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유리의 말에 박한빈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만약 진짜로 그가 성유리를 많이 챙겨주는 말을 꺼냈다 해도 성유리의 짧은 한마디는 박한빈을 밤새 뒤척이게 할 수 있었다. 박한빈의 이런 모습을 상상만 하기만 해도 성유리는 기뻐할 것이 뻔했다. 성유리는 비록 자신의 말이 날카로운 비수와도 같기에 박한빈의 가슴에 꽂힌다면 그가 아파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성유리 또한 전에 이미 많은 상처를 받았기에 가슴에서 “피”가 멈추지를 않았었다. 그래서 성유리는 지금 자신보다 박한빈이 더 아파하기를 바랐고 고통에 몸부림치기를 원했다. 돌담길은 생각보다 더 걷기가 어려웠고 성유리는 자신의 발뒤꿈치에서 피가 흐르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던 성유리는 하이힐을 신은 채로 뚜벅뚜벅 앞으로 나아갔고 박한빈은 그녀의 뒤를 묵묵히 따라갔다. 비록 시골집이지만 안에 인테리어는 도시 부럽지 않은 고풍스러웠고 안에 들어서자마자 성유리는 벽에 걸려있는 그림 두 폭을 발견했다. 그림에 박혀있는 익숙한 도장을 본 성유리는 그 그림들이 안 작가의 작품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직원은 두 사람을 조용한 방으로 안내해 주며 이 식당을 간단하게 소개해 줬다. 식당에서 들여오는 모든 식재는 다 뒷산에 있는 양식장에서 생산한 것이고 해산물이든 육류든 불문하고 현장에서 직접 잡아 신선한 상태를 유지한다고 말했다. 직원은 또 만약 손님이 원한다면 뒷산으로 직접 가서 먹을 식재료를 선택해도 된다고 말을 덧붙였다. “저기 있는 오리나 닭들 다 인삼을 먹으면서 큰 애들입니다. 정말 맛이 뛰어나죠.” 성유리는 인삼을 먹고 자란 닭들은 어느 정도로 맛이 좋은지는 몰랐지만 직원의 소개를 들으면 들을수록 식당 이름이 어딘가 이상했다. ‘닭들이 인삼을 먹고 자란다고? 그럼 이게 어떻게 시골집이야?’ 직원의 소개를 들으며 걷다 보니 어느새 방 입구까지 도착한 두 사람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던 조영준을 발견했다. 조영준은 혼자가 아니었는데 그의 옆에
“박 대표님 생각도 그러십니까? 그래도 연성 쪽 물이 좋고 산이 좋지요? 만약 이곳이 금성이었다면 이 정도로 못했을 겁니다. 이 닭곰탕 좀 드셔보십시오. 밖에서 파는 것이랑은 차원이 다릅니다. 이 식당도 아직 시 영업 중이긴 한데 시간 좀 지나면 완전 대박 날 겁니다.” 조영준은 식당에 관한 자세한 얘기와 칭찬을 오랫동안 쏟아냈다. 성유리는 나중에야 그 식당에 조영준도 투자를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리에 가만히 앉아 두 사람이 식당의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토론하는 것을 듣다 결국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입을 뗐다. “죄송한데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조영준은 성유리를 흘깃 쳐다보기만 할 뿐 대답하지 않았고 고개를 돌려 박한빈과의 대화를 이어갔다. 성유리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밖으로 나갔지만 커다란 식당 안에는 손님이 그들뿐인지라 한참을 화장실을 찾아 헤맸다. 돈을 많이 투자한 식당은 다른 곳보다 인테리어가 더욱 고급지고 독특했다. 화장실 천장에 있는 큰 샹들리에와 족히 5미터는 되는 듯한 통유리 거울을 본 성유리는 화장실이 아니라 고급 헬스장에 와있는 기분이 들었다.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화장을 고치려던 성유리는 화장실로 누군가가 들어오는 것을 알아챘다. 그 누군가를 발견하고도 성유리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으며 거울 속 자신만 쳐다보고 있었다. 성유정은 자연스럽게 성유리의 옆에 다가와 서더니 먼저 말을 걸었다. “유리 언니, 정말 대단하네요.” 그녀는 성유리를 힐끔힐끔 쳐다보며 계속 말했다. “이제는 연성까지 섭렵한 거예요? 그렇게 뻔뻔하게 한빈 오빠 옆에 붙어있는 거 말이에요. 도대체 어떻게 하면 할 수 있어요?” 성유리는 고치던 화장을 다 마친 뒤, 고개를 돌려 성유정을 쳐다보며 되물었다. “임신했다 하지 않았어? 근데 왜 조영준 씨랑 같이 있는 거야?” “제가 누구랑 같이 있든 그게 언니랑 무슨 상관인데요?” “그럼 내가 무슨 일을 하던 너랑은 무슨 상관이 있는 거지?” 성유리의 말에 성유정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갔
