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문호가 원경릉의 손에서 등롱을 받아 문틈에 끼운 뒤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당신 깨웠구나?”“자기가 없는데 나도 깊이 잠에 못 들지. 안에 있는 솥 보면 자기 주려고 탕 끓여 놨어. 어서 가져와!” 원경릉이 부뚜막 뒤에 솥을 가리키며 말했다. 솥 아래에는 장작불이 아직 꺼지지 않고 안쪽에 쌓여서 타고 있었다.우문호는 너무 배가 고픈 나머지 체면도 잊은 채 얼른 달려가 솥 뚜껑을 열었다. 안에는 탕이 있었고, 받침을 하나 집어 받친 뒤 소주방 작은 탁자에 앉아서 원경릉에게 물었다. “당신은 배 안 고파? 우리 같이 먹자.”원경릉이 고개를 흔들고 조심조심 옆에 앉아서 우문호에게 말했다. “자기 먹어, 난 배 안 고파. 밤에 음식을 못 먹겠어. 먹으면 위가 더부룩해서 잠이 안 와.”“개월수가 이렇게 되기까지 당신도 정말 고생 많았어.”“난 아직 괜찮아!”우문호가 다가가 입을 맞췄다. 그러자 촛불이 일렁이고 밤바람이 솔솔 불어와 원경릉의 머리카락을 날렸다. 우문호가 입 맞춘 곳이 마침 머리카락 위라 서로 웃으며 머리카락을 옆으로 젖히고는 다시 원경릉의 이마에 키스했다. “원 선생은 오늘밤에 내가 얼마나 정신이 없었는지 모를 거야. 소요공이 어느 나사가 빠졌는지 완전 미쳐 가지고 무려 마차로 성을 뱅뱅 돌았어. 문관들도 지쳐서 맛이 갔어. 다들 소요공한테 이를 갈고 있을 거야. 전에 문관들이 전쟁에 나가는 걸 반대해서 여러차례 곤란을 겪었던 걸 기억하고 방식을 바꿔 그들에게 벌을 준 거지. 오늘 걷다가 토한 관원이 얼마나 많았는데..”원경릉이 웃으며 대꾸했다. “그랬어? 난 또 소요공이 주책을 부리나 했지.”“그럴 리가 없지. 그 나이에 어디 주책이나 부리고 있겠어. 분명 다른 의도가 있었던 거야. 난 이제 그 세분을 아주 존경해.” 우문호가 고개를 파묻고 탕을 먹는데 안에는 고기가 있어 젓가락으로 열심히 집어 먹었다. 그런데 먹다 보니 소요공의 이번 행동에 의문이 드는 게 정말 그냥 주책이었나 싶었다. 원경릉이 우문호를 바라보고 웃으며
시집가면 그 집 사람이라고, 우문령도 남편의 이익을 먼저 고려했다.이리 나리는 느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필요할 때가 되면 훼천과 멸지를 내보내야지.”반드시 장인의 뜻대로 되라는 법이 있나! 명원제가 훼천이라는 장기말을 늑대파에서 빼내 오고 싶은 마음이 있다고, 늑대파가 반드시 조정을 위해 쓰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지금은 이리율이 명원제의 사위인만큼 황실의 위엄을 헤치는 것이 되므로 늑대파가 다시는 그런 살인청부업을 하지 못할 것이다.또한 늑대파가 항상 위협적인 존재인 이유는 어느 날 이리율이 자리에 물러나면 누군가 늑대파를 찾아가 조정의 높은 관리나 황실 사람 누군가를 살인 청부하는 일도 불가능 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리 나리는 늑대파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이생에 이룬 최대의 성취는 장사가 아니라 바로 늑대파기 때문이다.조정은 엄정한 기준으로 늑대파를 감독하지 않았는데 이는 늑대파가 지금 죽이려는 사람은 전부 극악무도한 죄인으로 법률의 손이 닿지 않는 지대까지도 늑대파가 처리해 주었다. 그리고 늑대파는 돈을 버니 이득이지 않겄나. 우문령은 더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방금은 그냥 걱정했던 척 한 것이었다. 이런 문제는 이리 나리가 알아서 처리할 수 있으며 그가 처리하지 못하는 일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우문령은 사실 지금 다른 일을 생각 중이었다.그녀가 살구 씨 같은 눈을 살짝 뜨자 고운 얼굴에 연지분을 살짝 바른 듯 발그레 했다. 우문령은 줄곧 분을 바르지 않아 정결하고 투명한 피부가 마치 백옥 같아서 살짝 도는 붉은 빛이 더욱 눈에 띄었다.이리 나리가 막 고개를 들어 우문령의 안색이 발그레한 것을 보고는 손을 뻗어 그녀의 이마를 짚었다. ”열이 나는 것이냐?”우문령은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그의 손에서 전해져 오는 체온을 느꼈는데, 청순하고 귀여운 얼굴이 더욱 새빨갛게 변하더니 용기를 내어 입을 뗐다. “열 나는 거 아니에요. 전에 그러셨잖아요. 북막을 평정하고 나면 우리 진짜 부부가 되자고
