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항에서 서혜지와 나준우는 택시를 타고 관강동 별장으로 출발했다.나준우는 조금 전에 서혜지와 차우미가 대화할 때는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택시를 타자 물었다.“세 사람 저녁 식사 끝났대?”서혜지는 줄곧 웃는 얼굴로 택시를 타고는 친밀하게 나준우의 팔짱을 끼고 어깨에 기댔는데 이틀 동안 둘만의 여행을 하면서 두 사람 사이가 엄청나게 좋아졌다.나준우의 질문에 서혜지는 꿀을 먹은 듯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네. 금방 식사를 마쳤대요. 아직 레스토랑에 있다고 해서 별장에서 만나자고 했어요. 아마 지금쯤 출발해서 별장으로 가고 있을 거예요.”“별장으로 가라고 했다고? 우리가 레스토랑으로 가면 되지, 왜 번거롭게 해?”나준우는 자기들이 곧바로 레스토랑으로 가는 것이 더 편리하다고 생각했다.서혜지는 나준우의 말을 듣자마자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그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당연히 별장으로 가야죠. 형수님은 절대 아주버님과 같이 있지 않으려고 할 건데 우리가 레스토랑에서 예은이를 픽업하면 두 사람은 각자 헤어져서 갈 거잖아요. 내가 형수님을 별장으로 가게 한 것은 아주버님께 형수님을 별장에 남길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드리는 거예요.”서혜지의 말을 들은 나준우는 그제야 모든 걸 알았다는 듯 말했다.“그런 거였어? 잘했어.”나준우도 서혜지의 생각에 동의하자, 그녀는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또 말했다.“당연하죠. 내가 누군데요.”서혜지의 자신감 넘치는 말에 나준우는 웃음을 터뜨렸다.“그렇지. 그쪽으로는 대단하지.”이건 사실이다. 서혜지의 계략이 없었다면 나준우는 절대 그녀에게 빠져들지 않았을 것이다.밤은 점점 더 깊어졌고 차우미와 나상준이 나예은과 함께 별장에 도착하자 거의 10시가 다 되었다.나예은은 서혜지와 나준우가 자기를 데리러 온다는 말을 듣고 별장으로 오는 동안 차 안에서 좋아하더니 낮잠을 자지 않아서인지 얼마 되지 않아 잠이 들었다.차가 멈춰도 나예은은 여전히 깨어날 기색이 없이 곤히 자고 있었다.차우미는 나예은이 달콤하게
차우미가 말했다.“혜지 씨와 준우 씨가 금방 도착할 거야. 내려가서 기다리자.”“응.”역시나 아주 간단한 한 글자 답변이었고 나쁜 감정은 하나도 없이 그녀가 무슨 말을 하든 다 동의할 것 같았다.순간 차우미는 나상준이 예전과 다르게 분위기가 온화하고 고분고분한 것 같다고 느끼며 아래층으로 내려갔다.나상준도 그녀의 뒤를 따라 내려갔다.주변의 분위기는 너무나 고요했다.두 사람이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적막이 두 사람을 둘러쌌고 발걸음 소리만 집안에 맴돌았다.사실 차우미는 나상준에게 할 말이 있었는데 서혜지와 나준우가 나예은을 데리러 온다고 하니 그 전에 이틀 동안 고마웠다고 말하고 싶었다.하지만 두 사람이 방을 나온 후, 차우미는 말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그녀가 조용히 계단을 내려갈 때 나상준도 그녀의 옆에서 천천히 내려갔는데 차우미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1층 거실에 내려가서 어두워진 밤하늘을 보는 순간 차우미는 지금 나상준과 단둘이 있다는 걸 느꼈고 무슨 말을 해야 하나 생각했다.차우미는 고개를 돌려 자기 옆에 서 있는 나상준을 보았다.그녀가 걸음을 멈추자, 나상준도 걸음을 멈추었는데 그의 눈은 줄곧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는 순간, 차우미는 무의식적으로 가슴을 조였는데 머릿속으로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왠지 이틀 내내 나상준이 계속 자기만 보는 것 같았는데 매번 그녀가 고개를 돌릴 때마다 그의 눈과 마주쳤었다.‘나의 착각인가? 설마 정말로 계속 나를 보고 있었던 건 아니겠지?’머릿속에 문뜩 떠오르는 의문에 대해 차우미는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고 또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여겼다.차우미는 나상준을 진지하게 바라보며 말했다.“혜지 씨와 준우 씨가 조금 있으면 올 거야. 그들이 예은이를 데려가면 내가 예은이와 한 약속도 끝나. 이틀 동안 고마웠어.”차우미는 진심으로 고마움을 전했다.예전에 어찌했던 좋은 건 좋은 것이고 나쁜 건 나쁜 것이다. 이틀 동안 나상준은 정말로 흠집 하나 잡
