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문수는 멋지게 손을 흔들었고 안나는 세 명의 여성분을 데리고 함께 걸어왔다.송문수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안녕하세요. 저는 송문수라고 해요. 만나서 반가워요.”다들 간단하게 자기소개를 하고 송문수가 안나에게 물었다.“근처에 음식이 맛있는 곳 있나요? 추천 좀 해주세요.”“회사 근처에 쇼핑몰이 있는데 안에 괜찮은 레스토랑이 있어요.”안나가 말했다.“혹시 저도 친구를 데려와도 괜찮을까요?”송문수가 하지수를 소개해 주며 말했다.그들은 여자라는 걸 보고는 바로 좋다고 대답했다.“물론이죠. 괜찮아요.”“그럼 안나 씨, 길 안내 부탁드려요.”그들 일행은 레스토랑으로 향했다.송문수는 TS 그룹의 여직원들과 즐겁게 대화하며 웃고 떠들었고 그 모습을 본 하지수는 입술을 깨물며 약간 불쾌해했다.송문수는 예전에도 송씨 그룹에서 직원들에게 관심을 보였던 적이 있었으니 말이다.‘사람 쉽게 안 바뀐다더니...’하지수는 표정을 굳히고 그들을 따라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송문수는 매우 신사적으로 안나에게 메뉴판을 건넸다.“원하는 거 주문하세요. 뭐든 괜찮아요.”“정말 뭘 시키든 다 괜찮나요?”안나가 물었다.역시 해외라서 그런지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친해졌다.“물론이죠.”송문수는 미소를 지으며 동의했다.여자들은 메뉴판을 받아 들고 흥분한 듯 음식을 주문하기 시작했다.음식이 나오는 동안 송문수는 그들에게 향수 각각 한 병을 건네주었다.여자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그것을 받을지 말지 고민했다.“작은 선물일 뿐이에요. 그렇게 큰 금액도 아니고요.”송문수가 무심하게 말했다.여자들은 결국 유혹을 참지 못하고 향수를 받았다.안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향수를 송문수에게 돌려주며 말했다.“저는 이미 로비에서 하나 받았어요.”“무슨 소리죠? 제가 설마 썼던 걸 안나 씨한테 드리겠어요? 그건 로비에 두라고 준 거예요.”송문수는 이렇게 말하며 웃었다.“안나 씨도 알죠? 로비에는 CCTV가 있으니까 조심하는 게 좋다는 걸요. 나중에 상사에게 물어보
“묻고 싶은 게 이것뿐인가요?”안나는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안 그러면요? 저는 다른 사람들에게 억지로 뭔가를 시키는 사람이 아니에요.”송문수는 그녀들과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며 웃었다.안나와 그 옆에 있던 세 명의 여성들은 각자 하나씩 크레지에 대한 정보를 흘렸다.“크레지 매니저님은 정말 가정을 중요하게 여기는 분이세요. 아내와 두 명의 귀여운 아들이 있고 매년 가족끼리 여행을 떠나셔요.”“크레지 매니저님에게 특별한 취미는 없는 것 같아요. 회사에서 그런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거든요. 술이나 회식을 좋아하지도 않아요. 회사에서 일을 마치면 집으로 돌아가요. 가정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시거든요.”“집이... 어디냐고요?”안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연락처를 남겨주세요. 제가 정확한 위치를 보내드릴게요.”송문수는 즉시 그녀와 연락처를 교환했다.하지수는 그 옆에서 송문수를 지켜보았다.그녀가 평생 본 것 중에서 가장 많이 웃고 있는 것 같이 느껴졌다.한 끼 식사를 마친 후, 송문수는 계산을 하고 그녀들에게 택시까지 불러주었다.“좋아, 내일 크레지 집으로 가면 돼.”송문수는 안나가 보내준 주소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그러자 하지수가 옆에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택시에 타서 호텔로 돌아가고 있었다.송문수는 기분이 좋아서 혼자서 노래를 흥얼거렸다.하지수의 기분이 안 좋은 건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말이다.그는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하지수에게 물었다.“지수야, 내일 크레지 집에 갈 때 작은 선물이라도 하나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응?”“크레지는 가정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니까 아내와 아이들을 위한 선물을 준비하는 게 좋을 것 같아.”송문수는 생각을 정리하며 말했다.“응.”“내일 가서 가방 하나 고르고 아이들을 위해 총이나 자동차 같은 장난감을 사자.”송문수는 이미 결심한 것 같았다.“응.”그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고 호텔에 도착할 때까지도 한참을 떠들었다.하지수는 송문수가 이렇게 말이 많
