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정언과 순왕오늘 잔치에 온 손님 중에 냉정언도 있는데 오늘은 드물게 흰옷 대신 짙은 감색 옷을 입었는데 가슴팍에 꽃이 한 송이 수 놓아져 있어 눈에 확 튀는 차림이다.손왕, 제왕, 회왕, 순왕 남자들 한 무리가 본관에서 얘기하는데 안왕이 왔다. 하지만 안에서 남자들이 얘기하고 있어 하는 수 없이 자기는 초왕부를 거닐었다. 사실 별로 오고 싶지 않았지만 안왕비가 온다고 하니 혼자 보내는 게 안심이 안돼서 어쩔 수 없이 따라왔다. 그래서 와서도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고 혼자 나가서 외롭게 산책이나 했다.우문호는 냉정언 가슴의 꽃에 자꾸 눈이 가는 게 거슬렸다. 냉정언이 이렇게 화려하게 입은 적이 거의 없었다.원 선생의 말이 생각나서 웃으며, “정언아, 밖에 너에 대한 소문 어떤 지 알아?”“응?” 냉정언이 고개를 들고 쳐다보는데, 눈은 맑고 찻잔을 든 손가락은 가늘고 흰 데가 밝은 햇살이 비쳐 들면서 도자기처럼 반짝였다.다같이 냉정언에 대한 소문을 듣고 의아해하며 일제히 우문호를 봤다. 냉정언 이 사람은 세속에 전혀 물들지 않았는데 이 사람을 이러쿵저러쿵 하는 사람이 누구야? 구사는 마음 속으로 짚이는 데가 있지만 헤벌쭉하게 웃었다.그 자리에 있는 사람 중에 형제를 제외하면 구사정도밖에 없다. 다들 우문호 사람인 데다 구사는 소문을 이미 알고 있다. 우문호가 웃으며, “내 말이. 냉정언과 관원의 부인이 불륜 관계라니.”친왕들이 전부 하하 웃으며 ‘그게 어떻게 가능해? 황당무계한 말이네.’손왕이 웃으며 조롱하길, “난 그 말이 진짜였으면 좋겠는데, 그럼 냉대인이 동성애자가 아니란 걸 증명하는 거니까.”냉정언이 호기심이 가득해서, “제가 어느 관원의 부인과 불륜이라고 합니까? 연상? 연하?”“몰라, 태자비가 탕양한테 가서 알아보라고 했으니 돌아오면 알겠지.” 제왕이 냉정언을 보고, “화 안 나나?”냉정언이 느긋하게 차를 마시며,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울 게 없는데 화 날게 뭐가 있겠습니까?”“자네 성격은 여전히 이해득실을 초월해서 인간미가
몹쓸 유언비어“아직 어리다니? 너 설써 스무 살 넘었다고 그러지 않았어?” 우문호가 말했다.동생의 혼사에 형들이 관심이 없을 수가 있나? 그 자리에서 이집 저 집 아가씨들 얘기가 총출동이다.아홉째가 부끄럽기도 하고 다급해서 뭐라 변명도 못하고 형들이 이집 아가씨가 좋네, 저 집 아가씨가 참하네 하는데 솔직히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우문호가 아홉째를 보고 갑자기, “그럼 그냥 만아로 하자!”“아뇨, 전 아직 혼인하고 싶지 않으니 좀더 미뤘다가…….” 잠깐만 만아라고? 아홉째가 막 고개를 젓다가 정신을 차리고 다섯째 형이 만아라고 얘기하는 걸 듣고 당황해서, “헉, 사실 스무 살도 적은 건 아니죠. 일찍 혼인했으면 벌써 집안을 일궜을 나이인데.”우문호가 미소를 띠고 혼내며, “말하는 것 좀 봐. 너랑 만아가 서로 눈에 콩깍지가 씐 건 벌써 알고 있어.”아홉째가 두 손을 무릎에 몇 번을 비비더니 어색하게 웃으며, “그런 뜻이 아니라, 그게 굳이 혼인을 해야 하면 어느 집 아가씨든 같지 않겠어요? 저도 딱히 가린 적 없어요.”“그렇다는 말이지? 나중에 황귀비 마마께 너에게 비를 뽑는 연회를 베풀어 달라고 하마.” 우문호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아홉째가 애원하며, “다섯째 형!”다들 아홉째의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마음속에 깊은 한숨이 나오는 것이 아홉째도 혼인을 하고 싶어 하다니 정말 세월이 쏜살같구나.아홉째 마음이 확실히 정해지면 우문호는 원경릉에게 만아의 의사를 물어보게 할 작정이었다.그런데 아직 만아에게 묻기도 전에 탕양이 돌아와서, “냉대인 일을 알아봤습니다. 밖에 거론하는 사람이 없지만 구대인이 말씀하시기를 집에 직은 어머니께서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고 하셔서, 구씨 집안에 있는 사람에게 은자를 좀 써서 이 말을 둘째 부인께서 어디서 들었는지 알아봤습니다. 널리 전해진 소문은 아니고 둘째 부인 몸종인 고참 시녀가 이 일은 밖에 함부로 얘기할 수 없다며 둘째 부인이 입막음을 당할 수도 있다고.”“구씨 집안의 둘째 부인이?” 우문
