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왕이 내무부 일을 인계받았을 때도 장부는 아주 깔끔했다. 나중에 사람을 시켜 정리하게 하고 지출 항목을 명확하게 확인한 다음이라 태상황의 조사 명령에 쉽게 장부를 가져갈 수 있었다.태상황이 왜 아바마마의 장부를 조사하려는지 몰랐기 때문에 약간 걱정이 된 회왕은 우문호에게 같이 가자고 했다.우문호도 약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째서 아무런 이유도 없이 내무부 장부를 조사한다고 하시지? 설마 태상황 폐하께서 아바마마께 무슨 오해라도 하시는 게 아닐까?’우문호는 회왕을 따라가 내무부 지출을 살펴보는 것이 자신에게도 좋은 경험이 될 것 같았다.태상황은 장부를 벌여놓고 주 재상을 불러 살펴보게 했는데, 주 재상이 한 권 한 권 넘기며 보자 안풍 친왕이 말했다. “그렇게 고생할 필요는 없네, 올해 걸 보거라.”그러자 주 재상이 올해 장부를 찾았다. 장부는 월별로 나뉘어 있고 한 달 치만도 몇 권이나 돼서 족히 반 시간이 넘게 걸려 눈가가 다 짓무를 정도였다. “이 지출에 무슨 문제가 있죠? 제가 보기엔 정상인데요. 전부 필요한 데 쓰인 지출이라.”“필요한 데 쓰인 지출이긴 하지, 그러니 하사한 부분만 골라내 보거라.”주 재상이 일일이 대조하며 내무부에서 하사한 은자 항목을 추려내 다른 공책에 베껴 썼다.각 친왕부에 하사한 은자 외에도 다른 황실 자제와 관리에게 하사한 것도 같이 베꼈는데 일 년 치 은자가 상당했으나 여러 친왕부에서 아이를 낳았으므로 하사금을 내리는 것도 당연했다.하지만 우문호는 놀라 눈이 동그래졌다. 아바마마께서 초왕부에 하사한 것을 보고는 물었다. “이렇게나 많았나?”열 몇 줄로 된 금액은 합쳐서 대략 8만 냥 정도 됐는데 그중에 곡식 종류도 있었다. 올해 계란이가 태어나 아바마마께서 한 번 하사하신 적이 있었고, 다른 건 선물로 주셨다. 우문호가 진지하게 보더니 ‘이거 아닌데, 이건 작년이고, 아니 작년에 아바마마께서 이렇게 많이 하사하셨던가? 원 선생이 말을 안 했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문호 뿐만 아니라 회왕도 놀랐
태상황이 회왕에게 물었다. “여섯째 너는?”회왕은 당황했지만 태상황의 체면을 지켜주었다. “거의 비슷하네요.”손자들 말이 참인지 거짓인지 태상황이 모를리가 없기에 한숨을 푹 쉬며 인풍 친왕에게 말했다. “휘형은 어떻게 아셨어요? 이렇게 비밀리에 행해진걸, 장부도 완전무결한데 어떻게 발견하신 겁니까?”“흑영한테 전당포에서 일하는 점원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가 흑영한테 그랬다고 했다. 목여 태감이 전당포 주 고객인데 적지 않은 은자를 맡겼다고. 흑영 녀석이 그 얘기를 듣고 돌아와서 궁에 태감 나부랭이도 이렇게 돈이 많은데 자기는 찢어지게 가난하다며 날 가슴 아프게 했었지. 그래서 사람을 시켜 알아보게 된 거야. 목여가 그렇게 돈이 많을 리가 없거든. 그럼, 그 돈이 누구 건지 추측하기 어렵지도 않지. 게다가 명원제는 상을 내릴 때 상당수 차용증을 쓰고 가끔 은자로 주긴 해도 많지 않으니까 뭔가 꼼수를 부렸구나 싶었지.”안풍 친왕이 빙긋 웃음을 지었다. “허나 말이야, 너무 이상하게 여기지는 마. 국고의 은자를 남용한 것도 아니고 그저 내탕고의 은자를 가져다 쓴 거니까. 그건 원래 황실용이고 어쨌든 내무부에서 매년 이 정도 은자를 지출하니까. 개인적인 지출을 막기 위해 솔선수범해서 절약해야만 하잖아? 명원제가 절약해서 후궁의 비빈들과 궁 안에 사람들이 다 절약하거든. 아낀 부분을 이런 명목으로 가져간 것에 불과해. 이 녀석 이렇게 많은 은자를 숨겨놨는데 내가 명원제를 속이지 그럼 누구를 속여?”다들 듣고 나서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역시 고수다, 고수 중에 상 고수다.태상황도 화는 나지 않았다. 결국 자신이 솔선수범해 절약한 은자로 오히려 자식들과 비빈, 궁 안의 하인들을 고생시킨 게 미안할 뿐이였다.명원제는 비록 평생을 고생했지만 돈을 모으는 재미가 있었다. “보아하니 오히려 똑똑하구먼.”소요공이 호기심이 생겨서 얼른 물었다. “그럼 황제께서는 그동안 도대체 얼마나 숨겨두신 겁니까?”“몇백만 냥은 될걸. 매화장을 살 때도 자기가 일부만 내
