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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8화

작가: 송진
last update 최신 업데이트: 2024-11-15 19:41:13
커다란 냄비에 담긴 면들은 양이 많을 뿐만 아니라 맛도 너무 없었다.

성유리는 지금까지 살면서 이 정도로 맛없는 음식을 먹어본 적이 없어 무척이나 당황했다.

결국 성유리는 몸을 일으켜 직접 박한빈에게 다시 면을 끓여주기를 선택했다.

박한빈은 성유리가 다시 요리를 하는 와중에도 계속 그녀의 곁에 서 있었다.

성유리가 입을 열어 박한빈에게 나가서 기다리라는 말을 하기도 전에 박한빈은 마치 성유리의 생각을 꿰뚫어 보기라도 하듯 먼저 말을 꺼냈다.

“옆에서 좀 봐두려고. 어떻게 만드는지는 알아야지.”

“박 대표님, 이런 일은 대표님 신분에 어울리지 않아요.”

성유리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대표님께서 원하신다면 이런 음식을 해줄 여자는 널리고 널렸잖아요.”

“나도 알아.”

박한빈은 성유리를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성유리는 아무 말도 없이 다시 끓인 면을 식탁 위에 내려놓고는 뒤돌아 방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오늘 밤에 연정우 씨랑 말은 했어?”

박한빈이 뒤돌아있는 성유리에게 물었다.

“우리 둘 사이 말이야.”

“네.”

“된대?”

“네.”

성유리의 박한빈이 귀찮은 듯 대충 대답을 해줬고 그는 더 이상 뭐라고 말을 걸지 몰랐다.

그녀는 이내 자기 방으로 돌아가 문을 닫았고 박한빈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지만 몸을 돌려 식탁 위에 있는 면을 본 순간, 또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박한빈은 성유리가 아직 자기에게 앙금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필경 전에 박한빈이 늘 성유리에게 상처를 주고 아프게 만들었으니까.

성유리가 박한빈에게 서운해하고 화를 내는 이유 또한 그녀가 박한빈을 신경 쓰고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박한빈은 성유리가 자신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은 것보다 그녀가 화를 내며 자신을 원망하는 것이 더 나았다.

지금 두 사람이 놓인 처지는 그냥 잠시일 뿐이라고 생각한 박한빈은 사냥감을 손에 넣으려면 천천히 다가가야 한다고 자신을 세뇌했다.

이 넓은 “초원”에서 “사냥감”에게 함부로 다가갔다가는 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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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이런 행동을 하는 건 단지 분풀이일 뿐일 거야.” 성유리가 사하나의 말을 뚝 끊어버리며 말했다. “나에게서 받은 좌절과 실망감을 이제 와서 나에게 되갚아주고 싶은 거겠지.” “하지만 제가 보기엔...” “만약 그 사람이 정말로 나를 아직도 좋아한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아이의 일을 가지고 나를 협박하진 않았을 거야.” 성유리가 단호하게 말을 이어갔다. “내가 지금 그의 말에 따르고 있는 것도 하늘이가 수술받을 기회를 얻기 위해서야. 이런 관계가 무슨 의미가 있겠어?” “그러니 사하나, 나와 그 사람은 정말로 끝난 사이야.” ... 어느새 밤이 다시 찾아왔다.솔직히 말해서 성유리는 이 시간이 가장 두려웠다. 휴대폰을 계속 들여다보면서 박한빈에게서 어떤 메시지가 올까 걱정했고 동시에 아무 메시지도 오지 않을까 봐 불안했다. 어쨌든 박한빈은 아직까지 수술 동의서에 서명을 하지 않은 상태였으니까. 하지만 그날 밤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음 날, 성유리는 왜 박한빈이 전날 자신에게 연락하지 않았는지를 깨달았다. 뉴스에서는 전날 밤 박한빈이 어떤 연회에 참석한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사진 속 박한빈의 옆에는 젊은 여자가 서 있었다. 화장이 조금 달라졌지만 성유리는 한눈에 그녀를 알아볼 수 있었다. 바로 얼마 전에 그와 함께 마트에 갔던 여자라는 사실을 말이다. 성유리에게 있어 함께 마트로 향하는 일은 꽤 친밀한 행위로 느껴졌다. 둘이 함께 살지 않는다면 마트에서 함께 필요한 물건을 고르며 자신들만의 공간을 꾸민다는 일은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성유리와 박한빈 사이에서는 단 한 번도 없었다. 박한빈은 항상 바빴다. 그의 옷은 계절마다 고급 맞춤 팀에서 직접 저택으로 보내졌고 생활용품 같은 사소한 물건에 시간을 쓰는 일을 가장 싫어했다. 하지만 결국 시간의 낭비라는 것도 박한빈의 생각에 따라 달라지는 일이었다. 어쩌면 어떤 사람과 함께라면 무엇을 하든 시간 낭비라고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을 것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498화

