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날, 평사저의 사람들로부터 소식이 전해졌다. 어제 서경 사절들이 회동관에 도착하자 회왕은 몰래 집으로 돌아갔고 오늘 아침 일찍 다시 변장을 하고 외출했다고 하는데 어쩌면 사람들을 움직이는 것 같았다.평사저는 잠시 생각한 후 회왕의 의도를 대충 짐작해 보았다. “조심하거라. 그가 수란석과 결탁한 것이라면 너에게 해를 끼칠 가능성이 있으니.”“알겠습니다.” 송석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어젯밤 사제는 그녀에게 서경의 호위무사 중 한 명이 회왕처럼 보였다고 했다. 하여 두 사람은 밤새 여러 가지 가능성을 추측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이다. 궁중 연회의 화려한 조명은 별처럼 빛났고 소명 연회당은 낮처럼 환했다.사여묵과 송석석이 입구에 도착했을 때, 서경 사절들이 이미 도착해 궁궐의 오른편에 앉아 있었고 호위와 서경의 궁인들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입궁 시에는 무기를 지닐 수 없기 때문에 호위들 모두 검을 차지 않았다.태후와 황후는 자리에서 대기 중이었는데 식사가 아직 시작되지 않아 서경의 냉옥 장공주를 맞이하고 있었다. 평소라면 태후는 몸이 아파 나오지 않지만 오늘은 냉옥 장공주가 오기 때문에 기꺼이 나와서 손님을 맞이한 것이다.냉옥 장공주와 태후는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놀라운 점은 두 사람이 통역사의 도움 없이 때로는 상국어로, 때로는 서경어로 대화를 원만하게 이어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냉옥 장공주가 상국어를 잘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지만 태후가 서경어를 할 줄 아는 것은 송석석에게 매우 의외였다.사여묵과 송석석은 먼저 황제에게 인사를 올린 후 태후에게 인사를 올렸다. 냉옥 장공주는 그녀가 송회안의 딸이자 소 대장군의 외손녀, 남장 전투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친 송석석이라는 사실에 저도 몰래 송석석을 몇 번 쳐다보았다.북명왕부는 냉옥 장공주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냉옥 장공주도 상국의 중요한 인물들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특히 송석석와 이방에 대해서는 더 잘 알았다. 송석석은 가문과 능력이 뛰어난 여인이고,
북명왕이 자기를 무시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자 수란석은 속으로 화가 치밀어 오르며 더는 참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그동안 성릉관의 일을 명확히 밝혀야겠다는 마음이 굴뚝같았다.두 눈에서 불꽃이 튀고 있을 때 사여묵이 물었다. "수 대장군이 부상을 입었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다 나으셨습니까?"수란석은 눈빛을 거두며 대답했다. "이리 신경 써 주시니 고마울 따름입니다. 형님께선 이제 큰 이상이 없습니다.""이번에 수 대장군과 함께 오실 줄 알았는데 말입니다."수란석의 눈빛은 차갑고 냉랭했다. "형님께선비록 큰 이상은 없지만 과거에 중상을 입으셨기에 장거리 이동은 부적합합니다."사여묵은 수란키가 갇혔다는 사실을 모르는 척 말했다. "우리 소 대장군도 두 번이나 화살을 맞았고 게다가 이제 막 칠순을 넘긴 고령이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국의 일을 처리하러 성릉관에서 진성으로 돌아오셨습니다."수란석은 미간을 찌푸렸다. ‘저 말의 의미는 과연 무엇인가? 오늘은 분명 저런 얘기를 안 하기로 하지 않았나? 그렇다면 나에게도 할 말이 아주 많은데.’하지만 수란석에게 말할 기회조차 주지 않는 듯 사여묵은 또 다른 화제로 말을 돌렸다. "아참, 듣자니 수 상서께서는 친히 검을 만드는 걸 좋아하신다 들었습니다. 최근에는 어떤 신검을 만드셨는지 보여주실 수 있을까요?"주제는 이렇게 자연스럽게 바뀌었고 수란석은 화가 난듯한 목소리로 눈을 크게 뜨며 대답했다. "군무가 바빠서 이제 더는 검을 만들지 않습니다. 왕야께서 서경의 무기가 보고 싶으시다면 기회는 얼마든지 있습니다."전장에 나가면 충분히 볼 수 있었기에 사여묵은 그를 가볍게 바라보며 한 마디 던졌다. "좋습니다."목소리는 매우 낮았지만, 수란석의 귀에는 아주 도발적으로 들렸다. 마치 그가 전쟁을 원한다는 것 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내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왕이 말하길 북명왕은 두 나라가 전쟁을 계속하는 걸 가장 원하지 않는다고 했다. 두 나라가 전쟁을 하면 소가는 분명 죄