이리 나리는 마당에서 개를 훈련하고 있다가 우문호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일어나, 손뼉을 치며 밝게 맞이했다. “귀한 발걸음을 하셨군요!”우문호가 이리 나리가 개랑 놀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잔소리를 했다. “개랑 놀 시간은 있는데 어째서 령이랑 외출할 시간은 없습니까?”“령이는 지금 잡니다!” 이리 나리가 우문호를 안으로 들어오라고 청하고는 앉으며 말했다. “저한테 령이랑 외출 좀 하라고 잔소리하러 오신 건 아닐 테고, 무슨 일이 있는지요?”“아바마마께서 감춰둔 은자가 있다는 걸 알았습니까?” 우문호도 애매하게 말 돌리지 않고 직접적으로 말했다.이리 나리가 입꼬리를 올리며 눈을 반짝였다. “당연히 알지요!”“안다고요?” 우문호는 예상치 못한 답변에 다소 놀랐다.“흠, 의외인가요? 전 장사를 하는 사람으로 당연히 전당포와 안면이 있죠. 전당포의 주 고객은 대략 다 압니다.” 이리 나리는 자신이 전당포에 얼마나 많은 돈을 빌려주고 있는지, 사치스러운 대부호의 위엄을 남김없이 드러났다.“설마 다들 같이 짜고?” 우문호가 숨을 들이쉬었다.“한쪽은 때리고 싶고, 한쪽은 맞고 싶어 하고.. 참, 은자를 못 내는 것도 아닌데요.”우문호가 말했다. “이리 나리께서도 이미 매화장에 돈을 냈다고 들었습니다. 굳이 그렇게 안 해도 되는데요.”이리 나리가 가볍게 웃었다. “괜찮아요. 어쨌든 사부님 주머니에 들어갈 돈들이니까. 매화장을 백 만 냥에 팔아서 두 분 기분이 좋아지셨다면, 전 그걸로 충분히 가치 있습니다.”우문호는 이리 나리의 말에서 공경에도 급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리 나리는 은자 수십만 냥으로 사부의 미소 한 번에 샀지만, 우문호에게는 평생을 가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하지만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두 분을 공경하기 위해서면 왜 직접 그분들에게 은자를 드리지 않는 겁니까? 그리고 그동안 두 분이 초라하게 지내신 듯한데 왜 경제적으로 지원을 안 했죠?”“두 분은 제 돈이 필요 없다고 하세요.”“왜?” 우문호는 이해가 안 됐다. “이리 나리의
‘이리 나리와 소요공, 평남왕이란 누가 봐도 확실한 세 명의 물주를 잡지 않고, 가난하게 지낸다는게 대체 무슨 논리지?’우문호가 말했다. “사실 아바마마께 은자가 좀 있는 것도 좋죠, 적어도 앞으로 원하시는 대로 마음껏 지내실 수 있을 테니까.”이리 나리가 웃었다. “아마 그건 안 될 겁니다. 그동안 이미 절약이 뼛속까지 몸에 뱄거든요. 명원제 폐하께서 재물을 긁어모으시는 건 우문씨 집안이 언제나 유달리 궁핍한 걸 알기 때문입니다. 쌀을 뒤주에 쟁여 두지 않으면 불안한 거지요. 태자 전하께서도 마찬가지십니다. 지금 태자 전하께 거금을 드리면 아마도 함부로 쓰지 못하실걸요.”“그야 당연히 함부로 못 쓰시겠죠. 자식들이 그렇게나 많으니 급할 때를 대비해 은자를 모아두지 않으면 안 되니까요.”“그렇지요. 급할 때 쓸 은자는 만일의 상황이 되지 않으면 쉽게 쓸 수 없어요. 아바마마께서도 처음 은자를 모으실 때 아마도 그렇게 생각하셨을 겁니다. 이건 돈을 모으는 사람들 특유의 사고방식입니다. 까놓고 말해 구두쇠 사고방식이라고도 하지요. 구두쇠라고 손가락질을 당할 가능성이 높아요.”우문호가 웃음을 지었다. 구두쇠 방면으로는 자신도 잠재력이 다분했기 때문이다. 우문호는 돌아와서 이 일을 원경릉에게 얘기하자 원경릉이 두리뭉실하게 답했다. “아바마마는 정말 기회를 잘 포착하신다니까.”우문호가 말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바마마께 돈이 있다니까 오히려 안심되더라. 헌데 이리 나리 말로는 아바마마께서 그 돈을 못 쓰실 거라고 하더라고. 그리고 안풍 친왕 전하 쪽도 아주 이상해. 백 만 냥을 가져다 자신을 오래 따른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자신은 다시 고생스러운 나날로 돌아가 산단 말이지. 이리 나리가 두 분에게 드리는 돈도 싫다고 청빈을 고집하신다는 거야. 헌데 그분들이 어디 기꺼이 청빈한 나날을 보내실 분들이셔? 당연히 아니거든, 현대 쪽에서 오픈카 몰고 명품 사던 거랑 너무 다르잖아.”원경릉이 찬찬히 따져보더니 우문호의 말을 이해하고 문제를 해결해주었다. “현대
그러자 손왕이 못 참고 얼른 물었다. “다섯째야, 아바마마 병환이 어떠시냐?”우문호가 말했다. “전 의술은 몰라서요. 원 선생 말로는 아마 한동안 정양하셔야 할 것 같다고 하네요.”“매화장 때문이야?” 손왕이 물었다.“모르겠습니다.”그러자 안왕이 우문호에게 따지듯 물었다. “네가 어떻게 모르느냐?! 아바마마께서는 뭐든 너한테 말씀하시는데 말이야.”“아바마마께서 제게 말씀하시는 건 모두 조정에 관한 일입니다.” 우문호는 형제들의 간절한 얼굴을 보고 사실 걱정하지 말라고 하고 싶었지만, 성지가 내려오기 전에는 말을 꺼내기가 곤란했다.안왕이 의심스러운 듯 물었다. “정말 모르는 거 맞느냐? 참, 이상한데. 아바마마께서 아프신 것도 이상하고. 우리가 입궐해서 병문안하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으시잖아.”회왕이 전에 별장에서 안풍 친왕이 만약에 황제가 퇴위하시면 이라고 하던 얘기가 기억나서 우문호를 보니 얼굴빛이 평온하게 별로 걱정하는 기색은 아니였다. 