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자 손왕이 못 참고 얼른 물었다. “다섯째야, 아바마마 병환이 어떠시냐?”우문호가 말했다. “전 의술은 몰라서요. 원 선생 말로는 아마 한동안 정양하셔야 할 것 같다고 하네요.”“매화장 때문이야?” 손왕이 물었다.“모르겠습니다.”그러자 안왕이 우문호에게 따지듯 물었다. “네가 어떻게 모르느냐?! 아바마마께서는 뭐든 너한테 말씀하시는데 말이야.”“아바마마께서 제게 말씀하시는 건 모두 조정에 관한 일입니다.” 우문호는 형제들의 간절한 얼굴을 보고 사실 걱정하지 말라고 하고 싶었지만, 성지가 내려오기 전에는 말을 꺼내기가 곤란했다.안왕이 의심스러운 듯 물었다. “정말 모르는 거 맞느냐? 참, 이상한데. 아바마마께서 아프신 것도 이상하고. 우리가 입궐해서 병문안하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으시잖아.”회왕이 전에 별장에서 안풍 친왕이 만약에 황제가 퇴위하시면 이라고 하던 얘기가 기억나서 우문호를 보니 얼굴빛이 평온하게 별로 걱정하는 기색은 아니였다. 그럼, 설마….하지만 회왕은 함부로 그 얘기를 입 밖에서 꺼내지 못했다. 형제지간에도 친하고 소원한 사이가 있기 마련이라, 만약 진짜면 그것도 아바마마께서 심사숙고해서 내린 결정일 테니 아들로서 당연히 지지해야 마땅했다.손왕, 위왕, 그리고 순왕 이렇게 세명은 여전히 아바마마의 옥체에 정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게 아닌지 걱정하고 있었다.형제들이 열심히 상의했지만 결국 합의점에 이르지 못하고 돈 문제는 자연스럽게 흐지부지 되었다. 모두 이만 돌아가서 조용히 소식을 기다리기로 했다.그렇게 이틀 후 아바마마께서 마침내 성지를 내려 친왕들에게 입궐하여 문병하는 것을 허락했다.친왕들이 같이 입궐해 어전에서 기다렸다.어의가 안에서 침을 놓고 휘장이 내려와 있어 안에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없었기에 마음이 다급해졌다.대략 차 한잔 마실 정도로 시간이 지난 후 목여 태감이 나와서 휘장을 걷고 명원제가 침대에서 몸을 살짝 일으켰는데 안색이 어둡고 눈가가 퀭했다. 친왕들은 그런 아바마마를 보고 충격을 받아 얼른 꿇
우문호는 아바마마께서 진짜 병을 앓고 계신 건 아니지만 자신들의 형제들이 이렇게 걱정하는 모습을 보니 영 마음이 불편해 표정도 상당히 침울해져 있었다.안왕은 원래 이상하다고 의심했으나 우문호의 표정이 어두운 것을 보고 아바마마께서 정말 큰 병에 걸렸다고 생각했다.며칠 내내 명원제는 움직이지 않고 조정 일을 모두 태자와 냉 재상에게 맡겼다. 나이 든 신하들이 문안을 오려 해도 윤허하지 않고 멀리서만 문안을 올리게 할 뿐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게 했다.다시 그렇게 며칠이 흘리고 태상황이 궁으로 돌아왔다. 이 일에 대해 다들 추측이 난무했는데 모두 명원제의 병이 예사롭지 않다고 생각했다. 어의가 명원제를 진찰해 보니 몸조리를 잘 해야 한다며 무리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하지만 명원제는 바로 퇴위를 선포하고 태자 우문호에게 선위를 발표했다. 성지가 내리자, 조정이 온통 놀라서 들끓어 올랐다. 