송석석은 그들의 대화를 모두 들었다. 그들은 전쟁을 피하려고 애쓰고 있지만 서경이 그들이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고 확신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특히 수란석에게는 송가와 소가만 전쟁을 원하지 않으며 북명왕은 오히려 군권을 되찾기 위해 전쟁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려야 했다. 송석석은 시선을 돌리며 냉옥 장공주의 유창한 상국 말에 귀 귀울였다. "본궁은 항상 왕비님을 뵙고 싶었습니다. 이번에 상국에 온 이유 중 하나도 바로 왕비님을 뵙기 위함입니다."그녀는 방금전에도 이렇게 말했었지만 이번에는 표정이 진지하고 진심에서 우러나 보였으며 아까 같은 가식적인 느낌이 들지 않았다. 송석석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공주님을 뵙게 되어 저 또한 영광입니다."가까이에서 보니 냉옥 장공주는 어제 성문에서 봤을 때보다 피로해 보이지 않았다. 어젯밤 충분한 휴식을 취한 모양이었다. 그녀의 눈 밑의 다크서클은 얇은 화장 덕분에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의 전체적인 상태는 실제 나이보다 몇 년 더 많이 먹은 듯 지쳐보였다. 송석석은 그녀가 정권을 보좌했던 적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서경은 내외의 위협을 겪었는데, 그들이 그동안 겪은 고통은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할 정도로 힘들었다고 했다. 내일 그녀와 신경전이 벌어질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녀에게 존경심을 느꼈다.서로 간단한 인사를 나눈 후 궁중 연회가 시작되었다.모두 자리에 앉아 식사를 준비했다. 서경의 사절단은 여전히 오른쪽에 앉아 있었고, 사여묵과 송석석은 나란히 앉았다. 태후는 음식을 같이 먹지 않았고 냉옥 장공주와 잠시 대면하기 위해 나왔다. 이는 사절단을 중시하는 태도였다.황제와 황후가 자리를 지키고 여러 왕야와 권신들도 함께 했다. 물론 회왕은 참석하지 않았고 회왕비도 오지 않았다. 연왕은 측비 김씨와 함께 자리에 앉았는데, 그는 이런 자리에 절대로 시민주를 데리고 오지 않는다. 아무리 시민주가 정비라도 말이다.연회 중 술잔이 오가며 두 나라는 우호적인 관계인 것처럼 보
정영수는 이 방법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북명왕이 왕비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든 간에 이렇게 해서는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아무 소용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큰 위험을 동반할 수도 있었다."수 대인, 저는 여전히 이 방법이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분명 우리의 소행임을 알아차릴 것입니다." 정영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뭐가 옳지 않다는 거냐?" 수란석의 눈빛에는 분노가 섞여 있었다. "우리를 의심하게 하는 것이 바로 내 목적이다. 만약 그가 전쟁을 원한다면 이것은 그에게 큰 기회를 주는 것이다. 그는 협상 자체를 파괴하고 즉시 전쟁을 일으킬 것이다. 만약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면 그는 이 사건을 모른 척하고 비밀리에 사람을 보내 구출할 것이다. 그럼 우리가 그의 속셈을 알게 되지 않겠냐?""전쟁이 옳지 않다는 겁니다. 공주님께서 두 나라의 전쟁을 피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여인의 생각, 수란키와 똑같이 마음이 나약하구나." 수란석은 싸늘한 웃음을 지으며 주머니에서 손조를 꺼내 정영수에게 건넸다. "보거라. 이것이 바로 폐하의 진정한 뜻이다."등불 아래에서 정영수가 손조를 펼쳤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 손조가 진짜임을 확신했다. 그는 평소에도 황제 앞에서 시중을 들었기 때문에 황제의 필체를 잘 알고 있었다. 손조에는 엄격한 요구 사항이 담겨 있었는데, 상국이 이를 거부하면 즉시 상국을 떠나 전쟁을 선포할 것이라고 적혀 있었다.정영수는 황제가 처음에는 전쟁을 원했으나 후에 장공주에게 설득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데 만약 이 손조가 진짜라면... 정영수는 급하게 고개를 들었다. "그렇다면 수 대인은 북명왕을 시험하려는 것이 아니라 송석석을 납치하려는 것이군요."북명왕을 시험하는 것은 구실에 불과했다. 황제는 전쟁을 원했기에 송석석을 납치하여 그들 방식대로 갚으려는 것이다. 이는 예전에 이방이 태자를 납치하고 모욕해 성릉관에서 소가군을 물러나게 한 것과 같은 방법이었다
