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이 말씀하시길, 올해 합격통지서는 우편으로 발송됐고, 너희 집 주소로 보냈다던데? 수령인은... 장소미야.”진아는 말끝을 흐리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장소미가 일부러 너를 방해하려고 통지서를 중간에 가로챈 것 같아!” 그 말을 듣는 순간, 시연의 얼굴은 창백해졌다. ‘혹시 떨어질 수도 있다고는 생각했지만, 첫 관문부터 장소미한테 발목이 잡힐 줄이야!’ “시연아.” 진아는 시계를 확인하며 말했다. “면접 시작 시간은 10시야. 아직 시간이 있어.” ‘맞아!’ 시연은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여기서 포기할 순 없어. 내 합격통지서를 반드시 찾아야 해.’ 시연은 곧바로 지씨 저택으로 향했다.‘합격통지서를 반드시 되찾아야 해!’ “진아야, 내 자리 좀 비워달라고 말해줘!” “알겠어, 얼른 가!” ...시연은 서두르며 지씨 저택에 도착했다. 문을 열어준 것은 한 가정부였다. “시연 아가씨...” 그녀는 문을 열며 어색하게 인사했다. 시연은 가정부를 차갑게 바라보며 물었다. “내 합격통지서 어디 있어요?” ‘...!’ 가정부는 당황해서 얼버무리기 시작했다. “그, 그게... 저는 잘 몰라요...” ‘흥.’ 시연은 가정부의 흔들리는 눈빛을 보며 속으로 냉소했다. ‘거짓말이야. 이 집안사람들은 하나같이 나에게 이렇게 함부로 대해. 내가 직접 찾아봐야겠어.’ 시연은 가정부의 대답에 신경 쓰지 않고 이내 2층으로 향했다. 그녀는 공구함에 든 망치를 꺼내 들고 잡동사니 방으로 향했다. “시연 아가씨?!”가정부는 깜짝 놀라며 급히 장미리와 지동성에게 각각 전화를 걸었다. 시연은 가정부의 말을 아예 무시한 채 장소미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망치를 한 손에 들고, 다른 손으로 서랍과 옷장을 마구 뒤지기 시작했다. “시연 아가씨, 이렇게 하면 안 돼요! 사모님이 아시면 큰일 나요!” 가정부는 뒤따라오며 만류했지만, 시연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몇 분도 지나
“무슨 일이야?” 지동성이 황급히 뛰어오자, 바닥에 주저앉아 흐느끼는 아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여보, 당신 딸 좀 봐! 여길 이렇게 난장판으로 만들었어! 경찰에 신고할 거야!” 시연은 장미리를 비스듬히 쳐다보다가 갑자기 침을 뱉어 장미리의 얼굴에 튀겼다. “퉤!” “악...!” 장미리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얼굴을 손으로 훑었다. 이내 광분한 듯 소리쳤다. “미쳤어! 이 정신 나간 년이! 너 정말 미쳤구나!” 짝!그 모습을 본 지동성은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시연의 뺨을 후려쳤다. “네 어머니한테 당장 사과해! 버릇없이 굴지 마!” 시연은 고개를 살짝 돌렸지만, 맞은 곳에 아프다는 감각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차가운 절망과 끓어오르는 분노가 뒤섞여 온몸을 휘감았다. ‘하하...’ 갑자기, 시연은 크게 웃음을 터뜨렸고, 눈을 부릅뜨고 아버지를 노려보면서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하하... 이 사람들이, 내 모든 것을 망쳤어!!’‘가족, 학업, 사랑까지!! 이 원한은, 천 년이 지나도 풀지 않을 거야!!’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눈물을 닦아내고, 시연은 편지들을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봉투에 넣은 뒤, 품에 꼭 안았다. “지시연, 너 뭘 가져가는 거야?!!” 지동성이 말을 잇자, 시연은 날카로운 눈빛을 쏘아붙이면서 이를 악물고, 단호하게 말했다. “다 내 물건이에요!!” 그 눈빛에 순간적으로 지동성이 움츠러들었다. 결국, 지동성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시연을 막지도 못했다. 집을 나서자마자, 시연은 핸드폰을 꺼내 들었고, 우선 장소미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신호음만 길게 울릴 뿐, 소미는 받지 않았다. 그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바로 유건의 번호를 눌렀다. 마침 회의 중이던 유건은 핸드폰 화면이 반짝이는 걸 보고 잠깐 멍해졌다. 남자의 손을 살짝 들어 회의 중단을 알린 후, 창가로 걸어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장, 소, 미, 어디 있어요?]