이리 나리는 가만히 우문령의 말을 듣고 있었다. 우문령은 점점 눈을 반짝였는데 볼도 더욱 발그레해 지는 것이 자신의 말이 진심이 가득하고 대충 넘기려는 게 아니라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이리 나리는 천천히 우문령의 부드러운 손을 쥐며 말했다. “혼례를 치르고 몇년간 한 침대에서 같은 이불을 덮고 잤지만 한번도 당신에게 손 대지 않은 건 세가지 부분을 고려했기 때문이야. 첫째는 당신 몸이 좋지 않은 거야. 일단 당신이 나와 함께 몸을 나눈다면 아들 딸을 낳아 키워야 하는데, 거자탕을 다 알아봐도 전부 찬 성분의 약 위주더군. 그래서 제일 좋은 방법은 당신이 몸조리를 먼저 하고 나이가 더 차서 아이를 낫는 것으로 그게 덜 위험해. 두번째는 내가 비록 장사치나 절반은 강호인이라 할 수 있으나 우리는 신분이 다르고 자라온 배경도 다르다는 점이였어. 당신은 궁궐에서 존귀하게 자랐고 난 시장과 강호에서 이리저리 구르며 살았지. 당신이 만약 더러운 세속에 적응하지 못할 경우엔 우리는 혼인해서는 안되는 사이가 되는 거지. 세번째는 내가 방금 당신에게 말한 것처럼 어명으로 마지못해 나에게 시집와서 후회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됐어. 앞에 두개는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지만 당신이 날 사랑하는가 하는 것 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문제니깐. 그리고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지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니까. 당신에게 후회할 충분한 시간을 준 건 우리가 진정한 부부가 되는 날엔 상대방의 손을 놓지 않고 평생을 함께 하자고 말할 생각이였어.” 우문령은 눈가에 물기가 맺혔다.이리 나리는 줄곧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 아니였다. 심지어는 하루 종일 한마디도 안 하는 경우도 있어서 방금 그의 말은 한 글자 한 글자 우문령의 마음을 때려 영혼을 뒤흔들어 놓았다. 우문령은 전에 이리 나리가 자신의 몸을 보양 시키는 것이 자신과 몸을 나누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어서 하는 일종의 변명이 아닐까 추측했었다. 하지만 우문령은 차마 도저히 물어볼 수가 없었다. 한 번 뱉은 뒤 답을 듣고 나면 모른 척 되돌릴
“뭘 그리 잘난 척이야?” 손왕이 투덜거리며 자기도 모르게 손 왕비의 손목을 있는 힘껏 비틀었으나 본인은 이미 화가 난 상태라 인지하지 못했다. 그러자 손왕비는 오늘 입궁 전에 쌓였던 울분이 떠오르며 버럭 화를 냈다. “뭐 하는 거예요? 손목 아파 죽겠네. 그런 험한 눈빛은 해서 대체 뭐 할 건데요? 누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래요? 누가 잘난 척했다고? 제가 눈에 거슬린거 아니예요?”손왕이 손 왕비의 손을 놓고 불쾌한듯 투덜거렸다. “뭘 중얼중얼거려? 당신한테 한 얘기도 아닌데.”“그럼 누구한테 한 건데요? 다들 얼마나 기뻐하는데, 당신만 무슨 비교 짓인지 원!” 손 왕비가 화를 냈다.손왕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우문호를 노려봤다. 조복 아래 늘씬하게 쭉 뻗은 몸매가 시원스러우면서도 귀티가 흘렀다. 그의 잘난 모습에 갈수록 질투가 불타올라 코웃음을 쳤다. “나도 내일부터 밥 안 먹고 살 뺄 거야. 저 녀석이 잘 생겼다고? 내가 살 빼면 백배는 더 잘 생겼어.”손 왕비가 눈을 흘겼다. 그가 살 어쩌고 하는 말을 어찌나 많이 들었는지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이었다. “왜, 오늘밤부터 안 드시지 그래요?”손왕이 눈을 내리깔고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그건 안돼. 오늘밤 궁중 연회에 나온 요리는 산해진미를 각종 요리법으로 맛을 극대화한 거라고. 이건 다시없는 기회야!”손 왕비가 악에 받쳐 서 소리쳤다. “에휴! 당신은 평생 뚱땡이로 살 거예요!”“당신은 입이 왜 그리 험해! 이 여자가 참으로 고약하군!” 손왕이 씩씩거렸다.“누가 저한테 먼저 시비 걸라고 했어요? 오늘 조복 뜯어진 거 굳이 저를 불러서 꿰매 달라고 했었죠? 수모가 당신 살찐 거 아는 게 창피해서 그랬겠죠. 근대 당신 살찐 거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당신이 어디 조복만 찢어 먹었어요? 살쪄서 미어지지 않은 옷이 얼나마 많은데! 그리고 당신이 시간 끌지 않았으면 오늘 우리가 늦지도 않았잖아요. 아바마마께서 절 째려 보셨다고요.” 손 왕비는 말을 꺼내면 꺼낼수록 더 화가 나는 모양이
