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부인은 잠시 할말을 잃었다. 빌리다니? 그런데 자신이 직접 한 말이라, 차마 무를 수가 없었다. 다만 속으로 철없는 송석석의 모습에 원망을 쏟아낼 뿐이었다. 온 집안에 자기 혼자밖에 안 남았는데, 남편한테 돈을 쓰지 않으면 어디에다가 쓰겠단 말인가?전북망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내가 알아서 해결하겠소. 당신 돈 따위 필요 없소.”이 말을 끝으로 그는 방을 나가버렸다. 그러자 또다시 시선이 모두 송석석에게 쏟아졌다. 송석석은 그들을 향해 고개를 숙여 보인 뒤 말했다.“그럼 다른 일 없으면 이만 물러가보겠습니다.”“석석아, 넌 남거라!”노부인이 분노한 목소리로 나가려던 송석석을 불러 세웠다. 아직 단신의가 남겨둔 약이 있었기에, 잔기침 하나 없이 매우 기력이 넘치는 모습이었다.송석석이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더 하실 말씀 남았어요?”노부인이 진지한 목소리로 답했다.“네가 궁에 가서 폐하를 만났다는 걸 알고 있다. 참 지혜롭지 못했구나. 이방이 북망에게 시집오게 되면 공을 세울 때마다 우리 가문도 같이 올라가지 않겠느냐? 그럼 너도 덕을 쌓고 영예를 누릴 수 있을 것이야. 안 그러니?”송석석은 반박하지 않았다.“틀린 말씀은 아니네요.”그녀가 다시 수그리는 듯한 태도를 보이자, 노부인은 다시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요구했다. “만 냥, 너한텐 그리 많은 금액도 아니잖아. 거기에 머리 장식과 장신구를 더하면 대략 2, 3천 냥만 더하면 될 텐데, 대신 내주는 게 어떠냐?”송석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안 될 건 없죠.”노부인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송석석이 홧김에 그런 황당한 말을 내뱉은 것이라 생각하며 다시 인자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 석석아, 넌 참 마음이 넓구나. 걱정하지 말거라. 앞으로 북망이 너를 속상하게 하면 내가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야.”오직 둘째 노부인만이 안절부절 송석석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녀는 송석석이 결정을 철회하길 바랐다. 자신의 혼인 지참금을 다시 남편의 첩을 들여오는 데다가
더 이상 단신의의 진료를 받을 수 없다니, 노부인은 믿을 수 없었다. 엊그저께만 해도 건강을 걱정하며 약을 잘 복용해야 한다며 신신당부하던 사람이었다. 그녀는 약왕당(藥王堂)으로 보내 즉시 사실을 확인시키게 했다. 그리고 돌아온 결과, 단신의의 그림자는 어디에도 볼 수 없었으며, 약방에 앉아 있던 다른 의원이 대신 거절의 의사를 전했다. 노부인은 이 소식에 충격 받아 하마터면 뒤로 넘어질 뻔했다. 의원이 단신의를 대신해 전달한 말은 이러했다.“앞으로 다시는 진료를 청하지 마시오. 장군부의 사람들만 봐도 소름이 끼치니, 더 이상 진료를 진행하다 가는 내 수명이 줄 것 같소. 나는 일찍 죽고 싶지 않소이다.”노부인이 분노가 가득 담긴 목소리로 외쳤다.“분명 송석석의 짓이다! 사람이 이렇게 독할 줄이야! 그동안 보여준 모습도 있었기에, 현명하고 온화한 성품을 가졌을 거라 생각했거만, 참으로 잔인하도다! 지금 이 행위는 나를 죽이려는 것으로 밖에 볼 수 없다. 단신의의 약이 없이, 앞으로 나보고 어떻게 버티란 말이냐!”전기 또한 말은 하지 않았지만, 마음엔 며느리에 다한 불만이 서서히 쌓이고 있었다. 처음엔 전북망이 갑자기 동의도 없이 첩을 데리고 왔으니, 충분히 투정 부릴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기 시어머니의 약까지 끊어버리다니, 이건 지나쳤다. 그가 작은 아들 전북삼에게 명령했다.“가서 네 형을 불러오거라. 어떻게든 네 형수를 달래 이 소란을 멈추게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 어머니의 목숨이 위태로워진다.”“예!”전북삼은 곧바로 뛰쳐나갔다. 오늘 일도 그 또한 송석석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바꾸게 되었다. 송석석은 정말 지독한 여자였다. 전소환 또한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문희거로 달려갔다. 그러나 굳게 닫힌 문에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고래고래 소리치기 시작했다.“송석석, 당장 나와! 이제야 알겠어, 둘째 오라버니가 이방 장군한테 마음 뺏긴 이유가 있었네! 이방 장군은 너처럼 비겁하지 않으니까! 넌 둘째 오라버니한테 미움 받아