파리 주명양탕양이 웃으며, “태자 전하, 삼가시지요. 다들 전하와 태자비 마마께서 서로 아끼시는 것을 알고 있으니 새삼 티 내지 않으셔도 됩니다. 사랑 받지 못하는 사람 마음도 헤아리셔서 자제하셔야 합니다.”우문호가 원경릉의 어깨를 안고 눈을 치켜 뜨더니, “사랑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절대로 너 자신은 아닐 테고. 부인과 서로 사랑하니까 맞아. 어제 왜 부인을 데려와서 얘기를 좀 하기 그랬어?”탕양이 미소를 짓고 나가며, “아내는 조용한 걸 좋아합니다!”탕양의 뒷모습을 보면서 원경릉은 탕양의 미소 뒤에 뭔가 숨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탕양과 부인은 사이가 좋고 부인도 탕양을 좋아한다는 건 알 수 있다.우문호는 사람을 보내 주명양과 우문군을 지켜보게 했는데 이 두사람이 무슨 소란을 피우지 않도록 대비해야 했기 때문이다.그런데 이들을 지켜보다가 큰 발견을 하게 될 이때만 해도 몰랐다.우선 우문호는 손전무를 경계했다. 강남의 거상이 처음이 아닌 게, 전에 우문군이 딸 희열이를 강남의 거상 이초 아들에게 시집보내려 했으나 성사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 거상의 눈이 계속 기왕을 주목한 것이 똥파리가 똥을 호시탐탐 노리는 것처럼 속셈이 있다.우문호가 손전무에게 의심스러운 구석이 있는지 조사했다.그리고 손전무와 왕래하는 또 한 사람, 그 자는 몸집과 눈빛 그리고 행동이 어떤 사람과 아주 닮았는데, 다름 아닌 우문호가 경성을 다 뒤져서 찾고 있는 임소다.우문호는 소홍천에게 가서 확인하도록 하고, 임소라는 걸 알아보더라도 큰 소리를 내서는 안된다고 신신당부 했다. 일을 그르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소홍천은 임소에게 뼈 속 깊이 한이 맺혔지만 계속 우문호를 위해 일해 왔다. 하지만 정서 감응력이 높아서 임소임을 알아봤을 때 당장 검을 날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꾹 참은 채 돌아와 우문호에게 보고했다.우문호는 귀영위에게 이들이 도대체 뭘 하려는 것인지 살피도록 했다. 임소가 주명양에게 접근한 건 주명양의 미모를 탐해서 일 리가 없기 때문이다.
평남왕과 남강왕주명양이 300만냥이나 빌릴 수 있다는 사실에 우문호는 상당히 충격을 받고 말았다.소홍천마저 주명양에게 탄복하며, “경성에서 추문이 자자하다더니 어떻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주명양을 믿을 수가 있죠? 그건 쳐주는 이자가 높다는 것 밖에 생각할 수 없어요. 재물을 탐하니 주명양에게 속는 거죠. 손전무가 빌려갔다고 인정하지 않는 한 주명양이 이렇게 엄청난 돈 못 갚죠. 그리고 손전무와 임소는 본래 암암리에 결탁하고 있었으니 이건 일종의 짜고 하는 연극에 불과해요.”우문호가 임소를 언급하는 소홍천을 살펴봤다. 비록 이를 악 물긴 했지만 미움만 있을 뿐 상처는 없는 것이 배신의 아픔에서 빠져 나온 모양이다. “계속 지켜보는데 주의를 끌어서는 안돼. 그들이 도대체 뭘 하려는 건지 보자.”“목적이 주재상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탕양이 옆에서, “그리고 임소는 평남왕부를 들락거렸으니 평남왕부를 조사할까요? 평남왕 전하 신분이면 헌제 왕조의 황태손으로 만약 제위에 미련을 가지고 계신다면 역모의 행동을 취하시지 못할 것도 없습니다.”우문호가 고개를 젓고, “평남왕 전하는 그러실 리 없어, 오히려 임소가 평남왕부에 간 속셈이 있을 거야. 평남왕께서 직접 태상황폐하께 편지를 쓰셨어 임소가 출입한다고……”우문호가 말하다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천천히 눈살을 찌푸리며, “그런데 이것도 말이 안돼.”“어떻게요?” “평남왕이 사람을 보내 임소를 따라잡아 잡아 두겠다고 했는데 내가 보기 분명 쫓아가지도 않았어. 나중에 임소가 다시 왔는데 임소는 평남왕이 자신을 잡으려는 걸 알고도 과연 왔을까? 그리고 두번째는 독 안에 든 쥐인데 평남왕부 안에 있는 임소를 못 잡았다고?”“임소는 똑똑해서 분명 알았을 거라, 그 말대로라면 두번째는 절대로 갈 리 없어요.”“임소가 일부러?” 탕양이 우문호를 보고, “평남왕이 선비사람을 몇을 집에 들였다고 냉대인이 전에 말씀하셨는데 이 일이 전에 있었으면 별 지장이 없었겠지만 어쨌든 지금 전란이 그쳐 양국이 왕래를 회복
둘째 부인을 떠보다주명양이 구씨 둘째 부인에게 퍼트린 낭설에 우문호는 계속 신경이 쓰였다. 원 선생과 냉정언의 명성에 해를 입힘과 동시에 지금은 밖에 새나가지 않았지만 앞으로도 그러리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특히 냉씨 집안이 혼사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구씨 둘째 부인과 구정민의 성격에 반드시 이 일을 천지사방에 떠들고 다닐 것이다.그래서 우문호는 구사에게 돌아가서 처리하도록 했는데 이 일을 깔끔하게 밝히는 제일 좋은 방법은 주명양의 상황을 심각하게 만들고 사태를 더욱 악화시켜 이 사람들의 최종 목적이 무엇인지 보는 것이다.구사는 이런 일을 잘 못해서 원경병에게 전부 맡겼다.