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354화

Author: 임공
“할아버지의 말씀을 따르는 거예요! 할아버지가 그러셨는데, 결혼식 전에 같이 자면 안 된대요... 그게 고씨 가문의 규칙이라고 하셨다고요!”

옛 어른들의 규칙에 따르면, 결혼식 전에는 신랑 신부가 아예 얼굴도 보지 않는 게 좋다고들 했다.

고상훈도 손자를 걱정해서 그런 말을 한 것이었다.

유건은 속이 터질 것 같았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규칙이야? 그냥 할아버지가 대놓고 나를 못마땅하게 여기시는 거잖아?’

“하하.”

시연은 유건의 반응에 웃음을 터뜨렸다.

“불만 있으면 직접 가서 할아버지께 말씀드려요. 나는 못 해요.”

“너는 못 한다고?”

유건이 갑자기 손을 뻗어 그녀의 옆구리를 간지럽혔다.

“할아버지는 너를 더 아끼시잖아. 나보다 네가 진짜 손주 같지! 네가 못 하면 난 더더욱 할 말이 없어. 두고 봐, 내가 널 그냥 둘 것 같아?”

“하하하...”

예민한 부위를 간질이니 시연은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그럴 거야?”

유건이 단단히 그녀를 안고 있지 않았다면, 시연은 바닥에 나뒹굴었을지도 모른다.

“안 그럴게요! 안 그럴게요!”

연신 손을 흔들며 항복 선언을 했다.

“이번만 봐준다.”

유건은 대장처럼 거들먹거리며 여자의 볼을 살짝 꼬집고는 옷을 갈아입으러 드레스룸으로 갔다.

옷을 다 갈아입을 즈음, 핸드폰이 울렸다.

화면을 확인한 순간, 유건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 굳어버렸다. 몇 초간 망설이다가, 결국 전화를 받았다.

“소미 씨.”

[유건 씨...]

장소미는 울먹이고 있었다.

[모레가... 유건 씨의 결혼식이라고...]

이 말을 듣자, 유건은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그저 침묵했다.

[유건 씨...]

소미는 흐느껴 울며 말을 이었다.

“지금 나... 너무 힘들어요... 너무 속상해요... 나... 나 정말 유건 씨를 보고 싶어요. 너무너무 보고 싶어요...”

유건은 미간을 깊이 찌푸렸다. 여자의 목소리가 이상했다.

“지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ocked Chapter

Related chapters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355화

    순간, 시연은 얼어붙었다.‘장소미가 왔다고?’지동성의 목소리가 이어졌다.[소미는 분명 고유건을 찾으러 갔을 거야. 너 지금 고유건과 같이 있지? 잘 지켜봐. 네 남편이 네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게 해.]시연은 입술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동성이 자신에게 이런 정보를 흘려줄 줄은 예상치 못했다.하지만 이미 늦었다. 분명, 유건이 방금 나간 이유는 소미를 만나러 가기 위함일 터.시연이 이해할 수 없던 건, 지동성이 왜 자신에게 이런 전화를 했냐는 점이었다.‘장소미는 나보다 더 소중한 딸인 거 아니었나? 심지어 죽을병에 걸려서도 장소미한테는 간 이식을 요구하지 않을 정도로 애지중지했지...’시연은 바로 물었다. “왜 인제 와서 그런 걸 알려주는 거예요?”[시연아...]지동성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예전에는... 아빠가 많이 잘못했다. 하지만 이제라도,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고유건... 그 사람, 네가 기대기엔 부족해.]하지만 시연은 지동성의 말을 끝까지 들을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며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손에 힘이 들어가며 얼굴이 창백해졌고, 호흡도 거칠어졌다.바로 분노 때문이었다.시연이 가장 듣기 싫은 것은 지동성이 하는 이 따위 ‘사과’였다.지동성은 과거 십여 년간 시연과 우주를 철저히 외면했다. 그걸 이제 와서 ‘미안하다’는 한 마디로 덮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시연과 우주가 잃어버린 것들은, 결코 되돌릴 수 없는 것들이었다.그녀는 깊은숨을 몇 번 들이쉬고 나서야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왜냐하면 아직 해결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그리고 지금 나가면, 어쩌면 유건을 따라잡을 수도 있다.‘가야 할까, 말아야 할까?’솔직히, 시연은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자신을 한 번이라도 배신한 남자는 평생 용서받을 자격이 없으니 말이다. 그러나, 유건은 시연이 선택한 남자가 아니었다.그는 고상훈이 시연에게 맡긴 사람이었다.결국 시연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손으로 얼굴을 몇 번 두드린 뒤, 얇은 카디건을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356화

