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회가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마오! 본 관은 당연히 사내가 맞지요. 허나 사내는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고 첩을 두는 것도 허용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자식이 없으면 양자를 받을 수 있으니 병이 들어도 아내가 돌봐야 합니다. 남자가 이렇게 방자하게 굴어도 세상이 어지럽혀지지 않았는데 여자가 쫓겨나서 수용될 곳이 있으면 오히려 세상이 혼란스러워진다는 것이 대체 무슨 말씀이신지요?”“여인에게 살길이 늘어난다는데 여러분은 대체 무엇이 두려운 겁니까? 아무도 그런 길은 원하지 않다지만 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그런 선택을 하게 될 수도 있지 않습니까?”이덕회는 집안의 그분이 왕야을 전폭적으로 지원하라고 지시했기 때문에 엄청난 사명감을 가지고 이 자리에 온 것이었다. 송석석도 조정에서 이 이야기를 듣고 있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인의 신분으로 여인을 대변하는 것은 더 큰 반발을 불러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아무리 재치 있게 말한들 그들의 날카로운 언쟁에는 상대가 되지 않기에 그녀는 황제가 말을 시키기만을 기다렸다.아니나 다를까, 여러 사람이 소란스럽게 토론하는 사이 황제가 헛기침을 하더니 송석석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송석석, 자네의 의견을 듣고 싶구나.” 순간 모든 시선이 송석석에게 쏠리자 그녀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곧 정신을 가다듬고 앞으로 나와 손을 모아 말했다. “폐하, 특별히 큰 의견은 없지만 여인의 입장에서, 그리고 한때 이혼한 여성으로서 제 생각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대감님들께서도 듣고 싶으신가요?”그녀의 말은 모든이들의 궁금증을 자아냈다. 그녀의 이혼 이야기는 모두가 알고 싶어하는 내용이었기 때문에 모두가 잠시 토론을 멈추고 그녀가 얘기하기만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송석석을 존경하는 몇몇은 그녀가 아픈 상처를 드러내는 것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황제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말해보게.”“여인이 혼인하는 건 사실상 두 번째 삶의 시작이라 할 수 있지요. 우리는 반드시 좋은 삶을 살아야
송석석의 목소리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것이 마침 모든 이가 들을 수 있는 크기였다. “여러분은 민씨의 죽음을 하찮게 여기실지 모르나 만약 그녀가 여러분의 누이나 여식, 혹은 친척이라면 어떻게 생각하실 겁니까? 조금이라도 공감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모두 성현서를 읽어보셨고 약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분들입니다. 많은 여인들이 버림받는 이유는 병이 있거나 자식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허나 그 여인들은 죄가 없습니다.”그녀는 다시 서글프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여인의 생명도 소중합니다. 그런데 어찌 세상은 여인들을 끝까지 몰아내려고 하는 것입니까?”민씨의 죽음에 많은 사람들은 ‘자기 자매나 가족도 아닌데 뭣 하러 저런단 말인가?’라고 생각하며 비웃었다. 하지만 그녀가 말한 성현서는 그들에게 도덕적인 제약을 부여했다. 이 상황에 어찌 반박한단 말인가? 이 자리에서 반박하게 되면 오히려 비정하고 냉정하다고 비난을 받을 것이 분명했다.이런 말이 사내에게서 나왔다면 반박하기가 조금 더 수월했을지도 모른다. 송석석은 이 자리에 있는 유일한 여인으로 무려 황제가 직접 그녀에게 의견을 말하라고 하였기에 그녀는 이와 같은 순간만 기다린 것이다. 여인에 대한 애절함과 안쓰러움이 가득한 그녀의 말에 그들은 도무지 반박할 수 없었고 반박한다는 것은 그녀를 괴롭히는 것과 다름없었기에 이렇게 많은 관료들에게 아주 수치스러운 일이 될 것이다. 게다가 이것 또한 그녀가 스스로 떠드는 것이 아닌, 무려 황제가 직접 그녀에게 의견을 물어서 하는 말이었다.그리하여 대전은 순식간에 정적에 휩싸였다. 그들의 얼굴에 불만이 가득했지만 더는 송석석과 논쟁할 수 없었다.숙청제는 이 모습을 보고 적당한 시기가 도래했음을 깨달았다. 더는 미룰 일이 아니였기에 필요한 조치를 취할 때가 되었다. 대연국은 이미 선례가 있기에 상국은 절대 뒤처져서는 안 된다. “반대하는 이가 없다면 시도해 보도록 하지. 조정은 자금을 지원하지 않지만 자수공방은 관정부의