저녁 식사가 끝날 무렵, 시간은 이미 밤 10시에 가까워지고 있었다.조영준은 오늘 저녁에 나눈 얘기들에 매우 만족한 것 같았고 떠나기 전 성유리에게 먼저 그녀의 제안을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처음 만났을 때와 달리 말투나 태도가 선명하게 부드러워졌고 성유리는 밝은 미소를 보이며 조영준에게 응했다. 한편, 오늘 갑자기 이 자리에 나타난 성유정은 투명 인간처럼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았는데 차에 오를 때 박한빈을 한 번 쳐다보았었다. 성유정의 눈빛에는 억울함과 원망, 그리고 약간의 희망이 섞여 있었다. 박한빈이 그녀에게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성유리가 미처 보지 못했지만 성유정이 탄 조영준의 검은색 벤틀리는 곧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자 환하게 웃고 있던 성유리는 삽시간에 표정이 바뀌었고 옆에 있는 사람을 쳐다보지도 않더니 차를 다가갔다. 그러나 박한빈은 앞으로 걸어 나가는 그녀를 꽉 붙잡았다.“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성유리는 박한빈의 손을 곧바로 뿌리치며 물었다. “아침에 내가 했던 말들 박 대표님께서는 다 잊었나요?” 박한빈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천천히 대답했다. “안 잊었어. 근데 너 지금 술 마셨잖아, 운전하면 안 돼.” 성유리도 이 점을 알고 있었기에 박한빈의 말에 그녀는 짜증이 나는 듯 말했다. “대리기사님 불렀어요.” 그녀는 대답을 마치고는 바로 자기 차에 올라탔다. 성유리가 예상치도 못한 일은 바로 그 순간, 박한빈이 자신을 따라 그 차에 탄 것이다. “왜 이러시는 거예요? 당장 내려요!” “이곳에서 대리운전 찾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야.” 박한빈이 능글맞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방금 전화해 봤는데 시간이 늦었는지 오려고 하는 사람이 없더군.”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요? 내리시라고요!” “설마 나를 여기 혼자 두려는 거야?” “박 대표님, 농담하지 마세요. 대표님에게는 비서들이 많잖아요? 아무나 불러서 데리러 오라고 하면 될 텐데요.” “이 시간에 누굴 불러서 야근하게 하긴 좀 그렇지 않아?”
성유리가 정신을 차렸을 때, 박한빈은 이미 그녀의 입술에 진한 키스를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이미 이렇게 친밀한 행동을 많이 했었기에 서로의 몸을 아주 잘 알았다. 하지만 오늘에서야 그들은 성욕을 만족하는 것이 아닌 정말 사랑하는 연인들이 나누는 키스를 한 기분이 들었다. 박한빈은 평소와 달리 조금 부드럽게 성유리에게 키스했는데 마치 본인에게 몹시 소중한 보물을 다루고 있는 듯했다. 성유리는 갑자기 머리가 조금 무거워지는 느낌이 들어 저도 모르게 박한빈의 옷깃을 꼭 잡았다. 그 순간, 성유리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려 차 안의 적막을 깼다. 핸드폰 벨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든 성유리는 달콤하게 꾸고 있던 “꿈”에서 벗어났다. 박한빈은 울리는 벨 소리에 약간 흠칫했고 먼저 정신을 차린 성유리가 그를 힘껏 밀어냈다. 그리더니 박한빈에게 잡혀있던 자신의 발목을 빼냈고 침착하게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발신자는 다름 아닌 성유리가 불러놓았던 대리기사였다. “네. 지금 어디 계시는지 봤어요. 저 지금 차 안에 있거든요?” 성유리는 차창을 내려 상대의 신분을 확인하고는 그더러 운전석에 타라고 말했다. 제삼자의 등장에 뜨겁게 달아오르던 두 사람은 이내 평정심을 되찾았고 성유리는 술을 깨려고 창문을 더욱 밑으로 내렸다. “네 발은...” 박한빈은 성유리에게 아까 했던 말을 다시 하려고 했지만 성유리는 단호하게 그의 말을 끊어버렸다. “그냥 조금 다친 것뿐이에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꿈”에서 깬 성유리의 목소리는 차갑기 그지없었고 오늘 아침 엘리베이터 밖에서 박한빈에게 선을 넘지 말라고 경고했던 모습과 다른 점이 없었다. 박한빈은 여전히 자신을 경계하는 성유리에게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차가 막히는 시간이 아니었던 터라 대리기사는 30분도 채 안 걸려 드림 타운에 도착했고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성유리는 제일 먼저 차에서 내렸고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문득 발걸음을 멈추며 뒤돌아봤다. “왜 그래?” 박한
