 목소리는 한층 차분해졌다.“난 너를 좋아하지 않아.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을 거야. 이만 돌아가. 그러면 우린 앞으로도 체면을 유지할 수 있을 거야. 하지만 계속 이런다면... 우린 결국 남이 될 수밖에 없어.”이렇게까지 말했으니, 진주가 더 이상 모를 리 없었다. 여자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고, 더 이상 부정하지도 않았다.“미안해.”그녀는 고개를 숙였다.“그동안 폐를 끼쳤어. 그럼, 난 이만
유건과 시연의 신혼 첫날밤은 살며시 스며드는 봄비처럼 다가왔고, 한여름 소나기처럼 뜨겁게 타올랐다.결국, 시연의 눈꺼풀이 감겨 버렸다.“여보, 물 좀 마셔.”유건은 시연을 품에 안고 물컵을 들어, 그녀의 입에 반쯤 가져다 댔다.“고마워요.”낮과 달리 한층 부드러워진 여자의 목소리였다.유건은 미소 지으며 받아들였다. “천만에, 여보.”‘역시 부부 사이는 말보다는 행동이 중요하구나.’‘옛말 틀린 거 하나 없네. 부부 싸움은 침대에서 끝난다더니, 정말 딱 맞아.’유건은 문득 떠오른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나, 서랍장을 뒤적였다. 그러다 약을 하나 찾아 들고 돌아와 이불을 살짝 들추고는 시연의 발목을 잡았다.그는 아까 시연의 뒤꿈치가 벗겨진 걸 알아차렸었다. 시연은 평소에 힐을 신지 않는 여자였지만, 결혼식이기 때문에 임신 중임에도 불구하고 짧게나마 힐을 신었다. 그러다 결국, 발뒤꿈치가 까진 것이었다. 유건은 약을 짜 손가락 끝에 묻혀 조심스레 상처 위에 발랐다.차갑고 약간 따끔한 감촉.“앗!”시연은 눈살을 찌푸리며 발을 움찔거렸다.“뭐 하는 거예요?”“가만히 있어.”유건은 여자의 다리를 살며시 눌러 움직이지 못하게 하며 다정하게 말했다.“뒤꿈치가 까졌잖아. 약 바르면 내일이면 괜찮아질 거야. 착하지.”시연은 여전히 귀찮다는 듯한 얼굴을 하며 재촉했다.“빨리 해요! 너무 귀찮아요. 지금 자야 해요.”“알았어, 알았어.”유건은 서둘러 남은 상처에도 약을 발랐다.“다 됐어. 이제 자.”“흥...”시연은 코웃음을 치며 몸을 돌려 잠들어 버렸다.‘저것 좀 봐, 완전 귀찮다는 얼굴인데?’유건은 어이가 없어 웃었다.‘나도 하루 종일 피곤했어. 그런데도 이렇게까지 챙겨줬는데, 칭찬 한마디도 안 해주는 거야?’ ‘조금 전까지 날 붙잡고 울던 사람은 어디 간 거지?’ ‘참, 자기 필요할 때만 날 찾는다니까.’ 그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불을 끄고 이불을 덮었다.다음 날 아침.유건은 평소처럼 일어났다. 시연은 지쳐 있었고
“침대로?” 시간이 아직 이르니, 좀 더 눈을 붙일 수 있을 것 같았다. “네...” 유건은 시연을 침대에 눕혔다. 시연은 허리를 한번 문지르더니, 참지 못하고 남자를 흘겨보았다. “다 당신 때문이에요!” “그래, 다 내 잘못이야.” 유건은 능청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순순히 인정했다. ‘이 인간, 진짜 뻔뻔하긴...’ 시연은 못마땅한 듯 다시 남자를 노려보다가 말했다. “안 잘 거면 내 허리 좀 주물러 줘요.” ‘어이구, 아주 능숙하게 부려 먹네.’ 하지만 유건은 거절할 생각도 없이 아주 쿨하게 대답했다. “좋아, 내가 해줄게. 내 손기술이 당신보단 못해도 힘 하나는 좋을 테니까.” 