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을 쇠는 것도 재미가 없었다. 궁연회에는 일 년에 한 번 보는 황실 종친들이 가족을 데리고 참석했는데 온통 남자와 여자들뿐이었다. 송석석은 여러 왕비와 공주들과 함께 황후와 궁비를 따라 태후를 뵈러 갔다. 태비들이 모두 함께 있어 당연히 혜 태비도 있었다. 연왕비인 시민주와 측비 김 씨는 영 태비 전에서 영 태비와 이야기를 나누느라 오지 않았다. 모두들 허무한 말만 하고 아첨을 떨며 자기의 장신구를 자랑하느라 바빴다. 황제의 비들도 한자리에 모였는데 송석석은 눈이 휘둥그레져 황후, 숙비, 공비, 덕비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다. 그리고 지위가 낮은 자들은 모두 고개를 숙이고 때로는 웃으며 때로는 고개를 들어 보곤 했다. 황후의 아들은 적장자로,매우 듬직해 보였다. 나이는 어렸지만 걸음걸이는 숙청제를 꼭 빼닮았다. 뒷짐을 진 채 턱을 살짝 들고 등을 곧게 펴고 있었는데 키가 작고 왜소하지만 않았다면 꼭 어른 같아 보였다. 숙비에게는 아들과 딸이 한 명 있었는데 아들은 그녀가 낳은 것이 아니였기에, 유모가 안고 와서 태후를 뵙고 바로 돌아갔다. 공주는 머리를 두 갈래하고 얌전하게 앉아 있었다. 서너 살짜리 아이는 아직 철이 없었지만 평시에 잘 가르쳐 함부로 떠들지 않았다. 공비에게도 딸이 있었는데 큰 공주로,숙비의 딸보다 석 달이나 먼저 태어났다. 그리고 덕비에겐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이황자이고 겨우 두 살이었다. 숙청제는 자식이 풍족하지 않았는데 아마 근정으로 후궁에 적게 간 탓인 것 같았다. 이황자는 몸이 하도 통통해서 뛸 때 비틀거렸는데 태후는 그 모습이 너무나도 귀여워 품에 안고 잠시 뽀뽀를 한 후 송석석에게 말했다. “너도 안아보거라. 그리고 내년에 너도 통통한 아들을 낳아야지!” 송석석은 통통한 이황자를 바라보더니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이황자, 숙모가 한 번 안아줄까요?” 이황자는 머뭇거리며 고개를 돌려 덕비를 보자 덕비는 웃으며 말했다. “숙모한테 가거라.” 그러자 이황자는 두 팔을 벌려 송석석에게
이어서 준비한 만찬에 연왕도 정비와 측비를 데리고 함께 참석했다. 그는 태후와 제후를 접견한 후 종친들과도 몇 마디 인사를 나누었다. 회 왕부 쪽에서는 회 왕비만 왔는데 회왕이 감기에 걸려 아직 낫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자 태후께서는 몇 마디 관심하더니 원기를 보충하는 귀중한 약재를 상으로 내려 주셨다. 만찬은 아주 풍성했다. 사여묵은 송석석과 함께 앉았는데, 사여묵은 송석석이 좋아하는 것은 골라주고 싫어하는 것은 모두 자기가 먹었다. 그 모습을 본 황후는 웃으며 말했다. “왕야와 왕비께서 참 금슬이 좋아 보이십니다.” 진왕과 진왕비는 자신들을 말하는 줄 알았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황후가 사여묵과 송석석을 보고 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아채고 눈길을 돌렸다. 숙청제는 담담하게 한 번 훑어보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술을 들 때 황후를 차갑게 한 번 쳐다보았다. 송석석은 황후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말했다. “황제폐하와 황후께서 사랑이 깊으시니 우리도 당연히 본받아야지요.” 황후는 웃으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 마음속의 고통은 자신만이 알고 있었다. 황제와 황후가 정이 깊은 건 모두 외부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고 황제가 진정으로 총애하는 사람은 바로 숙비였다. 황제가 숙비에게 하는 것 반만큼만 황후한테 했어도 이렇게까지 자기의 아들을 강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원래는 아무런 문제 없이 장자와 적자를 태자로 세워야 마땅하지만, 하필이면 황제가 숙비를 가장 총해한 덕분에 언제든지 아들을 더 낳을 수 있었다. 친아들이 있는데 자신의 아들을 위해 계획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황후의 마음이 싱숭생숭할 때 궁녀가 약 한 그릇을 들고 숙비에게 오더니 말했다. “마마, 양태약을 드실 시간입니다.” 그 말을 들은 황후는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그녀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숙비를 째려보더니 곧바로 웃는 얼굴로 말했다. “숙비가 임신했다는 것이오? 궁에 이렇게 큰 경사가 있는데 왜 나한테 알리지 않았소?” 숙비는 모란처럼 아리따운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지
