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고 싶은 게 이것뿐인가요?”안나는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안 그러면요? 저는 다른 사람들에게 억지로 뭔가를 시키는 사람이 아니에요.”송문수는 그녀들과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며 웃었다.안나와 그 옆에 있던 세 명의 여성들은 각자 하나씩 크레지에 대한 정보를 흘렸다.“크레지 매니저님은 정말 가정을 중요하게 여기는 분이세요. 아내와 두 명의 귀여운 아들이 있고 매년 가족끼리 여행을 떠나셔요.”“크레지 매니저님에게 특별한 취미는 없는 것 같아요. 회사에서 그런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거든요. 술이나 회식을 좋아하지도 않아요. 회사에서 일을 마치면 집으로 돌아가요. 가정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시거든요.”“집이... 어디냐고요?”안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연락처를 남겨주세요. 제가 정확한 위치를 보내드릴게요.”송문수는 즉시 그녀와 연락처를 교환했다.하지수는 그 옆에서 송문수를 지켜보았다.그녀가 평생 본 것 중에서 가장 많이 웃고 있는 것 같이 느껴졌다.한 끼 식사를 마친 후, 송문수는 계산을 하고 그녀들에게 택시까지 불러주었다.“좋아, 내일 크레지 집으로 가면 돼.”송문수는 안나가 보내준 주소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그러자 하지수가 옆에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택시에 타서 호텔로 돌아가고 있었다.송문수는 기분이 좋아서 혼자서 노래를 흥얼거렸다.하지수의 기분이 안 좋은 건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말이다.그는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하지수에게 물었다.“지수야, 내일 크레지 집에 갈 때 작은 선물이라도 하나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응?”“크레지는 가정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니까 아내와 아이들을 위한 선물을 준비하는 게 좋을 것 같아.”송문수는 생각을 정리하며 말했다.“응.”“내일 가서 가방 하나 고르고 아이들을 위해 총이나 자동차 같은 장난감을 사자.”송문수는 이미 결심한 것 같았다.“응.”그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고 호텔에 도착할 때까지도 한참을 떠들었다.하지수는 송문수가 이렇게 말이 많
두 사람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 없이 눈앞에 놓인 음식을 먹고 있었다.‘지수가 별로 먹지 않길래 나도 일부러 먹지 않은 거라는 걸 알고는 있을까? 내 속도 모르면서... 호텔로 돌아와서 같이 먹으려고 한 건데 고마워하긴커녕 내가 여자를 꼬신다고 말하다니...’‘내가 여자를 꼬신다고? 내가? 꼬시지 않아도 알아서 들러붙는데 내가 누굴 꼬신다고 그러는 거야? 내가 손에 넣고 싶은 사람은 지수뿐인데...’스테이크를 다 먹고 나서 두 사람은 각자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내일 중요한 일이 있었기에 서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각자 방에 들어가 쉬었다.송문수처럼 늦게 자는 것에 익숙한 사람도 오늘은 어쩔 수 없이 일찍 잠에 들어야 했다.다음 날 아침, 하지수가 막 일어났을 때 송문수는 이미 정장을 차려입고 거실에 앉아 있었다.“벌써 일어났어?”하지수는 깜짝 놀라며 말했다.“지금 7시인데...”“책임지고 이 일을 해결해야 하는데 늦잠을 자면 안 되지.”송문수가 말했다.“이거 맞지? 크레지랑 얘기할 때 필요한 서류 말이야. 미리 알아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내가 전문적이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니까.”서류를 들고 소파에 앉아 진지한 표정으로 읽고 있는 송문수를 보며 하지수는 이렇게 생각했다.‘내가 아는 문수 씨 맞아? 사람이 이렇게 변할 수도 있는 건가? 진짜 정신을 차린 거라고?’“내가 잘생긴 건 나도 알지만 그렇게 계속 쳐다보면 나도 일에 집중하기 어려운데...”송문수는 서류를 보면서 이렇게 말했다.하지수는 사색에서 벗어나 급하게 화장실로 가서 세수를 했다. 그녀는 옷을 갈아입고 화장도 했다. 준비를 끝내자 룸서비스로 아침이 배달된 것이었다.송문수와 하지수는 간단히 아침을 먹고 바로 매장으로 향했다.송문수는 아주 진지하게 선물을 고르고 있었다. 계속해서 직원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말이다.그는 여자들이 무엇을 좋아하는 지 꽤 잘 아는 듯했다. 여자를 많이 만나본 그가 여자들의 취향을 모를 리 없지만 말이다.하지수는 속이 쓰려왔다.
