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에서 세 남자는 한 시진 넘도록 토론했다. 그들은 회왕이 정말 진성에 없다면 세 곳에 갔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첫째는 성릉관인데 그들이 성릉관에 못을 박았을 가능성이 제일 높았고, 두 번째는 옹현이었는데 그곳은 그들의 사병이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진성외주군위소였는데, 요 몇 년 동안 회왕이 암암리에 운영하면서 위소에도 못을 박았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하지만 어느 곳을 가든 모두 그들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들은 회왕이 가장 침착하다고 생각했는데 왜 지금은 오히려 가장 먼저 움직였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때 염 선생이 말했다. “모든 것에 올인했을 수도 있습니다. 사온이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그들이 겁을 먹고 손을 놓고 싸우는 게 낫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지요.” 하지만 사여묵은 고개를 저었다. “내 생각은 그렇지 않네. 이 일은 그들이 오랫동안 계획해 온 일이지. 남강을 칠 때가 가장 좋은 기회였는데 그들은 그때마저 출병하지 않았지. 그러니 지금은 더더욱 충동적으로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야. 반드시 역모의 정당한 이유를 찾아야 한다. 나는 오히려 성릉관에 있는 소대장군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걱정이 되는 군.” “서경.” 염 선생은 눈을 붉히며 말했다. “성릉관의 가장 큰 변수는 서경입니다. 회왕도 서경의 황제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들의 목적이 정말로 서경이었다면 이미 그곳에 사람을 배치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새 태자의 곁에 있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성릉관에 녹분성, 그리고 서경까지 합치면 바로 조만간 폭발할 폭탄이었다. 그들은 이미 준비가 되어 있지만 이 폭탄이 실제로 폭발한다면 잘 대응할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몰랐다. 왜냐하면 어떻게 하든 변하지 않는 한 가지는 성릉관의 총병원수는 소대장군이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가장 우려되는 점이기도 했다. 석석에겐 남은 가족이 많지 않아 그녀의 외조부 일가는 반드시 지켜야 했다.심청화가 말했
최씨는 목적이 명확했다. 그녀는 자수공방과 여학에 대해 알아보기로 했다. 만약 북명황실이 여학을 창립한다면 그녀는 자기 여식을 위한 자리를 확보하고 싶었다.따라서 그녀는 처음에 여식을 데려올 계획이었지만 그렇게 되면 너무 노골적이기도 하고 또 왕비가 반드시 딸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으로 비쳐질까 걱정이 되어 차라리혼자 필요한 조건을 알아봐 나중에 준비할 수 있도록 했다. “괜찮으니 저흰 별실에서 얘기하시죠.” 송석석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이끌고 별실로 갔고 오직 사여묵과 연신 하품을 해대는 이덕회만 남겨두었다.“그게…” 이덕회는 피곤한듯 입을 가리고 하품하며 물었다. “혹시 누워서 담화할 수 있는 곳은 없습니까?”송석석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 나이에 아직도 광란의 밤을 즐기는 게냐? 아주 대단하군!”이씨 부인은 소주방의 중요성을 알기에 바로 송석석에게 물었다.“왜 시만자 아씨는 보이지 않습니까? 시만자 아씨와 함께 소주방에 대해 논의하고 싶은데요.”송석석은 안타까운 마음에 시만자가 좀 더 자기를 바랐지만 이씨 부인이 직접 물었으니 사람을 보내 그녀를 깨우기로 했다.이씨 부인도 꽤 정교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소주방은 작업장으로서 위치가 외진 만큼 수공예품을 판매하려면 점포가 필요했기에 그녀는 한 점포를 내놓아 이 물품을 판매하려고 했고 수익은 모두 소주방에 귀속시키기로 했다. 누가 무엇을 수놓았든, 수익은 모두 수놓은 여인에게 줄 생각이었다. 이씨 부인이 말했다. “나는 임대료를 받지 않을 것입니다. 선행에 힘을 보태는 것이니까요. 점포에서 판매를 담당할 부리의 봉급은 수익이 발생하기 전까지 제가 지급할 생각입니다. 수익이 발생하면 그 부분에서 부리에게 지급하도록 하지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시만자는 잠시 생각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으로서는 그렇게 해도 좋을 듯싶습니다. 지금은 누가 소주방에 갈지 모르니까요. 모든 것이 정상적으로 운영된다면 말솜씨가 좋은 사람을 앞에 내세워 판매하게 해도