제왕은 그렇게 한대 쥐어박지 않으면 멋대로 상상의 나래를 펴는 인간이라 아내 원용의에게 한대 맞고 나서야 제정신으로 돌아왔다.회왕과 미색은 손을 맞잡고 명전 무대를 바라보며 우문호의 축사를 들었다. 우문호는 미리 원고 준비없이 떠오르는 대로 연설하다가 갈수록 격앙되었다. “북막은 수년간 북당의 변경을 여러차례 도발하고 압박해왔습니다. 기고만장하게 굴었으나 전쟁은 백성들을 도탄에 빠지게 한다는 생각에, 우리 북당의 군인과 신하들은 줄곧 양국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화의를 시도했습니다. 백성들이 갈 곳 없어 떠도는 고통을 겪어서는 안되니까요. 하지만 북막은 북당의 약점을 잡았다며 만만하게 여기고 대군을 일으키는 만행을 저지르고야 말았습니다. 다행히 태상황 폐하의 친정에 소요공과 주재상이 앞장서고 애국충정의 병사들이 목숨을 걸고 뒤를 따라, 병사와 백성이 일심동체로 적에 맞서 싸웠습니다. 결국 적을 북당 영토에서 몰아내는 조약이 성립되어 북당의 변방은 수십년간 평화를 지킬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공로와 영광은 모든 병사들과……”우문호는 목여태감의 손에서 술잔을 받아 든 뒤 진중하고 숙연한 얼굴로 다시 말을 이었다. “특히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병사들의 몫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선혈과 생명으로 우리 북당의 강산을 지켜냈습니다. 우리는 영원토록 그들의 이름을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이 술은 그들을 위해 바칩니다!”문무 백관들은 엄숙하게 태자가 제주를 땅에 쏟는 것을 보며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국 병사들의 넋을 기렸다. 태자의 신중한 한 마디 한 마디가 진정성을 더해 그들의 희생없이 오늘의 승리는 쉽게 얻을 수 없었음을 통감했다.회왕은 원래 조정 일에 관심이 없었다. 비록 나중에 황실 창고를 맡긴 했지만 태평성대에 은전을 쓰는 일은 별다른 풍파가 일어날 게 없었다. 그래서 평생 무장을 만날 일이 거의 없었는데, 이번에 전시 군량담당관을 맡으며 무장이 얼마나 어려운 일을 하고 있는지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북당의 강산을 지키기 위해서는
“용서를 구해 봐요!” 회왕은 위왕의 이런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 위왕 사건이 있었을 때 회왕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고 심지어 안부조차 제대로 묻지 못해 늘 마음이 쓰였다.위왕이 고개를 들어 회왕에게 말했다. “모든 잘못이 다 용서받을 가치가 있는 건 아니지. 또 모든 감정이 다 이전으로 되돌아 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이치야 그렇지만. 회왕은 내내 위왕이 안쓰러웠다. “봐요, 형도 이미 넷째 형을 용서했잖아요?”“그건 또 다르지.” 위왕이 고개를 흔들며 사람들 속에서 안왕의 모습을 찾았다. 안왕은 마침 유모 손에서 안지를 받아 품에 안고 뽀뽀하고 있었는데 행복으로 가득찬 미소를 짓고 있었다. “넷째가 날 해쳐서 미웠어. 그런데 미움은 쉽게 용서받을 수 있지만 나는 라라에게 상처를 입혔어. 상처로 고통받게 한 거지. 사람은 고통 뒤에 깨어나게 돼. 라라가 결국엔 깨어나 날 사랑한 자체가 잘못이었다는 걸 깨닫게 된 거야. 난 지금 오히려 라라가 날 사랑한 적이 없기를 바래. 그러면 적어도 나에겐 조그만 희망은 있을 테니까!”이렇게 말하고 잠시 후 다시 고개를 흔들며 말을 이었다. “아니다, 역시 라라가 날 좋아한 적이 없는 건 싫어. 라라는 날 좋아했으면 좋겠군, 그러면 좋겠어.”회왕은 위왕의 얼굴에서 슬픔인지 기쁨인지 알 수 없는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그가 기억하고 있는 위왕은 늘 맹렬하고 신속해서 마음 먹은 일은 어떤 난관에 부딪혀도 해내는 사람이었다. 당시 정화 군주를 좋아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때는 정화 군주와 함께 도피행각을 벌이기까지 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겁을 내고 있다.“이 얘기는 그만 하자. 내 얘기 해봤자 좋은 것도 없는데 정말 나한테 신경 써주고 싶다면 있다가 나랑 술이나 해.” 위왕은 비록 회왕의 호의를 잘 알지만 정말로 다른 사람이 자신과 라라의 일에 관심을 가지지 말아줬으면 했다.바꿀 수 없다면 이렇게 친구 관계를 유지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위왕이 말을 마치고 발걸음을 옮겼다.회왕도 작게 한숨을 쉬며 정자를 나
