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망은 왕청여를 바라보며 그녀의 잃은 두 시녀가 떠올라 괴로운 말투로 말했다.“오월과 유월의 일은 미안하오. 내가 그들을 보호하지 못했소.”“말 돌리지 마십시오. 당신의 마음속에서 난 어떤 위치인지 물었습니다.”왕청여는 주먹을 불끈 쥐고 집착하여 물었다.전북망은 옆에 있던 나무를 붙잡고 심호흡을 하더니 그제야 화를 가라앉히고 가볍게 말했다.“말을 돌리지 않았소. 다만 그들의 죽음에 대해 유감스럽고 안타까움을 표현했을 뿐이오. 그리고 당신은 내 마음속에서 당연히 본처의 위치에 있지 않겠소?”“그냥 본처의 자리뿐입니까?”왕청여는 눈을 붉히며 끈질기게 캐물었다.“당신은 나에게 흔들린 적이 한 번도 없단 말입니까?”그녀의 말을 들은 전북망은 멍해져서 왕청여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들의 혼사는 목씨 부인이 중매한 것이고 황제의 뜻이기도 하니 두 사람이 서로 존경하고 공경하면 된다고 하려고 했다. 하지만 왕청여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본 그는 차마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그는 왕청여가 그에게 자신을 사랑하는지 물어볼 줄은 몰랐다.그가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하는 것을 본 왕청여는 그의 뜻을 알아채고 참담하게 웃었다.“그러니까 사랑은 조금도 없고 부부의 정 밖에 없다는 말씀이시군요.”전북망은 힘겹게 말했다.“난 당신의 부군이니 당신을 존경하고 지켜줄 것이오.”“자객이 오월과 유월을 죽이고 나까지 죽이려고 할 때 당신이 목숨을 걸고 날 구하러 온 게 책임감 때문이었습니까?”왕청여는 한 발짝 물러서더니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책임뿐이었습니까?” “난…… 당신은 내 부인이니 당신을 보호하는 건 당연한 도리요.” 전북망은 자신이 송석석에게 어떻게 대했는지 다시금 떠올라 말을 하면서도 자신이 없었다. 왕청여는 실망이 극에 달한 듯 손을 뻗어 눈물을 훔쳤다. “내가 당신의 집에 시집와서 가문을 관리할 뿐만 아니라 시어머니를 모시고 시누이를 참으며 당신의 그 추하고 악독한 평처까지 참아줬는데 이제 와서 나에게 조금도 애정이 없다고 하시
송석석은 밤에 무기를 가지고 나간 데다 장군부에 자객이 침입할 것을 미리 알고 찾아간 것이니 황제의 의심을 사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아무리 현갑군의 부지휘사라고 하지만 그래도 함부로 밤중에 무기를 들고 다닐 수 없었다. 그러니 자객의 행방을 안다는 건 더욱 불가능한 일이었다. 황제는 그녀가 곳곳에 정탐꾼을 분포했다고 의심했고 그녀를 의심하는 건 곧 북명황실을 의심하는 것이었다. 송석석은 눈을 들어 직언했다. “황제폐하께서도 송씨 가문이 멸문을 당했다는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서우를 찾아온 후부터 저는 그가 변을 당할까 걱정이 되어 사저에게 상경한 사람 중 행적이 의심스러운 사람들을 지켜봐 달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아니나 다를까 며칠 전에 상경해서 롱주에 묵은 몇 사람이 있었는데 무공도 대단한 데다 객잔에 입주한 후에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고 무언가를 꾸미고 있는 것 같아 서우를 해칠까 봐 사람을 붙여 지켜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다 그날 밤 그들은 야행복을 입고 롱주의 2층에서 뛰어내렸는데 황실이 아니라 청작거리로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묵 승상과 태부의 저택이 그쪽에 있는 것을 알고 그들이 중신에게 해를 가할까 봐 쫓아갔는데 그들이 청작거리로 간 것이 아니라 장군부로 향할 줄은 몰랐습니다.” 숙청제는 그녀의 설명을 듣고 웃으면서도 날카로운 눈빛으로 물었다. “그럼 넌 장군부와 원한이 있을 텐데 왜 구하려 나섰느냐?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말했다. “무고한 생명이기도 하고 장군부와 사람을 죽일 만큼의 원한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현갑군의 지휘사이기도 하니 못 본 척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숙청제는 고개를 살짝 들고 말했다. “너의 그 말도 일리는 있다. 하지만 그날 밤 자객의 목표가 이방이었다는 건 알고 있느냐?” 그러자 송석석이 대답했다. “그건 모릅니다. 제가 그들의 손과 발을 부러뜨리자 전 씨 둘째 어르신께서 그들을 묶었고 필명이 경위들을 데리고 달려와 저는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숙
