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에서는 반대의 목소리가 거세게 울려 퍼졌다.“터무니없사옵니다! 이런 곳을 열게된다면 삼종사덕의 가르침은 그저 허울 좋은 말이 되고 말 것이옵니다.”“그렇습니다! 이는 여인들의 기세를 북돋워 줄 뿐 아니라 시부모를 공경하지 않게 만들고 질투와 시기로 집안을 어지럽힐 것이옵니다.”“이건 아마 왕야의 생각이 아니고 왕비의 의견일 것이겠지요. 왕야께서 왕비를 기쁘게 하려고 남자의 체면까지 버리시다니, 정말 웃기는 일이옵니다!”숙청제는 보좌에 앉아 그저 혼란을 지켜보며 가끔 입술을 다물기도 하고, 가끔 입꼬리를 올리기도 했다. 사여묵이 남강 전장에서 돌아온 후 칭찬받는 소리만 들리다 이렇게 욕을 먹는 건 보기 드문 일이었다. 속으로 그는 나지막이 탄식했다. '아.. 사여묵, 네가 아직 어리구나. 이 일은 사대부들의 마음에 반하는 일 인걸 왜 알지 못하느냐. 여인에게 퇴로를 열어주면 그들은 여인을 어떻게 다룰 수 있겠느냐? 민심을 얻으려다가 사대부들의 마음을 잃을 수도 있단 말이다. 이 계산은 단단히 잘못되었다네!'온갖 논란 속에서도 숙청제는 여유롭게 사태를 방관하면서도 결정하지 않고 말했다. “다음 조정 회의에서 다시 논의하도록 하거라.” 이는 사태가 한 번 더 불타오를 수 있도록 시간을 두게 하기 위함이었다. 다음 회의에서 더 많은 이들이 반대에 참여하게 할 계획이었다. 사여묵 또한 황제께서 이 일을 곧바로 수락하지 않기를 원하며 상황이 자연스럽게 퍼져나가 백성들 사이에서 소문이 돌기만을 바랬다. 이 일이 제대로 진행되려면 반발과 소문으로 더욱 뜨거워져야 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이 새로운 장소가 있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게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한 달 동안 소문이 충분히 떠들썩하게 퍼져 온 경사에 이 일을 모르는 이가 없게 한다면 딱 좋을 것이다. 장소를 보수하고 침상을 마련하는 데 한 달이면 딱 알맞는 시간이니 말이다.사여묵은 황제가 결국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일 것이라 확신했다. 그의 강경한 태도에 밀려 황제가 마지못해 수락하는 형세로 말이
노부인은 얼굴이 굳은 채 최씨를 응시하였다. 희미하게 내려앉은 눈가를 들어 올리며 그녀의 의도가 진심인지 농담인지 가늠하려는 듯 유심히 살펴 보았다. 하지만 최씨는 농담이 아니었다. 그녀의 눈빛은 매우 진지했다. 그러자 노부인은 피가 거꾸로 쏟아오르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평서백 부인이 감히 약값을 자신에게 청구할 줄은 상상도 못한 일이었기에 점점 호흡이 가빠져오기 시작했다.일국의 친인척 사이에, 그것도 약을 사기 위해서 이런 것까지 철저히 따져야 할 필요가 있단 말인가?노부인은 간신히 그 수치심을 누르며 옆에 있던 손마마에게 눈짓을 보냈다. 손윗사람으로서 자존심이 걸린 문제이니 직접 말하기엔 어려웠다. 손마마는 마지못해 고개를 숙이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부인께서 먼저 은화를 내주시겠습니까? 추후에 꼭 갚겠습니다.”하지만 최씨는 단호히 답했다. “급히 나왔는데 몸에 그렇게 많은 은화를 지닐 리가 있겠습니까?”손마마는 점점 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부인께서 돌아가셔서 가져오시면 되지 않사옵니까……”최씨가 가볍게 웃으며 답했다. “그야 번거로울 따름이지요. 직접 주시면 될 것을 무엇 하러 제가 집으로 돌아갔다 오겠습니까? 어차피 갚을 것이라면 장군부에 이백 냥 정도 없을 리도 없지 않습니까?”노부인의 얼굴은 자줏빛으로 달아올랐다. 최씨가 자신을 모욕하는 게 분명했다.손마마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찌 없겠사옵니까? 다만 장부 관리자가 지금 마침 자리에 없어…… 그래서 잠시 드리지 못할 뿐이옵니다.”최씨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담담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사람을 보내 장부 관리자를 데리고 오십시오. 저는 먼저 청여를 보러 가겠사오니, 은화를 마련하여 문희거로 가져다주시면 대신 다녀오겠사옵니다. 사돈 간에 이 정도 수고는 도리상 마다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말을 마치자마자 최씨는 가볍게 절을 하고 나갔다. 뜰을 나서며 그녀의 입가에는 싸늘한 미소가 번졌다. 감히 약값을 내달라는 말을 하다니.. 도대체 어찌 그리도 맹
