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귀비의 호출궁을 떠나며 원경릉은 담배는 많이 피우면 안되니 어쩌다가 한 모금만 하고, 술도 한 번에 다 마시면 안되고 천천히 음미하시라고 잔소리를 잔뜩 했다. 태상황도 다음번에 올 때는 우리 떡들을 데리고 오라고 했다. 비록 배은망덕한 녀석들이지만 보면 또 좋으니까. 곁에 누군가 왁자지껄하지 않으면 건곤전의 나날은 너무 적막하다.태상황이 지금 신체적으로 호전되었고 의지가 굳은 사람으로 일선에서 물러나 언뜻 보기엔 삶을 즐기고 있다. 하지만 내내 모든 것이 폭풍우를 헤치는 것 같다가 갑자기 고요한 해안에 정박해서 파도가 치는 것만 멀뚱멀뚱 보고 있는 게 영 익숙하지가 않다.예전에는 몸이 안 좋아서 관뒀지만 상태가 점점 호전되니 생각이 다시 많아 지기 시작했다.물론 본인도 아들이 황제 역할을 아주 잘 하고 있다는 걸 안다. 지금 만약 태상황이 간여한다면 조정은 혼란스러워질 것이므로 오히려 좋지 않다. 더욱이 부모자식 관계가 나빠질 수 있으므로 조정에 관한 일은 태상황이 일체 건드리지 않는다.이틀이 지나고 귀비가 원경릉에게 입궐해 애기를 좀 하자는 전갈을 보냈다.원경릉과 귀비는 원래 얘기하던 사이도 아니고, 전에 귀비가 원경릉에 적씨 집안을 위해 사정해 주길 바랬으나 원경릉이 도와주지 않았다고 줄곧 원경릉을 좋아하지 않았다.그런데 왜 갑자기 자기더러 입궐하라고 하지?원경릉은 몸이 좋지 않으니 내일 가겠다고 둘러 대고 적씨 집안에서 요즘 무슨 문제를 일으킨 게 없는지 우문호가 돌아오면 물어보려고 기다렸다. 적귀비는 원경릉에게 부탁할 게 없으면 절대로 보자고 할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하지만 적귀비가 원하는 간 원경릉이 도울 수 없는 것이다.저녁 무렵 우문호에게 적씨 집안의 일을 물었더니, “적씨가 아직도 뭔가 풍파를 일으킬 수 있나? 핵심인물이 권력을 잃었으니 잔챙이들도 다 뿔뿔이 흩어졌지. 넷째도 경성에 없고 이럴 때 애쓰면 괜히 힘만 빼는 걸 텐데?”원경릉은 손왕비가 궁궐 각 마마들의 상황을 모르는 게 없다는 걸 생각해내고, 직접 갔는데
적귀비의 부탁원경릉은 속으로 생각이 있어 약 상자를 꺼내 가지고 적귀비에게 갔다.적귀비는 일찍 일어나 원경릉을 기다리고 있는데 원경릉이 오는 것을 보고 인사하고 안으로 들게 하더니 차를 내 놓았다.원경릉은 적귀비가 상당히 마른 데다 기세도 예전 같지 않은 것이 상당히 수더분해 진 모습으로, “마마께서 무릎이 아프시다고 들었는데 어떠신 지요?”귀비가 “온찜질을 며칠 했는데 효과가 별로 없네, 하지만 이건 오래된 지병이니 괜찮아. 여름이 되면 좋아지니까.”원경릉은 원래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라고 알았는데 자신의 병에 대해서는 대충하는 것으로 봐서 무릎 때문이 아니라는 걸 알고 약간 놀랐다.원경릉이 차를 마시는 동안 기다렸다가 귀비가 좌우를 물리고 원경릉만 남겼는데 원경릉이 딱 보니 적귀비가 애수 어린 모습이라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 더니.’“태자비, 이제 아무도 없으니 나도 솔직히 말하지. 적씨 집안이 처한 상황을 자네도 봐서 알 거야. 나까지 폐하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심지어 한 번 뵙기조차 어려우니 말해 뭐하겠어.”원경릉이 눈 딱 감고, “마마, 저도 폐하 앞에서 말씀드리기 좋지 않아요.”“아니, 이 일은 자네가 하기 딱이야,” 귀비가 서신 하나를 꺼내더니 원경릉에게 건네는데 손가락 끝이 떨리는 것이 예전에 침착하고 대범하던 적귀비가 아니다. “이건 넷째가 남강 북쪽으로 가기 전에 나에게 쓴 편지네. 지금 안왕비가 회임을 했으나 약한 체질이라 자주 배가 아프다고 하는구나. 자네는 의술에 정통한 사람이니 폐하께 안왕비가 경성으로 돌아와 해산을 할 필요가 있다고 하면 폐하께서 분명 그러라고 하실 거야.”원경릉은 안왕비 일을 생각 못하고 있었다. 안왕의 서신을 보니 안왕비가 임신 기간에 어디가 불편한지 제대로 안 써 있고 그저 한 마디 언급하고 귀비에게 좋은 약이 있으면 해산할 때 유비무환 아니겠냐며 약을 좀 알아봐 달라는 내용이었다.“강북부는 가난한 곳이니 좋은 의원이 없고, 사람을 시켜 알아보니 그 쪽에서 아이를 낳는
