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왕청여의 생활은 너무 엉망이었다. ‘안 그래도 성취욕이 없어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해 황제의 미움을 받고 있었는데 마침 이때 소진 소주방에 정말 사람이 찾아갔으니. 민소진, 살아서도 마음에 안 들었는데 죽은 후에 그녀의 이름으로 된 공방이 지어지다니. 그리고 형수는 민 씨의 죽음이 나와 관련이 있다고 주장을 해서 소진소주방은 늘 바늘처럼 내 목을 찌르는 것 같았지. 게다가 후부에서 쫓겨나 장군부로 돌아온 전소환은 죽어도 모자랄 판에 하루 종일 오만해져 태도가 좋지 않지. 지금은 재혼까지 생각하고 있다니, 정말 웃기지 않는가? 예전엔 재혼 부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더니. 당시에 송석석과 나를 재혼 부라고 얼마나 무안을 주었는가? 하지만 지금은 전소환도 이혼녀가 되었지. 아니지, 본처가 되어본 적이 없으니 그녀는 그저 쫓겨난 첩이지.’ 전소환은 매일 왕청여를 찾아와 큰 형수는 어머니나 마찬가지니 당연히 자신의 혼인을 책임져야 한다며 욕설을 퍼부었다. 전소환은 눈이 높아 세가로 시집가려고 했는데 그녀는 첩으로 들어가도 좋으니 좋은 가문으로 가려고 했다. 그녀는 외모가 출중하지 않은 데다 버림받은 첩이라 별의별 소문이 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를 받아줄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세가로 시집을 가려고 하니, 왕청여는 헛된 꿈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전소환이 찾아와 귀찮게 굴 때마다 장군부를 떠나고 싶어했다. 하지만 오늘 밤 전북망이 이혼을 동의했을 때 그녀의 심정은 무너졌다. 그녀는 전북망이 그렇게 흔쾌히 승낙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분명히 형편없고 돈도 없이 빈 껍데기만 남은 건 장군부인데, 솔직히 말해서 상인의 딸과 결혼하겠다고 해도 생각해봐야 할 판에. 게다가 나는 백작부의 셋째 아가씨이고 왕 씨 가문이 진성에서의 저력은 오늘날 빈약한 장군부와 비교할 수조차 없지. 그가 나에게 잘 보여서 우리 오빠에게 도움을 청해 진성에서 더 좋은 앞날을 도모해도 모자랄 판에 미련 없이 나와 이혼을 하자고 하다니? 이때 홍이가 옆에서 걱정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왕청여는 어떻게 할지 몰라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으려 했다. 왜냐하면 이혼하자는 것도 자기가 제안한 것이었고 전북망도 그저 홧김에 동의한 것이니까 말이다. 그리고 그녀는 정말로 이혼을 한다고 해도 장군부의 조건으로 전북망은 더 이상 부인을 찾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제 와서 누가 그를 존경하겠어? 상인의 딸이나 일반 백성의 딸과 결혼하면 몰라도 벼슬이 있는 집안은 그를 안중에 두지도 않을 것이야.’ “오늘 밤에 있었던 일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거라.” 왕청여는 피곤한 듯 두 눈을 감고 말했다. “내일 의사를 불러와서 내가 몸이 편찮으니 며칠 쉬어야 한다고 전하거라.” “네.” 홍이는 왕청여가 이혼하려고 했다가 소문을 내지 말라고 했다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몰라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전북망은 이튿날 아침 일찍 북명황실 앞에서 기다렸는데 이번에는 송석석을 만나러 온 것이 아니라 사여묵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사여묵은 외출하려고 하는데 전북망이 말을 끌고 문 가에서 초췌한 얼굴로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고 장대성에게 가서 물어보라고 했다. 전북망은 황급히 말을 끌고 가서 허리를 굽히고 인사를 건넸다. “왕야님을 뵙습니다.” 사여묵은 그를 훑어보며 물었다. “무슨 일이오?” 그러자 전북망은 용기를 내어 물었다. “왕야님, 서경 사람들이 이방을 처치했는지 알려주시겠습니까?” 사여묵은 그가 황실 서재에서 송석석을 막은 것이 화가 나 퉁명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내가 그걸 어찌 안단 말이오?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오.” “왕야님…!” 전북망은 황급히 그를 가로막고는 머리를 숙이고 애원했다. “저는 왕야님의 소식이 가장 빠르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지난날의 일은 모두 내가 잘못했으니 제발 형부에서 협조한 것을 봐서라도 알려주십시오.” 사여묵은 화가 난 나머지 웃음을 터뜨렸다. “전북망, 당신이 형부에서 협조한 것은 신하로서의 의무이고 장군부와 당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런 것 아니오? 괜히 날 위한 것처럼 말하지
