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식을 들은 우문호가 왕부로 돌아와 원경릉을 찾았다.“도대체 임산부가 무슨 이유로 호수로 뛰어들겠어?”“기왕비에게 위협을 받아서 그런 거라고 말했잖아?”“왜 그랬는지 부황에게 말해야겠어. 그렇지 않으면 유후궁이 임신한 몸으로 자살했으니, 그녀의 집안이 온전치 못할 거야. 유후궁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흘러갈 수도 있어.”원경릉은 한참을 생각하더니 부황에게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말해주었다.우문호가 입궁하여 사건의 정황을 보고하자 명원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에게 태후를 찾아가라고 했다.태후는 이번 일에 상심이 컸다. 그녀는 오랜만에 찾아온 새 생명 소식에 누구보다 기뻐했다. 손왕비와 기왕비가 아이를 낳았지만 모두 여자아이였고, 셋째인 우문위(宇文蔚)의 본처 최씨가 작년에 임신을 했지만, 무슨 영문인지 6개월 만에 유산되었다. 왕비는 그 충격으로 아직도 요양을 하고 있었다.태후는 유후궁의 임신에 기뻐한지 얼마 되지 않아 그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잠을 자지도, 밥을 먹지도 못했다. 우문호가 도착했을 때, 태후는 보이는 족족 물건을 던지고 있었다. 안에 있던 상궁과 시녀들이 우문호가 오는 것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쉬며 “왕야, 서둘러 들어가 태후 마마를 돌봐주십시오. 밥도 드시지 않고, 어젯밤엔 한숨도 자지 않으셨습니다.”라고 말했다.“알겠습니다. 탕을 준비해 주십시오. 본왕이 태후 마마를 돌보겠습니다.”“예!” 상궁이 사람을 보내 탕을 준비하도록 시켰다.태후는 증손자를 잃은 슬픔에 자신이 가장 예뻐하는 손자인 우문호도 반기지도 않았다.“유후궁이 왜 죽었는지 알아보았느냐? 누구냐! 그녀를 죽인 게!”우문호는 여기저기 깨진 물건들을 보고 태후가 단단히 화가 났다는 것을 짐작했다.“상궁이 말하길 태후 마마께서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고 하던데, 일단 밥부터 드시지요. 사건의 정황은 다 드시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문호는 태후의 옆에 앉아 그녀를 어르고 달랬다.“지금 이 상황에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겠느냐? 빨리 말하거라! 애간장이 타들
우문호의 말이 맞았다. 낳은 아이가 일찍 요절한다면 얼마나 면목이 없겠는가. 성 밖의 백성들은 오랜 기간 친왕비들이 아들을 낳지 못하자 황실에 대가 끊겼다며 망조가 아니냐는 소문이 돌고 있다. 기왕비가 회왕에게 병이 옮았다는 것을 알고 유후궁이 얼마나 정성껏 왕비를 돌보았는가. 그녀의 자애로운 행동은 칭찬받아야 마땅한 일이다. 태후는 슬피 울며 “하늘도 무심하시지!”라고 소리쳤다.우문호는 흐느끼는 태후를 보고 그녀가 이 일을 잊는 데 한참 걸릴 것이라고 생각했다.‘모든 일은 시간이 약이다.’그는 야윈 황조모의 등을 쓰다듬으며 탕을 조금이라도 더 먹으라고 했다.태후는 탕을 마신 후, 우문호를 보았다.“너도 혼인을 한지 일 년이나 됐는데, 왜 좋은 소식이 없는 거야? 안 될 것 같으면 빨리 후궁이라도 들여야 하는 거 아니냐? 지금 일곱째도 후궁을 들인다고 하는데 너도 빨리 알아보거라.”황조모는 시종일관 가장 아끼는 손주인 우문호에게 기대를 걸었다. 물론 현비가 자신의 조카딸이고 그녀의 친정에 몇 년간 아무 일이 없었기에, 그녀는 늘 다섯째가 빨리 정권을 잡아서 친정을 부양하길 바랐다. 그러나 친왕들 모두 자신의 손자이기에 우문호를 예뻐하는 것을 겉으로 티 낼 수 없었다. 우문호는 태후의 입에서 후궁 얘기가 나오는 것을 두려워했다. “후궁을 맞이하는 일은…… 손자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요즘 저희 내외도 사이가 좋으니…….”“입 다물 거라! 네 부인은 질투도 많고 속도 좁지 않느냐! 황후가 주최한 행사에서 후궁 목록을 마련해 줬더니 다른 친왕비들은 감사하다며 받아 갔는데, 네 부인만 보는 둥 마는 둥! 자기 눈에 차는 사람이 없다고 했다더라! 그때 황후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 아느냐? 혼인한지 일 년이 다 되어가는데 아기 소식은 없고, 너도 이제 마냥 어린 나이는 아니지 않느냐?”우문호가 원경릉을 언급하자 태후는 화가 치밀었다. 우문호는 원경릉이 태상황에게 총애를 받고 있으니 당연히 태후도 그녀를 예뻐할 줄 알았다. 하지만 그의 예상과 달리 태후
