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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화

작가: 유애
이방은 속에서 질투심이 살짝 올라왔지만,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

“전 질투가 많지 않습니다. 그쪽도 아이를 가져야 남은 생, 의지할 곳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임신한 뒤에도 그대와 잠자리를 가지건 말건, 그의 선택에 맡길 생각입니다.”

마지막 말엔 분명 화가 난 기색이 담겨 있었다.

전북망이 서둘러 약속했다.

“걱정할 것 없소. 임신한 뒤에는 다시는 건드리지 않을 것이오.”

“그럴 것 없습니다. 저 그렇게 속 좁은 사람 아닙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방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이걸 송석석이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은 그녀가 아닌 이방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이 역겨운 상황을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꾸짖듯 이방을 향해 쏟아붙였다.

“이미 여인인 것만으로도 살기 벅찬 세상인데, 같은 여자끼리 돕고 살지는 못할지 언정 짓밟으려 드시는군요. 그래봤자 당신도 여인 아닌가요? 전쟁터에서 좀 활약했다고 이렇게 사람을 무시해도 되나요? 당신들 눈엔 제가 겨우 자식한테 의지해야만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연약한 여자로 보이나요? 저도 하고 싶은 게 있고 원하는 삶이 있어요. 당신들 때문에 한낱 병풍이 될 생각이 없단 말이에요. 본인들만 중요하고 남들은 하찮게 여기지 마세요.”

이방은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눈살을 찌푸리며 반박했다.

“말 너무 심하게 하시는 거 아닙니까?”

송석석이 차갑게 말했다.

“긴말 하지 않겠습니다. 이혼합시다. 서로 얼굴 붉히지 말고.”

“이혼? 지금 날 협박하려 드는 것이오?”

이방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 그렇게 만만한 사람 아닙니다. 어디 마음껏 소란 피워 보십시오. 그럴수록 그쪽만 창피를 당할 테니.”

그녀는 명문가의 여인들이 얼마나 명예를 중요하게 여기는 잘 알고 있었다. 특히 송석석처럼 태어났을 때부터 높은 신분을 가진 여인들일수록 더 했다.

“난 그대와 이혼하지 않을 것이오. 우리가 이러는 것은 다 그대를 위해….”

“그만하세요!”

송석석이 표정을 가다듬으며 위엄이 가득 담긴 말투로 말했다.

“어디서 제 앞에서 위선을 떨려 하십니까? 이러는 이유 제가 모를 줄 아십니까? 자신들의 체면을 구기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잖습니까!”

전북망이 급히 끼어들었다.

“그게 아니오. 괜한 오해하지 마시오.”

이방이 냉소를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뭐의 눈엔 뭐만 보인다고, 역시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란 여인 답게 참으로 오만한 착각을 하고 있네요. 그대를 위해 하는 말이라고 분명히 말하지 않았습니까? 버림받아 밖에서 고생하는 것보단 장군부에 지내는 게 훨씬 나으니까. 왜 스스로 가시밭길을 걸으려 하십니까? 제 호의를 먼저 걷어찬 것은 그쪽이니, 더 긴말 하지 않겠습니다. 앞으로 그대가 어떻게 되든 신경 쓰지 않고 제 낭군님만 사랑하겠습니다. 사람들이 뭐라 수근거리든, 상관없습니다.”

송석석이 말했다.

“정말 상관없었다면, 여기에 올 필요도 없었겠죠.”

이방이 앞으로 걸어나가며 차갑게 말했다.

“나는 그대가 이혼을 빌미로 불쌍한 척 우리를 방해할까 봐 온 것입니다. 이 혼인은 우리가 전쟁의 공로로 받은 것이니, 그대가 아무리 훼방을 놓아도 소용없습니다.”

송석석이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나가세요. 이런 대화 해봤자 아무런 의미도 없으니까. 나라를 위해 싸워준 장군들과 더 얼굴 붉힐 일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

그녀의 아버지와 형제들 또한 무장으로서 전장에서 희생되었다. 그녀는 기본적으로 나라를 지키는 무장들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다. 송석석은 더 이상 두 사람과 다투고 싶지 않았다.