다음 날, 부부는 함께 외출했다. 그 전에 사여묵이 어색한 말투로 시만자에게 함께 갈 것이냐고 묻자 시만자는 그를 이상하게 쳐다볼 뿐이였다. 어젯밤 분명 송석석과 단둘이 놀러 간다고 하더니 이제 와서 그녀에게 함께 가겠냐고 묻는 것은 너무 가식적인 행동이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가 그런 말을 하지 않았어도 시만자는 가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자수공방 일을 처리해야 해서 바빴다. 자수공방은 수리 중이라 더욱 자주 살펴봐야 했다. 게다가 자수공방이 아니더라도 그녀는 휴일에 태비와 함께 차를 마시거나 왕경루와 금경루 같은 곳을 돌아다녔을 것이다. 추운 날씨에 산에 올라가 바람에 맞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왕경루에서 사여묵은 몇 가지 요리를 주문했다. 청증조기, 호피육, 백파광뚱국화 등심, 진주비취백옥탕에 기름에 볶은 새우 한 접시도 추가했다. 비록 자주 볼 수 있는 요리들이라 특별한 것은 아니었지만 왕경루는 이런 요리들을 더욱 극대화 시킬 수 있는 곳이었다.날씨가 춥기도 하고 또 산에 올라타야 했기에 사여묵은 술 한 병을 주문했다. 오늘은 전적으로 그가 주도하며 그녀는 유난히 준수한 그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좋았기에 그가 하고 싶은대로 내버려두었다. 그의 흰색 여우 가죽 외투는 옷걸이에 걸쳤다. 아늑한 방 안에는 숯불이 타고 있어 외투가 필요 없이 따뜻했다. 푸른색의 촉금은 구름과 파도 문양으로 수놓아져 있었는데 넓은 옷깃에 좁은 소매가 특징이었다. 게다가 푸른색의 장신구와 하얗게 변한 피부색에서 전체적으로 문관의 우아한 품격이 느껴졌고, 오직 검은 눈썹이 날카로움을 더해 무장군임을 상기시켰다.송석석은 문득 전쟁터에서 처음 그를 봤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는 마치 야생인처럼 얼굴에 수염이 덥수룩했다. 전술을 논의할 때, 그녀는 그의 수염을 몇 번이나 뚫어져라 쳐다봤는지 모른다.이런 생각에 웃음이 터져버린 그녀가 말했다. “남강에서 봤던 장군님과 지금의 장군님은 완전히 다른 사람 같네요.”“그때가 좋았지.” 사여묵이 대답했다.
산으로 올라갈수록 사여묵은 이상한 점을 느꼈다. 방시원이 말한 산 꽃은 보이지 않았고 눈에 들어오는 건 잎이 없는 나뭇가지와 새하얀 설경뿐이었다. 초겨울부터 가뭄이 들어 폭포도 메마른 상태였다. 설경이 예쁘지 않다는 게 아니라 너무 오래 버티고 있었더니 좀 지겹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폭포와 높은 산에 피는 겨울 꽃이 있었다면 느낌이 다를 수도 있겠지만 이 산에는 꽃이 단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만금산의 북쪽에는 눈이 덮인 데다 장애물이 없어 스키를 탈 수 있는 언덕이 있었기에 그는 전략을 바꿔 송석석을 데리고 북쪽으로 향했다. 그는 신이 나서 산꼭대기에 올라 숨을 돌리고 송석석에게 말했다. “여전히 예쁘지 않소? 석양을 기다렸다가 보고 스키를 타고 내려가면 정말 재미있을 것이오.” 송석석은 사여묵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방엔 새하얀 눈과 잎사귀가 없는 나뭇가지뿐이였지만 웅장함과 소슬함의 아름다움은 있었다. 너무 추운 게 문제인건 빼고는. 칼처럼 얼굴을 스치는 북풍은 귀가 얼어 떨어질 지경이었고 망토의 모자는 바람은 막지 못했다. 이때 송석석이 말했다. “그럽시다. 여기에 앉아서 석양을 구경하지요.” 그녀는 모처럼 신이 난 사여묵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지금이 아마 신시쯤 된 것 같으니 여기서 석양을 보려면 적어도 한 시간은 기다려야 하겠어. 게다가 날씨가 흐려 볼 수 있을지 확실 지도 않아.’ 송석석은 잠시 생각하다가 사여묵을 쳐다보더니 결심했다. ‘그래, 오늘의 운명은 사여묵에게 맡기겠어. 그래도 스키를 탄다는 건 그냥 하는 말이겠지?’ 사여묵은 가파른 산세를 보며 위에 덮인 눈을 밟아보더니 망토를 깔고 내려가도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예전에 남강에 있을 때도 그렇게 했었다.두 사람은 산꼭대기의 눈밭에 앉았는데 사여묵은 송석석을 품에 안고 서로 추위를 물리쳤다. 너무 춥고 바람이 세서 낭만 같은 건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고, 두 사람은 그저 온몸의 내공을 추위를 이겨내는 데 사용했다. 송석석은 머리를 사여묵의
