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에서는 반대의 목소리가 거세게 울려 퍼졌다.“터무니없사옵니다! 이런 곳을 열게된다면 삼종사덕의 가르침은 그저 허울 좋은 말이 되고 말 것이옵니다.”“그렇습니다! 이는 여인들의 기세를 북돋워 줄 뿐 아니라 시부모를 공경하지 않게 만들고 질투와 시기로 집안을 어지럽힐 것이옵니다.”“이건 아마 왕야의 생각이 아니고 왕비의 의견일 것이겠지요. 왕야께서 왕비를 기쁘게 하려고 남자의 체면까지 버리시다니, 정말 웃기는 일이옵니다!”숙청제는 보좌에 앉아 그저 혼란을 지켜보며 가끔 입술을 다물기도 하고, 가끔 입꼬리를 올리기도 했다. 사여묵이 남강 전장에서 돌아온 후 칭찬받는 소리만 들리다 이렇게 욕을 먹는 건 보기 드문 일이었다. 속으로 그는 나지막이 탄식했다. '아.. 사여묵, 네가 아직 어리구나. 이 일은 사대부들의 마음에 반하는 일 인걸 왜 알지 못하느냐. 여인에게 퇴로를 열어주면 그들은 여인을 어떻게 다룰 수 있겠느냐? 민심을 얻으려다가 사대부들의 마음을 잃을 수도 있단 말이다. 이 계산은 단단히 잘못되었다네!'온갖 논란 속에서도 숙청제는 여유롭게 사태를 방관하면서도 결정하지 않고 말했다. “다음 조정 회의에서 다시 논의하도록 하거라.” 이는 사태가 한 번 더 불타오를 수 있도록 시간을 두게 하기 위함이었다. 다음 회의에서 더 많은 이들이 반대에 참여하게 할 계획이었다. 사여묵 또한 황제께서 이 일을 곧바로 수락하지 않기를 원하며 상황이 자연스럽게 퍼져나가 백성들 사이에서 소문이 돌기만을 바랬다. 이 일이 제대로 진행되려면 반발과 소문으로 더욱 뜨거워져야 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이 새로운 장소가 있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게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한 달 동안 소문이 충분히 떠들썩하게 퍼져 온 경사에 이 일을 모르는 이가 없게 한다면 딱 좋을 것이다. 장소를 보수하고 침상을 마련하는 데 한 달이면 딱 알맞는 시간이니 말이다.사여묵은 황제가 결국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일 것이라 확신했다. 그의 강경한 태도에 밀려 황제가 마지못해 수락하는 형세로 말이
노부인은 얼굴이 굳은 채 최씨를 응시하였다. 희미하게 내려앉은 눈가를 들어 올리며 그녀의 의도가 진심인지 농담인지 가늠하려는 듯 유심히 살펴 보았다. 하지만 최씨는 농담이 아니었다. 그녀의 눈빛은 매우 진지했다. 그러자 노부인은 피가 거꾸로 쏟아오르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평서백 부인이 감히 약값을 자신에게 청구할 줄은 상상도 못한 일이었기에 점점 호흡이 가빠져오기 시작했다.일국의 친인척 사이에, 그것도 약을 사기 위해서 이런 것까지 철저히 따져야 할 필요가 있단 말인가?노부인은 간신히 그 수치심을 누르며 옆에 있던 손마마에게 눈짓을 보냈다. 손윗사람으로서 자존심이 걸린 문제이니 직접 말하기엔 어려웠다. 손마마는 마지못해 고개를 숙이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부인께서 먼저 은화를 내주시겠습니까? 추후에 꼭 갚겠습니다.”하지만 최씨는 단호히 답했다. “급히 나왔는데 몸에 그렇게 많은 은화를 지닐 리가 있겠습니까?”손마마는 점점 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부인께서 돌아가셔서 가져오시면 되지 않사옵니까……”최씨가 가볍게 웃으며 답했다. “그야 번거로울 따름이지요. 직접 주시면 될 것을 무엇 하러 제가 집으로 돌아갔다 오겠습니까? 어차피 갚을 것이라면 장군부에 이백 냥 정도 없을 리도 없지 않습니까?”노부인의 얼굴은 자줏빛으로 달아올랐다. 최씨가 자신을 모욕하는 게 분명했다.손마마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찌 없겠사옵니까? 다만 장부 관리자가 지금 마침 자리에 없어…… 그래서 잠시 드리지 못할 뿐이옵니다.”최씨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담담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사람을 보내 장부 관리자를 데리고 오십시오. 저는 먼저 청여를 보러 가겠사오니, 은화를 마련하여 문희거로 가져다주시면 대신 다녀오겠사옵니다. 사돈 간에 이 정도 수고는 도리상 마다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말을 마치자마자 최씨는 가볍게 절을 하고 나갔다. 뜰을 나서며 그녀의 입가에는 싸늘한 미소가 번졌다. 감히 약값을 내달라는 말을 하다니.. 도대체 어찌 그리도 맹
