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인이 되어서 감히 남편의 얼굴을 때리다니! 장군부의 문벌을 생각지 않더라도, 평범한 백성들조차 직접 서로의 얼굴은 때리지 않는다.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몸을 몇 번 두드릴 뿐이었다. 어차피 여인의 주먹은 그리 큰 힘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게다가 얼굴을 때린다는 것은 남자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일이기도 했다.밖에는 하인들도 있었으니, 전북망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된 것이다. 이제 승진까지 하여 어전 시위 대장이 되었는데 따귀를 맞는 바람에 조금 남아있던 기쁨마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왕청여는 이를 악문 채 계속해서 눈물을 흘렸다. 그녀도 자신이 조금 지나쳤다는 것을 알았으나, 차마 사과할 면목은 없었다. 전북망은 울분을 삼키며 말했다. "됐소, 그만 나가시오..!" 더 이상 다투고 싶지 않았던 전북망은 그저 분노를 삼킬 수밖에 없었다. 부부간의 불화는 그에게 너무 큰 고통이었고, 너무도 지치게 만들었다. 따귀를 때린 것 때문에 조금은 죄책감을 느낀 왕청여는 그가 냉정하게 내뱉는 한마디에 또다시 마음이 아팠다.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배가 불렀으면서 당신을 돌보며 하루빨리 회복하고 임명식에 참가할 수 있도록 했건만 당신의 태도는 저를 한없이 실망시키고 있군요." 전북망은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더 이상 다투고 싶지 않았기에 대꾸하지 않았다.차가운 그의 태도에 왕청여는 가슴이 찢어질 듯이 아팠다. 그녀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눈물을 닦으며 한마디 던지고 돌아섰다."그리도 저를 보고 싶지 않으시다니 친정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전북망은 그녀의 친정의 시선을 의식하고 있다는 것을 왕청여는 알고 있었다. 임신한 몸으로 친정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그는 분명 조급해질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홍이의 부축을 받으며 한참을 걸었지만, 전북망은 그녀를 불러들이라는 명령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분노와 슬픔에 휩싸였다. 전북망은 정말로 그녀를 조금도 마음에 두지 않는 것이었다. 왕청여는 홧김에 홍이와 함께 친정으로 돌아갔다.갑작스러운
평서백부인이 아직 그 정도로 사리 분별을 못하는 사람은 아니었다.그녀도 자신의 딸이 어떤 품행을 지닌 자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임신한 몸으로 눈물을 흘리며 돌아온 딸을 보니, 마음이 약해졌을 뿐이다.게다가 최근에 별다른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고, 예전 일들은 이미 지나갔으니, 어머니로서 줄기차게 그 일만 붙잡고 늘어지고 싶지 않았다.하여 전북망이 왕청여를 소홀히 대하고, 임신한 몸으로 친정에 돌아오겠다고 해도 무관심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며느리들을 불러 이 부부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의논하려 했었다.최 씨가 도착했을 때 이미 이방의 남희도 노부인의 방에 앉아 있었다. "형님이 오셨군요!" 자리에서 일어선 남희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오지 않았다면 그녀는 도망갈 궁리를 해야 할 판이었기 때문이다. 최 씨는 남희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노부인께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어머님께 인사드립니다." "그래, 잘 왔다." 정좌에 앉아있는 노부인은 매우 엄숙한 표정을 하고 있었고 그녀의 곁에는 눈물이 마르지 않은 왕청여가 앉아 있었다. 왕청여는 임신한 몸이라 흐느끼며 "형님"이라고만 할 뿐 예는 갖추지 않았다.최 씨는 자리에 앉으며 아무것도 모르는 척 물었다. "왜 울고 있는 것이냐? 누가 널 괴롭히라고 하였는가?" 왕청여는 본래 친정에 와서 도움을 청하려는 의도는 없었다. 그저 전북망을 겁주려던 것인데 그것이 통하지 않자 뽑은 칼을 도로 집어넣을 순 없어 돌아온 것이다.그런데 어머니를 보자 억울함이 밀려왔다. 하지만 또 작은 일로 친정을 찾은 딸은 되고 싶지 않았기에 전북망이 자신을 일부러 냉대한다며 장군부의 다른 사람들 역시 녀를 가볍게 여긴다고 늘어놓았다.그 말에 어머니는 바로 큰며느리와 작은며느리를 불러들였던 것이다. 엄격하기로 소문난 큰 형님 앞에서 오늘 일을 곧이곧대로 말한다면 자신의 잘못이 분명했다. 하여 최 씨의 질문에는 어머니께 말한 대로 답하지 않았다."조금 다퉈서 며칠 친정에서