회왕이 화들짝 놀랐다. “혼담이라고? 혼담이 오간다는 말이야? 대체 어느 집이랑?”“몰라요. 다 들은 게 아니라서요. 이 사람이다 저 사람이다 말이 많지만 아닐 수도 있어요. 제가 보기엔 정화 군주의 안색이 초췌한 게 이 일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요. 그러니 원하지 않는 거 아닐까요?” 미색이 말했다.회왕은 마음속으로 아차 싶었다. 위왕이 이 사실을 아는 날엔 하늘이 무너질 게 틀림없었다.위왕이 얼마나 괴로워할지 눈에 훤했다.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가 다른 남자에게 시집 가서 다른 남자의 아이를 낳고 평생을 그자와 산다니, 너무 끔찍하고 미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일은 절대 형이 알아서는 안돼. 적어도 오늘은 아니야. 오늘밤은 전승을 축하하는 자리로, 형이 심리적으로 무너져서 실성이라도 하는 날엔 아바마마께서 질책하실 게 틀림없다고.” 회왕이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설마 다시 얘기할 리는 없겠지?” 미색이 그쪽을 흘끔 보자 최씨 부인과 다른 부인 몇이 담소를 나누고 있었는데 무슨 얘기를 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난 다섯째형 사람들을 찾아가 볼게. 오늘밤 어찌됐든 셋째형 잘 지켜줘. 아바마마의 경축연을 망가뜨리는 날엔 셋째형 아주 경을 칠 걸!” 회왕이 말을 마치고 얼른 우문호를 찾으러 갔다.우문호와 원경릉은 회왕의 말을 듣고 정말 너무 갑작스러운 소식이라 화들짝 놀랐다. 최씨 집안이 궁중에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정화 군주의 혼사를 거론했으니 십중팔구 이뤄질 게 확실하다. 그렇지 않았으면 말도 꺼내지 않았겠지. 정화 군주의 명성을 해칠 테니 말이다.“원 선생이 정화 군주를 찾아가서 물어봐줘, 우리 형제들이 셋째가 최씨 집안 사람들이나 다른 내명부 사람 접촉하지 못하게 지키고 있을 테니까.” 우문호가 일사천리로 지시하자 부대는 둘로 갈라져서 빠르게 움직였다. 원경릉은 바로 정화 군주를 찾아가며 손 왕비, 회 왕비, 제 왕비, 그리고 안 왕비까지 황실의 동서들 중에 아홉째 만아와 요 부인을 제외하고는 다 불러냈다.그들은 같이
“뚱뚱하신 거 인정하죠. 하지만 겁 많다는 건 인정 못 해요. 절 위해 칼을 막아 서셨는 걸요.” 원경릉이 웃으며 슬그머니 정화 군주를 봤다. 손 왕비에게 손목이 잡혀 있으면서도 여전히 마음이 콩밭에 가 있는 모습이었다.손 왕비는 원경릉이 손왕을 칭찬하는 걸 듣고 기뻐서 점점 미소가 커졌다. “진짜 겁이 많은 걸. 그나마 동생을 보호해야 한다는 건 알아서 그렇지. 그래도 그 점은 괜찮은 편이야.”원용의는 계속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꽤 예민한 편이라 미색과 원경릉의 표정이 뭔가 어색한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손 왕비가 이렇게 열띠게 얘기하는데도 미색과 원경릉은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호비 궁에 도착해 궁문을 지키는 하인에게 물어보니 호비가 오늘 나가지 않았다고 했다. 어젯밤 과식하고 배탈이 나서 그런지 명원제가 금족령을 내려 문밖 출입을 못 한다는 것이다. 밖이 이렇게 시끌벅적한데 떠들썩한 걸 좋아하는 호비가 나가지 못해 얼마나 속이 탈까 걱정이 되었다. 황실의 며느리들이 웃고 떠들며 안으로 들어가자 호비가 놀라며 말했다. “날 구해 주러 왔구나. 어서 애기 좀 해 봐. 밖에 굉장하지? 나도 진짜 나가고 싶은데 말이야.”모두가 방안으로 들어오면서 너털웃음을 터트리고 원경릉도 웃으며 물었다. “오늘 이렇게 들썩들썩 할 걸 아셨으면 어젯밤에 그렇게 식탐을 부리셨음 안되죠.”“진작에 좋아졌는데, 폐하께서 지레 놀라서 가지고!” 호비가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눈동자에는 기쁨으로 넘실거렸다. 호비는 사실 이렇게 강압적인 사랑을 즐겼다.“아바마마께서도 마마를 위해서 그러시죠. 용종을 잉태하신 데다가 체기도 있으셨잖아요. 외출하시면 분명히 나가 노실 텐데 뱃속에 아이에게 좋지 않아요!” 손 왕비가 말했다.호비가 손 왕비를 한참 쳐다보더니 웃었다. “손 왕비, 오늘 입은 옷이 예쁘네. 혼례 때 입는 예복 같아.”손 왕비가 오늘 입은 옷은 친왕비의 조복이 아닌 붉은 석류 색 구름무늬 비단으로 만든 길상무늬 옷으로 커다란 모란을