“보주야, 손님들 나가신다! 배웅해드리거라!”

그녀가 싸늘하게 축객령을 내렸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보주가 나타나 그들을 향해 말했다.

“두 분의 관계는, 두 분이서 알아서 해결하세요. 괜히 가만히 있는 저희 아가씨 괴롭히지 마시고.”

“건방진 것!”

이방이 화를 내며 말했다.

“감히 하녀 따위가 장군을 가르치려 들어?”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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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ue Qin
개패고싶다 이름도 이방이네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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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혜미
재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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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정
2024. 10. 07. AM 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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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으로 들어가 황제에게 자초지종을 보고하자, 최숙심의 딱한 사정을 운운하면서 그녀의 선한 마음씨 또한 찬양했다.그녀의 삶도 이토록 엉망진창인데 힘든 사람들에게 죽도 나눠주고 갈 곳 없는 여인들을 소주방에서 지내게 도와준 사실들을 일일이 읊으면서 감탄했다. 솔직히 숙청제에게는 지금 최숙심처럼 백성들을 교화할 수 있는 모범적인 사람이 필요했다. 때문에 바로 어명을 내려 그녀에게 순금 백 냥과 집 한 채까지 하사했다. 그리고 유방 당했던 왕씨 가문 남자들도 남강 전쟁만 끝나면 북명왕과 함께 진성으로 돌아오는 것에 허락했다.그렇게 최숙심은 죽을 고비를 넘어 인생 역전까지 이뤄냈다!한편, 왕표에게는 요참형이 내려졌고 역적과 손잡고 왕표를 선동한 고청우에게도 똑같은 형을 내렸다. 그러자 숙청제는 예전에 고씨 가문 여인들을 살려준 일이 후회되었다. 고청우를 진작 감옥에 가뒀다면 남강에 이렇게 큰 화란이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니 말이다.이후 숙청제는 척귀에게 걱정되니깐 암자에 가끔 가보라고 했는데, 이는 실은 감시하기 위해서였다. 송석석은 척귀를 보자마자 황제가 무슨 걱정을 하고 있는지 바로 알아차리고는, 사람을 보내 고씨 여인들에게 고청우의 형이 집행될 때 고청우와의 옛정 때문에 잘못된 행동을 저지르지 말라고 확실하게 당부했다.한편, 소주방에 있는 노부인은 자신의 아들인 왕표가 결국 체포되었고 요참형을 받는다는 소식에 큰 충격을 받은 채, 죄 없는 왕청여와 최숙심에게 손가락질을 하면서 갖은 욕설을 퍼부으며 화풀이를 했다. 노부인은 두 사람이 어떻게 가족이며, 서방인 왕표를 배신할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며, 점점 더 흥분하다가 결국 최숙심과 왕청여의 뺨을 강하게 내리쳤다.그리고는 지금 당장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왕표를 구해내라고 억지를 부렸다.최숙심은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노부인에게 노여움을 풀라고 빌었지만, 노부인은 오히려 점점 언성을 높였다. 그러자 최숙심도 더 이상 참지 못해 벌떡 일어나 주막에서 칼을 가져오더니 바닥에 툭 던졌다

