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에서 깨었을 땐 이미 다음날 정오였다.잠이 계속 쏟아졌지만, 궐에 들라는 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어났다.머리를 빗고 단장을 마친 송석석이 하품을 하며 물었다. “보주, 내 친구들은 일어났어?”“아직 주무시고 계세요.” 보주는 어젯밤 송석석의 방에 있는 부드러운 침대에서 잠을 잤다. 아씨를 지킬 수 있어 얼마나 마음이 편안했는지 몰랐다.“깨우지 말고 계속 자게 해. 사흘 밤낮을 자도 신경 쓰지 마라.” 사실 그녀도 내일까지 깨지 않고 자고 싶었다.보주는 그녀의 상투를 빗질해 주고 보석이 박힌 비녀를 골라 꽂았다. 얼굴에 있는 멍 자국을 보고 있자니, 보주는 마음 한편이 아팠다. “네, 아씨. 진복 아저씨한테 들었어요. 장군님과 도련님들도 전쟁에서 돌아오면 너무 피곤해서 며칠씩 잠든다고 하셨어요.”“그래.” “궐에서 보낸 사람이 태후마마의 사람이더냐, 황제폐하의 사람이더냐?”보주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황후마마의 사람입니다.”송석석이 의아한 듯 물어다. “황후마마?”그녀는 제 황후(齊皇後)와 왕래하지 않았다. 매산에서 돌아와 궐에 들 때면 태후에게 인사를 올리고 지나가던 길에 황후에게 인사를 올린 게 전부였다.그렇게 딱 한 번 인사를 올린 적 있는 황후였기에, 그녀는 황후의 얼굴로 자세히 몰랐다. 황후의 부친은 이부 상서(吏部尚書)이고, 제씨 가문(齊家)은 백 년 된 명문가이다. 조상들 대다수가 현신(賢臣)과 대학자(大儒)로 제황후는 규방(閨房)에서 유명했다.일찍이 당시의 태자, 지금이 황제와 혼사를 했기에 내각을 나가기 전부터 유명했었다. 다만 송석석은 그녀와 직접 대면한 적이 없었다. 그녀는 그 이전에 매산에 있었고, 돌아온 뒤에는 어떤 연회에도 참석하지 않았었다.그렇기에 제 황후와 친분이 없었다. 자신을 왜 궁으로 불렀는지 이유도 알 수 없었고, 궐에 들어가서 직접 대면해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침 식사를 한 송석석은 보주와 함께 궐로 향했다.궐에 들어서자, 제 황후를 옆에서 모시던 상궁 란
송석석과 보주는 황후가 자리에 앉을 때까지 기다린 후에야 앞으로 나가 무릎을 꿇고 예를 표했다. “황후마마의 부름을 받고 몸종과 함께 왔사옵니다.”황후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위에서 들려왔다. “그만 일어나시오.”“황후마마, 감사하옵니다.”송석석과 보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황후는 송석석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황후는 예전에 송석석을 만난 적 있는데, 그때도 송석석이 매우 아름다워 살짝 놀랐던 기억이 있었다.고된 전쟁을 치르고 돌아온 그녀의 피부는 많이 상해 있었음에도 여전히 절세미인이었다.황제가 자신에게 송석석을 불러 후궁으로 들어올 생각 있는지 물어보라는 말에 그녀는 마음 한구석이 시큰거렸다. 송석석처럼 무술에 재능이 있으면서도, 절세미인이기도 한 여인이 궁에 들어오면 황제의 총애를 한 몸에 받을 것이다. 물론 신분과 지위가 황후보다 못하겠지만, 황제의 마음을 얻는 것만으로 이미 승자인 셈이다.다만 현명했던 황후는 대놓고 적대심을 드러내지 않았다. 황후는 미소를 지으며 송석석을 향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전 장군은 처자의 소중함을 몰라보고 눈앞의 새로운 것에 눈이 팔려 이리 귀한 여인을 알아보지 못했구려.”황후의 칭찬인 것 같으면서도 칭찬 같지 않은 말에 송석석은 기분이 묘했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다만 황후가 자신에게 왜 이런 소리를 하는지 궁금할 뿐이었다.황후가 차 한 모금을 들이키고, 손톱에 낀 금색의 호갑투(護甲套)로 찻잔 가장자리를 천천히 어루만지더니 큰 결심을 한 듯 송석석을 쳐다보았다.“그래도 명주는 명주인 법, 흙모래에 가려졌다고 해서 너무 상심하지 마시오. 명주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터니.” 송석석은 자신에게 지아비를 소개해 주려는 것 같은 황후의 의미심장한 말에 불쾌했지만, 티를 내지 않은 채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신녀는 지나간 일을 뒤돌아보지 않사옵니다. 사람은 앞날을 보며 살아가야 한다 생각하옵니다. 신녀를 명주에 비유한 것은 당치 않으신 말씀이시옵니다. 신녀는 그저 어릴 때부터 매산에서 무예를