    “유리 언니? 성유리 씨!” 사하나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성유리는 비로소 정신을 차리더니 멍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 있어요?” 사하나가 잔뜩 찡그린 얼굴을 하며 물었다. “정신이 어디 외딴곳으로 나가 있는 것 같아요.” “나... 괜찮아.” “그런데 다크서클이 왜 이렇게 심해요? 어제는 집에 가서 푹 쉬겠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오히려 병원에서 밤을 새웠을 때보다 더 안 좋아 보이는데?” “그냥... 어젯밤에 잘 못 잤어.” 성유리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하늘이를 못 봐서 걱정돼서 그런가 봐.” “뭐가 걱정이세요? 여기 이렇게 의사랑 간호사가 많은데. 게다가 의사 선생님도 말했잖아요. 이식 수술만 잘되면 하늘이는 곧 완치돼서 퇴원할 거라고.” 사하나는 갑자기 뭔가가 생각난 듯 물었다. “그나저나 박한빈 씨는 언제 수술 동의서에 서명하러 오는데요? 그 말은 날카로운 화살이 되어 성유리의 가슴을 아프게 찔렀다. 그리고 자신의 말에 표정이 순식간에 변하는 성유리의 모습을 사하나가 놓칠 리 없었다. “왜 그래요? 설마... 박한빈 씨가 마음을 바꾼 건 아니죠?” “아니야.” “근데 이상하잖아요. 어제도 병원에 안 왔고 오늘도 안 왔어요. 이게 뭘 의미하는 건데요? 검사가 끝난 걸 모를 리 없잖아요. 그럼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거죠? 일부러 잘난 척하려고 그러는 건가? 언니한테 직접 와서 부탁하게 만들려고?” 성유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하나는 끌어 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한 듯 언성을 높이며 계속 말했다. “미쳤나 봐요! 하늘이가 자기 친자식인데! 언니가 뭘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뻔히 알면서도 이렇게 대한다고요? 이건 완전 고의적인데?” “도대체 뭐 하자는 거예요? 언니가 무릎 꿇고 빌기라도 바라는 건가요? 아님 자기 앞에서 사죄하면서 참회하라고? 정말...” 사하나의 말이 끝나기 전에 성유리가 그녀를 진정시키듯 입을 뗐다. “진정해.” 사하나와는 달리 성유리는 오히려 차분한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497화