  • 봄에 전장의 꽃이 피어난다   제1394화

    왕표는 중범죄자이기에 바로 대리사로 이송되어야 하지만, 송석석은 그를 일단 경위부로 압송했다. 경위부에서 심문을 마친 후, 어전에 보고를 올리며 최숙심의 공을 황제에게 잘 얘기한다면,왕준과 현이 하루 빨리 진성으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더군다나 고청우도 아직 경위부에 갇혀 있기에 왕표와 고청우가 만난다면 더욱 많은 일들을 알아낼 수도 있었다.그렇게 고청우와 왕표는 같은 곳에 갇혔으며, 중간에 나무 울타리 하나를 세워 두 사람을 갈라놓았다.고청우와 왕표가 서로 눈이 마주치자, 표정이 순식간에 바뀌었으며 왕표가 먼저 이를 갈면서 마구 소리를 질렀다.“천박한 놈! 결국 네 놈 꼴도 이렇게 되었구나! 드디어 벌을 받은 게야!”그러자 고청우가 실눈을 살짝 뜨며,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비아냥거렸다.“내가 천박한 년이면 왕표 너는 뭔데? 나도 벌을 받았지만 너도 결국 이렇게 갇혀 있잖아! 넌 뭐 다를 것 같아?”“이게 다 네 놈 때문이야!”왕표가 울타리 사이로 손을 뻗어 고청우를 잡으려고 허우적거렸고 뒤로 살짝 물러난 고청우는 오아표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코웃음을 쳤다.“버러지 같은 놈!”“네 놈이 감히…! 지금 뭐라고 했느냐! 네 놈이 역적과 손잡고 날 꼬셔서 야반 도주하게 만들지 않았다면 난 지금 남강 원수의 신분으로 잘 살고 있었을 거야! 절대 이런 꼴을 당할 리 없었을 거라고!”왕표가 씩씩거리며 소리를 지르자 고청우가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널 꼬셨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 넌 결국 죽음이 두려워서 그런 선택을 한 거야. 넌 내가 무엇인가 노리고 접근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잖아. 그런데 내가 아이까지 낳으니 이제 날 곁에 묶어 둘 수 있겠다고 확신한 거지. 이 세상 모든 여자들이 네 본처처럼 아이들을 위해 목숨까지 바칠 수 있는 줄 알아? 가족애라는 건 이 세상에서 가장 우스운 거야. 그딴 걸로 날 묶어 둘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멍청한 놈! 내가 널 버리고 갈 때 분명하게 얘기했잖아. 넌 무능하고 무술 실력도 보잘것없는데

  • 봄에 전장의 꽃이 피어난다   제1393화

    한편, 송석석은 시만자를 데리고 일반 손님으로 위장한 채 직접 보화사로 향했다. 보화사에 도착한 뒤 절을 올리고 초를 꽂고는 주지 스님을 찾아 신분을 밝힌 뒤, 여람 스님에 관해서 물었다.주지 스님은 바로 지객 스님을 불러왔다. 각지 스님들이 보화사에 찾아와 며칠 묵고 갈 때마다 지객 스님이 그자들을 모셨기 때문에 자세한 상황을 제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보화사는 진성 3대 절 중의 하나일 정도로 꽤 유명했기에, 매년 보화사에 찾아와 경을 들으면서 며칠동안 이곳에 묵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많아도, 실제로 이곳에 머물 수 있는 사람은 몇 없었다. 지객 스님은 여람 스님에 대해 인상이 꽤 깊었다. 수련의 경지가 그리 높지 않았기에 원칙대로라면 이곳에서 지낼 수 없는데 몇 년 전부터 남강에서 죽은 이의 영혼들을 제도했기에 그 자비로운 마음을 높이 평가하고 덕행도 많이 쌓았기에 지객 스님은 의례적으로 여람 스님을 받아준 것이다.“며칠동안 매일 여람 스님께서 밖에 돌아다니셨습니다. 진성 내에 전란이 일어나 사상자가 많았기에 여람 스님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죽은 이들의 영혼을 제도하느라 고생이 많았습니다.”지객 스님은 여람 스님을 매우 좋게 평가했다. 송석석은 그런 지객 스님의 말을 조용하게 듣고 있을 뿐, 반박하지는 않았다.그러고는 지객 스님에게 여람 스님을 만나보고 싶다고 얘기하며, 여람 스님을 존경하는 마음에 돈을 기부하며 여람 스님을 위해 따로 절 하나를 지어주고 싶다는 말도 함께 전해달라고 했다.한편, 지객 스님은 송석석과 시만자의 신분을 알지 못했지만, 두 사람이 수수한 옷차림과 달리 기품이 넘쳐 흘렀기에 모 훈작 세가의 부인이나 아가씨일 것이라고 추측해,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인 후 바로 왕표에게 말을 전했다.왕표는 자신을 찾아온 자가 있다는 말에 흠칫 놀랐다가 절을 만들어주며 돈까지 기부하겠다는 소식에 바로 표정이 환하게 바뀌었다.평서백이었던 왕표는 가문의 번영을 위해 절에 돈을 기부하는 명문 가문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그렇게

