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여묵은 한쪽 무릎을 꿇고 있지만 여전히 물러서지 않았다. "공정성을 입증하기 위해 폐하께서는 형부를 통해 전북망을 심문하시고 그의 진술과 다른 사람들의 증언을 대조하여 사실을 밝혀주십시오. 신은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 이런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서경 사람들은 우리가 전쟁포로를 죽이고 마을을 학살한 일에 대해 우리보다 더 잘 알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전쟁의 총책임자인 전북망을 배제한다면 그들은 더욱 분노하며 저희 협상에 진정성이 없다고 여길 것입니다."그는 고개를 들고 강한 눈빛으로 숙청제를 바라보며 계속 말했다. "게다가 성릉관의 군사와 백성들은 실망할 것이고 폐하께서 심복 무장을 키우려는 의도가 따로 있기에 오랜 세월 성문을 지킨 노장에게 모든 죄를 덮어씌운다고 생각할 것입니다.""쾅!"술잔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숙청제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는데, 눈 속에는 엄청난 분노가 서렸다. "무엄하도다!"오 대반은 몸을 떨며 숙청제에게 진정하라고 청한 뒤 사여묵에게 말했다."왕야, 더는 폐하를 노하게 하지 마십시오."숙청제는 자리에서 일어나 한쪽 무릎을 꿇고 있는 사여묵을 위에서 차갑고 날카롭게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그동안 너의 공손한 태도는 모두 가식이었구나. 짐의 말을 거역하고 욕보이다니? 이런 일이 퍼지기라도 한다면 천하의 군사들이 짐에게 실망하지 않겠느냐? 네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말해보거라!"사여묵는 당당히 숙청제와 눈을 맞추며 말했다. "제가 무엇을 원하든지 모두 상국을 위한 것입니다. 도리어 여쭙고 싶습니다. 폐하께서는 신이 대체 무엇을 원한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평소보다 다른 사여묵의 모습에 숙청제는 화가 나기도 하고, 놀랍기도 했다. 비록 숙청제가 군권을 빼앗은 건 사실이지만 아직 군심을 얻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남강 전투 후, 숙청제는 사여묵이 군무를 맡지 못하게 하여 서서히 군대에서의 영향력을 잃게 하려 했지만 그 과정은 시간이 걸리기 마련이며 아직 목적에 도달할 수
숙청제는 손을 내려놓고 차갑게 말했다. “틀린 말이 아니다. 내가 새로운 무장을 키우려는 건 맞지만 짐은 어리석은 임금이 아니다. 아무리 새로운 인물을 키운다고 해도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한 노장들을 버릴 순 없다.”“헌데 내가 어찌 새로운 무장을 키우려는지 그가 정녕 모른단 말이냐? 북명군의 군권이 이제는 그에게 없지만 위신은 여전히 강하다. 남강 수복의 공은 마치 큰 산처럼 그를 지키고 있다. 나는 그를 움직일 수 없고 오히려 북명군이 나에게 위협을 가하고 있다.”하도 세게 쥔 탓에 주필이 그의 손에서 부러졌다. 숙청제는 붓을 책상 위에 던지고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짐은 북명왕이 역적이 되지 않을 거라 믿겠지만, 만약 그에게 진정 불순한 야망이 있다면 나는 그를 어찌해야 할꼬?”오 대반은 속으로 급히 머리를 굴리며 말했다. “폐하, 북명왕은 결코 반역할 마음이 없습니다. 그는 폐하의 아우입니다.”하지만 숙청제는 싸늘하게 답했다. “짐은 그가 당장 반역할 생각은 없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러나 고위직에 오래 있으면 어느 순간 다른 생각을 하게 되는 법이지. 나는 그를 경계하고 형제로서 싸우고 싶지 않으니 그가 그런 마음을 먹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렇지 않으면 나도 단호히 처리할 수밖에 없다.”사여묵은 숙청제와 대립하며 그를 분노하게 만들었지만 숙청제는 오히려 안도했다. 만약 그가 더 큰 계획이 있었다면 소 대장군의 일로 그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지금은 사여묵이 반역의 야망을 품고 있지 않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잠시 후, 전북망이 형부에 도착했고 이택이 직접 심문했다.전북망은 성릉관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숨김없이 고백했는데 그와 이방이 성릉관에서 사적인 관계가 있었다는 것도 솔직히 인정했다. 사실 그는 이미 빠져나갈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비록 황제가 그를 보호해 주고 있었지만 세상에 드러난 사실들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는 녹분성 작전의 장군이고 또 이방과도 관계를 가졌다. 그러니