    박한빈은 언제나 어딜 가도 주목받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성유리는 잘 알고 있다. 예전에도, 그리고 얼마 전에도 수많은 여자들이 그의 곁에 머물렀고 심지어 종래로 마트에 발을 들이지 않던 박한빈이 다른 여자와 함께 다니는 모습까지 보았었다. 박한빈이 원하기만 하면 그와 함께 침대에 올라가려는 여자들은 줄을 서 있을 것이다. 늘 인기가 많은 박한빈에게는 성유리를 제외하고도 다른 선택지가 많다. 그리고 자신은 그 많은 선택지 중에서 제일 좋은 선택이 될 리가 없었다. 예전에도 아니었으니 지금은 더더욱 아닐 것이 뻔했다. 그 순간, 박한빈의 몸이 굳어지더니 시선이 성유리의 흉터에 머물렀다. 성유리는 박한빈의 시선을 또렷이 느낄 수 있었고 무슨 원인에서인지 갑자기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입꼬리를 약간 올려 미소를 짓던 성유리가 먼저 말했다. “그래서 박한빈 씨는 계속하실 건가요? 확실하세요?” 성유리의 말이 끝나자 박한빈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깊고 어두워 성유리는 그의 감정을 읽을 수 없었다. 그녀가 뭔가를 더 말하려는 찰나, 그는 고개를 숙였고 이내 박한빈의 입술이 그녀의 흉터에 닿았다. 부드럽고 섬세한 감촉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성유리는 안색이 잔뜩 어두워지며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박한빈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를 단단히 눌러 제압했다. “당신...” 성유리는 뭔가 말하려 애썼지만 박한빈의 입술이 다시 그녀의 입술을 덮쳐 하려던 말을 막아버렸다. 이런 감정이 마지막으로 언제였는지 그녀는 이미 잊고 있었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고 통제할 수 없는 순간이었다. 사실 성유리는 오늘 박한빈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오늘 밤을 함께 보내면 내일 수술을 받아들일 것인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처음부터 말을 꺼내지 않은 이유는 박한빈이 끝까지 자신과 사랑을 나눌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유리가 알던 박한빈은 늘 완벽함을 추구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이 흉터를 보고도 아무렇지 않을 리가 없었다. 아니,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496화

    금세 담배 한 대를 다 피운 박한빈은 깊게 한숨을 내쉰 뒤, 다시 두 번째 담배에 불을 붙였다. 하지만 담배를 피우면 피울수록 박한빈의 기분은 더욱더 뒤숭숭해졌다. 욕실 안에서 끝도 없이 씻고 있는 성유리의 모습을 지켜보던 그는 결국 담배를 꺼버리고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박한빈이 손가락으로 문을 살짝 두드리자 또랑또랑한 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5분 줄 테니까 나와.” 말을 마친 박한빈은 바로 옆에 있는 침대에 앉더니 시선을 욕실 문에 고정했다. 그러자 안에서 들리던 물소리가 마침내 멈췄다. 성유리는 마치 안에서 휴대폰으로 시간을 재고 있었던 것처럼 정확히 5분이 다 되어가는 순간, 문을 살며시 열었다. 그녀의 가운으로 자신의 몸을 단단히 감싸고 있었고 이를 본 박한빈은 웃음을 터트리며 물었다. “꼭 이래야 해? 네 몸에서 내가 못 본 데가 어디 있다고?” 성유리는 고개를 숙인 채 땅바닥만 쳐다봤고 가운을 꽉 움켜쥔 손가락은 점점 더 창백해졌다. 박한빈은 지금 그녀가 폭발하기를 바랐다. 무엇이든 던지거나, 욕을 해도 되고 심지어는 자신을 물어뜯기라도 하길 바랐다. 그러나 성유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한참을 쭈뼛거리던 성유리는 몸에 걸친 가운을 한 번 더 단단히 붙잡으며 입을 열었다. “불 끄면 안 될까요?” “뭐라고?” “불... 끄고 싶어요.” 성유리의 목소리는 아주 낮은 데다가 떨리기까지 했다. 마치 박한빈이 너무 두렵다는 듯이. 박한빈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고 무표정한 얼굴로 손을 쭉 뻗어 그녀를 단숨에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성유리가 반응할 틈도 없이 그녀의 몸은 이미 침대 위에 눕혀졌고 부드러운 매트리스가 그녀의 등을 받치자 이내 그녀의 눈앞에는 박한빈의 잔뜩 찌푸려져 있는 얼굴이 보였다. 그는 몸을 숙여 그녀를 내려다보았고 길게 늘어진 앞머리가 성유리의 뺨을 스치자 그녀는 더욱 떨리기 시작했다. “끝까지 연기하려는 셈이야? 응?” 박한빈은 그런 성유리를 비웃으며 물었다. “내 아이까지 낳아준 몸인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495화