대오가 경성으로 돌아올 때 홍엽도 원숭이와 같이 돌아왔는데, 그도 풍도성에서 힘을 보탰다. 사실 홍엽이 안 가도 안풍 친왕이 모든 걸 다 준비해 둬서, 안풍 친왕 능력이면 안지여 정도 상대하기는 식은 죽 먹기였다.이리 나리 일행은 경성에 도착해, 우선 집으로 돌아가 공주와 천행이를 보고 가족이 함께 밥을 먹은 뒤 입궁해서 경과를 보고했다.사적인 원한은 한두 마디로, 벌을 받아 마땅한 사람은 지금 받아야 할 벌을 받고 있으며 아직 죽이지 않았다고 했다남은 건 정사를 논하는 것이었다.“어머니와 같이 풍도성에서 보름 정도 지내며 기본적인 민심을 파악했는데, 천문 세가는 백성들 사이에서 아직 명망이 높아 보입니다. 풍도성 백성들은 사실 세금이 너무 많고 경제가 번영한 성과가 전부 안지여 수중에 떨어지는 구조로 되어 있어 안지여의 통치에 불만이 있었다고 합니다. 조정에서 풍도성을 접수한 것에 백성들 대부분은 찬성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제 천하태평이냐 하면 그럴 순 없는 것이, 일부는 성주가 자기들의 황제라 여기고, 조정이 풍도성을 접수한 것이 풍도성이 침략당했다고 여겨 나중에 약간 문제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지부를 임명하실 때 신중하셔야 할 것입니다.”우문호가 말했다. “흠, 큰할아버지께서 천거한 사람이 있는데, 바로 박원이라네. 자네 생각은 어떤가?”그러자 이리 나리의 눈빛이 빛났다. “제 아버지가 추천한 사람이니 전 찬성입니다!”“아버지?” 우문호가 의아해하며 이리 나리를 쳐다봤다. ‘안풍 친왕비가 사부님이면 안풍 친왕은 사부의 남편 아닌가? 어떻게 아버지가 되지? 사부님의 배우자니 사모님이라고 부르는 게 더 맞지 않나?’“흠, 안풍 친왕은 제 아버지십니다!” 이리 나리는 더 설명할 생각이 없는지 어쨌든 그렇다고 주장했다. 그 오랜 세월 동안 한 번도 그를 아버지라 부른 적 없지만, 마음속에서만큼은 진정한 아버지였다.“하하하!” 우문호도 그저 웃으며 더는 묻지 않았다.이리 나리가 퇴청할 때 우문호가 이리 나리를 부르자 고개를 돌렸다. “무
“우선 박원이랑 소홍천 의사부터 물어보자. 억지로 하게 하고 싶지 않아. 그동안 그들이 날 많이 도와줬으니 전부 원하는 대로 하자고.” 우문호가 말했다.“그러자!” 원경릉이 일어서며 말했다. “오늘 저녁 애들 데리고 어머님께 가서 수라를 들려면 빨리움직여야 해. 꾸물대면 늦을거야.”그러자 우문호도 계란이를 안고 일어섰다. “그래, 우리 황조모한테 가서 맘마 먹자.”우문호가 나가서 부르자 아이들이 달려와, 같이 왁자지껄하게 수라를 들러 황태후 전으로 갔다.황태후는 원래 우문호에게 할 말이 있었지만, 식사 자리에 아이들이 있어서 기다렸다가 저녁을 다 먹은 뒤 우문호와 아이들이 나가서 놀고, 원경릉이 황태후와 얘기를 나눌 때 말을 꺼냈다.“천행이가 태어난 지 얼마나 됐다고 부마를 풍도성으로 보낼 수가 있지.. 공주가 얼마나 괴로웠을까.”원경릉이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공주는 사정을 훤히 알고 있어서, 이리 나리께서 풍도성에 가는 걸 지지하셨는걸요.”“말은 그렇게 해도, 출산 후에 여자 곁엔 남편이 있어야 하는 법이야. 하지만 이것도 단지 우리 가족끼리 하는 얘기일 뿐이고, 조정 일을 내가 함부로 이렇다 저렇다 할 수 없는 노릇이지.”황태후는 이리 나리가 풍도성으로 간 진정한 목적을 전혀 몰랐으며, 단순히 어지러운 형국을 정리하러 갔다고만 알았기 때문에 순수하게 공주를 아끼는 마음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어마마마, 걱정하지 마세요. 이리 나리는 이미 돌아오는 중이래요.” 원경릉이 위로하자 황태후가 기쁜 표정을 지었다. “그거 잘됐네!”온 가족이 별빛을 받으며 천천히 소월궁을 거닐었다.계란이는 아빠 품에서 잠이 들었고, 아이들은 놀다 지쳐서 아빠 엄마를 따라 천천히 걷고 있었으며, 목여 태감이 궁인 둘을 데리고 뒤에서 조용히 따라오는 가운데, 궁 안은 인적이 드물어 밤이 되자 상당히 고요했다.“어마마마께서 공주를 아끼셔서, 이리 나리가 하필 이때 풍도성에 보냈냐고 하셨어.” 원경릉이 말했다.“날 원망하셨어?” 우문호는 품에 있는 아이가 깰
늑대파 사람이 안지여와 소여쌍을 질질 끌고 나가는데, 소여쌍은 여전히 미친사람처럼 웃어대기만 했다.이리봉청은 그들이 끌려 나가는 것을 보자, 눈앞에 안지여가 자신을 데리고 소여쌍의 침대 앞으로 가서 소여쌍의 그 악랄한 말을 듣던 순간이 떠올랐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여리여리하고 아름답던 그녀가 이렇게 변해 버린 게 꿈처럼 느껴졌다.풍도성을 접수한 뒤 안풍 친왕은 관리들을 새롭게 임명했고, 더 이상 성주 같은 것을 두지 않고 조정과 이부에 적합한 인사를 선발해 풍도성 지부로 앉힐 것을 요청했다. 풍도성은 더 이상 이전의 독립 자치 지역이 아닌, 다른 주나 현과 마찬가지로 조정에 귀속되어 통일서 있게 다스리게 되었다.더불어 안풍 친왕은 별도로 서신을 써서 황제인 우문호에게 보냈는데, 풍도성을 추천하지만, 이건어디까지나 건의와 추천이니 황제가 생각하는 마땅한 사람이 있으면 안풍 친왕의 추천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동시에 안지여의 잔당들이 계속 나타났다.