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유리는 소파에 정자세로 누워있었다. 거실에 켜져 있는 환한 불빛을 쳐다보고 있던 성유리는 눈이 부셔 저도 모르게 눈물이 고였고 두 주먹을 꼭 쥐었다. 이렇게 했는데도 방법이 없자 결국 성유리는 아래로 손을 내려 박한빈의 머리를 감쌌다. 이성을 잃은 두 사람이지만 성유리는 그래도 중요한 일은 잊어버리지 않았다. 박한빈이 그녀를 번쩍 안아 올릴 때, 성유리는 정신을 다잡고 입을 열었다. “저를 어떻게 도와주실 건데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 박한빈은 뚜벅뚜벅 어디론가 걸어가기만 했다. 성유리는 마음이 조급해져 박한빈의 옷깃을 꽉 잡으며 다시 물었다. “박한빈 씨, 지금 혹시 저를 속인 거예요?” 박한빈은 성유리를 침대 위로 툭 내려놓더니 그녀의 위에 올라타며 대답했다. “유리야, 너무 조급해하는 거 아니야?” “말했잖아. 내가 제안한 조건을 허락하면 들어준다고. 근데 지금 아무것도 안 했는데 벌써 이러시면 어떡하나?” 박한빈은 성유리에게 경고를 하듯 말했지만 성유리는 그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으며 되물었다. “만약 조금 있다가 모르는척 하고 저를 무시하면 저는 어떡하는데요? 그때는 어떻게 되는 거죠?” “그럼 그냥 네 운이 안 좋다고 생각해야지.” “박...” 성유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박한빈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에 진한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 방금 전 일이 떠오른 성유리는 박한빈과 이런 행동을 하기가 싫어 거부하려 했지만 그는 성유리의 귓가에 이런 말을 했다. “이젠 좀 알겠어? 아직도 맛을 못 느꼈나? 달콤하지 않아?” 그의 말에 성유리는 주저하지도 않고 박한빈의 입술을 막아버렸다. 이빨을 꽉 깨물고 박한빈을 째려보는 성유지만 빨갛게 달아오른 두 볼과 귀는 전혀 설득력이 없었다. 박한빈은 아무런 말도 없이 성유리의 손을 살짝 잡더니 그녀 손에 살짝 뽀뽀했다. 부드럽게 뽀뽀를 하는 박한빈이지만 다른 행동들은 완전 달랐다. 성유리는 원래 발뒤꿈치에서만 고통이 느껴졌지만 2시간 뒤, 무릎도 새빨갛게 변해 샤워를 할
조영준의 태도는 어젯밤보다 확연히 좋아졌다. 몇 개의 문제만 말을 하던 조영준은 성유리에게 일주일 내로 이에 맞는 대답을 해주겠다며 약속했다. 업계에서 이 정도의 속도는 이미 아주 빠르다고 평가되었고 성유리는 박한빈이 자기 몰래 무슨 짓을 벌였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조영준과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티를 내지 않았고 그저 옅은 미소만 지으며 조영준에게 나중에 밥이라도 사겠다고 말했다. “허허. 알겠습니다.” 조영준 또한 성유리의 말에 시원하게 동의했고 그곳을 빠져나올 때, 정민재는 연신 감탄을 하며 성유리에게 말했다. “은행장님 생각보다 사람이 좋으십니다. 게다가 하신 말씀 다 예의상 하는 말이 아닌 것 같던데... 은행장님이시면 이런 프로젝트 하나는 손가락만 까딱해도 되지 않습니까?” “그래도 과정은 건너뛰면 안 되잖아요.” 성유리는 핸드폰으로 새로 뜬 뉴스를 보며 정민재의 말에 아무 생각 없이 대답했고 차 안은 순식간에 정적이 흘렀다. 이상한 분위기에 성유리가 고개를 들자 정민재가 아까부터 자신을 의미심장하게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성 대표님, 왜 지금 이미 승패를 아시는 사람처럼 말씀하십니까? 전에는 분명 도대체 저 큰 산을 어떻게 넘어야 하냐고 막 힘들어하셨는데?” “하룻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뭐 하늘에서 신선이라도 나타나 저희를 도와줬나요?” 성유리는 정민재가 호기심이 가득한 사람일 뿐 악의는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말에 대답해 주기가 싫었고 조용히 운전해라는 말을 하려고 했다. 그 순간, 정민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신선인지 뭔지는 몰라도 저희한테는 정말 좋은 일입니다. 은행장님은 절대로 이렇게 쉬운 분이 아니라고 들었는데... 사람들 몰래 뒤에서 어떤 짓을 벌이고 다니는지 소문이 무성합니다.” 정민재의 말에 성유리는 입을 꾹 닫아버렸다. 한참 뒤, 성유리는 정민재를 똑바로 주시하며 물었다. “말해 봐요. 박한빈 씨가 뭐로 정민재 씨를 꼬드겼는지.” “그럴 리가요!” 정
