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 없이 눈앞에 놓인 음식을 먹고 있었다.‘지수가 별로 먹지 않길래 나도 일부러 먹지 않은 거라는 걸 알고는 있을까? 내 속도 모르면서... 호텔로 돌아와서 같이 먹으려고 한 건데 고마워하긴커녕 내가 여자를 꼬신다고 말하다니...’‘내가 여자를 꼬신다고? 내가? 꼬시지 않아도 알아서 들러붙는데 내가 누굴 꼬신다고 그러는 거야? 내가 손에 넣고 싶은 사람은 지수뿐인데...’스테이크를 다 먹고 나서 두 사람은 각자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내일 중요한 일이 있었기에 서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각자 방에 들어가 쉬었다.송문수처럼 늦게 자는 것에 익숙한 사람도 오늘은 어쩔 수 없이 일찍 잠에 들어야 했다.다음 날 아침, 하지수가 막 일어났을 때 송문수는 이미 정장을 차려입고 거실에 앉아 있었다.“벌써 일어났어?”하지수는 깜짝 놀라며 말했다.“지금 7시인데...”“책임지고 이 일을 해결해야 하는데 늦잠을 자면 안 되지.”송문수가 말했다.“이거 맞지? 크레지랑 얘기할 때 필요한 서류 말이야. 미리 알아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내가 전문적이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니까.”서류를 들고 소파에 앉아 진지한 표정으로 읽고 있는 송문수를 보며 하지수는 이렇게 생각했다.‘내가 아는 문수 씨 맞아? 사람이 이렇게 변할 수도 있는 건가? 진짜 정신을 차린 거라고?’“내가 잘생긴 건 나도 알지만 그렇게 계속 쳐다보면 나도 일에 집중하기 어려운데...”송문수는 서류를 보면서 이렇게 말했다.하지수는 사색에서 벗어나 급하게 화장실로 가서 세수를 했다. 그녀는 옷을 갈아입고 화장도 했다. 준비를 끝내자 룸서비스로 아침이 배달된 것이었다.송문수와 하지수는 간단히 아침을 먹고 바로 매장으로 향했다.송문수는 아주 진지하게 선물을 고르고 있었다. 계속해서 직원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말이다.그는 여자들이 무엇을 좋아하는 지 꽤 잘 아는 듯했다. 여자를 많이 만나본 그가 여자들의 취향을 모를 리 없지만 말이다.하지수는 속이 쓰려왔다.
하지수는 멍하니 송문수 뒤를 따라 걷고 있었다.‘내가 가방을 구경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으면서... 신경조차 쓰이지 않는 건가?’두 사람은 차를 타고 곧바로 크레지의 집으로 향했다. 크레지의 집은 교외에 있었는데 아주 큰 별장이었다.그날은 날씨도 좋았기에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았다.하지수는 잠시 감탄하며 말했다.“나이가 들면 이렇게 한적한 곳에서 좋아하는 사람과 같이 살고 싶어”“너 이런 곳 좋아해?”송문수가 살짝 이해가 안 된다는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아주 조용한 곳이었기에 저녁이 되어도 느낌이 나지 않았다.하지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냥 말해본 거야.”송문수가 이런 곳을 좋아하지 않을 거라는 것쯤은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번잡한 곳을 좋아하는 사람이었으니 말이다.두 사람은 별장에 도착했다. 그들은 자로 초인종을 눌렀다.하우스키퍼가 문을 열고 나와서 무슨 일인지 묻더니 다시 안으로 들어가 확인을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렸고 하우스키퍼가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별장 안에는 넓고 푸른 잔디밭이 펼쳐져 있었다.아이 두 명과 강아지 두 마리가 잔디밭을 뛰어다니고 있었고 정원사들이 나무를 다듬고 있었다.그 모습은 따뜻하고 조화로워 보였다.두 사람은 하우스키퍼를 따라 거실로 들어갔다. 소파에는 크레지와 그의 아내인 쥴리가 앉아 있었다.두 사람은 송문수와 하지수를 웃으면서 맞이했지만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감정은 아닌듯했다.가족끼리 보내는 시간이었기에 방해받는 게 싫은 것이었다.그저 예의상 들어오라고 한 것이었다. 그들은 서로 인사를 나누고 몇 마디를 주고받았다.크레지가 바로 말을 꺼냈다.“저는 금융 기술에 큰 관심이 없습니다. 사실 지금 건강이 좋지 않아서 휴식을 취하고 있어요. 그러니 지금은 손님을 접대하거나 일적인 이야기를 하기는 좀 불편합니다.”“저희가 방해를 했네요. 죄송합니다.”송문수가 서둘러 말했다.“그럼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 회사의 기획안입니다. 시간이 되실 때 봐주