시연은 꼭 성공해야만 했다. 그래야 시연과 동생 우주가 사람답게 살 희망이 있다. “놔!!!” 소미는 가까스로 시연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벌떡 일어나서 그녀를 비웃으며 손가락질했다. “당연히 알지! 합격통지서가 너한테 얼마나 중요한지! 그러니까 찢어서 버렸지!” ‘뭐?!’ 시연의 동공이 급격히 수축하며 입술이 떨렸다. “...다시 말해봐.” “벌써 말했잖아.” 소미는 귀찮다는 듯이 귀 옆으로 늘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면서 한 글자 한 글자 끊어 말하며, 독을 퍼부었다. “찢었어. 네 합격통지서, 내가 갈기갈기 찢어서 버렸다고.” 이어 그녀는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너 공부 잘하는 거 알아! 그래서 뭐? 네 앞길, 내가 직접 망쳤어! 넌 평생 나한테 밟히게 돼 있어!” “...” 시연은 입을 벌렸지만, 한동안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고, 눈앞의 소미가 완전히 악마처럼 보였다. ‘이 악마는, 아버지가 우리 엄마를 배신했다는 살아 있는 증거야!! 내 아버지를 빼앗고, 우리 가족을 산산조각냈어!!’ ‘이제는 내 미래까지 짓밟으려 하고 있어!!’ ‘그리고 저 악마의 입술이 꿈틀거리면서, 또다시 독을 내뱉고 있어!!’시연이 두 주먹을 굳게 쥐자 뼈마디에서 ‘우두둑’ 소리가 났다. 그러다, 그녀는 이성을 놓아버린 듯이 ‘악마’에게 달려들었다. “악!” 소미를 바닥에 눕혀 버렸다. 시연은 양손으로 소미의 목을 졸라 움켜쥐었다. 시연의 얼굴은 눈물범벅이었지만, 눈빛은 메마른 듯했다. “네가 뭔데?! 은이가 그동안 보낸 편지를 가로채?! 우릴 3년이나 떨어뜨려 놓았잖아! 이제 와서 또 내 합격통지서까지?” “내가 왜 그랬냐고? 넌 너무 역겨우니까! 어릴 때부터 남자들한테 꼬리나 살살 치는 주제에 어디가 잘났다고 그래? 그러니까 노은범도 널 좋아했잖아!” 은범과 시연이 사귀었을 때, 소미는 질투로 미칠 지경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야! 간신히 내가 얻은 자릴, 또 네
경비원들이 앞으로 다가서서 시연을 완전히 포위했다. 그중 두 사람이 시연을 잡으려고 직접 손을 뻗자, 시연이 단호하게 외쳤다. “나한테 손대지 마!” 그녀는 다친 팔을 감싸 쥔 채, 휘청거리며 천천히 일어섰다. “도망칠 생각하지 마!” 조애린이 시연의 앞을 가로막으며 비웃듯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네가 사람을 폭행한 장면, 전부 CCTV에 찍혔어. 이미 경찰에 신고했다고!” 조애린은 원래 시연이 겁을 먹을 거라 예상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상대방의 반응은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시연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비웃었다. “그래? 좋아. 그러면 여기서 경찰이나 기다리지, 뭐.” 그렇게 말하더니, 시연은 바로 옆에 있던 의자에 털썩 앉았다. 시연의 두려운 것 없다는 듯한 태연한 모습에 조애린은 당황했다. ‘...이 여자, 진짜로 미친 거 아냐? 이 상황이 아무렇지도 않다고?’ ...소미는 근처 병원으로 바로 이송되었다. “크게 걱정할 정도는 아닙니다.” 의사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연조직이 부어올라서 당분간 목소리에 영향을 줄 수 있어요. 약 바르시고, 이틀 정도 말을 삼가세요.” 유건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뒤, 병실로 들어갔다. 소미는 이미 잠들어 있었고, 그녀의 목에는 하얀 붕대가 감겨 있었다. 유건은 깊게 미간을 찌푸렸다. ‘도대체 지시연과 장소미 사이에 무슨 원한이 있는 거지?’ ‘단순하게 보자면 한 명은 내 법적인 아내고, 한 명은 내가 결혼을 약속한 여자라서? 하지만, 이건 우리 중 누구도 원했던 관계는 아니잖아.’ ‘둘 사이에,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을 거야.’ 그때, 유건의 핸드폰이 울렸는데, 발신자는 주지한이었다. 유건은 병실을 나와 전화를 받았다. [형님, 큰일 났어요! 조애린 씨가 신고해서, 시연 씨가 경찰서로 끌려갔어요!]...유건이 경찰서에 도착했을 때, 조애린이 이미 먼저 와 있었다. 그는 불필요한 말을 하지 않고 곧바로 본론으로
