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이 지나야 발표할 수 있다는 것은 정월 이후에 새로운 어전시위령이 생기거나 전북망이 김순희의 장례에서 효를 지킬 수 없다는 걸 의미한다.송석석이 떠난 후, 숙청제는 전북망의 모친상에 관한 문서를 여러 번 살펴보더니 다시 한번 그 문서를 어좌 앞에 던져놓으며 오 대반에게 물었다. “너는 전북망이 효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느냐?”오 대반이 공손히 답했다. “폐하, 이는 조정의 인사 문제이므로 소인은 감히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조정의 인사일지라도 짐의 곁에 있는 어전시위에 관한 것이니 오 대반은 마음껏 말하거라.” 숙청제가 단호하게 말했다.오 대반은 잠시 생각하다가 결국 고개를 저었다. “소인은 알지 못하옵니다.”“모르는 것이냐, 아니면 말할 용기가 없는 것이냐?” 숙청제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오 대반은 숙청제 곁에서 오랫동안 시중을 들어왔기에 그의 성격을 잘 꿰뚫고 있었다. 만약 평범한 관료였다면 이 모친상 문서는 이미 허락되었을 것이고 송석석과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는 분명히 전북망을 잘 이용하고 싶었을 것이고, 자기 결정을 지지할 누군가를 바라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 대반은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할 수 없었고, 또 그의 의견이 하찮은 것도 알았기에 더욱 말을 꺼내기 어려웠다.“오 대반, 짐은 항상 너를 중용해 왔거늘… 너의 마음은 여전히 송가에 있는 것 같구나.” 숙청제의 목소리는 차가웠지만 평온했다. 오 대반은 식은땀을 흘렸다.“폐하, 소인은 폐하께 충심을 다하고 있는데 어찌 송가에 마음이 있을 수 있겠사옵니까?” 오 대반이 억울해하며 무릎을 꿇었지만 숙청제는 여전히 냉정한 태도였다. “송씨 부인이 네 목숨을 구했으니 그 은혜는 잊지 말아야 하겠지만, 네 신분 또한 잊지 말아라.”오 대반의 마음은 파도가 치듯 소란스러워졌다. 폐하가 어찌 이 일을 아신단 말이지? 설마 사람을 시켜서 나를 조사한 것인가?“일어나라!” 숙청제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가웠다. “짐은 네가 전북망을
사람들은 한동안 말문이 막혔다. 비록 서경의 새로운 황제가 즉위하면 녹분성 사건을 추궁할 거라고 예상하긴 했지만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바로 사건을 조사하고, 심지어는 수란키를 감옥에 가두어 버릴 줄은 꿈에도 몰랐었기 때문이다. 수란키는 오래전에 암살의 위협을 받고 겨우 생사를 넘겼는지라 아직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 몸으로 옥살이를 한다면 과연 견딜 수 있을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오랜 침묵을 깨고 사여묵이 말했다. “그렇다면 두 번째로 할 일은 어쩌면 상국과의 대결일 지도 모르지. 녹분성 사건을 추궁하려면.”“이는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염구진이 대답하자 송석석이 사여묵에게 물었다. “왕삼과 왕오는 이미 서경에 잠입하였습니까?”왕삼과 왕오는 치석정찰대의 사람들이다. 원래 상을 받고 고향으로 돌아가려 했으나 조정에 계속 충성하고 싶어 고향에서 가족의 얼굴만 본 후 곧바로 서경으로 향한 것이었다.“이미 서경 도성에 들어와 안착했소.”“그들 외에 다른 이들은 총 몇 명인가요?”“열세 명이오. 그리고 소팔야가 이미 사람을 보내 잠입시켰으니… 아마 합치면 사, 오십 명 정도 될 것이오.”소팔야는 소 대장군의 양아들로 항상 소 대장군과 함께 성릉관에서 함께했으며 현재 소 대장군 곁에는 팔이 잘린 삼야와 팔야, 그리고 소육랑이라고 불리는 조카가 한 명 있었다.소육랑의 아버지는 소 대장군의 서형제로 엽성에서 관직을 맡고 있으며 10년째 엽성에 재직 중이다. 그는 10년동안 한 번도 진성으로 돌아오지 않았고 가족 모두 그곳으로 이사했기에 진성에는 송가와 회왕비 외에는 친척이 없었다.사여묵은 송석석의 걱정스러운 표정을 보고 조용히 위로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우리는 이미 만단의 준비를 했소. 만약 폐하께서 진정 외할아버지를 진성으로 불러 처벌하려고 해도 공문 쪽은 거의 다 통과했으니 절대 고통받지 않을 것이오.”“예.” 송석석은 불안했지만 이 불안감이 일을 방해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알기에 침착
