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크게 숨을 헐떡이며 마치 큰 손이 심장을 꽉 쥔 것처럼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왜 그러십니까?” 왕청여는 소리에 깨어 그가 넋을 잃고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 짜증을 내며 물었다. “또 악몽을 꾸었습니까?” 요즘 그는 잘못한 일이 많은지 자주 악몽을 꾸었다. 하지만 왕청여를 가장 화나게 하는 것은 그가 악몽을 꾸면서 몇 번이나 이방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이다. 그가 가슴을 움켜쥔 채 아무말도 하지 않자 왕청여가 차갑게 말했다. “또 이방 꿈을 꾼 겁니까? 꿈에서 그녀가 죽었습니까?” “죽었소.” 전북망은 눈물인지 땀인지 알 수 없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정말 죽었소. 그녀는 마을 사람들에게 머리가 잘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비참하게 죽었소.” 한 밤중에 그가 하는 말을 들은 왕청여는 화가 치밀어 올라 호통쳤다. “됐습니다. 그녀가 죽든 말든 당신과 무슨 상관입니까? 어서 주무십시오.” 그러자 전북망은 맨발로 침대에서 내려왔다. “당신은 계속 주무시오. 난 서재에 가서 자겠소.” 그 모습을 본 왕청여는 노발대발하며 말했다. “당신이 계속 서재에 가서 주무시면 저택의 사람들이 대체 날 어떻게 보겠습니까?” 전북망은 온몸에 힘이 없어 한참 침대를 짚어서야 일어났다. 그는 왕청여가 한 말은 한마디도 듣지 못했고 귓가엔 꿈속 이방의 비명뿐이었다. 그가 비틀거리며 나가보니 밖에서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구슬픈 빗소리가 지붕에 떨어져 물줄기가 되어 흘러내렸다. 그는 회랑에서 걸었는데 처참한 풍등이 이리저리 흔들리자 그의 그림자도 이리저리 흔들리며 거대한 짐승처럼 보였다가 귀신처럼 휘날리기도 했다. 빗소리가 섞인 바람소리는 마치 귀신과 늑대가 울부짖는 것 같았고 그는 꿈속의 비명소리를 떠올리자 순간 심장을 기름 솥에 던져진 듯 아프고 뜨거웠다. 그는 원래 서재로 가려고 했지만 두 발이 말을 듣지 않는 것처럼 길상거로 갔다.길상거의 문을 열자 그는 이미 온몸이 흠뻑 젖었다.한두 달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길상거는 이미 초목이 무성해
전북망은 그녀를 아랑곳하지 않고 비틀거리며 돌계단으로 올라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어둠 속에서 그는 한참을 더듬어서야 불씨를 찾아 불을 켰다. 순간 콩알만 한 빛이 길상거 안의 모든 것을 비추었다. 그곳은 아주 간단해서 탁자와 의자 등 평범한 가구들뿐이었는데 가장 진귀한 것은 이방이 철목으로 보강한 문과 창문이었다. 그는 멍하니 앉아서 왕청여가 밖에서 화를 내든 말든 상관하지 않았다. 왕청여는 욕설을 퍼붓다가 그가 들은 척도 하지 않자 화가 나서 말했다. “당신이 계속 떠난 사람만 그리워하고 있으니 우리도 서로 감정을 소모할 필요 없는 것 같습니다. 이혼합시다.” 이혼이라는 두 글자가 전북망을 추억에서 끌어냈다. 그는 고개를 들어 눈빛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물었다. “이혼이오?” “그래요, 이혼합시다.” 왕청여는 우산과 등불을 모두 내팽개치고 물을 밟고 들어와 광기가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어차피 난 한 번 이혼한 몸이니 다시 이혼해도 상관없습니다. 그리고 우린 서로 사랑하지 않으니 난 방시원을 찾아가겠습니다.” 그러자 전북망이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방시원?” “그가 당신보다 천 배 만 배는 낫습니다. 그가 전쟁터에서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오지만 않았다면 나는 여전히 그의 부인일 것이고, 이젠 그가 살아 돌아왔으니 난 그를 찾아갈 것입니다.” 하지만 정신이 돌아온 전북망은 왕청여의 말에 화가 나지도 않았고 심지어 비아냥거렸다. “방시원은 이제 당신을 원하지 않소.” 그의 말은 왕청여의 아픈 곳을 찔렀다. 그래서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말을 뱉었다. “그럼 난 노세진을 찾아가겠습니다.” 전북망은 노세진이 누구인지 몰랐지만 왕청여가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 “노세진이 누구요?” 왕청여는 이름을 입 밖으로 내뱉은 후에 자기도 놀라서 멍해졌다. 한 번 밖에 없었던 황당했던 일이지만 왠지 모르게 그때가 그리웠다. 그녀는 노세진을 사랑하는 건 아니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오세진과 있었을 때 가장 따뜻했