하지수는 옆에서 지켜보며 마음이 조급해졌다.‘좀 양보해 주면 좋을 텐데... 두 아이들과 사이가 좋아지면 크레지도 마음이 누그러질 수도 있잖아... 그러면 협력 제안을 받아들일 수도 있을 거고. 왜 이렇게 승부욕이 강한지...’하지수는 그저 속으로 답답해하고 있었다.그때, 그녀는 크레지와 쥴리가 문 앞에서 이 장면을 보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두 아이는 드디어 송문수에게서 공을 빼앗았다. 하지수는 아이들이 골을 넣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송문수가 다시 그 공을 빼앗는 것이었다.그중 한 아이는 거의 눈물을 터뜨릴 것 같았지만 끝까지 참으면서 공을 쫓았다. 다른 아이도 송문수를 뒤쫓았다.세 사람은 잔디밭에서 뛰어다녔고 강아지 두 마리도 같이 달아 다니고 있었다. 그 장면을 보고 있으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송문수가 다시 골을 넣으려고 시도했다. 그때, 한 아이가 빠른 속도로 송문수의 공을 빼앗아 가는 것이었다.송문수는 순간 공을 놓쳐버렸고 아이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공을 골대로 차 넣었다.하지수는 기뻐서 환호를 터뜨렸고 크레지와 쥴리도 두 아이에게 박수를 보냈다.두 아이는 신이 나서 펄쩍 뛰며 기뻐했다. 아이들의 행복은 정말 순수한 것이었다.송문수는 그들을 격려하며 말했다.“잘했어. 대단한데? 하지만 약속한 10분이 다 돼서 이만 가봐야 될 것 같아.”“꼭 가야 돼요?”두 아이는 아쉬움이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응, 가야 돼. 두 사람 모두 정말 멋졌어. 계속 열심히 훈련해야 돼, 알겠지?”“그럼 또 만날 수 있을까요?”“인연이 있으면 또 만나게 되겠지.”송문수는 하지수에게로 다가가 외투를 받아 들고 대문으로 향했다. 하지수는 그 뒤를 따랐다.두 사람이 대문에 다다랐을 때, 하우스키퍼가 급히 따라왔다.“송문수 씨.”“크레지 씨랑 부인께서 점심을 함께 하자고 초대하셨어요.”하지수는 놀라운 표정으로 송문수를 쳐다봤다. 송문수 역시 기쁜 표정을 숨길 수 없었다. 둘은 서
하지수는 제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그녀는 이제서야 송문수가 왜 공을 넘겨주지 않았는지, 왜 아이들에게 골을 못 넣게 했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된 듯했다. 그는 아이들에게 노력한 뒤에 얻는 기쁨을 느끼게 하려고 했던 것이다.하지수는 자신이 항상 송문수를 부정하려는 습관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송문수는 두 아이와 한참 동안 축구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크레지가 독촉해서야 두 아이는 아쉬워하면서 잔디밭을 떠났다. 그러면서 두 아이는 이렇게 묻곤 했다.“또 같이 축구할 수 있나요?”송문수는 먼저 크레지가 준비한 방에서 씻고 나왔다. 땀에 젖은 채로 일을 하기는 불편했기 때문이었다. 씻고 나오니 그는 아주 깔끔한 모습이었다.점심 식사도 이미 준비되었기에 두 사람은 바로 함께 앉아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두 아이는 송문수가 그렇게 좋은지 식사 중에도 계속 말을 걸며 이야기를 나눴다.송문수도 그들의 질문에 인내심을 가지고 잘 대답해 주었다.점심 식사를 마치고 나서도 두 아이는 여전히 송문수 주위를 떠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쥴리의 손에 이끌려 방으로 갔다.아이들이 떠나자 거실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크레지는 송문수와 하지수를 서재로 안내했다.그는 바로 그들의 협력 제안을 꺼내며 말했다.“아까 기획안을 살펴봤거든요. 그러니까 기술 투자를 원하시는 거죠? 제가 독단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건 아니라서 바로 답할 수는 없어요. 제 회사에서 무슨 결정을 하든 제가 혼자 하는 게 아니니까요. 두 분도 제가 아닌 저희 회사와의 협력을 원하시는 거잖아요.”“물론입니다. 갑작스럽게 크레지 씨의 직업 계획을 함부로 바꾸고 싶지도 않고요.”송문수가 재빨리 답했다.“휴가가 끝나면 회사 분들과 논의한 후에 결정을 내리겠습니다. 하지만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아요. 제안을 살펴보니까 두 분이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하고 계시는지 알 것 같거든요. 또 저희 회사도 전부터 해외 시장에 진출할 생각을 하고 있었거든요. 하지만 직접 지사를 세우는 건 회사에 부담이 너무 크더라고