“뭐라고?”난데없는 한마디에 차우미는 깜짝 놀랐다.‘돌봐달라고?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기승전결이 없는 나상준의 한마디에 차우미는 황당하고 의아했다.나상준이 이어서 말했다.“어제 손을 다쳤잖아. 생활하는데 불편해서 돌봐 줄 사람이 필요해. 당신 말고 다른 여자가 하는 건 싫어.”차우미는 그제야 어젯밤에 자기 때문에 나상준이 손을 상했다는 것을 기억하고는 즉시 주머니에 넣은 그의 손을 쳐다보았다.오늘 하루 동안 평소와 똑같게 행동했기에 손을 다쳤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나상준이 직접 다친 걸 얘기하니 상태가 심각한 건지 궁금했다.‘예은이 노는데 영향을 주지 않으려고 참은 건가?’차우미는 미간을 찌푸리며 자신의 추측이 맞을 거라고 확신했다.‘그럼, 정말로 내가 돌봐줘야 하나?’나예은과의 약속이 끝나면 그녀는 정말로 다시는 나상준과 아무런 관계가 없이 각자의 생활로 돌아가고 싶었다.그런데 자신 때문에 다쳤는데 상관하지 않으면 너무 무정한 것 같고 그렇다고 계속 이렇게 엮이면 두 사람에게 모두 좋지 않을 것 같았다.차우미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들고 말했다.“영우 씨한테 남자 간병인을 찾아달라고 하면 되잖아.”“...”나상준은 대답하지 않고 침묵했다.따라서 주변 분위기도 순식간에 소름 돋을 정도로 조용해졌다.차우미는 나상준이 자신의 말에 동의하지 않을뿐더러 불만이 가득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하지만 차우미는 다시는 나상준과 그 어떤 관계도 맺고 싶지 않았는데 이대로면 정말로 끝이 없을 것 같았다.때문에 나상준이 기분이 나쁘고 화를 낼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말한 것이다.그녀는 다시 한번 마음속으로 결심하고 말했다.“나는 안평에 돌아가면 바로 출근할 거고, 매일 정상적으로 출퇴근해야 해. 휴가를 낼 수도 없고 또 손을 다친 데 관련해서 어떻게 하면 되는지 잘 모르니 전문 인력을 구하는 게 제일 좋아. 아니면 내가 영우 씨에게 연락해서 상준 씨 상황을 얘기하고 전문 인력을 구하라고 할게. 그리고 간병인 비용은 내가 영우 씨에
나준우는 택시 기사에게 비용을 지급하고 서혜지가 먼저 문을 열고 내렸다.기사는 돈을 받고나서 트렁크에서 짐을 내렸고 나준우가 넘겨받았다.택시를 떠나보내고 서혜지가 초인종을 누르려고 돌아서자, 문이 덜컥 열리면서 안에서 키가 훤칠한 남자가 걸어 나왔는데 자세히 보니 나상준이었다.서혜지는 눈썹을 치켜들고 입꼬리를 올리며 나준우의 팔짱을 끼고 같이 안으로 들어갔다.차우미는 거실 안에서 먼저 창밖으로 택시에서 내리는 사람들을 확인했다.서혜지와 나준우인 걸 확인하고는 곧바로 밖으로 걸어 나가는 나상준을 따라갔다.“아주버님, 형수님, 저희 왔어요.”“형, 형수님.”서혜지와 나준우는 나상준과 차우미 앞에 와서 두 사람이 이혼하지 않은 듯 예전처럼 자연스럽게 불렀다.특히 서혜지는 나상준과 차우미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보니 너무 좋았다.나상준이 간단하게 대답하자, 차우미가 말했다.“예은이는 방에서 자고 있어요.”서혜지가 말했다.“괜찮아요. 저희가 안고 가면 돼요.”나준우도 말했다.“형, 형수님, 이틀 동안 고생하셨어요.”나상준이 나준우를 보며 말했다.“아니야. 고생 없었어.”나지막한 말소리는 예의로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이었다.나준우는 나상준의 눈빛에서 이틀 동안 너무 만족했다는 것을 알아채고 마음속으로 깜짝 놀랐다.그는 나상준의 눈에서 이런 진심 어린 표현을 처음 봤기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서혜지가 웃으며 말했다.“아주버님, 형수님, 이틀 동안 고생 많으셨어요. 저희가 식사 초대하려는데 언제 시간이 되세요?”서혜지는 말하면서 미소 가득한 얼굴로 차우미와 나상준을 번갈아 보았다.차우미가 말했다.“나중에...”“다음에요.”차우미는 옆에서 자기 말을 끊은 나상준을 쳐다보았다.나상준은 그녀를 보지 않고 서혜지를 보고 있었는데 표정으로 초대에 응한다고 말했다.서혜지는 두 사람의 의견이 엇갈리고 차우미가 거절하고 싶어 한다는 것도 알아챘다.다만 나상준은 앞질러 동의한다는 자기 생각을 표현했다.서혜지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좋