송석석까지 의아해하며 휘왕을 쳐다보았다. ‘이제야 효자라는 것을 알았다니? 그럼 그전엔 불효라는 것인가? 적어도 효도하지는 않았다는 뜻이잖아.’ 다만 여러 친종들도 그의 말을 듣고 모두 오리무중이었다. 사람들 눈엔 연왕은 줄곧 효성이 지극했다. 그는 매년 어머니를 문안한다는 명목으로 진경으로 돌아왔는데 때론 순조롭게 돌아왔고 때론 기각당했다. 선제가 있을 때도 효심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오늘 모두가 기뻐하는 자리라 사람들은 그 말에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숙청제가 연왕을 의미심장하게 쳐다보자 연왕의 얼굴빛이 약간 변하더니 바로 회복하고 웃으며 말했다. “선조께서 인효로 나라를 다스렸는데 제가 어찌 감히 불효하겠습니까?” 사여묵은 휘왕을 한 눈 쳐다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계속 송석석과 식사를 했다. 식사 후 여인들은 연극을 보러 갔는데, 설날에도 극단은 멈추지 않고 정월 초여드레날까지 계속 공연할 계획이라고 했다. 연극을 보면서 새해를 보내는 것은 꽤 좋은 것 같았다. 적어도 시간을 보내는 데는 최고였다. 숙비는 임신 중이라 먼저 돌아갔고 태후는 여전히 그들과 함께 버텼다. 송석석이 요즘 바빠서 자주 궁으로 들어와 인사를 드리지 못했기에 모처럼 그녀를 만났으니 태후는 그녀의 손을 잡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덕 귀태비도 옆에 앉아서 결혼한 지 꽤 되었는데 왜 아직도 임신하지 않았냐며 묻기 바빴다. 송석석은 이런 문제를 대처하는 것이 가장 귀찮았다. 그녀는 아이를 낳을지 말지, 언제 낳을지는 모두 그녀와 사여묵 두 사람이 결정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했다. 송석석이 대답하기도 전에 태후가 말했다. “이제 현갑군의 지휘사가 되었는데 임신은 무슨. 여자도 남자와 마찬가지로 사업 위주로 일해야 한다.” 송석석은 항상 태후의 생각이 새롭다고 생각했다. 태후는 항상 여자들에게 자강을 장려했다. 그래서 처음에 이방이 행군하여 비적을 토벌해서 공을 세웠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기뻐하며 이방을 아주 높이 평가했었다. 심지어 이방이 천하의 여자들에게
설을 쇠고 궁을 떠나는 마차에서 송석석은 사여묵에게 그 일을 말했다. 사여묵은 역모 사건 이후 회왕부가 조용하고 회왕도 거의 외출하지 않았다고 했던 염 선생의 보고가 떠올랐다. 염 선생은 줄곧 사람을 보내 연왕부와 회왕부를 감시했고 회왕은 두세 번 외출했지만 모두 술을 마시러 간 것이었다. 그리고 더 이상 외출을 하지 않았다. “한 가지 가능성이 있는데, 바로 회왕은 아픈 것이 아니라 진성을 떠났다는 것이오.” 사여묵은 눈살을 찌푸렸다. “북명황실의 사람들이 회왕부를 오랫동안 감시했지만 시간이 지나다 보면 허술해질 수도 있으니 그 틈을 타 변장을 해서 나간다면 알아볼 수 없었을 것이오.” 그러자 송석석이 물었다. “이맘때쯤 진성을 떠난다면 어디로 갈 수 있습니까?” “그건 돌아가서 얘기하오.” 사여묵은 지금까지의 상황을 머릿속에 떠올리자 한 가지 짚이는 게 있었다. 오늘밤엔 국공부의 사람들도 함께 와서 설을 보내 황실에도 떠들썩했다. 하지만 공 씨 가문에서는 서우를 데려다주지 않았다. 말로는 그들이 궁에 들어가 연회를 참석할 것이니 황실에 보내는 것보다 공 씨 가문에서 설을 쇠는 게 낫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황실로 돌아온 후 그들도 한바탕 떠들썩하게 놀았는데 온 집안의 사람들이 송석석에게 세뱃돈을 받아갔다. 송석석은 손이 커서 모두들 즐거워하고 만족해했다. 사여묵과 염 선생은 서재에 들어갔고 송석석은 따라 들어가지 않았다. 그녀는 그들끼리 토론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황실의 종목은 궁보다 훨씬 재미있었다. 몽동이는 권법 한 세트와 검법 한 세트를 선보이고 은 20 냥이나 받아갔다. 노집사도 노래 한 곡을 불렀는데 모두들 웃으며 듣기 거북하다고 소리쳤지만 노 집사는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든 꾸준히 노래를 불렀다. 원래는 한 곡만 부르려고 했는데 사람들이 듣기 싫다고 떠들자 그는 단숨에 세 곡이나 불렀다. 그의 음이탈에 시만자와 송석석은 배를 끌어안고 웃기 바빴다. 하인들도 저마다의 재주가 있었는데 투호, 다트, 나무 타기, 종이
