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미가 나가자, 시만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참 거슬리단 말이지."그러자 송석석이 가볍게 웃었다. "그렇지만 쓸모는 있어. 궁궐에서 나왔으니 어련히 일을 잘 처리하지 않겠어? 덕분에 보주의 일이 많이 줄었지.""그렇군. 그러고 보니 보주도 이제 시집가야 하지 않나?"그러자 송석석이 한숨을 내쉬었다. "맞지.. 안 그래도 이 바쁜 일들이 끝나면 좋은 사람을 찾아봐야겠다고 생각 중이었어. 하지만 보내기가 아쉬워. 허나 나랑 동갑인 애를 곁에 두면 진짜 노처녀가 되버리고 말거야."시만자가 장난스레 물었다. "몽천생은 어때?"그러자 송석석이 단호하게 답했다. "그 사람은 우리 보주를 굶길까 두려워."시만자가 깔깔거리며 웃었다."맞아, 사문을 먹여 살려야 하니까 신부한테 줄 돈이 어디 있겠어? 그는 그냥 결혼하지 않는 게 나아. 괜히 여자만 고생시킬 테니까. 혹시 기억나? 어렸을 때 너한테 장가가겠다고 했잖아? 그래서 석소 사저가 호되게 혼내줬지. 어린애가 벌써부터 여자를 농락한다고 말이야."송석석도 웃었지만, 마음 한켠이 무거웠다. 매산과 진성은 그녀의 인생을 나누는 경계선와 같았다. 지금 매산으로 돌아간다 해도 그때의 마음으로 돌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보주와 석소 사저에 대해 말을 꺼내기 바쁘게 보주가 급히 달려왔다. "아가씨, 아니, 왕비님, 그리고 만자 아가씨, 석소 사저께서 오셨습니다. 군주님께서 곧 출산하신다고 합니다!"송석석은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출산? 벌써 그렇게 된 건가?""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석소 사저께서 위험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단신의료를 불러야 한다고 하는데 지금 진성에 안 계시다고 합니다."당황한 송석석이 급히 물었다. "석소 사저는 어디에 있느냐?""그분은 급하게 말만 전하시고 바로 돌아가셨는데 도대체 어찌 된 일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얼굴에 분노가 가득했습니다."송석석은 재빨리 결단을 내렸다. "우리가 가야겠어. 지금 바로 가자."시만자가 긴장을 한듯 큰 숨을 들이
그 말에 잔뜩 화가 난 라사저가 그만 폭발해버리고 말았다. “이 늙은이가 감히! 저리 비켜! 참아주는 것도 한두 번이다. 나이 먹은 걸 봐서 참아줬더니, 사람이 아닌짓을 하는구나. 내 평생 어르신을 욕해 본 적 없지만 너 때문에 예외를 두겠다. 더 이상 화나게 하지 말거라. 내가 네 뺨을 때리도록 하지는 말거라. 입조심이 힘들면 당장 꿰매거라!”어르신들께 깍듯했던 라사저는 강호인이었다.그녀가 한 치를 물러서면 상대는 한 자를 넘보는 격이니, 더는 봐줄 수 없었다.노태부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러자 승은백부 부인이 노태부인을 부축하며 재빨리 안으로 들어갔다. “어머니, 그만하세요. 곧 북명왕비께서 오시니, 이렇게 소란 피우시면 안 됩니다.”“내가 그자를 두려워할 것 같으냐?”노태부인이 가장 싫어하는 이가 바로 송석석이었다.“왕비라 한들 내 승은백부를 간섭할 수는 없다. 게다가 회왕비도 뭐라 하지 않았는데, 그년이 뭔 상관이냔 말이다!”하지만 란이의 비명소리에 노태부인도 저도 모르게 몸을 떨고 말았다. “단신의 제자가 여기 있다고 들었는데,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것이냐? 왜 아직도 촉진제를 쓰지 않는 것이냐?”그들이 계단을 올라갔을 때, 안에 있던 여인들은 모두 커튼을 사이에 두고 서 있었는데, 커튼 뒤가 바로 란이의 출산 방이었다.란이는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비록 이마의 피는 멎었지만 얼굴은 심하게 부어 있었다. 량소가 계단에서 세게 밀친 것이었다. 그때 라사저와 석소 사저가 곁에 없었고 석소 사저가 달려갔을 때는 이미 란이가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진 뒤였다.계단은 그리 높지 않았지만, 란이의 몸이 무거워 첫 번째 계단 모서리에 머리가 부딪혀버리고 만 것이다. 석소 사저가 그녀를 안아 올렸을 때는 이미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운 좋게도 홍작이 미리 와 있었기에 빠르게 상처를 처리할 수 있었다. 송석석이 미리 준비해 둔 최고의 산파도 곁에 있었는데, 그는 진성에서 손꼽히는 실력자였고 수많은 귀족 가문들이 찾는 이였다.이마의