이런 큰 일을 내각과 상의도 조정의 회의도 거치지 않고, 중병이란 소식이 들린 이래 보름도 되지 않아 바로 퇴위와 선위를 선포하였으니 말이다. 심지어 어의도 상태가 특별히 엄중하다고 하지 않아 정양이 필요하다고만 했을 뿐인데 이렇게 바로 퇴위의 성지를 내리다니 청천벽력이 따로 없었다. 이런 모습은 전혀 명원제답지 않았다.그리고 황제가 병에 걸린 것도 공교로운 것이 너무 갑작스러웠다. 여러 군데 알아보니 황제가 안풍 친왕의 매화장에 보물이 있다고 생각해 거액을 들여 샀으나 없다는 것이 밝혀져서 천불이 올라온 나머지 쓰러지게 되었다고 했다. 이 얘기는 북방에 금세 퍼졌지만 이상하게도 안풍 친왕을 욕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이 소문과 동시에 안풍 친왕이 음풍농월하며 유유자적한 삶을 보내는 얘기가 여럿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경성의 일부 노인들은 안풍 친왕이 이렇게 악명 높은 사람인 것을 기억하고, 악명 높은 사람이 돈을 좀 속였기로 황제가 못 본척하는 거라고 말할 수 밖에 없었다.이런 소문이 우문호 부부의 귀에도 들렸다. 원경릉이 살짝 한숨을 쉬었다. “
위왕의 대답이 경성 모든곳에 전해졌다. 어떤 방식이든 결국 끝은 아쉬움만 남았다.초왕부에서도 이견이 분분해져 태자 부부가 얘기를 나눴다.“난 셋째 형이 일부러 주 아가씨가 경성에 오는 걸 막지 않았다는 의심이 든단다. 천하에 자기 뜻을 공포할 계기가 필요했던 거겠지. 정화 군주가 이전의 전신에게 시집가는 의식을 치른 것처럼 말이야.” 우문호가 말하자 원경릉이 탄식을 했다. “하지만 이로써 두 사람 일은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결국 마무리된 거잖아. 어쩌면 제일 나은 결말일 지도 몰라.”우문호가 말했다. “난 오히려 앞으로 충분한 변수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누구도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잖아. 죽지 않은 이상 정해진 건 하나도 없어.”원경릉이 웃었다. “어쩌면 자기 말이 맞을지도 몰라. 아니면 내가 맞을 수도 있고. 하지만 저분들 인생이니 결정권은 저들에게 있지, 그분들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우린 존중하면 그만이야!”“그래, 바로 그거지!” 우문호가 원경릉을 보는 눈엔 사랑이 가득했다. “우리처럼 이렇게 행운인 사람은 별로 없다니까. 우리 서로를 더 아껴주자.”그러자 원경릉이 과거를 회상하며 뿌듯해했다. “우리도 적지 않은 일을 겪었네, 다행히 서로에게 믿음을 가지고 그 비바람을 잘 이겨왔어.”우문호가 원경릉에게 가볍게 입을 맞추고 기쁨 어린 눈으로 바라봤다. “이제 대관식 날도 정해졌으니, 우리도 그쪽에 연락해야 하지 않을까. 채비하시라고. 좀 당겨서 오시면 더 좋고.”“당신 그 일에 엄청 신경 쓰네?” 원경릉이 우문호에게 농담했다.“어떻게 신경을 안 써? 난 이번 혼례야말로 당신이 제일 원한다고 생각해. 가족, 친구가 모두 당신 곁에 있는 결혼식이잖아.” 우문호는 원경릉의 등을 살살 쓰다듬으며 자기가 말해놓고 자기가 감동해서 눈시울이 붉혔다. “이번 혼례는 전부터 당신에게 제일 해주고 싶었던 거야. 조금의 아쉬움도 남기고 싶지 않아.”원경릉이 웃으며 말했다. “도대체 이번 혼례를 간절히 원하는 게 나야 자기야? 난 사실….”우문호가