안풍 친왕이 이번에 이렇게 많은 사람을 데려오고, 호랑이와 눈 늑대, 회색 늑대까지 출동시킨 건 바로 모든 세력을 강화하고, 신속하게 진압해 풍도성을 조정에 복귀시키고 보름 만에 비적을 토벌하며 기본적인 숙청을 마무리하기 위해서였다.박원은 잔당의 남은 불씨가 다시 타오르는 것을 막기 위해서 안풍 친왕의 영패를 가지고 부근에 5천 명의 군사를 파견시켜 풍도성을 지켰다. 이리 나리는 자금을 지원해 천문 세가의 묘를 이장하였는데, 이전 무덤은 안지여가 고른 곳으로 폐허에 가까워, 그는 천문 세가 사람들이 그런 곳에서 안식을 취하기를 원하지 않았다.풍도성에 온지 거의 한 달가량 될 때쯤, 대군은 경성으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돌아가기 전에 미색이 안지여와 소여쌍을 보러 갔다가, 돼지우리에서 죽느니만 못한 삶을 사는 것을 보고 그제야 비로소 맺혀 있던 한이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미색은 이리 나리와 어머님에게 알리지 않은 것이, 두 사람은 이미 안지여가 누군지 잊은 듯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리봉청에게 있어 모든 건 지나가지 않았고, 36년 전 일은 여전히 어제 일 같이 느껴졌다.“어머니, 그를 어떻게 처분하시겠어요?” 이리 나리는 이리봉청의 마음을 넘겨짚을 수 없어 함께 걷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생각은 어떠니?” 이리봉청이 다시 되묻자 이리 나리가 원한에 사무친 눈빛으로 말했다. “제게 처분하라고 하면 전 그를 죽여 버릴 겁니다.”이리봉청은 알았다며 대답만 했다가, 다시 30분쯤 걷다가 정자에 앉아 을 때 말을 덧붙였다. “난 안 죽일 거야.”이리 나리가 약간 놀라서 물었다. “어머니, 또 마음이 약해지신 겁니까?”이리봉청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 반대야. 그 인간을 죽이는 게 마음이 약해진 거지. 사실 며칠 동안 이전의 원한을 내려놓을 수 있을지 생각해 봤는데, 내려놓을 수 있다면 그 인간을 백번이라도 죽이겠지만, 난 그럴 수 없더구나. 아들아, 게다가 오늘 천문 세가 대문을 들어서는 그 순간, 더욱 마음을 굳혔단다.”이리봉청이 일어나 집안을 둘러봤다. 이곳은 그녀의 가족들이 살아 원래 온통 사람 소리로 가득한 곳이였다. 그들의 웃던 광경이 눈앞에 비치는가 하더니, 눈 깜박할 사이에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그들은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천문 세가는 큰 잘못을 저지른 것도 없는데 멸문지화를 당했고, 가엾게도 그 중엔 아이들이 많아서 제일 어린아이는 이제 태어난 지 한 달밖에 되지 않았었다.이리봉청의 얼굴에 눈물이 타고 흐르며 가슴이 미어졌다. “그자와 소여쌍을 밖에 내버리고 사람을 시켜 지켜보도록 해. 죽게 두지 말고 계속 살려둬. 36년은 더 살면서 이 세상의 고생을 모두 겪어야, 내 마음에 맺힌 한이 풀리고 억울한 망자들도 안식에 들지!”이리 나리는 온몸으로 그 마음이 느껴져, 어머니가 눈물 흘리는 것을 더는 볼 수 없었다. “네, 전부 어머니께서 말씀하신 대로 할게요.”안지여와 소여쌍은 버려졌다. 짧은 며칠 사이에 안지여는 의기양양하던 성주에서 시궁창 쥐로 변해, 사람들이
안지여는 풍도성 지하감옥에 갇혔다. 빛 한 줄기 없는 지하감옥에서 사방에 끝없는 어둠과 절망만이 안지여를 삼키고 있었다.훼천의 형벌은 12 시진 후면 사라져서, 앞으로 안지여는 그저 한 명의 폐인일 뿐이었다.안지여의 결사대가 성으로 공격해 들어오기 전에, 이리봉청은 오 선생을 찾아내 안지여가 저지른 모든 죄를 고백하게 하고 안풍 친왕이 친필로 받아 적었다. 안지여가 당시 천문 세가를 해친 경위를 소상히 써 내려간 뒤, 오 선생과 안풍 친왕의 직인을 찍고 인쇄해서 대중에게 공개했다.안지여의 죄악은 하늘을 찔러 백성들 모두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안지여의 결사대의 옛 부하들이 본래 성을 공격해 들어가 안지여를 구출할 계획을 세워놓았으나, 안지여의 죄상이 공포된 뒤로 많은 사람들이 해산하였다. 유일하게 무대장군만이 수천 명을 데리고 성으로 쳐들어왔지만, 안풍 친왕과 이리 나리가 이미 대비해둔 덕분에, 경성에서 굴러온 돌이 무대장군의 박힌 돌을 빼내는 전투를 벌였다.풍도성에 온 지 7일째, 안풍 친왕은 풍도성을 접수하고 성에 살던 사람을 쫓아내며 서민으로 강등시켰다.안지여와 소여쌍에 대한 처분은 이리봉청에게 넘겼다.안지여는 캄캄한 지하감옥에서 6일을 지내는 동안, 처음엔 침착한 척 가장했으나 사흘째가 되자 울부짖으며 악독한 저주의 말을 내뱉더니, 나흘째가 되자 용서해달라고 애원하며 참회했다.