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왕의 깊어진 오해와 열이를 만나러 간 원경릉상선은 웃음을 띤 채 뒤늦게 알아차린 제왕을 보며, “그렇지 않으면, 태상황 폐하께서 어찌 한밤중에 왕비 마마를 왕야께 보내 치료하라 하셨겠습니까?”제왕은 이번엔 마치 전혀 모르는 사람인 듯 원경릉을 아주 위아래로 샅샅이 훑어봤다. 상선은 다시 원경릉에게, “태상황 폐하께서 소인에게 왕비 마마의 상처가 좀 나아지셨는지 물어보라 하셨습니다.”원경릉은 마음속으로 탄식하며, 도대체 이 늙은이는 어디까지 사람을 놀려먹어야 직성이 풀리는 거야.“태상황 폐하께서 기억해 주시니 감읍할 따름입니다. 많이 좋아졌습니다.”상선은 웃으며 “다행입니다. 태상황 폐하께서 말씀하시길, 왕비는 상처 치료 잘 하고 있으라 하셨습니다, 몸과 마음을 튼튼하게 만드셔야 한다고, 다음 번 곤장이 멀지 않았으니 강인한 신체와 정신을 길러 더욱 맹렬한 폭풍우를 견뎌야 한다고 말입니다.”원경릉은 눈을 내리 깔고 묵묵히 마음 속으로 방금 그 말을 되새겼다. 이 놈의 늙은이가 진짜 못하는 소리가 없네.제왕을 눈을 똥그랗게 뜨고 부러움과 질투의 눈빛으로 원경릉을 쳐다봤다. 제왕은 알고 있다. 태상황의 말투는 항상 이런 식이다. 총애하면 할 수록, 이렇게 얘기하곤 하셨다.이 여자는 도대체 뭐지? 그저 궁에서 며칠 병수발을 들었을 뿐인데, 어째서 할바마마께서 이렇게 신경을 쓰시느냐 말이다. 상선이 가고 제왕은 원경릉에게 “당신 도대체 할바마마에게 무슨 미약을 쓴 것인가?”원경릉은 눈을 흘깃 하더니 대꾸하지 않는다.“말 좀 하시오, 당신은 어찌 이리 무례하오?” 제왕이 화를 냈다.원경릉은 눈도 하나 꿈쩍하지 않고 바로, “제왕부로 돌아가세요!”“무슨 뜻이냐?” 제왕은 당황했다. 아니 제왕부로 돌아가는 게 무슨 상관이라고? 지금 원경릉이 예의가 없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데.“내쫓아야 정신을 차리겠어요!” 원경릉은 조금도 예의를 차리지 않고 말했다.“당….당신….무슨 배짱으로?” 제왕이 목소리가 꺾이며 성을 냈다.원경릉은 “여기는 초왕부고,
자금탕의 비밀과 깨어난 우문호원경릉은 기상궁을 보며 “어떤 불편함을 얘기하는 거지?”원경릉은 사실 지금 온 몸이 불편하다. 단지 고도의 압박감이 느껴지는 상황이라 아픔을 느낄 여유가 없지만, 앉거나 엎드릴 때 여전히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고통이 상처의 통증보다 더 심하게 느껴진다.기상궁은 고개를 흔들며, “사실, 쇤네도 구체적으로 모릅니다. 아마 탕대인이나 서 호위 대장님은 자세히 아시겠지만, 쇤네가 아는 것은 자금탕을 마시면 오장 육부를 손상시켜 처음엔 피를 토하고, 기침을 하고, 악몽을 꾼다고 했습니다. 전에 어떤 하인이 몰래 왕부의 골동품을 내다 팔았는데 죽어도 아니라고 벽에 부딪혀 자결하려는 것을, 탕대인이 그 하인에게 자금탕을 내렸는데, 하인은 자백하고 대략 보름쯤 후에 없어졌습니다.”원경릉은 겁이 나서 벌벌 떨며, “보름만에 사람이 없어졌다고? 자금탕때문에?”“탕대인 말씀에, 자금탕을 마신 후엔 반드시 1년반동안 약을 먹고 정양해야 정상으로 회복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하인은 죄질이 흉악해서 탕대인이 몸조리를 해주지 않아 죽었지요. 죽기 전에 피를 토하고, 배가 아프다고 하고, 기침을 심하게 했어요. 한번 기침을 하면 멈춰지지가 않고 죽을 때는 얼굴이 보랏빛이었지요.”기침으로 산소가 부족했나?기상궁은 망설이며, “또 하인이 죽기 전에 늘 귀신이 많이 보인다고, 자기를 저승으로 잡아가 심판을 받게 할 거라고, 두려워했어요, 그래서, 자금탕은 다른 말로 ‘황천탕’이라고도 하지요.”원경릉은 멍하니 기상궁을 보고 입가에 쓴 웃음을 띠며, 우문호, 넌 도대체 얼마나 원경릉을 미워하는 거니? 그리고 제일 기가 막힌 현실은, 원경릉이 된 그녀가, 여전히 최선을 다해 우문호를 구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만약 진짜 윤회란 것이 존재한다면, 그녀와 몸의 원래 주인 원경릉은 우문호 집안 조상 무덤이라도 파헤쳤나 보다. 그렇지 않고 서야 이런 인과응보를 받을 리 없다. 원경릉은 마음을 가다듬고 소위 귀신을 봤다는 건 분명 환각으로 뇌에 산소가
