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언제 지수 씨한테 가스라이팅을 했다고 그래? 송문수, 말 좀 조심해서 해.”송문수 말을 들은 송승우는 더욱 화가 났다.창피해서 화가 난 건지, 기분이 안 좋아서인지, 그는 평소와 다른 모습으로 화를 내고 있었다.송문수가 입을 열기도 전에 송기명이 단호한 말투로 말했다.“그만해!”“나이가 얼마인데 만나자마자 또 싸우냐? 문수야, 그래도 승우 네 형이야. 너도 좀 배려할 줄 알아야지.”송문수가 냉소를 지었다.어렸을 때부터 늘 이런 식이었다. 송승우와 싸울 때면 부모님들은 언제나 송승우 편을 들었다.어느 한 번은 송문수가 집 정원에 있는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고 있었는데 그 소리가 공부에 방해가 된다고 송승우가 송문수더러 수영을 그만두라고 했던 적도 있었다.하지만 수영 대회가 있어서 연습을 해야 했던 송문수는 그 말을 듣지 않았다.결국 송승우는 부모님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그로 인해 송문수는 부모님에게 수영을 금지당했다. 송승우의 공부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만으로 말이다.송문수는 대회 준비를 해야 한다고 반박했지만 부모님은 그를 무시했다.“수영 대회는 그렇게 중요한 대회가 아니잖아. 승우 공부가 더 중요하지.”그때부터 송문수는 수영을 그만두었다.부모님이 그때 상황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그가 수영을 하지 않는 이상 송승우의 공부에 방해되지 않을 것이니 말이다.사실 송승우가 창문을 닫기만 해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문수는 말없이 참아야 했다.어렸을 때나 지금이나 다들 결국 송승우를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송승우는 송씨 가문의 자랑이었고 송문수는 언제나 뒷전이었다.아무리 열심히 하고 잘한다고 해도 칭찬 한마디 듣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송승우가 하는 말은 언제나 맞았고 그가 하는 말은 언제나 틀렸다.송문수는 몸을 돌려 병실을 떠나려 했다. 변명을 늘어놓고 싶지도 않았고 그들과 싸우고 싶지도 않았다.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병실에 남아있는 송기명은 얼굴이 시퍼렇게 변할 정도로 화가 나 있었다.하지만 송승우는 옆에서 계속 불난 집에 부채질을 했다.“문수 철 든 거 맞아요? 아직도 저렇게 다른 사람 감정을 생각해 주지 않아서 되겠어요? 다른 건 다 제쳐둔다고 해도 지금 아버지께서 병원에 누워 계시는데... 그런데도 이렇게 짜증 낸다고요? 어떻게 몇 년 동안 아무 발전도 없을까요?”그 말을 들으면서 송기명은 점점 더 화가 나서 얼굴이 더욱 굳어져 갔다.그때, 허영지가 옆에서 말을 했다.“승우야, 그만해.”송승우는 자기도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저도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어쩌겠어요? 사실이잖아요. 제가 없는 말을 지어냈나요?”허영지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듯 다시 말했다. “그만해.”그녀의 말투에는 분명 짜증이 섞여 있었다.그 말을 들은 송승우도 알겠다는 듯 입술을 다물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때, 허영지가 말을 꺼냈다.“승우야, 방금 의사 선생님께 물어봤는데 네 아버지 상태도 많이 괜찮아 졌다고 하더라고. 큰 문제는 없다고 하셨어. 그냥 안정을 취하는 게 중요하다고 하시더라. 너 하루 종일 바쁘니까 계속 아버지 옆에 있을 필요 없어. 내가 여기서 네 아버지랑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마.”“아버지 정말 괜찮은 거예요?”송승우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많이 좋아졌어.”