차우미는 미소를 지으며 서혜지에게 이틀 동안 나예은이 얼마나 말을 잘 듣고 울지도 않고 잘 놀았는지를 얘기하고 있다가 서혜지의 갑작스러운 말에 입을 다물고 표정이 굳어졌다.차우미는 약간 놀라고 의문이 가득한 눈빛으로 서혜지를 바라보았다.‘예은이 얘기하고 있었는데 왜 갑자기 화제가 나상준으로 가지?’서혜지는 차우미의 표정을 개의치 않아 하며 계속해서 말했다.“정말이에요. 아주버님이 예전보다 부드러워진 것 같아요. 예전에 아주버님은 분위기가 너무 차가워서 말을 꺼내기도 무서웠어요. 한 가족이라고는 하지만 낯설고 거리감이 느껴지기도 했었거든요. 그런데 조금 전에 아주버님은 예전과 완전히 달랐어요. 아주버님한테서 온기가 느껴지고 가족 같은 느낌도 있고 낯설지도 않았어요.”서혜지의 말을 듣고 차우미는 다시 웃으며 말했다.“네, 변한 것 같아요. 그건 다 예은이 때문이예요.”“네?”서혜지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차우미를 바라봤는데 그녀가 알기로 나상준의 변화는 분명 나예은 때문이 아니라 차우미 때문이다.두 사람이 조금 전에 같이 서 있으면서 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미묘한 분위기가 느껴졌는데 전에 볼 수 없던 것이었다.간단하게 말하면 예전의 차우미와 나상준은 서로를 존중하는 부부 사이로 살았다면 지금의 두 사람은 사랑으로 평생을 함께할 수 있을 것 같았다정말로 예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당사자들은 못 느끼겠지만 제3자인 서혜지는 한눈에 알아보았을 뿐만 아니라 그 느낌이 너무나도 강력했다.두 사람 모두 변했다.사실 서혜지는 호기심으로 의문을 제기한 것이 아니라 차우미가 나상준의 마음을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한 말이다.그렇다, 나상준은 지금 이혼한 걸 후회하고 다시 재혼하고 싶어 한다.나상준은 차우미를 간절히 원하고 있다.하지만 차우미는 그런 서혜지의 마음을 전혀 알아채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럴 생각이 아예 없었다. 왠지 현재 차우미는 나상준에게 남녀 간의 감정이 없는 것 같았다.차우미는 서혜지를 바라보고 웃으며 말했다.
나상준의 말을 듣고 차우미는 마치 잔잔한 호수에 갑자기 파동이 일어나듯 심장이 두근거렸고 눈빛이 흔들렸다.나상준은 너무 직설적으로 차우미를 원한다고 고백했다.그 어떤 여자라도 그런 말을 들으면 절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을 텐데 차우미는 심지어 나상준을 좋아했던 사람이다.하지만 잠깐의 침묵이 흐른 뒤, 차우미는 정신을 차리고 핸드폰을 꽉 잡으며 침착하게 말했다.“그런데 나는 상준 씨를 간호하고 싶지 않아.”워낙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거절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나상준의 고집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나상준에서 3년 동안의 부부 관계는 다른 사람이 쉽게 대체할 수 없는 습관이 되어버린 듯했다.만약 회성에서 모든 것을 끝내지 않았다면 동의할 수도 있었을 건데 지금은 모든 것이 끝났고 두 사람 사이는 마침표를 찍었다.때문에 차우미는 이제 그 어떤 일로도 나상준과 다시 관계를 맺고 싶지 않았다. 비록 손을 다치게 된 것이 그녀와 관계가 있었지만 그래도 싫었다.“...”나상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묵했다.예전 같았으면 차우미의 직설적이고 무정한 거절에 이미 분노했을 건데 오늘은 이상하게도 화를 내지 않았다.그는 조금의 이질감도, 조금의 분노도 없을뿐더러 밤하늘의 고요한 눈빛으로 차우미를 바라보았다.나상준의 평온한 모습을 보면서 차우미는 순간 미안함과 죄책감을 느꼈다.나상준이 화를 냈으면 마음이 괜찮았을 건데 침묵으로 그녀만 바라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니 오히려 마음이 불편했다.차우미는 왠지 잘못된 결정을 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예은이와의 약속을 지켰으니 나는 이제 안평으로 돌아가서 출근해야 해. 상준 씨 업무는 대부분 해외에 있고 국내 업무가 있다고 해도 절대 내가 있는 작은 도시가 아닐 거잖아. 상준 씨가 내가 있는 도시로 오거나 내가 상준 씨 있는 데로 가는 것은 서로 불가능한 일이잖아. 어젯밤에 나를 도와준 것은 정말 고마워. 그리고 그 과정에서 다치게 된 건 미안해. 하지만 아무리
“볼일 다 끝나면 연락해. 나도 안평으로 가야 하니까.”나상준은 말을 마치고 돌아서서 안으로 들어가며 대화를 끝냈다.차우미는 너무 황당하고 혼란스러워서 한동안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오늘 밤에 안평으로 간다고 하지 않았어? 오늘 밤에 돌아가도 되는데 왜 굳이 내일 나와 같이 간다고 하는 거지? 아직도 나더러 간병하라는 거야?'한마디만 던지고 안으로 들어가는 나상준의 뒷모습을 보며 차우미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아 미간을 찌푸렸다.나상준은 절대 차우미의 간병을 받으려고 그녀와 같이 안평에 갈 사람이 아니다.분명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대체 왜 저러는 거지?’