자초지종을 알게 된 노부인은 너무 화가 나 심장이 멎을 것만 같았다. 그녀는 너무 분노한 나머지 손가락으로 왕청여를 가리키며 꾸짖기 시작했다."정말로 말도 안 된다! 전서방이 승진했는데 어찌 그것이 좋은 일이 아니란 말이냐? 너는 어째서 자꾸 불길한 말을 하고, 왕비를 끊임없이 거론하느냐? 그쪽에서 네가 그리 언급하는 것을 반기겠느냐? 그리고 내가 언제 남편의 얼굴을 때려도 된다고 가르쳤느냐? 그러고선 염치도 없이 감히 친정으로 돌아와 질질 짜고 있는 것이냐! 나는 지나간 일로 또 다투었다고 걱정하고 있었는데 결국 네가 혼자 난리를 친 것이구나! 전서방이 심하게 다쳤는데, 너는 아내로서 그를 잘 돌보지는 못할망정 몇 마디 말 때문에 그의 따귀를 때리다니, 너는 정말 그 고약한 버릇을 고치지 못하는구나! 내가 너 때문에 제명을 다하지 못하겠다!"왕청여는 고개를 숙였지만, 여전히 억울했다. 하지만 감히 소리내어 반박하지는 못해 그저 흐느낄 뿐이었다. "저도 그 사람과 다투고 싶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제가 이리 고생하여 아이를 가졌는데도 그는 여전히 송... 아니, 전 부인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대체 어느 누가 참을 수 있겠습니까?" 최 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런 주제에는 다시는 개입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행히 시어머니도 합리적이신 분이라 앞으로 왕청여의 일은 어머님께 맡기고, 자신은 그저 옆에서 조용히 앉아 있기로 했다. 노부인은 왕청여가 아직도 그런 소리를 하자,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크게 소리쳤다. "그럼, 내가 묻겠다. 전서방이 네 앞에서 늘 그녀 이야기를 꺼내느냐?" 그러자 왕청여는 화가 치밀어 오른듯 즉시 눈을 부릅떴다."그가 감히 그럴 수 있겠습니까?" "그럼, 집안 식구들 앞에서 이야기했던 것이냐? 혹 밖에서 떠벌이고 다니느냐?" "장군부에서는 이방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런 말을 꺼내지 않습니다. 밖에서야 감히 말할 리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입 밖으로 굳이 드러내지 않는다고 해도 마음속으로는 생각하고
송석석은 왕청여가 친정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저 최 씨에게 전할 일이 있어 찾아온 것이었고 밤에 방문한 이유는 낮에 사건을 처리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더불어 평서백부와 공주부는 친밀한 관계가 아니었기에 대낮에 경위대를 이끌고 오는 대신, 밤에 혼자 방문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판단했다. 대낮에 움직였다면 여느 가문들처럼 경위대를 동원해야 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차별 대우가 될 수 있었다.관복이 아닌 여성복을 입고 있는 송석석의 모습에 최 씨는 살짝 안심하며 말했다. "왕비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시아가씨도 그간 무탈하였습니까?" 시만자는 웃으며 답했다. "부인덕분에 무탈하였습니다." 시만자는 최 씨에게 특별한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비록 오늘 많이 피곤했지만, 송석석이 평서백부에 가야 한다는 말을 듣고 그녀도 동행했다.최 씨는 환하게 웃으며 손님을 맞았다. "어서 편히 앉으세요." 그녀는 하인들에게 차를 준비하도록 지시했다. 자리에 앉은 최 씨가 입을 열었다."용건이 있으시다면 사람을 보내 제가 찾아가면 될 것을, 어찌 이렇게 몸소 오신 것입니까?" 송석석은 고개를 저었다."그리 격식을 차리실 필요 없습니다. 오늘 제가 여기에 온 이유는 몇 가지 말씀드릴 것이 있어서 입니다." 송석석은 주변에 있는 하인들을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 "조용히 이야기 나눌 수 있겠습니까?" 최 씨가 금숙에게 눈짓을 보내자 금숙이 즉시 하인들에게 명했다. "모두 나가거라. 더 이상 시중들 필요 없다." 하인들이 자리를 뜨자 최 씨는 송석석을 보며 말했다. "무슨 일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자 송석석이 물었다. "부인은 만씨 가문의 만가다장인 만옥이란 여인에 대해 들어본 적 있으십니까?" 최 씨는 즉시 왕청여의 작은 도련님이 만두를 사던 그날 바므 만옥을 만났다는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때도 이상하게 여겼던 최 씨는 그 만옥이라는 여인이 수상하다고 생각했다. 순간 긴장한 최씨는 숨기지 않