“초왕비하고는 잘 지내는 것이냐?” 태후가 의심의 눈초리로 우문호를 보았다.요즘 들어 초왕이 나약하고 무능하다는 소문이 부중에 자자하게 퍼졌다. 태후는 이 소문의 진위가 궁금했다.다섯째의 성질대로 라면 원경릉 쯤이야 겁낼 일도 아니겠지만, 태후는 소문 때문에 걱정이 됐다.“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제가 여인 하나쯤 간수하지 못하겠습니까?”우문호가 웃었다.“그럼 됐다. 초왕비가 세자를 낳기만 하면 좋겠다. 정비(正妃)가 아들까지 낳는다면 얼마나 좋을까.”“암요. 그렇죠!”우문호는 나갈 채비를 했다. 여기에 더 있다가는 태후에게 세뇌를 당할지도 모른다. 우문호가 나가려고 하자 태후는 말을 이어 그를 붙잡았다.“맞다! 네 부인이 여섯째의 병을 고쳤으니, 기왕비도 빨리 고치라고 해라.”우문호는 순간 표정이 굳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태후가 저 말만은 하지 않길 간절히 바랐었다.“왜? 하기 싫어?”태후가 차갑게 물었다.“그럴리가요. 다만 형수께서도 제 부인에게 부탁하지 않은 일을 다짜고짜 가서 치료할겠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게다가 이번 달에 그녀가 월경을 하지 않았습니다. 임신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가능성이 있으니 기다려 보는 게 좋겠습니다. 그녀가 신경 쓰지 않게 후궁 얘기도 삼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정말이냐!” 태후는 원경릉이 월경을 하지 않는다는 소리에 기뻐하며“혹시 모르는 일이니 매사 주의하거라! 그리고 어의를 불러다가 진맥을 하고!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한다!”라고 말했다.“알겠습니다.” 태후의 잔소리에 우문호는 체념한 듯 대답했다.태후는 몇 마디 덕담을 덧붙이고는 그에게 어서 부인을 챙기러 가보라고 했다.그날 저녁. 초왕부.“아 참, 오늘 얼떨결에 태후 마마께 네가 임신했을 수도 있다고 말했어.”우문호가 원경릉에게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이 말을 듣고 원경릉은 탕을 마시다가 국물을 뿜을 뻔 했다. “무슨 소리야? 내가 어디를 봐서 임신을 했다는 거야?”“태후 마마께서 후궁을 들이라고 압력을 주시고,
우문호는 월경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월경을 시작도 안 했는데 황조모에게 네가 임신했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니…… 이것 참 큰일이네.”옆에서 듣고 있던 녹주가 원경릉을 쳐다보았다.“아닌데, 왕비님 아직 월경 안 하셨습니까? 그럴 리가 없는데 이상하네. 좀 기다려 봅시다. 두 달에 한 번 할 때도 있습니다.”“내가 월경을 시작했었어?” 원경릉이 놀라서 물었다.우문호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네가 시작을 했는지도 모르는 거야?”원경릉은 잠시 침묵하더니 “하다 안 하다 하니까, 몰랐을 수도 있지!”“하다가 안 하다가 한다고? 그게 가능해? 너 혹시 나한테 뭐 숨기는 거라도 있어?” 우문호가 물었다.“내가 뭘 숨긴다고 그래?” 원경릉은 화제를 돌리기 위해 말을 이었다.“유후궁에 관해서는 부황께 말씀 잘 드렸어?”“부황께서도 생각이 다 있으신 것 같아. 내 말에 아무런 답이 없으셨어.” 우문호가 답했다.원경릉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부황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니 우린 이만 손 떼자.”라고 말했다.그녀는 다바오를 보더니 “다바오! 우리 산책 가자!”라고 말했다.다바오가 신나서 뛰어왔다. 원경릉은 녹주를 보고 “녹주야 너도 같이 가야겠다.”라고 말했다.녹주는 원경릉을 따라 마당으로 나왔다. 원경릉은 우문호가 따라 나오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낮은 목소리로 녹주에게 물었다.“맞다 녹주야. 나 월경 말이야…… 세 달에 한 번 할 때도 있지?”“왕비께서는 정말 모르시는 겁니까?” 녹주가 의아해서 물었다.“알지!” 원경릉은 손을 흔들며 “그냥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거야. 그럼 너는 한 달에 한 번 하느냐?”그녀는 자연스럽게 당대 여인들의 평균 월경 기간을 물었다.“그렇죠. 한 달에 한 번씩.” 녹주가 대답했다.원경릉은 원주가 월경 불순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다.“왕비님 어의를 신청해서 진찰을 받는 건 어떠십니까? 녹주가 물었다. 부중에 친왕비들이 임신을 하기 위해 산전준비에 열심히 하는 것을 보니 괜히 녹
