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문호의 말이 맞았다. 낳은 아이가 일찍 요절한다면 얼마나 면목이 없겠는가. 성 밖의 백성들은 오랜 기간 친왕비들이 아들을 낳지 못하자 황실에 대가 끊겼다며 망조가 아니냐는 소문이 돌고 있다. 기왕비가 회왕에게 병이 옮았다는 것을 알고 유후궁이 얼마나 정성껏 왕비를 돌보았는가. 그녀의 자애로운 행동은 칭찬받아야 마땅한 일이다. 태후는 슬피 울며 “하늘도 무심하시지!”라고 소리쳤다.우문호는 흐느끼는 태후를 보고 그녀가 이 일을 잊는 데 한참 걸릴 것이라고 생각했다.‘모든 일은 시간이 약이다.’그는 야윈 황조모의 등을 쓰다듬으며 탕을 조금이라도 더 먹으라고 했다.태후는 탕을 마신 후, 우문호를 보았다.“너도 혼인을 한지 일 년이나 됐는데, 왜 좋은 소식이 없는 거야? 안 될 것 같으면 빨리 후궁이라도 들여야 하는 거 아니냐? 지금 일곱째도 후궁을 들인다고 하는데 너도 빨리 알아보거라.”황조모는 시종일관 가장 아끼는 손주인 우문호에게 기대를 걸었다. 물론 현비가 자신의 조카딸이고 그녀의 친정에 몇 년간 아무 일이 없었기에, 그녀는 늘 다섯째가 빨리 정권을 잡아서 친정을 부양하길 바랐다. 그러나 친왕들 모두 자신의 손자이기에 우문호를 예뻐하는 것을 겉으로 티 낼 수 없었다. 우문호는 태후의 입에서 후궁 얘기가 나오는 것을 두려워했다. “후궁을 맞이하는 일은…… 손자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요즘 저희 내외도 사이가 좋으니…….”“입 다물 거라! 네 부인은 질투도 많고 속도 좁지 않느냐! 황후가 주최한 행사에서 후궁 목록을 마련해 줬더니 다른 친왕비들은 감사하다며 받아 갔는데, 네 부인만 보는 둥 마는 둥! 자기 눈에 차는 사람이 없다고 했다더라! 그때 황후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 아느냐? 혼인한지 일 년이 다 되어가는데 아기 소식은 없고, 너도 이제 마냥 어린 나이는 아니지 않느냐?”우문호가 원경릉을 언급하자 태후는 화가 치밀었다. 우문호는 원경릉이 태상황에게 총애를 받고 있으니 당연히 태후도 그녀를 예뻐할 줄 알았다. 하지만 그의 예상과 달리 태후
“초왕비하고는 잘 지내는 것이냐?” 태후가 의심의 눈초리로 우문호를 보았다.요즘 들어 초왕이 나약하고 무능하다는 소문이 부중에 자자하게 퍼졌다. 태후는 이 소문의 진위가 궁금했다.다섯째의 성질대로 라면 원경릉 쯤이야 겁낼 일도 아니겠지만, 태후는 소문 때문에 걱정이 됐다.“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제가 여인 하나쯤 간수하지 못하겠습니까?”우문호가 웃었다.“그럼 됐다. 초왕비가 세자를 낳기만 하면 좋겠다. 정비(正妃)가 아들까지 낳는다면 얼마나 좋을까.”“암요. 그렇죠!”우문호는 나갈 채비를 했다. 여기에 더 있다가는 태후에게 세뇌를 당할지도 모른다. 우문호가 나가려고 하자 태후는 말을 이어 그를 붙잡았다.“맞다! 네 부인이 여섯째의 병을 고쳤으니, 기왕비도 빨리 고치라고 해라.”우문호는 순간 표정이 굳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태후가 저 말만은 하지 않길 간절히 바랐었다.“왜? 하기 싫어?”태후가 차갑게 물었다.“그럴리가요. 다만 형수께서도 제 부인에게 부탁하지 않은 일을 다짜고짜 가서 치료할겠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게다가 이번 달에 그녀가 월경을 하지 않았습니다. 임신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가능성이 있으니 기다려 보는 게 좋겠습니다. 그녀가 신경 쓰지 않게 후궁 얘기도 삼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정말이냐!” 태후는 원경릉이 월경을 하지 않는다는 소리에 기뻐하며“혹시 모르는 일이니 매사 주의하거라! 그리고 어의를 불러다가 진맥을 하고!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한다!”라고 말했다.“알겠습니다.” 태후의 잔소리에 우문호는 체념한 듯 대답했다.태후는 몇 마디 덕담을 덧붙이고는 그에게 어서 부인을 챙기러 가보라고 했다.그날 저녁. 초왕부.“아 참, 오늘 얼떨결에 태후 마마께 네가 임신했을 수도 있다고 말했어.”우문호가 원경릉에게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이 말을 듣고 원경릉은 탕을 마시다가 국물을 뿜을 뻔 했다. “무슨 소리야? 내가 어디를 봐서 임신을 했다는 거야?”“태후 마마께서 후궁을 들이라고 압력을 주시고,