요즘 왕청여의 생활은 너무 엉망이었다. ‘안 그래도 성취욕이 없어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해 황제의 미움을 받고 있었는데 마침 이때 소진 소주방에 정말 사람이 찾아갔으니. 민소진, 살아서도 마음에 안 들었는데 죽은 후에 그녀의 이름으로 된 공방이 지어지다니. 그리고 형수는 민 씨의 죽음이 나와 관련이 있다고 주장을 해서 소진소주방은 늘 바늘처럼 내 목을 찌르는 것 같았지. 게다가 후부에서 쫓겨나 장군부로 돌아온 전소환은 죽어도 모자랄 판에 하루 종일 오만해져 태도가 좋지 않지. 지금은 재혼까지 생각하고 있다니, 정말 웃기지 않는가? 예전엔 재혼 부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더니. 당시에 송석석과 나를 재혼 부라고 얼마나 무안을 주었는가? 하지만 지금은 전소환도 이혼녀가 되었지. 아니지, 본처가 되어본 적이 없으니 그녀는 그저 쫓겨난 첩이지.’ 전소환은 매일 왕청여를 찾아와 큰 형수는 어머니나 마찬가지니 당연히 자신의 혼인을 책임져야 한다며 욕설을 퍼부었다. 전소환은 눈이 높아 세가로 시집가려고 했는데 그녀는 첩으로 들어가도 좋으니 좋은 가문으로 가려고 했다. 그녀는 외모가 출중하지 않은 데다 버림받은 첩이라 별의별 소문이 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를 받아줄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세가로 시집을 가려고 하니, 왕청여는 헛된 꿈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전소환이 찾아와 귀찮게 굴 때마다 장군부를 떠나고 싶어했다. 하지만 오늘 밤 전북망이 이혼을 동의했을 때 그녀의 심정은 무너졌다. 그녀는 전북망이 그렇게 흔쾌히 승낙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분명히 형편없고 돈도 없이 빈 껍데기만 남은 건 장군부인데, 솔직히 말해서 상인의 딸과 결혼하겠다고 해도 생각해봐야 할 판에. 게다가 나는 백작부의 셋째 아가씨이고 왕 씨 가문이 진성에서의 저력은 오늘날 빈약한 장군부와 비교할 수조차 없지. 그가 나에게 잘 보여서 우리 오빠에게 도움을 청해 진성에서 더 좋은 앞날을 도모해도 모자랄 판에 미련 없이 나와 이혼을 하자고 하다니? 이때 홍이가 옆에서 걱정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왕청여는 어떻게 할지 몰라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으려 했다. 왜냐하면 이혼하자는 것도 자기가 제안한 것이었고 전북망도 그저 홧김에 동의한 것이니까 말이다. 그리고 그녀는 정말로 이혼을 한다고 해도 장군부의 조건으로 전북망은 더 이상 부인을 찾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제 와서 누가 그를 존경하겠어? 상인의 딸이나 일반 백성의 딸과 결혼하면 몰라도 벼슬이 있는 집안은 그를 안중에 두지도 않을 것이야.’ “오늘 밤에 있었던 일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거라.” 왕청여는 피곤한 듯 두 눈을 감고 말했다. “내일 의사를 불러와서 내가 몸이 편찮으니 며칠 쉬어야 한다고 전하거라.” “네.” 홍이는 왕청여가 이혼하려고 했다가 소문을 내지 말라고 했다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몰라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전북망은 이튿날 아침 일찍 북명황실 앞에서 기다렸는데 이번에는 송석석을 만나러 온 것이 아니라 사여묵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사여묵은 외출하려고 하는데 전북망이 말을 끌고 문 가에서 초췌한 얼굴로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고 장대성에게 가서 물어보라고 했다. 전북망은 황급히 말을 끌고 가서 허리를 굽히고 인사를 건넸다. “왕야님을 뵙습니다.” 사여묵은 그를 훑어보며 물었다. “무슨 일이오?” 그러자 전북망은 용기를 내어 물었다. “왕야님, 서경 사람들이 이방을 처치했는지 알려주시겠습니까?” 사여묵은 그가 황실 서재에서 송석석을 막은 것이 화가 나 퉁명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내가 그걸 어찌 안단 말이오?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오.” “왕야님…!” 전북망은 황급히 그를 가로막고는 머리를 숙이고 애원했다. “저는 왕야님의 소식이 가장 빠르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지난날의 일은 모두 내가 잘못했으니 제발 형부에서 협조한 것을 봐서라도 알려주십시오.” 사여묵은 화가 난 나머지 웃음을 터뜨렸다. “전북망, 당신이 형부에서 협조한 것은 신하로서의 의무이고 장군부와 당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런 것 아니오? 괜히 날 위한 것처럼 말하지