두 사람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 없이 눈앞에 놓인 음식을 먹고 있었다.‘지수가 별로 먹지 않길래 나도 일부러 먹지 않은 거라는 걸 알고는 있을까? 내 속도 모르면서... 호텔로 돌아와서 같이 먹으려고 한 건데 고마워하긴커녕 내가 여자를 꼬신다고 말하다니...’‘내가 여자를 꼬신다고? 내가? 꼬시지 않아도 알아서 들러붙는데 내가 누굴 꼬신다고 그러는 거야? 내가 손에 넣고 싶은 사람은 지수뿐인데...’스테이크를 다 먹고 나서 두 사람은 각자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내일 중요한 일이 있었기에 서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각자 방에 들어가 쉬었다.송문수처럼 늦게 자는 것에 익숙한 사람도 오늘은 어쩔 수 없이 일찍 잠에 들어야 했다.다음 날 아침, 하지수가 막 일어났을 때 송문수는 이미 정장을 차려입고 거실에 앉아 있었다.“벌써 일어났어?”하지수는 깜짝 놀라며 말했다.“지금 7시인데...”“책임지고 이 일을 해결해야 하는데 늦잠을 자면 안 되지.”송문수가 말했다.“이거 맞지? 크레지랑 얘기할 때 필요한 서류 말이야. 미리 알아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내가 전문적이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니까.”서류를 들고 소파에 앉아 진지한 표정으로 읽고 있는 송문수를 보며 하지수는 이렇게 생각했다.‘내가 아는 문수 씨 맞아? 사람이 이렇게 변할 수도 있는 건가? 진짜 정신을 차린 거라고?’“내가 잘생긴 건 나도 알지만 그렇게 계속 쳐다보면 나도 일에 집중하기 어려운데...”송문수는 서류를 보면서 이렇게 말했다.하지수는 사색에서 벗어나 급하게 화장실로 가서 세수를 했다. 그녀는 옷을 갈아입고 화장도 했다. 준비를 끝내자 룸서비스로 아침이 배달된 것이었다.송문수와 하지수는 간단히 아침을 먹고 바로 매장으로 향했다.송문수는 아주 진지하게 선물을 고르고 있었다. 계속해서 직원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말이다.그는 여자들이 무엇을 좋아하는 지 꽤 잘 아는 듯했다. 여자를 많이 만나본 그가 여자들의 취향을 모를 리 없지만 말이다.하지수는 속이 쓰려왔다.
하지수는 멍하니 송문수 뒤를 따라 걷고 있었다.‘내가 가방을 구경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으면서... 신경조차 쓰이지 않는 건가?’두 사람은 차를 타고 곧바로 크레지의 집으로 향했다. 크레지의 집은 교외에 있었는데 아주 큰 별장이었다.그날은 날씨도 좋았기에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았다.하지수는 잠시 감탄하며 말했다.“나이가 들면 이렇게 한적한 곳에서 좋아하는 사람과 같이 살고 싶어”“너 이런 곳 좋아해?”송문수가 살짝 이해가 안 된다는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아주 조용한 곳이었기에 저녁이 되어도 느낌이 나지 않았다.하지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냥 말해본 거야.”송문수가 이런 곳을 좋아하지 않을 거라는 것쯤은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번잡한 곳을 좋아하는 사람이었으니 말이다.두 사람은 별장에 도착했다. 그들은 자로 초인종을 눌렀다.하우스키퍼가 문을 열고 나와서 무슨 일인지 묻더니 다시 안으로 들어가 확인을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렸고 하우스키퍼가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별장 안에는 넓고 푸른 잔디밭이 펼쳐져 있었다.아이 두 명과 강아지 두 마리가 잔디밭을 뛰어다니고 있었고 정원사들이 나무를 다듬고 있었다.그 모습은 따뜻하고 조화로워 보였다.두 사람은 하우스키퍼를 따라 거실로 들어갔다. 소파에는 크레지와 그의 아내인 쥴리가 앉아 있었다.두 사람은 송문수와 하지수를 웃으면서 맞이했지만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감정은 아닌듯했다.가족끼리 보내는 시간이었기에 방해받는 게 싫은 것이었다.그저 예의상 들어오라고 한 것이었다. 그들은 서로 인사를 나누고 몇 마디를 주고받았다.크레지가 바로 말을 꺼냈다.“저는 금융 기술에 큰 관심이 없습니다. 사실 지금 건강이 좋지 않아서 휴식을 취하고 있어요. 그러니 지금은 손님을 접대하거나 일적인 이야기를 하기는 좀 불편합니다.”“저희가 방해를 했네요. 죄송합니다.”송문수가 서둘러 말했다.“그럼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 회사의 기획안입니다. 시간이 되실 때 봐주