시만자는 처음에 설날부터 굳이 스승의 위세를 부릴 필요 없다고 생각해 제자들에게 편안한 분위기를 주려고 했다. 하지만 세 쌍의 부부는 처음부터 그녀에게 아주 깍듯하게 대했다. 심지어 오 낭자는 하녀에게서 차를 건네받아 직접 그녀에게 대접하고 나머지 두 사람도 시어머니를 모시듯 그녀 곁에 서 있었다. 그래서 그녀도 어쩔 수 없이 스승의 체면을 챙길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도 마음속으론 과연 이게 맞는 것인지 하는 의문이 들었다. 평소 적염문에서는 스승을 이렇게 모시는 일이 없었고, 오히려 스승이 그녀를 귀여워하는 경우가 많았다. 차를 내리고 물을 따르는 일은 방금 들어온 제자들이나 맡는 일이었기에 그녀 같은 선배는 나설 필요가 없었다.이런 분위기를 경험하지 못했던 그녀는 사부에 대한 송구함이 생기고 또 사부가 그리워지기도 했다. 다음 날, 몽동이는 크고 작은 배낭을 메고 나갔다. 이번에 매산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는 라사저와 석소사저도 함께 데리고 갔다. 연말이니 어르신을 찾아뵙는 것이 마땅했기 때문이다.두 사제는 월례수당을 받지 않겠다고 했지만 란이는 그녀들에게 많은 선물을 사 주었다. 선물은 직물과 여성들이 필요한 일상용품, 그리고 두꺼운 옷들이었기에 원래 말을 타고 돌아갈 계획이었지만 어쩔 수 없이 두 대의 마차를 타고 돌아가기로 했다. 마차 안에는 선물로 물건이 가득 차 있었는데, 바깥에도 다닥다닥 걸려 있을 정도로 많았다.석소사저가 돈을 받지 않자 송석석은 몽동이에게 더 많은 돈을 주었다. 몽동이는 거절하는 법이 없었기에 지난번에 연지와 분을 사서 사부에게 크게 혼났었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여성들에겐 아름답게 꾸밀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사서 사용하는 건 여인들의 문제지만 없어서는 절대 안 된다. 게다가 언젠가는 필요할 날이 있을 테니 말이다. 시만자도 그에게 엄중성을 경고했지만 몽동이는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그는 여성이 아름다워지려면 벌을 받는 걸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한편, 왕부는 여전
그로부터 며칠 동안 송석석은 더는 손님을 응대할 여유가 없이 바빴다. 현갑군쪽에 전부 맡길 수는 없었기에 그녀도 경위부로 돌아가야 했다. 사여묵과 염구진은 여학을 순찰하러 갔는데 수리가 필요한 곳이 많고 확장할 장소도 많았다.날씨가 추워진 탓에 진행 속도가 현저히 느려졌지만 다행히도 자금이 마련되어 그나마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었다.정초 팔일, 조정이 열리자 전북망은 그의 상관인 송석석에게 모친상 문서를 제출했다. 그 문서는 송석석의 손을 거쳐 황제에게 전달되었고, 숙청제는 문서를 자세히 살펴보며 송석석에게 물었다.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송석석은 잠시 멈칫하며 대답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무장은 걱정할 필요가 없으니 그저 법칙에 따라 행동하면 된다.” 송석석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주둔 무장을 위한 것이었고, 전북망은 경안의 무관이었다. 그러나 황제의 뜻은 그가 효를 다 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 같았다.“모든 것은 전하의 결정에 따르겠습니다.” 송석석은 더 이상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그가 전북망에게 효를 다하지 말라고 하면 그것은 그의 어머니에 대한 효도를 저버리는 것이고 만약 효를 지키라고 하면…!하지만 황제가 직접 이렇게까지 말하였으니 그저 따를 수밖에 없었다.숙청제는 그녀가 그렇게 단호히 물러나자 웃으며 말했다. “우선 미뤄두도록 하거라. 어차피 그는 지금 특별 훈련 중이니 계속 훈련을 이어가고 효를 다할지는 나중에 논의하도록 하지.”“예, 신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송애경!” 숙청제가 그녀를 불러 세우며 자리에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몇 마디 물어보겠다.”그가 송애경이라고 부른 이상 이는 군신 간의 대화로 변한 것이다. 송석석은 정중하게 감사의 인사를 올린 후 앞으로 다가와 앉았다. “폐하, 하문하시옵소서.”“현갑군에는 순방영, 금군, 경위가 있다. 순방영에는 무능한 귀족 자제들이 많아 그 안에서 시간을 헛되이 보내고 있는 이들이 있다. 그들을 관리하는 것은