전북망은 돈을 빌리기 위해 여기저기 다 돌아다녔지만, 겨우 얻은 것이 천 냥이었다. 예물과 예금, 연회 비용까지 감당하기엔 터무니없는 금액이었다. 물론 얼굴에 철판을 깔고 좀 더 고위직을 가진 관료를 찾아간다면, 더 큰 돈을 빌릴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는 이제 막 떠오르는 신예, 겨우 쌓아 올린 명성을 한 번에 깎아먹고 싶지 않았다.돈을 빌린다는 것 자체가 이미 예민하고 부끄러운 일이었다. 온 조정에 돈을 빌리고 다녔다는 소문이 나는 것보단, 자존심이 상해도 말할 데가 없는 송석석한테 빌리는 것이 차라리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쯤이었다.멀리서 막내 동생 전북삼이 말을 타고 다급히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형님, 빨리 집으로 돌아오셔야 할 것 같아요. 어머니가 형수님 때문에 화가 나서 쓰러지기 직전이에요.”또 송석석의 이름이 나오자, 전북망은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이번엔 또 무슨 일인데 그러냐?”전북삼이 답했다.“형수께서 어머니의 치료를 막은 것 같아요.”전북망은 그게 왜 큰 일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수도에 의사가 단신의 뿐이더냐? 단신의가 진료를 거절했으면, 다른 의원을 찾으면 될 거 아니냐? 정 안되면 태의(太醫: 황실 의원)라도 불러오도록 하마.”하지만 덕분에 그는 다시 한번 송석석이 얼마나 지독한 여자인지 알게 되었다. 어머니의 병을 빌미로 협박하려는 속셈인게 분명했다. 이방이었으면 절대로 쓰지 않을 계략이었다. 전북망의 반응에 다급해진 것은 전북삼이었다. “형님, 그렇게 간단히 해결될 문제면 제가 여기까지 찾으러 오지도 않았어요. 형님이 출정하고 얼마되지 않아 갑자기 어머니의 병이 악화되었는데, 그때 이미 형수님이 태의까지 불렀었어요. 하지만 결국 해결되지 않자, 단신의까지 오게 된 거예요. 단신의의 약이 없다면 어머니는 진작에 돌아가셨을지도 몰라요.”그 말을 듣자, 전북망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정말이냐? 송석석이 어머니의 목숨을 담보로 날 협박하려 작정한 모양이구나.”전북삼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
전북망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송석석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는 송석석이 또다시 협박하려 이 말을 꺼낸 것인지, 아니면 진심으로 이혼을 바라고 있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하지만 무엇이 되었든, 그는 이혼할 마음이 없었다. 이혼하면 송석석의 말 대로 모든 비난이 그와 이방에게로 쏟아질 것이다. 또한 백성들도 그를 손가락질할 것이다. 진북후부는 온 백성에게 영웅으로 칭송받는 집안이었다. 송석석과 이혼한다는 것은 그런 그들의 신뢰를 잃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송석석, 난 그대와 이혼할 생각 없소.”그가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당신을 억압할 생각도 없소. 앞으로는 부디 자중하며 사시오. 이번에 어머니를 이용해 나를 협박하려 든 건, 정말 도를 넘었소. 요구든 불만이든 내게 하시오. 괜히 어머니를 끌어들이지 말고. 이 일이 밖에 알려지면 당신의 명성에도 도움이 안 될 테니.”하지만 송석석은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참으로 솔직하지 못하십니다. 저와 이혼할 생각이 없는 것이 아니라, 할 용기가 없는 것이겠지요. 저와 이혼하게 되면 장군한테 피해가 갈 테니까. 사람들이 당신을 무정한 남편이라며 욕할 것이며, 부하들도 당신을 달리 보게 되겠죠. 사랑과 명예, 두개 모두 얻으려 하니까 일이 꼬이는 겁니다. 사람 아주 잘못 보셨어요. 전 장군부가 없어도 충분히 혼자서 잘 살아갈 수 있습니다.”그녀의 말을 듣고, 전북망은 자존심이 상한 듯 얼굴이 붉어졌다. “쓸데없는 소리 그만 늘어 놓으시오. 혼인은 폐하께서 정하신 것이니, 절대로 무를 수 없소. 그러니 조건을 말하시오. 어떻게 하면 이방을 받아들이겠소?”“조건이요? 그런 거 없습니다.”송석석은 당당히 어깨를 편 채, 굳건히 그를 바라봤다. 그녀의 얼굴은 그 어느때보다 빛났으며 아름다웠다.전북망은 더 이상 화를 내지 못하고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솔직히 난 당신이 이 혼사를 기꺼이 받아들일 거라 생각했소. 그대의 아비와 오라비, 모두 무장 출신이었으니, 이방 또한 품어줄 줄 알았소.”
