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왕은 식구들을 이끌고 진성으로 돌아와 이미 자리를 잡은 상태였다. 그리고 태후와 황제를 배알한 후 왕비인 시민주와 측비인 김도연과 함께 북명왕부를 찾았다.사여묵은 오늘 휴무라 마침 저택에 있었으나, 연왕이 불쑥 찾아온 것을 몹시 못마땅했다. 하지만 삼촌인 그가 일가를 이끌고 친히 찾아왔으니, 만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원칙대로라면 사여묵이 송석석과 함께 연왕부로 찾아가는 것이 예의였고 황숙이 직접 왕부로 찾아오는 것은 사여묵이 권위를 세우려는 것처럼 보일 수 있었다. 사여묵은 어쩔 수 없이 어머니를 모시고 나와 연왕 일가를 맞이하였다. 이렇게 되면 연왕 일가가 혜태비를 방문하는 것이니 어색함을 조금은 덜 수 있었다. 사여묵과 연왕은 서로 말이 별로 없었고, 본디 서로 가깝지 않은 데다 각자 속마음을 감추고 있었기에 겉치레에 불과한 대화만 주고받았다. 반면 연왕비 시민주는 열정이 넘쳤다. 그녀는 시만자의 이야기를 하며 송석석과 가까워 지려 했다. 그러나 시만자는 시민주가 온다는 소식에도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그녀와 마주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송석석은 연왕에게 냉정한 표정을 지으며 겉치레마저 하지 않았다. 그녀는 고모가 처참히 죽은 일이 아직 뇌리를 떠나지 않았고, 그 책임이 연왕에게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시만자와 닮아 있는 그녀의 얼굴을 마주하기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이전에 시만자는 그녀가 연왕과 결혼하기 위해 집안의 반대를 무릅썼다는 이야기를 해줬었었다. "조카가 지금 대리 시경을 맡고 있다니, 재능을 발휘하기엔 너무 아깝구나. 황숙이 대신 마음이 아프구나. 대리 시경이라니, 결국 공문을 다루는 자리 아닌가. 너는 남강을 회복한 공신이니 황제께서 마땅히 군권을 다시 맡겨야 할 터인데." 연왕이 웃으며 말하자 사역묵이 답했다."황숙께서 그리 생각하시거든 황제께 직접 말 드리옵소서. 다만 조카는 대리 시경 자리가 천하의 형벌을 다스리는 자리이니 오히려 좋다고 생각하나이다." 그러다 미소를 지으며 한마디
사여묵과 송석석은 거의 동시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머리를 풀어 헤친 왕청여는 한 손에 비수를 잡고 자신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세게 누른 탓에 목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녀의 뒤에는 시녀인 홍이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서 있었다. 북명왕부로 향하던 중 비수를 사려는 것을 막으려 했으나 실패한 것이다. 송석석을 발견한 왕청여는 분노 서린 눈으로 외쳤다. "송석석! 우리 사이에 무슨 원한이 있기에 이토록 나를 망가뜨리는 것이냐!" 송석석은 침착한 말투로 노 집사에 명령했다. "평서백부와 장군부로 사람을 보내, 전 부인을 모셔가도록 하시오." 명을 받은 노 집사는 곧장 자리를 떠났다.송석석이 사여묵에게 말했다. "당신은 이만 돌아가세요. 내가 처리하리다." 사여묵은 왕청여를 한 번 더 보았다. 그녀는 거의 미친 듯한 모습으로 비수를 들고 있었다. "조심하오. 절대 다치면 안 돼요." 말을 마치고 사여묵이 돌아서려는데 연왕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사여묵은 긴 팔을 뻗어 급히 그를 막았다."황숙, 우리는 차를 마시러 돌아가시지요. 방금 어디까지 이야기했습니까?" 바로 그때, 연왕이 크게 소리쳤다. "무슨 일이냐?! 감히 누가 북명왕부에서 이리도 대담하게 소란을 피우는 것이냐? 제대로 다스려야 할 일이다. 함부로 왕부에 들어오는 자는 벌을 받아야 마땅하다!" 김도연도 연왕을 따라 밖으로 나왔다. 사여묵이 막을 새도 없이 그녀가 선수 치며 연왕의 말에 맞장구쳤다."저자는 평서백부의 셋째 아가씨 아닙니까? 전부인이 맞군요!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입니까?" 왕청여는 원래 송석석만 찾으려 한 것뿐이었으나 연왕과 김도연도 함께 있는 것을 보고 미쳐버린 듯한 광기를 즉시 거두어들이고 송석석을 차갑게 노려볼 뿐이었다. "그건 따로 이야기하시지요. 그렇지 않으면 두 목숨이 여기서 끝나는 것입니다. 어차피 그대는 이미 나를 끝장내려 했으니, 어디에서 죽든 상관없지만 말입니다." 그때 김도연이 이해심이 많은 듯한 태도로
