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의 말씀을 따르는 거예요! 할아버지가 그러셨는데, 결혼식 전에 같이 자면 안 된대요... 그게 고씨 가문의 규칙이라고 하셨다고요!” 옛 어른들의 규칙에 따르면, 결혼식 전에는 신랑 신부가 아예 얼굴도 보지 않는 게 좋다고들 했다. 고상훈도 손자를 걱정해서 그런 말을 한 것이었다. 유건은 속이 터질 것 같았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규칙이야? 그냥 할아버지가 대놓고 나를 못마땅하게 여기시는 거잖아?’ “하하.” 시연은 유건의 반응에 웃음을 터뜨렸다. “불만 있으면 직접 가서 할아버지께 말씀드려요. 나는 못 해요.” “너는 못 한다고?” 유건이 갑자기 손을 뻗어 그녀의 옆구리를 간지럽혔다. “할아버지는 너를 더 아끼시잖아. 나보다 네가 진짜 손주 같지! 네가 못 하면 난 더더욱 할 말이 없어. 두고 봐, 내가 널 그냥 둘 것 같아?” “하하하...” 예민한 부위를 간질이니 시연은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그럴 거야?” 유건이 단단히 그녀를 안고 있지 않았다면, 시연은 바닥에 나뒹굴었을지도 모른다. “안 그럴게요! 안 그럴게요!” 연신 손을 흔들며 항복 선언을 했다. “이번만 봐준다.” 유건은 대장처럼 거들먹거리며 여자의 볼을 살짝 꼬집고는 옷을 갈아입으러 드레스룸으로 갔다. 옷을 다 갈아입을 즈음, 핸드폰이 울렸다. 화면을 확인한 순간, 유건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 굳어버렸다. 몇 초간 망설이다가, 결국 전화를 받았다. “소미 씨.” [유건 씨...] 장소미는 울먹이고 있었다. [모레가... 유건 씨의 결혼식이라고...]이 말을 듣자, 유건은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그저 침묵했다. [유건 씨...] 소미는 흐느껴 울며 말을 이었다. “지금 나... 너무 힘들어요... 너무 속상해요... 나... 나 정말 유건 씨를 보고 싶어요. 너무너무 보고 싶어요...” 유건은 미간을 깊이 찌푸렸다. 여자의 목소리가 이상했다. “지
순간, 시연은 얼어붙었다.‘장소미가 왔다고?’지동성의 목소리가 이어졌다.[소미는 분명 고유건을 찾으러 갔을 거야. 너 지금 고유건과 같이 있지? 잘 지켜봐. 네 남편이 네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게 해.]시연은 입술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동성이 자신에게 이런 정보를 흘려줄 줄은 예상치 못했다.하지만 이미 늦었다. 분명, 유건이 방금 나간 이유는 소미를 만나러 가기 위함일 터.시연이 이해할 수 없던 건, 지동성이 왜 자신에게 이런 전화를 했냐는 점이었다.‘장소미는 나보다 더 소중한 딸인 거 아니었나? 심지어 죽을병에 걸려서도 장소미한테는 간 이식을 요구하지 않을 정도로 애지중지했지...’시연은 바로 물었다. “왜 인제 와서 그런 걸 알려주는 거예요?”[시연아...]지동성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예전에는... 아빠가 많이 잘못했다. 하지만 이제라도,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고유건... 그 사람, 네가 기대기엔 부족해.]하지만 시연은 지동성의 말을 끝까지 들을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며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손에 힘이 들어가며 얼굴이 창백해졌고, 호흡도 거칠어졌다.바로 분노 때문이었다.시연이 가장 듣기 싫은 것은 지동성이 하는 이 따위 ‘사과’였다.지동성은 과거 십여 년간 시연과 우주를 철저히 외면했다. 그걸 이제 와서 ‘미안하다’는 한 마디로 덮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시연과 우주가 잃어버린 것들은, 결코 되돌릴 수 없는 것들이었다.그녀는 깊은숨을 몇 번 들이쉬고 나서야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왜냐하면 아직 해결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그리고 지금 나가면, 어쩌면 유건을 따라잡을 수도 있다.‘가야 할까, 말아야 할까?’솔직히, 시연은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자신을 한 번이라도 배신한 남자는 평생 용서받을 자격이 없으니 말이다. 그러나, 유건은 시연이 선택한 남자가 아니었다.그는 고상훈이 시연에게 맡긴 사람이었다.결국 시연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손으로 얼굴을 몇 번 두드린 뒤, 얇은 카디건을