“흥!”보주가 경멸이 가득한 얼굴로 코웃음 쳤다.“예물로 만 냥을 요구하다니, 장군부를 너무 과대평가했네요. 이럴 줄 알았으면, 아가씨도 시집올 때 더 부를 걸 그랬습니다. 정말 저희만 손해 본 것 같아요.”그러자 송석석이 장난스레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내가 나를 너무 저렴하게 팔아 넘겼구나.”그러자 보주도 웃었다. 하지만 머릿속엔 그 동안 송석석이 당했던 억울한 일들이 생생히 떠올랐다. 절대 첩을 두지 않겠다던 약속만 믿고 한 혼인인데, 결국 거짓이었다. 그는 결국 송석석의 인생을 망치고 말았다. 보주는 차마 이 안타까운 마음을 송석석 앞에 티 낼 수 없어 속으로 눈물을 흘렸다.그러다 문득, 보주는 황제가 떠올랐다. 혹시나 황제가 이 이혼을 허락하지 않겠다고 나온다면, 큰 일이었다. 황제의 허락 아래에 진행되는 이혼과 그렇지 않은 것은 천지차이였다. 여인이 이혼을 당하는 거면, 혼수품을 받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겨우 종이 쪼가리 하나 쓰면 되는 일인데, 도대체 왜 이렇게 오래 걸리는 것일까? 설마 둘이 결혼한 뒤에 내릴 작정인가?그렇게 되면 정말 고통스러울 것 같았다. 보주는 이곳에서 한 순간이라도 더 머물고 싶지 않았다. 늦은 저녁, 송석석은 장부를 넘겨주기 위해 전북경의 아내, 큰며느리 민씨를 불렀다. 진작에 해치웠어야 할 일이었지만, 그동안 이런저런 일들이 겹치는 바람에 미뤄졌었다.하지만 민씨는 골치덩어리 장부를 맡고 싶지 않았다. 그녀도 남편이 있는 입장에서 송석석을 동정했지만, 이방이 시집오게 된다면 장군부에 큰 도움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이번에 서경의 항복을 받아낼 수 있었던 것도 이방의 덕이 컸다고 들었었다. 병부에도 이 공로를 잊지 않을 것이다.비록 이번 공로는 혼인과 맞바꾼 탓에 다른 공로는 없었지만, 전북망과 이방은 아직 한참 창창할 때였다. 또한 황제도 젊은 장군들을 키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니, 분명 조만간 좋은 소식이 전해질 것이다. 더군다나 송석석은 진북후부의 유일한 혈육이었다. 그녀의 친정은 조
장부를 넘긴 뒤, 송석석은 친정에서 함께 온 사람들을 모두 불러 문희거 문을 닫아버렸다. 식사도 다들 문희거 내부에 있는 작은 주방에서 해결했다. 장군부에서 하녀장 역할을 하던 황 마마(嬷嬤: 나이든 노련한 하녀)와 양 마마도 함께였다.송석석이 진북후부의 사람들을 모두 빼 가자, 장군부는 큰 혼란에 휩싸였다.민씨는 급한대로 집사를 불러 쓸만한 사람들을 뽑아 일단 공백을 채웠지만, 효율은 좋지 않았다.그런데 혼인식까지 준비해야 하는 지금, 인력이 딸려도 너무 딸렸다. 송석석이 시집온 후, 인력 관리의 대부분을 황 마마가 맡아서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자리가 비자, 마치 몸을 잃은 도마뱀 꼬리처럼, 사람들은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민씨는 수습할 수 없는 사태에, 노부인에게 이 사실을 고할 수밖에 없었다. 노부인이 머리를 짚으며 분노가 가득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정말 해도해도 너무 하는구나. 내가 정말 사람을 잘못 본 게야. 그동안 잘해줬거니만 이렇게 하룻밤 사이에 얼굴을 갈아엎다니. 처음부터 버릇을 잘 들였어야 했는데.”민씨는 그 말에 공감할 수 없었다. 그녀가 시집왔을 때만 해도 노부인은 엄격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송석석은 시집올 때 그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재산을 가지고 왔다. 그리고 가사는 물론 노부인의 병간호까지 모두 도맡아 했는데, 무슨 버릇을 더 들인다 말인가?하지만 차마 노부인 앞에서 솔직하게 말할 수 없었기에, 얼른 화제를 돌렸다.“어머니, 저희 안 그래도 자금이 부족한데 무슨 수로 하인을 늘리죠?”노부인은 고민하는 도중에 돈을 보태 주지 않는 송석석이 떠올라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지금 상황에 송석석이 가지고 있는 재산을 가지고 올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이 해결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장은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작은 집에 연락을 넣어보거라. 그쪽은 송석석과 사이가 좋은 편이잖냐.”그러자 민씨가 답했다. “여쭤봤으나 염치가 없어 차마 말을 못 꺼낸다 하십니다. 그리고 지금은 예