송석석이 물었다. “회왕은 정말로 진성을 떠났을까요?”사여묵이 대답했다. “며칠 동안 사람을 보내 확인했는데, 어젯밤 장부장이 보고하길 확실히 집에 없었다고 하오. 세 방향으로 추적 중인데 만약 변장했다면 찾기 어려울 거요.”그러자 염구진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실수를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진성을 떠날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송석석은 손톱을 매만지며 날카로운 눈빛을 보냈다. “제대로 살핀 후 폐하께 그가 진성에 없다는 사실을 알려야 합니다.”사여묵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곧 계획을 세웠다. “내일 어머니를 궁으로 들여보내 회왕부에 어의를 보내라 태후에 청할 생각이오. 그러니 어머니에게 태후 앞에서 어떻게 말씀해야 할지 잘 가르쳐주시오… 사실 란이가 가는 게 가장 좋긴 하다만... 괜히 방해가 되는 것 같으니 그건 안 되겠소.”혜태비는 음력 8일에 이미 집으로 돌아갔었는데, 궁에서 열흘 정도 지내니 지루함을 느껴 차라리 왕부로 돌아가면 더 자유로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궁에서는 규칙이 많지만 왕부에서는 그녀가 규칙을 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지금 바로 어머님을 찾아가겠습니다.” 송석석이 벌떡 일어섰다.…혜태비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 그녀는 아름다운 중년 여성이기에 충분한 수면으로 계속 미모를 유지해야 했는데, 며느리가 달콤한 잠을 방해하자 그녀의 두 눈에 불만이 가득 차올랐다. 송석석은 그녀가 거짓말을 하지 못하도록, 또 우회적인 표현을 하지 못하도록 바로 본론부터 말했다. “내일 궁에 들어가셔서 태후에게 회왕이 연초부터 지금까지 몸이 아픈데 아직도 나아지지 않았다고 말씀드리세요. 그리고 혹시 어의를 청한 적이 없다고 하시면 태후에게 회왕부에 어의를 보내달라고 요청해 주세요. 결국 그는 선제의 아우입니다.”혜태비는 즉시 불만을 토로했다. “지금 회왕 문제 때문에 나를 깨운 게냐? 그 집안 사람들이 너한테 어떻게 했는데 아직도 그들을 걱정한단 말이더냐?”혜태비는 송석석이 멍청하다며 탄식했다.송석석은 한숨을 내쉬
보요는 송석석을 위해 부탁한 것이기에 혜태비는 자기도 하나 고르겠다고 했다. 중년 여성의 애교는 아무리 높은 자리의 태후라도 거부할 수 없는 법이었다. 그녀는 나인에게 최근에 새로 들어온 보석을 가져오게 했는데, 혜태비가 무려 한꺼번에 일곱 여덟 개를 골라버린 것이었다!하지만 태후는 아끼는 여동생이 소녀처럼 좋아하는 모습에 그래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며 거절하지 않았다. 복구안은 허 어의와 함께 회왕부로 향했다. 허 어의는 늘 태후 곁을 지키던 사람으로, 형인 허어사처럼 고집이 세고 성품이 곧았다. 이런 성격으로는 태의원에서 버티기 힘들지만 다행히 태후가 그를 발탁했고, 심지어는 자신의 딸인 민지 공주를 그의 조카인 허낙천과 혼인시켰다.태후 곁의 복구안이 허 어의와 함께 회왕을 진찰하러 왔다는 소식에 회방비는 깜짝 놀라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맙소사, 맙소사!‘이걸 어쩐담? 왕야는 설전에 이미 나가셨는데. 그저 대외적으로 휴식이 필요하다고 했을 뿐인데 말이야.’회왕부는 그동안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기에 누가 찾아오는 일도 없었다. 설령 누군가 오더라도 병중이라고 하면 쉽게 넘길 수 있었다. 게다가 이 몇 년 동안 회왕부는 존재감이 전혀 없었고 그들이 있는지 없는지와 상관없이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었다. 그런데 왜 지금 태후가 어의를 보낸거지? “그게…” 회왕비가 당황해하며 말을 얼버무렸다. “왕야꼐서 이미 다른 의원에게 진찰을 받았는데 큰 문제는 없다고 했으니 허 어의님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여기까지 왔으니 그래도 보는 게 좋겠습니다.” 복구안이 담담하게 말했다. “게다가 이건 태후의 명입니다! 그냥 이대로 돌아간다면 제가 보고할 길이 없지 않겠습니까? 허 어의님도 태후 앞에서 설명하기 어렵게 되실 겁니다.”회왕비는 줏대가 없었다. 그녀는 회왕이 무엇을 하러 나갔는지도 몰랐기에 나간 목적을 알려주지 않았다. 단지 절대 누군가에게 그가 나갔다는 것을 알리지 말라고만 당부만 받았으니 말이다.이젠 어쩐단 말