성유리는 박한빈에게 업인 채 집에 들어섰다가 입구에서 그에게 말했다. “이제 저 좀 내려놔 주세요.” 평온한 말투로 말하는 성유리에게서는 조금 전, 발이 아프다고 약한 모습을 보이던 성유리와는 다른 사람 같아 보였다. 박한빈은 성유리가 일부로 더 아픈 척, 약한 척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는 성유리가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처럼 굴며 그녀의 뜻대로 짜여진 “각본”에 놀아났다. 성유리의 말에도 박한빈은 그녀를 내려줄 생각이 없었고 기다리던 성유리는 약간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재촉했다. “빨리요! 저 좀 내려놓으시라니까요?” “발 아프다며?” 박한빈은 능청맞게 대답했다. “곧 도착인데 좀 더 업혀있지 그래?” “이미 좀 전에 다 보셨잖아요.” 성유리는 박한빈이 각본대로 행동할 겨를도 주지 않으며 단도직입적으로 입을 열었다. “성유정이 지하 주차장에 숨어있었다고요.” “응. 나도 봤어.” “그래서 제가 갑자기 업어달라고 한 거예요.” “응. 그것도 알고.” 성유리는 자신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대한 원인을 다 말해줬지만 박한빈은 여전히 그녀를 내려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물더니 박한빈에게 물었다. “그래서 이제야 잘 아시겠어요? 저는 지금 박한빈 씨를 이용하기 위해 이러는 거라고요.” “잘 알겠어. 근데 난 상관없는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하는 박한빈을 보며 성유리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박한빈이 이럴 리가 없다고 생각해 당황했다. 집안으로 들어선 박한빈은 제일 먼저 허리를 숙이고는 성유리의 하이힐을 벗겨주었다. 조금 전에 차 안에서 벌어졌던 일이 떠오른 성유리는 무의식적으로 자기 발을 빼내려 했지만 박한빈은 힘을 더 주며 놓지 않았다. “놓으세요.” 성유리는 잔뜩 화가 난 표정을 지으며 박한빈에게 말했다. “약 발라줄게.” “저 혼자 바를 수 있어요.” 성유리가 뭐라고 하든 박한빈은 듣지도 않았고 약품 상자를 꺼내 들고 와 성유리의 발에 난 상처를 세심하게 처리해 주기
“그분을 도운다고요? 무열이가 성유정을 이용해 조영준 씨한테 잘 보이려 하는 건가요?” “그게 맞는지 아닌지는 나도 잘 몰라. 나랑 아무 상관이 없거든.” “박 대표님께서 성유정을 친 동생처럼 아끼셨잖아요. 동생이 그 지경까지 됐는데 마음도 안 아프세요?” 성유리의 말에 박한빈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더니 고개를 들어 성유리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나 혼자 불필요한 질투를 하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누구도 똑같네.” “누가요?” 성유리는 아무것도 모르는 순수한 아이처럼 박한빈에게 물었다. 박한빈도 그런 성유리의 장단에 맞춰주며 대답했다. “너는 지금 유정이가 조영준 씨한테 괜한 말을 해서 이번 프로젝트를 망칠까 봐 그러지?” “...” 성유리는 명확한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박한빈은 그녀의 대답을 들은 것 같았다. 박한빈은 손에 들고 있던 소독약을 내려놓으며 계속 말했다. “아예 가능성이 없는 일은 아니긴 해.” 성유리는 입술을 오므리고 있다 박한빈에게 물었다. “조영준 씨가 오늘 식사 자리에서 보인 태도로 보면 성유정의 말을 들어줄 것 같지는 않던데요?” “그 사람이 유정이를 데리고 식사 자리에 나왔다는 것만으로도 일종의 태도라고 할 수 있지.” 만약 정말 박한빈의 말이 사실이라면 성유리에게 좋을 점이 없었기에 그녀는 입을 꾹 닫아버렸다. 비록 연성에는 연성 은행을 제외하고도 다른 은행들이 있었지만 조영준의 권력은 그중에서도 제일 셌다. 성유정이 만약 조영준의 옆에 딱 붙어서 그렇고 그런 말들로 유혹한다면 성유리도 섣불리 행동하기 어려울 것이다. 성유리는 절대로 그런 일을 용납할 수 없었고 저도 모르게 표정이 굳었다. “걱정돼?” 그때, 박한빈이 물었다. 성유리는 마치 쓸데없는 물음을 왜 묻느냐는 듯 박한빈을 째려보았다. “유정이는 권력이 센 사람 옆에 붙어서 아부하면서 자기가 얻으려는 물건을 다 얻잖아. 근데 넌 왜 안 그러는데?” 박한빈은 성유리에게 물으며 발목을 잡고 있던 손을 천천히 위로 올리
성유리는 소파에 정자세로 누워있었다. 거실에 켜져 있는 환한 불빛을 쳐다보고 있던 성유리는 눈이 부셔 저도 모르게 눈물이 고였고 두 주먹을 꼭 쥐었다. 이렇게 했는데도 방법이 없자 결국 성유리는 아래로 손을 내려 박한빈의 머리를 감쌌다. 이성을 잃은 두 사람이지만 성유리는 그래도 중요한 일은 잊어버리지 않았다. 박한빈이 그녀를 번쩍 안아 올릴 때, 성유리는 정신을 다잡고 입을 열었다. “저를 어떻게 도와주실 건데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 박한빈은 뚜벅뚜벅 어디론가 걸어가기만 했다. 성유리는 마음이 조급해져 박한빈의 옷깃을 꽉 잡으며 다시 물었다. “박한빈 씨, 지금 혹시 저를 속인 거예요?” 박한빈은 성유리를 침대 위로 툭 내려놓더니 그녀의 위에 올라타며 대답했다. “유리야, 너무 조급해하는 거 아니야?” “말했잖아. 내가 제안한 조건을 허락하면 들어준다고. 근데 지금 아무것도 안 했는데 벌써 이러시면 어떡하나?” 박한빈은 성유리에게 경고를 하듯 말했지만 성유리는 그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으며 되물었다. “만약 조금 있다가 모르는척 하고 저를 무시하면 저는 어떡하는데요? 그때는 어떻게 되는 거죠?” “그럼 그냥 네 운이 안 좋다고 생각해야지.” “박...” 