원경병에겐 식은 죽 먹기다. 원경병은 어느 날 둘째 부인과 구정민을 불러 수다를 떨다가 무심코, “맞아요, 작은 어머니. 어머니께 말씀 드릴 일이 하나 있는데 조심하셔야 돼요.”둘째 부인이, “무슨 일인데?”원경병이 두 손으로 배를 만지며 느긋하게, “며칠 전에 제왕비 마마께서 경조부에서 지금 사기 사전을 조사중인데 자칭 강남의 거상이라고 사람이 사업 자금을 회전시키려고 경성에서 사기를 친다고 해요. 많은 사람들의 돈을 빌려서 처음에는 이자를 주더니 한참 지나자 그자가 돈을 들고 튀어서 원금도 돌려받지 못하고, 피 같은 본전이 날아갔다며 제왕비 마마께서 저더러 주의하라고 했어요. 이자들의 사기에 당하면 안된다고. 작은 어머니도 주의하세요. 친한 부인들께도 설명해 주시고요. 사기 당하지 마시라고.”둘째 부인과 구정민이 이 말을 듣고 안색이 새하얘지더니 서로 마주봤다.둘째 부인이 원경병에게 약간 목소리가 꺾이며, “강남의 거부?”“맞아요, 어쨌든 조심하는 게 좋아요. 은자를 모으는 게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그 사람들 전부 잡혔나?”원경병이 고개를 흔들고, “그건 몰라요. 어쨌든 지금도 신고하는 사람이 있는데 자기가 빌려준 돈을 못 받았다고 제일 큰 금액은 몇 십만 냥이래요.”원경병은 찻잔을 내려놓고 둘째 부인의 당황한 얼굴을 보고 놀라며, “작은 어머니, 설마 은
약은 자들의 대결원경병이 놀라서, “아가씨, 그게 무슨 뜻이예요?”구정민이 정색했으나 눈에 분노가 사그라들 지 않고, “아뇨. 이건 너무했다 싶어서요.”“확실히 너무 했죠. 우리 언니가 첫째 황자비 마마께 잘못한 것도 없는데 사랑에 눈 멀어서 증오심을 가진 거니까, 그만하죠. 그 사람들 얘기는 하지 않기로 해요. 저도 딸을 데리러 돌아가야 해서요 이제 잘 시간이라.” 원경병의 목적이 달성되었으니 더 이상 묻지 않고 일어섰다.원경병이 나가자 구정민이 흥분해서, “어머니, 마마께서 너무 하셨어요. 냉대인을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가 있어요? 제가 반드시 똑똑히 물어볼 거예요.”둘째 부인이 천천히 일어나, “만나야겠어. 하지만 냉대인 일은 급하지 않아. 관건은 은자를 얼른 가져오는 거야. 지난번에 이자를 연기했을 때 좀 이상했어. 부유한 상인이라면 어떻게 신용을 따지지 않을 수가 있어? 스스로 퇴로를 끊어버린 거 아냐?”“그럼 얼른 사람을 보내서 오라고 하세요.” 구정민도 마음이 급한 게 그 돈은 자신의 혼수로 앞으로 남편 집에서 대접을 받는 건 전부 혼수를 얼마나 해가는지에 달렸다.둘째 부인도 약은 사람이라 딸에게 경고하기를, “주명양이 오거든 절대로 질문을 퍼부어서는 안돼. 은자가 지금 걔 수중에 있으니 걔와 잘 상의해서 은자를 내놓게 한 다음 앞으로 다시는 왕래를 안 하면 돼.”“알았어요 어머니.” 구정민은 열 받아서 눈에서 김이 날 지경이다. 자신은 원래 고결한 인간인데 지금 은자때문에 주명양과 잠시 타협해야 하는게 속으로 더 열 받게 했다.둘째 부인은 주명양에게 사람을 보내 비취를 하나 구했는데 와서 감정 좀 해달라고 했다.무턱대고 주명양을 오라고 하면 분명 의심할 것이고, 안 오면 골치 아프기 때문에 일부러 핑계를 만든 것으로 주명양은 비취 골동품 보석 장신구를 좋아해서 이렇게 말하면 반드시 올 것이다.과연 점심이 되자 주명양이 왔다.은색 망토를 입고 있는데 목둘레 밍크 털이 약간 누렇게 된 게 이 밍크 망토가 귀한 것이긴 한데 옛날
주명양의 흑심둘째 부인이 이 말을 듣고 앞뒤가 꿰 맞춰지면서 어쩐지 계속 냉대인 얘기를 조작하 더라니 태자비의 얼굴에 먹칠을 하려던 것만이 아니라 냉정언과 혼사를 막으려던 거였구나. 혼사가 정해지지 않으면 은자를 돌려 달라고 하지 않을 테니까. 그날 은자를 돌려 달라고 해서 냉대인과 태자비 일을 말했군. 진짜 계략이 심해도 너무 심했다.둘째 부인은 당장 은자를 돌려받지 않았으니 주명양의 심기를 거스를 수 없어 미소를 지으며, “사람을 시켜 물어보니 전에 그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방법이 없었지만 최근 2년간 왕래가 전혀 없었 다니 그만 하려고. 나쁜 마음 품어보지 않은 남자가 어디 있나? 결국 마음을 돌렸으면 됐지. 그리고 민이 성격을 너도 알지. 고집을 부리면 바꿀 수가 없어.”주명양은 마음 속으로 ‘구정민 이 남자에 빠진 병신’하고 욕을 하면서도 겉으로는 유감스럽다는 듯, “그리 되었으니 사촌 언니인 제가 더 할 말은 없네요. 축복해요. 이모 안심하세요. 손 주인장에게 얘기해서 얼른 은자를 받아올 게요.”둘째 부인이 이 말을 듣고 마음이 다소 안정돼서, “명양이가 고생 좀 해줘, 걱정하지 마, 나중에 원금을 받으면 이모가 널 섭섭하게 하지 않을 테니.”“고마워요 이모!” 주명양이 건성으로 대답했다.“언제 돌려 받을 수 있을까? 내일 아니면 모레는 받을 수 있나?”주명양의 표정이 별로 좋지 않고 냉랭하게, “왜요? 이모는 절 못 믿으세요? 가서 손 주인장에게 얘기해도 돈이 돌고 있으니 당장 되는 건 아니죠.”“그럼 구체적으로 언제? 할 일이 많이 있어서 미리 알아야 준비하기 좋아서 그래, 절대 널 못 믿어 서가 아니야. 왜 걸핏하면 그런 얘기를 해? 이모가 널 못 믿으면 몇 십만 냥을 너한테 줄 수 있겠어?” 둘째 부인이 주명양의 낯빛이 좋지 않고 내켜 하지 않는 것을 보고 확답을 해주지 않으면 본인도 안심이 안되는 것이 만약 은자를 돌려받지 못하면 정말 죽을 수밖에 없다.“3~5일정도, 일단 가서 물어볼 게요. 손 주인장에게 준비
