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종문은 제자를 받는 기준이 엄격하여 임양운의 정식 제자는 많지 않았다. 이미 사문을 떠난 제자를 포함해도 총 15명뿐밖에 안 되었다. 하지만, 떠난 제자들 모두 사문을 배반한 것이 아닌, 각자의 길을 찾아 떠났다.임양운은 고지식한 인물이 아니었기에, 자신의 제자들이 원하는 일을 하도록 허락했다. 단 전제가 있었는데, 이는 백성과 선량한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며칠 전, 그는 사문을 떠난 제자들에게 전서구를 보냈다. 이 제자들은 현재 각자의 영역에서 충실히 살아가고 있었지만, 사부가 소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진성으로 달려가 소사매를 돕기로 했다.만종문에는 다른 제자들도 있었지만 그들은 단순히 제자라고만 불릴 뿐, 임양운이 몸소 가르친 제자는 아니었다. 임양운이 아주 가끔씩 그들을 지도하긴 했지만, 이들의 주된 지도는 만종문의 두 명의 무술 장로들이 담당했다. 때로는 임양운의 직계 제자들이 지도하기도 했다.이들의 실력은 뛰어났다. 하지만 평소에 잡일도 도맡아 해야 하므로 무술에만 몰두할 수 없었기에 임양운의 직계 제자들의 실력에 비해 한참 뒤떨어졌다.하지만 임양운이 필요한 것은 정예 병력이기 때문에 이번 일엔 그들과 함께하지 않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굳이 생신연회를 가장하여 각 문파의 장문인까지 초청하지 않았을 것이다.물론, 다른 사람이 이런 체면을 세워준 이상 그 정을 반드시 가슴에 새겨야 한다. 무림인들은 뜨거운 의리로 의기를 위해 목숨을 걸 수 있는 자들이기에, 받은 은혜를 가볍게 흘려보내는 법이 없었다.무소위가 그에게 물었다.“사형, 조정의 일엔 관심도 없으시면서 왜 이번에는 이렇게 많은 인력을 동원하여 대대적으로 움직이십니까? 송석석과 현갑군을 믿지 못하시는 겁니까?”임양운은 무기고에 앞에 서서 손에 맞는 무기를 고르며 말했다.“네가 만약 영군왕이라면 가장 먼저 무엇을 하겠느냐?”무소위가 생각에 잠겨 대답했다.“적절한 시기를 기다리겠지요?”“시기도 기다려야 하지.”임양운은 말하면서 부채를 하나 골라 들었
송석석은 며칠 동안 의논에 참석하며 승상이 했었던 말을 뼈저리게 실감할 수 있었다. 사람마다 의견이 제각각이고, 모두가 나름의 이유를 가지고 있는 탓에 끊임없이 논쟁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찬반이 몇 번이고 오갔지만, 일의 방향은 여전히 명확해지지 않았다.그래서 그녀는 순간 자신이 더는 이 의논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간 여러 의견에 휘말리다 보니, 어느 방향으로 움직여야 할지조차 모를 정도가 되었기 때문이다.게다가 황제의 병세도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 계속 기침을 하며 억지로 정신을 버티는 상황이었는데, 일부는 이런 상황을 틈타 태자를 책봉하자는 주장을 펼쳤다.이 말을 꺼낸 이들은 제상서의 문생으로, 젊은 관리들이었다. 그들은 원래 황후가 포섭했던 인물들로, 태자 책봉을 위해 힘쓰기로 했었는데, 황제의 병이 악화되고 내우외환이 겹친 틈을 타 후계 문제를 조속히 확정하자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제상서는 화가 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그가 어전에서 극히 반대했으나, 오히려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가 퇴로를 확보하려 하거나 책임을 회피하려 한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이 일로 인해 숙청제는 또다시 분노를 참지 못해 피를 토할 정도로 격노하자, 조정은 모두 난감해하며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그래서 송석석은 훈련을 핑계 삼아 논의에 참석하지 않기로 하곤 돌아가 이 일을 염선생과 대사형에게 이야기했다. 그러자 염선생이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황후는 금족 중 아니십니까? 그런데 어찌 파란을 일으킬 수 있단 말입니까? 이런 시기에 그러한행동을 벌이다니, 이는 자신과 제씨 가문을 불 속에 집어넣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합니다."제씨 가문과 황후가 어떻든, 송석석은 둘다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본래 조정의 문무 백관들이 한마음으로 협력하고 있었는데 이 일이 그 흐름을 끊어버리고 만 것이다.이때 심청화가 입을 열었다.“나는 오히려 이번 태자 책봉 문제를 꺼낸 것이 영군왕의 계략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오. 황후가 포섭한 사람들이 사실 영군왕의 사람