    제남도는 관광지인 만큼, 호텔과 숙박시설이 부족할 일이 없었다.유건은 주머니에서 차 키를 꺼내 한 경비에게 건넸다.“차 좀 가져다주세요.”“네, 고 대표님.”경비는 공손히 키를 받아 들고 주차장으로 향하려 했다.그러나 몇 걸음 가지도 못하고 멈춰 섰고, 입술을 살짝 떨며 조용히 침을 삼켰다. “사모님.”하지만, 속으로는 진심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무슨 날인가? 본처가 현장을 덮치는 거야? 하필 내가 이걸 봐야 한다고?!'“안녕하세요.”시연은 우산을 받쳐 들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이어서 시선이 유건에게 향했다.그 순간, 유건의 등골이 서늘해졌고,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심지어 혀가 굳어 제대로 말도 나오지 않았다. “저기...”시연의 눈길이 남자의 품 안에서 의식이 흐릿한 소미를 스쳤다. 그리고 가볍게 웃었다. 차를 가져가려고요? 어디 가려고 해요?”유건은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이미 시연이 나타난 이상, 소미를 데리고 나갈 수 없지만, 그렇다고 소미를 여기 내버려둘 수도 없었다. “시연아.”유건이 침착하게 말했다. “이 사람은 취했고, 온몸이 다 젖었어. 이렇게 놔두면 감기에 걸릴 거야. 우선 방을 하나 잡아서 씻고 옷부터 갈아입게 해야 해.”시연은 눈썹을 살짝 올렸다. “그럼 차는 뭐예요? 이 호텔로 들여보내고 싶은 거 아니에요?” “그래.” 유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허락해 준다면...”‘허락해 준다면?’시연은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허락 안 하면 상황이 달라지나?’ “유건 씨...”소미가 남자의 품에서 몸을 움찔거리며 더 깊숙이 파고들었다.“너무 힘들어요... 너무 추워요...”그리고 계속해서 유건의 허리를 감싸며 매달렸다. 마치 풀처럼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았다.유건은 소미를 달래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만 참아. 씻고 나면 괜찮아질 거야.”시연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유건은 다시 부탁했다.“그냥 씻고 옷만 갈아입히는 거야. 네가 지켜보고 있으니, 아무 일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357화

    “소미 씨.”유건은 재빠르게 소미의 팔을 붙잡아 더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게 막았다.“유건 씨...?”소미는 멍해졌고, 곧이어 상처받은 표정으로 물었다. “날 밀어낸 거예요?”유건은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조용히 말했다. “소미 씨, 여긴 내가 결혼식이 끝난 후 쓰려고 한 방이야.”순간, 소미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그리고 시선이 욕실 문 근처에 서 있는 시연에게 닿았다.여자의 눈빛이 서서히 어두워졌다.‘그래, 여긴 호텔이야.’‘모레면 고유건의 결혼식이지.’ ‘지시연이 여기에 있는 건 당연한 일이구나...’그렇게 생각하니, 소미의 눈물이 다시 뚝뚝 떨어졌다.이어서 스스로 몸을 일으키며, 거칠게 눈물을 닦아냈다.“이제 가야겠네요.”그렇게 말하더니,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나가려 했다.그러나 곧바로 시연과 마주쳤다.소미는 순간 멈칫하더니, 부어오른 눈으로 흐느끼며 말했다. “미안해요. 여기 오면 안 됐는데... 너무 힘들어서, 너무 슬퍼서... 술을 너무 많이 마셨고,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실례했어요. 지금 바로 갈게요.”그리고 다시 밖으로 나가려 했다.하지만, 몇 걸음 가지도 못하고, 갑자기 중심을 잃고 휘청였다.“소미 씨!”다행히도, 유건이 재빠르게 소미를 붙잡았고,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소미를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은 너무 늦었고, 밖에선 폭우가 내리고 있어. 지금 어디로 가겠다는 건데?” “유건 씨... 흐흑...”소미는 더욱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눈물은 그칠 줄 몰랐다.“미안해요... 내가 부족해서 그래요... 날 못 이기겠어요...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소미 씨 잘못이 아니야.”유건은 이를 악물고 시연을 바라봤다.“시연아, 하룻밤만 여기 머물게 해줄 수 있을까? 지금 소미 씨는 너무 취했어. 이렇게 내보내면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잖아.”시연은 가볍게 눈을 깜빡였다. “당신이 알아서 해요.”“고마워.”‘고맙다고?’시연은 그 말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고 생각했고, 무력감이 들었다.‘이런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358화

    유건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시연을 바라봤다.시연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왜 나를 봐요? 설마 내가 대신 씻겨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그건 당신이 해야 할 일이잖아요.”순간, 유건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제발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하지 마. 그런 생각은 전혀 안 했어.”시연은 코웃음을 쳤다. ‘그 말을 누가 믿어?’‘예전에 우리 둘이 잠깐 같이 있을 때, 당신은 여러 번 나를 안고 씻겼잖아.’‘장소미와는 더하면 더했겠지.’이런 생각이 들자, 시연은 짜증이 솟구쳤다.“시연아.”유건이 시연을 불렀고, 테이블을 가리키며 말했다. “핸드폰 좀 건네줘.”‘뭘 하려는 거야?’시연은 신경 쓰고 싶지 않아서 아무 말 없이 핸드폰을 들어 건넸다.유건은 전화를 걸었다.“그래요, 나예요.”“담당 업무는 아니지만, 추가 보상을 해줄게요.” 시연은 이 말을 듣고 누구에게 전화하는지 궁금해졌다.정답은 곧 밝혀졌다.초인종이 울렸고, 시연이 문을 열자, 우주의 간병인 최예민이 서 있었다.“사모님.”최예민이 인사하며 말했다. “고 대표님께서 저를 부르셨습니다. 돌봐야 할 사람이 있다고 하셔서요.”“아... 그래요.”시연은 최예민을 안으로 들였다.그 순간, 유건은 이미 소미를 안아 올리고 있었다. 그는 최예민을 보며 말했다. “욕실로 따라오세요.”“네, 고 대표님.”최예민은 남자의 뒤를 따라 욕실로 들어갔다.잠시 후, 유건이 나왔다.거실에는 둘만 남았다. 잠깐의 침묵이 감돌았다. 그리고 어쩔 수 없는 어색함.시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내 할 일은 끝난 것 같네요. 방에 가서 잘게요.”“응.”유건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용히 시연의 뒤를 따라갔다.시연은 그가 자신을 배웅하는 거라 생각했다. 원래도 이런 배려심이 있는 사람이니, 굳이 말하지 않았다.방에 도착하자, 시연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그런데 예상외로, 유건도 따라 들어왔고, 외투를 벗었다.소미를 찾으러 갔을 때 비를 맞았던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359화