왕청여는 예전부터 항상 책임을 회피하곤 했다. 아무리 큰 재앙이 일어나더라도 그녀는 항상 쏙 빠져나온 채 다른 이들을 원망하며 자기가 얼마나 어이없고 무고한지를 강조할 뿐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그녀는 최씨의 말을 반박하지 않고 떨어지는 눈물을 닦기만 했다.최씨는 그녀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전북경은 이미 폐위되어 관직도 잃고 아내도 없는 상태라 하루 종일 방에 갇혀 지냈고, 심지어 전북삼은 무공도 글공부도 형편없이한 쓸모없는 존재였기에 그에게 기대할 수 없었다. 둘째는 더는 관계하지 않겠다며 실제로 벽을 쌓아 장군부를 둘로 나누어 버렸다.겨우 남은 건 전북망 뿐이였다. 그는 특훈을 받는 중에도 시간을 내어 왕청여를 돌봐야 했는데 장부를 정리한 뒤에야 장군부가 정말로 가난하다는 것을 깨달았다.두 시간 후, 이천 냥이 최씨 앞에 놓였다. 이는 손마마가 직접 가져온 것이었다. 숨을 헐떡이며 달려오는 것을 보니 그녀는 분명 밖에서 막 돌아온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최씨는 홍이의 입을 통해 많은 일을 알게 되었다. 민소진은 김순희에게 전당포에 장신구를 맡기라고 했지만 김순희는 오히려 분노하며 민소진을 꾸짖었다. 그래서 결국 병과 약값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소중한 것을 전당포에 맡기게 되었다.최씨는 반드시 가야 한다고 했지만 사실 그녀는 이 일이 헛수고일 것임을 알고 있었기에 손마마를 데려가 그녀와 함께 증인이 되어줄 것을 요청했다. 약왕당에 가서 단설환을 구매하겠다며 신분을 밝히자 의원이 다가와 물었다. “어느 분께서 심장이 병이 드셨는지요? 단설환은 반드시 단의원이 직접 진맥하고 처방을 내리셔야 합니다. 평서백 부인께서는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제가 단 의원님을 모셔 오겠습니다.”최씨가 말했다. “아, 이렇게 번거로운가요? 진맥을 해보지 않고는 단설환을 구매할 수 없다는 말씀인가요?”“그렇습니다. 단설환은 공급이 한정되어 있어 진정으로 필요한 이에게만 드릴 수 있습니다.” 의원이 말했다.그러자 최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
그래서 전북망은 대담하게 몇몇 하인을 팔아넘기기로 결심했다. 장군부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큰형은 관직을 잃었고, 둘째는 분가했으며 그의 관직 복귀도 언제가 될지불확실했기에 수입이 없는 상황에서는 절약할 수밖에 없었다.보통 귀족 가문에서는 하인을 파는 법이 없었고, 가장 금기시 되었다. 집안의 비밀스러운 일들이 드러나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고, 하인이 팔려 나가면 좋은 집안에 가는 경우도 있겠지만 나쁜 집안에 가면 반드시 그 비밀들이 누설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군부에는 더는 숨길 것이 남아있지 않았기에 전북망은 더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매일 백성들이 가장 독한 저주로 자신을 입에 오르내리고 있으니 말이다. 집을 관리해 본 적이 없으면 쌀값도 모르는 법이라는 것을 깨달은 전북망은 그제야 민소진을 이해하게 되었다. 왕청여에 대한 그의 마음도 아주 복잡해졌다. 아이를 잃은 그녀가 안타깝기도 했지만 그녀가 형수와 다툼을 벌인 것에 화가 나기도 했다. 그는 유산에 관한 이야기를 묻고 싶었지만 이 시점에서 상처를 건드리는 것이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해 꺼내지 않기로 했다.엎친 데 덮친 격, 김순희의 병세는 날로 심각해졌고 의사는 설을 넘기기는 힘들 것이라며,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고 했다. 전북망은 사람을 보내 전소환을 불러오려 했지만 전소환은 돌아오지 않았다. 하긴 민소진이 떠날 때도 그녀는 끝내 오지 않았다. 그녀는 불길한 것을 피하고 싶었고 외부에서 장군부를 비난하고 있으니 이 혼란에 휘말리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현재 손마마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두가 김순희에게 등 돌린 상태였다. 죽음과 절망은 그녀의 마음을 강하게 묶어 그녀는 죽음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혔다. 동짓날에도 가족은 한데 모여 식사를 하지 않았고 그녀는 이미 병상에서 일어날 수조차 없었다. 그녀는 손마마의 손을 잡고 울며 말했다. “북명황실에 가서 송석석을 불러오거라… 내가 친히 할 말이 있다.”손마마는 한숨을 내쉬었다. “노부인, 왕비님은