송기명은 고개를 끄덕였다.“너희 어머니가 너무 걱정해서 탈이지. 너희 어머니만 아니었으면 나는 벌써 퇴원할 수도 있었어.”“퇴원은 무슨... 건강이 제일 중요한 거잖아요. 회사 일 걱정하지 말고 그냥 치료에 집중하세요.”송승우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알겠어.”송기명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전 먼저 갈게요. 무슨 일이라도 있으면 언제든지 전화하시고요. 바쁘지만 않으면 자주 들를게요.”“너도 몸 잘 챙겨.”허영지는 아들을 걱정하며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부모님께서 걱정하지 않게 잘 지낼게요.”송승우는 이런 말을 남기고 병
“뭐라고요?”송기명은 놀란 표정으로 허영지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녀가 갑자기 이런 말을 할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으니 말이다.“어릴 때부터 저희는 승우에게만 집중했어요. 승우는 똑똑하고 뭐든지 빨리 배우는 편이고 여러 면에서 뛰어났기 때문에 항상 승우한테만 신경을 썼었죠. 그 대신 문수한테 너무 소홀했던 것 같아요. 지금까지 문수 생일을 몇 번이나 챙겼는지 잘 기억도 안 나요.”허영지는 갑자기 괴로운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송기명은 잠시 멈칫하더니 입을 열었다.“남자애가 무슨 생일을 챙긴다고...”“하지만 승우 생일은 매년 챙겨줬잖아요. 승우와 문수 생일이 한 달 차이라고 항상 승우 생일에 맞춰서 생일 파티를 했죠. 그리고는 그 날에 문수 생일도 같이 챙겼다고 하면서 그저 넘어가 버렸잖아요. 하지만 그날, 모든 사람은 승우의 생일만 축하해줬지 문수는 거들떠보지도 않았어요. 문수는 그냥 옆에 있을 뿐이었죠. 그게 어떻게 같이 생일을 챙기는 거겠어요?”허영지는 힘없는 말투로 말했다.“당신은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거예요?”송기명은 허영지의 말을 곱씹어 보며 묻기 시작했다. 그는 세심한 성격이 아니었기에 그런 것들에 신경을 쓰고 싶지도 않았다.“형제 사이에 그런 것도 신경 써야 하나요?”“당신 못 느꼈어요? 승우가 문수한테 이미 습관적으로 불만을 품고 있다는 걸 말이에요.”허영지는 눈을 감고 깊이 생각하며 말했다.“저는 방금 승우가 문수한테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까 참을 수 없더라고요.”“문수가 제대로 하지 않았으니까 승우가 그렇게 말한 거죠. 승우가 어떤 사람인지 우리도 잘 알잖아요? 어릴 때부터 똑똑하고 말 잘 듣고 항상 성실한 아들이었으니까요. 걱정할 일도 전혀 없었고 말이에요. 그런데 문수는 항상 문제를 일으켰고...”“하지만 문수가 왜 승우한테 그런 말을 들어야 하는데요? 승우한테 무슨 자격이 있길래 문수를 그렇게 대하는 거죠?”허영지는 송기명의 말을 끊으며 반박했다.“승우가 우리 가정을 위해서 뭘 해줬는데요? 생각해
송기명은 허영지의 말을 듣고 잠시 말문이 막혔다. 지금껏 오랜 시간 동안 두 아이에게 각기 다른 태도를 취해왔기 때문에 지금 당장 자신이 잘못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변하기란 쉽지 않았던 것이다.사실 허영지도 마찬가지였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허영지 역시 쉽게 바뀌지는 못할 것이었다. 그녀는 깊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우리 앞으로는 좀 더 문수를 이해하도록 노력해요.”...“송문수!”하지수는 그의 발걸음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그녀는 화가 나서 폭발할 지경이었다.송문수는 화를 낼 때마다 정말 고집불통처럼 행동했다. 그는 키가 크고 발걸음도 빨랐기 때문에 하지수는 도저히 그의 뒤를 따라갈 수 없었다. 짧은 다리로는 도저히 그의 속도를 맞추는 건 무리였다.