왕청여는 예전부터 항상 책임을 회피하곤 했다. 아무리 큰 재앙이 일어나더라도 그녀는 항상 쏙 빠져나온 채 다른 이들을 원망하며 자기가 얼마나 어이없고 무고한지를 강조할 뿐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그녀는 최씨의 말을 반박하지 않고 떨어지는 눈물을 닦기만 했다.최씨는 그녀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전북경은 이미 폐위되어 관직도 잃고 아내도 없는 상태라 하루 종일 방에 갇혀 지냈고, 심지어 전북삼은 무공도 글공부도 형편없이한 쓸모없는 존재였기에 그에게 기대할 수 없었다. 둘째는 더는 관계하지 않겠다며 실제로 벽을 쌓아 장군부를 둘로 나누어 버렸다.겨우 남은 건 전북망 뿐이였다. 그는 특훈을 받는 중에도 시간을 내어 왕청여를 돌봐야 했는데 장부를 정리한 뒤에야 장군부가 정말로 가난하다는 것을 깨달았다.두 시간 후, 이천 냥이 최씨 앞에 놓였다. 이는 손마마가 직접 가져온 것이었다. 숨을 헐떡이며 달려오는 것을 보니 그녀는 분명 밖에서 막 돌아온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최씨는 홍이의 입을 통해 많은 일을 알게 되었다. 민소진은 김순희에게 전당포에 장신구를 맡기라고 했지만 김순희는 오히려 분노하며 민소진을 꾸짖었다. 그래서 결국 병과 약값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소중한 것을 전당포에 맡기게 되었다.최씨는 반드시 가야 한다고 했지만 사실 그녀는 이 일이 헛수고일 것임을 알고 있었기에 손마마를 데려가 그녀와 함께 증인이 되어줄 것을 요청했다. 약왕당에 가서 단설환을 구매하겠다며 신분을 밝히자 의원이 다가와 물었다. “어느 분께서 심장이 병이 드셨는지요? 단설환은 반드시 단의원이 직접 진맥하고 처방을 내리셔야 합니다. 평서백 부인께서는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제가 단 의원님을 모셔 오겠습니다.”최씨가 말했다. “아, 이렇게 번거로운가요? 진맥을 해보지 않고는 단설환을 구매할 수 없다는 말씀인가요?”“그렇습니다. 단설환은 공급이 한정되어 있어 진정으로 필요한 이에게만 드릴 수 있습니다.” 의원이 말했다.그러자 최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
그래서 전북망은 대담하게 몇몇 하인을 팔아넘기기로 결심했다. 장군부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큰형은 관직을 잃었고, 둘째는 분가했으며 그의 관직 복귀도 언제가 될지불확실했기에 수입이 없는 상황에서는 절약할 수밖에 없었다.보통 귀족 가문에서는 하인을 파는 법이 없었고, 가장 금기시 되었다. 집안의 비밀스러운 일들이 드러나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고, 하인이 팔려 나가면 좋은 집안에 가는 경우도 있겠지만 나쁜 집안에 가면 반드시 그 비밀들이 누설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군부에는 더는 숨길 것이 남아있지 않았기에 전북망은 더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매일 백성들이 가장 독한 저주로 자신을 입에 오르내리고 있으니 말이다. 집을 관리해 본 적이 없으면 쌀값도 모르는 법이라는 것을 깨달은 전북망은 그제야 민소진을 이해하게 되었다. 왕청여에 대한 그의 마음도 아주 복잡해졌다. 아이를 잃은 그녀가 안타깝기도 했지만 그녀가 형수와 다툼을 벌인 것에 화가 나기도 했다. 그는 유산에 관한 이야기를 묻고 싶었지만 이 시점에서 상처를 건드리는 것이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해 꺼내지 않기로 했다.엎친 데 덮친 격, 김순희의 병세는 날로 심각해졌고 의사는 설을 넘기기는 힘들 것이라며,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고 했다. 전북망은 사람을 보내 전소환을 불러오려 했지만 전소환은 돌아오지 않았다. 하긴 민소진이 떠날 때도 그녀는 끝내 오지 않았다. 그녀는 불길한 것을 피하고 싶었고 외부에서 장군부를 비난하고 있으니 이 혼란에 휘말리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현재 손마마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두가 김순희에게 등 돌린 상태였다. 죽음과 절망은 그녀의 마음을 강하게 묶어 그녀는 죽음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혔다. 동짓날에도 가족은 한데 모여 식사를 하지 않았고 그녀는 이미 병상에서 일어날 수조차 없었다. 그녀는 손마마의 손을 잡고 울며 말했다. “북명황실에 가서 송석석을 불러오거라… 내가 친히 할 말이 있다.”손마마는 한숨을 내쉬었다. “노부인, 왕비님은
이덕회가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마오! 본 관은 당연히 사내가 맞지요. 허나 사내는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고 첩을 두는 것도 허용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자식이 없으면 양자를 받을 수 있으니 병이 들어도 아내가 돌봐야 합니다. 남자가 이렇게 방자하게 굴어도 세상이 어지럽혀지지 않았는데 여자가 쫓겨나서 수용될 곳이 있으면 오히려 세상이 혼란스러워진다는 것이 대체 무슨 말씀이신지요?”“여인에게 살길이 늘어난다는데 여러분은 대체 무엇이 두려운 겁니까? 아무도 그런 길은 원하지 않다지만 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그런 선택을 하게 될 수도 있지 않습니까?”이덕회는 집안의 그분이 왕야을 전폭적으로 지원하라고 지시했기 때문에 엄청난 사명감을 가지고 이 자리에 온 것이었다. 