서재에서 세 남자는 한 시진 넘도록 토론했다. 그들은 회왕이 정말 진성에 없다면 세 곳에 갔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첫째는 성릉관인데 그들이 성릉관에 못을 박았을 가능성이 제일 높았고, 두 번째는 옹현이었는데 그곳은 그들의 사병이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진성외주군위소였는데, 요 몇 년 동안 회왕이 암암리에 운영하면서 위소에도 못을 박았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하지만 어느 곳을 가든 모두 그들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들은 회왕이 가장 침착하다고 생각했는데 왜 지금은 오히려 가장 먼저 움직였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때 염 선생이 말했다. “모든 것에 올인했을 수도 있습니다. 사온이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그들이 겁을 먹고 손을 놓고 싸우는 게 낫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지요.” 하지만 사여묵은 고개를 저었다. “내 생각은 그렇지 않네. 이 일은 그들이 오랫동안 계획해 온 일이지. 남강을 칠 때가 가장 좋은 기회였는데 그들은 그때마저 출병하지 않았지. 그러니 지금은 더더욱 충동적으로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야. 반드시 역모의 정당한 이유를 찾아야 한다. 나는 오히려 성릉관에 있는 소대장군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걱정이 되는 군.” “서경.” 염 선생은 눈을 붉히며 말했다. “성릉관의 가장 큰 변수는 서경입니다. 회왕도 서경의 황제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들의 목적이 정말로 서경이었다면 이미 그곳에 사람을 배치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새 태자의 곁에 있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성릉관에 녹분성, 그리고 서경까지 합치면 바로 조만간 폭발할 폭탄이었다. 그들은 이미 준비가 되어 있지만 이 폭탄이 실제로 폭발한다면 잘 대응할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몰랐다. 왜냐하면 어떻게 하든 변하지 않는 한 가지는 성릉관의 총병원수는 소대장군이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가장 우려되는 점이기도 했다. 석석에겐 남은 가족이 많지 않아 그녀의 외조부 일가는 반드시 지켜야 했다.심청화가 말했
최씨는 목적이 명확했다. 그녀는 자수공방과 여학에 대해 알아보기로 했다. 만약 북명황실이 여학을 창립한다면 그녀는 자기 여식을 위한 자리를 확보하고 싶었다.따라서 그녀는 처음에 여식을 데려올 계획이었지만 그렇게 되면 너무 노골적이기도 하고 또 왕비가 반드시 딸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으로 비쳐질까 걱정이 되어 차라리혼자 필요한 조건을 알아봐 나중에 준비할 수 있도록 했다. “괜찮으니 저흰 별실에서 얘기하시죠.” 송석석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이끌고 별실로 갔고 오직 사여묵과 연신 하품을 해대는 이덕회만 남겨두었다.“그게…” 이덕회는 피곤한듯 입을 가리고 하품하며 물었다. “혹시 누워서 담화할 수 있는 곳은 없습니까?”송석석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 나이에 아직도 광란의 밤을 즐기는 게냐? 아주 대단하군!”이씨 부인은 소주방의 중요성을 알기에 바로 송석석에게 물었다.“왜 시만자 아씨는 보이지 않습니까? 시만자 아씨와 함께 소주방에 대해 논의하고 싶은데요.”송석석은 안타까운 마음에 시만자가 좀 더 자기를 바랐지만 이씨 부인이 직접 물었으니 사람을 보내 그녀를 깨우기로 했다.이씨 부인도 꽤 정교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소주방은 작업장으로서 위치가 외진 만큼 수공예품을 판매하려면 점포가 필요했기에 그녀는 한 점포를 내놓아 이 물품을 판매하려고 했고 수익은 모두 소주방에 귀속시키기로 했다. 누가 무엇을 수놓았든, 수익은 모두 수놓은 여인에게 줄 생각이었다. 이씨 부인이 말했다. “나는 임대료를 받지 않을 것입니다. 선행에 힘을 보태는 것이니까요. 점포에서 판매를 담당할 부리의 봉급은 수익이 발생하기 전까지 제가 지급할 생각입니다. 수익이 발생하면 그 부분에서 부리에게 지급하도록 하지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시만자는 잠시 생각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으로서는 그렇게 해도 좋을 듯싶습니다. 지금은 누가 소주방에 갈지 모르니까요. 모든 것이 정상적으로 운영된다면 말솜씨가 좋은 사람을 앞에 내세워 판매하게 해도