이방의 소식은 곧 진성으로 전해졌다.평사저와 운익각의 사람들은 모두 백성들이 어떻게 분풀이를 했는지 그리고 이방이 얼마나 참혹하게 죽었는지 직접 보았다.이 편지는 비둘기로 보내온 것이 아니라 운익각의 사람이 말을 타고 북명황실로 보내온 것이라 아주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그건 평사저가 송석석에게 보여주려고 아주 상세하게 기록했다.송 씨 가문의 멸문사건의 범인이 이방이니 송석석은 뼈저리게 그녀를 미워했다. 하지만 녹분성의 일과 연루되어 있기 때문에 직접 복수를 할 수는 없었고 평사저가 최대한 상세하게 기록해서 송석석의 화를 풀어주려고 했던 것이었다.송석석은 몇 번이고 읽어보았는데 그녀는 이게 평사저의 필체라는 것을 알았다.편지 내용을 한참 보던 송석석은 결국 긴 숨을 내쉬며 사여묵의 품에 안겨 한바탕 울었다.사여묵은 마음이 아파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석석이가 드디어 속 시원히 우는구나…’다만 복수는 하긴 했지만, 이방이 죽었으니 아픔은 평생 갈 것이다. 사여묵은 송석석의 눈물을 닦아주며 위로했다.“이제 복수를 했으니 이방과 서경의 정탐꾼들은 모두 저승에서 당신 부모에게 청산을 받을 것이오.”송석석은 그의 가슴에 안겨 요 몇 년 동안 있었던 일들을 떠올렸는데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이 아팠다.보주도 문지방에 앉아 저녁노을이 겹겹이 물드는 하늘을 보았는데 마치 이글이글 타오르는 자신의 마음과도 같아 보였다. 그녀는 여전히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아가씨도 자기처럼 평생 이 아픔을 안고 살아가야 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시만자도 편지를 보더니 후련한 마음으로 말했다. “드디어 죽었다니. 참 잘 된 일입니다.” 염 선생은 장대성을 장군부에 보내 이 일을 전북망에게 알리라고 했다. 그 말을 들은 시만자가 말했다. “그가 무슨 대단한 사람이라고 직접 사람을 보내서 알려줍니까?” 그러자 염 선생이 말했다. “어떤 사람은 극단적인 행동을 할 수 있으니 여기 와서 묻기 전에 아예 알려주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염 선생은 그런 사람을 될
그 선물들은 아직도 창고에 있었는데 송석석은 한 번도 보러 가지 않았다. 저녁을 먹은 후 송석석은 혼자 등을 들고 창고로 들어갔다. 사여묵이 그녀와 함께 가겠다고 했지만 그녀는 혼자 선물을 뜯고 싶다고 했다. 시만자가 그녀와 함께 들어가려고 해도 거절했다. 하지만 사여묵은 여전히 마음이 놓아지지 않아 의자를 가져와 창고 밖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장대성이 돌아와서 말하기를 전북망이 이 소식을 듣자 벽에 머리를 박아 많은 피를 흘렸다고 했다. 그 역시 놀랐다. 직접 전북망이 벽에 머리를 박는 것을 보았는데 정말로 죽으려고 박은 줄 알았다. 그가 달려가며 발이 걸려서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분명 사망했을 것이었다. 장대성은 이해가 되지 않은 듯 염 선생에게 물었다. “전북망이 대체 왜 그런 것일까? 정말로 이방과 함께 죽고 싶었다면 이방이 잡혀갈 때 따라갔어야지. 왜 이방이 죽은 지금에야 머리를 박으려 하려는 것이지?” 염 선생도 생각을 하더니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서 사람은 살렸어?” “나도 몰라. 내가 갔을 땐 그가 방으로 실려 들어갔고 그의 부인도 놀라서 계속 비명을 지르더군. 장군부 전체가 아주 난리가 아니었지. 참, 그의 여동생이 달려와서 날 잡으려는 걸 내가 얼른 도망쳤지.” 전소환이 얼마나 사납고 미친개처럼 달려들던지 장대성은 말을 하면서도 여전히 두려움이 남아있는 것 같았다. 염 선생은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그의 가족은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앞으론 될 수 있는 한 건드리지 말고 멀리 해야 된다.” 그러자 장대성은 겁먹은 말투로 말했다. “직접 가서 알려줬기 다행이지 그가 우리 황실의 벽에 머리를 박았다면 또 이상한 소문이 돌 뻔했어…!” 그러자 염 선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쁜 생각 그만하고 가서 푹 쉬어.” 장대성은 알겠다면 대답했지만 사실 쉴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는 도저히 그런 사람을 본 적이 없었기에 시 아가씨와 몽 교두에게 이 일을 말해야겠다고
그 칼들이 얼마나 작은가 하면 새끼손가락 길이만 했고 종이장처럼 얇았다. 그녀가 한 줌 쥐고 날리자 칼은 벽으로 스며들었다. 원래 비도는 이렇게 큰 위력이 있을 수 없었지만 버드나무 잎 모양에 종이장처럼 얇기 때문에 내력으로 날리면 위력이 어마어마했다. 하지만 그건 송석석을 놀라게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녀는 나뭇잎을 따서 날려도 내공을 쓰면 이 정도 위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다만 살상 력이 이 비도보다 약했을 것이었다. 비도는 훨씬 사용하기 쉽고 위급할 때 사람의 생명을 취할 수도 있었다. 예전에 셋째 외삼촌과 일곱째 외삼촌이 매산에 와서 그녀를 본 적이 있는데, 그때 사부님이 암기를 연구하고 있었고 그녀도 마침 암기를 연습하고 있어서 셋째 외삼촌과 일곱째 외삼촌에게 편리하며 살상 력이 놀라운 암기가 있다면 정말 좋을 것이라고 투덜거렸었다. 