한편, 영주 쪽에서 가짜 영군왕의 정체가 탄로났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는 본래 영군왕과 외모가 닮은 일반 백성일 뿐이었는데, 영군왕의 눈에 들은 후 그의 모든 행동과 태도를 배우도록 훈련받았었다. 그렇게 영군왕이 영주를 떠난 후, 그는 영군왕의 분신이 되어 그가 자주 가던 곳에 가서 대신 모습을 드러냈고, 이 때문에 이전 조사에서 사람들이 영군왕이 봉지를 거의 떠나지 않는다고 여겼었던 것이다. “그 자를 제압했느냐?”송석석이 급히 물었다.“안심하십시오. 이미 붙잡아갔습니다.” 염선생이 답하자 송석석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렇다면 다행이군. 영주에는 더 이상 영군왕이 나타나선 안 돼. 이제야 영군왕의 속내를 알겠어. 그는 관백의 신분으로 숨어서 모든 지령을 휘황실에서 내렸지. 그래서 모두가 휘왕을 역적이라고 여긴 거야. 그는 줄곧 영주에 머물렀으니, 역모를 꾀하는 일에는 가담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고."염선생이 말했다.“맞습니다. 실패하면 모든 책임은 휘왕에게 돌아갈 테이니, 그는 대의를 위해 친족을 죽이는 것처럼 휘왕을 처단하며 자신을 보호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반대로 성공하면 모든 것이 그의 손안에 들어오겠지요.”그러자 송석석이 다시 물었다. “추몽은 지금 영주에 있나?”염선생이 답했다.“아뇨, 추측하건데 그는 이미 연왕의 대부분의 세력을 인수받았을 겁니다. 그래서 제가 이미 방시원에게 연왕이 투항하더라도 결코 경계를 늦춰서는 안되며 혹시 모를 속임수에 대비하라고 전했습니다.”송석석은 추몽이 간단한 인물이 아니라고 여겼다. 방시원이 그를 대적하기에 어려움이 있을 거라 생각해이 들어 염선생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아니면 선생이 직접 방 장군을 도와주러 가는 것은 어떠한가?” “그건… 안됩니다.”염선생은 단칼에 거절하며 곧이어 말을 덧붙였다.“연주가 포위되어 있는 상황에서 설령 추몽이 연왕을 위협해 거짓 항복을 시도하더라도 방시원은 이미 준비를 했을 겁니다. 그는 쉽게 속지 않을 겁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그들이 성 안으로 들어간 뒤, 마침 또 다른 상단이 도착했다. 필명은 그들도 철저히 검사했고, 똑같이 문제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들여보냈다.하지만 곧이어 필명이 고개를 돌리는 순간, 상단이 그들을 쫓아 함께 걸어가는 모습을 발견했다. 그 중 한 명의 뒷모습이 매우 익숙했는데, 마치 만종문의 그 사숙과도 같게 느껴졌다.그 사숙은 무소위라 불리던 사람이었는데, 뒷모습만 닮았을 뿐 얼굴은 전혀 닮지 않았다.그래도 이 상단을 조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어, 필명은 몇 사람을 시켜 그들의 뒤를 쫓아 이상한 것은 없는지 살펴보게 했다. 그렇게 반 시진 후, 그들이 동란 거리에 있는 한 저택에 머물렀었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 지역 일대는 전부 권력자와 훈작들이 모여 사는 곳으로, 아무리 부유한 상인이라 해도 쉽게 그곳에 저택을 구입할 수 없었다.결국 필명은 사람을 더 보내 조사하게 했다. 그들이 묵고 있는 집은 과거 이성왕의 저택으로, 오랜 기간 비어 있었던 곳임을 알게 되었다. 소문에 따르면 그 저택의 소유자는 이미 다른 곳으로 이주했다고 했다.무엇인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봐도 이미 복잡해져 구체적으로 떠오르지 않았다.매일같이 사람들을 조사하느라 어떤 정보든 다 머리에 담고 있었던 탓에, 필명의 머릿속은 마치 복잡한 실타래같이 뒤엉켜 있었다. "그 저택은 휘황실과 인접해 있습니다."이때 부하가 보고했고, 이 말을 들은 필명의 눈빛이 즉시 날카로워졌다."그럼 감시를 강화하거나, 직접 방문해 조사해 보도록 하지."송대감께서 말씀하시기를, 휘황실과 관련된 모든 것은 철저히 주의해야 한다고 했다.밤이 되어서야 조사를 마친 후 보고가 올라왔다. 그들은 과거 이성왕의 후손으로, 세습된 왕위가 박탈된 뒤 줄곧 외지에서 상업에 종사하다가 최근의 전란을 피해 잠시 숨기 위해 진성으로 돌아온 것이라는 내용이었다.필명은 순간 상단이 운반하던 물품을 떠올렸다. 모두 비단과 보물 같은 귀중품들이었기에, 그들이 값비싼 물건을 챙겨 진성으로 피
임양운은 이번에 대포 한 대를 가져왔는데, 아직 성 안으로 운반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현재는 성 밖에 보관할 수밖에 없었다.이 대포는 북당의 홍의대포를 개량한 것으로, 당시 무소위의 뜰을 날려버린 바로 그 포였다.이틀이 지나자, 이전 생신연회에 초대받은 문파들이 거의 모두 다양한 신분으로 입성했다. 무림인이 입성하면 오랫동안 심문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그들은 아예 모두 변장을 하고 들어갔다.임양운은 냉월산장의 사람들 몇 명을 특별히 선정해 경위부와 북명황실을 번갈아 감시하도록 했다.이렇게 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냉월산장의 사람들은 강호에서 거의 활동하지 않고, 진성에도 발을 들인 적이 드물어 영군왕의 사람들이 그들을 알아볼 가능성이 적었기 때문이다. 그들로 하여금 송석석을 몰래 보호하게 하면 훨씬 안심할 수 있었다.임양운은 영군왕이 다음 단계에서 송석석의 목숨을 노릴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가 잘못 추측한 경우도 있었지만, 그 외에는 추측이 단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그는 왕경루에서 연회를 열어 모두에게 술과 음식을 대접하였다. 