하지수는 창밖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사실 송문수에게 그렇게 큰 기대를 할 필요는 없었다.그는 원래부터 세심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기에 조금이라도 변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앞으로 같이 보낼 시간이 많으니까 말이다.두 사람은 호텔로 돌아와 짐을 챙긴 후 공항으로 향했다. 약 10시간의 비행을 거쳐 밤이 될 때에야 두 사람은 귀국했다.그들은 귀국하자마자 바로 병원으로 갔다.송기명은 중환자실에서 일반 병실로 옮겨졌다.두 사람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 송기명은 마침 밥을 먹고 있었는데 병실 안에는 송승우도 있었다.그도 아마 금방 서울에서 일처리를 끝내고 돌아온 모양이었다.송문수와 하지수를 본 송승우가 무표정으로 말했다.“아직 아버지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도 않았는데 출국해서는 몇 날 며칠씩 돌아오지도 않다니... 정말 간도 크지.”송문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송승우가 뭐라 하든 그저 무시해 버렸다. 송승우도 눈치챘지만 그는 송문수가 자신에게 어떤 태도를 보이든 상관없었다. 송승우에게 놓고 말해서 송문수는 어차피 자기보다 못한 사람이기 때문이었다.그러자 하지수가 설명했다.“어머님과 아버님 허락을 받고 출국한 겁니다. 지금 회사 상황이 불리한 상황이라서 문수 씨랑 저는 해외에서 회사를 살릴 수 있는 길을 찾고자 했어요. 회사가 다시 일어날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죠.”하지수는 자신도 모르게 송문수의 편을 들었다. 그녀는 점점 송승우가 송문수를 막 대하고 그에 대해 안 좋게 말하는 게 점점 불편해졌다.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요?”송승우가 비꼬며 말했다. 하지수가 송문수의 편을 드는 바람에 그는 점점 더 짜증이 났다. 전에는 하지수가 자기 편을 들었던 것 같은데 이제는 점점 자기한테 관심을 두지 않는 것 같아서 심술이 난 것이었다.하지만 하지수가 이렇게 나올수록 송승우는 오히려 더 그녀를 되찾고 싶어졌다. ‘하지수는 원래부터 내 편 아니었어?’그녀는 참을성 있게 말했다.“회사를 운영하는 건 시간이 필요
“내가 언제 지수 씨한테 가스라이팅을 했다고 그래? 송문수, 말 좀 조심해서 해.”송문수 말을 들은 송승우는 더욱 화가 났다.창피해서 화가 난 건지, 기분이 안 좋아서인지, 그는 평소와 다른 모습으로 화를 내고 있었다.송문수가 입을 열기도 전에 송기명이 단호한 말투로 말했다.“그만해!”“나이가 얼마인데 만나자마자 또 싸우냐? 문수야, 그래도 승우 네 형이야. 너도 좀 배려할 줄 알아야지.”송문수가 냉소를 지었다.어렸을 때부터 늘 이런 식이었다. 송승우와 싸울 때면 부모님들은 언제나 송승우 편을 들었다.어느 한 번은 송문수가 집 정원에 있는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고 있었는데 그 소리가 공부에 방해가 된다고 송승우가 송문수더러 수영을 그만두라고 했던 적도 있었다.하지만 수영 대회가 있어서 연습을 해야 했던 송문수는 그 말을 듣지 않았다.결국 송승우는 부모님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그로 인해 송문수는 부모님에게 수영을 금지당했다. 송승우의 공부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만으로 말이다.송문수는 대회 준비를 해야 한다고 반박했지만 부모님은 그를 무시했다.“수영 대회는 그렇게 중요한 대회가 아니잖아. 승우 공부가 더 중요하지.”그때부터 송문수는 수영을 그만두었다.부모님이 그때 상황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그가 수영을 하지 않는 이상 송승우의 공부에 방해되지 않을 것이니 말이다.사실 송승우가 창문을 닫기만 해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문수는 말없이 참아야 했다.어렸을 때나 지금이나 다들 결국 송승우를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송승우는 송씨 가문의 자랑이었고 송문수는 언제나 뒷전이었다.아무리 열심히 하고 잘한다고 해도 칭찬 한마디 듣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송승우가 하는 말은 언제나 맞았고 그가 하는 말은 언제나 틀렸다.송문수는 몸을 돌려 병실을 떠나려 했다. 변명을 늘어놓고 싶지도 않았고 그들과 싸우고 싶지도 않았다.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병실에 남아있는 송기명은 얼굴이 시퍼렇게 변할 정도로 화가 나 있었다.하지만 송승우는 옆에서 계속 불난 집에 부채질을 했다.“문수 철 든 거 맞아요? 아직도 저렇게 다른 사람 감정을 생각해 주지 않아서 되겠어요? 다른 건 다 제쳐둔다고 해도 지금 아버지께서 병원에 누워 계시는데... 그런데도 이렇게 짜증 낸다고요? 어떻게 몇 년 동안 아무 발전도 없을까요?”그 말을 들으면서 송기명은 점점 더 화가 나서 얼굴이 더욱 굳어져 갔다.그때, 허영지가 옆에서 말을 했다.