유건은 순간 얼어붙었고, 동공이 좁아졌다. ‘이게 뭐야...?’ 그리고 순간적인 충동으로 가방을 뒤적였는데, 한눈에 봐도 전부 은범에서 온 가득 찬 연애편지였다! 유건은 차갑게 웃으며 편지를 힘껏 밀어 넣은 뒤, 가방 입구를 단단히 묶은 뒤 더 이상 볼 생각조차 없었다. ...유건은 차를 집 앞에 세우고, 시연이 밖으로 나오는 걸 보았다. 그는 시연에게 차에 타라는 신호로 경적을 한 번 울렸다. 하지만 시연은 들은 척도 안 하고, 유건을 힐끔 보지도 않은 채 앞만 보고 걸었다. 유건은 찌푸린 눈썹을 하고 문을 열고 내렸다. “지시연! 지시연!” 두 번이나 불렀지만, 시연은 아무 반응도 없었다. 유건은 그녀를 쫓아가 손목을 붙잡았다. “어디 가는데? 타, 집에 가자.” “그 더러운 손 치워요! 나한테 손대지 마요!” 시연은 마치 유건이 전염병이라도 옮길 것처럼 격렬하게 반응했다. 유건은 눈살을 찌푸리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더럽다고?” “그래! 당신 더러워요! 장소미랑 가까운 사람은 다 더러워요. 다 쓰레기들이에요!” 시연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거친 욕설까지 내뱉었다. 하지만 유건은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확신이 들었다. ‘둘이... 예전부터 아는 사이였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유건은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너랑 장소미, 원래 아는 사이였어? 무슨 일 있었던 거야?” 시연은 코웃음을 쳤다. “알고 싶어요? 당신 여자 친구한테 물어봐요. 그 사람이 그걸 말할 용기나 있을지 모르겠지만.” ‘역시나...’ 유건은 더욱 미간을 좁혔다. “너희 사이에 뭔가 있었다는 건 짐작했지만, 꼭 이렇게까지 독하게 말해야 해? 너도 곧 의사가 될 사람이잖아. 기본적인 예의는 있어야 하는 거 아냐?” 시연은 또다시 코웃음을 치며 비웃었다. ‘예의? 그건 정말 정상적인 사람한테만 해당하는 거야.’ 하지만 굳이 유건에게 설명할 필요
“시연아!” 유건은 순간적인 공포에 휩싸이며 그녀를 번쩍 안아 올렸다. “병원으로 가자!” 고통이 너무 심해, 시연은 더 이상 유건의 손길을 거부할 힘조차 없었다. 임신한 이래로 지금까지, 이렇게까지 고통스러웠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혹시... 아이가 나보다 먼저 결정을 내린 걸까?’ ‘나는 어떻게 할지 아직 결정하지 못했는데...’ ‘아이의 아버지도 이 아이의 존재조차 모르고, 그 사람이 알게 된다 해도 반기지 않을지도 모르잖아.’ ‘그리고 아이의 엄마인 나는... 너무나도 무력해.’ ‘나 혼자 살아가는 것도 이렇게 힘든데...’ ‘그래서, 아이가 스스로 떠나려는 걸까?’ 갑자기 시연은 유건의 옷깃을 꽉 움켜잡았고, 힘이 들어가 목덜미에 핏줄까지 도드라졌다. “고유건 씨...!” 그녀는 힘겹게 유건의 이름을 불렀다. “말해.” 아마도 통증에 정신이 혼미해져서일까... 그 순간, 시연이 자기 눈앞의 남자가 놀라울 정도로 다정해 보였다. 남자의 눈빛도, 목소리도... “...아기...” 시연은 힘겹게 숨을 내쉬며 속삭였다. “내 아이... 내 아이를 지켜 줘요...” 유건은 여자의 차가운 이마에 입을 맞추며 단호하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 너도, 아이도... 아무 일 없을 거야.” 의사인 시연의 입장을 고려해, 유건은 그녀를 강울대학교병원이 아닌 다른 병원으로 데려갔다. “선생님!” 그는 응급실로 뛰어 들어가며 외쳤다. “검사실로 데려가 주세요! 산부인과 오현철 과장님도 당장 호출해 주세요!” “네!” 간호사가 유건을 진료실 밖으로 안내하려 하자, 시연이 그의 손을 꽉 붙잡았다. 공포에 질린 그녀는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보호자는 안에 계시면 안 됩니다.” 이 원칙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이 바로 시연이었다. 하지만, 시연도 사람이라 감정이 무너져 원칙을 생각하지 못했다. “고... 유... 건... 고...” 그녀는 뭐라고 해야 할지도 모
시연은 긴 꿈을 꾸었다. 실은 하나가 아니라 끝도 없이 쭉 이어지는 꿈이었다. 그 모든 꿈이 악몽이었다. 그리고 숨 막힐 듯한 절망. “아...” 시연은 비명이 터지며 눈이 번쩍 떠졌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젖었고, 차가운 공기가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시연아.” 낮고 부드러운 남자의 목소리. 시연은 자신이 아직 꿈에서 깨지 못한 줄 알았다. 그런데 다음 순간, 그녀는 따뜻하고 단단한 품에 안겨 있었는데, 몇 초간 멍하니 있다가, 서서히 정신이 돌아왔다. 시연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눈물 자국조차 없이 말라버린 눈동자에는, 어젯밤의 그 연약함은 흔적도 없었다. “시연아.” 유건이 낮게 물었다. “괜찮아? 어디 불편한 데 없어?” 그리고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여자의 이마를 만지려 했다. 어젯밤, 시연은 약간의 미열이 있었다. 그러나 시연은 정확하게 고개를 돌려 남자의 손길을 피했다. 유건은 순간 얼어붙었다. 마치 가슴 한가운데에 차가운 물을 들어부은 듯한 감각... 유건 역시 무안해진 손을 거두며, 식어버린 손끝을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그래. 