깨아난 우문호와 원경릉의 말다툼제왕이 비집고 들어와 기뻐하며, “형, 깨어난 거야?”우문호는 빙긋 웃으며 제왕에게, “네 자금단 덕을 봤구나.”제왕은 크게 손을 흔들며, “자금단이 뭐라고, 난 동생이라 전장에 나가지도 않고 원래부터 자금단이 필요 없어.”우문호의 웃고 있는 낯빛이 가라앉아 있다.잠시 후, 우문호는 “아우야, 탕양, 둘은 먼저 나가서 쉬고 있거라.”제왕은 “안 힘들어, 쉬고 왔어.”우문호는 가볍게 한숨을 쉬며 탕양을 바라봤다.탕양은 제왕을 손을 끌고, “맞아요, 제왕 전하, 소인이 몇 가지 여쭙고자 하는 일이 있습니다. 저와 함께 가시죠.”“뭔데 그래 여기서 말해.” 제왕이 어리둥절해 하는데 탕양이 끌고 나갔다.원경릉은 원래 마음이 답답했는데 이 장면을 보니 그만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우문호는 눈짓으로 “좀 와봐.”우문호의 목소리는 미약하기 그지 없고, 기력이 하나도 없어 한 쪽 발을 관에 넣고 있는 사람 같은데 정신만은 여전히 비교적 냉정하고 굳건하다.원경릉이 가까이 다가가 우문호가 말하는데 힘들지 않게 했다. “말해봐.”“할바 마마 용태는 좀 어떠셔?” 우문호가 물었다.원경릉은 우문호가 자신의 상태를 물을 줄 알았는데, 태상황을 걱정하고 있을 줄 생각도 못했다. 이 사람이 인간성은 더럽고 잔인한데다 폭력적이지만 효심 하나는 지극한 것 같다.“병이 오래되었으니, 좋아지는 것도 하루아침에 되지 않아.”“그럼 너 입궁해서 계속 병간호해라, 짐은 너 없어도 돼.” 우문호가 말했다.원경릉이 의아하게 쳐다보며, “위험한 고비가 아직 남았는데 만약 내가 가면 절반의 확률로 넌 죽어.”“짐이 생각이 있어, 이번 고비는 짐이 넘길 수 있을 것이다.” 우문호가 말했다.하하.자신을 맹신하고 있군.원경릉이 고개를 저으며, “이삼일 더 남아서 왕야 상태가 어느 정도 안정되면 입궁할께.”“가라면 좀 가!” 우문호의 차가운 표정으로, 이 여자는 정말 좋게 대할 수가 없어.“생각이 있다고.” 원경릉은 조용히 말했다.“너…
원경릉이 그에게 링거를 꽂아두고는 몸을 닦고 옷을 갈아입는데 주명취가 시녀를 데리고 뜰로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주명취는 제비 자수가 놓여 있는 오색비단 치마에 넓은 청색 소매 저고리를 입고 허리에는 저고리 색과 비슷한 띠를 두르고 있었다. 곱게 빗어 올린 머리에 달린 비녀, 새하얀 귓볼 그 아래에 작은 초롱 귀걸이.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귀걸이가 찰랑찰랑 흔들리며 청아한 소리가 났다.제왕은 그녀를 보고 부드럽게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마차를 타는 것이 힘들지 않습니까?” 주명취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두사람은 손을 마주잡고 함께 돌계단을 올랐다. 원경릉은 문 앞에서 냉담한 표정으로 주명취를 바라보았다. 주명취는 원경릉을 보자마자 슬쩍 제왕과 맞잡은 손을 풀었다. “초왕비님 안녕하십니까.”“응.” 원경릉이 대답했다. 그녀의 대답에 제왕은 화가 치밀었다. 황실에서는 예의를 지켜 왕비에게 ‘예.’라고 대답해야지. ‘응’이라니? 주명취는 손을 뻗어 제왕의 손을 꼭 쥐었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제왕은 이런 주명취가 참으로 현명하게 느껴졌다. 상대가 예의 없게 행동한다고 똑같이 행동하지 않는 모습. 이런 주명취를 보고 있으니 문득 저런 여자를 아내로 삼은 우문호가 불쌍하게 느껴졌다. “들어갑시다.” 제왕이 주명취의 손을 잡으려고 했지만, 주명취는 이미 안으로 들어간 뒤였다. 원경릉은 문가에 기대어 조용히 그들을 바라보았다. 주명취는 침상 옆으로 다가가 근심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우문호를 바라보았다. “왕야 괜찮으십니까?” 그녀의 두 눈이 그의 눈썹 뼈 상처에 머물렀다. ‘이렇게 가만히 그를 바라본적이 있던가.’주명취의 가슴이 두근거렸다.‘우문호. 왜 좀 더 용기내지 않은 것이야. 만약 당신이 태자가 될 수 있었다면, 내가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텐데’순간 그녀의 마음 속에서 슬픔이 솟구쳐 올랐다. 주명취와는 상반되게 우문호의 표정은 평온해 보였다. 그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찾아 주셔서 고맙습니다. 제왕비
주명취는 잠이 든 우문호를 한참 바라보다 제왕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 주명취는 문 앞에 서있던 원경릉을 보고는 멈춰섰다. “왕야의 심기를 건드리지말고 잘 보살펴주세요.”원경릉은 그녀를 냉담하게 바라보았다. “제왕비 쓸데없는 걱정마시지오.”원경릉의 말을 들은 제왕이 분노를 참으며 주명취를 끌어당겼다. “갑시다. 부인은 신경쓰지마세요. 황조부께서 저 사람보고 형님을 돌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알아서 하게 둡시다.”주명취는 얼빠진 사람처럼 멍하니 있다가 제왕에게 끌려 나갔다. 원경릉은 떠나는 둘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우연하게 그들의 대화를 듣게 되었다. “황조부께서 원경릉보고 우문호를 돌보라고 했습니까?”