하지수는 멍하니 송문수 뒤를 따라 걷고 있었다.‘내가 가방을 구경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으면서... 신경조차 쓰이지 않는 건가?’두 사람은 차를 타고 곧바로 크레지의 집으로 향했다. 크레지의 집은 교외에 있었는데 아주 큰 별장이었다.그날은 날씨도 좋았기에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았다.하지수는 잠시 감탄하며 말했다.“나이가 들면 이렇게 한적한 곳에서 좋아하는 사람과 같이 살고 싶어”“너 이런 곳 좋아해?”송문수가 살짝 이해가 안 된다는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아주 조용한 곳이었기에 저녁이 되어도 느낌이 나지 않았다.하지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냥 말해본 거야.”송문수가 이런 곳을 좋아하지 않을 거라는 것쯤은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번잡한 곳을 좋아하는 사람이었으니 말이다.두 사람은 별장에 도착했다. 그들은 자로 초인종을 눌렀다.하우스키퍼가 문을 열고 나와서 무슨 일인지 묻더니 다시 안으로 들어가 확인을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렸고 하우스키퍼가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별장 안에는 넓고 푸른 잔디밭이 펼쳐져 있었다.아이 두 명과 강아지 두 마리가 잔디밭을 뛰어다니고 있었고 정원사들이 나무를 다듬고 있었다.그 모습은 따뜻하고 조화로워 보였다.두 사람은 하우스키퍼를 따라 거실로 들어갔다. 소파에는 크레지와 그의 아내인 쥴리가 앉아 있었다.두 사람은 송문수와 하지수를 웃으면서 맞이했지만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감정은 아닌듯했다.가족끼리 보내는 시간이었기에 방해받는 게 싫은 것이었다.그저 예의상 들어오라고 한 것이었다. 그들은 서로 인사를 나누고 몇 마디를 주고받았다.크레지가 바로 말을 꺼냈다.“저는 금융 기술에 큰 관심이 없습니다. 사실 지금 건강이 좋지 않아서 휴식을 취하고 있어요. 그러니 지금은 손님을 접대하거나 일적인 이야기를 하기는 좀 불편합니다.”“저희가 방해를 했네요. 죄송합니다.”송문수가 서둘러 말했다.“그럼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 회사의 기획안입니다. 시간이 되실 때 봐주
하지수는 옆에서 지켜보며 마음이 조급해졌다.‘좀 양보해 주면 좋을 텐데... 두 아이들과 사이가 좋아지면 크레지도 마음이 누그러질 수도 있잖아... 그러면 협력 제안을 받아들일 수도 있을 거고. 왜 이렇게 승부욕이 강한지...’하지수는 그저 속으로 답답해하고 있었다.그때, 그녀는 크레지와 쥴리가 문 앞에서 이 장면을 보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두 아이는 드디어 송문수에게서 공을 빼앗았다. 하지수는 아이들이 골을 넣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송문수가 다시 그 공을 빼앗는 것이었다.그중 한 아이는 거의 눈물을 터뜨릴 것 같았지만 끝까지 참으면서 공을 쫓았다. 다른 아이도 송문수를 뒤쫓았다.세 사람은 잔디밭에서 뛰어다녔고 강아지 두 마리도 같이 달아 다니고 있었다. 그 장면을 보고 있으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송문수가 다시 골을 넣으려고 시도했다. 그때, 한 아이가 빠른 속도로 송문수의 공을 빼앗아 가는 것이었다.송문수는 순간 공을 놓쳐버렸고 아이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공을 골대로 차 넣었다.하지수는 기뻐서 환호를 터뜨렸고 크레지와 쥴리도 두 아이에게 박수를 보냈다.두 아이는 신이 나서 펄쩍 뛰며 기뻐했다. 아이들의 행복은 정말 순수한 것이었다.송문수는 그들을 격려하며 말했다.“잘했어. 대단한데? 하지만 약속한 10분이 다 돼서 이만 가봐야 될 것 같아.”“꼭 가야 돼요?”두 아이는 아쉬움이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응, 가야 돼. 두 사람 모두 정말 멋졌어. 계속 열심히 훈련해야 돼, 알겠지?”“그럼 또 만날 수 있을까요?”“인연이 있으면 또 만나게 되겠지.”송문수는 하지수에게로 다가가 외투를 받아 들고 대문으로 향했다. 하지수는 그 뒤를 따랐다.두 사람이 대문에 다다랐을 때, 하우스키퍼가 급히 따라왔다.“송문수 씨.”“크레지 씨랑 부인께서 점심을 함께 하자고 초대하셨어요.”하지수는 놀라운 표정으로 송문수를 쳐다봤다. 송문수 역시 기쁜 표정을 숨길 수 없었다. 둘은 서