시만자는 처음에 설날부터 굳이 스승의 위세를 부릴 필요 없다고 생각해 제자들에게 편안한 분위기를 주려고 했다. 하지만 세 쌍의 부부는 처음부터 그녀에게 아주 깍듯하게 대했다. 심지어 오 낭자는 하녀에게서 차를 건네받아 직접 그녀에게 대접하고 나머지 두 사람도 시어머니를 모시듯 그녀 곁에 서 있었다. 그래서 그녀도 어쩔 수 없이 스승의 체면을 챙길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도 마음속으론 과연 이게 맞는 것인지 하는 의문이 들었다. 평소 적염문에서는 스승을 이렇게 모시는 일이 없었고, 오히려 스승이 그녀를 귀여워하는 경우가 많았다. 차를 내리고 물을 따르는 일은 방금 들어온 제자들이나 맡는 일이었기에 그녀 같은 선배는 나설 필요가 없었다.이런 분위기를 경험하지 못했던 그녀는 사부에 대한 송구함이 생기고 또 사부가 그리워지기도 했다. 다음 날, 몽동이는 크고 작은 배낭을 메고 나갔다. 이번에 매산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는 라사저와 석소사저도 함께 데리고 갔다. 연말이니 어르신을 찾아뵙는 것이 마땅했기 때문이다.두 사제는 월례수당을 받지 않겠다고 했지만 란이는 그녀들에게 많은 선물을 사 주었다. 선물은 직물과 여성들이 필요한 일상용품, 그리고 두꺼운 옷들이었기에 원래 말을 타고 돌아갈 계획이었지만 어쩔 수 없이 두 대의 마차를 타고 돌아가기로 했다. 마차 안에는 선물로 물건이 가득 차 있었는데, 바깥에도 다닥다닥 걸려 있을 정도로 많았다.석소사저가 돈을 받지 않자 송석석은 몽동이에게 더 많은 돈을 주었다. 몽동이는 거절하는 법이 없었기에 지난번에 연지와 분을 사서 사부에게 크게 혼났었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여성들에겐 아름답게 꾸밀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사서 사용하는 건 여인들의 문제지만 없어서는 절대 안 된다. 게다가 언젠가는 필요할 날이 있을 테니 말이다. 시만자도 그에게 엄중성을 경고했지만 몽동이는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그는 여성이 아름다워지려면 벌을 받는 걸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한편, 왕부는 여전
그로부터 며칠 동안 송석석은 더는 손님을 응대할 여유가 없이 바빴다. 현갑군쪽에 전부 맡길 수는 없었기에 그녀도 경위부로 돌아가야 했다. 사여묵과 염구진은 여학을 순찰하러 갔는데 수리가 필요한 곳이 많고 확장할 장소도 많았다.날씨가 추워진 탓에 진행 속도가 현저히 느려졌지만 다행히도 자금이 마련되어 그나마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었다.정초 팔일, 조정이 열리자 전북망은 그의 상관인 송석석에게 모친상 문서를 제출했다. 그 문서는 송석석의 손을 거쳐 황제에게 전달되었고, 숙청제는 문서를 자세히 살펴보며 송석석에게 물었다.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송석석은 잠시 멈칫하며 대답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무장은 걱정할 필요가 없으니 그저 법칙에 따라 행동하면 된다.” 송석석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주둔 무장을 위한 것이었고, 전북망은 경안의 무관이었다. 그러나 황제의 뜻은 그가 효를 다 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 같았다.“모든 것은 전하의 결정에 따르겠습니다.” 송석석은 더 이상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그가 전북망에게 효를 다하지 말라고 하면 그것은 그의 어머니에 대한 효도를 저버리는 것이고 만약 효를 지키라고 하면…!하지만 황제가 직접 이렇게까지 말하였으니 그저 따를 수밖에 없었다.숙청제는 그녀가 그렇게 단호히 물러나자 웃으며 말했다. “우선 미뤄두도록 하거라. 어차피 그는 지금 특별 훈련 중이니 계속 훈련을 이어가고 효를 다할지는 나중에 논의하도록 하지.”“예, 신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송애경!” 숙청제가 그녀를 불러 세우며 자리에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몇 마디 물어보겠다.”그가 송애경이라고 부른 이상 이는 군신 간의 대화로 변한 것이다. 송석석은 정중하게 감사의 인사를 올린 후 앞으로 다가와 앉았다. “폐하, 하문하시옵소서.”“현갑군에는 순방영, 금군, 경위가 있다. 순방영에는 무능한 귀족 자제들이 많아 그 안에서 시간을 헛되이 보내고 있는 이들이 있다. 그들을 관리하는 것은
궁으로 들어가 황제에게 자초지종을 보고하자, 최숙심의 딱한 사정을 운운하면서 그녀의 선한 마음씨 또한 찬양했다.그녀의 삶도 이토록 엉망진창인데 힘든 사람들에게 죽도 나눠주고 갈 곳 없는 여인들을 소주방에서 지내게 도와준 사실들을 일일이 읊으면서 감탄했다. 솔직히 숙청제에게는 지금 최숙심처럼 백성들을 교화할 수 있는 모범적인 사람이 필요했다. 때문에 바로 어명을 내려 그녀에게 순금 백 냥과 집 한 채까지 하사했다. 그리고 유방 당했던 왕씨 가문 남자들도 남강 전쟁만 끝나면 북명왕과 함께 진성으로 돌아오는 것에 허락했다.그렇게 최숙심은 죽을 고비를 넘어 인생 역전까지 이뤄냈다!한편, 왕표에게는 요참형이 내려졌고 역적과 손잡고 왕표를 선동한 고청우에게도 똑같은 형을 내렸다. 