장춘궁에서 나와 출궁을 하던 중, 사여묵과 송석석이 마주쳤다.술에서 덜 깬 사여묵은 어제 입고 온 핏자국이 얼룩덜룩한 전투복과 녹슨 투구를 한 채, 금옥관을 묶고 있었다. 붉은 궁문에 기댄 그에게서 익숙한 땀 냄새가 났다.나른한 눈빛으로 쏟아지는 햇살을 멍하니 쳐다보는 사여묵에게 다가간 송석석이 손을 흔들었다.“어제 궐에 묶으셨어요?”“그래.” 사여묵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오늘 차림이 예쁘구려. 부잣집 규수 같소.”송석석이 웃음을 터트렸다.“원래 부잣집 규수였습니다만.”뒤늦게 정신을 차린 사여묵이 고개를 끄덕였다.“황후께서 궐에 들어와 후궁이 되라고 하셨소?”송석석이 눈을 살짝 치켜떴다. “어찌 황후마마께서 하신 말을 알고 계신 거예요?”사여묵이 자신의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어젯밤 태후마마를 만났으니 오늘 황후마마께 문안을 올리러 올 것 같았소.”“정확하셔요. 왕야님께서 이 사달이 난 내막을 알고 계시나 봅니다.” 송석석이 사여묵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황제 폐하께서 저를 궐에 들이시려는 이유에 대해 알고 계세요?”이리저리 알아보는 것보다야 사여묵에게 직접 묻는 편이 훨씬 신뢰가 있었다.어두운 눈빛을 한 사여묵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안을 수락했소?”송석석은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심정으로 답했다.“수락이라뇨? 줄곧 오라비로 여긴 폐하의 후궁이 될 수 없습니다.”사여묵은 한결 밝아진 얼굴로 송석석을 바라보았다. “어렸을 때, 폐하와 왕야님께서 제 오라비 때문에 우리 집에 자주 찾아오셨고 저도 자연스레 두 분과 놀았지요. 그때부터 두 분을 제 오라비로 여겼습니다.”그녀의 말을 듣던 사여묵이 멍한 얼굴로 물었다. “오라비?”송석석은 사여묵이 자기 대신 황제에게 마음을 전해주길 바랐다.“그렇습니다. 폐하와 왕야님은 제게 오라비 같은 존재예요.”사여묵이 다시 물었다. “폐하를 오라비로 여기는 것이오? 아니면 나도 오라비로 여기는 것이오?” “두 분 다요.”송석석이 단호하게 말했다.‘이
황제의 비웃음에 사여묵의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 아직은 오라비에 불과하지만, 그녀가 후궁이 되지 않으면 둘 사이 감정은 천천히 키울 수 있다고 믿었던 사여묵은 황제에게 인사를 건넨 자리에서 일어났다.황제는 그의 뒷모습을 힐끔 쳐다보더니 오 공공을 찾았다. “오 공공!”“폐하, 찾으셨사옵니까?” 오 공공이 신전문을 열고 들어와 몸을 숙였다.“송석석이 3개월 안에 인연을 찾지 못하면 귀비로 봉한다고 전하거라.”오 공공이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폐하, 그리하겠사옵니다.”“북명왕에게도 짐의 말을 알릴 거라. 단 쓸데없는 말은 한마디도 꺼내지 마라.” 황제의 명에 오 공공이 답했다. “그리하겠사옵니다.”“가서 전하라.”황제는 눈을 내리깔며 담담하게 말했고 오 공공이 나간 지 얼마 안 돼, 황후가 찾아왔고 황제는 그녀가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를 알고 있었다. “말씀하시오!”황후는 상궁을 데리고 들어왔다. 상궁의 손에 쟁반이 들려 있었다는데 쟁반 위에는 탕약이 놓여 있었다.황후가 온화하게 말했다. “어제 과음을 하셨다는 말을 듣고 신첩이 직접 간을 보호하는 탕약을 다려 왔사옵니다.”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황후께서 마음이 깊구려. 이리 가져 오시게.”황후는 직접 탕약을 들고 황제에게 다가가 숟가락으로 탕약을 떠 그에게 건넸다. “폐하, 드시지요.”황제는 황후가 들고 온 그릇이 평소 좋아하던 그릇인 것을 알아차리고 탕약이 든 그릇을 들어 벌컥벌컥 마신 뒤 물었다. “송석석은 뭐라고 하든가?”황후는 란희에게 빈 그릇을 건넨 뒤, 황제의 옆에 앉아 부드럽게 말했다. “신첩, 송 장군에게 후궁에 관한 말을 꺼내자 매우 완곡하게 거절의사를 밝혔사옵니다. 심심해할 신첩 위해 말동무가 되어 주겠답다고 하옵니다.”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황후는 조금도 불쾌한 기색을 보이지 않는 황제의 눈치를 조심스레 살피더니 잠시 망설였다. “여동생이 없는 신첩은 송 장군의 제안이 매우 마음에 들었사옵니다.”황제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국공부로 들어오자마자 오 공공이 따라 들어와 황제의 말을 전했고 송석석은 너무 놀라 입만 벙긋거렸다.‘석 달 동안 지아비를 찾지 못하면 후궁이 되라니?’그녀는 오 공공만 남겨두고 다른 사람들을 물렸다. “오 공공, 폐하께서 이러는 이유가 있으십니까?”