그녀는 송문수 뒤에서 숨을 헐떡이며 그를 쫓아갔다.송문수는 하지수의 목소리를 못 들은 척하며 여전히 자신만의 속도로 걸어갔다.그러자 하지수는 이를 악물고 뭔가 결심한 듯했다.그녀는 일부러 땅에 넘어져 큰 소리로 비명을 질렀다.“아, 아파!”그러자 송문수가 눈에 띄게 멈칫하는 것이었다.하지수는 땅에 앉아 그를 향해 소리쳤다.“송문수, 나 넘어졌다고! 다리 부러진 것 같아...”결국 송문수는 뒤로 돌아서더니 하지수를 바라보았다. 그는 급하게 달려오더니 다친 곳을 확인하려고 무릎을 꿇으면서 물었다.“어디 다쳤어?”그의 목소리에서 긴장감이 묻어났다.그러자 하지수가 송문수의 팔을 잡고 말했다.“도망가지 마.”송문수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어디 다쳤냐고!”“더 이상 도망가지 말라고.”하지수는 송문수의 팔을 놓지 않으면서 말했다.“하지수!”송문수는 그녀를 노려보며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 그의 얼굴에서 찬바람이 스쳐 지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하지수가 계속 대답하지 않자 송문수는 그녀를 힘껏 안더니 병원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하지수는 송문수의 목을 끌어안았다.“어디로 가는 거야?”“병원.”“나 괜찮아.”하지수는 그의 목을 꼭 껴안으며 여유롭게 말했다.“도저히 따라잡을
“하지만 문수 씨도 어머님 아버님께서 그렇게 말한다고 너무 원망하지는 마. 나도 그렇게 말하는 게 좋은 건 아니지만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그럴 만한 이유도 있으니까. 어릴 때부터 승우 씨가 문수 씨보다 더 똑똑해서 부모님 눈에 더 좋은 아들로 보였겠지. 대신에 문수 씨는 장난도 많이 쳤잖아. 편견을 갖는 것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그러니까 두 분한테 우리가 변했다는 걸 보여드리면 돼.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드리면 된다는 거지. 시간이 지나면 부모님도 분명 문수 씨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실 거야.”하지수가 말했다.“지금 부모님과 싸우는 것보다 행동으로 스스로 증명하는 게 낫지 않을까?“송문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지수는 송문수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그는 정말 극단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다. 싫은 일은 절대 하지 않았고 하기 싫은 일이라면 누가 강요하든 하지 않았다.하지수는 정말로 송문수가 변하고 있다고 느꼈고, 그래서 그는 절대 포기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문수 씨?”하지수가 조심스럽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알아.”송문수가 갑자기 말했다.하지수는 깜짝 놀랐다.‘뭘 안다고 하는 거지?’“네 말대로 내가 성과를 내기 전까지는 날 믿어주지 않을 거라는 거... 안다고.”송문수는 다소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화가 조금은 풀린 것 같았다.“나도 내가 못났다는 거 알고 있거든.”송문수는 자신을 비웃으며 말했다.“못난 게 아니라 기회가 없었던 거지.”하지수는 송문수를 격려하려 했다.“그러니까 지금이야말로 크게 날개를 펼칠 때야. 앞으로 문수 씨는 분명 많은 사람을 놀라게 할 거야.”“꿈을 크게 가지라는 거야?”송문수는 하지수를 쏘아보며 말했다.“난 진심으로 말하는 거야.”하지수는 결연한 눈빛으로 그를 응시했다.그 모습을 본 송문수가 웃음을 터뜨렸다.그가 웃는 걸 보고 하지수는 기분이 좋았다.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자기가 웃고 있다는 걸 깨달은 송문수는 즉시 웃음기를 거두었다.“