전쟁 후로부터 사국의 변성에는 줄곧 중병이 주둔해 왔다. 특히 지금은 상국과 협상해서 인질로 시몬성을 바꾸려는 중요한 시기이기 때문에 인질을 가둔 감옥에도 중병을 파견해서 지키고 있었다. 사여묵 등인이 변성에 들어간 지 며칠이 지났다. 그들은 드디어 척사가 갇힌 곳을 알아냈는데 변경의 관문을 지키는 위소였는데 금성탕지처럼 견고했다. 그리고 그 높은 벽 안의 감옥 구조도 낱낱이 밝혀졌다. 왕표에겐 5일의 기한이 있었는데 그들은 내일이 5일 기한의 마지막 날이라는 것을 몰랐다. 사여묵은 내일 빅토르가 왕표와 다시 협상할 것을 알고 있었다. 비록 5일의 기한은 모르지만 사여묵은 왕표가 그의 명령을 듣지 않고 협상을 미루지 않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사여묵은 내일 빅토르가 아당산으로 협상하러 가는 동안 척사를 구출해 낼 예정이었다. ‘빅토르의 신변에는 고수들이 많아서 아당산으로 갈 때 대부분의 고수들을 데리고 갈 것이야. 전쟁에 오랫동안 시달리다 북명군에게 패배를 당해서 빅토르는 북명군에 대한 두려움과 증오를 가지고 있지. 아당산에 가서 협상을 하는데 만약 왕표가 직접 거절한다면 빅토르는 오래 머물지 않고 다음날 밤늦게라도 돌아올 것이야. 하지만 왕표가 협상할 때 시간을 끌 수 있을지 두고 봐야 하는데 어정쩡한 태도를 취해 빅토르를 잡고 있으면 모레쯤 돌아올 것이야. 그럼 구조 시간은 충분할 텐데.’ 염 선생은 구출 전략을 세웠다. 한 명은 밖에서 호응하고 세 명은 침입해서 사람을 구하는 전략이었다. 밖에 남아 있는 사람은 장대성으로 정하고 시간은 내일 밤 유시로 정했다. 유시로 정한 이유는 그 시간에 수비를 바꾸기 때문이었다.세 사람은 비록 무공이 높지만 금성탕지처럼 높은 벽을 뚫고 지하 감옥까지 들어가 사람을 구출하기에는 난도가 높았다. 하지만 사여묵과 그의 사부님은 밤을 틈타 몇 번이나 침입했었다. 비록 지하감옥까지 가지는 않았지만 지형에 익숙하고 수비 상황을 알고 있기 때문에 승산은 있었다. 한편 변성 인근 벨강 옆 통나무집에 수염이 덥수룩하고
6월 18일 저녁, 열 사람은 찬물이 담긴 그릇을 들었다. 그들은 몇 년 동안 차와 술을 한 방울도 마시지 않았다. 변성에서 찻잎은 사치품이라 그들은 살 수 없었고 탁주는 저렴하긴 했지만 그들은 술에 취해 해서는 안 될 말을 해 죽음을 당할까 봐 한 방울도 마시지 못했다. 그들이 유일하게 술을 산 것은 송원수와 여섯 명의 소장군들이 희생되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였는데 그들은 술을 사서 땅에 부어 원수에게 제사를 지냈다. 그리고 그날 밤, 그들은 이불속에 숨어 밤새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그들이 슬퍼할 수 있는 시간은 하룻밤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땐 남강을 수복하기 전이라 다음날에도 눈물을 닦고 불바다에 뛰어들어야 했던 것이었다. 나중에 남강을 수복한 후 빅토르가 군사를 이끌고 돌아와 이곳을 지키고 있어 그들은 더 이상 남강으로 소식을 전할 수 없었고 국경 출입도 아주 어려워졌다. 예전에는 정보를 보낼 때 식량과 상품을 호송하는 대열에 섞여 시몬에 갔었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으니 그들도 밖으로 나갈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남강을 수복한 후 어떻게 빠져나갈지 계속 궁리하며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결국 실수로 장 씨가 인질로 잡혀간 것이었다. 장 씨가 체포된 후 고문을 당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사국 병사들이 찾아오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들에 관한 얘기를 하지 않은 것 같았다. 의지가 굳센 장 씨는 죽을지 언정 굴복하지 않았다. 그러니 남은 사람들도 더 이상 두려울 게 없었다. 그들은 모두 짚신을 걷어차고 일제히 허리를 굽혀 새로 만든 헝겊신을 신었다. 그리고 누더기 같은 옷을 버리고 야행 옷으로 갈아입었다. 이 열 벌의 야행 옷은 그들이 직접 만든 것이었다.그들은 모두 칼과 검을 들고 전장에 나가 적을 물리치던 장사들이니 여자들이 하는 바느질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몇 년 동안 옷을 살 돈이 없어 혼자 천으로 옷을 만들 수밖에 없었는데 부근에 있는 아주머니들에게 물어보며 배운 것이었다.그들도 한때는 무기가 없었다. 포로 진영에서 나