만약 석 달 동안 지아비를 찾지 못하면 자신의 후궁이 되라는 황제의 말이 다른 사람에게 전해지면 아무도 그녀와 결혼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결국 권력을 이용해 그녀를 압박하고 있는 황제 때문에 그녀는 후궁이 될 수밖에 없는 처지였으나, 그럼에도 그녀에게 석 달이라는 시간을 준 게 이상했다.“석 달 동안 아씨와 혼례를 치르려는 사람이 나타나면, 그건 폐하께 맞서는 일이기도 하지만 아씨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실런지요?”“폐하께서 왜 내 혼사에 관여하시는 겁니까?”오 공공이 답했다. “아씨께서 폐하를 오라비로 여기시니 폐하께서도 오라비의 마음으로 동생의 혼사를 걱정하는 것입니다.”오 공공의 말에 송석석은 폐하의 미움을 받을 각오로 용감하게 말했다. “어떤 오라비가 동생이 혼례를 안 치른다고 자신의 부인으로 삼습니까?”오 공공이 한숨만 내쉬며 아무 말이 없었고 송석석은 결국 어떤 실마리도 잡을 수 없었다. 그녀와 황제는 어릴 적 같이 뛰놀았던 게 전부였다.매산에서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아버지와 오라버니를 잃고 어머니를 따라 종종 궐에 들었을 때, 황제는 그녀를 친동생처럼 여기며 매우 온화하게 대했다.‘왜 갑자기 전쟁에서 돌아온 나를 후궁으로 맞으시려는 거지? 후궁을 들이고 싶거든 폐하께서 간택을 하면 되거늘 어찌 한 번 다녀온 날 후궁으로 들이려는 걸까? 정말 내게 마음이 있다면 내가 전북망과 혼례를 하기 전에 어머니께 말해 궐에 들이는 방법도 있었어.’하필 그녀가 이혼하고 전쟁을 치르고 돌아온 뒤에야 후궁으로 들이려는 게 이해되지 않았을 뿐더러 황후가 그 얘기를 전하기 위해 그녀를 궐에 불렀다.후궁이 되지 않겠다는 뜻을 들은 황제는 그녀에게 석 달이라는 기한을 주며 혼례를 재촉하는
송석석은 친구들이 남강 전쟁을 도와준 것으로 충분히 고마웠고, 더는 신경 쓰는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아 오 공공이 찾아와 전한 말을 그들에게 알리지 않았다.“남강 전쟁에서 우리 아버지와 오라버니를 희생 당했고, 그들의 복수하려고 난 남강 전쟁에 참가했어. 날 도와 함께 싸워준 이 은혜는 꼭 기억할게.”무림의 규칙은 원수는 갚아야 하는 것이고 그들은 친구인 송석석을 도와 복수를 하는 게 당연했다. 송석석이 호탕하게 말했다. “배불리 먹었으면 거리에 나가서 물건 좀 사갈래? 사문에게 내 물건 좀 가져다줘.”“폐하께서 보상을 주지 않아 은자도 없는 걸?” 몽동이가 송석석을 바라보며 말했다. “폐하께서 잊으신 건 아닐까?”송석석이 미소 지었다. “그럴 리가 없어. 폐하께서 직접 세 개 군에 상을 내리겠다고 했어. 우린 전공을 세웠고 분명 상을 받을 거야.”“폐하께서 황금 백 냥을 줬으면 좋겠다. 10년 치 임대료를 해결할 수 있다고.”몽동이가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몽동이가 속한 고월파는 매산에 있지만 매산은 만종문 소유이기에 매년 만종문에게 임대료를 내야 했으나 고월파는 벌어들이는 수입이 없었고 몽동이의 사부님은 고지식한 사람이었던 탓에 문파 제자들은 내공 무술을 닦는데만 열중했지 산에서 내려와 장사하지 못했다.“연지가루를 몇 개 사서 누이들과 나눌 거야. 소탈하고 소박한 사람들이라 내가 챙기는 수밖에 없어. 돌아갈 때 채단도 몇 개 사가야 내가 전쟁에 나갔다고 뭐라 하시지 않을 거야... 비녀도 사야지!”시만자가 그의 말을 끊었다. “네 사부님은 전쟁에 나갔다고 비난할 분이 아니지만 그런 물건을 사서 돌아간다면 네 열 손가락을 자를 것이야.”시만자의 말에 모두 웃음을 터트렸다.때마침, 부 장군 장대성이 그들에게 상을 건네주러 왔다.네 사람은 황금 2백 냥을 받았고 송석석은 성을 무너뜨리는 큰 공을 세웠기에 황금 천 냥을 받았으며 정4품 장군으로 승진했지만 어떤 직책도 주지는 않았다.앞니로 황금을 살짝 깨무는 몽동이에게 시만자가 자신
김순희는 고작 이런 상금을 받기 위해 아들과 며느리를 전쟁에 보낸 게 아니었기에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승진 기회를 놓친 게 이방 때문인 것도, 전북망이 이방 대신 벌을 받았다는 것도 알게 된 김순희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원래 몸이 좋지 않았던 김순희는 분노에 못 이겨 밤중 기절했고 의관을 불러와 주사를 맞아 겨우 회복되었다.그러나 신의에게 약을 사기 위해선 이미 손에 쥔 돈이 없었다. 수중의 돈은 일찍이 탕진했고 차례를 치르기 위해 돈까지 빌렸다. 전북망이 상으로 받은 황금 2백 냥으로 빚은 갚은 뒤 약을 처방받는 수밖에 없었다.‘목숨을 걸고 싸운 결과가 고작 황금 2백 냥이라니!’ 자기가 기절했는데도 수발을 들지 않는 이방을 보며 분노를 금치 못했다. “어떻게 저딴 걸 집에 들일 수 있어? 부부가 군공을 얻지 못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이리 효심이 없어서야.”