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유리가 말한 대로 조영준의 심사는 사실 그냥 과정일 뿐이었다. 5일이 지나기도 전, 성유리는 원했던 자금과 프로젝트를 바로 손에 넣었다. 하지만 자금이 떨어지는 일은 그저 첫 번째로 내딛는 발걸음과도 같기에 아무런 실수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 성유리는 직접 공사장으로 향했다. 연성은 이미 초여름으로 진입했기에 안전모를 하고 있는 성유리는 남들처럼 양산을 쓰지 않고 있었고 그로 인해 목과 팔, 얼굴은 강한 햇빛에 붉어졌다. 집에 돌아가는 길, 성유리는 약국에 들러 피부에 바를 약을 샀다. 도착하자마자 약을 꺼내 직접 바르려던 그때, 박한빈이 마침 집안으로 들어섰다. 오늘 밤 저녁 약속이 있던 박한빈이지만 이리 이른 시간에 집에 돌아왔으니 성유리는 그가 먼저 도망쳤다고 생각했다. 박한빈의 손에는 성유리를 위해 포장해 온 음식과 작은 케이크가 들려있었고 그녀는 집안에 들어서는 그를 가만히 쳐다만 봤다. “팔은 왜 그래?” 박한빈은 성유리의 온몸을 쓱 훑어보며 물었다. “별거 아니에요. 그냥 좀 타서...” 성유리는 덤덤한 말투로 대답을 해주더니 손에 닿지 않는 목 부분에 약을 바를 수 없어 자연스럽게 박한빈에게 내밀었다. 박한빈은 성유리가 내민 약을 얼른 건네받았고 그녀의 피부를 샅샅이 살피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병원 안 가 봐도 돼?” “괜찮아요. 약사한테 물어봤는데 이 약만 바르면 된다고 하더라고요.” 성유리의 말에도 박한빈은 그녀의 피부만 유심히 쳐다보고 있었고 기다리던 그녀는 살짝 짜증이 나 혼자 약을 바르려고 했다. 하지만 박한빈은 성유리의 생각을 읽기라도 하듯 이미 약 뚜껑을 열고 있었다. 차가운 고체의 약이 성유리의 피부에 닿자 그녀는 화끈거리던 곳이 진정이 되는 느낌이 들었다. 박한빈은 허리를 숙이고는 성유리의 약이 잘 녹아들어 가도록 입으로 바람을 살짝 불었고 성유리는 간질거려 온몸에 닭살이 돋았다. 저도 모르게 자꾸만 몸을 움찔거리며 피하려고 하는 성유리의 어깨를 박한빈은 꽉 잡았고 참다못한 그녀가 먼저
박한빈은 성유리의 탄 피부만 걱정하면서 감정을 추슬렀고 하던 행동을 멈추려 할 때, 성유리가 그를 꼭 잡더니 말을 걸었다. “박한빈 씨.” 성유리는 박한빈의 귓가에 가까이 다가가 그의 이름을 조용히 속삭였다. 그녀의 목소리에 박한빈은 온몸에 털이 바짝 서는 느낌이 들어 성유리를 가만히 쳐다만 봤다. 성유리는 박한빈에게 웃어 보였고 그녀의 손에는 그가 벗어 던진 넥타이가 들려 있었다. 부드러운 넥타이가 몸에 닿자 성유리는 더 가까이 다가오더니 박한빈의 입술에 가벼운 뽀뽀를 했다. 이성의 끈을 아슬아슬하게 잡고 있던 박한빈은 성유리의 행동에 “끈”을 놓아버렸고 그녀의 뒤통수를 잡고는 미친 듯이 키스하기 시작했다. 지금 이 순간, 두 사람은 마치 해안가에 떠밀려온 물고기처럼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지만 서로를 탐냈다. 목숨을 잃고 자기 생이 마감된대도 두 사람은 서로를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끝이 날 무렵, 성유리는 너무 힘이 들어 목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두 사람 다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고 성유리는 아까 바른 약도 소용이 없어졌겠다고 생각했다. 박한빈이 주방에서 컵에 물을 따라 성유리에게 건네주자 그녀는 단숨에 벌컥벌컥 마셔버렸다. “내가 너 안고 욕실까지 갈까? 씻자.” 욕망을 해결한 남자의 목소리는 다정하기 그지없었다. “씻고 나서 다시 약 발라줄게.” “네.” 성유리는 힘에 부쳐 짧게 대답했고 박한빈은 묵묵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에 이상함을 느낀 성유리가 미간을 찌푸리자 박한빈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나를 뭐라고 좀 불러줘야 되지 않나?” 성유리는 그제야 방금 전 침대에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 남자 역시 이런 건 절대 안 까먹네.’ 밖에서 아무리 도도하고 냉정하게 대한다 해도 옷을 벗으면 누구든 다 똑같은 사람이 되기 마련이다. 박한빈은 성유리가 자기 말에 반박하며 절대 뜻대로 안 해주겠다고 생각했지만 성유리는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여보.” 오직 두 글자일 뿐이지만 박한빈은 성유리의