    이 층은 최고급 스위트룸이 있는 층이었다. 복도는 지나치게 조용했고 왠지 모를 스산함도 감돌았다. 성유리는 초인종을 누른 뒤 고개를 숙이고 자기 발을 바라보고 있었다. 병원에서만 지내던 최근, 그녀의 하얀 운동화에는 어느새 흙이 묻어 있었다. 그렇기에 지금 딛고 있는 고급스러운 브라운 카펫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그녀는 이곳에 있어선 안 되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여기 지금 성유리가 서 있는 이 세상은 그녀의 세계가 아니었다. 성유리는 자신이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렸는지 알 수 없었다. 몇 초일 수도, 아니면 아주 긴 십여 분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성유리는 그 시간이 한 세기처럼 길게 느껴졌을 뿐이었다. 손발이 저려오기 시작할 때쯤, 마침내 문이 스르르 열렸다. 그러나 문 너머의 사람을 본 순간, 성유리는 당장이라도 돌아서서 도망치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옆에 늘어져 있던 손으로 주먹을 꽉 쥐었고 커다랗게 뜬 눈으로 그를 살짝 바라봤다. 박한빈은 방금 욕실에서 나온 상태였는지 허리에는 흰 수건 하나만 걸려 있었고 머리카락은 아직 마르지 않아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 물방울은 하얗고 탄탄한 가슴을 타고 흘러내려 복근을 따라 아래로 이어졌다. 그의 헝클어진 머리칼은 앞머리가 길어 눈을 거의 덮을 정도였지만 그 안의 깊고 어두운 눈빛은 성유리에게 똑똑히 보였다. 아무 말 없이 문을 열어준 박한빈은 성유리를 본 체도 하지 않고 곧바로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몇 걸음 걸어가던 박한빈은 문득 무언가 떠오른 듯 다시 고개를 돌려 성유리를 바라봤다. 그녀는 여전히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고 박한빈은 눈을 게슴츠레 뜨며 먼저 물었다. “무슨 뜻이야?” 그의 말에 성유리는 순간 숨이 가빠졌고 박한빈에게 되물었다. “뭐가 무슨 뜻이에요?” 성유리의 말을 들은 박한빈은 웃음을 터뜨렸다. “성유리, 네가 지금 나한테 질문을 하고 있어?” 그녀는 그의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이내 박한빈은 벽에 몸을 기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494화

    박한빈의 검사 결과가 곧 나왔고 그 결과는 완벽히 일치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결과를 본 성유리는 편히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없었다. 어제 그와의 대화는 결코 순조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박한빈이 떠날 때 성유리는 분명 분노에 휩싸인 그의 표정을 보았었다. 그가 동원한 의료진과 그의 관계는 분명 아주 돈독해 보였으니 지금쯤 박한빈도 이미 결과를 확인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아직까지도 성유리에게 연락이 없었다. 성유리는 휴대폰을 손에 꼭 쥔 채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먼저 박한빈에게 전화를 걸기로 했다. 신호음이 한참이나 울렸고 그 시간이 길어질수록 성유리는 그가 전화를 받지 않을 것 같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러나 이내, 수화기 너머 박한빈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박한빈의 목소리는 원래 성유리에게 익숙했지만 이상하게도 그녀는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온몸이 떨려와 휴대폰을 더 꽉 쥐었다. 성유리는 입술을 몇 번이나 움찔거린 끝에 간신히 말을 꺼낼 수 있었다.  “저예요.” “알아.” 박한빈은 빠르게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는 평온했지만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성유리의 심장을 꽉 움켜쥐는 듯한 느낌이 들어 그녀는 힘들었다. 입술을 꾹 다문 그녀는 잠시 뜸을 들이다 조심스레 물었다. “결과 나왔어요. 박한빈 씨도 봤죠?” “응.” “그럼 언제쯤...” “성유리, 나 마음 바꿨어.” 그는 그녀의 말을 뚝 끊었다.사실 박한빈의 이런 태도 또한 성유리가 예상했던 바이기도 했다. 그러니 그의 말을 듣는 순간, 그녀는 그럴 줄 알았다는 생각이 들어 많이 놀라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심장은 여전히 빠르게 뛰었고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다. 잠시 침묵하던 성유리는 이를 악물며 천천히 물었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생각해 봤어. 네 눈에 내가 이렇게 비열하다면 내가 아무 문제 없이 수술을 받아주는 건 네 기대를 저버리는 일이겠지?” “박한빈 씨, 저는...” “변명하지 마. 어제 네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493화