편청에서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고 앉았는데, 송석석은 왕청여의 목에 닿아 있는 비수를 보자 눈살을 찌푸렸다."계속해서 비수를 대고 있을 겁니까? 정말 죽으려 했다면 북명왕부 대문에 머리를 들이받아 죽는 게 나았을 겁니다. 이리 소란을 피우는 건 그대 체면만 망치는 것입니다."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낸 왕청여가 고집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인연을 망치는 건 음덕을 해하는 일인데.. 참으로 악독하기 그지없군요." "제가 인연을 망쳤단 말인가요? 전북망과의 문제는 그대들의 일이지, 저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그대는 사리 분별도 못하는 사람이군요. 장군부에 암살자가 들이닥쳤을 때에도 제가 그대들을 구해 준 것입니다." 송석석의 말에도 왕청여는 차갑게 대꾸했다. "공과 사는 구분합니다. 게다가 장군부에서 들이닥친 암살자를 쫓아낸 것은 저를 위한 것은 아니었으니, 제가 고마워할 필요는 없지요." 송석석은 그녀의 말에 어이가 없어 그만 헛웃음이 다 나왔다. "저도 필요 없습니다. 그럼 말해 보세요. 제가 무엇을 했기에 그대 인연을 망쳤다는 것입니까?" 왕청여는 화가 치밀어 올라 이를 악물었다."순진한 척하지 마세요. 당신이 방시원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는 당신이 더 잘 알지 않겠습니까? 당신은 제가 잘되는 꼴을 못 봐서, 방시원과 다시 이어질 것 같으니 예전 일을 캐고 방시원에게 알린 것이 아닙니까? 그는 이제 혼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정녕 당신이 원하는 결과입니까?" "방시원?" 송석석은 여직 그녀가 전북망과의 사이가 틀어져 이토록 행패를 부린다 생각했다. 하여 잠시 생각이 멈췄지만, 약당에서 그녀와 노세진이 보였던 이상한 모습을 떠올리고, 곧바로 상황을 이해했다.왕청여는 방시원을 찾아가 다시 함께하려 했으나, 왕청여와 노세진의 관계가 들통나버렸기에 그가 혼사 소문을 퍼뜨려 그녀와의 인연을 끊으려 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왕청여는 그 사실을 송석석이 방시원에게 말한 것이라고 오해해 이곳으로 찾아와 분풀이를 해 버렸다.
말을 마친 송석석은 그녀를 놓아주었고, 휘청거리며 의자에 주저앉아 버린 왕청여는 머리가 아파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당신이 아니라고? 그럼 도대체 누가 나를 해치려는 겁니까? 당신이 아니라면 또 누가 있냔 말입니까!"왕청여를 마주하고 있으려니 그저 말문이 막힐 따름이었다. 심지어 화도 나지 않았다. 화를 낼 가치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왕청여는 항상 친정과 방씨 가문의 보호 속에 있었기에 가장 기본적인 사고능력조차 없었다. 다시 말해 어린아이보다 더욱 어리석다.자리에 앉은 송석석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와 말다툼을 하는 건 이제 소용이 없어졌다. 도리를 설명한다 한들 알아듣는다는 보장도 없었다. 하지만 말은 해야 했다.“나와 그대 사이에 무슨 원한이 있다는 말입니까?" 왕청여는 손수건을 꺼내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두 눈은 이미 빨갛게 부어오른 상태였다. "원한이 왜 없습니까? 당신은 전북망의 첫 번째 아내였고, 우리는 같은 날에 시집가지 않았습니까? 혼수품으로 제 기를 눌러 장군부에 들어가서도 사람들에게 무시당했습니다." 송석석은 다시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다시 천천히 내뱉었다.이 여자는 사람을 돌아버리게 하는 재주가 있는 것 같다."혼수품? 제가 언제 그대와 혼수품을 비교했단 말입니까? 그대가 의식하고 비기려한 것 뿐이고, 결국 이기지 못했어도 그대가 나에게 화가 난 것이지 내가 무슨 화를 냈단 말입니까? 원한을 품고 그대를 해하려 했다고요? 제발 좀 머리로 생각한 후에 행동할 순 없습니까?" "그럼, 노세진과는..." 송석석은 답답해 그녀의 말을 확 끊어 버렸다. "제가 약당에 간 것은 영안군주의 출산을 도울 약을 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노세진은 약당의 약을 관리하는 사람이고, 당시에 단시의가 계시지 않아 그분을 찾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당신 두 사람이 서로를 피하고 있음을 느꼈지만, 그쪽으로는 생각도 하지 않았지요. 단지 방시원의 사촌 형이라 불편해하는 줄 알았습니다." 코를 훌쩍이며 눈물을 흘리고 있