이덕회가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마오! 본 관은 당연히 사내가 맞지요. 허나 사내는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고 첩을 두는 것도 허용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자식이 없으면 양자를 받을 수 있으니 병이 들어도 아내가 돌봐야 합니다. 남자가 이렇게 방자하게 굴어도 세상이 어지럽혀지지 않았는데 여자가 쫓겨나서 수용될 곳이 있으면 오히려 세상이 혼란스러워진다는 것이 대체 무슨 말씀이신지요?”“여인에게 살길이 늘어난다는데 여러분은 대체 무엇이 두려운 겁니까? 아무도 그런 길은 원하지 않다지만 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그런 선택을 하게 될 수도 있지 않습니까?”이덕회는 집안의 그분이 왕야을 전폭적으로 지원하라고 지시했기 때문에 엄청난 사명감을 가지고 이 자리에 온 것이었다. 송석석도 조정에서 이 이야기를 듣고 있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인의 신분으로 여인을 대변하는 것은 더 큰 반발을 불러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아무리 재치 있게 말한들 그들의 날카로운 언쟁에는 상대가 되지 않기에 그녀는 황제가 말을 시키기만을 기다렸다.아니나 다를까, 여러 사람이 소란스럽게 토론하는 사이 황제가 헛기침을 하더니 송석석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송석석, 자네의 의견을 듣고 싶구나.” 순간 모든 시선이 송석석에게 쏠리자 그녀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곧 정신을 가다듬고 앞으로 나와 손을 모아 말했다. “폐하, 특별히 큰 의견은 없지만 여인의 입장에서, 그리고 한때 이혼한 여성으로서 제 생각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대감님들께서도 듣고 싶으신가요?”그녀의 말은 모든이들의 궁금증을 자아냈다. 그녀의 이혼 이야기는 모두가 알고 싶어하는 내용이었기 때문에 모두가 잠시 토론을 멈추고 그녀가 얘기하기만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송석석을 존경하는 몇몇은 그녀가 아픈 상처를 드러내는 것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황제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말해보게.”“여인이 혼인하는 건 사실상 두 번째 삶의 시작이라 할 수 있지요. 우리는 반드시 좋은 삶을 살아야
송석석의 목소리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것이 마침 모든 이가 들을 수 있는 크기였다. “여러분은 민씨의 죽음을 하찮게 여기실지 모르나 만약 그녀가 여러분의 누이나 여식, 혹은 친척이라면 어떻게 생각하실 겁니까? 조금이라도 공감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모두 성현서를 읽어보셨고 약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분들입니다. 많은 여인들이 버림받는 이유는 병이 있거나 자식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허나 그 여인들은 죄가 없습니다.”그녀는 다시 서글프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여인의 생명도 소중합니다. 그런데 어찌 세상은 여인들을 끝까지 몰아내려고 하는 것입니까?”민씨의 죽음에 많은 사람들은 ‘자기 자매나 가족도 아닌데 뭣 하러 저런단 말인가?’라고 생각하며 비웃었다. 하지만 그녀가 말한 성현서는 그들에게 도덕적인 제약을 부여했다. 이 상황에 어찌 반박한단 말인가? 이 자리에서 반박하게 되면 오히려 비정하고 냉정하다고 비난을 받을 것이 분명했다.이런 말이 사내에게서 나왔다면 반박하기가 조금 더 수월했을지도 모른다. 송석석은 이 자리에 있는 유일한 여인으로 무려 황제가 직접 그녀에게 의견을 말하라고 하였기에 그녀는 이와 같은 순간만 기다린 것이다. 여인에 대한 애절함과 안쓰러움이 가득한 그녀의 말에 그들은 도무지 반박할 수 없었고 반박한다는 것은 그녀를 괴롭히는 것과 다름없었기에 이렇게 많은 관료들에게 아주 수치스러운 일이 될 것이다. 게다가 이것 또한 그녀가 스스로 떠드는 것이 아닌, 무려 황제가 직접 그녀에게 의견을 물어서 하는 말이었다.그리하여 대전은 순식간에 정적에 휩싸였다. 그들의 얼굴에 불만이 가득했지만 더는 송석석과 논쟁할 수 없었다.숙청제는 이 모습을 보고 적당한 시기가 도래했음을 깨달았다. 더는 미룰 일이 아니였기에 필요한 조치를 취할 때가 되었다. 대연국은 이미 선례가 있기에 상국은 절대 뒤처져서는 안 된다. “반대하는 이가 없다면 시도해 보도록 하지. 조정은 자금을 지원하지 않지만 자수공방은 관정부의
다음 날, 부부는 함께 외출했다. 그 전에 사여묵이 어색한 말투로 시만자에게 함께 갈 것이냐고 묻자 시만자는 그를 이상하게 쳐다볼 뿐이였다. 어젯밤 분명 송석석과 단둘이 놀러 간다고 하더니 이제 와서 그녀에게 함께 가겠냐고 묻는 것은 너무 가식적인 행동이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가 그런 말을 하지 않았어도 시만자는 가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자수공방 일을 처리해야 해서 바빴다. 자수공방은 수리 중이라 더욱 자주 살펴봐야 했다. 게다가 자수공방이 아니더라도 그녀는 휴일에 태비와 함께 차를 마시거나 왕경루와 금경루 같은 곳을 돌아다녔을 것이다. 추운 날씨에 산에 올라가 바람에 맞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왕경루에서 사여묵은 몇 가지 요리를 주문했다. 