    그리고 그때, 박한빈은 성유리가 왜 자신에게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사과를 한 건지 이해가 됐다. “내가 수술받지 않을까 봐 두려워?” 박한빈은 뒤돌아 성유리를 쳐다보며 물었다. 성유리는 침묵했지만 그 침묵 속에서 박한빈은 답을 알아냈다. 안색이 더 어두워진 박한빈은 너무 치가 떨려 이빨을 악물었고 그 과정에서 하마터면 이가 부서질 뻔했다. 성유리의 눈에 박한빈은 도대체 어떤 사람인 걸까? 냉철하고 이기적인 사람, 혹은 매정한 사람일까? 박한빈은 성유리를 죽일 듯 노려보다 다시 몸을 돌려 앞으로 걸어갔지만 속도는 현저히 느려졌다. 마치 온몸에 진이 빠진 듯 휘청거리며 걷던 박한빈은 성유리가 다가와 뭐라고 변명이라도 해주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뻔한 거짓말이라고 해도 지금 그는 성유리의 입에서 다른 대답을 듣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박한빈이 병원 밖을 나설 때까지도 그의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발걸음을 뚝 멈춘 그는 자신의 뒤를 멍하니 바라봤다. 운전기사가 다가와 그에게 말을 걸자 그제야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차 문을 열었다. 원래 계획대로 회사로 향하려 하던 박한빈은 잠시 고민하다 기사에게 말했다. “엔젤 월드로 갑시다.” 엔젤 월드, 그곳은 김서영이 현재 거주하는 곳이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별장은 김서영이 열심히 가꾼 정원 덕에 더 아늑해 보였고 2년 전 성유리와 심은 나무는 이미 많이 커 열매가 맺히기 시작했다. 박한빈이 별장 안으로 들어설 때, 김서영은 마침 나무에 비료를 주고 있었다. 인기척을 들은 김서영은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 “저쪽에 있는 삽 좀 가져다줄래요?” 박한빈은 김서영이 자신을 별장에 있는 도우미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는 말없이 삽을 건넸다. 손을 뻗어 삽을 건네받던 김서영은 귀신이라도 본 듯 깜짝 놀라며 물었다. “네가 왜 여기 있어? 요즘 바쁘다며? 어떻게 왔어?” 박한빈은 입술을 오므린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병원엔 가봤니?” 김서영이 박한빈에게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492화