하지수는 옆에서 지켜보며 마음이 조급해졌다.‘좀 양보해 주면 좋을 텐데... 두 아이들과 사이가 좋아지면 크레지도 마음이 누그러질 수도 있잖아... 그러면 협력 제안을 받아들일 수도 있을 거고. 왜 이렇게 승부욕이 강한지...’하지수는 그저 속으로 답답해하고 있었다.그때, 그녀는 크레지와 쥴리가 문 앞에서 이 장면을 보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두 아이는 드디어 송문수에게서 공을 빼앗았다. 하지수는 아이들이 골을 넣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송문수가 다시 그 공을 빼앗는 것이었다.그중 한 아이는 거의 눈물을 터뜨릴 것 같았지만 끝까지 참으면서 공을 쫓았다. 다른 아이도 송문수를 뒤쫓았다.세 사람은 잔디밭에서 뛰어다녔고 강아지 두 마리도 같이 달아 다니고 있었다. 그 장면을 보고 있으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송문수가 다시 골을 넣으려고 시도했다. 그때, 한 아이가 빠른 속도로 송문수의 공을 빼앗아 가는 것이었다.송문수는 순간 공을 놓쳐버렸고 아이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공을 골대로 차 넣었다.하지수는 기뻐서 환호를 터뜨렸고 크레지와 쥴리도 두 아이에게 박수를 보냈다.두 아이는 신이 나서 펄쩍 뛰며 기뻐했다. 아이들의 행복은 정말 순수한 것이었다.송문수는 그들을 격려하며 말했다.“잘했어. 대단한데? 하지만 약속한 10분이 다 돼서 이만 가봐야 될 것 같아.”“꼭 가야 돼요?”두 아이는 아쉬움이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응, 가야 돼. 두 사람 모두 정말 멋졌어. 계속 열심히 훈련해야 돼, 알겠지?”“그럼 또 만날 수 있을까요?”“인연이 있으면 또 만나게 되겠지.”송문수는 하지수에게로 다가가 외투를 받아 들고 대문으로 향했다. 하지수는 그 뒤를 따랐다.두 사람이 대문에 다다랐을 때, 하우스키퍼가 급히 따라왔다.“송문수 씨.”“크레지 씨랑 부인께서 점심을 함께 하자고 초대하셨어요.”하지수는 놀라운 표정으로 송문수를 쳐다봤다. 송문수 역시 기쁜 표정을 숨길 수 없었다. 둘은 서
하지수는 제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그녀는 이제서야 송문수가 왜 공을 넘겨주지 않았는지, 왜 아이들에게 골을 못 넣게 했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된 듯했다. 그는 아이들에게 노력한 뒤에 얻는 기쁨을 느끼게 하려고 했던 것이다.하지수는 자신이 항상 송문수를 부정하려는 습관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송문수는 두 아이와 한참 동안 축구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크레지가 독촉해서야 두 아이는 아쉬워하면서 잔디밭을 떠났다. 그러면서 두 아이는 이렇게 묻곤 했다.“또 같이 축구할 수 있나요?”송문수는 먼저 크레지가 준비한 방에서 씻고 나왔다. 땀에 젖은 채로 일을 하기는 불편했기 때문이었다. 씻고 나오니 그는 아주 깔끔한 모습이었다.점심 식사도 이미 준비되었기에 두 사람은 바로 함께 앉아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두 아이는 송문수가 그렇게 좋은지 식사 중에도 계속 말을 걸며 이야기를 나눴다.송문수도 그들의 질문에 인내심을 가지고 잘 대답해 주었다.점심 식사를 마치고 나서도 두 아이는 여전히 송문수 주위를 떠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쥴리의 손에 이끌려 방으로 갔다.아이들이 떠나자 거실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크레지는 송문수와 하지수를 서재로 안내했다.그는 바로 그들의 협력 제안을 꺼내며 말했다.“아까 기획안을 살펴봤거든요. 그러니까 기술 투자를 원하시는 거죠? 제가 독단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건 아니라서 바로 답할 수는 없어요. 제 회사에서 무슨 결정을 하든 제가 혼자 하는 게 아니니까요. 두 분도 제가 아닌 저희 회사와의 협력을 원하시는 거잖아요.”“물론입니다. 갑작스럽게 크레지 씨의 직업 계획을 함부로 바꾸고 싶지도 않고요.”송문수가 재빨리 답했다.“휴가가 끝나면 회사 분들과 논의한 후에 결정을 내리겠습니다. 하지만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아요. 제안을 살펴보니까 두 분이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하고 계시는지 알 것 같거든요. 또 저희 회사도 전부터 해외 시장에 진출할 생각을 하고 있었거든요. 하지만 직접 지사를 세우는 건 회사에 부담이 너무 크더라고