주명취가 제왕에게 물었다. 제왕은 물음에 대답하지 않은채 주명취에게 왜 자꾸 범인에 대해 물어보느냐고 물었다. 주명취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누군가 초왕을 죽이려고 했다면, 당신도 안전하지 않다는 소리잖습니까. 저는 그저 당신이 걱정돼서… 어찌 이리 제 마음을 모릅시니까.” 원경릉은 제왕 내외의 대화가 들리지 않게 문을 닫았다. 그녀는 우문호가 깰까 조심스레 들어와서는 잠이 든 그의 모습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감겨 있었지만 그가 내뱉는 숨결이 왠지 잠이 든 사람같지 않았다. ‘우문호가 제왕과 주명취가 한 말을 들었을까? 아마 침상과 문은 거리가 좀 있으니 듣지 못했겠지.’원경릉은 우문호를 지긋이 바라 보았다. ‘내가 이 사람의 얼굴을 이렇게 오랫동안 본적이 있었나? 얼굴 꼴이 많이 아니네’그 순간 우문호가 눈을 번쩍 뜨며 말했다. “뭘 그리 뚫어져라 쳐다봐!”“앗! 아무것도 아닙니다.”당황한 원경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방석을 들고 침상 옆에 엉거주춤 앉았다. 우문호는 그런 그녀를 무시한채, 무슨 생각을 하는지 공허한 눈빛으로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원경릉의 머릿 속은 온통 약상자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찼다. 원경릉은 이전까지 약상자 안에는 실험실의 약만 들어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다. 원경릉이 마음 속
서일은 씩씩거리며 걸어가는 원경릉의 뒷모습을 보며 ‘왕비가 또 무슨 일로 왕야를 화나게 한거지’라는 궁금증이 생겼다. 반면 탕양은 그 일은 나랑 상관없다는 듯 빠른 걸음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우문호의 미간에는 피가 올라와 있었고, 창백한 그의 얼굴에 빨갛게 손바닥 자국이 나있었다. “서일. 가루 좀 가져다주시지오.”탕양이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서일이 한걸음에 달려와 그의 뺨을 보았다. “감히 왕야에게 손찌검을 하다니!”탕양은 다급하게 서일에게 말했다. “일단 가루약을 가져오시라구요!”다급한 그들과는 다르게 우문호는 담담하게 “필요없어.” 라고 말했다. 그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서일은 가루약을 가져왔다. “괜찮다. 원경릉이 이미 약을 발라주었어.” 우문호는 그를 저지하며 말했다.서일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그에게 물었다. “왕야, 저 여자가 왕야에게 뺨까지 올려부쳤는데, 아직도 저 여자가 가져온 약을 쓰십니까? 저 여자가 날이 갈수록 왕야를 우습게 보고 있습니다!”우문호는 서일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탕양에게 “어서 원경릉을 찾아 약을 주거라. 아마 자금탕의 효력이 사라졌을거야. 방금 원경릉이 귀신 어쩌고… 라는 말을 하는 것을 들었어.” 라고 말했다.“그녀가 헛것이라도 본다는 말입니까? 왕비가 헛것을 보고 오해해 왕에게 손찌검 한 것 입니까?” 탕양은 염려의 목소리로 말했다. “오해는 무슨. 나는 그저 그녀가 혼잣말을 하는 것이 이상해서 정신차리라고 뺨 한대를 친것 뿐이다. 이 상처들만 회복하면, 내가 저 여자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야.”서일은 옆에서 지당하신 말씀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탕양은 그런 서일을 한심하게 바라보았다. 탕양은 원경릉을 찾으러 가기 위해 일어섰다.“서일. 여기서 왕야를 잘 돌보고 있으세요. 제가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서일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원경릉은 씩씩거리며 봉의각으로 들어갔다. 탁자를 닦던 녹주가 그녀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의아해하며 달려왔다. “왕비님. 왕야를 돌보셔야 하는거 아