두꺼운 장막이 바람을 차단했고 방 안에는 네다섯 개의 숯불 그릇이 놓여 있었는데 창문이 살짝 열려 있어 따뜻하면서도 답답하지 않았다.관리는 비단으로 된 사각 쟁반을 두 번째 장막 안으로 옮긴 후 손목을 침대 가장자리에 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허 의원님, 여기 앉으셔서 진맥해 주십시오.”허 의원은 자리에 앉아 왕야의 보기 위해 장막을 열려 했지만 만 관리가 저지했다. “왕야께서 추위를 피해야 합니다.”“맥만 짚을 수는 없소. 안색도 봐야 하오.”허 의원은 미간을 찌푸렸다. ‘대체 왜 이러단 말인가? 병이 있으면 병을 치료하는 것이 우선이지 않은가?’이때 복구안이 앞으로 나아가 장막을 열었는데, 침대 위의 사람은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이건 분명히 회왕이 아니다!한 눈에 봐도 알 수 있었다. 만 관리는 순간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여러 가지 대책이 떠오르긴 했지만 모두 소용이 없었다. 그들은 그동안 아무도 회왕부에 관심을 가진 적이 없어 회왕부에 문제가 생길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아니, 어찌 이런 일이…?!” 허 의원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사람을 써서 왕야를 가장하게 하다니?”만 관리는 씁쓸하게 웃을 뿐이었다. “사실 왕야는 농장에서 요양 중인데 왕비가 태후의 호의를 거절할 수 없어서… 그래서 사람을 불러 왕야를 가장하게 했습니다.”“웃기는 소리!” 복구안이 담담하게 말했다. “허 의원님, 그냥 태후께 보고합시다.”허 의원은 알겠다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회왕비, 그럼 이만.”떠나기 전, 그는 누워 있는 사람을 한번 쳐다봤다. 비록 이불 속에 있었지만 거친 옷깃이 보이는 것이 분명히 하인의 모습이었다.태후를 속이기 위해 하인을 왕야의 침대에 올리다니... 앞으로 저곳에서 어떻게 잠을 자려고?복구안이 물었다. “세자께서는 아직 외부에서 여행 중이시지요?”잔뜩 긴장한 회왕비는 복구안의 질문에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오래전부터 돌아오시지 않고 계십니다.”복구안은 더는
숙청제는 마음을 가다듬었다.문득 어머니가 왜 갑자기 황숙에게 어의를 보냈는지 궁금해져 잠시 고민하다가 물었다. “궁 안에서 사람들 말로는 오늘 혜태비께서 오셨다면서요?”태후는 웃으며 대답했다. “예, 제가 불렀습니다. 사보국에서 새로 들어온 장신구들 중 붉은 금으로 만든 칠색 보요가 있습니다. 황후도 이를 원하고 숙비도 원한다고 하니 고민이 참 많았지요. 황후에게 드리는 것도 좋지만 용종을 잉태한 숙비는 어찌할까요? 그래서 아예 혜태비에게 주었더니 혜태비가 글쎄 날강도가 따로 없었습니다. 보요뿐만 아니라 다른 장신구도 한가득 가져가 버렸어요. 정말 후회스럽습니다.”숙청제는 웃으며 말했다. “혜태비가 즐거우시면 어머님 또한 기쁘시지 않겠습니까?” 그는 이런 재물에 대해서는 별로 아깝지 않았다. 그에겐 어머니를 기쁘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저녁 식사를 마치고 숙청제는 돌아갔고, 태후는 옥춘과 옥하을 데리고 산책을 나갔다. 이 습관은 수년간 유지되어 왔으며 아무리 추운 날씨라도 식사를 마치고 잠시 휴식을 취한 후에는 꼭 나가서 걷곤 했다.냉혹한 북풍이 휘몰아쳤고 그녀는 하나하나 끊임없이 이어진 궁의 등불을 올려다보았는데, 멀리 있는 등불일수록 마치 수증기 속에 잠긴 유리처럼 희미하게 보였다.옥춘은 태후가 뭔가 말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꽃밭에 도착할 때까지 태후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그저 가끔 하늘을 바라볼 뿐이었다. 심지어 한숨조차 내쉬지 않았다.옥춘은 황제가 북명왕을 의심하게 되어 형제간에 불화가 생길까 두려워하는 태후의 걱정을 잘 알고 있었다. 태후와 황제는 모자 관계로 매우 친밀하지만 전왕조의 일에 대해서는 말을 아껴야 했다. 그녀의 말은 매우 무게감이 있기 때문에 더욱 신중하게 해야 했다.…북명황실.태비는 붉은 금으로 만든 칠색 보요를 송석석에게 주었고, 석류 손목띠는 시만자에게 주었다. 그리고 나머지는 자기를 위한 보상으로 매일 화려하게 치장했다. 그녀의 언니가 말하기를, 여성은 언제 어디서든 힘이 미치는 범위 내에서
그는 백보재의 주인장에게 하인을 데려와 하나하나 값을 매기도록 했다. 그렇게 상자를 하나씩 정리하다 보니 어머니가 금괴와 여러 가지 귀한 보석을 숨겨놓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마마의 말로는 일부는 어머니의 지참금이고 일부는 그의 할머니가 남긴 것인데 분가하지 않아서 육씨에게 나눠주지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일부는 송석석이 보낸 것인데 그녀가 이혼할 때 숨겨두었던 것이라며, 다행히도 송석석이 그 보석들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고 했다.전북망은 마마에게 송석석이 보낸 것들을 골라내게 하여 다시 그녀에게 돌려주기로 했다. 그러자 마마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사실 돌려줘도 받을 리 없을 것입니다. 차라리 둘째 노부인께 드리는 게 낫지요. 어차피 두 분은 사이도 좋았으니까요.”