  • 봄에 전장의 꽃이 피어난다   제1392화

    이내 표정을 숨긴 최숙심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얼른 가십시오. 돈을 구하면 바로 서방님을 찾으러 가겠습니다. 아, 그리고 요즘 진성 순찰이 삼엄하니 여기저기 돌아다니지 마십시오.”왕표는 자신을 걱정하는 최숙심의 말을 듣자, 그녀가 밖에서 아무리 대단한 여인이라고 불려도 결국 자신에게 만큼은 마음이 약해질 수밖에 없다는 뿌듯함에 경계심이 완전히 풀렸다.“최대한 3일 안에 마련해주면 고맙겠소.”그러자 최숙심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그건 안 됩니다. 지금 상황이 어려운데, 어떻게 3일 안에 그 큰돈을 마련할 수 있겠습니까?”“우리 딸 지아가 지금 북명 황실에서 지내고 있지 않소? 그러니 난 부인이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믿소. 부인의 소식을 기다리겠소. 그리고 내가 부인을 찾아왔다는 말은 아무한테도 하지 마오. 어머니와 왕청여한테도 얘기해서는 안 되오!”말을 마친 왕표는 삿갓을 쓰고는 돌아서서 빠르게 떠났다.표정이 확 어두워진 최숙심은 그를 얼른 따라갔지만 골목 밖에도 순찰하는 경위대가 보이지 않았기에 섣불리 소리를 지를 수도 없었다.왕표는 궁지에 몰린 순간 백성들을 인질로 잡아 어떻게든 진성을 벗어나려고 할 것이고 만에 하나 왕표가 진성을 빠져나가게 되면 그를 찾아내는 건 더 어려워질 것이다.최숙심은 빠른 걸음으로 소주방에 돌아와 석소를 구석으로 불렀다.“석소 아가씨, 얼른 왕비에게 찾아가서 왕표 그자가 보화사에 여람 스님 신분으로 위장하여 숨어있다고 전하시오.”“네, 지금 바로 다녀오겠습니다.”그렇게 석소가 돌아서서 소주방을 떠나려던 그때, 최숙심이 그를 불러 세웠다.“잠깐만요! 왕비님께 너무 대놓고 보화사에 왕표를 잡으러 가지는 말라고 전해주세요. 저에게 거짓말을 한 것일 수도 있으니 일단 몇 사람만 데리고 가서 상황만 파악해보시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전하세요.”현재 수색이 삼엄해서 왕표는 더 이상 도망갈 곳도 없겠지만 그래도 최대한 조심해야 한다. 이는 최숙심이 공을 세울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이고 단번에 확