“어머님, 의관이 움직이지 말라고 하셨어요.” 전북망이 침대 곁을 지키며 그녀를 집중시켰다.“오라버니, 이방이 더럽혀졌다는 게 사실이에요?”밤새 김순희의 곁을 지킨 사람은 전소환이었다. 며칠간 마을에 이방에 관한 소문이 끝없이 돌았었다. 친구들에게 자기 새언니라는 사람이 얼마나 더러운 사람인지 알게 된 전소환은 수치심에 죽을 것 같았다. ‘곧 혼인해야 하는데, 새언니라는 사람이 이 사달을 낸 탓에 혼삿길이 막혔어!’전북망이 눈살을 찌푸렸다. “예의 없게 누구 이름을 불러?”“더러운 그 사람을 언니로 인정하고 싶지 않아요.”전소환이 입술을 깨고 침대 옆에 앉았다. “어머니, 둘째 오라버니가 받은 상금으로 여름옷 좀 만들어주세요. 벌써 6월이나 됐는데 입을 옷이 없어요. 작년에 송석석이 만들어준 것만 입어서 다들 비웃어요.”“그래, 사거라.” 김순희의 대답에 전북경이 화를 냈다. “둘째가 받은 상금은 모두 어머니의 약값과 장군부 지출로 써야 하는데, 옷이 웬 말이냐!”전소환은 집안에서 막내이기에 모두 그녀를 귀여워했고 꾸지람 한 번 못 들어보고 귀하게 자랐
사나운 눈빛에 깜짝 놀란 전소환은 자기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서다가 침대 옆에 주저앉았다. “어머니, 이 여자가 절 때렸어요.”김순희는 사랑스러운 자기 딸이 이방에게 뺨을 맞자 참고 있었던 분노가 터졌다.“둘째야, 네 부인 단속 좀 해라.”전북망은 달려와 뺨부터 날리는 자기 부인을 보고 있자니 머리가 아팠다. “어떻게 애한테 손을 댈 수 있소? 잘못했으면 꾸중을 하면 되지, 왜 때리시오?” 이방이 눈썹을 찌푸리고 말했다. “때리면 안 돼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 사람을 탓해야죠.”“내가 말한 것도 아니고 바깥사람들이 그랬다는데, 그럼 다른 사람도 때리지 그래요?”전소환이 흐느끼며 말했다. “바깥사람은 때리지도 못하면서 왜 나한테만 화내요?”이방의 얼굴이 싸늘해졌다. “그건 그들의 일이고, 바깥사람이 어떻게 굴든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야. 그래도 내가 네 언니인데 단속은 해야 하지 않겠어? 아버님은 상관하지 않으시고 아주버님과 형님도 나 몰라라하고 어머님은 종일 골골 대기나 하시고, 약 살 돈도 없는데 네가 철없이 옷이나 장신구를 사달라고 하지. 적어도 난 군공을 세운 적 있는 장군인데, 네가 뭔데 내 험담을 해?” 이방의 말에 전북망과 민씨는 얼굴이 파랗게 질렸고 노부인은 손가락으로 이방을 가리키며 입을 열지 못한채 얼굴만 붉혔다.전북망은 손을 들어 이방의 뺨을 힘껏 내리쳤다. “말 조심하시오!”이방은 자기 뺨을 감싼 채 전북망을 멍하게 쳐다보았다.“절 때리신 거예요?”전북망도 깜짝 놀라서 자기 손만 바라보았다. 그간 겪었던 수모와 가족들에게 예의없게 구는 이방의 태도에 화가 다시 한번 이방의 뺨을 때렸고 이방도 화가 나서 모퉁이에 있는 의자를 한 손으로 들어 전북망의 머리 쪽으로 휘둘렀다. “어디 누가 죽는지 봅시다!”전북망은 이방이 의자를 휘두르는 모습에 무의식적으로 옆으로 몸을 돌렸고 그 의자는 그대로 전북망의 뒤에 있던 전기에게 부딪쳤다.“아버지!”전북망과 민씨가 동시에 소리를 질렀다. 전기는 머리에
사실 이런 자리에서는 모두 입맛이 그다지 좋지 않기 마련인지라, 많은 음식들이 한 입 먹고 나면 다시 치워지곤 한다.하지만 북당의 사람들은 정말 음식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어떤 요리가 나와도 모두 다 먹어버렸으며, 가득 채운 술잔도 순식간에 비웠다. 그들을 시중드는 궁인들도 꽤 힘들었을 것이었다.시만자는 그들이 춘만루에서 먹었던 그 한 끼를 떠올렸다. 그때도 남은 음식이 하나도 없이 모든 것이 비워졌었다.그녀는 송석석에게 무언가 말을 건네고 싶었다. 하지만 식사 소리 외에는 아무 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기에 말을 꺼내기 어려웠다.그러나 그들은 눈짓만으로도 서로가 하고자 하는 말의 의미를 알아차렸다.시만자는 북당 사람들이 이곳에 등장한 것이 협상과 관련이 있을 거라고 했고, 송석석도 그렇게 생각했다.하지만 그녀는 그들이 중재자로 온 것인지, 아니면 서경을 돕기 위해 온 것인지 확실하게 알 수 없었다. 만약 중재자라면 협상 또한 오래 걸리지 않고 조약을 체결할 수 있을 테니 더 좋을 것이었다.하지만 만약 서경을 돕기 위해 온 것이라면 협상은 공방전이 될 것이 분명했다. 북당이 그들의 방패가 된다면 상국이 협상에서 어려움을 겪을 것이 틀림 없으니 말이다.이덕회와 홍려사경 등 상국의 사절단들은 상황을 어느 정도 눈치챈 듯 했다. 그래서 그들은 처음의 그 기쁨을 잃은 대신 마음속으로 여러 가지를 고민하는 모습이었다. 눈앞의 음식도 별로 먹고 싶지 않은 듯했지만, 모두가 식사를 하고 있었기에 그들도 어쩔 수 없이 천천히 먹었다.이 궁중 연회는 그들이 참석했던 연회 중 가장 이상한 연회였을 것이다. 마치 폭풍이 다가오는 듯한 무서운 고요함이 느껴졌다.궁중에서 준비한 요리는 총 32가지였다. 그러나 각 요리의 양은 매우 적었으며, 궁인들은 음식을 하나씩 들고 들어와서는 다시 하나씩 치워갔다.누군가 술잔을 들고 싶어했지만, 역시 원신제와 마찬가지로 한 번 쓱 훑어본 후, 술잔을 비우고 다시 내려놓고는 식사를 계속했다.마침내 32가지 요리가 모두 올라갔