임소를 찾은 주명양“그야 그렇지. 늙은 구렁이라니까.” 원경릉이 웃었다.원경병이 깊이 탄복하며, “그럼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요?”원경릉이 느릿느릿, “아무 것도 할 필요 없어, 떡이나 먹고 굿이나 보면 돼. 당연히 둘째 부인께 한두마디 일깨워 줘도 되지, 구정민의 명성을 다치게 하지 않으려면.”원경병의 손가락이 도자기로 만든 잔을 쥐고 담담하게, “불쌍하지 않아요. 걔가 다른 사람의 명성을 상하게 한 게 한둘 이예요? 주명양이 이 일을 날조했지만 다른 남자였으면 구정민이 분명 떠들고 다녔을 거예요. 그런데 냉대인은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조용히 입다물고 있는 거잖아요.”원경릉은 동생이 지금 비록 둘째 부인과 화목하지만 원래 시집 갔을 때 그 모녀에게 얼마나 괴롭힘을 당했는지 생각했다.경병이는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 아니고 둘째 부인도 그렇다. 둘 다 집안의 안녕을 위해 태평한 척 가장하고 있지만 정말 심각한 고비를 맞닥뜨리면 넘어진 사람에게 손 내밀 사이는 아니지 안 그래?맞아, 원한이 있는데 언제나 부처님 가운데 토막처럼 그들을 상대할 수 없는 거다.주명양이 구후부에서 나간 뒤 바로 임소를 찾아갔다.임소의 만 냥을 받은 날 당장 우문군 앞에 고비는 넘겼지만, 그 뒤로 우문군이 그녀를 철저하게 원수로 여겨서 집에 가도 좋은 낯으로 맞아줄 리 없으니, 둘째 부인 일이 아니어도 주명양은 임소를 찾아가야 했다.임소 집 앞에서 한숨을 쉬고 문을 두드렸다. 어찌 됐든 해결방안을 찾아야 하는데 당장 찾아갈 사람이 없다. 임소는 은자 만 냥을 기꺼이 줬으니 분명 그녀를 더 도와주고 싶을 것이다.주명양은 임소가 자신을 돕고 싶어하는 건 자신을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문이 열리고 임소가 직접 나와서 맞았다. 이렇게 중시해주자 주명양의 마음도 으쓱해진 것이 그간 모든 사람에 업신여김을 당하며 이런 존중을 누려본 지 오래됐기 때문이다.주명양은 처음에 임소가 자신을 속인 것이 싫었지만 지금 그가 유일하게 자신을 중시해주는 사람이라 억울함을 누르며,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도, 다섯째 일행은 여전히 도착하지 않았다.그래서 원경릉과 할머니는 다른 의관을 더 둘러보기로 하고, 몇 군데 더 돌아본 뒤 관아에도 갈 계획을 했다.그런데 한 의관에 들어서자마자, 푸른 옷을 입은 중년 남자가 다급히 뛰어오며 말을 걸었다. “수 의원, 대인께서 병세가 위중합니다. 어서 봐주셔야 합니다.”의원은 그 말을 듣자마자, 약상자를 집어 들고 다른 환자들을 그냥 남겨둔 채, 푸른 옷의 중년 남자와 함께 나가려 했다.원경릉이 그를 막아 세우며 말했다.“의관에 있는 환자들을 돌봐야 하지 않소? 우리 할머님께서도 의원이니, 지부 대인의 병은 할머님께서 봐 드릴 것이오.”푸른 옷의 사내는 초조한 듯 원경릉을 향해 소리쳤다.“말도 안 되는 소리 마시오!““대인의 병세가 급박한데, 혹여라도 지체되면 당신들이 책임질 수나 있겠소?”바로 그때, 원 할머니가 호패를 꺼내, 그의 눈앞에 들이밀며 단호하게 말했다.“길을 안내하거라!”조급한 표정을 짓던 푸른 옷의 사내는 호패를 보자마자 표정이 얼어붙었다. 이내 정신을 차린 그는 곧장 허리를 굽혀 예를 올리며 말했다.“서관 대인께서 오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무례를 범해 송구하옵니다.”“그만 사과하고 길 안내나 하시오.”원경릉이 말했다.“예, 예!”사내는 급히 물러서서, 예를 갖춰서 길을 가리켰다.“마차가 밖에서 대기 중입니다. 서관 대인, 이쪽으로 오시지요.”원경릉은 할머니를 부축해 마차에 올랐고, 곧장 관아로 향했다.지부 대인은 따로 사저가 없어 관아의 뒷마당에서 거주 중이었다. 혼자 지내는 데다 관아가 워낙 가까워 편리했기 때문이다.관아에 도착하자마자, 그들은 마스크를 착용하고 안으로 들어갔다.주 지부는 병세가 꽤 심각해져 있었다. 그는 어지럼증과 흉통에 시달려, 침대에 누운 채 말을 꺼낼 힘도 없었다.원경릉은 직접 치료에 나섰고, 약상자를 열어 체온 측정기와 청진기를 꺼냈다.푸른 옷의 사내가 의아해하며 물었다.“아가씨께서도 의원이십니까?”그러자 곁에 서