우문호는 월경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월경을 시작도 안 했는데 황조모에게 네가 임신했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니…… 이것 참 큰일이네.”옆에서 듣고 있던 녹주가 원경릉을 쳐다보았다.“아닌데, 왕비님 아직 월경 안 하셨습니까? 그럴 리가 없는데 이상하네. 좀 기다려 봅시다. 두 달에 한 번 할 때도 있습니다.”“내가 월경을 시작했었어?” 원경릉이 놀라서 물었다.우문호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네가 시작을 했는지도 모르는 거야?”원경릉은 잠시 침묵하더니 “하다 안 하다 하니까, 몰랐을 수도 있지!”“하다가 안 하다가 한다고? 그게 가능해? 너 혹시 나한테 뭐 숨기는 거라도 있어?” 우문호가 물었다.“내가 뭘 숨긴다고 그래?” 원경릉은 화제를 돌리기 위해 말을 이었다.“유후궁에 관해서는 부황께 말씀 잘 드렸어?”“부황께서도 생각이 다 있으신 것 같아. 내 말에 아무런 답이 없으셨어.” 우문호가 답했다.원경릉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부황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니 우린 이만 손 떼자.”라고 말했다.그녀는 다바오를 보더니 “다바오! 우리 산책 가자!”라고 말했다.다바오가 신나서 뛰어왔다. 원경릉은 녹주를 보고 “녹주야 너도 같이 가야겠다.”라고 말했다.녹주는 원경릉을 따라 마당으로 나왔다. 원경릉은 우문호가 따라 나오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낮은 목소리로 녹주에게 물었다.“맞다 녹주야. 나 월경 말이야…… 세 달에 한 번 할 때도 있지?”“왕비께서는 정말 모르시는 겁니까?” 녹주가 의아해서 물었다.“알지!” 원경릉은 손을 흔들며 “그냥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거야. 그럼 너는 한 달에 한 번 하느냐?”그녀는 자연스럽게 당대 여인들의 평균 월경 기간을 물었다.“그렇죠. 한 달에 한 번씩.” 녹주가 대답했다.원경릉은 원주가 월경 불순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다.“왕비님 어의를 신청해서 진찰을 받는 건 어떠십니까? 녹주가 물었다. 부중에 친왕비들이 임신을 하기 위해 산전준비에 열심히 하는 것을 보니 괜히 녹
“즐거워? 매일 너와 다바오랑 같이 시간을 보내야겠구나. 아들과 놀아주는 연습이라고 생각해야겠다.”‘또 아들!’원경릉은 이 주제에 대한 대화는 피하고 싶었다.이 시대의 여인은 혼인 후 일 년 내에 아이를 낳지 못하면 죄인이나 다름없었다. 황실 다른 이들이 임신을 재촉하는 것은 그렇다고 쳐도, 그가 계속 구시렁거리며 압박을 하다니!원경릉은 마음이 복잡했다.다음날, 원경릉은 노마님을 뵈러 친정에 갔다. 매번 그녀는 정후부에 사람이 가장 없는 틈을 타서 갔다. 그러나 이번에는 난씨와 둘째 노마님이 그녀를 살뜰히 챙기며 점심까지 차려주었다.노마님의 병세는 여전히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원경릉은 단박에 노마님이 약을 제대로 먹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챘고, 손씨 아주머니에게 약이 얼마나 남았는지 묻자 아주머니는 많이 남았다며 보여주었다. “조모!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약을 잘 먹야 한다고요! 왜 이렇게 말을 듣지 않으십니까?”“죽고 사는 것은 하늘의 뜻이다. 하늘이 나를 데리고 가려고 하면 약을 먹어도 데리고 갈 것이야. 만약 나를 데리고 갈 마음이 없다면, 약을 먹지 않고도 살 수 있다.”“그게 무슨 해괴한 소리입니까?” 원경릉이 미간을 찌푸렸다.“늙은이는 신경 쓰지 말고, 네 얘기나 해보자. 왕야와 잘 지내는 것이냐?”노마님이 물었다.“갑자기 그건 왜 물으십니까?” 원경릉이 어리둥절했다.옆에 서있던 손씨 아주머니가 웃으며 원경릉을 보았다.“황제께서 아들을 낳은 친왕을 태자로 책봉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으니, 노마님께서는 언제 손주를 안아 볼 수 있는지 궁금하신 모양입니다.”어딜 가나 임신! 출산! ! 원경릉은 돌아버릴 것 같았다.“조모, 그것도 다 하늘의 뜻입니다! 안 그래도 그 소리를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듣습니다. 미치겠어요!”원경릉이 분노했다.“내가 묻지 않으면, 네 아비가 물을 것이야. 요즘 네 아비가 너를 찾아 왕부에 들어갈 생각을 하고 있거든.” 노마님이 담담하게 말했다.이 말을 들은 원경릉은 깜짝 놀라 “저 이만 가볼게요