하지수는 창밖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사실 송문수에게 그렇게 큰 기대를 할 필요는 없었다.그는 원래부터 세심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기에 조금이라도 변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앞으로 같이 보낼 시간이 많으니까 말이다.두 사람은 호텔로 돌아와 짐을 챙긴 후 공항으로 향했다. 약 10시간의 비행을 거쳐 밤이 될 때에야 두 사람은 귀국했다.그들은 귀국하자마자 바로 병원으로 갔다.송기명은 중환자실에서 일반 병실로 옮겨졌다.두 사람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 송기명은 마침 밥을 먹고 있었는데 병실 안에는 송승우도 있었다.그도 아마 금방 서울에서 일처리를 끝내고 돌아온 모양이었다.송문수와 하지수를 본 송승우가 무표정으로 말했다.“아직 아버지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도 않았는데 출국해서는 몇 날 며칠씩 돌아오지도 않다니... 정말 간도 크지.”송문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송승우가 뭐라 하든 그저 무시해 버렸다. 송승우도 눈치챘지만 그는 송문수가 자신에게 어떤 태도를 보이든 상관없었다. 송승우에게 놓고 말해서 송문수는 어차피 자기보다 못한 사람이기 때문이었다.그러자 하지수가 설명했다.“어머님과 아버님 허락을 받고 출국한 겁니다. 지금 회사 상황이 불리한 상황이라서 문수 씨랑 저는 해외에서 회사를 살릴 수 있는 길을 찾고자 했어요. 회사가 다시 일어날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죠.”하지수는 자신도 모르게 송문수의 편을 들었다. 그녀는 점점 송승우가 송문수를 막 대하고 그에 대해 안 좋게 말하는 게 점점 불편해졌다.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요?”송승우가 비꼬며 말했다. 하지수가 송문수의 편을 드는 바람에 그는 점점 더 짜증이 났다. 전에는 하지수가 자기 편을 들었던 것 같은데 이제는 점점 자기한테 관심을 두지 않는 것 같아서 심술이 난 것이었다.하지만 하지수가 이렇게 나올수록 송승우는 오히려 더 그녀를 되찾고 싶어졌다. ‘하지수는 원래부터 내 편 아니었어?’그녀는 참을성 있게 말했다.“회사를 운영하는 건 시간이 필요
“내가 언제 지수 씨한테 가스라이팅을 했다고 그래? 송문수, 말 좀 조심해서 해.”송문수 말을 들은 송승우는 더욱 화가 났다.창피해서 화가 난 건지, 기분이 안 좋아서인지, 그는 평소와 다른 모습으로 화를 내고 있었다.송문수가 입을 열기도 전에 송기명이 단호한 말투로 말했다.“그만해!”“나이가 얼마인데 만나자마자 또 싸우냐? 문수야, 그래도 승우 네 형이야. 너도 좀 배려할 줄 알아야지.”송문수가 냉소를 지었다.어렸을 때부터 늘 이런 식이었다. 송승우와 싸울 때면 부모님들은 언제나 송승우 편을 들었다.어느 한 번은 송문수가 집 정원에 있는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고 있었는데 그 소리가 공부에 방해가 된다고 송승우가 송문수더러 수영을 그만두라고 했던 적도 있었다.하지만 수영 대회가 있어서 연습을 해야 했던 송문수는 그 말을 듣지 않았다.결국 송승우는 부모님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그로 인해 송문수는 부모님에게 수영을 금지당했다. 송승우의 공부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만으로 말이다.송문수는 대회 준비를 해야 한다고 반박했지만 부모님은 그를 무시했다.“수영 대회는 그렇게 중요한 대회가 아니잖아. 승우 공부가 더 중요하지.”그때부터 송문수는 수영을 그만두었다.부모님이 그때 상황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그가 수영을 하지 않는 이상 송승우의 공부에 방해되지 않을 것이니 말이다.사실 송승우가 창문을 닫기만 해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문수는 말없이 참아야 했다.어렸을 때나 지금이나 다들 결국 송승우를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송승우는 송씨 가문의 자랑이었고 송문수는 언제나 뒷전이었다.아무리 열심히 하고 잘한다고 해도 칭찬 한마디 듣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송승우가 하는 말은 언제나 맞았고 그가 하는 말은 언제나 틀렸다.송문수는 몸을 돌려 병실을 떠나려 했다. 변명을 늘어놓고 싶지도 않았고 그들과 싸우고 싶지도 않았다.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는 간호사 하나가 걸어 나오며 말했다.“소이연 씨 보호자 계세요?”“네!”“아기 나왔습니다. 3.15킬로...”“산모는요?”간호사의 말에 우렁차게 대답한 육현경은 아이는 신경도 안 쓰고 소이연의 상태부터 물었다.“산모분은 아주 건강하십니다. 지금 선생님께서 상처 처리하고 계시니까 곧 나오실 겁니다.”“아빠 맞으시죠? 아이 한 번 안아보실래요?”그제야 안도한 육현경이 아이를 안아 들자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오며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어머, 어쩜 이렇게 하얗지? 내가 본 아기들 중에 제일 예쁜 것 같아.”“지금 네 아들은 못생겼다는 소리야?”“솔직히 말하면 좀 못생기긴 했어.”하도경의 시비에 예수진이 너무 솔직히 답하자 계지원이 그게 사실인 걸 알면서도 자기 아들 외모를 저렇게 평가하는 게 썩 기분 좋지는 않았는지 헛기침을 해댔다.“나도 안아볼래.”예수진의 말에 육현경은 바로 아이를 넘겨주었다.“우리 공주님, 너무 귀엽다. 