박한빈은 성유리의 말을 믿기 힘들었다. 필경 분명 30분 전까지만 해도 자신을 “여보”라고 부르며 다정하게 대하던 성유리가 이리도 평온한 말투로 떠나라고 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박한빈은 한참 동안 넋이 나간 듯 멍해 있다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물었다. “지금 나랑 장난하는 거지? 유리 네가...” “조영준 씨랑 무슨 거래를 하신 거예요?” 박한빈은 새우를 까려고 꼈던 장갑도 벗어던지고 성유리를 안으려 했지만 그녀는 재빨리 피해버리고는 되물었다. 진지한 성유리의 표정을 본 박한빈은 쭉 뻗었던 팔을 어색하게 내렸다. 성유리가 도대체 무슨 의도로 이런 질문을 하는지 박한빈은 몰랐지만 그래도 결국 대답해 줬다. “해외 재산에 문제가 좀 생겼다고 해서 내가 좀 도와줬어.” “역시 이럴 줄 알았어요.” 성유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박한빈은 성유리의 행동에 의아함을 느껴 따지듯 물었다. “아니요. 그래도 덕분에 저희가 하는 프로젝트가 원활하게 진행되었어요. 돈에 관한 문제도 오늘 정해졌고요. 만약 박 대표님이 아니었다면 힘들었을 텐데.” 박한빈은 성유리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어딘가 이상했다. ‘원활해? 정해졌다고? 그런데 왜...’ 그의 의아함이 성유리에게도 전해졌는지 이내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박한빈 씨는 이제 저한테 아무런 쓸모도 없어졌죠.” 성유리의 말에 박한빈의 안색이 서서히 어두워져갔다. “뭐라고?” “제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시는 거예요? 저는 충분히 잘 말했는데?” 박한빈의 물음에 성유리는 아주 엄숙한 표정으로 계속 말했다. “제일 중요한 원인도 하나 있어요, 저 다음 달에 정우랑 결혼하기로 했어요.” “저희가 그저 비즈니스 사이라면 상관없겠지만 결혼을 하기로 했으니 더 큰 이익을 위해 움직여야죠. 박한빈 씨랑 계속 이런 사이로 지내면 서로 좋을 점이 없잖아요. 그래서...” 성유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박한빈의 그녀의 손목을 강하게 잡았다.
멈췄더라면 그 당시에 박한빈은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라도 지킬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박한빈은 자기 자신을 컨트롤 할 수가 없었다. 성유리는 그런 박한빈을 조용히 쳐다만 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며칠 전에 이미 정한 거예요. 결혼하기로.” “아까는... 박 대표님도 들어보셨을 거예요. 이별을 위한 마지막 잠자리랄까? 게다가 최근에 박 대표님 덕분에 도움받은 일도 참 많았잖아요. 그래서 저도 그 도움에 대한 보답을 해주고 싶었던 것뿐이에요. 박 대표님께서 기분이라도 좋아지시라고.” 성유리는 아주 진지하게 말했지만 박한빈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래서 방금 그 행동들은 다 나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한 거라고?” “네. 아니면 뭐겠어요?” 성유리의 손목을 잡고 있던 박한빈은 그녀를 스르르 놓아주었다. 마치 진이 다 빠진 듯 멍한 표정으로 성유리만 쳐다보는 박한빈을 본 그녀는 그가 이제 이 사실을 받아들였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내, 박한빈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난 모르겠어.” “뭐를요?” “연정우 씨가 너를 도울 수는 있어. 근데 왜... 왜 네가 내가 아닌 그 사람을 선택하는지 모르겠다고.” 박한빈은 스스로 말하면서도 지금 자기가 미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더 이상 감정을 조절할 수가 없었고 자존심 따위 버린 지 오래였다. 그러나 자존심마저 버린 박한빈의 모습에도 성유리는 흔들리지 않았고 오히려 살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유는 딱히 없어요. 그냥 단순하게 정우를 선택하고 싶었을 뿐이죠.” 박한빈은 성유리의 눈을 묵묵히 바라보다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목젖마저 떨리고 있었고 침을 끊임없이 삼키고 있었다. 끓어오르는 분노와 질투심을 삼키고 있던 박한빈은 위에도 강한 고통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결국 박한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고개만 끄덕이더니 방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곧 성유리는 박한빈이 들고 왔던 캐리어 바퀴 소리를 들었지만 그를 상관하지도 않고 밥만 계속 먹었다. 박한빈은 아