최 씨는 의자 손잡이를 꼭 쥐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심경이 복잡해졌다. '남편을 아는 사람은 아내뿐이니깐...'최 씨의 남편은 남강으로 향하면서 두 명의 첩을 데려갔고, 그곳에서 또 두 명을 들였다. 비록 아직 명분은 없었지만, 이미 그들을 들인 이상 첩으로 삼는 것은 시간문제였다.최 씨는 집안을 엄하게 다스렸기에, 평서백부의 첩들은 항상 그녀를 공경해 아무런 문제도 일으키지 않았다. 하지만, 고청우가 남편에게 접근한다면, 취향에 맞추는 수고조차 필요 없어질 것이다. 그저 꽃다운 기녀의 미모만 드러내도, 남편은 충분히 마음을 빼앗길 것이다.시만자는 최 씨를 조용히 응시했다. 보아하니 그녀도 남편이 고청우의 미모를 쉽게 넘어갈 것임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시만자는 이 상황이 매우 안타까웠다.최 씨는 훌륭한 여성이지만, 그녀는 좋은 남자를 만나지 못했다. 왕표가 아무리 남강을 지키는 장수라고는 하지만 최 씨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최 씨는 온 마음을 다해 집안을 돌보며, 시어머니를 섬기고, 시누이의 문제를 해결하면서 평서백부를 위협하는 모든 일들을 막아내고 있지만, 그녀는 결코 행복하지 않았다.이내 평정심을 되찾은 최 씨는 송석석에게 감사를 표했다. "귀띔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곧 편지를 보내 주의시키겠습니다." 송석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고청우는 이미 이름을 바꾸었고, 사온도 그녀의 정체를 공개한 적이 없기에, 그녀가 평서백부에 어떤 목적으로 접근할지는 아직 불분명합니다." 최 씨는 송석석의 말뜻을 곧바로 이해했다. 고청우는 더 이상 기녀가 아니었고, 장공주도 이미 몰락했으니 이제 자유의 몸이었다. 그녀가 의지할 사람을 찾고자 한다면, 왕표는 그녀에게 훌륭한 보호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고작 그런 이유라면, 최 씨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고청우는 공주부의 서녀이고 이 사실을 대리사와 송 지휘사는 알고 있었다. 그러니 만약 왕표가 그녀와 얽히게 된다면, 사건은 복잡해질 것이다.그
그때 재빨리 앞으로 나선 금숙이 홍이와 함께 왕청여를 부축이며 말했다. "의원님이 말씀하시기를 아가씨께서는 너무 많이 걸어 다니지 말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어서 돌아가 쉬시지요. 부인께서 왕비님을 배웅하시면 되오니 아가씨는 몸부터 돌보는 것이 좋은 듯합니다." 금숙이 "왕비님"이라고 연신 부르자, 왕청여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순간적인 감정에 휩쓸려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을 깨달았다. 만약 형님이 그녀의 일을 이야기하려고 했다면, 어찌 송석석을 직접 초대했겠는가? 틀림없이 장공주의 반역 사건에 관련된 일일 것이다. 극도로 당황한 왕청여는 마음이 불안해졌다. 그녀는 엉성하게 몸을 숙여 송석석에게 인사한 후, 빠르게 자리를 떠났다. 서로 눈을 마주친 송석석과 시만자는 의아해했다. 또 왜 저러는 거지..?시만자는 최 씨가 그들을 배웅하는 틈을 타 조용히 물었다. "청여아가씨는 이 밤중에 왜 여기 있는 겁니까? 또 친정으로 돌아온 건가요? 남편과 다투었습니까?" 시만자는 호기심 때문이라기보다는 왕청여의 행동이 너무 이상했기 때문에 물어본 것이었다. 게다가 굳이 이 타이밍에 전북망과의 일을 거론하는 걸 보면 분명 송석석과도 관련이 있어 보였다. 집안의 수치스러운 일들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다지만 왕청여가 저지른 짓들은 이미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솔직히 말했다. "왕비님과 시 아가씨를 볼 면목이 없습니다. 아가씨는 남편과 말다툼을 하고 친정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그러다 태기가 불안해서 잠시 머물고 있는 중입니다." 시만자는 얼굴을 찡그렸다."전북망이 승진했고 부상으로 요양 중인데도 다투었단 말입니까? 혹시 또 송석석을 엮을 것입니까?" 그러자 최 씨는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저 제가 혼자 설친 것 뿐이니.. 왕비님과 시 아가씨께서는 부디 마음에 두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그러자 시만자는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체면을 위해 낮은 목소리로 욕설을 내뱉었다. “드디어.. 미쳤구나?”이미 이
며칠 동안 장공주부의 사람들도 어느 정도 심문하였으니 이제는 사온을 심문할 때가 되었다. 오늘, 송석석은 평양후부로 가서 가의 군주를 만날 예정이었고, 사여묵은 사온을 심문하여 두 쪽에서 동시에 움직일 계획이었다.사온은 지하 감옥에 갇힌 지 이제 여섯 날째였다. 처음에는 미친 척하며 피하려 했지만, 효과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후로는 더 이상 몸부림치지 않았고 자신의 운명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적어도 겉으로는 그렇게 보였다.심문실, 사여묵과 사온은 마주 앉았고, 사온은 한의절 밤에 입었던 흰옷 그대로였다. 며칠 동안 지하 감옥에 갇혀 있던 탓에 옷은 구겨졌고, 머리카락은 흐트러져 있었다. 얼굴에는 생기가 없었고, 눈 밑에는 검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심지어 몇 일 사이에 살이 급격히 빠져 수척해진 얼굴 때문에 실제 나이보다 다섯, 여섯 살은 더 들어 보였다. 중년의 여인이 갑자기 살이 빠지면, 더욱 비참해 보이기 마련이다. 