우문호가 반성하고 다시 말했다. “하지만 여기서 한마디 더 보내자면, 아바마마께서 연극을 정말 잘하시더군. 얼굴 분장한 것 빼서 봐도 정신이 몽롱해 보이고 숨도 잘 안 쉬어지시는 모습이 나도 미리 몰랐으면 아바마마께서 정말 중병에 걸리신 거라고 깜박 속을 뻔했어.”원경릉이 말했다. “그건 꾸며내신 게 아니야. 어쨌든 백만 냥이 사라졌으니, 나라도 일이 년은 가슴이 답답할 테니깐. 마침 가장 마음이 힘드실 때가 지금이잖아. 어떻게 숨이 안 차시겠어?”우문호가 동정 어린 표정으로 걱정했다. “그것도 그러네, 나라면 평생 못 잊을 거야.”원경릉이 밖을 보더니 물었다. “위왕이 청란 대가에서 고함친 뒤로 돌아오지 않으시는데 어디로 가신 걸까?”우문호가 말했다. “모르지. 그 주 아가씨인지 하는 사람만 집에 안 오면 돼. 지금 내쫓기도 뭐하고 들어오게 하는 건 더 도리도 아니고 말이야.”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우문호가 이 말을 마치자마자 녹주가 등장했다. “태자비 마마, 주 아가씨라는 분이 오셔서 위왕 전하를 찾으십니다. 문지기가 밖에서 잡아두고 있는데 쫓아낼까요?아니면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명을 내려주십시오.”다들 주 아가씨 신분이 특이하다는 것을 알기에 무작정 쫓아내기도 그랬다. 우문호가 미간을 찡그렸다. “입이 방정이지!”원경릉이 다정하게 웃으며 말했다. “사실 밖에서 위왕 전하를 여러 차례 막아섰는데 성공하지 못해서 조만간 찾아오겠지 싶었는데.. 잘 됐어, 들어오시라고 해, 내가 얘기할 테니까.”“당신은 마음이 약해서 걱정이야. 주 아가씨가 일편단심인 걸 봐도 넘어가면 안 돼.”우문호는 위왕이 전에 주 아가씨가 주명량과 닮았다는 말에 내내 신경이 쓰였다. 그러자 원경릉이 대꾸했다. “마음이 약한 게 뭐 어떻다고? 위왕 전하께서 내 말을 들을 것도 아닌데. 난 그냥 주 아가씨가 천리를 마다하지 않고 자신을 좋아하지도 않는 남자를 쫓아온 게 시간 낭비라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야. 그리고 계속 이렇게 훼방을 놓고 다니다가 정화 군주를 찾아
주 아가씨 눈빛은 오히려 고요해졌다. “전 조금도 겁나지 않아요. 오히려 평생 그런 사람을 만나지 못하는 게 두렵죠.”잠시 후 주지가 물었다. “그 여자분은 어떤 사람인가요? 제가 만나볼 수 있나요?”“제가 결정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그녀가 아가씨를 만나고 싶어 할지는 더더욱 모르겠네요. 하지만 전 그럴 필요 없다고 생각해요. 아가씨와 위왕 전하의 일이지 그 여자분과는 무관하니 그녀를 더는 괴롭히지 말았으면 해요.”주지는 그 여자가 고의로 심술궂게 군다고 생각해 비웃는 듯한 얼굴로 당당하게 말했다. “그녀가 복을 걷어찼네요. 그렇게 좋은 사람을 마다하다니. 앞으로 후회할 거예요. 우리 강북부에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위왕 전하를 좋아하는지 알아요? 