그럼, 설마….하지만 회왕은 함부로 그 얘기를 입 밖에서 꺼내지 못했다. 형제지간에도 친하고 소원한 사이가 있기 마련이라, 만약 진짜면 그것도 아바마마께서 심사숙고해서 내린 결정일 테니 아들로서 당연히 지지해야 마땅했다.손왕, 위왕, 그리고 순왕 이렇게 세명은 여전히 아바마마의 옥체에 정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게 아닌지 걱정하고 있었다.형제들이 열심히 상의했지만 결국 합의점에 이르지 못하고 돈 문제는 자연스럽게 흐지부지 되었다. 모두 이만 돌아가서 조용히 소식을 기다리기로 했다.그렇게 이틀 후 아바마마께서 마침내 성지를 내려 친왕들에게 입궐하여 문병하는 것을 허락했다.친왕들이 같이 입궐해 어전에서 기다렸다.어의가 안에서 침을 놓고 휘장이 내려와 있어 안에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없었기에 마음이 다급해졌다.대략 차 한잔 마실 정도로 시간이 지난 후 목여 태감이 나와서 휘장을 걷고 명원제가 침대에서 몸을 살짝 일으켰는데 안색이 어둡고 눈가가 퀭했다. 친왕들은 그런 아바마마를 보고 충격을 받아 얼른 꿇
우문호는 아바마마께서 진짜 병을 앓고 계신 건 아니지만 자신들의 형제들이 이렇게 걱정하는 모습을 보니 영 마음이 불편해 표정도 상당히 침울해져 있었다.안왕은 원래 이상하다고 의심했으나 우문호의 표정이 어두운 것을 보고 아바마마께서 정말 큰 병에 걸렸다고 생각했다.며칠 내내 명원제는 움직이지 않고 조정 일을 모두 태자와 냉 재상에게 맡겼다. 나이 든 신하들이 문안을 오려 해도 윤허하지 않고 멀리서만 문안을 올리게 할 뿐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게 했다.다시 그렇게 며칠이 흘리고 태상황이 궁으로 돌아왔다. 이 일에 대해 다들 추측이 난무했는데 모두 명원제의 병이 예사롭지 않다고 생각했다. 어의가 명원제를 진찰해 보니 몸조리를 잘 해야 한다며 무리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하지만 명원제는 바로 퇴위를 선포하고 태자 우문호에게 선위를 발표했다. 성지가 내리자, 조정이 온통 놀라서 들끓어 올랐다. 이런 큰 일을 내각과 상의도 조정의 회의도 거치지 않고, 중병이란 소식이 들린 이래 보름도 되지 않아 바로 퇴위와 선위를 선포하였으니 말이다. 심지어 어의도 상태가 특별히 엄중하다고 하지 않아 정양이 필요하다고만 했을 뿐인데 이렇게 바로 퇴위의 성지를 내리다니 청천벽력이 따로 없었다. 이런 모습은 전혀 명원제답지 않았다.그리고 황제가 병에 걸린 것도 공교로운 것이 너무 갑작스러웠다. 여러 군데 알아보니 황제가 안풍 친왕의 매화장에 보물이 있다고 생각해 거액을 들여 샀으나 없다는 것이 밝혀져서 천불이 올라온 나머지 쓰러지게 되었다고 했다. 이 얘기는 북방에 금세 퍼졌지만 이상하게도 안풍 친왕을 욕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이 소문과 동시에 안풍 친왕이 음풍농월하며 유유자적한 삶을 보내는 얘기가 여럿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경성의 일부 노인들은 안풍 친왕이 이렇게 악명 높은 사람인 것을 기억하고, 악명 높은 사람이 돈을 좀 속였기로 황제가 못 본척하는 거라고 말할 수 밖에 없었다.이런 소문이 우문호 부부의 귀에도 들렸다. 원경릉이 살짝 한숨을 쉬었다. “
위왕의 대답이 경성 모든곳에 전해졌다. 어떤 방식이든 결국 끝은 아쉬움만 남았다.초왕부에서도 이견이 분분해져 태자 부부가 얘기를 나눴다.“난 셋째 형이 일부러 주 아가씨가 경성에 오는 걸 막지 않았다는 의심이 든단다. 천하에 자기 뜻을 공포할 계기가 필요했던 거겠지. 정화 군주가 이전의 전신에게 시집가는 의식을 치른 것처럼 말이야.” 우문호가 말하자 원경릉이 탄식을 했다. “하지만 이로써 두 사람 일은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결국 마무리된 거잖아. 어쩌면 제일 나은 결말일 지도 몰라.”우문호가 말했다. “난 오히려 앞으로 충분한 변수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누구도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잖아. 죽지 않은 이상 정해진 건 하나도 없어.”원경릉이 웃었다. “어쩌면 자기 말이 맞을지도 몰라. 아니면 내가 맞을 수도 있고. 하지만 저분들 인생이니 결정권은 저들에게 있지, 그분들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우린 존중하면 그만이야!”“그래, 바로 그거지!” 우문호가 원경릉을 보는 눈엔 사랑이 가득했다. “우리처럼 이렇게 행운인 사람은 별로 없다니까. 우리 서로를 더 아껴주자.”