내가 다치게 했으니까. 화내면서 나를 피하는 것도 당연하지.’ “...미안해.” 유건은 낮게, 깊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그날 자신이 저지른 실수에 대해 진심으로 후회하고 있었다. “그땐 내가 제대로 신경 쓰지 못했어. 일부러 그런 건 아니지만, 네가 다친 건 사실이고... 내 잘못이야.” 그 말을 들은 순간, 시연의 눈이 미세하게 커졌다. 검고 깊은 눈동자에는 붉은 실핏줄이 불거져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결연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사과할 필요 없어요.” 아주 냉정한 목소리. “고 대표님은 여자 친구를 보호하기 위해 행동하신 거죠. 그건 아주 ‘올바른’ 선택이었어요.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 말에, 유건의 미간이 깊이 주름지면서 목소리도 단단하게 굳어졌다. “...꼭 그렇게 말해야 해?” 유건의 가슴이 묘하
다음 날 점심, 시연은 임진아와 약속을 잡고 함께 식사했다. 진아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잔뜩 화가 나서, 거의 접시가 뚫어져라 젓가락을 찌르고 있었다. “진짜 말도 안 돼! 너한테 이런 일이 안 일어났다면, 세상에 이렇게 역겨운 인간들이 존재한다는 걸 믿지도 못했을 거야!” 하지만 시연은 그저 담담하게 미소 지었다. ‘이제 와서 화내봤자, 뭐가 달라지겠어.’ 활활 타오르던 분노의 시기는 이미 지나갔다. 어차피 삶은 계속 흘러가야 한다. “진아야.” 시연이 조용히 말했다. “이 일은 너만 알고 있어. 절대 성빈이에게 말하지 마.” 진아는 입을 삐죽 내밀었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성빈이 성격이 너무 직선적이고 다혈질이라 이 사실을 알면 가만히 있지 않겠지.’ ‘괜히 또 사고라도 칠까 봐 걱정이네.’ 어쨌든 특별전형 석사 과정은 이미 물 건너갔다. 시연도 더 이상 성빈까지 이 싸움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밤이 되어서야 본가로 돌아온 시연은 번역 원고를 마감하느라 늦은 시간까지 바빴다. 비록 마감일은 모레였지만, 편집장이 내일 직접 오라고 해서 시연도 내일만 시간이 비어 있었다. 다음 날, 시연은 오전 근무를 마친 후, 수술을 끝내고 오후 네 시쯤 편집장을 만나러 갔다. “오, 시연 씨, 앉아요.” 편집장이 반갑게 웃으며 물 한 잔을 건넸다. “오늘 부른 건 두 가지 때문이에요. 하나는 앞으로 맡을 수 있는 원고 범위를 확인하려고, 그리고 다른 하나는 원고료 정산 때문이고.” “감사합니다, 편집장님.” 한 시간가량 이야기를 나눈 후, 편집장은 시연의 실력을 높이 평가하며 말했다. “앞으로 시연 씨에게 더 많은 원고를 맡길 생각이에요.”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시연은 기쁘게 고개를 숙였다. 편집장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솔직히 처음엔 지인 추천이라 걱정했어요. 근데 실력 있는 사람은 역시 다르네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시연은 순간적으로 멍해졌다
“장소미...”시연은 그녀가 화를 내도록 놔두었다.솔직히, 남자 친구가 전처와 함께 있는 걸 보고 화가 나는 건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난 네 남자 친구한테 매달린 적 없어. 정말 우연히 만난 거야.”“허!”소미는 이를 악물고 비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그래? 그럼 하나만 더 묻자. 일부러 가정법원 가는 걸 피해서, 이혼 서류에 서명 안 하는 이유는 뭔데?!”“뭐?”시연은 놀라며 유건을 바라보았다.“소미 씨.”유건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소미의 손을 잡았다.“그건 시연이 때문이 아니야. 내가 바빠서...”“지시연.”소미는 유건의 말을 무시하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시연을 응시했다.“난 네 대답을 들어야겠어. 이혼 서류에 서명 안 한 거, 혹시 유건 씨를 못 잊어서 그런 거 아니야?” 한 마디 한 마디가 날카롭게 박혀왔다.“장소미.”시연은 미소를 거두었다. 차갑고 단호하게 말했다.“너는 내 남편과 불륜 관계잖아. 네가 무슨 자격으로 날 추궁하는 건데?”소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뭐?”시연은 비웃음을 흘렸다. 소미를 똑바로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정확히 해두자. 난 아직 고유건 씨와 법적으로 혼인 관계야. 이혼할지 말지는 내 선택이고, 네가 참견할 일 아니란 뜻이지.”“지시연...!”소미는 분노에 휩싸여 이를 악물고 격앙된 목소리로 소리쳤다.“유건 씨는 널 사랑한 적 없어요! 그 결혼도 강요당해서 한 거라고!”“웃기시네.”시연은 무심코 서늘한 눈빛으로 유건을 스쳐보았다. “그럼 누가 칼을 들이대서 강제로 혼인 신고하게 만든 건데?”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담담했다.“성인이면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져야지.”“고유건 씨가 어떤 이유에서든 나랑 결혼했으면, 나는 법적으로 고유건 씨의 아내인 거야. 법이 보호하는 거라고.”그녀는 지친 듯한 표정으로 소미를 바라보았다.“그리고 너도 마찬가지야. 유부남을 선택했다면, 유부남이 정식으로 이혼하기 전까지는 조용히 있는 게 도리 아니야?”‘유부남의