평서백부의 시녀들과 하인들을 건드린 최 씨가 장군부보다 먼저 도착했다. 최 씨는 들어서자마자 먼저 혜태비꼐 인사를 올렸는데, 연왕 일가가 그녀와 함께 있음을 보자마자 얼굴이 급격히 창백해졌다. 이 일이 크게 알려지면 평서백부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될 것이었기 때문이다. 보주의 안내로 최 씨는 측정에 도착했고, 방에 들어서자마자 송석석에게 머리를 숙여 예를 갖추었다."왕비마마, 저희 집의 아가씨께서 경솔하게 굴었습니다. 제가 대신 사과드리옵니다." 그러자 송석석은 오히려 가볍게 손을 들어 사양을 표했다."마침 잘 오셨습니다. 아가씨를 모시고 얼른 돌아가시지요. 제가 장군부에도 사람을 보냈으나, 장군부에서는 아무도 오지 않을 듯합니다. 그러니 부인이 데려가시지요." 왕청여는 눈이 부어오른 채 최 씨를 올려다보았으나, 최 씨는 차갑게 그녀를 쏘아볼 뿐이었다. 최 씨는 다시 송석석을 바라보았다."그러지요, 오늘은 돌아가고 차후에 다시 찾아와 사과드리겠나이다." 최 씨는 냉랭한 눈빛으로 왕청여에 소리쳤다. "스스로 걸어갈 것인지, 하인들에게 억지로 끌려갈지 선택하세요!” 뒤에 서 있는 건장한 체격의 하녀들을 보자 왕청여는 울분이 치밀어 올랐지만 그녀는 그저 스스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송석석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이번 일은 한 번으로 끝내시오. 다음엔 절대 용서하지 않겠소." 그 말에 고개를 돌린 왕청여는 마지막으로 체면을 회복하려 했지만 송석석의 차가운 눈빛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그대로 최 씨에게 등 떠밀려 자리를 떠나 버렸다.그녀가 밖으로 나가고 최 씨는 다시 한번 송석석에게 고개를 숙였다. "왕비마마, 다시 한번 사죄드리옵니다…" "부인께서 말하셨지요?”송석석이 최 씨의 말을 끊어 버리고 직접적으로 물었다. "그녀와 노세진의 일을 방시원에게 알린 것이 부인이셨지요?" 최 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맞사옵니다. 그 일로 왕비 마마께 누를 끼쳐 정말 죄송하옵니다." 송석석은 최 씨의 인품
최 씨가 떠나고 곧이어 시만자가 방으로 들어왔다. 송석석은 이마를 문지르며 입을 열었다. "측비와 함께 정원을 구경하던 중이지 않았느냐?" 시만자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녀를 상대하기 싫어서 난 그냥 나오고, 양마마와 몇몇 시녀들을 옆에 붙여 두었어. 양마마의 손아귀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을 거야." 시만자는 의자에 앉으며 다시 물었다."그런데 그 미친 여자는 대체 왜 온 거야?" 주변을 둘러보던 송석석이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왕청여가 저지른 어처구니없는 일들을 이야기해 주었다. 이야기를 듣고 난 시만자 또한 화가 치밀어 올랐다."전북망의 아이를 품고 있으면서도 감히 내 오라버니를 찾아간 거야? 아주 뻔뻔하기 이를 데 없네? 형수 최 씨가 분별력이 있는 사람이라 다행이야. 아니면 내 오라버니가 죄책감 때문에 평생 발목 잡힐 뻔했군." "됐어. 너도 자중해. 네 오라버니도 진실을 알았으니 왕청여와 거리를 둘 거야." 하지만 시만자는 좀처럼 분히 삭히지 않았다."이렇게 뻔뻔한 인간은 또 처음이군! 밖에 또 다른 뻔뻔한 이가 있어, 정말 마주하고 싶지 않아." 송석석은 그 사람이 연왕비, 시민주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런 삶을 살기로 스스로가 결정한 것이니 네가 화를 낼 필요는 없어. 우리는 각자 자신의 삶을 살면 되는 거야." "그렇게 어리석은 사람이 아닌데 연왕의 마음을 모른다는 게 말이 돼?" "어쩌면 연왕의 마음을 너무 잘 알아서 급히 결혼한 것일 수도 있어." 시만자는 눈이 휘둥그레졌다."정말 그럴 수가 있단 말이야?" "누가 알겠어? 어쨌든, 가서 인사는 해야지. 이후로는 자주 마주칠 수밖에 없으니 얼굴도 보고 적당히 잘 지내는 것이 좋아. 그리고 요즘 어떤 풍문이 돌고 있는지 잘 지켜봐 줘. 아마 우리 장군님의 얘기일 가능성이 커. 연왕이 북명왕을 먼저 찾아왔다는 소문이라도 나면, 황제께서 기분이 좋을 리 없으니 말이야." 시만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어쩐지 이토록