남자의 손바닥이 시연의 허리에 닿았고,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면 돼?” ‘오, 고 대표 손기술도 나쁘지 않은데?’ ‘아무래도 힘쓰는 일은 남자가 유리한 게 맞아.’ “네...” 시연은 눈을 가늘게 뜨며 나른하게 몸을 맡겼다. “그렇게... 그래요... 거기...” 마치 고양이처럼, 나른하면서도 애교 섞인 목소리가 나왔다. ...시연이 다시 눈을 떴을 땐, 벌써 정오였다. 순간, 그녀는 당황하며 황급히 세수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 와중에 옆에서 태평하게 앉아 있는 유건을 보자 괜히 화가 났다. “왜 안 깨웠어요?” 유건이 두 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깨우면 ‘왜 깨우냐’고 뭐라 하고, 안 깨우면 ‘안 깨운다’고 또 뭐라 하고. 사모님, 이렇게 어려운 사람이었어? 너무 곤란한데?” 사실 그는 시연이 늦을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 시연이 할아버지를 신경 쓴다는 걸 알기에. 그래서 바로 덧붙였다. “걱정하지 마. 할아버지가 널 얼마나 예뻐하시는데. 그리고 아직 안 늦었어.” 더 이상 유건과 실랑이할 시간이 없어서 시연은 급히 옷을 갈아입었다. 신혼 첫날, 시연이 고른 옷은 연한 보랏빛 롱 원피스였다. 왼손 약지에서는 유건과 맞춘 커플링이 빛났다. 그
시연과 유건은 가장 마지막에 도착했다.문에 들어서자, 지하와 몇몇이 장난스럽게 놀려댔다.“어젯밤에 너무 힘들었던 거 아니야?”“형수님, 정말 수고하셨어요!”“이야, 이러다 이삿짐 싸야 하는 거 아냐?”“너희, 평생 장가 안 갈 작정이냐?”다들 어른이 되고도 여전히 유치하기 짝이 없었다.시연은 그들의 말다툼에 끼지 않고, 우주를 바라보았다.지금 우주는 고상훈과 함께 조용히 바둑을 두고 있었다. 둘만이 유일하게 소란스러운 분위기에서 벗어나 있었다.진아가 살짝 다가와 속삭였다.“꽤 오래 두고 있어. 처음엔 어르신께서 우주에게 말도 걸었는데...”그 말은 곧, 지금은 조용하다는 뜻이었다.‘왜...?’시연은 고상훈의 표정을 살폈다. 심각한 얼굴이었다.‘이거 좀 불안한데.'노인의 얼굴빛이 좋지 않았다. 굉장히 고민하는 듯한 모습이었다.고상훈은 바둑을 굉장히 좋아했고, 그만한 실력자가 드물었다. 그런데 오늘 뜻밖의 상대를 만난 모양이었다. 그것도 겨우 십 대의 소년.이번 한 수를 두기 위해 꽤 오랜 시간을 고민하고 있었다. 하지만 명쾌한 해답이 나오지 않는 듯했다.다행히도, 우주는 일반적인 아이들과는 달랐다. 성급하게 굴지 않고, 조용히 기다렸다.시연은 바둑을 둘 줄 몰랐다. 전혀 관심도 없었다. 하지만 고상훈의 표정을 보아하니, 뭔가 심상치 않았다.“우...”입을 열어 우주를 부르려는 순간, 유건이 허리를 감싸며 그녀를 저지했다.시연이 고개를 들어 남자를 보았다.“왜 그래요?”“당신이야말로 뭐 하려는 거야?”유건은 그녀를 보며 웃었다.“두 사람 바둑 두고 있는데, 방해하면 안 되지.”“우주가 괜히 할아버지에게 폐 끼칠까 봐...”시연은 고개를 저었다.“우주는 바둑 둘 줄도 몰라요...”“우주가 보통 아이야?”유건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내가 보기엔 잘 두고 있던데?”“하지만...”시연은 망설였다.고상훈의 표정을 보면, 우주가 장난을 치고 있는 건 아닐지 하는 걱정이 들었다.“그럴 필요 없어.”유건은