돌아온 안왕 부부우문호가 말을 마치고 잠시 있다가, “또 넷째가 다른 뜻이 있다면 엄하게 감시하면 됩니다. 아이를 낳은 뒤에 남을 건지 갈 건지는 아바마마께서 결정하실 일이시니까요.”명원제가 이 말을 듣고 우문호를 한 번 더 눈여겨보고 마음 속으로 안도감이 들었다. 황제가 된다는 것은 권위가 중요하고 과단성 있는 전투도 물론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사람의 목숨을 염두 해 두는 것이다.우문호는 과단성이 있고 자비로운 마음이 있으며 능력이 있고, 생각이 주도 면밀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예전엔 더 키우는 건데. 그럼 오늘 이정도로 그치지 않았을 것을 명원제는 후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명원제는 성지를 내려 구사에게 직접 금군을 이끌고 강북부로 가서 안왕 부부를 경성으로 ‘호송’하게 했다. 그리고 안왕비가 출산을 마치면 아이의 만 한달 축하를 마치고 강북부로 돌아갈 것을 성지에 명기했다. 박원과 소홍천도 대오를 데리고 강북부로 돌아가서 구사가 그들과 앞서거니뒤서거니 도착해 성지를 받들고 같이 경성으로 돌아가는 길에 올랐다.여정은 천천히 이루어져 경성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년말이 다가왔다.구사는 안왕 부부를 안왕부로 호송했다. 안왕부는 시중드는 사람이들이 싹 다 바뀌었다. 내무부에서 직접 사람을 뽑아 보냈고 어의를 상주시켰는데, 원래 데리고 있던 몸종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하인이든 시위든 전부 안왕 사람이 아니다.정리를 마치고 소홍천과 박원 및 구사는 초왕부로 가서 경과보고를 마친 후 우문호는 소홍천을 남겼다.서재에 두 개의 촛불이 불타고 불꽃이 일렁인다. 소홍천의 눈에서 지난날 임소로 인해 받았던 감정의 상처가 거의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우문호가 비로소 입을 열며, “임소 행방을 알았어.”소홍천의 눈썹이 꿈틀하더니 얼른 고개를 들어, “어디죠?”그런대로 평온한 말투다.“평남부(平南府)에 나타났다는 군.”“평남부요?” 소홍천이 놀라더니, “어떻게 그럴 수가? 평남왕은 절대 그와 왕래 할 리가 없는데요.”“평남왕이 직접 편지를 써서 태상황
아이를 가지고 싶어얘기의 끝은 다시 아이 화제로 넘어갔다.안왕비는 상태를 봐서 연말에서 2월말 정도에 낳을 것 같은데 지금 태아가 엄청 커서 손왕비가, “아들을 낳으면 폐하께서 좋아서 자네를 경성에 머물게 하실 지도 몰라.”여자들은 조정의 일을 모르고 그저 가까이 두고 싶은 마음이다. 동서들은 여전히 전처럼 화기애애하고 손왕비는 기세가 등등한 사람이 아니라 마음이 넓고 약한 사람이다.안왕비가 배를 만지며 조그맣게, “난 딸을 바라는데.”원용의가 킥킥 웃으며, “딸을 낳으면 태자전하께서 또 아쉬운 마음이 든다고요.”우문호는 딸을 갖고 싶어서 어느 집에 딸을 낳았다는 말을 들으면 엄청 질투의 눈빛을 보내는 걸 조정 사람들이면 다 알고 있다.요부인이 원경릉을 보고 웃으며, “이거 태자비가 딸을 낳아야 다섯째의 꿈이 비로소 실현될 수 있는 거네.”원경릉이 기가 막혀 얼른 손을 젓더니, “아뇨, 지금 집에서 다섯명이 난리를 치는 것만으로도 아수라장이예요. 만약 또 낳으면 밥 먹을 틈도 없을 거네요. 그리고 딸이란 보장도 없잖아요. 하나란 보장도 없고.”번식 능력이 이렇게 강하다니 원경릉은 스스로 놀라고 있다.다들 하하 웃고 싶었지만 미색이 시샘하며, “낳을 수 있다는 것 같네요.”모두 순간 웃음을 삼키고 미색의 분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을 봤다.요부인이 미색의 손을 잡고, “그래, 너랑 여섯째는 복이 많은 사람이야. 하늘도 둘을 사랑하셔서 때가 되면 그만 낳고 싶다고 소리쳐도 마음대로 안될 거야.”미색이 입을 삐죽거리며, “꿈에도 그러지 않을 거예요, 하나라도 간절해요.”“여섯째도 급한 게 없는데 네가 왜 급해?” 손왕비가 말했다.미색이 동서들을 보더니 눈가가 빨개져서, “저 빼고 다들 안 급하네요. 전 임신을 못 했는데 구사 부인은 지금 둘째를 임신했어요. 전 아무런 기색도 없는데.”원경릉이 놀라며, “경병이가 둘째를? 왜 나는 몰랐지?”“3개월이 안 돼서 밖에 얘기를 안 한 거죠.”“그런데 미색은 어떻게 알았어?”미색이 또
쌍둥이의 이름원경릉이 안왕부를 떠난 뒤 구후부(顧侯府)에 갔더니 원경병은 정말 또 임신을 했는데 아직 3개월이 되지 않아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았다.원경릉은 원경병의 안색이 아직 좋은 걸 보고 입덧이 심한 것 같지 않아 몇 마디 당부를 하고 갔다.서일과 사식이는 집을 다 꾸미고 새해가 오기 전에 이사를 들어갔는데 탕대인 집은 아직 천천히 짓고 있는 중으로 탕대인의 요구수준이 높은 편이라 자재는 제일 좋을 필요 없지만 편하고 우아해야 했다. 한결같이 학문이 깊고 우아하신 탕대인이다.새집 세간살이는 전부 처가에서 마련해 주었는데 원씨 집안에서 사식이가 편히 살라고 힘을 제법 줘서 큰 돈을 들여 하나같이 좋은 목재로 가구 세트를 맞춰주고 나머지는 전부 원용의가 마련해 준 것인데 좋은 건 전부 다 갖췄으니 사식이는 작지만 갖출 거 다 갖춘 알찬 자신의 집을 가지게 되었다.서일은 기뻐서 몇 날 며칠을 잠을 이루지 못했다. 태자와 태자비 마마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고 힘주어 얘기하고 목숨도 아끼지 않겠다고 하길래 사식이가 당장 남은 은을 의대에 기부하자고 하니 한마디로 거절하고 목숨은 목숨이고, 돈은 돈이라며 바보는 아닌지 계산은 정확했다.