노부인이 아파 들어 눕자, 장군부는 혼란에 빠졌다. 다른 선택지가 없었던 전북망은 급히 태의를 불렀다. 잠시 뒤, 진찰을 완료한 태의가 전북망을 바라보며 말했다.“사실 전에도 노부인을 뵌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제 의술로는 도무지 병을 낫게 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 노부인의 병을 고칠 수 있는 사람은 단신의 뿐입니다. 그의 단설환(丹雪丸)은 곧 노부인의 생명줄과 같습니다. 지금 당장은 제가 병세를 안정시킨 것 같아 보여도, 이건 모두 지난 일년간 단설환을 복용한 효과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앞으로 복용하지 못한다면 발병 횟수가 늘어나면, 저도 해드릴 것이 없습니다.”말을 마친 태의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넨 뒤, 장군부를 떠났다. 전북망은 분노와 슬픔이 뒤섞여 눈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는 태의의 조언대로 바로 단신의를 찾아갔다. 하지만 단신의는 만나주지도 않고 그를 거절했다. 전북망은 이 모든 것이 송석석의 탓임을 깨달았다. 노부인의 생명을 협박으로 이방과의 혼인을 막으려는 음모였다. 정말 악독하고 비열하기 짝이 없는 여자였다. 그는 곧바로 문희거로 쳐들어갔다. 늦은 밤이긴 했지만, 다행히 송석석도 잠들기 전이었다. 그녀는 은은한 등불 아래에 조용히 책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예고도 없이 쳐들어온 전북망을 발견하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분명 또 노부인의 병세와 단신의 때문에 추궁하려고 온 것일 터, 송석석은 다른 사람들에게 나가라고 명령했다. “다들 일단 나가거라.”“내일 당장 단신의를 부르시오! 그렇지 않으면….”전북망의 커다란 그림자가 서서히 송석석을 향해 다가왔다. 그의 얼굴은 얼음장처럼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하지만 송석석은 전혀 두려운 기색이 없이 그를 똑바로 마주보았다.“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그가 이를 악물며 말했다.“그렇지 않으면, 그대를 쫓아낼 것이오!”송석석이 코웃음 치며 말했다.“절 쫓아내겠다고요?”그러자 전북망도 차갑게 맞받아쳤다.“그대의 말 대로, 그대가 저지른 짓은
노부인의 방은 밤이 깊어지도록 불이 꺼지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전북망의 이혼 발표 때문이었다. 전북망의 아버지, 전기가 타이르듯 말했다. “네가 정실 부인을 먼저 내쫓게 되면, 모든 언관(言官: 왕에게 직언과 비판을 하는 관직)이 널 탄핵하라고 상소를 올릴 거다. 그러면 너는 더 이상 조정에서 높은 관직으로 올라가지 못해.”형 전북경도 옆에서 말을 보탰다.“둘째야, 아버지의 말씀 들어. 군에 송석석 아버지 부하로 있던 장병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니? 이번에 네가 큰 공을 세울 수 있었던 것도 그들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야. 그들의 지지를 잃게 되면, 네 입지가 불안해질 거다.”“하지만 저 여자가 어머니의 목숨을 가지고 저를 협박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그냥 넘어갑니까!”전북망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말했다.노분인은 지금 안정을 찾은 상태였지만, 좀 전에 발병했던 고통으로 송석석을 더욱 증오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때, 노부인이 뭔가 생각난 듯 거칠게 소리쳤다.“당장 내쫓거라! 이혼당하는 여자는 혼수품을 가지고 못 가게 되어 있어!”전북망이 말했다.“전 그걸 바라고 이혼하자고 한 거 아닙니다.”“그게 뭐 어때서? 자기가 잘못한 것 때문에 내쫓기는 건데, 혼수품은 당연히 두고 가야지!”노부인이 가슴을 문지르며 말했다. 아직도 가슴에 알싸한 고통이 남아 있었다.“혼수품을 두고 가면, 그 돈으로 다시 단신의를 부르면 되지 않느냐? 북망아, 너도 밖에 돈을 빌리러 다녀 봐서 알 것 아니냐? 돈이 없으면 아무리 뛰어난 장군이라도 무시당할 수밖에 없어. 그리고 예물을 준비한다고 가게와 땅을 다 팔아버린 바람에 우리 지금 완전 빈털터리야.”전기가 다급히 끼어들었다.“부인, 혼수품이 중요하오? 아니면 북망의 앞길이 더 중요하오? 제발 생각 좀 하고 말하시오!”노부인도 사실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것보다 돈이 더 급했다.“당신도 전에 말씀하셨잖아요. 조정엔 지금 무장들이 필요하다고, 폐하께서도 뛰어난 장군들을 많이 배출하려고 노력하고
시만자는 오늘 계속 방씨 가문에 있었다. 오수인의 몸 상태가 안 좋아서 약왕당의 청작을 불러서 방씨 가문으로 같이 간 것이다.저녁이 될 때까지 방씨 가문에 있었던 시만자는 방씨 가문 사람들을 통해 오늘 편서백부에서 있었던 일을 전해 듣게 되었다. 방천허의 부인은 이 사실을 절대 오수인에게 알리지 말라고 명령을 내렸지만 그리 오래 숨길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간 남자와 간통한 것도 모자라 낙태까지 하다니. 방시원은 이제 더 이상 왕청여의 서방이 아니지만 왕청여가 방씨 가문에 있을 때 벌어졌던 일이기에 방시원도 크게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외부에 방시원이 잠자리에 약해서 왕청여가 다른 남자에게 관심이 생긴 게 아니냐는 추측도 남발했다. 