시연은 말없이 유건을 흘끗 바라보았다.유건은 즉시 기세가 꺾였고, 입을 다물고 고개를 돌려버렸다.‘안 보면 신경도 안 쓰이겠지!’“얼른 가.”시연은 가볍게 웃으며 은범에게 손짓했다.“시연아, 고마워.”은범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짐하듯 말했다.“진주를 데려다주고 바로 올게. 제발 화내지 말고,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 알겠지?”시연은 대답 대신 다시 손짓했다.“얼른 가.”“조금만 기다려!”은범은 시연을 한 번 더 바라보고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빨리 다녀와서 시연이를 만나야 해!’두 사람이 떠나고 나자, 주변은 조용해졌다.시연은 멀어지는 은범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이제 와서 아쉬운 거니?”뒤에서 나직한, 그러나 비꼬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시연이 은범을 보고 있다면, 유건은 그런 시연을 보고 있었다.유건은 자신도 모르게 질투로 가득 차 있었다.가슴이 답답하고 무거웠다.“자기 남자를 놓아주고 대단한 척이라도 하려는 건가? 너, 분명히 후회하게 될 거야.” ‘과연 그럴까?’시연은 고개를 돌려 유건을 올려다보았다. 맑은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남자를 응시했다.‘난 바보가 아니야. 고유건이 갑자기 나한테 키스한 것도, 지금 이 말을 하는 것도...’‘하진주라는 여자가 은범이랑 같이 있는 걸 나한테 보여주지 않으려 한 거야.’시연은 서늘하게 미소 지었다.“유건 씨, 왜 그렇게 조급해해요? 혹시라도 내가 은범이랑 잘 안될까 봐 걱정하는 거예요?”유건의 숨이 턱 막혔다.‘걱정하다니?’‘지금 나더러 본인이 노은범을 좋아한다는 걸 인정하라는 건가?’ 한동안 말이 없던 유건을 향해, 시연이 느긋하게 물었다.“‘응’이랑‘아니’중에 골라서 대답하는 게 그렇게 어려워요?”‘이게 무슨...?’유건은 시연의 집요함을 이해할 수 없었다.짜증스럽게 턱을 까딱하며 짧게 대답했다.“응.”그리고 잠시 생각한 후 덧붙였다.“처음엔... 나도 너를 책임질 수 없는 상황이라, 네가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 그리
문 밖.유건, 은범, 그리고 진주는 침묵 속에 서 있었다.가장 먼저 진주의 핸드폰이 울렸다.“엄마. 네, 이제 끝났어요. 곧 갈게요.”전화를 끊고 나서, 진주는 은범을 바라보았다.“은범아, 우리 엄마가 집에 빨리 들어오래.”하지만 은범은 꿈쩍도 하지 않았고, 말 한마디 없이 굳어 있었다.그는 무조건 시연이 나올 때까지 기다릴 작정이었다.진주는 어쩔 수 없이 말했다.“그럼 나 먼저 갈게.”“응...”은범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이 순간, 그는 절대 시연을 두고 떠날 수 없었다.그러나 그때, 은범의 핸드폰이 울렸다.강수희였다.“어머니.”[은범아,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진주를 안 데려다준 거니? 서로 친해지는 건 좋지만, 너무 늦으면 진주 부모님이 걱정하실 거야.]은범은 진주를 한 번 바라보며 미간을 좁혔다.강수희의 목소리는 여전히 이어졌다.[이제 늦었으니, 무조건 진주 데려다줘야 해. 알겠지?]이를 악물며, 은범은 짧게 대답했다.“알았어요.”전화를 끊고, 그는 진주를 향해 말했다.“가자, 집까지 데려다줄게.”“어?”진주는 예상치 못한 반응에 놀라며 회의실 문을 가리켰다.“그래도 돼?”“너랑 같이 왔잖아.”은범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당연히 너를 집까지 바래다주는 게 맞지.”시연에게는 나중에 충분히 설명하면 될 일이었다. 그녀는 이성적인 사람이니까.“가자.”“응.”그 모습을 보고 있던 유건은 한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눈빛 가득한 냉소를 띄웠다.‘역시 믿을 수 없는 놈이었어.’그는 긴 다리를 내디뎌 은범의 앞을 가로막았다. 날카롭게 올라간 눈꼬리, 비꼬는 듯한 미소.“어디 가려고?”“고 대표님...”은범이 답하려 했지만, 유건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졌다.“내가 있는 한, 넌 한 발짝도 못 움직여.”은범은 얼굴을 찌푸리며 침착하게 말했다.“고 대표님, 전 친구를 집에 데려다줘야 합니다.”“헛소리 좀 그만하지 그래?”유건의 분노가 폭발했다. 자신도 모르게 욕설이 튀어나왔다.“