이 대인이 원경릉에게 의학을 잘 모른다고 반박할 틈도 없이, 원 할머니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말대로 하게. 하루만 줄 테니, 그 안에 역병에 관한 모든 자료를 가져오게. 사망자 수도 포함되어야 하네." 이 말까지 듣자, 이 대인은 더 이상 반박할 수 없었다. 비록 조사가 필요 없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서관 대인이 멀리서 오계부까지 왔으니, 시키는 일은 해야지 대인의 마음에 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사람들을 보내 조사를 명한 후, 이 대인은 거처를 마련해 드리겠다고 했다. 하지만 원경릉이 말했다. "괜찮습니다. 의서에 의원이 많지 않으니, 대인도 바쁘실 텐데요. 저희가 직접 오계부를 돌아보겠습니다." 이 대인은 그녀가 원 할머니의 힘을 빌려 위세를 부린다고 생각해, 대꾸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말에 답도 하지 않고, 원 할머니에게 예를 올렸다. "어르신께서 머무실 계획이 있으시면, 부디 저에게 알려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밤 대인을 잘 대접하라, 명을 내리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네. 일이나 보게." 원 할머니는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원경릉에게 말했다. "먼저 좀 돌아보다, 객사를 찾아 머물자꾸나." "예!" 두 사람은 역병을 조사하기 위해 다급히 이곳을 찾아왔기에, 먼저 각지의 의원을 직접 돌아보려 했다. 아마 다섯째 일행은 빨라야 내일이나 모레쯤 도착할 것이었다. 두 사람이 의서를 나서자, 이 대인은 뒤따라 나오려다 원 할머니의 날카로운 눈빛에 움찔하며 발길을 멈췄다. 두 사람은 오계부의 거리로 향했다. 거리가 꽤 번화했고, 사람들도 제법 많아, 대낮에는 조금 붐볐다. 그들은 곧장 의원으로 향했다. 의원 앞에는 약차가 많이 진열되어 있었지만, 환자는 얼마 없었다. 겉보기엔 역병이 퍼졌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원경릉은 안으로 들어가 의원에게 상황을 물었다. 그러자 의원은 요즘 들어 약차가 잘 팔리고 있고, 하루에 천 봉지가 넘게 팔린다고 답했다. 하지만 그도 역병
늦게 출발한 원경릉은 신속하게 오계부로 향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오계부 근처 주현에 도착하자마자, 할머니가 현지 혜민서로 가야 한다며 잠깐 멈추자고 했다. 그러고는 혜민서에 오계부로 약을 공급할 준비를 하게 했고, 명을 받으면 바로 오계부로 보낼 수 있도록 미리 준비를 당부했다. 혜민서 산하의 의료기관들은 지난 몇 년간 개혁을 통해 뚜렷한 성과를 거두었고, 지역 간의 연결도 긴밀해졌다. 특히 역병을 상대하는 체계가 가동되면 상부에서는 전력을 다해 의원과 약을 지원해줄 수 있었다. 신신당부한 뒤에야 원경릉과 할머니는 오계부로 재빨리 향했다. 곧이어 오계부에 도착했는데, 우문호 일행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다. 오계부는 인구가 500만 명에 이르는 곳으로, 두 개의 주부가 통합된 지역이었다. 열대에 있어, 경작지가 많고 산이 많아 농업을 위주로 삼고 있었다. 그래서 조정은 이곳을 서부의 주요 곡창지대로 삼고 있었던 것이었다. 농업이 발달한 지역은 상대적으로 경제도 번화했고, 현지 백성들은 벼 외에도 감, 자두, 리치 등을 대량으로 재배하고 있었다. 리치는 신선할 때 먹을 수도 있고, 말려서 건과로 만들어 팔 수도 있기에, 어느 정도 지역 경제 활성화에 도움이 되었다. 오계부는 백월국과 인접해 있었는데, 백월국은 북당의 속국으로 사이가 우호적이며 경제 교류도 활발했다. 이는 양국의 번영을 촉진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오계부의 지부는 장씨 성을 가진 오계부 출신이었다. 장 지부는 훌륭한 관리이며 지역 백성들로부터 존경받고 있었다. 원경릉과 원 할머니는 오계부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지역 혜민서를 찾았다. 할머니는 혜민서의 서관(署館) 신분을 밝혔다. 그녀는 북당 각 주부의 의서를 총괄하는 인물이고, 총책임자이기도 했다. 혜민서의 이 의원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두 사람을 안으로 청한 후, 바로 예를 올렸는데, 마치 신선이라도 본 것처럼 목소리까지 떨고 있었다. "소인은 이자옥이라 합니다. 어르신께서 친히 오신 줄도