그러자 원경릉이 과거를 회상하며 뿌듯해했다. “우리도 적지 않은 일을 겪었네, 다행히 서로에게 믿음을 가지고 그 비바람을 잘 이겨왔어.”우문호가 원경릉에게 가볍게 입을 맞추고 기쁨 어린 눈으로 바라봤다. “이제 대관식 날도 정해졌으니, 우리도 그쪽에 연락해야 하지 않을까. 채비하시라고. 좀 당겨서 오시면 더 좋고.”“당신 그 일에 엄청 신경 쓰네?” 원경릉이 우문호에게 농담했다.“어떻게 신경을 안 써? 난 이번 혼례야말로 당신이 제일 원한다고 생각해. 가족, 친구가 모두 당신 곁에 있는 결혼식이잖아.” 우문호는 원경릉의 등을 살살 쓰다듬으며 자기가 말해놓고 자기가 감동해서 눈시울이 붉혔다. “이번 혼례는 전부터 당신에게 제일 해주고 싶었던 거야. 조금의 아쉬움도 남기고 싶지 않아.”원경릉이 웃으며 말했다. “도대체 이번 혼례를 간절히 원하는 게 나야 자기야? 난 사실….”우문호가
우문호가 반성하고 다시 말했다. “하지만 여기서 한마디 더 보내자면, 아바마마께서 연극을 정말 잘하시더군. 얼굴 분장한 것 빼서 봐도 정신이 몽롱해 보이고 숨도 잘 안 쉬어지시는 모습이 나도 미리 몰랐으면 아바마마께서 정말 중병에 걸리신 거라고 깜박 속을 뻔했어.”원경릉이 말했다. “그건 꾸며내신 게 아니야. 어쨌든 백만 냥이 사라졌으니, 나라도 일이 년은 가슴이 답답할 테니깐. 마침 가장 마음이 힘드실 때가 지금이잖아. 어떻게 숨이 안 차시겠어?”우문호가 동정 어린 표정으로 걱정했다. “그것도 그러네, 나라면 평생 못 잊을 거야.”원경릉이 밖을 보더니 물었다. “위왕이 청란 대가에서 고함친 뒤로 돌아오지 않으시는데 어디로 가신 걸까?”우문호가 말했다. “모르지. 그 주 아가씨인지 하는 사람만 집에 안 오면 돼. 지금 내쫓기도 뭐하고 들어오게 하는 건 더 도리도 아니고 말이야.”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우문호가 이 말을 마치자마자 녹주가 등장했다. “태자비 마마, 주 아가씨라는 분이 오셔서 위왕 전하를 찾으십니다. 문지기가 밖에서 잡아두고 있는데 쫓아낼까요?아니면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명을 내려주십시오.”다들 주 아가씨 신분이 특이하다는 것을 알기에 무작정 쫓아내기도 그랬다. 우문호가 미간을 찡그렸다. “입이 방정이지!”원경릉이 다정하게 웃으며 말했다. “사실 밖에서 위왕 전하를 여러 차례 막아섰는데 성공하지 못해서 조만간 찾아오겠지 싶었는데.. 잘 됐어, 들어오시라고 해, 내가 얘기할 테니까.”“당신은 마음이 약해서 걱정이야. 주 아가씨가 일편단심인 걸 봐도 넘어가면 안 돼.”우문호는 위왕이 전에 주 아가씨가 주명량과 닮았다는 말에 내내 신경이 쓰였다. 그러자 원경릉이 대꾸했다. “마음이 약한 게 뭐 어떻다고? 위왕 전하께서 내 말을 들을 것도 아닌데. 난 그냥 주 아가씨가 천리를 마다하지 않고 자신을 좋아하지도 않는 남자를 쫓아온 게 시간 낭비라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야. 그리고 계속 이렇게 훼방을 놓고 다니다가 정화 군주를 찾아
양여혜는 급히 전문가 팀을 호출하고, 이전에 LR 프로젝트를 담당했던 사람들도 함께 불러 모았다.하지만 현재 데이터로는 아무런 문제도 발견되지 않았고, 우문호가 계속해서 검사받아야 한다는 결론만 나왔다.그래서 원경릉은 우문호에게 문제없이 돌아갈 수 있도록 확실히 확인하자며, 이곳에 며칠 더 머물도록 설득했다. 우문호가 바로 동의하긴 했지만, 원경릉과 함께 밖에 나가 놀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그도 어쩌다 이곳으로 왔으니, 밖에 나가서 돌아다니고 싶어하는게 당연했다. 그리고 그는 적어도 부모님과 휘종제를 뵈러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원경릉은 연구소를 떠나면 무슨 일이 생길까 걱정했지만, 우문호가 그리 협조적이지 않자, 결국 양여혜와 상의해 하루만 외출하고 돌아와 검사를 계속 받기로 했다.양여혜가 말했다."그럼 가세요. 제가 멀리서 따라가며 만약의 사태에 대비할게요""수고 많으세요."원경릉이 답했다."어쩔 수 없죠. 그의 안전을 확실히 해야 하니까요."양여혜가 말했다.그녀는 잠시 멈칫하다, 원경릉을 위로했다."상태도 좋아 보이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네, 괜찮을 거예요."원경릉도 최대한 낙관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양여혜는 그들에게 차를 준비해 준 후, 집에 있는 부모님을 잠시 들러서 보게 했다.원경릉의 부모님은 이미 퇴직했지만, 다시 병원으로 불려 가, 주 3일 진료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예전만큼 바쁘지는 않았다.그들은 내년 계약이 끝난 후, 세계 여행을 떠날 계획이었다. 그리고 손자를 보기 위해 딸이 있는 곳으로 가서 한동안 지낼 생각이었다.사위와 딸이 돌아오자, 그들은 아주 기뻐하며 식사를 준비했다. 원경릉과 우문호가 바쁜 일정 속에서 시간을 낸 거라, 반나절만 들를 수 있다는 말을 듣고 그들은 마음이 아팠다."앞으로는 바빠도 이렇게 급히 돌아오지는 말거라. 식사도 편히 못 하고, 차라리 집에서 푹 쉬어. 우리가 후년에 찾아가마."우문호는 이미 그들을 자기 부모처럼 여겼고, 그들의 걱정스러운 마음을 느끼며 답했다."비록