“무슨 말이야?” 낮은 소리로 묻는 박한빈의 말에 성유리는 먹던 케이크를 계속 입에 넣으며 되물었다. “지화 그룹에 생긴 문제들 다 해결하신 거죠?” 박한빈은 이 상황에 성유리가 왜 이런 물음을 묻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지 머리를 굴리던 박한빈에게 성유리가 다시 물었다. “작년에 지화 그룹에 생겼던 상업 위기 말이에요. 박한빈 씨가 연막작전을 펼친 거 맞죠?” “전에 저한테 말씀하셨잖아요. 지화 그룹 설립한 지도 이젠 몇십 년이 지났으니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다고. 좋은 점은 온 나라가 다 아는 대기업이라 유명해서 든든한 배경이 생겼다고요.” “나쁜 점은 몇십 년이 흘러 많은 직원들의 거의 다 열정이 사라진 채로 출근하니까 회사에 도움이 덜 된다고 하셨잖아요. 특히는 투자자 쪽에서 보낸 친척이나 친구들이요. 근데 그 사람들을 자른다 해도 뿌리까지 뽑기는 힘드니까 가만히 놔둔다면서요? 그분들은 박한빈 씨 아버지를 잘 따라는 투자자들이고 심지어는 할아버지와도 아는 사이라 손을 댄다면 명성에 큰 영향을 줄 거라고 했죠?” “그래서 사실 박한빈 씨는 항상 기회가 차려지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씀하셨죠.” “다 같은 배를 타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작년에 큰 일이 터졌을 때, 마음대로 하게 놔두고 혼란스러운 틈을 타 다른 사람들이 배에서 뛰어내리는 것을 주저하는 순간에 박한빈 씨가 뒤에서 뻥 차버리셨죠?” “배지수 씨에 관해서는 뭐 말할 것도 없죠. 그 사람들도 바보는 아닐 거잖아요? 그래서 전에 정신을 차리고 돌아오려고 했을 때도 박한빈 씨는 일말의 기회도 주지 않았어요. 그 사람들이 온갖 방법을 동원해 박한빈 씨를 시험하려 하니까 배지수라는 방패를 앞에 세운 거고. 제 말이 맞죠?” 느린 속도로 말을 이어가는 성유리지만 매 한 마디마다 발음이 정확했고 박한빈의 귀에 또박또박 들렸다. 성유리가 말한 사실들은 거의 다 정민재가 알려준 일들이지만 박한빈이 직접 말해준 것도 몇 개 포함돼 있었다. 널린 퍼
박한빈은 진심으로 성유리를 좋아했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그녀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 그렇게 다급해하며 해결해 주지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그 감정은 또 어떤 가치가 있겠는가? 박한빈은 늘 성유리를 주저하지도 않고 자신이 이용할 패로 일삼았고 얻을 이익만 먼저 생각했다. 이제 와서 잘해주면서 자기가 저질렀던 잘못을 뉘우친다고 해도 이미 때는 늦어버렸다. 필경 지화 그룹의 일이 다 해결이 됐으니 박한빈은 얻으려던 물건들을 다 손에 넣었고 이제야 뒤돌아 자신이 버렸던 “패”를 다시 거두려 했기 때문이다. 설령 지금 다시 거둔다 하더라도 그 “패”는 한번 버림받았었기 때문에 예전처럼 돌아가지는 못할 것이다. 박한빈도 그저 그런 상인이자 이익을 위해 사는 사람이기 때문에 성유리도 그를 많이 탓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성유리는 박한빈의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순간에도 다른 사람들의 입에 오르락내리락하는 박한빈이 얼마나 힘들게 시간을 보냈는지 다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성유리는 이익을 먼저 챙기려 하는 박한빈이 이상하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박한빈이 지금처럼 자신에게 보이는 다정한 모습과 사랑을 위해 뭐든 해준다는 말들이 너무 싫었다. 마치 너무 사랑해 성유리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을 것 같은 박한빈의 태도도 그녀는 탐탁지 않았다. 주위 사람들은 다 성유리를 꾸짖으며 박한빈이 저렇게 열심히 하는데 이제 그만 그의 마음을 받아주라고 타일렀다. 그렇다면 성유리는? 성유리도 박한빈 못지않은 노력을 했었다. 주위 사람들은 다 모르겠지만 전에 성유리는 말로 표현할 수도 없을 만큼 많은 노력과 용기를 내 박한빈의 옆에 다가갔다. 하지만 박한빈이 성유리를 그나마 잘 대해주니 사람들은 성유리가 타고난 복을 가진 여자라고 평가할 뿐 그녀의 노력을 봐 주지 않았다. 그래서 성유리는 늘 혼자 속으로만 끙끙 앓았었다. 성유리의 말이 끝난 지 한참이 지나도 박한빈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내 말이 다 맞나 보네.’ 그녀는 손에 들린 포크를
박한빈의 대답에 성유리는 잠시 멍해졌다. 그러더니 그녀는 실성한 사람처럼 웃기 시작하더니 박한빈에게 물었다. “그래요? 그럼 박한빈 씨가 이기셨나요?” 박한빈은 성유리의 물음에 대답할 가치가 없다고 느꼈는지 입을 꾹 닫았다. 그는 정리를 마친 자기 물건을 챙기고 성큼성큼 집 밖을 나가버렸고 문을 닫을 때도 별다른 감정이 없는지 소리는 크게 나지 않았다. 성유리는 떠나는 박한빈에게 시선 한번 돌리지 않았는데 사실 그녀 또한 방금 한 말들을 내뱉을 생각이 없었다. 아무런 의미도 없을뿐더러 이미 끝난 사이에 과거의 일까지 들춰내며 따지는 것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나의 썩은 과일을 바로 쓰레기통에 버리면 되는데 굳이 껍질을 한 겹씩 까 제일 먼저 썩기 시작한 부분을 찾을 필요도 없지 않은가? 결국 과일 껍질을 다 벗겨낸다 해도 돌아오는 정답은 딱 하나뿐이다. 애초에 처음부터 모든 것이 잘못됐다는 것. 