당연히 중요한 이야기는 사적으로 나누었다."다른 일은 일단 신경 쓰지 말고 우선 내 제자의 안전부터 보호하도록 하자. 앞으로의 일은 지켜보며 대응하자고."임양운도 무림인이 조정의 일에 엮이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자신도 그러하니 말이다. 하지만 하필 이렇게 소란을 좋아하는 제자를 받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었다.송석석은 자신이 사부의 사람들로부터 빈틈없이 보호받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그녀는 매일 북명황실과 경위부를 오갔고, 때로는 궁에도 들렀다.태자 책봉 문제는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숙청제가 이미 몇몇 사람을 처벌하고, 심지어 제씨 가문에도 경고를 내렸지만 여전히 누군가가 반복적으로 이 문제를 들춰내 거론하고 있었다.이 중요한 시기에 숙청제와 조정 신하들은 이 일로 인해 마음이 분산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영향을 받은 몇몇 신하들은 국본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태자 책봉을 지
그리고 결국 그날 저녁, 갈등이 극에 달하고 말았다.하도사에서는 관리와 병사를 동원해 일꾼들을 감독하며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전날 폭우가 심해 작업이 중단되었다. 그나마 오늘은 비가 내리지 않고 흐린 날씨였기에, 김창명은 일꾼들에게 서둘러 공사를 진행하라고 지시하며 당초 예상보다 3일 빨리 완공하라고 요구했다.그러나 일꾼들은 이를 거부하며 하도사의 사람들과 언쟁을 벌였고, 이에 화가 난 김창명이 막대기를 들어 한 일꾼을 때렸다. 이 일로 일꾼들은 완전히 분노했다.수백 명이 하도사 소속 관리를 둘러싸고 폭행을 가했다는 소식은 송석석이 근처에 미리 배치해 놓은 감시자에 의해 곧바로 오진에게 보고되었다.오진은 혹시 이 사건이 상대의 계략일지 염려했지만, 조사에 따르면 모든 노역과 일꾼이 영군왕과 연관된 것은 아니었다. 이번 사건을 일으킨 사람들은 평범한 일꾼들일 가능성이 컸다.이에 그는 사람들을 이끌고 현장으로 가서 사태를 진정시키려 함과 동시에 이를 송대감에게 보고하도록 명령했다.송석석은 어두워지고 있는 하늘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밤이 되면 진성에 제진이 시행되니, 만약 이 싸움이 계속되면 그 틈을 타서 누군가 음모를 꾸미기 쉬울 텐데……’그녀는 필명을 불러 경위를 이끌고 출동하도록 명령했으며, 사람을 시켜 선평후에게 김창명을 소환해 먼저 체포하라는 지시를 전달하도록 했다.이때 시만자가 말했다."이건 분명 김창명이 일을 키운 것일 거야.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일을 벌이는지 모르겠군."송석석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영군왕이 더는 기다리기 싫은 걸지도 몰라. 아니면 날 밖으로 유인하려는 걸 수도 있고."시만자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보며 말했다."그렇다면 오늘 밤은 경위부에서 보내도록 하자. 황실로 돌아가지 않는 게 좋겠어."그러자 송석석이 빠르게 상황을 분석했다."날 유인하는데 실패한다면, 오히려 직접 경위부로 와 나를 찾을 수도 있어. 이렇게 많은 노역들이 소란을 피우니 우리는 병력을 파견해야 하지만, 각 관문에서 골고
축축한 여름밤은 이유 없이 사람의 마음을 답답하게 만들었다.오늘 밤 휘왕은 입맛이 없는 듯 몇 입만 먹고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글을 쓰며 마음을 가라앉히겠다며 고청영을 데리고 서방으로 들어갔다. 고청영은 아직 배가 고파 서방에 들어가기전에 요깃거리 할 음식을 서둘러 챙겼다. 영군왕은 여전히 관백으로 변장한 채, 휘왕이 서방으로 가는 것을 보고도 막지 않았다. 어차피 어디에 있든 누군가 그를 감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러나 오늘 밤, 영군왕에게는 더 중요한 일이 생겼다. 그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야행복으로 갈아입고 구리거울 앞에 앉아 작은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에는 여러 장의 얼굴 가죽이 들어 있었다. 그는 먼저 얼굴에 붙어 있던 변장 가죽을 떼어낸 다음, 새로운 얼굴 가죽을 선택해 붙였다. 이 가죽은 매우 정교해, 얼굴에 붙이고 나면 전혀 가짜 같지 않았다.비록 얼굴에 검은 천을 감쌀 예정이었지만, 그는 여전히 얼굴 가죽과 목의 연결 부위에 같은 색의 화장을 꼼꼼히 했다. 만약 검은 천이 벗겨져도 흔적을 알아볼 수 없게 하기 위해서였다.그때 밖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리자 그가 검은 천을 얼굴에 감싼 뒤 말했다."들어와라."그림자 같이 조용하게 한 사람이 들어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심청화와 염구진이 몽천생을 데리고 경위부로 갔습니다. 그들도 우리가 오늘 밤 행동에 나설 걸 알고 있는 듯합니다.""문제없다."영군왕의 목소리는 이미 바뀌어 더 이상 관백의 음성이 아니었다. 비록 네 글자뿐이었지만, 그 속에는 자신감과 위엄이 가득했다."예, 언제 출발할까요? 몇 명정도가 좋을까요?""조금 더 기다리거라."영군왕 사청엄은 상자를 치우고 일어나 검을 고르며 말을 이었다. "설령 임양운이 직접 나선다 해도 본군왕의 상대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하물며 몇몇 잡병 따위는 본군왕의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그러고는 갑자기 무엇인가 떠오른 듯 물었다."임황실에 들어간 몇 사람은 조사가 끝났는가?""예. 그들은 확실히 임씨 가문의 후손으로, 오