왜 하필 혈연관계인 거야!”피가 섞인 남매라서 자기 아들과 맺어줄 수 없다고 안타까워하는 예수진에 하지수도 궁금해서 다가가 보았다.“나도 봐봐.”가까이에서 보니 정말 떡잎부터 남다른 예쁜 아이였다.장차 아주 예쁘게 클 것 같아서 하지수는 아이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물었다.“딸이야?”“딱 보면 딸이지, 이 얼굴이 남자일 리는 없잖아.”간호사가 대답하려던 그때 분만실 분이 또 한 번 열리고 소이연이 휠체어를 타고 나오자 육현경은 다급히 달려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고생했어.”“이제 돌아가서 쉬자. 우리 이제 아이는 그만 가지자.”소이연이 고생하는 게 마음 아팠던 육현경은 잔뜩 굳은 얼굴로 간호사에게서 휠체어를 받아 병실로 향했다.친구들도 그런 육현경을 따라 병실로 향하고 있었는데 성큼성큼 걷던 하지수가 휑한 옆자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송문수가 아직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왜 움직이지 않는지 의아해진 하지수가 그를 바라보자 송문수가 그녀와 시선을 맞추며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뭐라고요?!”놀란 예수진이 언성을 높이자 육현경도 표정을 굳히고 소이연을 바라보았다.늘 소리소문없이 일을 처리하던 육현경은 이번에도 다들 벙쪄있는 틈을 타 소이연을 안고 밖으로 나갔다.예수진도 그 뒤를 따라 나가려 하자 계지원이 그녀를 잡아 세웠다.“수진아, 오늘 이 자리 우리가 만든 거야.”“그래도 갈 거야. 당신은 엄마랑 현경 오빠 어머님한테 손님들 좀 부탁한다고 전해줘. 난 언니한테 가봐야겠어.”예수진을 말릴 수 없다고 생각한 계지원도 잠시 고민하다가 그녀의 뒤를 따라 나가자 상황이 심상치 않게 흘러감을 눈치챈 송문수와 하지수도 아쉬운 듯 서로에게서 떨어졌다.“키스 다 했으면 빨리 병원 가. 이연 씨 출산한대.”출산이라는 말에 하지수도 다급히 뒤 따르려 하자 송문수가 그녀를 잡으며 말했다.“천천히 가. 그래도 안 늦어.”그렇게 몇 분도 안 된 사이에 많은 사람들이 파티장을 빠져나갔다.예수진이 둘째를 위해 연 백일잔치는 사라진 엄마 아빠 때문에 아이 혼자 남겨진 채로 끝이 나버렸다.그들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양수가 터진 소이연이 분만실로 옮겨진 뒤였다.상황이 많이 급박한지 늘 침착함을 유지하던 육현경조차도 많이 초조해 보였다.아까부터 입구에서 서성이는 육현경을 보다 못한 예수진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오빠, 가만히 좀 있어 봐. 지금 다들 긴장하고 있는데 오빠 때문에 더 진정할 수가 없잖아.”직설적인 그녀의 말에 육현경이 예수진을 보자 계지원이 다급히 나서며 분위기를 풀었다.“아무 일 없을 테니까 걱정 마. 수진이도 그때 오래 걸렸잖아. 낳으면 된 거지 뭐.”말은 그렇게 해도 사실 계지원도 육현경 못지않게 초조해했었다.당장이라도 분만실로 뛰어 들어가 예수진 대신 아이를 낳아주고 싶어 했었다.그런데 그때, 분만실에서 소이연의 고통스러운 비명소리가 흘러나왔다.주먹을 쥐고 있던 육현경의 손이 점점 하얗게 질려감에 따라 지켜보던 친구들의 긴장감도 고조되고 있었다.다들 긴장하고 있는 와중에 송문수가 갑자기 하지수의 손
“임신 때문에 살쪄서 그런 거야. 문수 씨 탓 아니야.”하지수가 당황한 송문수를 달래주자 그는 벙찐 표정으로 물었다.“그럼 어떡하지?”“살 빼고 나서 다시 끼지 뭐.”“그래.”하지수에게 반지를 직접 끼워주는 건 송문수가 꿈에서도 그리던 장면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이유로 못하게 되는 그는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하지수가 자신과 결혼만 해준다면 앞으로의 날은 길 것이기에 송문수는 그만 몸을 일으켰다.그런데 그가 일어서자마자 사람들이 소리높이 외치기 시작했다.“키스해! 키스해!”갑작스러운 호응에 하지수의 얼굴이 빨개지자 송문수는 그녀가 난처해지지 않게 당분간은 자신의 욕구를 억누르기로 했다.사실 그날 밤, 하지수와의 잠자리는 송문수에게 많은 미련을 남겨주었다.잠을 자다가도 쉴 새 없이 흥분해서 밤에 속옷을 몇 번이나 씻기도 했었다.그렇게 그녀를 원했어도 자리가 자리인 만큼 송문수는 하지수의 손을 잡고 내려가려 했는데 그 순간, 하지수의 입술이 송문수에게 닿아왔다.그녀가 먼저 한 입맞춤은 송문수의 심장을 뒤흔들기 충분했다.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입맞춤을 당한 송문수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고 있는데 그때 하도경의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뽀뽀 한 번에 바보 된 거야?”“...”그 말에 욱한 송문수였지만 여자친구도 없는 친구를 위해 한번은 참아주기로 했다.“신경 쓰지 마. 우리 내려갈...”그런데 그때, 하지수가 또다시 입을 맞춰왔다.하지만 이번에는 아까처럼 닿았다가 금방 떨어지는 입맞춤이 아니라 오래도록 이어지는 키스였다.작은 그녀의 혀가 불규칙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송문수의 몸은 그대로 굳어버렸고 그의 심장박동 또한 정직하게 빨라졌다.정말 자신을 죽이려 드는 하지수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송문수는 하지수의 뒤통수를 손으로 잡고 키스를 이어가기 시작했다.임신을 해도 작기만 한 체구의 하지수는 금방 송문수에게 주동권을 뺏겨버렸다.두 사람의 행복을 빌어주기라도 하듯 무대 위로 장미꽃잎이 흩날리고