    유건은 순간 멈칫했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그쪽에도 보내도록 했어.”“그럴 줄 알았어요.”‘이 생강차, 애초에 나를 위해 준비된 게 아니었네.’‘비를 맞은 사람은 장소미니까, 나는 어부지리로 얻어먹게 된 것일 뿐이지.’ 시연은 웃으며 그릇을 받지 않았다.“그쪽에 가져다주면 되겠네요. 난 필요 없어요.”말을 끝내자마자 고개를 저으며 이불을 다시 덮고 눕고자 했다. “필요 없다니?”유건이 재빠르게 손을 뻗어 그녀를 붙잡았다.“다 마시고 자.”“안 마시고 싶어요.”시연은 유건이 왜 이렇게 고집을 부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장소미를 위해 준비한 거라면서요... 그러니까 그 사람이 마시면 되잖아요. 왜 굳이 나한테까지 강요하는 거예요?”‘지금 이 여자, 설마 나한테 따지는 건가?!’‘이 생강차가 누구를 위한 건지 따지는 거야? 자기를 위한 배려인 건지, 아니면 그저 형식적인 건지...?’유건 역시 답답했다. “장소미도 마신다고 하니까, 마시기 싫어진 거야?” 시연이 이런 고집을 부리는 건 처음이 아니었다.예전에도 한 번 그랬다. 유건이 시연에게 팔찌를 선물했을 때, 소미와 같은 걸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돌려준 적이 있었다.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시연은 이제 진짜 유건의 아내이기 때문에, 유건은 한층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잘 들어. 지금 넌 아이를 품고 있어. 감기에 걸리면 위험하다고.”“정말...”시연은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난 비도 안 맞았잖아요. 당신의 관심은 다 장소미한테 주면 돼요.”“지시연!!”유건이 갑자기 어조를 높였고, 여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한 마디 한 마디 강조했다.“스스로 마실래, 아니면 내가 떠먹여 줄까?”‘세상에 저렇게 독단적인 사람이 또 있을까?'마음속은 불만으로 가득 찼지만, 결국 시연은 타협했다. “알겠어요. 마시면 되잖아요.”그리고 그릇을 들고 단숨에 생강차를 들이켰다.이어서 곧바로 그릇을 돌려주며 말했다. “됐죠? 이제 잘 거예요.”바로 이불을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360화

    시연은 고개를 돌려 유건의 손에서 벗어났다.그리고 이불을 댕겨 몸을 감싸고는 다시 등을 돌려 누웠는데, 유건에게 나가라고도 하지 않았고, 남으라고도 하지 않았다.‘나한테 여기서 자라고 허락한 걸까?’ 유건은 상관없었다. 어차피 나갈 생각이 전혀 없었으니까.그래서 바로 이불 한쪽을 들추고 자연스럽게 들어가 시연을 다시 끌어안았다.그 순간, 시연의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이번에는 단숨에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내려갔다.“멈춰.”유건이 여자의 손목을 붙잡았다. “어디 가는데?”‘만약 ‘소파에서 잘 거예요’라고 말하면...’‘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하지만, 시연은 담담하게 말했다. “이불 가지러 가려고요.”즉, 따로 자겠다는 뜻이었다.유건은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터뜨렸고, 여전히 여자를 놓아주지 않았다.“안 돼. 그냥 이대로 자자.”그가 손에 힘을 주자, 시연은 미세하게 눈썹을 찡그렸다. ‘이대로면 내가 절대 빠져나갈 수 없을 것 같은데...’결국 유건은 시연을 다시 침대로 끌어당겼고, 여자를 품에 꼭 안았다.두 사람의 몸이 완벽히 밀착됐다. 마치 포개진 숟가락처럼.시연은 남자의 따뜻한 숨결과 강한 심장 박동을 느낄 수 있었기에, 너무 짜증이 났다. “잘 거면 그냥 자요. 나 좀 놔 줄래요?”“못 놔.”유건은 여자의 목덜미에 입술을 스치듯 대며 말했다. “너 없으면 잠이 안 와.”‘뭐? 진심이야?’시연은 냉소를 지었다.‘여자가 없으면 잠을 못 자는 건가?’ ‘하지만, 그 여자는 내가 아니라 장소미겠지.’생각할수록 짜증이 치밀어 올라서 시연은 이를 갈듯 말했다. “놔요!”“싫어.”“사람을 화나게 하는 특별한 재능이라도 있는 거예요? 세상에 어떻게 당신 같은 사람이 있는 건지 궁금할 지경이라고요.” ‘이 남자는 장소미를 잊지 못하면서, 할아버지 때문에 억지로 나랑 결혼하기로 했어...’‘그럼 적어도, 장소미에 대한 미련이 있더라도 나한테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야 하는 거 아니야?’‘그런데 어떻게 이런 상황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361화