다음날, 궁중 연회는 신시에 시작되었고, 여전히 수란키가 직접 그들을 맞아 궁으로 안내해주었다.예상했던 대로 즉위식은 이미 끝난 상태였고, 이번 연회의 주요 목적은 국경선의 협상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궁에 들어간 후에도 다른 나라의 사절단을 보지 못했다.궁 안은 황실의 측근과 문무 백관들로 가득했다. 하지만 그들은 상국의 사절단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고, 친근한 분위기도 없었다.이런 자리에서는 역관의 도움이 필요했기에 대화의 주제가 그리 넓지 않아, 서로 간단한 인사 정도만 나눌 뿐이었다.다른 나라의 사절단이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입석할 때 원신제가 상국의 사절단에게 말했다."오늘 북당에서 귀빈들이 오십니다. 곧 도착할 것인데, 여러분이 그들과 바로 친해질 것이라 믿습니다."이덕회는 즉시 흥분하며 말했다. "북당의 귀빈이라 하셨습니까? 어떤 분이 오시는지요?"그가 흥분하는 것은 당연했다. 왕이장이 가져온 임양운의 육안총과 포차는 모두 북당에서 개량된 것이었고, 임양운 선생이 북당에서 배운 적이 있었다고 들었기 때문이다.상국의 병부상서로서 그는 정말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싶었다.북당은 상국이 항상 배우고자 했던 본보기였다. 그들의 첨단 무기와 치국책은 상국보다 훨씬 진보적이었다.물론 국가의 상황이 다르기에 모든 것을 배울 수는 없을 테지만, 대화를 깊이 나누면 분명히 얻을 것이 있을 것이었다.원신제는 그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도착하면 알게 될 것입니다."연회는 지루하고 피곤했지만, 북당의 귀빈이 온다면 그 이야기는 달라진다.모두가 기대하고 있을 때, 한 외침이 들렸다.“북당 안풍친왕과 왕비께서 도착하셨습니다!"이덕회는 놀라서 입을 막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의 눈에는 기쁨이 넘치고 있었다.송석석도 사부로부터 안풍친왕의 호를 들어본 적이 있었다. 사부는 그를 매우 존경한다고 했다. 생각치도 못하게 오늘 그를 만날 수 있으니 그녀도 말할 수 없이 기뻤다.반면, 만두와 몽동이 그들은 비교적 담담했
원신제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씁쓸한 게 한 가지 더 있네. 지금까지 짐은 장공주의 신분으로 여인에게도 과거 시험을 볼 자격이 있어야 한다고 높이 외쳤지. 하지만 황제가 된 지금, 어쩔 수 없이 각 세력들의 이익을 고려해줘야 하고 그자들이 짐에 대한 적대심과 경계를 약화시킬 수밖에 없다네. 짐은 이제 고려한 일이 더 많아졌어. 가끔은 속에 천불이 나서 반대파 세력들의 가슴에 칼을 꽂고 싶기도 하네.”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송석석이 대꾸했다.“사실 한 나라의 황제나 대신들은 남녀를 막론하고 결국 최종 목적은 같지 않겠습니까? 폐하께서도 그렇듯 다들 나라의 안정과 백성들의 평안을 바라고 있는 겁니다. 나라에 영원히 전란이 일어나지 않고 창성해야 폐하께서 원하시는 개혁을 진행하셨을 때 반대의 목소리가 잦아드는 것입니다. 그러니 폐하, 현재 가장 중요한 건 폐하의 자리부터 굳건히 지키시는 겁니다.”대놓고 얘기하지는 않았지만 원신제는 송석석의 말뜻을 확실하게 알아들었다. 현재까지 나라가 혼란에 빠져 있고 각 세력들의 제지도 심하기에 이 국면을 해결하는 것도 충분히 힘든 일이다.황제의 자리도 흔들리고 있는 지금, 원신제가 개혁까지 고집하려는 건 더욱 위험한 일이었기에, 미래가 불안정할 수밖에 없었다.시만자 또한 송석석의 말에 동의하는 바였다.“사실 한 가지 일을 처리하는 데에 방법이 한 가지밖에 없는 건 아닙니다. 강경하게 상대방과 맞서 싸우는 것도 방법이지만 이는 가장 현명하지 못한 하책입니다. 한 사람의 성격도 바꾸기 쉽지 않은데 천 년이나 넘게 지속된 규정을 바꾸는 건 더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폐하께서 관념의 씨앗을 심으시면 언젠가 누군가가 폐하께서 남긴 발자국을 따라 한 걸음씩 나아갈 것입니다.”잠시 머뭇거리던 시만자는 이내 다시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갔다.“저와 석석도 매산에서 무술을 공부할 때 그랬습니다. 다들 저희를 비웃고 하찮게 여겼지만 저희는 결국 실력으로 그자들을 한 명씩 쓰러트렸습니다. 구호만 외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실력이