성유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박한빈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에 진한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 방금 전 일이 떠오른 성유리는 박한빈과 이런 행동을 하기가 싫어 거부하려 했지만 그는 성유리의 귓가에 이런 말을 했다. “이젠 좀 알겠어? 아직도 맛을 못 느꼈나? 달콤하지 않아?” 그의 말에 성유리는 주저하지도 않고 박한빈의 입술을 막아버렸다. 이빨을 꽉 깨물고 박한빈을 째려보는 성유지만 빨갛게 달아오른 두 볼과 귀는 전혀 설득력이 없었다. 박한빈은 아무런 말도 없이 성유리의 손을 살짝 잡더니 그녀 손에 살짝 뽀뽀했다. 부드럽게 뽀뽀를 하는 박한빈이지만 다른 행동들은 완전 달랐다. 성유리는 원래 발뒤꿈치에서만 고통이 느껴졌지만 2시간 뒤, 무릎도 새빨갛게 변해 샤워를 할
조영준의 태도는 어젯밤보다 확연히 좋아졌다. 몇 개의 문제만 말을 하던 조영준은 성유리에게 일주일 내로 이에 맞는 대답을 해주겠다며 약속했다. 업계에서 이 정도의 속도는 이미 아주 빠르다고 평가되었고 성유리는 박한빈이 자기 몰래 무슨 짓을 벌였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조영준과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티를 내지 않았고 그저 옅은 미소만 지으며 조영준에게 나중에 밥이라도 사겠다고 말했다. “허허. 알겠습니다.” 조영준 또한 성유리의 말에 시원하게 동의했고 그곳을 빠져나올 때, 정민재는 연신 감탄을 하며 성유리에게 말했다. “은행장님 생각보다 사람이 좋으십니다. 게다가 하신 말씀 다 예의상 하는 말이 아닌 것 같던데... 은행장님이시면 이런 프로젝트 하나는 손가락만 까딱해도 되지 않습니까?” “그래도 과정은 건너뛰면 안 되잖아요.” 성유리는 핸드폰으로 새로 뜬 뉴스를 보며 정민재의 말에 아무 생각 없이 대답했고 차 안은 순식간에 정적이 흘렀다. 이상한 분위기에 성유리가 고개를 들자 정민재가 아까부터 자신을 의미심장하게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성 대표님, 왜 지금 이미 승패를 아시는 사람처럼 말씀하십니까? 전에는 분명 도대체 저 큰 산을 어떻게 넘어야 하냐고 막 힘들어하셨는데?” “하룻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뭐 하늘에서 신선이라도 나타나 저희를 도와줬나요?” 성유리는 정민재가 호기심이 가득한 사람일 뿐 악의는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말에 대답해 주기가 싫었고 조용히 운전해라는 말을 하려고 했다. 그 순간, 정민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신선인지 뭔지는 몰라도 저희한테는 정말 좋은 일입니다. 은행장님은 절대로 이렇게 쉬운 분이 아니라고 들었는데... 사람들 몰래 뒤에서 어떤 짓을 벌이고 다니는지 소문이 무성합니다.” 정민재의 말에 성유리는 입을 꾹 닫아버렸다. 한참 뒤, 성유리는 정민재를 똑바로 주시하며 물었다. “말해 봐요. 박한빈 씨가 뭐로 정민재 씨를 꼬드겼는지.” “그럴 리가요!” 정
“미안해요. 제가 괜히...”아라가 막 사과하려는 찰나, 그들 등 뒤에 앉아 있던 남자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성유리의 코앞에 손가락을 겨누었다.“아니, 어떻게 이렇게 냉혈하고 무정할 수가 있습니까?”남자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는 바람에 성유리는 깜짝 놀라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아직 상황 파악도 못 했을 때 알리는 이미 그녀 앞까지 다가온 상태였다.“지금 아라 씨가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안 보이십니까? 당신이 도와주지 않으면 형한테 그대로 죽어버릴지도 모릅니다. 아라 씨가 전에 당신 목숨까지 살려줬다는 거, 잊었어요?”남자의 얼굴은 분노로 물들어 있었고 성유리를 바라보는 눈빛은 마치 자신이 엄청난 배신을 당한 피해자인 것처럼 절절했다.성유리는 잠시 눈을 깜빡이더니 차분하게 되물었다.“그렇게 생각하고 계신다면 왜 당신은 안 도와주는 거죠?”“전...”알리는 한순간 말문이 막혔으니 곧 정신을 차리고 되받아쳤다.“당신들 일에 제가 왜 끼어들어야 합니까? 전 돈이 남아도는 줄 알아요?”“그 사람은 당신 친형이잖아요. 당신이 끼는 게 오히려 더 자연스러운 일 아닌가요? 그리고 당신이 금성에 온 것도 이 일 때문 아닌가요?”성유리는 다툴 생각은 없었고 그저 이성적으로 말했을 뿐이었다.오히려 어조는 담담했고 눈빛엔 약간의 의문이 섞여 있었다.하지만 알리는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못 했고 성유리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아라를 바라보며 말했다.“이번 일에 도와주지 못해서 정말 미안해요. 하지만 저는... 이 일은 아라 씨가 가족들과 먼저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게 더 맞다고 생각해요.”아라는 말이 없었다.성유리도 더 머물지 않고 조용히 자신의 짐을 챙겨 일어섰다.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알리가 그 뒤를 따라 나올 줄은.처음엔 또다시 성유리를 욕하려는 줄 알았지만 예상과 달리 알리는 비웃듯 한마디를 툭 던졌다.“위선자, 가식덩어리!”알리의 말을 성유리는 아예 못 들은 척 그냥 걸음을 옮겼다.자신이 무시당한 것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자리