하지만 오늘 성유리는 꾹꾹 참아왔던 감정들이 다 터졌다. 정민재가 지화 그룹의 일들을 말해준 것과 김서영이 깨어났다는 사실을 알려준 후로 성유리는 항상 머릿속에 맴돌던 의문들에 정답을 얻은 것 같았다. 최근 며칠 동안 성유리는 이 말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꺼내야 할지 고민했고 박한빈을 볼 때마다 입이 근질거렸다. 결국 오늘에서야 터져버린 성유리도 두 사람 사이에 큰 소리가 오갈 줄 알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매 사람마다 견딜 수 있는 고통의 크기가 다르듯이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 있는 감정 또한 한계가 있었다. 성유리는 앞에 놓인 케이크에 시선을 돌렸다. 말을 하면서 제멋대로 쑤시고 찔러버린 케이크의 모양은 완전 망가져버렸지만 성유리는 다시 포크를 들었다. 케이크의 맛은 너무도 달콤했지만 성유리는 왜인지 모르게 그 달콤한 맛이 쓰게 느껴졌다. 결국 성유리는 그 케이크를 망설임도 없이 쓰레기통에 던졌다. ‘하긴 원래 디저트를 안 좋아하는 사람이 어떻게 맛있는 케이크를 사 왔겠어.’ 한편, 박한빈은 이미 호텔 방으로 돌아갔다
박한빈은 성유리가 어떠한 상황에서든 자기 곁을 지켜줄 줄 알았고 따뜻한 마음으로 자신의 결점과 문제를 다 용서할 줄 알았다. 그는 성유리가 정말 자신을 떠난다 해도 이렇게까지 아플 것이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박한빈은 마치 생존에 꼭 필요한 산소와 물을 하루아침에 잃어버린 것 같았다. ‘그래서... 결국 내가 틀린 거네.’ 그가 성유리에게 설명할 기회도 주지 않았던 것처럼 성유리는 지금 박한빈에게 작은 틈조차 남겨주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는 이미 성유리에 의해 넘을 수 없는 선이 그어져 버렸다. ... 그 뒤로 며칠 동안 성유리는 평소대로 회사로 출근했다. 연정우와 결혼을 한다는 말도 성유리가 멋대로 지어낸 사실이 아니었고 둘은 이미 오랫동안 상의해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왜 이렇게 급히 결정을 내렸냐 묻는다면 이유는 바로 연정우의 할아버지에게 남은 시간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어르신은 연세가 그다지 많은 편은 아니지만 최근 갑자기 치매 판정을 받았다. 게다가 상황 또한 다른 사람보다 심각했기에 자신이 그나마 정신을 차릴 수 있을 때, 하나뿐인 외손자인 연정우가 결혼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했다. 비록 할아버지를 가까이서 만나 뵌 성유리는 그가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더 불친절하다고 생각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성유리는 이혼을 겪어본 여자이고 하마터면 감옥에 들어갈 뻔했던 사람이지 않는가? 그래서 당연하게도 연정우의 가족들 눈에 성유리는 그에게 잘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어르신이 화 한번 내시지 않고 그나마 말을 섞어주는 것만으로도 성유리는 괜찮다고 생각했다. 연정우에게서 어르신의 말을 전해 들었을 때 성유리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잔뜩 찌푸렸었다. 자신의 요구가 과분하다고 느꼈는지 연정우는 성유리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동의하지 않는다 해도 난 너를 탓하지 않을 거야. 결혼이라는 게 얼마나 큰일인데. 너도...” “너 혹시 따로 좋아하는 사람 있어?” 성유리가 연정우의 말을 끊어버리며 물었다. 갑작스러운 성유리의 물음에
마음속에 걸리는 것이 있어서인지 불안한 성유리는 박한빈의 대답이 들리지 않자 미간을 찌푸렸다. 박한빈에게 뭐라고 말을 하려던 성유리가 입을 떼기 전, 박한빈은 시원하게 비밀번호와 인증코드를 알려주었다. 그는 성유리기에 컴퓨터로 무슨 일을 할 것인지도 묻지도 않았다. 성유리는 예상치 못한 박한빈의 태도에 알겠다는 짧은 대답을 하고는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녀는 빠르게 박한빈이 알려준 비밀번호를 입력했고 컴퓨터 화면이 열리자 배경 화면이 두 사람의 결혼식 사진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당황한 성유리는 멍해졌다가 이내 박한빈과 고명도 사이의 일을 알아내야 한다는 사실이 떠올랐고 이제 와서 이러는 박한빈이 한심하고 웃겼다. 그래서 성유리는 증거들을 찾기 전에 먼저 박한빈의 컴퓨터 배경 화면을 바꿔버렸다. 제일 간단하고 기본 설정인 배경 화면으로 바꾸자 성유리는 기분이 한결 나아졌지만 또 다른 문제에 직면했다. 그 문제는 바로 박한빈이 하나하나 잠가버린 모든 자료와 파일들이었다. 컴퓨터를 쓰겠다고 말했지만 파일들 비밀번호까지 알려달라면 들켜버릴 것이 뻔했다. 성유리는 혼자서 이것저것 입력해 봤지만 다 틀리자 아예 포기해 버렸다. 