“즐거워? 매일 너와 다바오랑 같이 시간을 보내야겠구나. 아들과 놀아주는 연습이라고 생각해야겠다.”‘또 아들!’원경릉은 이 주제에 대한 대화는 피하고 싶었다.이 시대의 여인은 혼인 후 일 년 내에 아이를 낳지 못하면 죄인이나 다름없었다. 황실 다른 이들이 임신을 재촉하는 것은 그렇다고 쳐도, 그가 계속 구시렁거리며 압박을 하다니!원경릉은 마음이 복잡했다.다음날, 원경릉은 노마님을 뵈러 친정에 갔다. 매번 그녀는 정후부에 사람이 가장 없는 틈을 타서 갔다. 그러나 이번에는 난씨와 둘째 노마님이 그녀를 살뜰히 챙기며 점심까지 차려주었다.노마님의 병세는 여전히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원경릉은 단박에 노마님이 약을 제대로 먹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챘고, 손씨 아주머니에게 약이 얼마나 남았는지 묻자 아주머니는 많이 남았다며 보여주었다. “조모!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약을 잘 먹야 한다고요! 왜 이렇게 말을 듣지 않으십니까?”“죽고 사는 것은 하늘의 뜻이다. 하늘이 나를 데리고 가려고 하면 약을 먹어도 데리고 갈 것이야. 만약 나를 데리고 갈 마음이 없다면, 약을 먹지 않고도 살 수 있다.”“그게 무슨 해괴한 소리입니까?” 원경릉이 미간을 찌푸렸다.“늙은이는 신경 쓰지 말고, 네 얘기나 해보자. 왕야와 잘 지내는 것이냐?”노마님이 물었다.“갑자기 그건 왜 물으십니까?” 원경릉이 어리둥절했다.옆에 서있던 손씨 아주머니가 웃으며 원경릉을 보았다.“황제께서 아들을 낳은 친왕을 태자로 책봉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으니, 노마님께서는 언제 손주를 안아 볼 수 있는지 궁금하신 모양입니다.”어딜 가나 임신! 출산! ! 원경릉은 돌아버릴 것 같았다.“조모, 그것도 다 하늘의 뜻입니다! 안 그래도 그 소리를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듣습니다. 미치겠어요!”원경릉이 분노했다.“내가 묻지 않으면, 네 아비가 물을 것이야. 요즘 네 아비가 너를 찾아 왕부에 들어갈 생각을 하고 있거든.” 노마님이 담담하게 말했다.이 말을 들은 원경릉은 깜짝 놀라 “저 이만 가볼게요
정후부 문을 나서자 원경릉이 원경병을 붙잡았다.“어찌 된 일이야? 혼인에 노력을 안 한다니?”침울한 표정의 원경병이 그녀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말도 마세요. 신랑감이라고 데리고 오는 작자들이 다 아버지 뻘이라고요! 괜찮다 싶으면 첩자리 입니다.”원경릉은 정후부의 원팔룡이 악명 높은 투기꾼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이득을 보기 위해서라면 앞뒤 가리지 않고,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었다.특히 딸을 시집보내면 큰 수확을 하게 되니 그는 머리를 굴려 가장 큰 이익이 되는 곳을 찾아다녔다. 젊고 문벌이 높은 사내는 후작을 업신여겼고, 문벌이 낮은 사내는 자신의 신분이 부끄럽다고 여겼다. 결국 남은 것은 안정적인 직업의 좋은 집안 출신인 나이 많은 남자들이었다. 그는 비록 첩자리로 들어가는 거지만, 나이 많은 본처가 죽기만 하면 그 자리를 꿰차고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원경병의 말을 들은 그녀는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네 혼사는 내가 좀 알아볼게.”“응.” 원경병은 언니에게 딱히 기대하지 않는 듯 대충 대답했다.초왕부로 돌아온 원경릉은 지나가는 희상궁을 붙잡고 물었다.“왕비님께서 주선한 사내가 부친의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딸은 이익이 맞으면 팔아버리는 것이니 괜한 신경 쓰지 마세요.” 희상궁이 신랄하게 말했다.‘이 시대에서 한 번 혼인을 하면, 이혼도 못하고 죽을 때까지 쭉 살아야 하는데! 여자에게 너무 가혹하다!’원주인 원경릉도 가혹한 예의 하나였다. 때문에 원경병의 혼사는 원경릉에게 꽤 중요한 일이었다.저녁에 우문호가 왕부로 들어오자 그녀는 우문호에게 물었다.“혹시 주변에 겸손하고 똑똑한 미혼 남자 있어?”우문호는 이상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다.“그걸 알아서 뭐 하게? 기억해, 너는 이미 임자가 있는 몸이야.”“아니! 나 말고, 네 처제!” 우문호의 경계하는 눈빛에 원경릉은 웃음이 터졌다.“처제? 아 그 병풍이?” 우문호는 사내대장부 같은 처제가 생각이 났다.“병풍이라니? 경병이라고 불러!” 원경릉은 그를 노려보
“처제가 구사한테 뭐라고 했는데? 설마 아픈 곳을 건드리는 말은 한건 아니지?” 우문호가 물었다.“어디 있어요? 이렇게 한 마디 물었을 뿐이야. 근데 구사가 본 체도 안 하고 그냥 가더라니까.”그녀가 그때의 일이 생생하게 기억이 났다.“구사가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네. 됐다 내가 한번 물색 해볼게.”“가문보다는 인품이 중요해. 너처럼 가정폭력 하는 남자는 안돼.”원경릉이 신신당부했다.우문호는 얼굴이 붉어졌다.“누가 폭력을 써? 내가 언제 그랬어?”가정폭력이라는 단어부터가 부정적이다. 원경릉은 이 단어를 듣기만 해도 소름이 끼친다.“이미 너는 새사람이 됐잖아. 옛날에 비하면 완전 환골탈태했지.”원경릉이 웃으며 말했다.우문호는 조소를 띠며 “환골탈태를 누가 했는지 모르겠네. 너야말로 새사람이 됐지. 혹시 몰라…… 진짜 다른 사람일 수도? 곤장 맞은 상처만 없었으면 나도 의심했겠어.”라고 말했다.“정말?” 원경릉이 배를 잡고 웃었다.우문호는 방정맞게 웃는 그녀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네가 암탉처럼 웃어젖힐 때마다 찜찜하단 말이야…….”