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지울 수 없었던 건, 언젠가 세 식구가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란 희망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겠지.’핸드폰 벨 소리가 끊임없이 울렸다. 유건이 전화를 받으며 짧게 말했다. “곧 도착한다.” 잠시 멈춘 뒤, 한 마디를 더 덧붙였다. “노은범에게도 연락해.” [형님, 그게...]기환은 잠시 망설였다. [지하가 분명 이번 기회에 형님이 시연 씨에게 점수를 딸 수 있을 거라고 했는데... 형님, 이건 좀 아닌 거 같은데요.] 하지만 유건은 참을성이 없었다. “뭐야? 두 번 말해야 알아듣겠어?” [아닙니다! 바로 연락하겠습니다.]전화를 끊고, 유건이 곧바로 마장 뒤편으로 향하고 있을 때, 가는 길에 은범과 마주쳤다. “고 대표님.” 은범은 특유의 차분하고도 점잖은 얼굴로 물었다. “방금 전화, 고 대표님 쪽에서 온 건가요?” “네.” 유건은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대답한 후, 더 이상 말을 덧붙이지 않고 앞장서서 걸어갔다. ‘대체 무슨 일이야?’ 은범은 더욱 의아했다. ‘고유건이 여기에 왜 있는 거지? 게다가 시연이랑 관련된 일에 이렇게 적극적이라니. 둘 사이가 정말 단순히 환자와 의사 사이가 전부일까?’ ...승마장 뒤편의 인공 숲.지금 우주는 숲속의 바위 위에 갇혀 있었다. 알고 보니, 연을 날리던 중 바람이 너무 강해 연이 숲속으로 날아가 버린 것이었다. 우주는 고집스럽게 연을 찾으러 숲으로 들어갔고, 결국 바위 위에 걸린 연을 발견했다. 문제는 바위 위로 올라가는 건 쉬웠지만, 내려오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유건이 도착했을 때, 우주는 연을 품에 안고 바위 위에 앉은 채 내려오지 못하고 있었다. 아래에서는 정민환과 정기환이 어쩔 줄 몰라 하며 대치 상태를 이어가고 있었다. “왜 안 끌어내리고 있어?” 유건이 묻자, 민환이 난감한 표정으로 답했다. “형님, 이 아이는 도무지 대화가 안 돼요. 가까이 가기만 해도 소리를 지르면서 발버둥 칩니다. 못 믿
민환과 기환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유건을 바라보았다.‘이렇게 가버린다고? 시연 씨가 오기 전에 점수 딸 기회를 이대로 그냥 날려버린다고?’ “노은범 씨.” 유건은 걸음을 멈추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지시연 씨에게 이 일 말하지 마요.” 말을 끝내고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어둠 속에서 남자의 입가에는 희미한 쓴웃음이 스쳤다. ‘그 사람... 내게 잘해주지 말라고 했으니까, 굳이 내가 우주를 구한 사실을 알 필요도 없지.’ ...“우주야!”시연은 전화를 받고 급히 달려가던 중 은범을 만났다. 은범의 등에 업힌 우주는 곤히 잠들어 있었다. 시연은 간단히 우주의 상태를 확인하고, 다행히 아무 이상이 없다는 것을 알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은범아, 정말 고마워. 이번 일로 괜히 너에게 폐를 끼쳤네.” 은범이 시간과 노력을 들여준 데다, 예상치 못한 상황까지 자신을 위해서 해결해야 하니까 시연은 은범에게 아주 미안했다. 은범은 입을 열려다 망설였다. 하지만 결국, 그는 유건에 대한 이야기를 시연에게 하지 않기로 했다. 남자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다. 시연을 향한 유건의 마음이 단순한 호기심만은 아니란 걸.‘괜히 경쟁 상대를 만들고 싶지 않아.’ 은범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고맙다는 말 할 필요 없어. 하나도 번거로운 거 없었어.” 시연은 우주의 상태에만 신경을 쏟아 은범의 말에 담긴 의미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우리 얼른 방으로 들어가자. 우주 씻기고, 깨면 밥도 먹이고 약도 먹여야 하니까.” “그래. 들어가자.” ...‘CLOUD’에서의 시간은 나름 즐거웠다.은범과 시연은 우주를 데리고 ‘CLOUD’에서 하루를 더 머물고, 일요일 저녁이 되자 비로소 시연은 우주를 태산 요양병원으로 데려다주었다. 떠나려는 순간, 우주는 시연의 손을 꼭 붙잡으며 눈망울을 깜빡였다. “우주야, 누나랑 헤어지기 아쉬워? 누나가 다음 주에 또 올게.” “마..