성유리가 말한 대로 조영준의 심사는 사실 그냥 과정일 뿐이었다. 5일이 지나기도 전, 성유리는 원했던 자금과 프로젝트를 바로 손에 넣었다. 하지만 자금이 떨어지는 일은 그저 첫 번째로 내딛는 발걸음과도 같기에 아무런 실수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 성유리는 직접 공사장으로 향했다. 연성은 이미 초여름으로 진입했기에 안전모를 하고 있는 성유리는 남들처럼 양산을 쓰지 않고 있었고 그로 인해 목과 팔, 얼굴은 강한 햇빛에 붉어졌다. 집에 돌아가는 길, 성유리는 약국에 들러 피부에 바를 약을 샀다. 도착하자마자 약을 꺼내 직접 바르려던 그때, 박한빈이 마침 집안으로 들어섰다. 오늘 밤 저녁 약속이 있던 박한빈이지만 이리 이른 시간에 집에 돌아왔으니 성유리는 그가 먼저 도망쳤다고 생각했다. 박한빈의 손에는 성유리를 위해 포장해 온 음식과 작은 케이크가 들려있었고 그녀는 집안에 들어서는 그를 가만히 쳐다만 봤다. “팔은 왜 그래?” 박한빈은 성유리의 온몸을 쓱 훑어보며 물었다. “별거 아니에요. 그냥 좀 타서...” 성유리는 덤덤한 말투로 대답을 해주더니 손에 닿지 않는 목 부분에 약을 바를 수 없어 자연스럽게 박한빈에게 내밀었다. 박한빈은 성유리가 내민 약을 얼른 건네받았고 그녀의 피부를 샅샅이 살피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병원 안 가 봐도 돼?” “괜찮아요. 약사한테 물어봤는데 이 약만 바르면 된다고 하더라고요.” 성유리의 말에도 박한빈은 그녀의 피부만 유심히 쳐다보고 있었고 기다리던 그녀는 살짝 짜증이 나 혼자 약을 바르려고 했다. 하지만 박한빈은 성유리의 생각을 읽기라도 하듯 이미 약 뚜껑을 열고 있었다. 차가운 고체의 약이 성유리의 피부에 닿자 그녀는 화끈거리던 곳이 진정이 되는 느낌이 들었다. 박한빈은 허리를 숙이고는 성유리의 약이 잘 녹아들어 가도록 입으로 바람을 살짝 불었고 성유리는 간질거려 온몸에 닭살이 돋았다. 저도 모르게 자꾸만 몸을 움찔거리며 피하려고 하는 성유리의 어깨를 박한빈은 꽉 잡았고 참다못한 그녀가 먼저
박한빈은 성유리의 탄 피부만 걱정하면서 감정을 추슬렀고 하던 행동을 멈추려 할 때, 성유리가 그를 꼭 잡더니 말을 걸었다. “박한빈 씨.” 성유리는 박한빈의 귓가에 가까이 다가가 그의 이름을 조용히 속삭였다. 그녀의 목소리에 박한빈은 온몸에 털이 바짝 서는 느낌이 들어 성유리를 가만히 쳐다만 봤다. 성유리는 박한빈에게 웃어 보였고 그녀의 손에는 그가 벗어 던진 넥타이가 들려 있었다. 부드러운 넥타이가 몸에 닿자 성유리는 더 가까이 다가오더니 박한빈의 입술에 가벼운 뽀뽀를 했다. 이성의 끈을 아슬아슬하게 잡고 있던 박한빈은 성유리의 행동에 “끈”을 놓아버렸고 그녀의 뒤통수를 잡고는 미친 듯이 키스하기 시작했다. 지금 이 순간, 두 사람은 마치 해안가에 떠밀려온 물고기처럼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지만 서로를 탐냈다. 목숨을 잃고 자기 생이 마감된대도 두 사람은 서로를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끝이 날 무렵, 성유리는 너무 힘이 들어 목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두 사람 다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고 성유리는 아까 바른 약도 소용이 없어졌겠다고 생각했다. 박한빈이 주방에서 컵에 물을 따라 성유리에게 건네주자 그녀는 단숨에 벌컥벌컥 마셔버렸다. “내가 너 안고 욕실까지 갈까? 씻자.” 욕망을 해결한 남자의 목소리는 다정하기 그지없었다. “씻고 나서 다시 약 발라줄게.” “네.” 성유리는 힘에 부쳐 짧게 대답했고 박한빈은 묵묵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에 이상함을 느낀 성유리가 미간을 찌푸리자 박한빈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나를 뭐라고 좀 불러줘야 되지 않나?” 성유리는 그제야 방금 전 침대에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 남자 역시 이런 건 절대 안 까먹네.’ 밖에서 아무리 도도하고 냉정하게 대한다 해도 옷을 벗으면 누구든 다 똑같은 사람이 되기 마련이다. 박한빈은 성유리가 자기 말에 반박하며 절대 뜻대로 안 해주겠다고 생각했지만 성유리는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여보.” 오직 두 글자일 뿐이지만 박한빈은 성유리의
박한빈은 성유리의 말을 믿기 힘들었다. 필경 분명 30분 전까지만 해도 자신을 “여보”라고 부르며 다정하게 대하던 성유리가 이리도 평온한 말투로 떠나라고 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박한빈은 한참 동안 넋이 나간 듯 멍해 있다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물었다. “지금 나랑 장난하는 거지? 유리 네가...” “조영준 씨랑 무슨 거래를 하신 거예요?” 박한빈은 새우를 까려고 꼈던 장갑도 벗어던지고 성유리를 안으려 했지만 그녀는 재빨리 피해버리고는 되물었다. 진지한 성유리의 표정을 본 박한빈은 쭉 뻗었던 팔을 어색하게 내렸다. 성유리가 도대체 무슨 의도로 이런 질문을 하는지 박한빈은 몰랐지만 그래도 결국 대답해 줬다. “해외 재산에 문제가 좀 생겼다고 해서 내가 좀 도와줬어.” “역시 이럴 줄 알았어요.” 성유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박한빈은 성유리의 행동에 의아함을 느껴 따지듯 물었다. “아니요. 