“젊은 사람들끼리 재미있게 놀다 와.”시연의 몸 상태 때문에 신혼여행 계획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바로 제남도를 떠날 것도 아니었다.계획대로라면 섬에서 이틀, 삼일 정도 더 머무르며 쉴 예정이었다.오후가 되자, 유강석이 앞장서서 바닷가에 가자고 제안했다. 모두가 동의했다.시연은 우주를 걱정하며 물었다.“우주, 가고 싶어?”우주는 반짝이는 눈으로 시연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누나, 가고 싶어.”하지만 시연은 여전히 고민되었다. 몸이 불편한 탓에 동생을 제대로 돌볼 자신이 없기 때문이었다. 우주는 영리했다. 바로 유건에게 시선을 돌렸다.게다가 우주는 시연과 같은 눈을 가지고 있었다. 간절하게 바라볼 때면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표정을 짓곤 했다.유건이 그걸 이겨낼 리 없었다. 결국 처남을 위해 나섰다.“가자. 우주는 걱정하지 마. 내가 볼게. 마침 우주도 수영 배우고 싶다며? 내가 가르쳐 줄게.”우주의 두 눈이 더 크게 빛났다.몇 번이나 말하려다 망설이며, 결국 기대 가득한 눈으로 물었다.“매형, 진짜... 진짜야?”“진짜지.”유건은 잔잔히 미소 지으며 소년의 머리를 가볍게 두드렸다.“내가 너한테 거짓말하면, 네 누나가 날 가만둘 것 같아?”“누나.”매형의 약속을 받고 나니, 우주는 다시 시연을 바라보았다. 결국 결정권은 누나에게 있었다.동생의 간절한 눈빛을 외면할 수 없던 시연은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알았어.”물론, 또 다른 중요한 이유도 있었다.그녀는 유건을 믿었다.감정을 떠나, 유건이라는 사람 자체가 신뢰감을 주었다.“와!”우주는 기쁨에 들떠 뛰어올랐다.“매형! 누나가 허락했어! 얼른 가자!”그렇게 다들 바닷가로 향했다.남자들은 전부 바다로 뛰어들었고, 시연만이 해변 의자에 느긋하게 누워 있었다.임진아는 자연스럽게 시연 곁을 지켰다.“안 들어가?”“귀찮아.”시연은 고개를 저었다.“움직이기도 싫어.”“히힛.”진아는 장난스럽게 다가오며 속삭였다.“어젯밤에 너무 무리했어?”시연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시연은 물러설 수 없었다. 게다가, 우주를 생각하면 유건의 의중을 거스를 수도 없었다. 그녀는 얇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교수님, 그럼 어서 다 함께 내려가시죠.” “그... 그래.” “좋다!” “얼른 가자!” “나 진짜 배고파 죽겠어.” “나도. 저녁 먹으려고 하루 종일 굶었단 말이야.” “...”사람들은 웅성거리며 아까 있었던 일은 일부러 언급하지 않았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건물 앞에는 차가 여섯 대쯤 대기 중이었고, 일행은 그 차들을 나눠 타고 ‘셀레스트’로 향했다. ...일반 뷔페의 북적임과는 달리, ‘셀레스트’는 놀라울 만큼 조용했다. 손님들은 각자 음식을 고른 후, 식사 중에도 조용히 대화를 나눴으니 말이다. 지한이 예약해 둔 자리는 창가 쪽 세 테이블을 붙여놓은 넓은 자리였다. 음식은 신선한 재료로 구성되어 있었고, 해산물, 육류, 디저트... 중식, 양식 가릴 것 없이 다 준비되어 있었다. 