정후부 문을 나서자 원경릉이 원경병을 붙잡았다.“어찌 된 일이야? 혼인에 노력을 안 한다니?”침울한 표정의 원경병이 그녀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말도 마세요. 신랑감이라고 데리고 오는 작자들이 다 아버지 뻘이라고요! 괜찮다 싶으면 첩자리 입니다.”원경릉은 정후부의 원팔룡이 악명 높은 투기꾼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이득을 보기 위해서라면 앞뒤 가리지 않고,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었다.특히 딸을 시집보내면 큰 수확을 하게 되니 그는 머리를 굴려 가장 큰 이익이 되는 곳을 찾아다녔다. 젊고 문벌이 높은 사내는 후작을 업신여겼고, 문벌이 낮은 사내는 자신의 신분이 부끄럽다고 여겼다. 결국 남은 것은 안정적인 직업의 좋은 집안 출신인 나이 많은 남자들이었다. 그는 비록 첩자리로 들어가는 거지만, 나이 많은 본처가 죽기만 하면 그 자리를 꿰차고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원경병의 말을 들은 그녀는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네 혼사는 내가 좀 알아볼게.”“응.” 원경병은 언니에게 딱히 기대하지 않는 듯 대충 대답했다.초왕부로 돌아온 원경릉은 지나가는 희상궁을 붙잡고 물었다.“왕비님께서 주선한 사내가 부친의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딸은 이익이 맞으면 팔아버리는 것이니 괜한 신경 쓰지 마세요.” 희상궁이 신랄하게 말했다.‘이 시대에서 한 번 혼인을 하면, 이혼도 못하고 죽을 때까지 쭉 살아야 하는데! 여자에게 너무 가혹하다!’원주인 원경릉도 가혹한 예의 하나였다. 때문에 원경병의 혼사는 원경릉에게 꽤 중요한 일이었다.저녁에 우문호가 왕부로 들어오자 그녀는 우문호에게 물었다.“혹시 주변에 겸손하고 똑똑한 미혼 남자 있어?”우문호는 이상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다.“그걸 알아서 뭐 하게? 기억해, 너는 이미 임자가 있는 몸이야.”“아니! 나 말고, 네 처제!” 우문호의 경계하는 눈빛에 원경릉은 웃음이 터졌다.“처제? 아 그 병풍이?” 우문호는 사내대장부 같은 처제가 생각이 났다.“병풍이라니? 경병이라고 불러!” 원경릉은 그를 노려보
“처제가 구사한테 뭐라고 했는데? 설마 아픈 곳을 건드리는 말은 한건 아니지?” 우문호가 물었다.“어디 있어요? 이렇게 한 마디 물었을 뿐이야. 근데 구사가 본 체도 안 하고 그냥 가더라니까.”그녀가 그때의 일이 생생하게 기억이 났다.“구사가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네. 됐다 내가 한번 물색 해볼게.”“가문보다는 인품이 중요해. 너처럼 가정폭력 하는 남자는 안돼.”원경릉이 신신당부했다.우문호는 얼굴이 붉어졌다.“누가 폭력을 써? 내가 언제 그랬어?”가정폭력이라는 단어부터가 부정적이다. 원경릉은 이 단어를 듣기만 해도 소름이 끼친다.“이미 너는 새사람이 됐잖아. 옛날에 비하면 완전 환골탈태했지.”원경릉이 웃으며 말했다.우문호는 조소를 띠며 “환골탈태를 누가 했는지 모르겠네. 너야말로 새사람이 됐지. 혹시 몰라…… 진짜 다른 사람일 수도? 곤장 맞은 상처만 없었으면 나도 의심했겠어.”라고 말했다.“정말?” 원경릉이 배를 잡고 웃었다.우문호는 방정맞게 웃는 그녀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네가 암탉처럼 웃어젖힐 때마다 찜찜하단 말이야…….”원경릉이 얼마나 웃었는지 눈물을 닦으며 “암탉은 너지.”라고 말했다.우문호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나는 사실 네가 약 상자에 대해서 뭔가 숨기고 있는 것 같아…… 의학에 문외한이던 네가 갑자기 어의보다 뛰어난 의술을 가지게 되다니, 내가 네 약 상자의 약들을 빻아서 어의에게 보여주니 어의도 이런 건 처음 본다며 모르겠다고 하던데.”“뭐야? 내 뒷조사라도 한 거야?” 원경릉의 눈이 휘둥그레졌다.“모르는 게 있으면 찾아봐야지.” 우문호가 떳떳하다는 듯 말했다.“그럼 자금단과 자금탕의 원리를 설명해 봐. 생사의 갈림길에서 왜 그걸 먹으면 살아날 수 있는 거지?”“자금단은 수십 종의 귀한 약재를 정제해 만들었기에 목숨을 구할 수 있는 거야.”“너 내가 한의학 약리(藥理)를 모른다고 속이려고 하나 본데, 그 수십 가지 귀한 약들은 약성이 모두 같은 거야? 왜 내외상만 치료할 수 있고, 가지고 있