이택은 날카롭게 말했다. “소 대장군께서 진성으로 돌아와 심문을 받는 것도 다 너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모든 죄를 뒤집어쓰길 바라는 거냐? 네가 어찌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누군가 그를 이 사건에서 빼려고 합니다. 누군가가요!” 이방은 마치 분노한 사자처럼 발버둥을 쳤으나 쇠사슬에 묶여 있는 탓에 쉽게 움직이지 못했다. “공정하지 않습니다! 그는 성릉관의 주장이었으니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합니다. 당신들은 하나같이 권세가 두려워 사여묵과 송석석에게 아첨하며 전북망을 죽이려 들지 않습니까? 그는 내가 마을을 학살한 일을 전혀 모릅니다. 전북망은 억울하게 누명을 쓴 거란 말입니다!”“전북망이 모른다면 소 대장군은 더더욱 알 리가 없다.” 이택은 콧방귀를 뀌며 주부에게 명령했다. “기록하거라. 이방은 전북망과 소 대장군이 모두 몰랐다고 진술했다는 것을.”“아니, 나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방이 큰 소리로 부인했지만, 이택은 목소리를 높일 뿐이었다. “여기 귀가 몇 개인데 감히 말을 바꾼단 말이냐?”이방은 입을 열다 말고 자기가 처한 상황을 깨닫고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눈에 숨겨진 교만과 불만을 애써 감췄다.이택은 그녀를 지켜보며 생각했다. 역시 왕야는 단호하다. 전북망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녀의 주장은 성립되지 않는다. 전북망이야말로 작전의 지휘관이었고 그가 몰랐다면 소 대장군은 더욱 알 리가 없다. 이방은 전북망의 부장이라 절대 독립적으로 소 대장군의 명령을 받을 수 없었다.사실 이방은 전에 전북망이 자신에게 감정이 없다고 생각하고 그가 자신을 배신했다고 여겼었기에 형부에 붙잡히기 전까지는 전북망을 연루시키는 것에 개의치 않았다. 하지만 그날, 성릉관에서 그녀에게 했던 약속을 기억하고 자신의 미래를 걸고 그녀를 도와 도망치게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제서야 전북망의 마음을 알게 된 것이다.그래서 형부에 들어온 후 그녀는 소 대장군을 범인으로 몰아가는 것이 정확한 방법이며 황제는
주부는 이방의 말을 기록하며, 이천명 등 사람들의 입에서 나왔던 진실을 다시 한 번 되새겼다.그러고는 성릉관에 돌아가서 세부 사항을 정하자고 제안했지만 수란키는 이를 거절했다. 그는 이전에 두 나라가 이미 세부 사항을 발송했으며 서로 동의하지 않겠다고 했다고 말했는데, 그 세부 사항은 이방도 본 적이 있었다. 상국의 요구사항으로 전쟁을 멈추고 국경선을 원래의 선으로 돌려놓자는 내용이 담겨 있었고, 그 기준은 녹분성 외곽의 산기슭이었다."잠시 정신이 팔려서 내가 협정을 체결하면 공을 세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수란키에게 군대를 20리 후퇴시키고 단 12명만 남기게 했지요. 한편으로는 전북망이 양곡 창고를 불태우는 계획을 잘 진행했으면 싶어서였고, 또 한편으로는 협정이 체결된 후 제와 제 부하들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본래 12명을 남기기로 한 것은 그들이 모두 능력 있는 사람들일까 봐 위험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상외로 그들이 남긴 사람 중에는 참모와 의무병 3명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걱정이 사라졌고 협정은 예상보다 훨씬 순조롭게 체결되었습니다. 협정이 체결된 후 우리는 그 소장을 붙잡고 산 아래로 내려가 풀어주었습니다."그 뒤 그녀는 전북망에게 협정 체결 사실을 알렸고 성릉관으로 돌아갔다.수란키는 사람을 보내 접선했고 그녀는 그렇게 얼떨결에 공신이 되었다.물론 소삼야는 반복해서 그녀에게 수란키와 어떻게 협정을 체결했는지 물었고 그녀와 그 부하들은 이미 만들어 놓은 이야기를 말했다. 그들은 산 아래에서 수란키와 12명을 만났는데 전투를 통해 수란키를 붙잡았고 그 뒤에 협정이 체결되었다고 했다.소삼야와 그들은 그 이야기를 잘 믿지 않았지만 수란키가 전선에서 사라진 사실과 협정에 수란키의 도장이 찍혀 있었다. 게다가 성릉관에서는 이제 소 대장군의 도장만 찍으면 그 협정은 공식적으로 성립될 수 있었다.주부는 그 기록에서 서경 태자에 대한 언급을 완전히 생략하고, ‘소장'이라는 표현만을 사용했다. 왜냐하면 서경의 국서에