깔끔한 플레이팅은 보기만 해도 식욕을 자극했다. “와... 이래서 비싼 거구나.” 주하은이 시연과 함께 음식 코너를 돌며 감탄했다. “여기 음료는 다 즉석에서 만들어주네.” 그리고 시연을 슬쩍 보며 웃는다. “고 대표님, 여전히 너한테는 돈 아끼는 법이 없네?” ‘돈을 아끼지 않는다...’시연은 대답 없이 웃기만 했다.예전에 시연은, 바로 그 ‘아낌없이 주는’ 모습에 마음을 빼앗겼다.그런데 지금은 그 모습이 오히려 그녀를 더 미치게 했다.자리로 돌아오자, 양석현이 컵을 들었다. “오늘은 지 선생이 쏜다니까... 우리 과 식구가 된 걸 축하하면서, 다 같이 건배하자! 지 선생, 고마워!” “지 선생, 축하해!” “지 선생님, 환영합니다!” “건배!” “...”시연도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컵을 들었다. 그 컵은 아까 하은이 가져다준 거였다. 시연은 살짝 긴장하며 입을 뗐다. “선생님들, 저는 이제
사무실은 완전히 조용해졌다. 모두가 두 여자의 상황을 지켜보며,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시연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숨고 싶을 정도의 굴욕감. ‘왜... 왜 내가 이런 꼴을 당해야 해?’이를 악물고 소미의 팔을 잡았다.“고유건 씨는 지금 여기 없어. 그 사람을 찾고 싶으면, 직접 전화해.”손에 힘을 주며 억지로 끌어내려 했다.“싫어! 난 안 가!” 소미는 저항하며 울부짖었다. “유건 씨! 난 유건 씨 봐야 해!!”“없다니까!!!”시연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소미는 갑자기 손을 뿌리치고 앞으로 뛰어갔다.“유건 씨!!!”복도 끝. 병동 입구.막 들어서던 유건이 놀란 얼굴로 멈춰 섰다. 소미의 등장에 당황한 그는, 곧장 시연을 찾았다.시연은 잠깐 멍하니 있다가, 고개를 돌려버렸다.‘이 상황, 최악이야.’유건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모두의 시선은 전부 두 사람에게 쏠려 있었다. 숨죽인 채, 입도 뻥끗하지 못한 채.사람 중 몇은 이미 눈치를 채고 있었다. “진짜 소문대로였네. 고유건 대표님과 장소미 씨...”“둘 사이, 예전부터 돌던 스캔들...”“끝나지 않은 거였어... 지금도...”“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는 고 대표님의 아내인... 지 선생님도 있는데...?”“...”소미는 유건의 팔에 달라붙었다. 그리고 남자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 엉엉 울기 시작했다.시연은 계속 거기에 있었다. 게다가 모두가 그 장면을 보는데도, 유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유건은 시연에게 말하고 싶고, 설명하고 싶었다.“여보...” 그는 한 발 내디뎠지만, 소미가 남자의 팔을 붙잡고 있었다.“유건 씨, 왜 이틀째 병실에 안 온 거예요? 나 치료도 안 받고 있었어요.”“소미 씨.” 유건은 난처하게 미간을 찌푸렸다.“요즘 일이 많았어. 직접 가지는 못했지만, 소미 씨 상태는 계속 보고 있었어.”“정말요?” 소미는 울다가 입술을 삐죽였다.“그럼, 지금은 시간 있잖아요? 저랑 같이 있어 줄래요?