단약을 먹고 나니 숨쉬기가 한결 편해졌다. 숨 쉬는게 편해지면 뇌에 산소 공급이 원활해지고 자연스레 환각이 보이지 않는 원리. 원경릉은 문득 이 약을 만든 사람이 누군지 궁금해졌다. 소월각에 도착했을 때, 탕양과 서일이 원경릉을 따라 들어갔다. 그들의 눈은 원경릉이 무슨짓을 할지도 모른다는 경계심으로 가득차있었다. 우문호는 들어오는 그녀를 담담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원경릉은 그의 미간에 고여있는 피를 보며 살짝 죄책감이 들었지만 그저 묵묵히 그의 상처를 치료할 뿐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렇게 앉아있으면 아프지 않나?” 우문호가 갑자기 원경릉에게 말을 걸었다. 적막을 깨는 그의 목소리에 원경릉은 깜짝 놀라 “전혀!” 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그녀에게 “미안해”라고 말했다.원경릉은 그의 말에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미안하다고? 그가 미안하다는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나?’그녀는 그와 화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와는 이렇게 거리를 두는 것이 안전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녀는 미안하다는 그의 말에 “됐어요. 이미 지난일이니까.”라고 흐지부지 대답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우문호의 눈에서 웃음기가 보였다. “본왕은 사과한겁니다.”원경릉은 이런 우문호의 모습이 얄미워 상처를 힘주어 눌렀다. 그러자 웃음기 있던 그의 얼굴에 한순간에 분노가 일었다. “어머 내가 모르고 건들였네. 고의는 아닙니다.” 원경릉이 말했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서일이 못참겠다는 듯 달려왔다. “왕비님! 조심 좀 하십시오!”“그럼 당신이 하던가!” 원경릉이 서일을 노려보았다. 그녀의 매서운 눈빛에 서일의 몸이 움츠러들었다. “왕비님께서 계속 하시지오……”우문호는 서일과 탕양을 번갈아 보더니 “너희들은 이제 그만 가보거라. 오늘 밤은 왕비가 내 곁을 지킬것이다.” 라고 말했다. 탕양과 서일은 우문호의 말을 듣고 물러났다. 원경릉은 침상 옆에 꿇어 앉아 그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저들이 당신 걱정을 엄청하네요.”“본왕이 그들이 먹고 자게 해주니까.”원경릉은 고개
원경릉은 의아한 표정으로 우문호를 보았다. “무슨 뜻이죠?” 우문호는 이에 대답하지 않고는 왜 기왕이 했다고 생각하느냐고 되물었다. 원경릉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직감” 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직감을 그리 믿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황실 안에 흐르는 기운과 그녀가 지금까지 쌓아온 데이터에 근거하면 기왕이 그랬을 것이라고 추측이 됐다. 우문호는 그녀를 훑어보더니 “직감은 무슨 얼어죽을. 그냥 말하거라.”라고 했다. “진짜 직감이 그렇다는 건데.”원경릉은 어이없다는 듯 그를 보았다.그녀는 우문호가 이렇게 예민하게 반응 하는 것을 보고 방금 자신이 한 말을 다시 주워담고 싶었다. 이런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봤자 그녀에게 득이 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우문호가 원경릉이 이런 생각을 오래 전부터 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오해하기 쉬웠다. 역사책을 많이 본 사람의 입장에서 지금 이 시국은 굉장히 복잡하고 예민하다. 기왕의 장자이며 전쟁에서 많은 승리를 거두었고, 이를 황제도 높게 평가하고 있다. 기왕은 이 기세를 몰아 조신(朝臣)들을 회유해 태자의 직위를 반드시 차지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현재 기왕의 세력으로는 우문호를 쉼게 제거할 수는 없다. 다른 친왕들도 태자가 되려는 야심은 갖고 있지만, 기왕이 무서워 우문호를 방패삼아 멀리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우문호는 원경릉에게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는 마음 속으로 그녀가 기왕을 의심하고 있다는 것이 신경쓰였다. 우문호는 정후부(静候府)에서 시국 논의가 적지 않게 일어나겠구나 느낄 수 있었다. 이런 생각이 들자 정후부에 대한 혐오감이 짙어졌다. 원경릉은 바닥에 엎드려 눈을 감았다. 최근에 많은 일들을 겪은 그녀는 머리가 땅에 붙기만 하면 졸음을 참을 수 없었다. 하지만 머릿속에서 여러가지 일들이 얽혀 쉽사리 잠이 들지 못했다. “추녀!” 침상 위에 우문호가 소리쳤다.저런 예의없는 사람하고는 상대하기 싫다는 듯 원경릉은 고개를 반대로 돌렸다. 고개를 돌림과 동시에 머리 위로 베개가 떨어졌다.