바깥방에 있던 여인들 또한 송석석을 보더니 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송석석은 그들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커튼을 들어 올려 곧바로 안으로 들어갔다.시만자도 그 뒤를 따랐다.참담한 란이의 상태를 보자마자 송석석은 진정하기 위해 찬 공기를 한 웅큼 들이마셨다.‘어떻게 이마를 다친 거지? 왜 또 이마를 다쳤단 말이냐..!’“홍작,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것입니까?”송석석은 란이의 손을 잡으며 그녀의 얼굴에 흐르는 땀과 눈물을 천천히 닦아주었다. 홍작은 한창 침을 놓고 있었다. 비단 이불이 높이 덮여 있었고 란이의 배에는 침이 한가득 꽂혀 있었다.홍작이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단순히 태기가 움직인 정도가 아니고, 태아에게까지 상처를 입혔을 가능성이 큽니다. 촉진 약을 썼지만, 이미 세 시간이나 지났는데도 아무런 징후가 보이지 않습니다.” 란이의 얼굴이 그만 일그러졌다.“언니... 너무 아파요...” “걱정 말거라. 내가 여기 있으니 곧 괜찮아질 것이다.” 송석석은 그녀를 걱정하면서 다시 홍작에게 물었다. “단신의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현재 성 밖에서 진료 중이라, 석소 사저가 직접 모시러 갔습니다. 제발 늦지 않길 바랄 뿐입니다.” 홍작은 애써 차분함을 유지하려 했지만, 그 안에 담긴 불안은 숨길 수 없었다.시만자는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고, 라사저는 문밖에 서서 승은백부의 그 무리들. 그중에서도 노태부인을 감시하고 있었다.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이고 아까까지만 해도 심한 말들을 주저 없이 찌껄이고 있었던 터라 단단히 지켜야 했다. 혹시라도 사람을 시켜 안 좋은 말이라도 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사저님, 도대체 어떻게 된 것입니까? 어쩌다 이렇게 된 것입니까?”시만자가 라사저에게 묻자 라사저는 화가 난 얼굴로 나무에 묶인 량소를 가리켰다. “저자가 이 지경으로 만들었고 우리가 경계를 늦춘 문제도 있다.” 라사저는 전후 경과를 자세히 설명했다. 마침내 연유를 잃은 아픔에서 벗어난 량소가 군주에게 소홀했던 자신을 뉘우치며
란이 옆에 있던 시녀 두희는 재부인의 말을 듣고 분해서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왕비가 나가려는 것을 보고 급히 말했다.“왕비님. 군마가 군주님께 황제폐하에게 가서 좋은 말을 해서 자신의 세자신분을 회복시키려고 했는데 군주가 동의하지 않자 그는 화가 나서 군주를 밀친 것이었습니다. 군주가 조심하지 않아서 그런 게 아닙니다.”송석석은 화가 치밀어 올라 커튼을 걷고 밖으로 나가 차가운 시선으로 태부인을 보았다. 태부인은 그녀의 날카로운 눈빛에 놀라 멍해졌다. 하지만 자신이 나이도 많고 책봉까지 받은 몸이라 왕비라고 해도 승은백부의 일은 상관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그녀는 바로 허리를 곧게 펴고 물었다.“왕비께서는 대체 뭘 하시려는 겁니까?”그러자 송석석이 그녀를 째려 보았다.“다시 한번 군주를 모욕하는 말이 내 귀에 들리기라도 한다면 황실을 모욕한 죄로 생각하겠습니다.”“왕비가 어떻게 감히...!”송석석은 발로 의자를 걷어차 의자는 문으로 날아가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의자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만약 란이에게 어떠한 변수라도 생긴다면 당신의 보배인 손자도 함께 잃을 것이니 각오하십시오.”송석석의 행위에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겁을 먹었고 태부인도 등이 오싹해졌다. 그녀는 송석석에게 승은백부의 일을 간섭하지 말라고 하려고 했는데 목소리마저 나오지 않았다.승은백부인은 아연실색해서 말했다.“왕비, 화를 푸십시오. 지금으로서는 군주가 가장 중요하지 않습니까?”연홍은 분만 촉진약을 달여 가지고 왔고 송석석은 약을 받아 차가운 표정으로 분만실로 들어갔다.시만자도 들어와 앉아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더니 승은백부인에게 말했다.“며느리가 안에서 출산하고 있는데 시어머니가 되어서 함께 있어주지도 않으십니까?”승은백부인은 시어머니가 무슨 말을 해서 북명왕비의 노여움을 살까 봐 여기에서 지키고 있으려고 했다. 하지만 시만자의 말에 그녀는 동서들에게 태부인을 잘 보살피라고 하고 시만자를 따라 들어갔다.승은백 부인은 아
승은백 부인은 하마터면 바닥에 넘어질 뻔했다. 그 후 그녀는 도움을 청하듯 산파를 바라보았다. 산파는 평생 출산을 하다가 위험한 경우를 많이 봐왔는데 가장 위험한 경우는 어른도 아이도 지킬 수 없었다. “어떡해? 어떡하면 좋아?” 승은백 부인은 다급하게 눈물을 흘리면서 란이의 땀을 닦아주었다. “애야, 고생했다. 너무 고생했어.” “너무 아픕니다.” 란이는 아프다는 말만 하며 도움을 청하는 눈빛으로 사람들을 보았지만 아무도 그녀를 도와줄 수 없었다. 밖에서 다급한 발자국 소리가 들려오더니 회 왕비가 왔다. 그녀는 분만실로 뛰어들어 송석석을 밀치고 란이의 손을 잡고 말했다. “란아, 어마마마가 왔다. 지금 상태가 어떠는냐?” “너무 아픕니다..” 회 왕비를 본 란이는 기뻐하지도 않고 오히려 두려운 표정으로 회 왕비의 손을 뿌리치고 송석석을 찾았다. “좀만 참거라. 여자가 아이를 낳는 건 다 아프 단다. 내가 널 낳을 때도 아팠는데 결국 이겨내지 않았느냐? 참거라.” 회 왕비는 쪼그리고 앉아 말했다. “숨을 천천히 들이마시고 내쉬거라. 그러면 덜 아플 것이다.” 그 모습을 본 홍작이 말을 덧붙였다. “왕비님, 군주님은 복부를 부딪혀 복중의 아기가 지금 위험한 상태입니다. 그뿐 만 아니라 현재 군주님의 목숨까지 위험합니다. 그건 참을 수 없는 고통입니다.” 홍작의 말을 들은 회 왕비가 반문했다. “헛소리하지 말거라. 태의가 이리로 오는 길이니 이제 곧 도착할 것이다.” 그러자 홍작은 속으로 태의의 수준은 자신과 비슷하니 오직 사부님께서 오셔야 방법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녀는 태의의 의술을 부정해 약왕당에게 시비를 불러오기 싫었다. 태의는 곧 도착했지만 들어올 수 없어 병풍 밖에서 상황을 묻고 출산을 촉진하는 약을 처방했다. 방금 이미 한 그릇 마셨는데 또 한 그릇을 마셔야 했기에 란이는 그만 심한 통증으로 인해 겨우 두 모금 마시고는 다시 토해냈다.어쩔 수 없어 침대 앞에 커튼을 치고 태의