원경릉이 얼마나 웃었는지 눈물을 닦으며 “암탉은 너지.”라고 말했다.우문호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나는 사실 네가 약 상자에 대해서 뭔가 숨기고 있는 것 같아…… 의학에 문외한이던 네가 갑자기 어의보다 뛰어난 의술을 가지게 되다니, 내가 네 약 상자의 약들을 빻아서 어의에게 보여주니 어의도 이런 건 처음 본다며 모르겠다고 하던데.”“뭐야? 내 뒷조사라도 한 거야?” 원경릉의 눈이 휘둥그레졌다.“모르는 게 있으면 찾아봐야지.” 우문호가 떳떳하다는 듯 말했다.“그럼 자금단과 자금탕의 원리를 설명해 봐. 생사의 갈림길에서 왜 그걸 먹으면 살아날 수 있는 거지?”“자금단은 수십 종의 귀한 약재를 정제해 만들었기에 목숨을 구할 수 있는 거야.”“너 내가 한의학 약리(藥理)를 모른다고 속이려고 하나 본데, 그 수십 가지 귀한 약들은 약성이 모두 같은 거야? 왜 내외상만 치료할 수 있고, 가지고 있
원경릉은 자시가 되도록 우문호가 돌아오지 않자 침상에 누워 엎치락뒤치락 하며 잠들지 못했다. 그녀는 녹주를 불러 그가 언제쯤 돌아올지 알아보라고 했지만, 녹주도 소식이 없다며 어깨를 으쓱했다.‘혹시 무슨 사건이라도 일어난 건가?’보통 큰 사건이 벌어지면 관아에서 늦게까지 연장근무를 했다. 그때마다 우문호는 그녀가 걱정하지 않게 서일을 보내 늦는다고 알려주었는데 오늘은 서일도 오지 않았다.밖에서 ‘쿵쿵’하는 발걸음 소리가 나자 원경릉의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그녀는 침상에서 벌떡 일어났다. 녹주가 뛰어 들어오더니 “왕비님, 서일이 와서 아룁니다.”라고 말했다.원경릉은 피투성이가 된 서일을 보고 깜짝 놀라 기절할 뻔했다. 녹주는 휘청거리는 그녀를 부축하며 “왕비님 괜찮으십니까?” 라고 물었다.“왕야는?” 원경릉이 마음을 다잡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서일은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그녀를 보았다.“일 났습니다! 왕야께서 돈을 많이 잃고, 화가 잔뜩 나셔서 물건을 집어 던지시는 걸 구사가 말리다가 어떻게 된 일인지 왕야와 구사가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둘이 집현국에서 치고받고 난리도 아닙니다! 소인이 말리려고 했지만 역부족이라 왕비님을 찾아왔습니다. 이 일이 황상 귀에 들어가면 분명 크게 화를 내실 겁니다!”“마차를 준비하거라!”원경릉은 내심 우문호가 암살 사건에 휘말린 게 아니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시간까지 도박을 하다가 싸움을 한다는 말에 화가 치밀었다.저번에도 구사랑 치고받고 하더니, 이 두 사람은 무슨 애증관계인지 둘이 애틋하다가도 이따금 죽기 살기로 싸운다. “서일. 어쩌다 피가 이렇게 많이 묻었습니까?” 서일이 피를 닦으며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아 이거요? 돼지 피입니다. 집현국에서 돼지를 잡았거든요. 싸우는데 상대 패거리가 저보고 미천한 신분이라며 돼지 피를 들이부었습니다.”‘패싸움? 한 국가의 친왕이 누군지 모르는 사람들과 모여서 도박을 하는 것도 모자라 패싸움을 하다니.’서일의 말을 듣고 원경릉은 몸
경천은 그녀의 말을 반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네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다."택란이 말했다."어쩌면 5년 후에는 오늘 한 모든 일이 어리석고 충동적이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좋아하는 여인을 만나게 될 때, 그 감정이 단순한 사모인지 은혜 때문인지 알게 되실 것이고, 오늘의 행동을 후회하게 될지도 모릅니다."경천은 단 한 마디만 응한 뒤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태도가 이렇게나 분명하니, 절대 그런 말로 그녀를 얽매여 부담을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오늘 한 모든 일은 그의 결정이며 그의 태도였다. 그녀는 몰라도 되고,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긴 하지만, 그는 언제나 그녀를 기다릴 것이었다.그리고 그녀의 인정을 얻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택란은 한숨 놓은 듯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해한다니 다행입니다.""알고 있다."경천의 얼굴은 약간 창백했지만, 애써 미소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삼 태감이 책자를 가져왔다. 경천은 그것을 택란에게 건넸고, 택란은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았다. 그가 제시한 조건은 매우 공정했으며, 심지어 약도성에 이익을 양보한 정도였다.책자를 접은 후, 그녀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우리 약도성을 생각해 줘서 고맙습니다. 