원경릉은 결국 그를 설득할 수밖에 없었다."이틀만 더 있지요. 혈액 검사를 한 번 더 해야 하고, 골수를 뽑아 상처도 아프지 않소?"“이미 다 나았네. 만져도 아무 느낌이 없소!”우문호는 당당하게 셔츠를 걷어 올려 상처를 보여줬다. 상처 위에는 아직 의료용 밴드가 붙어 있었기에, 원경릉은 될수록 물에 닿지 않게 그의 몸을 조심히 닦아주었다.“상처에 약을 발라야 하오.”원경릉이 말했다.그렇게 손을 뻗어 밴드를 찢었는데, 순간 화들짝 놀랐다. 상처가 거의 회복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어제 밴드 갈 때는 약간의 피가 고여 있었는데, 이렇게나 빨리 나았다니…?“이렇게나 빨리 나았습니까?”서일도 다가가서 살펴보며 매우 놀라워했다.우문호는 골수를 뽑고 나서, 상처가 아프다고 했는데, 서일은 그의 몸에 작은 구멍이 생긴 것을 보고 무서워했기 때문이다. “그래. 많이 나았다. 이번에 앓고 나니, 오히려 예전보다 정신이 더 맑아 졌다. 서일아, 내 머리 옆에 있던 흰머리도 사라지지 않았느냐?”우문호는 머리를 숙여서 서일이 볼 수 있게 했다.서일은 그의 머리카락을 자세히 살펴본 후, 그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흰머리뿐만 아니라, 눈가 주름도 없어졌습니다. 참 이상합니다. 폐하, 어찌 더 젊어진 것 같습니다. 아닙니까, 마마?”서일의 말을 들은 원경릉은 깜짝 놀라, 우문호를 자세히 살폈다. 그의 피부는 훨씬 더 맑아 졌다. 하지만 병을 앓고 나서 햇빛을 거의 보지 않아서 더욱 그런 것 같았다. 흰머리는 사실 뽑으면 그만이었다. 눈가 주름은 확실히 없어졌고, 피부의 탄력도 예전보다 훨씬 나아 보였다.예전에는 그가 30대 중반이었다고 느껴졌지만, 지금은 처음 그를 만났을 때처럼, 맑은 눈빛과 깔끔한 이목구비를 자랑하는 잘생긴 미남이었다.우문호는 거울을 보곤 갑자기 혼란스러워졌다. 그는 급히 원경릉을 끌어당겨 조용히 물었다.“혹시 휘종제처럼 그런 것을 한 것이오? 리프팅?”“무슨 소리요?”원경릉은 마음을 가라앉히며 웃음도 섞인 말을 했다.“어찌
다음 날 아침, 우문호는 골수 검사를 마친 후, 전신 검사를 진행했다.검사팀은 야근까지 하며 최대한 결과를 빨리 얻으려 노력했다.그동안 원경릉은 우문호가 걱정할까 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우문호는 어차피 건강을 회복했다고 생각하고 있던 터라, 검사가 좀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서일과 함께 겨룰 수 있을 정도로 몸을 회복했기에 더 이상 문제가 없다고 믿어 마음을 놓고 서일과 함께 패드로 드라마를 시청했다.결과가 나오자마자, 양여혜는 바로 원경릉을 불렀다.“골수의 유전자 검사 결과… 돌연변이가 발견됐어요. 외부 자극이 아닌, 자가 자연 돌연변이에요. 또한, 발가락에 있는 그 덩어리, 조직을 채취해 검사한 결과, 일종의 얼음 벌레와 비슷한 형태였어요. 이 얼음 벌레는 과거 사람 몸에서 발견된 적도 있어요.”“얼음 벌레? 그게 뭐죠?”원경릉은 조금 혼란스러웠다.“하지만 이전엔… 그 덩어리에서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하지 않았나요?”“처음엔 발견되지 않았죠. 하지만 주진 씨가 조직을 채취해 검사를 해보니, 그 얼음 벌레와 비슷한 결과가 나왔어요. 생명력이 굉장히 강하고 벌레라고는 하지만 사실 세균이죠. 이 얼음 벌레가 어떻게 번식하는지, 혹은 이 얼음 벌레가 그의 혈액 생성 기능에 영향을 주어 혈소판 수치를 낮추었는지는 아직 모르고, 더 많은 데이터가 필요해요. 그래서 우리는 이 얼음 벌레 세균을 배양해서 더 나은 발견을 할 수 있기를 희망하고 있어요. 그 후에가 되서야 어떻게 억제하는지, 죽일 수 있을지 알게 될 거예요.”“이 얼음 벌레는 얼음 속에서 사는 건가요? 하지만 그가 물린 곳은 호수였잖아요.”“아니요, 이 얼음 벌레는 처음 발견된 곳은 얼음 속이었지만, 여러 곳에서 살거나 휴면 상태로 있을 수 있어요. 사람의 몸에 들어가는 기회를 엿보죠. 예를 들어 손으로 얼음 벌레를 만지거나, 작은 상처로 침투할 수 있죠. 하지만 이 얼음 벌레에 대한 많은 정보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어요. 우리는 이 분야의 전문가와 이미 연락을 취했어요.”