특히, 본성이 모진 사온이었기에, 그 모습은 더욱 표독스러워 보였다.사여묵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오랫동안 첩들을 지하 감옥에 가두더니 이제 그곳에 살게 되었군요. 지낼 만합니까?" 갑자기 고개를 든 사온은 웃음을 지었다."공주부보다는 형편없구나." "전하께서 공주 직위를 박탈하라고 명하셨으니 오늘 경조부의 공양이 공주부를 조사하러 갈 것입니다." 그 말에 사온은 눈썹을 치켜세우더니 냉소적으로 말했다."직위를 박탈하면 어떻고 공주가 아니면 어떠냐? 나는 여전히 황실 출신이고 내 부친은 문엄 황제에, 내 모친은 의귀비다. 이는 누구도 바꿀 수 없는 사실이다." 그녀의 말속에는 냉소뿐만 아니라 원망도 섞여 있었다. 마치 문제의 딸로 태어난 것이 불행이라는 듯이 말이다.사여묵은 절차를 밟듯 차분하게 물었다. "그 무기들은 어디서 난 것입니까? 왜 반역을 꾸민 것입니까? 배후에 대체 누가 있는 것입니까?" 사온은 입가를 비틀며 말했다. "이미 반역죄로 확정된 마당에 더 물어볼 필요 있겠느냐
고개를 돌린 사온은 웃음을 멈추고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항상 네 부중의 염 선생이 나와 연락을 하지 않았더냐? 벌써 잊은 것이냐? 너는 직접 나서지 못한다며 약점을 잡힐 수 없다고 처음 나에게 반역을 제안한 후, 모든 일은 염 선생이 담당했지. 그자를 데려다가 엄하게 심문하면, 모든 것이 명백해지지 않겠느냐? 아, 그리고 네가 전장에서 돌아온 뒤에는, 그자뿐만 아니라 송석석도 나와 연락을 했었지. 그 무기들은 모두 그녀가 무림 사람들에게 시켜 보낸 것이 아니더냐? 그녀를 데려다가 고문하거라. 그러면 진실을 자백할 것이다." 사온은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그들을 고문하지 않는다면, 나에게도 형을 내릴 수 없겠지. 그건 명백한 차별 대우가 될 테니까. 또 하나 더, 내가 너를 배후로 지목했으니, 너는 이 사건을 담당할 수 없다. 다른 사람을 보내거라." 하지만 사여묵은 동요하지 않았다. "그건 당신이 걱정할 일이 아닙니다. 전하께서 당신 진술을 보시고 필요하다고 판단하시면 다른 사람이 나설 것입니다. 그러면 다음번에 저를 보지 않을 수 있겠지요." 웃고 있는 사온은 눈빛에 악의로 가득 찼다. "정말 다시는 널 보고 싶지 않구나. 이처럼 역겨울 수도 없느니라. 전장에서 공을 세운 친왕이 이미 시집갔던 여인을 아내로 맞다니. 우리 황실의 체면을 네가 다 망쳐버렸구나." 사여묵은 이전 기억을 상기시키듯 말했다. "당신은 더 이상 황실의 사람이 아니니, 그 체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자 사온이 비웃었다. "넌 정말로 부끄러움을 모르는구나. 내가 이리 욕을 해도 화를 내지 않다니. 너의 그 뻔뻔한 모습이 사람을 화나게 하는구나. 네게 약점을 잡히지 않았더라면, 이용당하지도 않았을 텐데 말이다. 쓸모없는 자식, 자신의 저택에는 감히 무기를 두지 못하고 전부 공주부에 숨겨 두었지. 그 무기들 중 많은 것은 네가 남강 전장에서 몰래 운반해 온 것들이지 않느냐? 갑옷도 있었지 아마?" 보좌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는
그러자 송석석이 이내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왕씨 가문에서는 그녀를 아주 잘 대해줍니다. 조카딸의 혼담에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시집간 부군이 잘 대해준다 하더군요. 다만 그녀는 자신이 두 번 시집갔음에도 처가에 머무는 것이 조카들에게 미칠 영향이 걱정되어 그러는 모양입니다.”그 말에 전북망이 고개를 끄덕였는데, 순간 번개처럼 날렵하지만 마음씨 따뜻한 최씨 부인이 떠올랐다. 최씨 부인에게는 적자와 서자녀들이 있었고, 아직 혼담이 정해지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그런 그녀가 혼인 문제로 얼마나 많은 유언비어에 시달렸을지 생각하니, 전북망은 진심으로 안타까웠다. 형수로서의 최씨 부인을 존중하며, 그녀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할 바 없었다. 이때 송석석이 그의 생각을 끊었다. “그럼 천천히 생각해 보십시오.”전북망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문득 물었다. “우리 단둘이 여기에 있으면, 섭정왕이 질투하지 않을까요?” 송석석은 예상치 못한 질문에 잠시 당황했으나, 곧 침착하게 답했다. “이 정도 신뢰도 없다면, 제가 어찌 현갑군 지휘사로 오래 근무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서로 숨김없이 모든 걸 공유합니다. 이번 만남 역시 그분께 이미 알려두었죠.”송석석이 떠나자 전북망도 따라나섰다. 그는 섭정왕이 어딘가에서 이들을 지켜보고 있으리라 의심했지만, 정작 별청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앞마당에서야 섭정왕을 발견했는데, 그는 대장군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송석석을 보자 미소로 맞이하며 불러세우는 섭정왕의 모습에 전북망은 마음이 착잡해졌다. ‘진정한 부부란 저런 것일까.'그러나 성릉관이든 진성이든, 남녀의 단독 만남은 명예에 흠이 될 수 있음도 잘 알았다. 특히 높은 지위에 오른 이들은 더욱 조심해야 했다. ‘내가 무슨 권리로 그들을 걱정하는가.’