년말, 드디어 쌍둥이의 이름이 내려졌다.이 이름은 무려 4개월한 숙고한 것으로 명원제가 좋다고 하면 태상황이 좋아하지 않고, 태상황이 마음에 들면 명원제가 별로 안 좋아하고, 부자가 쌍둥이 이름을 두고 고집을 부리며 서로 한치의 양보도 없었다.그러다 환타는 우문엽(宇文燁), 칠성이는 우문황(宇文煌)으로 세 형이 충효인의예지신에서 따온 것과 달리, 중시하는 정도의 차이를 알 수 있는데 쌍둥이 이름에 세 형보다 더욱 심혈을 기울였다.엽(燁), 황(煌) 두 글자도 상당히 연구를 거듭한 것으로 불 화(火) 변은 두 사람에게 양화(阳火)의 기운을 더해주는 것으로 태상황은 둘이 늘 지나치게 조용해서 울지도 않는 게 불기운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엽(燁)자는 햇살이 찬란하게 빛난다는 뜻이다. 그리고 황(煌)자는 달빛이 환하고
난 나중에 황제가 될 거야.우리 떡들은 열째 삼촌이랑 정전 앞에서 노는데 열째는 뒤룩뒤룩 살이 쪄서 갈수록 손왕을 닮아갔다. 손왕이 뿌듯한 지 열째 동생을 상당히 예뻐 해서 우리 떡들에게 열째 삼촌 괴롭히지 말라고 당부했다.말을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은 열째 삼촌은 서열을 내세워서 위세를 부리는데 뚱뚱한 허리에 손을 얹고 손왕에게, “난 괴롭힘 안 당해, 난 나중에 황제가 될 사람이니까.”정전에 앉은 사람들은 전부 황실의 친인척으로 이 말을 듣고 모두 당황해서 뿔뿔이 호비를 쳐다봤다. 호비가 얼굴색이 변해 일어나 꾸짖으며, “조용히 해, 무슨 헛소리야!”열째는 엄마가 갑자기 화를 내자 놀라서 당황한 나머지 명원제를 보는데 작은 눈동자에 의문이 가득한 채로 ‘뭘 잘못 한 건데요?’명원제도 호비를 흘끔 보고 아무렇지도 않게, “괜찮아, 계속 놀아라.”호비가 일어나 있는 채로 눈에 눈물이 일렁이는데 앉아서도 마음이 불안한 것이 누군가 가르쳐 준 게 아니라면 이렇게 어린 아이가 이런 말을 할 리가 없다고 모두 생각하고 있을 게 틀림없기 때문이다.원경릉을 보니 고개를 숙이고 옆에 요부인과 작은 소리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이 원경릉도 그렇게 생각해서 요부인과 이 일을 얘기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입술이 부들부들 떨리며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호비도 요부인이 대단하다는 걸 안다. 한 마디 말로도 엄청난 일을 추측해내는 사람이니 분명 지금 소근소근 분명 자기 얘기를 하는 중일 것이다.저녁 연회가 계속 되는데 눈물이 자꾸 그렁그렁 맺혀서 명원제가 몇 번이나 호비를 봤는데, 눈빛이 냉담한 것이 호비는 순간 의기소침해졌다. 자기는 완전히 명원제를 믿고 있는데 명원제는 어째서 자기를 믿지 못할까?호비는 명원제 뿐 아니라 다른 사람도 종종 이상한 눈빛으로 자신을 보는 것을 발견했다. 호비는 성격이 급하고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얘기하는 타입이라 이런 눈빛을 참을 수가 있나? 하지만 궁에 있으면서 법도를 배우다 보니 지금은 변명할 때가 아니라는 걸 안다. 여기서
호비를 모함하는 자진비는 속으로 자기 아들이 밖에서 저렇게 수모를 당하고 있는 것도 서러운데 어째서 궁에서 자신의 지위는 황귀비만 못하고, 총애는 호비만 못한가. 구중궁궐이 적막하고 쓸쓸하기만 하다. 따듯한 곳을 찾으려 해도 없고 자신보다 훨씬 힘들 아들이 마음에 걸려 뭘 봐도 다 눈꼴사납다.진비는 일부러 후궁의 안정을 어질러 놓은 건 아니고 그저 원망의 마음을 좀 발산하고 싶었을 뿐으로 호비는 놀려서 안되는 걸 진비도 알고 있다. 호비가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진비가 총애를 받지 못하는 건 호비 탓이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호비는 성품이 강직하고 시비가 분명한 사람으로 정말 싫어하면 본인이 맨손으로 사람 하나는 패 죽일 수 있는 사람이다.황귀비는 알고 있다. 진비가 이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휘저어 놓고 싶긴 했지만 분명 별반 악의는 없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하지만 열째가 한 말은 확실히 좀 짜증났다. 이제 몇 살이나 됐다고? 거기서 그런 말을 할 정도면 아무도 가르쳐준 사람이 없었다는 걸 어떻게 믿을 수 있겠어?황귀비는 어젯밤 다섯째 부부가 궁을 떠날 때를 떠올려 봤다. 우문호는 열째를 계속 유심히 보고 태자비는 계속 요부인과 얘기하는데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이, 태자비는 원래 전체적인 것을 파악하는 사람으로 어젯밤 얼굴이 어두운 것으로 봐서 열째 말에 신경을 쓰고 있는 지도 모른다.어찌되었든 최근 열째가 누구를 접촉했는지 호비에게 물어볼 필요가 있다.호비가 잠시 후 열째를 데리고 왔는데, 여전히 눈물이 아롱진 얼굴로 예를 취했다.황귀비가 곁으로 불러 앉히고 열째를 안았는데 열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황 어마마마 안녕하세요.” 하고 불렀다.황귀비는 열째가 좋아서 따듯하고 자상한 미소를 지으며, “우리 규야 착하지, 황 어마마마에게 얘기 해 볼까. 오늘 뭐 먹었나?”“야채요!” 열째가 신나서 대답했다.황귀비는 고개를 들어 호비를 보는데, 새해 첫날 후궁에서 야채를 먹는 풍습은 지난 태후 마마 때 정해진 법도로 돌아가신