위왕 전하를 한 번 보겠다고 비바람이 불든 눈보라가 치든 종일 자리를 지키며 위왕 전하께서 군영이나 산에서 돌아오시는 걸 기다렸다가 한번 보는 것으로 한 달은 행복해해요. 이런 마음을 당신네 경성 귀부인들은 모르시겠군요.”이 말은 적의로 가득 차서 원경릉도 담담하게 웃을 뿐이였다. “어쩌면 전 이해 못 할지도 몰라요. 하지만 그래도 제가 드리는 말은 같아요. 정화 군주를 찾아가지 마세요. 두 분 일은 그녀와 무관해요. 제가 원래 아가씨를 설득하려고 했는데 아가씨에게 이미 결심이 섰으면 제가 뭐라고 해도 소용없겠군요. 가세요!”주지는 여전히 노여움을 띤 얼굴로 비꼬았다. “그렇게 연약한 사람이, 뭐든 당신들이 다 보호해 줘야 하고, 그런 사람이 위왕 전하의 사랑을 받을 가치가 있나요?”그러자 원경릉의 낫빛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아가씨가 위왕 전하를 좋아하고, 그녀는 자기 삶을 살면 되지 아가씨가 그 사람을 공격해서 어쩌자는 건가요? 됐으니까 이만 가시지요!”주지가 벌떡 일어나 차갑게 말했다. “보아하니 경성 사람들은 다 이렇군요. 희로애락을 모르고 체면만 차릴 줄 알지, 말이 한마디도 통하지 않네요. 실례했습니다. 그럼, 이만!”그러고는 아무렇지 않다는 표정을 애써 지으며 성큼성큼 나갔다.녹주는
위왕이 말했다. “내가 뭘 한다는 것이냐? 물건 남겨봤자 소용없어. 그리고 계속 강북부에 있을 거라 앞으로 일 년에 한 번도 경성에 오기 힘들 것이야. 식구도 없고 봉양할 노인도 없으니 봉록만으로 나 하나 먹고살기는 충분해.”“정화 군주도 원할까요?” 원경릉이 물었다.“모르죠. 일곱째 시켰으니까 잘하면 술 한잔 사주고 못 하면 한 대 패주면 됩니다. 술이냐 주먹이냐는 일곱째 능력에 달렸지요.” 말을 마치고 위왕은 방으로 들어갔고, 우문호는 원경릉을 마차에 태우고 가리개를 내린 뒤 말했다. “셋째 형은 강북부에서 늙어 죽을 생각인가 봐.”원경릉은 아무 답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위왕이 가산을 처분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었다. 확실히 그럴 마음이였다.하지만, 이 일은 주변 사람이 감 놔라 배 놔라 할 수 없는 일로 본인 하고 싶은 대로 해야 한다. 두 사람이 입궐할 때 명원제는 막 안정제를 먹고 졸음이 온 상태였는데, 우문호 부부를 보더니 잠기운이 싹 달아났다.두 사람이 예를 취하고 명원제에게 물었다. “아바마마, 무슨 일이십니까?”명원제가 손짓을 하자 목여 태감이 비단 상자를 하나 가지고 들어왔다. 비단 상자를 열고 명원제가 잠시 들여다보고 몇 장 꺼낸 뒤 목여 태감에게 말했다. “태자한테 줘!”그러자 목여 태감이 안고 와서 우문호에게 건네었다. “전하, 받으시지요!”우문호가 받아 들고 잠시 보더니 할 말을 잊고 멍해졌다. 상자안에는 두꺼운 지폐 더미와 보관증이 있었다.“아바마마, 이….” 우문호가 고개를 들어 의혹에 가득 찬 낯으로 명원제를 바라봤다. ‘이게 아바마마의 개인 재산인가?’“이 은자는 짐이 너에게 주는 것이긴 하나, 너한테 쓰라고 주는 게 아니니 잘 보관하도록 해. 짐이 여기에 총 삼백 만 냥을 넣었고, 그중 일부는 이자를 불리는 중이라 보관증으로 넣어두었어. 이 은자는 네가 써서는 안 돼. 황실의 급한 일을 위해 남겨두어라. 전부 짐이 아낀 것으로 꼭 짐에게 약속하거라. 만일의 상황이 아닐 때 이 돈을 쓰지 않기로.”