냉옥 장공주는 소란석과 정영수의 퇴장에 약간 불안한 마음을 느꼈다. 그들은 돌아왔을 때 서로 눈길을 주고받으며 무언가를 확인하는 듯한 모습이 보였지만 정영수에게 물을 수는 없었다. 궁중 연회에서 몇 번씩 정영수를 불러 내면 쉽게 눈에 띄기 마련이었다. 서경은 현재 내란이 일어나려 하고 냉옥 장공주는 이제 더이상의 충돌을 원하지 않는다. 이번에 공정한 해결을 요구하는 것도 삼황제의 황위를 안정시키고 백성들을 달래기 위해서였다.남강 전쟁에 나가 정의를 위해 싸웠을 때 이미 많은 군사들이 희생되었다. 게다가 사국에 전폭적으로 지원을 해주어 국고는 비어버렸기에 더는 민심을 잃는 전쟁은 감당할 수 없었다. 전쟁을 벌이려면 최소 5년은 더 기다려야 했다.궁거문고 연주가 울리고 무희들이 엄청난 기예를 선보이고 있었지만 모두 속마음을 숨긴 채 거짓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앉은 사람들을 몰래 살펴볼 뿐이었다. 연회가 끝났을 땐 이미 해시중으로 숙청제는 취기가 잔뜩 오른 상태였고 냉옥 장공주는 사절을 이끌고 퇴장 의례를 마쳤다. 술에 취한 숙청제는 궁인들의 부축을 받아 후궁으로 돌아갔다.오늘 밤의 연회는 모두 평화로웠고, 내일의 협상이 어떻게 진행될지, 어떻게 전쟁의 연료가 될지, 그가 직접 대면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사여묵의 사심이 마음에 들었다. 사여묵이야말로 진정 평범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가 맘에 들었다. "대공무사"라며 나라와 백성을 위해 일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하도 위선적이라 그는 절대 믿지 않았다. 요구가 없는 사람이 더 두려운 법이다. 본성을 어긴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다.진정한 충신, 애국적인 순수한 신하가 있을 수 있긴 하다. 예를 들어 소 대장군은 정말 존경받을 만한 인물이다. 그는 말로만 하지 않고 실제로 평생을 걸어 행동으로 실천해 왔다. 하지만 사람 마음은 쉽게 변하는 법, 그는 이미 연주에 조사를 보냈는데, 현재까지도 연주에서 문제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 심지어 옹현에도 사람을 보냈다. 옹현의 사온의 봉지로 만약
해시중의 어가에는 마차 소리 외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몽동이는 앞에서 마차를 몰았는데 이제는 이 일에 꽤 능숙해진 것 같았다. 어쨌든 그는 이제 마차가 있는 사람이니 말이다. 이때 시만자가 송석석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오늘 정말 힘들었다며 푸념하기 시작했다. "너희는 안에서 맛있는 걸 먹고 마셨겠지만 우리는 밖에서 찬 바람이나 맞으며 기다렸다. 다행히 보주가 구운 오리와 과자를 준비해 주고 또 배려 깊게 차를 황피 물주머니에 담아 왔으니 말이지, 그렇지 않으면 지금 배고파서 쓰러져 버렸을 것이다."송석석이 웃으며 말했다."시만자 아씨를 굶게 두다니 정말 미안하구나. 일이 끝나면 내 너를 위해 잔치를 열어주겠다."시만자는 그제야 인상을 펴고 밝게 웃었다."역시 나를 가장 잘 아는 건 너밖에 없다. 내가 인생에서 가장 마음껏 쓸 수 있는 건 아마도 돈 뿐일 것이다."그녀는 주위 사람들에게 돈을 쓰는 걸 좋아했고 외부 사람들에게는 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만약 동정심이 생기면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줄곧 아깝지 않게 돈을 썼다.송석석은 머리를 비스듬히 기울인 뒤 그녀의 머리와 맞대었다. 두 여인은 몽동이가 있으니 별문제 없을 것이라 믿어 외부 소음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회왕부.서재 안에는 어두운 불빛이 하나 켜져 있었다. 그 불빛은 그가 풍상에 쓸려온 얼굴을 비추고 있었는데 평소의 나약하고 소극적인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위험한 눈빛만 번쩍였다. 오늘 밤의 행동에서는 한 점의 실수도 용납될 수 없다.두 나라가 반드시 전쟁을 벌여야만 그들에게 기회가 찾아온다. 남강 전쟁에서 그들이 이미 기회를 놓쳤기에 이번에는 절대 놓칠 수 없었다. 숙청제는 그들을 의심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은 자존심과 명예를 둘 다 취할 수 없었다. 아무리 반역자라고 하더라도 승자가 왕이 되는 법, 이후 역사에 어떻게 기록될지는 권력이 있는 자가 결정한다.과거 삼 형제는 명예를 너무 중시하여 그 좋은 기회를 놓쳤고 황자까지 희생시켰다.이제 성공적인 역