다들 숨을 죽이고 송문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하지수의 눈엔 눈물이 가득해서 눈을 조금만 깜빡여도 쏟아질 정도였지만 그녀 역시 온 힘을 다해 참아내고 있었다.송문수는 그 정적 속에서 입술을 말아 물며 많은 고민을 거쳐 마침내 입을 열었다.“결혼하자.”그 대답이 들리기까지의 몇 분이 하객들에게는 한 세기만큼 길게 느껴졌다.송문수의 말이 끝나자마자 하지수도 기쁨의 눈물을 왈칵 쏟아냈고 송문수는 그런 그녀를 향해 한 번 더 소리높이 외쳤다.“하지수, 결혼하자. 너랑 결혼하는 게 내 평생의 소원이었어. 나중에 후회하더라도, 네가 지금 충동적으로 결정한 거라 해도 넌 이제 평생 내 여자야. 다시는 너 다른 남자한테 안 보내. 아주 박력 넘치는 남자가 될 거라고.”“난 후회 안 해.”송문수와의 결혼을 하지수가 후회할 리는 없었다.그때 예수진이 무대 위로 올라가자 송문수는 그제야 이 자리의 주인공이 예수진이었다는 걸 깨닫고는 다급히 하지수를 데리고 내려가려 했다.그런데 그때 예수진이 빨간 보석함 하나를 송문수에게 보여주었다.“이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는 알지?”그 안에 들어있는 건 송문수가 하지수를 위해 준비한 프러포즈 반지였다.익숙한 상자가 등장하는 순간부터 그 사실을 기억해낸 송문수였다.송문수는 하지수에게 가장 특별한 반지를 만들어주기 위해 세계적인 디자이너까지 초빙하며 큰 공을 들였었다.“이제 네가 가져.”예수진이 그것을 송문수에게 건네주자 그는 떨리는 손으로 받아들고는 천천히 보석함을 열어보았다.반짝이는 5캐럿의 다이아몬드가 마침내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눈이 멀어버릴 정도로 반짝이는 반지를 집어 든 송문수는 하지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자신이 상상해왔던 화면이 눈 앞에 펼쳐지자 하지수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는데 송문수 역시 눈가가 촉촉해진 채로 목멘 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지수야.”송문수의 부름에 하지수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예전에는 내가 진짜 나쁜 놈이었어. 맹세할게, 앞으로는 진짜 좋
그런데 하지수가 이런 마음을 전하기도 전에 송문수가 그 먼 타지로 떠나버린 것이다.그래도, 송문수가 정말 자신을 싫어한다 해도, 정말 자신과 헤어지고 싶어 한다 해도 송승우와 함께하지 않겠다는 하지수의 마음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었다.물론 자신을 쉽게 포기하는 송문수에 잠깐 실망도 했었다.그러면서 송문수에게 자신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예수진과 소이연이 저 영상을 보여주지 않았더라면, 그들이 송문수가 준비해온 모든 것들을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하지수는 영원히 송문수가 오래도록 자신을 좋아했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눈에 눈물을 가득 매단 하지수를 보던 송문수는 가슴이 아파와 손을 뻗으려 했지만 다시 움츠러들었다.지금 송문수는 무슨 결정을 내려야 할 지 몰랐다.혹여나 자신의 선택이 하지수에게 부담으로 다가갈까 봐, 그녀의 모습을 보며 송문수는 괴로워하고 있었다.너무 괴로워서 생긴 착각인지, 송문수는 하지수도 자신을 사랑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하지만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그건 바로 하지수 배 속의 아이였다.물론 송승우의 아이라 해도 송문수는 상관없었지만 하지수도 개의치 않을 수 있을까가 그의 의문이었다.“나 너랑 결혼하고 싶어. 네가 나한테 잘해줘서가 아니고, 네가 오래전부터 날 좋아해서도 아니고, 날 위해 많은 걸 준비해줘서도 아니라 그냥 내가 좋아서. 그래서 결혼하고 싶어. 다른 거랑은 아무 상관없어.”하지수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송문수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네가 좋아하는 건 송승우잖아.”“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난 송승우 안 좋아해. 아주 오래전부터 이미 끝난 사이였어. 말했잖아, 그때 좋아한다고 느꼈던 감정은 그냥 습관 같은 거였다고. 내가 좋아하는 건 너야. 미안해서가 아니라 그냥 네가 좋아!”매번 좋아한다고 할 때마다 믿질 못하는 송문수 때문에 하지수는 화가 치밀어올랐다.물론 송문수가 자신을 믿지 못해서 화가 난 게 아니라 송문수가 본인한테 자신감이 너무 없는 것 같아