왕비 합방하다북당(北唐), 초왕부(楚王府) 봉의각(鳳儀閣)일렁이는 촛불에 방안 곳곳에 붙여 놓은 낡은 붉은 ‘희(喜, 축 결혼)’종이가 비치고, 금박의 대조가 어슴푸레한 느낌을 떨쳐내는 가운데 벽에 한 쌍의 그림자가 떠오른다.원경릉(元卿淩)은 원하지 않는 것을 참고 또 참는 얼굴이다.결혼한지 어언 1년, 그는 원경릉의 털 끝 하나 건드리지 않았다. 그런데 그제 입궁했을 때 태후(太后)가 원경릉의 밋밋한 배를 보고 실망한 기색으로 후궁(侧妃)을 들이는 것에 대한 말을 꺼내는 것이 아닌가. 그녀는 태후께 하는 수 없이 둘이 결혼한지 1년이 되었지만, 아직 합방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털어놓을 수 밖에 없었다. 원경릉은 울고불고 고자질하는 것이 싫었다. 그러니까 그냥, 내키지 않았을 뿐이다.13살에 처음 그를 본 이래, 마음을 온통 그에게 빼앗겨 갖은 수단을 다 동원해 결국 그의 정비가 되었다. 제 아무리 차가운 돌덩이라도 뜨겁게 타오르게 하리라 믿었건만, 그건 단단히 착각한 거였다.서로 부부이고, 낭군이 분명했지만, 그의 눈빛에는 단 한 가닥 연민조차 없이, 오히려 집착에 가까운 증오만 있을 뿐이었다.“윽……”마음 속에 알 수 없는 원망이 솟구치며 그녀는 있는 힘껏 입술을 깨물었다.선혈이 배어 나와 비릿한 피가 입안으로 방울져 들어갔다.그는 낮게 깔린 눈빛으로 훤칠한 몸을 일으켜, 한 손을 그녀의 얼굴 옆에 바짝 댄 채 얼음같이 냉정하게, “원경릉, 네가 바라던 대로 짐이 너와 합방했으니, 이제부터 짐은 너와 일체 타인이다.”원경릉은 절망과 슬픔의 웃음을 띄우며, “당신은 결국 절 미워하는군요.”푸른 옷자락 아래 초왕(楚王)의 건장한 몸매와 늘씬한 다리로 쭉 걷어차니, 탁자고 의자고 우당탕탕 넘어지며 물건이 사방에 떨어지고 깨지는 가운데 그는 경멸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 “미워한다고? 당치도 않은 소릴. 짐은 네가 혐오스러워. 짐의 눈에 너는, 더러운 벌레만도 못한 존재야. 사람을 증오심에 불타게 한다고. 아니면 짐이 약의 힘까지 빌려 너와
두 명의 원경릉그녀는 자신이 개발한 약을 스스로에게 주사한 후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 보니, 여기였다.그리고 머리 속에 자신의 것이 아닌 기억이 본인의 기억과 서서히 뒤섞이기 시작했다. 정후(靜候)의 적녀(嫡女, 정실부인의 큰 딸) 원경릉은 초왕 우문호(宇文皓)를 사모한지 오래다. 15살에 성인식을 올리고, 공주부 연회에서 치밀한 음모로 초왕이 그녀를 ‘범하도록’ 함정에 빠뜨렸다. 원경릉은 죽네 사네 한바탕 연극 끝에 댓가로 소원하던 왕비의 자리를 얻어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녀가 왕부에 시집 와서 1년동안 갖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초왕은 원경릉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공대 여자로 연애를 해 본적은 없지만, 몸이 말해주고 있었다. 몸의 원래 주인 원경릉이 죽기 전에 한 차례 성적 행위를 당했다는 사실을.몸의 원래 주인 원경릉이 뇌에 남긴 기억도 이를 뒷받침했다.현대의 천재 박사에서 이름도 알 수 없는 어느 왕조의 초왕비가 된, 그녀의 유일한 아쉬움이라면 수중에 있던 연구과제를 계속 진행할 수 없다는 점이다. 영혼이 시공을 초월한다는, 과학으로는 도무지 설명할 길이 없는 일이 그녀의 몸에 일어난 지금, 그녀는 자신의 처지를 걱정하기는 커녕, 만약 다시 현대로 돌아갈 수 있다면 심령학을 연구할 텐데 하는 아쉬움 뿐이다.원경릉은 피를 너무 많이 흘린 나머지, 사고가 점점 흐릿해져 아예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침대로 돌아가 그대로 쓰러져 잠이 들었다.“어서, 어서 가서 의원을 불러 오너라!”문밖에 기상궁의 다급하고 혼란스런 목소리가 들려왔다.비릿한 피냄새가 대충 닫아 둔 문틈으로 스며 들었다.원경릉은 두 손으로 의자에 기대 덜덜 떨리는 발을 간신히 딛고 서서 밖을 내다 보았다.보이는 건 기상궁과 시녀 하나가 어린 시동 하나를 복도에서 부축하고 있는 것으로, 그 시동의 눈에서 철철 피가 흐르고, 시동의 눈에 뭐가 박혔는지 격한 통증으로 울부짖고 있었다. 기상궁은 다급히 시동이 그러쥐고 있는 눈 가에 손을 뻗으려 다가, 예리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