그래도 덕분에 저희가 하는 프로젝트가 원활하게 진행되었어요. 돈에 관한 문제도 오늘 정해졌고요. 만약 박 대표님이 아니었다면 힘들었을 텐데.” 박한빈은 성유리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어딘가 이상했다. ‘원활해? 정해졌다고? 그런데 왜...’ 그의 의아함이 성유리에게도 전해졌는지 이내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박한빈 씨는 이제 저한테 아무런 쓸모도 없어졌죠.” 성유리의 말에 박한빈의 안색이 서서히 어두워져갔다. “뭐라고?” “제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시는 거예요? 저는 충분히 잘 말했는데?” 박한빈의 물음에 성유리는 아주 엄숙한 표정으로 계속 말했다. “제일 중요한 원인도 하나 있어요, 저 다음 달에 정우랑 결혼하기로 했어요.” “저희가 그저 비즈니스 사이라면 상관없겠지만 결혼을 하기로 했으니 더 큰 이익을 위해 움직여야죠. 박한빈 씨랑 계속 이런 사이로 지내면 서로 좋을 점이 없잖아요. 그래서...” 성유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박한빈의 그녀의 손목을 강하게 잡았다.
멈췄더라면 그 당시에 박한빈은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라도 지킬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박한빈은 자기 자신을 컨트롤 할 수가 없었다. 성유리는 그런 박한빈을 조용히 쳐다만 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며칠 전에 이미 정한 거예요. 결혼하기로.” “아까는... 박 대표님도 들어보셨을 거예요. 이별을 위한 마지막 잠자리랄까? 게다가 최근에 박 대표님 덕분에 도움받은 일도 참 많았잖아요. 그래서 저도 그 도움에 대한 보답을 해주고 싶었던 것뿐이에요. 박 대표님께서 기분이라도 좋아지시라고.” 성유리는 아주 진지하게 말했지만 박한빈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래서 방금 그 행동들은 다 나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한 거라고?” “네. 아니면 뭐겠어요?” 성유리의 손목을 잡고 있던 박한빈은 그녀를 스르르 놓아주었다. 마치 진이 다 빠진 듯 멍한 표정으로 성유리만 쳐다보는 박한빈을 본 그녀는 그가 이제 이 사실을 받아들였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내, 박한빈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난 모르겠어.” “뭐를요?” “연정우 씨가 너를 도울 수는 있어. 근데 왜... 왜 네가 내가 아닌 그 사람을 선택하는지 모르겠다고.” 박한빈은 스스로 말하면서도 지금 자기가 미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더 이상 감정을 조절할 수가 없었고 자존심 따위 버린 지 오래였다. 그러나 자존심마저 버린 박한빈의 모습에도 성유리는 흔들리지 않았고 오히려 살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유는 딱히 없어요. 그냥 단순하게 정우를 선택하고 싶었을 뿐이죠.” 박한빈은 성유리의 눈을 묵묵히 바라보다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목젖마저 떨리고 있었고 침을 끊임없이 삼키고 있었다. 끓어오르는 분노와 질투심을 삼키고 있던 박한빈은 위에도 강한 고통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결국 박한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고개만 끄덕이더니 방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곧 성유리는 박한빈이 들고 왔던 캐리어 바퀴 소리를 들었지만 그를 상관하지도 않고 밥만 계속 먹었다. 박한빈은 아
“무슨 말이야?” 낮은 소리로 묻는 박한빈의 말에 성유리는 먹던 케이크를 계속 입에 넣으며 되물었다. “지화 그룹에 생긴 문제들 다 해결하신 거죠?” 박한빈은 이 상황에 성유리가 왜 이런 물음을 묻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지 머리를 굴리던 박한빈에게 성유리가 다시 물었다. “작년에 지화 그룹에 생겼던 상업 위기 말이에요. 박한빈 씨가 연막작전을 펼친 거 맞죠?” “전에 저한테 말씀하셨잖아요. 지화 그룹 설립한 지도 이젠 몇십 년이 지났으니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다고. 좋은 점은 온 나라가 다 아는 대기업이라 유명해서 든든한 배경이 생겼다고요.” “나쁜 점은 몇십 년이 흘러 많은 직원들의 거의 다 열정이 사라진 채로 출근하니까 회사에 도움이 덜 된다고 하셨잖아요. 특히는 투자자 쪽에서 보낸 친척이나 친구들이요. 근데 그 사람들을 자른다 해도 뿌리까지 뽑기는 힘드니까 가만히 놔둔다면서요? 