“송석석이 둘째 노부인에게 주는 것은 그녀의 일이지만 우리는 대신 결정을 내릴 수는 없다.” 전북망은 이렇게 생각했지만 왕청여는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 돈과 보석에 욕심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젠 왕부 사람들과는 아무런 연관을 맺고 싶지도 않아 했으니 어차피 송석석이 가져가지 않았으니 팔거나 맡기는 게 낫고 그 수익은 육씨에게 주면 된다고 생각했다.“송석석은 신경 쓰지 않을 것입니다. 형님이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으로 전당 맡긴 것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걸 되찾는 게 송석석에게 돌려주는 것보다 낫지 않을까 싶습니다. 형수님도 본래 송석석에게 돌려주려 했을 것일 테니.” 전북망이 말했다. 그는 왕청여의 주장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 거절했다. “관계를 깔끔히 정리하려 한다면 더욱더 돌려줘야 합니다. 설령 그녀가 버리더라도 그것은 그녀의 결정이지요.”백보재의 사람들이 함께 있었기 때문에 왕청여는 그의 행동에 화가 나더라도 집안의 치부를 드러내고 싶지 않아 결국 그를 끌고 나가서 대화했다.창고 밖에 나가니 전북망이 자연스럽게 자기 망토를 벗어 그녀에게 덮어주었다. 그녀는 아이를 낳고 난 후 몸이 별로 회복되지도 않았고 또 오늘은 날씨도 아주 추웠기
상대는 회왕부의 무상 선생이었지만, 그의 복장이 왕부에 있을 때와 달랐고, 얼굴도 익숙하지 않았다. 그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손을 모아 인사했다. “장군님, 어머님과 민씨의 일에 대해 들었습니다. 삼가 애도 드립니다.”여전히 낯선 사람인 탓에 전북망은 거리를 두었다. “고맙소. 허는 성함을 밝히지 않으신다면 이만 가보겠소.”무상이 대답했다. “소인은 만씨로 회왕부의 가신입니다. 회왕비께서 위로차 소인을 보냈습니다. 허나 장군님과 송 대감의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서둘러 방문하기 어려웠습니다.”전북망은 회왕부의 사람을 몇 명 보았기에 만씨 성을 가진 관리가 있다는 것은 알고있었고, 눈앞의 그가 바로 그 사람 같았다. 그에게선 학자의 기품이 느껴졌는데 아무리 봐도 관리처럼 보이지 않았다.하지만 왕부의 가신인 만큼 분명 학자의 신분은 틀림없을 것이다.그는 회왕비가 그를 직접 찾아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해 복잡한 감정이 마음속에 교차했다. “회왕비에게 고맙다고 전해주시게. 내 부족함으로 인해 송 부인과 회왕비의 기대를 저버렸으니.”“다과점으로 자리를 옮겨 이야기를 나누면 어떻겠습니까? 회왕비께서 전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다고 하십니다.”전북망은 결혼식 날 성릉관에 갔고 그 후 이혼했지만 회왕비는 송석석을 돕지 않았다.그래서 그는 무의식적으로 회왕비에게 호감을 느낀 것이었다. 게다가 회왕부는 진성에서 항상 저자세로 지내왔기에 몇 번의 교류는 문제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좋소. 그렇게 하지.” 전북망이 말했다.사방에선 많은 숨겨진 눈들이 그들이 다과점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무상은 전북망을 바라보았다. 사실 이전부터 그는 항상 그의 동태를 살펴보았고 계속해서 사람을 보내 관찰하고 있었다. 한 해가 지나자 전북망은 한층 더 여윈 탓에 얼굴은 각이 졌고, 눈빛도 이전보다 훨씬 침착하고 진지해졌다.하지만 무상은 약간 실망했다. 전북망의 얼굴에선 이전같은 적개심이나 숨겨진 야망의 기미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튿날 아침, 송석석은 경위부로 돌아갔는데, 회왕비가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이번에 회왕이 진성으로 잡혀왔을 때, 그의 아들은 아직 잡히지 않았기에 목종욱은 여전히 병사들을 이끌고 회왕의 아들을 수색하고 있었다.회왕비는 자신의 아들도 왕표처럼 요참형에 처형당할까 봐 걱정되어 급하게 송석석을 찾아온 것이다.사실 전에 회왕이 진성으로 압송되었을 때에도 회왕비가 란이를 찾아가 송석석에게 도움을 청해보라고 시켰지만 란이는 단호하게 거절했었다. 심지어 송석석 앞에서 단 한번도 언급한 적이 없었기에, 송석석도 석소 사저를 통해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이었다.회왕비가 재빨리 송석석에게 다가가 조급한 표정으로 말했다.“석석아! 이모가 너에게 부탁할 일이 있어. 일단 조용한 데 가서 얘기 좀 할까?”“지금 처리할 일이 많아서 그럴 시간이 없습니다.”송석석이 돌아서서 떠나려고 하자 회왕비는 얼른 두 팔을 활짝 벌려 다시 그녀의 앞을 막았다.“몇 마디만 하면 돼. 네가 네 사촌 오라버니를 좀 살려주면 안 돼? 