“승우야, 그만해.”송승우는 자기도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저도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어쩌겠어요? 사실이잖아요. 제가 없는 말을 지어냈나요?”허영지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듯 다시 말했다. “그만해.”그녀의 말투에는 분명 짜증이 섞여 있었다.그 말을 들은 송승우도 알겠다는 듯 입술을 다물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때, 허영지가 말을 꺼냈다.“승우야, 방금 의사 선생님께 물어봤는데 네 아버지 상태도 많이 괜찮아 졌다고 하더라고. 큰 문제는 없다고 하셨어. 그냥 안정을 취하는 게 중요하다고 하시더라. 너 하루 종일 바쁘니까 계속 아버지 옆에 있을 필요 없어. 내가 여기서 네 아버지랑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마.”“아버지 정말 괜찮은 거예요?”송승우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많이 좋아졌어.”송기명은 고개를 끄덕였다.“너희 어머니가 너무 걱정해서 탈이지. 너희 어머니만 아니었으면 나는 벌써 퇴원할 수도 있었어.”“퇴원은 무슨... 건강이 제일 중요한 거잖아요. 회사 일 걱정하지 말고 그냥 치료에 집중하세요.”송승우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알겠어.”송기명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전 먼저 갈게요. 무슨 일이라도 있으면 언제든지 전화하시고요. 바쁘지만 않으면 자주 들를게요.”“너도 몸 잘 챙겨.”허영지는 아들을 걱정하며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부모님께서 걱정하지 않게 잘 지낼게요.”송승우는 이런 말을 남기고 병
“뭐라고요?”송기명은 놀란 표정으로 허영지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녀가 갑자기 이런 말을 할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으니 말이다.“어릴 때부터 저희는 승우에게만 집중했어요. 승우는 똑똑하고 뭐든지 빨리 배우는 편이고 여러 면에서 뛰어났기 때문에 항상 승우한테만 신경을 썼었죠. 그 대신 문수한테 너무 소홀했던 것 같아요. 지금까지 문수 생일을 몇 번이나 챙겼는지 잘 기억도 안 나요.”허영지는 갑자기 괴로운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송기명은 잠시 멈칫하더니 입을 열었다.“남자애가 무슨 생일을 챙긴다고...”“하지만 승우 생일은 매년 챙겨줬잖아요. 승우와 문수 생일이 한 달 차이라고 항상 승우 생일에 맞춰서 생일 파티를 했죠. 그리고는 그 날에 문수 생일도 같이 챙겼다고 하면서 그저 넘어가 버렸잖아요. 하지만 그날, 모든 사람은 승우의 생일만 축하해줬지 문수는 거들떠보지도 않았어요. 문수는 그냥 옆에 있을 뿐이었죠. 그게 어떻게 같이 생일을 챙기는 거겠어요?”허영지는 힘없는 말투로 말했다.“당신은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거예요?”송기명은 허영지의 말을 곱씹어 보며 묻기 시작했다. 그는 세심한 성격이 아니었기에 그런 것들에 신경을 쓰고 싶지도 않았다.“형제 사이에 그런 것도 신경 써야 하나요?”“당신 못 느꼈어요? 승우가 문수한테 이미 습관적으로 불만을 품고 있다는 걸 말이에요.”허영지는 눈을 감고 깊이 생각하며 말했다.“저는 방금 승우가 문수한테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까 참을 수 없더라고요.”“문수가 제대로 하지 않았으니까 승우가 그렇게 말한 거죠. 승우가 어떤 사람인지 우리도 잘 알잖아요? 어릴 때부터 똑똑하고 말 잘 듣고 항상 성실한 아들이었으니까요. 걱정할 일도 전혀 없었고 말이에요. 그런데 문수는 항상 문제를 일으켰고...”“하지만 문수가 왜 승우한테 그런 말을 들어야 하는데요? 승우한테 무슨 자격이 있길래 문수를 그렇게 대하는 거죠?”허영지는 송기명의 말을 끊으며 반박했다.“승우가 우리 가정을 위해서 뭘 해줬는데요? 생각해
그 말에 분위기가 순식간에 어색해지자 예수진이 다급히 말을 받았다.“너랑 나랑은 다르지.”“뭐가 다른데?”“난 너 안 좋아하니까 친구로 지낼 수 있는 거야.”그런 아픈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예수진에 하도경은 충격받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헤어질 때 준 상처로는 부족했는지 만날 때마다 이렇게 하도경의 가슴을 후벼 파는 예수진이었다.“진짜 사랑했던 사람들은 친구가 될 수 없어, 내 말이 맞지 지수야?”일부러 하지수를 언급했지만 그녀는 입술만 말아 물고 있었고 오히려 송문수가 대답을 가로챘다.