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화군주 다들 나갔습니다. 이제 일어나시지요.”원경릉이 말했다.원경릉의 말에 반응이라도 하는 듯 그녀의 속눈썹을 파르르 떨렸지만 그녀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잠시 후 정화군주의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흘렀다. 눈을 꼭 감은 정화군주는 입술을 씰룩거리며 흐르는 눈물을 참았다. “이제 괜찮습니다. 아무도 당신을 해칠 수 없습니다. 이제 다 끝났습니다.”원경릉이 말했다. 누워있는 그녀는 몸이 들썩거릴 정도로 흐느꼈지만 눈을 뜨지 않았다. 원경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그녀의 옆에 앉아 눈물을 닦아주었다. 원경릉은 그녀가 탈진할까 걱정돼 수분을 보충할 수 있도록 수액을 놓아주고는 편하게 잠들 수 있게 했다. 수액을 다 놓은 원경릉은 밖으로 나와 한 사람만 방 안에 들어가고, 나머지는 밖에 있으라고 당부했다. *구사는 위왕을 왕부로 데리고 갔고, 정후부의 하인들은 그가 어지럽힌 정원을 치우고 있었다. 위왕이 정원에 있는 회화나무에 장검으로 상처를 내고, 꽃들도 모두 잘라버렸기에 정원은 엉망진창이 되었다. 원래대로라면 매화꽃이 예뻤을 정원에는 아무렇게 잘린 가지들과 아직 피지도 못한 꽃봉오리가 여기저기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희상궁은 원경릉을 부축하며 “왕비, 안색이 좋지 않습니다. 눈 좀 붙이시지요.”라고 말했다.원경릉은 고개를 저으며 “아닙니다. 왕부에 가야겠습니다. 왕야께서 또 열이 날 수도 있지 않습니까.”라고 말했다.사식이는 이 상황에서도 자신의 몸보다는 왕야를 챙기는 원경릉이 안타까웠다. “원누이, 어젯밤 한숨도 못 잤잖아요. 제가 왕부로 가서 왕야가 어떤지 살피겠습니다. 왕야께서 또 열이 나신다면 제가 이곳으로 오면 되지 않습니까?”원경릉은 무거운 몸을 이끌며 “아니야. 쉬더라도 왕부에 가서 쉬어야지. 여기에는 정화군주께서 쉬고 계시니까 방해하면 안 돼.”라고 말했다. 희상궁과 사식이는 원경릉의 완강한 태도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원경릉은 왕부로 돌아가는 마차에서 잠시 눈을 붙였다. 왕부에 도착하자 사식이
열이 내리자 우문호는 깊은 잠에 빠졌다. 단잠에 빠진 그의 코 고는 소리는 마치 피리처럼 가늘고 길게 울렸다. 원경릉은 그의 추한 모습을 감상할 겨를도 없이 비몽사몽한 얼굴로 침상에 올라가 누웠다. 잠시 후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은 원경릉은 침상에서 일어나 들어오라고 했다.“왕비, 현비마마께서 오셨습니다.”만아가 말했다.원경릉은 현비마마라는 말에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현비마마라면 원주 원경릉을 싫어하는 시어머니?’그녀는 조용히 침상으로 나와 조심스럽게 우문호에게 이불을 덮어주며 그의 볼에 입을 맞추었다. “휙—” 순간 우문호의 손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조용히 해. 나 자고 있잖아.” 우문호가 말했다.“참나, 알겠어!” 원경릉은 그의 얼굴을 톡톡 치며 말했다.그녀는 만아에게 자신의 옷매무새를 다듬어달라고 하고는 입가에 묻은 침자국을 닦았다. 현비마마는 출궁 할 때마다 화려하게 겉치레를 하기로 유명했다. 원경릉이 급히 밖으로 나오자 태감들과 궁녀들이 줄을 지어 서있었고, 원경릉이 나오는 것을 보고 하나같이 예의를 갖춰 인사를 했다. 원경릉은 고개를 숙여 인사를 받고는 치마를 잡고 다급히 본관으로 향했다. “현비마마께서는 지금 천자의 수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사식이가 원경릉을 붙잡았다. “본관이 아니라 천자의 수레에 계신다고?”원경릉은 현비의 허세에 기함을 토했다. 왕부에 오면서 궁인들과 태감을 대동하는 것도 모자라 천자의 수레를 타고 오다니.원경릉은 속으로 현비의 허세를 욕했다. ‘역시 시어머니가 불편하고 싫은 건 현대나 지금이나 똑같구나…… 하기사 20여 년 동안 공을 들여 키운 아들을 맘에 들지도 않는 여인에게 장가 보냈으니 시어머니인 현비도 내가 마음에 들지는 않겠어……’그녀는 과거나 현대나 고부관계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했다. 춥고 바람도 거센 겨울, 12명의 금군이 현비마마를 태운 수레 앞에 두 줄로 서있었다.현비마마는 천자의 수레에 앉아있었고, 상궁이 초왕비가 나왔다고 하자 ‘응’하