네 사촌 오라버니는 아무 잘못이 없어. 걔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어. 전부 걔 아버지 때문에 벌어진 일이야. 제발 네가 좀 구해줘!”송석석은 눈시울이 붉어진 회왕비를 보며 예전에 외할아버지가 진성으로 돌아와 관아에 갇혀 있었을 때 회왕비가 단 한번도 외할아버지를 보러 가지 않았던 일이 떠올랐다.송석석은 이기적이고 냉정하며 나약한 회왕비와 단 한 마디도 섞고 싶지 않았으며 회왕비를 슬쩍 피해 경위부 안으로 들어갔고 경위대에게 회왕비를 쫓아내라고 지시했다.이때 등 뒤에서 회왕비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석석아, 너 어찌 이리 인정머리가 없을 수 있느냐? 네가 어렸을 때 이모가 너에게 얼마나 잘해줬는데 벌써 다 잊은 거야?”송석석이 뒤도 안 돌아보자 회왕비는 더욱더 큰소리로 외쳤다.“송석석, 네 어머니는 나를 제일 사랑하고 아꼈다! 네가 날 이렇게 모른 척하면 분명 네 어머니 상심이 클 것이다!”자신의 어머니가 언급되자, 걸음을 멈춘 송석석은 싸늘하게 굳은
한편, 송석석은 서재에서 편지 한 장을 쓴 뒤, 편지를 염구진에게 주면서 사람을 시켜 남강에 있는 사여묵에게 전달하라고 했다. 송석석은 현재 남강의 상황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빅토르는 병사들만 끌어 모을 뿐 공격도 하지 않고 물러서지도 않은 채 대치를 하고 있었다. 빅토르가 시간을 끌고 있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남강 전쟁에 참여하겠다고 황제에게 먼저 얘기한 빅토르는 전쟁을 이기지 못하면 군령에 의해 처벌을 받겠다는 서약서까지 썼지만 사청엄이 반역에 성공하지 못했기에 빅토르에게 성을 나눠줄 수 없었고 빅토르도 공을 세울 수 없었다.이대로 섣불리 자신의 나라로 돌아갔다가 자신이 쓴 서약서 때문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빅토르는 초원과 연합하여 자신의 퇴로를 확보하려고 했지만 초원은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초원은 애초부터 전쟁을 싫어했을 뿐만 아니라 중간에 끼어 마음을 졸이면서 어렵게 생존하고 있었기에 반드시 중립을 유지해야 안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만약 둘 중 한 나라를 반드시 선택해야 한다면 초원은 반드시 상국을 선택할 것이다.전에 사제가 송석석에게 보낸 서신에 의하면 남강 병사들은 빅토르를 확실하게 공격하여 다시는 전쟁을 일으킬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만들 거라고 했다.송석석이 생각에 잠겨 있었던 그때, 시만자가 문을 두드렸다.“석석아!”“들어와.”송석석의 말에 시만자가 최숙심과 함께 방으로 들어왔다.“최씨께서 너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싶다고 하셔서 모시고 왔어.”최숙심은 한걸음 앞으로 다가가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왕비님, 그동안 신경 써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제가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까요?”송석석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농담을 던졌다.“전 여색을 즐기지 않으니 몸으로만 갚지 않으시면 됩니다.”송석석은 분위기가 무거워지는 게 싫어서 농담을 하자, 흠칫하던 최숙심도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시만자는 잠깐 앉아있다가 왕경루로 가야 한다고 방을 나섰다. 종문파와 시씨 가문 사람들은
오후 3시 정각, 커다란 판대기가 처형장에 올라왔다. 철로 만들어진 판대기는 매우 단단했으며 상국에서 요참형에 쓰이는 유일한 판대기였기에, 오랫동안 방치되어 먼지가 뽀얗게 쌓여 있었다.문엄 황제 때 요참형이 너무 잔인하다는 평가가 많았기에 죄가 아무리 중한 범인이라고 해도 요참형을 내리지 않았다.하지만 이 형이 현재까지 폐지되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 반역자에게 겁을 주기 위한 것이다.요참형을 처형할 때 백성들에게 보여주지 않는 게 원칙이지만 국정을 어지럽히고 역적들과 손을 잡고 나라를 배신한 건 역천 대죄이기에 이러한 방식으로 반역의 마음을 품고 있는 사람들에게 겁을 주려고 했다.왕표는 이내 입고 있던 옷이 전부 벗겨졌고 관원 부하 두 명이 왕표를 판대기에 눕혀 어깨를 꾹 누른 뒤 꿈쩍도 못하게 제압했다.공포에 질린 왕표는 순간 정신을 잃은 채 기절했고 망나니가 대도를 치켜 들자 대부분 사람들이 급하게 고개를 돌렸다.구경꾼들과 달리 영군오아과 연왕 등 사람들은 전방을 직시하게 고정되어 있었기에 고개를 돌릴 수 없었고 눈을 꼭 감은 채 온몸을 덜덜 떨었다.