그렇지 않으면 왜 전장에 나간 지 며칠 되지도 않은 사이에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이와 반대로 왕청여가 태생부터 한 남자에 만족하지 못하는 천박한 여자라는 비판도 무성했으며 노세진을 뻔뻔하다고 욕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방씨 가문에서 착한 마음으로 노세진을 거둬줬는데 노세진은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고, 파렴치한 인간이라고 손가락질을 했다.사람들의 평가를 종합해보면 결론은 하나였다. 노세진과 왕청여는 천벌 받아 마땅한 나쁜 놈들이고 방시원은 아무 잘못 없이 억울하게 엮였다는 결론이 내렸다. 반면, 전북망을 언급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전씨 가문에 어떤 일이 벌어져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전북망에 큰 관심이 없었고 심지어 왕청여와 이혼한 사실도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이날 밤, 함께 황실로 돌아온 시만자와 송석석은 오늘 서로에게 있었던 일을 상대방에게 얘기해주다가 이내 동시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전에는 구경 삼아 지켜보던 일이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자 시만자와 송석석도 걱정되고 마음이 불편했다.한편, 현이는 오늘 밤에도 무술을 연습하러 찾아왔고 평소보다 더 열정적으로 연습에 임했다. 현이는 능력이 부족한 자신이 도울 수 없는 일이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최대한 빨리
송석석은 사람을 시켜 약왕당으로 가서 홍작을 모셔왔다. 다행히 이마의 상처가 깊지 않았고 신속적으로 지혈도 했기에 큰 문제는 없었다.하지만 며칠 동안 고열을 앓고 있었던 최씨는 몸이 허약한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화까지 낸 탓에 새까만 피를 왈칵 토했을 뿐만 아니라 의식도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최씨 눈가에서는 계속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송석석이 아무리 닦아도 눈물은 계속 흘렀다.“의원님, 상황은 좀 어떤가요?”홍작이 최씨에게 진맥 검사를 마치자 송석석이 물었고 홍작은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부인께서 고열을 며칠이나 앓으셨는데 조금 전에 등을 확인해보니 폐에 문제가 조금 있는 듯합니다. 그리고 화병 때문에 간에도 어혈이 생겼습니다. 전에 복용하시던 약으로는 더 이상 해결되지 않을 겁니다. 일단 극약 처방으로 간과 폐를 치료하고 나머지 부분은 몸조리를 통해 천천히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더 이상 이렇게 과로하시면 절대 안 됩니다.”말을 하던 홍작은 송석석을 구석으로 끌고 가서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간에 어혈이 심각한 상태입니다. 이는 마음속에 늘 화병이 잠재되어 있어서 생긴 현상입니다. 부인께서 마음속에 어떤 일을 숨기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계속 이렇게 혼자서 쌓아 두면 나중에 큰일이 날 수도 있습니다.”송석석은 최씨가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혹시 왕표가 반역 사건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집안 사람들까지 엮이지 않을까 매일 전전긍긍하면서 속앓이를 했을 것이다.“일단 약을 좀 복용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홍작은 말을 마치자마자 돌아서서 떠났다.송석석은 밖으로 나와 순방영 사람들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절대 아무한테도 얘기해서는 안 된다고 입단속을 단단히 시켰다.이내 순방영 사람들까지 떠났고 송석석은 돌아선 순간, 기둥에 가까스로 기댄 채 눈이 벌겋게 충혈된 왕청여를 발견하게 되었다.왕청여는 다음 순간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모습으로 송석석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북명 왕비님, 제가 뭐 하
량씨 부인의 폭탄 발언에 순간 현장은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량씨 부인이 데리고 온 사람들은 아이의 존재에 대해 전혀 몰랐으며 심지어 운향월조차도 모르고 있었다.지금 이 상황에서 제일 놀란 사람은 운향월이었다. 그녀는 연신 뒷걸음질을 치면서 모든 걸 잃은 듯 망연자실한 표정이었다.사실 량씨 부인도 전까지는 확신이 없었다. 약왕당 사건이 터지고 나서 량씨 부인은 사람을 시켜 왕청여를 조사했고 조사 과정에서 그 의원을 찾아내게 되었는데 마침 그 의원은 량씨 부인의 서방과 아는 사이였다.그 의원에게 왕청여가 왜 전씨 가문의 아이를 지키지 못했는지 묻자, 의원은 솔직하게 이유를 얘기해주었다.그중 한 가지 추측이 바로 왕청여가 낙태 경험이 있어서 몸이 많이 상했다는 것이다.