정월이 지나야 발표할 수 있다는 것은 정월 이후에 새로운 어전시위령이 생기거나 전북망이 김순희의 장례에서 효를 지킬 수 없다는 걸 의미한다.송석석이 떠난 후, 숙청제는 전북망의 모친상에 관한 문서를 여러 번 살펴보더니 다시 한번 그 문서를 어좌 앞에 던져놓으며 오 대반에게 물었다. “너는 전북망이 효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느냐?”오 대반이 공손히 답했다. “폐하, 이는 조정의 인사 문제이므로 소인은 감히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조정의 인사일지라도 짐의 곁에 있는 어전시위에 관한 것이니 오 대반은 마음껏 말하거라.” 숙청제가 단호하게 말했다.오 대반은 잠시 생각하다가 결국 고개를 저었다. “소인은 알지 못하옵니다.”“모르는 것이냐, 아니면 말할 용기가 없는 것이냐?” 숙청제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오 대반은 숙청제 곁에서 오랫동안 시중을 들어왔기에 그의 성격을 잘 꿰뚫고 있었다. 만약 평범한 관료였다면 이 모친상 문서는 이미 허락되었을 것이고 송석석과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는 분명히 전북망을 잘 이용하고 싶었을 것이고, 자기 결정을 지지할 누군가를 바라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 대반은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할 수 없었고, 또 그의 의견이 하찮은 것도 알았기에 더욱 말을 꺼내기 어려웠다.“오 대반, 짐은 항상 너를 중용해 왔거늘… 너의 마음은 여전히 송가에 있는 것 같구나.” 숙청제의 목소리는 차가웠지만 평온했다. 오 대반은 식은땀을 흘렸다.“폐하, 소인은 폐하께 충심을 다하고 있는데 어찌 송가에 마음이 있을 수 있겠사옵니까?” 오 대반이 억울해하며 무릎을 꿇었지만 숙청제는 여전히 냉정한 태도였다. “송씨 부인이 네 목숨을 구했으니 그 은혜는 잊지 말아야 하겠지만, 네 신분 또한 잊지 말아라.”오 대반의 마음은 파도가 치듯 소란스러워졌다. 폐하가 어찌 이 일을 아신단 말이지? 설마 사람을 시켜서 나를 조사한 것인가?“일어나라!” 숙청제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가웠다. “짐은 네가 전북망을
사람들은 한동안 말문이 막혔다. 비록 서경의 새로운 황제가 즉위하면 녹분성 사건을 추궁할 거라고 예상하긴 했지만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바로 사건을 조사하고, 심지어는 수란키를 감옥에 가두어 버릴 줄은 꿈에도 몰랐었기 때문이다. 수란키는 오래전에 암살의 위협을 받고 겨우 생사를 넘겼는지라 아직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 몸으로 옥살이를 한다면 과연 견딜 수 있을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오랜 침묵을 깨고 사여묵이 말했다. “그렇다면 두 번째로 할 일은 어쩌면 상국과의 대결일 지도 모르지. 녹분성 사건을 추궁하려면.”“이는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염구진이 대답하자 송석석이 사여묵에게 물었다. “왕삼과 왕오는 이미 서경에 잠입하였습니까?”왕삼과 왕오는 치석정찰대의 사람들이다. 원래 상을 받고 고향으로 돌아가려 했으나 조정에 계속 충성하고 싶어 고향에서 가족의 얼굴만 본 후 곧바로 서경으로 향한 것이었다.“이미 서경 도성에 들어와 안착했소.”“그들 외에 다른 이들은 총 몇 명인가요?”“열세 명이오. 그리고 소팔야가 이미 사람을 보내 잠입시켰으니… 아마 합치면 사, 오십 명 정도 될 것이오.”소팔야는 소 대장군의 양아들로 항상 소 대장군과 함께 성릉관에서 함께했으며 현재 소 대장군 곁에는 팔이 잘린 삼야와 팔야, 그리고 소육랑이라고 불리는 조카가 한 명 있었다.소육랑의 아버지는 소 대장군의 서형제로 엽성에서 관직을 맡고 있으며 10년째 엽성에 재직 중이다. 그는 10년동안 한 번도 진성으로 돌아오지 않았고 가족 모두 그곳으로 이사했기에 진성에는 송가와 회왕비 외에는 친척이 없었다.사여묵은 송석석의 걱정스러운 표정을 보고 조용히 위로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우리는 이미 만단의 준비를 했소. 만약 폐하께서 진정 외할아버지를 진성으로 불러 처벌하려고 해도 공문 쪽은 거의 다 통과했으니 절대 고통받지 않을 것이오.”“예.” 송석석은 불안했지만 이 불안감이 일을 방해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알기에 침착
송석석이 물었다. “회왕은 정말로 진성을 떠났을까요?”사여묵이 대답했다. “며칠 동안 사람을 보내 확인했는데, 어젯밤 장부장이 보고하길 확실히 집에 없었다고 하오. 세 방향으로 추적 중인데 만약 변장했다면 찾기 어려울 거요.”그러자 염구진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실수를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진성을 떠날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송석석은 손톱을 매만지며 날카로운 눈빛을 보냈다. “제대로 살핀 후 폐하께 그가 진성에 없다는 사실을 알려야 합니다.”사여묵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곧 계획을 세웠다. “내일 어머니를 궁으로 들여보내 회왕부에 어의를 보내라 태후에 청할 생각이오. 그러니 어머니에게 태후 앞에서 어떻게 말씀해야 할지 잘 가르쳐주시오… 사실 란이가 가는 게 가장 좋긴 하다만... 괜히 방해가 되는 것 같으니 그건 안 되겠소.”혜태비는 음력 8일에 이미 집으로 돌아갔었는데, 궁에서 열흘 정도 지내니 지루함을 느껴 차라리 왕부로 돌아가면 더 자유로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궁에서는 규칙이 많지만 왕부에서는 그녀가 규칙을 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지금 바로 어머님을 찾아가겠습니다.” 