“선생님이 말씀하시길, 올해 합격통지서는 우편으로 발송됐고, 너희 집 주소로 보냈다던데? 수령인은... 장소미야.”진아는 말끝을 흐리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장소미가 일부러 너를 방해하려고 통지서를 중간에 가로챈 것 같아!” 그 말을 듣는 순간, 시연의 얼굴은 창백해졌다. ‘혹시 떨어질 수도 있다고는 생각했지만, 첫 관문부터 장소미한테 발목이 잡힐 줄이야!’ “시연아.” 진아는 시계를 확인하며 말했다. “면접 시작 시간은 10시야. 아직 시간이 있어.” ‘맞아!’ 시연은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여기서 포기할 순 없어. 내 합격통지서를 반드시 찾아야 해.’ 시연은 곧바로 지씨 저택으로 향했다.‘합격통지서를 반드시 되찾아야 해!’ “진아야, 내 자리 좀 비워달라고 말해줘!” “알겠어, 얼른 가!” ...시연은 서두르며 지씨 저택에 도착했다. 문을 열어준 것은 한 가정부였다. “시연 아가씨...” 그녀는 문을 열며 어색하게 인사했다. 시연은 가정부를 차갑게 바라보며 물었다. “내 합격통지서 어디 있어요?” ‘...!’ 가정부는 당황해서 얼버무리기 시작했다. “그, 그게... 저는 잘 몰라요...” ‘흥.’ 시연은 가정부의 흔들리는 눈빛을 보며 속으로 냉소했다. ‘거짓말이야. 이 집안사람들은 하나같이 나에게 이렇게 함부로 대해. 내가 직접 찾아봐야겠어.’ 시연은 가정부의 대답에 신경 쓰지 않고 이내 2층으로 향했다. 그녀는 공구함에 든 망치를 꺼내 들고 잡동사니 방으로 향했다. “시연 아가씨?!”가정부는 깜짝 놀라며 급히 장미리와 지동성에게 각각 전화를 걸었다. 시연은 가정부의 말을 아예 무시한 채 장소미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망치를 한 손에 들고, 다른 손으로 서랍과 옷장을 마구 뒤지기 시작했다. “시연 아가씨, 이렇게 하면 안 돼요! 사모님이 아시면 큰일 나요!” 가정부는 뒤따라오며 만류했지만, 시연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몇 분도 지나
“무슨 일이야?” 지동성이 황급히 뛰어오자, 바닥에 주저앉아 흐느끼는 아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여보, 당신 딸 좀 봐! 여길 이렇게 난장판으로 만들었어! 경찰에 신고할 거야!” 시연은 장미리를 비스듬히 쳐다보다가 갑자기 침을 뱉어 장미리의 얼굴에 튀겼다. “퉤!” “악...!” 장미리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얼굴을 손으로 훑었다. 이내 광분한 듯 소리쳤다. “미쳤어! 이 정신 나간 년이! 너 정말 미쳤구나!” 짝!그 모습을 본 지동성은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시연의 뺨을 후려쳤다. “네 어머니한테 당장 사과해! 버릇없이 굴지 마!” 시연은 고개를 살짝 돌렸지만, 맞은 곳에 아프다는 감각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차가운 절망과 끓어오르는 분노가 뒤섞여 온몸을 휘감았다. ‘하하...’ 갑자기, 시연은 크게 웃음을 터뜨렸고, 눈을 부릅뜨고 아버지를 노려보면서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하하... 이 사람들이, 내 모든 것을 망쳤어!!’‘가족, 학업, 사랑까지!! 이 원한은, 천 년이 지나도 풀지 않을 거야!!’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눈물을 닦아내고, 시연은 편지들을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봉투에 넣은 뒤, 품에 꼭 안았다. “지시연, 너 뭘 가져가는 거야?!!” 지동성이 말을 잇자, 시연은 날카로운 눈빛을 쏘아붙이면서 이를 악물고, 단호하게 말했다. “다 내 물건이에요!!” 그 눈빛에 순간적으로 지동성이 움츠러들었다. 결국, 지동성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시연을 막지도 못했다. 집을 나서자마자, 시연은 핸드폰을 꺼내 들었고, 우선 장소미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신호음만 길게 울릴 뿐, 소미는 받지 않았다. 그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바로 유건의 번호를 눌렀다. 마침 회의 중이던 유건은 핸드폰 화면이 반짝이는 걸 보고 잠깐 멍해졌다. 남자의 손을 살짝 들어 회의 중단을 알린 후, 창가로 걸어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장, 소, 미, 어디 있어요?]