두 나라의 원한을 풀기 위해 애써줘서, 그리고 약도성의 백성과 조정이 화해할 수 있도록 도와줘서 고맙습니다.""알고 있었던 것이냐?"경천이 다소 놀라며 묻자, 택란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예. 알아봤습니다.""오해하지 마라. 그저 너를 위하여 한 일이 아니니, 부담 갖지 않아도 된다."그는 다소 긴장한 표정으로 해명했다.택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오해하지 마시지요. 저는 정말 부담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저를 위해 이렇게 많은 일을 해줘서 고마울 뿐입니다. 오늘도 사실 많이 감동했습니다. 다만, 저는 아직 혼사에 대해 논할 나이가 아니고, 사적인 감정보다는 다른 일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저는 아직 어리고, 앞으로 혼사를 하더라도 반드시 아바마마
손에 쥐니, 차가운 촉감이 느껴졌다. 그 옥의 차가운 느낌이 서서히 스며들자, 그녀는 기분이 좋았다.그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놀라운 표정을 지었을 때, 그는 미세하게 안도하며, 그녀가 좋아할 것이라 믿었다."직접 만든 것입니까?"택란은 마음에 든 듯 손에 꼭 쥐고 있었다. 그녀의 밝은 눈동자에는 존경이 가득했다."응!"그는 힘주어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마음에 드냐?""예. 정말 마음에 듭니다!"택란도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더욱 빛나는 미소를 지었다.그러자 그가 약간 흥분된 표정으로 물었다."그럼, 이걸 직접 나에게 선물해 줄 수 있느냐?""예?"택란이 잠시 멈칫하며, 놀라 물었다."저에게 준 선물이 아닙니까?"그가 미세하게 떨리는 손끝으로 소매 주머니에서 또 다른 옥 조각을 꺼내 손바닥에 올려놓으며, 진지하게 말했다."이건 내가 네게 직접 주고 싶은 것이다."택란은 그가 손에 든 것을 바라보았다. 옥질도 동일하게 맑고 투명했고, 손바닥의 선도 보일 정도였는데, 그 조각에는 경천의 모양이 새겨져 있었다.옥에는 미소를 짓고 있는 준수한 그의 모습이 새겨져 있었고,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 입고 있던 옷이 새겨져 있었다. 비록 색은 알 수 없었지만, 자수가 명확하게 새겨져 있었다.그녀는 기억력이 매우 좋았기에, 그때의 기억이 선명히 떠올랐다.그녀는 두 개의 옥을 손바닥에 놓았다. 그제야 그녀는 옥에 3년 전 그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그가 시간을 되돌려 3년 전 만남을 담은 것이었다!경천은 택란을 바라보며, 애써 차분함을 유지하려 했다. 하지만 심장은 거의 목구멍까지 올라올 듯했다.택란이 두 개의 옥을 서둘러 상자에 다시 넣으며 말했다."두 개 모두 오라버니께서 먼저 가지고 있으세요."경천은 눈시울을 붉히며 다시 건네받은 상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눈을 내리깔며, 애써 실망이 드리운 눈빛을 숨겼다.삼 태감이 정교한 음식을 올려놓았고, 모두 택란이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그녀는 가볍게 숨을 내쉬며, 알 수 없는 작은 흥분을 억누르고, 표정을 고쳐서 천천히 돌아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북당 백성인 란이 언니와의 혼사는 다 거짓인 겁니까?"경천의 동공이 흔들렸다."혹시... 화가 난 것이냐?""아닙니다."택란이 고개를 젓자, 밝은 빛이 그녀의 깨끗한 얼굴에 비쳤고, 고르게 정리된 이마 밑의 눈동자는 다시 차분해졌다."그런데 어찌 사람을 시켜 저를 찾고 있다고 직접 저게 소식을 전하지 않으셨습니까? 만약 편지를 보냈다면, 저도 오라버니를 만나러 왔을 것입니다. 심지어 혼사에 하객까지 청하며 일을 이렇게나 크게 벌였는데, 대체 어떻게 수습하려고 하십니까?"그는 갑자기 결단을 내린 듯, 천천히 그녀 앞에 섰다. 그러고는 그녀의 까만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위압적인 목소리로 말했다."수습할 필요 없다. 나는 이미 천하에 나의 황후가 우문택란이라고 선언했다. 나는 그녀가 어서 크기만을 기다리고 있다."택란은 순간 놀라하며, 굳어진 얼굴로 물었다. "정말… 그렇게 말씀하셨습니까?"경천은 그녀가 화가 난 것 같아, 마음이 내려앉았다. 그의 눈동자엔 어두운 그림자가 깔렸고, 이내 조심스레 물었다."응할 수... 있겠느냐?"택란은 잠시 망설였다. 기억 속의 그 소년이 지금 별빛을 받으며 그녀 곁으로 돌아왔다. 이전의 그는 그녀의 손목을 잡고, 10년 후 그가 죽지 않으면 돌아와서 그녀를 부인으로 맞겠다고 열정적으로 말했었다. 그 열정이 가득한 목소리는 지금도 그녀의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었다. 그런 과거와 현재가 얽혀 버리자, 대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저는..."경천은 그녀가 망설이는 모습을 보며,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는 그녀의 반응이 너무 당황스러워서, 얼굴을 조금 숙이며 말했다."지금 바로 대답할 필요 없다. 몇 년 후라도, 10년, 아니 20년 후라도 괜찮다.""하지만...""아니, 말하지 말거라."그는 방금까지만해도 가득찼던 자신감을 더 이상 보여줄 수 없