  • 봄에 전장의 꽃이 피어난다   제1391화

    진성 전체에 대한 순찰을 강화하자 예상대로 왕표가 급하게 모습을 드러냈다.하지만 왕표가 찾아간 사람은 왕청여가 아니라 최숙심이었다.이날 최숙심은 딸에게 자신이 직접 만들어준 옷을 주러 북명 황실에 찾아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소주방 여인들을 위해 이런저런 필요한 물건들을 사기도 했다.눈앞에 갑자기 나타난 왕표를 봤을 때, 최숙심은 너무 놀라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왕표는 분명 왕청여에게 자신이 나타났다는 사실을 최숙심에게 알리지 말라고 했는데 왜 이렇게 직접 찾아온 건가?’“부인, 나일세.”커다란 삿갓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목소리는 왕표가 확실했다. 최숙심은 잠시 넋을 잃고 있다가, 순간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이를 꽉 깨문 채 가까스로 화를 억눌렀다. 몰래 주변을 쓱 살폈는데, 골목 안에는 두 사람 외에 아무도 없었다.최숙심은 왕표가 절대 자신을 찾아오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었는데, 그녀의 판단이 틀려 버린 것이었다. “지금 무슨 말씀하시는 겁니까…?”이를 악문 최숙심의 목소리는 조금 떨렸는데, 왕표는 그녀가 자신을 오랜만에 보게 되어 흥분한 거라고 착각했다.왕표는 이내 삿갓을 위로 슬쩍 올려 삐쩍 마른 얼굴을 드러냈다. 왕청여가 말한 것처럼 눈썹은 전부 잘라버렸는데, 그 모습은 더할 나위 없이 우스꽝스러 보였다.“부인, 정말 나일세!”왕표는 기대에 찬 눈빛을 하고 있다가 이내 주변을 경계하듯 쳐다보다가 아무도 없다는 것을 인하고 나서야 다시 입을 열었다. “가족들이 걱정돼서 이렇게 진성으로 다시 돌아온 거라네. 다들 무사한 걸 보니까 이제 한시름 놓이는군.”하지만 최숙심은 가식적인 왕표의 모습에 헛구역질이 날 정도였다.“진성 곳곳에 당신의 체포 공문서가 붙어있는데 어떻게 감히 진성으로 돌아온 것입니까?”“다들 무사한 걸 봤으니, 이제 이곳을 떠날 생각이오.”왕표는 말을 하며 한걸음 가까이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앞으로 평생 이렇게 여기저기 숨어 다녀야 할지도 모르오. 부인, 내가 예전에 부인에게 많은 잘못

  • 봄에 전장의 꽃이 피어난다   제1390화

    최숙심은 왕청여에게 언제 어디에서 왕표를 어떻게 만났는지 자세하게 물으며, 왕표 곁에 아이가 없었는지도 확인했다.“어제 냄비를 사러 밖에 나갔는데 소주방으로 돌아오는 길에 오라버니가 갑자기 작은 골목에서 나타나서 깜짝 놀랐어요. 나쁜 사람인 줄 알고 겁을 먹고 있다가 오라버니가 제 이름을 부르고 나서야 오라버니를 알아보았거든요. 얼굴은 까맣고 눈썹도 다 잘랐는데 몸도 심하게 야위어서 자세하게 보지 않으면 오라버니라는 걸 절대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어요. 아이를 데리고 있지는 않았고 혼자였어요. 누군가에게 협박을 받아서 도주하게 되었는데 체포 공문이 떠서 여기저기 숨어 다닐 수밖에 없었다고 했어요. 이제 가진 돈도 다 썼고 아이까지 키워야 하는데 더 이상 방법이 없다고 하면서 저와 어머니에게 어떻게든 3천냥을 구해달라고 부탁했어요.”“돈을 구하면 그자에게 어떻게 주기로 했어?”최숙심이 다급하게 물었고 왕청여가 대답했다.“그건 아직 정하지 않았어요. 일단 저희에게 돈부터 구하라고 하곤, 나중에 오라버니가 날 찾아오겠다고 했어요.”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최숙심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그자가 눈썹이 없다고 했나?”“네, 오라버니는 눈썹이 짙어서 알아보기 쉽거든요. 그래서 다 잘라버린 것 같아요.”왕청여가 말한 것처럼 왕표가 눈썹을 자른다면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 적을 것이다. 이 사실을 얼른 북명 왕비에게 알려야 하지만 눈썹을 다시 그릴 수도 있기에 눈썹이 없는 사람만 유의해서 될 일도 아니다.“그럼 넌 이틀에 한 번씩 밖을 돌아다녀서 관찰해봐. 병부에 가서 왕이장을 만나기도 하고. 네 오라버니는 기회가 생길 때마다 너를 몰래 미행할 거야. 난 석소에게 지금 당장 북명 왕비를 찾아가 순찰에 더욱 힘써 달라고 부탁할게. 그래야 네 오라버니가 한 시라도 빨리 널 찾아올 거야.”“알겠어요.”고개를 끄덕이던 왕청여가 다시 물었다.“그럼 어머니께는 뭐라고 말해야 할까요?”“돈을 마련하고 있다고 해. 왕이장이 돈을 주기로 했고 지금 점포를 팔고 있는 중