사여묵은 그들을 보자 심장이 목구멍까지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왜 갑자기 사람들이 나타난 거이지? 게다가 갈고리 밧줄을 이용해야 올라갈 수 있을 정도면 무공도 별로인 것 같은데. 대체 위소로 온 목적이 무엇일까? 그들이 발견되기라도 한다면 오늘 밤의 구조계획은 물거품으로 될 것이다.’그들이 숨어있는 곳은 어두운 곳이라 상대방이 빠르게 벽을 타고 와도 소리를 낼 수 없었다.‘에라 모르겠다. 수비가 끝나기 전에 무조건 쳐들어가야 해.’방시원도 앞에 세 사람이 숨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은 어두운 곳에 숨어있었는데 머리까지 뒤집어쓰지는 않았지만 검은 야행복을 입고 있어 적인지 아군인지 판별할 수 없었다. 그들이 가벼운 몸집으로 자신이 가려고 했던 곳으로 날아가자 방시원은 어리둥절해졌다.‘혹시 우리를 구하러 온 것인가?’하지만 방시원은 바로 자신의 생각을 부정했다.‘그럴 리 없을 거야. 비록 그쪽과 연락을 취할 수 없지만 원수가 바뀌었고 지금의 원수는 왕표 뿐이야.’방시원은 왕표가 어떤 사람인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왕표는 왕청여의 오빠라 방시원에겐 형님이었다. 무장 출신이지만 오랫동안 전쟁터에 나가지 않았고 탁상공론에만 능했는데 그렇다고 또 실력이 없다는 건 아니었다.다만 왕표는 성격이 오만해서 장단점을 따져봤을 때 그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는 방식을 택했을 뿐이었다.협상과 구출, 방시원은 왕표가 분명히 전자를 택하지, 두 가지 모두를 고려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그는 잠깐 생각하더니 손을 들어 잠입 의사를 표시했다.위소는 매우 커서 모두 열두 채의 건물이 있었다. 그리고 지하 감옥은 열한 동과 열두 동 사이에 단독으로 된 방이 있었는데 그 방으로 내려가면 지하 감옥이었다. 하지만 거긴 분명 많은 병력이 지키고 있을 것이었다. 모든 곳이 방어 태세를 바꾸고 있어 그들이 이리저리 숨어 다니면 무사히 열한 동에 도착할 수는 있을 것도 같았다. 그들은 벽에 붙어 살금살금 걸어가 지하감옥 입구에 병사들이 얼마나 있는지 보려고
세 줄기의 검은 그림자가 빠르게 날아갔다. 사실 적절한 시기라는 건 없다. 작은 방 주변에 불이 켜져 있기 때문에 대낮처럼 밝지는 않지만 적어도 어떤 물체나 사람의 움직임을 볼 수 있었다. 특히 수백 개의 시선 아래에서 그들이 아무리 빠르고 경공이 뛰어나다고 해도 결국 작은 방 앞에 서서 문을 부숴야 지하 감옥에 들어갈 수 있었다. 지하 감옥에 들어가면 그들은 독 안에 든 쥐나 다름없었다. 전에 사여묵과 무소위가 이미 조사해 봤기에 이런 상황이 될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의 원래 계획은 무소위와 염 선생이 호위에게 달라붙어 시간을 끌고 사여묵이 지하 감옥으로 들어가 사람을 구출한 후 재빨리 장대성에게 넘긴 뒤 다시 돌아와 무소위와 염 선생을 돕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방시원이 있어 호위들을 더 쉽게 붙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여묵의 그림자는 곧장 방으로 향했다. 방문은 철로 되어 있어서 부수기 쉽지 않았지만 사여묵은 쇠도 진흙처럼 쉽게 깎을 수 있는 칼을 꺼냈다. 칼의 무게는 가벼웠지만 칼날은 아주 날카로웠다. 그가 진기를 담아 칼날을 몇 번 내리치자 철문이 한쪽으로 기울었다. 그는 발로 걷어찬 후 뒤를 돌아보자 사부님이 긴 칼을 들고 대문을 지키고 있었고 염 선생은 수비 병과 싸우기 시작했다. 그는 사부님을 걱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염 선생이 걱정되었는데 염 선생의 무공은 최고는 아니었지만 경공이 좋아 경공으로 적들을 지치게 한 후 반격할 기회를 노리기만 하면 되었지만 위험성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리고 방시원 등인이 쳐들어온 것을 본 사여묵은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사람이 많으니 철문만 지키고 있으면 내가 지하 감옥으로 가서 사람을 구출할 수 있을 거야.’ 솔직히 말해서 이곳은 감옥이 아니라 밀실과 지하 통로였다. 여긴 전쟁에서 사국이 이기지 못한다면 주장들을 옮기거나 숨길 수 있는 곳으로 만들어진 지하 밀실이었다.하지만 사여묵은 이 땅굴과 밀실에 대해 너무 가볍게 생각했던 것이었다. 아래층으로 들어가면 갈
낮에 아당산에서 열린 상담에서 왕표의 태도는 무척 단호했다. 협상 전에 방천허와 제린은 모두 그에게 빅토르 앞에서 북명왕을 언급하지 말라고 설득했지만 왕표는 그들이 북명왕의 부하였으니 북명왕을 보호하려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일단 승낙은 했지만 마음속으로는 다른 계산이 있었다. 앞서 여러 차례 협상할 때 그는 금이나 곡물, 포목, 비단 등으로 척사를 바꾸자고 흥정했지만, 빅토르가 동의하지 않아 협상은 지속되었다. 그리고 이번엔 왕표의 인내심은 바닥이 드러났다. 그는 이미 척사를 위해 많은 양보를 했다고 생각했다. 5천 냥에서 만 냥으로 오른 것도 모자라 식량 3천 석, 비단 2천 필까지. 이런 대가로 인질을 바꾸려고 하는데 상대방은 여전히 동의하지 않았다. 그래서 왕표는 그들이 너무 욕심이 많다고 생각했다. ‘시몬성으로 바꾸는 건 절대로 안 돼. 북명왕이 힘겹게 되찾아온 시몬성을 내 손으로 내놓으면 난 모든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들 게 분명해.’ 