냉명유는 팔짱을 낀 채 검을 가슴 앞으로 옮기며, 차갑게 말했다."누님께서 어디로 가든, 저도 무조건 함께 갈 것입니다."“하… 하지만."삼 태감이 무척 난감해했다."그래. 함께 가자. 이 거월통천각이 정말 달을 딸 수 있는지 어디 가서 보자꾸나!"그러자 택란이 웃으며 말했다.주 아가씨는 조금 의심스러웠다. 정말 공주가 만나고 싶다면, 어찌 공주한테 이렇게 높은 계단을 오르게 할 수 있는가?그러고는 계단 위에 새겨진 난초꽃을 힐끗 보고는 순간 멈칫했다. 시선을 위로 올려보니, 계단의 각 층마다 난초꽃이 새겨져 있었다.황제가 자신의 그리움을 돌계단에 새긴 것이었다!택란도 계단을 오르며, 이 사실을 눈치챘다.게다가 각 난초의 형태와 크기는 매우 똑같았다. 처음에는 선이 조금 거칠게 느껴지긴 했지만, 후에는 점점 더 섬세하고 부드러워 보였다.이건 분명 같은 사람이 새긴 것 같았다. 그가 직접 조각한 것일까? 금나라가 이곳으로 수도를 옮긴지 아직 1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 말이다. 잠시 후, 그들은 거월통천각의 가장 높은 층에 도착했다. 다행히 냉명여는 문 앞에서 멈추고 안까지 들어가지 않았다.택란은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는데, 안에는 정교하게 조각된 네개의 용 모양 기둥이 세워져 있었고, 네 모서리에는 각각 올라가 쉴 수 있는 정자가 있었다. 정자에는 난간이 둘러져 있었으며, 가운데에는 탁자와 두 개의 의자가 놓여 있었다. 떠힌. 네 면에 걸려져 있는 대나무 커튼이 걷혀 있어, 사방에서 밖을 볼 수 있었다.그 사이에서 청색 비단옷 차림의 남자가 통천각 옆 난간에 기대어 택란을 바라보고 있었다.그는 매우 긴장한 듯 손과 발을 살짝 떨고 있었다. 별빛처럼 맑은 눈동자에 약간 숨이 가쁜 듯 보였다. 그는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그녀를 보자마자 이내 눈시울을 붉혔다.재회를 위해 최선을 다하며 가장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기에, 그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이 만남을 특별하게 만들려고 노력했다. 반짝이는 별들도 그중 하나였다.하지만
손님들이 하나둘씩 떠나자, 경천 황제는 서둘러 궁으로 돌아가 푸른 비단옷으로 갈아입었다.옅은 청색 옷자락에, 소매 끝에는 난초꽃이 수놓아져 있었고, 나머지 부분은 어두운 구름 문양으로 수놓아져 있었다. 이 옷감은 북당에서 온 것이었다."폐하, 꼬마 은인께서 궁문에 도착하셨다고 합니다."삼 태감이 와서 보고했다."좋소."그는 거울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깊은숨을 내쉬었다."택수운천으로 가겠네."택수운천은 그가 즉위한 후, 궁궐 안에 지은 새 궁전으로, 세 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궁전 옆에는 거월통천각이 있었는데, 이는 량주성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거월통천각 안에 있으면 마치 손바닥에 달을 담을 수 있을정도로 웅장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거월통천각에서 멀게는 약도성과 량주가 인접한 산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그녀가 생각날 때면, 늘 거월통천각의 가장 높은 층으로 올라가 풍경을 멀리 바라보곤 했다."진이야, 너는 누군가를 진심으로 좋아해 본 적이 있느냐?"그가 준수한 옷차림으로 난간에 기대어 먼 곳을 바라보며 물었다. 바람이 서서히 불며 청색 옷자락이 휘날리자, 옷자락의 네 끝에 박힌 고급스러운 야명주가 그의 선명하고 잘생긴 얼굴을 비추었다.그때, 저 멀리서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궁 시위를 따라, 아치과 복도를 지나 거월통천각으로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그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젊은 금군 통령 진이가 그의 모습을 보고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그런 적 없습니다.""사모의 마음을 품어보거라. 떨리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느낌만큼 좋은 것이 없다."그는 그녀를 멍하니 보며 말했다. 천천히 다가오는 탓에 그녀의 얼굴이 자세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13세 전까지의 그의 인생에는 나라와 백성들 뿐이었지만, 13세 이후 그의 인새은 온통 그녀뿐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지금 그녀가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진이는 황제의 시선을 따라, 천천히 다가오는 세 명을 보며