외과 사무실을 나와 병원 건물을 벗어날 때까지, 시연의 얼굴엔 내내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여보.” 유건이 그녀의 손목을 잡아세웠다. “왜 그렇게 표정이 안 좋아?”물었으니 대답해야 할 터였다. 시연은 돌아보며 담담하게 말했다.“식사 자리는 내가 마련했어야 하는 건데, 왜 아무 상의도 없이 당신이 정했어요?”“어...?” 유건은 억울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내가 예약한 데가 마음에 안들어? 당신 셀레스트 음식 좋아하잖아.”“좋아하긴 하는데...” 시연의 눈썹이 확 짧아졌다. “당신, 우리 과에 몇 명이나 있는 줄 알아요? 의사 간호사 포함하면 30명은 넘는다고요!”“그래서?” 유건은 고개를 갸웃했다.‘‘그래서’라니...’ 시연은 숨을 꾹 참았다.‘대충 계산해도 거의 몇천만 원이야. 그걸 아무 말 없이 덜컥?’“비싸잖아요, 당신 정말 몰라서 그래요?”“그게 비싸?” 유건은 미간을 찌푸렸고, 진심으로 의아한 듯했다.“우리가 부담 못 할 정도는 아니잖아.”‘그게 문제가 아니라고.’ 시연은 말문이 막혔다.만약 자신들이 ‘정상적인' 부부였다면, 그녀도 이걸 기분 좋게 받아들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당신한테 빚지고 싶지 않다고. 그게 싫은 거야.’그녀가 진심으로 표정을 굳히자, 유건은 눈치 빠르게 태도를 바꿨다.“알았어, 이번엔 내가 잘못했어. 다음부턴 꼭 당신한테 먼저 물어볼게. 미안해, 응?”‘다음? 우리 사이에 다음이 있긴 한 걸까?’시연은 속으로 냉소적인 웃음을 흘렸지만, 입 밖으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식사 자리는 돌아오는 주말로 정해졌다. 당일, 당직 간호사 두 명을 제외한 나머지 직원들은 전원 참석 예정.근무 시간이 끝나기 전부터 사무실 분위기는 들떠 있었다.하지만 시연만큼은 평소처럼 진료차트를 정리하며 조용히 움직이고 있었다.‘그래도... 다들 내가 임신 중인 걸 챙겨주는 덕에, 차트 정리는 내 몫이 된 거야.’ “지 선생, 그만하고 옷 갈아입
“지 선생, 이렇게 좋은 날 뭔가 있어야 하는 거 아냐?” “맞아요! 우리 지 선생님, 명색이 사모님이신데 한턱내셔야죠!”“한턱이 뭐예요! 파티해요, 파티!” “좋아! 좋아!”“...”사무실은 순식간에 떠들썩해졌다. 축하의 의미를 담은 장난 섞인 말들이 오가며 분위기는 점점 올라가고 있었다.양석현 교수가 슬쩍 시연을 보더니,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자자, 후배인 시연이가 정식으로 입사했으니, 선생님이자 선배인 우리가 환영회를 열어줘야 하지 않겠어?” “아... 과 모임이라는 게 다 그렇지.”“예산은 정해져 있고, 장소도 늘 그 나물에 그 밥...”“교수님 말씀대로면 또 그 식당이겠지...” “병원 근처에 있는 몇 군데서 맴돌 뿐인데...”“차라리 그냥 내가 쏠걸 그랬나...”“그래도 이번엔 사모님 덕 좀 보나 했는데...”“...”묘하게 아쉬운 눈빛들이 여기저기서 오갔다.아쉬움이 가득한 눈빛이 오가던 가운데, 누군가 끝내 포기하지 못하고 슬쩍 시연에게 다가왔다.“지 선생님, 혹시 따로 생각해 두신 데 있으세요?”“저요...?”시연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내가 뭘 할 수 있겠어... 정말 돈도 없는데... 차라리 과에서 하는 게 나을 거야.’“그럼... 제가 따로 커피라도...”그때, 문이 열리며, 날렵하고 단정한 실루엣 하나가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고급스러운 정장에 단정한 머리, 은은한 미소까지.“분위기 좋은데요?”모든 시선이 일제히 유건을 향했다. 사무실 안은 마치 누군가 리모컨으로 ‘정지’ 버튼을 누른 것처럼 조용해졌다.‘저 사람이... 왜... 왔지?’시연은 눈썹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유건 앞을 막아섰다.“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 나 곧 끝나니까, 나가 있어요.”“이미 들어왔는데, 나가긴 좀 그렇잖아, 응?” 그는 미소를 지으며 시연이 손을 가볍게 잡았고, 곧장 열 손가락을 자연스럽게 깍지 꼈다. ‘제발, 지금 이 상황에서 이러지 마.’시연은 당황하며 손을 빼려 했지만, 유건