하지수는 제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그녀는 이제서야 송문수가 왜 공을 넘겨주지 않았는지, 왜 아이들에게 골을 못 넣게 했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된 듯했다. 그는 아이들에게 노력한 뒤에 얻는 기쁨을 느끼게 하려고 했던 것이다.하지수는 자신이 항상 송문수를 부정하려는 습관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송문수는 두 아이와 한참 동안 축구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크레지가 독촉해서야 두 아이는 아쉬워하면서 잔디밭을 떠났다. 그러면서 두 아이는 이렇게 묻곤 했다.“또 같이 축구할 수 있나요?”송문수는 먼저 크레지가 준비한 방에서 씻고 나왔다. 땀에 젖은 채로 일을 하기는 불편했기 때문이었다. 씻고 나오니 그는 아주 깔끔한 모습이었다.점심 식사도 이미 준비되었기에 두 사람은 바로 함께 앉아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두 아이는 송문수가 그렇게 좋은지 식사 중에도 계속 말을 걸며 이야기를 나눴다.송문수도 그들의 질문에 인내심을 가지고 잘 대답해 주었다.점심 식사를 마치고 나서도 두 아이는 여전히 송문수 주위를 떠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쥴리의 손에 이끌려 방으로 갔다.아이들이 떠나자 거실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크레지는 송문수와 하지수를 서재로 안내했다.그는 바로 그들의 협력 제안을 꺼내며 말했다.“아까 기획안을 살펴봤거든요. 그러니까 기술 투자를 원하시는 거죠? 제가 독단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건 아니라서 바로 답할 수는 없어요. 제 회사에서 무슨 결정을 하든 제가 혼자 하는 게 아니니까요. 두 분도 제가 아닌 저희 회사와의 협력을 원하시는 거잖아요.”“물론입니다. 갑작스럽게 크레지 씨의 직업 계획을 함부로 바꾸고 싶지도 않고요.”송문수가 재빨리 답했다.“휴가가 끝나면 회사 분들과 논의한 후에 결정을 내리겠습니다. 하지만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아요. 제안을 살펴보니까 두 분이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하고 계시는지 알 것 같거든요. 또 저희 회사도 전부터 해외 시장에 진출할 생각을 하고 있었거든요. 하지만 직접 지사를 세우는 건 회사에 부담이 너무 크더라고
하지수는 창밖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사실 송문수에게 그렇게 큰 기대를 할 필요는 없었다.그는 원래부터 세심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기에 조금이라도 변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앞으로 같이 보낼 시간이 많으니까 말이다.두 사람은 호텔로 돌아와 짐을 챙긴 후 공항으로 향했다. 약 10시간의 비행을 거쳐 밤이 될 때에야 두 사람은 귀국했다.그들은 귀국하자마자 바로 병원으로 갔다.송기명은 중환자실에서 일반 병실로 옮겨졌다.두 사람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 송기명은 마침 밥을 먹고 있었는데 병실 안에는 송승우도 있었다.그도 아마 금방 서울에서 일처리를 끝내고 돌아온 모양이었다.송문수와 하지수를 본 송승우가 무표정으로 말했다.“아직 아버지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도 않았는데 출국해서는 몇 날 며칠씩 돌아오지도 않다니... 정말 간도 크지.”송문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송승우가 뭐라 하든 그저 무시해 버렸다. 송승우도 눈치챘지만 그는 송문수가 자신에게 어떤 태도를 보이든 상관없었다. 송승우에게 놓고 말해서 송문수는 어차피 자기보다 못한 사람이기 때문이었다.그러자 하지수가 설명했다.“어머님과 아버님 허락을 받고 출국한 겁니다. 지금 회사 상황이 불리한 상황이라서 문수 씨랑 저는 해외에서 회사를 살릴 수 있는 길을 찾고자 했어요. 회사가 다시 일어날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죠.”하지수는 자신도 모르게 송문수의 편을 들었다. 그녀는 점점 송승우가 송문수를 막 대하고 그에 대해 안 좋게 말하는 게 점점 불편해졌다.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요?”송승우가 비꼬며 말했다. 하지수가 송문수의 편을 드는 바람에 그는 점점 더 짜증이 났다. 전에는 하지수가 자기 편을 들었던 것 같은데 이제는 점점 자기한테 관심을 두지 않는 것 같아서 심술이 난 것이었다.하지만 하지수가 이렇게 나올수록 송승우는 오히려 더 그녀를 되찾고 싶어졌다. ‘하지수는 원래부터 내 편 아니었어?’그녀는 참을성 있게 말했다.“회사를 운영하는 건 시간이 필요