“치료했습니다. 만약 치료하지 않았다면 아직도 열이 났을 겁니다.” 원경릉이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지? 계속 열이나라고 저주를 하는 것이냐?”현비는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려 원경릉을 보며 엄하게 말했다.현비가 갑자기 멈추자 원경릉은 깜짝 놀라 넘어질 뻔했지만 그녀는 가까스로 중심을 잡고 바로 섰다.“저주라니요! 제가 감히……”“그럼 그게 무슨 뜻이냐? 네가 임신한 몸으로 네 남편을 치료한 걸 공으로 인정해달라는 거야?”현비가 몰아세우자 원경릉은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희상궁을 보았다. 희상궁은 고개를 저으며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표정으로 원경릉을 보았다.희상궁은 웃으며 현비를 부축하며 “마마님, 못 본 사이에 전보다 훨씬 젊어지신 것 같으시네요! 살갗이 희고 투명하셔서 쇤네가 잘 못 본 줄 알았습니다! 무슨 단약이라도 달여드십니까? 어쩜 이리 고우십니까?”라고 말했다.현비는 자신이 젊고 예쁘다는 말에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참, 희상궁도…… 본궁이 그렇게 젊어 보입니까? 어휴, 세월이 빨라요. 제가 벌써 마흔이라니까요. 단약은 무슨 하나도 챙겨 먹는 거 없는데, 아 참! 예전에 희상궁이 본궁에게 줬던 백풍단, 그건 참 좋더라고요? 그건 먹으면 눈가가 환해지는 기분이 들어요. 여기 봐봐요 희상궁이 보기에는 주름이 옅어진 것 같아요?”현비마마는 올해로 마흔 두 살이다. 희상궁은 현비의 얼굴을 이리저리 보았다. “어머! 세상에 피부가 아주 투명하십니다! 주름은커녕 진주같이 고와서 미끄러질 것 같아요!”현비는 희상궁의 손을 잡고 한숨을 내쉬었다. “황실에서는 입에 발린 소리 하는 사람이 많은데, 희상궁은 그렇지 않아서 참 좋아요. 항상 진실을 말해주니까요.”“마마님 쇤네는 황실에서 반평생을 살았습니다. 거짓과 위선이 얼마나 악한 것인지 잘 압니다.” 희상궁은 웃으며 그녀를 부축하며 안으로 향했다.원경릉은 왜 시어머니인 현비가 이렇게 예민하게 구는지 알고 있었다. 다섯째가 다친 것 말고도 호 아가씨(扈小姐)때문일 것이다. 시어머
현비도 호씨 집안 여식에 대해 들은 바가 있었다. 항간에 도는 소문에도 호씨 아가씨가 진북의 도적 소굴에서 자랐기에 성격이 거칠고 제멋대로라고 했다. 그래도 현비는 다섯째가 계집 하나 제대로 다루지 못할까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호씨 집안 여식의 사람 됨됨이가 별로라고 해도 다섯째가 태자가 될 수 있도록 호씨 집안에서 힘을 써줄 수 있지 않는가. 몰락한 정후부보다는 든든한 호씨 집안을 처가로 두는 게 우문호가 태자가 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자, 입지를 다질 수 있는 기회다.희상궁은 원경릉이 난처해질까 봐 차를 가지고 들어오면서 “현비마마! 여인에게 특히 좋은 차를 가져왔습니다. 안에는 구기자와 계피 대추 등 몸에 좋은 것은 다 들어있습니다. 마시고 나면 피로가 풀리고 혈색이 좋아질 겁니다. 한 번 드셔보세요.”라고 말했다.현비는 희상궁이 주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달지도 않고 맛이 딱 좋네요. 역시 희상궁의 손맛은 알아줘야 한다니까요? 희상궁, 시간이 있을 때마다 왕비를 설득 좀 해봐요. 여인의 미덕 중에 하나가 나눔, 배려 아닙니까? 질투심이 강한 여인을 누가 좋아하겠습니까?”“마마님 왕비께서는 통이 크십니다! 왕비께서 임신을 한 이후로 계속해서 왕야께 후궁을 맞이하라고 하셨는데, 왕야가 전부 거절하신 겁니다.”희상궁이 말했다.희상궁의 말을 듣고 현비는 다섯째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현비는 슬쩍 원경릉의 배를 쳐다보았다. ‘임신을 한 걸 보니 영 몹쓸 물건은 아니군……’희상궁은 현비의 표정이 유해진 것을 보고 한숨을 돌리고 물러났다. 현비는 이왕 출궁 한 거 원경릉에게 훈계를 몇 마디 더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시어머니로서 현모양처가 되는 방법부터 이상적인 며느리가 되는 법까지 원경릉의 귀에 못이 박히도록 얘기했다.현비가 열변을 토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드르렁- 드르렁-”현비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원씨, 본궁이 지금 얘기하는 거 안 보입니까? 어떻게 본궁이 얘기를 하고 있는데 코까지 골면서 잘
조어의가 원경릉을 보고 피로누적으로 인해서 잠을 자는 것이라고 하자 현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현비는 부중의 사람들에게 왕비를 잘 돌보라고 분부하고 수레에 올라탔다. 현비가 떠난 왕부에서 원경릉은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그녀는 만아와 사식이의 부축으로 침상으로 옮겨져 누가 업고 가도 모를 정도로 잠에 들었다. 현비는 궁으로 돌아가는 수레 안에서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그녀는 출궁을 하면서 다섯째를 설득해 호씨 집안과 혼인을 하게끔 하려고 했다. 하지만 예상밖의 상황에 이렇게 쫓겨나듯 궁으로 돌아오게 되다니. 궁으로 돌아온 현비에게 태후가 초왕비의 상태를 묻자 무사하다고 말했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와 사람을 진북후부로 보내 내일 호 아가씨를 입궁하라고 분부했다.현비는 호 아가씨의 인품이 어떤지 두 눈으로 확인해보고 싶었다. 