“그냥 친구로 지낼만한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고 판단해서 그럴 수도 있지.”하지수는 입까지 올라온 말을 삼켜냈고 예수진은 생각 없이 아무 말이나 막 뱉는 송문수를 노려보며 저 싹수면 이혼당할 만하다고 생각했다.“우리 진짜 오랜만에 모인다, 다음에 만날 때쯤이면 우리 애도 다 태어났겠어.”“도경아, 오늘은 진짜 취하기 전엔 아무도 집에 보내지 말자.”계지원이 분위기를 풀기 위해 말하자 하도경도 눈치 있게 대꾸했다.“좋아.”어차피 예수진 때문에 마음고생을 너무 해서 더 다칠 마음도 없었기에 하도경은 공허한 제 가슴에 술이나 퍼부으려고 맥주를 따기 시작했다.그렇게 남자들 앞에 한 병씩 놓아준 하도경은 여자들을 보며 물었다.“우리 여자분들은 물, 우유, 음료수 중에 고르세요.”“전 물 마실게요, 알아서 마실 테니까 신경 안 쓰셔도 돼요.”“전 맥주 주세요.”평소엔 술을 즐기지도 않고 예수진과 소이연이 마실 때만 한 잔씩 같이 마시던 하지수가 갑자기 맥주를 요구하자 다들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쳐다봤다.“오랜만에 보는 거니까 저도 한잔하고 싶어서요. 요즘 송승우 옆에만 있느라 또 언제 나올지도 모르잖아요.”“송승우는 좀 어때?”궁금한 건 못 참는 예수진이었기에 말 나온 김에 하지수를 향해 물었다.“아직도 죽겠다고 난리야?”“아니, 지금은 많이 좋아졌어.”“다 큰 남자가 왜 자기 목숨으로 가족들 협박하는 거야?”처음에는 송승우를 안타까워
그 한 달 동안 송문수는 하지수 앞에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부모님이 같이 밥이라도 먹자고 집으로 불러도 송문수는 회사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가족 모임에도 참석하지 않았다.말은 그렇게 해도 본인이 내키지 않아서 안 온다는 걸 허영지와 송기명은 알고 있었다.불행 중 다행으로 송승우의 회복속도는 눈에 띄게 빨랐다.송씨 집안 주치의가 매일같이 검사를 진행하며 회복속도를 체크하고 있었는데 이 정도면 두 달 뒤에 바로 의족을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소견도 듣게 되었다.그 말에 허영지와 송기명도 마침내 큰 시름을 덜었다는 듯 환하게 웃었다.송승우와의 교제를 약속한 하지수도 매일 그의 옆을 지키며 함께 재활 치료를 진행하고 있었다.그렇게 별장에서만 지내던 어느 날, 하지수는 예수진의 전화를 받게 되었다.곧 출산하는 데 그러면 산후조리원에 가야 해서 먹고 싶은 걸 마음껏 먹지 못하니 그전에 한 번 만나서 원 없이 밥이나 먹자는 연락이었다.그 말을 들은 하지수는 자신에게도 기분전환이 필요하다 싶어 더 고민할 것도 없이 그녀의 제안을 수락했다.지금 본인의 상태가 우울한 건지는 잘 몰랐지만 살아갈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어서 마음을 다잡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송문수도 가는 거야?”예수진과 밥을 먹으러 간다는 얘기를 송승우에게 했을 때 그가 던진 첫마디가 바로 저것이었다.송문수와 예수진의 사이가 돈독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송문수와 하지수가 따로 만날까 봐 걱정돼서 한 질문인 것 같았지만 하지수는 바로 대답했다.“몰라요, 그건 안 물어봤어요.”“그런데 문수 씨가 간다고 해도 내가 못 갈 이유는 없잖아요. 송문수 때문에 내 가장 친한 친구를 안 볼 순 없어요.”하지수가 너무 직설적으로 말해 당황했던 송승우는 멋쩍게 웃으며 대꾸했다.“그냥 한번 물어본 거야. 속 아프니까 술은 너무 많이 마시지 마.”“네.”그날 저녁 하지수는 바로 예수진의 집으로 향했다.그때 집에는 예수진의 가족뿐이었는데 안 본 사이 더 커진 배를 보니 두
이혼 시간까지 다 정하고 나니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진 둘은 가만히 소파에 앉아있었다.그 숨 막힌 정적 속에서 한참을 앉아있던 송문수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난 이만 가볼게.”말을 마친 송문수는 하지수가 대답하기도 전에 등을 돌려 집을 나서버렸다.서울을 떠날 때처럼 미련 없이 돌아서는 송문수에 하지수의 시야가 흐려졌다.하지수는 뿌얘진 시야에 끝까지 그의 뒷모습을 담았다.이튿날, 하지수는 약속대로 송문수와의 이혼을 위해 법원으로 향했는데 송문수는 먼저 와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는 하지수가 차에서 내리며 안에 앉아있는 또 다른 이와 뭐라고 말하는 걸 지켜보았다.그 안의 있는 사람은 당연히 송승우일 것이기에 송문수는 시선을 돌리며 라이터를 만지작거렸다.공공장소에서는 흡연이 금지된 상태였기에 그는 이런 식으로 담배를 피우고 싶은 욕구를 잠재우고 있는 것이었다.하지수는 대화를 마친 건지 종종걸음으로 송문수에게 다가가 말했다.“오래 기다렸어? 미안해.”“아니야, 내가 빨리 온 거야.”그녀가 제게 다가오자 송문수는 라이터를 주머니에 찔러넣으며 말했다.“들어가자.”“그래.”