그렇게 또 30분이 흘렀다. 란이는 너무나 아파서 소리를 낼 수조차 없었고 온몸이 물에서 건져낸 것처럼 흠뻑 젖었다. 송석석은 수건으로 그녀의 땀을 닦아주며 귓가에서 계속 말했지만 란이는 지쳐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죽을 것만 같아 힘겹게 눈을 떠 겨우 한 마디 했다. “그냥 차라리 죽고 싶을 뿐입니다..”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말거라. 단신의가 이제 곧 도착할 것이니 조금만 더 참거라.” 송석석은 울먹이며 말했다. 그녀는 무력감에 사로잡혔는데 이건 그녀가 가장 두려워하는 감정이었다. 왜냐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회 왕비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란아, 말 들어. 그런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말거라. 언니 말대로 단신의가 곧 도착할 테니 조금만 더 버티거라.” 란이는 힘없는 신음소리만 낼뿐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남은 힘을 모두 통증을 저항하는 데 사용했는데 오장육부가 뒤틀린 아픔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밖에 있던 태부인도 드디어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처음엔 배가 부딪혀 출산을 하려나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심각할지는 꿈에도 몰랐다. 그녀는 란이가 걱정되는 것이 아니라 란이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량소까지 연류 할까 봐 걱정되었다. 황제폐하께서 노하시면 승은백부를 사라지게 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되면 량소의 목숨도 더 이상 부지할 수 없었다. 여기까지 생각한 노부인은 온 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하더니 곁에 있는 하인에게 량소가 도망갈 수 있게 내려보내라는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하인은 바로 알아채고 호위 몇 명을 불러 량소를 내려주려 했으나, 그만 라 사저에게 들켜 버려 회초리로 사람들을 물리쳤다. “왕비의 명령 없이 이 자를 내리려는 사람은 모두 묶어버리겠다!”라 사저는 승은백부 사람들을 잘 알고 있어 다른 사람은 몰라도 노부인은 손자가 고생하는 걸 마음 아파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노부인이 일이 잘못되면 량소를 풀어줄까 봐 여기에서 지키고 있었던
송석석과 시만자는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승은백부인도 단신의에게 안방에서 군주를 치료해 달라고 부탁했다. 바깥사람들이 감히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자 회 왕비가 잠시 망설이다가 딸의 숨결이 미약해진 걸 보고는 곧바로 허락했다. 단신의는 환경에 신경 쓰지 않았다. 이쯤 되면 아이는 지키지 못하고 어른의 목숨을 건질 수 밖에 없으니 침을 대범하게 놓았다. 그는 란이에게 단설환을 먹인 후 출산 촉진약의 용량을 늘리도록 명령했다. 그런 용량은 태의도 두렵게 했지만 그도 단설환의 효능을 들어봤기 때문에 함부로 뭐라 할 수 없었다. 게다가 태의는 계속 병풍 뒤에 있어 단신의가 어떤 혈자리에 침을 놓았는지 알 수 없었다. 만약 어디에 놓았는지 보았다면 더욱 놀랄 것이었다. 이어서 단신의는 사향홍화와 단심을 사용했는데 사향 냄새가 퍼져 모든 사람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러 버렸다. 사향의 양은 엄청 조심스럽게 조절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이번에 아이를 낳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더 이상 임신하기 어려울 것이었다. 태의는 그가 처방한 약을 듣고 단신의가 최후의 방법까지 사용했다고 생각해 결국 우여곡절 끝에 효과를 본 것이다. 게다가 앞서 복용한 단설환과 고본단약도 모두 효과를 보이자 기진맥진해 있던 란이가 서서히 기운을 차릴 수 있었다. 금침으로 혈자리를 찌르자 자궁이 움츠러들면서 아랫배의 옴을 느꼈다. 산파가 황급히 란이에게 힘을 주라고 했다. 란이가 이를 악물고 힘을 주자 고생 끝에 태아가 마침내 나왔다. 단신의는 돌아서 홍작과 산파에게 뒷수습을 맡겼다. 아이는 남자 태아였는데, 아쉽게도 온몸에 시퍼렇게 멍이 들었고 호흡도 이미 끊긴 상태였다.승은백 부인은 량소를 닮은 아기를 보자 참지 못하고 오열했다.회 왕비도 한 번 쳐다보고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불쌍한 내 외손주.”그러자 단신의가 물었다. “당신 딸부터 걱정해야 하는 것 아니오?”현재 란이에게는 출혈의 징조가 보였는데, 혈액 순환의 약을 너무 많이 사용했기에 바로 지혈단을 사용하고