서일이 뒤늦게 물었다.“이제 괜찮으신 겁니까?”“지금까지는 괜찮아요.”양여혜가 그를 한 번 보고 웃으며 말했다.“며칠 동안 잠도 못 주무셨는데… 검사하는 틈에 잠깐 주무시러 가세요.”서일은 그제야 마음이 놓인 듯, 서서히 졸음이 몰려왔다. 우문호가 검사를 받으러 옮겨지는 것을 보고, 그는 바로 우문호의 병상에 쓰러져 잠들었다.우문호가 검사를 받고 돌아왔을 때, 서일은 이미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원경릉은 울지도 웃지도 못했다. 다른 곳에서 쉬지 않고 굳이 다섯째의 병상에 자는 것이 너무 당황스럽게 느껴졌다.우문호도 서일을 아끼고 있기에 원경릉에게 말했다.“깨우지 말고 그냥 자게 두시오. 정말 깜짝 놀랐을 것이오. 나한테 주사를 놓았으니, 나한테 혹시 위험이 생기면 황제를 해친 죄를 얻을 것이라는부담이 얼마나 컸겠소.”원경릉은 그만 실소를 터트렸다. 사실 따지고 보면 사실이 그러했긴 했다. 서일은 정말 적지 않게 일을 벌였다.옆 병실로 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검사 결과가 도착했다.폐렴은 크게 호전되었고, 각 항도 정상값으로 돌아갔지만, 혈액 속의 마커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다행인 점은 현재로서는 세포나 림프의 이상은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세균 보고서도 나왔는데, 이전에 발견된 적이 없는 세균으로 확인되었다.그리고 우문호 발에 있던 작은 두드러기는 시간이 오래 지난 데다, 오랫동안 물에 잠겨있어, 참고가 될 만한 결과는 나오지 않았고, 이전에 추측된 개미산도 없었다.모든 것은 마치 신비로운 사건처럼 맞물려 있었지만, 확실히 할 수 있는 것은 고열과 폐렴, 세균이 LR 주사로 인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다만 LR이 세균 감염 상태를 악화시킨 가능성이 있었다.란오가 연구실을 떠나며 양여혜에게 우문호의 혈액 상태를 계속 모니터링하도록 했다. 그는 마커 외에도 다른 이상이 발견되면 바로 알려달라고 했기에, 우문호는 아직 이곳을 떠날 수 없었다. 당분간 계속 그의 상태를 지켜보며 혈액 검사를 기다려야 했다.5일째 되는 날, 우
양여혜와 란오는 우문호에게 약을 투여하기 시작했다.원경릉은 병실 밖에서 서일와 함께 유리창 앞에서 지켜봤다. 파란 약이 큰 병에 섞여 천천히 우문호의 혈관으로 흘러 들어갔다.약이 매우 느리게,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지고 있는 모습이 마치 천천히 원경릉의 마음속에 스며드는 것 같았다. 그녀는 지금 이 상황이 너무 망연하게 느껴졌다. 여러 가지 가능성을 생각했지만, 결국 해결 방법은 란오의 혈액뿐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란오의 신분에 대해 그녀 또한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많은 사람들이 그를 좀비 왕이라고 부르긴 하지만, 바이러스 연구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그가 어떤 바이러스와 공생한다고도 했다. 그 바이러스는 그의 유전자와 세포는 물론, 모든 것을 변화시켰다. 세포는 분열하고 재생했고, 유전자는 끊임없이 자기 수정을 하며, 아주 이상한 방식으로 변화했다.그의 혈액에서도 실제로 바이러스가 검출되었고, 그 바이러스는 끊임없이 변이를 일으키며 오직 혈액을 통해 퍼져나갈 수 있었다.과학적 탐구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 그리고 알고 있는 일은 너무나 적었다.약을 투여한 후 1시간이 지나자, 다행히 호흡 곤란 증상이 어느 정도 완화되었고, 열도 40도에서 38.8도로 떨어졌다.그렇게 2시간 후, 드디어 열이 떨어졌다.이때, 큰 병에 담겨 있는 약을 겨우 삼분의 일정도 사용한 상태였다.지금 상황으로 보아, 상태는 괜찮아 보였다.그 후, 혈압도 서서히 회복되었고, 혈압도 70까지 올라갔다.약물 투여 3시간 후, 수혈이 병행되었다.밤이 되자, 혈액 검사를 진행하였고 혈색소와 혈소판 상승, 백혈구도 감소하였고, 중성구 또한 정상으로 돌아왔다.이것은 감염 상태가 강력하게 통제되었음을 의미했다! 하지만 원경릉은 여전히 마음을 놓지 못하고, 계속 그의 상태를 지켜봤다.상황이 다소 안정된 뒤, 호흡기가 제거 되었고, 원경릉도 안에서 그를 지킬 수 있었다.서일은 들어가지 않고 문 앞에서 계속 대기했다. 의술에 전혀 알지 못하는 그는 이틀 동안 정신을