회사로 돌아간 다음 날, 송문수와 하지수는 마침내 육현경이 보내준 돈을 받았다.비록 송문수한테 질책을 당했을 때는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돈을 받게 되자 이사들도 약간 흥분되는 듯했다. 그렇게 투자가 부족한 상황이었는데 송문수처럼 놀기만 하는 사람이 쉽게 해결해 버릴 줄은 상상도 못 했다.돈을 받은 후, 송문수는 이사들과 함께 논의하기 위해 회의실에서 모였다.“전 회사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어요. 그래서 그동안 많은 데이터를 봤죠. 지금 제 머릿속엔 전부 데이터뿐이에요. 화장실에서 볼일을 볼 때에도 데이터의 의미를 생각해요.”송문수가 말했다.이사들은 모두 입을 다물었다.‘이제 회사의 대리 회장님인데 말을 좀 더 품위 있게 할 순 없을까?’“인정할 건 인정해요. 사실 전 데이터를 다룬 경험이 적고 깊게 이해한 것도 아니에요. 하지만 제 개인적인 생각을 말해보자면 일단 직원들의 월급을 우선 해결해야 한다는 겁니다. 재무팀 보고에 따르면 일반 직원들 월급은 이미 한 달 반이나 밀렸고 관리직 분들 월급은 3개월이나 밀린 상태라고 하더라고요. 이게 말이 된다고요? 일은 시켜놓고 월급은 안 준다니... 이게 가능해요?”송문수는 자신의 입장을 말했다.“직원들의 월급은 오래 미뤄선 안 돼요. 점점 더 혼란스러워질 거니까요.”오 이사가 송문수의 의견에 동조하며 말했다.“그럼 관리직 월급은 일단 한 달 정도만 지급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이후에 자금이 충분해지고 나서 한 번에 지급하는 게 어떨까요?”“반대합니다.”송문수는 주저하지 않고 바로 반박했다.오 이사의 안색이 다소 어두워졌다.“문수 씨, 저희 의견도 좀 들어보시죠? 지금 회사는 돈이 부족한 상황이에요. 게다가 관리직들의 월급은 적지 않은 금액이고요. 이 돈을 남겨두면 만약의 상황을 대비할 수 있잖아요.”“그럼 오 이사님 말은 관리직들의 급여를 지급하지 않고 비상일 때를 대비해서 남겨둔다는 거죠? 특수한 상황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이 돈을 쓰지 않겠다는 거네요.”“예기치 못한 특수한 상황들
하지수는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전화를 받았다.“승우 씨.”“문수 지금 어디 있어요? 아버지가 또 응급실에 실려 갔어요!”송승우의 크고 화난 듯한 목소리가 전화 너머로 울려 퍼졌다.하지수는 잠시 멈칫했지만 곧바로 말했다.“저희도 바로 병원으로 갈게요.”“무슨 일이야?”하지수의 표정이 이상한 걸 알아챈 송문수가 물었다.“아버님께서 또 응급실에 실려 가셨대요.”하지수는 자신을 진정시키려 애썼다.송문수는 손에 들고 있던 일을 내려놓고 바로 사무실을 뛰쳐나갔다.하지수도 그 뒤를 따라 급하게 걸었다.두 사람은 한달음에 병원으로 달려갔다. 응급실 문 앞에 도착했을 때, 송기명은 이미 의사와 간호사에게 실려 나오고 있었다.송문수가 가까이 다가가려 했지만 송승우가 그를 막았다.“넌 아버지 앞에 나타날 자격도 없어!”송문수가 이를 악물었다.허영지는 송문수를 한 번 쳐다봤지만 지금은 송기명이 더 걱정되는 상황이었기에 곧바로 의사에게 물었다.“의사 선생님, 제 남편은 괜찮은 거죠?”“걱정 마세요. 큰 일은 아닙니다.”의사는 이렇게 말하며 그녀를 안심시켰다.“변비 때문이에요. 배변할 때 힘을 많이 주셔서 복부 압력이 증가하게 되거든요. 그러면서 혈압이 높아지고 뇌 부분에 흐르는 피가 일시적으로 부족해져서 기절하신 겁니다. 지금은 혈압이 정상으로 회복되었고 다른 문제는 없습니다. 수술을 받으셔서 몸이 조금 약해지셨겠지만 적당히 일어나서 걸어 다니는 게 좋을 듯합니다. 장운동에도 도움이 되니까요.”“감사합니다, 의사 선생님.”허영지는 한숨을 돌리며 말했다.그녀는 송기명이 쓰러진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던 것이다. 혹시라도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정말 무서웠었다. 다행히 그 타이밍에 송승우가 그들을 보러왔고 바로 의사를 불러 응급실로 모셨다.“별말씀을요.”의사는 그렇게 말하며 주의해야 할 점들을 전달했다.“평소에 식사도 좀 더 신경 써서 드셔야 해요. 식이섬유가 많이 들어있는 음식을 드셔야 합니다. 약도 조금 처방해 드릴 거예요. 만약 변비가