회왕비는 문밖에서 한참을 서 있다가 떠났다. 그녀는 왕야가 마치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린 것 같아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회왕부에는 몇 명의 낯선 사람들이 왔는데 그들은 왕비인 그녀조차 안중에도 두지 않는 듯 마주쳐도 못 본 척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고요한 밤에 갑자기 말굽 소리가 들렸지만, 청석판 거리에는 아무도 다니지 않았다.진성의 밤은 동서성 및 강변 쪽에서만 번화했으며 그곳의 소음과 웃음소리가 남성까지 전해지지는 않았다.바로 그때 갑자기 말이 울부짖으며 멈추더니 공기 속에 이상한 떨림이 느껴졌다.몽동이는 채찍을 들고 허리에는 긴 칼을 찼다. 마차의 풍등은 먼 곳까지 비추지 못했고, 달이 구름 속에 숨어있는 탓에 주변은 어둠에 휩싸여 오싹할 정도로 음침했다.몽동이는 눈을 감고 공기 속의 변화를 귀 기울여 들으며 귀를 미세하게 움직였다.송석석도 채찍을 쥐고 있었는데 긴 채찍은 마치 붉은 뱀처럼 그녀의 발치에 똬리를 틀고 있었다.시만자는 검을 움켜잡으며, 검집을 살짝 튕기면 검이 쑥 빠져나오게 단단히 준비를 했다. 어둠 속에서 수십 명의 그림자가 조용히 내려앉았는데 발밑에는 먼지조차 닿지 않아 그들의 경공이 얼마나 뛰어난지 알 수 있었다.몽동이는 순간적으로 폭발적인 전투력을 발휘했다. 그는 마치 천둥 같은 힘으로 채찍을 휘두르며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손에 쥐고 경공을 펼쳐 구름을 타듯 날아가면서 칼을 뽑아 그 사람을 향해 내리쳤다.암살자는 치명적인 일격을 피하기 위해 몸을 피했지만 긴 칼엔 피가 잔뜩 묻어 있었다. 피 냄새가 코를 찔러 암살자의 살육 본능을 자극했다.마차 안에서 두 사람은 창을 부수고 뛰쳐나왔다. 긴 채찍은 민첩하게 뱀처럼 휘어지더니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두 사람을 곧바로 밀어냈다.시만자는 보검을 뽑아 꽃처럼 휘두르고는, 송석석의 채찍을 밟고 그대로 공중으로 뛰어올라 능숙하게 방어막을 형성하며 암살자들을 단숨에 밖으로 밀어냈다.검은 옷과 가면을 쓴 정영수도 긴 칼을 들고 있었다. 그는 팔도장인 모든 무
심지어 그는 송석석이 어떻게 피했는지조차 보지 못했다. 그저 긴 칼이 공중에서 빗나갔고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그대로 서 있었다. 마치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마차의 풍등이 어두운 빛을 발산하며 송석석의 얼굴을 비췄는데, 차가운 바람 속에서 서리가 내린 듯 차가워 보였다. 송석석이 그를 향해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미소는 순간적으로 그의 피부를 스쳐 지나가며 오싹한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그런데 그 오싹함은 단지 기분 뿐만이 아니라 통증까지 전해지게 했다. 그가 반응하기도 전에 송석석의 채찍이 공중에서 그를 정확히 내려 찍어버렸다. 순간 채찍 끝이 그의 얼굴을 스쳐 지나가며 얼굴을 가리고 있던 검은 천이 떨어져 나갔다. 그는 몸을 돌려 공중으로 날아오르며 얼굴을 재빨리 가렸다.그는 벽 위로 올라가 몸을 돌렸는데, 그때 붉은 채찍은 마치 독사처럼 왼쪽 사사의 목을 감아 버렸다. 송석석은 힘을 주어 채찍을 당기며 그를 오른쪽으로 날려버리고는 몸을 한 바퀴 돌리며 그의 사사를 마차 앞으로 끌고갔다.곧 사사의 손에 들려 있던 무기는 손을 벗어났고 무기가 떨어지기 전 송석석은 발끝으로 그것을 날려 보냈다. 칼은 공중을 가르며 비행했고 그녀는 그 사사를 끌고 빠르게 공중으로 뛰어올라 칼을 향해 다리를 휘둘렀다. 그러자 그 칼은 또 다른 사사의 배꼽을 정확히 찔렀다.이 모든 일이 순식간에 일어난 탓에 정영수는 가까운 거리에서 이 장면을 직접 목격했지만 그 어떤 도움도 줄 수 없었다.그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진정으로 강한 것은 송석석이지, 자신들이 아니라는 사실을.그는 이를 악물고 칼을 휘두르며 채찍을 끊으려 했다. 그렇지 않으면 사사는 정말 죽게 될 것이다. 송석석은 채찍을 휘두르며 사람을 공중으로 던졌는데 그 속도는 정영수를 다시금 어지럽게 만들었다. 그는 방향을 급히 바꾸어 사사를 실수로라도 다치지 않게 하려고 했다.하지만 방향을 바꾼 순간 그의 큰 칼엔 피가 묻었고 사사의 머리는 그대로 떨어져 나갔다.송석
원신제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씁쓸한 게 한 가지 더 있네. 지금까지 짐은 장공주의 신분으로 여인에게도 과거 시험을 볼 자격이 있어야 한다고 높이 외쳤지. 하지만 황제가 된 지금, 어쩔 수 없이 각 세력들의 이익을 고려해줘야 하고 그자들이 짐에 대한 적대심과 경계를 약화시킬 수밖에 없다네. 짐은 이제 고려한 일이 더 많아졌어. 가끔은 속에 천불이 나서 반대파 세력들의 가슴에 칼을 꽂고 싶기도 하네.”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송석석이 대꾸했다.“사실 한 나라의 황제나 대신들은 남녀를 막론하고 결국 최종 목적은 같지 않겠습니까? 폐하께서도 그렇듯 다들 나라의 안정과 백성들의 평안을 바라고 있는 겁니다. 