“지난 두 차례 실험 결과는 어땠나요?”그러자 란오가 휴대전화를 꺼내 실험 데이터를 불러왔다.“직접 보세요.”두 사람은 데이터를 확인했고 결과는 매우 이상적이었다. 바이러스와 세균 억제율이 95%에 달했고, 3개월간의 관찰에서도 이상 증상이 없었다.“이렇게나 이상적인 데이터인데, 당신은 망설이고 있는 것 같군요.”원경릉이 란오를 보며 말했다.“네. 남편분 상태가 특별하기 때문이에요. 그는 LR를 주입했고, 어떤 세균에 감염되었는지 모르고 있어요. 게다가 그의 혈액에서 마커가 발견됐어요. LR는 접촉한 적 없지만, 여혜 씨와 이야기를 나눈 적은 있어요. LR이 변이를 일으킬 수 있다고 했으니, 제 약이 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모르겠어요.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는데, 그에 대한 선례가 없어서 확신할 수 없어요.”원경릉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연구소에서 이미 다섯째에게 최고의 항생제와 알부민을 투입했지만 전혀 효과가 없었고, 오히려 병세가 더욱 악화했다. 지금 상황에 더 이상 사용할 수 있는 약은 하나도 없었다.양여혜가 그녀를 안쓰럽게 바라보며 말했다.“잘 생각해 보세요. 하지만 너무 오래 고민하지는 마세요. 그의 상태가 그렇게 좋진 않으니깐요.”원경릉은 떨리는 손으로 와인을 들고 단숨에 한잔을 전부 들이켰다.“… 사용하겠습니다!”원경릉은 의약 연구를 하는 사람으로, 이렇게 많은 약을 투여했는데 효과가 없다는 것은 그 약들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 약들이 자신의 남편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그녀는 란오를 보며 참았던 눈물을 흘렸다.“만약 약을 사용한 후, 그의 상태가 나아지지 않거나... 혹시... 당신이 그를 도와줬으면 합니다. 설령... 설령 그가 그렇게 되더라도.”란오는 잠시 침묵한 후 입을 열었다.“그렇게 결정을 내리셨다면 도울게요.”양여혜는 그녀를 안으며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괜찮아요. 결국 란오의 혈액을 사용해야 할 상황이 오더라도, 예전처럼 되지 않을 거
양여혜는 바로 중환자실로 돌아가 전문가팀과 다음 계획을 논의했다.세균 감염과 약물 부작용이 원인일 가능성이 가장 컸지만, 둘 다 아직 명확하지 않았다.밤새 지켜봤지만, 우문호의 상태는 여전히 좋지 않았다. 혈압은 계속 올라가지 않았고, 고열도 가라앉지 않았다. 특효약도 폐렴을 억제하지 못하고 있어, 그의 상태는 점점 더 악화될 것이 분명했다.다음 날 점심, 흉부 X-ray를 통해 폐렴이 악화된 것으로 확인됐다. 그의 호흡은 더욱 가빠져, 이제는 결국 인공호흡기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원경릉은 버티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녀는 쉬지도 않고, 먹지도 않고 서일과 함께 침대 옆을 지켰다.양여혜도 오랜 시간 함께 있다가, 결국 자리를 떠나 란오에게 전화를 걸어 숨도 못 쉴 만큼 질문을 퍼부었다. “란오 씨, 일단 당신의 혈액이 조금 필요할지도 몰라요... 아직 확실한 건 아니고, 대비책으로 준비하려는 거예요. 지금 어디에 있어요? 어디에 있는 실험실이죠? 무슨 실험 중인가요? 당신의 혈액에서 바이러스를 추출했다고요? 확실한가요? 효과는 어때요? 잠시만 기다려요! 내가 바로 만나러 갈 테니, 직접 만나서 얘기해 봐요. 이쪽으로 와도 괜찮아요. 계속 기다릴 테니까 빨리 와주세요.”그렇게 세 시간 후, 검은색 세단 한 대가 연구소 앞에 멈춰 섰고 양여혜는 직접 나가서 맞이했다. 차에서 내린 남자는 정장 차림에 선글라스를 쓰고 있는 훤칠하고 잘생긴 남자였다. 그는 강렬한 카리스마를 풍기고 있었다. 마침 주진에게 전화를 걸기 위해 밖으로 나온 원경릉은 그가 양여혜와 함께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것을 보았는데, 그 남자는 원경릉에게 묘하게 낯선 느낌을 주었다. 순간 원경릉의 머릿속에는 피로 물든 어떠 한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양여혜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누구?”“걱정하지 마세요.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상황 아니에요. 소개할게요.”양여혜가 그녀를 진정시키며 말했다.“란오 씨, 이쪽은 원경릉 씨예요. 서로 인사 나누세요.”란오가 손을