원경릉은 자시가 되도록 우문호가 돌아오지 않자 침상에 누워 엎치락뒤치락 하며 잠들지 못했다. 그녀는 녹주를 불러 그가 언제쯤 돌아올지 알아보라고 했지만, 녹주도 소식이 없다며 어깨를 으쓱했다.‘혹시 무슨 사건이라도 일어난 건가?’보통 큰 사건이 벌어지면 관아에서 늦게까지 연장근무를 했다. 그때마다 우문호는 그녀가 걱정하지 않게 서일을 보내 늦는다고 알려주었는데 오늘은 서일도 오지 않았다.밖에서 ‘쿵쿵’하는 발걸음 소리가 나자 원경릉의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그녀는 침상에서 벌떡 일어났다. 녹주가 뛰어 들어오더니 “왕비님, 서일이 와서 아룁니다.”라고 말했다.원경릉은 피투성이가 된 서일을 보고 깜짝 놀라 기절할 뻔했다. 녹주는 휘청거리는 그녀를 부축하며 “왕비님 괜찮으십니까?” 라고 물었다.“왕야는?” 원경릉이 마음을 다잡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서일은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그녀를 보았다.“일 났습니다! 왕야께서 돈을 많이 잃고, 화가 잔뜩 나셔서 물건을 집어 던지시는 걸 구사가 말리다가 어떻게 된 일인지 왕야와 구사가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둘이 집현국에서 치고받고 난리도 아닙니다! 소인이 말리려고 했지만 역부족이라 왕비님을 찾아왔습니다. 이 일이 황상 귀에 들어가면 분명 크게 화를 내실 겁니다!”“마차를 준비하거라!”원경릉은 내심 우문호가 암살 사건에 휘말린 게 아니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시간까지 도박을 하다가 싸움을 한다는 말에 화가 치밀었다.저번에도 구사랑 치고받고 하더니, 이 두 사람은 무슨 애증관계인지 둘이 애틋하다가도 이따금 죽기 살기로 싸운다. “서일. 어쩌다 피가 이렇게 많이 묻었습니까?” 서일이 피를 닦으며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아 이거요? 돼지 피입니다. 집현국에서 돼지를 잡았거든요. 싸우는데 상대 패거리가 저보고 미천한 신분이라며 돼지 피를 들이부었습니다.”‘패싸움? 한 국가의 친왕이 누군지 모르는 사람들과 모여서 도박을 하는 것도 모자라 패싸움을 하다니.’서일의 말을 듣고 원경릉은 몸
“은화라고요? 얼마나요?” 원경릉은 애써 침착하게 웃어 보였지만, 속에서는 열불이 끓어올랐다.“삼백 냥.”“이백 냥.”“백오십 냥이요!”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손을 들었다.“뭐가 이렇게 많아?”우문호가 화가 나서 그들을 향해 소리쳤다. “저들은 본왕이 술에 취한 틈에 한몫 뜯어내려고 달려드는 거야!”그때 서일이 원경릉 귀에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정말입니다. 저들은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서일아 저들의 이름을 모두 기록해라. 은화는 내일 궁으로 와서 받아 가세요! 초왕부에는 은화가 부족하지만, 다행히도 내가 황상께 받은 은화가 있으니 그거로 드리겠습니다.” 원경릉이 웃으며 말했다.“궁으로 들어오라고요?”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그래요. 내일 아침이니까 잘 기억하세요.” 원경릉이 답했다.그중 청색 옷을 입은 사내가 손을 들었다. “왕비님, 설마 돈을 떼먹으려고 하시는 겁니까?”“떼먹는다고요? 이게 어딜 봐서 돈을 떼먹으려고 하는 거죠? 그럼 뭐 어쩔 수 없죠. 서일아 경조부의 병사들 보고 오늘 도박판에 있던 사람들을 다 데리고 가라고 하거라!” 원경릉이 소리쳤다.“예!” 서일이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서일이 몸을 돌려 경조부로 향하자 사람들이 다 도망갔다.우문호는 화가 잔뜩 나서 도망가는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했다.“이 자식들 봐라? 버러지 같은 것들! 이러고도 본왕의 처제를 얻겠다고 한 것이냐!”원경릉은 그의 말을 듣고 화가 폭발할 것 같았지만 차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며 그를 부축했다. 그 순간 구사가 우문호를 향해 주먹을 휘두르며 달려왔다. “네가 그러고도 내 친구인 것이냐? 내가 너에게 속마음도 터놓았잖아! 그걸 알고서도 원경병에게 신랑감을 구해줘?”원경릉은 구사를 막아서며 왕부로 들어가서 얘기를 나누자고 했다.“예. 처형” 구사가 위엄 있는 원경릉의 표정을 보고 머리를 숙였다. 원경릉은 휙 몸을 돌려 밖으로 나왔다. 우문호의 체면을 생각해서 여기 있는 사람들에게 상냥하게 대하려고 했으나 하나같이 속이 시커먼
안지여는 풍도성 지하감옥에 갇혔다. 빛 한 줄기 없는 지하감옥에서 사방에 끝없는 어둠과 절망만이 안지여를 삼키고 있었다.훼천의 형벌은 12 시진 후면 사라져서, 앞으로 안지여는 그저 한 명의 폐인일 뿐이었다.안지여의 결사대가 성으로 공격해 들어오기 전에, 이리봉청은 오 선생을 찾아내 안지여가 저지른 모든 죄를 고백하게 하고 안풍 친왕이 친필로 받아 적었다. 안지여가 당시 천문 세가를 해친 경위를 소상히 써 내려간 뒤, 오 선생과 안풍 친왕의 직인을 찍고 인쇄해서 대중에게 공개했다.안지여의 죄악은 하늘을 찔러 백성들 모두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안지여의 결사대의 옛 부하들이 본래 성을 공격해 들어가 안지여를 구출할 계획을 세워놓았으나, 안지여의 죄상이 공포된 뒤로 많은 사람들이 해산하였다. 