그분들은 박한빈 씨 아버지를 잘 따라는 투자자들이고 심지어는 할아버지와도 아는 사이라 손을 댄다면 명성에 큰 영향을 줄 거라고 했죠?” “그래서 사실 박한빈 씨는 항상 기회가 차려지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씀하셨죠.” “다 같은 배를 타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작년에 큰 일이 터졌을 때, 마음대로 하게 놔두고 혼란스러운 틈을 타 다른 사람들이 배에서 뛰어내리는 것을 주저하는 순간에 박한빈 씨가 뒤에서 뻥 차버리셨죠?” “배지수 씨에 관해서는 뭐 말할 것도 없죠. 그 사람들도 바보는 아닐 거잖아요? 그래서 전에 정신을 차리고 돌아오려고 했을 때도 박한빈 씨는 일말의 기회도 주지 않았어요. 그 사람들이 온갖 방법을 동원해 박한빈 씨를 시험하려 하니까 배지수라는 방패를 앞에 세운 거고. 제 말이 맞죠?” 느린 속도로 말을 이어가는 성유리지만 매 한 마디마다 발음이 정확했고 박한빈의 귀에 또박또박 들렸다. 성유리가 말한 사실들은 거의 다 정민재가 알려준 일들이지만 박한빈이 직접 말해준 것도 몇 개 포함돼 있었다. 널린 퍼
박한빈은 진심으로 성유리를 좋아했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그녀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 그렇게 다급해하며 해결해 주지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그 감정은 또 어떤 가치가 있겠는가? 박한빈은 늘 성유리를 주저하지도 않고 자신이 이용할 패로 일삼았고 얻을 이익만 먼저 생각했다. 이제 와서 잘해주면서 자기가 저질렀던 잘못을 뉘우친다고 해도 이미 때는 늦어버렸다. 필경 지화 그룹의 일이 다 해결이 됐으니 박한빈은 얻으려던 물건들을 다 손에 넣었고 이제야 뒤돌아 자신이 버렸던 “패”를 다시 거두려 했기 때문이다. 설령 지금 다시 거둔다 하더라도 그 “패”는 한번 버림받았었기 때문에 예전처럼 돌아가지는 못할 것이다. 박한빈도 그저 그런 상인이자 이익을 위해 사는 사람이기 때문에 성유리도 그를 많이 탓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성유리는 박한빈의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순간에도 다른 사람들의 입에 오르락내리락하는 박한빈이 얼마나 힘들게 시간을 보냈는지 다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성유리는 이익을 먼저 챙기려 하는 박한빈이 이상하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박한빈이 지금처럼 자신에게 보이는 다정한 모습과 사랑을 위해 뭐든 해준다는 말들이 너무 싫었다. 마치 너무 사랑해 성유리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을 것 같은 박한빈의 태도도 그녀는 탐탁지 않았다. 주위 사람들은 다 성유리를 꾸짖으며 박한빈이 저렇게 열심히 하는데 이제 그만 그의 마음을 받아주라고 타일렀다. 그렇다면 성유리는? 성유리도 박한빈 못지않은 노력을 했었다. 주위 사람들은 다 모르겠지만 전에 성유리는 말로 표현할 수도 없을 만큼 많은 노력과 용기를 내 박한빈의 옆에 다가갔다. 하지만 박한빈이 성유리를 그나마 잘 대해주니 사람들은 성유리가 타고난 복을 가진 여자라고 평가할 뿐 그녀의 노력을 봐 주지 않았다. 그래서 성유리는 늘 혼자 속으로만 끙끙 앓았었다. 성유리의 말이 끝난 지 한참이 지나도 박한빈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내 말이 다 맞나 보네.’ 그녀는 손에 들린 포크를
“지금 이런 행동을 하는 건 단지 분풀이일 뿐일 거야.” 성유리가 사하나의 말을 뚝 끊어버리며 말했다. “나에게서 받은 좌절과 실망감을 이제 와서 나에게 되갚아주고 싶은 거겠지.” “하지만 제가 보기엔...” “만약 그 사람이 정말로 나를 아직도 좋아한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아이의 일을 가지고 나를 협박하진 않았을 거야.” 성유리가 단호하게 말을 이어갔다. “내가 지금 그의 말에 따르고 있는 것도 하늘이가 수술받을 기회를 얻기 위해서야. 이런 관계가 무슨 의미가 있겠어?” “그러니 사하나, 나와 그 사람은 정말로 끝난 사이야.” ... 어느새 밤이 다시 찾아왔다.솔직히 말해서 성유리는 이 시간이 가장 두려웠다. 휴대폰을 계속 들여다보면서 박한빈에게서 어떤 메시지가 올까 걱정했고 동시에 아무 메시지도 오지 않을까 봐 불안했다. 어쨌든 박한빈은 아직까지 수술 동의서에 서명을 하지 않은 상태였으니까. 하지만 그날 밤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음 날, 성유리는 왜 박한빈이 전날 자신에게 연락하지 않았는지를 깨달았다. 뉴스에서는 전날 밤 박한빈이 어떤 연회에 참석한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사진 속 박한빈의 옆에는 젊은 여자가 서 있었다. 화장이 조금 달라졌지만 성유리는 한눈에 그녀를 알아볼 수 있었다. 바로 얼마 전에 그와 함께 마트에 갔던 여자라는 사실을 말이다. 성유리에게 있어 함께 마트로 향하는 일은 꽤 친밀한 행위로 느껴졌다. 둘이 함께 살지 않는다면 마트에서 함께 필요한 물건을 고르며 자신들만의 공간을 꾸민다는 일은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성유리와 박한빈 사이에서는 단 한 번도 없었다. 박한빈은 항상 바빴다. 그의 옷은 계절마다 고급 맞춤 팀에서 직접 저택으로 보내졌고 생활용품 같은 사소한 물건에 시간을 쓰는 일을 가장 싫어했다. 하지만 결국 시간의 낭비라는 것도 박한빈의 생각에 따라 달라지는 일이었다. 어쩌면 어떤 사람과 함께라면 무엇을 하든 시간 낭비라고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을 것