아라와 성유리는 금성의 한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문을 막 들어서자 성유리는 아라 목에 감겨 있는 스카프를 보고 바로 눈치를 챘다.“그건... 왜 그래요?”아라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조용히 스카프를 풀었고 그 아래로는 뚜렷하게 남은 손자국이 드러났다.이미 이틀이나 지났건만 그 자국은 여전히 선명해서 보는 이로 하여금 경악을 금치 못하게 만들었다.그리고 그 자국은 에릭이 당시 얼마나 강하게 목을 졸랐는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증거였다.선명하게 남은 자국을 본 성유리의 얼굴도 바로 굳어졌고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미안해요. 원래 유리 씨한테 이런 말 하려고 한 건 아닌데 솔직히 지금... 누구한테도 털어놓을 데가 없어서...”말하는 아라의 눈가가 서서히 붉어지기 시작했다.“저희 가족은 제 처지를 전혀 이해 못 해요. 아니,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죠. 에릭 씨한테 조금이라도 거슬리는 말을 하는 걸 두려워하고요. 그들한테 중요한 건 제가 에릭 씨랑 빨리 결혼해서 뭔가를 얻는 것뿐이에요.”“제가 행복한지, 이 결혼을 원하는지... 그런 건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요.”아라가 처한 상황을 성유리는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 그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었지만 지금 당장은 그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며칠 전... 제가 에릭 씨한테 이별 통보를 했고 그 사람도 동의했어요.”아라의 말에 성유리는 놀랐지만 이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참 잘됐네요. 그럼 이제...”하지만 아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그런데... 그 사람이 저희 부모님께 이미 결혼 자금으로 돈을 송금했거든요. 에릭 씨는 제가 파혼을 원한다면 그 돈을 전액 돌려줘야 한다는 거예요. 하지만 그 돈은 이미 부모님이 다 써버렸고... 지금 제가 그 돈을 달라고 해도 당연히 안 줄 거고...”여기까지 말했을 때 아라의 의도는 너무도 명확했다.성유리가 아직 입을 떼기 전에 아라가 계속 말했다.“그러니까... 유리 씨가 저 좀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아라의 목소리는 점점 더 갈라졌다.
아라의 얼굴빛이 순식간에 변하더니 손으로 그의 팔뚝을 붙잡으며 본능적으로 몸을 비틀어 벗어나려 했다.하지만 에릭은 아라에게 그런 기회를 주지 않았고 오히려 그녀를 붙잡고 있는 손에 더 힘을 주었다.그렇게 아라의 숨이 점점 끊겼고 결국 마지막에는 힘없이 바닥으로 쓰러졌다.의식이 점점 희미해지는 와중에도 아라는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비록 지금 죽음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었지만 그녀가 느낀 건... 허무함뿐이었다.설마 자기 인생이 누군가에게 목이 졸려 죽는 걸로 끝날 줄 누가 알았겠는가?그렇지만 이게 또 나쁘지만은 않았다. 어쩌면 귀찮은 일들을 줄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어차피 집에서는 파혼을 받아들일 리 없었고 에릭의 태도 역시 결혼을 계속 유지하겠다는 쪽은 아닌 듯했다.그렇다고 아라는 평생을 에릭의 ‘부속품’처럼 살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렇게 죽는 것도 어쩌면 자신에게는 더 나은 선택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그렇게 생각하는 찰나, 에릭이 갑자기 손에 힘을 풀었다.공기가 한순간에 밀려 들어오며 폐를 터뜨릴 듯 부풀게 만들었다.아라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목을 부여잡은 채 격하게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숨을 너무 오래 참았던 탓에 눈물과 콧물이 뒤섞여 얼굴이 엉망이 되었고 아라의 모습은 더없이 초라하고 처참했다.