진술서를 어전에 제출한 후 숙청제는 이택이 말한 이방의 자백 세부 사항을 들으며 이마를 찌푸렸다.녹분성 사건은 숙청제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긴 하지만 마을 학살과 포로 처형 네 글자는 모두 피비린내 나는 말들 뿐이었다. 세부 사항은 있는 줄은 몰랐다. 진술서에는 포로 처형과 마을 학살의 구체적인 내용은 적혀 있지 않았지만 이택이 말한 내용을 들으며 숙청제는 자기가 상국의 황제라는 사실을 잊어 버리고 미처 분노를 억제하지 못하고 책상을 내리쳤다.이택도 마찬가지로 등골이 오싹해져 황제의 분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심지어는 이런 사람이 전쟁 공로로 혼인 허락을 받아 다행이라고 생각되었다. 만약 북명왕비처럼 입직해서 관직에 나가거나 군에서 무장으로 활동했다면 그것은 큰 위험 요소가 될 수 있었다."북명왕은 이 진술서를 보았느냐?" 숙청제는 한차례 질책을 마친 후 이택에게 물었다.이택은 북명왕이 먼저 사람을 보내 전북망에게 전한 뒤 황제가 명을 내린 것을 알고 있기에 신중하게 대답했다. "이방의 자백이 있자마자 신은 즉시 이 진술서를 가지고 궁으로 들어왔습니다."숙청제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그에게도 이 진술서를 전달하거라. 비록 대리사가 이 사건에 관여하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소 대장군은 북명왕비의 외조부이니 그도 알아야 할 것이야."이택은 잠시 놀랐다. ‘설마 황제가 북명왕의 개입을 허락한 것인가?’ 그는 황제와 북명왕 사이에 어떤 불편한 감정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었다.하지만 이택은 얼굴에 감정을 나타내지 않고 공손히 대답했다. "예, 제가 직접 가서 전달하겠습니다."어전에서 나온 후, 이택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사여묵과 입을 맞춰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일은 시작부터 긴장감이 가득했다. 북명왕이 개입한 만큼 황제의 명령을 받은 후 이 일의 결과를 어떻게 처리할지는 아주 중요했다. 만약 잘 처리된다면 공로를 얻을 수 있겠지만 실수하면 직위가 내려가고 처벌을 받을 수도 있었다.그래서 이택은 마음속으로 안도하며 빠르게
다음 날 정오쯤, 서경 사절단이 진성에 도착하자 예부와 홍려사에서 그들을 접대해 회동관으로 안내했다. 서경의 관제는 상국과 비슷하지만 서경은 승상 자리를 두지 않고 내각과 육부구경을 두고 있었다. 이번에 상국에 온 사절단은 냉옥공주와 병부 상서 수란석을 필두로 내각 대학사 고공과 양안, 홍려사 사정 소진, 통역관 두 명, 친군령 정영수, 냉옥 장공주부의 위장 임화옥과 세 명의 여관으로 구성됐고, 여관의 이름은 보고되지 않아 알 수 없었다. 그 외에는 모두 호위와 수행 인원들이다.사여묵과 송석석 일행은 성문 근처의 술집에서 사절단이 지나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냉옥 장공주는 보라색 관복에 자홍색의 준마를 탄 채 대열을 따라 천천히 진성에 들어섰다. 냉옥 장공주의 실제 나이는 서른두 살이지만 아마도 긴 여행의 피로로 인해 더 늙어 보이는 것 같았다.“장공주 뒤에서 검은 준마를 타고 있는 사람이 바로 수란석입니다. 그는 수란키의 친동생이긴 하지만 서로 사이가 좋지 않지요. 예전에 성릉관에서 전투를 이끈 사람이 바로 그이고, 지금은 정원제의 전쟁을 적극적으로 종용하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정원제는 장공주를 매우 존경하지만 사실 선태자를 더 존경하였습니다. 정원제는 전쟁을 원하고 그는…” 염구진은 잠시 말을 멈추고 적당한 표현을 찾았다. “… 어쨌든 능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문무를 겸비했고 선태자를 오래 따랐지요. 서경에서 덕망도 높고 꽤 중요한 인물이지만 본성은 좀 미쳐 있다고 합니다. 예전에는 장공주와 선태자가 그를 지켜봐 주고 또 수란키가 귀띔을 해줘서 본성이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장공주가 그를 뒷받침해서 높은 자리에 올린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그러나 장공주가 모르는 사실은 그의 마음속엔 형인 수란키보다 집안과 나라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지요.”송석석이 그 말을 이어받았다. “장공주가 나라를 우선시한다고 생각해서 정원제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라 여겼겠죠.”“네, 하지만 이제 장공주는 깨달았을 겁니다. 이번에 그녀가 직접 와서 여러 논의를 이끌어가