이번 협상이 시작되자 그는 다시 한번 식량을 5천 석으로 늘렸지만 빅토르는 여전히 거절했다. 그러자 왕표는 화가 치밀어 올라 책상을 치며 소리쳤다. “내가 보기엔 당신들이 성의가 없는 것 같군. 난 이미 최대한 양보를 했는데 아직도 만족을 하지 않다니. 그렇다면 이 협상도 계속할 필요가 없겠군.” 번역관이 그의 말을 번역하자 빅토르는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더 이상 협상하지 않을 건가? 정말로 당신들의 정탐꾼을 희생시키겠다는 것인가?” 그러자 왕표가 말했다. “성의가 없는 건 당신들이지. 협상할 성의가 없다면 안 하면 된다. 이것 또한 북명왕의 뜻이니 마음대로 하게.” 방천허와 제린은 그의 말을 듣고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분명 왕야에 대해 언급하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나?’ 북명왕이란 세 글자는 빅토르도 알아들을 수 있어 번역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긴장해서 물었다. “북명왕? 북명왕이 왔다는 건가? 그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왜 그가 협상하러 오지 않았는가?”번역관이 빅토르의 말을 번역했다
왕표는 두 사람의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고 속으로 이상하게 생각했다. ‘나보고 협상하라고 해놓고 내가 분명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는데 두 사람이 빅토르를 막아서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는 남강을 수복한 후에야 통병이 되어서 장성들이 원래 불복했다. 그런데 협상마저 실패한다면 그의 위엄을 손상시킬 테니 그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방천허와 제린에게 명령했다. “그만 돌아오너라.” 그리고 번역관에게 말했다. “빅토르에게 말하거라. 그쪽에서 성의가 없으니 협상 종료하겠다고. 협상할 성의가 있다면 내가 말한 조건을 받아들이라고.” 번역관이 말을 전하자 빅토르는 왕표를 보았는데 그의 표정에는 이미 인내심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방심할 수 없어 명령했다. “당장 성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제린과 방천허는 쫓아가 빅토르를 계속 막았다. 제린은 두 손을 모으고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며 말했다. “빅토르 원수님. 왕 원수님은 척사를 모르니 그에게 정이 없어서 시몬성과 바꾸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흰 척사와 함께 전장에 나간 적이 있어 매우 중히 여깁니다. 그러니 잠깐만 기다려주십시오. 저희가 가서 왕원수를 설득해 보겠습니다.” 그러자 빅토르가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 “설득할 수 있었다면 벌써 설득했겠지. 그리고 너희 북명왕이 시몬성과 인질을 바꾸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럼 협상할 필요가 없지 않으냐?” “아닙니다. 저희 왕야님은 시몬으로 오시는 길이니 며칠 후면 도착할 것입니다. 왕야께서도 척사를 매우 중시하시니 그가 오면 이 일은 분명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북명왕이 여기로 오고 있다고?” 빅토르는 말하며 제린의 얼굴을 뚫어져라 보았다. 그러자 제린을 고개를 끄덕이며 진정성이 있는 표정으로 말했다. “네, 맞습니다. 며칠 후면 도착할 겁니다.” 방천허는 물러나 왕표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원수님, 진정하십시오. 비록 우리가 협상을 종료하기로 결정했지만 협상시간을 최대한 오래 끌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
시만자는 원래 그들의 몸에 더 많은 구멍을 뚫어줄까도 생각했으나 보주의 말을 듣고 멈추기로 했다. 몇 번 더 찌른다면 피가 너무 빨리 흘러 그들이 너무 쉽게 죽을수도 있어서였다.송석석은 조상 묘지 앞의 작은 사당에서 향을 가져와 불을 붙여 향로에 꽂았다. 그러고는 목이 메어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무릎을 꿇고 세 번 큰절을 올렸다. 그녀는 절을 올리면서 먼저 떠난 가족들이 저세상에서 이 장면을 보고 있을 것이라 믿었다.사여묵 역시 향을 피우고는 그녀 옆에 무릎을 꿇고 그녀의 손을 잡았는데, 송석석이 이미 눈물범벅이 되어 있어 그는 더욱 마음이 아팠다. 사여묵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범인이 이미 처형되었으니 장모님도 저세상에서 이제는 편히 쉴 수 있을 것이오.”