제남도는 관광지인 만큼, 호텔과 숙박시설이 부족할 일이 없었다.유건은 주머니에서 차 키를 꺼내 한 경비에게 건넸다.“차 좀 가져다주세요.”“네, 고 대표님.”경비는 공손히 키를 받아 들고 주차장으로 향하려 했다.그러나 몇 걸음 가지도 못하고 멈춰 섰고, 입술을 살짝 떨며 조용히 침을 삼켰다. “사모님.”하지만, 속으로는 진심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무슨 날인가? 본처가 현장을 덮치는 거야? 하필 내가 이걸 봐야 한다고?!'“안녕하세요.”시연은 우산을 받쳐 들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이어서 시선이 유건에게 향했다.그 순간, 유건의 등골이 서늘해졌고,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심지어 혀가 굳어 제대로 말도 나오지 않았다. “저기...”시연의 눈길이 남자의 품 안에서 의식이 흐릿한 소미를 스쳤다. 그리고 가볍게 웃었다. 차를 가져가려고요? 어디 가려고 해요?”유건은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이미 시연이 나타난 이상, 소미를 데리고 나갈 수 없지만, 그렇다고 소미를 여기 내버려둘 수도 없었다. “시연아.”유건이 침착하게 말했다. “이 사람은 취했고, 온몸이 다 젖었어. 이렇게 놔두면 감기에 걸릴 거야. 우선 방을 하나 잡아서 씻고 옷부터 갈아입게 해야 해.”시연은 눈썹을 살짝 올렸다. “그럼 차는 뭐예요? 이 호텔로 들여보내고 싶은 거 아니에요?” “그래.” 유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허락해 준다면...”‘허락해 준다면?’시연은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허락 안 하면 상황이 달라지나?’ “유건 씨...”소미가 남자의 품에서 몸을 움찔거리며 더 깊숙이 파고들었다.“너무 힘들어요... 너무 추워요...”그리고 계속해서 유건의 허리를 감싸며 매달렸다. 마치 풀처럼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았다.유건은 소미를 달래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만 참아. 씻고 나면 괜찮아질 거야.”시연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유건은 다시 부탁했다.“그냥 씻고 옷만 갈아입히는 거야. 네가 지켜보고 있으니, 아무 일
“소미 씨.”유건은 재빠르게 소미의 팔을 붙잡아 더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게 막았다.“유건 씨...?”소미는 멍해졌고, 곧이어 상처받은 표정으로 물었다. “날 밀어낸 거예요?”유건은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조용히 말했다. “소미 씨, 여긴 내가 결혼식이 끝난 후 쓰려고 한 방이야.”순간, 소미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그리고 시선이 욕실 문 근처에 서 있는 시연에게 닿았다.여자의 눈빛이 서서히 어두워졌다.‘그래, 여긴 호텔이야.’‘모레면 고유건의 결혼식이지.’ ‘지시연이 여기에 있는 건 당연한 일이구나...’그렇게 생각하니, 소미의 눈물이 다시 뚝뚝 떨어졌다.이어서 스스로 몸을 일으키며, 거칠게 눈물을 닦아냈다.“이제 가야겠네요.”그렇게 말하더니,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나가려 했다.그러나 곧바로 시연과 마주쳤다.소미는 순간 멈칫하더니, 부어오른 눈으로 흐느끼며 말했다. “미안해요. 여기 오면 안 됐는데... 너무 힘들어서, 너무 슬퍼서... 술을 너무 많이 마셨고,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실례했어요. 지금 바로 갈게요.”그리고 다시 밖으로 나가려 했다.하지만, 몇 걸음 가지도 못하고, 갑자기 중심을 잃고 휘청였다.“소미 씨!”다행히도, 유건이 재빠르게 소미를 붙잡았고,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소미를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은 너무 늦었고, 밖에선 폭우가 내리고 있어. 지금 어디로 가겠다는 건데?” “유건 씨... 흐흑...”소미는 더욱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눈물은 그칠 줄 몰랐다.“미안해요... 내가 부족해서 그래요... 날 못 이기겠어요...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소미 씨 잘못이 아니야.”유건은 이를 악물고 시연을 바라봤다.“시연아, 하룻밤만 여기 머물게 해줄 수 있을까? 지금 소미 씨는 너무 취했어. 이렇게 내보내면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잖아.”시연은 가볍게 눈을 깜빡였다. “당신이 알아서 해요.”“고마워.”‘고맙다고?’시연은 그 말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고 생각했고, 무력감이 들었다.‘이런