둘째 날, 평사저의 사람들로부터 소식이 전해졌다. 어제 서경 사절들이 회동관에 도착하자 회왕은 몰래 집으로 돌아갔고 오늘 아침 일찍 다시 변장을 하고 외출했다고 하는데 어쩌면 사람들을 움직이는 것 같았다.평사저는 잠시 생각한 후 회왕의 의도를 대충 짐작해 보았다. “조심하거라. 그가 수란석과 결탁한 것이라면 너에게 해를 끼칠 가능성이 있으니.”“알겠습니다.” 송석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어젯밤 사제는 그녀에게 서경의 호위무사 중 한 명이 회왕처럼 보였다고 했다. 하여 두 사람은 밤새 여러 가지 가능성을 추측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이다. 궁중 연회의 화려한 조명은 별처럼 빛났고 소명 연회당은 낮처럼 환했다.사여묵과 송석석이 입구에 도착했을 때, 서경 사절들이 이미 도착해 궁궐의 오른편에 앉아 있었고 호위와 서경의 궁인들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입궁 시에는 무기를 지닐 수 없기 때문에 호위들 모두 검을 차지 않았다.태후와 황후는 자리에서 대기 중이었는데 식사가 아직 시작되지 않아 서경의 냉옥 장공주를 맞이하고 있었다. 평소라면 태후는 몸이 아파 나오지 않지만 오늘은 냉옥 장공주가 오기 때문에 기꺼이 나와서 손님을 맞이한 것이다.냉옥 장공주와 태후는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놀라운 점은 두 사람이 통역사의 도움 없이 때로는 상국어로, 때로는 서경어로 대화를 원만하게 이어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냉옥 장공주가 상국어를 잘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지만 태후가 서경어를 할 줄 아는 것은 송석석에게 매우 의외였다.사여묵과 송석석은 먼저 황제에게 인사를 올린 후 태후에게 인사를 올렸다. 냉옥 장공주는 그녀가 송회안의 딸이자 소 대장군의 외손녀, 남장 전투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친 송석석이라는 사실에 저도 몰래 송석석을 몇 번 쳐다보았다.북명왕부는 냉옥 장공주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냉옥 장공주도 상국의 중요한 인물들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특히 송석석와 이방에 대해서는 더 잘 알았다. 송석석은 가문과 능력이 뛰어난 여인이고,
북명왕이 자기를 무시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자 수란석은 속으로 화가 치밀어 오르며 더는 참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그동안 성릉관의 일을 명확히 밝혀야겠다는 마음이 굴뚝같았다.두 눈에서 불꽃이 튀고 있을 때 사여묵이 물었다. "수 대장군이 부상을 입었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다 나으셨습니까?"수란석은 눈빛을 거두며 대답했다. "이리 신경 써 주시니 고마울 따름입니다. 형님께선 이제 큰 이상이 없습니다.""이번에 수 대장군과 함께 오실 줄 알았는데 말입니다."수란석의 눈빛은 차갑고 냉랭했다. "형님께선비록 큰 이상은 없지만 과거에 중상을 입으셨기에 장거리 이동은 부적합합니다."사여묵은 수란키가 갇혔다는 사실을 모르는 척 말했다. "우리 소 대장군도 두 번이나 화살을 맞았고 게다가 이제 막 칠순을 넘긴 고령이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국의 일을 처리하러 성릉관에서 진성으로 돌아오셨습니다."수란석은 미간을 찌푸렸다. ‘저 말의 의미는 과연 무엇인가? 오늘은 분명 저런 얘기를 안 하기로 하지 않았나? 그렇다면 나에게도 할 말이 아주 많은데.’하지만 수란석에게 말할 기회조차 주지 않는 듯 사여묵은 또 다른 화제로 말을 돌렸다. "아참, 듣자니 수 상서께서는 친히 검을 만드는 걸 좋아하신다 들었습니다. 최근에는 어떤 신검을 만드셨는지 보여주실 수 있을까요?"주제는 이렇게 자연스럽게 바뀌었고 수란석은 화가 난듯한 목소리로 눈을 크게 뜨며 대답했다. "군무가 바빠서 이제 더는 검을 만들지 않습니다. 왕야께서 서경의 무기가 보고 싶으시다면 기회는 얼마든지 있습니다."전장에 나가면 충분히 볼 수 있었기에 사여묵은 그를 가볍게 바라보며 한 마디 던졌다. "좋습니다."목소리는 매우 낮았지만, 수란석의 귀에는 아주 도발적으로 들렸다. 마치 그가 전쟁을 원한다는 것 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내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왕이 말하길 북명왕은 두 나라가 전쟁을 계속하는 걸 가장 원하지 않는다고 했다. 두 나라가 전쟁을 하면 소가는 분명 죄