청증조기, 호피육, 백파광뚱국화 등심, 진주비취백옥탕에 기름에 볶은 새우 한 접시도 추가했다. 비록 자주 볼 수 있는 요리들이라 특별한 것은 아니었지만 왕경루는 이런 요리들을 더욱 극대화 시킬 수 있는 곳이었다.날씨가 춥기도 하고 또 산에 올라타야 했기에 사여묵은 술 한 병을 주문했다. 오늘은 전적으로 그가 주도하며 그녀는 유난히 준수한 그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좋았기에 그가 하고 싶은대로 내버려두었다. 그의 흰색 여우 가죽 외투는 옷걸이에 걸쳤다. 아늑한 방 안에는 숯불이 타고 있어 외투가 필요 없이 따뜻했다. 푸른색의 촉금은 구름과 파도 문양으로 수놓아져 있었는데 넓은 옷깃에 좁은 소매가 특징이었다. 게다가 푸른색의 장신구와 하얗게 변한 피부색에서 전체적으로 문관의 우아한 품격이 느껴졌고, 오직 검은 눈썹이 날카로움을 더해 무장군임을 상기시켰다.송석석은 문득 전쟁터에서 처음 그를 봤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는 마치 야생인처럼 얼굴에 수염이 덥수룩했다. 전술을 논의할 때, 그녀는 그의 수염을 몇 번이나 뚫어져라 쳐다봤는지 모른다.이런 생각에 웃음이 터져버린 그녀가 말했다. “남강에서 봤던 장군님과 지금의 장군님은 완전히 다른 사람 같네요.”“그때가 좋았지.” 사여묵이 대답했다.
산으로 올라갈수록 사여묵은 이상한 점을 느꼈다. 방시원이 말한 산 꽃은 보이지 않았고 눈에 들어오는 건 잎이 없는 나뭇가지와 새하얀 설경뿐이었다. 초겨울부터 가뭄이 들어 폭포도 메마른 상태였다. 설경이 예쁘지 않다는 게 아니라 너무 오래 버티고 있었더니 좀 지겹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폭포와 높은 산에 피는 겨울 꽃이 있었다면 느낌이 다를 수도 있겠지만 이 산에는 꽃이 단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만금산의 북쪽에는 눈이 덮인 데다 장애물이 없어 스키를 탈 수 있는 언덕이 있었기에 그는 전략을 바꿔 송석석을 데리고 북쪽으로 향했다. 그는 신이 나서 산꼭대기에 올라 숨을 돌리고 송석석에게 말했다. “여전히 예쁘지 않소? 석양을 기다렸다가 보고 스키를 타고 내려가면 정말 재미있을 것이오.” 송석석은 사여묵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방엔 새하얀 눈과 잎사귀가 없는 나뭇가지뿐이였지만 웅장함과 소슬함의 아름다움은 있었다. 너무 추운 게 문제인건 빼고는. 칼처럼 얼굴을 스치는 북풍은 귀가 얼어 떨어질 지경이었고 망토의 모자는 바람은 막지 못했다. 이때 송석석이 말했다. “그럽시다. 여기에 앉아서 석양을 구경하지요.” 그녀는 모처럼 신이 난 사여묵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지금이 아마 신시쯤 된 것 같으니 여기서 석양을 보려면 적어도 한 시간은 기다려야 하겠어. 게다가 날씨가 흐려 볼 수 있을지 확실 지도 않아.’ 송석석은 잠시 생각하다가 사여묵을 쳐다보더니 결심했다. ‘그래, 오늘의 운명은 사여묵에게 맡기겠어. 그래도 스키를 탄다는 건 그냥 하는 말이겠지?’ 사여묵은 가파른 산세를 보며 위에 덮인 눈을 밟아보더니 망토를 깔고 내려가도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예전에 남강에 있을 때도 그렇게 했었다.두 사람은 산꼭대기의 눈밭에 앉았는데 사여묵은 송석석을 품에 안고 서로 추위를 물리쳤다. 너무 춥고 바람이 세서 낭만 같은 건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고, 두 사람은 그저 온몸의 내공을 추위를 이겨내는 데 사용했다. 송석석은 머리를 사여묵의
상서원과 지안궁에서 벌어진 일은 순식간에 숙청제의 귀에 들어갔다. 그는 마음이 나날로 초조해져갔다.게다가 연일 계략까지 모색하느라 두통이 심해져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플 정도였다.황후의 금족령을 해제한 것도, 대황자를 태자로 책봉하기 위한 준비였다. 태자가 될 인물에게 금족된 어머니가 있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숙청제는 금족된 황후가 자식을 방치하는 것이 곧 자식을 해치는 일임을 깨달을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착각이었다.황후는 반성하긴 커녕, 오히려 황자가 자신의 곁에 있어야만 자신의 지위를 굳힐 수 있다고 확신할 뿐이었다. 한편, 숙청제는 입맛이 없는듯 저녁 식사를 대충 때운 뒤 약탕을 마셨다. 아무리 지쳐도 약은 반드시 복용해야 했다. 하루라도 더 살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매번 죽음이 눈앞에 다가왔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마다,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누구나 겪어야 할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항상 죽음은 먼 이야기라 생각했는데 이리도 갑자기, 예고도 없이 다가온 것이니 말이다. 