그러자 숙청제는 예전에 고씨 가문 여인들을 살려준 일이 후회되었다. 고청우를 진작 감옥에 가뒀다면 남강에 이렇게 큰 화란이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니 말이다.이후 숙청제는 척귀에게 걱정되니깐 암자에 가끔 가보라고 했는데, 이는 실은 감시하기 위해서였다. 송석석은 척귀를 보자마자 황제가 무슨 걱정을 하고 있는지 바로 알아차리고는, 사람을 보내 고씨 여인들에게 고청우의 형이 집행될 때 고청우와의 옛정 때문에 잘못된 행동을 저지르지 말라고 확실하게 당부했다.한편, 소주방에 있는 노부인은 자신의 아들인 왕표가 결국 체포되었고 요참형을 받는다는 소식에 큰 충격을 받은 채, 죄 없는 왕청여와 최숙심에게 손가락질을 하면서 갖은 욕설을 퍼부으며 화풀이를 했다. 노부인은 두 사람이 어떻게 가족이며, 서방인 왕표를 배신할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며, 점점 더 흥분하다가 결국 최숙심과 왕청여의 뺨을 강하게 내리쳤다.그리고는 지금 당장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왕표를 구해내라고 억지를 부렸다.최숙심은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노부인에게 노여움을 풀라고 빌었지만, 노부인은 오히려 점점 언성을 높였다. 그러자 최숙심도 더 이상 참지 못해 벌떡 일어나 주막에서 칼을 가져오더니 바닥에 툭 던졌다
왕표는 중범죄자이기에 바로 대리사로 이송되어야 하지만, 송석석은 그를 일단 경위부로 압송했다. 경위부에서 심문을 마친 후, 어전에 보고를 올리며 최숙심의 공을 황제에게 잘 얘기한다면,왕준과 현이 하루 빨리 진성으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더군다나 고청우도 아직 경위부에 갇혀 있기에 왕표와 고청우가 만난다면 더욱 많은 일들을 알아낼 수도 있었다.그렇게 고청우와 왕표는 같은 곳에 갇혔으며, 중간에 나무 울타리 하나를 세워 두 사람을 갈라놓았다.고청우와 왕표가 서로 눈이 마주치자, 표정이 순식간에 바뀌었으며 왕표가 먼저 이를 갈면서 마구 소리를 질렀다.“천박한 놈! 결국 네 놈 꼴도 이렇게 되었구나! 드디어 벌을 받은 게야!”그러자 고청우가 실눈을 살짝 뜨며,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비아냥거렸다.“내가 천박한 년이면 왕표 너는 뭔데? 나도 벌을 받았지만 너도 결국 이렇게 갇혀 있잖아! 넌 뭐 다를 것 같아?”“이게 다 네 놈 때문이야!”왕표가 울타리 사이로 손을 뻗어 고청우를 잡으려고 허우적거렸고 뒤로 살짝 물러난 고청우는 오아표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코웃음을 쳤다.“버러지 같은 놈!”“네 놈이 감히…! 지금 뭐라고 했느냐! 네 놈이 역적과 손잡고 날 꼬셔서 야반 도주하게 만들지 않았다면 난 지금 남강 원수의 신분으로 잘 살고 있었을 거야! 절대 이런 꼴을 당할 리 없었을 거라고!”왕표가 씩씩거리며 소리를 지르자 고청우가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널 꼬셨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 넌 결국 죽음이 두려워서 그런 선택을 한 거야. 넌 내가 무엇인가 노리고 접근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잖아. 그런데 내가 아이까지 낳으니 이제 날 곁에 묶어 둘 수 있겠다고 확신한 거지. 이 세상 모든 여자들이 네 본처처럼 아이들을 위해 목숨까지 바칠 수 있는 줄 알아? 가족애라는 건 이 세상에서 가장 우스운 거야. 그딴 걸로 날 묶어 둘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멍청한 놈! 내가 널 버리고 갈 때 분명하게 얘기했잖아. 넌 무능하고 무술 실력도 보잘것없는데
한편, 송석석은 시만자를 데리고 일반 손님으로 위장한 채 직접 보화사로 향했다. 보화사에 도착한 뒤 절을 올리고 초를 꽂고는 주지 스님을 찾아 신분을 밝힌 뒤, 여람 스님에 관해서 물었다.주지 스님은 바로 지객 스님을 불러왔다. 각지 스님들이 보화사에 찾아와 며칠 묵고 갈 때마다 지객 스님이 그자들을 모셨기 때문에 자세한 상황을 제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보화사는 진성 3대 절 중의 하나일 정도로 꽤 유명했기에, 매년 보화사에 찾아와 경을 들으면서 며칠동안 이곳에 묵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많아도, 실제로 이곳에 머물 수 있는 사람은 몇 없었다. 지객 스님은 여람 스님에 대해 인상이 꽤 깊었다. 수련의 경지가 그리 높지 않았기에 원칙대로라면 이곳에서 지낼 수 없는데 몇 년 전부터 남강에서 죽은 이의 영혼들을 제도했기에 그 자비로운 마음을 높이 평가하고 덕행도 많이 쌓았기에 지객 스님은 의례적으로 여람 스님을 받아준 것이다.“며칠동안 매일 여람 스님께서 밖에 돌아다니셨습니다. 