그녀는 일단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하고, 냉 대인이 자세한 상황을 묻는 사이에 제 대인의 피를 뽑았다. 약상자는 기능이 꽤 다양하기에, 바이러스 검사도 문제없었고, 안에는 양여혜가 준 소형 현미경도 있었다. 하지만 바이러스 관찰이나 세균 배양에는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지체할 수 없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이 먼저 오계부로 향하고, 그녀는 이곳에 남아 제 대인을 치료하고 검사 결과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면 바이러스든, 세균 감염이든, 결과가 나와야 제대로 된 치료 방안을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미색이 말했다. "저도 이곳에 함께 남겠습니다. 제가 환자를 돌보는 것 정도는 도울 수 있지 않겠습니까?" "괜찮으니 먼저 가거라. 어쩌면 내가 더 일찍 도착할 수도 있으니깐." 원경릉이 말했다. 그녀는 혼자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지만, 미색까지 데리고 가는 건 무리였다. "우리가 먼저 출발하는데, 어찌 더 일찍 도착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미색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가능한 일이다. 원 선생은 늘 기적을 만들어내니." 우문호가 말했다. 그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고, 원경릉에게 다가가 조심하라고 몇 마디 당부했다. "알았소. 지체하지 말고, 어서 떠나시오. 오계부에 도착하면 곧바로 관아를 찾아가, 의원의 빠른 대처를 명하라 하시오. 만약 내가 먼저 도착한다면, 내가 관아를 찾아가겠소." "알겠소. 그럼, 먼저 가겠소!" 우문호는 그녀와 입을 맞추고 싶었지만, 보는 이가 많으니 그저 참을 수밖에 없었다. 서일은 황후를 홀로 두고 가는 것이 걱정되어, 우문호를 따라나서며 계속 물었다. "정말 황후를 이곳에 혼자 남겨도 되는 것입니까?" "그럼, 네가 남을 것이냐?" 우문호가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 "너도 원 선생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알고 있지 않느냐?" 회왕 부부도 걱정은 되었지만, 다섯째의 여유로운 모습에 자신이 있을 것이라 믿었다. 다섯째 부부는 늘 비밀이 많은 사람들이라, 그들은 더 이상 신경
원경릉은 밖으로 나가, 오계부에 역병이 생긴 것 같다고 전했다. 오계부는 서쪽에 자리 잡고 있어, 기후가 더운 탓에 가끔 역병이 생기긴 했었지만 백성들은 고뿔 치료에 쓰이는 약초로 끓인 차를 즐겨 마시기에, 대규모로 역병이 돈 적은 없었다. 냉 대인이 말했다. "오계부에서는 이 상황을 조정에 알리지 않았습니다. 비록 해마다 역병이 생기긴 하지만, 빠르게 통제해 왔으니, 이번에도 예전과 같은 상황이지 않겠습니까?" 원경릉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런데 이번엔 더 심각할 수도 있습니다. 제 대인의 형도 역병으로 돌아가셨고, 그와 가까이 지낸 사람들도 병에 걸렸습니다. 이렇게 관아에만 역병에 걸린 자들이 많으니, 예전보다 더 심각할 것 같습니다." "그래도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해마다 역병이 생겼으니, 그에 대한 대응책도 이미 있을 것입니다." 원경릉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해마다 역병이 생겼지만, 대대적으로 유행하지 않았기에, 현지 관리들이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겨 쉽게 통제될 것이라 생각하고, 방심할 수도 있으니깐요." 우문호가 물었다. "원 선생, 역병을 어떻게 통제해야 한다고 생각하오?" "역병 상황이 안 좋을 것이라 추측할 뿐, 정말 오계부의 상황이 어떠한지는 아직 모르네. 제 대인은 여전히 고열에 시달리고 있어, 수액을 맞히고 해열제를 먹였소. 냉 대인과 함께 들어가 상황을 자세히 물어봐야겠소. 하지만 꼭 마스크를 끼고, 병을 막아야 하오." 원경릉은 유행성 독감이나 변이된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일 것이라 의심하고 있었다. 그녀가 살던 세계에서는 A형 독감의 대규모 변이가 십수 년마다 한 번씩 발생했는데, 그런 변이 독감은 현대에서도 의료 체계에 큰 부담이 되곤 했다. 그러니 지금 이곳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만약 역병이 다시 시작한다면, 가능한 한 빨리 통제해야만 했다. 원경릉의 말을 우문호와 냉 대인은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도