안왕은 보책을 받아 든 순간, 갑자기 무엇인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지만, 정확히 어떤 점이 이상한지 말로 설명할 수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모든 일이 다 이상하게 느껴졌다.보책을 펼쳐 안에 적힌 이름을 본 순간 그는 드디어 이상한 점이 무엇인지 알아차리게 되었다.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굳어진 표정으로 경천 황제를 바라보았다.경천 황제는 얼굴에 미소를 띠며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조사를 통해 드디어 그녀의 이름을 알게 되었소. 그녀의 이름은 우문택란이오. 금나라 황후의 이름은 우문택란이네. 난 반드시 그녀를 찾아낼 것이오. 만약 그녀가 황후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황후의 자리는 그녀를 위해 계속 비워둘 것이네.”위왕은 온몸에 식은땀을 흐르는 탓에 두 손을 급히 움켜잡았다. 방금 황제가 보책을 그의 손에 올리지 않아, 그가 받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정말 다섯째에게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다!안왕은 어두워진 안색으로 자리에서 물러나 이를 악물고 낮은 소리로 위왕에게 말했다.“방금까지도 어린 황제에게 어리석다고 했건만. 이렇게 계책에 능하고 이따위 교묘한 계책으로 우리 형제를 그와 같은 편에 서게 만들다니...!”위왕은 또 한 걸음 물러서며 아무런 표정 없이 말했다.“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구나. 방금 술을 두 잔 마셔 조금 취한 터라,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구나. 아니, 지금 들고 있는 그건 무엇이냐?”안왕은 단단한 그의 팔을 비틀어 버리고 싶을 정도로 분노했다.하지만 이 상황 속에서 연회는 계속되었고, 사람들의 감정은 점점 고조되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갑자기 누군가가 북당 황제의 작은 공주도 우문택란이라는 말을 꺼냈다.그 말에 다들 그 당시 금나라 황제를 구한 사람이 북당의 작은 공주가 맞는지 추측하기 시작했다.정말 북당 공주가 맞는다면, 금나라 황제도 참 배짱이 큰 것이다. 사실상 북당 황실이 금나라 황제를 구했다고 선언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만약
경천은 위왕의 말을 듣자, 마치 마음속 큰 돌덩이가 내려간 듯 후련해 보였다. 그는 그러고는 궁인에게 술을 올리게 해 술잔을 여러 차례 돌린 후, 아래를 둘러보며 말했다.“오늘 여러분께 이야기를 하나 들려드리겠소. 이 이야기를 듣고 나면 오늘 정혼연이 어찌 열리게 되었는지 알게 될 것이오.”그러자 모두가 이야기를 들려주겠다는 말에 당황을 금치 못하며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정혼연이든 혼례든, 이런 자리에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이때, 위왕이 안왕의 귀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섯째에게 서신을 보내야겠다. 금나라에서 실권을 쥐고 있는 자가 황제가 아닐 수도 있다. 진국왕이 아직 살아 있고, 이 황제가 꼭두각시일지도 모른다.”“맞소. 확실히 조금 병신같아 보이네.”안왕도 동의했다.참고로 ‘병신같다’는 표현은 안왕이 조카에게서 배운 단어였다.“이 이야기는 3년 전쯤에 있었던 일이오.”이내 경천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의 목소리에는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힘이 담겨져 있었다.“당시 금나라는 진국왕이 집권하고 있었는데, 그는 나를 대신해 금나라의 군주가 되려 했소. 이 사실은 여러분도 알고 있을 것이오. 그때 난 진국왕과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었소. 진국왕이 왕위를 빼앗으려 나를 죽이려는 음모를 꾸민다고 하기에, 나도 어쩔 수 없이 반격에 나섰는데, 그 과정에 심각한 상처를 입었소. 그때 나를 구해준 이가 바로 란이라는 소녀이오. 만약 그녀가 없었다면 난 이미 죽은 목숨이었을 것이오. 그 당시 나는 란이의 정체도 몰랐고, 그저 약도성 사람이라는 것만 알았을 뿐, 그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소. 상처를 치료하며 그녀와 며칠을 함께 보냈고, 황권을 되찾으면 그녀를 부인으로 맞이하겠다고 약속했네. 하지만 그녀가 나를 구했다는 사실이 진국왕에게 알려졌고, 진국왕이 사람을 보내 그녀의 집에 불을 질렀소. 그리고 그곳에서 시신이 발견되었소.”모두가 진국왕이 불을 질렀다는 말에 멈칫했다.금나라 황제가 이렇게 비극적인 황권