유건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시연을 바라봤다.시연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왜 나를 봐요? 설마 내가 대신 씻겨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그건 당신이 해야 할 일이잖아요.”순간, 유건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제발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하지 마. 그런 생각은 전혀 안 했어.”시연은 코웃음을 쳤다. ‘그 말을 누가 믿어?’‘예전에 우리 둘이 잠깐 같이 있을 때, 당신은 여러 번 나를 안고 씻겼잖아.’‘장소미와는 더하면 더했겠지.’이런 생각이 들자, 시연은 짜증이 솟구쳤다.“시연아.”유건이 시연을 불렀고, 테이블을 가리키며 말했다. “핸드폰 좀 건네줘.”‘뭘 하려는 거야?’시연은 신경 쓰고 싶지 않아서 아무 말 없이 핸드폰을 들어 건넸다.유건은 전화를 걸었다.“그래요, 나예요.”“담당 업무는 아니지만, 추가 보상을 해줄게요.” 시연은 이 말을 듣고 누구에게 전화하는지 궁금해졌다.정답은 곧 밝혀졌다.초인종이 울렸고, 시연이 문을 열자, 우주의 간병인 최예민이 서 있었다.“사모님.”최예민이 인사하며 말했다. “고 대표님께서 저를 부르셨습니다. 돌봐야 할 사람이 있다고 하셔서요.”“아... 그래요.”시연은 최예민을 안으로 들였다.그 순간, 유건은 이미 소미를 안아 올리고 있었다. 그는 최예민을 보며 말했다. “욕실로 따라오세요.”“네, 고 대표님.”최예민은 남자의 뒤를 따라 욕실로 들어갔다.잠시 후, 유건이 나왔다.거실에는 둘만 남았다. 잠깐의 침묵이 감돌았다. 그리고 어쩔 수 없는 어색함.시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내 할 일은 끝난 것 같네요. 방에 가서 잘게요.”“응.”유건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용히 시연의 뒤를 따라갔다.시연은 그가 자신을 배웅하는 거라 생각했다. 원래도 이런 배려심이 있는 사람이니, 굳이 말하지 않았다.방에 도착하자, 시연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그런데 예상외로, 유건도 따라 들어왔고, 외투를 벗었다.소미를 찾으러 갔을 때 비를 맞았던
유건은 순간 멈칫했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그쪽에도 보내도록 했어.”“그럴 줄 알았어요.”‘이 생강차, 애초에 나를 위해 준비된 게 아니었네.’‘비를 맞은 사람은 장소미니까, 나는 어부지리로 얻어먹게 된 것일 뿐이지.’ 시연은 웃으며 그릇을 받지 않았다.“그쪽에 가져다주면 되겠네요. 난 필요 없어요.”말을 끝내자마자 고개를 저으며 이불을 다시 덮고 눕고자 했다. “필요 없다니?”유건이 재빠르게 손을 뻗어 그녀를 붙잡았다.“다 마시고 자.”“안 마시고 싶어요.”시연은 유건이 왜 이렇게 고집을 부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장소미를 위해 준비한 거라면서요... 그러니까 그 사람이 마시면 되잖아요. 왜 굳이 나한테까지 강요하는 거예요?”‘지금 이 여자, 설마 나한테 따지는 건가?!’‘이 생강차가 누구를 위한 건지 따지는 거야? 자기를 위한 배려인 건지, 아니면 그저 형식적인 건지...?’유건 역시 답답했다. “장소미도 마신다고 하니까, 마시기 싫어진 거야?” 시연이 이런 고집을 부리는 건 처음이 아니었다.예전에도 한 번 그랬다. 유건이 시연에게 팔찌를 선물했을 때, 소미와 같은 걸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돌려준 적이 있었다.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시연은 이제 진짜 유건의 아내이기 때문에, 유건은 한층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잘 들어. 지금 넌 아이를 품고 있어. 감기에 걸리면 위험하다고.”“정말...”시연은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난 비도 안 맞았잖아요. 당신의 관심은 다 장소미한테 주면 돼요.”“지시연!!”유건이 갑자기 어조를 높였고, 여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한 마디 한 마디 강조했다.“스스로 마실래, 아니면 내가 떠먹여 줄까?”‘세상에 저렇게 독단적인 사람이 또 있을까?'마음속은 불만으로 가득 찼지만, 결국 시연은 타협했다. “알겠어요. 마시면 되잖아요.”그리고 그릇을 들고 단숨에 생강차를 들이켰다.이어서 곧바로 그릇을 돌려주며 말했다. “됐죠? 이제 잘 거예요.”바로 이불을
시연은 고개를 돌려 유건의 손에서 벗어났다.그리고 이불을 댕겨 몸을 감싸고는 다시 등을 돌려 누웠는데, 유건에게 나가라고도 하지 않았고, 남으라고도 하지 않았다.‘나한테 여기서 자라고 허락한 걸까?’ 유건은 상관없었다. 어차피 나갈 생각이 전혀 없었으니까.그래서 바로 이불 한쪽을 들추고 자연스럽게 들어가 시연을 다시 끌어안았다.그 순간, 시연의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이번에는 단숨에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내려갔다.“멈춰.”유건이 여자의 손목을 붙잡았다. “어디 가는데?”‘만약 ‘소파에서 잘 거예요’라고 말하면...’‘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하지만, 시연은 담담하게 말했다. “이불 가지러 가려고요.”