원경릉은 청진기를 꺼내 그의 폐를 확인해 보았는데, 남녀가 가까이 접촉하는 것이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한 제 대인은 이내 손을 뻗어 그녀를 막으려 했다. 하지만 병세가 심해 아픈 데다가, 마스크를 쓰고 있어도 묘한 위압감을 풍기는 의원의 단호한 눈빛과 기운에 그만 압도당하고 말았다. 원경릉은 앞쪽을 청진한 뒤, 그에게 옆으로 돌라고 한 다음에 꼼꼼히 살피고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며칠을 아프신 것입니까?" 제 대인은 꽉 막힌 코 때문에 콧소리를 내며 천천히 몸을 돌리고 답했다. "며칠 사이의 일입니다. 오계부를 떠날 때도 멀쩡했는데, 밤새 달리고, 말을 오래 타다 보니 고뿔에 걸렸나 봅니다." "기침 말고, 가슴 통증도 있습니까?" "예. 이곳이 아픕니다!" 제 대인은 가슴 근처를 손으로 누르며 말했다가, 숨쉬기가 어려운 듯 손바닥을 움직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도 아프고, 온몸 뼈마디도 다 아픕니다." 그러자 원경릉은 더 자세히 증상을 확인한 뒤 말했다. "약을 준비할게요. 수액을 좀 맞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수액이요?" 제 대인은 멍하니 원경릉을 바라보았다. "예. 질문은 하지 마시고, 그저 치료에 협조만 해주십시오. 병세가 꽤 심각한 편입니다." 원경릉은 제 대인이 폐렴이라 확신했고, 중증 폐렴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제 대인은 병이 심하다는 말에 초조한 표정을 지으며 다급히 말했다. "의원 나리, 제발 최선을 다해 치료해 주십시오… 저에게는 아직 모셔야 할 노모가 있습니다. 지난달 병으로 형님께서 세상을 떠난 터라, 형님의 자식들도 제가 돌봐야 하니, 절대 이대로 목숨을 잃을 수는 없습니다." 원경릉이 답했다. "최선을 다할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 치료에만 집중하시지요!" 제 대인은 감동을 받은 듯 감사 인사를 올렸다. "정말… 감사합니다." 원경릉은 곧바로 약을 지어 수액을 준비했다. 수액을 맞는 동안, 제 대인은 여전히 놀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냉정언이 물었다. "그렇다면 어찌 의원을 부르지 않은 것이냐?" 역 일꾼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돈이 없다고 하셔서 해열에 좋은 약초를 조금 달여주었지만, 별 효과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방에 다른 사람이 들어오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의원을 부르고 진료하고 약을 짓는 데에는 모두 돈이 필요했지만, 역에서는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예산이 따로 없었다. "오계부의 부승이 상경하여 직무를 보고하러 왔는데, 돈도 지니지 않았다는 것이냐?" 냉정언이 놀라서 물었다. "나리께서 돈이 든 보따리를 도둑맞았다고 하셨습니다." "혼자 온 것이냐?" 냉정언이 물었다. "예. 관속이나 아전도 없이 혼자입니다." 경성과 꽤 멀리 떨어진 오계부의 부승이 그 먼 길을 수행 인원도 없이 홀로 와, 직무를 보고하는 것은 꽤 이상한 일이었다. 원경릉이 말했다. "내가 확인하겠소." "부인께서 의원이십니까?" "그렇다. 길을 안내하거라." 원경릉이 답했다. 역 일꾼은 별다른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 북당에서는 여인이 의술을 익히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황후가 의학원을 세운 이후, 해마다 여인들이 입학하여 의술을 배우고 있었다. 우문호가 미색을 돌아보자, 미색이 바로 입을 열었다.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원경릉은 약상자를 챙겨 들고, 역 일꾼의 안내를 받아 한 객실로 향했는데, 문이 세게 잠겨져 있었다. 일꾼이 문을 두드렸다. "제 대인, 제 대인. 의원께서 오셨습니다. 문 좀 열어주십시오." 하지만 방은 일꾼의 부름에도 여전히 잠잠했다. 이내 기침 소리가 들려왔고, 한참 기침을 하다, 쇳소리 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마." 말이 끝나자, 침대에서 일어나 휘청거리며 걸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곧 문이 열렸고, 솜으로 만든 마스크로 코와 입을 가린 채, 핏발이 선 눈만 드러낸 관리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피곤하고 지친 모습으로 문턱을 잡고 서 있었다. 그는 숨을 고른 뒤