이방의 소식은 곧 진성으로 전해졌다.평사저와 운익각의 사람들은 모두 백성들이 어떻게 분풀이를 했는지 그리고 이방이 얼마나 참혹하게 죽었는지 직접 보았다.이 편지는 비둘기로 보내온 것이 아니라 운익각의 사람이 말을 타고 북명황실로 보내온 것이라 아주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그건 평사저가 송석석에게 보여주려고 아주 상세하게 기록했다.송 씨 가문의 멸문사건의 범인이 이방이니 송석석은 뼈저리게 그녀를 미워했다. 하지만 녹분성의 일과 연루되어 있기 때문에 직접 복수를 할 수는 없었고 평사저가 최대한 상세하게 기록해서 송석석의 화를 풀어주려고 했던 것이었다.송석석은 몇 번이고 읽어보았는데 그녀는 이게 평사저의 필체라는 것을 알았다.편지 내용을 한참 보던 송석석은 결국 긴 숨을 내쉬며 사여묵의 품에 안겨 한바탕 울었다.사여묵은 마음이 아파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석석이가 드디어 속 시원히 우는구나…’다만 복수는 하긴 했지만, 이방이 죽었으니 아픔은 평생 갈 것이다. 사여묵은 송석석의 눈물을 닦아주며 위로했다.“이제 복수를 했으니 이방과 서경의 정탐꾼들은 모두 저승에서 당신 부모에게 청산을 받을 것이오.”송석석은 그의 가슴에 안겨 요 몇 년 동안 있었던 일들을 떠올렸는데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이 아팠다.보주도 문지방에 앉아 저녁노을이 겹겹이 물드는 하늘을 보았는데 마치 이글이글 타오르는 자신의 마음과도 같아 보였다. 그녀는 여전히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아가씨도 자기처럼 평생 이 아픔을 안고 살아가야 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시만자도 편지를 보더니 후련한 마음으로 말했다. “드디어 죽었다니. 참 잘 된 일입니다.” 염 선생은 장대성을 장군부에 보내 이 일을 전북망에게 알리라고 했다. 그 말을 들은 시만자가 말했다. “그가 무슨 대단한 사람이라고 직접 사람을 보내서 알려줍니까?” 그러자 염 선생이 말했다. “어떤 사람은 극단적인 행동을 할 수 있으니 여기 와서 묻기 전에 아예 알려주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염 선생은 그런 사람을 될
그 선물들은 아직도 창고에 있었는데 송석석은 한 번도 보러 가지 않았다. 저녁을 먹은 후 송석석은 혼자 등을 들고 창고로 들어갔다. 사여묵이 그녀와 함께 가겠다고 했지만 그녀는 혼자 선물을 뜯고 싶다고 했다. 시만자가 그녀와 함께 들어가려고 해도 거절했다. 하지만 사여묵은 여전히 마음이 놓아지지 않아 의자를 가져와 창고 밖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장대성이 돌아와서 말하기를 전북망이 이 소식을 듣자 벽에 머리를 박아 많은 피를 흘렸다고 했다. 그 역시 놀랐다. 직접 전북망이 벽에 머리를 박는 것을 보았는데 정말로 죽으려고 박은 줄 알았다. 그가 달려가며 발이 걸려서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분명 사망했을 것이었다. 장대성은 이해가 되지 않은 듯 염 선생에게 물었다. “전북망이 대체 왜 그런 것일까? 정말로 이방과 함께 죽고 싶었다면 이방이 잡혀갈 때 따라갔어야지. 왜 이방이 죽은 지금에야 머리를 박으려 하려는 것이지?” 염 선생도 생각을 하더니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서 사람은 살렸어?” “나도 몰라. 내가 갔을 땐 그가 방으로 실려 들어갔고 그의 부인도 놀라서 계속 비명을 지르더군. 장군부 전체가 아주 난리가 아니었지. 참, 그의 여동생이 달려와서 날 잡으려는 걸 내가 얼른 도망쳤지.” 전소환이 얼마나 사납고 미친개처럼 달려들던지 장대성은 말을 하면서도 여전히 두려움이 남아있는 것 같았다. 염 선생은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그의 가족은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앞으론 될 수 있는 한 건드리지 말고 멀리 해야 된다.” 그러자 장대성은 겁먹은 말투로 말했다. “직접 가서 알려줬기 다행이지 그가 우리 황실의 벽에 머리를 박았다면 또 이상한 소문이 돌 뻔했어…!” 그러자 염 선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쁜 생각 그만하고 가서 푹 쉬어.” 장대성은 알겠다면 대답했지만 사실 쉴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는 도저히 그런 사람을 본 적이 없었기에 시 아가씨와 몽 교두에게 이 일을 말해야겠다고
그 칼들이 얼마나 작은가 하면 새끼손가락 길이만 했고 종이장처럼 얇았다. 그녀가 한 줌 쥐고 날리자 칼은 벽으로 스며들었다. 원래 비도는 이렇게 큰 위력이 있을 수 없었지만 버드나무 잎 모양에 종이장처럼 얇기 때문에 내력으로 날리면 위력이 어마어마했다. 하지만 그건 송석석을 놀라게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녀는 나뭇잎을 따서 날려도 내공을 쓰면 이 정도 위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다만 살상 력이 이 비도보다 약했을 것이었다. 비도는 훨씬 사용하기 쉽고 위급할 때 사람의 생명을 취할 수도 있었다. 예전에 셋째 외삼촌과 일곱째 외삼촌이 매산에 와서 그녀를 본 적이 있는데, 그때 사부님이 암기를 연구하고 있었고 그녀도 마침 암기를 연습하고 있어서 셋째 외삼촌과 일곱째 외삼촌에게 편리하며 살상 력이 놀라운 암기가 있다면 정말 좋을 것이라고 투덜거렸었다. 