만약 그녀가 소문보다 성격이 견딜 수 있는 정도라면 빠른 시일 내 다섯째와 혼인을 시킬 계획을 세워야 한다. 시간이 갈수록 현비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내가 살아있을 때, 내 아들 문호를 꼭 태자로 만들어야 해.’다섯째는 공주부 사건으로 근 1년 동안 황실에서 찬밥 신세를 면치 못했다. 지금 왕비의 임신과 동시에 경조부윤으로 파견되어 승승장구하나 싶었더니 또 곤장을 맞고 그 모양 그 꼴이 되다니. 현비는 바보 같은 다섯째만 생각하면 한숨이 나오고 눈앞이 캄캄했다. 그녀는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아들의 미래를 위해서 뭐라도 해야 했다. *다음날, 호 아가씨가 입궁했다. 호 아가씨는 빨간 단색 치마를 입고 검은 옷깃의 저고리에 털 망토를 걸치고 있었다. 쪽진 머리에는 적산호 비녀가 꽂혀있었으며 검은 피부에 짙은 눈썹, 반짝이는 눈동자 그리고 곧게 뻗은 콧대. 전체적으로 그녀의 모습엔 활기가 가득했다. ‘소문대로 대범하고 자유분방해 보이는군.’그녀는 무릎을 꿇고 현비 앞에 앉았다. “신녀가 현비마마를 뵙습니다. 제 이름은 호강연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현비마마 만수무강하시옵소
현비는 호강연의 말을 듣고 얼굴에 미소가 만개했다. 현비가 잠깐 눈을 감자 눈앞에 우문호가 태자로 책봉되는 순간이 그려졌다. 현비는 호강연의 손을 꼭 잡고 눈을 가늘게 떴다. “호 아가씨도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까? 정말 다행입니다!”호강연은 활짝 웃으며 “예, 그 말씀을 줄곧 기다려왔습니다!”라고 말했다.현비는 그 말을 듣고 크게 기뻐했다. “오늘 본궁이 사람을 시켜 제비집을 준비해 두었는데, 마시고 계세요. 본궁이 사람을 시켜 황상을 모셔오겠습니다.”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현비는 방금 호강연과 나눈 대화를 황제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호강연은 황상이라는 말에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현비를 보았다.“예…… 신녀 다 마셨습니다. 제비집은 진북에서 아주 귀한 겁니다. 이렇게 귀한 것을 준비해주시다니 감사합니다.”현비는 당황한 표정의 호강연을 보고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녀가 세간에서 떠드는 것과는 전혀 다르게 겸손하고 예의도 바르다고 생각했다. 원경릉은 다섯째가 호 아가씨의 성격 때문에 혼인을 거절했다고 했는데, 그건 그가 호강연을 만나보지 못했기 때문이다.‘생각보다 얌전하고 성격도 소탈하니 좋은데…… 다섯째가 오해를 하고 있구나.’*명원제는 요 며칠 기분이 좋았다. 그 이유는 나귀빈 사건이 해결된 후 악몽을 꾸지 않게 되었고, 또 하나는 진북후측에서 트집을 잡지 않아 평온한 매일을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목여태감이 출궁해 초왕비를 보고 와서는 배가 남산만 하니 장군을 낳을 것 같다고 전하자 그 기쁨이 말로 다 할 수 없었다.하지만 명원제 마음 한구석에 찝찝함이 남아있었는데, 그 이유는 셋째 때문이었다. 구사가 말하길 셋째가 정후부에서 소란을 피웠다는데, 그 말을 듣고 명원제는 낯이 뜨거워져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자식 농사가 제일 어렵다더니…… 정세보다 자식 관리가 더 어렵구나.’명원제가 궁궐화원에서 앙상해진 가시나무를 보며 찬바람을 맞고 있었다. 때마침 현비가 보낸 사람이 와서 호 아가씨
다섯째도 후궁을 들여야 할 때가 됐다. 명원제는 호강연에게 거침없이 궁금한 것들을 질문했고, 그때마다 호강연은 꾸밈없이 진솔하게 대답을 했다. 황제 앞에서 떨지 않고 당차게 대답하는 호강연의 모습이 명원제 마음에 들었다. 심지어 호강연의 모든 조건도 원경릉에 비해 떨어지지도 않는다. 명원제가 현비와 이야기를 나누자 호강연은 멀찌감치 떨어져 앉아 숨죽여 기다렸다. 호강연은 본래 원하는 것은 다 가져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기에 쟁취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번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혼사란 자신의 의지대로 되지 않는 일이기에 자신만만한 호강연도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전에 호강연의 아버지가 괜찮은 신랑감이 있다고 중매를 서겠다고 했을 때 호강연은 죽어도 싫다며 거절했다. 그녀는 줄곧 우문호를 기다렸다. 진북에서 경중으로 돌아왔으니 주사위는 던져졌다. 호강연은 원하는 것을 갖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명원제는 현비와 이야기를 한 후 마음이 통한 듯 방글방글 웃었다. 호탕한 웃음소리에 호강연이 힐끗 명원제를 보다가 놀라서 고개를 숙였다. 명원제는 그런 호강연이 매우 마음에 들었다. ‘당차고 똑 부러지는 성격에 생각보다 겸손하기까지 다섯째의 배필로 딱이다. 앞으로 황실에 법도와 규율을 잘 가르친다면 문제 될 것은 없겠어.’호강연은 명원제와 현비에게 인사를 하고 출궁 했고, 명원제는 그 길로 사람을 시켜 진북후를 입궁시켰다. 딸의 혼사를 걱정하던 진북후는 명원제가 혼사에 관련해 긴히 할 얘기가 있다고 하자 만사를 제쳐두고 궁으로 들어왔다. 진북후는 명원제가 자신을 급히 찾는다는 소리를 듣고 명원제가 호강연을 친왕의 부인으로 들일 것이라고 예상했다. ‘설마 회왕은 아니겠지. 회왕은 전에 병을 앓았기에…… 어떤 친왕의 부인으로 점지하셨을까.’진북후는 자신의 딸을 후궁으로 들일 것이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진북후의 마음에 가장 드는 친왕은 우문호였다. 만약 우문호를 사위로 맞이한다면 딸이 후궁으로 들어가도 상관없다고