    소미의 뒤에는 정기환이 따라오고 있었다.기환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유건의 지시로 아침부터 방 앞에서 대기하다가 소미가 깨어나면 바로 집으로 데려가야 했다. 그러나 소미가 고집을 부리며 유건을 찾아가겠다고 하니, 그도 어쩔 수 없었다.“유건 씨.”하룻밤 푹 쉰 덕에, 소미는 한결 나아 보였다. 정신은 또렷했지만, 화장하지 않아 얼굴이 창백했고, 눈가도 여전히 부어 있었다.“기환 씨를 탓하지 마요. 제가 원해서 온 거니까요. 유건 씨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싶었고, 지 선생님에게도 사과하고 싶었어요. 어젯밤엔 정말 실례가 많았어요.”그러면서 그녀는 안쪽을 힐끔 바라봤다.“혹시 제가 지 선생님을 잠깐 볼 수 있을까요?”소미가 이미 방 앞까지 와 있었기에, 막을 수 없었던 유건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에 있어.”소미의 미소가 순간적으로 굳었고, 몇 걸음 안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그럼 지 선생님에게 몇 마디만 하고 갈게요. 오래 머무르진 않을 거니까...”“그래.”두 사람이 방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세수를 마치고 나오던 시연은 잠시 멈칫했다. ‘이른 아침부터 또 같이 다니네?'굳어버린 소미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시연이 입은 옷이었다. 그 옷은 남성용 욕실 가운이며 길이가 길어 바닥까지 끌릴 정도였다.누구의 것인지 묻지 않아도 뻔했다. 바로 유건의 것이었다.‘지시연이... 감히?'소미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지 선생님, 좋은 아침이에요.”“아, 네.”시연은 안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얘기 나누세요. 전 옷 갈아입으러 가야 해서요.”그렇게 말하고는 드레스룸으로 들어갔다.소미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잠시 기다려야겠네요.”“그래.”“고 대표님.”그때, 직원들이 아침 식사를 준비해 두고 퇴장했다. “조식 준비되었습니다. 맛있게 드십시오.”“네.”“와...!”소미는 다이닝 룸을 둘러보며 미소를 지었다.“아침도 준비됐네요.”그러면서 배를 살짝 문지르며 말했다. “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362화

    “확실해?”유건은 천천히 말했다. “당신은 우주를 제일 신경 쓰잖아. 우주가 물어보면 어떡할 건데? ‘왜 누나는 매형이랑 같이 안 있어?'라고.”시연이 멍하니 있는 사이, 유건은 그녀의 손목을 잡고 다이닝 룸으로 끌고 갔다.“나갈 생각하지 말고 같이 아침 먹자. 우주는 조금 있으면 볼 수 있잖아.” 그는 단숨에 시연을 의자에 앉혔다.그리고 마주 보게 된 사람은 소미였다.소미는 방금 한입 베어 문 샤오룽바오를 내려놓고 입을 닦았다.“좋은 아침이에요.”시연은 희미하게 웃었지만, 대꾸하지 않았다. 소미의 가식적인 태도에 굳이 반응할 필요는 없었다.묘한 정적이 흘렀다.소미는 애써 웃으며 말했다. “지 선생님, 어제는 제가 너무 취해서 실례했어요. 방해해서 미안해요. 그냥... 감정 조절이 잘 안됐어요. 이해해 주길 바라요. 아무래도 저랑 유건 씨는...”그리고 말을 잇지 못하고 목이 멘 듯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너무나도 가슴이 아픈 듯한 모습.시연은 묵묵히 소미를 바라보며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공기가 더더욱 무거워졌다.그때, 유건이 새우장 덮밥을 시연 앞에 밀어 놓고 젓가락을 건넸다.“먹어.”시연은 젓가락을 들고 면을 휘적거리다 미간을 찌푸렸다.“좀 불었네요.”“당신이 그런 말 할 자격이 있어?”유건은 피식 웃었다. 탓하는 듯한 말투였지만, 음성에는 따뜻한 기색이 감돌았다.“배고프다길래 빨리 준비해 달라고 했는데, 당신은 왜 이렇게 늦장을 부린 거야? 널 기다리느라 면이 다 불었잖아.” 여자가 얼굴을 찡그리며 불만스러워하자, 유건은 망설임 없이 면을 가져갔다.“그만 먹어. 새로 만들어 달라고 할게.”“안 돼요.”시연은 단호했다. “음식은 버리면 안 돼요.”그녀는 어릴 때부터 끼니를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그래서 음식 낭비는 절대 하지 않았다.“낭비는 안 해.”유건은 그런 시연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그래서 면을 자기 앞으로 가져갔다.“이건 내가 먹을게.”“그래요.”“새로 주문해야겠네.”그는