  • 봄에 전장의 꽃이 피어난다   제1389화

    한편, 최숙심은 뜨개질로 딸에게 옷을 만들어주고 있었다. 현재 북명 황실에서 지내고 있는 딸이 먹고 쓰는 것까지 황실에게 부탁할 수는 없었다.최숙심은 뜨개질을 하면서도 왕비가 했던 말들이 실제로 벌어질 가능성이 클 것 같다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했다. 왕표가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으면 무조건 진성으로 돌아올 테지만 진성에 돌아온 그가 자신을 찾아올지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왕표는 일단 노부인에게 찾아가 도움을 청할 것이고 노부인이 도울 능력이 없다고 생각되면 그때가 되어서야 자신을 찾아올 것이다. 하지만 아들을 걱정하고 아끼는 노부인은 어떻게든 그의 이 일을 해결해주려고 할 것이다. 비록 오늘 노부인과 왕청여를 미행했을 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앞으로도 이럴 것이라는 보장은 없었다.왕표가 진성으로 돌아온 이유가 돈을 구하기 위해서이니 돈만 구해지면 바로 진성을 떠날 것이다.노부인 현재 가지고 있는 돈이 없지만 진성에서 오랜 세월을 보냈기에 인맥은 넓다. 여기저기서 돈을 조금씩 빌린다면 그건 상대방들을 구렁이에 빠트리는 거나 다름없다.하지만 거동이 불편한 탓에 노부인은 직접 돈을 빌리러 나갈 수도 없고 창피해서라도 절대 직접 나가지 않을 것이다. 그럼 보낼 사람은 남희나 왕청여밖에 없다.최숙심이 속으로 이런저런 분석을 하고 있을 때, 왕청여가 방으로 걸어 들어왔고 최숙심은 고개를 들며 물었다.“무슨 일로 찾아온 것이냐?”왕청여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눈물부터 줄줄 흘렸다.“새언니, 제가 예전에 멍청한 짓을 많이 저질렀어요. 저 때문에 새언니가 얼마나 많은 피해를 받고 조카들까지 얼마나 힘들었는지 이제 알 것 같아요. 제가 다 잘못했어요. 예전에 했던 행동들이 너무 후회돼요.”최숙심은 왕청여가 감옥에서 간신히 살아나온 뒤로 많이 바뀌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먼저 찾아와서 사과까지 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다 지난 일이야. 이제 미래를 보면서 살아야지. 앞으로 다 잘 될 거야.”최숙심이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위로했다. “