유일하게 무대장군만이 수천 명을 데리고 성으로 쳐들어왔지만, 안풍 친왕과 이리 나리가 이미 대비해둔 덕분에, 경성에서 굴러온 돌이 무대장군의 박힌 돌을 빼내는 전투를 벌였다.풍도성에 온 지 7일째, 안풍 친왕은 풍도성을 접수하고 성에 살던 사람을 쫓아내며 서민으로 강등시켰다.안지여와 소여쌍에 대한 처분은 이리봉청에게 넘겼다.안지여는 캄캄한 지하감옥에서 6일을 지내는 동안, 처음엔 침착한 척 가장했으나 사흘째가 되자 울부짖으며 악독한 저주의 말을 내뱉더니, 나흘째가 되자 용서해달라고 애원하며 참회했다.손발의 힘줄이 끊어진 안지여는 일어나 걸을 수도 없고 심지어 스스로 몫숨을 끊을 힘도 없었다.그 와중에 매일 누군가가 먹고 마시도록 해주고, 상처도 치료해 주어 살 수 있다는 부질없는 희망을 품게 했다.훼천의 말에 따르면, 진정한 절망은 살아도 죽느니만 못하고,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것으로, 온 마음으로 죽기를 바라지만 살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었다가, 안간힘을 쓴 뒤 다시 절망에 빠지는 것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으로, 사람을 한없이 죽였다 살렸다 괴롭힌다고 했다.결국 안지여를 죽일지 말지 여부는 이리봉청에게 달렸는데, 그녀는 안지여를 단번에 죽여 천문 세가
안지여의 이마에 파란 힘줄이 불끈불끈했으나 냉정을 가장했다. “내가 두려워할 줄 알았나 보지? 죽음도 두렵지 않은데 뭘 더 두려워하겠어?”“넌 두려울 것이야!” 이리봉청이 고개를 돌려 이리 나리를 보고 살짝 그의 팔을 잡았다. “내가 오는 길에 늑대파 사람이 그러던데, 천하에서 제일 잔혹한 형벌을 아는 사람이 늑대파에 있다고. 그게 사실인 것이냐?”이리 나리가 가볍게 답했다. “물론 사실이죠. 훼천이라고 합니다. 늑대골 출신이에요.”“안지여가 버틸 수 있는지 어디 한 번 보고 싶구나.” 이리봉청이 말했다.이리 나리가 엄숙한 태도로 명을 내렸다. “훼천!”그러자 훼천이 급히 나왔다. “이리 나리, 분부하시지요!”이리 나리는 그가 짐짓 냉정한 척하고 있으나 눈빛이 조금씩 허물어져 가고, 몸까지 부들부들 떠는 것이 아주 만족스러워 훼천에게 담담하게 말했다. “시작해!”안지여가 갑자기 큰 소리로 욕했다. “난 네 아버지거늘, 감히 나에게 손을 대다니, 천벌을 받아 마땅한 놈 같으니라고!”이리봉청이 이 말을 듣고 잠시 주저하는 눈빛으로 이리 나리를 바라봤다.이리 나리가 이리봉청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제 아버지는 오직 저를 키워주신 안풍 친왕뿐이십니다.”이리봉청이 살짝 안도했다. “저 인간이 단지 나만 해쳤으면 네 체면을 봐서 놔줬겠지만 천문 세가의 수백 명의 목숨을 앗아갔으니 난 용서할 수 없구나.”“이리봉청, 너 언제 이렇게 악랄하게 변했어? 죽이려거든 그냥 죽여. 난 천문 세가 사람을 죽이긴 했어도 그들을 괴롭히진 않았어. 네가 날 죽이려거든 깨끗하게 단번에 죽여!”안지여가 크게 노해 몇 번 몸부림을 치다가 상처가 벌어지는 바람에 배에서 선혈이 흘러나오고, 훼천이 가까이 다가가자, 눈에 두려움이 깊어졌는데, 늑대골 출신 훼천은 온몸에서 피비린내가 뿜어져 나와 안지여를 덜덜 떨게 했다.“이리율!” 안풍 친왕비는 시ㅈ가하기 전에 이리 나리를 불렀다. “내가 여기서 네 엄마와 같이 있을 테니 넌 먼저 나가 있거라!”이리 나리가 안풍 친왕비에게
안지여에게 구원 병력이 없는 상황에서, 이리 나리 일행이 성을 제압하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대오가 경성에서 출발하기 전에, 안풍 친왕비가 미리 사람을 풍도성으로 보내 각처, 특히 성 수비군과 군대에 잠입시켜, 음식에 효과가 천천히 나타나는 독을 풀어, 오늘 중독 증상이 나타나도록 독의 분량을 조절했다.적어도 내일까지는 안지여를 도우러 올 사람은 없었다. 독성은 적어도 이틀이 지나야 깨끗해지기 때문에 이틀 동안 그들은 설사와 전신 무기력으로 성에 무슨 일이 있다는 걸 알아도 와서 도울 수 없었다.그리고 그들이 기력을 회복할 때쯤이면, 안지여는 벌써 죽었을 것이다.안풍 친왕과 이리 나리는 성을 통제하고, 안지여 부부를 제압해 두 사람을 줄로 묶고 지혈시켜 주었다.안지여는 요 몇 년 동안 자신이 상당히 대단하다고 여겼다. 이는 풍도성이 부유하기 때문으로, 돈으로 많은 사람을 살 수 있었으며, 여러 곳에서 추켜세워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처절하게 패배한 적이 없었던 이유는 진정한 적이 없기 때문으로, 주변의 떠돌이 비적은 작은 마을 규모로 너무 작아서 소탕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결코 그가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적이 너무 약해서였다.