경천은 위왕의 말을 듣자, 마치 마음속 큰 돌덩이가 내려간 듯 후련해 보였다. 그는 그러고는 궁인에게 술을 올리게 해 술잔을 여러 차례 돌린 후, 아래를 둘러보며 말했다.“오늘 여러분께 이야기를 하나 들려드리겠소. 이 이야기를 듣고 나면 오늘 정혼연이 어찌 열리게 되었는지 알게 될 것이오.”그러자 모두가 이야기를 들려주겠다는 말에 당황을 금치 못하며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정혼연이든 혼례든, 이런 자리에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이때, 위왕이 안왕의 귀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섯째에게 서신을 보내야겠다. 금나라에서 실권을 쥐고 있는 자가 황제가 아닐 수도 있다. 진국왕이 아직 살아 있고, 이 황제가 꼭두각시일지도 모른다.”“맞소. 확실히 조금 병신같아 보이네.”안왕도 동의했다.참고로 ‘병신같다’는 표현은 안왕이 조카에게서 배운 단어였다.“이 이야기는 3년 전쯤에 있었던 일이오.”이내 경천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의 목소리에는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힘이 담겨져 있었다.“당시 금나라는 진국왕이 집권하고 있었는데, 그는 나를 대신해 금나라의 군주가 되려 했소. 이 사실은 여러분도 알고 있을 것이오. 그때 난 진국왕과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었소. 진국왕이 왕위를 빼앗으려 나를 죽이려는 음모를 꾸민다고 하기에, 나도 어쩔 수 없이 반격에 나섰는데, 그 과정에 심각한 상처를 입었소. 그때 나를 구해준 이가 바로 란이라는 소녀이오. 만약 그녀가 없었다면 난 이미 죽은 목숨이었을 것이오. 그 당시 나는 란이의 정체도 몰랐고, 그저 약도성 사람이라는 것만 알았을 뿐, 그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소. 상처를 치료하며 그녀와 며칠을 함께 보냈고, 황권을 되찾으면 그녀를 부인으로 맞이하겠다고 약속했네. 하지만 그녀가 나를 구했다는 사실이 진국왕에게 알려졌고, 진국왕이 사람을 보내 그녀의 집에 불을 질렀소. 그리고 그곳에서 시신이 발견되었소.”모두가 진국왕이 불을 질렀다는 말에 멈칫했다.금나라 황제가 이렇게 비극적인 황권
한편, 안왕과 위왕은 이미 명월전에 도착했다. 두 사람은 부하들과 함께 말을 타고 달려왔기에 피곤하지는 않았지만, 몸 전체가 먼지투성이였다.하지만 오자마자, 쉬지도 못하고 바로 궁에 들어가라는 통보를 받았다. 정혼 연회가 예정보다 앞당겨 열리게 되었다고 했다.그들은 의아해하며 금나라가 막무가내라고 투덜거렸다. 처음에는 혼례라더니, 이제는 정혼식이라 하고, 심지어 약속했던 날도 지키지 않고 앞당겼으니 말이다.혼사라는 중대사가 이렇게 어린아이 장난처럼 진행될 수 있단 말인가?하지만 신부가 북당 사람이니, 그들은 신부의 친정과도 마찬가지였기에 금나라의 일정을 따르며, 금나라의 계획을 지지하는 것이 맞았다. 다른 나라 사절들이 함께 있었기에, 그들은 무관의 신분으로도 가능한 한 많은 사람과 친구를 사귀고 주변 무역 문제를 논의했다.이 부분에 대해서는 오래전에 다섯째가 특별히 당부한 적이 있었다. 그는 비공식적인 자리에서 다른 나라의 사신을 만나면 국사를 논하지 않더라도, 상업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라고 말했었다. 장사는 대화로 시작되는 일이니, 이야기를 많이 나누다 보면 결국 성사될 것이라고 말이다. 그들은 비록 처음에 다섯째의 이런 태도가 약간 뻔뻔하다고 느꼈었지만, 지난 10여년간 나라 경제가 눈에 띄게 번영했다는 사실을 차마 부인할 수는 없었다.다섯째의 말처럼 경제를 앞서게 만들어 백성들의 생활 수준을 향상한 덕분에, 돈이 끊임없이 북당으로 흘러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렇게 그들이 다른 나라 신하와 열심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황제가 온다는 소식이 들려왔다.안왕과 위왕은 금나라의 황제에 대해 호기심이 가득했다. 이 젊은 황제는 올해 열여덟도 되지 않는 어린 나이라 들었다. 어린 나이에 유명한 진국왕을 몰락시켰으니, 얼마나 대단한 결단력과 꾀를 가졌을까?내시의 우렁찬 소리와 함께, 밝은 황금빛 용포를 입은 젊은 황제가 시위에게 둘러싸여 등장했다.혼례복이 아닌 용포를 입고 있는 것으로 보아, 역시나 혼례를 올리는 것은 아닌 듯했다