인시가 되자, 빗줄기가 점차 잦아들어 더위가 조금 가신 덕분에 사람들은 더욱 달콤한 잠에 빠져들어 버렸다. 이 틈을 타 일곱, 여덟 개의 그림자가 제진된 진성의 밤하늘을 제비처럼 스쳐 지나갔다. 비록 그들의 발이 지붕 위에 닿았지만 눈이나 흙을 밟는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그 그림자들은 어느새 경위부에 도착했는데, 야간 경비를 서는 시위들이 모두 철수한 상태였고, 본채에 있는 자들만이 방어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검은 그림자들은 눈빛으로 서로 신호를 주고받으며 무기를 움켜쥐었다. ‘왔다!’그렇게 희미하게 일렁이던 본채의 등불은 검은 그림자들이 몰고 온 바람에 순식간에 꺼져버렸다.칠흑의 어둠 속이었기에 손을 뻗어도 손가락조차 보이지 않았다.오직 상대의 숨소리와 내공으로 위치를 파악해야 했다.그 중 사청엄의 내공은 깊어 다른 사람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기에, 그의 검은 빠르고 강력하게 공기를 가르며 단숨에 송석석의 목 근처까지 위협했다. 하지만 송석석 또한 엄청난 능력자이다. 그녀는 단번에 날아올라 검을 피한 뒤, 가볍게 회전하며 착지하며 도화창으로 앞의 적들을 모두 쓸어서 정리했다. 그러고는 냄새를 따라 시만자를 찾아 그녀와 등을 맞대고 적들과 맞서 싸웠다.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펼쳐진 전투는 극도로 격렬했으며, 오직 칼과 창, 검 등 무기의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한편, 송석석과 일행들은 점점 마음이 무거워졌다. 고수들 간의 대결에서는 서너 번 움직임만으로도 상대의 실력을 파악할 수 있었는데, 이들의 실력은 매우 뛰어났기 때문이다. 특히 송석석을 집중 공격하는 자의 실력은 심연처럼 깊었다.그들은 모두 이 자가 영군왕일 수 있다고 직감했다. 만약 그를 붙잡을 수만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터였지만 전투가 본격화되기도 전에 이미 부상자가 속출하고 있었다. 고작 백여 차례의 교전으로도 이미 대부분이 큰 중상을 입은 상황이었다.모두가 속으로 경악하며, 영군왕을 잡기는커녕 목숨을 건질 수만 있다면 조상님의 은덕이라고 여길 정도였다. 다른
그러자 송석석이 이내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왕씨 가문에서는 그녀를 아주 잘 대해줍니다. 조카딸의 혼담에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시집간 부군이 잘 대해준다 하더군요. 다만 그녀는 자신이 두 번 시집갔음에도 처가에 머무는 것이 조카들에게 미칠 영향이 걱정되어 그러는 모양입니다.”그 말에 전북망이 고개를 끄덕였는데, 순간 번개처럼 날렵하지만 마음씨 따뜻한 최씨 부인이 떠올랐다. 최씨 부인에게는 적자와 서자녀들이 있었고, 아직 혼담이 정해지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그런 그녀가 혼인 문제로 얼마나 많은 유언비어에 시달렸을지 생각하니, 전북망은 진심으로 안타까웠다. 형수로서의 최씨 부인을 존중하며, 그녀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할 바 없었다. 이때 송석석이 그의 생각을 끊었다. “그럼 천천히 생각해 보십시오.”전북망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문득 물었다. “우리 단둘이 여기에 있으면, 섭정왕이 질투하지 않을까요?” 송석석은 예상치 못한 질문에 잠시 당황했으나, 곧 침착하게 답했다. “이 정도 신뢰도 없다면, 제가 어찌 현갑군 지휘사로 오래 근무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서로 숨김없이 모든 걸 공유합니다. 이번 만남 역시 그분께 이미 알려두었죠.”송석석이 떠나자 전북망도 따라나섰다. 그는 섭정왕이 어딘가에서 이들을 지켜보고 있으리라 의심했지만, 정작 별청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앞마당에서야 섭정왕을 발견했는데, 그는 대장군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송석석을 보자 미소로 맞이하며 불러세우는 섭정왕의 모습에 전북망은 마음이 착잡해졌다. ‘진정한 부부란 저런 것일까.'그러나 성릉관이든 진성이든, 남녀의 단독 만남은 명예에 흠이 될 수 있음도 잘 알았다. 특히 높은 지위에 오른 이들은 더욱 조심해야 했다. ‘내가 무슨 권리로 그들을 걱정하는가.’