나라에 영원히 전란이 일어나지 않고 창성해야 폐하께서 원하시는 개혁을 진행하셨을 때 반대의 목소리가 잦아드는 것입니다. 그러니 폐하, 현재 가장 중요한 건 폐하의 자리부터 굳건히 지키시는 겁니다.”대놓고 얘기하지는 않았지만 원신제는 송석석의 말뜻을 확실하게 알아들었다. 현재까지 나라가 혼란에 빠져 있고 각 세력들의 제지도 심하기에 이 국면을 해결하는 것도 충분히 힘든 일이다.황제의 자리도 흔들리고 있는 지금, 원신제가 개혁까지 고집하려는 건 더욱 위험한 일이었기에, 미래가 불안정할 수밖에 없었다.시만자 또한 송석석의 말에 동의하는 바였다.“사실 한 가지 일을 처리하는 데에 방법이 한 가지밖에 없는 건 아닙니다. 강경하게 상대방과 맞서 싸우는 것도 방법이지만 이는 가장 현명하지 못한 하책입니다. 한 사람의 성격도 바꾸기 쉽지 않은데 천 년이나 넘게 지속된 규정을 바꾸는 건 더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폐하께서 관념의 씨앗을 심으시면 언젠가 누군가가 폐하께서 남긴 발자국을 따라 한 걸음씩 나아갈 것입니다.”잠시 머뭇거리던 시만자는 이내 다시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갔다.“저와 석석도 매산에서 무술을 공부할 때 그랬습니다. 다들 저희를 비웃고 하찮게 여겼지만 저희는 결국 실력으로 그자들을 한 명씩 쓰러트렸습니다. 구호만 외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실력이
서경의 황궁은 금빛으로 반짝였으며 기세가 어마어마했다. 어둠이 깃든 고요한 밤에는 기 장엄함이 더욱 돋보였다.첫 번째 궁문을 들어서고 나서도 마차는 궁 안을 자유롭게 누빌 수 있었다.궁 안 곳곳에는 커다란 나무들 위에는 등불이 잔뜩 걸려 있어 대낮처럼 밝았으며, 누군가가 몰래 나무 위에 숨어있는다고 해도 너무 밝아서 바로 들킬 정도였다.수란키는 앞장서서 걷다가 한 궁전 밖에 도착했는데, 궁녀 두 명이 다가와 수란키와 서경 언어로 몇 마디 나누다가 고개를 돌려 송석석과 시만자에게 환하게 웃으며 허리를 숙여 인사를 올렸다.수란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송 대감님, 만자 낭자, 폐하께서 두 분에게 궁전으로 모시라고 하셨습니다.”두 궁녀가 앞에서 길을 안내했고 송석석과 시만자는 이내 궁전 안으로 들어갔다.휘황찬란한 궁전 내부에는 커다란 조각 기둥이 양측에 세워져 있었으며 그 모습은 압박감이 넘쳤다.원신제는 용상에 앉아 환한 미소로 두 사람을 반겼지만 얼굴에는 피로함이 가득해 보였다.송석석과 시만자는 이내 인사를 올렸고 원신제는 그들에게 편하게 앉으라고 했다.그리고는 송석석을 쳐다보며 말을 걸었다.“짐은 송 대감이 사절단과 함께 이곳으로 온다고 하여 며칠 전부터 계속 기대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보니 너무 반갑네.”송석석은 웃으면서도 진지하게 대답했다.“폐하께서 황위에 오르셨다는 소식을 듣고 소인도 너무 기뻤습니다. 원하는 바를 이루신 걸 감축드립니다.”송석석은 원신제를 힐끔 쳐다보았다. 원신제에게서 냉옥 장공주의 모습이 보였고 예전과 크게 변한 건 없었으며 여전히 피로해 보이고 여전히 진중하고 엄숙했다.냉옥 장공주에게 있어서 황제의 역할이든 실권을 손에 쥔 장공주 역할이든 똑같이 신경 쓸 일이 많을 것이다.“원하는 바를 이루느라 많이 힘들었네. 하지만 다행히도 이제 일처리는 훨씬 쉬워졌네.”원신제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조금 뒤, 궁녀들이 서경 특색이 돋보이는 다과들을 내왔다. 송석석과 시만자는 조금 전에 저녁 식사를 했기에 배가 고프지
서경 수도에 도착했을 땐 8월 13일이었기에, 송석석 일행이 떠난 지 한 달은 족히 넘은 상황이었다. 점심이 되자, 햇빛이 따스하게 비추어졌다.진왕은 마차 안에 몸을 웅크려 누운 채 입성에 진입했다. 하지만 마지막 자객들은 머릿수도 많고 기세도 등등해, 서경 지대에 들어서고 나서도 송석석 일행은 총 일곱 번이나 습격을 당했다. 현갑군은 대부분 부상을 당했고 시만자마저 어깨가 칼에 찔렸지만 다행히 신경까지 다치지는 않았다.진왕이 이렇게까지 크게 논란 건, 자객에게 습격을 당할 당시, 그는 변소 안에 있었다.일을 마치고 변소를 나선 순간, 갑자기 나타난 자객이 검으로 진왕의 가슴을 베었고 그 검을 진왕의 가슴에 꽂으려던 순간, 송석석이 제때에 나타나 손에 들고 있던 검을 한 발 빠르게 자객의 가슴에 꽂았다.하지만, 이내 자객의 머리채를 뒤로 확 잡아당긴 덕분에 진왕은 무사할 수 있었다.그는 가슴팍이 조금 베인 게 전부였지만 큰 중상을 입은 것 마냥 밤새 괴로운 신음소리를 내고 나서야 겨우 진정이 되었다. 수도에 도착하자 수란키가 관원들을 데리고 성문 앞에 서서 진왕을 반겼다. 수란키는 이제 서경의 승상이 되었다.한눈에 송석석을 알아본 수란키는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했다.“송 장군님,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여전히 기품이 넘치시네요.”