즉, 따로 자겠다는 뜻이었다.유건은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터뜨렸고, 여전히 여자를 놓아주지 않았다.“안 돼. 그냥 이대로 자자.”그가 손에 힘을 주자, 시연은 미세하게 눈썹을 찡그렸다. ‘이대로면 내가 절대 빠져나갈 수 없을 것 같은데...’결국 유건은 시연을 다시 침대로 끌어당겼고, 여자를 품에 꼭 안았다.두 사람의 몸이 완벽히 밀착됐다. 마치 포개진 숟가락처럼.시연은 남자의 따뜻한 숨결과 강한 심장 박동을 느낄 수 있었기에, 너무 짜증이 났다. “잘 거면 그냥 자요. 나 좀 놔 줄래요?”“못 놔.”유건은 여자의 목덜미에 입술을 스치듯 대며 말했다. “너 없으면 잠이 안 와.”‘뭐? 진심이야?’시연은 냉소를 지었다.‘여자가 없으면 잠을 못 자는 건가?’ ‘하지만, 그 여자는 내가 아니라 장소미겠지.’생각할수록 짜증이 치밀어 올라서 시연은 이를 갈듯 말했다. “놔요!”“싫어.”“사람을 화나게 하는 특별한 재능이라도 있는 거예요? 세상에 어떻게 당신 같은 사람이 있는 건지 궁금할 지경이라고요.” ‘이 남자는 장소미를 잊지 못하면서, 할아버지 때문에 억지로 나랑 결혼하기로 했어...’‘그럼 적어도, 장소미에 대한 미련이 있더라도 나한테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야 하는 거 아니야?’‘그런데 어떻게 이런 상황
소미의 뒤에는 정기환이 따라오고 있었다.기환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유건의 지시로 아침부터 방 앞에서 대기하다가 소미가 깨어나면 바로 집으로 데려가야 했다. 그러나 소미가 고집을 부리며 유건을 찾아가겠다고 하니, 그도 어쩔 수 없었다.“유건 씨.”하룻밤 푹 쉰 덕에, 소미는 한결 나아 보였다. 정신은 또렷했지만, 화장하지 않아 얼굴이 창백했고, 눈가도 여전히 부어 있었다.“기환 씨를 탓하지 마요. 제가 원해서 온 거니까요. 유건 씨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싶었고, 지 선생님에게도 사과하고 싶었어요. 어젯밤엔 정말 실례가 많았어요.”그러면서 그녀는 안쪽을 힐끔 바라봤다.“혹시 제가 지 선생님을 잠깐 볼 수 있을까요?”소미가 이미 방 앞까지 와 있었기에, 막을 수 없었던 유건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에 있어.”소미의 미소가 순간적으로 굳었고, 몇 걸음 안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그럼 지 선생님에게 몇 마디만 하고 갈게요. 오래 머무르진 않을 거니까...”“그래.”두 사람이 방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세수를 마치고 나오던 시연은 잠시 멈칫했다. ‘이른 아침부터 또 같이 다니네?'굳어버린 소미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시연이 입은 옷이었다. 그 옷은 남성용 욕실 가운이며 길이가 길어 바닥까지 끌릴 정도였다.누구의 것인지 묻지 않아도 뻔했다. 바로 유건의 것이었다.‘지시연이... 감히?'소미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지 선생님, 좋은 아침이에요.”“아, 네.”시연은 안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얘기 나누세요. 전 옷 갈아입으러 가야 해서요.”그렇게 말하고는 드레스룸으로 들어갔다.소미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잠시 기다려야겠네요.”“그래.”“고 대표님.”그때, 직원들이 아침 식사를 준비해 두고 퇴장했다. “조식 준비되었습니다. 맛있게 드십시오.”“네.”“와...!”소미는 다이닝 룸을 둘러보며 미소를 지었다.“아침도 준비됐네요.”그러면서 배를 살짝 문지르며 말했다. “
“뭐라고...?” 장미리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지금, 나한테 화내는 거야?!!” 그 말 한마디에, 마치 불씨에 기름을 부은 듯, 장미리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지동성! 그게 사람이 할 소리야?”“내가 당신이랑 몇 년을 살았는데... 우린 부부잖아! 집안 돈은 우리 공동재산이라고!” 지동성은 코웃음을 쳤다. “공동재산? 웃기고 있네.” 싸늘하게 시선을 내리깔며 말했다. “잊었어? 당신, 나한테 시집올 때 빈손이었잖아. 혼수? 그런 건 하나도 없이 나한테 온 거 아니었나?” 장미리의 표정이 굳었다. ‘그래, 그때 난 진짜 아무것도 없었지... 근데 그 일을 지금, 이 순간에 꺼낸다고?’그녀는 울분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래! 난 빈손으로 왔어! 하지만 소미는? 소미는 내 딸이야! 내가 낳은 내 딸이라고!” 지동성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냉정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소미만 아니었으면... 난 당신이랑 결혼하지 않았을 거야.” “하, 미쳤네 진짜...” 