자조적인 생각이 들었지만, 왕청여의 제안은 여전히 그의 가슴을 두드렸다. 5일의 고민 시간이 주어졌다. 사여묵과 송석석이 진성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최씨 부인의 이야기를 떠올리면 답은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 전북망은 송석석과 다시 만났다. 사실 그전에도 송석석이 성릉관으로 갔을 때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들은 서로 서먹해서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이 매번 성릉관을 떠날 때마다 몰래 배웅하곤 했다. 전북망은 자신이 당시 어떤 마음으로 그런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늘 송석석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이방과 왕청여에게도 미안하긴 하지만, 그들과는 서로 감정을 소모하고 다투면서 서로에게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장군부만 송석석에게 상처를 줬을 뿐, 송석석은 장군부에게 조금의 상처도 주지 않았다. 비록 이혼한 후에는 전북망 어머니의 병세에 대해 상관하지 않았지만 큰형수에게 어떻게 단설환을 얻을 수 있는지 알려주기까지 했다.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는 이미 섭정 왕비가 되어있고 나서였다. 변방의 전사들에겐 양식과 무기가 풍부하고, 봉록까지 올라, 그들에겐 이득이기에 이제는 조정의 정세에 관심을 두지 않아도 되었다. 섭정왕은 한때 장수였기에 병사들이 배불리 먹어야만 국토를 지킬 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전북망과 송석석이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섭정왕과 함께 소 대장군에게 생신을 축하해주고 있었다. 그녀를 보는 소 대장군의 눈빛은 여전히 자애롭고 인자했다. 전북망은 사람들을 사이에 두고 멀리서 그 광경을 보며, 그때 그렇게 어리석지 않았다면 지금 송석석과 함께 노장군의 생신을 축하하는 사람이 바로 자신일 것이라는 후회를 했다.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같은 생각인 걸 보니, 자신만 제자리에서 멈춰 있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래서 그는 이번에도 송석석과 대화를 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생일잔치가 끝난 후에 송석석이 뜻밖에도 먼저 그를 찾았다. 그와 송석석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섭정왕은 이상한 소문이 날까 봐 걱정되지도 않는가?’전북망은 당황하고 불안해 보였고, 송석석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먼저 입을 열지도 못하고 송석석이 말하기만을 기다리
전북망은 성릉관에서 몇 년 동안 두 번이나 발탁되었고, 지금은 장군의 신분으로 수천 명의 병사를 관리하고 있다. 계속 성릉관에 주둔하고 있어 다시 진성으로 돌아간 적이 없었고, 진성의 부름 없이는 제멋대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는 재혼도 하지 않고 여전히 혼자 살아갔다. 성릉관의 모래바람은 해마다 그의 얼굴에 흔적을 남겨 또래들보다 몇 살이나 더 늙어 보였다. 심지어는 몇 년 동안 불면증에 시달렸기에, 진정제를 먹어야만 잘 수 있었다. 그는 가끔 이런 생각을 했다. ‘만약 내가 그때 이방과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어떻게 지내고 있었을까? 송석석과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부부가 되었을까? 아마도 우린 귀여운 자녀도 낳았겠지. 그리고 나는 군대에서 열심히 일하고 석석은 가문의 내무를 책임지며 부모님을 모시고 아이를 돌보고 있었겠지? 설령 내가 승진을 하지 못하고 평생 장군으로만 살아도 그는 날 떠나지 않았겠지.’ 이전의 전북망은 송석석이 하늘을 나는 독수리였는데 자신을 위해 날개를 부러뜨리고 병든 시어머니를 돌보며 군부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책임지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리고 그가 알아차렸을 땐 이미 돌이킬 수도 없었다. 전북망에게는 이미 이방이 있었고 이방을 사랑한다고 했으니, 송석석이 이혼하자고 했을 때 그는 심한 말을 하고 후회하지 말라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송석석 또한 후회할 게 없었다. 이혼을 하면서 전북망을 위해 부러뜨렸던 날개가 다시 자라나 전쟁터로 날아가 쉽게 공을 세웠으니까 말이다. 이방은 송석석이 큰 가문의 아가씨인 데다가 부친과 오라버니가 그를 위해 길을 닦아주었기에 이런 성과를 이룰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의 성공은 그의 능력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문이 도움이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주된 원인은 아닐 것이다. 만종문에서 송석석의 무공은 거의 최고였는데, 그건 송석석이 그만큼 노력을 했고, 그만큼 땀을 흘렸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전북망은 송석석을 존경했지만 그는 자신이 송석석을