순간 그녀는 뭔가 떠오른 듯이 안색이 변하더니 팔찌를 집어 들고 다시 통에서 바늘 몇 개를 루비의 작은 구멍으로 넣어서 닫고는, 사파이어를 비틀자 휙휙 하는 소리와 함께 강철 바늘이 튀어나와 기둥에 박혔다. 그녀가 손목을 위로 향했기에 바늘이 기둥으로 박힌 것이었다. 만약 적을 향했다면 바늘은 순간 적의 몸에 박혔을 것이었다. 그녀는 순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이건 그녀가 예전에 일곱째 외삼촌에게 말했던 것이었다. 그녀는 당시 내력을 거치지 않고 암기 자체만으로 큰 위력을 가질 수 있다면 중상을 입어 죽어간다고 해도 자신을 위해 복수를 할 것이라고 말했었다. 그녀는 일곱째 외삼촌이 정말로 해낼 줄은 몰랐다.하지만 애초에 그녀는 그저 해본 말이었다. 게다가 암기 제작은 워낙 어려웠고 특히 장신구로 위장하려면 더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송석석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바깥에 있던 사여묵은 줄곧 창고 안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는데 비수를 날릴 땐 그도 들었지만 바늘을 날릴 때는 전혀 듣지 못했는데 오히려 송석석의 울음소리를 듣고 긴장해서 물었다. “석석아, 왜
송석석은 망설이다가 편지를 받았다.그녀는 나무상자에 앉아 한참 동안 편지를 쥐고 있다가 펼쳐 보았다. 일곱째 외삼촌은 어려서부터 책 읽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목공이나 기관을 만드는 것을 좋아해서 무술을 연마할 사람이었다. 하지만 외할아버지는 항상 그가 하는 일이 없다고 무장이라도 병서를 읽고 계략을 짤 줄 알아야 한다며 매일 몽둥이로 그를 쫓아다니며 공부하라고 했다.하지만 일곱째 외삼촌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노력도 아닌 데다 재능까지 없어 공부엔 아무런 성과를 보지 못했다. 그래서 글씨도 아주 난잡했는데 그는 송석석에게 자신의 글이 너무 멋져서 일반인들은 알아보기 힘들다고 했었다.송석석은 그의 말을 떠올리며 난잡한 글씨를 보더니 인정했다.다행히도 몇 글자를 제외하고는 대략적인 뜻은 모두 알아볼 수 있었다.편지엔 그 암기의 사용법이 적혀 있었는데 그들이 방금 말한 것처럼 약간 기울어야 목표를 명중할 수 있다고 쓰여 있었다.그가 일부러 그렇게 만든 게 아니라 전사가 코앞이라 급하게 만들다 보니 개선할 겨를이 없었던 것이었다. 전쟁이 끝나면 천천히 개량해서 명년엔 완벽한 암기를 보내겠다고 했다.그는 칼날이 유선형으로 되어 있어 날아갈 때 속도가 빠르고 날이 얇아 내면을 적게 사용하며 교묘한 힘만 쓰면 된다고 했다.그는 다른 암기의 도지도 있으니 전쟁이 끝나기만 하면 바로 만들어서 보내주겠다고 했다. 편지엔 다른 말은 없었고 온통 암기에 관한 내용들이었다. 그는 자신이 암기 천재라고 여겼고 앞으로 50년은 그의 상대가 될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다. 사 여묵은 등으로 그녀를 비춰주고 있었지만 편지 내용은 보지 않았다. 일곱째 외삼촌이 희생할 때가 수란석이 성릉관에서 첫 전쟁을 치렀을 때였는데 수란석이 아무런 대책 없이 무모하게 전쟁을 시작해 일곱째 삼촌이 목숨을 잃은 것이었다. 송석석은 편지를 천천히 접어 자기의 향낭에 쑤셔 넣었는데, 오랫동안 참고 있었던 눈물이 손등에 뚝뚝 떨어졌다. 하지만 그녀는 닦지 않고 다른 상자를 열었다. 일곱째 외삼촌이
이방의 죽음은 사실 송석석에게 조금의 위안을 주지 못했다.그녀는 밤에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숙면에 빠진 것처럼 고른 숨을 쉬었다.하지만 그녀는 잠에 들지 않았다.예전의 모든 순간이 그녀의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그것들은 마치 절벽에서 날아다니는 나비 같아 그녀는 아무것도 잡지 못했다.거의 오경이 되어서야 그녀는 비로소 정신이 없는 상태로 잠들기 위해 눈을 감았다. 사여묵은 그녀가 눈을 감자 그제야 눈을 떴다. 사실 그도 마음이 편치 않아 잠들지 않았다. 송석석과 결혼해서 지금까지 금슬이 좋은 편이었지만 그는 송석석이 줄곧 자신의 감정을 감추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른 일은 괜찮았는데, 나라에 관한 큰 일은 심지어 주동적으로 그를 찾아와 토론하곤 했다. 하지만 유독 자신의 감정만은 마음속 깊은 곳에 꽁꽁 숨겨두었다.송석석은 상처를 마음속에 묻고 평온한 척을 한 것이었다. 그녀는 심지어 자신이 더 이상 행복해질 자격이 없다고 느껴 감히 진정으로 행복해하지도 못했다.그녀의 웃음은 아무리 환해도 눈 밑에는 늘 깊은 근심이 서려 있었는데, 그 근심이 그녀를 정신 들게 했다.산에서 제멋대로 핀 진달래처럼 활기차게 자란 그녀는 원래는 가장 화려한 모습으로 인생을 맞이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마음대로 웃지도 못했으니 말이다.사여묵은 편지를 볼 때 그녀가 자신의 품에 안겨 우는 것처럼 자신에게 속마음을 털어놓길 바랐는데 그녀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는 기다란 손가락으로 송석석의 손을 감쌌다. 하지만 송석석은 깨어나지 않았고 오히려 더 깊이 잠이 들었다.다만 겉으로는 편안히 자고 있는 모습이지만 꿈속에는 피비린내가 나는 살육을 겪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잘 숨기며 예전의 일은 감히 생각하지 않기로 마음 먹었다. 생각하기만 하면 송 씨 가문이 멸문당하는 참혹한 상황을 꿈꿨기 때문이다. 비록 그녀가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가족들의 시신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꿈속에서 그녀는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바닥에서 기어가는 어머니를