순간 그녀는 뭔가 떠오른 듯이 안색이 변하더니 팔찌를 집어 들고 다시 통에서 바늘 몇 개를 루비의 작은 구멍으로 넣어서 닫고는, 사파이어를 비틀자 휙휙 하는 소리와 함께 강철 바늘이 튀어나와 기둥에 박혔다. 그녀가 손목을 위로 향했기에 바늘이 기둥으로 박힌 것이었다. 만약 적을 향했다면 바늘은 순간 적의 몸에 박혔을 것이었다. 그녀는 순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이건 그녀가 예전에 일곱째 외삼촌에게 말했던 것이었다. 그녀는 당시 내력을 거치지 않고 암기 자체만으로 큰 위력을 가질 수 있다면 중상을 입어 죽어간다고 해도 자신을 위해 복수를 할 것이라고 말했었다. 그녀는 일곱째 외삼촌이 정말로 해낼 줄은 몰랐다.하지만 애초에 그녀는 그저 해본 말이었다. 게다가 암기 제작은 워낙 어려웠고 특히 장신구로 위장하려면 더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송석석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바깥에 있던 사여묵은 줄곧 창고 안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는데 비수를 날릴 땐 그도 들었지만 바늘을 날릴 때는 전혀 듣지 못했는데 오히려 송석석의 울음소리를 듣고 긴장해서 물었다. “석석아, 왜
송석석은 망설이다가 편지를 받았다.그녀는 나무상자에 앉아 한참 동안 편지를 쥐고 있다가 펼쳐 보았다. 일곱째 외삼촌은 어려서부터 책 읽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목공이나 기관을 만드는 것을 좋아해서 무술을 연마할 사람이었다. 하지만 외할아버지는 항상 그가 하는 일이 없다고 무장이라도 병서를 읽고 계략을 짤 줄 알아야 한다며 매일 몽둥이로 그를 쫓아다니며 공부하라고 했다.하지만 일곱째 외삼촌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노력도 아닌 데다 재능까지 없어 공부엔 아무런 성과를 보지 못했다. 그래서 글씨도 아주 난잡했는데 그는 송석석에게 자신의 글이 너무 멋져서 일반인들은 알아보기 힘들다고 했었다.송석석은 그의 말을 떠올리며 난잡한 글씨를 보더니 인정했다.다행히도 몇 글자를 제외하고는 대략적인 뜻은 모두 알아볼 수 있었다.편지엔 그 암기의 사용법이 적혀 있었는데 그들이 방금 말한 것처럼 약간 기울어야 목표를 명중할 수 있다고 쓰여 있었다.그가 일부러 그렇게 만든 게 아니라 전사가 코앞이라 급하게 만들다 보니 개선할 겨를이 없었던 것이었다. 전쟁이 끝나면 천천히 개량해서 명년엔 완벽한 암기를 보내겠다고 했다.그는 칼날이 유선형으로 되어 있어 날아갈 때 속도가 빠르고 날이 얇아 내면을 적게 사용하며 교묘한 힘만 쓰면 된다고 했다.그는 다른 암기의 도지도 있으니 전쟁이 끝나기만 하면 바로 만들어서 보내주겠다고 했다. 편지엔 다른 말은 없었고 온통 암기에 관한 내용들이었다. 그는 자신이 암기 천재라고 여겼고 앞으로 50년은 그의 상대가 될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다. 사 여묵은 등으로 그녀를 비춰주고 있었지만 편지 내용은 보지 않았다. 일곱째 외삼촌이 희생할 때가 수란석이 성릉관에서 첫 전쟁을 치렀을 때였는데 수란석이 아무런 대책 없이 무모하게 전쟁을 시작해 일곱째 삼촌이 목숨을 잃은 것이었다. 송석석은 편지를 천천히 접어 자기의 향낭에 쑤셔 넣었는데, 오랫동안 참고 있었던 눈물이 손등에 뚝뚝 떨어졌다. 하지만 그녀는 닦지 않고 다른 상자를 열었다. 일곱째 외삼촌이
어떤 힘에서 비롯된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걷기도 버거워 보이던 노부인이 갑자기 날렵하게 움직이며 앞으로 나아갔다. 금숙과 천마마조차 그녀를 따라잡지 못할 정도였다.노부인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오직 자신의 심장 박동 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눈앞에는 정원의 풍경도, 주변의 사물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머릿속에는 수년간 불타오르던 큰` 화재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불길 속에서 울려 퍼지던 처절한 비명이 귀를 맴돌았다.그때 그녀는 누군가에게 끌리고 붙잡혀 움직이면서도 그 불길이 모든 것을 삼키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았다.그녀의 막내아들은 그렇게 불 속에서 죽었다.불길 속에서 여러 시신이 끌려 나왔지만 그녀는 그 시신들 중 어느 것이 자신의 아들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었다.그녀는 몇 번이나 의식을 잃을 정도로 크게 오열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아들이 죽지 않았을 가능성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감히 그런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병약해 걷는 것조차 누군가의 부축이 필요했던 아들이 어떻게 그 불바다 속에서 살아남았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노부인이 본채에 도착했을 때, 그녀의 눈에는 오직 한 사람만이 보였다. 