그러나 에릭은 힘들어하는 아라를 한 번도 쳐다보지 않은 채 냉정하게 말했다.“파혼하고 싶다고? 좋아. 해.”예상치 못한 에릭의 대답에 아라는 움찔하더니 눈을 번쩍 떴다.“대신, 내가 준 1억 돌려줘.”...“알리!”여자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오자 알리는 발걸음을 뚝 멈추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이내 다가오는 여자를 본 순간, 그는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곧 웃음을 터뜨렸다.“누가 당신한테 제 이름을 부르라고 했습니까? 말해두는데 당신이 설령 우리 형이랑 결혼한다고 해도 소용없습니다. 전 절대 당신 같은 여자를 형수로 인정하지 않을 거고 우리 부모님도 당신을 받아들일 일 없으니까.”알리의 말투는 한없이 차가웠
아라는 터벅터벅 거리를 걸어가고 있었다.그녀의 뺨에 있던 붉은 자국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여전히 하얀 피부 위에 눈에 띄게 남아 있었다.에릭은 그 시각 호텔에 있었다.그는 아라를 보고 처음에는 잠시 멈칫하다가 금세 눈빛이 다시 싸늘하게 식더니 물었다.“이게 무슨 일이야? 누가 이런 거야?”아라는 에릭의 반응을 보고 알았다. 그는 자신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소유물이 피해를 입은 것에 대한 반응을 보였을 뿐이었다.진정으로 자신을 걱정했다면 예전에 자신이 계단에서 떨어졌을 때도 그런 표정을 지었을 리 없었고 술집에서 자신에게 술을 퍼붓기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런 행동들이야말로 에릭이 자신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증거였다.지금 에릭이 아라의 얼굴의 붉은 자국에 대해 신경을 쓰는 이유는 단지 자신이 소유한 것에 무언가가 손을 대었다는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었다.이것은 아라가 원하는 삶이 아니었다.그녀는 자기가 전혀 무죄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에릭을 속인 것도 사실, 자신이 자발적으로 한 일이었다.그때는 단지 주성운의 병원비를 빨리 마련하고 싶었을 뿐이었다.아라는 자신이 잘못된 방법을 쓴 것이 맞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릭에게도 충분히 마음을 다했다고 생각했다.결국 그것은 하나의 거래였으니 아라는 에릭에게 미안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어차피 에릭은 전에 다른 여자들에게도 그렇게 했던 사람이었지 않나?그저 자신도 그 많은 여자들 중 하나가 되고 싶었던 것뿐이었다.그러나 아라는 한 가지를 깜빡하고 있었다.자신의 무심함이 오히려 에릭의 소유욕과 승부욕을 자극하게 될 거라는 사실을.결국 아라의 모든 예상을 뒤덮고 상황은 이렇게 된 것이다.“누가 그랬는지 말해줘.”에릭이 다시 물었다.그의 목소리는 이미 짜증이 섞인 듯 들렸고 미간을 찌푸리며 아라를 바라보고 있었다.“저희 가족이요.”아라가 순수히 대답했지만 에릭의 얼굴에선 아무런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에릭은 자신이 이미 결혼 예물까지 보냈으니 아라는 이미 자신의 소유물
“싫어요.”성유리는 생각할 것도 없이 단칼에 거절했다.그러자 박한빈의 표정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왜?”“그때 찍은 사진 안 예뻐요.”“그럼 다시 찍자.”“우리 결혼한 지가 얼마나 됐는데 이제 와서 다시 찍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나는 의미 있다고 보는데.”“당신 원래 사진 찍는 거 싫어하잖아요?”성유리가 의아한 얼굴로 묻자 박한빈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그녀는 그의 속내를 간파한 듯 미소를 지었다.“박한빈 씨, 뭐든지 남이 가지고 있는 건 다 가져야겠어요? 애처럼 굴지 마세요.”박한빈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다 손에 들고 있던 청첩장을 옆으로 휙 던졌다.그리고는 외투를 거칠게 벗어던졌다.성유리는 그 행동의 의미를 순간적으로 깨달았고 이내 본능적으로 입을 열었다.“찍어요. 다시 찍자고요. 저희 내일 당장 가서 찍어요.”...아라는 요즘 결혼 준비 때문에 사실상 반강제로 집에 갇혀 지내고 있었다.에릭이 보낸 200억이나 되는 예물이 이미 입금되었다.그 돈으로 아라의 가족은 즉시 새집을 샀고 아버지는 새 차까지 뽑았다.평소엔 거들떠보지도 않던 친척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집에 찾아왔다.거실에서는 그들이 떠들어대는 소리가 천장을 뚫을 기세였다.“내가 뭐랬어? 아라는 딱 봐도 크게 될 애라고! 해외 나간 지 얼마나 됐다고 이렇게 좋은 신랑감을 데려와?”“그러게 말이야. 형, 이런 사위가 있으면 노후 걱정 끝난 거 아니야?”“하하, 난 그냥 우리 딸 미래를 위해서 한 거지!”아라의 아버지는 흡족한 듯 계속 말했다.“솔직히, 난 우리 딸이 어디 멀리 가는 것도 싫어했어. 그래서 가까운 데서 결혼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애가 직접 데려온 사람이 외국인인 데다 너무 잘해주니까 어쩌겠어? 거절할 수가 없지!”“거절? 그런 걸 거절하는 게 바보지!”“맞아! 이렇게 좋은 결혼... 남들은 꿈도 못 꾸는걸!”“근데 말이야, 아직 형 사위를 직접 본 적이 없네? 이왕 다 모인 김에 같이 식사라도 한 끼 할까?”“식사는 무슨,