의원은 왕청여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기에 그저 뱃속 태아를 지키지 못한 게 너무도 흔한 일이라고 얘기할 뿐이었다. 낙태를 하고 나서 몸조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 여자들은 당연히 몸이 상할 수밖에 없었다.량씨 부인은 왕청여와 방시원 사이에 아이가 있었는데 알 수 없었으며 방씨 가문 집안일까지 조사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모든 건 그녀의 추측일 뿐이다.왕청여가 하도 건방진 태도로 운향월을 벼랑 끝으로 몰아넣자 화가 치밀은 량씨 부인은 자신의 추측을 사실인냥 내뱉은 것이었다.이로써 왕청여에게 제대로 한 방을 먹이고 교활하게 화제를 돌려가면서 문제점을 흐리지 않게 만들려고 했다.하지만 량씨 부인이 말을 뱉은 순간, 최씨와 왕청여의 안색이 한순간에 하얗게 질렸기에 량씨 부인은 자신의 추측이 정확하다는 것을 눈치채게 되었다.한편, 온몸에 힘이 쫙 풀린 왕청여는 바닥에 주저앉았고 그저 량씨 부인의 추측이었다는 사실은 전혀 알지 못했다.이때, 운향월이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말했다.“그러니까 이 모든 건 제가 의심이 많고 질투가 많아서 생긴 일이 아니라 왕청여 당신은 정말 그 사람을 만나고 싶어서 약왕당에 찾아갔던 거네요. 두 사람 사이는 실수가 아니었어요. 심지어 아이까지 있었네요. 당신이
운향월의 물음에 왕청여는 이리저리 시선을 피하며 끝까지 앉으려고 하지 않았고, 그저 냉랭하게 말할 뿐이었다. “그때 당시 난 술을 많이 마셔서 실수로 그 사람을 방시원으로 착각한 것뿐이에요. 하지만 그 사람은 전혀 술에 취하지 않았어요. 맨 정신이었다고요. 그 사람은 내가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어요. 물론 나도 잘못이 있지만 그 사람 잘못이 더 크다고요!”“서방님이 저한테 해준 말은 그게 아니었어요. 그날 당신은 술을 많이 마셨지만 취하지 않았고 서방님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고 했어요. 그리고 두 사람이 함께 있을 때 당신은 제 서방님 이름까지 불렀다고 했어요.”운향월은 가까스로 눈물을 참은 채 떨리는 목소리로 반박했고 왕청여의 눈빛이 격하게 흔들렸다.“그 사람이 거짓말을 한 거예요!”왕청여는 고개를 홱 돌려 송석석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그 사람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라고요! 못 믿겠으면 지금 당장 그 사람을 불러서 내 앞에서 다시 한번 물어봐요! 전 그때 당시 분명 방시원의 이름을 부른 거예요!”송석석은 이런 안건을 해결해본 적은 없었지만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왕청여가 여전히 그때 당시 방시원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것으로 보면 확실히 많이 취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한다.정신이 멀쩡한 상태에서 방시원과 노세진의 얼굴을 헷갈린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한편, 왕청여의 말에 운향월은 말문이 턱 막혔지만 곁에 서있던 량씨 부인은 바로 왕청여의 말에서 허점을 눈치챘다.량씨 부인은 어이없다는 듯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그때 당시 술에 많이 취했다고 하지 않았나? 그 상황에서 누구의 이름을 불렀는지는 어떻게 그렇게 똑똑히 기억하지? 술에 취했어도 정신이 멀쩡했다면 상대방이 방시원이 아니라는 걸 바로 알았을 텐데?”“말도 안 되는 소리!”왕청여가 씩씩거리며 돌아서서 현장을 떠나려고 했다. 과거의 망신거리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다시 언급되자 왕청여는 너무 창피하고 화도 났다.이때, 금숙이 다
최씨는 서럽게 우는 운향월을 보며 너무 안쓰러웠다. 운향월도 벼랑 끝에 몰리지 않는 이상 절대 가문 체면까지 팔아가면서 이렇게 난동을 부리지는 않았을 것이다.순간, 표정이 확 굳은 최씨가 금숙에게 말했다.“지금 당장 가서 셋째 아가씨를 데리고 나와. 어떤 방법을 쓰든 무조건 데리고 나와.”시녀 금숙이 하인들과 함께 왕청여를 데리러 현장을 떠나자 최씨가 운향월을 보며 당부했다.“향월 낭자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편하자고 이곳에 찾아온 겁니다. 그러니 셋째 아가씨가 어떤 대답을 하든, 그 대답이 진실이든 거짓이든, 낭자 느낌대로 잘 분별하시길 바랍니다. 그래야만 마음이 편해질 것이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명확해질 것입니다.”최씨의 말에 운향월은 눈물을 닦은 채 창백한 얼굴로 대답했다.“감사합니다, 부인.”한편, 곁에 서있던 량씨 부인도 최씨와 송석석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딸이 이런 불공평한 대우를 받은 게 너무 마음이 아팠고 친척들까지 데리고 평서백부에 찾아온 것도 그저 한 마디 설명이라도 듣기 위한 것일 뿐이라고 했다.운씨 가문 사람들은 노세진과 왕청여의 과거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다가 나중에 운향월에게서 전해 듣게 된 것이다. 