차우미는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나상준은 들어가자마자 사라졌는데 시간이 늦어서 휴식하고 싶은 듯했다.차우미가 휴대폰으로 시간을 봤는데 10시 30분이었다. 호텔까지 가려면 새벽이 될 거라서 그녀는 지체하지 않았다.휴대폰을 가방에 넣고 호텔로 가기 위해 캐리어 가지러 들어갔다.나예은이 집으로 갔기에 차우미도 이제 여기에 있을 이유가 없어 호텔로 가려는 것이다.그녀가 거실에 들어가자마자 위층에서 캐리어 바퀴가 굴리는 소리가 났는데 조용한 밤에 엄청 크게 들렸다.차우미가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위층을 보니 나상준이 그녀의 캐리어를 들고 내려오고 있었다.‘설마 나를 데려다주려는 건가?’한 손에는 캐리어를 번쩍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차 키를 들고 내려오고 있었는데 차우미의 생각이 맞는 것 같았다.나상준의 다친 손이 걱정되어 차우미는 서둘러 올라가며 말했다.“내가 할게. 택시 부르면 되니까 상준 씨는 일찍 쉬어.”차우미는 곧바로 그의 손에서 캐리어를 받으려고 했지만 실패했다.그와 동시에 나상준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계단 조심해.”전에는 절대 들어볼 수 없었던 부드러움과 세심한 배려에 차우미는 그대로 굳어버렸다.불빛 아래에서 눈을 살짝 내리깔고 계단을 바라보는 그의 모습이 보였는데 짙고 긴 속눈썹에 가려진 눈매는 그의 속마음을 전혀 엿볼 수 없었다.그의 옆모습은
차우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채 나상준은 차 키를 그녀에게 건네며 말했다.“내 손이 걱정되면 당신이 운전해. 예전에 당신이 타던 차니까 익숙하지.”차우미는 눈앞에 있는 아우디 차 키를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 차는 확실히 그녀가 예전에 계속 타고 다니던 차인데 하얀색이고 이 집에서 제일 저렴한 차였고 당연히 익숙하성우는 초기 화면으로 돌아온 휴대폰을 보면서 어이가 없었다.했다.차우미는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오늘 밤 나상준의 반응이 모두 생소하고 적응이 되지 않았고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차 키에는 그가 손수 만든 안전을 기원하는 나무 재질의 조각품이 그대로 달려 있었는데 그 아래에 달린 빨간 액세서리가 밤하늘 아래에서 유난히 선명하게 보였다.순간 많은 추억들이 떠올랐다.“그래, 알았어.”시간이 너무 늦은 지금 당장 마음속의 수많은 의심을 해결할 수도 또 그럴 필요도 없고 나상준이 회사에 일이 있다는 것이 사실이든 거짓이든 상관하고 싶지 않았다.게다가 손을 다친 나상준이 운전하다가 더 심각해질까 봐 차우미는 자기가 운전하기로 했다.차 키를 건네받고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었다.나상준은 차우미의 진지한 모습을 지켜보다가 조수석의 문을 열고 올라탔다.그는 처음으로 차우미가 운전하는 차에 타는 거였다. 아우디는 차우미가 출근하거나 평소 외출할 때 타던 거여서 내부 설정 등 모든 것에 너무 익숙하였다. 비록 이혼하고 아우디 차를 만지지 않은 시간이 몇 개월밖에 안 되었지만, 핸들을 잡는 순간 조금 낯설었다. 이건 시간이 가져다 주는 필연이다.하지만 시동을 거는 순간 낯선 것도 순식간에 사라졌다.차우미는 액셀러레이터를 밟고 핸들을 돌리며 별장을 나갔다.나상준은 조수석에서 핸들을 잡고 있는 차우미의 손을 바라보았는데 밤하늘의 가로등이 가늘고 부드러운 손가락을 따뜻함으로 감싸주는 듯했다.차우미는 나상준의 회사로 가본 적이 있어서 곧바로 회사로 향했는데 도착한 다음 내려서 택시 타고 호텔에 가려고 했다.호텔 방은 아직 퇴실하
차우미가 원하지 않는다는 건 나상준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냥 모르는 체하고 그녀와 함께하고 싶었다.차우미는 어찌 됐든 나상준과 이혼한 이후 서로의 생각이 다른 것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부분은 그녀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다.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차우미가 뭐라고 할 수는 없다.나중에 다시 얘기하자고 했으니, 그때도 아마 바쁠 거라고 생각하면서 차우미는 편안하게 생각하기로 했다.차우미는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탑승 시간인 것을 보고 잠시 휴식하면서 업무에 대해 생각하기로 했다.휴식 구는 점차 조용해지더니 나중에는 적막이 퍼졌다.나상준은 휴대폰을 들고 창밖을 바라보는 차우미를 보았는데 무언가 진지하게 생각하는 눈빛이었다.‘무슨 생각하는 거지?’그런 그녀의 모습은 회성 회의실에서 일할 때와 같았다.