다른 사람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눈물이 계속 흘러내리면서 그녀의 시야는 더욱 흐릿해졌다. 그녀는 온 힘을 다해 그 희미한 그림자를 따라 걸어갔다.노부인은 고개를 약간 기울이며 힘없고 불확실한 목소리로 말했다."네가…… 네가 내 아들이냐?"왕이장은 그녀를 알아보았다. 마음속으로 가장 원망스러워했던 사람이었다.하지만 그 순간 노부인의 끊임없이 흐르는 눈물을 보고 왕이장은 가슴 한구석에서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그는 움직이지 않고 대답도 하지 않았다."어머니, 저 아이가 교여예요." 왕준이 울면서 옆에서 외쳤다."아……!"노부인은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지르며 왕이장을 끌어안았다. 그녀의 기억 속 깊은 과거가 검고 짙은 밤을 뚫고 되살아났다. 그녀의 가슴은 마치 한 조각이 도려내
왕준이 그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화난 목소리로 외쳤다."여기서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거냐? 어머니께서 언제 친아들을 버린 적이 있다고 그래? 나도, 큰형도 잘 지내고 있지 않느냐!""너희는 잘 지낸다고? 그럼 나는?"왕이장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너무 힘을 준 나머지 위와 목이 자극을 받아 고통스러워졌다. 그는 위를 부여잡고 웅크린 채 앉아 내력으로 속을 진정시키려 애썼다.그의 말에 왕준은 한동안 얼어붙었다. 그러다 무언가를 떠올린 듯 그를 급히 바라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최씨 역시 무언가 기억난 듯 당황스러운 기색을 보였다. 그녀가 처음 집에 들어왔을 때 들었던 이야기였다. 어머니에게는 세 명의 아들이 있었고, 막내아들은 병에 걸려 치료하지 못해 사찰로 보내져 길러졌다. 그러나 사찰에 화재가 발생해 어머니는 막내아들이 불타 죽는 것을 두 눈으로 지켜봐야 했다.‘설… 설마 그때 죽지 않았던 건가?’"이름이 무엇이냐?"왕준은 이미 울먹이며 물었다. 그의 입술은 계속해서 떨렸다. 그는 왕이장을 간절히 바라보았다."노부인에게 물어보십시오, 노부인에게."왕이장은 위를 부여잡고 힘겹게 의자에 앉아 한 마디를 내뱉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더 이상 힘이 없었다.최씨는 다가가며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기억났어요. 당신을 본 적이 있는 것 같아요. 여러 번 백부 문 앞에서 서성였잖아요."왕이장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최씨는 곧바로 시만자를 바라보았다.하지만 시만자 또한 최씨를 보지 않고 왕이장에게 말했다. "왕노오, 여기까지 왔으니 이들에게 분명히 말해. 왕교여라는 이름으로 어릴 적 여자 아이처럼 길러졌고, 다섯 살 때 사찰에 버려졌으며 학대받아서 몇 달 만에 죽을 뻔하다가 또 다시 버려졌다고. 사부가 널 주워서 살려줬지. 너는 아무 잘못도 없어. 잘못한 건 이들이야. 그러니까 제대로 따져봐."왕준은 마치 벼락을 몇 차례나 맞은 사람처럼 멍하니 굳어버리고 말았다. 눈동자조차 움직이지 않았다.그리고 곧 크
술에 취한 두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평서백부에 도착했다. 시만자의 신분을 아는 덕분에 밤늦은 시간임에도 문이 열렸다. 하지만 최씨가 병을 앓고 있는 관계로 하인은 왕준과 남희에게 이를 알리러 갔다.소식을 들은 왕준과 남희는 다소 당황스러웠다. 이렇게 늦은 밤에 시 소저가 대체 무슨 일로 온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왕준이 먼저 물었다.“남자를 데려왔다고? 그 남자는 누구인가?" 문지기가 답했다."전혀 본 적이 없는 이였고, 태도도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들어오자마자 여기저기 둘러보더니 의자를 두 개나 발로 차서 넘어뜨렸습니다. 입으로는 험한 말을 뱉으며 정말 너무한다며 계속 중얼거렸습니다."왕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분란을 일으키러 온 건가? 혹시 왕청여가 화를 산 사람인가?"그는 최근 이런 일이 몇 차례 있어 겁을 먹은 상태였다. 누군가 찾아와 문제를 일으키면 첫 번째로 왕청여가 일을 벌인 게 아닌지 의심하곤 했다."아닐 겁니다." 문지기가 잠시 망설이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그 사람이 욕한 대상은 노부인과…… 돌아가신 선대대인 이었습니다."왕준은 작위를 물려받지 못했기에 백작이라 불리지 못했다. 그래서 평서백부의 하인들은 그를 선대대인이라 부르며 존경을 표했다.왕준은 효심이 매우 깊은 아들인지라, 어머니와 돌아가신 아버지를 욕하고 있다는 말을 듣자마자 크게 분노했다. 시만자가 데려온 사람인지 아닌지는 상관하지 않고 바로 말했다."가자, 내가 직접 나가서 누군지 보겠다. 평서백부에 와서 감히 행패를 부리다니, 무슨 배짱을 가진 놈인가 보자!"왕준은 죽은 자는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죽은 이를 욕하는 것은 성격이 비열하고 교양이 없는 사람만이 할 짓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분노에 차 남희를 데리고 성큼성큼 나갔다.한편 왕이장이 의자를 발로 차는 소란이 있자, 다른 하인이 이를 최씨에게 보고하러 갔다. 모두가 이런 문제를 진정시킬 사람은 오직 최씨뿐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왕준도 관직이 있기는 했지만, 성격이 대게