승은백 부인이 죽은 아기를 안고 나가려 하자 태부인이 목놓아 울었다. 하지만 승은백부인은 그녀를 신경도 쓰지 않고 곧장 량소에게로 향했다. 량소는 오랫동안 묶여 있어 몸에 피가 통하지 않아 얼굴이 다 자홍색으로 변해 있었다.“이 아이가 네 아들이다. 네가 이 아이를 죽인 것이란 말이다!”승은백 부인은 아기를 번쩍 들어 량소에게 보였다. 그녀의 얼굴엔 아직 마르지 않은 눈물이 어려 있었고 처음엔 말투가 차분했지만 갑자기 비분이 가득한 말투로 변해 있었다.“넌 대체 언제 철이 들 것이냐? 어떻게 해야 소란을 피우지 않을 것이냐 말이다! 보아라. 넌 자신의 아들을 죽이고 가문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았다. 뭘 믿고 그러는지 내가 모를 줄 아느냐? 군주가 널 연모한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을 괴롭히다니. 천하의 불효자 같으니라고. 그녀가 아직도 위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알기나 하느냐?”향소는 시선을 피하며 그 아이를 보지 않았다. 방금 안방에서 전해오는 소리를 그는 모두 들었다. 그는 지금 자신의 기분을 말로 형용할 수 없었다. 그는 아이를 감히 보지 못했다.‘내가 죽인 게 아니야. 내가 죽인 게 아니야.’“데려가십시오. 데리고.. 가십시오..!”그는 중얼거리며 입가에 피를 흘리며 말했다.“난 보지 않을 것입니다.”하지만 그는 소리 없이 승은백부인의 품에 안겨 있는 아이를 보았다. 원래 울고 보채야 하는 아이가 지금은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아이는 정말 귀여웠다. 그의 아들인데 죽었다.그는 오열하며 소리쳤다.“데려가십시오. 데려가십시오. 나는 보고 싶지 않습니다. 어머니,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러니 란이를 보러 가게 저를 풀어주십시오.”승은백부인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늦었다, 너무 늦었어. 량소야, 세상엔 돌이킬 수 있는 일이 있고, 돌이킬 수 없는 일들이 있단다. 네 아이는 다시 살아날 수 없고 모든 것은 되돌릴 수 없단다.”승은백 부인은 화를 낸 후 슬픔으로 가득 찬 말투로 말했다.“어릴 때부터 너는 어머니의 자랑이었다. 여섯
그러자 송석석이 이내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왕씨 가문에서는 그녀를 아주 잘 대해줍니다. 조카딸의 혼담에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시집간 부군이 잘 대해준다 하더군요. 다만 그녀는 자신이 두 번 시집갔음에도 처가에 머무는 것이 조카들에게 미칠 영향이 걱정되어 그러는 모양입니다.”그 말에 전북망이 고개를 끄덕였는데, 순간 번개처럼 날렵하지만 마음씨 따뜻한 최씨 부인이 떠올랐다. 최씨 부인에게는 적자와 서자녀들이 있었고, 아직 혼담이 정해지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그런 그녀가 혼인 문제로 얼마나 많은 유언비어에 시달렸을지 생각하니, 전북망은 진심으로 안타까웠다. 형수로서의 최씨 부인을 존중하며, 그녀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할 바 없었다. 이때 송석석이 그의 생각을 끊었다. “그럼 천천히 생각해 보십시오.”전북망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문득 물었다. “우리 단둘이 여기에 있으면, 섭정왕이 질투하지 않을까요?” 송석석은 예상치 못한 질문에 잠시 당황했으나, 곧 침착하게 답했다. “이 정도 신뢰도 없다면, 제가 어찌 현갑군 지휘사로 오래 근무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서로 숨김없이 모든 걸 공유합니다. 이번 만남 역시 그분께 이미 알려두었죠.”송석석이 떠나자 전북망도 따라나섰다. 그는 섭정왕이 어딘가에서 이들을 지켜보고 있으리라 의심했지만, 정작 별청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앞마당에서야 섭정왕을 발견했는데, 그는 대장군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송석석을 보자 미소로 맞이하며 불러세우는 섭정왕의 모습에 전북망은 마음이 착잡해졌다. ‘진정한 부부란 저런 것일까.'그러나 성릉관이든 진성이든, 남녀의 단독 만남은 명예에 흠이 될 수 있음도 잘 알았다. 특히 높은 지위에 오른 이들은 더욱 조심해야 했다. ‘내가 무슨 권리로 그들을 걱정하는가.’자조적인 생각이 들었지만, 왕청여의 제안은 여전히 그의 가슴을 두드렸다. 5일의 고민 시간이 주어졌다. 