세 사람은 화려하게 차려입었다. 그 중, 택란은 베일을 쓴 채 궁에서 준비한 마차에 올랐다.때마침 불이 하나둘씩 밝혀질 시간이라, 거리는 무척 떠들썩했다. 금나라 수도의 번화함은 약도성이 비교할 수 없는 정도였다. 수도임에도 불구하고 통행금지가 없어, 백성들이 밤늦게까지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택란은 마차의 가림막을 살짝 들어 올려 거리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거리에는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 장사에 열중하는 상인들, 주루나 주막으로 손님을 맞이하는 상인들로 북적이고 있었다.이런 활기 넘치는 모습은 그녀의 마음을 따뜻하게 했다.그러고는 순간 어린 황제를 본 지 오래되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3년이나 지났으니, 지금은 얼마나 어떻게 달라졌을지 궁금해졌다. 그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3년 사이에 자신도 많은 변화를 겪었으니 말이다. 키도 훤칠해졌고 이제 얼굴도 아이 같은 모습이 아닌 한층 성숙하고 침착해진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약도성이 지난 몇 년간 겪어온 일들이 많았기에 당연히 성숙해질 수밖에 없었다.한편, 금나라 황궁에서는 이미 정혼 연회의 준비를 마쳤으나, 중요한 두 사람이 아직 도착하지 않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두 사람은 바로 안왕과 위왕이었다.북당의 두 친왕이 도착해야만 연회를 시작할 수 있었다.한편, 경천 황제는 내내 택란을 만나고 싶어 했다.지난 3년 동안, 그는 그녀와 재회할 순간만을 간절히 기다렸다.3년간 간절히 바랐던 그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에 그는 들떴지만, 첫 만남은 너무도 중요했다.그는 서두르지 않고 차분히 준비된 상태에서 그녀를 만나고 싶었다.그리고 지금 자신의 감정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조차 모르는 상태였다. 그것이 사랑인지 아닌지도 정의할 수 없었다. 그저 그녀가 자신의 눈앞에 생생히 서 있는 모습을 보고 싶을 뿐이었다.그는 사실 가장 힘들었던 시절에 조정을 되찾아 그녀와 혼사를 올리겠다고 다짐했던 적이 있었다.물론 지금 그녀는 아직 어리기에, 혼담을 논하기엔 이르지만
어머니는 아버지처럼 아쉬워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생각이 훨씬 개방적이었고, 두 사람이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장 큰 행복이라 여겼기에 의식 자체를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그래도 아버지의 아쉬움을 덜어주기 위해 현대에서 한 번, 즉위 후에 또 한 번 의식을 치렀다.주 아가씨는 객사로 돌아오자마자, 객사 일꾼에게 소식을 물었다.그러자 일꾼은 황제가 곧 혼례를 올린다는 말을 듣고는 잠시 멈칫했다.“혼례요? 정혼 아니었습니까?”“정혼? 정혼이라니? 그럼 이미 혼사를 올릴 나이가 되었는데, 어찌 바로 혼례를 하지 않다는 것이냐?”“그건 모르겠습니다. 저희는 정혼한다는 소문만 들었습니다.”“미래의 황후가 북당 사람이 맞느냐?”일꾼이 말했다.“예. 북당 출신의 아가씨라고 합니다. 게다가 황제의 생명의 은인이라고 들었습니다.“택란은 이 말을 듣고 고개를 저으며 경천이 어리석다고 생각했다. 그가 정말 은인의 언니라는 말을 믿다니 말이다.설사 그렇다고 해도 굳이 그녀와 혼례 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혼사를 어찌 장난처럼 다룰 수 있단 말인가?택란은 경천 황제에게 크게 실망했다. 그저 정치적인 판단에서만큼은 어리석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택란은 원래 이틀 정도만 량주를 둘러본 뒤 바로 궁으로 들어가 알현할 생각이었지만, 아직 혼례 날짜가 다가오지 않았으니 며칠 더 머물며 시간을 보냈다. 궁으로 들어가 정체를 드러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그리고 그녀가 생명의 은인인 것을 알아차리면, 정혼식을 진행할지 말지 애매해질 것이기에, 택란은 며칠 동안 객사에 머물며 량주의 풍습과 문화를 살펴보는 한편, 참고할 만한 것이 있는지 살펴보기로 했다.그렇게 살펴보던 중, 주 아가씨가 정보를 알아보러 나갔다가 안왕과 위왕이 왔다는 소식을 들었다.며칠 동안 다른 나라 사절들은 계속 장관에 묵고 있었는데, 택란은 여전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했다. 그녀는 삼촌들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저녁 무렵 장관으로 갔다.그런데 도착하고 나서야 그들이 이미 황
량주는 금나라의 수도가 된 이후 지난 2년간 크게 발전했다. 또한,금나라와 북당이 우호적인 교류를 시작하면서, 북당 변방 도성의 백성들도 장사를 위해 많이 찾아왔다.이전에 택란도 자신의 목숨을 바치기 위해 금나라에 왔었다. 하지만 그때의 량주는 지금처럼 북당 사람들이 많지는 않았다. 그래서 택란은 객사에 머문 뒤 주 아가씨와 냉명여를 데리고 거리로 나가 량주의 풍습과 문화를 살폈다.여기도 어쨌든 금나라의 수도 아닌가!진국왕은 물러나기 전까지 나라를 잘 다스렸고, 특히 발전에 많은 힘을 기울였다. 하지만 야망이 지나친 탓에 늘 약도성을 되찾겠다고 욕심을 부렸다.그리고 동시에 북막을 두려워하기도 했다.경천이 즉위한 후, 광산 자원 개발 외에도, 그는 농경지와 산지를 개간하려고 노력했다. 금나라의 서북부에는 농사에 적합한 땅이 있었지만, 사람이 드물었다. 그래서 그는 북당의 다른 도성을 본받아 사람들을 개간지로 보내고 그들에게 이익을 나누어주었다.나라가 상승세일 때, 그 분위기는 눈에 띄기 마련이다. 백성의 긍정적인 에너지는 숨길 수 없는 법이었다.