새해 풍경황귀비가 당부하기를, “돌아간 뒤에 좀 더 신경을 쓰게. 전에 곁에서 친근했던 사람도 완전히 믿을 수 있는 건 아니야. 자네 아버지가 지금 태자와 가깝게 지내고 자네와 태자비도 서로 잘 어울리는데 만약 이 일이 마음에 걸림돌이 되면 모두에게 좋지 않아.”호비가 쓴 웃음을 지으며 눈에 눈물이 고였다. “태자비는 저를 의심하고, 폐하도 저를 의심하세요. 어젯밤 원래 태자비에게 남으라고 해서 설명하고 싶었는데 거들떠도 안 보고 바로 가버렸어요. 게다가 어젯밤 이후로 폐하는 저에게 좋은 얼굴을 짓지 않으세요. 폐하께서 어쩌면 이렇게 저를 모르실 수가 있어요? 황귀비 마마께서도 절 믿으시는데 어째서 폐하는 절 안 믿으시나요?”황귀비가 미간을 찡그리며, “자네 또 쓸데없는 망상 했지? 폐하는 자네를 아시는데 어떻게 자네를 의심하나? 태자비는 원래 대의가 분명한 사람이니 똑바로 설명하면 돼. 며칠 있다가 태자비를 불러 이 일에 대해 명확히 설명하면 그만이야.”호비는 아직 어려서 성격은 불 같지만 이런 일을 겪어본 적이 없으니 전부 황귀비 말을 들을 따름이다.황귀비가 몇 마디 더 위로하고 호비를 돌려보냈다.황제는 어젯밤 황귀비에게 왔지만 밤새 이 일은 들먹이지 않았다. 그저 한 동안 깊이 생각할 뿐이라 황제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사실 황귀비도 모른다.정말 황제가 호비를 의심하지 말았으면 하고 바라는 게, 그렇지 않으면 이 궁궐에 어찌 하루라도 안정될 수 있겠는가?원경릉은 정월 초이틀 가솔들을 이끌고 노마님을 뵈러 정후부에 갔다. 원경병도 돌아와서 온 집안이 같이 밥을 먹고, 노마님이 세뱃돈을 주시고 크고 작은 보따리를 싸 주셔서 각자 가지고 집으로 돌아갔다.원경릉이 웃으며, “딸은 진짜 도둑이라니 까요. 올때마다 또 한 바탕 털어가네요. 할머니, 집에 이렇게 물건이 적으면 못 훔쳐가니 좀 많이 사두세요.”정후부 노마님이 자신만만하게, “금은 보석은 없지만 먹고 마시고 입고 쓸 거는 없는 게 없으니 언제든 가져가고 싶으면 와서 가져가.”노마님은 물
잔뜩 긴장한 채로 앞으로 몸을 반쯤 내밀고 있었던 주 지부는 우렁찬 상대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중심을 잃은 듯 비틀거렸다. 그는 이내 팔을 뻗어 망루의 기둥을 붙잡으려 했지만, 허공에서 멈추고 말았고, 그대로 몸이 앞으로 쏠려 떨어져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가 말에서 빠르게 날아올라, 믿기 힘들 정도로 빠른 속도로 그에게 달려갔다. 상대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주 지부가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그를 안고 빙 돌아서 바닥에 착지했다.주 지부는 깜짝 놀라서 그만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를 구해준 사람은 반짝거리는 눈망울에, 품위 있는 모습의 젊고 잘생긴 사내였다. 주 지부는 그를 황제의 호위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거의 죽을 뻔한 고비를 넘겼기에, 안도의 한숨을 내쉴 새도 없이 그에게 예를 올렸다.“대인,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그때 말들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는데, 서일이 먼저 말에서 내려, 다급히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괜찮으십니까?”우문호도 매우 놀란 듯했다. 조금만 늦었다면, 주 지부는 정말 죽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가슴을 가볍게 두드리며 숨을 들이쉬었다.“괜찮다.”그러고는 주 지부를 보며 물었다.“자네는 누구요?”주 지부는 마차에서 내리는 사람들을 보며, 누가 황제인지 추측했다.황제는 올해 마흔에 가까운 나이로 알려져 있었기에 위엄이 넘쳐 보일 것이었다. 그는 일행 중, 냉 수보와 홍엽을 만난 적 있었기에, 거친 모습을 한 이 인물은 아마도 호위로 추측된다. “묻지 않았소? 자네는 누구요? 어찌 죽으려고 하는 것이오?”서일은 그가 멍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자, 큰 소리로 다시 물었다.주 지부는 울 지경이었다. 냉 수보가 그를 보고 있으니, 예를 올려야 하지만, 황제도 자리에 있으니, 바로 냉 수보에게 예를 올릴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대체 누가 황제란 말인가?그는 황제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어, 결국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그러고는 그들에게만 들릴 정도로 낮은 목소