송석석이 벌떡 일어섰다.…혜태비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 그녀는 아름다운 중년 여성이기에 충분한 수면으로 계속 미모를 유지해야 했는데, 며느리가 달콤한 잠을 방해하자 그녀의 두 눈에 불만이 가득 차올랐다. 송석석은 그녀가 거짓말을 하지 못하도록, 또 우회적인 표현을 하지 못하도록 바로 본론부터 말했다. “내일 궁에 들어가셔서 태후에게 회왕이 연초부터 지금까지 몸이 아픈데 아직도 나아지지 않았다고 말씀드리세요. 그리고 혹시 어의를 청한 적이 없다고 하시면 태후에게 회왕부에 어의를 보내달라고 요청해 주세요. 결국 그는 선제의 아우입니다.”혜태비는 즉시 불만을 토로했다. “지금 회왕 문제 때문에 나를 깨운 게냐? 그 집안 사람들이 너한테 어떻게 했는데 아직도 그들을 걱정한단 말이더냐?”혜태비는 송석석이 멍청하다며 탄식했다.송석석은 한숨을 내쉬
보요는 송석석을 위해 부탁한 것이기에 혜태비는 자기도 하나 고르겠다고 했다. 중년 여성의 애교는 아무리 높은 자리의 태후라도 거부할 수 없는 법이었다. 그녀는 나인에게 최근에 새로 들어온 보석을 가져오게 했는데, 혜태비가 무려 한꺼번에 일곱 여덟 개를 골라버린 것이었다!하지만 태후는 아끼는 여동생이 소녀처럼 좋아하는 모습에 그래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며 거절하지 않았다. 복구안은 허 어의와 함께 회왕부로 향했다. 허 어의는 늘 태후 곁을 지키던 사람으로, 형인 허어사처럼 고집이 세고 성품이 곧았다. 이런 성격으로는 태의원에서 버티기 힘들지만 다행히 태후가 그를 발탁했고, 심지어는 자신의 딸인 민지 공주를 그의 조카인 허낙천과 혼인시켰다.태후 곁의 복구안이 허 어의와 함께 회왕을 진찰하러 왔다는 소식에 회방비는 깜짝 놀라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맙소사, 맙소사!‘이걸 어쩐담? 왕야는 설전에 이미 나가셨는데. 그저 대외적으로 휴식이 필요하다고 했을 뿐인데 말이야.’회왕부는 그동안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기에 누가 찾아오는 일도 없었다. 설령 누군가 오더라도 병중이라고 하면 쉽게 넘길 수 있었다. 게다가 이 몇 년 동안 회왕부는 존재감이 전혀 없었고 그들이 있는지 없는지와 상관없이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었다. 그런데 왜 지금 태후가 어의를 보낸거지? “그게…” 회왕비가 당황해하며 말을 얼버무렸다. “왕야꼐서 이미 다른 의원에게 진찰을 받았는데 큰 문제는 없다고 했으니 허 어의님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여기까지 왔으니 그래도 보는 게 좋겠습니다.” 복구안이 담담하게 말했다. “게다가 이건 태후의 명입니다! 그냥 이대로 돌아간다면 제가 보고할 길이 없지 않겠습니까? 허 어의님도 태후 앞에서 설명하기 어렵게 되실 겁니다.”회왕비는 줏대가 없었다. 그녀는 회왕이 무엇을 하러 나갔는지도 몰랐기에 나간 목적을 알려주지 않았다. 단지 절대 누군가에게 그가 나갔다는 것을 알리지 말라고만 당부만 받았으니 말이다.이젠 어쩐단 말
그러자 송석석이 이내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왕씨 가문에서는 그녀를 아주 잘 대해줍니다. 조카딸의 혼담에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시집간 부군이 잘 대해준다 하더군요. 다만 그녀는 자신이 두 번 시집갔음에도 처가에 머무는 것이 조카들에게 미칠 영향이 걱정되어 그러는 모양입니다.”그 말에 전북망이 고개를 끄덕였는데, 순간 번개처럼 날렵하지만 마음씨 따뜻한 최씨 부인이 떠올랐다. 최씨 부인에게는 적자와 서자녀들이 있었고, 아직 혼담이 정해지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그런 그녀가 혼인 문제로 얼마나 많은 유언비어에 시달렸을지 생각하니, 전북망은 진심으로 안타까웠다. 형수로서의 최씨 부인을 존중하며, 그녀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할 바 없었다. 이때 송석석이 그의 생각을 끊었다. “그럼 천천히 생각해 보십시오.”전북망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문득 물었다. “우리 단둘이 여기에 있으면, 섭정왕이 질투하지 않을까요?” 송석석은 예상치 못한 질문에 잠시 당황했으나, 곧 침착하게 답했다. “이 정도 신뢰도 없다면, 제가 어찌 현갑군 지휘사로 오래 근무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서로 숨김없이 모든 걸 공유합니다. 이번 만남 역시 그분께 이미 알려두었죠.”송석석이 떠나자 전북망도 따라나섰다. 그는 섭정왕이 어딘가에서 이들을 지켜보고 있으리라 의심했지만, 정작 별청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앞마당에서야 섭정왕을 발견했는데, 그는 대장군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송석석을 보자 미소로 맞이하며 불러세우는 섭정왕의 모습에 전북망은 마음이 착잡해졌다. ‘진정한 부부란 저런 것일까.'그러나 성릉관이든 진성이든, 남녀의 단독 만남은 명예에 흠이 될 수 있음도 잘 알았다. 특히 높은 지위에 오른 이들은 더욱 조심해야 했다. ‘내가 무슨 권리로 그들을 걱정하는가.’