“내가 언제 지수 씨한테 가스라이팅을 했다고 그래? 송문수, 말 좀 조심해서 해.”송문수 말을 들은 송승우는 더욱 화가 났다.창피해서 화가 난 건지, 기분이 안 좋아서인지, 그는 평소와 다른 모습으로 화를 내고 있었다.송문수가 입을 열기도 전에 송기명이 단호한 말투로 말했다.“그만해!”“나이가 얼마인데 만나자마자 또 싸우냐? 문수야, 그래도 승우 네 형이야. 너도 좀 배려할 줄 알아야지.”송문수가 냉소를 지었다.어렸을 때부터 늘 이런 식이었다. 송승우와 싸울 때면 부모님들은 언제나 송승우 편을 들었다.어느 한 번은 송문수가 집 정원에 있는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고 있었는데 그 소리가 공부에 방해가 된다고 송승우가 송문수더러 수영을 그만두라고 했던 적도 있었다.하지만 수영 대회가 있어서 연습을 해야 했던 송문수는 그 말을 듣지 않았다.결국 송승우는 부모님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그로 인해 송문수는 부모님에게 수영을 금지당했다. 송승우의 공부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만으로 말이다.송문수는 대회 준비를 해야 한다고 반박했지만 부모님은 그를 무시했다.“수영 대회는 그렇게 중요한 대회가 아니잖아. 승우 공부가 더 중요하지.”그때부터 송문수는 수영을 그만두었다.부모님이 그때 상황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그가 수영을 하지 않는 이상 송승우의 공부에 방해되지 않을 것이니 말이다.사실 송승우가 창문을 닫기만 해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문수는 말없이 참아야 했다.어렸을 때나 지금이나 다들 결국 송승우를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송승우는 송씨 가문의 자랑이었고 송문수는 언제나 뒷전이었다.아무리 열심히 하고 잘한다고 해도 칭찬 한마디 듣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송승우가 하는 말은 언제나 맞았고 그가 하는 말은 언제나 틀렸다.송문수는 몸을 돌려 병실을 떠나려 했다. 변명을 늘어놓고 싶지도 않았고 그들과 싸우고 싶지도 않았다.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병실에 남아있는 송기명은 얼굴이 시퍼렇게 변할 정도로 화가 나 있었다.하지만 송승우는 옆에서 계속 불난 집에 부채질을 했다.“문수 철 든 거 맞아요? 아직도 저렇게 다른 사람 감정을 생각해 주지 않아서 되겠어요? 다른 건 다 제쳐둔다고 해도 지금 아버지께서 병원에 누워 계시는데... 그런데도 이렇게 짜증 낸다고요? 어떻게 몇 년 동안 아무 발전도 없을까요?”그 말을 들으면서 송기명은 점점 더 화가 나서 얼굴이 더욱 굳어져 갔다.그때, 허영지가 옆에서 말을 했다.“승우야, 그만해.”송승우는 자기도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저도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어쩌겠어요? 사실이잖아요. 제가 없는 말을 지어냈나요?”허영지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듯 다시 말했다. “그만해.”그녀의 말투에는 분명 짜증이 섞여 있었다.그 말을 들은 송승우도 알겠다는 듯 입술을 다물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때, 허영지가 말을 꺼냈다.“승우야, 방금 의사 선생님께 물어봤는데 네 아버지 상태도 많이 괜찮아 졌다고 하더라고. 큰 문제는 없다고 하셨어. 그냥 안정을 취하는 게 중요하다고 하시더라. 너 하루 종일 바쁘니까 계속 아버지 옆에 있을 필요 없어. 내가 여기서 네 아버지랑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마.”“아버지 정말 괜찮은 거예요?”송승우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많이 좋아졌어.”송기명은 고개를 끄덕였다.“너희 어머니가 너무 걱정해서 탈이지. 너희 어머니만 아니었으면 나는 벌써 퇴원할 수도 있었어.”“퇴원은 무슨... 건강이 제일 중요한 거잖아요. 회사 일 걱정하지 말고 그냥 치료에 집중하세요.”송승우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알겠어.”송기명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전 먼저 갈게요. 무슨 일이라도 있으면 언제든지 전화하시고요. 바쁘지만 않으면 자주 들를게요.”“너도 몸 잘 챙겨.”허영지는 아들을 걱정하며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부모님께서 걱정하지 않게 잘 지낼게요.”송승우는 이런 말을 남기고 병