송석석도 조정에서 이 이야기를 듣고 있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인의 신분으로 여인을 대변하는 것은 더 큰 반발을 불러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아무리 재치 있게 말한들 그들의 날카로운 언쟁에는 상대가 되지 않기에 그녀는 황제가 말을 시키기만을 기다렸다.아니나 다를까, 여러 사람이 소란스럽게 토론하는 사이 황제가 헛기침을 하더니 송석석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송석석, 자네의 의견을 듣고 싶구나.” 순간 모든 시선이 송석석에게 쏠리자 그녀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곧 정신을 가다듬고 앞으로 나와 손을 모아 말했다. “폐하, 특별히 큰 의견은 없지만 여인의 입장에서, 그리고 한때 이혼한 여성으로서 제 생각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대감님들께서도 듣고 싶으신가요?”그녀의 말은 모든이들의 궁금증을 자아냈다. 그녀의 이혼 이야기는 모두가 알고 싶어하는 내용이었기 때문에 모두가 잠시 토론을 멈추고 그녀가 얘기하기만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송석석을 존경하는 몇몇은 그녀가 아픈 상처를 드러내는 것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황제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말해보게.”“여인이 혼인하는 건 사실상 두 번째 삶의 시작이라 할 수 있지요. 우리는 반드시 좋은 삶을 살아야
송석석의 목소리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것이 마침 모든 이가 들을 수 있는 크기였다. “여러분은 민씨의 죽음을 하찮게 여기실지 모르나 만약 그녀가 여러분의 누이나 여식, 혹은 친척이라면 어떻게 생각하실 겁니까? 조금이라도 공감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모두 성현서를 읽어보셨고 약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분들입니다. 많은 여인들이 버림받는 이유는 병이 있거나 자식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허나 그 여인들은 죄가 없습니다.”그녀는 다시 서글프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여인의 생명도 소중합니다. 그런데 어찌 세상은 여인들을 끝까지 몰아내려고 하는 것입니까?”민씨의 죽음에 많은 사람들은 ‘자기 자매나 가족도 아닌데 뭣 하러 저런단 말인가?’라고 생각하며 비웃었다. 하지만 그녀가 말한 성현서는 그들에게 도덕적인 제약을 부여했다. 이 상황에 어찌 반박한단 말인가? 이 자리에서 반박하게 되면 오히려 비정하고 냉정하다고 비난을 받을 것이 분명했다.이런 말이 사내에게서 나왔다면 반박하기가 조금 더 수월했을지도 모른다. 송석석은 이 자리에 있는 유일한 여인으로 무려 황제가 직접 그녀에게 의견을 말하라고 하였기에 그녀는 이와 같은 순간만 기다린 것이다. 여인에 대한 애절함과 안쓰러움이 가득한 그녀의 말에 그들은 도무지 반박할 수 없었고 반박한다는 것은 그녀를 괴롭히는 것과 다름없었기에 이렇게 많은 관료들에게 아주 수치스러운 일이 될 것이다. 게다가 이것 또한 그녀가 스스로 떠드는 것이 아닌, 무려 황제가 직접 그녀에게 의견을 물어서 하는 말이었다.그리하여 대전은 순식간에 정적에 휩싸였다. 그들의 얼굴에 불만이 가득했지만 더는 송석석과 논쟁할 수 없었다.숙청제는 이 모습을 보고 적당한 시기가 도래했음을 깨달았다. 더는 미룰 일이 아니였기에 필요한 조치를 취할 때가 되었다. 대연국은 이미 선례가 있기에 상국은 절대 뒤처져서는 안 된다. “반대하는 이가 없다면 시도해 보도록 하지. 조정은 자금을 지원하지 않지만 자수공방은 관정부의
다음 날, 부부는 함께 외출했다. 그 전에 사여묵이 어색한 말투로 시만자에게 함께 갈 것이냐고 묻자 시만자는 그를 이상하게 쳐다볼 뿐이였다. 어젯밤 분명 송석석과 단둘이 놀러 간다고 하더니 이제 와서 그녀에게 함께 가겠냐고 묻는 것은 너무 가식적인 행동이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가 그런 말을 하지 않았어도 시만자는 가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자수공방 일을 처리해야 해서 바빴다. 자수공방은 수리 중이라 더욱 자주 살펴봐야 했다. 게다가 자수공방이 아니더라도 그녀는 휴일에 태비와 함께 차를 마시거나 왕경루와 금경루 같은 곳을 돌아다녔을 것이다. 추운 날씨에 산에 올라가 바람에 맞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왕경루에서 사여묵은 몇 가지 요리를 주문했다. 청증조기, 호피육, 백파광뚱국화 등심, 진주비취백옥탕에 기름에 볶은 새우 한 접시도 추가했다. 비록 자주 볼 수 있는 요리들이라 특별한 것은 아니었지만 왕경루는 이런 요리들을 더욱 극대화 시킬 수 있는 곳이었다.날씨가 춥기도 하고 또 산에 올라타야 했기에 사여묵은 술 한 병을 주문했다. 오늘은 전적으로 그가 주도하며 그녀는 유난히 준수한 그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좋았기에 그가 하고 싶은대로 내버려두었다. 그의 흰색 여우 가죽 외투는 옷걸이에 걸쳤다. 아늑한 방 안에는 숯불이 타고 있어 외투가 필요 없이 따뜻했다. 푸른색의 촉금은 구름과 파도 문양으로 수놓아져 있었는데 넓은 옷깃에 좁은 소매가 특징이었다. 게다가 푸른색의 장신구와 하얗게 변한 피부색에서 전체적으로 문관의 우아한 품격이 느껴졌고, 오직 검은 눈썹이 날카로움을 더해 무장군임을 상기시켰다.송석석은 문득 전쟁터에서 처음 그를 봤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는 마치 야생인처럼 얼굴에 수염이 덥수룩했다. 전술을 논의할 때, 그녀는 그의 수염을 몇 번이나 뚫어져라 쳐다봤는지 모른다.이런 생각에 웃음이 터져버린 그녀가 말했다. “남강에서 봤던 장군님과 지금의 장군님은 완전히 다른 사람 같네요.”“그때가 좋았지.” 사여묵이 대답했다.