진성 내에 전란이 일어나 사상자가 많았기에 여람 스님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죽은 이들의 영혼을 제도하느라 고생이 많았습니다.”지객 스님은 여람 스님을 매우 좋게 평가했다. 송석석은 그런 지객 스님의 말을 조용하게 듣고 있을 뿐, 반박하지는 않았다.그러고는 지객 스님에게 여람 스님을 만나보고 싶다고 얘기하며, 여람 스님을 존경하는 마음에 돈을 기부하며 여람 스님을 위해 따로 절 하나를 지어주고 싶다는 말도 함께 전해달라고 했다.한편, 지객 스님은 송석석과 시만자의 신분을 알지 못했지만, 두 사람이 수수한 옷차림과 달리 기품이 넘쳐 흘렀기에 모 훈작 세가의 부인이나 아가씨일 것이라고 추측해,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인 후 바로 왕표에게 말을 전했다.왕표는 자신을 찾아온 자가 있다는 말에 흠칫 놀랐다가 절을 만들어주며 돈까지 기부하겠다는 소식에 바로 표정이 환하게 바뀌었다.평서백이었던 왕표는 가문의 번영을 위해 절에 돈을 기부하는 명문 가문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그렇게
이내 표정을 숨긴 최숙심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얼른 가십시오. 돈을 구하면 바로 서방님을 찾으러 가겠습니다. 아, 그리고 요즘 진성 순찰이 삼엄하니 여기저기 돌아다니지 마십시오.”왕표는 자신을 걱정하는 최숙심의 말을 듣자, 그녀가 밖에서 아무리 대단한 여인이라고 불려도 결국 자신에게 만큼은 마음이 약해질 수밖에 없다는 뿌듯함에 경계심이 완전히 풀렸다.“최대한 3일 안에 마련해주면 고맙겠소.”그러자 최숙심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그건 안 됩니다. 지금 상황이 어려운데, 어떻게 3일 안에 그 큰돈을 마련할 수 있겠습니까?”“우리 딸 지아가 지금 북명 황실에서 지내고 있지 않소? 그러니 난 부인이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믿소. 부인의 소식을 기다리겠소. 그리고 내가 부인을 찾아왔다는 말은 아무한테도 하지 마오. 어머니와 왕청여한테도 얘기해서는 안 되오!”말을 마친 왕표는 삿갓을 쓰고는 돌아서서 빠르게 떠났다.표정이 확 어두워진 최숙심은 그를 얼른 따라갔지만 골목 밖에도 순찰하는 경위대가 보이지 않았기에 섣불리 소리를 지를 수도 없었다.왕표는 궁지에 몰린 순간 백성들을 인질로 잡아 어떻게든 진성을 벗어나려고 할 것이고 만에 하나 왕표가 진성을 빠져나가게 되면 그를 찾아내는 건 더 어려워질 것이다.최숙심은 빠른 걸음으로 소주방에 돌아와 석소를 구석으로 불렀다.“석소 아가씨, 얼른 왕비에게 찾아가서 왕표 그자가 보화사에 여람 스님 신분으로 위장하여 숨어있다고 전하시오.”“네, 지금 바로 다녀오겠습니다.”그렇게 석소가 돌아서서 소주방을 떠나려던 그때, 최숙심이 그를 불러 세웠다.“잠깐만요! 왕비님께 너무 대놓고 보화사에 왕표를 잡으러 가지는 말라고 전해주세요. 저에게 거짓말을 한 것일 수도 있으니 일단 몇 사람만 데리고 가서 상황만 파악해보시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전하세요.”현재 수색이 삼엄해서 왕표는 더 이상 도망갈 곳도 없겠지만 그래도 최대한 조심해야 한다. 이는 최숙심이 공을 세울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이고 단번에 확
진성 전체에 대한 순찰을 강화하자 예상대로 왕표가 급하게 모습을 드러냈다.하지만 왕표가 찾아간 사람은 왕청여가 아니라 최숙심이었다.이날 최숙심은 딸에게 자신이 직접 만들어준 옷을 주러 북명 황실에 찾아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소주방 여인들을 위해 이런저런 필요한 물건들을 사기도 했다.눈앞에 갑자기 나타난 왕표를 봤을 때, 최숙심은 너무 놀라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왕표는 분명 왕청여에게 자신이 나타났다는 사실을 최숙심에게 알리지 말라고 했는데 왜 이렇게 직접 찾아온 건가?’“부인, 나일세.”커다란 삿갓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목소리는 왕표가 확실했다. 최숙심은 잠시 넋을 잃고 있다가, 순간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이를 꽉 깨문 채 가까스로 화를 억눌렀다. 몰래 주변을 쓱 살폈는데, 골목 안에는 두 사람 외에 아무도 없었다.최숙심은 왕표가 절대 자신을 찾아오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었는데, 그녀의 판단이 틀려 버린 것이었다. “지금 무슨 말씀하시는 겁니까…?”이를 악문 최숙심의 목소리는 조금 떨렸는데, 왕표는 그녀가 자신을 오랜만에 보게 되어 흥분한 거라고 착각했다.왕표는 이내 삿갓을 위로 슬쩍 올려 삐쩍 마른 얼굴을 드러냈다. 왕청여가 말한 것처럼 눈썹은 전부 잘라버렸는데, 그 모습은 더할 나위 없이 우스꽝스러 보였다.“부인, 정말 나일세!”왕표는 기대에 찬 눈빛을 하고 있다가 이내 주변을 경계하듯 쳐다보다가 아무도 없다는 것을 인하고 나서야 다시 입을 열었다. “가족들이 걱정돼서 이렇게 진성으로 다시 돌아온 거라네. 다들 무사한 걸 보니까 이제 한시름 놓이는군.”하지만 최숙심은 가식적인 왕표의 모습에 헛구역질이 날 정도였다.“진성 곳곳에 당신의 체포 공문서가 붙어있는데 어떻게 감히 진성으로 돌아온 것입니까?”“다들 무사한 걸 봤으니, 이제 이곳을 떠날 생각이오.”왕표는 말을 하며 한걸음 가까이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앞으로 평생 이렇게 여기저기 숨어 다녀야 할지도 모르오. 부인, 내가 예전에 부인에게 많은 잘못