파티장 안의 모든 불빛은 송문수와 하지수에게 집중되어 있었다.무대 중앙에 선 하지수는 송문수를 바라보고 있었고 송문수도 사람들 틈에서 하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다.지금 하지수는 송문수가 그냥 가버릴까 봐, 그게 제일 무서웠다.하지수는 자신이 이런 용기를 내는 것도 마지막일 것 같았다.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마주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조용한 그 공간에서 송문수가 갑자기 무대로 향해 걸어갔다.한발 한발, 무거운 발걸음이었지만 그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확실했다.그래서 하지수의 심장박동도 빨라졌다.더 이상 컨트롤이 되지 않을 정도로.모두들 숨죽인 채 송문수와 하지수를 보고 있었지만 그중에서 가장 마음을 졸이는 건 예수진과 소이연이었다.겁이 많은 송문수가 도망이라도 갈까 봐 걱정하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송문수가 책임감은 있어서 하지수를 혼자 남겨두진 않았다.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송문수가 하지수에게로 다가섰고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송문수의 눈은 빛나고 있었고 울대는 잔잔히 떨리고 있었다.심경에 크나큰 변화가 일었지만 애써 본인을 진정시키려 하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지수야, 이건 마음에 담아두지 마.”그러다 갑자기 내뱉은 말에 하지수는 송문수를 빤히 쳐다보았다.“그때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런 걸 찍었는지도 모르겠어.”송문수는 이번에도 장난인 척 너스레를 떨며 상황을 넘기려 했다.“너도 알잖아 나 이상한 거. 충동적으로 무슨 짓이든 하는 사람이잖아. 그러니까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진 마.”말을 마친 송문수가 직원을 찾아가 영상을 지우려 하자 하지수가 입을 열었다.“난 이미 진지하게 받아들였어.”그 말에 발이 잡힌 송문수는 빨라지는 심장박동을 애써 늦추며 말했다.“미안해.”송문수의 갈등과 무력함을 보아낸 하지수의 눈에도 어느새 눈물이 차올랐다.“너 헷갈리게 해서 미안해. 만약 네가 신경 쓰인다면... 앞으로 네 앞에 안 나타날게. 너도 나 같은 사람 때문에 힘들어하지 마. 그럴 가치 없
오늘 온 손님들은 하나같이 외향형인지 호응도 아주 잘해줬다.“네! 궁금해요!”“한 여자를 위해선데요.”“누구예요?”“바로 하지수입니다.”영상 속의 자신이 한 자 한 자 내뱉는 말들을 듣던 송문수는 그제야 이게 자신의 프러포즈 영상이었음을 깨달았다.처음에는 이게 어떻게 여기 있는지 당황스러웠지만 항상 일 처리에 미흡한 예수진이 이번에도 실수한 거라 생각해 송문수는 무대 위로 올라가 영상을 멈추려 했다.그런데 그가 발을 내디디자마자 육현경과 하도경이 그 앞을 막아섰다.그리고 영상은 계속해서 재생되었다.“하지수는 제 아내입니다. 결혼한 지 몇 년이나 되었지만 한 번도 제대로 사랑해준 적이 없었죠. 사실 저는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라 사랑할 용기가 없었던 겁니다. 제가 너무 비겁해서 그 사람 앞에만 서면 저 자신이 쓸모없어지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늘 유치한 방법으로 그 사람에게 상처만 줬어요.”영상 속 송문수의 얼굴에는 미안함이 가득했다.“미안해 지수야. 나 지금 엄청 후회하고 있어. 괜한 질투로 널 몇 년 간 힘들게 한 걸. 매일 밤 널 안고 자고 싶었는데도 난 자존심 때문에 그런 말 한마디 못했어. 그래서 내 인생이 좀 덜 재밌었던 것 같아. 너라는 복지가 부족했잖아.”감동하며 영상을 보고 있던 사람들은 마지막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참 울지도 웃지도 못하게 하는 고백 영상이었다.“사랑해, 지수야.”뒤이어 마침내 사랑한다는 말이 나왔는데 그때 송문수의 눈은 확신이 가득 차 있었다.“널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했었어. 그런데 네가 좋아하는 게 내가 아니니까 점점 비참해지더라. 그래서 네가 싫어하는 방법으로 네 시선을 끌려고 했어. 그때만 생각하면 아무리 나라도 너무 멍청한 것 같더라.”“하지만 이젠 아니야.”“내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은 못 돼도 세상에서 너한테 가장 잘해주는 남자는 될 수 있어.”“더 이상 너한테 성질도 안 내고 부려먹지도 않을게. 괜한 질투 때문에 너 상처받게 하지도 않아. 우리 집은 이제 너한테 맡길 거야. 돈도