송석석은 말에서 내려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인사를 하며 상대방을 힐끗 살폈다. 솔직히 조금 전에 수란키를 알아보지 못했다.전보다 훨씬 늙어 보였고 백발인 데다가 수염도 허옇게 변해 버렸다. 하지만 눈빛은 여전히 카리스마가 넘쳤고 남강 전장에서 봤을 때보다 되레 활기가 넘쳐 보이기까지 했다.남강 전장에서 봤던 수란키는 온몸에서 분노가 들끓고 있었다. 위엄이 넘치고 엄숙한 그는 삶의 의지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으며 그저 복수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살아가는 그런 느낌이었다.“승상께서 이렇게 직접 마중까지 나오시고. 너무 민폐를 끼치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되네요.”송석석이 웃으면서 말하자 수란키가 호탕하게 웃었다.“너
한편, 크게 놀란 진왕은 태의를 불러 심신을 안정할 수 있는 약을 처방받았다.송석석이 찾아갔을 때, 진왕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창백한 얼굴에는 핏기가 전혀 보이지 않았으며 덜덜 떨리는 입술로 송석석에게 자객은 어떻게 됐냐고 물었다.송석석이 진왕에게 자객이 도망쳤다고 얘기하고 나서야 그는 조금 안정을 찾은 듯했다.사실 진왕을 보필하는 사람들이 자객이 도망쳤다고 진작 얘기했지만 진왕은 믿지 않았다. 이제 송석석에게서 듣고 나니 그제야 안심이 된 것이다.송석석은 진왕에게 몸조리 잘 하라고 당부한 뒤 방을 나섰다.이와 동시에, 이덕회는 나머지 사람들을 안심시키고 있었다. 병부 상서인 이덕회는 지금까지 산전 수전 공중전까지 전부 겪어 보기도 했고 또한 왕비와 현갑군을 믿었기에 전혀 겁을 먹지 않았다.한편, 매산 출신 몇 명은 한데 모여 전에 성릉관에서 만났던 검은 복장 차림의 무리들을 의심하고 있었다.어쩌면 그자들이 바로 자객일지도 모른다는 의심 말이다.이 의심을 가장 먼저 제기한 건 바로 시만자였다. 그는 그 무리들이 갑자기 사라진 게 너무 수상했고 비밀 경로를 통해 계획적으로 도망친 거라고 확신했다.더군다나 조금 전 자객들도 전부 검은색 옷차림이었기에, 비록 머릿수가 조금 차이 나긴 했지만 그리 이상하지도 않다. 일부 사람들은 숨어서 지켜보고 있었을 수도 있으니까.“성릉관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출동했던 건 아마 우리한테 손을 쓰려고 그랬을 가능성이 커. 하지만 나중에 생각해보니까 성릉관에서 우리를 죽이면 쉽게 도망칠 수 없을 것 같아서 일단 포기한 거야.”시만자는 분석할수록 자신의 의심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서 고개를 돌려 송석석에게 물었다.“내 말이 맞는 것 같지 않아?”송석석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그자들은 아니야. 정확히 얘기하자면 조금 전 자객들은 그자들보다 무술 실력이 확연히 떨어져. 그자들은 성릉관에서도 자유롭게 나타났다가 사라졌어. 그렇게 보면 네 의심이 성립되지 않다는 거지. 그자들은 성릉관에
이날 아침, 송석석 일행은 서경으로 출발했다.송석석은 딱히 아쉬운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나중에 돌아올 때 성릉관을 또 지나야 했기에, 이후에도 외조부 가족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성릉관을 떠나자마자, 평탄한 길이 사라졌다. 여기저기가 다 울퉁불퉁했고 일부러 인위적으로 파괴한 곳도 있었기에 마차가 지나가기엔 무리가 있었다.하지만 진왕은 절대 다시 말을 타려고 하지 않았다. 며칠동안 안정을 취했지만 다리 안쪽의 쓸림 상태가 아직 심했기에 걸을 땐 괜찮아도 말에 타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때문에 성릉관에서 공을 세우고 육아당까지 설립한 진왕은 까탈스럽게 마차를 고집했고 마차가 도무지 지나갈 수 없는 곳은 현갑군이 말에서 내려 마차를 밀면서 힘겹게 전진했다.하지만 불행 중 다행인 건, 현재 양국으로 통하는 길이 개방되었기에 그 길을 따라 갈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산길밖에 없었다면 고귀한 진왕의 엉덩이가 엄청나게 고생했을 것이다.그렇게 겨우 서경 지대에 진입하여 루벌로 향하자, 서경의 관원과 병사들이 그들을 맞이하며 가는 길까지 호송해주었다.송석석 일행들 중에서 통역관을 제외하고는 서경에 와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똑 같은 변경 도시라고 해도, 루벌은 성릉관보다 훨씬 낙후했다. 여기저기에는 망가지고 훼손된 집채가 많았으며 행색이 누추한 거지나 근심이 많아 보이는 백성들도 많았다.송석석은 이 광경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두 나라가 전쟁을 치른 건 사실이지만 이곳까지 침투되지는 않았는데 말이다. 전에 전북망과 이방이 이곳 마을을 공격했다고 해도 공격당한 그 마을만 피해를 받아야지 루벌 전체가 이렇게 엉망진창이 된 것은 말이 안 되었다.루벌의 한 역관에 도착하고 나서야 송석석은 호송하고 있던 관원한테서 그 이유를 듣게 되었다. 수란석이 성릉관에서 전쟁을 일으켰을 때, 후방 공급이 부족한 탓에 병사들이 루벌로 돌아와 약탈을 진행한 것이었다.수란석 당시의 상황이 빅토르와 거의 비슷하다고 했다. 그때 당시 전쟁을 바라는 사람들이 많지 않