자조적인 생각이 들었지만, 왕청여의 제안은 여전히 그의 가슴을 두드렸다. 5일의 고민 시간이 주어졌다. 사여묵과 송석석이 진성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최씨 부인의 이야기를 떠올리면 답은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 전북망은 송석석과 다시 만났다. 사실 그전에도 송석석이 성릉관으로 갔을 때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들은 서로 서먹해서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이 매번 성릉관을 떠날 때마다 몰래 배웅하곤 했다. 전북망은 자신이 당시 어떤 마음으로 그런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늘 송석석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이방과 왕청여에게도 미안하긴 하지만, 그들과는 서로 감정을 소모하고 다투면서 서로에게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장군부만 송석석에게 상처를 줬을 뿐, 송석석은 장군부에게 조금의 상처도 주지 않았다. 비록 이혼한 후에는 전북망 어머니의 병세에 대해 상관하지 않았지만 큰형수에게 어떻게 단설환을 얻을 수 있는지 알려주기까지 했다.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는 이미 섭정 왕비가 되어있고 나서였다. 변방의 전사들에겐 양식과 무기가 풍부하고, 봉록까지 올라, 그들에겐 이득이기에 이제는 조정의 정세에 관심을 두지 않아도 되었다. 섭정왕은 한때 장수였기에 병사들이 배불리 먹어야만 국토를 지킬 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전북망과 송석석이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섭정왕과 함께 소 대장군에게 생신을 축하해주고 있었다. 그녀를 보는 소 대장군의 눈빛은 여전히 자애롭고 인자했다. 전북망은 사람들을 사이에 두고 멀리서 그 광경을 보며, 그때 그렇게 어리석지 않았다면 지금 송석석과 함께 노장군의 생신을 축하하는 사람이 바로 자신일 것이라는 후회를 했다.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같은 생각인 걸 보니, 자신만 제자리에서 멈춰 있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래서 그는 이번에도 송석석과 대화를 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생일잔치가 끝난 후에 송석석이 뜻밖에도 먼저 그를 찾았다. 그와 송석석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섭정왕은 이상한 소문이 날까 봐 걱정되지도 않는가?’전북망은 당황하고 불안해 보였고, 송석석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먼저 입을 열지도 못하고 송석석이 말하기만을 기다리
전북망은 성릉관에서 몇 년 동안 두 번이나 발탁되었고, 지금은 장군의 신분으로 수천 명의 병사를 관리하고 있다. 계속 성릉관에 주둔하고 있어 다시 진성으로 돌아간 적이 없었고, 진성의 부름 없이는 제멋대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는 재혼도 하지 않고 여전히 혼자 살아갔다. 성릉관의 모래바람은 해마다 그의 얼굴에 흔적을 남겨 또래들보다 몇 살이나 더 늙어 보였다. 심지어는 몇 년 동안 불면증에 시달렸기에, 진정제를 먹어야만 잘 수 있었다. 그는 가끔 이런 생각을 했다. ‘만약 내가 그때 이방과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어떻게 지내고 있었을까? 송석석과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부부가 되었을까? 아마도 우린 귀여운 자녀도 낳았겠지. 그리고 나는 군대에서 열심히 일하고 석석은 가문의 내무를 책임지며 부모님을 모시고 아이를 돌보고 있었겠지? 설령 내가 승진을 하지 못하고 평생 장군으로만 살아도 그는 날 떠나지 않았겠지.’ 이전의 전북망은 송석석이 하늘을 나는 독수리였는데 자신을 위해 날개를 부러뜨리고 병든 시어머니를 돌보며 군부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책임지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리고 그가 알아차렸을 땐 이미 돌이킬 수도 없었다. 전북망에게는 이미 이방이 있었고 이방을 사랑한다고 했으니, 송석석이 이혼하자고 했을 때 그는 심한 말을 하고 후회하지 말라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송석석 또한 후회할 게 없었다. 이혼을 하면서 전북망을 위해 부러뜨렸던 날개가 다시 자라나 전쟁터로 날아가 쉽게 공을 세웠으니까 말이다. 이방은 송석석이 큰 가문의 아가씨인 데다가 부친과 오라버니가 그를 위해 길을 닦아주었기에 이런 성과를 이룰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의 성공은 그의 능력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문이 도움이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주된 원인은 아닐 것이다. 만종문에서 송석석의 무공은 거의 최고였는데, 그건 송석석이 그만큼 노력을 했고, 그만큼 땀을 흘렸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전북망은 송석석을 존경했지만 그는 자신이 송석석을