예수진의 말에 정곡을 찔린 듯 소이연은 얼굴을 붉혔다.“거봐요, 오빠는 내가 제일 잘 안다니까. 그냥 겉으로만 멀쩡해 보이는 거예요.”소이연의 반응에 예수진은 득의양양해 하며 말을 이어나갔다.“겉으로는 차가워 보여도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아주 대범해지는 사람이거든요. 언니는 이제 오빠의 넘치는 사랑을 받을 일만 남았네요, 물론 침대 위에서요.”“그만 해요 수진 씨.”신나서 얘기하는 예수진에 못 말린다는 듯 웃던 소이연이 그녀를 타박하듯 말했다.“태교하는 사람이 자꾸 그런 생각 하면 어떡해요?”“아직은 그냥 핏덩이라서 아무것도 몰라요.”“...”“지수야, 너는 요즘 뭐 하고 지내? 평소에 문자 보내도 답장 늦게 하던데.”말을 하던 예수진은 임신한 뒤로 아무것도 못 하게 하는 계지원 때문에 요즘 부쩍 재미없어진 일상을 떠올리고는 서러운 듯 입술을 삐죽였다.“그냥 회사일 처리하고 있었지. 얼마 전에 경영에 문제가 생겨서 회사 부도날 뻔했거든. 그래서 문수 씨랑 일 처리만 했어.”“송문수?”“걔가 회사 일을 한다고?”송문수가 일한다는 소리에 예수진은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그래, 안 믿길 거 아는데 진짜니까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문수 씨 정말 많이 변했어, 더 이상은 맨날 놀러만 다니던 망나니 아니야. 이번에도 문수 씨 덕분에 송씨 집안이 다시 일어서게 된 거야. 그리고 이연 언니랑 현경 씨도 많이 도와줬고.”하지수는 곧바로 소이연을 보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정말 고마워요 언니, 언니랑 형부 도움 아니었으면 저희 집안은 진작에 끝났을 거예요.”“아니에요, 별로 힘든 일도 아니었는데요 뭘.”“현경이가 안 그래도 문수 씨 많이 변했다는 말 하더라고요. 밤에도 전화해서 기획서 어떻냐고 물어볼 정도로 열정적이래요.”“진짜 그렇게나 많이 변했다고요?”소이연까지 긍정하자 예수진은 눈을 크게 뜨며 하지수를 바라봤다.“네가 바꾼 거야?”“내가 그 정도는 아니야. 그냥 나이가 점점 드니까 본인이 알아서 바뀐 거겠지.”“송문수가 바뀐 뒤
그래서 하지수는 이를 악문 채로 따져 물었다.“문수 씨, 당신 형이 올린 인스타 봤어?”자신이 송승우를 이긴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었는데 갑작스레 인스타를 언급하는 하지수에 송문수는 자연스레 핸들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안 그래도 거슬렸는데 하지수의 저 질문은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격이었다.“그걸 봤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아?”“응, 괜찮아. 그냥 인스타일 뿐인데 뭘 신경 써.”자신이 송승우를 선택할까 봐 두려워하는 모습이 조금도 보이지 않자 하지수는 조금 실망했지만 그래도 괜찮은 척 말했다.“신경 안 쓴다니 다행이지만 그래도 당신 아내로서 해명할게. 나랑 송승우 씨는 아무 사이도 아니야.”아무 사이도 아니라니, 둘이 얼마나 뜨거운 사랑을 나눈 사이였는지 온 집안사람들이 다 아는데 저런 말을 하는 하지수가 어이없었지만 송문수 본인도 뭐 그다지 깨끗한 사람은 아니었기에 그는 자신도 하지 못한 것을 하지수에게 요구할 자격은 없다 생각해서 입을 다물었다.하지수는 송승우를 진짜 사랑한 거였지만 자신은 그저 다른 여자들을 갖고 논 것이기에 더 따질 권리가 없는 것 같았다.“오늘 어머니랑 같이 쇼핑가기로 했는데 송승우 씨가 먼저 따라가겠다고 한 건 맞아. 나랑 어머니도 거절하기 힘들어서 같이 오긴 했는데 나는 송승우 씨랑은 말도 안 섞었어. 거리도 엄청 많이 뒀고 못 믿겠으면 어머니한테 물어봐도 돼.”하지수의 해명을 듣고 있던 송문수는 오로지 저를 위해 저렇게 자세히 상황설명을 해주는 건가 싶어 또 가슴이 벌렁거리기 시작했다.그녀의 작은 행동에 또 흥분한 송문수는 운전에 집중할 수가 없어 애써 심호흡을 하며 정면을 주시했다.“내가 선택한 사람은 당신이니까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한테 진심일 거야. 당신한테 미안한 짓은 절대 안 해.”하지수의 약속에도 송문수는 꿈쩍도 안 했지만 하지수는 둘 사이의 작은 오해가 큰 불화로 번지지 않게 하려고 아무런 반응이 없어도 상황설명을 마쳤다.제 할 일을 마친 하지수는 안광이 사라진 눈으로 차 시트에 기대 있었
송문수는 애초에 쉽게 만족하는 사람이었기에 하지수가 조금만 잘해주면 한동안 기뻐했다.둘의 웃는 모습을 지켜보던 허영지도 흐뭇하게 그들을 지켜보며 이렇게 사이좋은 둘이라면 걱정할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지수 데리고 밥 먹으러 가려고 온 거라고 했지?”“네.”“옷도 다 입어봤으니까 얼른 가봐.”데이트하러 가라는 말만 안 했지 사실 허영지는 그 둘에게 오붓한 공간을 마련해주고 싶었기에 서둘러 둘의 등을 떠밀었다.“어머니는요, 저녁 어떻게 하시려고요?”“승우 집에 있잖니. 승우랑 같이 쇼핑 좀 더 하면서 네 시아버지 옷 좀 더 보려고. 내 걱정 말고 얼른 가봐.”