사여묵과 송석석이 진성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최씨 부인의 이야기를 떠올리면 답은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 전북망은 송석석과 다시 만났다. 사실 그전에도 송석석이 성릉관으로 갔을 때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들은 서로 서먹해서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이 매번 성릉관을 떠날 때마다 몰래 배웅하곤 했다. 전북망은 자신이 당시 어떤 마음으로 그런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늘 송석석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이방과 왕청여에게도 미안하긴 하지만, 그들과는 서로 감정을 소모하고 다투면서 서로에게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장군부만 송석석에게 상처를 줬을 뿐, 송석석은 장군부에게 조금의 상처도 주지 않았다. 비록 이혼한 후에는 전북망 어머니의 병세에 대해 상관하지 않았지만 큰형수에게 어떻게 단설환을 얻을 수 있는지 알려주기까지 했다.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는 이미 섭정 왕비가 되어있고 나서였다. 변방의 전사들에겐 양식과 무기가 풍부하고, 봉록까지 올라, 그들에겐 이득이기에 이제는 조정의 정세에 관심을 두지 않아도 되었다. 섭정왕은 한때 장수였기에 병사들이 배불리 먹어야만 국토를 지킬 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전북망과 송석석이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섭정왕과 함께 소 대장군에게 생신을 축하해주고 있었다. 그녀를 보는 소 대장군의 눈빛은 여전히 자애롭고 인자했다. 전북망은 사람들을 사이에 두고 멀리서 그 광경을 보며, 그때 그렇게 어리석지 않았다면 지금 송석석과 함께 노장군의 생신을 축하하는 사람이 바로 자신일 것이라는 후회를 했다.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같은 생각인 걸 보니, 자신만 제자리에서 멈춰 있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래서 그는 이번에도 송석석과 대화를 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생일잔치가 끝난 후에 송석석이 뜻밖에도 먼저 그를 찾았다. 그와 송석석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섭정왕은 이상한 소문이 날까 봐 걱정되지도 않는가?’전북망은 당황하고 불안해 보였고, 송석석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먼저 입을 열지도 못하고 송석석이 말하기만을 기다리
전북망은 성릉관에서 몇 년 동안 두 번이나 발탁되었고, 지금은 장군의 신분으로 수천 명의 병사를 관리하고 있다. 계속 성릉관에 주둔하고 있어 다시 진성으로 돌아간 적이 없었고, 진성의 부름 없이는 제멋대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는 재혼도 하지 않고 여전히 혼자 살아갔다. 성릉관의 모래바람은 해마다 그의 얼굴에 흔적을 남겨 또래들보다 몇 살이나 더 늙어 보였다. 심지어는 몇 년 동안 불면증에 시달렸기에, 진정제를 먹어야만 잘 수 있었다. 그는 가끔 이런 생각을 했다. ‘만약 내가 그때 이방과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어떻게 지내고 있었을까? 송석석과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부부가 되었을까? 아마도 우린 귀여운 자녀도 낳았겠지. 그리고 나는 군대에서 열심히 일하고 석석은 가문의 내무를 책임지며 부모님을 모시고 아이를 돌보고 있었겠지? 설령 내가 승진을 하지 못하고 평생 장군으로만 살아도 그는 날 떠나지 않았겠지.’ 이전의 전북망은 송석석이 하늘을 나는 독수리였는데 자신을 위해 날개를 부러뜨리고 병든 시어머니를 돌보며 군부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책임지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리고 그가 알아차렸을 땐 이미 돌이킬 수도 없었다. 전북망에게는 이미 이방이 있었고 이방을 사랑한다고 했으니, 송석석이 이혼하자고 했을 때 그는 심한 말을 하고 후회하지 말라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송석석 또한 후회할 게 없었다. 이혼을 하면서 전북망을 위해 부러뜨렸던 날개가 다시 자라나 전쟁터로 날아가 쉽게 공을 세웠으니까 말이다. 이방은 송석석이 큰 가문의 아가씨인 데다가 부친과 오라버니가 그를 위해 길을 닦아주었기에 이런 성과를 이룰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의 성공은 그의 능력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문이 도움이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주된 원인은 아닐 것이다. 만종문에서 송석석의 무공은 거의 최고였는데, 그건 송석석이 그만큼 노력을 했고, 그만큼 땀을 흘렸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전북망은 송석석을 존경했지만 그는 자신이 송석석을