서경의 황궁은 금빛으로 반짝였으며 기세가 어마어마했다. 어둠이 깃든 고요한 밤에는 기 장엄함이 더욱 돋보였다.첫 번째 궁문을 들어서고 나서도 마차는 궁 안을 자유롭게 누빌 수 있었다.궁 안 곳곳에는 커다란 나무들 위에는 등불이 잔뜩 걸려 있어 대낮처럼 밝았으며, 누군가가 몰래 나무 위에 숨어있는다고 해도 너무 밝아서 바로 들킬 정도였다.수란키는 앞장서서 걷다가 한 궁전 밖에 도착했는데, 궁녀 두 명이 다가와 수란키와 서경 언어로 몇 마디 나누다가 고개를 돌려 송석석과 시만자에게 환하게 웃으며 허리를 숙여 인사를 올렸다.수란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송 대감님, 만자 낭자, 폐하께서 두 분에게 궁전으로 모시라고 하셨습니다.”두 궁녀가 앞에서 길을 안내했고 송석석과 시만자는 이내 궁전 안으로 들어갔다.휘황찬란한 궁전 내부에는 커다란 조각 기둥이 양측에 세워져 있었으며 그 모습은 압박감이 넘쳤다.원신제는 용상에 앉아 환한 미소로 두 사람을 반겼지만 얼굴에는 피로함이 가득해 보였다.송석석과 시만자는 이내 인사를 올렸고 원신제는 그들에게 편하게 앉으라고 했다.그리고는 송석석을 쳐다보며 말을 걸었다.“짐은 송 대감이 사절단과 함께 이곳으로 온다고 하여 며칠 전부터 계속 기대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보니 너무 반갑네.”송석석은 웃으면서도 진지하게 대답했다.“폐하께서 황위에 오르셨다는 소식을 듣고 소인도 너무 기뻤습니다. 원하는 바를 이루신 걸 감축드립니다.”송석석은 원신제를 힐끔 쳐다보았다. 원신제에게서 냉옥 장공주의 모습이 보였고 예전과 크게 변한 건 없었으며 여전히 피로해 보이고 여전히 진중하고 엄숙했다.냉옥 장공주에게 있어서 황제의 역할이든 실권을 손에 쥔 장공주 역할이든 똑같이 신경 쓸 일이 많을 것이다.“원하는 바를 이루느라 많이 힘들었네. 하지만 다행히도 이제 일처리는 훨씬 쉬워졌네.”원신제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조금 뒤, 궁녀들이 서경 특색이 돋보이는 다과들을 내왔다. 송석석과 시만자는 조금 전에 저녁 식사를 했기에 배가 고프지
서경 수도에 도착했을 땐 8월 13일이었기에, 송석석 일행이 떠난 지 한 달은 족히 넘은 상황이었다. 점심이 되자, 햇빛이 따스하게 비추어졌다.진왕은 마차 안에 몸을 웅크려 누운 채 입성에 진입했다. 하지만 마지막 자객들은 머릿수도 많고 기세도 등등해, 서경 지대에 들어서고 나서도 송석석 일행은 총 일곱 번이나 습격을 당했다. 현갑군은 대부분 부상을 당했고 시만자마저 어깨가 칼에 찔렸지만 다행히 신경까지 다치지는 않았다.진왕이 이렇게까지 크게 논란 건, 자객에게 습격을 당할 당시, 그는 변소 안에 있었다.일을 마치고 변소를 나선 순간, 갑자기 나타난 자객이 검으로 진왕의 가슴을 베었고 그 검을 진왕의 가슴에 꽂으려던 순간, 송석석이 제때에 나타나 손에 들고 있던 검을 한 발 빠르게 자객의 가슴에 꽂았다.하지만, 이내 자객의 머리채를 뒤로 확 잡아당긴 덕분에 진왕은 무사할 수 있었다.그는 가슴팍이 조금 베인 게 전부였지만 큰 중상을 입은 것 마냥 밤새 괴로운 신음소리를 내고 나서야 겨우 진정이 되었다. 수도에 도착하자 수란키가 관원들을 데리고 성문 앞에 서서 진왕을 반겼다. 수란키는 이제 서경의 승상이 되었다.한눈에 송석석을 알아본 수란키는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했다.“송 장군님,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여전히 기품이 넘치시네요.”송석석은 말에서 내려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인사를 하며 상대방을 힐끗 살폈다. 솔직히 조금 전에 수란키를 알아보지 못했다.전보다 훨씬 늙어 보였고 백발인 데다가 수염도 허옇게 변해 버렸다. 하지만 눈빛은 여전히 카리스마가 넘쳤고 남강 전장에서 봤을 때보다 되레 활기가 넘쳐 보이기까지 했다.남강 전장에서 봤던 수란키는 온몸에서 분노가 들끓고 있었다. 위엄이 넘치고 엄숙한 그는 삶의 의지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으며 그저 복수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살아가는 그런 느낌이었다.“승상께서 이렇게 직접 마중까지 나오시고. 너무 민폐를 끼치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되네요.”송석석이 웃으면서 말하자 수란키가 호탕하게 웃었다.“너