산으로 올라갈수록 사여묵은 이상한 점을 느꼈다. 방시원이 말한 산 꽃은 보이지 않았고 눈에 들어오는 건 잎이 없는 나뭇가지와 새하얀 설경뿐이었다. 초겨울부터 가뭄이 들어 폭포도 메마른 상태였다. 설경이 예쁘지 않다는 게 아니라 너무 오래 버티고 있었더니 좀 지겹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폭포와 높은 산에 피는 겨울 꽃이 있었다면 느낌이 다를 수도 있겠지만 이 산에는 꽃이 단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만금산의 북쪽에는 눈이 덮인 데다 장애물이 없어 스키를 탈 수 있는 언덕이 있었기에 그는 전략을 바꿔 송석석을 데리고 북쪽으로 향했다. 그는 신이 나서 산꼭대기에 올라 숨을 돌리고 송석석에게 말했다. “여전히 예쁘지 않소? 석양을 기다렸다가 보고 스키를 타고 내려가면 정말 재미있을 것이오.” 송석석은 사여묵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방엔 새하얀 눈과 잎사귀가 없는 나뭇가지뿐이였지만 웅장함과 소슬함의 아름다움은 있었다. 너무 추운 게 문제인건 빼고는. 칼처럼 얼굴을 스치는 북풍은 귀가 얼어 떨어질 지경이었고 망토의 모자는 바람은 막지 못했다. 이때 송석석이 말했다. “그럽시다. 여기에 앉아서 석양을 구경하지요.” 그녀는 모처럼 신이 난 사여묵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지금이 아마 신시쯤 된 것 같으니 여기서 석양을 보려면 적어도 한 시간은 기다려야 하겠어. 게다가 날씨가 흐려 볼 수 있을지 확실 지도 않아.’ 송석석은 잠시 생각하다가 사여묵을 쳐다보더니 결심했다. ‘그래, 오늘의 운명은 사여묵에게 맡기겠어. 그래도 스키를 탄다는 건 그냥 하는 말이겠지?’ 사여묵은 가파른 산세를 보며 위에 덮인 눈을 밟아보더니 망토를 깔고 내려가도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예전에 남강에 있을 때도 그렇게 했었다.두 사람은 산꼭대기의 눈밭에 앉았는데 사여묵은 송석석을 품에 안고 서로 추위를 물리쳤다. 너무 춥고 바람이 세서 낭만 같은 건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고, 두 사람은 그저 온몸의 내공을 추위를 이겨내는 데 사용했다. 송석석은 머리를 사여묵의
그러자 송석석이 이내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왕씨 가문에서는 그녀를 아주 잘 대해줍니다. 조카딸의 혼담에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시집간 부군이 잘 대해준다 하더군요. 다만 그녀는 자신이 두 번 시집갔음에도 처가에 머무는 것이 조카들에게 미칠 영향이 걱정되어 그러는 모양입니다.”그 말에 전북망이 고개를 끄덕였는데, 순간 번개처럼 날렵하지만 마음씨 따뜻한 최씨 부인이 떠올랐다. 최씨 부인에게는 적자와 서자녀들이 있었고, 아직 혼담이 정해지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그런 그녀가 혼인 문제로 얼마나 많은 유언비어에 시달렸을지 생각하니, 전북망은 진심으로 안타까웠다. 형수로서의 최씨 부인을 존중하며, 그녀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할 바 없었다. 이때 송석석이 그의 생각을 끊었다. “그럼 천천히 생각해 보십시오.”전북망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문득 물었다. “우리 단둘이 여기에 있으면, 섭정왕이 질투하지 않을까요?” 송석석은 예상치 못한 질문에 잠시 당황했으나, 곧 침착하게 답했다. “이 정도 신뢰도 없다면, 제가 어찌 현갑군 지휘사로 오래 근무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서로 숨김없이 모든 걸 공유합니다. 이번 만남 역시 그분께 이미 알려두었죠.”송석석이 떠나자 전북망도 따라나섰다. 그는 섭정왕이 어딘가에서 이들을 지켜보고 있으리라 의심했지만, 정작 별청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앞마당에서야 섭정왕을 발견했는데, 그는 대장군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송석석을 보자 미소로 맞이하며 불러세우는 섭정왕의 모습에 전북망은 마음이 착잡해졌다. ‘진정한 부부란 저런 것일까.'그러나 성릉관이든 진성이든, 남녀의 단독 만남은 명예에 흠이 될 수 있음도 잘 알았다. 특히 높은 지위에 오른 이들은 더욱 조심해야 했다. ‘내가 무슨 권리로 그들을 걱정하는가.’자조적인 생각이 들었지만, 왕청여의 제안은 여전히 그의 가슴을 두드렸다. 5일의 고민 시간이 주어졌다. 