    박한빈의 말을 성유리는 한참이 지나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 박한빈에게 물었다. “박한빈 씨, 지금 이게 무슨 뜻이죠?” “들은 대로.” 박한빈은 콧방귀를 뀌며 대답을 이어갔다. “아이한테 이름 지어준 거 확인했어. 네 성을 따른 것에 나도 반박하지는 않을게. 근데 아무리 네 성을 따랐다 해도 걔는 결국 내 아이야.” “하늘이가 다른 남자한테 아빠라고 부르는 꼴을 난 절대 봐주지 않을 거고.” “당연히 너도 아직은 젊으니까 재혼하겠다고 해도 말리지 않을게. 그렇지만 하늘이까지 데리고 결혼은 하지 마. 절대로 안 되니까. 알겠어?” 박한빈의 말이 끝나자 성유리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를 잘 아는 박한빈은 시선을 천천히 아래로 돌렸고 곧 꽉 쥔 성유리의 두 주먹을 발견했다. 어찌나 힘을 세게 주고 있는지 그녀는 지금 어깨까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박한빈은 성유리가 곧 노발대발 화를 내며 자신에게 험한 말을 내뱉을 줄 알았지만 성유리는 손에 힘을 풀더니 미소까지 지으며 입을 열었다. “오해가 있으신 모양이네요.” 박한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린 하늘이는 아무것도 몰라서 하는 말이에요. 어떻게 애 말을 철석같이 믿으세요?” “오늘 정우랑 만난 건 사실이지만 저희는 2년 동안 어떠한 일도 없었어요. 그런데 어떻게 이제 와서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될 수 있겠어요?” “다른 일에 대해서는... 제가 신경 쓸 겨를이 있다고 생각하세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당신이 하는 모든 걱정들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이게 아닌데?’ 박한빈이 생각한 성유리의 반응은 절대 이게 아니었다. 그녀는 지금 화를 내야 한다. 꼭 박한빈과 심하게 다투고 불만을 토로해야 한다. 하지만 왜 지금 성유리는 이리도 평온하게 말하고 있는 것일까? 박한빈은 성유리의 말을 듣고 나서도 전혀 안심되거나 기쁘지 않았다. 그때, 문득 박한빈은 자신이 전에 어디서 봤던 문장이 떠올랐다. 사람은 자신이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491화

    성유리는 하늘이의 기분을 맞춰주려 애를 썼고 덕분에 아이는 이내 즐거워하며 웃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퇴원하면 하고 싶은 일들을 차례차례 성유리에게 말해줬고 그녀는 옆에 앉아 아이의 말을 경청해줬다. 간호사가 들어와 약을 건네줄 때에도 하늘이는 떼도 안 쓰고 순순히 약을 복용했고 부작용 때문에 힘든지 침대에 누워 성유리의 손을 꽉 붙잡았다. 성유리는 그런 하늘이의 어깨를 다정하게 어루만져주며 아이가 좋아하는 노래를 불러주었다. 그녀의 자세는 어딘가 이상했지만 아이가 너무 편해하니 바꾸지도 않았다. 하늘이는 병원 병실에 있는 것이 너무 안정감이 없는 건지 눈을 떠서도, 눈을 감을 때도 성유리가 안 보이면 극도로 불안해했다. 그래서 성유리는 저려오는 다리와 팔을 애써 주무르며 하늘이 곁을 지켜야 했고 아이가 깊은 잠에 들어서야 천천히 팔을 뺐다. “성유리 씨.” 간병인은 옆에 조용히 앉아 있다 하늘이가 잠에 든 후, 성유리에게 다가와 조심스레 물었다. “밖에 어떤 사람이 계속 앉아 있던데 아시는 분이에요?” 성유리는 그 말에 깜짝 놀랐다.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지만 곧 애써 부정했다. 필경 박한빈이 어떤 사람인지 성유리는 잘 알고 있으니 말이다. 방금 전, 하늘이에게 문전박대를 당한 박한빈은 화가 나 바로 병원을 떠났다고 성유리는 생각했다. 그러나 병실 밖을 나가보니 예상과는 달리 박한빈이 그곳에 앉아 있었다. 성유리가 돌아왔을 때에도 그 의자에 앉아 있던 그였지만 현재는 태블릿도 보지 않은 채로 멍해 있는 모습이었다. 그녀는 망설이다 박한빈에게로 다가가며 먼저 말했다. “죄송해요.” 성유리의 목소리에 박한빈은 고개를 번쩍 들었고 눈빛은 마치 왜 사과를 하냐고 묻는 것 같았다. “하늘이가 요즘... 불안정해요. 일부로 그런 건 아닐 거예요. 그러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성유리는 박한빈에게 하려던 말을 이어갔고 그는 그녀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 갑자기 물었다. “연정우 씨도 하늘이를 만났어?” 성유리는 왜 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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