사무실 책상에서 발견하지 못했으니 뒤에 있는 책장에는 있을 리가 없었다. 성유리는 서재를 다 찾았지만 아무런 수확이 없어 결국 포기하려고 마음먹었다. 그 시각, 날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박한빈은 여전히 도연제에 돌아오지 않았고 성유리는 입맛이 없어 밥을 먹고 싶지 않았다. 서재에서 나온 성유리는 자연스럽게 복도 끝자락에 있는 방으로 시선을 돌렸다. 문이 굳게 잠겨있긴 하지만 성유리는 방안 구조와 인테리어를 다 훤히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성유리는 결국 그 방안으로 발을 들이지 않았고 문 앞에서 서성이다 아래로 내려갔다. 소파에 누워 눈을 감은 성유리는 박한빈이 언제 들어왔는지도 몰랐다. 서서히 감았던 눈을 뜨자 성유리는 제일 먼저 자신의 볼을 쓰다듬는 누군가의 손길을 느꼈고 깜짝 놀라 펄쩍 뛰었다. 정신을 차려
성유리는 자기가 어떻게 병원을 빠져나왔는지도 기억이 안 났다. 이미 금성은 햇볕이 강하게 내리쬐는 무더운 한 여름이었지만 성유리는 전혀 덥지도 않았고 따뜻함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밖에 한참을 서 있던 성유리는 등 뒤로 식은땀이 줄줄 흘러 이빨을 꽉 깨물고 버텼다. 택시는 빠른 속도도 달려 도연제에 도착했다. 눈앞에 있는 익숙하고도 낯선 곳에 성유리는 방금 전 성시원이 했던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유일한 기회이자 방법이야.] 성시원은 박한빈에게 위협을 줄 수 있는 방법과 증거를 찾고 싶었고 그 증거로 박한빈을 끌어내리려 했다. 하지만 성유리의 생각은 성시원과 달랐다. 박한빈이라는 사람을 잘 아는 성유리는 그가 행여 다른 사람들에 의해 끌려 내려오더라도 언젠간 꼭 다시 올라와 두 배로 갚을 것 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성유리는 박한빈과 비슷한 사람을 대할 때면 꼭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하고 마음이 약해져서는 안 된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초원에서 만난 두 마리의 맹렬한 맹수는 싸울 때 서로 할퀴고 뜯는 것은 의미가 없다. 서로한테 제일 치명적인 상을 입혀야 승리를 거머쥐는 잔인한 현실에 성유리는 정신을 다잡았다. 차에서 내린 성유리는 이곳에서 2년이라는 시간을 보냈기에 아주 익숙하고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성유리는 이내 박한빈의 서재를 찾았고 아침에 그가 했던 말들 떠올렸다. [오늘 바빠서 못 돌아갈 거야.] 비록 자신이 찾는 서류가 서재에 있을지는 모르지만 성유리에게 있어서 지금은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기회였다. 성유리는 굳게 잠긴 문에 몇 번이나 비밀번호를 입력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박한빈의 생일이나 그의 핸드폰 비밀번호, 게다가 성유리 본인의 생일까지 입력해 봤지만 여전히 틀린 비밀번호였다. 성유리는 머릿속 깊은 곳에 있던 기억까지 끄집어내 절대 불가능할 것 같던 숫자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띠릭! 그 순간, 열리지 않을 것 같던 문이 천천히 열렸다. 성유리가 마지막에 입력한 숫자들은 바로 박한빈과 성유리 두
그 말인즉슨 그들이 담판을 짓기 전부터 사실 박한빈은 이런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는 뜻이다. 이번 기회를 빌어 성리그룹의 모든 것을 다 삼켜버리고만 싶었다. 모든 일은 성유리와 아무런 관계가 없었지만 박한빈은 성유리가 자신에게 애원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성유리는 그런 박한빈의 결정에 아주 침착하고 냉정하게 판단을 내렸다. 필경 그녀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박한빈은 항상 이런 사람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유리는 가끔 박한빈이 자신의 앞에서 온순한 양이 되어 항상 져주던 모습을 떠올렸다. 그래서 성유리는 전에 자기 마음대로 박한빈을 대하고 그에게 복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했었다. 성유리는 이제 서야 박한빈의 모든 “가면”을 벗겨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런 느낌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괴이했고 이상했지만 웃기게도 성유리는 아직 박한빈의 이런 태도를 볼 때면 마음이 아프고 속상했다. 허나 고통을 호소할 정도로의 아픔은 아니었고 그저 피부가 살짝 날카로운 칼에 긁힌 것 같은 정도였다. 깊은 상처는 아니지만 갓 치유가 된 상처 부위를 또다시 긁혔기에 이런 고통은 새로 생긴 상처보다 더 아프고 쓰렸다. 