연왕은 그 중에서 가장 겁이 많은 사람이었다. 망나니가 대도를 든 순간 눈을 꽉 감은 연왕은 심지어 비명까지 질렀다.하지만 겁을 먹은 사람들과 달리 추몽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전방만을 직시했다.망나니의 대도가 왕표의 허리를 자른 순간에도 추몽의 표정은 한 치의 변화도 없었다.왕표에 이어 고청우가 처형당할 때에도 그는 눈을 피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주변의 비명소리나 흐느끼는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 듯 왕표와 고청우가 발버둥 치다가 완전히 의식을 잃을 때까지 빤히 지켜 보았다.한편, 왕청여는 왕표가 처형되기 전에 노부인을 데리고 이미 처형장을 떠났고, 최숙심은 처형이 끝나고 나서도 여전히 남아 있었다.최숙심은 결국 왕표가 처형당하는 모습을 보지 않았다. 눈을 꼭 감고 있다가 주변에 모여 있던 백성들이 왕표가 죽었다는 말에 그제야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가족들이 시체를 거둬가지 않으면
경위대가 노부인과 최숙심 그리고 왕청여를 처형장 안으로 호송했고 다리에 힘이 쫙 풀린 노부인은 온몸을 덜덜 떨면서 눈물을 줄줄 흘렸다.“이 멍청한 놈아! 넌 우리 집안 조상님들과 네 아버지의 얼굴을 보기 창피하지도 않아? 이제 하늘나라로 가면 어떻게 마주하려고 이런 짓을 저지른 거야!”그러고는 노부인은 엉엉 울면서 왕표의 뺨을 강하게 내리쳤다.한편, 감당할 수 없는 공포에 영혼이 나간 왕표는 어머니를 보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소리를 질렀다.“어머니, 저를 구해주세요! 제발 저를 구해주세요! 전 이대로 죽고 싶지 않다고요!”“네가 이렇게 큰 죄를 저질렀는데 내가 무슨 수로 너를 구해? 황제 폐하께서 너를 얼마나 중히 여기고 믿어줬는데 네가 어찌 이런 배은망덕한 짓을 저지른단 말이냐!”“어머니, 저 정말 잘못했어요. 제 죄를 다 뉘우쳤어요. 다시는 그러지 않을 거예요! 나라를 위해 목숨 걸고 싸울게요. 제발 이 아들을 살려주세요!”왕표가 오열했지만 노부인은 그저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이때, 곁에 서있던 최숙심이 직접 만든 음식과 술을 꺼내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당신과 나 사이에 부부의 연은 끝났지만 어머님과 아이들은 제가 잘 돌볼게요. 그러니 걱정 말고 떠나세요.”왕표는 담담하게 말을 하는 최숙심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네가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와! 서방을 배신한 천박한 년! 감히 나에게 부부의 연을 운운해?”“그래요. 저희는 이제 부부가 아닙니다. 그러니 앞으로 각자 갈 길을 가는 게 좋겠지요.”“나쁜 년!”왕표가 잔뜩 분노한 목소리로 외치자, 이를 들은 백성들이 너도나도 최숙심을 불쌍하게 여겼다. 평생 전전긍긍하면서 왕표를 위해 아들과 딸을 낳고 집안일을 처리하면서 시부모에게도 최선을 다했는데 결국 저런 말을 듣다니.뒤로 한 걸음 물러난 최숙심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한편, 고청우는 왕씨 가문의 일에 전혀 관심이 없었으며 모여 있는 백성들을 자세하게 쓱 훑었다. 이제 곧 죽을 텐데 정말 아무도
그렇게 한참 지나고 나서야 눈물을 그친 노부인은 결국 왕표를 구하는 일은 포기했지만, 그의 형이 집행되기 전에 최후의 만찬을 직접 먹일 것이라고 고집을 부리기 시작했다. 노부인의 눈은 퉁퉁 부었고, 목소리도 심하게 갈라져 있었다.“형이 집행되기 전에 범인은 가족들을 마지막으로 한 번 만날 수 있다는 걸 알아. 그러니까 이것만 하게 해줘. 아들이 마지막으로 배불리 먹고 길을 떠날 수 있게 해줘.”노부인은 다시 최숙심을 쳐다보며 말을 이어갔다.“며느리 너도 자식이 있으니 부모의 마음을 이해할 거야. 세상 사람들 눈에 걔가 백 번 죽어 마땅한 나쁜 놈이라고 해도 나에게는 그저 한없이 어린 아이일 뿐이야.”한참동안 침묵하던 최숙심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어머님, 형이 집행되기 전에 마지막으로 만난다는 게 뭘 의미하는지 아시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집행장에서 아들이 요참형을 당하는 모습을 정말 직접 보실 수 있으시겠습니까?”노부인은 온몸을 덜덜 떨면서 대답했다.“네가 가서 북명 왕비에게 부탁을 좀 해보거라. 난 감옥에 가서 아들을 만나고 싶다.”노부인의 말에 고청락이 어이없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참 말씀을 쉽게 하시네요. 어머님께서 부탁하면 왕비님께서 무조건 그 부탁을 들어줘야 하시는 겁니까?”“어머님, 전 그런 부탁을 드릴 수 없습니다. 이 일은 왕비께서 결정할 수 있는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최숙심이 대답하자 노부인은 잠시 고민하다가 입술을 꽉 깨문 채 말했다.“집행장이라도 갈 것이다. 절대 내 아들을 굶겨서 하늘나라로 보낼 수는 없어.”“어머니, 오라버니는 안 굶어요. 형이 집행되기 전에 감옥에서 오라버니에게 맛있는 밥을 준비해줄 거예요. 심지어 술도 준비해준다고 들었어요.”왕청여의 말에도 노부인은 끝까지 고집을 부렸다.“그건 달라!”최숙심이 계속 한숨을 살짝 내쉴 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곁에서 지켜보던 모종윤이 고청락을 끌고 밖으로 나갔다.그렇게 시간이 흘러 집행 당일 날이 되었고, 하늘은 한없이 맑았다.문엄