Latest chapter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525화

    “시연아, 나 M국 도착했어. 며칠은 적응해야 해서, 학교 등록은 좀 이따가 하려고...”“오늘은 눈이 왔어. M국 날씨는 G시보다 더 오락가락하고 있어. 어제는 반 소매 입었는데, 오늘은 눈이 내려...”“오늘 장 봐서 집에서 밥해 먹었어. 햄버거랑 치킨만 먹다 보니 몸이 좀 이상하더라...”“요리가 좀 익숙해지면, 나중에 너한테도 해줄게. 넌 교수가 될 거니까 아주 바쁠 거잖아. 내가 집안일도, 너도 챙길게.” 한 문장, 또 한 문장. 은범의 글씨를 따라가던 시연의 눈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리고 눈물이 자꾸만 번졌다. ‘왜 이제야 보게 된 걸까...’ 시연의 심장이, 천천히, 무겁게 가라앉았다. ...“계속 답장이 없네. 아직도 화난 거야? 내가 갑작스럽게 떠난 건... 정말 어쩔 수 없었어. 우리 부모님이...” “지난번 내가 한 설명... 안 믿는 거야? 맹세할게. 단 한 마디도 거짓은 없어.” “시연아, 보고 싶어.” “난 언제나 진심이야. 그 마음은 단 한 번도 변한적이 없어. 너를, 그리고 우리를 배신한 적 없어.” “나, 오늘 전액 장학금 받았어! 너도 기뻐해 줄 거지?” “내 디자인이 공모전에서 상 받았어! 앞으로... 우리 집은 내가 잘 지켜낼 수 있을 거야.” “시연아, 날 기다려줘. 제발... 나 돌아갈게.” “너무 보고 싶다. 딱 한 번만, 연락해 줄래?” “내가 잘못했어. 넌... 절대 날 용서하지 않을 거지? 미안해... 정말 미안해...” 점점, 시연은 더 이상 문장을 끝까지 읽을 수 없게 되었다. “아...!!!” 손으로 가슴을 꾹 누른 채, 시연은 오열했다. 이와 동시에 침대 위에 누운 은범을 바라보는 눈빛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이 서렸다. ‘난... 몰랐어. 정말 아무것도... 몰랐어.’ 지난 3년 동안, 시연이 은범에게 가졌던 감정은 오직 하나... 증오였다. 약속을 어긴 은범에 대한, 자신을 버린 은범에 대한, 가차 없이 떠난 은범에 대한.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524화

    시연은 조용히 침대 곁에 앉았고, 모니터에 뜬 숫자들을 힐끗 봤다. 심박수, 산소포화도를 포함한 모든 상태가 아주 심각했다. “은범아... 나야, 시연이.” 물론,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시연은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은범의 손 가까이 다가가, 살며시... 감쌌다. “은이야...” 갑자기 목이 메었다. “내가 왔어. 널 보러 왔어... 은이야...” 이어서 눈을 감자, 눈물이 쏟아졌다. “왜 이렇게 바보같이 굴었어... 아프면 말하지 그랬어. 그동안 혼자 견디느라... 많이 힘들었지?” “포기하지 마. 지금 여기서 끝내지 마. 다 괜찮아질 거야. 괜찮아질 거야.” “내가 곁에 있을게.” 시연은 계속 중얼거렸다. 우울증이 어떤 건지, 그녀는 의사지만 완전히 알 수 없었다. ‘내가 뭘 하면... 널 도울 수 있을까?’은범은 의식이 없는 상태였지만, 시연은 지금 이 순간에도 그가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잠시 생각에 잠긴 그녀는, 갑자기 뭔가 떠오른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연아?” 문밖에 서 있던 강수희와 노수철이 놀라 그녀를 불렀다. “어디 가는 거니?” 지금 노수철 부부에게, 시연이 병실을 떠나는 건 곧 ‘희망’이 사라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시연은 두 사람을 지나쳐, 병실 구석에 조용히 서 있던 정기환을 바라봤다. “기환 씨...” 그녀의 부름에 그가 다가왔다. “형수님, 무슨 일이세요?” 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가방을 뒤적였다. “예전에... 지 사장님이... 제 이름으로 집을 하나 사주셨거든요. 그 집, 어딘지 알죠?” “네, 압니다.” 그녀는 집 열쇠를 꺼내 건넸다. “거기 서재 책상 왼쪽 서랍에, 천으로 된 가방이 하나 있어요. 그거 좀 가져다주세요.” 기환은 멈칫했다. ‘지금 내가 자리를 비웠다가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그가 선뜻 움직이지 못하자, 시연은 고개를 돌려 노수철 부부를 바라봤다.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523화