송석석은 이 상황이 열받기도 하고 웃기기도 했다. 그녀는 절뚝거리는 사여묵을 부축하며 천천히 산 아래로 내려갔다. 사여묵의 머리는 눈보라로 인해 망가져 버렸다. 머리카락은 다 세로로 얼어붙어서 모양이 괴이하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얼굴엔 푸릇푸릇하게 멍이 들었는데 눈에 스쳐 빨갛게 피가 난 곳도 있었다. 다행인 건 크게 다치지 않아 피를 금방 멎을 수 있었다. 심지어 이마엔 거위 알같이 부어올라 송석석은 그 모습이 안쓰럽기도 하고 우습기도 했다. ‘무술, 싸움, 벼슬까지 모두 잘하지만 운동은 정말 못하는구나. 스키를 저렇게 타는 사람이 어디 있어?’ 세상엔 산을 속이더라도 물은 속이지 말라는 속담이 있다. 그건 물이 더 위험하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이지 산을 얕잡아보라는 뜻은 아니다. 특히 겨울에 눈이 덮인 산에서는 보이지 않은 것 때문에 더욱 위험했다. 이곳의 지형은 남강과 달랐다. 게다가 전쟁 때는 갑옷을 입었지만 지금은 입지 않았기에사여묵은 난처함이 극에 달했다. 그는 간단하게 스키를 타기만 했을 뿐인데 이런 망신을 당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모처럼 휴가라서 송석석과 둘 만의 시간을 보내며 나중에 늙어서 함께 추억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일을 만들려고 했는데……. 그래 이것도 잊을 수 없는 추억이긴 하겠지. 아마 석석은 영원히 오늘을 잊지 못할 것이야.’ “발이 많이 아프시지요?” 송석석은 갈수록 절뚝거리는 사여묵을 안타깝게 보며 물었다. 그러자 사여묵이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괜찮소. 사실 날 부축할 필요 없소. 당신이 이렇게 날 부축하니 내가 마치 장애인이 된 것처럼 보이는 것 같아서 말이오.”하지만 송석석은 손을 놓지 않고 애교 섞인 말투로 말했다.“난 그냥 당신에게 기대어 가고 싶을 뿐입니다.”예전 같았으면 사여묵은 분명 기뻐했을 테지만 지금의 그는 낭패하기 그지없었고 발이 아파 죽을 지경이었다. 뼈에 금이 가지 않는 이상 이렇게 아플 수 없다고 생각했다.다행히 송석석이 부축해 주어서 걷기 좀 편했다.그는 순간
장대성은 염 선생에게 마당을 쓸라는 벌을 받았고, 때 마침 약왕당의 남작도 도착했다.남작은 단신의의 여섯 번째 제자로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의술이 뛰어나 약왕당에서만 진료를 했다.하지만 오늘은 사여묵이 낙상했다는 소식을 듣고 특별히 진료를 하러 온 것이다. 그의 임무는 사여묵의 전신을 검사하고 급소를 다친 건 아닌지 확인하는 것이었다. 젊은 나이에 아이도 없는 상태이기에 단신의가 제일 걱정하는 부분이었다. 혜태비와 시만자는 거리에 나갔다가 사여묵이 다쳤다는 말을 듣고 급히 달려왔다.남작이 그의 상처를 치료하고 있었고 송석석은 옆에서 지키고 있었는데 태비가 황급히 달려오는 것을 보고 몸을 수그리고 인사를 했다.“어머님 오셨습니까?”그러자 혜 태비는 대답하며 눈길은 줄곧 자신의 아들을 찾았다. 방에 들어간 후에도 씻을 겨를이 없어 여전히 곤두선 머리카락과 새파랗게 멍든 얼굴, 그리고 이마에 혹이 나 있는 사여묵의 모습을 본 혜 태비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말했다.“하하, 어떻게 이 꼴이 된 건가? 산에 눈 구경 간다고 하지 않았느냐?”그러자 송석석이 대답했다.“어머님, 왕야님께서 부주의로 넘어지셨습니다.”그러자 헤 태비는 아들의 얼굴을 다시 쳐다보며 말했다.“거 참, 왜 그렇게 조심성이 없는 것이냐?”시만자는 염 선생이 왕야께서 다리를 다쳤다는 말을 듣고 들어가지 않고 문 밖에서 서 있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남자의 다리를 볼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이때 혜 태비가 물었다.“그런데 왜 부의를 부르지 않았느냐?”그러자 송석석이 대답했다.“부의는 오늘 외출했습니다.”“그러느냐? 앞으론 저택에 의사를 두 명쯤 두는 것도 나쁠 것 같지 않구나.”혜 태비는 사여묵의 부은 다리를 보고 젊은 의사가 그의 다리를 감아 고정시키는 것을 보고 물었다.“상처가 심각한 것이오?”그러자 남작이 대답했다.“왕야님의 다리뼈에 살짝 금이 갔지만 큰 문제는 없습니다. 약을 바르고 열흘 동안 고정하고 있으면 거의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나머지는 모두 피부
송석석은 급히 돌아와 혜 태비를 달래며 함께 밖으로 나갔고, 혜 태비는 여전히 투덜거렸다. “그렇지 않느냐? 결혼도 했는데 뭐가 부끄럽다고 그러느냐? 어릴 땐 어마마마에게 잘도 말하더니 다 컸다고 말 못 할 게 무엇이란 말이냐? 석석아, 넌 모를 것이다. 여묵이 어렸을 때 그곳에 모기에게 물려 바지를 벗고 나보고 약을 발라달라고…” “어머니!” 방안에서는 사여묵이 포효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송석석은 황급히 혜 태비를 만자에게 부탁하고 궁녀 옥 씨와 궁녀 영 씨에게 뜨거운 물을 준비해 오라고 분부해 직접 사여묵의 머리를 감겨주었다. 목욕탕에 몸을 담그지 못해 사여묵은 욕실에 앉아 머리를 숙여 머리를 씻어야 했다. 