궁으로 들어가 황제에게 자초지종을 보고하자, 최숙심의 딱한 사정을 운운하면서 그녀의 선한 마음씨 또한 찬양했다.그녀의 삶도 이토록 엉망진창인데 힘든 사람들에게 죽도 나눠주고 갈 곳 없는 여인들을 소주방에서 지내게 도와준 사실들을 일일이 읊으면서 감탄했다. 솔직히 숙청제에게는 지금 최숙심처럼 백성들을 교화할 수 있는 모범적인 사람이 필요했다. 때문에 바로 어명을 내려 그녀에게 순금 백 냥과 집 한 채까지 하사했다. 그리고 유방 당했던 왕씨 가문 남자들도 남강 전쟁만 끝나면 북명왕과 함께 진성으로 돌아오는 것에 허락했다.그렇게 최숙심은 죽을 고비를 넘어 인생 역전까지 이뤄냈다!한편, 왕표에게는 요참형이 내려졌고 역적과 손잡고 왕표를 선동한 고청우에게도 똑같은 형을 내렸다. 그러자 숙청제는 예전에 고씨 가문 여인들을 살려준 일이 후회되었다. 고청우를 진작 감옥에 가뒀다면 남강에 이렇게 큰 화란이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니 말이다.이후 숙청제는 척귀에게 걱정되니깐 암자에 가끔 가보라고 했는데, 이는 실은 감시하기 위해서였다. 송석석은 척귀를 보자마자 황제가 무슨 걱정을 하고 있는지 바로 알아차리고는, 사람을 보내 고씨 여인들에게 고청우의 형이 집행될 때 고청우와의 옛정 때문에 잘못된 행동을 저지르지 말라고 확실하게 당부했다.한편, 소주방에 있는 노부인은 자신의 아들인 왕표가 결국 체포되었고 요참형을 받는다는 소식에 큰 충격을 받은 채, 죄 없는 왕청여와 최숙심에게 손가락질을 하면서 갖은 욕설을 퍼부으며 화풀이를 했다. 노부인은 두 사람이 어떻게 가족이며, 서방인 왕표를 배신할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며, 점점 더 흥분하다가 결국 최숙심과 왕청여의 뺨을 강하게 내리쳤다.그리고는 지금 당장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왕표를 구해내라고 억지를 부렸다.최숙심은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노부인에게 노여움을 풀라고 빌었지만, 노부인은 오히려 점점 언성을 높였다. 그러자 최숙심도 더 이상 참지 못해 벌떡 일어나 주막에서 칼을 가져오더니 바닥에 툭 던졌다
왕표는 중범죄자이기에 바로 대리사로 이송되어야 하지만, 송석석은 그를 일단 경위부로 압송했다. 경위부에서 심문을 마친 후, 어전에 보고를 올리며 최숙심의 공을 황제에게 잘 얘기한다면,왕준과 현이 하루 빨리 진성으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더군다나 고청우도 아직 경위부에 갇혀 있기에 왕표와 고청우가 만난다면 더욱 많은 일들을 알아낼 수도 있었다.그렇게 고청우와 왕표는 같은 곳에 갇혔으며, 중간에 나무 울타리 하나를 세워 두 사람을 갈라놓았다.고청우와 왕표가 서로 눈이 마주치자, 표정이 순식간에 바뀌었으며 왕표가 먼저 이를 갈면서 마구 소리를 질렀다.“천박한 놈! 결국 네 놈 꼴도 이렇게 되었구나! 드디어 벌을 받은 게야!”그러자 고청우가 실눈을 살짝 뜨며,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비아냥거렸다.“내가 천박한 년이면 왕표 너는 뭔데? 나도 벌을 받았지만 너도 결국 이렇게 갇혀 있잖아! 넌 뭐 다를 것 같아?”“이게 다 네 놈 때문이야!”왕표가 울타리 사이로 손을 뻗어 고청우를 잡으려고 허우적거렸고 뒤로 살짝 물러난 고청우는 오아표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코웃음을 쳤다.“버러지 같은 놈!”“네 놈이 감히…! 지금 뭐라고 했느냐! 네 놈이 역적과 손잡고 날 꼬셔서 야반 도주하게 만들지 않았다면 난 지금 남강 원수의 신분으로 잘 살고 있었을 거야! 절대 이런 꼴을 당할 리 없었을 거라고!”왕표가 씩씩거리며 소리를 지르자 고청우가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널 꼬셨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 넌 결국 죽음이 두려워서 그런 선택을 한 거야. 넌 내가 무엇인가 노리고 접근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잖아. 그런데 내가 아이까지 낳으니 이제 날 곁에 묶어 둘 수 있겠다고 확신한 거지. 이 세상 모든 여자들이 네 본처처럼 아이들을 위해 목숨까지 바칠 수 있는 줄 알아? 가족애라는 건 이 세상에서 가장 우스운 거야. 그딴 걸로 날 묶어 둘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멍청한 놈! 내가 널 버리고 갈 때 분명하게 얘기했잖아. 넌 무능하고 무술 실력도 보잘것없는데