송승우는 당연히 내키지 않았지만 어머니가 말도 다 뱉은 마당에 거절하기도 쉽지 않아 그저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그럼 차 키는 두고 갈게요.”“저랑 문수 씨는 이만 옷 갈아입을게요.”옷을 갈아입은 둘은 손을 잡고 쇼핑몰 밖으로 나갔고 그 둘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송승우는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승우야.”송승우는 갑자기 들리는 어머니의 부름에 다급히 표정을 감추었지만 허영지는 이미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안다는 듯이 말했다.“그때 너랑 지수 사이 우리도 다 알아. 하지만 너희 둘은 이미 끝난 사이고 지수랑 문수가 저렇게 잘 지내니까 이제는 너도 형으로서 축복해줘야 하지 않겠니?”송승우도 물론 어머니의 의도를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그 옛날 하지수가 좋아하던 건 분명 자신이었는데, 그때의 제삼자인 송문수가 하지수를 채가는 게 송승우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말을 마친 허영지는 이만 옷을 갈아입으러 피팅룸으로 들어갔다.송승우도 성인이었기에 조언도 적당히 해야지 선을 넘으면 그냥 가족 사이의 불화만 생길 것이기에 허영지도 여기서 멈춘 것이었다.하지만 어릴 때부터 송문수에게 져본 적이 없던 송승우는 이번에도 제 여자를 그에게 내어주고 싶지 않아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며 주먹을 꽉 쥐었다....송문수의 차에 앉은 하지수는 처음으로 저를 데리러 온 송문수에 못내 기분이 좋
하지만 원체 쇼핑을 싫어하는 송문수의 성격을 알고 있던 하지수는 그의 냉담함에 실망하지 않았다.이렇게 앉아서 옷을 갈아입는 저를 봐주는 것도 그의 노력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문수 왔구나.”허영지의 부름에 송문수가 짤막하게 답했다.“좀 있다 모임 있어서 지수 데리러 왔어요.”“그래, 젊은 사람들이야 그런 모임에 나가면 좋지.”전에는 송문수가 밖에 나가겠다고 하면 거절은 안 해도 표정은 굳어지던 허영지가 너그럽게 대꾸하는 것도 의외였다.“아직 이르니 너도 정장 한번 입어보고 가.”“바로 가야 되는데 갈아입기 귀찮아요.”“얼른 갈아입어.”“엄마, 나 온종일 일해서...”“지수가 너 준다고 한참 고른 건데 와이프 위해서 그 정도도 못 해줘?”남녀 사이에 있어서는 목석같기만 한 제 아들을 보며 허영지가 미간을 찌푸렸다.엄마의 말을 들은 송문수가 하지수를 바라보자 하지수는 다급히 말했다.“잘 어울릴 것 같아서 고르긴 했는데 갈아입기 싫으면 그냥 보기만 해. 맘에 들면 당신 사이즈로 맞출게.”“입어볼게, 맘에 안 들 수도 있으니까.”송문수가 하도 담담하게 대답해서 떨리는 그의 손가락을 주의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사실 그는 하지수가 자신을 위해 옷을 골라줬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 놀라는 중이었다.기쁜 마음 반 당황스러움 반으로 옷을 갈아입은 송문수가 나오자 직원들은 일제히 그를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너무 잘 어울리세요, 손님 더 멋있어 보이는 것 같아요.”“진짜요?”송문수가 직원들의 말을 반신반의하자 하지수가 나서며 말했다.“진짜야. 진짜 너무 멋있다.”“그래?”하지수의 확신에 찬 대답을 들은 송문수는 흘러나오는 웃음을 감추지 못하고 득의양양해 하며 대꾸했다.“다 내가 잘 생겨서 그런 거야. 옷이랑은 큰 상관 없지.”이렇게 가끔 자아도취 하는 송문수를 보며 하지수는 웃음을 터뜨리더니 그에게로 다가가 넥타이를 정리해주었다.그 둘의 다정한 모습을 보던 주위 사람들은 다들 흐뭇한 미소를 지었지만 송승우만은 아주 언짢아하
생일파티에 관한 일을 다 의논한 뒤 하지수는 허영지와 함께 그녀의 드레스를 맞추러 갔는데 하지수의 드레스도 같이 맞추자는 시어머니의 권유에 그녀도 옷을 입으로 들어가게 되었다.그래서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것인데 하필 그때 송승우가 송문수의 전화를 받게 된 것이다.옷을 다 입어보고 나서도 시어머니와 쇼핑을 하느라 굳이 핸드폰을 보지 않았던 하지수는 송문수에게서 연락이 온 줄도 모르고 있었다.다시 한번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을 때 송승우가 이번에도 자신이 받으려고 했는데 하지수가 그걸 보고 빠르게 핸드폰을 낚아채 갔다.그녀의 행동에 표정이 굳어버렸던 송승우는 이내 송문수가 자신이 올린 인스타를 봤을 생각에 다시 입꼬리를 올리며 시선을 신문에 고정한 채 둘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문수 씨.”송문수의 이름을 부르는 하지수의 목소리에는 기대와 반가움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잠시 떨어져 있던 연인이 재회할 때나 나올법한 목소리에 송승우의 표정은 한층 더 어두워졌다.