“유리 언니? 성유리 씨!” 사하나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성유리는 비로소 정신을 차리더니 멍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 있어요?” 사하나가 잔뜩 찡그린 얼굴을 하며 물었다. “정신이 어디 외딴곳으로 나가 있는 것 같아요.” “나... 괜찮아.” “그런데 다크서클이 왜 이렇게 심해요? 어제는 집에 가서 푹 쉬겠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오히려 병원에서 밤을 새웠을 때보다 더 안 좋아 보이는데?” “그냥... 어젯밤에 잘 못 잤어.” 성유리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하늘이를 못 봐서 걱정돼서 그런가 봐.” “뭐가 걱정이세요? 여기 이렇게 의사랑 간호사가 많은데. 게다가 의사 선생님도 말했잖아요. 이식 수술만 잘되면 하늘이는 곧 완치돼서 퇴원할 거라고.” 사하나는 갑자기 뭔가가 생각난 듯 물었다. “그나저나 박한빈 씨는 언제 수술 동의서에 서명하러 오는데요? 그 말은 날카로운 화살이 되어 성유리의 가슴을 아프게 찔렀다. 그리고 자신의 말에 표정이 순식간에 변하는 성유리의 모습을 사하나가 놓칠 리 없었다. “왜 그래요? 설마... 박한빈 씨가 마음을 바꾼 건 아니죠?” “아니야.” “근데 이상하잖아요. 어제도 병원에 안 왔고 오늘도 안 왔어요. 이게 뭘 의미하는 건데요? 검사가 끝난 걸 모를 리 없잖아요. 그럼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거죠? 일부러 잘난 척하려고 그러는 건가? 언니한테 직접 와서 부탁하게 만들려고?” 성유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하나는 끌어 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한 듯 언성을 높이며 계속 말했다. “미쳤나 봐요! 하늘이가 자기 친자식인데! 언니가 뭘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뻔히 알면서도 이렇게 대한다고요? 이건 완전 고의적인데?” “도대체 뭐 하자는 거예요? 언니가 무릎 꿇고 빌기라도 바라는 건가요? 아님 자기 앞에서 사죄하면서 참회하라고? 정말...” 사하나의 말이 끝나기 전에 성유리가 그녀를 진정시키듯 입을 뗐다. “진정해.” 사하나와는 달리 성유리는 오히려 차분한
박한빈은 언제나 어딜 가도 주목받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성유리는 잘 알고 있다. 예전에도, 그리고 얼마 전에도 수많은 여자들이 그의 곁에 머물렀고 심지어 종래로 마트에 발을 들이지 않던 박한빈이 다른 여자와 함께 다니는 모습까지 보았었다. 박한빈이 원하기만 하면 그와 함께 침대에 올라가려는 여자들은 줄을 서 있을 것이다. 늘 인기가 많은 박한빈에게는 성유리를 제외하고도 다른 선택지가 많다. 그리고 자신은 그 많은 선택지 중에서 제일 좋은 선택이 될 리가 없었다. 예전에도 아니었으니 지금은 더더욱 아닐 것이 뻔했다. 그 순간, 박한빈의 몸이 굳어지더니 시선이 성유리의 흉터에 머물렀다. 성유리는 박한빈의 시선을 또렷이 느낄 수 있었고 무슨 원인에서인지 갑자기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입꼬리를 약간 올려 미소를 짓던 성유리가 먼저 말했다. “그래서 박한빈 씨는 계속하실 건가요? 확실하세요?” 성유리의 말이 끝나자 박한빈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깊고 어두워 성유리는 그의 감정을 읽을 수 없었다. 그녀가 뭔가를 더 말하려는 찰나, 그는 고개를 숙였고 이내 박한빈의 입술이 그녀의 흉터에 닿았다. 부드럽고 섬세한 감촉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성유리는 안색이 잔뜩 어두워지며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박한빈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를 단단히 눌러 제압했다. “당신...” 성유리는 뭔가 말하려 애썼지만 박한빈의 입술이 다시 그녀의 입술을 덮쳐 하려던 말을 막아버렸다. 이런 감정이 마지막으로 언제였는지 그녀는 이미 잊고 있었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고 통제할 수 없는 순간이었다. 사실 성유리는 오늘 박한빈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오늘 밤을 함께 보내면 내일 수술을 받아들일 것인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처음부터 말을 꺼내지 않은 이유는 박한빈이 끝까지 자신과 사랑을 나눌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유리가 알던 박한빈은 늘 완벽함을 추구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이 흉터를 보고도 아무렇지 않을 리가 없었다. 아니,