그는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국가의 중대사나 미래의 계획 같은 무거운 이야기가 아닌 단순히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며 숨을 돌리며, 마음을 편히 하고 싶었다. 하지만 한참을 머리를 굴린 끝에 떠오른 인물은 단 한 사람, 송석석뿐이었다. 송석석은 부상 치료로 며칠간 어서방에 오지 않았다. 숙청제는 임태의를 불러 침술로 두통을 진정시켰으나, 어지러운 증상과 불안감은 점점 커져만 갔다. 어지러움 때문인지, 검은 하늘이 빙글빙글 도는가 싶더니 금방이라도 자신을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그러다 문득 터무니없는 생각이 떠올랐는데, 그것은 단순한 충동이 아닌 의심할 여지조차 없는 확신이었다.한편, 북명왕부에서 노 집사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급히 달려왔다.“무슨 일이오?” 염 선생이 서재에서 나오며 물었다. 노 집사는 빠르게 계단을 올라가서는 목소리를 낮췄다. “폐하께서 오셨습니다. 왕비마마를 뵙고 싶다 하시옵니
황후는 시간을 맞춰 다시 상서원으로 간 후, 대황자를 데리고 함께 지안궁으로 가서 태후에게 문안 인사를 올렸다. 앞뒤로 늘어선 수행원들의 위세는 대단했다.대황자마저 어린 환관의 등에 업혀 궁문에 이르러서야 그를 내려놓았다.황후는 의복을 단정히 하고 대황자의 손을 잡고 지안궁으로 들어갔다. 꿇어앉아 예를 올린 후, 태후의 안부를 여쭈어 보았다. 비록 예법은 완벽했으나, 태후는 한동안 그녀에게 일어나라는 말을 하지 않았고 다만 대황자를 불러 물었다. “오늘 태부께 칭찬을 들었느냐?” 그러자 대황자는 태후의 눈치를 살짝 살피더니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늘 태부께서 칭찬을 잊으신 것 같사옵니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황후가 서둘러 말을 보탰다. “태부께서는 엄격하시어 쉬이 칭찬을 하시지 않으십니다.” 황후는 태후가 이미 태부와 약속을 해둔 일을 모르고 있었다.대황자가 그날 착실하고 성실히 임하면 수업이 끝날 때 한마디 칭찬을 해 주기로, 그렇지 않으면 칭찬은 없기로 말이다. 이를 통해 태후는 대황자의 하루 태도를 알 수 있었다. 태후는 황후의 말을 무시한 채 담담히 대황자를 향해 말했다. “규율은 기억하고 있느냐?” 그러자 순간 대황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렸다. 그는 급히 변명하며 말했다. “태부께서는 어머니가 저를 찾으신 것을 못마땅히 여기셔서 칭찬하지 않으신 것 같사옵니다.” “그렇다면 벌을 받아야 하는 건 너냐, 아니면 네 어미냐?” 태후가 묻자, 대황자는 황후를 가리키며 재빨리 말했다. “어머니를 벌하옵소서! 어머니께서는 글을 베끼시는 것을 가장 즐기시옵니다!” “맞습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저는 글을 베끼는 것을 좋고 자식을 가르치지 못한 죄도 있으니 응당 벌을 받아야 하옵니다.” 황후도 서둘러 맞장구를 치자, 태후는 그녀를 흘끗 보더니 금마마에게 명했다. “대황자를 저녁을 차려주고 작은 서재로 보내라. 해시 전까지 모두 베끼지 못하면 출입을 금하라.” 그러자
두 사람은 그렇게 어서방에서 거의 한 시진가량 이야기를 나눴다.태후가 떠난 뒤, 숙청제는 황후의 금족령을 해제하라는 어명을 내릴 뿐, 후궁을 관리하는 권한은 돌려주지 않았다.오대반으로부터 어명을 전해 들은 제황후는 처음엔 믿을 수 없었다. 어째서 갑자기 금족령이 해제했단 말인가?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니, 아마도 자신이 전에 퍼뜨리도록 지시했던 말들이 효과를 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후가 살아 있는데, 적자를 태후궁에서 보살피는 것은 규율에 어긋난다는 말이었다.금족령이 해제된 제황후는 감사의 인사는 뒤로하고 대신, 곧장 서대신, 곧장 대황자를 만나러 상서원으로 향했다. 대황자는 황후를 보자마자 봅시 기뻐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태부가 강의를 하고 있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새장 속에서 풀려난 새처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그녀에게 달려갔다. “어머니, 아들은 어머니가 너무 보고 싶었사옵니다! 언제쯤 저를 다시 데려가시겠나이까!” 황후는 허리를 숙여 그의 어깨를 잡고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들을 찬찬히 살폈다. 초구를 걸치지 않은 대황자는 많이 야워어 턱선이 뽀쪽하게 드러난 모습에 황후는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어찌 이렇게 수척해졌느냐? 잘 먹지 못한 것이냐?” 대황자는 입을 삐죽이더니 금세 억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서재에서 돌아가면 황조모께서는 또 글을 외우게 하십니다. 