그리고 송석석이 머리를 감겨줄 때 발이 젖지 않게 조심해야 했다. 사여묵은 자신이 쓸모없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자신의 부인이 손으로 두피를 주무르는 것을 느끼며 어색함 속에서도 달콤한 행복을 느꼈다. 그는 이번 부상이 아니었다면 이런 좋은 대우를 받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예전에 다쳤을 땐 장대성이 도와줬었다. 머리를 감은 후 송석석이 닦아줄 때 그는 한참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 “어머니께서 헛소리하는 것이니 곧이곧대로 듣지 마시오.” “알았어요.” 송석석은 두툼한 수건을 들고 그의 머리카락을 닦으며 말했다. “어머님께서 뭐라고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아요.”그러자 사여묵이 말했다. “오늘 많이 실망한 거 아니오? 어젯밤에 얘기한 후 밤새 기대했을 텐데 오늘 아무것도 보지 못했으니…” 송석석은 오히려 웃으며 말했다. “그럴 리가요? 나는 매산에서 자라서 등산을 제일 좋아합니다. 게다가 설산의 절경이 너무 아름답고 웅장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당신과 함께라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이야기만 나누어도 너무 좋은 걸요.”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실망이 어디 있겠어?’ 사여묵이 등산을 가자고 했을 때 송석석은 오늘 기대할 수 있는 건 왕경루에서 식사하는 것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와 함께라면 무엇을 해도
혜 태비는 종종 선제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때론 선제가 자신에게 잘해줬다고 하고 때론 선제를 원망하는 말도 했었다. 하지만 매번 그에 대해 말할 마다 순수한 소녀 같았다. 혜 태비는 가장 근심 걱정 없이 살았던 후궁이었다. 그녀는 태비의 자리에 있으면서 어떠한 계락도 당한 적이 없었다. 설령 있다고 해도 그녀를 향한 것이 아니었으며 그녀를 향한 것이라고 해도 태후가 그녀의 앞에서 가로막아 주었다. 그녀는 귀하게 자라 자식을 낳았고, 지금은 며느리의 사랑까지 받으며 모든 일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가끔 고민거리를 찾아다녔다. 예를 들면 덕귀태비와 제귀태비를 찾아가 그들과 비교하며 소란을 피우는 것 말이다. 이기면 기뻐서 펄쩍펄쩍 뛰고 지면 입을 삐죽 내밀며 한참 화를 내다가 떠나곤 했다. 그녀는 사온과 가의에게 한바탕 당한 후에도 잠시 화를 내고 털어낼 뿐 그녀의 생활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그렇게 반평생이 지나갔다. 지금 그녀에게 가장 급한 건 손자를 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녀가 아이를좋아해 보고 싶어하는 것이 아니라 덕귀태비의 아들인 진왕이 아이를 낳았으니 질투가 나그런 것일 지도 모른다. 아이는 울거나 소리만 지를 뿐 그녀는 아직 아이의 장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송석석은 혜 태비에게 선제의 이야기를 잠깐 듣다가 방으로 돌아갔다.궁녀 옥씨는 달걀로 사여묵의 이마를 굴러주었는데 그래도 꽤 쓸모 있는 것 같았다. 적어도 혹이 전보다 작아져 지금은 시퍼런 멍만 남아있었다.보주가 생강떡을 가져오자 사여묵은 두 조각 먹었다. 그러자 송석석은 저녁 준비를 하라고 했다.저녁 식사를 마친 후 송석석은 사여묵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사여묵은 손을 뻗어 그런 송석석을 품속으로 끌어안더니 다정한 눈빛으로 말했다.“당신 벌써 며칠 밤동안 나를 상대하지 않고 침대에 눕기만 하면 잠을 잤소.”그러자 송석석이 말했다.“다리를 다쳐서 불편하지 않습니까?”뜨거운 손끝이 송석석의 뺨에 닿더니 사여묵이 그
궁으로 들어가 황제에게 자초지종을 보고하자, 최숙심의 딱한 사정을 운운하면서 그녀의 선한 마음씨 또한 찬양했다.그녀의 삶도 이토록 엉망진창인데 힘든 사람들에게 죽도 나눠주고 갈 곳 없는 여인들을 소주방에서 지내게 도와준 사실들을 일일이 읊으면서 감탄했다. 솔직히 숙청제에게는 지금 최숙심처럼 백성들을 교화할 수 있는 모범적인 사람이 필요했다. 때문에 바로 어명을 내려 그녀에게 순금 백 냥과 집 한 채까지 하사했다. 그리고 유방 당했던 왕씨 가문 남자들도 남강 전쟁만 끝나면 북명왕과 함께 진성으로 돌아오는 것에 허락했다.그렇게 최숙심은 죽을 고비를 넘어 인생 역전까지 이뤄냈다!한편, 왕표에게는 요참형이 내려졌고 역적과 손잡고 왕표를 선동한 고청우에게도 똑같은 형을 내렸다. 그러자 숙청제는 예전에 고씨 가문 여인들을 살려준 일이 후회되었다. 고청우를 진작 감옥에 가뒀다면 남강에 이렇게 큰 화란이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니 말이다.