어머니께 간청해도 소용이 없자 신이는 아버지를 찾아갔다. 하지만 돌아온 건 더 심한 꾸지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신이가 이 혼사를 반대하는 것은 양지춘과 접촉한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양지춘에게 그녀를 데리고 나가서 놀며 감정을 쌓으라고 했다. 신이는 가기 싫었지만 어머니가 억지로 그녀를 마차에 태웠고, 심지어는 하녀에게 그녀가 부적절한 말을 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엄명했다. 양지춘의 얼굴은 그나마 멀쩡하게 생겼는데, 처음에는 신이를 조금이나마 존중하는 척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본성을 드러냈다. 그는 신이의 외모와 품평을 논하며 신이가 외모가 예쁘지 않았더라면 절대로 그를 부인으로 들이지 않겠다고까지 했다. 그의 오만한 태도는 신이를 매우 불편하게 했다. 단지 이것뿐이었다면 아마도 신이가 결혼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양지춘은 일부러 신이를 마차에 태워주는 척하며 그녀의 엉덩이를 꼬집었다!그 순간 신이는 온몸의 피가 머리 위로 솟구친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의 경박한 눈빛에 신이는 이내 눈물이 쏟아졌고, 모욕감에 온몸을 떨었지만, 감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힘들게 집에 돌왔는데, 하녀와 마부는 그의 동작을 보지 못한 탓에, 오히려 그가 세심하고 자상하다며 그녀의 어머니 앞에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신이는 억울해서 어머니에게 그 일을 말했지만 어머니는 오히려 그녀가 일부러 꾸민 말이라고 생각해, 그녀를 꾸짖으며 사흘 동안이나 외출을 금지했다. 신이는 그렇게 방에 갇혔고, 매일매일을 눈물로 얼굴을 씻었다. 심지어 그날 선비의 말을 듣고 호수에 뛰어들지 않은 것을 후회하기까지 했다. ‘내가 양지춘에게 시집가는 것이 물에 빠져 죽는 것과 대체 무엇이 다른가?’ 사흘 후, 외출 금지가 해제되자마자 신이는 다시 경산사로 가서 같은 핑계로 하녀를 내보냈다. 이번엔 정말 죽을 각오로 호숫가에 간 것이었는데, 뜻밖에도 그곳에서 다시 그 선비를 만났다.그는 쓸쓸하게 호숫가에 앉아 작은
신이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한 사람이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고, 나무 그늘에 몸이 가려져 있었다. 그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은 초라해 보였고 눈 밑에는 검푸른 빛을 띠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 사람은 바로 다리 앞에서 그림을 팔던 선비이자, 학정이 말하던 퇴학 해서 기녀를 키우는 학생이었다!“헛소리하지 마십시오.” 신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짜증을 냈지만, 그가 한 말을 떠올리자 내심 두려웠다. “나는 여기에 물귀신이 있다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거짓말하는 것이겠지요.” 신이는 죽음은 두렵지 않았지만, 귀신은 두려웠고 진흙탕에 영원히 깔려 있는 건 더욱 두려웠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가 걸어 나오자 얼굴은 더욱 여위어 보였다. “호숫가의 주변을 보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왜 이런 아름다운 경치를 보러 오는 사람이 없겠습니까?” “그건 사람들이 이곳으로 예불하기 위해 오는 것이지, 경치를 보러 오는 것은 아니니까요. 절을 하고 바로 돌아가니 당연히 보지 못하겠지요.” 신이는 그렇게 말했지만, 순간 깊이가 보이지 않는 호수에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느껴져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그는 여전히 굳게 서서 말했다. “예불하는 사람은 천지와 자연을 경외하기 때문에 이런 좋은 경치가 있다면 반드시 한 번 보러 올 것입니다. 이런 곳은 인재를 배출할 수 있는 좋은 곳일 텐데 아무도 없다는 게 아기씨는 이상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것이 사실인지는 몰랐지만, 그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감히 그런 무서운 곳에서는 죽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몸을 돌려 떠나려 했다.그러자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한 번뿐인 인생이니 절대 쉽게 자신의 생명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살고 싶어도 살 지 못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의 말이 이상하게 느껴져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는데, 그의 눈 밑은 이내 붉어졌고 눈물이 고여 반짝이는 것 같