상처가 깊지 않은 탓에 피는 곧 멈췄기에 반창고를 붙이는 것도 의미가 없다. “정말 그렇다고 해도 결과는 변하지 않아요.” 성유리가 입을 뗐다. “지금 성리 그룹의 상황은 이미 엉망진창이 되어버렸어요. 남들처럼 파산신청이나 할 수 있어도 정말 불행 중 다행이고요.” 평온한 말투로 말을 하는 성유리는 본인조차도 자기감정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성시원은 성유리의 말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아무 말도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그는 성유리의 말에 평소처럼 화를 내지도 못했고 침대에 가만히 누워 천장만 멍하니 쳐다보았다. “몸 잘 챙기세요.” 성유리는 조용히 그를 쳐다보다 짧은 인사말을 하고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때, 성시원이 갑자기 성유리에게 말했다. “사실 방법이 하나 더 남아있어.” 앞으로 뚜벅
이런 상황을 겪어본 적 없던 간병인은 어쩔 줄 몰라 했다.무엇보다 성시원은 금방 의식을 회복한 사람으로서 누구든 지금 흥분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간병인은 성시원을 말릴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그 반면에 성유리는 아주 덤덤했다.그는 데인 종아리에서 퍼져오는 고통을 견디며 천천히 성시원에게 다가갔다.성시원은 생각보다 당돌한 성유리의 모습에 놀랐는지 손에 든 컵을 다시 던지려고 움직였지만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성유리가 그의 손을 단단히 내리누르며 막았다.그리고 고개를 돌려 옆에 있던 간병인을 바라보며 말했다.“잠시 나가주세요.”이 자리가 불편하다고 생각 중이던 간병인은 성유리의 말이 구세주라도 되는 양 곧장 자리를 떴다.성유리가 성시원을 보며 물었다.“지금 회사 상황 다 알고는 계세요?”“알다마다? 이럴 줄 알았어... 이럴 줄 알았다고! 박한빈 그 자식이 어떤 놈인데! 너한테 인주 프로젝트 맡길 때부터 이미 함정이었던 거야! 이거 다 둘이서 짠 거 아니냐? 오늘 이러려고...”“성리 그룹이 이렇게 된 건 인주 프로젝트 때문이 아니에요.”성유리가 성시원의 말을 단칼에 끊었다.“가장 책임을 물어야 할 사람은 고명도와 아버지입니다.”성유진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성시원은 그 말에 넋을 놓고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뭐라고?”성시원의 목소리가 낮아지긴 했지만 어떻게든 반박해보기 위해 입을 열려던 찰나, 성유진이 입을 열었다.“아니에요? 만약 고명도가 그 큰 거액을 빼돌려 자금 흐름만 안 끊었어도 성리 그룹이 이런 상태가 됐을까요? 그리고 그런 고명도를 맹목적으로 믿었던 아버지께도 잘못이 있어요. 지금 회사가 주주들 권리랑 악성 채무 관계로 엉망이 되어버린 것도 그동안 아버지께서 너무 무책임했던 결과 아닙니까? 남에게 잘 보이겠다고 딸을 이리저리 내다 팔아가며 이익을 얻으려고 하셨잖아요. 생각 못 해보셨어요? 성리 그룹이 어쩌다가 이렇게 됐는지?”성리가 단번에 수많은 말을 쏟아냈다.그 말에
뒤를 미처 보지 못한 박한빈은 성유리에게서 날아온 베개에 그대로 맞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도, 뒤돌아보지도 않고 그대로 걸음을 옮겨 집을 나섰다.성유리는 문득 허탈한 감정을 느꼈다.박한빈의 앞에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었다.그의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너무 초라하게만 느껴졌다. 박한빈에게 던져진 베개처럼 겉으로는 화가 잔뜩 나 있으면서도 사실은 그에게 아무런 피해도 줄 수 없었다.발버둥 칠수록 그저 자신만 우스워질 뿐이었다....결국 성유리는 병원으로 향했다.그녀는 연정우가 밝힌 입장문을 확인했다.연정우는 결혼을 취소했다고 하는 대신 며칠 연기할 예정이라고만 밝히고 자세한 것은 얘기하지 않았다.언제까지 연기할 것인지는 밝히지 않았지만 그것이 단순히 체면을 지키기 위한 말일 뿐,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무산될 것이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성유리는 그 성명을 몇 분 동안 보다가 스크롤을 조금만 더 내려 댓글을 확인하더니 조용히 휴대폰을 껐다.그리고 마침 병원에 도착했다.어제의 소식이 퍼지자 병원 근처에는 기자들이 몰려 있었지만 나름 철저한 병원의 보안 덕분에 그들은 입구 밖에만 몰려 있었다.차에서 내리는 성유리의 모습에 기자들이 웅성거렸다.“업계에서 누가 일부러 성리 그룹을 음해하려고 한다던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성리 그룹의 향후 계획은 뭔가요?”“파산 신청하실 예정인가요?”“아버님께서 깨어나셨나요? 충격이 꽤 크신 것 같은데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요?”수많은 마이크와 카메라가 성유리를 둘러싸자 병원의 보안 요원들이 다가와 간신히 기자들을 저지했다.그리고 성유리는 기자들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녀의 침묵으로 인한 추측성 기사가 하나씩 나오기 시작했다.그렇게 나온 기사들은 대부분 그녀의 침묵에 대해 추측하는 내용이었다. 기자들은 아무 말도 못 하는 성유리의 모습에 성리 그룹이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처지가 됐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그리고 성시원의 상태로 그다지 좋지