말을 하고 있을 때, 영태비가 사적으로 사람을 보내 송석석을 초대했다. 송석석은 태후마마의 허락을 받은 후에야 그곳으로 향했다. 영태비는 문엄 황제의 빈이라 아들을 따라 봉지에 가서 복을 누려야 했지만 지금은 궁궐의 외딴곳에 홀로 남아 생활을 했다. 송석석이 고 공공을 따라 영수궁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설 분위기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고, 심지어는 몇 개의 전각이 아닌 하늘과 땅을 사이에 두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겨울이 되자 영태비의 병세가 악화되어 연왕의 아들인 사여령이 진성에 남았는데 오늘 입궁해서 조모의 곁을 지켰다. 송석석이 온 것을 보자 사여령은 일어나 인사를 했다. “왕비님, 오셨습니까?” 송석석은 그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큰 도련님도 계셨군요.” “네, 조모께 문안인사를 드리러 왔습니다.” 사 여령은 송석석 앞에서 감히 그녀의 눈을 쳐다볼 수 없어 고개를 숙였고, 송석석은 아랑곳하지 않고 영태비께 인사를 올렸다. 영태비는 등에 비단 베개 두 개를 받치고 침대에 기대 있었는데 안색이 노란 데다 푸르스름했고, 희끗희끗한 머리는 풀어헤친 채 계속 누워있었던 탓에 헝클어져 있었다. 그녀는 연신 기침을 하더니 송석석에게 말했다. “왕비, 어서 앉게.” 영태비는 말하는 속도가 아주 느리고 힘이 없었다. 궁녀가 의자를 가져와 침대 옆에 놓자 고 공공이 말했다. “왕비님, 앉으십시오. 태비마마께서 몸이 허약해서 말소리가 크지 않으니 가까이 앉으셔야 들을 수 있습니다.” 송석석은 태비마마께 감사를 표하고 자리에 앉아서 말했다. “태비마마께서는 좀 괜찮으십니까?” “아마도 낫지 않을 것이다.” 영태비는 말을 하며 입술에 립밤을 좀 발랐는데 혈색을 더하지 못하고 오히려 더 창백해 보였다. 송석석은 영태비를 위로했다. “잘 치료한다면 금방이라도 괜찮아질 것입니다.” 전 중의 숯불은 아주 따뜻하게 타올라서 송석석은 조금 뜨겁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렇게 태우는데도 연기 한 점 보이지 않을 것으로 보아 좋은 숯임을 알 수
혜태비는 궁에 들어오자마자 덕귀태비와 제귀테비를 찾아가 정원을 노닐었다. 혜태비는 홍보석 장신구가 오늘 피부색을 잘 받쳐주어 모두에게 자랑하고 싶었다. 사여묵은 송석석과 함께 태후마마에게 문안을 드리러 태후전에 들어갔는데 많은 명부들 또한 때를 지어 태후에게로 왔다. 마침 방시원의 어머니인 오수인도 태후에게 인사를 드리러 궁으로 들어왔는데, 태후가 이렇게 많은 명부들 앞에서 방시원의 혼사를 물을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 같았다. 오수인은 마음속으로 괴로움이 가득했지만, 감히 태후 앞에서 하소연하지는 못했다. “태후마마, 혼인을 조급해서는 안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자 태후도 한숨을 쉬며 말했다. “방시원이 고생이 많구나. 이유 없이 이런 일에 연루되고, 너희 집안은 더할 나위 없이 인자한데 하필이면 그 사람들 때문에 발칵 뒤집히다니.” 오수인은 그제야 태후께서 왜 갑자기 그 말을 물으셨는지 알았다. 알고 보니 방시원과 방 씨 가문을 위해서였다. 그녀는 감격에 겨워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아무래도 복이 천박한 것 같습니다.” 그러자 태후가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말거라. 그는 우리 상국의 훌륭한 장군이자 황은을 받들고 있는데 복이 천박하다니? 그의 운명은 분명 찾아올 것이다.” “예, 태후마마께서 좀 더 신경을 써주십시오.” 사건이 일어난 후 사람들은 다소 조롱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었는데, 지금 현장에 있던 명부들의 오수인을 보는 눈빛은 순식간에 달라져 있었다.하지만 태후께서 말씀을 하시니 상황이 달라졌다. 태후는 방시원을 상국의 훌륭한 장군이라고 평가했다. 여태껏 조정의 일에 참견하지 않았지만 이번만큼은 방시원을 위해서 나선 것이었다. 자리에 있는 사람들 모두 총명한 사람이기에, 태후의 이 뜻을 알아듣지 못할 리 없었다.그러니 앞으로 아무도 감히 방 씨 가문을 무시하지도, 함부로 입에 담지도 못할 것이다.태후마마께서는 방시원의 얘기를 길게 하지 않고 다른 가문의 일도 물어보았다. 그리고 제대부인이 보이지 않자
제황후는 그녀에게 대황자와 공주를 데리고 나가 놀라고 하고 제자예의 어머니인 경 씨를 불러들였다. 경 씨는 방시원의 일을 듣고 눈살을 약간 찌푸렸다. “황후마마, 그는 자예보다 나이도 훨씬 많아서 어울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오히려 광릉후의 향삼랑이 젊은 나이에 능력까지 있어 벌써 거인이 되지 않았습니까? 비록 작위를 물려받지는 못하겠지만 그의 능력에 제 씨 가문의 추대를 더하면 반드시 큰 성과를 이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게다가 삼랑은 풍채가 넘치는 데다 올해 열아홉 살 밖에 되지 않았는데 작년에 과거에 진급했으니 진사에 급제를 하기만 하면 앞날이 창창할 것입니다.” 경 씨의 말이 끝나자 란주가 옆에서 웃음을 터뜨렸다. “부인, 제 씨 가문의 아들 중 출세한 사람이 많습니까?” 그러자 경 씨는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지으며 말했다. “당연히 많지요. 