원경릉의 말은 그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고, 자리에 있던 관리들은 기쁨과 동시에 두려움에 휩싸였다. 이 대인은 땅에 엎드려 온몸을 바르르 떨고 있었다. 그는 살아생전에 자신이 황제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은 단 한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평소 차분하고 신중한 주 지부도, 그도 감정이 격해져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눈가에는 눈물이 가득했다.황후를 만난 것만으로도 큰 영광이라 생각했는데, 황제까지 오신다는 소식에 그의 마음은 흥분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원경릉은 평생을 경성에서 다섯째와 함께 있었기에, 그녀는 그저 그가 온다는 사실을 간단히 전했을 뿐이었는데 말이다. 그녀는 다들 걱정 없이 역병을 치료하고, 언제나 황제가 그들의 뒤를 든든히 지켜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들의 반응을 보니, 황제가 직접 오는 것이, 지방 관리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깨달았다.원경릉이 급히 말을 덧붙였다.“폐하게서는 그저 역병 때문에 온 것이니, 모두 각자 맡은 일에만 최선을 다하면 되네.”“예, 예, 마마의 명을 따르겠습니다.”주 지부가 눈물을 닦으며 답했다.그렇게 관아와 의서가 협력하여, 오계부를 조사하기 시작했다.원 할머니는 역병을 치료할 수 있는 처방을 몇 가지 내렸다. 경증 환자는 약차를 계속 마시고, 증상이 악화하거나 중증 환자는 그녀의 처방을 사용하도록 했다.전에 이미 근처 주부에 연락해 약을 보내라 명했고, 오계부에서 구비한 약까지 있으니, 이번 역병을 대처할 수 있었다.오계부 의서는 이번 역병을 과거의 역병과 동일하게 생각하고, 소홀히 한 것 외에는 준비가 충분했다.원경릉은 황제 일행이 저녁 무렵 오계부에 도착할 것이라 예상했다.주 지부는 원래 여러 관리와 함께 황제를 맞이할 예정이었지만, 원경릉이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그녀는 황제가 미복 순행 중이니, 과하게 맞이하여 백성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했다.그 말에 주 지부는 당황했다.황제가 오계부에 도착했는데, 아무도 맞이하지 않는다니, 어찌 그럴 수 있다는 말인가?그러나 그는 황
약을 쓰자, 주 지부의 열이 단번에 내려갔다.열이 내려가니 정신이 맑아져, 그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는 애써 자리에서 일어나 황후마마에게 예를 올리겠다고 고집 피웠다.원경릉은 그에게 누워 있으라고 말한 후, 역병에 관해 이야기하며 주 지부에게 이를 중시할 것을 당부했다.주 지부는 이를 듣고 깜짝 놀라 말했다.“소신은 매일 의서에 사람을 보내, 역병의 상황을 보고받고 있사옵니다. 매일 보고된 상황은 그다지 심각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역병이 발생했지만, 작년과 비슷한 정도였고, 약재도 충분한데, 어찌 이렇게 심각해진 것입니까?”“매년 역병이 발생했으나, 대대적으로 퍼지지 않아,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네.”원경릉이 답했다.“의서의 이 대인을 불러, 상황을 확인하겠습니다.”주 지부는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어제 이미 그를 찾아가, 환자 수와 사망자 수를 조사하라 명했네. 하지만 그는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모를 것이네. 자네가 사람을 보내, 관아에 와서 상황을 보고하도록 하게.”“예!”주 지부는 곧바로 사람을 보냈다.푸른 옷을 입은 남자는 관아에서 일하는 관리였기에, 그는 반 시진도 채 되지 않아, 관아 내에서 병에 걸린 자가 얼마나 되는지 통계해냈다.관아 내에서 역병 증상을 보인 사람은 총 열여덟 명이었고, 그중 두 명은 병세가 심각하여 이미 집에서 쉬고 있는 상태였다. 주 지부는 관아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병에 걸린 줄 몰랐고, 관리의 보고를 들은 후, 큰 충격을 받았다.