무작정 뺨을 때린 것은 성유리의 자동반사적인 반응이었다.박한빈이 너무 가까이 있었던 탓이다.그리고 박한빈이 정말 막을 생각이 있었다면 그녀의 손을 잡거나 어떻게든 막았겠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어젯밤 뺨에 남긴 자국이 사라지기도 전에 하나가 더 생겨버렸다.정말 웃긴 이야기 속의 주인공처럼 대칭 맞춰 두 뺨에 손자국이 생긴 격이었다.“악몽 꿨어?”박한빈은 아프다는 기색 하나 없이 물었다.하지만 성유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냥 꿈일 뿐이야.”박한빈은 옷을 갈아입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오늘은 내가 좀 바빠서 같이 밥 못 먹을 것 같네. 넌 아버지 뵈러 병원 가 봐. 그리고 연정우랑 결혼 취소했다고도 전하고. 회사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박한빈의 목소리는 짧고도 단호했다.“어떻게 할 생각이야?”성유리가 물었다.박한빈은 단추를 잠그던 동작을 멈추더니 성유리를 바라보며 말했다.“어쨌든 성리 그룹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어. 이번 일로 주주들 반응도 봤을 거고, 성리 그룹의 문제는 오랜 시간 동안 쌓여온 거야. 본질이 아예 썩어 있다고. 오늘 평가 진행하고 청산해야 할 거 청산할 거야. 하지만 걱정할 필요 없어. 네 건 뺏을 생각 없으니까.”박한빈의 말을 듣는 순간, 성유리는 손에 잡히는 베개를 그의 얼굴에 내던졌다.“그럼 성리 그룹은 인수합병하는 거랑 다를 게 뭐야? 어젠 분명 그런 말 없었잖아!”“지금으로선 이게 최선이야.”박한빈은 자신에게 던져진 베개를 잡은 채 성유리를 바라보며 말했다.“지금 상황이 별로 좋지 않아. 성리 그룹은 심각한 적자를 겪고 있고, 회사를 넘기고 싶어도 쉽지 않을 거야. 이 문제를 해결해준 건 나니까 넌 나한테 고마워해야지. 그리고, 난 단지 너희가 지화 그룹에 끼친 손해를 묻지 않겠다고 했을 뿐이지, 성리 그룹을 살려주겠다는 약속은 한 적이 없어. 내가 이렇게 하는 이유는 널 위해서야. 너도 알잖아. 네가 성리 그룹에 있는 한, 회장님은 어떻게든 우리 관계를
지금 그 꽃은 이미 시들어 죽어버리고 말았다. 다 죽은 꽃에 뒤늦게 찾아온 햇빛과 보살핌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성유리는 다시 눈을 감았다.하지만 그 순간, 눈을 감으려던 성유리는 화장대 위에 놓여 있는 물건을 발견했다.성유리의 기억이 맞다면 그것은 그녀가 애용하던 브랜드의 스킨케어 제품이었다.뒤이어 창가에 묶여 있는 커튼 끈과 맞은 편 드레스룸의 유리문 너머 걸려 있는 익숙한 옷가지도 눈에 들어왔다.그제야 성유리는 자신이 이곳에 남겨두고 갔던 물건들을 박한빈이 다 옮겨놓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사실 그 물건들은 성유리의 것이 아니었다.옷들은 성유리가 박 대표의 아내라는 칭호에 걸맞을 수 있게 김서영이 사준 옷들이었다. 자신의 돈으로 산 것이 아니라 떠날 때도 굳이 챙겨가지 않았던 것이다.그리고 스킨케어 제품들도... 아마 이젠 유통기한이 다 지나지 않았을까?성유리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욕실에서 들려오던 물소리가 멈췄다.그녀는 생각하는 것을 멈춘 채 눈을 질끈 감았다.어둠 속에서 박한빈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성유리의 옆에 자리 잡고 누웠다.샤워를 금방 마치고 나온 그는 상쾌한 향기를 풍기며 성유리의 허리를 감싼 팔에 점점 힘을 주었다.둘의 피부가 조금의 틈도 없이 단단히 맞닿았다.하지만 박한빈은 더 가까이 붙으려는 듯 힘을 더 주더니 팔을 더 세게 조여왔다. 마치 성유리를 자신의 육체에 완전히 새기기라도 할 것 같았다.그 엄청난 힘에 성유리는 숨을 제대로 쉬기조차 버거웠다.참다못한 성유리가 박한빈의 손등을 몇 번 꼬집으며 말했다.“놔! 아파!”그녀는 여전히 이를 악문 채 말했다.그 말에 박한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팔의 힘을 어느 정도 느슨하게 풀더니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하지만 그의 몸은 여전히 성유리에게 밀착해 있었고 입술은 수시로 그녀의 피부에 댄 채 가볍게 키스했다.성유리는 박한빈에게 개새끼냐고 묻고 싶었다.하지만 조금 전 그의 뺨을 후려갈겼을 때, 오히려 즐겁