나상준은 차우미를 바라보다고 다시 휴대폰으로 안평의 관광 명소들을 검색했다.그는 자기와 멀어지려고 하는 차우미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을 것이다.시간은 어느덧 5시가 되어 나상준과 차우미는 비행기에 탑승했다.좌석에 앉아서 안전벨트를 하더니 차우미는 휴대폰을 꺼내 온이샘에게 탑승했다는 메시지를 보냈다.곧바로 온이샘이 답장을 보냈다.[알았어. 나도 지금 탑승하고 있어.]퍼스트 클래스는 이코노미석보다 조금 더 일찍 탑승한 것이다.차우미는 온이샘의 메시지를 확인하고 다시 시간을 보더니 이어서 시선을 돌려 창밖을 보았다.하늘은 이미 어두워졌는데 청주는 안평보다 더 일찍 어두워지는 것 같았다.이제야 차우미의 마음은 조금 편안해졌다.청주에 있는 며칠 동안은 몇 년인 것처럼 오래 느껴져서 빨리 돌아가고 싶었는데 이제 비행기에 탑승하고 나니 정말로 집으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차우미는 고향에 돌아가서 다시는 여기로 오지 않고 평범한 생활을 하고 싶었다. 그녀는 몸의 긴장을 풀고 의자 등받이에 기대었고 얼굴에는 마음속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기쁨의 미소를 지었다.그런데 갑자기 무슨 물건이 그녀의 몸 위에 떨어져서 놀라며 내려다
“예은이가 안평에 가본 적이 없어서 여름 방학이 되면 안평으로 놀러 갈 생각이야. 그런데 안평은 나도 잘 몰라.”나상준이 나예은과 같이 놀자고 한 것은 두 사람 사이의 약속이고 자신과 상관이 없다는 생각에 차우미는 나예은의 말에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어찌 됐든 조금 전에 그녀는 약속하지 않았다.그런데 지금 나상준의 말에 차우미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입을 벌렸다.나상준은 안평 사람이 아닌 청주 사람이고 또 일 때문에 여기저기 다니기에 안평을 잘 알지 못하는 것은 알고 있다. 그는 청주 이외의 다른 도시에서 오래 있어 본 적이 거의 없었다.나예은과 같이 놀려면 어느 도시든 모두 가능한데 왜 하필 안평으로 가려고 하고 또 차우미까지 함께 하자고 하는지 이해되지 않았다.사실 차우미는 그들과 놀지 않고 일을 하고 싶었다.그리고 제일 중요한 것은 차우미는 워낙 회성에서 일을 끝내고 또 나예은과의 약속을 이행한 다음에는 나상준과 더 이상 엮이는 일이 없을 줄 알았다.그런데 지금은 또 이렇게 같이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만나러 가고 있고 그것도 부족해서 나예은과 같이 놀자고 한다.차우미는 나상준과 왕래를 하지 않는 것이 언제면 가능할지 막막했다.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미간을 찡그렸다.나상준은 그녀의 표정 변화를 똑똑히 지켜보다가 말했다.“지금부터 서두를 거 없으니,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그가 억지로 밀어붙이지 않고 여유를 주자, 차우미의 표정이 약간 풀렸다.나상준은 말을 마치고 차우미를 보고 있던 시선도 거두고는 휴대폰으로 일을 하려는 것 같았다.차우미는 그의 행동을 바라보다가 말했다.“아직 예은이의 여름 방학까지 한 달 정도 남았다고는 하지만 나 이번에 회성에서의 일이 금방 끝났고 또 휴가까지 썼기에 앞으로는 매우 바쁠 거여서 그때는 시간이 안 돼. 정말로 예은이와 같이 안평으로 가게 되면 내가 전문 투어 가이드를 소개해 줄 거니까 예은이와 같이 놀러 다녀.”비록 나상준이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했지만, 차우미는 아예 지금 미
차우미는 라운지 안으로 들어가면서 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그녀는 나상준이 통화하는 것을 보고 시선을 거두고 원래 앉았던 1인 소파에 앉았다.나상준은 시종일관 차분한 차우미의 표정을 보다가 별다른 생각없이 말했다.“그래, 큰아빠 시간이 될 때 전화할게.”“네, 알겠어요. 큰아빠 전화 기다릴게요.”나예은은 나상준과 차우미와 함께 놀 수만 있다면 충분히 기다릴 수 있었기에 나상준의 말을 듣고 엄청나게 기뻐했다.차우미는 나상준이 누구와 통화하는지 몰랐지만 업무상의 일이라고 생각할 뿐 나예은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그러다가 나상준의 입에서 큰아빠라는 세 글자를 듣는 순간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고 나상준을 바라봤다.나상준이 그녀를 보며 말했다.“큰엄마도 같이 있는데 얘기할래?”나예은은 커다란 두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큰엄마와 같이 계세요?”사실 예전에 나예은은 나상준이 아닌 차우미에게만 계속 전화했었다. 그런데 이틀 동안 같이 지낸 보람으로 처음 차우미가 아닌 나상준에게 전화한 것이다.