사여묵과 송석석이 진성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최씨 부인의 이야기를 떠올리면 답은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 전북망은 송석석과 다시 만났다. 사실 그전에도 송석석이 성릉관으로 갔을 때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들은 서로 서먹해서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이 매번 성릉관을 떠날 때마다 몰래 배웅하곤 했다. 전북망은 자신이 당시 어떤 마음으로 그런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늘 송석석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이방과 왕청여에게도 미안하긴 하지만, 그들과는 서로 감정을 소모하고 다투면서 서로에게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장군부만 송석석에게 상처를 줬을 뿐, 송석석은 장군부에게 조금의 상처도 주지 않았다. 비록 이혼한 후에는 전북망 어머니의 병세에 대해 상관하지 않았지만 큰형수에게 어떻게 단설환을 얻을 수 있는지 알려주기까지 했다.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는 이미 섭정 왕비가 되어있고 나서였다. 변방의 전사들에겐 양식과 무기가 풍부하고, 봉록까지 올라, 그들에겐 이득이기에 이제는 조정의 정세에 관심을 두지 않아도 되었다. 섭정왕은 한때 장수였기에 병사들이 배불리 먹어야만 국토를 지킬 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전북망과 송석석이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섭정왕과 함께 소 대장군에게 생신을 축하해주고 있었다. 그녀를 보는 소 대장군의 눈빛은 여전히 자애롭고 인자했다. 전북망은 사람들을 사이에 두고 멀리서 그 광경을 보며, 그때 그렇게 어리석지 않았다면 지금 송석석과 함께 노장군의 생신을 축하하는 사람이 바로 자신일 것이라는 후회를 했다.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같은 생각인 걸 보니, 자신만 제자리에서 멈춰 있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래서 그는 이번에도 송석석과 대화를 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생일잔치가 끝난 후에 송석석이 뜻밖에도 먼저 그를 찾았다. 그와 송석석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섭정왕은 이상한 소문이 날까 봐 걱정되지도 않는가?’전북망은 당황하고 불안해 보였고, 송석석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먼저 입을 열지도 못하고 송석석이 말하기만을 기다리
전북망은 성릉관에서 몇 년 동안 두 번이나 발탁되었고, 지금은 장군의 신분으로 수천 명의 병사를 관리하고 있다. 계속 성릉관에 주둔하고 있어 다시 진성으로 돌아간 적이 없었고, 진성의 부름 없이는 제멋대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는 재혼도 하지 않고 여전히 혼자 살아갔다. 성릉관의 모래바람은 해마다 그의 얼굴에 흔적을 남겨 또래들보다 몇 살이나 더 늙어 보였다. 심지어는 몇 년 동안 불면증에 시달렸기에, 진정제를 먹어야만 잘 수 있었다. 그는 가끔 이런 생각을 했다. ‘만약 내가 그때 이방과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어떻게 지내고 있었을까? 송석석과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부부가 되었을까? 아마도 우린 귀여운 자녀도 낳았겠지. 그리고 나는 군대에서 열심히 일하고 석석은 가문의 내무를 책임지며 부모님을 모시고 아이를 돌보고 있었겠지? 설령 내가 승진을 하지 못하고 평생 장군으로만 살아도 그는 날 떠나지 않았겠지.’ 이전의 전북망은 송석석이 하늘을 나는 독수리였는데 자신을 위해 날개를 부러뜨리고 병든 시어머니를 돌보며 군부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책임지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리고 그가 알아차렸을 땐 이미 돌이킬 수도 없었다. 전북망에게는 이미 이방이 있었고 이방을 사랑한다고 했으니, 송석석이 이혼하자고 했을 때 그는 심한 말을 하고 후회하지 말라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송석석 또한 후회할 게 없었다. 이혼을 하면서 전북망을 위해 부러뜨렸던 날개가 다시 자라나 전쟁터로 날아가 쉽게 공을 세웠으니까 말이다. 이방은 송석석이 큰 가문의 아가씨인 데다가 부친과 오라버니가 그를 위해 길을 닦아주었기에 이런 성과를 이룰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의 성공은 그의 능력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문이 도움이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주된 원인은 아닐 것이다. 만종문에서 송석석의 무공은 거의 최고였는데, 그건 송석석이 그만큼 노력을 했고, 그만큼 땀을 흘렸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전북망은 송석석을 존경했지만 그는 자신이 송석석을