성유리가 마련한 집은 작지만 아늑했다.하지만 층이 낮아 창가에 서도 제대로 된 풍경이나 달빛조차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박한빈의 팔을 힘주어 움켜쥐었는데 목소리는 이미 살짝 쉰 상태였다.사실 성유리는 박한빈의 화가 전혀 풀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조금 전 보였던 불쌍한 척과 반성하는 태도는 결국 밀고 당기기의 한 수였을 뿐이었다.성유리는 다 봤다.손등의 작은 상처 외엔 몸 어디에도 멍 하나 없었다.심지어 그 상처도 벽에 일부러 긁어서 만든 걸지도 몰랐다.지금의 박한빈 성격이라면 충분히 가능했다.그가 원하는 건 단 하나였다.성유리가 안심하고 자신을 집에 들여보내는 것.일단 문을 열어준 순간, 주도권은 박한빈 것이었다.그리고 그는 충분히, 아주 충분히 성유리에게서 ‘보상’을 받아 갔다.바로 지금처럼.성유리는 이미 여러 번 머리까지 저으며 살려달라고 애원했다.하지만 박한빈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점점 더 거칠게, 센 힘으로 성유리를 탐했고 그녀의 생사조차 신경 쓰지 않았다.하는 수 없이 성유리는 그날 밤 박한빈이 듣기 좋아하는 말을 수없이 내뱉었다.다음 날 아침, 스스로 했던 말을 떠올려도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였다.반면, 박한빈은 대단히 만족한 표정으로 말했다.“집 괜찮네. 앞으로 종종 와야겠다.”그 말에 성유리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박한빈이 떠난 뒤, 제일 먼저 한 일은 도어락 비밀번호를 바꾸는 것이었다.그날 밤, 정말 박한빈과 에릭이 싸웠는지는 성유리도 알 수 없었다.다만, 확실한 건 그날 이후 두 사람은 거의 완전히 연락을 끊었다는 것이었다.그리고 에릭과 아라의 결혼 준비는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성유리는 이미 청첩장을 받아 두었는데 보낸 사람은 다름 아닌 아라였다.청첩장 안에는 그들과 함께 찍은 웨딩사진도 들어 있었다.사진 속 아라는 웨딩드레스를 입고 의자에 앉아 있었고 에릭은 그녀의 뒤에 서서 어깨에 가볍게 손을 올린 채 미소를 짓고 있었다.흔한 웨딩 촬영 포즈였지만 성유리는 어딘가 모
갑작스럽게 터진 박한빈의 웃음에 성유리는 멍해졌다.그러다 이내 마치 정신병자를 보는 듯한 눈빛으로 박한빈을 가만히 쳐다봤다.“너 이제 안 화났어?”박한빈이 묻자 성유리는 그제야 자신이 여전히 화가 난 상태여야 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심지어 집에 가는 것도 싫다고 선언한 상태였다.방금 박한빈이 괜히 상기시켜 주는 바람에 다시 감정을 끌어올리려던 순간, 박한빈은 갑자기 그녀를 확 끌어안았다.“오늘은 내가 잘못했어.”뜻밖에도 순순히 잘못을 인정하는 그의 태도에 성유리는 당황했다.“내가 널 너무 가뒀어.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해서 네가 하면 안 된다고 말한 것도 잘못이야.”“난 그냥 네가 너무 걱정됐어. 누군가 너를 속이거나, 혹시 또 위험한 일이 생길까 봐.”진심을 다해 말하는 박한빈을 본 성유리는 할 말을 잃었다.한참을 머뭇거리다 결국 그녀 또한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저도 잘못했어요.”“네가 뭘 잘못했는데?”박한빈은 성유리를 쓱 밀어내곤 그녀와 눈을 맞췄다.그 태도가 너무 명확했기에 성유리가 그의 의도를 모를 수 없었다.‘유도신문 같은 거였구나. 결국 나한테서 이런 대답을 들으려던 거였어.’하지만 이미 말을 꺼낸 이상 주워 담을 수도 없었다.“사실 저도 그런 곳을 좋아하진 않아요. 그냥... 아라 씨가 너무 불쌍해서 같이 간 거고요.”성유리는 자신이 말한 단어를 다시 떠올렸다.불쌍하다는 말, 그 말을 내뱉는 순간부터 성유리의 마음속에는 복잡한 감정이 얽히고 있었다.집안이 비슷해야 잘 어울린다는 어른들의 말과 사랑하기만 한다면 아무 문제 없다는 말은 어느 정도 정확했다.하지만 그런 문제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많이 발생하기 마련이다.마치 아라와 에릭처럼.그들의 차이는 너무도 컸다.그리고 아라의 부모는 에릭을 마치 ‘입장권’처럼 여겼다.결혼을 위한 거액의 지참금조차도 그들에게는 그저 돈벌이 수단이었다.그 결과, 아라는 점점 외딴섬처럼 고립되었다.혼자서는 견디기 힘든 상황에서 단순한 싱글 파티라는 명