우리 제 씨 가문의 아들들 중에 훌륭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셋째 집이 가장 모자라지만 제수찬도 공주와 결혼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자 황후가 웃으며 말했다. “셋째 삼촌은 모자란 게 아니라 머리를 다친 탓에 그런 것 입니다. 머리를 다치기 전엔 아주 총명했답니다. 우리 제 씨 가문엔 모자란 사람이 없습니다. 이렇게 큰 가문에 아들들은 모두 뛰어나고 이미 벼슬에 들어간 사람과 곧 벼슬에 들어갈 사람도 적지 않지요. 그렇다면 외가에 의해 올라온 향삼량이 무슨 좋은 벼슬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그녀는 자신의 손가락을 들여다보며 무심한 듯 계속 말했다. “사위가 아들과 앞길을 다투게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제 황후의 말을 들은 경 씨의 표정이 순간 엄숙하게 변했다. 그러자 란주가 말했다. “맞습니다. 부인, 사람은 많고 벼슬은 한계가 있으니 차라리 아가시의 사위는 제 씨 가문과 달리 다른 길을 개척하는 사람을 찾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방시원의 나이가 좀 만긴 하지만 벌써 삼 품 총병까지 올라갔고 어머니도 고명을 받았으니 아가씨께서 시집을 가 고명을 받으면 젊은 나이에
동지 날, 궁에서 단합연회를 열기 전에 내외 명부들이 입궁하여 문안인사를 올렸다. 태후께서는 평소에 조용한 것을 좋아하지만 이 날은 명부들의 방문을 허락해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황후는 먼저 와서 함께 있다가 다시 장춘궁으로 돌아가 친정 식구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친정어머니인 제대부인은 입궁하지 않고 오히려 숙모와 사촌 여동생들이 몰려왔다. 물어보니 어머니는 몸이 좋지 않아 바람을 맞으면 안 된다고 했다. 게다가 입궁을 하면 황태후께 문안을 드려야 할 텐데 태후에게 병을 전염시키면 큰일이라 오지 않은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제황후는 믿지 않았다. 그녀는 지난번에 어머니가 공방의 일을 말했는데 거절을 한 탓에 그녀가 화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제황후는 실망이 컸지만 내색하지 않고 란주에게 몇 마디와 효심을 전하라고 분부했다. 번잡한 예절이 끝난 후, 황후는 작은 사촌 여동생을 남겨놓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제자예는 여학에서 주 장군의 손녀인 주창우와 광릉후의 막내딸인 향회옥과 함께 소란을 피워 안여옥을 못살게 굴었던 사람이다. 한바탕 혼쭐이 난 후부터는 좀 수그러들긴 했지만 가끔씩 안여옥을 격분시켜 다른 사람에게 성격이 조급하다는 말을 듣게 하려고 했다. 그해서 여학의 명성에도 큰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제자예는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사촌 언니, 국태부인은 너무 무섭습니다. 심 선생도 저를 엄하게 꾸짖었으니 나도 당분간은 조용히 지내겠습니다. 그러니 이쯤에서 그만둡시다. 태후에게까지 알려지면 언니에게 안 좋은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황후는 몸을 반쯤 기울인 채 담담하게 그녀를 흘겨보며 말했다. “너는 내가 여학을 괴롭힌다고 생각하느냐? 황제도 나와 같은 생각이다. 여학이 설립되었을 때 황제는 송석석의 형세가 너무 세 질까 봐 걱정했단다. 다만 여학이 태후의 뜻이었기에 공개적으로 거절하기 어려워 수단을 써서 여학의 명성을 훼손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 그렇게 되면 나중에 태후가 원망을 하더라도 송석석이 훈장 노릇
고 공공은 울면서 무릎을 꿇고 공주를 부르더니 땅에 엎드려 통곡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사온은 눈길도 주지 않았다. 치매에 걸려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 것 같았다. 고 공공은 한바탕 울고 나서야 찬합에서 떡 한 접시를 꺼냈고 유은이 검사해 보겠다고 하자 만소가 말렸다. “왕야께서 떡은 검사할 필요 없다고 하셨습니다.” 고 공공은 무릎을 꿇고 눈시울을 붉히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공주님, 한 입만 드십시오. 이건 영태비께서 특별히 저에게 부탁하여 보내온 것입니다. 공주님께서 가장 좋아하는 달콤한 떡입니다. 아직 많이 있으니 천천히 드셔도 됩니다. 사온은 영태비의 이름을 듣고서야 천천히 눈을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검게 물들어 드러웠으며, . 눈가에도 검푸른 색깔이었지만 눈시울은 붉어졌다. “내려놓거라.” 