신이의 사촌 여동생과 하녀는 신이를 찾으러 돌아왔다. 신이가 하녀보고 이순에게 삼백문을 주라고 하자 이순은 웃으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원래는 우연한 만남일 뿐이라 다시는 접점이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 조모님의 생신 때 가문 연회에서 공학정이 데리고 온 제자들 중에 이순이 있었다. 강남의 예의 규율은 진성처럼 엄격하지 않아서 연회에 참석할 때 여인들도 앞마당에 갈 수 있었다. 이순은 신이를 단번에 알아보지 못했다. 신이는 그때 면사포를 쓰고 있었고 두 눈만 드러냈기 때문에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이상할 건 없었다. 이순은 식사를 하지 않고, 신이의 조모에게 생신 축하 그림만 드린 후에 집에 일이 있다며 작별을 고했다. 그가 떠나자마자 학정이 그를 언급하며 안타까운 말투로 말했다. “총명하긴 한데 진취심이 없어서 계속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걸 여기로 데려와 진취성이 있는 사람들을 많이 사귀게 하려고 했는데… 이 정도로 사리분별을 할 줄 모르다니. 정말 실망이군. 학교를 그만두겠다면, 이젠 마음대로 하라고 해야겠어.” 그러자 신이의 부친이 위로했다. “화내실 필요 없습니다. 선생님껜 학생이 많으니 그가 나간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될 건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학정은 마치 울화가 쌓인 것처럼 말했다. “그는 내가 가장 아끼는 제자였다네. 그런데 진취성만 없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동창에게 돈을 빌리질 않나, 게다가 집에 기녀까지 키우고 있다더군.” 신이의 아버지는 그런 사람을 가장 싫어하였다. “그런 사람은 얘기할 가치도 없습니다.” 신이는 그가 어떤 사람이라는 걸 알고 나서 왠지 마음속으로 실망감이 가득했다. 아마도 그날은 그가 그린 그림을 보고,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 같다고 생각해 마음이 갔던 것 같았다. 그렇게 몇 달 후, 신이의 혼사도 낙착되었다. 그녀의 약혼자는 회주 지부의 둘째 아들인 양지춘이고, 올해 22살이었다. 22살인데도 결혼하지 않았던 건 첩을 통해 서자를 낳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좋은 가문은 그
그의 이름은 신이었는데 그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그에 대해서 말할 때, 경멸하는 기색을 띠었고,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 모르는 사람까지 모두 침을 뱉으며 뻔뻔하다고 할 정도였다. 알다시피 애인과 야반도주하는 것은 사람을 죽이고 불을 지르는 것보다 더 욕먹을 일이니 말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에게 후회하냐고 묻기도 했다. 그녀는 시집간 것을 후회하지 않지만 죄책감을 느끼긴 했다. 왜냐하면 그로 인해 시 씨 가문의 명성이 손상되어 형제자매들과 조카들이 혼사에 어려움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신이는 시 씨 가문의 아가씨로서, 태어날 때부터 온갖 보살핌을 받아왔다. 먹는 것은 물론 모두 산해진미이고, 입는 것도 모두 능라 비단이었다. 게다가 보모님과 오라버니의 총애까지 한 몸에 받았다. 하지만 그녀에겐 한 가지 결함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열네 살 때까지 월사가 오지 않은 것이었다. 많은 의사들을 불러 진찰을 받고 밤낮으로 약을 먹었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어머니는 그녀에게 몸이 차서 그러니 몸조리를 하면 나을 수 있다고 위로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몰래 의사가 부모님께 하는 말을 들었다. 의사는 그가 몸이 차서 그런 병이 생긴 것이 아닌, 아이를 키우는 곳이 어린아이와도 같아서 평생 아이를 가질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의 몸이 마치 작은 꽃병과 같아서 꽃을 꽂을 수는 있지만 나무를 심고 꽃을 피워 열매를 맺는 건 불가능하다고 비유했다. 그녀는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건 여자에게 어떤 의미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녀를 속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나중에 좋은 사람에게 시집가서 부군에게 첩을 들인 후, 첩이 낳은 아이를 친자식처럼 키우라고 조언해주었다.시 씨 가문이라는 후원이 있으면 그녀가 아이를 낳을 수 없어도 아무도 그녀의 지위를 흔들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 씨 가문의 재물은 그녀가 평생 부귀하게 살기에 충분했다. 신이의 조모도 그녀에게 아이를 낳을 수 없으니 자세를 낮춰야 한다고 했다. 시 씨 가문의 딸이라고