택란은 경천이 황제로서 매우 적합하다고 느꼈기에, 그가 이끄는 금나라는 분명 빠르게 발전할 것이라 생각했다. 발전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정말 좋은 일이기에,그가 광산을 함께 개발하자는 제안에 동의할 가능성이 높았다.택란은 이내 자신감을 얻었다. 궁에 들어가 알현하는 것을 서두르지 않고, 량주 백성들이 북당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기로 했다. 과거, 약도성과 량주의 관계는 다소 안 좋았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금나라가 약도성에 사람을 침투시켜 많은 폭동을 일으켰기에, 약도성 백성들도 그들을 매우 싫어했다.그렇기에 지난 2년간의 교류를 통해, 택란은 그들의 원한이 천천히 사라지기만을 바란 것이었다.이제 북당 쪽은 문제가 없으니, 량주 백성들의 생각을 확인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기에, 택란은 물건을 사면서 점포 주인과 상인들에게 북당 약도성에 대한 생각을 물어보곤 했다.그 중, 다
원경릉은 뒤에서 계산을 하고 있었는데, 그들의 대화를 듣고는 웃음을 터뜨렸다.그러고는 사식이가 정말 좋은 남자를 만난 것 같다는 생각을 다시금 했다. 서일이 비록 평범한 사람이긴 하지만, 그의 마음과 눈에는 오직 사식이만 있었다.그야말로 진실한 남편이다.물건을 산 뒤, 서일은 계속 계산기를 두드리며, 여기서 쓴 금액을 북당으로 돌아가 황후에게 얼마만큼의 금으로 바꿔 드려야 할지 열심히 계산했다.계산을 마친 후, 지갑형편이 다소 여유롭다고 느껴지자, 그는 귀걸이와 금팔찌까지 더 구매했다. 이곳의 디자인은 북당보다 훨씬 아름다웠다.한편, 금나라에서는 완안경천이 혼사를 준비하고 있었고, 이웃 나라 사신들도 연이어 축하해주기 위해 도착했다.택란은 냉명여와 주 아가씨를 데리고 량주로 갔는데, 그들이 량주성에 도착하자마자, 누군가가 경천 황제에게 보고했다."폐하, 초상화 속의 아가씨가 이미 도착하여 객사에 머물고 있습니다. 근처에서 감시 중이며, 가까이 다가가 방해하지는 않았습니다."경천 황제는 어서방에 앉아 이 보고를 들으며 눈매를 약간 올리고는, 온화하고 잘생긴 얼굴에 빛을 발했다. "그녀가 왔구나. 마침내 그녀가 왔다!""폐하, 바로 부를까요?""아니. 사람을 보내 그녀를 계속 감시하도록 하거라. 절대 그녀를 놓쳐서는 안 된다."경천 황제 또한 손끝이 떨릴 정도로 감격했다. 수많은 밤, 그는 초상화를 보며 멍하니 그녀가 살아있기를 바라고 또 바랬기 때문이다.그 초상화는 그가 직접 그린 것이었다. 원래 그는 서화에 강하지 않았다. 하지만 화가에게 아무리 설명해도 화가의 그림이 그녀와 닮지 않아, 직접 그림을 배우기 시작한 것이었다.그렇게 늘 마음속에 품고 있던 그녀를 자신의 그림으로 완성했다.그는 그녀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사람을 보내 북당에서 한 부녀를 데려왔다. 그 중 딸이 자신이 란이의 언니라고 주장했지만, 그녀의 얼굴은 택란과 닮은 점이 조금도 없었다. 심지어 분위기도 전혀 닮지 않았다.친자매가 어찌 조금도 비슷한 부분이 없다는
원경릉은 병실로 돌아간 뒤, 서일을 따로 불러내서 물었다.당시에는 상황이 급박했던 탓에 서일이 어떻게 그 약을 가져왔는지, 약상자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에 대해 전혀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두 번째 약은 어디서 꺼낸 것이냐?"원경릉이 약상자를 열며 묻자, 서일이 약상자 두 번째 칸을 가리켰다."이쪽이였습니다. 그 당시 약이 이미 준비되어 있었고, 주삿바늘에 뚜껑도 씌워져 있었습니다."원경릉은 약을 세 번째 칸에 넣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세 번째 칸은 자동으로 수축하는 구조여서, 사용하지 않는 약을 넣고 약상자를 닫는 순간 아래로 내려가게 되어 있었다.반면 두 번째 칸은 평소 사용하는 약으로 꽉 차 있어, 추가로 주사를 넣을 공간조차 없었다.게다가 약상자를 10년 넘게 사용해 온 그녀였기에, 약을 어디에 두는지 몸이 기억할 정도로 익숙했다. 그녀가 약을 잘못 넣었을 가능성은 없다는 뜻이다. 설령 잘못 넣었다 하더라도, 약상자는 위험성을 자동으로 감지하는 기능이 있어, 그 약이 서일 앞에 나타날 리가 없었다.서일은 원경릉의 심각한 표정을 보고, 우문호의 병세가 다시 악화한 줄로 착각하며 구석에 쪼그려 앉아 얼굴을 감싸고 울기 시작했다. 그동안 참고 또 참아왔지만, 이제는 도저히 견딜수가 없었다. 그가 울기 시작하자, 원경릉이 깜짝 놀라 물었다."왜 그래? 설마 또 무슨 약이라도 먹인 것이냐?""아닙니다..."서일은 빨개진 눈에 머리도 헝클어진 채로 원경릉을 바라보며 처량하게 말했다."마마, 폐하께서 아직 낫지 않은 것입니까? 혹시 제가 폐하를 죽게 만든 것입니까?"원경릉은 웃음을 터뜨리며, 서일의 반응 속도가 정말로 느리다고 생각했다."그런 소리 하지 말거라. 그런 일 없다. 그저 사실을 알아보는 것뿐이니, 괜히 걱정하지 말거라. 다섯째도 아주 좋아졌다. 단지 조금 더 검사가 필요할 뿐이다."서일을 안심시키기 위해 그녀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서일은 우문호에게 가서 울며 모든 것을 털어놓았을 것이 뻔했다.