몇 걸음 떨어진 곳.노은범과 하진주가 나란히 서 있었다.그리고 시연과 마주쳤다.“시, 시연아.”은범은 당황해 더듬거렸다.진주는 은범을 한 번 바라보더니 옅게 미소 지었다.“친구야?”“응, 아니... 아니야. 내가 좋아한다던 그 사람이야.”은범은 고개를 끄덕였다가 이내 부정했고, 더 이상 진주를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서둘러 시연에게 다가갔다.그리고 시연을 바라보며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이렇게 늦은 시간에, 여긴 웬일이야?” 뜻밖의 조우에 시연은 잠시 놀랐지만, 곧 평정심을 되찾았다.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교수님이 여기서 회의 중이셔. 놓고 가신 자료를 가져다주러 왔어.”그녀가 유건에게 한 말과 똑같았다.“그렇구나.”은범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시연의 가방을 받으려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이번엔 허공을 잡았다.시연은 재빨리 한 걸음 물러난 것이었다.은범은 순간 멍해졌고,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시연아?”시연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지만, 그 속엔 명확한 거리감이 담겨 있었다.“교수님이 기다리고 계셔서 먼저 가볼게. 그리고 널 방해하면 안 되잖아.”시연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그들을 지나쳐 걸어가려 했다.은범은 당황했다.시연이 오해했다고 확신했다.“시연아...”“잠시만요.”진주가 갑자기 시연의 앞을 가로막았다.여자의 직감은 빠르다. 이 짧은 순간에도 진주는 분위기를 감지했다.시연과 눈을 마주치며 조용히 말했다.“죄송하지만, 잠깐 제 이야기 좀 들어주시겠어요?”“...”시연은 고개를 저었다.“죄송해요. 시간 없어서요. 비켜주세요.”거절이었다.진주는 순간 당황했지만, 이내 강단 있게 나섰다.그녀는 시연의 팔을 잡았다.“잠깐이면 돼요! 금방 끝날 말이에요.”그녀는 은범을 흘끗 바라보더니 말을 이었다.“당신이 은범이가 좋아하는 사람이죠? 그런데 오해하신 것 같아요. 저희는 그런 사이가 아니에요. 그냥 친구일 뿐이거든요.”“하고 싶으신 말, 다 하신 거예요?”
유건은 결국 함정에 빠졌다. 재빨리 걸음을 멈추고 시연을 놓아주었다.“배가 어떻게 아파? 심한...”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시연은 몸을 돌려 달아나려 했다.“지시연!”유건은 당황하며 몇 걸음에 따라잡아 그녀를 끌어안았다.시연은 눈을 크게 뜨고 온몸이 얼어붙었다. 뭔가 반응할 새도 없이, 유건의 넓고 따뜻한 손이 여자의 눈을 가렸다.남자의 다급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보지 마.”“뭐를요...?”시연은 놀라며 남자의 손을 잡고 떼어내려 했다.“왜 이러는 건데요? 안 가려도 돼요...”‘안 가리면 어떡하라고?!’유건은 앞쪽을 매섭게 노려보았다.노은범이 하진주에게 자기 재킷을 벗어 걸쳐주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이걸 시연이가 본다면 얼마나 상처받을까?’“유건 씨!”시연이 저항하자, 유건은 그녀의 얼굴을 감싸고 자신의 쪽으로 돌렸다.“너, 으음...”시연이 놀라서 입을 열려는 순간, 유건이 그녀를 덮치듯 입을 맞췄다.‘뭐야?!’시연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놔... 윽...”무언가 말하려 했으나, 유건은 더욱 거칠게 여자의 입술을 탐했다.남자의 키스는 점점 깊어졌고, 점점 더 강렬해졌다.시연은 필사적으로 유건의 가슴을 두드렸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그녀는 화가 치밀어 올라 손을 번쩍 들었다.찰싹!깨끗한 타격음이 울리며 유건의 뺨이 돌아갔다.유건은 순간 멍해졌다. 손으로 뺨을 어루만지며 충격받은 표정으로 시연을 바라보았다.“미안해, 나는...”그는 단지 시연이 은범을 보지 못하게 하려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를 키스하고 나서 이성을 잃어버렸다.그녀를 원했고, 가까이하고 싶었으며, 심지어 그녀를 독차지하고 싶었다.시연의 눈가가 붉어졌다. 그녀는 마치 혐오스러운 존재를 보는 듯한 눈빛으로 남자를 노려보며 너무나 속상하다는 듯 말했다.“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예요?”‘우리... 그래도 예전에는 부부였고, 이 사람의 포옹과 키스를 받아들일 이유라도 있었어. 하지만 지금은?’‘이제 우리는 이혼을 앞둔 상태잖아!