조정 사람과 비교했을 때, 그는 제대로 훈련받은 적 없는 비적었기에 일격도 감당할 깜냥이 못됐다.이리 나리는 둘을 중정에 묶어 두었다. 온 바닥에 남은 음식과 깨진 기와가 널브러져 있는 것을 본 안지여는 마음속 깊이 분노가 일었다. 자신의 생일날, 그를 다치게 한 것이 바로 그의 친자식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더욱이 오늘 이렇게 많은 고수가 현장에 있었는데도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이런 결말을 맞다니 너무 불쾌했다. 이리 나리가 이리봉청을 부축하고 안지여 부부 앞으로 가서, 그녀가 안지여 부부를 내려다보자, 그들은 낭패에 달가워하지 않는 기색으로, 이리봉청은 분노하는 마음과 함께 서글픈 마음도 들었다. 그들을 죽이면 커다란 복수는 이뤄 천문 세가 망자의 원혼은 달랠 수 있었다.하지만 저들을 이렇게 쉽게
“그럴 필요 없을 것 같은데?!” 이리 나리가 검을 휘두르며 안지여를 겨누자, 안지여가 공중으로 뛰어올라 후퇴했다.공자들은 돕고 싶었으나 검은 옷을 입은 노인들에게 바로 제압당했다. 안지여는 이리율 것으로 그들은 주변 사람을 제압하기만 할 뿐 옆에 서서 전투를 관전하고 있었다.이리율의 무공이 얼마나 뛰어난지 그를 가르친 안풍 친왕 부부를 제외하고, 사실 많은 사람들은 모르고 있었다.이리율의 검법은 신속하고 맹렬해서 안지여는 상대하느라 쩔쩔매고 구석으로 몰리고 있었다. 성안의 호위들은 늑대 무리와 늑대파, 홍매문 사람들에게 막히는 바람에 안지여는 홀로 고전을 면치 못했는데 그래도 아직은 버틸 수 있었다.하지만 30분을 못 가서 안지여는 질게 틀림없었다.놀란 나머지 계속 실성해 있던 소여쌍이 갑자기 이리봉청을 향해 바싹 마른 손을 뻗어, 그녀의 목을 조르며 광적인 집착과 분노에 사로잡혀 성질을 부렸다. “멈춰, 다들 멈추라고. 안 그러면 내가 이년을 죽여버릴 것이니까!”소여쌍은 무공을 할 줄 알았지만 잘하지 못한 것이 어릴 때부터 계속 중병을 앓아 무공 연습에 소홀했고 성주 부인이 된 뒤로는 더욱 병기에 가까이할 일이 없었지만, 공력만큼은 아직 약간 있었다.소여쌍은 증오의 힘으로 이리봉청의 목을 졸랐는데, 소여쌍이 조금만 더 힘을 주면 이리봉청의 목을 부러뜨릴 것만 같았다.안풍 친왕이 차가운 눈빛으로 나서려 하자, 안풍 친왕비가 말리며 고개를 살짝 흔들었는데, 그럴 필요 없다는 뜻으로 뒤에 있던 사람들에게도 참으라는 눈짓을 하자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모두가 이리봉청이 제압당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손가락으로 뭔가를 쥐고 있어 소여쌍의 어깨 위를 휘감고 팔을 눌러 소여쌍이 머리를 돌리게 했다. 이리봉청 손에 쥔 것은 바늘로, 그대로 소여쌍의 오른쪽 눈을 찌르고 들어갔다.소여쌍이 절규하며 이리봉청을 놔주고 선혈이 흐르는 눈을 움켜쥔 채 비틀거리다 바닥에 쓰러져 데굴데굴 구르며 새된 소리를 지르는데, 원망과 저주의 말을 끊임없이 쏟아
풍도성 중정에는 안지여의 아들들과 사위가 그의 곁에 남았는데, 크고 작은 부상을 입어 점점 공포에 질려가고 있었다.‘이 사람들, 아주 대단하구나!’안지여는 이리봉청을 보고 비록 조금 냉정해 보였지만, 여전히 놀라운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갑자기 소여쌍이 큰 소리로 웃으며, 몸을 앞뒤로 흔들며 눈물을 찔끔거리더니 완전히 미친 사람처럼 갑자기 웃음을 멈추고 부들부들 떨리는 손가락으로 이리봉청을 가리키며 원망했다. “뜻밖에 네가 안 죽었단 말이지? 게다가 아들까지 있고. 참으로 황당하구나. 정말 너무 황당해. 원래 죽어야 했을 인간은 죽지 않고, 잘 살아야 할 사람은 36년간 괴로움을 당했어. 이리봉청 네가 날 비참하게 만들었으니 넌 이제 지옥에 떨어져야 해.”이리봉청은 소여쌍의 말을 들은 체 만 체했는데, 그녀 눈에는 지금 안지여만 들어왔다.안지여는 36년을 살아왔지만, 이리봉청에게 있어 36년은 마치 사라진 시간처럼 멸문지화의 원한이 어제 일 같았다.안지여도 이리봉청의 눈에서 분노와 악랄함을 보고, 처음으로 마음속에 두려움을 느꼈다.안지여는 억지로 감정을 가라앉히고 말했다. “네 사람을 데리고 가. 지난 일을 묻지 않을 테니. 그렇지 않으면 풍도성에서 곧바로 10만 대군이 올 것으로, 살아서 도망갈 생각은 꿈도 꾸지 않는 게 좋아.”이리봉청의 목소리가 낮게 잠겼다. “우리는 이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바로 네 성으로 쳐들어갈 수 있어. 넌 이미 졌어.”안지여가 웃었다. “졌다고? 그래?”안지여는 수하의 대장군이 믿음직해서, 그들을 당하게 놔줄 수도 있다고 여겼다. 