시연은 꼭 성공해야만 했다. 그래야 시연과 동생 우주가 사람답게 살 희망이 있다. “놔!!!” 소미는 가까스로 시연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벌떡 일어나서 그녀를 비웃으며 손가락질했다. “당연히 알지! 합격통지서가 너한테 얼마나 중요한지! 그러니까 찢어서 버렸지!” ‘뭐?!’ 시연의 동공이 급격히 수축하며 입술이 떨렸다. “...다시 말해봐.” “벌써 말했잖아.” 소미는 귀찮다는 듯이 귀 옆으로 늘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면서 한 글자 한 글자 끊어 말하며, 독을 퍼부었다. “찢었어. 네 합격통지서, 내가 갈기갈기 찢어서 버렸다고.” 이어 그녀는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너 공부 잘하는 거 알아! 그래서 뭐? 네 앞길, 내가 직접 망쳤어! 넌 평생 나한테 밟히게 돼 있어!” “...” 시연은 입을 벌렸지만, 한동안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고, 눈앞의 소미가 완전히 악마처럼 보였다. ‘이 악마는, 아버지가 우리 엄마를 배신했다는 살아 있는 증거야!! 내 아버지를 빼앗고, 우리 가족을 산산조각냈어!!’ ‘이제는 내 미래까지 짓밟으려 하고 있어!!’ ‘그리고 저 악마의 입술이 꿈틀거리면서, 또다시 독을 내뱉고 있어!!’시연이 두 주먹을 굳게 쥐자 뼈마디에서 ‘우두둑’ 소리가 났다. 그러다, 그녀는 이성을 놓아버린 듯이 ‘악마’에게 달려들었다. “악!” 소미를 바닥에 눕혀 버렸다. 시연은 양손으로 소미의 목을 졸라 움켜쥐었다. 시연의 얼굴은 눈물범벅이었지만, 눈빛은 메마른 듯했다. “네가 뭔데?! 은이가 그동안 보낸 편지를 가로채?! 우릴 3년이나 떨어뜨려 놓았잖아! 이제 와서 또 내 합격통지서까지?” “내가 왜 그랬냐고? 넌 너무 역겨우니까! 어릴 때부터 남자들한테 꼬리나 살살 치는 주제에 어디가 잘났다고 그래? 그러니까 노은범도 널 좋아했잖아!” 은범과 시연이 사귀었을 때, 소미는 질투로 미칠 지경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야! 간신히 내가 얻은 자릴, 또 네
경비원들이 앞으로 다가서서 시연을 완전히 포위했다. 그중 두 사람이 시연을 잡으려고 직접 손을 뻗자, 시연이 단호하게 외쳤다. “나한테 손대지 마!” 그녀는 다친 팔을 감싸 쥔 채, 휘청거리며 천천히 일어섰다. “도망칠 생각하지 마!” 조애린이 시연의 앞을 가로막으며 비웃듯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네가 사람을 폭행한 장면, 전부 CCTV에 찍혔어. 이미 경찰에 신고했다고!” 조애린은 원래 시연이 겁을 먹을 거라 예상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상대방의 반응은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시연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비웃었다. “그래? 좋아. 그러면 여기서 경찰이나 기다리지, 뭐.” 그렇게 말하더니, 시연은 바로 옆에 있던 의자에 털썩 앉았다. 시연의 두려운 것 없다는 듯한 태연한 모습에 조애린은 당황했다. ‘...이 여자, 진짜로 미친 거 아냐? 이 상황이 아무렇지도 않다고?’ ...소미는 근처 병원으로 바로 이송되었다. “크게 걱정할 정도는 아닙니다.” 의사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연조직이 부어올라서 당분간 목소리에 영향을 줄 수 있어요. 약 바르시고, 이틀 정도 말을 삼가세요.” 유건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뒤, 병실로 들어갔다. 소미는 이미 잠들어 있었고, 그녀의 목에는 하얀 붕대가 감겨 있었다. 유건은 깊게 미간을 찌푸렸다. ‘도대체 지시연과 장소미 사이에 무슨 원한이 있는 거지?’ ‘단순하게 보자면 한 명은 내 법적인 아내고, 한 명은 내가 결혼을 약속한 여자라서? 하지만, 이건 우리 중 누구도 원했던 관계는 아니잖아.’ ‘둘 사이에,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을 거야.’ 그때, 유건의 핸드폰이 울렸는데, 발신자는 주지한이었다. 유건은 병실을 나와 전화를 받았다. [형님, 큰일 났어요! 조애린 씨가 신고해서, 시연 씨가 경찰서로 끌려갔어요!]...유건이 경찰서에 도착했을 때, 조애린이 이미 먼저 와 있었다. 그는 불필요한 말을 하지 않고 곧바로 본론으로