연회장으로 돌아온 유건은 금세 흥미를 잃었다.그는 소미를 한 번 바라보고 나직이 말했다.“가자, 별로 재미없어.”소미는 아무런 이의 없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유건의 표정이 어딘가 불편해 보였다.“무슨 일 있어요?”“아니.”유건의 시선이 그녀의 배로 향했다.“너무 늦게 자면 두 사람한테 안 좋잖아.”“네.”소미는 미소를 띠었지만 속으로 불안했다.‘어떡하지? 이 사람, 아이를 정말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지금 뭔가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나중에 크게 곤란해질지도 몰라.’“왜 그래?”유건은 소미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눈치채고 눈을 가늘게 떴다.“몸이 안 좋아?”“아니에요.”소미는 웃으며 얼버무렸다.“그냥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같이 가자.”“괜찮아요...”“아니.”유건은 단호했다. 그녀가 지금 상태에서 혼자 다니는 건 마음이 놓이지 않았으니 말이다.그는 결국 화장실 입구까지 소미를 데려다주었다.“천천히 다녀와.”“네.”소미는 두려우면서도, 동시에 이 남자가 점점 더 마음에 들었다.‘이렇게 다정하고 능력 있는 사람을 어떻게 안 좋아할 수 있겠어?’유건은 조금 떨어진 흡연 구역으로 이동했다.담배를 꺼내 들었지만, 불을 붙이기도 전에 시연이 책가방을 메고 이쪽으로 다가오는 걸 보았다.‘시연이? 여기 온 이유는 뭘까?시연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결국 유건은 참지 못하고 다가가 그녀를 내려다보며 물었다.“뭐 찾는 거야?”“네?”시연이 놀라 돌아보았다.유건을 보자, 그녀는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여기 B동 6층 맞나요?”유건은 여자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6층은 맞는데, 여긴 B동이 아니라 C동이야.”“아.”시연은 짜증스럽게 머리를 두드렸다.“아, 진짜! 또 길을 잘못 들었네요.”“또?”유건은 그녀의 찡그린 얼굴을 보며 무심코 물었다.“길을 자주 잃어버려?”시연의 표정이 잠시 어두워졌다.사실, 자주 그런 건 아니었다. 그녀는 원래 방향 감각이 떨
[알겠습니다, 형님.]전화를 끊자, 소미가 방으로 들어왔다.“유건 씨.”유건은 담배를 비벼 끄고 손을 저었다.“먼저 들어가 있어. 여기 담배 냄새 나.”담배는 임신한 여자에게 좋지 않으니까.“아, 네.”연기가 가라앉은 후, 유건은 문을 열고 들어가 소미가 건넨 물을 받았다.“좀 괜찮아요?”소미가 다정하게 물었다.“네.”유건은 물을 마시고 소파에 기대었다.“너무 많이 마셨나 봐.” 그는 관자놀이를 가볍게 눌렀다.“머리가 좀 아프네. 그래도 잠깐 앉아 있으면 괜찮아질 거야.”“제가 마사지해 드릴까요?”소미가 자리에서 일어나 유건의 곁에 앉으며 소매를 걷었다.남자가 거부할 틈도 없이, 그녀는 말했다.“눈 감아요. 우리 아빠가 술 마셨을 때 자주 해드렸어요.”여자의 손끝이 관자놀이를 누르자, 유건은 거부하지 않았다.“고마워.”소미가 잔잔히 웃었다.“저한테 뭘 그렇게 고마워하세요? 제가 유건 씨를 도로는 건 당연한 거 아니에요? 우린, 앞으로 평생 함께할 사이잖아요.”‘그래, 앞으로도 함께할 사람이지.’유건은 속으로 그렇게 되뇌었다. 익숙해져야 했다.소미의 손길이 생각보다 편안해서 그는 점점 나른해졌다.“유건 씨?”그녀가 속삭이듯 부르자, 유건은 반쯤 감긴 눈으로 대답했다.“응...”소미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가슴이 뛰었다.‘이건 기회야!’‘내 임신은 거짓말이잖아... 시간을 더 끌면 고유건은 의심할 거고, 배를 감출 수도 없을 거야.’‘그 전에 내가 확실히 해야 해. 이 사람과 더욱 가까워지는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고!’그녀는 숨을 죽이고 목에서 어깨로 손을 내렸다. 그리고 천천히 유건의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남자의 입술과 단 한 뼘도 남지 않은 거리.하지만, 소미는 남자의 입술이 닿기 직전, 유건의 눈이 번쩍 뜨였다.여자가 너무 가까이 있는 걸 깨닫고, 순간 멈칫했다.“소미 씨?”“유건 씨.”소미는 포기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키스해 줘요.”유건은 말이 막혔고, 본능적으로 미간이 좁혀졌다