이후 숙청제는 척귀에게 걱정되니깐 암자에 가끔 가보라고 했는데, 이는 실은 감시하기 위해서였다. 송석석은 척귀를 보자마자 황제가 무슨 걱정을 하고 있는지 바로 알아차리고는, 사람을 보내 고씨 여인들에게 고청우의 형이 집행될 때 고청우와의 옛정 때문에 잘못된 행동을 저지르지 말라고 확실하게 당부했다.한편, 소주방에 있는 노부인은 자신의 아들인 왕표가 결국 체포되었고 요참형을 받는다는 소식에 큰 충격을 받은 채, 죄 없는 왕청여와 최숙심에게 손가락질을 하면서 갖은 욕설을 퍼부으며 화풀이를 했다. 노부인은 두 사람이 어떻게 가족이며, 서방인 왕표를 배신할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며, 점점 더 흥분하다가 결국 최숙심과 왕청여의 뺨을 강하게 내리쳤다.그리고는 지금 당장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왕표를 구해내라고 억지를 부렸다.최숙심은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노부인에게 노여움을 풀라고 빌었지만, 노부인은 오히려 점점 언성을 높였다. 그러자 최숙심도 더 이상 참지 못해 벌떡 일어나 주막에서 칼을 가져오더니 바닥에 툭 던졌다
왕표는 중범죄자이기에 바로 대리사로 이송되어야 하지만, 송석석은 그를 일단 경위부로 압송했다. 경위부에서 심문을 마친 후, 어전에 보고를 올리며 최숙심의 공을 황제에게 잘 얘기한다면,왕준과 현이 하루 빨리 진성으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더군다나 고청우도 아직 경위부에 갇혀 있기에 왕표와 고청우가 만난다면 더욱 많은 일들을 알아낼 수도 있었다.그렇게 고청우와 왕표는 같은 곳에 갇혔으며, 중간에 나무 울타리 하나를 세워 두 사람을 갈라놓았다.고청우와 왕표가 서로 눈이 마주치자, 표정이 순식간에 바뀌었으며 왕표가 먼저 이를 갈면서 마구 소리를 질렀다.“천박한 놈! 결국 네 놈 꼴도 이렇게 되었구나! 드디어 벌을 받은 게야!”그러자 고청우가 실눈을 살짝 뜨며,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비아냥거렸다.“내가 천박한 년이면 왕표 너는 뭔데? 나도 벌을 받았지만 너도 결국 이렇게 갇혀 있잖아! 넌 뭐 다를 것 같아?”“이게 다 네 놈 때문이야!”왕표가 울타리 사이로 손을 뻗어 고청우를 잡으려고 허우적거렸고 뒤로 살짝 물러난 고청우는 오아표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코웃음을 쳤다.“버러지 같은 놈!”“네 놈이 감히…! 지금 뭐라고 했느냐! 네 놈이 역적과 손잡고 날 꼬셔서 야반 도주하게 만들지 않았다면 난 지금 남강 원수의 신분으로 잘 살고 있었을 거야! 절대 이런 꼴을 당할 리 없었을 거라고!”왕표가 씩씩거리며 소리를 지르자 고청우가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널 꼬셨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 넌 결국 죽음이 두려워서 그런 선택을 한 거야. 넌 내가 무엇인가 노리고 접근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잖아. 그런데 내가 아이까지 낳으니 이제 날 곁에 묶어 둘 수 있겠다고 확신한 거지. 이 세상 모든 여자들이 네 본처처럼 아이들을 위해 목숨까지 바칠 수 있는 줄 알아? 가족애라는 건 이 세상에서 가장 우스운 거야. 그딴 걸로 날 묶어 둘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멍청한 놈! 내가 널 버리고 갈 때 분명하게 얘기했잖아. 넌 무능하고 무술 실력도 보잘것없는데
한편, 송석석은 시만자를 데리고 일반 손님으로 위장한 채 직접 보화사로 향했다. 보화사에 도착한 뒤 절을 올리고 초를 꽂고는 주지 스님을 찾아 신분을 밝힌 뒤, 여람 스님에 관해서 물었다.주지 스님은 바로 지객 스님을 불러왔다. 각지 스님들이 보화사에 찾아와 며칠 묵고 갈 때마다 지객 스님이 그자들을 모셨기 때문에 자세한 상황을 제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보화사는 진성 3대 절 중의 하나일 정도로 꽤 유명했기에, 매년 보화사에 찾아와 경을 들으면서 며칠동안 이곳에 묵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많아도, 실제로 이곳에 머물 수 있는 사람은 몇 없었다. 지객 스님은 여람 스님에 대해 인상이 꽤 깊었다. 수련의 경지가 그리 높지 않았기에 원칙대로라면 이곳에서 지낼 수 없는데 몇 년 전부터 남강에서 죽은 이의 영혼들을 제도했기에 그 자비로운 마음을 높이 평가하고 덕행도 많이 쌓았기에 지객 스님은 의례적으로 여람 스님을 받아준 것이다.“며칠동안 매일 여람 스님께서 밖에 돌아다니셨습니다. 진성 내에 전란이 일어나 사상자가 많았기에 여람 스님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죽은 이들의 영혼을 제도하느라 고생이 많았습니다.”