그렇게 둘은 법원으로 들어가 대기하고 있었는데 그때 송문수가 합의서를 건네며 말했다.“내가 알아서 작성했는데 맘에 안 드는 거 있으면 바로 말해줘, USB 챙겼으니까 여기서 고칠 수 있어.”사실 어젯밤 송문수가 파일을 보내와서 하지수는 이미 확인을 마친 상태였다.둘 사이에는 자녀가 없으니 양육권 싸움도 없었고 이익을 따지는 사이가 아니니 재산분할에도 큰 문제 없었다.그럼에도 제게 40억을 주겠다는 송문수를 하지수는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어차피 큰돈도 아니라서 헤어지는 대가로 주겠다는 그의 말에 공감이 가 그저 받기로 했다.송문수한테는 정말 적은 돈이긴 하니까.그리고 돈으로서 둘 사이를 깔끔히 정리하는 걸 송문수도 원할 것 같아 하지수는 결국 그걸 받는 조건으로 서류에 사인을 한 것이다.이혼서류를 제출하자 직원이 한 달간의 이혼 숙려기간이 있다는
애써 태연한 척하고 있었지만 핸들을 잡은 손이 하얗게 질려가고 있었다.제멋대로 날뛰는 심장임에도 송문수는 그걸 애써 무시하며 집으로 향했다.차가 멈추자 하지수는 송승우를 부축하며 차에서 내렸는데 송승우의 몸은 껌딱지처럼 하지수에게 딱 달라붙어 있었다.그를 차에서 내려 휠체어에 앉히는 모든 과정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웠다.마치 매일 하던 행동인 것 마냥, 그래서 몸에 배어버린 것마냥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하지수, 송문수, 송승우가 집 안으로 들어가자 허영지와 송기명도 마침 도착해있었다. 나이 드신 분들이라 보름 동안 돌아오지 못했던 집이 그리웠던 허영지와 송기명은 바로 방으로 돌아갔다.아무리 편한 호텔에서 자도 제집만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은 먼저 잠부터 청했다.그리고 송승우도 피곤해해서 하지수는 휠체어를 밀며 그를 방에 데려다주었다.순식간에 혼자 남아버린 송문수는 소파에 앉아 하지수를 기다렸다.원래는 송문수를 데려다주고 나가려 했는데 저에게 할 말이 있다는 하지수 때문에 이렇게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솔직히 하지수가 언제 내려올지는 미지수였기에 송문수는 하지수가 잠에서 깬 다음에 내려올 수도 있다는 최악의 상황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다.그렇게 되면 하루를 꼬박 기다려야 할 수도 있었지만 송문수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듯 보였다.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2층에서 홀로 내려오는 하지수가 보이자 송문수의 심장박동은 저도 모르게 빨라졌다.몸에 힘이 자꾸만 들어가며 뭐가 그렇게 긴장되는지 몸을 가만둘 수가 없었다.하지수가 자연스럽게 송문수의 옆에 자리 잡고 앉기는 했지만 둘 사이에는 아직도 어색한 기류가 감돌고 있었다.부부인데도 부부답지 않았고 가족임에도 가족 같지 않은 둘의 애매모호한 사이 때문이었다.이렇게 보니 제 인생은 참으로 우습기 짝이 없는 것 같아 송문수는 바로 본론부터 꺼냈다.“나한테 할 말 있다며, 뭐야?”송문수는 더 이상의 희망을 품지 않기 위해, 하지수와 한 지붕 아래에서 얼굴을 맞대지 않기 위해,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난 충동적인 적 없어요, 그리고...”하지수가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송승우가 대뜸 소리를 질렀다.“그럼 너 나랑 다시 사귈 수 있어?”터무니없는 그의 말에 하지수는 적잖이 당황했는데 송승우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을 이어나갔다.“네가 내가 아닌 송문수를 좋아한다는 걸 난 못 믿겠어. 난 아직도 네가 그때 내가 말도 떠난 일로 화내는 것 같아. 그러니까 나랑 다시 사귀자. 6개월만 만나보고 그때도 네가 송문수를 선택한다면 나도 깔끔하게 포기할게.”하지수는 자신이 송승우를 다시 좋아할 리 없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가 완벽히 포기해야 끝나는 싸움이었기에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 버렸다.하지수는 이제 송승우와의 이 지긋지긋한 인연에서 벗어나고 싶었다.“좋아요.”하지수가 긍정적인 답을 하자 자신만만했던 송승우의 얼굴에는 바로 미소가 번졌다.자신이 한쪽 다리를 잃긴 했지만 송승우는 그래도 하지수의 사랑을 다시 거머쥘 자신이 있었다.송승우는 단 한 번도 송문수를 제 상대로 여겨본 적이 없었다.그리고 하지수도 바보가 아닌 이상 이렇게 완벽한 저를 놔두고 멍청한 송문수를 선택할 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조건이 하나 더 있어.”“말해요.”“문수랑 이혼부터 해.”“네가 나랑 사귀겠다고 했잖아. 난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수군거리는 게 싫으니까 당당하게 너랑 만나고 싶어.”송승우의 말에 하지수는 입술을 말아 물고 생각에 잠겼다.송문수와의 결혼 관계를 유지하며 송승우와 만나는 건 바람피우는 거랑 다를 바가 없는데 그건 서로에 대한 존중을 깨는 거라서 하지수도 썩 내키진 않았다.“알겠어요.”하지수가 이혼만 하면 저와 재결합을 할 가능성이 더 커지는 것이기에 송승우의 미소는 아까보다 더 선명해졌다.“대신 나도 조건이 있어요.”“뭐든 말만 해.”기분이 좋았던 송승우는 하지수가 제시한 조건을 고민도 없이 받아들였다.송승우는 하지수는 어차피 저 아니면 안 된다고 자신을 하고 있었다....일주일 뒤, 송승우가 퇴원하자 드디어 가족들이 전부