한편, 송석석은 시만자를 데리고 일반 손님으로 위장한 채 직접 보화사로 향했다. 보화사에 도착한 뒤 절을 올리고 초를 꽂고는 주지 스님을 찾아 신분을 밝힌 뒤, 여람 스님에 관해서 물었다.주지 스님은 바로 지객 스님을 불러왔다. 각지 스님들이 보화사에 찾아와 며칠 묵고 갈 때마다 지객 스님이 그자들을 모셨기 때문에 자세한 상황을 제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보화사는 진성 3대 절 중의 하나일 정도로 꽤 유명했기에, 매년 보화사에 찾아와 경을 들으면서 며칠동안 이곳에 묵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많아도, 실제로 이곳에 머물 수 있는 사람은 몇 없었다. 지객 스님은 여람 스님에 대해 인상이 꽤 깊었다. 수련의 경지가 그리 높지 않았기에 원칙대로라면 이곳에서 지낼 수 없는데 몇 년 전부터 남강에서 죽은 이의 영혼들을 제도했기에 그 자비로운 마음을 높이 평가하고 덕행도 많이 쌓았기에 지객 스님은 의례적으로 여람 스님을 받아준 것이다.“며칠동안 매일 여람 스님께서 밖에 돌아다니셨습니다. 진성 내에 전란이 일어나 사상자가 많았기에 여람 스님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죽은 이들의 영혼을 제도하느라 고생이 많았습니다.”지객 스님은 여람 스님을 매우 좋게 평가했다. 송석석은 그런 지객 스님의 말을 조용하게 듣고 있을 뿐, 반박하지는 않았다.그러고는 지객 스님에게 여람 스님을 만나보고 싶다고 얘기하며, 여람 스님을 존경하는 마음에 돈을 기부하며 여람 스님을 위해 따로 절 하나를 지어주고 싶다는 말도 함께 전해달라고 했다.한편, 지객 스님은 송석석과 시만자의 신분을 알지 못했지만, 두 사람이 수수한 옷차림과 달리 기품이 넘쳐 흘렀기에 모 훈작 세가의 부인이나 아가씨일 것이라고 추측해,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인 후 바로 왕표에게 말을 전했다.왕표는 자신을 찾아온 자가 있다는 말에 흠칫 놀랐다가 절을 만들어주며 돈까지 기부하겠다는 소식에 바로 표정이 환하게 바뀌었다.평서백이었던 왕표는 가문의 번영을 위해 절에 돈을 기부하는 명문 가문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그렇게
이내 표정을 숨긴 최숙심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얼른 가십시오. 돈을 구하면 바로 서방님을 찾으러 가겠습니다. 아, 그리고 요즘 진성 순찰이 삼엄하니 여기저기 돌아다니지 마십시오.”왕표는 자신을 걱정하는 최숙심의 말을 듣자, 그녀가 밖에서 아무리 대단한 여인이라고 불려도 결국 자신에게 만큼은 마음이 약해질 수밖에 없다는 뿌듯함에 경계심이 완전히 풀렸다.“최대한 3일 안에 마련해주면 고맙겠소.”그러자 최숙심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그건 안 됩니다. 지금 상황이 어려운데, 어떻게 3일 안에 그 큰돈을 마련할 수 있겠습니까?”“우리 딸 지아가 지금 북명 황실에서 지내고 있지 않소? 그러니 난 부인이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믿소. 부인의 소식을 기다리겠소. 그리고 내가 부인을 찾아왔다는 말은 아무한테도 하지 마오. 어머니와 왕청여한테도 얘기해서는 안 되오!”말을 마친 왕표는 삿갓을 쓰고는 돌아서서 빠르게 떠났다.표정이 확 어두워진 최숙심은 그를 얼른 따라갔지만 골목 밖에도 순찰하는 경위대가 보이지 않았기에 섣불리 소리를 지를 수도 없었다.왕표는 궁지에 몰린 순간 백성들을 인질로 잡아 어떻게든 진성을 벗어나려고 할 것이고 만에 하나 왕표가 진성을 빠져나가게 되면 그를 찾아내는 건 더 어려워질 것이다.최숙심은 빠른 걸음으로 소주방에 돌아와 석소를 구석으로 불렀다.“석소 아가씨, 얼른 왕비에게 찾아가서 왕표 그자가 보화사에 여람 스님 신분으로 위장하여 숨어있다고 전하시오.”“네, 지금 바로 다녀오겠습니다.”그렇게 석소가 돌아서서 소주방을 떠나려던 그때, 최숙심이 그를 불러 세웠다.“잠깐만요! 왕비님께 너무 대놓고 보화사에 왕표를 잡으러 가지는 말라고 전해주세요. 저에게 거짓말을 한 것일 수도 있으니 일단 몇 사람만 데리고 가서 상황만 파악해보시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전하세요.”현재 수색이 삼엄해서 왕표는 더 이상 도망갈 곳도 없겠지만 그래도 최대한 조심해야 한다. 이는 최숙심이 공을 세울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이고 단번에 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