유건은 순간 얼어붙었고, 동공이 좁아졌다. ‘이게 뭐야...?’ 그리고 순간적인 충동으로 가방을 뒤적였는데, 한눈에 봐도 전부 은범에서 온 가득 찬 연애편지였다! 유건은 차갑게 웃으며 편지를 힘껏 밀어 넣은 뒤, 가방 입구를 단단히 묶은 뒤 더 이상 볼 생각조차 없었다. ...유건은 차를 집 앞에 세우고, 시연이 밖으로 나오는 걸 보았다. 그는 시연에게 차에 타라는 신호로 경적을 한 번 울렸다. 하지만 시연은 들은 척도 안 하고, 유건을 힐끔 보지도 않은 채 앞만 보고 걸었다. 유건은 찌푸린 눈썹을 하고 문을 열고 내렸다. “지시연! 지시연!” 두 번이나 불렀지만, 시연은 아무 반응도 없었다. 유건은 그녀를 쫓아가 손목을 붙잡았다. “어디 가는데? 타, 집에 가자.” “그 더러운 손 치워요! 나한테 손대지 마요!” 시연은 마치 유건이 전염병이라도 옮길 것처럼 격렬하게 반응했다. 유건은 눈살을 찌푸리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더럽다고?” “그래! 당신 더러워요! 장소미랑 가까운 사람은 다 더러워요. 다 쓰레기들이에요!” 시연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거친 욕설까지 내뱉었다. 하지만 유건은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확신이 들었다. ‘둘이... 예전부터 아는 사이였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유건은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너랑 장소미, 원래 아는 사이였어? 무슨 일 있었던 거야?” 시연은 코웃음을 쳤다. “알고 싶어요? 당신 여자 친구한테 물어봐요. 그 사람이 그걸 말할 용기나 있을지 모르겠지만.” ‘역시나...’ 유건은 더욱 미간을 좁혔다. “너희 사이에 뭔가 있었다는 건 짐작했지만, 꼭 이렇게까지 독하게 말해야 해? 너도 곧 의사가 될 사람이잖아. 기본적인 예의는 있어야 하는 거 아냐?” 시연은 또다시 코웃음을 치며 비웃었다. ‘예의? 그건 정말 정상적인 사람한테만 해당하는 거야.’ 하지만 굳이 유건에게 설명할 필요
“시연아!” 유건은 순간적인 공포에 휩싸이며 그녀를 번쩍 안아 올렸다. “병원으로 가자!” 고통이 너무 심해, 시연은 더 이상 유건의 손길을 거부할 힘조차 없었다. 임신한 이래로 지금까지, 이렇게까지 고통스러웠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혹시... 아이가 나보다 먼저 결정을 내린 걸까?’ ‘나는 어떻게 할지 아직 결정하지 못했는데...’ ‘아이의 아버지도 이 아이의 존재조차 모르고, 그 사람이 알게 된다 해도 반기지 않을지도 모르잖아.’ ‘그리고 아이의 엄마인 나는... 너무나도 무력해.’ ‘나 혼자 살아가는 것도 이렇게 힘든데...’ ‘그래서, 아이가 스스로 떠나려는 걸까?’ 갑자기 시연은 유건의 옷깃을 꽉 움켜잡았고, 힘이 들어가 목덜미에 핏줄까지 도드라졌다. “고유건 씨...!” 그녀는 힘겹게 유건의 이름을 불렀다. “말해.” 아마도 통증에 정신이 혼미해져서일까... 그 순간, 시연이 자기 눈앞의 남자가 놀라울 정도로 다정해 보였다. 남자의 눈빛도, 목소리도... “...아기...” 시연은 힘겹게 숨을 내쉬며 속삭였다. “내 아이... 내 아이를 지켜 줘요...” 유건은 여자의 차가운 이마에 입을 맞추며 단호하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 너도, 아이도... 아무 일 없을 거야.” 의사인 시연의 입장을 고려해, 유건은 그녀를 강울대학교병원이 아닌 다른 병원으로 데려갔다. “선생님!” 그는 응급실로 뛰어 들어가며 외쳤다. “검사실로 데려가 주세요! 산부인과 오현철 과장님도 당장 호출해 주세요!” “네!” 간호사가 유건을 진료실 밖으로 안내하려 하자, 시연이 그의 손을 꽉 붙잡았다. 공포에 질린 그녀는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보호자는 안에 계시면 안 됩니다.” 이 원칙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이 바로 시연이었다. 하지만, 시연도 사람이라 감정이 무너져 원칙을 생각하지 못했다. “고... 유... 건... 고...” 그녀는 뭐라고 해야 할지도 모
“뭐라고...?” 장미리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지금, 나한테 화내는 거야?!!” 그 말 한마디에, 마치 불씨에 기름을 부은 듯, 장미리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지동성! 그게 사람이 할 소리야?”“내가 당신이랑 몇 년을 살았는데... 우린 부부잖아! 집안 돈은 우리 공동재산이라고!” 지동성은 코웃음을 쳤다. “공동재산? 웃기고 있네.” 싸늘하게 시선을 내리깔며 말했다. “잊었어? 당신, 나한테 시집올 때 빈손이었잖아. 혼수? 그런 건 하나도 없이 나한테 온 거 아니었나?” 장미리의 표정이 굳었다. ‘그래, 그때 난 진짜 아무것도 없었지... 근데 그 일을 지금, 이 순간에 꺼낸다고?’그녀는 울분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래! 난 빈손으로 왔어! 하지만 소미는? 소미는 내 딸이야! 내가 낳은 내 딸이라고!” 지동성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냉정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소미만 아니었으면... 난 당신이랑 결혼하지 않았을 거야.” “하, 미쳤네 진짜...” 장미리는 이성을 잃고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날 그렇게 깔보며 살아온 거야?!” 지동성은 귀찮다는 듯 팔을 뿌리치며 말했다. “됐고, 그만 좀 해. 이 나이에 이런 말싸움은 하고 싶지도 않거든.” 그는 몸을 돌려 자리를 뜨려 했다. “가긴 어딜 가!” 장미리는 그를 붙잡았다.“설마... 시연이한테 돈이랑 집을 준 거야? 진짜냐고! 나 몰래 챙겨준 거 맞지?” 지동성의 눈썹이 깊게 찌푸려졌다. “몰래라니? 시연이는 내 딸이고, 우주는 내 아들이야. 내가 내 자식한테 주겠다는데, 누구 눈치를 봐?!” “뭐... 라고...?” 장미리는 무너지는 듯 허탈하게 웃었다. ‘소미 말이 맞았어. 이 인간, 진짜로 지시연한테 다 퍼줬어.’“그 돈은 내 거야! 소미의 미래를 위해 모은 거라고!!” 장미리는 소리쳤다. “당장 가서 시연이한테 준 거 다 받아와! 그 집도, 그 돈도! 다 내놓