자조적인 생각이 들었지만, 왕청여의 제안은 여전히 그의 가슴을 두드렸다. 5일의 고민 시간이 주어졌다. 사여묵과 송석석이 진성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최씨 부인의 이야기를 떠올리면 답은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 전북망은 송석석과 다시 만났다. 사실 그전에도 송석석이 성릉관으로 갔을 때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들은 서로 서먹해서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이 매번 성릉관을 떠날 때마다 몰래 배웅하곤 했다. 전북망은 자신이 당시 어떤 마음으로 그런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늘 송석석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이방과 왕청여에게도 미안하긴 하지만, 그들과는 서로 감정을 소모하고 다투면서 서로에게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장군부만 송석석에게 상처를 줬을 뿐, 송석석은 장군부에게 조금의 상처도 주지 않았다. 비록 이혼한 후에는 전북망 어머니의 병세에 대해 상관하지 않았지만 큰형수에게 어떻게 단설환을 얻을 수 있는지 알려주기까지 했다.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는 이미 섭정 왕비가 되어있고 나서였다. 변방의 전사들에겐 양식과 무기가 풍부하고, 봉록까지 올라, 그들에겐 이득이기에 이제는 조정의 정세에 관심을 두지 않아도 되었다. 섭정왕은 한때 장수였기에 병사들이 배불리 먹어야만 국토를 지킬 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전북망과 송석석이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섭정왕과 함께 소 대장군에게 생신을 축하해주고 있었다. 그녀를 보는 소 대장군의 눈빛은 여전히 자애롭고 인자했다. 전북망은 사람들을 사이에 두고 멀리서 그 광경을 보며, 그때 그렇게 어리석지 않았다면 지금 송석석과 함께 노장군의 생신을 축하하는 사람이 바로 자신일 것이라는 후회를 했다.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같은 생각인 걸 보니, 자신만 제자리에서 멈춰 있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래서 그는 이번에도 송석석과 대화를 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생일잔치가 끝난 후에 송석석이 뜻밖에도 먼저 그를 찾았다. 그와 송석석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섭정왕은 이상한 소문이 날까 봐 걱정되지도 않는가?’전북망은 당황하고 불안해 보였고, 송석석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먼저 입을 열지도 못하고 송석석이 말하기만을 기다리
전북망은 성릉관에서 몇 년 동안 두 번이나 발탁되었고, 지금은 장군의 신분으로 수천 명의 병사를 관리하고 있다. 계속 성릉관에 주둔하고 있어 다시 진성으로 돌아간 적이 없었고, 진성의 부름 없이는 제멋대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는 재혼도 하지 않고 여전히 혼자 살아갔다. 성릉관의 모래바람은 해마다 그의 얼굴에 흔적을 남겨 또래들보다 몇 살이나 더 늙어 보였다. 심지어는 몇 년 동안 불면증에 시달렸기에, 진정제를 먹어야만 잘 수 있었다. 그는 가끔 이런 생각을 했다. ‘만약 내가 그때 이방과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어떻게 지내고 있었을까? 송석석과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부부가 되었을까? 아마도 우린 귀여운 자녀도 낳았겠지. 그리고 나는 군대에서 열심히 일하고 석석은 가문의 내무를 책임지며 부모님을 모시고 아이를 돌보고 있었겠지? 설령 내가 승진을 하지 못하고 평생 장군으로만 살아도 그는 날 떠나지 않았겠지.’ 이전의 전북망은 송석석이 하늘을 나는 독수리였는데 자신을 위해 날개를 부러뜨리고 병든 시어머니를 돌보며 군부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책임지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리고 그가 알아차렸을 땐 이미 돌이킬 수도 없었다. 전북망에게는 이미 이방이 있었고 이방을 사랑한다고 했으니, 송석석이 이혼하자고 했을 때 그는 심한 말을 하고 후회하지 말라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송석석 또한 후회할 게 없었다. 이혼을 하면서 전북망을 위해 부러뜨렸던 날개가 다시 자라나 전쟁터로 날아가 쉽게 공을 세웠으니까 말이다. 이방은 송석석이 큰 가문의 아가씨인 데다가 부친과 오라버니가 그를 위해 길을 닦아주었기에 이런 성과를 이룰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의 성공은 그의 능력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문이 도움이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주된 원인은 아닐 것이다. 만종문에서 송석석의 무공은 거의 최고였는데, 그건 송석석이 그만큼 노력을 했고, 그만큼 땀을 흘렸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전북망은 송석석을 존경했지만 그는 자신이 송석석을