“네.”“회사 일을 이제는 문수가 다 책임지고 있으니까 빨리 가는 것도 맞지, 승우도 많이 좋아졌으니까 이제 매일 간호할 필요도 없잖아.”하지수를 직접 키워온 허영지는 그녀의 기분이 안 좋다는 걸 한눈에 보아낼 수 있었다.그래서 빈말이지만 기분을 조금이라도 풀어주기 위해 애를 썼다.“네.”그런 허영지의 노력을 보아낸 건지 하지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엄마, 아빠도 그동안 고생 많으셨어요. 저 이제 중환자실에서도 나오고 의사 선생님도 별문제 없다고 했으니까 두 분은 먼저 돌아가서 쉬고 계세요. 며칠만 더 있으면 퇴원도 가능하다고 하잖아요.”“그래.”송승우의 상태가 많이 좋아져서 마음을 놓을 수도 있었고 또 지금 하지수와 단둘이 있고 싶어 하는 아들의 속내가 너무 눈에 훤해서 허영지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우린 그럼 먼저 갈게. 지수야, 승우 잘 부탁해. 네가 고생이 많다.”말이야 친절하기 그지없지만 사실은 하지수의 발을 여기 묶어두는 거나 마찬가지였다.“네.”하지수 역시 제 시어머니의 의도를 알지만 거절하지는 않았다.하지수의 대답을 들은 허영지는 마음이 한결 놓여 송기명을 밀며 병실을 빠져나갔다.송기명은 등 떠밀려 나가면서도 끊임없이 한숨을 내쉬었다.상황이 이렇게 흘러가는 데에 대한 불만이 많아 보였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허영지와 송기명이 나간 병실에는 하지수와 송승우 둘뿐이었다.“과일 좀 먹을래요?”“응, 고마워.”하지수가 먼저 그 어색한 정적을 깨며 묻자 송승우도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배를 집어 든 하지수는 열심히 깎기 시작했는데 송승우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한참 지나 껍질을 다 깎아낸 하지수는 배를 작게 썰어 송승우의 앞에 놓아주었다.“천천히 먹어요.”“넌 안 먹어?”“입맛 없어요.”송승우는 입맛 없다는 하지수에게 굳이 권하지 않고 천천히 과일을 먹기 시작했다.도도하고 자신만만하던 송승우의 모습을 다시 본 하지수는 송승우의 말대로 거기에 자신의 공
하지수는 송문수를 따라 송승우의 병실을 빠져나왔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앞을 향해 걷기만 했다.병원 입구에 도착하자 송문수를 기다리고 있는 차량이 보였다.그래도 작별인사는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어 차 문도 열지 못하고 망설이던 송문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결국 그냥 차에 타려 했는데 그 순간 하지수가 그를 불러세웠다.“문수 씨.”“장안시로 돌아가면 서울엔 다시 올 거야?”“안 올 것 같아 아마. 송승우도 많이 나았으니까 얼마 안 있으면 퇴원하겠지. 그럼 엄마 아빠가 송승우 집에 데려가서 보살피려 할 텐데 내가 뭐하러 여기까지 와 힘들게.”“그래서 나 혼자 여기 버려두겠다는 거구나.”하지수가 내뱉은 담담한 한마디에 송문수는 심장박동이 멎는 것만 같았다.숨을 내쉴 수조차도 없이 가슴이 아파와서 그는 이를 악문 채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여전히 침묵만 유지하는 송문수에 마지막 기대도 사라져버린 하지수는 이제 그만 그를 보내주기로 했다.송문수 말대로 자신은 그저 그가 마음을 다잡을 때 마침 옆에 있었던 여자일 뿐이니, 여기서 뭘 더 바라는 것도 욕심인 것 같았다.아무리 노력해봐도 송문수의 마음은 저를 향하지 않으니 하지수는 이제 그와의 사이를 끝내려 했다.“조심히 가.”이렇게라도 서로의 마음을 제대로 확인했으니 하지수는 그거면 된 것 같았다.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아주 많았지만 저 짤막한 한마디만 내뱉고 웃으며 돌아섰다.그 작은 몸통이 외로이 돌아서는 걸 보던 송문수는 가슴이 아파왔다.정말 제가 하지수를 버린 것만 같아서, 또 하지수를 혼자만 남겨둔 것 같아서 가슴이 아려왔다.주먹을 꽉 말아쥔 채 온몸을 떨어대던 송문수는 당장이라도 그녀에게로 달려가 그녀를 품에 안고 싶었다.하지만 그럴 수 없었기에 그는 제 충동을 잠재우며 무거운 발걸음을 내디뎌 결국 차에 올라탔다.하지수에게는 송승우가 있었으니, 그녀는 한 번도 혼자인 적이 없었으니 이번에도 혼자일 리는 없을 것 같아서 그는 미련 없이 돌아서기로 했다.한편 한참을