이튿날 송석석은 아무 일 없는 사람처럼 일어나 말채찍을 들고 집을 나섰다. 전북망이 중상을 입고 휴가를 신청하자 숙청제는 경과를 알고는 분노하며 욕설을 퍼부었다. “그가 정말로 일편단심인 남자라면 애초에 석석에게 그렇게 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은 일개 죄인 때문에 자해를 해서 장군부의 일도 상관하지 않다니. 효도도 충성도 없는 사람이 무슨 소용이 있겠어?” 오대반은 황제가 전북망을 몇 번이고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첫 번째 이유는 전 노장군을 봐 서고, 두 번째 이유는 그를 이용해 현갑군을 견제하기 위해서이고, 세 번째는 성릉관의 장군들에게 영향을 끼칠까 봐 당분간 그를 파면할 수 없어서였다. 이젠 서경의 철수 소식도 전해졌으니 황제도 더 이상 그를 멋대로 두진 않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 조정의 신하들이 밖에서 소리를 지를 때 오대반은 특별히 허어사를 기다렸다가 황제폐하께서 전북망 때문에 화를 냈다는 일을 무심코 언급했다. 허어사가 이유를 묻자 오대반은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허어사가 조사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서경인이 이방을 처치하여 전북망이 벽에 머리를 박았다는 보고가 허어사에게로 보내졌다. 허어사는 고지식한 사람이라 이런 걸 용납할 수 없었다. 어사대에서는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전 씨 가문의 자손으로서 가문을 빛낼 생각을 하지 않고 신하로서 관직을 잘 완수하지 못해 황은까지 저버렸으니 차라리 그 죄인을 따라가는 게 낫지 않소?” 그러고는 탁자에 앉아 상주본을 쓰기 시작했다. 허어사가 상주본을 쓰자 많은 관리들도 맞장구를 치기 시작했는데 그들이 전북망의 가치를 알아채지 못한 게 아니라 그가 이방을 위해 벽에 박았다는 말이 서경인의 귀에 들어가면 어떤 말이 나올지 몰랐기 때문이었다.3일 동안 계속 상주본을 올리자 원래도 위태롭던 전북망의 벼슬자리가 결국 사라졌고 숙청제는 그의 관직을 해임하고 자숙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전북망을 면직시킨 후 장기문이 승진을 했고 척귀가 장기문의 원래
그러자 송석석이 이내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왕씨 가문에서는 그녀를 아주 잘 대해줍니다. 조카딸의 혼담에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시집간 부군이 잘 대해준다 하더군요. 다만 그녀는 자신이 두 번 시집갔음에도 처가에 머무는 것이 조카들에게 미칠 영향이 걱정되어 그러는 모양입니다.”그 말에 전북망이 고개를 끄덕였는데, 순간 번개처럼 날렵하지만 마음씨 따뜻한 최씨 부인이 떠올랐다. 최씨 부인에게는 적자와 서자녀들이 있었고, 아직 혼담이 정해지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그런 그녀가 혼인 문제로 얼마나 많은 유언비어에 시달렸을지 생각하니, 전북망은 진심으로 안타까웠다. 형수로서의 최씨 부인을 존중하며, 그녀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할 바 없었다. 이때 송석석이 그의 생각을 끊었다. “그럼 천천히 생각해 보십시오.”전북망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문득 물었다. “우리 단둘이 여기에 있으면, 섭정왕이 질투하지 않을까요?” 송석석은 예상치 못한 질문에 잠시 당황했으나, 곧 침착하게 답했다. “이 정도 신뢰도 없다면, 제가 어찌 현갑군 지휘사로 오래 근무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서로 숨김없이 모든 걸 공유합니다. 이번 만남 역시 그분께 이미 알려두었죠.”송석석이 떠나자 전북망도 따라나섰다. 그는 섭정왕이 어딘가에서 이들을 지켜보고 있으리라 의심했지만, 정작 별청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앞마당에서야 섭정왕을 발견했는데, 그는 대장군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송석석을 보자 미소로 맞이하며 불러세우는 섭정왕의 모습에 전북망은 마음이 착잡해졌다. ‘진정한 부부란 저런 것일까.'그러나 성릉관이든 진성이든, 남녀의 단독 만남은 명예에 흠이 될 수 있음도 잘 알았다. 특히 높은 지위에 오른 이들은 더욱 조심해야 했다. ‘내가 무슨 권리로 그들을 걱정하는가.’