성유리는 자신이 다시 도연제로 돌아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이곳을 떠나던 그 날, 다시 여기로 돌아올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다.저택에서 일하던 직원들은 박한빈이 모두 내보낸 듯했고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섰을 때, 집안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박한빈은 성유리를 데리고 곧장 2층으로 올라갔다.안방의 문이 그에 의해 열렸다.안의 가구 배치가 예전보다 조금 달라진 듯했지만 성유리가 자세히 살펴보기도 전에 박한빈은 그녀를 침대에 밀어 눕혔다.여기까지 오는 동안 그는 표정을 굳힌 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그의 행동에서는 다정함이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이런 상황을 이미 예측한 성유리도 그다지 놀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아무런 저항의 의지도 보이지 않은 채 무표정한 얼굴로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성유리의 무반응이 박한빈을 더욱 불쾌하게 만들기라도 한 듯 그는 고개를 숙이더니 그녀의 목을 세게 물었다.단순한 애무가 아니라 정말 힘껏 문 것이었다.박한빈의 이빨이 피부를 뚫어 피가 새어 나오는 것이 생생히 느껴졌다.성유리는 참을 수 없는 고통에 신음하며 손을 들어 박한빈의 뺨을 힘껏 후려갈겼다.그녀의 손에는 힘이 잔뜩 실려 있었다.며칠 동안 쌓여왔던 모든 분노와 억울함이 이 한 대에 실려 박한빈의 뺨에 닿았다.그렇게 새하얀 그의 얼굴에는 빨간 손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그 순간, 마음이 약해진 성유리는 자신이 너무 심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 출근을 해야 하는 사람인데, 이런 얼굴로 출근한다면 분명 모두의 이목을 끌 게 뻔했다.하지만 박한빈은 그런 것쯤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보였다.성유리가 박한빈의 뺨을 내리칠 때, 그는 오히려 웃고 있었다.그 반응에 당황한 성유리는 그저 멍하니 있을 수밖에 없었다.이윽고 그녀의 입에서 욕이 흘러나왔다.“병신.”박한빈은 성유리가 무슨 말을 하든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조금 전보다 훨씬 부드러워진 손길로 그녀를 매만졌다.하지만 그런 다정함이 성유리는
“성...”먼저 입을 연 쪽은 연정우였지만 성유리는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두세 걸음 만에 박한빈의 앞으로 다가가 말했다.“갑시다.”그녀의 목소리는 어딘가 쉬어 있었다.박한빈이 눈을 가늘게 떴다.성유리는 더 생각하지 않고 손을 뻗어 박한빈의 손을 잡아끌었다.박한빈은 저항하지 않은 채 성유리를 따라가려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자리를 뜨려 하던 순간, 연정우가 뒤늦게 정신을 차린 듯 성유리의 다른 한 손을 덥석 잡았다.그 행동에 박한빈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지만 성유리가 그보다 한발 빨리 연정우를 돌아보며 말했다.“너무 고민할 필요 없어. 나도... 널 선택하지 않았으니까.”성유리가 말을 이었다.“지금 성리 그룹이 어떤 상황인지 정우 씨도 잘 알잖아. 이런 상황에 난 회사에게 이익이 되는 쪽으로 가는 수밖에 없어.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제 걱정할 필요 없겠네. 우리... 서로 미안해할 일은 없겠다. 결혼식은... 취소하자.”말을 마친 그녀는 자신의 손목을 잡고 있던 연정우의 손을 떼어냈다. 그러고는 박한빈의 손을 다시 쥐더니 계속해서 앞으로 걸어 나갔다.술집은 여전히 떠들썩했다.시끄러운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똑같은 유니폼을 입은 화려한 여자들과 환히 웃는 남자들 덕에 공기 중에는 유흥의 분위기가 가득 찼다.이곳에 바로 금성이었다.겉으로는 화려해 보이지만 사실은 차갑기 그지없는 도시였다.이곳에서 매일 누군가는 뭔가를 잃고, 누군가는 상처를 받겠지만 그 아무도 타인의 고통에 관심이 없다.시내 중심가, 그것도 가장 번화하기로 소문난 곳에서도 투자 버블로 인해 투신한 사람이 있었다.그 흩뿌려진 피와 사라진 생명은 사회 뉴스에 짧은 보도 한 줄로 남아 있었다.성유리 역시 그들 중 하나였을 뿐이다.작고 무력하기 짝이 없는 그런 존재.그러니 성유리는 자신이 그 어떤 것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을 바쳐 스스로 높은 자리까지 올라왔다고 생각했지만 박한빈의 손짓 한 번에 짓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