송승우가 병실을 옮기고 나니 가족들은 그제야 한숨 돌릴 수 있었다.“엄마, 아빠 고생 많으셨어요. 저 걱정하느라 제대로 쉬지도 못하셨죠.”“너만 괜찮을 수 있다면 우린 뭐든 다 할 수 있어.”병원 침대에 누운 채 감성 어린 말을 하는 송승우를 향해 허영지는 감격에 겨워 말했다.허영지는 송승우가 중환자실에서 나온 뒤 정말 많이 변한 것 같았다.더 이상 나쁜 생각은 하지 않고 전과 다름없이 씩씩하게 본인의 생활을 이어나가는 것 같았다.“제가 하루빨리 마음 다잡아서 이제 엄마 아빠 실망시켜 드리지 않을게요.”“넌 한 번도 우릴 실망시킨 적이 없는 애야, 넌 계속 우리의 자랑이었어.”제 손을 잡은 채 저와 눈을 맞추며 말하는 엄마를 향해 송승우도 웃음을 지어 보였다.정말 눈물 나도록 다정한 모자지간이었다.송승우가 병실을 옮긴다는 소식에 병원으로 달려온 송문수도 병실 한쪽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하지만 그들의 대화에는 끼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라이터만 만지작거리는 그는 어쩐지 제 가족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한편 허영지와 대화를 나누던 송승우는 하지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그녀는 아직까지도 간호사에게 자신의 상태를 물어가며 앞으로는 어떻게 재활 치료를 진행해야 하는지에 대해 자세히 묻고 있었다.자신의 일에 이렇게 신경을 써주는 하지수를 보며 송승우는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고마워, 지수야.”“아니에요, 당연한 일인데요 뭘.”“네 덕분에 내가 이렇게 빨리 마음 다잡을 수 있었어. 너 아니었으면 현실을 이렇게 빨리 받아들이진 못했을 거야.”“나 응원해줘서 정말 고마워.”하지수는 결국 그 감사 인사를 받아들인다는 듯 웃어 보이고는 다시 간호사를 보며 디테일하게 보호자로서 해야 할 일들을 물었다.다들 제 자리를 잡은 듯한 모습에 송문수는 그만 병실을 나가려고 몸을 일으켰는데 그때 송기명이 그를 불러세웠다.“문수야, 어디 가?”“장안시로 돌아가야죠 이제.”담담히 말하는 송문수에 송기명은 놀란 기색을 내비쳤다.“지금
허영지의 말에 다들 그녀의 시선을 따라 눈을 돌렸고 그 시선 끝에는 하지수가 서 있었다.하얗게 질린 얼굴로, 멍하니 서 있던 하지수는 송문수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지수야, 여긴 어떻게 왔어?”그런 하지수를 본 허영지는 다급히 그녀에게로 달려갔다.하지수가 송문수의 말을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들었다면 둘 사이에 감정이 있든 없든 마음이 아플 것은 당연지사였기에 허영지는 하지수가 안쓰러웠다.하지수는 굳어버린 고개를 힘겹게 돌리며 허영지를 향해 말했다.“일어나보니까 호텔에 아무도 없어서 왔어요.”눈 떠보니 사라져버린 송문수에 빠르게 병원으로 달려온 거지만 혹시나 송문수가 자신의 몸 상태를 걱정하며 오지 말라고 말릴까 봐 연락은 하지 않았었다.하지만 송문수가 또다시 허영지와 싸울까 봐 말도 없이 온 건데, 오자마자 하지수는 송문수가 내뱉는 차가운 말들을 모조리 들어버린 것이다.저를 물건 취급하며 송승우에게 넘겨주겠다는 송문수의 말에 하지수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이제 좀 달라진 줄 알았는데, 송문수한테 저는 여전히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란 걸 이렇게 알게 될 줄은 몰랐는데...모든 게 다 저 혼자만의 착각인 것 같아 하지수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차올랐다.“아직도 많이 피곤해서 전 이만 호텔로 돌아가 볼게요.”그래서 그녀는 빠르게 고개를 돌리며 병원을 나섰다.자신들에게 우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등을 돌리는 하지수를 보며 허영지 역시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하지수가 친딸은 아니었지만 어릴 때부터 같이 키워왔던 아이였기에 허영지는 그녀를 친딸 이상으로 아껴주었다.부모도 잃은 아이가 저렇게 충격받은 모습으로 자리를 뜨는 게 가슴이 아팠지만 허영지는 끝내 송문수 더러 하지수를 위로하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허영지는 이번에도 이기적이게 송승우를 위해 송문수를 희생시킨 것이다.송승우가 나을 수만 있다면 송문수와 하지수 사이에는 아무 감정도 없다는 그 말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하지만 송기명은 그런 아이들을 두고 볼 수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