지객 스님은 여람 스님을 매우 좋게 평가했다. 송석석은 그런 지객 스님의 말을 조용하게 듣고 있을 뿐, 반박하지는 않았다.그러고는 지객 스님에게 여람 스님을 만나보고 싶다고 얘기하며, 여람 스님을 존경하는 마음에 돈을 기부하며 여람 스님을 위해 따로 절 하나를 지어주고 싶다는 말도 함께 전해달라고 했다.한편, 지객 스님은 송석석과 시만자의 신분을 알지 못했지만, 두 사람이 수수한 옷차림과 달리 기품이 넘쳐 흘렀기에 모 훈작 세가의 부인이나 아가씨일 것이라고 추측해,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인 후 바로 왕표에게 말을 전했다.왕표는 자신을 찾아온 자가 있다는 말에 흠칫 놀랐다가 절을 만들어주며 돈까지 기부하겠다는 소식에 바로 표정이 환하게 바뀌었다.평서백이었던 왕표는 가문의 번영을 위해 절에 돈을 기부하는 명문 가문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그렇게
이내 표정을 숨긴 최숙심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얼른 가십시오. 돈을 구하면 바로 서방님을 찾으러 가겠습니다. 아, 그리고 요즘 진성 순찰이 삼엄하니 여기저기 돌아다니지 마십시오.”왕표는 자신을 걱정하는 최숙심의 말을 듣자, 그녀가 밖에서 아무리 대단한 여인이라고 불려도 결국 자신에게 만큼은 마음이 약해질 수밖에 없다는 뿌듯함에 경계심이 완전히 풀렸다.“최대한 3일 안에 마련해주면 고맙겠소.”그러자 최숙심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그건 안 됩니다. 지금 상황이 어려운데, 어떻게 3일 안에 그 큰돈을 마련할 수 있겠습니까?”“우리 딸 지아가 지금 북명 황실에서 지내고 있지 않소? 그러니 난 부인이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믿소. 부인의 소식을 기다리겠소. 그리고 내가 부인을 찾아왔다는 말은 아무한테도 하지 마오. 어머니와 왕청여한테도 얘기해서는 안 되오!”말을 마친 왕표는 삿갓을 쓰고는 돌아서서 빠르게 떠났다.표정이 확 어두워진 최숙심은 그를 얼른 따라갔지만 골목 밖에도 순찰하는 경위대가 보이지 않았기에 섣불리 소리를 지를 수도 없었다.왕표는 궁지에 몰린 순간 백성들을 인질로 잡아 어떻게든 진성을 벗어나려고 할 것이고 만에 하나 왕표가 진성을 빠져나가게 되면 그를 찾아내는 건 더 어려워질 것이다.최숙심은 빠른 걸음으로 소주방에 돌아와 석소를 구석으로 불렀다.“석소 아가씨, 얼른 왕비에게 찾아가서 왕표 그자가 보화사에 여람 스님 신분으로 위장하여 숨어있다고 전하시오.”“네, 지금 바로 다녀오겠습니다.”그렇게 석소가 돌아서서 소주방을 떠나려던 그때, 최숙심이 그를 불러 세웠다.“잠깐만요! 왕비님께 너무 대놓고 보화사에 왕표를 잡으러 가지는 말라고 전해주세요. 저에게 거짓말을 한 것일 수도 있으니 일단 몇 사람만 데리고 가서 상황만 파악해보시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전하세요.”현재 수색이 삼엄해서 왕표는 더 이상 도망갈 곳도 없겠지만 그래도 최대한 조심해야 한다. 이는 최숙심이 공을 세울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이고 단번에 확
진성 전체에 대한 순찰을 강화하자 예상대로 왕표가 급하게 모습을 드러냈다.하지만 왕표가 찾아간 사람은 왕청여가 아니라 최숙심이었다.이날 최숙심은 딸에게 자신이 직접 만들어준 옷을 주러 북명 황실에 찾아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소주방 여인들을 위해 이런저런 필요한 물건들을 사기도 했다.눈앞에 갑자기 나타난 왕표를 봤을 때, 최숙심은 너무 놀라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왕표는 분명 왕청여에게 자신이 나타났다는 사실을 최숙심에게 알리지 말라고 했는데 왜 이렇게 직접 찾아온 건가?’“부인, 나일세.”커다란 삿갓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목소리는 왕표가 확실했다. 최숙심은 잠시 넋을 잃고 있다가, 순간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이를 꽉 깨문 채 가까스로 화를 억눌렀다. 몰래 주변을 쓱 살폈는데, 골목 안에는 두 사람 외에 아무도 없었다.최숙심은 왕표가 절대 자신을 찾아오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었는데, 그녀의 판단이 틀려 버린 것이었다. “지금 무슨 말씀하시는 겁니까…?”이를 악문 최숙심의 목소리는 조금 떨렸는데, 왕표는 그녀가 자신을 오랜만에 보게 되어 흥분한 거라고 착각했다.왕표는 이내 삿갓을 위로 슬쩍 올려 삐쩍 마른 얼굴을 드러냈다. 왕청여가 말한 것처럼 눈썹은 전부 잘라버렸는데, 그 모습은 더할 나위 없이 우스꽝스러 보였다.“부인, 정말 나일세!”왕표는 기대에 찬 눈빛을 하고 있다가 이내 주변을 경계하듯 쳐다보다가 아무도 없다는 것을 인하고 나서야 다시 입을 열었다. “가족들이 걱정돼서 이렇게 진성으로 다시 돌아온 거라네. 다들 무사한 걸 보니까 이제 한시름 놓이는군.”하지만 최숙심은 가식적인 왕표의 모습에 헛구역질이 날 정도였다.“진성 곳곳에 당신의 체포 공문서가 붙어있는데 어떻게 감히 진성으로 돌아온 것입니까?”“다들 무사한 걸 봤으니, 이제 이곳을 떠날 생각이오.”왕표는 말을 하며 한걸음 가까이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앞으로 평생 이렇게 여기저기 숨어 다녀야 할지도 모르오. 부인, 내가 예전에 부인에게 많은 잘못