장미리는 이성을 잃고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날 그렇게 깔보며 살아온 거야?!” 지동성은 귀찮다는 듯 팔을 뿌리치며 말했다. “됐고, 그만 좀 해. 이 나이에 이런 말싸움은 하고 싶지도 않거든.” 그는 몸을 돌려 자리를 뜨려 했다. “가긴 어딜 가!” 장미리는 그를 붙잡았다.“설마... 시연이한테 돈이랑 집을 준 거야? 진짜냐고! 나 몰래 챙겨준 거 맞지?” 지동성의 눈썹이 깊게 찌푸려졌다. “몰래라니? 시연이는 내 딸이고, 우주는 내 아들이야. 내가 내 자식한테 주겠다는데, 누구 눈치를 봐?!” “뭐... 라고...?” 장미리는 무너지는 듯 허탈하게 웃었다. ‘소미 말이 맞았어. 이 인간, 진짜로 지시연한테 다 퍼줬어.’“그 돈은 내 거야! 소미의 미래를 위해 모은 거라고!!” 장미리는 소리쳤다. “당장 가서 시연이한테 준 거 다 받아와! 그 집도, 그 돈도! 다 내놓
장소미가 납치 사건으로 인해 심각한 화상을 입은 이후, 유건과 시연 사이에도 보이지 않는 벽이 생겼다.‘이대로 끝낼 수는 없어.’‘누가 됐든, 반드시 뿌리까지 뽑아낼 거야.’유건의 눈빛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그의 싸늘한 기운에 방 안의 공기조차 무거워졌다.“네, 형님.”지한은 짧게, 그러나 단단한 어조로 대답했다.말보다 표정이 먼저 충성심을 증명했다....다음 날 아침. 시연이 다이닝 룸으로 내려갔을 때, 유건은 아직 나가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일어났어?” 유건은 조용히 시연의 손을 잡아 자리에 앉히며, 얼굴을 살폈다. “머리는 어때? 아직 아파?” 부드러운 목소리. 언뜻 보기엔, 누구보다 자상한 남편이었다. “이모님이 아침부터 생선 머리 탕을 끓여주셨어. 당신 어제 술을 조금 마셨잖아. 속 풀리게 한 그릇 먹어.” 이때 왕성애가 아침을 들고 들어왔다. “사모님, 도련님께서 오늘 아침에 직접 당부하셨어요. 어젯밤에 술을 드셨으니, 꼭 속 풀어드리라고요.” “감사합니다.” 시연은 조용히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하지만 그 말은 왕성애를 향한 것인지, 유건을 향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녀가 국을 한 숟갈 뜨는 사이, 유건은 조용히 상 위에 작은 상자를 꺼내 놓았다. “여보.” 그는 다정하게 불렀다. “선물이야.” 시연은 반응하지 않았다. 유건은 약간 찌푸린 얼굴로 말을 이었다. “입사 축하 선물이야. 시계야.” “필요 없어요.” 짧고 단호했다. 유건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아직도 어제 일 때문에 화난 거야?” “아니요.” 시연은 고개를 저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그 시계... 너무 비쌀 것 같아요. 난 이제 막 입사한 신입인데, 그런 건 나한테 어울리지 않아요.” 유건은 낮게 웃었다. “그게 문제였어?” 그는 상자를 열었다. 안에 들어있던 건, 고급스러운 여성용 파텍 필립 시계. 그가 평소에 차고 다니는 것과 비슷한 디자인이었
유건은 시연을 조심히 안아 차에 올랐다. 하지만 문턱을 넘는 순간, 그녀의 머리가 살짝 닿았다. “아야.” 시연이 눈을 뜨며 그를 째려봤다. “아프잖아.” 삐죽한 입매에 살짝 붉어진 눈꼬리. 투정 부리듯 말하는 그녀는, 말도 안 되게 귀여웠다. 요즘 내내 싸우기만 했고, 시연은 유건에게 제대로 된 눈빛 하나 준 적 없었다. 오늘, 만약 실수로 술을 마시지 않았다면, 그녀가 이렇게 말할 일도 없었을 터. 유건의 목젖이 뚜렷하게 움직였다. ‘미치겠네... 이럴 땐 정말, 참기 힘들다.’“여보, 그렇게 날 유혹하지 마.” “응?” 시연은 고개를 갸웃했다. “유혹 안 했는데? 난 유혹한 거 아닌데? 난 의사야. 후크 아냐.” “푸흡!!” 참으려 했지만,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 더는 참지 못한 유건이 여자의 턱을 살며시 잡고, 고개를 숙였다. 입술이 시연의 입술에 닿았다. 부드럽고, 깊고, 절제되지 않은 키스였다. “읏...!” 호흡이 가빠지자, 시연은 손으로 그의 가슴을 밀었다. “숨... 못 쉬겠어.” 유건은 여자의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아직도 키스하는 법 몰라?” 그 순간, 시연의 눈동자가 멈췄다. 그를 말없이 바라보는 눈빛에, 무언가 낯선 기운이 돌았다. “왜 그래? 어디 아파?” 유건이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고유건!!” 시연은 그의 옷깃을 잡았다. 조금 전까지 흐리던 눈빛이, 조금은 맑아진 듯했다. “괜찮아.” 그 말에 유건은 오히려 더 당황했다. 시연은 너무 조용했고, 너무 순했고, 평소 같지 않았다. 유건은 다가가 뺨에 입을 맞췄다. 시연은 피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눈은 텅 빈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눈가에서, 조용히 눈물이 떨어졌다. 유건의 손등 위로, 작고 뜨거운 물방울이 스며들었다. “여보...?” 그가 급히 얼굴을 들었다. 시연의 두 눈엔 이미 눈물이 가득 차 있었다.