어머니께 간청해도 소용이 없자 신이는 아버지를 찾아갔다. 하지만 돌아온 건 더 심한 꾸지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신이가 이 혼사를 반대하는 것은 양지춘과 접촉한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양지춘에게 그녀를 데리고 나가서 놀며 감정을 쌓으라고 했다. 신이는 가기 싫었지만 어머니가 억지로 그녀를 마차에 태웠고, 심지어는 하녀에게 그녀가 부적절한 말을 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엄명했다. 양지춘의 얼굴은 그나마 멀쩡하게 생겼는데, 처음에는 신이를 조금이나마 존중하는 척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본성을 드러냈다. 그는 신이의 외모와 품평을 논하며 신이가 외모가 예쁘지 않았더라면 절대로 그를 부인으로 들이지 않겠다고까지 했다. 그의 오만한 태도는 신이를 매우 불편하게 했다. 단지 이것뿐이었다면 아마도 신이가 결혼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양지춘은 일부러 신이를 마차에 태워주는 척하며 그녀의 엉덩이를 꼬집었다!그 순간 신이는 온몸의 피가 머리 위로 솟구친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의 경박한 눈빛에 신이는 이내 눈물이 쏟아졌고, 모욕감에 온몸을 떨었지만, 감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힘들게 집에 돌왔는데, 하녀와 마부는 그의 동작을 보지 못한 탓에, 오히려 그가 세심하고 자상하다며 그녀의 어머니 앞에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신이는 억울해서 어머니에게 그 일을 말했지만 어머니는 오히려 그녀가 일부러 꾸민 말이라고 생각해, 그녀를 꾸짖으며 사흘 동안이나 외출을 금지했다. 신이는 그렇게 방에 갇혔고, 매일매일을 눈물로 얼굴을 씻었다. 심지어 그날 선비의 말을 듣고 호수에 뛰어들지 않은 것을 후회하기까지 했다. ‘내가 양지춘에게 시집가는 것이 물에 빠져 죽는 것과 대체 무엇이 다른가?’ 사흘 후, 외출 금지가 해제되자마자 신이는 다시 경산사로 가서 같은 핑계로 하녀를 내보냈다. 이번엔 정말 죽을 각오로 호숫가에 간 것이었는데, 뜻밖에도 그곳에서 다시 그 선비를 만났다.그는 쓸쓸하게 호숫가에 앉아 작은
신이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한 사람이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고, 나무 그늘에 몸이 가려져 있었다. 그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은 초라해 보였고 눈 밑에는 검푸른 빛을 띠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 사람은 바로 다리 앞에서 그림을 팔던 선비이자, 학정이 말하던 퇴학 해서 기녀를 키우는 학생이었다!“헛소리하지 마십시오.” 신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짜증을 냈지만, 그가 한 말을 떠올리자 내심 두려웠다. “나는 여기에 물귀신이 있다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거짓말하는 것이겠지요.” 신이는 죽음은 두렵지 않았지만, 귀신은 두려웠고 진흙탕에 영원히 깔려 있는 건 더욱 두려웠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가 걸어 나오자 얼굴은 더욱 여위어 보였다. “호숫가의 주변을 보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왜 이런 아름다운 경치를 보러 오는 사람이 없겠습니까?” “그건 사람들이 이곳으로 예불하기 위해 오는 것이지, 경치를 보러 오는 것은 아니니까요. 절을 하고 바로 돌아가니 당연히 보지 못하겠지요.” 신이는 그렇게 말했지만, 순간 깊이가 보이지 않는 호수에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느껴져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그는 여전히 굳게 서서 말했다. “예불하는 사람은 천지와 자연을 경외하기 때문에 이런 좋은 경치가 있다면 반드시 한 번 보러 올 것입니다. 이런 곳은 인재를 배출할 수 있는 좋은 곳일 텐데 아무도 없다는 게 아기씨는 이상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것이 사실인지는 몰랐지만, 그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감히 그런 무서운 곳에서는 죽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몸을 돌려 떠나려 했다.그러자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한 번뿐인 인생이니 절대 쉽게 자신의 생명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살고 싶어도 살 지 못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의 말이 이상하게 느껴져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는데, 그의 눈 밑은 이내 붉어졌고 눈물이 고여 반짝이는 것 같