대장군의 부대는 분명 치밀하게 준비되어 있을 것으로, 아마 지금쯤이면 궁수들이 이미 배치를 마치고 그들을 전부 쏴 죽이기 위해 기다리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이리 나리가 이리봉청의 손을 잡고 말했다. “어머니, 저자와 말 섞으실 필요 없어요. 앉아서 지켜보시기만 하면 됩니다!”말을 마치고 의자를 올리더니 이리봉청을 부축해서 앉혔다.안지여가 이리 나리를 보는데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안지여가 퍼뜩 눈을 돌려 이리 나리를 보았다.‘이리봉청이 저자를 아들이라고 불렀다는 건러니까?이리 나리는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을 찬찬히 훑어보더니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안 성주와 좀 오래된 원한을 따져야 하는데, 관련되기 싫으신 분은 자리를 피해 주시지요!”그때 한 사람이 검을 짚고 일어나 호통을 쳤다. “넌 도대체 어떤 놈이냐? 무슨 자격으로 자리를 피해라 마라야? 안 성주를 귀찮게 할 생각이면 일단 나부터 통과해 보시지!”그는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장검을 뽑아 파죽지세로 이리 나리를 향해 휘둘렀다.이리 나리는 손을 살짝 움직여 손바닥으로 칼자루를 밀자, 검이 날아가며 그 사람의 귀를 베어 한 줄기 피가 공중에 뿌려지더니, 방금까지 기고만장하던 자가 비명을 지르고 귀는 바닥에 떨어졌다.검이 다시 이리 나리 수중으로 정확히 돌아왔다.이 모든 게 3초 안에 벌어진 일이었다.“회선검?” 검법을 아는 사람들이 깜짝 놀라며 외쳤다.현장은, 숨소리마저도 들리지 않았다.회선검은 검마의 검법으로, 그렇다는 건 저 사람이 검마의 계승자?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무리에서 검마를 찾았다. 과연 두 손으로 검을 안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도 차가운 안광이 느껴졌다.과연 진짜 검마구나, 사람들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검마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이리 나리를 흘끔 보더니 속으로 의아해했다. ‘이 자식, 언제 내 비장의 검법을 배운 거야?’이리 나리의 검 끝에선 아직 선혈이 떨어지는데, 여전히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말했다. “이 아수라장에 끼고 싶은 거라면, 제가 무례하다고 원망할 생각 마세요.”“무엄하도다!” 안지여가 몹시 놀랐다가 천천히 정신을 차리고 눈을 치켜뜨며 이리 나리를 노려봤다. “너는 내가 누구인 줄 아느냐? 내가 네 아버지다!”이리 나리가 코웃음을 쳤다!안지여의 몇몇 아들이 달려 나와 소리쳤다. “아버지, 저희가 지켜드리겠습니다.”안풍 친왕이 젓가락을 던지고 일어나 차갑게 명을 내렸다
오늘은 성주의 생일이기에 경사라 섣불리 피를 볼 수는 없으므로 칼은 빼 들었지만 먼저 나서서 늑대를 죽이는 사람은 없었다.안지여는 어두운 눈빛으로 ‘늑대 무리라고? 척후병의 보고로는 안풍 친왕이 늑대 무리를 끌고 온다고 했는데, 저들이 의외로 성으로 직접 쳐들어 왔다 이거지?’라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안지여는 잔을 들고 꿈적도 하지 않은 채, 무너지기 직전까지 미동도 없는 태산처럼 냉정하고 침착했다. 늑대 무리는 안으로 들어온 뒤로 두 패로 나뉘어 서서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을 호시탐탐 엿보며 으르렁거렸다.“성주님, 성주님, 저들이 기어코 쳐들어오겠다고….” 문지기가 외치는 소리는 들렸으나 사람은 보이지 않더니, 그보다 조정에서 보낸 사람들이 먼저 들이닥쳤다.앞에 걸어들어오는 두 사람을 안지여는 본 적이 있었는데, 바로 안풍 친왕 부부로 예전에 그들이 천문 세가 사람들을 조사하러 왔을 때 그에게 속은 적이 있었다. 비록 당시 일면식 뿐이었으나 천문 세가 일을 캐내고 있다는 사실에 놀란 탓에 그들의 얼굴을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그런데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어째서 별로 변한 게 없는 거지?’안풍 친왕 부부 뒤에 따라오는 10여 명의 검은 옷을 입은 노인은 그들의 호위 무사일 것으로, 주인인 안풍 친왕 부부는 별 표정이 없었으나,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들어와 고개를 들자 괴팍하고 악랄한 얼굴이 안지여 마음에 들지 않았다.안지여는 여전히 일어나지 않았고, 미소는 띠고 있었지만 매서운 눈빛으로 저들이 돌계단을 오르면 그때 일어나도 늦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게 그의 태도였다.하지만 안풍 친왕 부부는 돌계단을 오르지 않았고, 손님 중 건배를 권하느라 자리를 비운 사람들 의자에 검은 옷을 입은 노인들이 차지하고 앉아, 그들을 대놓고 밀치더니 품에서 자기 젓가락을 꺼내 옆 사람 상관하지 않고 먹기 시작해 사람들이 다 경악했다.그들이 자리를 잡고 앉자 뒤따라 들어오는 사람들이 보였다.두 사람이 사람들에 둘러싸여 천천히 걸어들어오고 있었