심청화가 급하게 그를 따라 나서서 붙잡자, 왕이장은 걸어가며 손을 휘저으면서 말했다."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말할 가치도 없습니다."심청화는 왕이장에 대해 너무 잘 알았다. 마음속에 무언가 괴로움이 있어도 그는 절대 내색하지 않고 그저 다른 곳으로 떠나 은둔하는 것을 선택했다."이건 우리가 추측한 것일 뿐이야. 진실이라고 단정할 수 없어."왕이장이 웃으며 말했다."괜찮습니다. 정말 괜찮아요. 이제 술을 마시러 갈 겁니다. 마침 지금 가을바람도 불고 날씨도 시원한데, 미인과 함께하면 더할 나위 없겠죠."시만자가 나서서 그의 손목을 붙잡고 말했다."가자. 내가 함께 마셔줄게."시만자도 지금이 되어서야 그가 사실 첩의 아들이 아니라 평서백부인의 친아들이며, 왕표와 왕청여와 같은 친남매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왕이장은 시만자가 따라오는 것 또한 원하지 않았다. 그는 시만자에게 말했다."내가 가려는 곳은 너에게 어울리지 않는 곳이야."시만자는 막무가내로 그의 손을 잡아 끌며 말했다."술값은 내가 계산해줄게."하지만 왕이장은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태도가 날카롭고 신랄하게 변한 것이다."돈 있어. 따라오지 마. 정말 내가 가난하다고 생각하냐? 정말 네가 나를 먹여 살려야된다고 생각해? 나는 네가 자꾸만 살려준 은혜를 갚으려 해서 그랬던 거야. 너희 여자들은 정말 진절머리가 나. 스스로 얼마나 귀찮은지조차 모르잖아."시만자는 전혀 화내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여자들만 귀찮아? 남자들은 안 귀찮고?"그녀의 웃는 얼굴을 보며, 왕이장은 못마땅한 듯 말했다."다 귀찮아. 똑같이 귀찮아."시만자는 그의 손을 계속 잡아끌며 마구간 쪽으로 향하며 말했다. "그럼 말타러 가자. 남자도 여자도 보지 않으면 되잖아. 바람이 얼마나 시원한데. 바람 맞으며 말을 타면 모든 걸 날려버릴 수 있을 거야.""안 간다고!"“가자니까!”시만자는 웃음을 거두고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말 타러 가지 않으면 술을 마시러 갈 거야. 네가 나랑 같이 가야 해. 나도
염선생과 노 집사가 여러 경로를 통해 조사한 결과, 이 일이 결코 간단한 사건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심청화의 말에 따르면, 사부님께서 처음 조사한 바로는 왕전은 그 아이가 자신에게 복을 가져다준다고 했었다. 다만 몸이 상해 이미 건강이 나빠진 탓에, 진성의 많은 명의들에게 치료를 받았지만 효과가 없어서 결국 어느 사찰로 보냈다는 것이다.이 점은 왕전이 이 아이에게 부성애를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게다가 막내아들은 대개 더 많은 사랑을 받기 마련이다.하지만 노 집사와 평서백부의 몇몇 노관리와 노집사들이 제공한 정보에 따르면, 왕전은 죽은 그 아이를 매우 싫어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어떤 태도였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나중에는 정말로 냉대했다는 것이다.그들은 몇 가지 사례도 제시했다.지금의 왕이장이 옛날 그 당시에는 왕교여라고 불렸다. 때는 할아버지의 생신 날, 할아버지는 그를 직접 안고 생신 연회장에 데리고 들어갔다. 그때는 할아버지의 건강이 많이 회복되어 정정하게 걸으실 수 있었다.그러나 그 일 이후, 왕교여가 할아버지를 피곤하게 했다는 이유로 왕전은 그를 끌어내 손바닥을 열 대나 맞는 벌을 내렸다.이 일은 다른 이들이 알지는 못하지만, 하인들 중 일부가 목격했다고 한다.또 다른 예로, 할아버지가 왕교여를 데리고 사냥을 갔을 때 흰 여우를 잡아 여우 가죽을 그에게 주었다. 그러나 나중에 그 가죽은 셋째인 왕청여가 입고 있었다.그 외에도 왕전이 왕교여에게 싫은 기색을 드러냈다는 이야기는 하인들 사이에서 여러 번 회자되었다. 노 집사에게 정보를 제공한 이들도 이를 보았다고 말했다.당시 분가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모두가 같은 저택에서 생활했다. 왕전은 감정을 잘 숨기지 못하는 성격이어서 얼굴에 감정이 드러나는 경우가 많았다. 본인조차 이를 자각하지 못했을 정도였다.또한 왕교여의 병을 치료할 때 당시 의원은 모두 그의 할아버지가 초빙한 명의들이었다. 그렇게 약을 달이는 과정에서 몇 가지 약재가 바뀌었는데, 왕전은 약을 달이는 하녀나 하인들에게