신이의 사촌 여동생과 하녀는 신이를 찾으러 돌아왔다. 신이가 하녀보고 이순에게 삼백문을 주라고 하자 이순은 웃으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원래는 우연한 만남일 뿐이라 다시는 접점이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 조모님의 생신 때 가문 연회에서 공학정이 데리고 온 제자들 중에 이순이 있었다. 강남의 예의 규율은 진성처럼 엄격하지 않아서 연회에 참석할 때 여인들도 앞마당에 갈 수 있었다. 이순은 신이를 단번에 알아보지 못했다. 신이는 그때 면사포를 쓰고 있었고 두 눈만 드러냈기 때문에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이상할 건 없었다. 이순은 식사를 하지 않고, 신이의 조모에게 생신 축하 그림만 드린 후에 집에 일이 있다며 작별을 고했다. 그가 떠나자마자 학정이 그를 언급하며 안타까운 말투로 말했다. “총명하긴 한데 진취심이 없어서 계속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걸 여기로 데려와 진취성이 있는 사람들을 많이 사귀게 하려고 했는데… 이 정도로 사리분별을 할 줄 모르다니. 정말 실망이군. 학교를 그만두겠다면, 이젠 마음대로 하라고 해야겠어.” 그러자 신이의 부친이 위로했다. “화내실 필요 없습니다. 선생님껜 학생이 많으니 그가 나간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될 건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학정은 마치 울화가 쌓인 것처럼 말했다. “그는 내가 가장 아끼는 제자였다네. 그런데 진취성만 없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동창에게 돈을 빌리질 않나, 게다가 집에 기녀까지 키우고 있다더군.” 신이의 아버지는 그런 사람을 가장 싫어하였다. “그런 사람은 얘기할 가치도 없습니다.” 신이는 그가 어떤 사람이라는 걸 알고 나서 왠지 마음속으로 실망감이 가득했다. 아마도 그날은 그가 그린 그림을 보고,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 같다고 생각해 마음이 갔던 것 같았다. 그렇게 몇 달 후, 신이의 혼사도 낙착되었다. 그녀의 약혼자는 회주 지부의 둘째 아들인 양지춘이고, 올해 22살이었다. 22살인데도 결혼하지 않았던 건 첩을 통해 서자를 낳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좋은 가문은 그
그의 이름은 신이었는데 그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그에 대해서 말할 때, 경멸하는 기색을 띠었고,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 모르는 사람까지 모두 침을 뱉으며 뻔뻔하다고 할 정도였다. 알다시피 애인과 야반도주하는 것은 사람을 죽이고 불을 지르는 것보다 더 욕먹을 일이니 말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에게 후회하냐고 묻기도 했다. 그녀는 시집간 것을 후회하지 않지만 죄책감을 느끼긴 했다. 왜냐하면 그로 인해 시 씨 가문의 명성이 손상되어 형제자매들과 조카들이 혼사에 어려움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신이는 시 씨 가문의 아가씨로서, 태어날 때부터 온갖 보살핌을 받아왔다. 먹는 것은 물론 모두 산해진미이고, 입는 것도 모두 능라 비단이었다. 게다가 보모님과 오라버니의 총애까지 한 몸에 받았다. 하지만 그녀에겐 한 가지 결함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열네 살 때까지 월사가 오지 않은 것이었다. 많은 의사들을 불러 진찰을 받고 밤낮으로 약을 먹었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어머니는 그녀에게 몸이 차서 그러니 몸조리를 하면 나을 수 있다고 위로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몰래 의사가 부모님께 하는 말을 들었다. 의사는 그가 몸이 차서 그런 병이 생긴 것이 아닌, 아이를 키우는 곳이 어린아이와도 같아서 평생 아이를 가질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의 몸이 마치 작은 꽃병과 같아서 꽃을 꽂을 수는 있지만 나무를 심고 꽃을 피워 열매를 맺는 건 불가능하다고 비유했다. 그녀는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건 여자에게 어떤 의미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녀를 속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나중에 좋은 사람에게 시집가서 부군에게 첩을 들인 후, 첩이 낳은 아이를 친자식처럼 키우라고 조언해주었다.시 씨 가문이라는 후원이 있으면 그녀가 아이를 낳을 수 없어도 아무도 그녀의 지위를 흔들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 씨 가문의 재물은 그녀가 평생 부귀하게 살기에 충분했다. 신이의 조모도 그녀에게 아이를 낳을 수 없으니 자세를 낮춰야 한다고 했다. 시 씨 가문의 딸이라고