사여묵에게는 오랜만에 오는 쉬는 날이였는데, 연왕이 방문하는 바람에 반나절이나 날아가 버렸다. 혜태비도 그리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그녀도 연왕 일가를 접대하고 싶지 않아졌다.“나는 무정한 자가 딱 질색이다. 선제와 형제라지만 두 사람은 전혀 다른 사람이다. 자신의 정비를 괴롭히다 못해 결국 죽게 만들다니, 참으로 인간 말종이 따로 없다.” 그러자 고 씨 유모가 다독였다.“그들이 일부러 찾아온 것인데 웃어른인 마마 덕분에 그나마 수글어 든 것입니다. 왕야와 왕비 마마께서 그들을 상대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어른이 손아랫사람을 찾아뵈는 법은 없으니, 태비마마가 나서서 왕야와 왕비 마마를 도와준 것입니다.” “알고 있다. 다만 너무 화가 나서 연왕의 뺨을 갈겨 버리고 싶을 뿐이였다.”혜태비는 불쾌한 표정으로 말을 덧붙였다.“무정한 남자는 많지만, 무정하면서 잔인하기까지 한 자는 몇 없을 것이다.” 하지만 고 씨 유모는 속으로 생각했다.‘마마께서도 남자를 몇이나 보셨다고 그러시나요?’사여묵은 송석석과 함께 매화원을 돌아왔다."옷을 갈아입고 나가서 좀 걷자고. 오늘 저녁은 밖에서 먹는 게 좋겠소." 그러자 송석석이 물었다. "어디로 가는 건가요?" “오늘은 원래 당신과 함께 시간을 보내려 했는데, 그들 때문에 반나절이 지나버렸소. 이제 남은 반나절은 멀리 갈 수는 없겠고, 단풍을 보러 만금산에 가는 게 어떻겠소? 올해 단풍이 유독 붉다고 들었소.” 그들은 요즘 계속 바삐 돌아쳤기에 감정을 나눌 시간이 거의 없었다. 하여 사여묵은 쉬는 날을 맞아 송석석과 단둘이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방시원이 추천한 만금산은 조용하고 사람들이 거의 찾지 않는 곳이었다. 반나절 동안 가벼운 산책을 즐기기엔 제격이었다.송석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만자가 지금 고청란과 검술을 연습하고 있는데 그녀를 기다려야 하지 않을까요?" 사여묵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를 왜 기다리고 있는 것이오? 오늘은 우리 둘만의 시간을 보내기로 하고 시녀도
“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태부 부인의 말에 사여묵과 송석석은 충격에 빠진 채 서로를 쳐다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이 일은 두 분께 부탁드릴 수밖에 없게 되었소.” 태부 부인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눈가에 자리 잡은 주름이 더욱 선명해졌다.송석석은 난감했다."하지만 혼사 문제라면 전문 중매인을 찾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안 된다면 고위 관직에 계신 덕망 높은 분들께 부탁드리는 것은 어떻습니까? 저는 아직 나이가 어려, 이토록 중요한 일을 맡기에는 버거울 듯합니다." 그러자 태부 부인은 다시 한숨을 쉬며 말했다. "우리 손녀는 평소에는 아주 온순하고 의젓한 아이인데 혼사에 있어서만 조금 까다로운 편이지요. 여러 번 몰래 후보를 물색해 봤지만, 하나같이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고 오직 그 사람만을 고집하고 있습니다. 집안에서 계속 설득했지만, 그녀는 그 외에는 누구와도 혼인하지 않겠다고 하여 가족들과도 냉전중입니다. 어머니 말도 좀처럼 들으려고 하지 않아서 우리는 결국 그녀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시집보내리라 다짐했습니다. 하여 맞선을 준비했지만, 중매인이 말하길 거절하였다고 하더군요. 우리 손녀를 망치고 싶지 않다면서 말이죠. 그리하여 왕야와 왕비 마마께 부탁드러 온 것입니다. 남강에서 함께 돌아왔고 왕야와 왕비 마마를 존경하고 있으니 아마 두 분이 설득하시면 듣지 않겠습니까?" 옆에 있던 안태부도 말을 덧붙였다. "사실 혼사가 성사될지 여부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니오. 우리는 그저 왜 거절한 것인지 그 이유를 알고 싶소. 망치고 싶지 않다고 한 것은 핑계로밖에 들리지 않소. 누구를 만나든 망치는 것은 마찬가지 아니겠소? 왕야와 왕비도 그리 생각하지 않소?" 송석석은 그저 입술만 벙긋거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사실 그녀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방시원이 진정으로 혼인하려는 것이 아니고, 그저 왕청여가 마음을 접게 하려고 혼사 이야기를 퍼뜨린 것이었다. 그러나 이 사실을 태부에게 직접 말할 수는 없었다.