“너희...!!!” 하은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표정은 굳어 있었고, 눈빛에는 분노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더는 말 안 할게. 하지만 너희, 앞으로는 입 단속 잘 하는 게 좋을 거야. 다음에 또 이런 말 들리면...” 그녀는 고개를 살짝 들어, 냉정하게 말했다. “고 대표님께 바로 말씀드릴 거야. 고 대표님이 시연이를 얼마나 아끼는지 알지? 과연, 그분이 가만히 계실까?” 그 말에 간호사 두 사람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병원 안에서 이미 떠도는 소문... 조한나가 갑작스레 ‘사라진’ 이유가, 바로 시연과 관련 있다는 얘기. “다, 다시는 안 그럴게. 제발 말하지 마...” “맞아. 우리가 잘못했어. 잠시 정신이 나갔었나 봐.” “흥.” 하은은 그들이 뉘우치는 척하는 얼굴조차 보기 싫었다. “그럼 얼른 꺼져.” “알았어. 가면 되잖아!” “미, 미안해...” 고개를 푹 숙인 채 돌아서는 두 사람, 그 순간, 정면에 서 있는 유건과 마주쳤다. 딱!싸늘한 눈빛, 입꼬리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고, 고 대표님...” 유건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 “이미 다 들었어. 다음엔 조한나보다 더한 꼴을 보게 될 거야.” 두 사람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역시... 조한나 이야기가 진짜였어...’“두 번 말하고 싶지 않으니까 당장 꺼져.” “죄, 죄송합니다!” 두 사람은 거의 울 듯한 얼굴로 도망치듯 자리를 떴고, 그제야 하은이 조심스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고 대표님... 아까는 시연이가 안에 있어서... 괜히 듣고 속상해할까 봐... 제가 맘대로 대표님 이름을 입에 올렸어요...” 유건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잘했어. 오히려 고마워.” 그는 처음으로, 하은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같은 학교 동기인 데다, 병원에서도 늘 같이 있다고 했지? 시연이... 내가 못 챙길 때가 많아. 앞으로도 이런 일 있으면, 부탁 좀 할게.” “아, 네... 그럼요! 저야
샤부샤부와 시연이 좋아하는 채소들까지. 유건은 직접 음식 코너를 몇 번이나 오가며 이것저것 챙겼다. 직원들이 다가와 도와드리겠다고 했지만, 그는 손사래를 쳤다. “괜찮아. 내 아내가 부탁한 거니까.” 남의 손을 빌릴 수 없었다.시연이 원한 것이니, 유건이 직접 해야만 했다. 가스 불을 켜고, 국물이 보글보글 끓기 시작하자, 유건은 채소며 고기며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넣기 시작했다. 시연은 두 눈을 반짝이며 그 과정을 지켜봤다. 입술이 살짝 벌어져, 침 삼키는 소리가 다 들릴 정도였다. ‘저 고기... 다 익은 거 같은데... 언제 주려나?’ ‘고기야 오래 익힐 필요 없지.’ 그 모습을 보고 유건은 웃음을 지으며, 익은 고기를 시연의 그릇에 덜어주었다. 그녀 취향에 맞춰 소스까지 만들어주고 나서야 말했다. “됐어. 이제 먹어봐.” 시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젓가락으로 고기를 집어 들었다. 볼이 빵빵하게 부풀 정도로 가득 넣고, 입을 오물거리며 행복하게 웃었다. “맛있어?” “응.” 시연은 또 고개를 끄덕이며, 국물을 가리켰다. “더.” “알겠어.” “그리고... 소고기 완자도!” “그래, 그것도.” 주변 동료들은 그 장면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다. 고 대표가 시연에게 이렇게 다정한 줄은 몰랐다. 아까 하은에게 냉정하게 굴던 모습과는 정반대였다. 하지만, 그런 평화로운 분위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먹다 말고, 시연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을 좌우로 흔들며, 균형을 제대로 잡지 못했다. “왜 일어나? 뭐 필요한 거 있어?” 유건이 급히 그녀를 부축했다. “화장실.” 시연은 천진하게 웃으며 유건의 손을 뿌리려 했다. ‘이런 상태로 혼자 가게 둘 수는 없지.’ 유건은 그녀를 반쯤 안다시피 하며 일어났다. “같이 가자.” “고 대표님.” 목소리에 돌아보니, 하은이었다. “제가 같이 갈게요. 화장실 안쪽은 남자분이 들어가기 힘들 테