송석석은 그들이 정말로 안식을 얻을 수 있을지 알 수 없지만 그들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비록 복수는 했지만 마음속 고통은 조금도 가시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강해지고 행복해져야만 그들에게 진정한 위로가 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서경의 두 정탐꾼은 아직 죽지 않았으나 과다 출혈로 의식이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그들은 서경 말로 무언가 중얼거리고 있었지만 송석석과 시만자 등은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고 오직 사여묵만이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차렸다. 바로 “송구하다”라는 말이었다.그들 역시 자신의 잘못을 알지만 단지 인정하기 싫었을 뿐이었는데, 이제 죽음을 앞두고 있으니 그동안 저지른 일들이 하나하나 떠오르는듯 했다. 송구하다는 말이야말로 그들이 이 묘지 앞에서 비로소 할 말이었다.사여묵이 송석석과 보주에게 전했다. “이자들이 송구스럽다고 말하는구나.”보주는 여태 애써 눈물을 참고 있었는데, 사여묵의 말을 듣자마자 결국 눈물을 터뜨리며 시만자의 품에 와락 안겼다.“그게 무슨 소용입니까? 송구스럽다고 해서 이 모든 일이 없어지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보주는 목이 찢어질 듯한 울음을 터뜨리며 외쳤다. 단지 송구하다는 말로 모든 죄
일행은 이상서와 함께 안으로 들어갔고 송석석은 내내 보주의 손을 놓지 않았다.그리고 곧 두 명의 서경 정탐이 끌려 나왔는데 그들의 옷은 이미 너덜너덜해지고 피가 묻어있었으며, 얼굴은 이목구비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부어 있었다. 그들은 땅에 무릎을 꿇고 있었는데 몸이 앞쪽으로 쏠려 거의 넘어져 엎어질 지경이었다.보주는 눈에 핏대를 세운 채 그런 그들을 노려보았다.그녀와 송석석은 단 하루도 진북후부의 멸문에 대한 복수를 잊은 적이 없었다.이제 대세는 정해졌고 그녀도 마침내 가족과 송 부인 등에게 복수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그녀의 가슴 속에 있던 슬픔과 분노는 산을 무너뜨릴 듯한 기세로 솟구쳐 나왔다.보주는 당장 달려가 주먹과 발길질을 퍼붓고 싶었으나 이상서 앞에서 무례하게 굴어 왕야와 아씨의 얼굴을 깎아내릴 수 없었다.이대인이 말했다. “이 두 정탐은 형부에 보내졌을 때까지도 죽음을 각오한 듯 오만한 태도였습니다. 하관이 직접 고문을 한 것은 아니지만, 일부 사람들이 개인적인 감정 때문에 뺨을 몇 대 때렸습니다. 그들의 몸에 난 상처도 이미 잡혀 올 때부터 있었습니다.”그러자 사여묵은 평 사저의 말이 떠올랐다. 그들은 역시나 심하게 맞은 후 여기에 데려온 것이다.사여묵은 가볍게 허리를 굽히고는, 몽동이에게 그들을 데리고 송가의 조상 묘지에 가라고 지시했다.바람에 흔들리는 등불이 그림자를 드리워 날은 앞길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웠다.몽동이는 그들을 마차 앞에 묶고 말을 몰았다. 그러던중 송가의 멸문이 떠올릴 때면 그들에게 채찍을 휘둘렀다.송가 조상 묘지 앞에 도착하자, 몽동이는 발로 그들을 묘지 앞으로 걷어찼다.보주도 그들 앞으로 달려가 주먹과 발길질을 퍼부었다. 둥글게 말아 쥔 손바닥이 뺨에 연달아 떨어졌으나 마음속의 분노와 슬픔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았다.모두 그녀를 막지 않았고 그녀가 분노를 표출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언제나 사랑스럽고 순진했던 그녀가 이토록 광기에 휩싸인 모습을 보이자 사람들은 마음 깊
서경 사절들이 경성을 떠난 후, 숙청제는 소 대장군과 전북망에게도 죄를 내렸다.소 대장군은 군 기강을 엄격히 다루지 못한 책임이 있었으나 장기간 성릉관을 지키며 노고가 많았던 점과, 전북망과 이방이 녹분성으로 출정했을 당시 그가 여전히 생사를 오가는 상황이었던 점을 감안해서 성릉관으로 돌아가 여생을 보내도록 했다.또한 어명을 내려 소삼야를 성릉관 총병으로 임명하고 소팔야를 부총병으로 임명하였으며 국경선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이상 성릉관에는 소씨 가문이 필요하다는 것을 다시금 천명하였다.소승은 마침내 소부에서 나와 입궐하여 숙청제에게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그의 가족들은 모두 성릉관에 있었기에 파직을 당한 후에도 당연히 성릉관으로 돌아가야 했다. 총지휘관의 자리는 내려놓았으나 그동안의 공로는 영예를 받지 못했음에도 그는 후회가 없었다. 애초에 그가 추구한 것도 이런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전북망 역시 동일한 죄에 처할 뻔했으나 서경에서의 협상 중 중요한 제보를 한 공로를 인정받아 현철군 부사령관으로 강등되었고 3년간 녹동이 삭감하게 했으며, 오월을 정사령관으로 승진시켰다. 