그녀는 이가 없어 발음이 또렷하진 않았지만 모두가 알아들을 수 있었다. “옷도 한 벌 가져왔는데 제가 입혀드리겠습니다.” 고 공공은 옷을 받들고 와서 더러운 사온의 몸을 아랑곳하지 않고 한 손으로 그녀를 일으켜 부축해서 들어갔다. 그러자 유은은 다급하게 만소와 고 씨 유모를 보며 물었다. “들아가보지 않아도 괜찮습니까?” “괜찮아, 옷을 바꾸게 둡시다.” 만소는 말하며 떡 한 조각을 소매 속에 숨겼다. 유은은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왕야님과 왕비님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상관하지 않았다. 반 시진 정도 지나자 고 공공은 사온을 업고 나왔다. 사온은 옷을 갈아입었는데 몸이 너무 말라서 옷이 헐렁해 보였다. 고 공공이 그녀를 떡 옆에 내려놓자 그는 다시 몸을 웅크렸다. 이때 만소가 말했다. “자, 이제 유 대인을 곤란하게 하지 말고 돌아가십시오.” 고 공공은 눈물을 글썽이며 다시 사온을 보더니 아쉬운 마음으로 떠났다.사온은 고 공공의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더니 문이 닫히고 나서야 흐느끼며 울기 시작했다. 만소는 떡을 들고 약왕당에서 청작을 찾아 독이 들어있다는 것을 확인한 후, 왕야와 왕비에게 보고를
염선생 측에서 대대적인 조사를 진행한 결과 몇몇 용의자를 특정했고, 사람을 시켜 그들의 동태를 밀착 감시하도록 조치를 취했다.그러나 어디까지나 의심일 뿐, 확실한 증거는 없었다.무상은 연주로 돌아간 후 회왕 외에는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심지어 시씨 가문에도 방문하지 않아 정말로 깊이 숨어서 들어간 것 같았다.현재 들어온 단서에 의하면, 사병들은 한때 옹현에 있었으나 이후 매우 빠르게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이동 과정에서 많은 물건을 남겨두고 갔다.하지만 그들이 정확히 어디로 이동했는지는 아직 파악되지 않았다.연주 지역은 본래 분열되어 있었으나, 무상이 돌아간 이후 세력이 다시 결집되었다. 지방 관료들은 연황실을 자주 드나들며 잔치를 즐기고 술자리를 벌이며 매우 즐겁게 지냈다.이 명단은 사여묵의 손을 거쳐 숙청제에게 전달되었다.그러나 여전히 그곳은 군주가 없는 상태로 보였다. 그렇다고 회왕과 무상을 군주로 볼 수도 없었다.숙청제는 사여묵과 논의한 끝에 연왕을 서둘러 연주로 보내야 한다고 판단했다. 연왕은 적어도 현재 무상의 세력을 억제할 수 있는 존재였기 때문이다.무상이 연왕의 손에서 권력과 자원을 완전히 빼앗으려면 그곳에 연왕이 없는 것이 유리했다. 그러나 연왕이 연주로 돌아가면 그곳에서 쌓아온 인맥과 자원은 여전히 연왕의 손에 있기 때문에, 무상이 그것을 차지하려면 더 큰 노력이 필요했다.숙청제는 연왕에게 부상을 회복했으니 연주로 돌아가라는 교지를 내렸다.연왕은 당장이라도 돌아가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부상을 치료하는 동안 그는 연주의 상황을 심히 걱정했고, 시씨 가문과의 관계를 어떻게 회복할지 깊이 고민해왔다.교지가 내려지자 그는 영태비께 작별 인사를 드릴 겨를도 없이 짐을 싸서 가족들과 함께 바로 진성을 떠났다.그는 신체에 장애를 입었고 그 방면에서도 기능을 잃었다. 그러나 한동안 침체된 시간을 보낸 후 오히려 투지가 되살아났다.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야망을 품고 있었지만, 예전에는 어느 정도 명예를 중시했기에 세상을
사여묵이 말했다. “맞다, 전에 최씨 부인이 부탁한 일 말이오, 오사형이 동의했소?”송석석이 대답했다. “오사형에게 이야기했는데 생각해보겠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한 것 같아요.”"내 생각엔 그에게 이 일을 알려서 스스로 판단하게 하면 좋겠소. 그가 예전에도 최씨 부인이 내놓은 점포들을 산 적이 있는 걸로 보아 평서백부를 도울 의향이 있었던 걸로 보이오."송석석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평서백부를 돕고 싶었던 건 아니고 그저 자신을 아끼는 사람들과 아이들을 돕고 싶었던 것뿐이겠죠.”며칠간 많은 사실을 알게 되면서, 송석석은 점점 과거 노부인이 왕전의 계획에 관여했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하지만 아마 한때 양심의 가책을 느껴 오사형을 찾아갔고, 오사형이 불에 타 죽은 것을 발견하자 왕전에게 분노를 돌린 것 같았다. 분명 이 죄책감을 감당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었다.이는 그녀가 오사형을 만나고 나서 이야기를 지어내어 용서를 구했지만, 정작 그가 어떻게 지냈는지 별 관심을 두지 않았던 이유였다. 심지어 오사형에게 보상하겠다고 말한 후에도 사람을 보내 소식을 묻지도 않았다.그녀는 단지 마음의 안정을 원했을 뿐이었다. 그녀 곁에서 자라지 않은 아이에게는 왕표나 왕청여처럼 깊은 감정을 품지 않았던 것이다.