“아직도 바빠?”“어머니 모시고 드레스 피팅해보고 있었어. 지금은 디자이너님이랑 디테일 얘기하고 있어. 나도 아까 하나 입어봤는데 사진 보내줄게.”“지금 데리러 갈 건데 어디야?”잔뜩 신나서 말하던 하지수는 이제 고작 4시밖에 안 됐는데 퇴근했다는 송문수가 의아하여 놀라며 물었다.“퇴근했어?”“주말이라서 일찍 퇴근했어.”“회사도 좀 안정돼서 직원들도 앞으로 주말은 다 쉬기로 했어.”“그래.”고개를 끄덕이며 주소를 불러준 하지수는 웃는 얼굴로 전화를 끊고는 허영지에게로 다가갔다.하지만 송문수와 하지수가 싸울 것이라 예상했던 송승우는 화도 내지 않는 송문수에 혹시 그가 하지수를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하지만 사실 송문수는 인스타를 보자마자 차오르는 화에 핸드폰을 손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꽉 쥐고 있었다.다른 사람이 채갈까 봐 하지수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심정이 굴뚝같은데 그런 그녀가 옛날에 좋아하던 송승우와 함께 있는 걸 본 이상 그는
결국 송승우에게 차 키를 내어준 하지수가 허영지와 함께 밖으로 나간 뒤 자연스레 뒷좌석에 타려 하는데 송승우가 갑자기 그녀를 불러세웠다.“지수야, 넌 앞에 타.”“어머니랑 같이 앉을게요.”“장안시에 길은 나도 잘 몰라서 알려줄 사람이 필요해.”단호한 그의 말을 하지수가 거절하기 어려워하자 허영지가 나서며 말했다.“그럼 내비게이션 켜. 바로 윌런 호텔로 갈 거야, 호텔 사장이랑 얘기 다 끝나서 아마 우리 기다리고 있을 거야.”말을 마친 허영지는 또 일부러 하지수를 보며 말했다.“지수는 나랑 같이 타자, 말동무해줘.”“네, 어머니.”제 옆에 앉지 않아도 된다고 저렇게 입이 귀에 걸린 채로 좋아하는 하지수를 보며 송승우는 표정을 굳힌 채로 운전석에 올라탔다.그렇게 내비게이션을 켜고 윌런 호텔로 출발하자 허영지가 하지수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지수야, 어제 내가 한 말 그냥 흘려듣지 말고 잘 생각해봐.”“무슨 말이요?”“너랑 문수 아이 얘기 말이야.”“아, 네.”“그냥 대답만 하지 말고 노력을 해야 애가 생기지.”허영지가 거리낌 없이 남사스러운 말을 하자 하지수는 얼굴이 빨개진 채로 대답했다.“어젯밤에 문수 씨랑도 얘기했어요.”“문수도 알겠대?”“네.”“그럼 난 그냥 기다리고만 있으면 된다는 말이지?”하지수가 다시 고개를 끄덕이자 허영지는 아주 기뻐하며 말했다.“그럼 나는 할머니 될 날만 기다리고 있을게.”그런 허영지와 반대로 하지수가 송문수의 아이를 낳는 걸 용납할 수 없었던 송승우는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이를 갈고 있었다.윌런 호텔에 도착한 뒤 세 사람은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사장 사무실로 향해 파티 당일의 규모와 배치에 대해 의논하기 시작했는데 이런 비즈니스적인 자리를 포함한 모든 인간관계를 꺼리던 송승우는 얘기에는 참여하지 않고 가만히 자리만 지키고 있었다.그렇게 심심해하던 송승우는 문득 무슨 생각에서인지 핸드폰을 들어 사진을 찍었다.허영지와 하지수도 담긴 사진이었지만 그 둘은 파티 준비에 열과 성을 다하고
“이연 언니가 왔다고?”오랜만에 들려온 소이연의 소식에 하지수는 흥분하며 답했다.“그럼 당연히 가야지, 오랫동안 못 봐서 안 그래도 궁금했는데. 육현경 씨랑 이연 언니가 나 엄청 많이 도와줘서 직접 만나서 감사 인사 하고 싶었어.”“계지원 씨 집에서 모이기로 했어. 예수진 씨 배도 점점 불러서 움직이기 힘드니까 그냥 거기서 보기로 했어.”“그래. 그럼 퇴근할 때 연락해. 나는 먼저 어머님이랑 아버님 생일파티 준비하고 있을게.”“응.”밥을 다 먹은 두 사람은 각자 알아서 집을 나섰고 하지수는 바로 송 씨 가문별장에 시어머니를 모시러 갔다.하지수가 안으로 들어가자 송승우가 소파에 덩그러니 앉아있는 게 보였다.그와 단둘이 만나는 건 아직 어색했기에 하지수도 입을 다물고 있었는데 그런 그녀를 한참이나 바라보던 송승우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엄마 모시러 온 거야?”“네.”“집에 계속 계시는 거예요?”“나갔으면 좋겠어?”헛웃음을 흘리며 묻는 송승우에 하지수가 다급히 해명했다.“아뇨, 그냥 전에는 계속 일로 바쁘셨던 분이 계시니까 물어본 거예요.”“전에는 연구과제 때문에 바빴는데 이제는 나 없이도 잘 돌아가서 한가해.”“아, 네.”고개를 끄덕이는 하지수를 보며 그녀가 저를 불편해하는 걸 느낀 송승우는 올라오려는 화를 참으며 물었다.“문수는?”“출근했어요.”“주말에도 출근해?”“요즘이 회사한테 중요한 시기라서 일요일만 쉬기로 했대요. 내일은 안나가요.”사실 송문수에게는 거의 휴일이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처리해야 할 일이 매일 산더미여서 그는 시간만 나면 사무실에 틀어박혀 있었다.“송문수 많이 변했네.”“송문수가 변해서 너도 걔를 다시 보게 된 거야?”냉소를 흘리며 묻는 송승우에 하지수가 고개를 저었다.“잘 모르겠어요. 감정이라는 게 원래 언제 생겼는지도 모르게 생기는 거잖아요.”감정이라는 건 애초에 기척 없이 생겨서는 헤어나오지 못할 정도로 한 사람을 옭아매는 것이다.하지수의 말로부터 그녀가 이제는 정말로 송문수를