하지만 그녀는 순간 집사의 보고가 매우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매각한 점포가 곧바로 다른 사람에게 넘어갔으며, 그 가격 또한 상당히 높게 책정되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시세보다 10~20% 더 높은 가격이었다.그녀는 집안을 관리한 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점포 거래를 여러 번 해보았다. 거래는 대개 시세를 기준으로 이루어져 있다. 간혹 한두 건 정도 시세를 약간 웃도는 경우도 있었지만, 최근 매각한 모든 점포가 이처럼 높은 가격에 거래되니 매우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그녀는 왕비가 자신이 점포를 매각하는 것을 알고, 자신이 급히 은자가 필요한 줄로 여겨 일부러 높은 가격에 매입한 것이 아닐까 의심하기까지 했다.그녀는 집사에게 매매 계약서를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계약서에 써 있는 매수인의 이름이 고효풍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그녀가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었다."북명황실에 고효풍이라는 이름의 집사가 있느냐?" 최씨가 집사에게 물었다."들어본 적 없습니다.""그럼 이 매수인은 대체 누구인 것인가?"그녀의 마음속에 약간의 불안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시세보다 이렇게 높은 가격에 매수하다니, 혹시 나중에 어떤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염려되었다.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모든 거래가 합법적이고 합리적으로 진행되었으며 공식 문서를 통해 등기되었고, 또한 증인이 보증한 합법적인 절차였기 때문에 큰 문제가 생길 이유는 없어 보였다."됐다. 일단 신경 쓰지 말고 남은 점포는 더 이상 팔지 마라. 어머니를 놀라게 할 필요는 없으니." 그녀거 집사에게 말했다.점포를 매각하는 일은 그녀가 노부인 몰래 진행한 것으로, 심지어 왕준이나 남희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그들이 집안일은 관리하지 않으니 이런 일에는 관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들이 이를 알게 되더라도 나중에 이유를 설명하면 될 터였다. 어차피 이 일은 그녀만을 위해 진행한 것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매수인에 대한 의문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날 송석석이 그녀를
홍이의 말에 왕청여가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대답했다.“하지만… 내 서방님은 출세를 못하잖아. 가서 계급도 달지 못한 병사를 한다는데.. 그럼 내 체면은 어떡하라고? 난 내 자신을 더욱 소중하게 대하고 싶은 거야. 그때 당시 송석석이 내 서방과 이혼할 땐 어명까지 내려졌잖아. 그런데 난 왜 안 되는 거야? 내가 뭐가 부족해서 이렇게 손가락질을 받고 욕을 먹어야 하는 거냐고.”홍이는 이 모든 게 왕청여가 자초한 일이라고 얘기하고 싶었지만 감히 그럴 수 없었다.“사람과 사람 사이를 비교할 수는 없는 겁니다. 각자 다른 선택으로 다른 삶을 살고 있지 않습니까? 북명 왕비님보다 못한 사람도 있지만 더 행복하게 살고 있는 사람도 분명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이 세상 모든 사람들보다 행복한 건 아닙니다.”왕청여가 씁쓸하게 웃으며 물었다.“왜 예전에는 나한테 이런 말을 해주지 않은 것이냐?”“제가 얘기를 해도 아가씨께서는 제 말을 듣지 않았을 겁니다.”문발을 내린 홍이가 마부에게 말했다. “이보시게, 이만 출발합시다.”마차 안에 멍하니 앉아있던 왕청여는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고 앞으로 그녀를 원하는 남자는 더 이상 없을 거라는 생각에 너무 불안했다.‘송석석은 한 번 이혼을 하고도 외모가 수려하고 나라에 큰 공까지 세운 서방을 만날 수 있는데 난 왜 안 되는 걸까?’이런 생각에 왕청여는 홍이의 손을 덥석 잡으며 하얗게 질린 얼굴로 물었다.“홍이야, 설마 나중에 전북망 그 사람이 나라에 큰 공을 세우는 일은 절대 없겠지?”홍이가 담담하게 대답했다.“아가씨, 사람 일은 모르는 겁니다. 그분은 나중에 다시 장군님이 될 수도 있고 혹은 다시는 재기하지 못하고 평생 그저 평범하게 살다가 결국 장군부까지 잃을 수도 있겠죠.”“그 사람 능력으로 다시 재기한다는 건 말도 안 돼. 내가 그 사람과 이혼하지 않고 계속 산다면 늙어 죽을 때까지 예물마저 다 탕진하고 결국 장군부까지 빼앗겨 길바닥에 나앉게 될 수도 있어. 그럼 내 인생은 정말 망가지는 거야. 내