어머니께 간청해도 소용이 없자 신이는 아버지를 찾아갔다. 하지만 돌아온 건 더 심한 꾸지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신이가 이 혼사를 반대하는 것은 양지춘과 접촉한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양지춘에게 그녀를 데리고 나가서 놀며 감정을 쌓으라고 했다. 신이는 가기 싫었지만 어머니가 억지로 그녀를 마차에 태웠고, 심지어는 하녀에게 그녀가 부적절한 말을 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엄명했다. 양지춘의 얼굴은 그나마 멀쩡하게 생겼는데, 처음에는 신이를 조금이나마 존중하는 척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본성을 드러냈다. 그는 신이의 외모와 품평을 논하며 신이가 외모가 예쁘지 않았더라면 절대로 그를 부인으로 들이지 않겠다고까지 했다. 그의 오만한 태도는 신이를 매우 불편하게 했다. 단지 이것뿐이었다면 아마도 신이가 결혼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양지춘은 일부러 신이를 마차에 태워주는 척하며 그녀의 엉덩이를 꼬집었다!그 순간 신이는 온몸의 피가 머리 위로 솟구친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의 경박한 눈빛에 신이는 이내 눈물이 쏟아졌고, 모욕감에 온몸을 떨었지만, 감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힘들게 집에 돌왔는데, 하녀와 마부는 그의 동작을 보지 못한 탓에, 오히려 그가 세심하고 자상하다며 그녀의 어머니 앞에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신이는 억울해서 어머니에게 그 일을 말했지만 어머니는 오히려 그녀가 일부러 꾸민 말이라고 생각해, 그녀를 꾸짖으며 사흘 동안이나 외출을 금지했다. 신이는 그렇게 방에 갇혔고, 매일매일을 눈물로 얼굴을 씻었다. 심지어 그날 선비의 말을 듣고 호수에 뛰어들지 않은 것을 후회하기까지 했다. ‘내가 양지춘에게 시집가는 것이 물에 빠져 죽는 것과 대체 무엇이 다른가?’ 사흘 후, 외출 금지가 해제되자마자 신이는 다시 경산사로 가서 같은 핑계로 하녀를 내보냈다. 이번엔 정말 죽을 각오로 호숫가에 간 것이었는데, 뜻밖에도 그곳에서 다시 그 선비를 만났다.그는 쓸쓸하게 호숫가에 앉아 작은
신이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한 사람이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고, 나무 그늘에 몸이 가려져 있었다. 그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은 초라해 보였고 눈 밑에는 검푸른 빛을 띠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 사람은 바로 다리 앞에서 그림을 팔던 선비이자, 학정이 말하던 퇴학 해서 기녀를 키우는 학생이었다!“헛소리하지 마십시오.” 신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짜증을 냈지만, 그가 한 말을 떠올리자 내심 두려웠다. “나는 여기에 물귀신이 있다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거짓말하는 것이겠지요.” 신이는 죽음은 두렵지 않았지만, 귀신은 두려웠고 진흙탕에 영원히 깔려 있는 건 더욱 두려웠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가 걸어 나오자 얼굴은 더욱 여위어 보였다. “호숫가의 주변을 보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왜 이런 아름다운 경치를 보러 오는 사람이 없겠습니까?” “그건 사람들이 이곳으로 예불하기 위해 오는 것이지, 경치를 보러 오는 것은 아니니까요. 절을 하고 바로 돌아가니 당연히 보지 못하겠지요.” 신이는 그렇게 말했지만, 순간 깊이가 보이지 않는 호수에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느껴져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그는 여전히 굳게 서서 말했다. “예불하는 사람은 천지와 자연을 경외하기 때문에 이런 좋은 경치가 있다면 반드시 한 번 보러 올 것입니다. 이런 곳은 인재를 배출할 수 있는 좋은 곳일 텐데 아무도 없다는 게 아기씨는 이상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것이 사실인지는 몰랐지만, 그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감히 그런 무서운 곳에서는 죽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몸을 돌려 떠나려 했다.그러자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한 번뿐인 인생이니 절대 쉽게 자신의 생명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살고 싶어도 살 지 못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의 말이 이상하게 느껴져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는데, 그의 눈 밑은 이내 붉어졌고 눈물이 고여 반짝이는 것 같