진북후의 말을 듣고 명원제는 기분이 언짢았다. ‘아무리 진북 사람 성격이 호탕하고 직설적이라고 해도 너무 속이 뻔히 보이지 않는가?’진북후는 진북으로 가기 전까지만 해도 그저 장군에 불과했다. 진북으로 간 몇 년 동안 그가 많은 공적을 세운 것은 사실이지만 그로 인해 그의 가족들에게 물질적으로 많은 것을 제공했으며 풍요롭게 살 수 있게끔 해주었다. 그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큰 야망을 품다니.명원제는 여러 신하를 다루어보았기에 진북후의 페이스에 말리지 않기 위해 고개를 저으며 그를 보았다. “누구나 실수를 하기 마련이지. 짐이 초왕비를 친정으로 보낸 이유는 반성을 하라고 보낸 것이다.”“그렇습니까? 황상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초왕부의 일이니 저도 더는 얘기하지 않겠습니다. 황상께서 강연이와 이어주려는 친왕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황상께서도 강연이를 보셔서 아시겠지만 강연이는 고집이 세서 자신이 원하는 것은 꼭 차지해야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명원제는 찻잔을 들어 목을 축이며 “알지. 당차고 똑 부러지는 아이더구나. 그래, 결혼은 큰일이니, 후작이 걱정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래서 짐이 이렇게 후작의 생각을 먼저 들어보려고 이렇게 부른 것이 아니냐. 아직 결정된 것은 없다만, 현비가 자네 집 여식을 불러 담화를 했다고 하네. 두 사람이 말이 잘 통하는 것을 보니 가족의 연이 있는 것 같아서 말이네.”라고 말했다. “신도 딸아이의 말을 전해 들었습니다. 강연이도 현비마마를 존경하고 있어 현비마마의 진정한 며느리가 되고 싶다고 했습니다.”“그럼 진정한 며느리지 가짜 며느리도 있는가?” 명원제는 일부러 모르는 체하며 진북후에게 되물었다. “황상, 신에게는 딸 하나가 전부입니다. 그래서 뭐든 최고로 해주고 싶습니다. 만약 강연이가 초왕과 혼인을 하고 싶다고 하면 초왕의 정비로 보내고 싶습니다.”진북후가 과감 없이 말했다.명원제는 진북후의 붉어진 얼굴을 보고 화가 났지만, 이 또한 진북후의 모습이거니 하고 화를 참았다.명원제는 후회스러운 마음을
위왕이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혹시 복수하려는 것이냐?”“복수가 아니라, 그저 사실을 말할 뿐입니다.”안왕은 그에게 책임을 떠넘겨 혼자 감당하게 한 위왕을 보며 만족스러운 얼굴로 대답했다.위왕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어찌 다섯째에게 설명할지 생각해 보거라. 보책은 아직 네 손안에 있잖냐.”안왕은 여전히 두꺼운 보책을 손에 쥐고 있었다. 잃어버릴 수 없는 귀한 것이지만, 가만히 들고 있기도 거슬렸다.이렇게 골치 아픈 상황이 생길 줄 알았다면 차라리 꾀병을 부리고 위왕 혼자 오게 한 것이 더 나았을 텐데 말이다. 그렇게 각자 방으로 돌아가 목욕을 한 후, 막 침대에 누웠을 때 택란이 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두 사람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방문을 열고, 바로 택란을 만나러 나갔다.안왕은 보책을 가지려 했으나, 택란에게 넘겨받으면 곧 금나라 황후임을 인정하는 셈이 되므로, 절대 넘길 수 없다고 생각했다.적어도 어린 황제는 아직 그들의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다.택란은 두 분 큰아버지에게 인사를 드린 후 자리에 앉아 말했다.“큰아버지, 오늘 일은 아바마마께 절대 말하지 마십시오.”안왕도 원하던 바였기에 다급히 답했다.“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먼저 네 아버지한테 숨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대체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른다.”“예. 저도 그것이 걱정입니다.”택란의 가장 큰 걱정은 바로 아버지였다.“어린 황제도 참, 어린 시절의 약속마저 진지하게 받아들이다니… 설령 너와 혼사를 약속했다 해도, 네가 승낙하지 않을 것 아니더냐.”안왕이 말하자 택란은 잠시 머뭇거리며 말했다.“그때 이미 동의했었습니다.”다만 그때는 그저 그를 달래, 그의 상처가 심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 뿐이었다.“승낙했다니?”안왕과 위왕은 서로 놀란 표정으로 시선을 마주했다. 그러면 이 일은 전적으로 어린 황제의 탓도 아니다.“하지만 넌 그때 겨우 여덟, 아홉 살이었다. 그저 아이들의 장난일 뿐일 테니, 동의했다고 해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아도 된다.”위왕이 재빨