어머니께 간청해도 소용이 없자 신이는 아버지를 찾아갔다. 하지만 돌아온 건 더 심한 꾸지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신이가 이 혼사를 반대하는 것은 양지춘과 접촉한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양지춘에게 그녀를 데리고 나가서 놀며 감정을 쌓으라고 했다. 신이는 가기 싫었지만 어머니가 억지로 그녀를 마차에 태웠고, 심지어는 하녀에게 그녀가 부적절한 말을 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엄명했다. 양지춘의 얼굴은 그나마 멀쩡하게 생겼는데, 처음에는 신이를 조금이나마 존중하는 척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본성을 드러냈다. 그는 신이의 외모와 품평을 논하며 신이가 외모가 예쁘지 않았더라면 절대로 그를 부인으로 들이지 않겠다고까지 했다. 그의 오만한 태도는 신이를 매우 불편하게 했다. 단지 이것뿐이었다면 아마도 신이가 결혼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양지춘은 일부러 신이를 마차에 태워주는 척하며 그녀의 엉덩이를 꼬집었다!그 순간 신이는 온몸의 피가 머리 위로 솟구친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의 경박한 눈빛에 신이는 이내 눈물이 쏟아졌고, 모욕감에 온몸을 떨었지만, 감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힘들게 집에 돌왔는데, 하녀와 마부는 그의 동작을 보지 못한 탓에, 오히려 그가 세심하고 자상하다며 그녀의 어머니 앞에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신이는 억울해서 어머니에게 그 일을 말했지만 어머니는 오히려 그녀가 일부러 꾸민 말이라고 생각해, 그녀를 꾸짖으며 사흘 동안이나 외출을 금지했다. 신이는 그렇게 방에 갇혔고, 매일매일을 눈물로 얼굴을 씻었다. 심지어 그날 선비의 말을 듣고 호수에 뛰어들지 않은 것을 후회하기까지 했다. ‘내가 양지춘에게 시집가는 것이 물에 빠져 죽는 것과 대체 무엇이 다른가?’ 사흘 후, 외출 금지가 해제되자마자 신이는 다시 경산사로 가서 같은 핑계로 하녀를 내보냈다. 이번엔 정말 죽을 각오로 호숫가에 간 것이었는데, 뜻밖에도 그곳에서 다시 그 선비를 만났다.그는 쓸쓸하게 호숫가에 앉아 작은
신이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한 사람이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고, 나무 그늘에 몸이 가려져 있었다. 그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은 초라해 보였고 눈 밑에는 검푸른 빛을 띠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 사람은 바로 다리 앞에서 그림을 팔던 선비이자, 학정이 말하던 퇴학 해서 기녀를 키우는 학생이었다!“헛소리하지 마십시오.” 신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짜증을 냈지만, 그가 한 말을 떠올리자 내심 두려웠다. “나는 여기에 물귀신이 있다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거짓말하는 것이겠지요.” 신이는 죽음은 두렵지 않았지만, 귀신은 두려웠고 진흙탕에 영원히 깔려 있는 건 더욱 두려웠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가 걸어 나오자 얼굴은 더욱 여위어 보였다. “호숫가의 주변을 보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왜 이런 아름다운 경치를 보러 오는 사람이 없겠습니까?” “그건 사람들이 이곳으로 예불하기 위해 오는 것이지, 경치를 보러 오는 것은 아니니까요. 절을 하고 바로 돌아가니 당연히 보지 못하겠지요.” 신이는 그렇게 말했지만, 순간 깊이가 보이지 않는 호수에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느껴져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그는 여전히 굳게 서서 말했다. “예불하는 사람은 천지와 자연을 경외하기 때문에 이런 좋은 경치가 있다면 반드시 한 번 보러 올 것입니다. 이런 곳은 인재를 배출할 수 있는 좋은 곳일 텐데 아무도 없다는 게 아기씨는 이상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것이 사실인지는 몰랐지만, 그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감히 그런 무서운 곳에서는 죽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몸을 돌려 떠나려 했다.그러자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한 번뿐인 인생이니 절대 쉽게 자신의 생명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살고 싶어도 살 지 못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의 말이 이상하게 느껴져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는데, 그의 눈 밑은 이내 붉어졌고 눈물이 고여 반짝이는 것 같