손발의 힘줄이 끊어진 안지여는 일어나 걸을 수도 없고 심지어 스스로 몫숨을 끊을 힘도 없었다.그 와중에 매일 누군가가 먹고 마시도록 해주고, 상처도 치료해 주어 살 수 있다는 부질없는 희망을 품게 했다.훼천의 말에 따르면, 진정한 절망은 살아도 죽느니만 못하고,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것으로, 온 마음으로 죽기를 바라지만 살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었다가, 안간힘을 쓴 뒤 다시 절망에 빠지는 것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으로, 사람을 한없이 죽였다 살렸다 괴롭힌다고 했다.결국 안지여를 죽일지 말지 여부는 이리봉청에게 달렸는데, 그녀는 안지여를 단번에 죽여 천문 세가
안지여의 이마에 파란 힘줄이 불끈불끈했으나 냉정을 가장했다. “내가 두려워할 줄 알았나 보지? 죽음도 두렵지 않은데 뭘 더 두려워하겠어?”“넌 두려울 것이야!” 이리봉청이 고개를 돌려 이리 나리를 보고 살짝 그의 팔을 잡았다. “내가 오는 길에 늑대파 사람이 그러던데, 천하에서 제일 잔혹한 형벌을 아는 사람이 늑대파에 있다고. 그게 사실인 것이냐?”이리 나리가 가볍게 답했다. “물론 사실이죠. 훼천이라고 합니다. 늑대골 출신이에요.”“안지여가 버틸 수 있는지 어디 한 번 보고 싶구나.” 이리봉청이 말했다.이리 나리가 엄숙한 태도로 명을 내렸다. “훼천!”그러자 훼천이 급히 나왔다. “이리 나리, 분부하시지요!”이리 나리는 그가 짐짓 냉정한 척하고 있으나 눈빛이 조금씩 허물어져 가고, 몸까지 부들부들 떠는 것이 아주 만족스러워 훼천에게 담담하게 말했다. “시작해!”안지여가 갑자기 큰 소리로 욕했다. “난 네 아버지거늘, 감히 나에게 손을 대다니, 천벌을 받아 마땅한 놈 같으니라고!”이리봉청이 이 말을 듣고 잠시 주저하는 눈빛으로 이리 나리를 바라봤다.이리 나리가 이리봉청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제 아버지는 오직 저를 키워주신 안풍 친왕뿐이십니다.”이리봉청이 살짝 안도했다. “저 인간이 단지 나만 해쳤으면 네 체면을 봐서 놔줬겠지만 천문 세가의 수백 명의 목숨을 앗아갔으니 난 용서할 수 없구나.”“이리봉청, 너 언제 이렇게 악랄하게 변했어? 죽이려거든 그냥 죽여. 난 천문 세가 사람을 죽이긴 했어도 그들을 괴롭히진 않았어. 네가 날 죽이려거든 깨끗하게 단번에 죽여!”안지여가 크게 노해 몇 번 몸부림을 치다가 상처가 벌어지는 바람에 배에서 선혈이 흘러나오고, 훼천이 가까이 다가가자, 눈에 두려움이 깊어졌는데, 늑대골 출신 훼천은 온몸에서 피비린내가 뿜어져 나와 안지여를 덜덜 떨게 했다.“이리율!” 안풍 친왕비는 시ㅈ가하기 전에 이리 나리를 불렀다. “내가 여기서 네 엄마와 같이 있을 테니 넌 먼저 나가 있거라!”이리 나리가 안풍 친왕비에게
안지여에게 구원 병력이 없는 상황에서, 이리 나리 일행이 성을 제압하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대오가 경성에서 출발하기 전에, 안풍 친왕비가 미리 사람을 풍도성으로 보내 각처, 특히 성 수비군과 군대에 잠입시켜, 음식에 효과가 천천히 나타나는 독을 풀어, 오늘 중독 증상이 나타나도록 독의 분량을 조절했다.적어도 내일까지는 안지여를 도우러 올 사람은 없었다. 독성은 적어도 이틀이 지나야 깨끗해지기 때문에 이틀 동안 그들은 설사와 전신 무기력으로 성에 무슨 일이 있다는 걸 알아도 와서 도울 수 없었다.그리고 그들이 기력을 회복할 때쯤이면, 안지여는 벌써 죽었을 것이다.안풍 친왕과 이리 나리는 성을 통제하고, 안지여 부부를 제압해 두 사람을 줄로 묶고 지혈시켜 주었다.안지여는 요 몇 년 동안 자신이 상당히 대단하다고 여겼다. 이는 풍도성이 부유하기 때문으로, 돈으로 많은 사람을 살 수 있었으며, 여러 곳에서 추켜세워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처절하게 패배한 적이 없었던 이유는 진정한 적이 없기 때문으로, 주변의 떠돌이 비적은 작은 마을 규모로 너무 작아서 소탕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결코 그가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적이 너무 약해서였다.조정 사람과 비교했을 때, 그는 제대로 훈련받은 적 없는 비적었기에 일격도 감당할 깜냥이 못됐다.이리 나리는 둘을 중정에 묶어 두었다. 온 바닥에 남은 음식과 깨진 기와가 널브러져 있는 것을 본 안지여는 마음속 깊이 분노가 일었다. 자신의 생일날, 그를 다치게 한 것이 바로 그의 친자식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더욱이 오늘 이렇게 많은 고수가 현장에 있었는데도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이런 결말을 맞다니 너무 불쾌했다. 이리 나리가 이리봉청을 부축하고 안지여 부부 앞으로 가서, 그녀가 안지여 부부를 내려다보자, 그들은 낭패에 달가워하지 않는 기색으로, 이리봉청은 분노하는 마음과 함께 서글픈 마음도 들었다. 그들을 죽이면 커다란 복수는 이뤄 천문 세가 망자의 원혼은 달랠 수 있었다.하지만 저들을 이렇게 쉽게