“그럼 제가 오사형을 찾아가 보겠습니다.” 송석석이 말했다.왕이장은 송석석의 말을 듣고 차갑게 욕을 퍼부었다.“뭐라고? 남강에서 첩이랑 호강하며 지내고 있다고? 애까지 배서 부인 행세를 하고 있다니, 그럼 진성에 있는 본처는 뭘로 보는 것이냐? 식모 취급하는 거냐?” “아마 최씨 부인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을 거예요. 그래서 그런 부탁을 한 거죠. 오사형, 이제 오사형이 어떻게 하실 건지에 달려있어요.”왕악장은 더 이상 두말하지 않고 말했다."최씨 부인에게 전해. 내일부터 바로 시작하라고. 넘길 수 있는 건 전부 넘기라고 해. 이 일을 굳이 조용히 처리할 필요는 없어. 백부 쪽에서 지출이 너무
다음 날, 전북망은 소위 합동 훈련이라는 것이 병력 배치나 전술 훈련이 아니라 농사를 짓는 일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9월은 겨울 밀을 심기에 적기였다. 남강은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지역으로, 물자가 여전히 부족했으며 전쟁으로 인해 인구도 크게 줄어든 상태였다. 이에 병사들이 농사를 돕게 된 것이다. 밀 외에도 배추, 무, 과일 등을 심기도 했다.방천허는 전북망이 마침 좋은 시기에 도착했다며 서둘러 가서 합류하라고 말했다.전북망은 하루 종일 농사일에 시달렸지만, 그 와중에도 짬을 내어 필명에게 편지 한 통을 썼다.진성에서 전북망의 편지를 받은 필명은 편지를 본 후 한참 동안 멍하니 있다가 머리를 긁적였다. '음…… 우리 사이가 이렇게 좋았던가?' 편지에는 자잘한 이야기가 빼곡히 적혀 있어 무려 3장이나 되었다. 대부분은 전에 전북망이 술에 취해 늘어놓았던 말들과 비슷했다.전북망은 원수부에서의 생활을 적으며 원수부가 얼마나 호화롭고 웅장한지 왕실조차 능가할 정도라고 표현했다.그는 원수부에 하인들이 구름처럼 많고 임신한 주모를 모시고 있으며, 그녀가 사용하는 물건이 모두 사치스러워 천금에 맞먹는다고 묘사했다.또한 농번기로 인해 현재 병사들이 농사를 지어야 하고, 농사가 끝난 뒤에야 훈련이 시작된다는 점을 언급했다. 병사들의 피부는 모두 새까맣게 그을렸지만 원수는 돼지처럼 하얗다고 비꼬기도 했다.뒤죽박죽한 이야기들을 잔뜩 늘어놓은 뒤, 평서백 부인에게 안부를 전해달라는 말을 덧붙였다.그 말을 마치고 나서는 자신도 한때 그런 사람이었고 비슷한 실수를 저질렀지만, 다른 사람이 자신의 과거와 같은 길을 걷는 것은 차마 볼 수 없다고 말하며 주저리주저리 이야기를 이어갔다.편지를 읽던 필명은 전북망이 왜 이런 말을 적었는지 눈치챘다. 평서백 부인에게 이 이야기를 전해 그녀가 마음 속 준비를 할 수 있도록 하려는 의도였다.필명은 전북망이 괜한 걱정을 한다고 생각했다.'평서백 부인처럼 현명한 사람이 왕표의 상황을 모를 리가 있나?'그러나
왕표는 전북망이 자신의 위엄을 충분히 보도록 한 뒤에야 그를 불러들였다.남강에 머문 지 2년이 채 되지 않았지만 왕표는 살이 많이 쪘다. 비록 과도한 비만 상태는 아니었지만, 호랑이 가죽이 깔린 팔걸이 의자에 앉아 있을 때면 턱 밑의 주름이 겹겹이 드러났다.그는 높은 자리에서 전북망을 내려다보며 위압적인 태도로 말했다.“너와 왕청여의 일은 이미 들었다. 그래, 너같이 평범하고 포부도 없는 자는 내 여동생과 어울릴 자격도 없지."전북망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런 반응 없이 한마디 대꾸만 하고 입을 닫았다.왕표는 차가운 코웃음을 치며 꾸짖었다."네가 이렇게 무능할 줄은 몰랐다. 현철위 부사령관이었지만 결국 관직에서 쫓겨났으니. 장군부는 정말 무능한 자들로만 가득 찼구나. 네 조부께서 하늘에서 너희 같은 무용지물을 보고 계신다면 눈을 감지 못하실 거다."전북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이마에는 핏줄이 드러났다."불만이면 어쩔 거냐? 너희 장군부에서 나온 인간들이 대체 어떤 꼴이 났는지 봐라. 그리고 너 자신만 봐도 여자 하나한테 휘둘려 이 지경이 됐으니. 앞뒤로 세 명의 여자가 있었지만 그 누구도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지 않냐……쯧, 우리 남자들의 체면을 다 구겨놨다!”왕표는 지금 그야말로 의기양양했다.그의 곁에는 절세미인이 있었고, 그 미인은 그의 아이를 임신 중이었으니 말이다. 그런 그녀 이전에도 왕표는 남강에서 원하는 여자는 누구든 손에 넣었다.언제나 여자들이 그를 즐겁게 하려고 애썼을 뿐이었다.그래서 그는 본능적으로 전북망을 깔보았다.위세를 충분히 떨친 뒤 왕표는 물었다."진성 쪽에 무슨 큰일이라도 있는 것이냐?"전북망은 대답했다."큰일은 없습니다."왕표는 의자 팔걸이를 매만지며 입가에 냉소를 띠고 말했다."그래? 그럼 여기로 오기 전에 최씨를 본 적이 있나?"전북망은 고개를 들고 답했다."원수께서 말씀하신 게 평서백 부인 입니까?"왕표는 그의 의도적인 물음 속 뜻을 간파하고 냉소를 지었다."왜? 내가 내 여자를 어떻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