신이의 사촌 여동생과 하녀는 신이를 찾으러 돌아왔다. 신이가 하녀보고 이순에게 삼백문을 주라고 하자 이순은 웃으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원래는 우연한 만남일 뿐이라 다시는 접점이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 조모님의 생신 때 가문 연회에서 공학정이 데리고 온 제자들 중에 이순이 있었다. 강남의 예의 규율은 진성처럼 엄격하지 않아서 연회에 참석할 때 여인들도 앞마당에 갈 수 있었다. 이순은 신이를 단번에 알아보지 못했다. 신이는 그때 면사포를 쓰고 있었고 두 눈만 드러냈기 때문에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이상할 건 없었다. 이순은 식사를 하지 않고, 신이의 조모에게 생신 축하 그림만 드린 후에 집에 일이 있다며 작별을 고했다. 그가 떠나자마자 학정이 그를 언급하며 안타까운 말투로 말했다. “총명하긴 한데 진취심이 없어서 계속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걸 여기로 데려와 진취성이 있는 사람들을 많이 사귀게 하려고 했는데… 이 정도로 사리분별을 할 줄 모르다니. 정말 실망이군. 학교를 그만두겠다면, 이젠 마음대로 하라고 해야겠어.” 그러자 신이의 부친이 위로했다. “화내실 필요 없습니다. 선생님껜 학생이 많으니 그가 나간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될 건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학정은 마치 울화가 쌓인 것처럼 말했다. “그는 내가 가장 아끼는 제자였다네. 그런데 진취성만 없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동창에게 돈을 빌리질 않나, 게다가 집에 기녀까지 키우고 있다더군.” 신이의 아버지는 그런 사람을 가장 싫어하였다. “그런 사람은 얘기할 가치도 없습니다.” 신이는 그가 어떤 사람이라는 걸 알고 나서 왠지 마음속으로 실망감이 가득했다. 아마도 그날은 그가 그린 그림을 보고,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 같다고 생각해 마음이 갔던 것 같았다. 그렇게 몇 달 후, 신이의 혼사도 낙착되었다. 그녀의 약혼자는 회주 지부의 둘째 아들인 양지춘이고, 올해 22살이었다. 22살인데도 결혼하지 않았던 건 첩을 통해 서자를 낳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좋은 가문은 그
그의 이름은 신이었는데 그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그에 대해서 말할 때, 경멸하는 기색을 띠었고,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 모르는 사람까지 모두 침을 뱉으며 뻔뻔하다고 할 정도였다. 알다시피 애인과 야반도주하는 것은 사람을 죽이고 불을 지르는 것보다 더 욕먹을 일이니 말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에게 후회하냐고 묻기도 했다. 그녀는 시집간 것을 후회하지 않지만 죄책감을 느끼긴 했다. 왜냐하면 그로 인해 시 씨 가문의 명성이 손상되어 형제자매들과 조카들이 혼사에 어려움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신이는 시 씨 가문의 아가씨로서, 태어날 때부터 온갖 보살핌을 받아왔다. 먹는 것은 물론 모두 산해진미이고, 입는 것도 모두 능라 비단이었다. 게다가 보모님과 오라버니의 총애까지 한 몸에 받았다. 하지만 그녀에겐 한 가지 결함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열네 살 때까지 월사가 오지 않은 것이었다. 많은 의사들을 불러 진찰을 받고 밤낮으로 약을 먹었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어머니는 그녀에게 몸이 차서 그러니 몸조리를 하면 나을 수 있다고 위로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몰래 의사가 부모님께 하는 말을 들었다. 의사는 그가 몸이 차서 그런 병이 생긴 것이 아닌, 아이를 키우는 곳이 어린아이와도 같아서 평생 아이를 가질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의 몸이 마치 작은 꽃병과 같아서 꽃을 꽂을 수는 있지만 나무를 심고 꽃을 피워 열매를 맺는 건 불가능하다고 비유했다. 그녀는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건 여자에게 어떤 의미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녀를 속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나중에 좋은 사람에게 시집가서 부군에게 첩을 들인 후, 첩이 낳은 아이를 친자식처럼 키우라고 조언해주었다.시 씨 가문이라는 후원이 있으면 그녀가 아이를 낳을 수 없어도 아무도 그녀의 지위를 흔들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 씨 가문의 재물은 그녀가 평생 부귀하게 살기에 충분했다. 신이의 조모도 그녀에게 아이를 낳을 수 없으니 자세를 낮춰야 한다고 했다. 시 씨 가문의 딸이라고