파티장에 들어와 보니 계지원과 예수진이 아들딸과 함께 와준 손님들에게 인사를 해주고 있었다.인사를 마친 예수진은 흥분된 목소리로 하지수를 불렀다.“이번에는 제 가장 친한 친구이자 우리 아들의 영원한 이모일 하지수 씨를 모셔보겠습니다.”파티장 한구석에 선 송문수는 무대 위로 올라가는 하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아까는 제대로 볼 엄두가 안 나서 애써 무시하려 했던 그녀의 배가 꽤나 불러온 것 같았다.옷을 입어도 다 가려지지 않는 게 이미 임신 몇 개월은 된 것 같았다.정말 자신은 안중에도 없었는지 이렇게 빨리 임신한 하지수가 송문수는 조금은 원망스러웠다.이어서 마이크를 잡은 하지수는 누군가를 찾는 듯 무대 아래를 훑어보았다.한참이 지나 자신에게로 향하는 그녀의 시선에 다급히 눈을 피하던 송문수가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하지수의 시선은 이미 사라져있었다.그에 송문수는 그녀가 찾던 건 아마 송승우일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그런데 끝까지 모습을 비추지 않는 송승우 때문에 그저 시선을 거둔 것 같았다.“우선은 수진이 아들 이모가 될 수 있어서 너무 영광스럽고요.”“수진이가 제 배 속에 있는 아이가 딸이면 꼭 사돈을 맺자고 그러더라고요.”“저도 우리 조카 귀여워서 너무 사랑하거든요.”“하지만 사돈은 저 혼자 맺는 게 아니잖아요. 애 아빠 입장도 있고 하니까요.”그러자 예수진의 격앙된 목소리가 또 한 번 들려왔다.“그럼 얼른 애 아빠부터 불러서 오늘 사돈 한번 맺자!”“아이 아빠는...”그녀의 말에 담담히 웃던 하지수는 갑자기 말을 멈췄다.마른 침을 삼키며 그 모습을 보던 송문수는 정말 송승우를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가장 사랑하는 여자를 내어줬는데도 책임을 다하지 않고 이런 날에 하지수를 혼자 이곳에 보내고 또 혼자 무대 위에 올리는 게 어떻게 남편이라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짓인가 싶었다.“수진아, 내가 무대 좀 써도 돼?”“당연하지, 오늘 이 자리는 널 위한 거야.”“아, 아니다. 내 미래의 며느리를 위한 거지.”예수진의 한마디에
하지수의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의 시선이 맞물리자 송문수가 황급히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당연하지.”“진짜야?”“내가 왜 널 속이겠어?”“그런데 왜 안 데려왔어?”“이번엔 시간이 별로 없어서 괜히 고생만 할까 봐 안 데려왔어.”“나중에 기회 되면 데리고 올 거야.”“예뻐?”“내가 안 예쁜 여자 사귀는 거 봤어? 외국 여자들은 몸매도 좋아. 원래 S라인이 내 취향이잖아.”“사진 있어?”하지만 저 질문에는 송문수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몇 초 동안 침묵을 유지하다가 다시 능청스레 대답했다.“있지.”“내가 봐도 돼?”“왜? 뭐 심사라도 해주게?”“아니, 그냥 궁금해서. 네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여자는 어떻게 생겼는지.”“보면 너 상처받을까 봐 안 보여줄 거야.”“괜찮아.”송문수도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거절하려 했지만 하지수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다음에 직접 데려와서 보여줄게.”“지금 보고 싶어.”“카메라는 잘 안 받아서 실물보다 별로야.”“왜 안 보여주는 거야? 설마 없는 거야?”“설마 내가 너 못 잊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걱정 마. 난 원래 감정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거든. 절대 너한테 매달리지 않을 거야.”송문수가 확신에 찬 말을 하자 하지수는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매달린 적이 있긴 해?”그런 하지수의 모습을 보니 또 가슴이 아파왔지만 송문수는 꾹 참기로 했다.송승우의 아이를 가진 하지수는 이미 자신에게서 너무 멀어져 있으니까.“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하지수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멀어져가는 송문수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한편 화장실로 들어온 송문수는 물을 틀어놓고 손을 몇 번이니 씻어댔다.더 이상 손에 감각이 없을 정도로 아까부터 한 동작만 반복하고 있었다.“더 씻으면 손 터져.”그 모습을 본 하도경이 직접 물을 꺼주자 송문수는 넋 나간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이고는 하도경이 건넨 휴지를 받아 손을 닦아냈다.“고마워.”“이게 진짜 뭐 하는 짓이냐. 그렇게 좋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