집안 사람들은 운향월에게 그저 한때 지나간 과거뿐이라고 설득했으며 지난 일 때문에 부부 사이가 나빠지면 안 된다고 했다.운향월은 가족들의 설득을 받아들였고 노세진과의 결혼 생활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더군다나 결혼하고 나서부터 노세진은 여자 문제를 단 한번도 일으킨 적이 없었으며 심지어 첩도 들이지 않았다.그러던 어느 날, 운향월이 엉엉 울면서 친정으로 돌아갔다. 노세진과 왕청여 사이에 아직 왕래가 있고 약왕당에서 두 사람이 꽁냥거리는 모습을 직접 목격했다고 하면서 눈물을 줄줄 흘리는 딸을 보고 있으니 가족들은 마음이 아프지 않을 수가 없었다.한편, 량씨 부인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던 송석석은 남의 집안일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렸으며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도 많았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최씨는 고열을 앓고 있는 상황
집안 허물은 밖으로 소문내지 않는 것이 법이지만 운향월은 더 이상 그런 체면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다가 송석석의 위압감 넘치는 모습에 덜컥 겁을 먹은 운향월은 가가스로 눈물을 참은 채 모친과 친척들을 데리고 평서백부 내부로 들어갔다.왕준이 아직 퇴청하지 않은 탓에 평서백부 안에는 남희 혼자서 하인들을 데리고 서있었다.단 한번도 이런 상황을 처리해본 적 없는 남희는 하인에게 왕청여를 데리고 나오라고 지시했지만 방에 숨어있던 왕청여는 송석석까지 출동했다는 말에 더더욱 나가지 않으려고 했다.결국 상황을 전해들은 최씨가 열이 펄펄 나는 몸을 이끌고 나와서 문제를 수습했다. 송석석은 그런 최씨를 보자마자 마음이 안쓰러웠다. 며칠 사이에 최씨는 눈에 보일 정도로 심각하게 말라져 있을 뿐만 아니라 안색이 너무 창백하고 입술은 고열 때문에 벌겋게 변해 있었다. 하인의 부축 없이는 혼자서 걸을 수도 없을 정도로 몸이 허약한 것 같았다.송석석은 평소에도 최씨와 사이가 가까웠지만 최씨가 왕이장의 형수라는 사실을 알고 난 뒤로부터 최씨에게 더욱 내적 친밀감을 느꼈다.최씨가 이토록 몸 상태가 안 좋은 상황에서도 왕청여의 뒤처리를 해주기 위해 사람들 앞에 선 모습을 보자 송석석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평서백부 셋째 아가씨께서 끝까지 나오기 싫다고 하신다면 노부인께서라도 나오시라고 하세요. 아픈 사람을 이렇게 혹사시키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왕비님, 저희 어머님께서도 몸이 안 좋으십니다…”남희가 대답했다.한편, 운향월은 말이 전혀 안 통하고 막무가내인 사람은 아니었다. 다만 일이 이 지경까지 됐으니 왕청여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을 뿐이다. 확실한 대답만 들으면 마음이 조금 풀릴 것 같았다.운향월은 눈시울이 붉어진 채 말했다.“전 아무도 힘들게 할 생각 없습니다. 다만 왕청여에게 한 마디 물어보고 싶을 뿐입니다. 그날 약왕당에 일부러 그 사람을 찾아간 건지, 아니면 정말 단순히 약을 사러 간 건지 그것만 솔직하게 대답해주길 바랍니
노씨 부인이 평서백부까지 찾아온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외부에 떠도는 유언비어가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었고 노세진이 약왕당에서 약재를 관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이 매일 약왕당으로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약왕당은 환자가 많아진 게 아니라 노세진을 한 마디라도 욕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로 들썩였으며 이 때문에 약왕당은 도무지 제대로 된 장사를 할 수가 없었다.사태가 더 이상 수습이 안 될 정도로 심각해지자 약재를 캐서 돌아온 단신의는 약왕당 앞에 서서 오늘부로 노세진을 약왕당에서 내보내겠다고 대외적으로 발표했고 노세진은 더 이상 약왕당 직원이 아니라고 명확하게 얘기했다.그리고 이 외에도 또 한 가지 이유가 있었다. 방씨 가문에서 겨우 마음에 드는 여인이 생겼고 방시원의 모친 노수인도 상대방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여자 측에서도 좋다고 동의했고 이제 방시원만 동의하면 혼사를 준비할 수 있을 텐데 하필 이 상황에서 이런 일이 터지는 탓에 여자 측에서 바로 중매쟁이를 보내 없던 일로 하자고 말을 전했다.평소에 만나서 차나 마시고 담소는 나눌 수 있지만 혼사에 관해서는 더 이상 얘기하지 말자고 명확한 뜻을 보였다.화가 잔뜩 난 노수인은 친정으로 돌아가 노씨 가문 어르신들에게 고자질을 했다.노씨 가문 어르신들은 바로 노세진을 집안으로 불러 호되게 나무랐고 형제에게 민폐만 끼치는 멍청한 놈일 뿐만 아니라 노씨 가문 전체에 먹칠한 것도 모자라 방시원과 방씨 가문의 명성까지 더럽혔다고 호통을 쳤다.안 그래도 약왕당에서 쫓겨난 노세진은 노씨 가문 어르신들에게 욕까지 먹자 화도 나고 너무 창피해서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부인에게 이혼하자고 소리를 지른 것이다.노세진이 홧김에 이혼 얘기를 꺼냈을 수도 있고 혹은 오래 전부터 이혼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을 수도 있지만 이유가 어찌 됐든 이혼이라는 단어를 들은 노씨 부인 운향월은 분노가 순식간에 치밀었다.운향월의 친정은 6품 관원으로 권력이나 힘이 있는 건 아니지만 딸이 이렇게 괴롭힘을 당하는 꼴은 절대 가만