금세 담배 한 대를 다 피운 박한빈은 깊게 한숨을 내쉰 뒤, 다시 두 번째 담배에 불을 붙였다. 하지만 담배를 피우면 피울수록 박한빈의 기분은 더욱더 뒤숭숭해졌다. 욕실 안에서 끝도 없이 씻고 있는 성유리의 모습을 지켜보던 그는 결국 담배를 꺼버리고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박한빈이 손가락으로 문을 살짝 두드리자 또랑또랑한 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5분 줄 테니까 나와.” 말을 마친 박한빈은 바로 옆에 있는 침대에 앉더니 시선을 욕실 문에 고정했다. 그러자 안에서 들리던 물소리가 마침내 멈췄다. 성유리는 마치 안에서 휴대폰으로 시간을 재고 있었던 것처럼 정확히 5분이 다 되어가는 순간, 문을 살며시 열었다. 그녀의 가운으로 자신의 몸을 단단히 감싸고 있었고 이를 본 박한빈은 웃음을 터트리며 물었다. “꼭 이래야 해? 네 몸에서 내가 못 본 데가 어디 있다고?” 성유리는 고개를 숙인 채 땅바닥만 쳐다봤고 가운을 꽉 움켜쥔 손가락은 점점 더 창백해졌다. 박한빈은 지금 그녀가 폭발하기를 바랐다. 무엇이든 던지거나, 욕을 해도 되고 심지어는 자신을 물어뜯기라도 하길 바랐다. 그러나 성유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한참을 쭈뼛거리던 성유리는 몸에 걸친 가운을 한 번 더 단단히 붙잡으며 입을 열었다. “불 끄면 안 될까요?” “뭐라고?” “불... 끄고 싶어요.” 성유리의 목소리는 아주 낮은 데다가 떨리기까지 했다. 마치 박한빈이 너무 두렵다는 듯이. 박한빈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고 무표정한 얼굴로 손을 쭉 뻗어 그녀를 단숨에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성유리가 반응할 틈도 없이 그녀의 몸은 이미 침대 위에 눕혀졌고 부드러운 매트리스가 그녀의 등을 받치자 이내 그녀의 눈앞에는 박한빈의 잔뜩 찌푸려져 있는 얼굴이 보였다. 그는 몸을 숙여 그녀를 내려다보았고 길게 늘어진 앞머리가 성유리의 뺨을 스치자 그녀는 더욱 떨리기 시작했다. “끝까지 연기하려는 셈이야? 응?” 박한빈은 그런 성유리를 비웃으며 물었다. “내 아이까지 낳아준 몸인
이 층은 최고급 스위트룸이 있는 층이었다. 복도는 지나치게 조용했고 왠지 모를 스산함도 감돌았다. 성유리는 초인종을 누른 뒤 고개를 숙이고 자기 발을 바라보고 있었다. 병원에서만 지내던 최근, 그녀의 하얀 운동화에는 어느새 흙이 묻어 있었다. 그렇기에 지금 딛고 있는 고급스러운 브라운 카펫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그녀는 이곳에 있어선 안 되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여기 지금 성유리가 서 있는 이 세상은 그녀의 세계가 아니었다. 성유리는 자신이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렸는지 알 수 없었다. 몇 초일 수도, 아니면 아주 긴 십여 분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성유리는 그 시간이 한 세기처럼 길게 느껴졌을 뿐이었다. 손발이 저려오기 시작할 때쯤, 마침내 문이 스르르 열렸다. 그러나 문 너머의 사람을 본 순간, 성유리는 당장이라도 돌아서서 도망치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옆에 늘어져 있던 손으로 주먹을 꽉 쥐었고 커다랗게 뜬 눈으로 그를 살짝 바라봤다. 박한빈은 방금 욕실에서 나온 상태였는지 허리에는 흰 수건 하나만 걸려 있었고 머리카락은 아직 마르지 않아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 물방울은 하얗고 탄탄한 가슴을 타고 흘러내려 복근을 따라 아래로 이어졌다. 그의 헝클어진 머리칼은 앞머리가 길어 눈을 거의 덮을 정도였지만 그 안의 깊고 어두운 눈빛은 성유리에게 똑똑히 보였다. 아무 말 없이 문을 열어준 박한빈은 성유리를 본 체도 하지 않고 곧바로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몇 걸음 걸어가던 박한빈은 문득 무언가 떠오른 듯 다시 고개를 돌려 성유리를 바라봤다. 그녀는 여전히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고 박한빈은 눈을 게슴츠레 뜨며 먼저 물었다. “무슨 뜻이야?” 그의 말에 성유리는 순간 숨이 가빠졌고 박한빈에게 되물었다. “뭐가 무슨 뜻이에요?” 성유리의 말을 들은 박한빈은 웃음을 터뜨렸다. “성유리, 네가 지금 나한테 질문을 하고 있어?” 그녀는 그의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이내 박한빈은 벽에 몸을 기