한편, 크게 놀란 진왕은 태의를 불러 심신을 안정할 수 있는 약을 처방받았다.송석석이 찾아갔을 때, 진왕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창백한 얼굴에는 핏기가 전혀 보이지 않았으며 덜덜 떨리는 입술로 송석석에게 자객은 어떻게 됐냐고 물었다.송석석이 진왕에게 자객이 도망쳤다고 얘기하고 나서야 그는 조금 안정을 찾은 듯했다.사실 진왕을 보필하는 사람들이 자객이 도망쳤다고 진작 얘기했지만 진왕은 믿지 않았다. 이제 송석석에게서 듣고 나니 그제야 안심이 된 것이다.송석석은 진왕에게 몸조리 잘 하라고 당부한 뒤 방을 나섰다.이와 동시에, 이덕회는 나머지 사람들을 안심시키고 있었다. 병부 상서인 이덕회는 지금까지 산전 수전 공중전까지 전부 겪어 보기도 했고 또한 왕비와 현갑군을 믿었기에 전혀 겁을 먹지 않았다.한편, 매산 출신 몇 명은 한데 모여 전에 성릉관에서 만났던 검은 복장 차림의 무리들을 의심하고 있었다.어쩌면 그자들이 바로 자객일지도 모른다는 의심 말이다.이 의심을 가장 먼저 제기한 건 바로 시만자였다. 그는 그 무리들이 갑자기 사라진 게 너무 수상했고 비밀 경로를 통해 계획적으로 도망친 거라고 확신했다.더군다나 조금 전 자객들도 전부 검은색 옷차림이었기에, 비록 머릿수가 조금 차이 나긴 했지만 그리 이상하지도 않다. 일부 사람들은 숨어서 지켜보고 있었을 수도 있으니까.“성릉관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출동했던 건 아마 우리한테 손을 쓰려고 그랬을 가능성이 커. 하지만 나중에 생각해보니까 성릉관에서 우리를 죽이면 쉽게 도망칠 수 없을 것 같아서 일단 포기한 거야.”시만자는 분석할수록 자신의 의심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서 고개를 돌려 송석석에게 물었다.“내 말이 맞는 것 같지 않아?”송석석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그자들은 아니야. 정확히 얘기하자면 조금 전 자객들은 그자들보다 무술 실력이 확연히 떨어져. 그자들은 성릉관에서도 자유롭게 나타났다가 사라졌어. 그렇게 보면 네 의심이 성립되지 않다는 거지. 그자들은 성릉관에
이날 아침, 송석석 일행은 서경으로 출발했다.송석석은 딱히 아쉬운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나중에 돌아올 때 성릉관을 또 지나야 했기에, 이후에도 외조부 가족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성릉관을 떠나자마자, 평탄한 길이 사라졌다. 여기저기가 다 울퉁불퉁했고 일부러 인위적으로 파괴한 곳도 있었기에 마차가 지나가기엔 무리가 있었다.하지만 진왕은 절대 다시 말을 타려고 하지 않았다. 며칠동안 안정을 취했지만 다리 안쪽의 쓸림 상태가 아직 심했기에 걸을 땐 괜찮아도 말에 타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때문에 성릉관에서 공을 세우고 육아당까지 설립한 진왕은 까탈스럽게 마차를 고집했고 마차가 도무지 지나갈 수 없는 곳은 현갑군이 말에서 내려 마차를 밀면서 힘겹게 전진했다.하지만 불행 중 다행인 건, 현재 양국으로 통하는 길이 개방되었기에 그 길을 따라 갈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산길밖에 없었다면 고귀한 진왕의 엉덩이가 엄청나게 고생했을 것이다.그렇게 겨우 서경 지대에 진입하여 루벌로 향하자, 서경의 관원과 병사들이 그들을 맞이하며 가는 길까지 호송해주었다.송석석 일행들 중에서 통역관을 제외하고는 서경에 와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똑 같은 변경 도시라고 해도, 루벌은 성릉관보다 훨씬 낙후했다. 여기저기에는 망가지고 훼손된 집채가 많았으며 행색이 누추한 거지나 근심이 많아 보이는 백성들도 많았다.송석석은 이 광경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두 나라가 전쟁을 치른 건 사실이지만 이곳까지 침투되지는 않았는데 말이다. 전에 전북망과 이방이 이곳 마을을 공격했다고 해도 공격당한 그 마을만 피해를 받아야지 루벌 전체가 이렇게 엉망진창이 된 것은 말이 안 되었다.루벌의 한 역관에 도착하고 나서야 송석석은 호송하고 있던 관원한테서 그 이유를 듣게 되었다. 수란석이 성릉관에서 전쟁을 일으켰을 때, 후방 공급이 부족한 탓에 병사들이 루벌로 돌아와 약탈을 진행한 것이었다.수란석 당시의 상황이 빅토르와 거의 비슷하다고 했다. 그때 당시 전쟁을 바라는 사람들이 많지 않