    이 광경에 시연은 숨이 턱 막혔다. “사모님, 대체 무슨 일이에요?” “그러게요, 사모님!” 시연뿐만 아니라, 나이 지긋한 왕성애마저 놀라고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우리 사모님은 아직 어리세요. 갑자기 이러시면 놀라서 수명이 깎일지도 모른다고요!” “절대 그럴 의도는 아니었어요!” 강수희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럼 어서 일어나세요.” 왕성애는 불쾌하다는 듯이 입을 삐죽거렸다‘한밤중에, 그것도 울고불고하며 무릎까지 꿇다니... 대체 누구한테 겁을 주려는 거야?’ “아, 네...” 노수철이 강수희를 부축해 일으켰고, 강수희는 그 틈에 시연의 손을 덥석 잡았다. “시연아, 미안해... 내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너무 급해서, 너무 막막해서 그랬어. 부탁이야... 우리 은범이 좀 살려줘.” ‘뭐...?’ 시연은 당황스러웠다. “은범이가... 왜요?” “은범이가...” 그 이름을 입에 올리자마자, 강수희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은범이가 손목을 그었어... 자살 시도를 했다고... 의사 말로는, 그냥... 살고 싶어 하지도 않는대. 시연아, 너밖에 없어. 은범이한테 남은 마지막 희망은 너뿐이야...” “맞아.” 노수철은 체면이고 뭐고 다 내려놓은 듯했다. “예전에 우리가 널 힘들게 했던 거 안다. 근데 은범이도... 결국 피해자잖니.” 시연은 이미 정신이 아득했다. 입술을 파르르 떨리며 말을 내뱉었다. “지금... 은범이는 어디 있어요?” “병원에 있어.” “어서 가요.” ‘지금은 묻고 따질 때가 아니야.’ 은범에게 우울증 있다는 거, 시연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손목을 그은 건... 처음이 아니었다. “안 돼요!” 갑자기 왕성애가 가로막았다. “사모님! 가시면 안 돼요!” “왜요?” 시연은 당황했다. 왕성애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답답한 듯 말을 끌었다. “유건 도련님을 생각하셔야죠!” ‘고유건...’ 유건이 알게 된다면,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522화

    “어떻습니까, 교수님?” 강수희는 비틀거리며 다가가 물었다. 초조함이 전신을 감쌌고, 목소리도 떨렸다.의사는 깊게 찌푸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출혈은 막았고 봉합은 완료했지만... 생명 징후가 매우 불안정합니다. 혹시 부모님이시라면, 자살 시도 이유를 알고 계십니까?”노수철과 강수희는 눈을 마주쳤다. 하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절망과 자책, 무지의 공허함만이 흐를 뿐.의사는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일단 병실로 옮겨 보겠습니다. 상황은 조금 더 지켜봐야 합니다.”...병실로 옮겨진 은범은 여전히 의식이 없었다. 몸은 차갑고, 호흡은 희미했다.의사는 곁을 돌며 환자의 상태를 살핀 후, 다시 고개를 저었다. “생명 징후가 너무 약해요. 솔직히 말해서... 살겠다는 본인의 의지가 전혀 느껴지지 않네요. 두 분... 부모로서... 정말 이유를 모르십니까?”‘살겠다는 의지가 없다’라는 말이, 비수처럼 강수희의 가슴에 꽂혔다. 의료는 기적을 바랄 수 있는 일이기도 하지만, 마음이 꺾인 사람에겐 한없이 무력해지는 일이기도 했다.“방법... 방법이...” 강수희는 중얼거리며, 불현듯 남편의 팔을 움켜잡았다.“방법 있어요! 방법이 있어요, 분명히!”그리고 이내, 진성빈을 찾아갔다.“성빈아... 있어. 방법이 있어.” 강수희의 눈은 붉게 충혈돼 있었다.성빈은 바로 눈치를 챘다. 하지만 믿을 수 없어 되물었다. “설마... 시연이요?”“그래, 시연이.” 강수희는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아이만이 은범이를 살릴 수 있어... 그 아이는... 은범이한테 약이야...”“이모...” 성빈은 난감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 돼요. 시연이가 결혼했다는 거, 이모도 아시잖아요.”고씨 가문의 결혼식은 조용히 이루어졌지만, G시의 상류 사회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일이었다. 이제는 누군가의 아내가 되어버린 시연이, 전 남자 친구를 보러 오는 일은 불가능에 가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521화