시연이 울었다.유건의 기억 속에서, 시연은 늘 강한 사람이었다.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던 사람. 특히 감정 문제에 있어서, 그녀가 눈물을 흘린 건 오직 한 사람, 우주 때문이었다.하지만 지금, 시연이 울고 있었다. 그것도, 유건의 앞에서.시연을 이렇게 만든 사람은 바로 유건이었다.유건은 당황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손을 들어 시연의 뺨을 닦아주려 했다.하지만, 시연은 남자의 손길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나가주세요. 지금은... 당신 얼굴 보기 싫어요.”“혼자 있고 싶으니까, 제발 나가줘요.”유건은 입술을 달싹였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시연이 이렇게까지 자신을 밀어낸 건, 처음이었다.“알겠어. 나갈게.”그는 조용히 물러서, 서재 문을 닫았다. 문 앞에 서서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내가... 너무 몰아붙였나?’‘시연이가 정말 잘못한 걸까? 혹시 내가 오해했던 건 아닐까?’‘그날도... 장소미랑 같이 납치됐을 때도, 두 사람이 일부러 만났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면?’유건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한편으로는 미안했고, 한편으로는 자신이 점점 감정에 휘둘리고 있다는 사실이 답답했다.시연이 ‘혼자 있고 싶다’고 했기에, 그는 더 이상 다가가지 않았다.하지만 밤 11시가 넘어도, 시연은 침실로 돌아오지 않았다. 평소라면 진작에 자고 있을 시간.유건은 결국, 다시 서재 문을 열었다.“여보?”조심스럽게 불을 켰다.방 안은 어두웠고, 시연은 소파에 몸을 웅크리고 잠들어 있었다. 배 위엔 얇은 담요가 덮여 있었지만, 겉보기에도 불안정했다.‘저 좁은 소파에... 저렇게 배가 불렀는데, 떨어지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유건은 조용히 다가가 그녀를 안아 침실로 옮겼다.시연은 깊이 잠든 상태였기에 그를 밀치지도, 눈도 뜨지 않았다.유건은 속으로 안도했다.‘지금은... 그냥 자게 두자.’아침.시연은 천천히 눈을 떴다. 익숙한 천장.
“괜찮아요...”시연의 목소리는 작고 흔들렸지만, 소미의 비명은 멈추지 않았다.“장소미 씨! 제발 진정하세요!” “진정제 가져와요!” “네!”의사와 간호사들은 그녀를 제어하지 못했다.“장소미 씨, 그렇게 움직이면 위험해요! 다치실 수 있어요!”“저 여자야...!” 소미는 시연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저 여자! 나를 망친 게 저 여자라고!! 으아아아아!!”의사는 당황한 얼굴로 시연을 바라봤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저는...” 시연은 멍하니 입을 열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왜 이러는 거야? 도대체 내가 뭘 했다는 거야?’“너, 당장 여기서 나가! 나가라고!!! 으아아아아!!!”또다시 소미가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다.“지 선생님, 나가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의사는 단호하게 말했다. “환자가 너무 예민한 상태라... 선생님도 아시잖아요. 이럴 땐 자극을 주면 안 됩니다.”“네...”시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병실을 나섰다. 