최숙심은 왕청여에게 언제 어디에서 왕표를 어떻게 만났는지 자세하게 물으며, 왕표 곁에 아이가 없었는지도 확인했다.“어제 냄비를 사러 밖에 나갔는데 소주방으로 돌아오는 길에 오라버니가 갑자기 작은 골목에서 나타나서 깜짝 놀랐어요. 나쁜 사람인 줄 알고 겁을 먹고 있다가 오라버니가 제 이름을 부르고 나서야 오라버니를 알아보았거든요. 얼굴은 까맣고 눈썹도 다 잘랐는데 몸도 심하게 야위어서 자세하게 보지 않으면 오라버니라는 걸 절대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어요. 아이를 데리고 있지는 않았고 혼자였어요. 누군가에게 협박을 받아서 도주하게 되었는데 체포 공문이 떠서 여기저기 숨어 다닐 수밖에 없었다고 했어요. 이제 가진 돈도 다 썼고 아이까지 키워야 하는데 더 이상 방법이 없다고 하면서 저와 어머니에게 어떻게든 3천냥을 구해달라고 부탁했어요.”“돈을 구하면 그자에게 어떻게 주기로 했어?”최숙심이 다급하게 물었고 왕청여가 대답했다.“그건 아직 정하지 않았어요. 일단 저희에게 돈부터 구하라고 하곤, 나중에 오라버니가 날 찾아오겠다고 했어요.”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최숙심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그자가 눈썹이 없다고 했나?”“네, 오라버니는 눈썹이 짙어서 알아보기 쉽거든요. 그래서 다 잘라버린 것 같아요.”왕청여가 말한 것처럼 왕표가 눈썹을 자른다면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 적을 것이다. 이 사실을 얼른 북명 왕비에게 알려야 하지만 눈썹을 다시 그릴 수도 있기에 눈썹이 없는 사람만 유의해서 될 일도 아니다.“그럼 넌 이틀에 한 번씩 밖을 돌아다녀서 관찰해봐. 병부에 가서 왕이장을 만나기도 하고. 네 오라버니는 기회가 생길 때마다 너를 몰래 미행할 거야. 난 석소에게 지금 당장 북명 왕비를 찾아가 순찰에 더욱 힘써 달라고 부탁할게. 그래야 네 오라버니가 한 시라도 빨리 널 찾아올 거야.”“알겠어요.”고개를 끄덕이던 왕청여가 다시 물었다.“그럼 어머니께는 뭐라고 말해야 할까요?”“돈을 마련하고 있다고 해. 왕이장이 돈을 주기로 했고 지금 점포를 팔고 있는 중
한편, 최숙심은 뜨개질로 딸에게 옷을 만들어주고 있었다. 현재 북명 황실에서 지내고 있는 딸이 먹고 쓰는 것까지 황실에게 부탁할 수는 없었다.최숙심은 뜨개질을 하면서도 왕비가 했던 말들이 실제로 벌어질 가능성이 클 것 같다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했다. 왕표가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으면 무조건 진성으로 돌아올 테지만 진성에 돌아온 그가 자신을 찾아올지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왕표는 일단 노부인에게 찾아가 도움을 청할 것이고 노부인이 도울 능력이 없다고 생각되면 그때가 되어서야 자신을 찾아올 것이다. 하지만 아들을 걱정하고 아끼는 노부인은 어떻게든 그의 이 일을 해결해주려고 할 것이다. 비록 오늘 노부인과 왕청여를 미행했을 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앞으로도 이럴 것이라는 보장은 없었다.왕표가 진성으로 돌아온 이유가 돈을 구하기 위해서이니 돈만 구해지면 바로 진성을 떠날 것이다.노부인 현재 가지고 있는 돈이 없지만 진성에서 오랜 세월을 보냈기에 인맥은 넓다. 여기저기서 돈을 조금씩 빌린다면 그건 상대방들을 구렁이에 빠트리는 거나 다름없다.하지만 거동이 불편한 탓에 노부인은 직접 돈을 빌리러 나갈 수도 없고 창피해서라도 절대 직접 나가지 않을 것이다. 그럼 보낼 사람은 남희나 왕청여밖에 없다.최숙심이 속으로 이런저런 분석을 하고 있을 때, 왕청여가 방으로 걸어 들어왔고 최숙심은 고개를 들며 물었다.“무슨 일로 찾아온 것이냐?”왕청여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눈물부터 줄줄 흘렸다.“새언니, 제가 예전에 멍청한 짓을 많이 저질렀어요. 저 때문에 새언니가 얼마나 많은 피해를 받고 조카들까지 얼마나 힘들었는지 이제 알 것 같아요. 제가 다 잘못했어요. 예전에 했던 행동들이 너무 후회돼요.”최숙심은 왕청여가 감옥에서 간신히 살아나온 뒤로 많이 바뀌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먼저 찾아와서 사과까지 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다 지난 일이야. 이제 미래를 보면서 살아야지. 앞으로 다 잘 될 거야.”최숙심이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위로했다. “