의서의 이 대인은 하루 종일 쉬지도 않고, 바삐 움직였다. 서관 대인이 직접 오셨으니, 어떻게든 시키는 일을 완성해내야 했다.그는 사실 역병이 그다지 심각하지 않고, 그저 작년과 비슷하다고 여겼었다.하지만 여러 지역과 의원을 돌아보고 나서야, 이번 역병이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처음엔 그저 서관 대인에게 보고만 하려고 했지만, 병세가 심각해지자 그도 조급해지기 시작했다.하지만 짧은 시간 안에 인원수를 통계하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도, 다섯째 일행은 여전히 도착하지 않았다.그래서 원경릉과 할머니는 다른 의관을 더 둘러보기로 하고, 몇 군데 더 돌아본 뒤 관아에도 갈 계획을 했다.그런데 한 의관에 들어서자마자, 푸른 옷을 입은 중년 남자가 다급히 뛰어오며 말을 걸었다. “수 의원, 대인께서 병세가 위중합니다. 어서 봐주셔야 합니다.”의원은 그 말을 듣자마자, 약상자를 집어 들고 다른 환자들을 그냥 남겨둔 채, 푸른 옷의 중년 남자와 함께 나가려 했다.원경릉이 그를 막아 세우며 말했다.“의관에 있는 환자들을 돌봐야 하지 않소? 우리 할머님께서도 의원이니, 지부 대인의 병은 할머님께서 봐 드릴 것이오.”푸른 옷의 사내는 초조한 듯 원경릉을 향해 소리쳤다.“말도 안 되는 소리 마시오!““대인의 병세가 급박한데, 혹여라도 지체되면 당신들이 책임질 수나 있겠소?”바로 그때, 원 할머니가 호패를 꺼내, 그의 눈앞에 들이밀며 단호하게 말했다.“길을 안내하거라!”조급한 표정을 짓던 푸른 옷의 사내는 호패를 보자마자 표정이 얼어붙었다. 이내 정신을 차린 그는 곧장 허리를 굽혀 예를 올리며 말했다.“서관 대인께서 오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무례를 범해 송구하옵니다.”“그만 사과하고 길 안내나 하시오.”원경릉이 말했다.“예, 예!”사내는 급히 물러서서, 예를 갖춰서 길을 가리켰다.“마차가 밖에서 대기 중입니다. 서관 대인, 이쪽으로 오시지요.”원경릉은 할머니를 부축해 마차에 올랐고, 곧장 관아로 향했다.지부 대인은 따로 사저가 없어 관아의 뒷마당에서 거주 중이었다. 혼자 지내는 데다 관아가 워낙 가까워 편리했기 때문이다.관아에 도착하자마자, 그들은 마스크를 착용하고 안으로 들어갔다.주 지부는 병세가 꽤 심각해져 있었다. 그는 어지럼증과 흉통에 시달려, 침대에 누운 채 말을 꺼낼 힘도 없었다.원경릉은 직접 치료에 나섰고, 약상자를 열어 체온 측정기와 청진기를 꺼냈다.푸른 옷의 사내가 의아해하며 물었다.“아가씨께서도 의원이십니까?”그러자 곁에 서
이 대인이 원경릉에게 의학을 잘 모른다고 반박할 틈도 없이, 원 할머니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말대로 하게. 하루만 줄 테니, 그 안에 역병에 관한 모든 자료를 가져오게. 사망자 수도 포함되어야 하네." 이 말까지 듣자, 이 대인은 더 이상 반박할 수 없었다. 비록 조사가 필요 없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서관 대인이 멀리서 오계부까지 왔으니, 시키는 일은 해야지 대인의 마음에 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사람들을 보내 조사를 명한 후, 이 대인은 거처를 마련해 드리겠다고 했다. 하지만 원경릉이 말했다. "괜찮습니다. 의서에 의원이 많지 않으니, 대인도 바쁘실 텐데요. 저희가 직접 오계부를 돌아보겠습니다." 이 대인은 그녀가 원 할머니의 힘을 빌려 위세를 부린다고 생각해, 대꾸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말에 답도 하지 않고, 원 할머니에게 예를 올렸다. "어르신께서 머무실 계획이 있으시면, 부디 저에게 알려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밤 대인을 잘 대접하라, 명을 내리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네. 일이나 보게." 원 할머니는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원경릉에게 말했다. "먼저 좀 돌아보다, 객사를 찾아 머물자꾸나." "예!" 두 사람은 역병을 조사하기 위해 다급히 이곳을 찾아왔기에, 먼저 각지의 의원을 직접 돌아보려 했다. 아마 다섯째 일행은 빨라야 내일이나 모레쯤 도착할 것이었다. 두 사람이 의서를 나서자, 이 대인은 뒤따라 나오려다 원 할머니의 날카로운 눈빛에 움찔하며 발길을 멈췄다. 두 사람은 오계부의 거리로 향했다. 거리가 꽤 번화했고, 사람들도 제법 많아, 대낮에는 조금 붐볐다. 그들은 곧장 의원으로 향했다. 의원 앞에는 약차가 많이 진열되어 있었지만, 환자는 얼마 없었다. 겉보기엔 역병이 퍼졌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원경릉은 안으로 들어가 의원에게 상황을 물었다. 그러자 의원은 요즘 들어 약차가 잘 팔리고 있고, 하루에 천 봉지가 넘게 팔린다고 답했다. 하지만 그도 역병