더불어 숙청제는 특별히 은혜를 베풀어 북명황실이 서경의 두 정탐조 모두 사적으로 처단할 수 있도록 했다.사여묵은 송석석의 의견을 묻기 위해 돌아갔다. 그녀가 직접 처리할지 아니면 형부에 맡길지를 결정하기 위해서였다.송석석은 보주를 불러 의견을 물었다. 이방은 송가를 멸문시킨 주범이었지만 그들을 잔인하게 학살한 것은 서경의 정탐조들이기 때문이었다.보주는 한 번도 사람을 죽여본 적이 없어 사여묵과 송석석 앞에 무릎을 꿇은 채 이를 악물며 말했다. “소인은 그들이 죽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보고 싶습니다. 송가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서라도 말입니다.”그러자 송석석은 심장이 찔리듯 아파왔고 눈가가 뜨거워졌다. “좋다, 널 데려가겠다!”그녀도 한때는 망설였었다. 직접 그들을 죽이기도 싫었고 심지어 그들을 보는 것조차 싫었다. 그들을 보면, 미친 듯이 본가로 달려갔던 날 목격한
이러한 결과는 두 나라 모두에게 이익이었다. 장공주는 돌아가면 많은 일을 준비해야 했기에 국경 문제에서는 절대 물러설 수 없었다. 만약 물러선다면 그녀가 하려는 일은 성공하기 어려울 것이고 백성들의 지지도 얻지 못할 것이다.조약 서명 다음 날, 서경 사절들이 황제에게 작별 인사를 올리러 궁에 들어왔다. 숙청제는 그들에게 송별연을 베풀 생각이었으나, 장공주는 빨리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즉시 출발 의사를 밝혔고 그도 이를 받아들였다.형부는 이미 이방을 죄수 수레에 태워 회동관으로 보냈는데, 소승이 보이지 않자 서서히 불안에 휩싸여 크게 소리쳤다. “왜 나 혼자인 것이냐! 소승은? 소승도 책임을 져야하지 않겠느냐?” 감랑중은 서둘러 그녀의 입을 틀어막고 수란석과 함께 인계했다.서경 사절들은 진성에 들어온 후 처음으로 이방을 보게 되었는데 그들의 눈에는 분노의 불길이 가득해 당장이라도 이방을 태워버릴 듯했다.이방은 수레 안에서 몸부림치며 전북망을 찾으려 했다. 하지만 회동관 밖에는 길게 늘어선 행렬과 경위대, 그리고 송석석과 사여묵도 있었으나 전북망은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소리칠 수도 몸부림칠 수도 없었고 수레 안에서 머리조차 제대로 내밀 수 없었다. 앉아도 서기도 불편한 이 죄수 수레는 마치 옛날에 그녀가 경역을 쇠창살에 가둬놓고 활로 괴롭히던 때 같았다. 그 당시는 통쾌했지만 이제는 두려움만이 가득차 버렸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송석석은 오늘 일부러 보주를 데리고 왔다. 두 여인은 죄수 수레에서 다섯 걸음 떨어진 곳에 서서 이방의 두려움과 혼란을 똑똑히 바라보았다. 보주는 이방을 국공부로 끌고 가서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었지만 이방은 이제 서경의 죄인이었기에 그녀가 직접 복수할 수는 없었다. 그녀의 눈에는 그저 이방을 향한 증오와 피 같은 눈물만이 맺혀 있었다.“아씨, 저 계집을 한 대 때려도 되겠습니까? 저는 힘이 약해서 심하게 때리지는 못할 것입니다. 냉옥 장공주께 말씀 좀 전해주실 수 있겠습니까?”송석석은 보주가 이 한 대
송석석은 단 백부의 말에는 뭔가 의미심장한 뜻이 담긴 듯해 잠시 당황했다. 장공주가 그녀를 바라보자 송석석은 담담한 표정으로 장공주의 눈을 마주 보며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평온하게 행동했다.단 백부에게는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능력이 있었기에 그가 이런 말을 한 것은 장공주의 속마음을 알아차렸기 때문일 것이다. 단신의가 약을 남기고 떠나려 하자 장공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예를 갖춰 인사했다.“신의님께 감사드립니다. 상국에 다시 오실 기회가 있으면 반드시 성의를 다해 보답하겠습니다.”왠지 모르게 장공주는 그의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송석석은 단신의를 부축하고 청작은 약상자를 메고 각자 갈 길을 갔다. 장공주는 자리에 앉아 금태의가 약병을 열어 검토하는 것을 바라보았으나 시선은 이미 흐려진 상태였다. ‘의사는 몸뿐만 아니라 마음도 치유하는 사람이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단신의는 그녀의 마음을 읽어낼 수 있었다. 여인이 큰 뜻을 품는 것을 남성 권위에 대한 도전이라 여기지 않고 평등한 관점에서 바라본 듯했다. 그것은 장공주가 오랫동안 추구해 온 바였다.모든 남성이 그녀의 뜻을 반대하는 건 아니라는 사실에 장공주는 깊이 감동했다. 갓 생겨난 이 생각에 대한 지지와 인정은 그녀에게는 마음을 어루만지는 약과도 같았다.송석석은 단신의를 약왕당에 직접 모셔다 드리기로 했다. 마차 안에서 단신의는 한참 침묵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서경이 변화하면 더 나아질 것이야.”송석석은 그의 숨겨진 뜻을 이해해 장공주의 길이 험난할 것임을 짐작하고 조용히 마음속으로 그녀를 응원했다. 만약 그녀가 황제가 된다면 상국과의 문제도 평화로운 협상을 통해 해결할 수 있어 전쟁도 일어나지 않기에 양국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오후가 되자 협상이 다시 시작되었다. 사전 통보를 받은 사여묵은 곧바로 홍려사로 향했고 이후 궁으로 들어가 상국에 대한 서경의 보상안을 황제로부터 허락받아 협상장으로 돌아갔다. 서경 측에서는 수란석과