장소미가 납치 사건으로 인해 심각한 화상을 입은 이후, 유건과 시연 사이에도 보이지 않는 벽이 생겼다.‘이대로 끝낼 수는 없어.’‘누가 됐든, 반드시 뿌리까지 뽑아낼 거야.’유건의 눈빛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그의 싸늘한 기운에 방 안의 공기조차 무거워졌다.“네, 형님.”지한은 짧게, 그러나 단단한 어조로 대답했다.말보다 표정이 먼저 충성심을 증명했다....다음 날 아침. 시연이 다이닝 룸으로 내려갔을 때, 유건은 아직 나가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일어났어?” 유건은 조용히 시연의 손을 잡아 자리에 앉히며, 얼굴을 살폈다. “머리는 어때? 아직 아파?” 부드러운 목소리. 언뜻 보기엔, 누구보다 자상한 남편이었다. “이모님이 아침부터 생선 머리 탕을 끓여주셨어. 당신 어제 술을 조금 마셨잖아. 속 풀리게 한 그릇 먹어.” 이때 왕성애가 아침을 들고 들어왔다. “사모님, 도련님께서 오늘 아침에 직접 당부하셨어요. 어젯밤에 술을 드셨으니, 꼭 속 풀어드리라고요.” “감사합니다.” 시연은 조용히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하지만 그 말은 왕성애를 향한 것인지, 유건을 향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녀가 국을 한 숟갈 뜨는 사이, 유건은 조용히 상 위에 작은 상자를 꺼내 놓았다. “여보.” 그는 다정하게 불렀다. “선물이야.” 시연은 반응하지 않았다. 유건은 약간 찌푸린 얼굴로 말을 이었다. “입사 축하 선물이야. 시계야.” “필요 없어요.” 짧고 단호했다. 유건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아직도 어제 일 때문에 화난 거야?” “아니요.” 시연은 고개를 저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그 시계... 너무 비쌀 것 같아요. 난 이제 막 입사한 신입인데, 그런 건 나한테 어울리지 않아요.” 유건은 낮게 웃었다. “그게 문제였어?” 그는 상자를 열었다. 안에 들어있던 건, 고급스러운 여성용 파텍 필립 시계. 그가 평소에 차고 다니는 것과 비슷한 디자인이었
유건은 시연을 조심히 안아 차에 올랐다. 하지만 문턱을 넘는 순간, 그녀의 머리가 살짝 닿았다. “아야.” 시연이 눈을 뜨며 그를 째려봤다. “아프잖아.” 삐죽한 입매에 살짝 붉어진 눈꼬리. 투정 부리듯 말하는 그녀는, 말도 안 되게 귀여웠다. 요즘 내내 싸우기만 했고, 시연은 유건에게 제대로 된 눈빛 하나 준 적 없었다. 오늘, 만약 실수로 술을 마시지 않았다면, 그녀가 이렇게 말할 일도 없었을 터. 유건의 목젖이 뚜렷하게 움직였다. ‘미치겠네... 이럴 땐 정말, 참기 힘들다.’“여보, 그렇게 날 유혹하지 마.” “응?” 시연은 고개를 갸웃했다. “유혹 안 했는데? 난 유혹한 거 아닌데? 난 의사야. 후크 아냐.” “푸흡!!” 참으려 했지만,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 더는 참지 못한 유건이 여자의 턱을 살며시 잡고, 고개를 숙였다. 입술이 시연의 입술에 닿았다. 부드럽고, 깊고, 절제되지 않은 키스였다. “읏...!” 호흡이 가빠지자, 시연은 손으로 그의 가슴을 밀었다. “숨... 못 쉬겠어.” 유건은 여자의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아직도 키스하는 법 몰라?” 그 순간, 시연의 눈동자가 멈췄다. 그를 말없이 바라보는 눈빛에, 무언가 낯선 기운이 돌았다. “왜 그래? 어디 아파?” 유건이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고유건!!” 시연은 그의 옷깃을 잡았다. 조금 전까지 흐리던 눈빛이, 조금은 맑아진 듯했다. “괜찮아.” 그 말에 유건은 오히려 더 당황했다. 시연은 너무 조용했고, 너무 순했고, 평소 같지 않았다. 유건은 다가가 뺨에 입을 맞췄다. 시연은 피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눈은 텅 빈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눈가에서, 조용히 눈물이 떨어졌다. 유건의 손등 위로, 작고 뜨거운 물방울이 스며들었다. “여보...?” 그가 급히 얼굴을 들었다. 시연의 두 눈엔 이미 눈물이 가득 차 있었다.