“폐하, 공주께서 폐하가 드리신 선물을 받지 않으신 것입니까?”언제 올라온 건지, 진이는 어느새 그의 곁에 서 있었다.“응.”경천은 뒤돌아 상자와 두 개의 옥패를 바라보았다. 그가 오랜 시간 동안 배우며 수많은 옥을 망친 끝에 겨우 지금과 같은 모습을 조각해 낸 것이었다.하지만 그녀는 받지 않았다.“속상해하지 마십시오. 공주께서 아직 어리셔서 폐하의 노고를 다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으니깐요.”진이가 위로하자 경천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아니, 그녀는 아주 잘 알고 있어서 받지 않는 것이다.”진이가 잠시 멈칫했다.“너무 잘 안다니요? 그런 것 같진 않아 보였는데요.”경천은 이미 실망한 기분을 떨쳐버렸고, 대신 굳건한 의지를 다졌다.“진아, 나는 그녀의 뜻을 완전히 이해했다. 그녀는 먼저 좋은 황제가 되어주기를 바란단다. 이곳을 떠나기 전, 나에게 한 나라의 군주라 하지 않았냐? 황제로서 역할을 다하기를 바라는 것이다.”“아... 그런 것입니까!”진이는 비록 이해하지 못했지만, 황제가 속상해하지 않으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택란 일행은 궁을 나섰다. 냉명여가 그녀에게 물었다.“누나, 어찌 황제가 주신 옥패를 받지 않으시나요? 그를 싫어하시는 것입니까?”택란은 웃으며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나는 절대 그를 싫어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강단 있는 황제이고, 뛰어난 통치로 금나라가 정권 이양 위기를 넘길 수 있도록 했다. 게다가 그는 두 나라의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 두 나라에 평화를 가져왔다.”“그럼, 어찌 그의 선물을 받지 않으셨습니까?”냉명여는 다른 사람의 선의를 함부로 거절하면 안 된다고 배웠기에, 그녀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다.택란이 답했다.“그 옥패가 약속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명여야, ‘약속’이라는 말은 무거운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약 네가 그것을 이행할 능력이 없다면, 함부로 약속하지 말아야 하는 법이다.”“하지만 그도 누나와 혼사를 올리겠다고 한 말에 대한 약속을 지키려는 것 아닙니까?”“그래. 하지만 나
경천은 그녀의 말을 반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네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다."택란이 말했다."어쩌면 5년 후에는 오늘 한 모든 일이 어리석고 충동적이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좋아하는 여인을 만나게 될 때, 그 감정이 단순한 사모인지 은혜 때문인지 알게 되실 것이고, 오늘의 행동을 후회하게 될지도 모릅니다."경천은 단 한 마디만 응한 뒤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태도가 이렇게나 분명하니, 절대 그런 말로 그녀를 얽매여 부담을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오늘 한 모든 일은 그의 결정이며 그의 태도였다. 그녀는 몰라도 되고,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긴 하지만, 그는 언제나 그녀를 기다릴 것이었다.그리고 그녀의 인정을 얻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택란은 한숨 놓은 듯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해한다니 다행입니다.""알고 있다."경천의 얼굴은 약간 창백했지만, 애써 미소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삼 태감이 책자를 가져왔다. 경천은 그것을 택란에게 건넸고, 택란은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았다. 그가 제시한 조건은 매우 공정했으며, 심지어 약도성에 이익을 양보한 정도였다.책자를 접은 후, 그녀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우리 약도성을 생각해 줘서 고맙습니다. 두 나라의 원한을 풀기 위해 애써줘서, 그리고 약도성의 백성과 조정이 화해할 수 있도록 도와줘서 고맙습니다.""알고 있었던 것이냐?"