때마침 나상준이 차우미와 함께 있다고 하니 나예은 순식간에 행복과 기쁨이 가득했다.서혜지가 나예은의 옆에 있다가 그 말을 듣고 예상치 못한 일에 눈썹을 치켜올렸다.‘두 사람이 같이 있다고?’나상준은 휴대폰에서 들려오는 격동의 앳된 목소리를 듣고 차우미의 의아한 눈빛을 보며 말했다.“응, 같이 있어. 전화 바꿔줄게.”“네.”나상준이 휴대폰을 차우미에게 건넸는데, 그녀가 아직 놀라 있을 때 휴대폰이 눈앞에 왔다.차우미는 잠깐 망설이다가 휴대폰을 받아서 귀에 가져다 댔다.휴대폰은 나상준의 체온이 담겨 있는 듯 따뜻했다.“예은아.”“큰엄마, 깜짝 놀랐죠. 예은이 이번에는 큰아빠에게 전화했어요. 하하하...”차우미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나예은은 어찌나 기뻤는지 호탕하게 웃었다.나예은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예은도 같이 웃었다.“그래, 큰엄마도 깜짝 놀랐어.”나예은과의 약속한 일을 이미 완성했기 때문에 차우미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고 있었는
차우미는 잠깐 멈칫하더니 휴대폰을 꺼내서 확인했다.휴대폰 화면에 신규 메시지가 뜨자 차우미는 하선주인 줄 알았는데 발신자는 온이샘이었다.그녀는 메시지를 클릭했다.[우미야, 탑승하면 나에게 메시지 보내줄 수 있어?]차우미는 메시지를 확인하고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응, 알았어.]그러자 온이샘으로부터 또 잽싸게 미소를 짓고 있는 이모티콘이 왔다.차우미는 이모티콘을 보는 순간 조금 전에 대기실에서 온이샘이 휴대폰으로 좌석 업그레이드를 할 때의 모습이 떠올랐다.그녀는 손가락을 움직여 달력을 한참 동안 확인하다가 휴대폰을 가방에 넣고 라운지 안으로 들어갔다.어떤 일은 애매모호하면 안 되고 정확해야 했기에 안평으로 돌아가면 반드시 시간을 내서 온이샘과 만나 확실하게 얘기할 생각이었다.라운지 휴식 구에서 나상준은 소파에 몸을 기대고 앉아서 줄곧 라운지 밖의 복도를 바라보며 손에는 휴대폰을 들고 통화를 했다.“아주버님, 지금 바빠요?”서혜지의 목소리는 예의를 갖추었지만 조금은 긴장하고 조심스러웠다.나상준이 말했다.“무슨 일이에요?”그는 바쁜가 하는 물음에는 답변하지 않고 무슨 일인지부터 물었다. 아마도 상황에 따라서 다를 모양이다.그러자 서혜지가 서둘러 말했다.“다른 건 아니고요. 지금 예은이를 픽업했는데 예은이가 아주버님과 할 얘기가 있대요. 혹시 바쁘신데 폐를 끼치는 거 아닐까 해서 문의드리는 거예요.”나상준이 말했다.“안 바빠요.”서혜지는 예상했던 대답인 듯 즉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알았어요. 그럼, 예은이 바꿀게요.”“그래요.”나예은은 아주 조용하게 베이비시트에 앉아 있었는데 커다란 두 눈을 굴리면서 서혜지를 바라보며 나상준과 통화시켜 주기를 기다렸다.나예은은 나상준과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서혜지를 만나자마자 자신의 요구를 말했다.서혜지가 자기를 바꿔주겠다는 말을 듣자마자 나예은은 기쁜 나머지 두 눈을 깜빡거리며 서혜지 쪽으로 자그마한 손을 내밀어 휴대폰을 받으려고 했다.서혜지는 조급해하는 나예은의 표정에 미소를 지
하선주는 이제 차우미 옆자리에는 온이샘이여야 한다고 생각했다.게다가 온이샘은 하선주에게 특히 좋은 인상을 남겨서 온이샘에 대해 매우 만족하고 좋아했다.차우미는 워낙 하선주에게 숨길 생각이 없었기에 하선주가 눈치채자, 그냥 자연스럽게 대답하려고 했다.그런데 하선주가 갑자기 온이샘을 얘기할 줄은 몰랐다.차우미가 웃으며 말했다.“선배가 아니라 상준 씨랑 같이 가.”“나상준?”하선주의 미간이 순식간에 찌푸려졌고 얼굴도 일그러졌다. 마치 눈 깜짝할 사이에 맑은 하늘에 먹장구름이 낀 것 같았다.“나상준은 왜 너와 같이 있어? 둘이 뭘 하는 거야? 그런데 왜 안평으로 오는 거야? 나씨 가문에 무슨 일 있어?”하선주의 불만이 섞인 말투와 함께 질문들이 쏟아졌다.나상준과 온이샘에 대한 하선주의 태도는 하늘과 땅이었다.이런 하선주의 반응을 차우미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할아버지와 할머니 뵈러 오는 거야.”“...”표정이 굳어진 하선주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차우미의 말 한 마디에 무슨 일인지 알아챘다.분명 나씨 가문의 이혜정이 나상준에게 직접 가서 사과하라고 명령한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나씨 가문 이혜정의 일 처리는 오늘날 젊은이들은 비교할 수도 없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선주는 마음이 불쾌했다.차우미는 하선주가 비록 말하지 않지만 듣고 있다는 걸 알고 계속해서 말했다.“엄마, 나씨 가문과 차씨 가문의 관계 때문이라도 상준 씨가 할아버지, 할머니를 뵈러 오는 건 정상적인 일이야. 그러니 화내지 마.”“내가 왜 화를 내? 그리고 화를 낼 필요도 없어. 그냥 안 보면 되지.”하선주가 불쾌함을 직설적으로 얘기하는 걸 듣고 차우미는 웃었다.“엄마, 이제 다 지난 일이야. 우리 이혼한 지도 벌써 몇 달 지났잖아. 상준 씨도 나도 이제 모두 각자의 삶이 있으니 두 가문은 예전대로 서로 왕래하면서 지내면 돼.”차우미의 아무렇지 않아하는 말을 듣고 있던 하선주는 순간 바늘에 찔린 것처럼 가슴이 아팠다.어렸을 때부터 말도 잘