“그럴 필요 없을 것 같은데?!” 이리 나리가 검을 휘두르며 안지여를 겨누자, 안지여가 공중으로 뛰어올라 후퇴했다.공자들은 돕고 싶었으나 검은 옷을 입은 노인들에게 바로 제압당했다. 안지여는 이리율 것으로 그들은 주변 사람을 제압하기만 할 뿐 옆에 서서 전투를 관전하고 있었다.이리율의 무공이 얼마나 뛰어난지 그를 가르친 안풍 친왕 부부를 제외하고, 사실 많은 사람들은 모르고 있었다.이리율의 검법은 신속하고 맹렬해서 안지여는 상대하느라 쩔쩔매고 구석으로 몰리고 있었다. 성안의 호위들은 늑대 무리와 늑대파, 홍매문 사람들에게 막히는 바람에 안지여는 홀로 고전을 면치 못했는데 그래도 아직은 버틸 수 있었다.하지만 30분을 못 가서 안지여는 질게 틀림없었다.놀란 나머지 계속 실성해 있던 소여쌍이 갑자기 이리봉청을 향해 바싹 마른 손을 뻗어, 그녀의 목을 조르며 광적인 집착과 분노에 사로잡혀 성질을 부렸다. “멈춰, 다들 멈추라고. 안 그러면 내가 이년을 죽여버릴 것이니까!”소여쌍은 무공을 할 줄 알았지만 잘하지 못한 것이 어릴 때부터 계속 중병을 앓아 무공 연습에 소홀했고 성주 부인이 된 뒤로는 더욱 병기에 가까이할 일이 없었지만, 공력만큼은 아직 약간 있었다.소여쌍은 증오의 힘으로 이리봉청의 목을 졸랐는데, 소여쌍이 조금만 더 힘을 주면 이리봉청의 목을 부러뜨릴 것만 같았다.안풍 친왕이 차가운 눈빛으로 나서려 하자, 안풍 친왕비가 말리며 고개를 살짝 흔들었는데, 그럴 필요 없다는 뜻으로 뒤에 있던 사람들에게도 참으라는 눈짓을 하자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모두가 이리봉청이 제압당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손가락으로 뭔가를 쥐고 있어 소여쌍의 어깨 위를 휘감고 팔을 눌러 소여쌍이 머리를 돌리게 했다. 이리봉청 손에 쥔 것은 바늘로, 그대로 소여쌍의 오른쪽 눈을 찌르고 들어갔다.소여쌍이 절규하며 이리봉청을 놔주고 선혈이 흐르는 눈을 움켜쥔 채 비틀거리다 바닥에 쓰러져 데굴데굴 구르며 새된 소리를 지르는데, 원망과 저주의 말을 끊임없이 쏟아
풍도성 중정에는 안지여의 아들들과 사위가 그의 곁에 남았는데, 크고 작은 부상을 입어 점점 공포에 질려가고 있었다.‘이 사람들, 아주 대단하구나!’안지여는 이리봉청을 보고 비록 조금 냉정해 보였지만, 여전히 놀라운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갑자기 소여쌍이 큰 소리로 웃으며, 몸을 앞뒤로 흔들며 눈물을 찔끔거리더니 완전히 미친 사람처럼 갑자기 웃음을 멈추고 부들부들 떨리는 손가락으로 이리봉청을 가리키며 원망했다. “뜻밖에 네가 안 죽었단 말이지? 게다가 아들까지 있고. 참으로 황당하구나. 정말 너무 황당해. 원래 죽어야 했을 인간은 죽지 않고, 잘 살아야 할 사람은 36년간 괴로움을 당했어. 이리봉청 네가 날 비참하게 만들었으니 넌 이제 지옥에 떨어져야 해.”이리봉청은 소여쌍의 말을 들은 체 만 체했는데, 그녀 눈에는 지금 안지여만 들어왔다.안지여는 36년을 살아왔지만, 이리봉청에게 있어 36년은 마치 사라진 시간처럼 멸문지화의 원한이 어제 일 같았다.안지여도 이리봉청의 눈에서 분노와 악랄함을 보고, 처음으로 마음속에 두려움을 느꼈다.안지여는 억지로 감정을 가라앉히고 말했다. “네 사람을 데리고 가. 지난 일을 묻지 않을 테니. 그렇지 않으면 풍도성에서 곧바로 10만 대군이 올 것으로, 살아서 도망갈 생각은 꿈도 꾸지 않는 게 좋아.”이리봉청의 목소리가 낮게 잠겼다. “우리는 이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바로 네 성으로 쳐들어갈 수 있어. 넌 이미 졌어.”안지여가 웃었다. “졌다고? 그래?”안지여는 수하의 대장군이 믿음직해서, 그들을 당하게 놔줄 수도 있다고 여겼다. 대장군의 부대는 분명 치밀하게 준비되어 있을 것으로, 아마 지금쯤이면 궁수들이 이미 배치를 마치고 그들을 전부 쏴 죽이기 위해 기다리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이리 나리가 이리봉청의 손을 잡고 말했다. “어머니, 저자와 말 섞으실 필요 없어요. 앉아서 지켜보시기만 하면 됩니다!”말을 마치고 의자를 올리더니 이리봉청을 부축해서 앉혔다.안지여가 이리 나리를 보는데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