송석석은 사여묵으로부터 복소의의 유산 소식을 전해 들었다.진왕비는 송석석에게 함께 입궁하여 문병을 가자고 제안했고, 송석석도 이를 받아들였다.본래 송석석과 진왕비는 별다른 왕래가 없었으나, 진왕이 그녀와 함께 서경을 다녀온 이후, 진왕비는 동서지간에 자주 왕래하는 것이 좋다며 송석석에게 더욱 살갑게 굴었다.하지만 진왕비는 제씨 가문의 여인으로, 황후의 종매이긴 했지만, 황후가 금족 된 이후로는 단 한 번도 황후를 찾아가지 않았다.즉, 그녀가 말하는 동서지간에 자주 왕래하는 것이 좋다는 말의 진짜 의미는 귀찮은 일이 없을 때는 교류할 수 있지만, 문제가 생기면 피하는 것이 상책이라는 뜻이었다.예전에 황제가 북명황실을 경계하던 시기에도 진왕비는 송석석을 철저히 피하며 혹여 화를 입을까 두려워했다.사실 이번에 진왕이 특별한 공을 세웠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저 황제의 가벼운 칭찬 한마디를 들은 정도였지만, 진왕에게는 그 한마디가 두 해나 자랑할 거리였다.그들은 함께 입궁하면서도 특별한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진왕비는 그저 몇 마디 가벼운 이야기만 했는데, 송석석은 그런 진왕비가 영리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때때로 일부러 어리숙한 척 행동하며, 평온하고 안락한 삶만을 바랬기 때문이다.그렇기에 단둘이 있을 때에 그녀는 더욱 쓸데없는 말을 하지도, 남에게 꼬투리를 잡힐 행동도 하지 않았다.입궁하여 복소의를 만나게 되자, 진왕비는 이 아이와 그녀의 인연이 이미 닿아 있었다며, 결국 그 인연 덕분에 품계를 올리게 된 것이니 조만간 다시 태중으로 돌아와 전생의 모자 인연을 이어갈 것이라는 위로의 말을 한 가득 쏟아냈다.그녀가 나긋한 목소리로 덧붙였다."그러니 지금 해야 할 일은 그저 몸을 잘 돌보는 것 뿐이다. 괜히 이 일로 침울해 하면 안된다. 폐하께서 정무로 바쁘신데, 소의가 매일 울기만 하면 보시기에 번거롭지 않겠는가?"진왕비의 말은 빈틈이 없어 송석석이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그녀가 한참 이야기하다가 문득 송석석을 향해 한 마디 던졌다.
자신의 궁으로 돌아오자, 숙청제는 비로소 실망한 기색을 드러냈다.아무것도 밝혀지지 않았다는 것이 곧 아무 문제가 없다는 뜻은 아니었기 때문이다.후궁에서 벌어지는 수작들은 때로는 흔적조차 남기지 않는 법이다.단신의가 복소의의 태아를 보전하기 어려울 수 있으며, 설령 무사히 태어난다 해도 선천적으로 허약하거나 정신적으로 이상이 있을 아이일 가능성이 높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숙청제는 한때 복소의에게 약을 직접 먹일까 고민한 적도 있었지만, 이 아이가 어쩌면 자신의 마지막 자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끝내 결단을 내리지는 못했다.한 번쯤 걸어보고 싶긴 했다.이번 일은 누군가 개입한 것이 분명했다. 그가 최근 들어 복소의의 궁에 자주 드나들었으니, 누군가는 불만을 품었을 것이 틀림없었다.덕비는 분명 복소의를 배려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복소의는 황제의 총애를 믿고 오만하게 굴며, 심지어는 덕비를 원망하는 마음까지 품었다. 그날 그녀에게 경고를 주었지만 아쉽게도 그녀는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덕비는 후궁을 총괄하는 인물이었다. 때문에 그녀와 수빈이 배치한 사람들이 후궁 곳곳에 퍼져 있었으니, 복소의의 태아를 해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그렇다고 해서 덕비가 직접 손을 썼을 가능성은 낮았다. 만약 덕비가 아이를 해하려 했더라면 애초에 복소의를 보호해주지 않았을 것이었다. 게다가 덕비가 이황자를 데리고 자주 드나든 것도 반은 아들을 위한 것이었지만, 반은 복소의의 태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었다.복소의가 황제에게 덕비를 험담했던 것은 반드시 덕비의 귀에 들어갔을 것이었다. 덕비가 이후 더 이상 찾아오지 않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다.그녀가 복소의에게 손을 떼자, 마음 속에 꿍꿍이가 있던 자들이 움직이기 훨씬 쉬워졌다.그가 실망한 이유는 복소의의 태아를 잃은 것 때문이 아니었으며, 그가 바라지 않았던 후계 경쟁이 결국 벌어지고 말았다는 점이었다.그는 이 일을 벌인 자가 누구인지 거의 확신할 수 있었다. 황후이거나 수빈 둘 중 하나일 것