자조적인 생각이 들었지만, 왕청여의 제안은 여전히 그의 가슴을 두드렸다. 5일의 고민 시간이 주어졌다. 사여묵과 송석석이 진성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최씨 부인의 이야기를 떠올리면 답은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 전북망은 송석석과 다시 만났다. 사실 그전에도 송석석이 성릉관으로 갔을 때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들은 서로 서먹해서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이 매번 성릉관을 떠날 때마다 몰래 배웅하곤 했다. 전북망은 자신이 당시 어떤 마음으로 그런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늘 송석석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이방과 왕청여에게도 미안하긴 하지만, 그들과는 서로 감정을 소모하고 다투면서 서로에게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장군부만 송석석에게 상처를 줬을 뿐, 송석석은 장군부에게 조금의 상처도 주지 않았다. 비록 이혼한 후에는 전북망 어머니의 병세에 대해 상관하지 않았지만 큰형수에게 어떻게 단설환을 얻을 수 있는지 알려주기까지 했다.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는 이미 섭정 왕비가 되어있고 나서였다. 변방의 전사들에겐 양식과 무기가 풍부하고, 봉록까지 올라, 그들에겐 이득이기에 이제는 조정의 정세에 관심을 두지 않아도 되었다. 섭정왕은 한때 장수였기에 병사들이 배불리 먹어야만 국토를 지킬 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전북망과 송석석이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섭정왕과 함께 소 대장군에게 생신을 축하해주고 있었다. 그녀를 보는 소 대장군의 눈빛은 여전히 자애롭고 인자했다. 전북망은 사람들을 사이에 두고 멀리서 그 광경을 보며, 그때 그렇게 어리석지 않았다면 지금 송석석과 함께 노장군의 생신을 축하하는 사람이 바로 자신일 것이라는 후회를 했다.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같은 생각인 걸 보니, 자신만 제자리에서 멈춰 있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래서 그는 이번에도 송석석과 대화를 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생일잔치가 끝난 후에 송석석이 뜻밖에도 먼저 그를 찾았다. 그와 송석석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섭정왕은 이상한 소문이 날까 봐 걱정되지도 않는가?’전북망은 당황하고 불안해 보였고, 송석석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먼저 입을 열지도 못하고 송석석이 말하기만을 기다리
전북망은 성릉관에서 몇 년 동안 두 번이나 발탁되었고, 지금은 장군의 신분으로 수천 명의 병사를 관리하고 있다. 계속 성릉관에 주둔하고 있어 다시 진성으로 돌아간 적이 없었고, 진성의 부름 없이는 제멋대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는 재혼도 하지 않고 여전히 혼자 살아갔다. 성릉관의 모래바람은 해마다 그의 얼굴에 흔적을 남겨 또래들보다 몇 살이나 더 늙어 보였다. 심지어는 몇 년 동안 불면증에 시달렸기에, 진정제를 먹어야만 잘 수 있었다. 그는 가끔 이런 생각을 했다. ‘만약 내가 그때 이방과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어떻게 지내고 있었을까? 송석석과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부부가 되었을까? 아마도 우린 귀여운 자녀도 낳았겠지. 그리고 나는 군대에서 열심히 일하고 석석은 가문의 내무를 책임지며 부모님을 모시고 아이를 돌보고 있었겠지? 설령 내가 승진을 하지 못하고 평생 장군으로만 살아도 그는 날 떠나지 않았겠지.’ 이전의 전북망은 송석석이 하늘을 나는 독수리였는데 자신을 위해 날개를 부러뜨리고 병든 시어머니를 돌보며 군부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책임지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리고 그가 알아차렸을 땐 이미 돌이킬 수도 없었다. 전북망에게는 이미 이방이 있었고 이방을 사랑한다고 했으니, 송석석이 이혼하자고 했을 때 그는 심한 말을 하고 후회하지 말라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송석석 또한 후회할 게 없었다. 이혼을 하면서 전북망을 위해 부러뜨렸던 날개가 다시 자라나 전쟁터로 날아가 쉽게 공을 세웠으니까 말이다. 이방은 송석석이 큰 가문의 아가씨인 데다가 부친과 오라버니가 그를 위해 길을 닦아주었기에 이런 성과를 이룰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의 성공은 그의 능력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문이 도움이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주된 원인은 아닐 것이다. 만종문에서 송석석의 무공은 거의 최고였는데, 그건 송석석이 그만큼 노력을 했고, 그만큼 땀을 흘렸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전북망은 송석석을 존경했지만 그는 자신이 송석석을