추운 겨울이 되자 눈이 내려 성릉관은 하얗게 뒤덮였다. 세상이 마치 깨끗해진 것처럼 보였다. 이황자는 몇 년 동안 너덜너덜한 승복을 입고 발우를 받쳐 들고는, 가는 길에 동냥을 하다가 절을 보면 이틀 묵으며 부처님께 참회하면서 살았다. 사실 그는 원래 있던 절에서 계속 지낼 수 있었다. 편안하진 않지만 풍찬노숙할 필요도 없고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그런 안일한 곳에서는 평생 죄를 씻을 수 없다고 생각했고, 계속 길을 걷고 계속 고생해야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했다. 그가 성릉관에 도착했을 때 짚신은 이미 찢겨 있었고 발바닥에는 두꺼운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이제는 신발을 신지 않고도 자갈이 가득한 길을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추운 날씨에는 모든 옷을 껴입어도 추위를 막을 수 없었지만 이미 익숙해진 뒤였다. 그는 눈보라를 맞으며 성릉관에 위치한 감은사로 향했는데, 몇 년 동안 발걸음을 멈춘 적이 없는 탓에 고단함이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심지어는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아 그는 눈이 가득 쌓인 길에서 의식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깨어났을 때 그는 따뜻한 두꺼운 이불 속에 누워 있었다. 그가 있는 방에는 숯불이 피워져 있었고, 살짝 열린 창문으로 눈에 눌려 허리가 굽은 나뭇가지가 보였다. 그는 눈동자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렇게 편안하고 따뜻한 느낌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의 마음속에 순간 욕심이 생겨 조금만 더 누워있고 싶어졌다. 그런데 바로 그때, 문이 활짝 열렸다. 그가 벌떡 일어나 앉았는데, 갑자기 눈앞이 핑핑 돌더니 다시 힘없이 침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누워 있거라.” 이때 누군가가 부드러운 말투로 말하면서 약그릇을 그의 침대 옆에 놓았다. 그는 말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익숙해, 어지러움을 가라앉히고 고개를 돌려보니, 그 사람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서우 형?!’ 그는 자신이 잘못 보았을까 봐 다시 자세히 보려 했지만, 몸이 너무 어지러운
대황자는 봄 사냥 때 숙청제에게 꾸중을 듣고 돌아간 후 앓아누웠다. 당시 이황자와 서우가 모두가 걱정했는데 덕비는 오히려 기뻐했다. 그는 이번 일을 겪으면서 황제폐하께서는 분명히 대황자를 싫어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덕비는 이황자를 안고 반드시 부지런해야 하고, 태부와 황숙의 말을 잘 듣고 누구보다 잘 배워 황형을 제압해야 한다고 당부까지 했다. 그로 인해 이황자의 마음은 몹시 복잡했다. 덕비가 줄곧 그에게 태자와 황제가 되는 것이 얼마나 좋은 지 말해주었을 때 비록 그도 마음이 설렜지만 자신과 거리가 먼 얘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지금 그와 대황형, 서우 형, 그리고 셋째 동생이 사이가 좋아 도저히 대황형을 미워할 수가 없었다. 매일 모순적으로 지내다 보니 오히려 학업이 나빠졌고 승마 연습을 할 때도 여러 번 실수를 했다. 하지만 덕비는 이상하게 그를 탓하지 않았고 며칠 동안 계속 게으르게 하라고 했다. 그렇게 덕비는 이황자를 데리고 복마마를 자주 뵈러 갔고, 복마마 궁전에서 숙청제를 만날 수도 있었다. 덕비는 며칠 동안 그곳을 드나들더니 어느 날 굳은 표정으로 다시는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차가운 말투로 청이에게 자신의 보살핌이 없으면 아이가 태어날 수 있는지 보겠다고 했다. 황제폐하를 자주 뵈러 갈 수 없어 아쉬웠지만 이황자는 마음을 가다듬고 공부와 승마술에 전념했다. 이황자는 당시 앞날이 어떻게 될지도 몰랐고, 비록 매일 힘들긴했지만 한편으로는 즐거웠기에, 계속 이렇게 지내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숙청제의 천추세에 승마대회를 개최할 예정이니 세 황자와 서우도 가서 겨뤄 보기로 했다. 원래 그런 대회에서 황자들은 재미있게 참석만하면 되지만, 덕비는 그 경기를 몹시 중시했다. 덕비가 이황자에게 마름쇠를 건넬 때, 그는 하늘이 무너져내리는듯한 기분을 느꼈다. 이황자는 원하지 않았다. 그는 절대로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대황형의 목숨을 앗으려 하다니, 이황자는 처음으로 어마마마가 무서워졌다.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