“너희...!!!” 하은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표정은 굳어 있었고, 눈빛에는 분노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더는 말 안 할게. 하지만 너희, 앞으로는 입 단속 잘 하는 게 좋을 거야. 다음에 또 이런 말 들리면...” 그녀는 고개를 살짝 들어, 냉정하게 말했다. “고 대표님께 바로 말씀드릴 거야. 고 대표님이 시연이를 얼마나 아끼는지 알지? 과연, 그분이 가만히 계실까?” 그 말에 간호사 두 사람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병원 안에서 이미 떠도는 소문... 조한나가 갑작스레 ‘사라진’ 이유가, 바로 시연과 관련 있다는 얘기. “다, 다시는 안 그럴게. 제발 말하지 마...” “맞아. 우리가 잘못했어. 잠시 정신이 나갔었나 봐.” “흥.” 하은은 그들이 뉘우치는 척하는 얼굴조차 보기 싫었다. “그럼 얼른 꺼져.” “알았어. 가면 되잖아!” “미, 미안해...” 고개를 푹 숙인 채 돌아서는 두 사람, 그 순간, 정면에 서 있는 유건과 마주쳤다. 딱!싸늘한 눈빛, 입꼬리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고, 고 대표님...” 유건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 “이미 다 들었어. 다음엔 조한나보다 더한 꼴을 보게 될 거야.” 두 사람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역시... 조한나 이야기가 진짜였어...’“두 번 말하고 싶지 않으니까 당장 꺼져.” “죄, 죄송합니다!” 두 사람은 거의 울 듯한 얼굴로 도망치듯 자리를 떴고, 그제야 하은이 조심스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고 대표님... 아까는 시연이가 안에 있어서... 괜히 듣고 속상해할까 봐... 제가 맘대로 대표님 이름을 입에 올렸어요...” 유건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잘했어. 오히려 고마워.” 그는 처음으로, 하은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같은 학교 동기인 데다, 병원에서도 늘 같이 있다고 했지? 시연이... 내가 못 챙길 때가 많아. 앞으로도 이런 일 있으면, 부탁 좀 할게.” “아, 네... 그럼요! 저야
샤부샤부와 시연이 좋아하는 채소들까지. 유건은 직접 음식 코너를 몇 번이나 오가며 이것저것 챙겼다. 직원들이 다가와 도와드리겠다고 했지만, 그는 손사래를 쳤다. “괜찮아. 내 아내가 부탁한 거니까.” 남의 손을 빌릴 수 없었다.시연이 원한 것이니, 유건이 직접 해야만 했다. 가스 불을 켜고, 국물이 보글보글 끓기 시작하자, 유건은 채소며 고기며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넣기 시작했다. 시연은 두 눈을 반짝이며 그 과정을 지켜봤다. 입술이 살짝 벌어져, 침 삼키는 소리가 다 들릴 정도였다. ‘저 고기... 다 익은 거 같은데... 언제 주려나?’ ‘고기야 오래 익힐 필요 없지.’ 그 모습을 보고 유건은 웃음을 지으며, 익은 고기를 시연의 그릇에 덜어주었다. 그녀 취향에 맞춰 소스까지 만들어주고 나서야 말했다. “됐어. 이제 먹어봐.” 시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젓가락으로 고기를 집어 들었다. 볼이 빵빵하게 부풀 정도로 가득 넣고, 입을 오물거리며 행복하게 웃었다. “맛있어?” “응.” 시연은 또 고개를 끄덕이며, 국물을 가리켰다. “더.” “알겠어.” “그리고... 소고기 완자도!” “그래, 그것도.” 주변 동료들은 그 장면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다. 고 대표가 시연에게 이렇게 다정한 줄은 몰랐다. 아까 하은에게 냉정하게 굴던 모습과는 정반대였다. 하지만, 그런 평화로운 분위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먹다 말고, 시연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을 좌우로 흔들며, 균형을 제대로 잡지 못했다. “왜 일어나? 뭐 필요한 거 있어?” 유건이 급히 그녀를 부축했다. “화장실.” 시연은 천진하게 웃으며 유건의 손을 뿌리려 했다. ‘이런 상태로 혼자 가게 둘 수는 없지.’ 유건은 그녀를 반쯤 안다시피 하며 일어났다. “같이 가자.” “고 대표님.” 목소리에 돌아보니, 하은이었다. “제가 같이 갈게요. 화장실 안쪽은 남자분이 들어가기 힘들 테