박한빈의 검사 결과가 곧 나왔고 그 결과는 완벽히 일치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결과를 본 성유리는 편히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없었다. 어제 그와의 대화는 결코 순조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박한빈이 떠날 때 성유리는 분명 분노에 휩싸인 그의 표정을 보았었다. 그가 동원한 의료진과 그의 관계는 분명 아주 돈독해 보였으니 지금쯤 박한빈도 이미 결과를 확인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아직까지도 성유리에게 연락이 없었다. 성유리는 휴대폰을 손에 꼭 쥔 채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먼저 박한빈에게 전화를 걸기로 했다. 신호음이 한참이나 울렸고 그 시간이 길어질수록 성유리는 그가 전화를 받지 않을 것 같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러나 이내, 수화기 너머 박한빈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박한빈의 목소리는 원래 성유리에게 익숙했지만 이상하게도 그녀는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온몸이 떨려와 휴대폰을 더 꽉 쥐었다. 성유리는 입술을 몇 번이나 움찔거린 끝에 간신히 말을 꺼낼 수 있었다. “저예요.” “알아.” 박한빈은 빠르게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는 평온했지만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성유리의 심장을 꽉 움켜쥐는 듯한 느낌이 들어 그녀는 힘들었다. 입술을 꾹 다문 그녀는 잠시 뜸을 들이다 조심스레 물었다. “결과 나왔어요. 박한빈 씨도 봤죠?” “응.” “그럼 언제쯤...” “성유리, 나 마음 바꿨어.” 그는 그녀의 말을 뚝 끊었다.사실 박한빈의 이런 태도 또한 성유리가 예상했던 바이기도 했다. 그러니 그의 말을 듣는 순간, 그녀는 그럴 줄 알았다는 생각이 들어 많이 놀라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심장은 여전히 빠르게 뛰었고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다. 잠시 침묵하던 성유리는 이를 악물며 천천히 물었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생각해 봤어. 네 눈에 내가 이렇게 비열하다면 내가 아무 문제 없이 수술을 받아주는 건 네 기대를 저버리는 일이겠지?” “박한빈 씨, 저는...” “변명하지 마. 어제 네
그리고 그때, 박한빈은 성유리가 왜 자신에게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사과를 한 건지 이해가 됐다. “내가 수술받지 않을까 봐 두려워?” 박한빈은 뒤돌아 성유리를 쳐다보며 물었다. 성유리는 침묵했지만 그 침묵 속에서 박한빈은 답을 알아냈다. 안색이 더 어두워진 박한빈은 너무 치가 떨려 이빨을 악물었고 그 과정에서 하마터면 이가 부서질 뻔했다. 성유리의 눈에 박한빈은 도대체 어떤 사람인 걸까? 냉철하고 이기적인 사람, 혹은 매정한 사람일까? 박한빈은 성유리를 죽일 듯 노려보다 다시 몸을 돌려 앞으로 걸어갔지만 속도는 현저히 느려졌다. 마치 온몸에 진이 빠진 듯 휘청거리며 걷던 박한빈은 성유리가 다가와 뭐라고 변명이라도 해주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뻔한 거짓말이라고 해도 지금 그는 성유리의 입에서 다른 대답을 듣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박한빈이 병원 밖을 나설 때까지도 그의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발걸음을 뚝 멈춘 그는 자신의 뒤를 멍하니 바라봤다. 운전기사가 다가와 그에게 말을 걸자 그제야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차 문을 열었다. 원래 계획대로 회사로 향하려 하던 박한빈은 잠시 고민하다 기사에게 말했다. “엔젤 월드로 갑시다.” 엔젤 월드, 그곳은 김서영이 현재 거주하는 곳이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별장은 김서영이 열심히 가꾼 정원 덕에 더 아늑해 보였고 2년 전 성유리와 심은 나무는 이미 많이 커 열매가 맺히기 시작했다. 박한빈이 별장 안으로 들어설 때, 김서영은 마침 나무에 비료를 주고 있었다. 인기척을 들은 김서영은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 “저쪽에 있는 삽 좀 가져다줄래요?” 박한빈은 김서영이 자신을 별장에 있는 도우미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는 말없이 삽을 건넸다. 손을 뻗어 삽을 건네받던 김서영은 귀신이라도 본 듯 깜짝 놀라며 물었다. “네가 왜 여기 있어? 요즘 바쁘다며? 어떻게 왔어?” 박한빈은 입술을 오므린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병원엔 가봤니?” 김서영이 박한빈에게