하은이 새우 완자를 시연의 그릇에 조심스레 올려놓았다. 시연은 한 눈으로 슬쩍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싫어!” 하은은 순간 멍해졌다. 분명, 평소의 시연이라면 절대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 텐데. “시연아...?”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불러보자, 시연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하은을 바라봤다. 멍한 눈, 어딘가 초점 없는 시선. “왜?” “너, 설마 취한 거야?” “응?” 시연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해맑게 웃었다. “아니야, 나 멀쩡해!” ‘뭐야, 딱 취한 모습이잖아.’ 하은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입술을 꼭 다물었다.떨리는 손끝이 컵에 닿아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시연아, 어디 불편한 데는 없어?” “없어. 헤헤.” “배는?” 하은은 조심스레 시연의 배를 바라보았다. ‘제발 아무 일도 없어야 해... 시연이 배에는 고씨 가문의 후계자가 계시니까...’“배 아프진 않아?” “배?” 시연은 곧 두 손을 배 위에 얹고, 아주 조심스럽게 쓰다듬기 시작했다. 입술 끝엔 미소까지 걸렸다. “여기 내 아기가 있어.” 서로의 눈을 마주친 하은과 현진이 동시에 얼어붙었다. ‘이거, 어떻게 해야 해...?’ 그때, 룸 안이 웅성거리며 갑자기 술렁이기 시작했다. “고 대표님!” “고 대표님, 어서 오세요!” 양석현 교수가 일어서며 반갑게 인사했다. 유건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 자연스럽게 시연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오늘은 아내랑 함께하는 자리이니, 꼭 오려고 했습니다. 양 교수님,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오신 것만으로도 감사하죠. 시연이는 저기 있습니다.” 유건은 가볍게 인사만 나눈 뒤, 바로 시연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은과 현진은 눈치 빠르게 자리를 비켜 주었다. 하지만 시연은 그가 다가온 줄도 몰랐다. 그녀는 그저 자기 앞의 접시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표정은 어딘가 멍하고, 또 순진했다. “무슨 일 있어?” 유건의 목소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시연은 물러설 수 없었다. 게다가, 우주를 생각하면 유건의 의중을 거스를 수도 없었다. 그녀는 얇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교수님, 그럼 어서 다 함께 내려가시죠.” “그... 그래.” “좋다!” “얼른 가자!” “나 진짜 배고파 죽겠어.” “나도. 저녁 먹으려고 하루 종일 굶었단 말이야.” “...”사람들은 웅성거리며 아까 있었던 일은 일부러 언급하지 않았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건물 앞에는 차가 여섯 대쯤 대기 중이었고, 일행은 그 차들을 나눠 타고 ‘셀레스트’로 향했다. ...일반 뷔페의 북적임과는 달리, ‘셀레스트’는 놀라울 만큼 조용했다. 손님들은 각자 음식을 고른 후, 식사 중에도 조용히 대화를 나눴으니 말이다. 지한이 예약해 둔 자리는 창가 쪽 세 테이블을 붙여놓은 넓은 자리였다. 음식은 신선한 재료로 구성되어 있었고, 해산물, 육류, 디저트... 중식, 양식 가릴 것 없이 다 준비되어 있었다. 깔끔한 플레이팅은 보기만 해도 식욕을 자극했다. “와... 이래서 비싼 거구나.” 주하은이 시연과 함께 음식 코너를 돌며 감탄했다. “여기 음료는 다 즉석에서 만들어주네.” 그리고 시연을 슬쩍 보며 웃는다. “고 대표님, 여전히 너한테는 돈 아끼는 법이 없네?” ‘돈을 아끼지 않는다...’시연은 대답 없이 웃기만 했다.예전에 시연은, 바로 그 ‘아낌없이 주는’ 모습에 마음을 빼앗겼다.그런데 지금은 그 모습이 오히려 그녀를 더 미치게 했다.자리로 돌아오자, 양석현이 컵을 들었다. “오늘은 지 선생이 쏜다니까... 우리 과 식구가 된 걸 축하하면서, 다 같이 건배하자! 지 선생, 고마워!” “지 선생, 축하해!” “지 선생님, 환영합니다!” “건배!” “...”시연도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컵을 들었다. 그 컵은 아까 하은이 가져다준 거였다. 시연은 살짝 긴장하며 입을 뗐다. “선생님들, 저는 이제