외우지 못하면 밥을 주지 않으시니 황조모궁에 더는 있고 싶지 않아졌습니다. 빨리 돌아가고 싶사옵니다!” 제황후는 태후가 엄격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방금 금족령이 풀린 상황에서 태후와 맞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는 다만 대황자를 달래며 말했다. “조금만 더 참거라. 어미가 네 부황을 설득할 것이다.” 대황자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말하려다, 안만수 태부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말문을 닫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이때 안만수가 제황후에게 예를 갖추며 말했다. “마마, 대황자께서는 수업 중이시옵니다.” 제황후는 안
이튿날, 목 승상은 바로 태의원으로 향하였다. 태의원에서는 모든 태의와 원정이 대기 중이었다. 자리에 앉은 목 승상은 그들을 바라보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딱 한 가지만 묻겠다. 폐하의 병을 치료할 자신이 있느냐?” 태의들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다 마침내 오원정이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목 승상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없사옵니다.” “조금이라도 말이냐?” 목 승상은 쉽게 납득할 수 없어 다시 물었다. “단 한 가닥의 희망이라도, 혹 다른 방도라도 없단 말이냐?” 모두가 다시 침묵하자, 목 승상의 눈빛은 점차 어두워졌고 그러다 완전히 빛을 잃었다.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태의원의 명성을 걸고서라면, 이 기한을 2년으로 늘릴 수는 없겠느냐?” 오원정은 얼굴에 깊은 자책감이 서려 있었다. “승상, 폐적증은 발작하면 기세가 매우 심각하여 2년은커녕 1년조차도… 쉽지 않을 것이옵니다.” 이번에는 목 승상이 한참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러고는 마침내 한 마디 내뱉었다.“입들 조심하거라.” 그는 천천히 태의원을 나서며 망토를 단단히 여몄다. 이렇게도 빨리 또 연말이 다가왔다. 날씨가 갈수록 추워져 뼛속까지 스며들었다.태후는 겉으로는 아무 일도 모르는 듯했지만, 태의원의 밤새 꺼지지 않는 불을 보고일이 터졌음을 짐작했다. 그녀는 두통을 핑계로 오원정을 불러 진맥을 청했다. 그러자 진맥을 마친 오원정이 말했다. “태후마마께서는 수면이 부족하신 듯하옵니다.” 꼿꼿이 서 있는 그는 태후가 이미 무엇인가를 눈치챘음을 알고 있었다. 궁에서 태후의 눈과 귀를 피해 갈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태후가 알고 싶어 하지 않을 때만 예외였다. 태후는 주변 사람들을 돌려 보내고, 오원정만 남게 했다. 문지방 위로 햇살이 드리웠지만 매서운 바람이 드리워, 그 햇살조차 싸늘하게 느껴졌다. “말해보거라.” 태후는 자리에 앉아, 오원정의 멍든 눈가를 바라보며 말했다. “폐하께서 얼마나 심각한 상황이기에
오늘 밤, 목 승상은 궁에 묵기로 하였다. 한편, 숙청제는 여전히 후궁에 들지 않았으며, 자신의 침전에 돌아가지도 않고 어서방 안의 침상에 누워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목 승상은 황제가 약을 다 마시는 것을 보고 사탕 하나를 건넸다.숙청제는 사탕을 받아 들고 한참을 바라보다가 눈가에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어릴 적, 부황에게 호되게 꾸짖음을 당하고 나면 승상께서 꼭 사탕 하나를 건네며 격려의 말을 해주시곤 하였지요.” 목 승상도 그를 바라보았다.“그렇습니다. 저 역시 기억하고 있사옵니다. 황상께서 당시 말씀하셨지요. 훗날 현군이 되겠노라고 말입니다.” “혹 승상을 실망시킨 적이 있었는지요?” 숙청제는 사탕을 입에 넣었다. 그로 인해 목소리가 다소 흐릿해졌다. “없사옵니다. 소인에게 폐하는 이미 현군이시옵니다.” 숙청제는 고개를 저으며, 눈에 실망스러운 빛을 띠우고 말했다. “난 현군이 아닙니다. 하고 싶은 일이 아직 많이 남아 있지만 이제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태의원에서 아직 진단을 내리지 않았으니, 폐하께서는 비관하시면 안되옵니다.” 목승상의 위로는 다소 건조하게 느껴졌다. “조금은 아쉽기는 하지만 더 많은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숙청제는 침상에 비스듬히 누운 채 무거운 눈빛으로 말했다. “우선, 태자를 정해야 할 텐데 승상께서는 대황자가 어떠신지요?” 목승상이 답했다. “대황자는 장남이자 중궁의 적자로서, 지금은 태부의 가르침 아래 점점 나아지고 있사옵고 예전의 제멋대로이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시간이 지나면 더욱 믿음직스러운 인물이 될 것입...” 그러자 숙청제가 그의 말을 끊었다. “저는 미래를 알 수 없습니다. 현재를 이야기하시지요. 그럼, 이황자는 어떻습니까?” 잠시 생각에 잠기던 목 승상이 답했다. “이황자는 영민하고 총명하지요. 비록 이제 막 학문을 시작하셨으나, 근면하고 배우려는 의지가 강한 점이 눈에 띕니다. 다만 이를 지속할 수 있을지는