신이의 사촌 여동생과 하녀는 신이를 찾으러 돌아왔다. 신이가 하녀보고 이순에게 삼백문을 주라고 하자 이순은 웃으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원래는 우연한 만남일 뿐이라 다시는 접점이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 조모님의 생신 때 가문 연회에서 공학정이 데리고 온 제자들 중에 이순이 있었다. 강남의 예의 규율은 진성처럼 엄격하지 않아서 연회에 참석할 때 여인들도 앞마당에 갈 수 있었다. 이순은 신이를 단번에 알아보지 못했다. 신이는 그때 면사포를 쓰고 있었고 두 눈만 드러냈기 때문에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이상할 건 없었다. 이순은 식사를 하지 않고, 신이의 조모에게 생신 축하 그림만 드린 후에 집에 일이 있다며 작별을 고했다. 그가 떠나자마자 학정이 그를 언급하며 안타까운 말투로 말했다. “총명하긴 한데 진취심이 없어서 계속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걸 여기로 데려와 진취성이 있는 사람들을 많이 사귀게 하려고 했는데… 이 정도로 사리분별을 할 줄 모르다니. 정말 실망이군. 학교를 그만두겠다면, 이젠 마음대로 하라고 해야겠어.” 그러자 신이의 부친이 위로했다. “화내실 필요 없습니다. 선생님껜 학생이 많으니 그가 나간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될 건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학정은 마치 울화가 쌓인 것처럼 말했다. “그는 내가 가장 아끼는 제자였다네. 그런데 진취성만 없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동창에게 돈을 빌리질 않나, 게다가 집에 기녀까지 키우고 있다더군.” 신이의 아버지는 그런 사람을 가장 싫어하였다. “그런 사람은 얘기할 가치도 없습니다.” 신이는 그가 어떤 사람이라는 걸 알고 나서 왠지 마음속으로 실망감이 가득했다. 아마도 그날은 그가 그린 그림을 보고,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 같다고 생각해 마음이 갔던 것 같았다. 그렇게 몇 달 후, 신이의 혼사도 낙착되었다. 그녀의 약혼자는 회주 지부의 둘째 아들인 양지춘이고, 올해 22살이었다. 22살인데도 결혼하지 않았던 건 첩을 통해 서자를 낳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좋은 가문은 그
그의 이름은 신이었는데 그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그에 대해서 말할 때, 경멸하는 기색을 띠었고,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 모르는 사람까지 모두 침을 뱉으며 뻔뻔하다고 할 정도였다. 알다시피 애인과 야반도주하는 것은 사람을 죽이고 불을 지르는 것보다 더 욕먹을 일이니 말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에게 후회하냐고 묻기도 했다. 그녀는 시집간 것을 후회하지 않지만 죄책감을 느끼긴 했다. 왜냐하면 그로 인해 시 씨 가문의 명성이 손상되어 형제자매들과 조카들이 혼사에 어려움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신이는 시 씨 가문의 아가씨로서, 태어날 때부터 온갖 보살핌을 받아왔다. 먹는 것은 물론 모두 산해진미이고, 입는 것도 모두 능라 비단이었다. 게다가 보모님과 오라버니의 총애까지 한 몸에 받았다. 하지만 그녀에겐 한 가지 결함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열네 살 때까지 월사가 오지 않은 것이었다. 많은 의사들을 불러 진찰을 받고 밤낮으로 약을 먹었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어머니는 그녀에게 몸이 차서 그러니 몸조리를 하면 나을 수 있다고 위로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몰래 의사가 부모님께 하는 말을 들었다. 의사는 그가 몸이 차서 그런 병이 생긴 것이 아닌, 아이를 키우는 곳이 어린아이와도 같아서 평생 아이를 가질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의 몸이 마치 작은 꽃병과 같아서 꽃을 꽂을 수는 있지만 나무를 심고 꽃을 피워 열매를 맺는 건 불가능하다고 비유했다. 그녀는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건 여자에게 어떤 의미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녀를 속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나중에 좋은 사람에게 시집가서 부군에게 첩을 들인 후, 첩이 낳은 아이를 친자식처럼 키우라고 조언해주었다.시 씨 가문이라는 후원이 있으면 그녀가 아이를 낳을 수 없어도 아무도 그녀의 지위를 흔들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 씨 가문의 재물은 그녀가 평생 부귀하게 살기에 충분했다. 신이의 조모도 그녀에게 아이를 낳을 수 없으니 자세를 낮춰야 한다고 했다. 시 씨 가문의 딸이라고