시만자는 오늘 계속 방씨 가문에 있었다. 오수인의 몸 상태가 안 좋아서 약왕당의 청작을 불러서 방씨 가문으로 같이 간 것이다.저녁이 될 때까지 방씨 가문에 있었던 시만자는 방씨 가문 사람들을 통해 오늘 편서백부에서 있었던 일을 전해 듣게 되었다. 방천허의 부인은 이 사실을 절대 오수인에게 알리지 말라고 명령을 내렸지만 그리 오래 숨길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간 남자와 간통한 것도 모자라 낙태까지 하다니. 방시원은 이제 더 이상 왕청여의 서방이 아니지만 왕청여가 방씨 가문에 있을 때 벌어졌던 일이기에 방시원도 크게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외부에 방시원이 잠자리에 약해서 왕청여가 다른 남자에게 관심이 생긴 게 아니냐는 추측도 남발했다. 그렇지 않으면 왜 전장에 나간 지 며칠 되지도 않은 사이에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이와 반대로 왕청여가 태생부터 한 남자에 만족하지 못하는 천박한 여자라는 비판도 무성했으며 노세진을 뻔뻔하다고 욕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방씨 가문에서 착한 마음으로 노세진을 거둬줬는데 노세진은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고, 파렴치한 인간이라고 손가락질을 했다.사람들의 평가를 종합해보면 결론은 하나였다. 노세진과 왕청여는 천벌 받아 마땅한 나쁜 놈들이고 방시원은 아무 잘못 없이 억울하게 엮였다는 결론이 내렸다. 반면, 전북망을 언급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전씨 가문에 어떤 일이 벌어져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전북망에 큰 관심이 없었고 심지어 왕청여와 이혼한 사실도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이날 밤, 함께 황실로 돌아온 시만자와 송석석은 오늘 서로에게 있었던 일을 상대방에게 얘기해주다가 이내 동시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전에는 구경 삼아 지켜보던 일이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자 시만자와 송석석도 걱정되고 마음이 불편했다.한편, 현이는 오늘 밤에도 무술을 연습하러 찾아왔고 평소보다 더 열정적으로 연습에 임했다. 현이는 능력이 부족한 자신이 도울 수 없는 일이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최대한 빨리
송석석은 사람을 시켜 약왕당으로 가서 홍작을 모셔왔다. 다행히 이마의 상처가 깊지 않았고 신속적으로 지혈도 했기에 큰 문제는 없었다.하지만 며칠 동안 고열을 앓고 있었던 최씨는 몸이 허약한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화까지 낸 탓에 새까만 피를 왈칵 토했을 뿐만 아니라 의식도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최씨 눈가에서는 계속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송석석이 아무리 닦아도 눈물은 계속 흘렀다.“의원님, 상황은 좀 어떤가요?”홍작이 최씨에게 진맥 검사를 마치자 송석석이 물었고 홍작은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부인께서 고열을 며칠이나 앓으셨는데 조금 전에 등을 확인해보니 폐에 문제가 조금 있는 듯합니다. 그리고 화병 때문에 간에도 어혈이 생겼습니다. 전에 복용하시던 약으로는 더 이상 해결되지 않을 겁니다. 일단 극약 처방으로 간과 폐를 치료하고 나머지 부분은 몸조리를 통해 천천히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더 이상 이렇게 과로하시면 절대 안 됩니다.”말을 하던 홍작은 송석석을 구석으로 끌고 가서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간에 어혈이 심각한 상태입니다. 이는 마음속에 늘 화병이 잠재되어 있어서 생긴 현상입니다. 부인께서 마음속에 어떤 일을 숨기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계속 이렇게 혼자서 쌓아 두면 나중에 큰일이 날 수도 있습니다.”송석석은 최씨가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혹시 왕표가 반역 사건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집안 사람들까지 엮이지 않을까 매일 전전긍긍하면서 속앓이를 했을 것이다.“일단 약을 좀 복용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홍작은 말을 마치자마자 돌아서서 떠났다.송석석은 밖으로 나와 순방영 사람들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절대 아무한테도 얘기해서는 안 된다고 입단속을 단단히 시켰다.이내 순방영 사람들까지 떠났고 송석석은 돌아선 순간, 기둥에 가까스로 기댄 채 눈이 벌겋게 충혈된 왕청여를 발견하게 되었다.왕청여는 다음 순간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모습으로 송석석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북명 왕비님, 제가 뭐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