혜의궁에서는 삼황자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삼공주는 그의 젖은 머리카락을 닦아주며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했다."어제 막 머리를 감았는데, 굳이 그 고양이랑 놀겠다고 해서 온 머리와 얼굴이 털투성이가 되었잖아. 다음번에도 이러면 엉덩이를 때려줄 거야."도자기처럼 매끄러운 분홍빛 살결의 귀여운 아이가 까만 눈동자를 반짝이며 공주의 품에 기댔다."누이, 고양이는 재미있고 귀여워요. 작은 발로 내 몸을 밟고 지나갈 때면, 포근해서 기분이 좋아요. 안고 있으면 따뜻하기도 하고요."그러자 삼공주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어마마마께서 그러셨잖아. 아바마마께서는 고양이를 좋아하지 않으신다고. 그런데 넌 자꾸 아바마마께 고양이 이야기를 해서…… 그러니 요즘 아바마마께서 널 찾지 않으시는 거야."삼황자는 누이가 머리를 말려주는 대로 꼿꼿이 앉아 있으면서도 입을 다물지 않았다."아바마마와 나는 다른 사람이잖요. 당연히 각자 좋아하는 것이 다를 수도 있는 거지요. 아바마마께서 싫어한다고 해서 나까지 싫어해야 해요? 내가 고양이를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내가 이 아이를 사랑하니, 아바마마께서 아무리 싫어하셔도 나한테 버리라고 하시면 안 되는 거죠."삼공주는 그의 코끝을 톡 하고 건드리며 말했다."말은 참 잘하네."삼황자는 웃으며 말했다."누이가 나를 설득 수 없는 건 누이의 말이 논리적으로 맞지 않기 때문이에요. 황숙께서 그러셨는데, 이치에 맞게 말을 한다면 그 누구도 이길 수 있다고 하셨거든요.""그래? 그런데 요즘 왜 황숙께 무예를 배우러 가지 않는 거야?"삼황자는 고개를 기울였다."무예라 해도 기본적인 것만 가르쳐 주시니까요. 그런 건 궁에서도 연습할 수 있어서 이미 다 할 수 있어요! 그리고 말 타기는… 아직 말 위에 혼자 올라갈 수가 없으니까 좀 더 자라서 다리가 길어지면 그때 배울거에요.""다 할 수 있다고? 못 믿겠는데." 삼공주가 말했다."정말 할 수 있다니까요!"삼황자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황숙께서 며칠 동안 같은 걸 반복해
복소의는 춘당의 입가에 스친 조소를 알아채지 못했다.춘당은 복소의가 첩여로 승급될 때부터 곁에서 그녀를 모셔왔다. 그녀는 영리하고 침착한 성품을 지녀 복소의에게 여러 차례 계책을 내주었고, 당시 황후가 그녀를 끌어들이려 했을 때도 춘당은 이렇게 말했었다.‘황후마마께서 여러 번 금족 처분을 당하신 것으로 보아, 폐하께서 이미 탐탁지 않게 여기시는 것이 분명합니다. 게다가 후궁을 다스릴 권한도 없으시니, 황후마마께는 겉으로만 응하는 척하고 실질적으로는 덕비 마마와 수빈 마마께 가까이 다가가시는 것이 더 좋을 것입니다.’그리고 춘당의 말은 역시나 옳았다. 덕비는 늘 그녀를 잘 대해주었고, 먹고 입는 것 모두 넉넉히 챙겨주었다. 그 덕분에 더 이상 감히 그녀를 깔보는 자도 없어졌다.예전의 덕비는 분명 좋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녀가 아이를 가졌다는 것을 이유로 폐하께 가까이 가려 하는 것 같아 못마땅했다."마마께서는 덕비 마마께서 오시는 것이 싫으십니까?"춘당이 그녀의 머리와 허리를 살짝 받쳐주며 말했다. 침상에 오래도록 누워만 있어 등이 아픈 그녀를 배려한 것이었다.그녀는 춘당을 신뢰했기에 자연스레 속내를 털어놓았다."내 태가 안정되었을 때는 덕비 마마께서 그리 열심히 오시지도 않으셨는데, 이제 와서 이렇게 자주 찾으시는 것이 진심이겠느냐? 분명 폐하를 의식해서 오는 것일 것이다. 게다가 폐하께서 날 아끼시기에 자주 찾아와 주시는 것인데, 매번 덕비 마마와 이황자가 끼어드는 바람에 폐하와 두세 마디도 제대로 나누지 못하지 않느냐."춘당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위로하며 말했다."마마께서는 그저 몸을 잘 돌보시면 됩니다. 그 외의 일은 신경 쓰지 마세요."복소의는 한숨을 쉬었다."이렇게 밤낮으로 누워만 있어야 하다니…… 폐하께서 오실 때만 겨우 앉을 수 있구나. 이 아이는 나를 참 힘들게 한다. 부디 황자가 되어주기를 바랄 뿐이지. 내가 이 고생을 한 보람이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춘당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반드시 마마께서 바라시는
복소의의 태는 안정적이었기에, 태의도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겨울이 지나면서 태가 점점 불안정해져, 두 번의 출혈을 경험했다. 금태의는 그녀의 태를 지키기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했다. 그 덕분에 그녀는 겨우 안정을 찾을 수 있었지만 계속해서 침상에 누워 있어야 했기에 바닥에 내려갈 수가 없었다.갑자기 이런 상황이 발생하자, 태의는 신중히 식단과 궁에서 사용하는 모든 것들을 점검했다. 하지만 별다른 문제가 발견되지는 않았다. 아마 황제가 장기간 약을 복용한 탓에 태아가 불안정해진 것일 가능성이 있었다. 숙청제는 그녀의 태에 매우 긴장하고 있었다. 숙청제는 그녀가 침상에서 요양을 시작한 후 거의 이틀에 한 번씩 그녀를 보러 갔으며, 가끔은 같이 식사를 하기도 했다.상황이 이렇게 되자 그는 수빈의 궁에 자주 가지 않았고, 삼황자를 어서방에 불러 들이지도 않았다.덕비는 후궁을 관리하는 일을 맡고 있었기에 시간이 날 때마다 이황자와 함께 복소의를 보러 갔고, 이로 인해 황제와 함께 몇 번의 식사를 함께했다.복소의는 첩여 시절 후궁에서 자신이 의지할 사람을 찾으려 했고, 비밀리에 수빈과 덕비에게 아첨하며 양쪽을 오갔다. 하지만 수빈은 늘 거만하게 행동했으며, 그녀가 한때 황제의 총애를 얻었기도 했기에, 복소의는 수빈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반면 덕비는 후궁에서 유명한 온화하고 자애로운 인물로, 공정하게 일을 처리하며 위치가 낮은 여인들까지 보살펴 주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복소의는 점차 덕비에게 더 접근했지만 지금은 조금 고심했다. 황제가 그녀에게 올 때, 덕비가 여러 번 이황자를 데리고 왔고, 그 목적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수빈의 성격에 이런 일을 할 리가 없었기에, 그녀는 오히려 수빈의 도도함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결국 불만을 마음속으로에만 토로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의지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덕비는 후궁을 관리하는 권한이 있기에 그녀를 적대할 수도 없었다. 이러한 날들이 지속되자, 그녀는 덕비가 오지 않