추운 겨울이 되자 눈이 내려 성릉관은 하얗게 뒤덮였다. 세상이 마치 깨끗해진 것처럼 보였다. 이황자는 몇 년 동안 너덜너덜한 승복을 입고 발우를 받쳐 들고는, 가는 길에 동냥을 하다가 절을 보면 이틀 묵으며 부처님께 참회하면서 살았다. 사실 그는 원래 있던 절에서 계속 지낼 수 있었다. 편안하진 않지만 풍찬노숙할 필요도 없고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그런 안일한 곳에서는 평생 죄를 씻을 수 없다고 생각했고, 계속 길을 걷고 계속 고생해야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했다. 그가 성릉관에 도착했을 때 짚신은 이미 찢겨 있었고 발바닥에는 두꺼운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이제는 신발을 신지 않고도 자갈이 가득한 길을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추운 날씨에는 모든 옷을 껴입어도 추위를 막을 수 없었지만 이미 익숙해진 뒤였다. 그는 눈보라를 맞으며 성릉관에 위치한 감은사로 향했는데, 몇 년 동안 발걸음을 멈춘 적이 없는 탓에 고단함이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심지어는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아 그는 눈이 가득 쌓인 길에서 의식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깨어났을 때 그는 따뜻한 두꺼운 이불 속에 누워 있었다. 그가 있는 방에는 숯불이 피워져 있었고, 살짝 열린 창문으로 눈에 눌려 허리가 굽은 나뭇가지가 보였다. 그는 눈동자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렇게 편안하고 따뜻한 느낌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의 마음속에 순간 욕심이 생겨 조금만 더 누워있고 싶어졌다. 그런데 바로 그때, 문이 활짝 열렸다. 그가 벌떡 일어나 앉았는데, 갑자기 눈앞이 핑핑 돌더니 다시 힘없이 침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누워 있거라.” 이때 누군가가 부드러운 말투로 말하면서 약그릇을 그의 침대 옆에 놓았다. 그는 말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익숙해, 어지러움을 가라앉히고 고개를 돌려보니, 그 사람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서우 형?!’ 그는 자신이 잘못 보았을까 봐 다시 자세히 보려 했지만, 몸이 너무 어지러운
대황자는 봄 사냥 때 숙청제에게 꾸중을 듣고 돌아간 후 앓아누웠다. 당시 이황자와 서우가 모두가 걱정했는데 덕비는 오히려 기뻐했다. 그는 이번 일을 겪으면서 황제폐하께서는 분명히 대황자를 싫어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덕비는 이황자를 안고 반드시 부지런해야 하고, 태부와 황숙의 말을 잘 듣고 누구보다 잘 배워 황형을 제압해야 한다고 당부까지 했다. 그로 인해 이황자의 마음은 몹시 복잡했다. 덕비가 줄곧 그에게 태자와 황제가 되는 것이 얼마나 좋은 지 말해주었을 때 비록 그도 마음이 설렜지만 자신과 거리가 먼 얘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지금 그와 대황형, 서우 형, 그리고 셋째 동생이 사이가 좋아 도저히 대황형을 미워할 수가 없었다. 매일 모순적으로 지내다 보니 오히려 학업이 나빠졌고 승마 연습을 할 때도 여러 번 실수를 했다. 하지만 덕비는 이상하게 그를 탓하지 않았고 며칠 동안 계속 게으르게 하라고 했다. 그렇게 덕비는 이황자를 데리고 복마마를 자주 뵈러 갔고, 복마마 궁전에서 숙청제를 만날 수도 있었다. 덕비는 며칠 동안 그곳을 드나들더니 어느 날 굳은 표정으로 다시는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차가운 말투로 청이에게 자신의 보살핌이 없으면 아이가 태어날 수 있는지 보겠다고 했다. 황제폐하를 자주 뵈러 갈 수 없어 아쉬웠지만 이황자는 마음을 가다듬고 공부와 승마술에 전념했다. 이황자는 당시 앞날이 어떻게 될지도 몰랐고, 비록 매일 힘들긴했지만 한편으로는 즐거웠기에, 계속 이렇게 지내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숙청제의 천추세에 승마대회를 개최할 예정이니 세 황자와 서우도 가서 겨뤄 보기로 했다. 원래 그런 대회에서 황자들은 재미있게 참석만하면 되지만, 덕비는 그 경기를 몹시 중시했다. 덕비가 이황자에게 마름쇠를 건넬 때, 그는 하늘이 무너져내리는듯한 기분을 느꼈다. 이황자는 원하지 않았다. 그는 절대로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대황형의 목숨을 앗으려 하다니, 이황자는 처음으로 어마마마가 무서워졌다.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