최숙심은 왕청여에게 언제 어디에서 왕표를 어떻게 만났는지 자세하게 물으며, 왕표 곁에 아이가 없었는지도 확인했다.“어제 냄비를 사러 밖에 나갔는데 소주방으로 돌아오는 길에 오라버니가 갑자기 작은 골목에서 나타나서 깜짝 놀랐어요. 나쁜 사람인 줄 알고 겁을 먹고 있다가 오라버니가 제 이름을 부르고 나서야 오라버니를 알아보았거든요. 얼굴은 까맣고 눈썹도 다 잘랐는데 몸도 심하게 야위어서 자세하게 보지 않으면 오라버니라는 걸 절대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어요. 아이를 데리고 있지는 않았고 혼자였어요. 누군가에게 협박을 받아서 도주하게 되었는데 체포 공문이 떠서 여기저기 숨어 다닐 수밖에 없었다고 했어요. 이제 가진 돈도 다 썼고 아이까지 키워야 하는데 더 이상 방법이 없다고 하면서 저와 어머니에게 어떻게든 3천냥을 구해달라고 부탁했어요.”“돈을 구하면 그자에게 어떻게 주기로 했어?”최숙심이 다급하게 물었고 왕청여가 대답했다.“그건 아직 정하지 않았어요. 일단 저희에게 돈부터 구하라고 하곤, 나중에 오라버니가 날 찾아오겠다고 했어요.”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최숙심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그자가 눈썹이 없다고 했나?”“네, 오라버니는 눈썹이 짙어서 알아보기 쉽거든요. 그래서 다 잘라버린 것 같아요.”왕청여가 말한 것처럼 왕표가 눈썹을 자른다면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 적을 것이다. 이 사실을 얼른 북명 왕비에게 알려야 하지만 눈썹을 다시 그릴 수도 있기에 눈썹이 없는 사람만 유의해서 될 일도 아니다.“그럼 넌 이틀에 한 번씩 밖을 돌아다녀서 관찰해봐. 병부에 가서 왕이장을 만나기도 하고. 네 오라버니는 기회가 생길 때마다 너를 몰래 미행할 거야. 난 석소에게 지금 당장 북명 왕비를 찾아가 순찰에 더욱 힘써 달라고 부탁할게. 그래야 네 오라버니가 한 시라도 빨리 널 찾아올 거야.”“알겠어요.”고개를 끄덕이던 왕청여가 다시 물었다.“그럼 어머니께는 뭐라고 말해야 할까요?”“돈을 마련하고 있다고 해. 왕이장이 돈을 주기로 했고 지금 점포를 팔고 있는 중
한편, 최숙심은 뜨개질로 딸에게 옷을 만들어주고 있었다. 현재 북명 황실에서 지내고 있는 딸이 먹고 쓰는 것까지 황실에게 부탁할 수는 없었다.최숙심은 뜨개질을 하면서도 왕비가 했던 말들이 실제로 벌어질 가능성이 클 것 같다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했다. 왕표가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으면 무조건 진성으로 돌아올 테지만 진성에 돌아온 그가 자신을 찾아올지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왕표는 일단 노부인에게 찾아가 도움을 청할 것이고 노부인이 도울 능력이 없다고 생각되면 그때가 되어서야 자신을 찾아올 것이다. 하지만 아들을 걱정하고 아끼는 노부인은 어떻게든 그의 이 일을 해결해주려고 할 것이다. 비록 오늘 노부인과 왕청여를 미행했을 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앞으로도 이럴 것이라는 보장은 없었다.왕표가 진성으로 돌아온 이유가 돈을 구하기 위해서이니 돈만 구해지면 바로 진성을 떠날 것이다.노부인 현재 가지고 있는 돈이 없지만 진성에서 오랜 세월을 보냈기에 인맥은 넓다. 여기저기서 돈을 조금씩 빌린다면 그건 상대방들을 구렁이에 빠트리는 거나 다름없다.하지만 거동이 불편한 탓에 노부인은 직접 돈을 빌리러 나갈 수도 없고 창피해서라도 절대 직접 나가지 않을 것이다. 그럼 보낼 사람은 남희나 왕청여밖에 없다.최숙심이 속으로 이런저런 분석을 하고 있을 때, 왕청여가 방으로 걸어 들어왔고 최숙심은 고개를 들며 물었다.“무슨 일로 찾아온 것이냐?”왕청여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눈물부터 줄줄 흘렸다.“새언니, 제가 예전에 멍청한 짓을 많이 저질렀어요. 저 때문에 새언니가 얼마나 많은 피해를 받고 조카들까지 얼마나 힘들었는지 이제 알 것 같아요. 제가 다 잘못했어요. 예전에 했던 행동들이 너무 후회돼요.”최숙심은 왕청여가 감옥에서 간신히 살아나온 뒤로 많이 바뀌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먼저 찾아와서 사과까지 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다 지난 일이야. 이제 미래를 보면서 살아야지. 앞으로 다 잘 될 거야.”최숙심이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위로했다. “