    차가운 면도날이 혈관을 스쳤다. 피가 터지듯 솟구쳤다.은범은 미동도 없이 그 광경을 바라봤다. 점점 창백해지는 얼굴. ‘이상하다... 오히려... 편안해.’ ‘이대로 피가 다 빠지면, 이제... 끝이겠지.’그는 서서히 의자에 앉았다. 팔을 세면대 안으로 걸치고, 마치 아무 일 없는 듯 천천히 눈을 감았다.‘해방이란 게 있다면, 이런 거 아닐까?’‘죽음은 단지 긴 수면일 뿐이야.’ ‘두렵지도 않아...’그리고 점점 몸이 식어갔다.은범의 의식이 아득해지고, 생각은 흐릿해지고 있었다.그때, 어디선가 급한 발소리, 그리고 울먹이는 목소리.“은범아! 은범아!!”강수희였다. 피범벅이 된 아들의 손목을 보는 순간, 그녀는 그대로 무너졌다.“으아아악... 은범아...!”어머니의 얼굴 위로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재빨리 떨리는 손으로 겨우 핸드폰을 꺼내 119를 눌렀다.“제발요, 제 아들이에요! 지금 피를 너무 많이 흘려요...” “여기... 제발, 빨리 와주세요... 부탁드릴게요... 제발...!!”...병원.“어떻게 된 거야?! 은범이는...!” 노수철이 숨을 헐떡이며 응급실로 뛰어들었다.“아직 수술 중이에요...” 강수희의 눈은 완전히 부어올랐고, 손은 계속 떨리고 있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 우리 은범이가 왜...”“이모.” 조용히, 낮고 단단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진성빈이었다. 은범과 어릴 적부터 함께 자라온, 가장 가까운 친구.“성빈이?” 노수철이 인상을 찌푸렸다. “너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 거냐?”“삼촌.” 성빈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말, 싫어하실 거 알아요. 하지만... 더는 참을 수가 없어요.” 강수희는 얼굴을 찡그리며 겨우 물었다. “무슨 말이든... 해줘, 제발.”“네...” 성빈은 잠시 말을 고르다, 이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이모, 은범이... 심각한 우울증 환자예요.”“뭐...?” 강수희와 노수철은 동시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520화

    햇살은 눈부시게 쏟아졌고, 하늘은 한 점 구름 없이 맑았다. 농구 코트 위, 남자들의 구호와 땀방울이 어우러진 뜨거운 풍경 속, 관중석의 친구들이 장난스럽게 소리쳤다.“은범이 파이팅!” “은범이, 잘생겼다!”“오늘은 구경꾼도 많네! 은범아, 여자애들이 저렇게 많은데 한 명도 눈에 안 들어와?” “야야, 우리 은범이 여자 친구 있잖아.”“아, 그냥 농담이지 뭐... 여기, 여자 친구는 안 왔잖아?”“저기 ‘법대 퀸’, 너 좋아한 지 꽤 됐지? 아빠가 대형 로펌 대표래. 솔직히 네 여친보다 집안이 몇 배는 좋잖아. 솔직히 말해봐, 흔들리지도 않아?”“그래, 시대가 변해도, 결국은 ‘분수에 맞는 집안’이 최고잖아.”“야, 그만해.” 은범이 결국 참지 못하고 수건을 내팽개쳤다. “끝나고 밥도 없어. 다들 꺼져.”“뭐야?!”“오늘 은범이의 한턱 기대했는데...”“야야, 시연이 얘기 꺼낸 너 때문이야! 은범이가 시연이를 얼마나 아끼는지 몰라서 그러냐?”“오늘의 죄인은 너로 정했다!”농구가 끝나고, 사람들이 하나둘 정리할 때쯤, ‘법대 퀸’이라 불리는 여대생이 다가왔다. 손에 시원한 음료를 든 채, 수줍은 미소를 띠며.“은범아, 이거...”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은범은 그녀를 스치듯 지나쳐 버렸다. 남자의 시선은 오직 한 사람만을 향하고 있었다.등에 백팩을 멘 채, 린넨 원피스를 입고 햇살을 받으며 다가오는... 시연.“우리 여친 왔네!”“흥!” 시연은 콧소리를 흘리며, 은범의 시선을 따라 ‘법대 퀸’을 슬쩍 훑었다. “내가 좀... 타이밍이 안 좋았나 보네?”‘질투 날 수밖에 없잖아. 저렇게 예쁘고, 잘 어울리데...’“무슨 소리야! 나, 이제 막 경기 끝났어. 못 봤지? 나 아까 진짜 멋있었어.” 은범은 웃으며 시연의 손을 잡았다.그제야 시연도 입꼬리를 올렸다. “물 마실래?”시연이 내민 물병을 보자 은범이 반갑게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녀는 장난스럽게 손을 뒤로 뺐다.“이건 그냥 물이야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519화

    노은범이었다.“시연아.”시연보다 먼저, 은범이 담담한 미소로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네.”“응, 오랜만이야.” 딱히 오래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얼마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은범은 또 눈에 띄게 말라 있었다. 매번 마주할 때마다, 그는 더 말라가고 있었다.‘왜 이렇게... 보기만 해도 마음이 복잡하지...?’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를 시연의 감정. 그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여긴... 어떻게 온 거야?” 시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은범은 심재규 쪽을 힐끗 보더니, 늘 그렇듯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말했다. “교수님이랑 아는 사이야. 근처에 볼일 있어서 잠깐 들른 거고. 이제 나가려던 참이었어.”‘정말 그게 다일까? 아니야, 분명 날 보러 온 거잖아.’하지만 시연은 굳이 그 사실을 건드리지 않았다. “그래? 그럼... 내가 배웅해 줄게.”“응, 좋아.” 두 사람은 마치 친구인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함께 별산장 밖으로 걸어 나왔다.은범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배로 향했다. “많이 나왔네.”“응, 이제 슬슬 티 나기 시작했어. 4개월 지나고부터 눈에 띄더니, 하루가 다르게 불러오는 느낌이야.”“그래... 참 좋다.” 은범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더니, 문득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잘 지내? 그 사람은... 너한테 잘해줘?”시연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든, 나쁘든... 이젠 내 몫이야. 너까지 이런 얘기 들어야 할 이유는 없잖아. 너... 상태도 안 좋은데.’정문 앞에 다다랐을 때, 은범은 걸음을 멈췄다. “여기까지만 데려다줘. 곧 우주 수업이 끝날 시간이잖아. 이만 돌아가.” “응, 잘 가.”“잘 있어.”시연은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멀어지는 은범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녀가 돌아온 후에도, 우주는 아직 수업 중이었다....심재규는 시연을 보자 바로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사모님. 오늘이 마침 노 사장님의 진료 날이었어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518화