염구진과 노 집사는 자신의 인맥을 통해 예전에 있었던 일을 수소문하기 시작했다.평서백부 방계 어르신들에게 물어보니 다들 왕이장이 불에 타 죽은 뒤로 왕전 부부가 오랜 세월동안 슬퍼했다고 한다.방계 어르신들의 말은 예전에 임양운이 조사했던 내용과 똑같애 그저 겉으로 보여지는 거짓일 뿐이었다. 한편, 전북망과 왕청여는 결국 합의하에 이혼하게 되었다. 두 당사자가 동의한 일이라 별다른 분쟁도 없었고 예물도 그대로 다 되돌려 받았다.그때 당시 두 사람의 결혼식은 진성 전체가 들썩거릴 정도로 화려하고 성대했지만 이혼할 때만큼은 아무도 모르게 최대한 조용하게 진행했다.왕청여는 최씨에게 장군부의 어려운 상황을 잘 알고 있다고 하면서 큰 예물은 필요 없으니 비단과 액세서리만 돌려주면 된다고 했다. 하지만 말과 달리 예물로 줬던 집과 땅은 이혼하자마자 사람을 시켜 돌려받았다.최씨는 직접 해결하는 대신, 집안일을 돕는 집사를 보내 처리하게 했다.한편, 왕청여와 노부인은 끝까지 최씨에게 노씨 부인을 찾아가서 해명을 부탁하라고 시켰으며 돈은 얼마든지 줄 수 있다고 하기도 했다.하지만 최씨와 남희 두 사람은 반대했다. 큰돈을 들여 셋째 아가씨의 명성을 되돌릴 가치가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모든 일이 마무리되자 최씨는 결국 앓아눕고 말았다.야밤에 갑자기 고열을 앓기 시작하더니 의식마저 흐릿해졌다. 급하게 의사를 불러 진료를 받아보니 속에 화병이 나서 온몸에 열이 나는 거라고 했고 더군다나 쌀쌀한 가을바람까지 맞아 상태가 더욱 악화된 것이다.최씨가 아프다는 소식에 친아들과 친딸에 이어 서자와 서녀까지 한걸음에 달려와 최씨를 보살폈다.서녀들은 아군서원에 합격하지는 못했지만 최씨는 그들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마마를 구해서 전문적인 교육까지 받게 했다. 이렇듯 최씨는 결혼 생활에 최선을 다했으며 남들이 절대 못하는 부분도 어떻게든 해내려고 애를 썼다.평서백부 노부인은 자신이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한 탓에 최씨가 앓아눕게 되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며 미안한 마음에 왕청
심청화는 사여묵이 얘기한 부분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었다.“왕전이 승작을 하지 않았다고? 그럼 사부께서 조사하라고 보낸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었다는 거야?”심청화의 말에 사여묵이 대답했다.“염 선생한테 물어보면 바로 알 수 있겠죠.”조금 뒤, 서재로 들어선 염구진은 예전에 평서백부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묻자 확실히 뭔가 알고 있는 듯했다.명문 가문들의 집안일은 위로 삼대까지 알고 있지만 대충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알고 있을 뿐 완벽하게 알지는 못했다.“왕전이 승작한 적 없는 건 사실입니다. 그때 당시 평서백부 어르신께서 병을 앓고 계셔서 세자를 정하지 않으셨거든요. 왕전이 전공을 세우고 돌아온 뒤, 어르신은 왕전을 세자로 임명했고 그 뒤로부터 어르신의 몸 상태가 점점 호전되다가 기적처럼 완치가 되셨어요. 그래서 승작에 관한 일도 계속 뒤로 미루어진 거죠. 나중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어르신께서 장손 왕표를 세손으로 책봉했어요. 그 사이에 많은 일들이 있었던 것 같은데 외부인은 아무도 모르죠. 물론 저도 모릅니다. 아마 평서백부 몇몇 어르신들과 현재의 평서백부 노부인만 정확한 내막을 알고 계실 거예요.”염구진의 말에 이 일은 더욱 미궁속으로 빠지게 되었다.만약 그때 당시 왕전이 승작하지 않았다면 단순히 세자로 임명된 것으로 아들인 왕이장이 자신의 운명의 바꿔줄 것이라고 확신한 것인지 싶었다. 왕이장이 태어난 그 해에 왕전은 세자로 책봉되었지만, 다섯 살이 된 왕이장이 점쟁이한테 보내질 때까지도 왕전은 승작을 하지 못했다.이렇게 듣고 보면 왕이장의 출생은 아버지가 아닌 할아버지의 운명을 바꾼 것 같기도 하다.어찌 됐든 이 속에는 문제가 많다. 그리고 어쩌면 평서백부의 몇몇 어르신들도 정확한 사실을 모르고 있을 수도 있으며 모든 사실을 확실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평서백부의 노부인밖에 없을지도 모른다.“일단 조사하지 않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오사형이 직접 결정해야죠. 저희는 그냥 알고 있기만 하다가 오사형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지지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