박한빈의 말을 성유리는 한참이 지나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 박한빈에게 물었다. “박한빈 씨, 지금 이게 무슨 뜻이죠?” “들은 대로.” 박한빈은 콧방귀를 뀌며 대답을 이어갔다. “아이한테 이름 지어준 거 확인했어. 네 성을 따른 것에 나도 반박하지는 않을게. 근데 아무리 네 성을 따랐다 해도 걔는 결국 내 아이야.” “하늘이가 다른 남자한테 아빠라고 부르는 꼴을 난 절대 봐주지 않을 거고.” “당연히 너도 아직은 젊으니까 재혼하겠다고 해도 말리지 않을게. 그렇지만 하늘이까지 데리고 결혼은 하지 마. 절대로 안 되니까. 알겠어?” 박한빈의 말이 끝나자 성유리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를 잘 아는 박한빈은 시선을 천천히 아래로 돌렸고 곧 꽉 쥔 성유리의 두 주먹을 발견했다. 어찌나 힘을 세게 주고 있는지 그녀는 지금 어깨까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박한빈은 성유리가 곧 노발대발 화를 내며 자신에게 험한 말을 내뱉을 줄 알았지만 성유리는 손에 힘을 풀더니 미소까지 지으며 입을 열었다. “오해가 있으신 모양이네요.” 박한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린 하늘이는 아무것도 몰라서 하는 말이에요. 어떻게 애 말을 철석같이 믿으세요?” “오늘 정우랑 만난 건 사실이지만 저희는 2년 동안 어떠한 일도 없었어요. 그런데 어떻게 이제 와서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될 수 있겠어요?” “다른 일에 대해서는... 제가 신경 쓸 겨를이 있다고 생각하세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당신이 하는 모든 걱정들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이게 아닌데?’ 박한빈이 생각한 성유리의 반응은 절대 이게 아니었다. 그녀는 지금 화를 내야 한다. 꼭 박한빈과 심하게 다투고 불만을 토로해야 한다. 하지만 왜 지금 성유리는 이리도 평온하게 말하고 있는 것일까? 박한빈은 성유리의 말을 듣고 나서도 전혀 안심되거나 기쁘지 않았다. 그때, 문득 박한빈은 자신이 전에 어디서 봤던 문장이 떠올랐다. 사람은 자신이
성유리는 하늘이의 기분을 맞춰주려 애를 썼고 덕분에 아이는 이내 즐거워하며 웃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퇴원하면 하고 싶은 일들을 차례차례 성유리에게 말해줬고 그녀는 옆에 앉아 아이의 말을 경청해줬다. 간호사가 들어와 약을 건네줄 때에도 하늘이는 떼도 안 쓰고 순순히 약을 복용했고 부작용 때문에 힘든지 침대에 누워 성유리의 손을 꽉 붙잡았다. 성유리는 그런 하늘이의 어깨를 다정하게 어루만져주며 아이가 좋아하는 노래를 불러주었다. 그녀의 자세는 어딘가 이상했지만 아이가 너무 편해하니 바꾸지도 않았다. 하늘이는 병원 병실에 있는 것이 너무 안정감이 없는 건지 눈을 떠서도, 눈을 감을 때도 성유리가 안 보이면 극도로 불안해했다. 그래서 성유리는 저려오는 다리와 팔을 애써 주무르며 하늘이 곁을 지켜야 했고 아이가 깊은 잠에 들어서야 천천히 팔을 뺐다. “성유리 씨.” 간병인은 옆에 조용히 앉아 있다 하늘이가 잠에 든 후, 성유리에게 다가와 조심스레 물었다. “밖에 어떤 사람이 계속 앉아 있던데 아시는 분이에요?” 성유리는 그 말에 깜짝 놀랐다.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지만 곧 애써 부정했다. 필경 박한빈이 어떤 사람인지 성유리는 잘 알고 있으니 말이다. 방금 전, 하늘이에게 문전박대를 당한 박한빈은 화가 나 바로 병원을 떠났다고 성유리는 생각했다. 그러나 병실 밖을 나가보니 예상과는 달리 박한빈이 그곳에 앉아 있었다. 성유리가 돌아왔을 때에도 그 의자에 앉아 있던 그였지만 현재는 태블릿도 보지 않은 채로 멍해 있는 모습이었다. 그녀는 망설이다 박한빈에게로 다가가며 먼저 말했다. “죄송해요.” 성유리의 목소리에 박한빈은 고개를 번쩍 들었고 눈빛은 마치 왜 사과를 하냐고 묻는 것 같았다. “하늘이가 요즘... 불안정해요. 일부로 그런 건 아닐 거예요. 그러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성유리는 박한빈에게 하려던 말을 이어갔고 그는 그녀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 갑자기 물었다. “연정우 씨도 하늘이를 만났어?” 성유리는 왜 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