이번 순행에 서일이 동참하면서 사식이도 함께 가게 되었다. 그러나 고된 여정에 아이를 데리고 다니기엔 무리가 있었다. 다행히 원가에서 사식이가 서일과 함께 순행에 나선다는 소식을 듣고, 원가는 서일 부부가 3년이든 5년이든 돌아오지 않더라도 아이를 잘 돌보겠다고 약속해주었다. 그 역시 아이들과 떠들썩하게 지내고 싶어 했던 터라 기뻤다.탕양도 순행에 참여했으나, 그의 부인은 맡은 직책이 있어 동행하지 않기로 했다. 미색 또한 당연히 회왕을 따라갈 예정이었으나, 오랜만의 외출인 만큼 아이를 데리고 간다면 재미가 없을 테니, 아이를 데리고 가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러자 그녀의 시어머니인 태비도 흔쾌히 아이를 돌보겠다고 나섰다. 이제 아이도 다 컸으니 힘들게 돌볼 필요가 없어졌으니 말이다. 그렇게 모두가 신나게 순행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원경릉은 순행을 기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숙왕부의 노인들이 걱정되었다. 비록 삼대 거두는 여행을 떠난 상황이긴 하지만, 숙왕부에는 아직 흑영 어르신들이 계셨다. 그리고 안정을 찾은 추 할머니마저 지속해서 약을 복용해야만 했다. 온갖 걱정에 흽싸인 원경릉 때문에 오히려 원 할머니가 그 모습을 보고 성가시다고 느꼈는지, 진지하게 말했다. "그냥 편히 놀러 가면 되지, 뭘 그렇게 걱정하냐? 내가 있지 않느냐?"그 말에 원경릉은 할머니를 껴안으며 웃었다."맞아요. 제가 몸이 열 개라도 할머니는 못 이길 테니까요!"이 말은 틀리지 않았다. 원경릉이 비록 황후라고 해도, 숙방부에서의 위세가 그리 대단하지는 않았다. 그런 그녀가 유일하게 권력을 행사할 수 있을 때는 바로 주사기를 꺼낼 때 뿐이지만, 원 할머니는 달랐다. 그녀는 그냥 서 있기만 해도, 눈빛 하나만으로 모든 사람을 제압할 수 있었다. 게다가 최근 몇 년 사이, 그녀의 성격이 점점 난폭해져서, 틈만 나면 사람을 끌고 가서 주사를 놓았다. 원 할머니가 손수 만든 약이 한가득 담긴, 원경릉의 약상자에는 없는 귀한 약들을 보여주며 말했다. “이 약들은 수토불복, 고
조사가 끝난 후, 목을 쳐야 할 자는 목을 치고, 옥에 보내야 할 자는 옥에 보냈다. 그리고 오씨가 챙긴 돈은 전부 피해자 가족들에게 배상되었다.우문호는 신하들 앞에서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지 못했다. 그는 탐관오리를 금지하고 청렴을 장려하는 법을 내렸으며, 부정부패 전담 조사 관아를 설립해 전국을 조사하라 명했다. 부정부패를 근절해야 백성들이 잘 살 수 있다고 강조했다.동시에 그는 신하들의 봉급 인상을 제안했다. "예전엔 나라가 가난해 관리들의 봉급이 적었지만, 이제는 나라도 번영하고 산업이 활성화되었으니 함께 잘 살아야 할 때다." 봉급을 높이면 부정부패 예방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 덧붙였다.조회가 끝난 후 우문호는 수보와 친왕들을 불러 오래 전부터 품어온 생각을 털어놓았다."과인은 순행하고자 하오!"나라가 태평하지만 황제의 관심이 미치지 못하는 곳도 있다는 걱정이 들었기 때문이다. 초왕과 태자 시절에는 백성들의 고통을 잘 알았지만, 지금은 점점 백성과 멀어지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직접 돌아다니며 백성들의 삶을 보고 싶었고, 공무를 핑계로 원 선생과 북당 전역을 둘러보고 싶었다.냉정언이 적극 찬성하며 말했다."상소문만으로는 진실을 알 수 없습니다. 은폐된 사실, 억울한 사건, 고통받는 백성들을 직접 확인해야 합니다.""옳은 말이네." 우문호는 최근 냉정언의 말이 마음에 들었다.그러나 냉정언이 갑자기 태도를 바꿨다."하지만 아직 각지에 위험한 도적들이 있습니다. 그러니 폐하의 안전을 위해 소신이 대신 가는 것이..."그러자 우문호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수보의 말도 일리 있지만, 참 뻔뻔하구먼!" 그러고는 어명이 적힌 서찰을 건네며 덧붙였다."함께 순행할 명단이니 반포하시게!"냉정언은 자기가 제외될 줄 알았으나 명단에 자신의 이름이 있는 것을 보고 기쁜 목소리로 물었다."소신도 갈 수 있습니까?""가시게. 국정에 큰일이 없으니 내각에서 처리할 수 있네. 새로 양성한 인재들의 능력을 시험해볼 기회이기도 하고.""상산명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