복도를 걷는 그녀의 발걸음은 무겁고 혼란스러웠다.‘이 상태라면 나는 아무것도 들을 수 없을 거야. 근데, 장소미는 분명히 뭔가 알고 있어. 그날 밤... 그 사람의 정체를...’하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소미의 입을 통해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럼, 또 누구를 통해 알 수 있을까?’...그 시각, 병실 안.의사가 소미에게 진정제를 투여하자, 그녀는 점점 고요해졌다. 그런 장면을 기환은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곧바로 유건에게 연락했다.유건은 통화 내내 아무 말 없이 듣기만 하다가, 짧게 대답했다.[알겠어.]잠시 정적.그리고 천천히 덧붙였다.[앞으로 시연이랑 소미, 절대 마주치게 하지 마.]“네, 형님.”통화를 끊은 유건은 한참 동안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눈을 뜬 그는 조용히 일어나, 집으로 향했다....밤, 고씨 가문의 본가. 유건은 곧장 2층 서재로 향했다. 문을 열자, 시연은 책상 앞에 앉
유건은 숟가락을 들어 조심스럽게 시연의 입가로 가져갔다. 표정은 다정했고, 동작은 섬세했다.겉보기엔 따뜻함이 느껴지는 배려 같았지만, 시연의 머릿속엔 오늘 병실에서 본 장면이 겹쳐 떠올랐다.‘그때도, 저렇게 장소미를 먹이고 있었지.’그리고 입술이 저절로 일그러졌다. 시연은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찡그리며 고개를 돌렸다.“됐어요.” “여보.” 유건은 눈을 가늘게 뜨며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내 말은... 내가 직접 먹을게요.”남자의 눈치를 보며, 시연은 재빨리 수건을 내려놓고 국그릇을 받아서 들었다. “머리도 거의 말랐으니까 그냥 내가 마시면 돼요.”그녀는 숟가락을 들어 조용히 한입을 떠넣었다.유건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미간을 슬쩍 풀며 물었다.“맛은 어때? 괜찮아?”“음... 괜찮아요.” 시연은 평범한 표정을 지었지만, 진심은 아니었다.‘아무리 좋은 재료로 정성껏 끓인 거라도... 지금은, 아무 맛도 안 나.’유건은 그녀의 미묘한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별로 맛없는 것 같네?” “아뇨, 그냥... 냄새가 좀 익숙하지 않아서요.”“싫지 않으면 됐어.” 유건은 억지로 웃음을 띠며 말했다.“당신이랑 아이한테 좋은 재료니까, 하루 한 그릇 정도는 괜찮지?”‘하루 한 그릇... 하루 한 그릇이면 괜찮다고? 그게, 괜찮은 거야?’시연은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이제 씻어야죠? 난 좀 누울게요. 많이 피곤하네요.”“그래, 금방 씻고 와서 곧 옆에 누울게.”그는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욕실로 향했다.욕실 문이 닫히자마자, 시연은 깊게 숨을 내쉬었다.‘이런 하루하루가 언제쯤 끝날 수 있을까... 아니, 끝이 있긴 할까?’국은 입 안에서 맴돌았지만, 넘기기는 힘들었다. ...며칠이 지났다. 겉보기엔 평온한 나날이 이어졌지만, 시연은 알 수 있었다. 모든 게, 자신과 장소미가 납치를 당한‘그날’ 이전과는 달라졌다는 걸.오늘은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병원 창가에서 내리는 가을비