왕청여는 결국 왕이장을 찾아가지 않았다. 예전이라면 뻔뻔하게 왕이장도 평서백부 핏줄이니 가족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반드시 도와야 하는 게 맞다고 얘기하겠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었다.왕청여는 이런저런 일들을 겪으면서 깨달은 게 많았다. 평서백부가 무한한 영광과 명예를 누릴 때 왕이장은 덕을 조금도 보지 못했다면 왕씨 가문이 패가망신한 지금, 왕이장에게 도와달라고 부탁할 자격도 없는 것이다.왕청여는 그보다 이 사실을 새언니에게 알려야 하는지 고민이 깊었다. 오라버니가 죽게 내버려둘 수는 없었기에 왕청여는 나무 그늘 밑에 앉아 한참동안 멍 때리고 있었다.이때, 석소 사저가 마침 이곳을 지나가다가 왕청여를 보자 그녀와 마주치기 싫어서 바로 방향을 틀었고 조금 전의 말실수가 떠오른 왕청여가 다급하게 석소 사저를 불러 세웠다.“석소 사저, 조금 전에는 제가 죄송했습니다. 하지만 절대 나쁜 뜻으로 얘기한 건 아니었습니다.”“예.”그러자 석소 사저는 대충 대답을 하고 바로 자리를 뜨려고 했다.왕청여는 자유롭게 사는 무림의 여인은 솔직하고 직설적으로 말을 해줄 것 같아서 돌아서는 석소 사저에게 말을 걸었다.“석소 사저, 혹시 사저와 얘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걸음을 멈춘 석소 사저가 잠시 망설이다가 돌아서서 왕청여에게 다가갔고 두 사람은 그렇게 나무 그늘 밑에 나란히 앉았다.“무슨 얘기하고 싶은데요?”왕청여는 무슨 말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라서 우물쭈물하다가 석소 사저 손에 들고 있던 재봉실을 보며 물었다.“재봉실을 사신 거예요?”“아니요. 이씨 부인께서 보내왔어요.”석소 사저의 대답에 왕청여가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이씨 부인은 사람이 참 선하네요. 소주방에 신경도 많이 써주고.”“다들 선한 사람들이죠.”“맞아요.”석소 사저는 대충 대답을 하고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그러자 왕청여가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특별한 건 아니고 그냥 함께 사는 얘기나 하려고 그런 겁니다. 아
왕청여는 석소 사저가 자신의 뜻을 오해했다는 것을 알았지만, 마음이 심란해서 사과할 겨를이 없었다. 문을 굳게 닫은 왕청여는 어머니에게 약을 건네며 말했다.“어머니, 일단 약부터 드세요. 나머지는 다시 천천히 생각하시고요.”그러자 노부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청여야, 네가 솔직히 얘기해 보거라. 네 오라버니가 평소에 너에게 얼마나 잘해주었느냐?”“어머니, 하지만 저희는 이제 오라버니를 도울 능력이 없어요. 우린 지금 소주방에서 빌붙어서 살고 있고 어머니께서 드시는 약도 시만자 아가씨가 돈을 줘서 살 수 있었던 거예요.”왕청여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하자 노부인이 반박했다.“네가 틀렸어. 그 돈들은 왕이장이 준 거야. 비록 왕이장이 우리를 가족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우리를 살리기 위해 여기저기 바쁘게 움직였었다고.”“그자의 돈이라고 해도 우리는 오라버니를 위해 그자에게 돈을 달라고 할 수는 없어요.”입술을 꽉 깨물고 있던 노부인이 솔직하게 얘기했다.“그 돈들은 왕이장 돈이 아니야. 그때 당시 왕이장이 돌아왔을 때 네 새언니가 왕이장에게 보상을 줘야 한다고 제안했어. 그래서 점포 여러 개를 왕이장에게 준 거야.”“그자에게 줬으면 그자의 것이잖아요. 그리고 왕이장 그자도 암암리에서 저희를 많이 챙기고 도왔는데 이제 와서 도로 내놓으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어머니, 이건 왕이장에게 불공평해요.”왕청여의 말에 노부인의 표정이 확 굳어졌다.“어차피 우리는 왕이장에게 미안한 짓을 이미 많이 저질렀어. 지금도 왕이장은 우리를 원망하고 있을 텐데 더 원망하게 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어. 네 오라버니가 잘못을 저지른 건 맞아. 잠시 정신이 나가서 그랬을 거야.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도망칠 곳도 없는데 네 오라버니가 이대로 죽는 걸 두고 볼 수는 없잖아.”고개를 푹 숙인 왕청여는 약 그릇을 내려놓으며 대꾸했다.“어머니, 차라리 새언니에게 말하는 건 어떨까요? 새언니는 좋은 방법이 있을 수도 있잖아요.”“그건 절대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