너무나도 큰 일이라 송석석은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황제가 만약 승하한다면, 의심할 여지도 없이 대황자가 황위에 오를 것이고, 조만간 태자로 책봉될 것이다. 어린 황제가 즉위한다면, 반드시 보정 대신이 필요할 것이며, 그 수는 한 명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이로 인해 조정은 여러 당파로 갈리게 될 것이고, 혼란이 일어날 가능성이 컸다. 만약 보정대신을 두지 않는다면, 태후나 제황후가 수렴청정할 것이다. 황후는 야망이 가득한 사람으로, 현재 금족 된 상태에서도 대황자를 위해 계략을 꾸미고 있었다. 제씨 가문의 세력이 너무나 강해져 최근 황제가 억누르고는 있으나, 만약 황제가 승하하고 대황자가 즉위하면 제씨 가문은 다시 힘을 얻게 될 것이었다. 누군들 권력을 탐하지 않겠는가? 목승상은 고령이라 퇴의를 염두에 두고 있었기에, 신황을 위해 나라를 돌보려 해도 상황이 그리 녹록지 않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나중에 벌어질 일들이고 현재 가장 우려되는 것은 황제에게 1년이란 시간밖에 남지 않았다면 그가 승하하기 전에 황후는 대황자를 위해 모든 장애물과 위협을 제거하려 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북명왕부가 가장 큰 위협이었다. 오대반도 이 점을 깨달았는지, 얼굴이 갑자기 창백해졌다. 그는 황제의 병세를 알게 되었을 때, 오직 북명왕만이 어린 황제를 도와 정국을 안정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만 생각했다.하지만 송석석의 근심 어린 얼굴을 마주하게 되자 그 끔찍한 가능성을 깨닫게 되었다.아니, 이것은 단순한 가능성이 아니었다. 현실이 될 가능성이 너무나도 컸다. “왕비마마, 차라리 떠나시는 것이…” 송석석이 서둘러 손을 들어 그를 막았다. “그만하시옵소서. 지금은 태의조차 확실히 진단 내리지 못하였으니, 어쩌면 단순한 두통이거나 종기일 수도 있사옵니다.” 그녀는 오대반이 조언을 하지 못하도록 했다. 혹여 훗날 황제에 대한 자신의 불충함을 느끼고 괴로워할까 염려했기 때문이다. 먼지떨이를 꽉 쥔 오대반은 그녀의 뜻을 바
와야 할 사람들은 모두 만났기에, 이제 송석석은 마음 놓고 쉴 수 있을 것 같았다.간혹 임 태의가 상처 치료와 흉터 제거를 위한 약을 챙겨 찾아오긴 했지만, 그럴 때마다 염 선생이 그를 환대해 주었고 황제께 대신 감사를 전해줄 것을 바랐다. 이날은 임 태의가 오대반과 함께 찾아왔다. 염 선생은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그는 임 태의에게 흉터 제거에 관련한 질문이 있다며 그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면서 송석석이 오대반과 단둘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했다. “폐하께서 보내신 것이옵니까?” 송석석이 묻자, 오대반은 손에 든 먼지떨이를 팔꿈치 위에 걸친 채 문밖에 함께 온 친위병들을 힐끗 보며 답했다. “황상께서 보내신 것도 맞고, 내 스스로도 오고 싶었사옵니다. 왕비 마마는 좀 나으셨사옵니까?” 잠시 망설이던 송석석이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어때 보이시나요?” 오대반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왕비 마마께서는 통찰력이 깊으시옵니다. 좀 나아진 듯하나, 아직은 거동이 어려우신 것 같습니다만.” 송석석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공공께서 말씀하신 대로, 좀 나아지긴 했으나 아직 걸을 수는 없사옵니다.” “왕비마마께서는 마음 졸이지 마시고, 우선 몸부터 잘 돌보셔야 하옵니다.” 오대반이 위로하자, 송석석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마음이 급하지만 어쩔 수 없지요. 단신의 말로는 골절은 백일이 걸린다 하였으니, 이 백일 동안 잘 요양해야 할 듯하옵니다.” 그때 시만자가 안쪽을 들여다보며 미소를 지었다.“멀리서 보고 척귀대인인 줄 알았는데, 가까이 와보니 내가 착각했군.” 그 말을 들은 친위병들은 그녀가 장기문 대감의 사부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서둘러 예를 갖춰 인사했다. 시만자는 그들의 이름을 물은 뒤,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재미있군요. 내 제자들이 그대들 무예가 뛰어나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던데, 오늘 잘 만났군. 내 그대들과 몇 수 겨루도록 하지.” 그 말에 친위병들의 눈이 반짝였