어머니께 간청해도 소용이 없자 신이는 아버지를 찾아갔다. 하지만 돌아온 건 더 심한 꾸지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신이가 이 혼사를 반대하는 것은 양지춘과 접촉한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양지춘에게 그녀를 데리고 나가서 놀며 감정을 쌓으라고 했다. 신이는 가기 싫었지만 어머니가 억지로 그녀를 마차에 태웠고, 심지어는 하녀에게 그녀가 부적절한 말을 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엄명했다. 양지춘의 얼굴은 그나마 멀쩡하게 생겼는데, 처음에는 신이를 조금이나마 존중하는 척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본성을 드러냈다. 그는 신이의 외모와 품평을 논하며 신이가 외모가 예쁘지 않았더라면 절대로 그를 부인으로 들이지 않겠다고까지 했다. 그의 오만한 태도는 신이를 매우 불편하게 했다. 단지 이것뿐이었다면 아마도 신이가 결혼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양지춘은 일부러 신이를 마차에 태워주는 척하며 그녀의 엉덩이를 꼬집었다!그 순간 신이는 온몸의 피가 머리 위로 솟구친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의 경박한 눈빛에 신이는 이내 눈물이 쏟아졌고, 모욕감에 온몸을 떨었지만, 감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힘들게 집에 돌왔는데, 하녀와 마부는 그의 동작을 보지 못한 탓에, 오히려 그가 세심하고 자상하다며 그녀의 어머니 앞에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신이는 억울해서 어머니에게 그 일을 말했지만 어머니는 오히려 그녀가 일부러 꾸민 말이라고 생각해, 그녀를 꾸짖으며 사흘 동안이나 외출을 금지했다. 신이는 그렇게 방에 갇혔고, 매일매일을 눈물로 얼굴을 씻었다. 심지어 그날 선비의 말을 듣고 호수에 뛰어들지 않은 것을 후회하기까지 했다. ‘내가 양지춘에게 시집가는 것이 물에 빠져 죽는 것과 대체 무엇이 다른가?’ 사흘 후, 외출 금지가 해제되자마자 신이는 다시 경산사로 가서 같은 핑계로 하녀를 내보냈다. 이번엔 정말 죽을 각오로 호숫가에 간 것이었는데, 뜻밖에도 그곳에서 다시 그 선비를 만났다.그는 쓸쓸하게 호숫가에 앉아 작은
신이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한 사람이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고, 나무 그늘에 몸이 가려져 있었다. 그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은 초라해 보였고 눈 밑에는 검푸른 빛을 띠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 사람은 바로 다리 앞에서 그림을 팔던 선비이자, 학정이 말하던 퇴학 해서 기녀를 키우는 학생이었다!“헛소리하지 마십시오.” 신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짜증을 냈지만, 그가 한 말을 떠올리자 내심 두려웠다. “나는 여기에 물귀신이 있다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거짓말하는 것이겠지요.” 신이는 죽음은 두렵지 않았지만, 귀신은 두려웠고 진흙탕에 영원히 깔려 있는 건 더욱 두려웠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가 걸어 나오자 얼굴은 더욱 여위어 보였다. “호숫가의 주변을 보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왜 이런 아름다운 경치를 보러 오는 사람이 없겠습니까?” “그건 사람들이 이곳으로 예불하기 위해 오는 것이지, 경치를 보러 오는 것은 아니니까요. 절을 하고 바로 돌아가니 당연히 보지 못하겠지요.” 신이는 그렇게 말했지만, 순간 깊이가 보이지 않는 호수에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느껴져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그는 여전히 굳게 서서 말했다. “예불하는 사람은 천지와 자연을 경외하기 때문에 이런 좋은 경치가 있다면 반드시 한 번 보러 올 것입니다. 이런 곳은 인재를 배출할 수 있는 좋은 곳일 텐데 아무도 없다는 게 아기씨는 이상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것이 사실인지는 몰랐지만, 그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감히 그런 무서운 곳에서는 죽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몸을 돌려 떠나려 했다.그러자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한 번뿐인 인생이니 절대 쉽게 자신의 생명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살고 싶어도 살 지 못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의 말이 이상하게 느껴져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는데, 그의 눈 밑은 이내 붉어졌고 눈물이 고여 반짝이는 것 같