“하지수, 변호사 일할 때는 똑똑하더니 연애에는 영 소질이 없나 봐?”자는 척하고 자신을 놀려먹은 건 송문수인데 오히려 바보라고 핀잔을 듣자 화가 난 하지수가 얼굴을 붉혔다.“네가 나한테 뽀뽀하는 게 좋으니까 계속하라고 가만히 있은 거잖아!”송문수가 언성을 높여 말해서야 이유를 알게 된 하지수는 당황스러운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고 그 표정에 어이가 없어진 송문수는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이렇게 바보 같아서 어떡해, 누가 너 팔아넘겨도 모르겠다.”“누가 누구한테 바보래. 내가 당신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런 생각인 줄 어떻게 알고...”말을 채 끝맺지도 못했는데 갑자기 입을 맞춰오며 진득한 키스를 이어나가는 송문수에 하지수는 눈을 크게 떴다.“아...”아까 자신이 한 건 그저 뽀뽀이지 이렇게 치열을 훑고 지나가는 키스는 아니었는데 입속 깊은 곳까지 뜨겁게 만드는 키스는 옆에서 핸드폰이 울리건 말건 오래도록 지속되었다.송문수도, 하지수도 그 벨 소리를 무시한 채 키스를 이어나가다 둘의 입술이 다 번들번들해질 때가 되어서야 송문수는 아쉬움을 뒤로한 채 하지수를 놓아주었다.송문수의 키스에 정신이 혼미해진 하지수는 나른한 눈빛으로 송문수를 보고 있었는데 핸드폰을 보던 송문수는 갑자기 욕설을 내뱉더니 서둘러 침대에서 내려가 욕실로 달려들어 갔다.그의 샤워 소리가 들릴 때에야 정신을 차린 하지수도 시간을 보자마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변호사 일을 시작하면서 누구보다 규칙적이고 자율적인 일상을 보내왔던 하지수였기에 그녀는 자신이 아주 이성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송문수를 만난 뒤부터 이성보다 감성이 앞서는 사람이 돼버린 것 같았다.그래서 그녀는 송문수가 만약 자신을 팔아넘겨도 그를 도와 돈을 세줄 것 같다는 그의 말에 어느 정도 동의를 하고 있었다.생리대부터 바꾸러 제 방으로 돌아간 하지수가 준비를 마치고 나오자 송문수도 옷을 갈아입은 채로 거실에서 통화를 하고 있었다.평소에는 7시에 일어나서 8시 정도면
말을 마친 하지수는 송문수가 그새 깨어난 지도 모르고 그의 품에 안겨 눈을 감았고 송문수는 다정한 눈을 한 채 떨리는 손으로 제 옆에 누운 하지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이튿날 아침, 눈을 뜬 하지수는 방금 일어난 탓에 낯선 주위를 한참이나 둘러보고서야 여기가 송문수의 방임을 기억해냈다.관계 빼고는 별짓 다 한 어젯밤이 떠오른 하지수는 얼굴을 붉혔다.혼자 자는 게 습관 되어있어 송문수의 품에 안긴 뒤 빨리 뛰는 심장 때문에 뜬눈으로 밤을 새울 줄 알았는데 예상외로 그녀는 눈을 감자마자 잠에 빠져들었다.아마도 바쁜 일정 때문에 피곤했던 것 같다.완전히 정신을 차린 하지수는 고개를 돌려 아직도 곤히 자고 있는 송문수를 바라보았다.자고있는 그의 모습은 평소처럼 차갑지 않고 쫙 펴진 미간 덕분에 오히려 부드러워 보여 공격성이 다분하지도 않았다.왜 눈을 뜬 모습과 감은 모습이 이렇게 다를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 송문수의 얼굴을 찬찬히 보던 하지수는 날카로운 그의 눈빛을 떠올렸다.전에는 그 눈빛이 마음속을 꿰뚫어 볼 것만 같아 두려웠었는데 지금의 하지수는 더 이상 잠들어있는 송문수도, 깨어있는 송문수도 두렵지는 않았다.한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깨어있는 송문수를 마주할 때는 하지수가 주동적으로 입을 맞출 수 없다는 것뿐이었다.하지만 잠들어있을 때는 그야말로 하지수 세상이었기에 그녀는 빠르게 송문수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한 번으로는 부족했는지 하지수는 그 뒤로도 여러 번 입을 맞추다가 누군가의 핸드폰이 울릴 때가 돼서야 행동을 멈추었다.물론 자의로 멈춘 건 아니고 입맞춤을 하던 와중에 눈을 떠버린 송문수 때문에 도둑이 제 발 저리듯 깜짝 놀라 잠시 멈칫한 것이었다.당황한 하지수는 빠르게 도망가려 했지만 자신을 눌러버린 송문수 때문에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분명 방금 눈을 떴는데 이상하게 송문수의 눈은 반짝반짝 빛이 나고 있었다.몽롱한 느낌은 전혀 없는 눈으로 그는 하지수를 빤히 바라보았고 그의 진득한 눈빛을 당해내지 못한 하지수는 서둘러 눈을 피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