경천이 다소 놀라며 묻자, 택란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예. 알아봤습니다.""오해하지 마라. 그저 너를 위하여 한 일이 아니니, 부담 갖지 않아도 된다."그는 다소 긴장한 표정으로 해명했다.택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오해하지 마시지요. 저는 정말 부담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저를 위해 이렇게 많은 일을 해줘서 고마울 뿐입니다. 오늘도 사실 많이 감동했습니다. 다만, 저는 아직 혼사에 대해 논할 나이가 아니고, 사적인 감정보다는 다른 일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저는 아직 어리고, 앞으로 혼사를 하더라도 반드시 아바마마
손에 쥐니, 차가운 촉감이 느껴졌다. 그 옥의 차가운 느낌이 서서히 스며들자, 그녀는 기분이 좋았다.그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놀라운 표정을 지었을 때, 그는 미세하게 안도하며, 그녀가 좋아할 것이라 믿었다."직접 만든 것입니까?"택란은 마음에 든 듯 손에 꼭 쥐고 있었다. 그녀의 밝은 눈동자에는 존경이 가득했다."응!"그는 힘주어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마음에 드냐?""예. 정말 마음에 듭니다!"택란도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더욱 빛나는 미소를 지었다.그러자 그가 약간 흥분된 표정으로 물었다."그럼, 이걸 직접 나에게 선물해 줄 수 있느냐?""예?"택란이 잠시 멈칫하며, 놀라 물었다."저에게 준 선물이 아닙니까?"그가 미세하게 떨리는 손끝으로 소매 주머니에서 또 다른 옥 조각을 꺼내 손바닥에 올려놓으며, 진지하게 말했다."이건 내가 네게 직접 주고 싶은 것이다."택란은 그가 손에 든 것을 바라보았다. 옥질도 동일하게 맑고 투명했고, 손바닥의 선도 보일 정도였는데, 그 조각에는 경천의 모양이 새겨져 있었다.옥에는 미소를 짓고 있는 준수한 그의 모습이 새겨져 있었고,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 입고 있던 옷이 새겨져 있었다. 비록 색은 알 수 없었지만, 자수가 명확하게 새겨져 있었다.그녀는 기억력이 매우 좋았기에, 그때의 기억이 선명히 떠올랐다.그녀는 두 개의 옥을 손바닥에 놓았다. 그제야 그녀는 옥에 3년 전 그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그가 시간을 되돌려 3년 전 만남을 담은 것이었다!경천은 택란을 바라보며, 애써 차분함을 유지하려 했다. 하지만 심장은 거의 목구멍까지 올라올 듯했다.택란이 두 개의 옥을 서둘러 상자에 다시 넣으며 말했다."두 개 모두 오라버니께서 먼저 가지고 있으세요."경천은 눈시울을 붉히며 다시 건네받은 상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눈을 내리깔며, 애써 실망이 드리운 눈빛을 숨겼다.삼 태감이 정교한 음식을 올려놓았고, 모두 택란이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그녀는 가볍게 숨을 내쉬며, 알 수 없는 작은 흥분을 억누르고, 표정을 고쳐서 천천히 돌아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북당 백성인 란이 언니와의 혼사는 다 거짓인 겁니까?"경천의 동공이 흔들렸다."혹시... 화가 난 것이냐?""아닙니다."택란이 고개를 젓자, 밝은 빛이 그녀의 깨끗한 얼굴에 비쳤고, 고르게 정리된 이마 밑의 눈동자는 다시 차분해졌다."그런데 어찌 사람을 시켜 저를 찾고 있다고 직접 저게 소식을 전하지 않으셨습니까? 만약 편지를 보냈다면, 저도 오라버니를 만나러 왔을 것입니다. 심지어 혼사에 하객까지 청하며 일을 이렇게나 크게 벌였는데, 대체 어떻게 수습하려고 하십니까?"그는 갑자기 결단을 내린 듯, 천천히 그녀 앞에 섰다. 그러고는 그녀의 까만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위압적인 목소리로 말했다."수습할 필요 없다. 나는 이미 천하에 나의 황후가 우문택란이라고 선언했다. 나는 그녀가 어서 크기만을 기다리고 있다."택란은 순간 놀라하며, 굳어진 얼굴로 물었다. "정말… 그렇게 말씀하셨습니까?"경천은 그녀가 화가 난 것 같아, 마음이 내려앉았다. 그의 눈동자엔 어두운 그림자가 깔렸고, 이내 조심스레 물었다."응할 수... 있겠느냐?"택란은 잠시 망설였다. 기억 속의 그 소년이 지금 별빛을 받으며 그녀 곁으로 돌아왔다. 이전의 그는 그녀의 손목을 잡고, 10년 후 그가 죽지 않으면 돌아와서 그녀를 부인으로 맞겠다고 열정적으로 말했었다. 그 열정이 가득한 목소리는 지금도 그녀의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었다. 그런 과거와 현재가 얽혀 버리자, 대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저는..."경천은 그녀가 망설이는 모습을 보며,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는 그녀의 반응이 너무 당황스러워서, 얼굴을 조금 숙이며 말했다."지금 바로 대답할 필요 없다. 몇 년 후라도, 10년, 아니 20년 후라도 괜찮다.""하지만...""아니, 말하지 말거라."그는 방금까지만해도 가득찼던 자신감을 더 이상 보여줄 수 없