신이의 사촌 여동생과 하녀는 신이를 찾으러 돌아왔다. 신이가 하녀보고 이순에게 삼백문을 주라고 하자 이순은 웃으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원래는 우연한 만남일 뿐이라 다시는 접점이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 조모님의 생신 때 가문 연회에서 공학정이 데리고 온 제자들 중에 이순이 있었다. 강남의 예의 규율은 진성처럼 엄격하지 않아서 연회에 참석할 때 여인들도 앞마당에 갈 수 있었다. 이순은 신이를 단번에 알아보지 못했다. 신이는 그때 면사포를 쓰고 있었고 두 눈만 드러냈기 때문에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이상할 건 없었다. 이순은 식사를 하지 않고, 신이의 조모에게 생신 축하 그림만 드린 후에 집에 일이 있다며 작별을 고했다. 그가 떠나자마자 학정이 그를 언급하며 안타까운 말투로 말했다. “총명하긴 한데 진취심이 없어서 계속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걸 여기로 데려와 진취성이 있는 사람들을 많이 사귀게 하려고 했는데… 이 정도로 사리분별을 할 줄 모르다니. 정말 실망이군. 학교를 그만두겠다면, 이젠 마음대로 하라고 해야겠어.” 그러자 신이의 부친이 위로했다. “화내실 필요 없습니다. 선생님껜 학생이 많으니 그가 나간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될 건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학정은 마치 울화가 쌓인 것처럼 말했다. “그는 내가 가장 아끼는 제자였다네. 그런데 진취성만 없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동창에게 돈을 빌리질 않나, 게다가 집에 기녀까지 키우고 있다더군.” 신이의 아버지는 그런 사람을 가장 싫어하였다. “그런 사람은 얘기할 가치도 없습니다.” 신이는 그가 어떤 사람이라는 걸 알고 나서 왠지 마음속으로 실망감이 가득했다. 아마도 그날은 그가 그린 그림을 보고,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 같다고 생각해 마음이 갔던 것 같았다. 그렇게 몇 달 후, 신이의 혼사도 낙착되었다. 그녀의 약혼자는 회주 지부의 둘째 아들인 양지춘이고, 올해 22살이었다. 22살인데도 결혼하지 않았던 건 첩을 통해 서자를 낳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좋은 가문은 그
그의 이름은 신이었는데 그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그에 대해서 말할 때, 경멸하는 기색을 띠었고,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 모르는 사람까지 모두 침을 뱉으며 뻔뻔하다고 할 정도였다. 알다시피 애인과 야반도주하는 것은 사람을 죽이고 불을 지르는 것보다 더 욕먹을 일이니 말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에게 후회하냐고 묻기도 했다. 그녀는 시집간 것을 후회하지 않지만 죄책감을 느끼긴 했다. 왜냐하면 그로 인해 시 씨 가문의 명성이 손상되어 형제자매들과 조카들이 혼사에 어려움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신이는 시 씨 가문의 아가씨로서, 태어날 때부터 온갖 보살핌을 받아왔다. 먹는 것은 물론 모두 산해진미이고, 입는 것도 모두 능라 비단이었다. 게다가 보모님과 오라버니의 총애까지 한 몸에 받았다. 하지만 그녀에겐 한 가지 결함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열네 살 때까지 월사가 오지 않은 것이었다. 많은 의사들을 불러 진찰을 받고 밤낮으로 약을 먹었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어머니는 그녀에게 몸이 차서 그러니 몸조리를 하면 나을 수 있다고 위로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몰래 의사가 부모님께 하는 말을 들었다. 의사는 그가 몸이 차서 그런 병이 생긴 것이 아닌, 아이를 키우는 곳이 어린아이와도 같아서 평생 아이를 가질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의 몸이 마치 작은 꽃병과 같아서 꽃을 꽂을 수는 있지만 나무를 심고 꽃을 피워 열매를 맺는 건 불가능하다고 비유했다. 그녀는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건 여자에게 어떤 의미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녀를 속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나중에 좋은 사람에게 시집가서 부군에게 첩을 들인 후, 첩이 낳은 아이를 친자식처럼 키우라고 조언해주었다.시 씨 가문이라는 후원이 있으면 그녀가 아이를 낳을 수 없어도 아무도 그녀의 지위를 흔들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 씨 가문의 재물은 그녀가 평생 부귀하게 살기에 충분했다. 신이의 조모도 그녀에게 아이를 낳을 수 없으니 자세를 낮춰야 한다고 했다. 시 씨 가문의 딸이라고