어머니께 간청해도 소용이 없자 신이는 아버지를 찾아갔다. 하지만 돌아온 건 더 심한 꾸지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신이가 이 혼사를 반대하는 것은 양지춘과 접촉한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양지춘에게 그녀를 데리고 나가서 놀며 감정을 쌓으라고 했다. 신이는 가기 싫었지만 어머니가 억지로 그녀를 마차에 태웠고, 심지어는 하녀에게 그녀가 부적절한 말을 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엄명했다. 양지춘의 얼굴은 그나마 멀쩡하게 생겼는데, 처음에는 신이를 조금이나마 존중하는 척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본성을 드러냈다. 그는 신이의 외모와 품평을 논하며 신이가 외모가 예쁘지 않았더라면 절대로 그를 부인으로 들이지 않겠다고까지 했다. 그의 오만한 태도는 신이를 매우 불편하게 했다. 단지 이것뿐이었다면 아마도 신이가 결혼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양지춘은 일부러 신이를 마차에 태워주는 척하며 그녀의 엉덩이를 꼬집었다!그 순간 신이는 온몸의 피가 머리 위로 솟구친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의 경박한 눈빛에 신이는 이내 눈물이 쏟아졌고, 모욕감에 온몸을 떨었지만, 감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힘들게 집에 돌왔는데, 하녀와 마부는 그의 동작을 보지 못한 탓에, 오히려 그가 세심하고 자상하다며 그녀의 어머니 앞에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신이는 억울해서 어머니에게 그 일을 말했지만 어머니는 오히려 그녀가 일부러 꾸민 말이라고 생각해, 그녀를 꾸짖으며 사흘 동안이나 외출을 금지했다. 신이는 그렇게 방에 갇혔고, 매일매일을 눈물로 얼굴을 씻었다. 심지어 그날 선비의 말을 듣고 호수에 뛰어들지 않은 것을 후회하기까지 했다. ‘내가 양지춘에게 시집가는 것이 물에 빠져 죽는 것과 대체 무엇이 다른가?’ 사흘 후, 외출 금지가 해제되자마자 신이는 다시 경산사로 가서 같은 핑계로 하녀를 내보냈다. 이번엔 정말 죽을 각오로 호숫가에 간 것이었는데, 뜻밖에도 그곳에서 다시 그 선비를 만났다.그는 쓸쓸하게 호숫가에 앉아 작은
신이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한 사람이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고, 나무 그늘에 몸이 가려져 있었다. 그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은 초라해 보였고 눈 밑에는 검푸른 빛을 띠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 사람은 바로 다리 앞에서 그림을 팔던 선비이자, 학정이 말하던 퇴학 해서 기녀를 키우는 학생이었다!“헛소리하지 마십시오.” 신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짜증을 냈지만, 그가 한 말을 떠올리자 내심 두려웠다. “나는 여기에 물귀신이 있다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거짓말하는 것이겠지요.” 신이는 죽음은 두렵지 않았지만, 귀신은 두려웠고 진흙탕에 영원히 깔려 있는 건 더욱 두려웠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가 걸어 나오자 얼굴은 더욱 여위어 보였다. “호숫가의 주변을 보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왜 이런 아름다운 경치를 보러 오는 사람이 없겠습니까?” “그건 사람들이 이곳으로 예불하기 위해 오는 것이지, 경치를 보러 오는 것은 아니니까요. 절을 하고 바로 돌아가니 당연히 보지 못하겠지요.” 신이는 그렇게 말했지만, 순간 깊이가 보이지 않는 호수에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느껴져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그는 여전히 굳게 서서 말했다. “예불하는 사람은 천지와 자연을 경외하기 때문에 이런 좋은 경치가 있다면 반드시 한 번 보러 올 것입니다. 이런 곳은 인재를 배출할 수 있는 좋은 곳일 텐데 아무도 없다는 게 아기씨는 이상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것이 사실인지는 몰랐지만, 그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감히 그런 무서운 곳에서는 죽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몸을 돌려 떠나려 했다.그러자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한 번뿐인 인생이니 절대 쉽게 자신의 생명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살고 싶어도 살 지 못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의 말이 이상하게 느껴져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는데, 그의 눈 밑은 이내 붉어졌고 눈물이 고여 반짝이는 것 같