후궁에서는 황제의 병에 대해 추측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지금 복소의가 임신을 했다고는 하지만, 단신의가 궁에 들어와 치료하고 있다는 사실은 황제의 몸이 단순히 요양을 하면 괜찮아질 상태가 아님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황제의 편애가 계속될수록 몇몇 사람들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특히 황후는 더욱 불안해했다. 그녀는 황제의 병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에, 지금 단신의가 궁에 들어와 치료하고 있지만 치료의 효과는 확실하지 않다고 생각해, 그녀는 황제가 심각한 상태라고 여겼다. 황후는 복소의의 임신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아이의 성별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 없을 뿐더러, 설령 황자가 태어난다고 해도 그에게 까지 순서가 올 리 없었다. 그러나 삼황자에게 집중된 황제의 편애는 그녀에게 위기의식을 가져다 주었던 것이다.황제는 그녀에게 선택권을 주었을 때 그녀는 황후 자리를 선택하며 생명을 보장받았다. 하지만 며칠의 시간을 보내자, 황후는 황제가 대황자를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특히 요즘 대황자가 열심히 공부하고 있으며, 태부와 황숙도 그를 칭찬하고 있었다. 황제도 대황자의 그러한 모습에 매우 만족해 한다고 전해 들었다.이황자와 삼황자는 그녀에게 모두 위협적인 존재였다. 그러나 황후는 황제가 이황자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고 여겼다.최근 몇 달 동안 그녀는 거의 이황자를 본 적이 없었고, 또한 이황자가 이제는 예전처럼 열정적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후는 강력한 뒷배경이 없는 덕비가 여전히 유력하지 않다고 여겼지만 수빈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수빈의 아버지는 형부상서이며, 사여묵과 같은 공문이었다. 공무의 일이든 사적인 일이든 접촉이 분명 많았을 것이고, 수빈의 어머니인 이씨 부인은 송석석에게 잘 보이기 위해 공방에 많은 돈을 기부했다. 어쩌면 이미 그녀를 손에 넣었을지도 모른다.“마마, 오늘 대황자께서 또 왕야의 칭찬을 받으셨습니다.”란주 상궁이 들어오며 웃으며 말했다.황후는 별다른 감정을 보이
숙청제는 신하들을 어서방에 불러들였고, 그들은 밤늦게까지 논의했다. 논의는 결국 단신의가 들어가서 시간이 많이 늦었음을 알리며 중단을 요청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숙청제는 팔을 뻗고 웃으면서 말했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다니. 그럼 궁문도 이제 잠가야겠으니 다들 돌아가시게.”그는 여전히 기운이 넘쳤고, 특히 지금은 얼굴에 혈색이 돌아 병든 사람 같지 않아 보였다.송석석은 논의 중이던 사여묵을 기다렸다. 그들은 함께 궁을 떠나 황실로 돌아갔다. 매우 피곤했던 그녀는 사여묵의 어깨에 기대어 잠이 들었다.마차가 황실 문 앞에 도착하자 사여묵은 그녀를 안아 들었다. 송석석은 그 사실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내려오기 귀찮았기에 그대로 안겨 있었다. 그의 넓고 따뜻한 품은 정말 편안했다.그와 떨어져 있던 세 달 동안 그녀는 성릉관에서만 편히 잠을 청할 수 있었으며, 그 외의 곳에서는 늘 경계하며 지냈다. 이제 집에 돌아오니 자연스럽게 긴장이 풀렸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불안함을 느꼈다. 무언가 뜨겁고 큰 손이 자신의 몸을 이리저리 만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눈을 감은 채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단 백부 말씀을 잊으셨나요?”귓가에 따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단 백부가 이제 괜찮다고 말씀하셨소.”송석석은 감고있던 눈을 떠, 뜨겁고 열정적인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마주하며 물었다.“정말인가요?”“틀림 없소.”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입술이 덮였다.불꽃이 강렬하게 타올왔다. 침실의 온도마저 높아진 듯 했다.두 사람은 뜨겁게 사랑했다. 오랜 시간 떨어져 있었기에 마치 새롭게 결혼한 듯한 기분이었다!한 달 후, 상국은 시박사를 설립할 예정이었다. 이는 상국과 해외 북당과의 화물 교류를 담당할 기관이었다.원래의 시역업도 시박사의 운영을 전폭적으로 지원할 것이며, 상국에서 다른 국가에 판매할 수 있는 화물 목록을 정리하여 서경으로 사신을 파견해 화물 교환 협정을 체결할 것이다.이 한 달 동안 단신의는 약을