추운 겨울이 되자 눈이 내려 성릉관은 하얗게 뒤덮였다. 세상이 마치 깨끗해진 것처럼 보였다. 이황자는 몇 년 동안 너덜너덜한 승복을 입고 발우를 받쳐 들고는, 가는 길에 동냥을 하다가 절을 보면 이틀 묵으며 부처님께 참회하면서 살았다. 사실 그는 원래 있던 절에서 계속 지낼 수 있었다. 편안하진 않지만 풍찬노숙할 필요도 없고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그런 안일한 곳에서는 평생 죄를 씻을 수 없다고 생각했고, 계속 길을 걷고 계속 고생해야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했다. 그가 성릉관에 도착했을 때 짚신은 이미 찢겨 있었고 발바닥에는 두꺼운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이제는 신발을 신지 않고도 자갈이 가득한 길을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추운 날씨에는 모든 옷을 껴입어도 추위를 막을 수 없었지만 이미 익숙해진 뒤였다. 그는 눈보라를 맞으며 성릉관에 위치한 감은사로 향했는데, 몇 년 동안 발걸음을 멈춘 적이 없는 탓에 고단함이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심지어는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아 그는 눈이 가득 쌓인 길에서 의식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깨어났을 때 그는 따뜻한 두꺼운 이불 속에 누워 있었다. 그가 있는 방에는 숯불이 피워져 있었고, 살짝 열린 창문으로 눈에 눌려 허리가 굽은 나뭇가지가 보였다. 그는 눈동자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렇게 편안하고 따뜻한 느낌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의 마음속에 순간 욕심이 생겨 조금만 더 누워있고 싶어졌다. 그런데 바로 그때, 문이 활짝 열렸다. 그가 벌떡 일어나 앉았는데, 갑자기 눈앞이 핑핑 돌더니 다시 힘없이 침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누워 있거라.” 이때 누군가가 부드러운 말투로 말하면서 약그릇을 그의 침대 옆에 놓았다. 그는 말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익숙해, 어지러움을 가라앉히고 고개를 돌려보니, 그 사람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서우 형?!’ 그는 자신이 잘못 보았을까 봐 다시 자세히 보려 했지만, 몸이 너무 어지러운
대황자는 봄 사냥 때 숙청제에게 꾸중을 듣고 돌아간 후 앓아누웠다. 당시 이황자와 서우가 모두가 걱정했는데 덕비는 오히려 기뻐했다. 그는 이번 일을 겪으면서 황제폐하께서는 분명히 대황자를 싫어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덕비는 이황자를 안고 반드시 부지런해야 하고, 태부와 황숙의 말을 잘 듣고 누구보다 잘 배워 황형을 제압해야 한다고 당부까지 했다. 그로 인해 이황자의 마음은 몹시 복잡했다. 덕비가 줄곧 그에게 태자와 황제가 되는 것이 얼마나 좋은 지 말해주었을 때 비록 그도 마음이 설렜지만 자신과 거리가 먼 얘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지금 그와 대황형, 서우 형, 그리고 셋째 동생이 사이가 좋아 도저히 대황형을 미워할 수가 없었다. 매일 모순적으로 지내다 보니 오히려 학업이 나빠졌고 승마 연습을 할 때도 여러 번 실수를 했다. 하지만 덕비는 이상하게 그를 탓하지 않았고 며칠 동안 계속 게으르게 하라고 했다. 그렇게 덕비는 이황자를 데리고 복마마를 자주 뵈러 갔고, 복마마 궁전에서 숙청제를 만날 수도 있었다. 덕비는 며칠 동안 그곳을 드나들더니 어느 날 굳은 표정으로 다시는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차가운 말투로 청이에게 자신의 보살핌이 없으면 아이가 태어날 수 있는지 보겠다고 했다. 황제폐하를 자주 뵈러 갈 수 없어 아쉬웠지만 이황자는 마음을 가다듬고 공부와 승마술에 전념했다. 이황자는 당시 앞날이 어떻게 될지도 몰랐고, 비록 매일 힘들긴했지만 한편으로는 즐거웠기에, 계속 이렇게 지내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숙청제의 천추세에 승마대회를 개최할 예정이니 세 황자와 서우도 가서 겨뤄 보기로 했다. 원래 그런 대회에서 황자들은 재미있게 참석만하면 되지만, 덕비는 그 경기를 몹시 중시했다. 덕비가 이황자에게 마름쇠를 건넬 때, 그는 하늘이 무너져내리는듯한 기분을 느꼈다. 이황자는 원하지 않았다. 그는 절대로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대황형의 목숨을 앗으려 하다니, 이황자는 처음으로 어마마마가 무서워졌다.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