늦게 출발한 원경릉은 신속하게 오계부로 향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오계부 근처 주현에 도착하자마자, 할머니가 현지 혜민서로 가야 한다며 잠깐 멈추자고 했다. 그러고는 혜민서에 오계부로 약을 공급할 준비를 하게 했고, 명을 받으면 바로 오계부로 보낼 수 있도록 미리 준비를 당부했다. 혜민서 산하의 의료기관들은 지난 몇 년간 개혁을 통해 뚜렷한 성과를 거두었고, 지역 간의 연결도 긴밀해졌다. 특히 역병을 상대하는 체계가 가동되면 상부에서는 전력을 다해 의원과 약을 지원해줄 수 있었다. 신신당부한 뒤에야 원경릉과 할머니는 오계부로 재빨리 향했다. 곧이어 오계부에 도착했는데, 우문호 일행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다. 오계부는 인구가 500만 명에 이르는 곳으로, 두 개의 주부가 통합된 지역이었다. 열대에 있어, 경작지가 많고 산이 많아 농업을 위주로 삼고 있었다. 그래서 조정은 이곳을 서부의 주요 곡창지대로 삼고 있었던 것이었다. 농업이 발달한 지역은 상대적으로 경제도 번화했고, 현지 백성들은 벼 외에도 감, 자두, 리치 등을 대량으로 재배하고 있었다. 리치는 신선할 때 먹을 수도 있고, 말려서 건과로 만들어 팔 수도 있기에, 어느 정도 지역 경제 활성화에 도움이 되었다. 오계부는 백월국과 인접해 있었는데, 백월국은 북당의 속국으로 사이가 우호적이며 경제 교류도 활발했다. 이는 양국의 번영을 촉진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오계부의 지부는 장씨 성을 가진 오계부 출신이었다. 장 지부는 훌륭한 관리이며 지역 백성들로부터 존경받고 있었다. 원경릉과 원 할머니는 오계부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지역 혜민서를 찾았다. 할머니는 혜민서의 서관(署館) 신분을 밝혔다. 그녀는 북당 각 주부의 의서를 총괄하는 인물이고, 총책임자이기도 했다. 혜민서의 이 의원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두 사람을 안으로 청한 후, 바로 예를 올렸는데, 마치 신선이라도 본 것처럼 목소리까지 떨고 있었다. "소인은 이자옥이라 합니다. 어르신께서 친히 오신 줄도
그녀는 일단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하고, 냉 대인이 자세한 상황을 묻는 사이에 제 대인의 피를 뽑았다. 약상자는 기능이 꽤 다양하기에, 바이러스 검사도 문제없었고, 안에는 양여혜가 준 소형 현미경도 있었다. 하지만 바이러스 관찰이나 세균 배양에는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지체할 수 없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이 먼저 오계부로 향하고, 그녀는 이곳에 남아 제 대인을 치료하고 검사 결과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면 바이러스든, 세균 감염이든, 결과가 나와야 제대로 된 치료 방안을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미색이 말했다. "저도 이곳에 함께 남겠습니다. 제가 환자를 돌보는 것 정도는 도울 수 있지 않겠습니까?" "괜찮으니 먼저 가거라. 어쩌면 내가 더 일찍 도착할 수도 있으니깐." 원경릉이 말했다. 그녀는 혼자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지만, 미색까지 데리고 가는 건 무리였다. "우리가 먼저 출발하는데, 어찌 더 일찍 도착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미색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가능한 일이다. 원 선생은 늘 기적을 만들어내니." 우문호가 말했다. 그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고, 원경릉에게 다가가 조심하라고 몇 마디 당부했다. "알았소. 지체하지 말고, 어서 떠나시오. 오계부에 도착하면 곧바로 관아를 찾아가, 의원의 빠른 대처를 명하라 하시오. 만약 내가 먼저 도착한다면, 내가 관아를 찾아가겠소." "알겠소. 그럼, 먼저 가겠소!" 우문호는 그녀와 입을 맞추고 싶었지만, 보는 이가 많으니 그저 참을 수밖에 없었다. 서일은 황후를 홀로 두고 가는 것이 걱정되어, 우문호를 따라나서며 계속 물었다. "정말 황후를 이곳에 혼자 남겨도 되는 것입니까?" "그럼, 네가 남을 것이냐?" 우문호가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 "너도 원 선생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알고 있지 않느냐?" 회왕 부부도 걱정은 되었지만, 다섯째의 여유로운 모습에 자신이 있을 것이라 믿었다. 다섯째 부부는 늘 비밀이 많은 사람들이라, 그들은 더 이상 신경