냉명유는 팔짱을 낀 채 검을 가슴 앞으로 옮기며, 차갑게 말했다."누님께서 어디로 가든, 저도 무조건 함께 갈 것입니다."“하… 하지만."삼 태감이 무척 난감해했다."그래. 함께 가자. 이 거월통천각이 정말 달을 딸 수 있는지 어디 가서 보자꾸나!"그러자 택란이 웃으며 말했다.주 아가씨는 조금 의심스러웠다. 정말 공주가 만나고 싶다면, 어찌 공주한테 이렇게 높은 계단을 오르게 할 수 있는가?그러고는 계단 위에 새겨진 난초꽃을 힐끗 보고는 순간 멈칫했다. 시선을 위로 올려보니, 계단의 각 층마다 난초꽃이 새겨져 있었다.황제가 자신의 그리움을 돌계단에 새긴 것이었다!택란도 계단을 오르며, 이 사실을 눈치챘다.게다가 각 난초의 형태와 크기는 매우 똑같았다. 처음에는 선이 조금 거칠게 느껴지긴 했지만, 후에는 점점 더 섬세하고 부드러워 보였다.이건 분명 같은 사람이 새긴 것 같았다. 그가 직접 조각한 것일까? 금나라가 이곳으로 수도를 옮긴지 아직 1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 말이다. 잠시 후, 그들은 거월통천각의 가장 높은 층에 도착했다. 다행히 냉명여는 문 앞에서 멈추고 안까지 들어가지 않았다.택란은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는데, 안에는 정교하게 조각된 네개의 용 모양 기둥이 세워져 있었고, 네 모서리에는 각각 올라가 쉴 수 있는 정자가 있었다. 정자에는 난간이 둘러져 있었으며, 가운데에는 탁자와 두 개의 의자가 놓여 있었다. 떠힌. 네 면에 걸려져 있는 대나무 커튼이 걷혀 있어, 사방에서 밖을 볼 수 있었다.그 사이에서 청색 비단옷 차림의 남자가 통천각 옆 난간에 기대어 택란을 바라보고 있었다.그는 매우 긴장한 듯 손과 발을 살짝 떨고 있었다. 별빛처럼 맑은 눈동자에 약간 숨이 가쁜 듯 보였다. 그는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그녀를 보자마자 이내 눈시울을 붉혔다.재회를 위해 최선을 다하며 가장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기에, 그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이 만남을 특별하게 만들려고 노력했다. 반짝이는 별들도 그중 하나였다.하지만
손님들이 하나둘씩 떠나자, 경천 황제는 서둘러 궁으로 돌아가 푸른 비단옷으로 갈아입었다.옅은 청색 옷자락에, 소매 끝에는 난초꽃이 수놓아져 있었고, 나머지 부분은 어두운 구름 문양으로 수놓아져 있었다. 이 옷감은 북당에서 온 것이었다."폐하, 꼬마 은인께서 궁문에 도착하셨다고 합니다."삼 태감이 와서 보고했다."좋소."그는 거울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깊은숨을 내쉬었다."택수운천으로 가겠네."택수운천은 그가 즉위한 후, 궁궐 안에 지은 새 궁전으로, 세 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궁전 옆에는 거월통천각이 있었는데, 이는 량주성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거월통천각 안에 있으면 마치 손바닥에 달을 담을 수 있을정도로 웅장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거월통천각에서 멀게는 약도성과 량주가 인접한 산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그녀가 생각날 때면, 늘 거월통천각의 가장 높은 층으로 올라가 풍경을 멀리 바라보곤 했다."진이야, 너는 누군가를 진심으로 좋아해 본 적이 있느냐?"그가 준수한 옷차림으로 난간에 기대어 먼 곳을 바라보며 물었다. 바람이 서서히 불며 청색 옷자락이 휘날리자, 옷자락의 네 끝에 박힌 고급스러운 야명주가 그의 선명하고 잘생긴 얼굴을 비추었다.그때, 저 멀리서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궁 시위를 따라, 아치과 복도를 지나 거월통천각으로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그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젊은 금군 통령 진이가 그의 모습을 보고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그런 적 없습니다.""사모의 마음을 품어보거라. 떨리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느낌만큼 좋은 것이 없다."그는 그녀를 멍하니 보며 말했다. 천천히 다가오는 탓에 그녀의 얼굴이 자세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13세 전까지의 그의 인생에는 나라와 백성들 뿐이었지만, 13세 이후 그의 인새은 온통 그녀뿐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지금 그녀가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진이는 황제의 시선을 따라, 천천히 다가오는 세 명을 보며