풍도성 안은 술잔을 주고받고 건배하며 흥겨운 잔치가 한창 무르익고 있었다.안지여는 오늘 황금색 예복을 입었는데 예복에 거대한 이무기를 수놓았으며, 황실의 밝은 황색과는 약간 구별되었지만, 자세히 보지 않으면 진짜 곤룡포로 착각할 만큼 거대한 이무기가 하늘로 날아오르는 형상이 구름을 뚫고 솟아오르는 용과 매우 흡사했다.안지여는 자신의 야심을 이미 조금도 감추지 않았다.당연히 안지여는 오늘도 야심을 감출 생각 없이 손님들에게 보란 듯이 자세를 잡았다. 심지어 인근 지역 조정 관리들이 손님으로 왔어도 안지여는 전부터 맺어온 관계였기에, 그들과 개인적인 친분이 매우 두터워 산 넘고 물 건너 저 멀리 있는 황제가 그들을 시시콜콜 관리할 수 없었다.그 자리 있던 사람들은 모두 오늘 황실에서 파견한 일행이 온다는 것을 알고, 연회석에서 큰 소리로 물었다. “성주님, 듣자하니 안풍 친왕 전하와 이리 부마께서 오늘 오신다던데 어째서 안 보입니까?”안지여가 잔을 들고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진심으로 생일을 축하한다면 결국 오겠지요.”“여정을 듣기론 오늘 분명 풍도성에 도착한다고 했는데, 어째서 밤이 되도록 아직 안 보입니까? 설마 성주님이 직접 나가서 맞이하셔야 하는 건 아니겠지요?”“성주님이 가서 맞이하셔야 한다고? 아주 허세가 대단한데? 퉤!”“누가 아니랍니까? 진심으로 생신을 축하하는 거였으면 며칠 전에 풍도성에 도착해 성의를 보여야지, 오늘까지 늑장을 부리다가 늦게서야 와서, 아직도 잔치에 오지 않은 건 분명 성주님의 체면을 안중에도 두지 않은 행태입니다. 제가 보기에 못 들어오게 막고 돌려보내시지요, 마음만 받은 셈 치고요. ”“맞습니다. 그동안 조정에서는 풍도성에서 받은 공물이 적지 않았으니, 만족한 줄도 알아야죠.”“풍도성은 더 이상 조공을 바칠 필요 없어요. 뭐 때문에 그럽니까? 수백 년 전에 풍도성은 원래 북당의 영토가 아니었어요. 선을 긋고 나와 독립해야 합니다.”모두 안지여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서, 몇 잔 들어가자, 비위를
소여쌍의 욕은 거의 반 시진 동안 계속되었다. 이것도 별로 드문 일이 아니라 무쌍거 사람들은 다 익숙해져 있었다. 성주가 오지 않거나 소여쌍이 아프기 시작해도 이렇게 욕을 해댔다.욕하다 지치기를 기다렸다가 늙은 몸종이 가서 달랬다. “부인 그러실 게 뭐가 있으십니까? 몸이 가장 중하십니다.”소여쌍이 의자에 기대 늘어졌다. 극도로 피곤해 풀린 눈으로 천정을 보며 비참함이 가슴 깊은 곳을 타고 내렸다. “오늘이 초엿새지?”“네!” 늙은 몸종이 대답했다.소여쌍이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 “곧 15일이구나. 또 내 명을 재촉하는 고통이 오겠지. 죽으면 죽었지 다시는 그 고통을 느끼고 싶지 않다.”그러자 늙은 몸종도 매우 괴로워했다. “부인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고통도 며칠이면 그럭저럭 지나가서, 그동안도 그렇게 지내셨잖아요?”“며칠이면 뭐 그럭저럭 지나가나?” 소여쌍이 잔인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건 네가 이 고통을 안 당해봐서 그래. 이게 다 이리봉청 그년 짓이야. 오빠가 그년을 쫓아가서 죽이게 한 걸 정말 후회해. 그년을 잡아 와서 가두고 내가 한 번씩 아플 때마다 그년을 갈기갈기 찢어발겨 나보다 수천 수백 배 고통스럽게 해야 했어.”늙은 몸종이 소여쌍의 손을 쥐었다. “부인 그런 생각 마세요. 벌써 죽은 사람을 이제 와서 생각해 봤자 아무 도움도 안 됩니다. 성주님과 자꾸 다투지 마세요. 자꾸 다투시다 보면 감정이 사라집니다.”소여쌍이 처연한 웃음을 지었다. “오빠는 진작부터 나한테 아무 감정 없어.”“성주님은 이리봉청에게 아무 감정 없으세요. 감정이 있을 리도 없고요. 안 그러면 당시 부인을 위해 이리봉청을 죽이고 천문 세가 사람을 다 죽이셨을 리가 없죠.”소여쌍이 고개를 돌리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전에는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요 몇 년간, 성에 들어온 여자들 생긴 걸 보라고. 전부 이리봉청을 쏙 빼닮았잖아? 오빠는 역시 후회하고 있는 거야. 날 위해 이리봉청을 죽인 걸.”소여쌍은 늙은 몸종의 손을 잡는데 고여서 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