한편, 안왕과 위왕은 이미 명월전에 도착했다. 두 사람은 부하들과 함께 말을 타고 달려왔기에 피곤하지는 않았지만, 몸 전체가 먼지투성이였다.하지만 오자마자, 쉬지도 못하고 바로 궁에 들어가라는 통보를 받았다. 정혼 연회가 예정보다 앞당겨 열리게 되었다고 했다.그들은 의아해하며 금나라가 막무가내라고 투덜거렸다. 처음에는 혼례라더니, 이제는 정혼식이라 하고, 심지어 약속했던 날도 지키지 않고 앞당겼으니 말이다.혼사라는 중대사가 이렇게 어린아이 장난처럼 진행될 수 있단 말인가?하지만 신부가 북당 사람이니, 그들은 신부의 친정과도 마찬가지였기에 금나라의 일정을 따르며, 금나라의 계획을 지지하는 것이 맞았다. 다른 나라 사절들이 함께 있었기에, 그들은 무관의 신분으로도 가능한 한 많은 사람과 친구를 사귀고 주변 무역 문제를 논의했다.이 부분에 대해서는 오래전에 다섯째가 특별히 당부한 적이 있었다. 그는 비공식적인 자리에서 다른 나라의 사신을 만나면 국사를 논하지 않더라도, 상업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라고 말했었다. 장사는 대화로 시작되는 일이니, 이야기를 많이 나누다 보면 결국 성사될 것이라고 말이다. 그들은 비록 처음에 다섯째의 이런 태도가 약간 뻔뻔하다고 느꼈었지만, 지난 10여년간 나라 경제가 눈에 띄게 번영했다는 사실을 차마 부인할 수는 없었다.다섯째의 말처럼 경제를 앞서게 만들어 백성들의 생활 수준을 향상한 덕분에, 돈이 끊임없이 북당으로 흘러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렇게 그들이 다른 나라 신하와 열심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황제가 온다는 소식이 들려왔다.안왕과 위왕은 금나라의 황제에 대해 호기심이 가득했다. 이 젊은 황제는 올해 열여덟도 되지 않는 어린 나이라 들었다. 어린 나이에 유명한 진국왕을 몰락시켰으니, 얼마나 대단한 결단력과 꾀를 가졌을까?내시의 우렁찬 소리와 함께, 밝은 황금빛 용포를 입은 젊은 황제가 시위에게 둘러싸여 등장했다.혼례복이 아닌 용포를 입고 있는 것으로 보아, 역시나 혼례를 올리는 것은 아닌 듯했다
세 사람은 화려하게 차려입었다. 그 중, 택란은 베일을 쓴 채 궁에서 준비한 마차에 올랐다.때마침 불이 하나둘씩 밝혀질 시간이라, 거리는 무척 떠들썩했다. 금나라 수도의 번화함은 약도성이 비교할 수 없는 정도였다. 수도임에도 불구하고 통행금지가 없어, 백성들이 밤늦게까지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택란은 마차의 가림막을 살짝 들어 올려 거리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거리에는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 장사에 열중하는 상인들, 주루나 주막으로 손님을 맞이하는 상인들로 북적이고 있었다.이런 활기 넘치는 모습은 그녀의 마음을 따뜻하게 했다.그러고는 순간 어린 황제를 본 지 오래되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3년이나 지났으니, 지금은 얼마나 어떻게 달라졌을지 궁금해졌다. 그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3년 사이에 자신도 많은 변화를 겪었으니 말이다. 키도 훤칠해졌고 이제 얼굴도 아이 같은 모습이 아닌 한층 성숙하고 침착해진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약도성이 지난 몇 년간 겪어온 일들이 많았기에 당연히 성숙해질 수밖에 없었다.한편, 금나라 황궁에서는 이미 정혼 연회의 준비를 마쳤으나, 중요한 두 사람이 아직 도착하지 않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두 사람은 바로 안왕과 위왕이었다.북당의 두 친왕이 도착해야만 연회를 시작할 수 있었다.한편, 경천 황제는 내내 택란을 만나고 싶어 했다.지난 3년 동안, 그는 그녀와 재회할 순간만을 간절히 기다렸다.3년간 간절히 바랐던 그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에 그는 들떴지만, 첫 만남은 너무도 중요했다.그는 서두르지 않고 차분히 준비된 상태에서 그녀를 만나고 싶었다.그리고 지금 자신의 감정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조차 모르는 상태였다. 그것이 사랑인지 아닌지도 정의할 수 없었다. 그저 그녀가 자신의 눈앞에 생생히 서 있는 모습을 보고 싶을 뿐이었다.그는 사실 가장 힘들었던 시절에 조정을 되찾아 그녀와 혼사를 올리겠다고 다짐했던 적이 있었다.물론 지금 그녀는 아직 어리기에, 혼담을 논하기엔 이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