  • 봄에 전장의 꽃이 피어난다   제1388화

    왕청여는 결국 왕이장을 찾아가지 않았다. 예전이라면 뻔뻔하게 왕이장도 평서백부 핏줄이니 가족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반드시 도와야 하는 게 맞다고 얘기하겠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었다.왕청여는 이런저런 일들을 겪으면서 깨달은 게 많았다. 평서백부가 무한한 영광과 명예를 누릴 때 왕이장은 덕을 조금도 보지 못했다면 왕씨 가문이 패가망신한 지금, 왕이장에게 도와달라고 부탁할 자격도 없는 것이다.왕청여는 그보다 이 사실을 새언니에게 알려야 하는지 고민이 깊었다. 오라버니가 죽게 내버려둘 수는 없었기에 왕청여는 나무 그늘 밑에 앉아 한참동안 멍 때리고 있었다.이때, 석소 사저가 마침 이곳을 지나가다가 왕청여를 보자 그녀와 마주치기 싫어서 바로 방향을 틀었고 조금 전의 말실수가 떠오른 왕청여가 다급하게 석소 사저를 불러 세웠다.“석소 사저, 조금 전에는 제가 죄송했습니다. 하지만 절대 나쁜 뜻으로 얘기한 건 아니었습니다.”“예.”그러자 석소 사저는 대충 대답을 하고 바로 자리를 뜨려고 했다.왕청여는 자유롭게 사는 무림의 여인은 솔직하고 직설적으로 말을 해줄 것 같아서 돌아서는 석소 사저에게 말을 걸었다.“석소 사저, 혹시 사저와 얘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걸음을 멈춘 석소 사저가 잠시 망설이다가 돌아서서 왕청여에게 다가갔고 두 사람은 그렇게 나무 그늘 밑에 나란히 앉았다.“무슨 얘기하고 싶은데요?”왕청여는 무슨 말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라서 우물쭈물하다가 석소 사저 손에 들고 있던 재봉실을 보며 물었다.“재봉실을 사신 거예요?”“아니요. 이씨 부인께서 보내왔어요.”석소 사저의 대답에 왕청여가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이씨 부인은 사람이 참 선하네요. 소주방에 신경도 많이 써주고.”“다들 선한 사람들이죠.”“맞아요.”석소 사저는 대충 대답을 하고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그러자 왕청여가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특별한 건 아니고 그냥 함께 사는 얘기나 하려고 그런 겁니다. 아

  • 봄에 전장의 꽃이 피어난다   제1387화

    왕청여는 석소 사저가 자신의 뜻을 오해했다는 것을 알았지만, 마음이 심란해서 사과할 겨를이 없었다. 문을 굳게 닫은 왕청여는 어머니에게 약을 건네며 말했다.“어머니, 일단 약부터 드세요. 나머지는 다시 천천히 생각하시고요.”그러자 노부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청여야, 네가 솔직히 얘기해 보거라. 네 오라버니가 평소에 너에게 얼마나 잘해주었느냐?”“어머니, 하지만 저희는 이제 오라버니를 도울 능력이 없어요. 우린 지금 소주방에서 빌붙어서 살고 있고 어머니께서 드시는 약도 시만자 아가씨가 돈을 줘서 살 수 있었던 거예요.”왕청여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하자 노부인이 반박했다.“네가 틀렸어. 그 돈들은 왕이장이 준 거야. 비록 왕이장이 우리를 가족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우리를 살리기 위해 여기저기 바쁘게 움직였었다고.”“그자의 돈이라고 해도 우리는 오라버니를 위해 그자에게 돈을 달라고 할 수는 없어요.”입술을 꽉 깨물고 있던 노부인이 솔직하게 얘기했다.“그 돈들은 왕이장 돈이 아니야. 그때 당시 왕이장이 돌아왔을 때 네 새언니가 왕이장에게 보상을 줘야 한다고 제안했어. 그래서 점포 여러 개를 왕이장에게 준 거야.”“그자에게 줬으면 그자의 것이잖아요. 그리고 왕이장 그자도 암암리에서 저희를 많이 챙기고 도왔는데 이제 와서 도로 내놓으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어머니, 이건 왕이장에게 불공평해요.”왕청여의 말에 노부인의 표정이 확 굳어졌다.“어차피 우리는 왕이장에게 미안한 짓을 이미 많이 저질렀어. 지금도 왕이장은 우리를 원망하고 있을 텐데 더 원망하게 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어. 네 오라버니가 잘못을 저지른 건 맞아. 잠시 정신이 나가서 그랬을 거야.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도망칠 곳도 없는데 네 오라버니가 이대로 죽는 걸 두고 볼 수는 없잖아.”고개를 푹 숙인 왕청여는 약 그릇을 내려놓으며 대꾸했다.“어머니, 차라리 새언니에게 말하는 건 어떨까요? 새언니는 좋은 방법이 있을 수도 있잖아요.”“그건 절대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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