우주는 거기 있었다.별산장에 있는 조용한 산기슭에 자리한 독립 고급 전원주택. 심재규 교수와 최예민이 상주하며, 우주에게 1:1 집중 치료와 생활 지원이 이루어지고 있었다.“누나!”우주는 시연을 보자마자 두 팔을 활짝 벌리며 달려왔다.“우주야.” 시연은 무릎을 꿇고 동생을 꼭 안았다. “잘 있었어? 보고 싶었어.”“나도! 누나 보고 싶었어!” 그는 시연 뒤에 선 유건을 보고 환하게 웃었다. “매형도 왔네! 매형, 여기 진짜 크다!”유건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매형이 뭐랬어. 여기가 더 좋고, 더 재밌을 거라고 했잖아.”“응, 진짜야!”시연은 놀란 듯 우주를 바라봤다. “여기... 마음에 들어?”우주는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좋아! 음식도 맛있고, 방도 넓고... 누나도 올 수 있고!”그 말에 시연은 가슴이 콱 메었다. ‘우주... 정말 행복해 보여.’ 직접 눈으로 보고, 말도 나눠보니 시연이 그간 품고 있던 불안이 조금은 풀렸다.그 순간, 유건이 조용히 시연의 손을 잡았다.“잠깐만, 나 미팅이 하나 있는데, 당신은 우주랑 더 있을 거지? 아니면 나랑 같이 갈래?”시연은 망설이지 않았다. “당연히 우주랑 있고 싶어요. 지금은... 이 시간이 더 소중하니까요.”유건은 부드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손을 뻗어, 그녀의 옆머리를 정돈해 주듯 쓸었다. 그 동작은 다정했지만, 시연은 알았다.‘이건 다정함이 아니라, 경고야.’“기환이를 두고 갈게. 당신 곁에 누군가 있어야 내가 안심되니까.”‘보호? 아니지, 감시겠지.’시연은 속으로 씁쓸히 웃었다. 겉으론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그때 유건이 그녀의 얼굴을 가볍게 손으로 잡으며 눈을 맞췄다.“여보, 이번이 마지막이었으면 해. 우주는 곧 해외로 나가야 하니까.”“환경이 자주 바뀌는 건 아이에게 좋지 않잖아. 그건 당신도 알지?”그 말에 시연은 등골이 오싹해졌다.‘이거... 협박이구나. 또 마음에 안들
시연은 병동 복도 끝, 창가에 기대어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오래 걸릴 거라 생각했는데, 예상보다 훨씬 빨랐다. 유건이 병실에서 나왔다.“여보.”남자의 부름에 시연은 돌아섰다. 그리고 바로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우주 어딨어요? 지금 어디 있어요?”시연의 표정은 얼핏 차분해 보였지만, 꼭 쥔 양손이 그녀의 진심을 말해주고 있었다.‘떨지 마... 지금 화내면 지는 거야.’유건은 여자의 손을 흘긋 보고, 미간을 살짝 좁혔다.“태산요양병원, 솔직히 말해서 최고는 아니야. 자폐 스펙트럼 관련 전문 치료도 그리 뛰어나지 않고.”그는 의도적으로 말투를 부드럽게 했다.“더 좋은 시설이 있어서, 우주를 거기로 옮겼어. 최예민 씨랑 심재규 교수도 같이 갔고, 우주 상태는 아주 좋아.”그 말투, 그 표정... 모든 게 너무 완벽해서 더 불쾌했다.“내가 묻는 말에 대답해요. ‘어디’ 있는지 물었는데, 왜 말을 돌려요?” 시연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억눌려 있던 감정이, 그 순간 확 터져 나왔다.“나는! 지금 당장, 우주를... 보고 싶다고요!”유건은 그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침착하게 시연을 바라봤다.“보고 싶어? 내 조건은 간단해. 당신도 내가 원하는 걸 알잖아?” ‘진짜, 이 인간... 끝까지 이렇게 나오겠다는 거네.’순간, 시연은 숨이 턱 막혔다.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았던 것일지도.‘그래, 애초에... 우리는 계약으로 시작된 관계였어. 내가 아주 잠깐, 착각했을 뿐이야.’ ‘고유건의 다정함에, 사람다운 모습에... 내가 방심했어.’시연은 눈을 들어, 유건의 눈동자를 곧장 바라봤다.“당신한텐 장소미가 있잖아요. 장소미가 당신의 ‘나비 공주’라면서...”“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데요? 나한테도, 장소미한테도 왜 이렇게 잔인하게 구는 건데요?”유건은 입꼬리를 거의 티 나지 않게 올렸다.“당신만 순순히 굴었으면, 나도 이런 방법은 쓰지 않았을 거야.”그는 한 걸음 다가서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