소 팔야는 곧바로 송석석이 말한대로 지시를 내렸고 이 지시를 실행에 옮긴 사람은 바로 전북망이었다. 그는 서둘러 부하들을 데리고 여기저기 수색하기 시작했다.송석석이 성릉관에 왔다는 사실은 전북망도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녀를 맞이하던 그날, 그는 멀리 서서 지켜볼 뿐, 가까이 다가가지는 않았다.하지만 거리가 너무 먼 탓에 전북망은 송석석을 정확히 보지도 못했고 그저 그림자만 볼 수 있었다.전북망은 자신이 지금 참 쓸모없는 짓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느껴지기도 했다. 송석석은 이제 자신과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이고 진성의 일과 관련된 사람은 이제 멀리해야했기 때문이다. 한편, 시절단은 성릉관에서 잠시 쉬는 사이에도 담판의 기교에 대해 상의했으며 상황 모의도 여러 번 해보았다.이번 담판이 저번에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어렵지는 않았지만 절대적으로 쉬운 건 아니었다. 이는 여제가 계속 마음에 두고 있던 일이기에 쉽게 타협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소씨 가문에서도 상대방이 몰래 사람을 보내 사절단의 책략을 몰래 엿듣는 것은 아닌지 걱정됐다. 사절단의 책략을 알게 된다면 상대방은 그에 맞는 대책을 미리 준비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상국은 열세에 처하게 된다.때문에 소 팔야는 전북망에게 반드시 철저하게 관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몰래 침입한 사람이 있으면 무조건 찾아내야 하고 이와 동시에 사절단 곁에서 시중을 드는 하인들 사이에도 첩자가 있을 수 있으니 확실하게 조사해야 한다고 했다.이틀 동안 수색했지만 전북망은 수확이 없었다. 그리고 수부를 샅샅이 수색했지만 위장술을 쓰거나 몰래 정보를 외부에 빼돌리는 사람도 없었다.전북망이 유일하게 알아낸 정보는 검은 복장을 입은 사람들이 춘만루에서 밥을 한 번 먹은 적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들이 춘만루를 떠난 뒤, 이들을 목격했다는 가게 주인도 있었지만 어디에 묵었고 어디로 갔는지는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서른 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심지어 전부 검은 복장을 차려 입었는데 이렇게 쥐도 새도 모르게
춘만루는 오늘 손님들로 꽉 차 있었다. 가게가 그리 크지 않기도 했고, 다른 손님들도 있었을 뿐만 아니라, 조금 전 낭자가 데리고 오겠다고 했던 검은 복장을 입은 남자들까지 가게 안 나머지 자리를 전부 차지했다.송석석과 시만자 그리고 남자까지 앉을 자리가 없었기에 가게 주인은 급하게 작은 탁자 하나를 펴서 가게 앞에 자리를 마련했다.그렇게 세 사람은 일행들과 떨어져서 식사를 하게 되었다.이때, 남자가 미안한 목소리로 송석석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저자들은 전부 제 일행입니다. 저와 똑같이 이틀 전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했거든요. 혹시 불편하시다면 저자들에게 가게 앞에서 기다리라고 하겠습니다. 나중에 저자들에게 호빵이나 하나씩 나눠줘도 충분합니다.”멈칫하던 시만자는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그럴 필요 없어요. 편하게 드시고 싶은 거 시키시면 됩니다.”남자가 환하게 웃으며 대꾸했다.“낭자는 정말 얼굴도 예쁘시고 마음도 선하시군요. 그럼 저희 편하게 시키겠습니다.”“그… 그래요.”고개를 끄덕이던 시만자는 가게 안에 앉아있던 사람들을 힐끗 쳐다보았다. 이자들의 옷차림은 꽤 눈에 띄었으며 옷소매에 수놓은 글씨들이 보이기도 했다.하지만 옷이 구겨지고 먼지도 많이 묻었기에 수놓은 글씨를 정확하게 확인할 수 없었다.그렇게 한참동안 쳐다본 시만자는 그제야 이자들의 옷에 수놓은 글씨들이 각자 다르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 중에서 흑영위나 전광위 등 글씨들이 보이기도 했다.이자들은 예의가 없거나 우악스럽지는 않았다. 각자 자리를 찾은 뒤 자신들에게 밥을 사준 시만자와 송석석에게 일제히 고개를 숙여 감사인사를 했다.거의 대부분 사람들이 머리가 하얬지만 얼굴은 불그스름한 게 나이가 그렇게 많아 보이지는 않았다.그 중에서 생김새가 매우 추악한 사람들도 몇 명 있었으며 쳐다보기만 해도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송석석과 시만자 그리고 몽동이는 서로를 힐끔 쳐다보다가 왠지 이 식사자리가 자신들의 마음에서 우러러 나온 게 아니라는 기분이 들었다.송석석은 식사를