신이의 사촌 여동생과 하녀는 신이를 찾으러 돌아왔다. 신이가 하녀보고 이순에게 삼백문을 주라고 하자 이순은 웃으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원래는 우연한 만남일 뿐이라 다시는 접점이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 조모님의 생신 때 가문 연회에서 공학정이 데리고 온 제자들 중에 이순이 있었다. 강남의 예의 규율은 진성처럼 엄격하지 않아서 연회에 참석할 때 여인들도 앞마당에 갈 수 있었다. 이순은 신이를 단번에 알아보지 못했다. 신이는 그때 면사포를 쓰고 있었고 두 눈만 드러냈기 때문에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이상할 건 없었다. 이순은 식사를 하지 않고, 신이의 조모에게 생신 축하 그림만 드린 후에 집에 일이 있다며 작별을 고했다. 그가 떠나자마자 학정이 그를 언급하며 안타까운 말투로 말했다. “총명하긴 한데 진취심이 없어서 계속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걸 여기로 데려와 진취성이 있는 사람들을 많이 사귀게 하려고 했는데… 이 정도로 사리분별을 할 줄 모르다니. 정말 실망이군. 학교를 그만두겠다면, 이젠 마음대로 하라고 해야겠어.” 그러자 신이의 부친이 위로했다. “화내실 필요 없습니다. 선생님껜 학생이 많으니 그가 나간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될 건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학정은 마치 울화가 쌓인 것처럼 말했다. “그는 내가 가장 아끼는 제자였다네. 그런데 진취성만 없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동창에게 돈을 빌리질 않나, 게다가 집에 기녀까지 키우고 있다더군.” 신이의 아버지는 그런 사람을 가장 싫어하였다. “그런 사람은 얘기할 가치도 없습니다.” 신이는 그가 어떤 사람이라는 걸 알고 나서 왠지 마음속으로 실망감이 가득했다. 아마도 그날은 그가 그린 그림을 보고,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 같다고 생각해 마음이 갔던 것 같았다. 그렇게 몇 달 후, 신이의 혼사도 낙착되었다. 그녀의 약혼자는 회주 지부의 둘째 아들인 양지춘이고, 올해 22살이었다. 22살인데도 결혼하지 않았던 건 첩을 통해 서자를 낳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좋은 가문은 그
그의 이름은 신이었는데 그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그에 대해서 말할 때, 경멸하는 기색을 띠었고,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 모르는 사람까지 모두 침을 뱉으며 뻔뻔하다고 할 정도였다. 알다시피 애인과 야반도주하는 것은 사람을 죽이고 불을 지르는 것보다 더 욕먹을 일이니 말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에게 후회하냐고 묻기도 했다. 그녀는 시집간 것을 후회하지 않지만 죄책감을 느끼긴 했다. 왜냐하면 그로 인해 시 씨 가문의 명성이 손상되어 형제자매들과 조카들이 혼사에 어려움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신이는 시 씨 가문의 아가씨로서, 태어날 때부터 온갖 보살핌을 받아왔다. 먹는 것은 물론 모두 산해진미이고, 입는 것도 모두 능라 비단이었다. 게다가 보모님과 오라버니의 총애까지 한 몸에 받았다. 하지만 그녀에겐 한 가지 결함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열네 살 때까지 월사가 오지 않은 것이었다. 많은 의사들을 불러 진찰을 받고 밤낮으로 약을 먹었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어머니는 그녀에게 몸이 차서 그러니 몸조리를 하면 나을 수 있다고 위로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몰래 의사가 부모님께 하는 말을 들었다. 의사는 그가 몸이 차서 그런 병이 생긴 것이 아닌, 아이를 키우는 곳이 어린아이와도 같아서 평생 아이를 가질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의 몸이 마치 작은 꽃병과 같아서 꽃을 꽂을 수는 있지만 나무를 심고 꽃을 피워 열매를 맺는 건 불가능하다고 비유했다. 그녀는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건 여자에게 어떤 의미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녀를 속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나중에 좋은 사람에게 시집가서 부군에게 첩을 들인 후, 첩이 낳은 아이를 친자식처럼 키우라고 조언해주었다.시 씨 가문이라는 후원이 있으면 그녀가 아이를 낳을 수 없어도 아무도 그녀의 지위를 흔들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 씨 가문의 재물은 그녀가 평생 부귀하게 살기에 충분했다. 신이의 조모도 그녀에게 아이를 낳을 수 없으니 자세를 낮춰야 한다고 했다. 시 씨 가문의 딸이라고