안왕은 보책을 받아 든 순간, 갑자기 무엇인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지만, 정확히 어떤 점이 이상한지 말로 설명할 수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모든 일이 다 이상하게 느껴졌다.보책을 펼쳐 안에 적힌 이름을 본 순간 그는 드디어 이상한 점이 무엇인지 알아차리게 되었다.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굳어진 표정으로 경천 황제를 바라보았다.경천 황제는 얼굴에 미소를 띠며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조사를 통해 드디어 그녀의 이름을 알게 되었소. 그녀의 이름은 우문택란이오. 금나라 황후의 이름은 우문택란이네. 난 반드시 그녀를 찾아낼 것이오. 만약 그녀가 황후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황후의 자리는 그녀를 위해 계속 비워둘 것이네.”위왕은 온몸에 식은땀을 흐르는 탓에 두 손을 급히 움켜잡았다. 방금 황제가 보책을 그의 손에 올리지 않아, 그가 받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정말 다섯째에게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다!안왕은 어두워진 안색으로 자리에서 물러나 이를 악물고 낮은 소리로 위왕에게 말했다.“방금까지도 어린 황제에게 어리석다고 했건만. 이렇게 계책에 능하고 이따위 교묘한 계책으로 우리 형제를 그와 같은 편에 서게 만들다니...!”위왕은 또 한 걸음 물러서며 아무런 표정 없이 말했다.“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구나. 방금 술을 두 잔 마셔 조금 취한 터라,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구나. 아니, 지금 들고 있는 그건 무엇이냐?”안왕은 단단한 그의 팔을 비틀어 버리고 싶을 정도로 분노했다.하지만 이 상황 속에서 연회는 계속되었고, 사람들의 감정은 점점 고조되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갑자기 누군가가 북당 황제의 작은 공주도 우문택란이라는 말을 꺼냈다.그 말에 다들 그 당시 금나라 황제를 구한 사람이 북당의 작은 공주가 맞는지 추측하기 시작했다.정말 북당 공주가 맞는다면, 금나라 황제도 참 배짱이 큰 것이다. 사실상 북당 황실이 금나라 황제를 구했다고 선언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만약
경천은 위왕의 말을 듣자, 마치 마음속 큰 돌덩이가 내려간 듯 후련해 보였다. 그는 그러고는 궁인에게 술을 올리게 해 술잔을 여러 차례 돌린 후, 아래를 둘러보며 말했다.“오늘 여러분께 이야기를 하나 들려드리겠소. 이 이야기를 듣고 나면 오늘 정혼연이 어찌 열리게 되었는지 알게 될 것이오.”그러자 모두가 이야기를 들려주겠다는 말에 당황을 금치 못하며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정혼연이든 혼례든, 이런 자리에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이때, 위왕이 안왕의 귀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섯째에게 서신을 보내야겠다. 금나라에서 실권을 쥐고 있는 자가 황제가 아닐 수도 있다. 진국왕이 아직 살아 있고, 이 황제가 꼭두각시일지도 모른다.”“맞소. 확실히 조금 병신같아 보이네.”안왕도 동의했다.참고로 ‘병신같다’는 표현은 안왕이 조카에게서 배운 단어였다.“이 이야기는 3년 전쯤에 있었던 일이오.”이내 경천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의 목소리에는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힘이 담겨져 있었다.“당시 금나라는 진국왕이 집권하고 있었는데, 그는 나를 대신해 금나라의 군주가 되려 했소. 이 사실은 여러분도 알고 있을 것이오. 그때 난 진국왕과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었소. 진국왕이 왕위를 빼앗으려 나를 죽이려는 음모를 꾸민다고 하기에, 나도 어쩔 수 없이 반격에 나섰는데, 그 과정에 심각한 상처를 입었소. 그때 나를 구해준 이가 바로 란이라는 소녀이오. 만약 그녀가 없었다면 난 이미 죽은 목숨이었을 것이오. 그 당시 나는 란이의 정체도 몰랐고, 그저 약도성 사람이라는 것만 알았을 뿐, 그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소. 상처를 치료하며 그녀와 며칠을 함께 보냈고, 황권을 되찾으면 그녀를 부인으로 맞이하겠다고 약속했네. 하지만 그녀가 나를 구했다는 사실이 진국왕에게 알려졌고, 진국왕이 사람을 보내 그녀의 집에 불을 질렀소. 그리고 그곳에서 시신이 발견되었소.”모두가 진국왕이 불을 질렀다는 말에 멈칫했다.금나라 황제가 이렇게 비극적인 황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