소 팔야는 곧바로 송석석이 말한대로 지시를 내렸고 이 지시를 실행에 옮긴 사람은 바로 전북망이었다. 그는 서둘러 부하들을 데리고 여기저기 수색하기 시작했다.송석석이 성릉관에 왔다는 사실은 전북망도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녀를 맞이하던 그날, 그는 멀리 서서 지켜볼 뿐, 가까이 다가가지는 않았다.하지만 거리가 너무 먼 탓에 전북망은 송석석을 정확히 보지도 못했고 그저 그림자만 볼 수 있었다.전북망은 자신이 지금 참 쓸모없는 짓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느껴지기도 했다. 송석석은 이제 자신과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이고 진성의 일과 관련된 사람은 이제 멀리해야했기 때문이다. 한편, 시절단은 성릉관에서 잠시 쉬는 사이에도 담판의 기교에 대해 상의했으며 상황 모의도 여러 번 해보았다.이번 담판이 저번에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어렵지는 않았지만 절대적으로 쉬운 건 아니었다. 이는 여제가 계속 마음에 두고 있던 일이기에 쉽게 타협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소씨 가문에서도 상대방이 몰래 사람을 보내 사절단의 책략을 몰래 엿듣는 것은 아닌지 걱정됐다. 사절단의 책략을 알게 된다면 상대방은 그에 맞는 대책을 미리 준비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상국은 열세에 처하게 된다.때문에 소 팔야는 전북망에게 반드시 철저하게 관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몰래 침입한 사람이 있으면 무조건 찾아내야 하고 이와 동시에 사절단 곁에서 시중을 드는 하인들 사이에도 첩자가 있을 수 있으니 확실하게 조사해야 한다고 했다.이틀 동안 수색했지만 전북망은 수확이 없었다. 그리고 수부를 샅샅이 수색했지만 위장술을 쓰거나 몰래 정보를 외부에 빼돌리는 사람도 없었다.전북망이 유일하게 알아낸 정보는 검은 복장을 입은 사람들이 춘만루에서 밥을 한 번 먹은 적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들이 춘만루를 떠난 뒤, 이들을 목격했다는 가게 주인도 있었지만 어디에 묵었고 어디로 갔는지는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서른 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심지어 전부 검은 복장을 차려 입었는데 이렇게 쥐도 새도 모르게
춘만루는 오늘 손님들로 꽉 차 있었다. 가게가 그리 크지 않기도 했고, 다른 손님들도 있었을 뿐만 아니라, 조금 전 낭자가 데리고 오겠다고 했던 검은 복장을 입은 남자들까지 가게 안 나머지 자리를 전부 차지했다.송석석과 시만자 그리고 남자까지 앉을 자리가 없었기에 가게 주인은 급하게 작은 탁자 하나를 펴서 가게 앞에 자리를 마련했다.그렇게 세 사람은 일행들과 떨어져서 식사를 하게 되었다.이때, 남자가 미안한 목소리로 송석석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저자들은 전부 제 일행입니다. 저와 똑같이 이틀 전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했거든요. 혹시 불편하시다면 저자들에게 가게 앞에서 기다리라고 하겠습니다. 나중에 저자들에게 호빵이나 하나씩 나눠줘도 충분합니다.”멈칫하던 시만자는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그럴 필요 없어요. 편하게 드시고 싶은 거 시키시면 됩니다.”남자가 환하게 웃으며 대꾸했다.“낭자는 정말 얼굴도 예쁘시고 마음도 선하시군요. 그럼 저희 편하게 시키겠습니다.”“그… 그래요.”고개를 끄덕이던 시만자는 가게 안에 앉아있던 사람들을 힐끗 쳐다보았다. 이자들의 옷차림은 꽤 눈에 띄었으며 옷소매에 수놓은 글씨들이 보이기도 했다.하지만 옷이 구겨지고 먼지도 많이 묻었기에 수놓은 글씨를 정확하게 확인할 수 없었다.그렇게 한참동안 쳐다본 시만자는 그제야 이자들의 옷에 수놓은 글씨들이 각자 다르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 중에서 흑영위나 전광위 등 글씨들이 보이기도 했다.이자들은 예의가 없거나 우악스럽지는 않았다. 각자 자리를 찾은 뒤 자신들에게 밥을 사준 시만자와 송석석에게 일제히 고개를 숙여 감사인사를 했다.거의 대부분 사람들이 머리가 하얬지만 얼굴은 불그스름한 게 나이가 그렇게 많아 보이지는 않았다.그 중에서 생김새가 매우 추악한 사람들도 몇 명 있었으며 쳐다보기만 해도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송석석과 시만자 그리고 몽동이는 서로를 힐끔 쳐다보다가 왠지 이 식사자리가 자신들의 마음에서 우러러 나온 게 아니라는 기분이 들었다.송석석은 식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