추운 겨울이 되자 눈이 내려 성릉관은 하얗게 뒤덮였다. 세상이 마치 깨끗해진 것처럼 보였다. 이황자는 몇 년 동안 너덜너덜한 승복을 입고 발우를 받쳐 들고는, 가는 길에 동냥을 하다가 절을 보면 이틀 묵으며 부처님께 참회하면서 살았다. 사실 그는 원래 있던 절에서 계속 지낼 수 있었다. 편안하진 않지만 풍찬노숙할 필요도 없고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그런 안일한 곳에서는 평생 죄를 씻을 수 없다고 생각했고, 계속 길을 걷고 계속 고생해야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했다. 그가 성릉관에 도착했을 때 짚신은 이미 찢겨 있었고 발바닥에는 두꺼운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이제는 신발을 신지 않고도 자갈이 가득한 길을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추운 날씨에는 모든 옷을 껴입어도 추위를 막을 수 없었지만 이미 익숙해진 뒤였다. 그는 눈보라를 맞으며 성릉관에 위치한 감은사로 향했는데, 몇 년 동안 발걸음을 멈춘 적이 없는 탓에 고단함이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심지어는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아 그는 눈이 가득 쌓인 길에서 의식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깨어났을 때 그는 따뜻한 두꺼운 이불 속에 누워 있었다. 그가 있는 방에는 숯불이 피워져 있었고, 살짝 열린 창문으로 눈에 눌려 허리가 굽은 나뭇가지가 보였다. 그는 눈동자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렇게 편안하고 따뜻한 느낌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의 마음속에 순간 욕심이 생겨 조금만 더 누워있고 싶어졌다. 그런데 바로 그때, 문이 활짝 열렸다. 그가 벌떡 일어나 앉았는데, 갑자기 눈앞이 핑핑 돌더니 다시 힘없이 침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누워 있거라.” 이때 누군가가 부드러운 말투로 말하면서 약그릇을 그의 침대 옆에 놓았다. 그는 말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익숙해, 어지러움을 가라앉히고 고개를 돌려보니, 그 사람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서우 형?!’ 그는 자신이 잘못 보았을까 봐 다시 자세히 보려 했지만, 몸이 너무 어지러운
대황자는 봄 사냥 때 숙청제에게 꾸중을 듣고 돌아간 후 앓아누웠다. 당시 이황자와 서우가 모두가 걱정했는데 덕비는 오히려 기뻐했다. 그는 이번 일을 겪으면서 황제폐하께서는 분명히 대황자를 싫어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덕비는 이황자를 안고 반드시 부지런해야 하고, 태부와 황숙의 말을 잘 듣고 누구보다 잘 배워 황형을 제압해야 한다고 당부까지 했다. 그로 인해 이황자의 마음은 몹시 복잡했다. 덕비가 줄곧 그에게 태자와 황제가 되는 것이 얼마나 좋은 지 말해주었을 때 비록 그도 마음이 설렜지만 자신과 거리가 먼 얘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지금 그와 대황형, 서우 형, 그리고 셋째 동생이 사이가 좋아 도저히 대황형을 미워할 수가 없었다. 매일 모순적으로 지내다 보니 오히려 학업이 나빠졌고 승마 연습을 할 때도 여러 번 실수를 했다. 하지만 덕비는 이상하게 그를 탓하지 않았고 며칠 동안 계속 게으르게 하라고 했다. 그렇게 덕비는 이황자를 데리고 복마마를 자주 뵈러 갔고, 복마마 궁전에서 숙청제를 만날 수도 있었다. 덕비는 며칠 동안 그곳을 드나들더니 어느 날 굳은 표정으로 다시는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차가운 말투로 청이에게 자신의 보살핌이 없으면 아이가 태어날 수 있는지 보겠다고 했다. 황제폐하를 자주 뵈러 갈 수 없어 아쉬웠지만 이황자는 마음을 가다듬고 공부와 승마술에 전념했다. 이황자는 당시 앞날이 어떻게 될지도 몰랐고, 비록 매일 힘들긴했지만 한편으로는 즐거웠기에, 계속 이렇게 지내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숙청제의 천추세에 승마대회를 개최할 예정이니 세 황자와 서우도 가서 겨뤄 보기로 했다. 원래 그런 대회에서 황자들은 재미있게 참석만하면 되지만, 덕비는 그 경기를 몹시 중시했다. 덕비가 이황자에게 마름쇠를 건넬 때, 그는 하늘이 무너져내리는듯한 기분을 느꼈다. 이황자는 원하지 않았다. 그는 절대로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대황형의 목숨을 앗으려 하다니, 이황자는 처음으로 어마마마가 무서워졌다.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