유건은 회의를 마치고 대표실로 돌아왔다.비서가 다가와 보고했다.“대표님, 장소미 씨가 도착하신 지 좀 되었습니다.”오늘 밤, 유건은 한 연회에 참석해야 했고, 이번엔 소미가 파트너였다.“유건 씨.”소미가 환하게 웃으며 소파에서 일어났다.“그냥 앉아 있어.”유건은 손을 살짝 흔들며 무심하게 말했다.“조애린 씨한테 들었는데, 일을 계속할 생각이야?”“네, 그래요.”소미는 살짝 긴장한 표정으로 설명했다.“양 감독님의 작품은 쉽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게다가, 이미 절반 정도 촬영했거든요. 광고를 비롯한 일정이 과하게 많은 것도 아니고요. 저는 가만히 있는 게 더 싫어요.”잠시 생각하던 유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소미의 배를 힐끗 바라보았다.“몸에 이상 없으면 소미 씨 뜻대로 해. 다만, 배가...”언젠가는 드러날 것이었다.“아, 아직 문제없어요. 사극이라 의상 때문에 티도 안 나고요.”소미는 오늘 넉넉한 원피스를 입고 온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평평한 신발까지 신은 것을 떠올렸다.유건은 여전히 걱정스러웠다.“양 감독님께 소미 씨 촬영 분량을 최대한 빨리 마무리해달라고 이야기해.”“네, 유건 씨 말대로 할게요.”시간이 늦어서 유건은 휴게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소미와 함께 대표실을 나섰다....연회는 해성 호텔에서 열렸다.주차장에서, 노은범이 먼저 내려 조수석 문을 열었다.“고마워.”진주가 미소 지으며 차에서 내렸다.은범은 담담히 말했다.“별일 아니야.”그가 어색해하는 모습을 본 하진주는 웃으며 말했다.“너무 긴장하지 마. 우리 약속했잖아? 친구처럼 지내기로.”“알아.”은범은 살짝 찡그렸다.“하지만, 네가 나 때문에 불편해질 수도 있잖아.”“괜찮아.”진주는 고개를 저었다.“이건 너만의 문제가 아니야. 우리 엄마도 연관되어 있으니까.”그녀는 남자의 팔을 자연스럽게 잡았다.“그냥 편하게 가자. 시간이 지나면 부모님들도 우리가 진짜 안 될 거라고 깨달으시겠지.”은범은 한결 편안해졌다.‘나보다도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하진주를 힐끗 바라보았다.“내가 보기엔 진주가 참 괜찮은 것 같은데, 정말 아쉬워. 우리 은범이 복이 없는 탓이지, 뭐.”진주는 급히 손사래를 쳤다.“이모, 그런 말씀 마세요. 과찬이세요.”“진주야.”강수희는 쉽게 포기하지 않고, 진주의 손을 잡으며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지난번에 은범이랑 같이 연극 봤다면서? 그 후로는 어떻게 된 거야? 솔직히 말해 봐. 은범이의 뭐가 마음에 안들었니?”“그게...”진주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뭐라고 해야 할까?’지난번에 은범과 미리 조율한 대로, 진주는 연극을 본 후 자기 부모님께 자신이 은범을 향한 마음이 없다고 전했다. 이는 진주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한 거였고, 은범도 신경 쓰지 않는 듯했지만, 예상치 못하게 강수희가 다시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이었다.진주는 은범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이모, 은범이는 괜찮은 사람이에요. 다만, 저희는 서로를 잘 모르잖아요...”이 말이 강수희에게 희망을 주고 말았다.“그럼, 좀 더 만나보고 알아가면 되잖아? 제발, 은범이에게 기회를 줘 봐, 응?”“어머니!”은범이 더는 못 참겠다는 듯 다가왔다.그는 먼저 방혜령에게 인사를 건넸다.“이모, 오랜만이네요.”그리고 곧바로 어머니를 향해 얼굴을 찌푸렸다.“어머니, 이모는 어머니를 뵈러 오신 거잖아요. 그런데 왜 그런 이야기를 하시는 거예요?”“내가 이러는 건...”“괜찮아.”방혜령이 손을 흔들며 부드럽게 웃으면서 시선을 은범에게 두었다.“이제 많이 컸네? 그런데 너희 엄마 말도 틀린 건 아닌 것 같아.”그녀는 딸을 한번 흘긋 보며 의미심장하게 말을 이었다.“너희, 한 번 본 걸로 판단하기엔 너무 성급하지 않아? 좀 더 만나면서 알아가는 게 맞지 않나?”강수희가 기뻐하며 맞장구쳤다.“내 말이! 네가 내 마음을 알아주는구나.”“어머니!”“엄마!”은범과 진주가 동시에 소리쳤다.그 모습을 보고, 방혜령과 강수희는 눈을 마주치며 웃음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