다음 날 아침이 밝자 안운여는 송석석을 찾아가 단신의를 불러달라고 부탁했다.한편 고공은 홍려사로 향했고 협상은 오후에 다시 시작될 예정이었다. 단신의는 장공주가 자기를 초대하러 올 것을 예상하고 일찍부터 기다리고 있었다. 송석석이 도착했을 때 단신의는 이미 마차를 준비했고 송석석이 입을 열기도 전에 청작에게 약상자를 준비시키며 말했다. “회동관이라 했느냐?”송석석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백부님, 다 알고 계셨습니까?”“장공주의 두통이 심하니 내가 아니면 남은 협상도 무사히 마치기 어렵다. 돌아가서 필요한 일들을 처리하는 건 말할 것도 없고.” 단신의는 자기 의술에 대해 여전히 확신을 갖고 있었다.송석석은 그와 함께 마차에 오르며 물었다. “장공주의 두통은 어찌 생긴 겁니까? 혹시 편두통입니까?”“편두통도 일부 원인이지. 맥을 짚어보면 장공주의 편두통은 오랫동안 지속된 것으로 아주 심각하더군. 또 오랫동안 책상에 엎드려 일하다 보니 목뼈가 변형되고 혈기가 머리로 공급되지 않아 혈액이 막혀 있는 상태이다. 어젯밤 금태의의 진단이 틀린 건 아니지만 그 향이 잠깐만 막힌 혈을 통하게 했을 뿐이기에 약효가 떨어지면 다시 두통이 시작될 것이다.”“금태의가 정말 이 문제를 몰랐을까요? 수년 동안 치료했는데도 크게 나아지지 않은 이유가 뭘까요?”“침술로는 증상이 호전될 수 있다. 금태의도 공을 들였겠지만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거지. 게다가 장공주는 무리한 일로 상태가 이미 악화됐으니,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목숨까지 위태로울 수 있다.”단신의는 약상자를 두드리며 말했다. “일찍이 청작에게 1년 치 약을 준비해 오게 했다. 장공주가 나를 믿는다면 충분히 회복될 수 있다.”송석석은 고개를 끄덕이곤 현재 두 나라의 상황을 떠올렸다. 장공주가 일을 제대로 처리할 수 없다면 상국에도 절대 좋은 일이 아니었다.회동관에 도착하자 단신의와 청작은 안으로 들어갔고 송석석은 밖에서 대기하고, 곧 필명이 교대를 하러 올 것이기에 단신의가 진료를 마치면
서경은 이번에 조건을 낮춰서라도 협상을 조속히 성사시키려 할 것이며, 가장 가능성 높은 방안은 국경선 문제를 양보하거나 잠정적으로 논의에서 제외하는 것이라고 다들 의견을 모았다.염구진이 말했다. "연왕의 여러 차례 계략이 모두 실패한 걸 보면 지금 그가 아주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게 분명합니다. 아마 인맥 대부분도 이제는 사온이 장악하고 있을 테니 사온이 몰락하면 연왕은 정말로 진성에서 손발이 묶인 상황이 될 것입니다."연왕부는 지금 염구진의 말처럼 정말로 속수무책인 상황이었다. 무상은 여러 번이고 회왕과 숨겨둔 다른 인맥을 이용했지만 이제 거의 모두 뿌리째 뽑힌 상태였으며 또 다시 열 명 이상의 사사를 잃고 말았다.그들은 회동관의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단신의가 회동관에 들어간 사실만으로도 이미 계획이 실패했음을 알 수 있었다. 심지어 장공주가 혼수 상태에 빠졌을 때도 구혼선충의 모충은 장공주의 몸속 유충을 제어할 수 없으니 이제 계획이 성공하기는 어려울 것임을 알게 되었다.무상은 비록 실망했지만 냉옥 장공주의 강인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구혼선충의 조종을 이겨내는 일은 매우 어려운데 무공이 뛰어나고 의지가 강한 사내조차도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지금까지는 오직 한 사람만이 구혼선충의 조종을 버텨낼 수 있었다. 그 사람은 비범한 신분과 남다른 강인함을 가진 인물이었다.무상은 이번 상대가 강력한 인물임을 깨닫고 본인의 패배를 순순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냉옥 장공주가 있는 한 서경은 상국과 전쟁을 일으키지 않을 것입니다. 정원제가 즉위한 후 여러 계획을 세우며 여론을 조성했으나 결국 모두 역풍이 되어 돌아올 것입니다. 그는 원래 황위에 관심이 없었고 그의 마음속에는 선황태자가 가장 중요합니다. 가문과 나라는 그 후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하여 우리와 동맹을 맺기를 원했지만 이 동맹은 그의 야망에 기반한 것이 아닌 허상에 불과합니다. 동맹이 무너진다면 우리도 연루될 가능성이 높으니 정원제에게 기대를 걸 수는 없습니