하은이 새우 완자를 시연의 그릇에 조심스레 올려놓았다. 시연은 한 눈으로 슬쩍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싫어!” 하은은 순간 멍해졌다. 분명, 평소의 시연이라면 절대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 텐데. “시연아...?”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불러보자, 시연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하은을 바라봤다. 멍한 눈, 어딘가 초점 없는 시선. “왜?” “너, 설마 취한 거야?” “응?” 시연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해맑게 웃었다. “아니야, 나 멀쩡해!” ‘뭐야, 딱 취한 모습이잖아.’ 하은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입술을 꼭 다물었다.떨리는 손끝이 컵에 닿아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시연아, 어디 불편한 데는 없어?” “없어. 헤헤.” “배는?” 하은은 조심스레 시연의 배를 바라보았다. ‘제발 아무 일도 없어야 해... 시연이 배에는 고씨 가문의 후계자가 계시니까...’“배 아프진 않아?” “배?” 시연은 곧 두 손을 배 위에 얹고, 아주 조심스럽게 쓰다듬기 시작했다. 입술 끝엔 미소까지 걸렸다. “여기 내 아기가 있어.” 서로의 눈을 마주친 하은과 현진이 동시에 얼어붙었다. ‘이거, 어떻게 해야 해...?’ 그때, 룸 안이 웅성거리며 갑자기 술렁이기 시작했다. “고 대표님!” “고 대표님, 어서 오세요!” 양석현 교수가 일어서며 반갑게 인사했다. 유건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 자연스럽게 시연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오늘은 아내랑 함께하는 자리이니, 꼭 오려고 했습니다. 양 교수님,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오신 것만으로도 감사하죠. 시연이는 저기 있습니다.” 유건은 가볍게 인사만 나눈 뒤, 바로 시연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은과 현진은 눈치 빠르게 자리를 비켜 주었다. 하지만 시연은 그가 다가온 줄도 몰랐다. 그녀는 그저 자기 앞의 접시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표정은 어딘가 멍하고, 또 순진했다. “무슨 일 있어?” 유건의 목소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시연은 물러설 수 없었다. 게다가, 우주를 생각하면 유건의 의중을 거스를 수도 없었다. 그녀는 얇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교수님, 그럼 어서 다 함께 내려가시죠.” “그... 그래.” “좋다!” “얼른 가자!” “나 진짜 배고파 죽겠어.” “나도. 저녁 먹으려고 하루 종일 굶었단 말이야.” “...”사람들은 웅성거리며 아까 있었던 일은 일부러 언급하지 않았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건물 앞에는 차가 여섯 대쯤 대기 중이었고, 일행은 그 차들을 나눠 타고 ‘셀레스트’로 향했다. ...일반 뷔페의 북적임과는 달리, ‘셀레스트’는 놀라울 만큼 조용했다. 손님들은 각자 음식을 고른 후, 식사 중에도 조용히 대화를 나눴으니 말이다. 지한이 예약해 둔 자리는 창가 쪽 세 테이블을 붙여놓은 넓은 자리였다. 음식은 신선한 재료로 구성되어 있었고, 해산물, 육류, 디저트... 중식, 양식 가릴 것 없이 다 준비되어 있었다. 깔끔한 플레이팅은 보기만 해도 식욕을 자극했다. “와... 이래서 비싼 거구나.” 주하은이 시연과 함께 음식 코너를 돌며 감탄했다. “여기 음료는 다 즉석에서 만들어주네.” 그리고 시연을 슬쩍 보며 웃는다. “고 대표님, 여전히 너한테는 돈 아끼는 법이 없네?” ‘돈을 아끼지 않는다...’시연은 대답 없이 웃기만 했다.예전에 시연은, 바로 그 ‘아낌없이 주는’ 모습에 마음을 빼앗겼다.그런데 지금은 그 모습이 오히려 그녀를 더 미치게 했다.자리로 돌아오자, 양석현이 컵을 들었다. “오늘은 지 선생이 쏜다니까... 우리 과 식구가 된 걸 축하하면서, 다 같이 건배하자! 지 선생, 고마워!” “지 선생, 축하해!” “지 선생님, 환영합니다!” “건배!” “...”시연도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컵을 들었다. 그 컵은 아까 하은이 가져다준 거였다. 시연은 살짝 긴장하며 입을 뗐다. “선생님들, 저는 이제