원경릉은 밖으로 나가, 오계부에 역병이 생긴 것 같다고 전했다. 오계부는 서쪽에 자리 잡고 있어, 기후가 더운 탓에 가끔 역병이 생기긴 했었지만 백성들은 고뿔 치료에 쓰이는 약초로 끓인 차를 즐겨 마시기에, 대규모로 역병이 돈 적은 없었다. 냉 대인이 말했다. "오계부에서는 이 상황을 조정에 알리지 않았습니다. 비록 해마다 역병이 생기긴 하지만, 빠르게 통제해 왔으니, 이번에도 예전과 같은 상황이지 않겠습니까?" 원경릉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런데 이번엔 더 심각할 수도 있습니다. 제 대인의 형도 역병으로 돌아가셨고, 그와 가까이 지낸 사람들도 병에 걸렸습니다. 이렇게 관아에만 역병에 걸린 자들이 많으니, 예전보다 더 심각할 것 같습니다." "그래도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해마다 역병이 생겼으니, 그에 대한 대응책도 이미 있을 것입니다." 원경릉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해마다 역병이 생겼지만, 대대적으로 유행하지 않았기에, 현지 관리들이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겨 쉽게 통제될 것이라 생각하고, 방심할 수도 있으니깐요." 우문호가 물었다. "원 선생, 역병을 어떻게 통제해야 한다고 생각하오?" "역병 상황이 안 좋을 것이라 추측할 뿐, 정말 오계부의 상황이 어떠한지는 아직 모르네. 제 대인은 여전히 고열에 시달리고 있어, 수액을 맞히고 해열제를 먹였소. 냉 대인과 함께 들어가 상황을 자세히 물어봐야겠소. 하지만 꼭 마스크를 끼고, 병을 막아야 하오." 원경릉은 유행성 독감이나 변이된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일 것이라 의심하고 있었다. 그녀가 살던 세계에서는 A형 독감의 대규모 변이가 십수 년마다 한 번씩 발생했는데, 그런 변이 독감은 현대에서도 의료 체계에 큰 부담이 되곤 했다. 그러니 지금 이곳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만약 역병이 다시 시작한다면, 가능한 한 빨리 통제해야만 했다. 원경릉의 말을 우문호와 냉 대인은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도
원경릉은 청진기를 꺼내 그의 폐를 확인해 보았는데, 남녀가 가까이 접촉하는 것이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한 제 대인은 이내 손을 뻗어 그녀를 막으려 했다. 하지만 병세가 심해 아픈 데다가, 마스크를 쓰고 있어도 묘한 위압감을 풍기는 의원의 단호한 눈빛과 기운에 그만 압도당하고 말았다. 원경릉은 앞쪽을 청진한 뒤, 그에게 옆으로 돌라고 한 다음에 꼼꼼히 살피고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며칠을 아프신 것입니까?" 제 대인은 꽉 막힌 코 때문에 콧소리를 내며 천천히 몸을 돌리고 답했다. "며칠 사이의 일입니다. 오계부를 떠날 때도 멀쩡했는데, 밤새 달리고, 말을 오래 타다 보니 고뿔에 걸렸나 봅니다." "기침 말고, 가슴 통증도 있습니까?" "예. 이곳이 아픕니다!" 제 대인은 가슴 근처를 손으로 누르며 말했다가, 숨쉬기가 어려운 듯 손바닥을 움직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도 아프고, 온몸 뼈마디도 다 아픕니다." 그러자 원경릉은 더 자세히 증상을 확인한 뒤 말했다. "약을 준비할게요. 수액을 좀 맞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수액이요?" 제 대인은 멍하니 원경릉을 바라보았다. "예. 질문은 하지 마시고, 그저 치료에 협조만 해주십시오. 병세가 꽤 심각한 편입니다." 원경릉은 제 대인이 폐렴이라 확신했고, 중증 폐렴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제 대인은 병이 심하다는 말에 초조한 표정을 지으며 다급히 말했다. "의원 나리, 제발 최선을 다해 치료해 주십시오… 저에게는 아직 모셔야 할 노모가 있습니다. 지난달 병으로 형님께서 세상을 떠난 터라, 형님의 자식들도 제가 돌봐야 하니, 절대 이대로 목숨을 잃을 수는 없습니다." 원경릉이 답했다. "최선을 다할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 치료에만 집중하시지요!" 제 대인은 감동을 받은 듯 감사 인사를 올렸다. "정말… 감사합니다." 원경릉은 곧바로 약을 지어 수액을 준비했다. 수액을 맞는 동안, 제 대인은 여전히 놀란 모습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