향병의 행동에 장공주는 결심을 더욱 굳히고 그들을 불러 모았다. 그러고는 겉옷을 걸친 채로 의자에 앉아 정신을 가다듬고 말했다.“내일 오후에 다시 협상을 재개할 것이니, 조건은 협상 가능하도록 하지요. 너무 고집부릴 필요는 없습니다.”수란석은 눈을 크게 뜨며 반발했다. “협상이라? 어떻게 협상한단 말이오? 설마 그들이 국경을 물러서라고 해도 그걸 가만히 받아들이란 말이오?”장공주는 이미 결심이 선 듯 단호하게 말했다. “국경 문제는 일단 보류할 것입니다. 내일이나 모레 협정을 체결하고 즉시 귀국하는 것이 목표지요.”“그건 안 되오…” 수란석이 강하게 반발하자 장공주는 그를 냉랭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의견을 묻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내 결정이니 불만이 있어도 모두 삼가세요.”수란석은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고는 소리쳤다. “이건 독단이오! 국경 문제를 보류하면 황제와 조정의 문무백관들, 그리고 백성들에게 어떻게 설명할 것이오?”장공주는 위엄 있는 눈빛으로 그를 단숨에 제압했다. “설명은 내가 하면 되지 수 상서가 할 일이 아닙니다.” 그녀는 조정을 오랜 시간 이끌어온 인물로서 항상 권위와 기세가 넘쳤다. “당장 나가서 초안을 다시 작성하고 상국에 더 많은 보상을 요구하는 대신 국경 문제는 제외하십시오. 그리고 2년 후에 이 문제로 다시 협상하는 것으로 하지요. 나는 협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고 싶습니다.”수란석은 이를 악물며 불만을 드러냈다. “나약하오, 정말 나약하오!” 그는 장공주가 서둘러 귀국하려는 이유를 알고 있었기에 속으로 향병을 원망했다. “난 동의할 수 없소. 국경 문제는 분명히 해야 하오.”장공주는 화가 나 향로를 내던지며 강하게 명령했다. “당장 나가서 다시 작성하십시오.”한편, 북명황실의 의논 자리에서는 새로운 국면이 펼쳐졌다. 단신의는 정좌에 앉았고 무소위조차도 그 옆에 앉아 있었다. 만종문의 구성원들은 세력을 등에 업고 몸을 꼿꼿이 세우며 잘난 척했다.그러자 단신의가 설명했다. “이번에 사용된
향병은 뺨을 맞은 얼굴을 가린채 억울함과 분노를 모두 토해냈다. “장공주님. 태자 전하께서 얼마나 비참하게 사망하셨는지 잊으셨습니까? 그건 우리 서경 백성들의 영원한 고통인데 어찌 원수를 갚지 않을 수 있단 말입니까? 태자 전하는 장공주님의 친동생이셨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모진 선택을 할 수가 있습니까?” 장공주가 움켜쥔 손바닥은 젖어 있었고 불빛에 비친 그녀의 창백한 얼굴은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너는 내가 그를 위해 복수를 하지 않으려고 전쟁을 반대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장공주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더니 눈빛에 노기로 가득 찼다. 그녀는 아직 허약하지만 손을 뻗어 향병을 가리키며 말했다. “향병, 다른 사람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는 이해했을 것이다. 하지만 난 내 모든 계획과 절차를 너에게 말했고, 내가 걱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너도 잘 알고 있지 않느냐? 나를 가장 잘 알아야 하는 사람이 복수에 눈이 멀어 정세를 조금도 파악하지 않다니. 넌 경역에게 충성을 다했으니 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거라. 그가 지금 상국과 전쟁이 일어나기를 바라겠느냐?” 그러자 향병이 울먹이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복수를 하지 않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저도 지금 내우외환의 상황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식량 30만 석과 소성을 요구하시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승리할 수 있으니까요. 장공주님, 저희는 지금 승리로 하늘에 계신 태자를 위로해야 합니다.” 장공주는 오열하는 향병을 보며 말할 수 없는 분노와 침통함을 느꼈다.그녀는 안운여와 곽아정을 올려다보더니 말했다. “너희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너희도 향병의 말에 동의하느냐? 뒤에서 나를 모해할 생각 하지 말고 이 참에 다 말하거라.” 곽아정과 안운여는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 “장공주님, 동의할 수 없습니다.” 향병은 고개를 돌려 실망스러운 눈빛으로 안운여를 바라보며 말했다. “안운여, 너도 동의하지 않는다는 말이냐? 넌 전하의 보살핌을 잊었느냐? 복수할 생각이 전혀 없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