송석석은 이들을 몇 번이나 아래위로 훑어보다가 순간 마음속으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들의 나이가 쉽게 가늠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외모로 보면 서른 살은 족히 넘는 것 같아 보였지만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활력이나 기운은 최대 스무 살 정도밖에 안 되는 것 같았다.송석석은 이들의 눈빛도 함께 살폈는데, 특히 그 남자의 눈빛은 매우 심오하고 진중했으며 나이를 꽤 많이 먹은 늙은 여우와 흡사하게 느껴졌다.송석석 일행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남자가 먼저 한걸음 다가가서 물었다.“여기에 육아당이 생기는 겁니까? 혹시 관아에서 직접 계획한 일인가요?”곁에 서있던 몽동이가 이들을 자세하게 훑어보았다.완벽한 상국 말투를 쓰고 있었기에 성릉관 사람은 확실히 아닌 것 같았다.일단 이자들 태도에서 악의를 발견하지 못했기에 몽동이가 남자의 말에 대답을 했다.“맞습니다. 버려진 아이들을 거두는 곳입니다. 관아에서 직접 설립했고요.”“참 좋은 일이네요.”남자가 고개를 끄덕이자 송석석이 한걸음 다가가 물었다.“선생님께서는 진성에서 오셨습니까?”하지만 남자는 그저 송석석을 힐끗 쳐다보기만 할 뿐, 질문에 대답은 하지 않고 되레 그녀에게 되물었다.“혹시 북명왕비이십니까? 성함은 송석석이고요?”경계심이 잔뜩 차오른 송석석이 질문을 하려던 그때, 남자가 다시 말을 이어갔다.“서경으로 출발하실 예정이시죠? 언제 출발하실 건가요? 혹시 저희도 함께 동행해도 되겠습니까?”송석석은 미간을 확 찌푸렸다. 물론 그들이 서경에 담판하러 간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 많지만 송석석 일행은 사절단 신분으로 가는 것이기에 함부로 아무 사람이나 데리고 갈 수는 없었다.하지만 이 남자가 매우 자연스럽고 당연한 듯 묻는 것이 몹시 수상했다.“선생님들은 왜 서경에 가시려는 겁니까?”송석석의 물음에 남자가 대답했다.“담판하는 과정을 구경하고 싶어서요. 증인도 되어줄 겸 해서요.”송석석은 상대방이 예사롭지 않은 신분을 가진 사람이거나 단순히 헛소리가 습관처럼 나오는 이상한 사람일
진왕은 다음 날 오후가 되어서야 배고픔에 못 이겨 깨어났다. 눈을 뜨고 나니 온몸이 마치 부서진 것처럼 쑤시고 아파왔다. 심지어는 뼛속까지 피곤이 스며들어 손을 들어 올리는 것조차 힘들 정도였다. 그의 곁에서 시중을 드는 사람 중에는 심복인 소환이라는 하인이 있었다. 그가 침상 곁에서 진왕에게 보고했다. "북명왕비께서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며 반나절째 기다리고 계십니다." 진왕은 원래 침상에서 식사를 해결한 뒤 그대로 다시 자려고 했다. 너무 지쳐서 움직이기조차 싫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송석석이 반나절 동안 기다렸다는 말을 듣자, 급히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났다. "옷을 갈아입혀라, 어서!" 이번 여정에서 그는 이미 송석석의 대단함을 목격했다. 여성이지만 단 한 번도 힘들다고 말한 적이 없었고, 그녀의 지휘 아래 여러 차례 위험을 피해갈 수 있었다. 게다가 길에서 많은 사람이 병에 걸려 쓰러졌을 때도 그녀는 황소처럼 튼튼했다. 실력 있는 사람은 소홀히 대할 수 없는 법이었다. 그들은 쓸데없는 대화를 나누려고 찾아오는 법이 없으며, 분명 중요한 일이 있을 것이었다. 배가 너무 고파서 뱃가죽이 달라붙을 지경이었지만, 서둘러 씻고 죽 한 그릇을 들이킨 뒤 송석석을 만나러 갔다. "나를 찾은 이유가 대체 무엇인가?" 송석석은 육아당 건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진지하게 듣고는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잘 알겠네. 어제 도착하자마자 피곤해서 쓰러져 자긴 했지만, 이 소부의 장식이 간소하고 사용하는 물품도 매우…… 소박한 것을 보았다. 대장군의 일가는 나라에 충성을 바쳤으니, 이렇게 푸대접 받아서는 안 되겠지." 송석석이 입가를 씰룩이며 말했다. "전하, 오해하셨습니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소씨 가문은 한 푼도 착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그 아이들을 위한 것이며, 동시에 전하의 선행을 널리 알리기 위함입니다. 이 아이들은 훗날 멀리 진성에 계신 전하를 감사히 여길 것이며, 조정의 문무백관들도 전하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