“짐은 저 주세요.”나상준의 아무런 감정도, 온도도 없는 목소리가 두 사람의 귓가에 들렸는데 봄날 같은 분위기가 순식간에 깨졌다.온이샘은 시선을 살짝 돌려 나상준을 보았는데 나상준도 아무런 흔들림 없는 깊은 눈동자 온이샘을 보고 있었다.나상준은 지금 아주 담담하게 온이샘이 반드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차우미의 캐리어는 이제 나상준에게 넘겨줘야 했기에 온이샘은 캐리어를 잡았던 손에 힘을 꽉 주었다가 바로 풀고 나상준에게 넘겼다.차우미가 말했다.“내가 하면 돼.”그녀가 말하면서 손을 내밀었지만 이미 늦었다.차우미가 손을 뻗었을 때 골격이 분명한 손이 이미 캐리어를 잡고 자기 앞으로 가져갔다.나상준이 차우미를 바라보며 말했다.“가자.”차우미는 허공에 있는 손을 거두며 캐리어를 잡은 나상준의 손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온이샘을 향해 말했다.“선배, 우리 안평에서 봐.”온이샘도 부드러운 미소로 대답했다.“그래, 안평에서 보자.”그리고 차우미는 곧바로 자리를 떠났다.온이샘은 그 자리에 서서 가냘픈 몸매가 자신의 시야에서 멀어지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옆에서 함께 걷고 있는 키 크고 분위기가 차가운 남자도 보이자,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차우미가 다른 남자와 함께 가는 모습을 보니 마치 다른 남자와 함께 그를 멀리 떠나는 것처럼 마음이 아팠다.온이샘은 주먹을 꽉 움켜쥐고 억지로 이성을 회복했다.그는 온평에 가서 차우미를 만나면 마음속의 말을 모두 할 건데 그녀만 좋다면 온이샘은 두려운 것이 없었다.차우미와 나상준은 대기실을 떠나 VIP 라운지로 갔는데 아직 이른 시간이어서 서둘러 비행기를 탈 필요가 없었다.때문에 두 사람은 라운지의 휴식 구에 가서 앉았다.그러자 직원이 차와 디저트를 가져왔고 차우미는 휴대폰을 꺼내서 시간을 확인하더니 소파에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는 나상준을 보며 말했다.“나가서 전화하고 올게.”나상준은 여전히 간단하게 알았다고 했다.차우미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들
하얀 셔츠, 연한 캐주얼 바지, 뼛속에서부터 뿜어 나오는 좋은 가정 교양과 준수하고 우아한 얼굴은 대기실의 밝은 조명을 받아 더욱더 환하고 사람들의 주의를 끌었다.나상준은 눈동자를 살짝 움직이더니 서두르지 않고 평온한 속도로 걸어갔다.“다 됐어?”모두가 한곳에 모여 발걸음을 멈추자마자 온이샘이 먼저 말했다.차우미는 고개를 끄덕이고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응. 선배 이제 캐리어는 나 줘.”온이샘이 뭔지 몰라 흠칫하더니 말했다.“괜찮아. 내가 들게.”“그게 아니라, 선배, 우리 탑승구가 달라.”온이샘 얼굴에 있던 부드러운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탑승구가 다르다고?’그는 머릿속으로 차우미가 나타나던 방향을 생각하더니 그제야 자신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문제를 깨달았다.사실 온이샘은 비행기 탈 때 보통 퍼스트 클래스가 아닌 이코노미석을 타고 다녔다.가끔 중요하거나 급한 일이 있을 때만 퍼스트 클래스를 선택할 뿐 대부분의 경우에는 이코노미석이 익숙했기에 오늘도 습관적으로 티켓팅을 할 때 이코노미석을 예약한 것이다.하지만 나상준은 달랐다. 그는 지위와 신분 때문에 매번 퍼스트 클래스를 타야 했는데 따라서 차우미도 그와 함께 다닐 때마다 자연스럽게 퍼스트 클래스를 탔다.그런데 온이샘은 오늘 티켓을 예매할 때 이 부분을 놓친 것이다.온이샘은 잠깐 생각하더니 곧바로 말했다.“잠깐만, 나도 좌석 업그레이드하면 돼.”말을 마치고 그는 곧바로 휴대폰을 꺼내서 좌석 업그레이드를 시도했다.온이샘은 차우미가 이코노미석인 줄 알고 있었는데 만약 차우미가 퍼스트 클래스인 줄 알았다면 진작에 퍼스트 클래스를 샀을 것이다.조금 전에 차우미는 온이샘의 표정을 보고 있다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온이샘이 먼저 말을 하는 바람에 차우미는 하려던 말을 하지 못했다.지금 온이샘의 행동을 보며 차우미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온이샘의 선택을 간섭할 권리가 없다는 생각에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나상준은 차우미 옆