성유리가 산 집은 사실 그리 크지 않았다.비록 그녀가 받은 저작권 수익이 적지는 않았지만 땅값이 비싼 금성에서 겨우 방 두 개짜리 작은 아파트 계약금 정도를 마련할 수 있을 뿐이었다.이 집에 박한빈은 한 번도 온 적이 없었다.그리고 성유리는 알았다.그가 이곳을 마음에 들어 할 리가 없다는걸.하지만 박한빈이 모르는 사이 성유리는 이곳을 자신만의 공간으로 잘 꾸며 놓았다.필요한 생활용품들은 모두 근처 마트에서 산 터라 세면을 마친 성유리는 바로 침대에 누웠다.이제야 비로소 자신의 공간이 생겼다.그러니까 마음이 편해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눈을 감고 한참 누워 있던 성유리는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어쩐지 어색했다.매일 밤 박한빈과 함께 있다가 오늘 처음으로 혼자 있는 침대가 이렇게 넓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게다가 새로 들여놓은 가구에서는 아직도 약간의 냄새가 났다.결국, 한참을 누워 있던 성유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성유리는 박한빈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려던 것은 아니었다.방금 술집 앞에서 그렇게 큰소리를 쳤는데 이제 와서 돌아가면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그저 잠이 안 와서 아래층 편의점에 가서 뭐라도 사 오려고 했을 뿐이다.하지만 문을 연 순간, 그 앞에 서 있는 박한빈과 마주쳤다.박한빈은 담배를 손에 들고 있었다.아직 피우던 상태였는데 성유리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놀란 듯 급히 담배를 비벼 끄며 변명했다.“나... 지금 막 다시 피우기 시작했어.”그리고는 얼른 담배를 손바닥 안에 꽉 쥐었다.“왜 나왔어?”성유리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다 작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언제부터 여기 계셨어요?”그렇지만 곧바로 성유리는 또 다른 걸 깨닫고 다시 물었다.“아니, 제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아셨죠?”“관리실에 알아봤어.”성유리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사실 박한빈에게 이걸 물어본 게 실수였다.여기는 금성이다.박한빈이 모르는 일이 있을 리가 없는 금성.아마 성유리가 이 집을 사자마자 관리사무소에서 바
박한빈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성유리는 이미 혼자 앞으로 걸어 나가고 있었다.“어디 가려고?”그는 급히 따라붙으며 물었다.“이제 집에 가야죠.”“나...”“당신이랑 같이 안 가요.”성유리는 단호하게 말했다.“전 제집으로 갈 거예요.”그녀가 말하는 집은 저작권 수익으로 스스로 마련한 집이었다.박한빈은 한때 성유리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굳이 네 명의로 집을 살 필요 있어? 내가 가진 부동산이 얼마든지 있는데? 네가 원하면 하나 넘겨줄 수도 있어.”하지만 성유리는 끝까지 자신의 명의로 집을 장만했다.박한빈은 그때는 그녀의 고집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제야 알 것 같았다.성유리는 어떤 식으로든 그에게 얽매이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예전에는 둘이 싸우면 김서영에게 갔었다.하지만 김서영이 아무리 그녀를 아낀다 해도 결국 박한빈의 어머니였다.이제는?성유리는 더 이상 그런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그녀는 술이 취한 상태라 운전을 할 수 없었기에 별다른 고민 없이 택시를 잡아타고 떠났다.박한빈은 차를 몰고 따라가려 했다.그런데 바로 그 순간 술집 입구에서 보안 요원들이 일제히 2층으로 뛰어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다급하게.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뻔했다.‘쟤가 또 난동을 부렸겠지.’성유리의 차가 멀어지는 것을 보던 박한빈은 짧은 고민 끝에 술집 안으로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역시 그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방 안은 이미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에릭은 테이블이며 술병이며 모조리 집어던졌고 그 자리에 있던 남자들은 처참한 몰골로 쓰러져 있었다.그리고 소파 한쪽에 앉아 있는 아라는 머리카락과 옷이 축축이 젖어 있었다.누가 봐도 에릭이 술을 끼얹은 것이었다.모든 분노를 쏟아낸 에릭은 이제 아라를 데리고 나가려 하고 있었다.하지만 술집 관계자들이 그렇게 쉽게 보내줄 리 없었다.에릭의 눈빛은 점점 더 차가워졌고 당장이라도 난폭하게 부딪칠 듯한 기세였다.그 순간, 박한빈이 앞으로 나섰다.그는 술집 매니저에게 조용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