사무실은 완전히 조용해졌다. 모두가 두 여자의 상황을 지켜보며,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시연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숨고 싶을 정도의 굴욕감. ‘왜... 왜 내가 이런 꼴을 당해야 해?’이를 악물고 소미의 팔을 잡았다.“고유건 씨는 지금 여기 없어. 그 사람을 찾고 싶으면, 직접 전화해.”손에 힘을 주며 억지로 끌어내려 했다.“싫어! 난 안 가!” 소미는 저항하며 울부짖었다. “유건 씨! 난 유건 씨 봐야 해!!”“없다니까!!!”시연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소미는 갑자기 손을 뿌리치고 앞으로 뛰어갔다.“유건 씨!!!”복도 끝. 병동 입구.막 들어서던 유건이 놀란 얼굴로 멈춰 섰다. 소미의 등장에 당황한 그는, 곧장 시연을 찾았다.시연은 잠깐 멍하니 있다가, 고개를 돌려버렸다.‘이 상황, 최악이야.’유건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모두의 시선은 전부 두 사람에게 쏠려 있었다. 숨죽인 채, 입도 뻥끗하지 못한 채.사람 중 몇은 이미 눈치를 채고 있었다. “진짜 소문대로였네. 고유건 대표님과 장소미 씨...”“둘 사이, 예전부터 돌던 스캔들...”“끝나지 않은 거였어... 지금도...”“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는 고 대표님의 아내인... 지 선생님도 있는데...?”“...”소미는 유건의 팔에 달라붙었다. 그리고 남자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 엉엉 울기 시작했다.시연은 계속 거기에 있었다. 게다가 모두가 그 장면을 보는데도, 유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유건은 시연에게 말하고 싶고, 설명하고 싶었다.“여보...” 그는 한 발 내디뎠지만, 소미가 남자의 팔을 붙잡고 있었다.“유건 씨, 왜 이틀째 병실에 안 온 거예요? 나 치료도 안 받고 있었어요.”“소미 씨.” 유건은 난처하게 미간을 찌푸렸다.“요즘 일이 많았어. 직접 가지는 못했지만, 소미 씨 상태는 계속 보고 있었어.”“정말요?” 소미는 울다가 입술을 삐죽였다.“그럼, 지금은 시간 있잖아요? 저랑 같이 있어 줄래요?
외과 사무실을 나와 병원 건물을 벗어날 때까지, 시연의 얼굴엔 내내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여보.” 유건이 그녀의 손목을 잡아세웠다. “왜 그렇게 표정이 안 좋아?”물었으니 대답해야 할 터였다. 시연은 돌아보며 담담하게 말했다.“식사 자리는 내가 마련했어야 하는 건데, 왜 아무 상의도 없이 당신이 정했어요?”“어...?” 유건은 억울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내가 예약한 데가 마음에 안들어? 당신 셀레스트 음식 좋아하잖아.”“좋아하긴 하는데...” 시연의 눈썹이 확 짧아졌다. “당신, 우리 과에 몇 명이나 있는 줄 알아요? 의사 간호사 포함하면 30명은 넘는다고요!”“그래서?” 유건은 고개를 갸웃했다.‘‘그래서’라니...’ 시연은 숨을 꾹 참았다.‘대충 계산해도 거의 몇천만 원이야. 그걸 아무 말 없이 덜컥?’“비싸잖아요, 당신 정말 몰라서 그래요?”“그게 비싸?” 유건은 미간을 찌푸렸고, 진심으로 의아한 듯했다.“우리가 부담 못 할 정도는 아니잖아.”‘그게 문제가 아니라고.’ 시연은 말문이 막혔다.만약 자신들이 ‘정상적인' 부부였다면, 그녀도 이걸 기분 좋게 받아들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당신한테 빚지고 싶지 않다고. 그게 싫은 거야.’그녀가 진심으로 표정을 굳히자, 유건은 눈치 빠르게 태도를 바꿨다.“알았어, 이번엔 내가 잘못했어. 다음부턴 꼭 당신한테 먼저 물어볼게. 미안해, 응?”‘다음? 우리 사이에 다음이 있긴 한 걸까?’시연은 속으로 냉소적인 웃음을 흘렸지만, 입 밖으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식사 자리는 돌아오는 주말로 정해졌다. 당일, 당직 간호사 두 명을 제외한 나머지 직원들은 전원 참석 예정.근무 시간이 끝나기 전부터 사무실 분위기는 들떠 있었다.하지만 시연만큼은 평소처럼 진료차트를 정리하며 조용히 움직이고 있었다.‘그래도... 다들 내가 임신 중인 걸 챙겨주는 덕에, 차트 정리는 내 몫이 된 거야.’ “지 선생, 그만하고 옷 갈아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