여가현과 통화를 마친 온이샘의 눈에는 미소가 가득했고 거기에는 굳은 의지도 담겨 있었다.여가현의 말을 듣고 그는 마음이 많이 안정되었다. 원래 차우미가 자신을 선택하지 않을까 봐 두려웠었는데 지금은 두려울 것이 없었다.나상준이 차우미 옆에 있다고 해도 이제 더 이상 불안해하지 않을 것이다.그 순간 가슴속으로부터 무한한 힘이 솟구쳤는데 온이샘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번졌다.차우미가 자신을 인정했다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했기 때문이다.같은 시각, 공항 로비에서 나상준은 곧장 VIP 게이트로 향했는데 차우미는 처음에 아무 생각 없이 따라 가다가 가는 방향이 VIP 게이트인 것을 보고 무언가 떠올렸다.온이샘이 구매한 항공권은 퍼스트 클래스가 아닌 이코노미석이어서 그녀에게 보낸 사진도 일반 대기실이지 VIP 라운지가 아니었다.차우미는 그 생각을 하며 발걸음을 멈추고 옆에 있는 나상준을 불렀다.“상준 씨.”나상준은 키가 크고 다리가 길어서 발 폭이 차우미보다 컸지만, 앞에서 걷지 않고 차우미의 속도를 맞춰서 나란히 걷고 있었다.차우미가 발걸음을 멈추는 것을 보고 그도 멈추고 대답했다.“응.”차우미가 말했다.“선배는 이코노미석이어서 일반 대기실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어. 조금 전에 보내온 사진에서 봤는데 일반 탑승구였어. 상준 씨는 먼저 VIP 라운지에 가 있어. 나는 선배한테 가서 캐리어를 가지고 갈게.”VIP 라운지와 일반 탑승구가 다르기에 나상준은 그녀와 같이 갈 필요가 없었다.“그럴 필요 없어.”“응?”“같이 가자.”말을 마치고 나상준은 먼저 출발했다.차우미는 깜짝 놀랐다가 서둘러 그를 쫓아가며 말했다.“같이 안 가도 돼. 먼저 라운지에 가서 휴식도 하고 일도 해. 나랑 다니며 시간 낭비하지 말고.”나상준이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었다.그러자 차우미도 따라서 발걸음을 멈추고 나상준을 바라봤다.나상준은 차우미를 바라보며 말했다.“나도 같이 가면 안 돼?”차우미는 당황하며 말했다.“아니, 그런 건 아닌데. 나는 그냥...”“
온이샘은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알았어.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서흔이에게 전화해.”“그래.”그들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여가현이 전화를 끊고 휴대폰을 강서흔에게 건네자, 강서흔이 곧바로 물었다.“어때? 잘 된 거야?”여가현은 강서흔의 금방이라도 신랑이 되고 싶어 하는 간절한 표정을 보고 물 한 컵을 가져다 마시며 말했다.“뭐가 돼?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강서흔의 흥분했던 얼굴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왜 아직이야? 너무 느린 거 아니야? 나였다면 진작에...”말이 끝나기 전에 강서흔은 즉시 멈추고 조심스럽게 여가현을 바라보았다.여가현은 물컵을 내려놓고 그를 바라보며 헛기침을 두 번 하고 물었다.“진작에 뭐?”여가현의 헛기침 소리에 강서흔은 순간 가슴이 섬뜩했는데 그녀의 웃는 듯 웃지 않는 듯한 표정은 너무 무서웠다.강서흔은 무의식적으로 장난이라는 듯 웃으며 주제를 바꾸려고 했지만 여가현이 꼼짝하지 않고 자기를 바라보는 눈빛에 즉시 생각을 접고 몸을 움츠리며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속삭였다.“나였다면 진작에 덮쳤을 거라고. 나는 네가 동의를 하든 안 하든 무조건 너와 함께할 거야.”여가현은 웃었다.“우미가 나인 줄 알아? 미리 말하는데 우미는 절대 나처럼 양보하고 굽히지 않을 거야. 나상준 씨 어머니도 비록 좋은 사이는 아니었지만 우미를 괴롭히지는 못했어. 우미와 나상준의 이혼도 나상준 씨 어머니와는 아무 관련이 없이 오로지 우미의 뜻이었어. 우미가 한 번 결정하면 아무도 말릴 수 없는 거야. 마찬가지로 우미는 한 번 이혼한 사람을 절대 다시 돌아보지 않는다는 거야. 때문에 절대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에게 어울리는 사람을 선택할 거야.”강서흔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두 사람이 다시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여가현의 기분은 늘 변덕스러웠다.예를 들어 조금 전에 온이샘과 통화할 때는 태도가 좋더니 지금 강서흔을 대하는 태도는 확연히 달랐다.사실 여가현의 마음에 여전히 불만이 있었는데 수년간 쌓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