왕청여는 결국 왕이장을 찾아가지 않았다. 예전이라면 뻔뻔하게 왕이장도 평서백부 핏줄이니 가족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반드시 도와야 하는 게 맞다고 얘기하겠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었다.왕청여는 이런저런 일들을 겪으면서 깨달은 게 많았다. 평서백부가 무한한 영광과 명예를 누릴 때 왕이장은 덕을 조금도 보지 못했다면 왕씨 가문이 패가망신한 지금, 왕이장에게 도와달라고 부탁할 자격도 없는 것이다.왕청여는 그보다 이 사실을 새언니에게 알려야 하는지 고민이 깊었다. 오라버니가 죽게 내버려둘 수는 없었기에 왕청여는 나무 그늘 밑에 앉아 한참동안 멍 때리고 있었다.이때, 석소 사저가 마침 이곳을 지나가다가 왕청여를 보자 그녀와 마주치기 싫어서 바로 방향을 틀었고 조금 전의 말실수가 떠오른 왕청여가 다급하게 석소 사저를 불러 세웠다.“석소 사저, 조금 전에는 제가 죄송했습니다. 하지만 절대 나쁜 뜻으로 얘기한 건 아니었습니다.”“예.”그러자 석소 사저는 대충 대답을 하고 바로 자리를 뜨려고 했다.왕청여는 자유롭게 사는 무림의 여인은 솔직하고 직설적으로 말을 해줄 것 같아서 돌아서는 석소 사저에게 말을 걸었다.“석소 사저, 혹시 사저와 얘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걸음을 멈춘 석소 사저가 잠시 망설이다가 돌아서서 왕청여에게 다가갔고 두 사람은 그렇게 나무 그늘 밑에 나란히 앉았다.“무슨 얘기하고 싶은데요?”왕청여는 무슨 말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라서 우물쭈물하다가 석소 사저 손에 들고 있던 재봉실을 보며 물었다.“재봉실을 사신 거예요?”“아니요. 이씨 부인께서 보내왔어요.”석소 사저의 대답에 왕청여가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이씨 부인은 사람이 참 선하네요. 소주방에 신경도 많이 써주고.”“다들 선한 사람들이죠.”“맞아요.”석소 사저는 대충 대답을 하고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그러자 왕청여가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특별한 건 아니고 그냥 함께 사는 얘기나 하려고 그런 겁니다. 아
왕청여는 석소 사저가 자신의 뜻을 오해했다는 것을 알았지만, 마음이 심란해서 사과할 겨를이 없었다. 문을 굳게 닫은 왕청여는 어머니에게 약을 건네며 말했다.“어머니, 일단 약부터 드세요. 나머지는 다시 천천히 생각하시고요.”그러자 노부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청여야, 네가 솔직히 얘기해 보거라. 네 오라버니가 평소에 너에게 얼마나 잘해주었느냐?”“어머니, 하지만 저희는 이제 오라버니를 도울 능력이 없어요. 우린 지금 소주방에서 빌붙어서 살고 있고 어머니께서 드시는 약도 시만자 아가씨가 돈을 줘서 살 수 있었던 거예요.”왕청여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하자 노부인이 반박했다.“네가 틀렸어. 그 돈들은 왕이장이 준 거야. 비록 왕이장이 우리를 가족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우리를 살리기 위해 여기저기 바쁘게 움직였었다고.”“그자의 돈이라고 해도 우리는 오라버니를 위해 그자에게 돈을 달라고 할 수는 없어요.”입술을 꽉 깨물고 있던 노부인이 솔직하게 얘기했다.“그 돈들은 왕이장 돈이 아니야. 그때 당시 왕이장이 돌아왔을 때 네 새언니가 왕이장에게 보상을 줘야 한다고 제안했어. 그래서 점포 여러 개를 왕이장에게 준 거야.”“그자에게 줬으면 그자의 것이잖아요. 그리고 왕이장 그자도 암암리에서 저희를 많이 챙기고 도왔는데 이제 와서 도로 내놓으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어머니, 이건 왕이장에게 불공평해요.”왕청여의 말에 노부인의 표정이 확 굳어졌다.“어차피 우리는 왕이장에게 미안한 짓을 이미 많이 저질렀어. 지금도 왕이장은 우리를 원망하고 있을 텐데 더 원망하게 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어. 네 오라버니가 잘못을 저지른 건 맞아. 잠시 정신이 나가서 그랬을 거야.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도망칠 곳도 없는데 네 오라버니가 이대로 죽는 걸 두고 볼 수는 없잖아.”고개를 푹 숙인 왕청여는 약 그릇을 내려놓으며 대꾸했다.“어머니, 차라리 새언니에게 말하는 건 어떨까요? 새언니는 좋은 방법이 있을 수도 있잖아요.”“그건 절대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