    한 번 그런 일이 있었다면, 두 번째도 있을 수 있었다. 그래서 시연은 진심으로 무서웠다. 그리고... 또...‘왜 이렇게 가슴이 답답하지...?’뭔가 꽉 막힌 듯한 느낌, 그리고 불쾌한 통증. 혹시 또 쓰러지기라도 할까 두려워진 시연은, 조용히 방으로 돌아가 누웠다. 하지만 잠은 쉽게 오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유건과 나눴던 대화가 계속 맴돌았다. 특히 복수 때문에 이혼을 거부했다는 말. 그 말은 진심이었다.깜깜한 어둠 속, 시연은 가슴에 손을 얹고 속삭였다. “그렇지만... 결국, 난 지키지 못했어.” ‘난... 마음이 움직였으니까.’‘사랑하지 말았어야 할 사람을... 좋아하게 돼버렸어.’ ‘내가 만든 덫에 내가 걸려든 거야. 자업자득이지.’그날 밤, 유건은 끝내 방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시연은 식탁에서 아침을 챙겨 먹었지만, 여전히 유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벌써 출근했나...?’ ‘어제 술을 그렇게 마셨는데, 두통도 없나 보네. 진짜 대단한 체력이다.’시연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가방을 둘러매고 현관을 나섰다. 역시나 정기환이 대기 중이었다.“형수님.” 기환은 운전석에서 시연을 힐끔힐끔 보며 입술을 몇 번이나 달싹였다.“왜요...?” 시연은 피식 웃으며 물었다. “할 말이라도 있어요?”“아니요... 그게...” 기환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가, 갑자기 질문을 던졌다. “혹시... 저한테 궁금한 거 없으세요?”“네...?” 시연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없는데요? 왜요, 제가 뭘 물어야 하죠? 무슨 질문을 기다리는 거예요?”‘뭐야, 이건 또 무슨 희한한 대화야...’“아, 아니요... 그냥요. 하하.” 기환은 쓴웃음을 지으며 다시 조용히 운전대를 잡았다.강울대병원에 도착하자, 시연이 병동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기환은 한숨을 길게 내쉬며 핸드폰을 꺼냈다. ‘이걸... 형님한테 뭐라고 보고해야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517화

    유건의 약속을 들은 시연은 더 이상 웃지 않았다. 남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또렷하게 입을 열었다.“그럼... 사실대로 말할게요.” “처음에 계약 결혼을 수락한 건... 돈 때문이었어요. 우주 치료비가 필요해서.” “그리고 나중에 당신이 장소미의 남자친구라는 걸 알았죠... 이혼을 거부한 건, 복수였어요. 그 여자한테, 그 집안에... 복수하고 싶었어요. 그게 전부예요.”시연의 분홍빛 입술이 천천히 열리고 닫히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유건의 머릿속은 텅 비어버렸다. ‘정말... 복수였어...’예전에 시연이 병실에서 그랬다. 유건이 누굴 사랑하든, 상관하지 않을 거라고. 그 말이 인제야 명확하게 유건의 귀에 들려오는 것 같았다. 모든 퍼즐이 맞춰지는 듯했다‘그동안... 내가 느낀 시연이의 다정함은... 모두 연기였던 걸까?’‘아니, 내가 그렇게 믿고 싶었던 걸까?’유건은 더 생각하지 않으려 애쓰며, 표정을 감췄다.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그런 방식으로 복수한다고? 좀 유치하지 않아?”“그렇죠, 유치하죠.” 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씁쓸하게 웃었다.‘결국 복수는커녕, 나 자신만 구역질 나게 했으니까.’그녀는 한참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진심을 담아 말했다.“미안해요. 이 말은 꼭 하고 싶었어요. 이혼 안 해준 것도, 당신을 이용한 것도... 그건 분명 내가 잘못한 거니까요.”그 한마디가 유건의 가슴 깊은 곳에 단번에 불을 밝혔다. ‘‘그동안’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지금은?’‘지금은... 나에 대한 감정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걸까?’유건은 묻고 싶었다. 정말, 정말로 묻고 싶었다. 하지만 무서웠다.그런 유건의 망설임을 모른 채, 시연은 조용히 물었다.“이제 다 알았으니까... 어쩔 건데요? 이혼할 거예요?”“뭐...?”그 순간, 유건의 표정이 무너졌다. 아무리 인내심이 강한 사람이라 해도, 그 질문을 참을 수는 없을 터였다.‘이혼? 또 이혼? 이혼이 무슨 일상 대화야?’‘조금만 감정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