사무실은 완전히 조용해졌다. 모두가 두 여자의 상황을 지켜보며,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시연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숨고 싶을 정도의 굴욕감. ‘왜... 왜 내가 이런 꼴을 당해야 해?’이를 악물고 소미의 팔을 잡았다.“고유건 씨는 지금 여기 없어. 그 사람을 찾고 싶으면, 직접 전화해.”손에 힘을 주며 억지로 끌어내려 했다.“싫어! 난 안 가!” 소미는 저항하며 울부짖었다. “유건 씨! 난 유건 씨 봐야 해!!”“없다니까!!!”시연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소미는 갑자기 손을 뿌리치고 앞으로 뛰어갔다.“유건 씨!!!”복도 끝. 병동 입구.막 들어서던 유건이 놀란 얼굴로 멈춰 섰다. 소미의 등장에 당황한 그는, 곧장 시연을 찾았다.시연은 잠깐 멍하니 있다가, 고개를 돌려버렸다.‘이 상황, 최악이야.’유건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모두의 시선은 전부 두 사람에게 쏠려 있었다. 숨죽인 채, 입도 뻥끗하지 못한 채.사람 중 몇은 이미 눈치를 채고 있었다. “진짜 소문대로였네. 고유건 대표님과 장소미 씨...”“둘 사이, 예전부터 돌던 스캔들...”“끝나지 않은 거였어... 지금도...”“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는 고 대표님의 아내인... 지 선생님도 있는데...?”“...”소미는 유건의 팔에 달라붙었다. 그리고 남자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 엉엉 울기 시작했다.시연은 계속 거기에 있었다. 게다가 모두가 그 장면을 보는데도, 유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유건은 시연에게 말하고 싶고, 설명하고 싶었다.“여보...” 그는 한 발 내디뎠지만, 소미가 남자의 팔을 붙잡고 있었다.“유건 씨, 왜 이틀째 병실에 안 온 거예요? 나 치료도 안 받고 있었어요.”“소미 씨.” 유건은 난처하게 미간을 찌푸렸다.“요즘 일이 많았어. 직접 가지는 못했지만, 소미 씨 상태는 계속 보고 있었어.”“정말요?” 소미는 울다가 입술을 삐죽였다.“그럼, 지금은 시간 있잖아요? 저랑 같이 있어 줄래요?
외과 사무실을 나와 병원 건물을 벗어날 때까지, 시연의 얼굴엔 내내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여보.” 유건이 그녀의 손목을 잡아세웠다. “왜 그렇게 표정이 안 좋아?”물었으니 대답해야 할 터였다. 시연은 돌아보며 담담하게 말했다.“식사 자리는 내가 마련했어야 하는 건데, 왜 아무 상의도 없이 당신이 정했어요?”“어...?” 유건은 억울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내가 예약한 데가 마음에 안들어? 당신 셀레스트 음식 좋아하잖아.”“좋아하긴 하는데...” 시연의 눈썹이 확 짧아졌다. “당신, 우리 과에 몇 명이나 있는 줄 알아요? 의사 간호사 포함하면 30명은 넘는다고요!”“그래서?” 유건은 고개를 갸웃했다.‘‘그래서’라니...’ 시연은 숨을 꾹 참았다.‘대충 계산해도 거의 몇천만 원이야. 그걸 아무 말 없이 덜컥?’“비싸잖아요, 당신 정말 몰라서 그래요?”“그게 비싸?” 유건은 미간을 찌푸렸고, 진심으로 의아한 듯했다.“우리가 부담 못 할 정도는 아니잖아.”‘그게 문제가 아니라고.’ 시연은 말문이 막혔다.만약 자신들이 ‘정상적인' 부부였다면, 그녀도 이걸 기분 좋게 받아들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당신한테 빚지고 싶지 않다고. 그게 싫은 거야.’그녀가 진심으로 표정을 굳히자, 유건은 눈치 빠르게 태도를 바꿨다.“알았어, 이번엔 내가 잘못했어. 다음부턴 꼭 당신한테 먼저 물어볼게. 미안해, 응?”‘다음? 우리 사이에 다음이 있긴 한 걸까?’시연은 속으로 냉소적인 웃음을 흘렸지만, 입 밖으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식사 자리는 돌아오는 주말로 정해졌다. 당일, 당직 간호사 두 명을 제외한 나머지 직원들은 전원 참석 예정.근무 시간이 끝나기 전부터 사무실 분위기는 들떠 있었다.하지만 시연만큼은 평소처럼 진료차트를 정리하며 조용히 움직이고 있었다.‘그래도... 다들 내가 임신 중인 걸 챙겨주는 덕에, 차트 정리는 내 몫이 된 거야.’ “지 선생, 그만하고 옷 갈아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