"다섯째가 예전에 물을 다스리는 술법을 아는 사람한테서 편지를 받은 적 있는데, 혹시 그 편지에 얼음 벌레가 묻어 있었던 건 아닐까요? 그 벌레가 다섯째 몸에 숨어있다가, 수영 후 뭔가에 물려서 생긴 미세한 상처를 통해 몸속으로 들어갔을 수도 있어요.""네, 충분히 가능한 추측이에요!""그리고 요즘 다섯째가 일이 너무 바빠 밤낮없이 일한 탓에 몸 상태도 좋지 않았어요. 면역력이 떨어지고, 폐렴에 비까지 맞아 고열이 났던 데다가, LR까지 잘못 사용했으니..."원경릉은 멈칫하다 약상자를 꺼내고는, 겹겹이 쌓인 약상자 안의 디자인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왜 그래요?"양여혜가 그녀가 멍하니 있는 걸 보고 물었다.원경릉은 폐 치료제를 꺼냈는데, 지금은 쓸 필요가 없는 약이라 다시 약을 넣고 상자를 닫았다. 그리고 다시 열어보니, 그 약은 이미 사라져 있었다. "정말 이상하네요. 제 약상자는 제 통제 외에도 자율적으로 작동이 가능해요. 약을 꺼낸 후 사용하지 않거나, 약상자가 스스로 사용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을 경우 맨 아래 칸으로 내려가요. 그리고 상자를 다시 열어서 직접 꺼내야만 나타나죠. 방금 그 약도 그랬는데, 예전에 제가 LR를 실험용 쥐에게 주사하려고 꺼냈다가 서일이 오는 바람에 약을 다시 넣었거든요? 그럼, 그 약은 원래대로라면 맨 아래 칸으로 내려갔어야 해요. 그런데 서일이 다섯째에게 주사할 때, LR를 바로 꺼냈는데, LR이 내려가지 않았어요."양여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약상자는 확실히 프로그램으로 제어되고 위험성이 높은 약은 자동으로 내려가는 방식이니, 쉽게 꺼낼 수 없어요. 그래서 우문호 씨를 데려와, 시위가 약을 주사했다고 했을 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급한 상황이라 묻지 않았어요. 그런데 원경릉씨 말을 들으니, 더 신기하네요. 약상자가 이렇게 통제가 불가능하게 된 적이 있었나요?""아니요.""그렇다면 위험한 약은 직접 꺼내야 하거나 본인이 자리에 있어야만 보일 수 있는 거네요?"원경릉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밤늦게 연구소에 돌아오자마자 양여혜는 곧바로 원경릉을 사무실로 끌고 들어갔다.“오늘 저도 함께 바닷가에 갔었는데, 우문호 씨의 특별함을 알아차리셨나요?”“혹시… 파도를 통제할 수 있다는 걸 말하는 건가요?”원경릉은 단번에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눈치챘다.“맞아요. 오늘 바람이 그렇게 세지 않아서 큰 파도가 일어날 리가 없어요. 게다가 파도가 일던 순간, 주변에 지나가는 배도 없었어요. 그러니까, 그 파도는 갑자기 생겨난 거예요!”원경릉은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그게 무슨 뜻이죠?”“저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혹시 물을 다스리는 술법에 대해 들어본 적 있나요?”원경릉은 뭔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들어본 적 있어요.”하지만 머릿속이 뒤죽박죽이라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이 힘은 유전자의 돌연변이에서 비롯된 겁니다. 이 능력은 물에 굉장히 민감해요. 마치 약이 병에 민감한 것처럼 말이죠. 그리고 이 능력은 물과 독특한 자기장이 형성돼서, 이 힘을 쓸 때 공기가 진동하면서 물이 그 힘을 따라 움직이게 돼요. 우리 연구소에서도 한 전문가가 이것에 대해 연구한 적 있어요. 결과가 나왔는데, 한번 볼래요?”“좋아요, 보여주세요!”양여혜가 즉시 컴퓨터에서 관련 문서를 열어 보여주자, 원경릉은 자리에 앉아 마우스를 잡고 천천히 결론 보고서를 읽어나갔다. 잠시 후, 그녀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했다.“인간이 어떻게 이런 힘을 통제할 수 있는 거죠? 여기엔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네요. 단지 문제를 제기했을 뿐이고요.”양여혜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네. 관찰 사례가 아직 부족하니까요.”원경릉은 그녀의 시선이 부담스러워졌다.“그럼, 혹시 제 남편을 연구하려는 건가요?”“LR 연구에 문제가 있으니, 그건 일단 신경 쓰지 말고. 당신 남편을 집중적으로 연구해 보는 게 어때요?”원경릉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안 된다고 할 수 없겠네요. 제가 항상 그를 지켜보니깐요.”“사실 물을 다스리는 기술을 아는 사람은 몇몇 더 있어요. 도교의 수행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