추운 겨울이 되자 눈이 내려 성릉관은 하얗게 뒤덮였다. 세상이 마치 깨끗해진 것처럼 보였다. 이황자는 몇 년 동안 너덜너덜한 승복을 입고 발우를 받쳐 들고는, 가는 길에 동냥을 하다가 절을 보면 이틀 묵으며 부처님께 참회하면서 살았다. 사실 그는 원래 있던 절에서 계속 지낼 수 있었다. 편안하진 않지만 풍찬노숙할 필요도 없고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그런 안일한 곳에서는 평생 죄를 씻을 수 없다고 생각했고, 계속 길을 걷고 계속 고생해야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했다. 그가 성릉관에 도착했을 때 짚신은 이미 찢겨 있었고 발바닥에는 두꺼운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이제는 신발을 신지 않고도 자갈이 가득한 길을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추운 날씨에는 모든 옷을 껴입어도 추위를 막을 수 없었지만 이미 익숙해진 뒤였다. 그는 눈보라를 맞으며 성릉관에 위치한 감은사로 향했는데, 몇 년 동안 발걸음을 멈춘 적이 없는 탓에 고단함이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심지어는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아 그는 눈이 가득 쌓인 길에서 의식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깨어났을 때 그는 따뜻한 두꺼운 이불 속에 누워 있었다. 그가 있는 방에는 숯불이 피워져 있었고, 살짝 열린 창문으로 눈에 눌려 허리가 굽은 나뭇가지가 보였다. 그는 눈동자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렇게 편안하고 따뜻한 느낌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의 마음속에 순간 욕심이 생겨 조금만 더 누워있고 싶어졌다. 그런데 바로 그때, 문이 활짝 열렸다. 그가 벌떡 일어나 앉았는데, 갑자기 눈앞이 핑핑 돌더니 다시 힘없이 침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누워 있거라.” 이때 누군가가 부드러운 말투로 말하면서 약그릇을 그의 침대 옆에 놓았다. 그는 말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익숙해, 어지러움을 가라앉히고 고개를 돌려보니, 그 사람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서우 형?!’ 그는 자신이 잘못 보았을까 봐 다시 자세히 보려 했지만, 몸이 너무 어지러운
대황자는 봄 사냥 때 숙청제에게 꾸중을 듣고 돌아간 후 앓아누웠다. 당시 이황자와 서우가 모두가 걱정했는데 덕비는 오히려 기뻐했다. 그는 이번 일을 겪으면서 황제폐하께서는 분명히 대황자를 싫어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덕비는 이황자를 안고 반드시 부지런해야 하고, 태부와 황숙의 말을 잘 듣고 누구보다 잘 배워 황형을 제압해야 한다고 당부까지 했다. 그로 인해 이황자의 마음은 몹시 복잡했다. 덕비가 줄곧 그에게 태자와 황제가 되는 것이 얼마나 좋은 지 말해주었을 때 비록 그도 마음이 설렜지만 자신과 거리가 먼 얘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지금 그와 대황형, 서우 형, 그리고 셋째 동생이 사이가 좋아 도저히 대황형을 미워할 수가 없었다. 매일 모순적으로 지내다 보니 오히려 학업이 나빠졌고 승마 연습을 할 때도 여러 번 실수를 했다. 하지만 덕비는 이상하게 그를 탓하지 않았고 며칠 동안 계속 게으르게 하라고 했다. 그렇게 덕비는 이황자를 데리고 복마마를 자주 뵈러 갔고, 복마마 궁전에서 숙청제를 만날 수도 있었다. 덕비는 며칠 동안 그곳을 드나들더니 어느 날 굳은 표정으로 다시는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차가운 말투로 청이에게 자신의 보살핌이 없으면 아이가 태어날 수 있는지 보겠다고 했다. 황제폐하를 자주 뵈러 갈 수 없어 아쉬웠지만 이황자는 마음을 가다듬고 공부와 승마술에 전념했다. 이황자는 당시 앞날이 어떻게 될지도 몰랐고, 비록 매일 힘들긴했지만 한편으로는 즐거웠기에, 계속 이렇게 지내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숙청제의 천추세에 승마대회를 개최할 예정이니 세 황자와 서우도 가서 겨뤄 보기로 했다. 원래 그런 대회에서 황자들은 재미있게 참석만하면 되지만, 덕비는 그 경기를 몹시 중시했다. 덕비가 이황자에게 마름쇠를 건넬 때, 그는 하늘이 무너져내리는듯한 기분을 느꼈다. 이황자는 원하지 않았다. 그는 절대로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대황형의 목숨을 앗으려 하다니, 이황자는 처음으로 어마마마가 무서워졌다.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