추운 겨울이 되자 눈이 내려 성릉관은 하얗게 뒤덮였다. 세상이 마치 깨끗해진 것처럼 보였다. 이황자는 몇 년 동안 너덜너덜한 승복을 입고 발우를 받쳐 들고는, 가는 길에 동냥을 하다가 절을 보면 이틀 묵으며 부처님께 참회하면서 살았다. 사실 그는 원래 있던 절에서 계속 지낼 수 있었다. 편안하진 않지만 풍찬노숙할 필요도 없고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그런 안일한 곳에서는 평생 죄를 씻을 수 없다고 생각했고, 계속 길을 걷고 계속 고생해야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했다. 그가 성릉관에 도착했을 때 짚신은 이미 찢겨 있었고 발바닥에는 두꺼운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이제는 신발을 신지 않고도 자갈이 가득한 길을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추운 날씨에는 모든 옷을 껴입어도 추위를 막을 수 없었지만 이미 익숙해진 뒤였다. 그는 눈보라를 맞으며 성릉관에 위치한 감은사로 향했는데, 몇 년 동안 발걸음을 멈춘 적이 없는 탓에 고단함이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심지어는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아 그는 눈이 가득 쌓인 길에서 의식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깨어났을 때 그는 따뜻한 두꺼운 이불 속에 누워 있었다. 그가 있는 방에는 숯불이 피워져 있었고, 살짝 열린 창문으로 눈에 눌려 허리가 굽은 나뭇가지가 보였다. 그는 눈동자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렇게 편안하고 따뜻한 느낌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의 마음속에 순간 욕심이 생겨 조금만 더 누워있고 싶어졌다. 그런데 바로 그때, 문이 활짝 열렸다. 그가 벌떡 일어나 앉았는데, 갑자기 눈앞이 핑핑 돌더니 다시 힘없이 침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누워 있거라.” 이때 누군가가 부드러운 말투로 말하면서 약그릇을 그의 침대 옆에 놓았다. 그는 말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익숙해, 어지러움을 가라앉히고 고개를 돌려보니, 그 사람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서우 형?!’ 그는 자신이 잘못 보았을까 봐 다시 자세히 보려 했지만, 몸이 너무 어지러운
대황자는 봄 사냥 때 숙청제에게 꾸중을 듣고 돌아간 후 앓아누웠다. 당시 이황자와 서우가 모두가 걱정했는데 덕비는 오히려 기뻐했다. 그는 이번 일을 겪으면서 황제폐하께서는 분명히 대황자를 싫어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덕비는 이황자를 안고 반드시 부지런해야 하고, 태부와 황숙의 말을 잘 듣고 누구보다 잘 배워 황형을 제압해야 한다고 당부까지 했다. 그로 인해 이황자의 마음은 몹시 복잡했다. 덕비가 줄곧 그에게 태자와 황제가 되는 것이 얼마나 좋은 지 말해주었을 때 비록 그도 마음이 설렜지만 자신과 거리가 먼 얘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지금 그와 대황형, 서우 형, 그리고 셋째 동생이 사이가 좋아 도저히 대황형을 미워할 수가 없었다. 매일 모순적으로 지내다 보니 오히려 학업이 나빠졌고 승마 연습을 할 때도 여러 번 실수를 했다. 하지만 덕비는 이상하게 그를 탓하지 않았고 며칠 동안 계속 게으르게 하라고 했다. 그렇게 덕비는 이황자를 데리고 복마마를 자주 뵈러 갔고, 복마마 궁전에서 숙청제를 만날 수도 있었다. 덕비는 며칠 동안 그곳을 드나들더니 어느 날 굳은 표정으로 다시는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차가운 말투로 청이에게 자신의 보살핌이 없으면 아이가 태어날 수 있는지 보겠다고 했다. 황제폐하를 자주 뵈러 갈 수 없어 아쉬웠지만 이황자는 마음을 가다듬고 공부와 승마술에 전념했다. 이황자는 당시 앞날이 어떻게 될지도 몰랐고, 비록 매일 힘들긴했지만 한편으로는 즐거웠기에, 계속 이렇게 지내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숙청제의 천추세에 승마대회를 개최할 예정이니 세 황자와 서우도 가서 겨뤄 보기로 했다. 원래 그런 대회에서 황자들은 재미있게 참석만하면 되지만, 덕비는 그 경기를 몹시 중시했다. 덕비가 이황자에게 마름쇠를 건넬 때, 그는 하늘이 무너져내리는듯한 기분을 느꼈다. 이황자는 원하지 않았다. 그는 절대로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대황형의 목숨을 앗으려 하다니, 이황자는 처음으로 어마마마가 무서워졌다.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