안여옥이 몸을 굽히며 작별 인사를 했다.“그럼 더 이상 방해하지 않겠사옵니다.” “살펴 가세요.” 최숙심은 미소를 띈 얼굴로 그녀를 배웅했다. 안여옥이 떠난 후, 최숙심이 왕청여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녀의 얼굴에 드리운 검은 그림자는 또 다시 후회를 하고 있다는 증거였다.“이미 지난 일을 되새긴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어서 들어가시지요.” 왕청여가 송석석을 문병하러 온 것은 큰 용기를 낸 것이었다. 그녀는 송석석에게 사과와 감사를 동시에 전해야 했기에, 오늘은 그저 형수님들을 따라온 척했지만, 사실은 과거의 모든 일을 마주하기 위해 찾아왔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과대평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송석석을 마주할 용기는 냈지만, 안여옥을 보는 순간, 알 수 없는 감정이 북받쳤다. 마치 무언가로 세게 맞은 듯 머릿속이 하얘졌고, 그 미소조차 억지로 지어낸 것이었다. 심지어 자신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까 두려웠다. 멍하니 형수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간 왕청여는 송석석을 마주한 순간 이미 눈물은 시야를 가렸다. 그녀를 한 번 쳐다보던 송석석은 미소 지으며 자리에 앉으라 권하고 차를 내렸다. 그녀의 다리에 감긴 붕대를 바라보던 최숙심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심하게 다친 것은 아닌지요? 얼마나 많이 아프셨습니까?” 그녀의 진심 어린 염려에 송석석은 오히려 태연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 정도 작은 상처는 아무것도 아니지요.” “어찌 아프지 않을 수 있겠사옵니까? 듣자 하니 뼈까지 부러졌다던데, 얼마나 오래 요양해야 한답니까? 나중에 걷는 데 지장은 없겠사옵니까?” “이것 보세요. 아주 멀쩡하지 않습니까? 정말로 괜찮습니다. 전장에서의 부상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요.” 송석석은 태연하게 다리를 살짝 들어 보이며 말했다. 그녀의 의연한 모습에 최숙심의 눈이 더더욱 슬퍼졌다. “전장에서 얼마나 힘드셨겠습니까?” “늘 있는 일이지요. 이제 다 나았사옵니다.” 그때 옆에 있던 남희가
그렇게 궁을 떠난 혜태비는 왕부에 들어서자마자 서우와 함께 곧장 송석석에게로 향했다. 계속 입이 근질거렸던 그녀는 송석석과 대화를 마치자마자 돌아서서는 서우가 멀어지기 바쁘게 오늘 궁에서 들은 이야기와 태후가 내린 엄벌 조치를 모두 털어놓았다. 그러자 모든 것을 전해 들은 송석석은 오히려 혜태비를 위로했다. 후궁에 갇혀 있다 싶이 하는 자들이라 너무나 한가해서 그러는 것이라고 그녀처럼 거리를 산책하거나 연극을 보러 갈 수도 없기에 자연스레 이야기를 꾸며내며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을거라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 길고 지루한 나날을 어떻게 보내겠냐며 말이다.하지만 혜태비는 여전히 화가 났다."그렇다 해도 함부로 입을 놀리면 안 되는 것이니라. 게다가 듣기 거북할 정도이니 용서할 수 없느니라. 우리 묵이가 낙동강 오리알이 될 수도 있다니, 이게 사람이 할 소리냔 말이다! 나이만 먹었지. 기본 예의라곤 없는 사람이니라!" 송석석은 한숨을 내쉬었다. 애초 이상함을 느꼈을 때 자신이 곧장 액션을 취하지 않았음이 후회되었다. 하지만 그 탕약을 마시기 전에는 이상하다고 느꼈어도 이렇게까지 심각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고, 도리어 황제가 만종문의 일을 알아내려는 줄로만 여겼다. 지금까지도 황제가 무슨 의도로 그러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원체 생각이 많은 그인지라 생각을 꿰뚫었다는 느낌이 왔어도 크게 어긋날 때가 더욱 많았다. 비록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군정 회의에 직접 참여할 수는 없으니, 전선의 소식은 오직 사매에게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한가한 나날들이라고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부상을 입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많은 이들이 문병하러 찾아왔기 때문이다.아프지 않을 때는 알 수 없던 관계망이, 병환에 있게 되니 얼마나 넓은지 깨닫게 되었다. 그들은 저마다 선물 꾸러미와 약재를 한가득 들고 찾아왔다.모두 오래 머물지는 않는다 하였으나 날마다 많은 이들이 찾아오니 일일이 응대해야 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서야 비로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