원경릉은 곁에서 지켜보았는데, 다리가 몹시 떨리고 있었다. 이전에 그를 잃을 뻔한 고통을 겪은 적 있었기에, 이번 생에서는 절대 그런 일을 다시 겪고 싶지 않았다.채혈 검사를 마쳤지만, 또 여러 항목의 분석이 필요했다.바이러스 세균 팀의 한 전문가는 세균 감염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어떤 세균인지 알아내려면 무조건 배양 과정을 거쳐야 하기에, 결과를 바로 알 수는 없었다.고열은 계속되고 있었고, 호흡 곤란도 심해졌다. 만약 더 나아지지 않으면, 인공호흡기를 써야 할 상황이었다.원경릉은 금방이라도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아이들은 이 상황을 전혀 감지하지 못한 듯, 그녀와 어떤 의식 교류도 하지 않았다.이 점도 너무 이상한 일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약간 안심이 되기도 했다.아이들이 아버지에게 위험이 닥쳤음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은, 우문호가 회복될 가능성이 크다는 뜻일지도 모른다.그녀는 이런 부모와 자식 간의 의식 연결만으로 판단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 믿음 없이는 견딜 수 없었다.다행히 우문호는 응급처치를 통해 목숨을 부지했다. 호흡은 점차 안정됐지만, 혈압은 여전히 오르지 않아, 집중적인 모니터링이 필요했다.X-ray 결과도 나왔고, 폐렴이었다. 그것도 매우 심각한 폐렴이었으며, 최소 일주일 이상 진행된 것으로 보였다.원경릉이 얼굴을 감싸며 울음을 터뜨리자, 양여혜가 서둘러 그녀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 커피 한 잔을 건네줬다.그러고는 원경릉의 창백한 얼굴과 부어오른 눈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아무 일 없을 거라고 말했잖아요. 아직 방법이 남아 있어요. 최악의 경우가 아니라 쉽게 쓰지 않았을 뿐이에요.”“무슨 방법인데요? 왜 쓸 수 없어요?”원경릉은 절박한 표정으로 양여혜를 바라보며 말했다.“그럼 지금 바로 써요! 그가 무사하다는 걸 확신하고 싶어요.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해요.”“알겠어요, 알겠어요. 너무 서두르지 말고, 일단 진정하세요.”“진정할 수가 없어요...”원경릉
돌아오자마자 그녀는 바로 양여혜에게 전화를 걸었고, 양여혜는 직접 헬리콥터를 보내 그들을 연구소로 이송해주었다.이송 중 우문호의 호흡은 점점 어려워졌고, 혈압도 심각하게 낮았으며 쇼크 지수도 무서우리만치 높았다. 원경릉은 내내 불안한 마음을 놓을 수 없었고 긴장한 탓에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그녀는 자기 능력을 사용해 상황을 파악하려 했지만, 마치 보이지 않는 장벽이 가로막힌 것처럼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너무 초조해하지 마세요. 마음이 급하면 능력이 제어되지 않을 수 있으니깐요. 억제제를 한 대 놓을 테니 더는 무리하지 마세요. 얼굴이 다 창백해졌어요.”양여혜가 설득했다.“안 돼요! 능력을 유지해야 해서 억제제를 맞으면 안 됩니다.”하지만 원경릉은 곧바로 거절했다. 이런 상황에 능력까지 억제해 버린다면 그녀는 정말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알겠어요. 하지만 진정하세요. 우리에겐 여러 가지 방법이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양여혜가 여전히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어떤 방법인데요?”원경릉은 눈물을 닦으며 빨개진 눈으로 양여혜에게 물었다.“그 연구 데이터, 찢어진 적이 있었던 거죠? 무슨 문제가 생긴 건가요?”“지금 조사 중이에요. 실종된 그 전문가의 행방은 여전히 오리무중이지만, 찢어진 페이지에 대해서 일부 단서를 얻었어요. 그 페이지에는 약물이 세포 변이를 유발한다는 데이터를 담고 있었어요. 그녀 자신도 변이를 겪었기 때문에 그 페이지를 찢어버리고 사라졌을 가능성이 높아요.”원경릉은 경악했다.“변이요? 용량 문제 때문인가요?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나요?”“분명 용량 문제는 아닐 거예요. 우문호 씨에게는 얼마나 투여했죠?”“실험용 쥐에게 투여한 양의 두 배 정도요!”“그렇다면 용량 문제가 아닐 가능성이 더욱 커져요. 아마도 다른 원인이 있을 거예요. 주사를 맞기 전에 어떤 증상이 있었나요? 혹은 평소에 가지고 있는 질환이라도 있었나요?”원경릉이 울먹이며 대답했다.“주사를 맞기 전 열이 났었어요.”“열이라면, 세균 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