10월 15일, 사절단은 드디어 진성에 도착했다.현갑군은 그 자리에서 먼저 해산했고, 이덕회와 홍려사경은 궁에 들어가 황제를 뵈러 갔다. 그동안 몸이 약해져 혼자서는 거동할 수 없었던 진왕은 이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자신도 궁에 가겠다고 말했다.송석석은 이미 성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여묵에게 인도되어 황실로 돌아갔다.그동안 사여묵은 매일같이 성문 앞에서 그녀를 기다렸고, 때로는 낮잠시간에 직접 가서 기다리기도 했다. 그런데 오늘이 되어서야, 드디어 기다리던 그녀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이덕회와 그들이 궁에서 황제에게 보고할 때, 송석석은 이미 태비께 인사를 드린 후였다.혜 태비는 송석석이 피곤해 보이자, 가서 씻고 옷을 갈아입으라고 말했다.송석석은 사여묵과 함께 나와서 매화원으로 돌아갔다.목욕을 마치고 옷을 갈아입고 나왔을 때, 송석석의 입술이 어쩐지 조금 부풀어 있었다. 서주는 깜짝 놀라 왕야를 바라보았다. 왕비가 목욕하는데 왕야께서 꼭 직접 모셔야 한다며 들어가더니, 보아하니 제대로 보살피지 못한 것이 틀림없었다.서방에서는 염선생과 심청화가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송석석은 그들에게 서경에서의 일들을 말해주었다. 협상 결과는 그들이 이미 알고 있었기에, 송석석은 길에서 일어난 암살 시도, 원신제의 곤경, 그리고 북당의 안풍친왕이 말한 3년과 5년의 기한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었다.사여묵은 두려운 마음으로 이야기를 들었는데, 서경이 그렇게 혼란스러웠음에도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았음에 안도하며 다행이라 여겼다.안풍친왕이 성릉관을 자유롭게 오고 간 것과 그가 말한 3년, 5년 기한에 대해서, 심청화는 사부에게 편지를 보내면 알 수 있을 거라 말했다. 사부는 그들을 잘 알기 때문에 그 말의 숨은 의미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었다.이야기를 마친 후, 사여묵은 송석석이 휴식을 취하게 하기 위해, 송석석에게 더 이상 질문하지 못하게 그들을 막았다. 그는 오후에 휴가를 내어 일을 쉬려고 했지만, 황제가 사람을 보내 궁에 오라고 일렀다.송석석
성릉관에서 다섯 날을 지낸 진왕은 어느 정도 몸이 회복이 되었다.그가 회복되었다는 것은 이제 다시 진성으로 향해야 함을 의미했다.이별은 너무나 아쉬웠지만, 송석석은 눈물을 삼키며 그저 작별 인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소 대장군 앞에서 여러 번 절을 했는데, 그로 인해 소 대장군도 눈물이 거의 터져 나올 뻔했다.이덕회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바로 소 대장군이었다. 소 대장군은 상국을 위해 수십 년 동안 성릉관을 지킨 노장이었기 때문이다.송석석은 눈물을 삼켰지만, 그는 얼굴을 가리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는 이 평생 다시는 그를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이미 노령에 접어든 듯, 이전에 만났을 때보다 훨씬 더 노쇠해 보였다. 설령 황제가 그를 진성으로 돌아가게 허락한다 할지라도, 긴 여정과 고된 일정을 고려했을 때 소씨 가문 사람들이 그를 돌아가지 못하게 할 수도 있었다.소 대장군은 이덕회와 잠시 대화를 나누었다.그러자 이덕회는 더 크게 울음을 터뜨렸다.외숙모 남씨는 회 왕비에 관한 질문을 하지 않았었다가 이별을 앞두고서야 송석석을 옆으로 데려와 그녀의 상황을 물었다.송석석은 회 왕비가 지금 감옥에 있다는 사실과 란이가 그녀를 위해 손을 써주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렇게 힘든 상황은 아닐 거라며, 혹시 태자가 세워지면 대사면이 내려져 그녀가 나올 수도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남씨는 살짝 안도의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외조부께서 말씀하시지는 않으셨지만, 엄청 신경 쓰고 계실 거다. 세상에 정말로 모진 부모는 드무니까. 네 외조부는 모진 분이 아니시다. 그때 그녀가 란이에게 그렇게 까지 모질게 대했던 게 안타깝다. 란이가 여전히 그녀를 돌보아야 하다니."송석석이 말했다. "걱정 마세요. 란이는 지금 편안하고 자유롭게 지내고 있어요. 그리고 앞으로도 더 잘 지낼 거예요.""그렇지. 분명히 잘 지낼 거야." 남씨는 아쉬움이 가득한 눈빛으로 송석석을 바라보다가, 이내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