“오늘뿐이 아니에요. 어제도 야근했거든요. 병원에서 나와 바로 회사로 갔어요.”하지수는 큰 목소리로 말했다.“문수 씨는 정말 열심히 일하고 있어요.”송기명과 허영지는 깜짝 놀랐다. 그들이 송문수에게 편견이 있었던 것도 있지만 다들 송문수가 이렇게 많이 변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말했다.“문수야, 진짜 철이 들었구나?”송문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의 성격상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그건 사실이라는 걸 의미했다.“문수야, 네가 좋은 쪽으로 발전하다니 너무 좋은데? 엄마 정말 기뻐.”허영지가 말했다.“항상 회사를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이었는데 이제 네가 있으니까 안심이 되네.”“이틈을 타서 잘 배우도록 해”송기명은 엄격한 어조로 말했지만 그가 한 말은 분명 송문수를 인정하는 말이었다.송승우는 송문수에 대한 부모님의 태도 변화를 보고 마음이 복잡했다. 어린 시절부터 칭찬은 늘 송승우가 받아왔으니 말이다. 송문수가 부모님의 관심을 받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그는 불쾌한 감정을 내비치며 말했다.“문수야, 네가 좋은 쪽으로 발전하는 건 물론 좋지만 오래 가지 않을까 봐 걱정돼. 언제까지 계속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걱정하지 않아도 돼. 나는 하기로 했으면 끝까지 하는 사람이거든.”송문수가 단호하게 대답했다.“그건 두고 봐야 알지.”송승우는 다소 비꼬는 듯한 톤으로 말했다.“일을 하는 것과 잘하는 건 또 다른 문제니까. 말만 잘해서 성공하는 게 아니잖아.”하지수는 송승우가 송문수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하는 걸 듣고 바로 입을 열었다.“승우 씨, 회사 돈 문제는 이미 해결되었어요. 회사가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걸 의미하죠. 모두 문수 씨 덕분이에요.”송승우는 놀란 얼굴로 말했다.“은행에서 대출을 해준 건가요?”그 말을 들은 송기명과 허영지도 송문수를 쳐다봤다. 최근 허영지는 송기명이 회사 걱정을 할까 봐 그의 휴대폰을 압수했었다. 그러면서 본인도 회사 일을 멀리했기에 회사가 이미 정상적으로
그리고는 간호사 하나가 걸어 나오며 말했다.“소이연 씨 보호자 계세요?”“네!”“아기 나왔습니다. 3.15킬로...”“산모는요?”간호사의 말에 우렁차게 대답한 육현경은 아이는 신경도 안 쓰고 소이연의 상태부터 물었다.“산모분은 아주 건강하십니다. 지금 선생님께서 상처 처리하고 계시니까 곧 나오실 겁니다.”“아빠 맞으시죠? 아이 한 번 안아보실래요?”그제야 안도한 육현경이 아이를 안아 들자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오며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어머, 어쩜 이렇게 하얗지? 내가 본 아기들 중에 제일 예쁜 것 같아.”“지금 네 아들은 못생겼다는 소리야?”“솔직히 말하면 좀 못생기긴 했어.”하도경의 시비에 예수진이 너무 솔직히 답하자 계지원이 그게 사실인 걸 알면서도 자기 아들 외모를 저렇게 평가하는 게 썩 기분 좋지는 않았는지 헛기침을 해댔다.“나도 안아볼래.”예수진의 말에 육현경은 바로 아이를 넘겨주었다.“우리 공주님, 너무 귀엽다. 왜 하필 혈연관계인 거야!”피가 섞인 남매라서 자기 아들과 맺어줄 수 없다고 안타까워하는 예수진에 하지수도 궁금해서 다가가 보았다.“나도 봐봐.”가까이에서 보니 정말 떡잎부터 남다른 예쁜 아이였다.장차 아주 예쁘게 클 것 같아서 하지수는 아이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물었다.“딸이야?”“딱 보면 딸이지, 이 얼굴이 남자일 리는 없잖아.”간호사가 대답하려던 그때 분만실 분이 또 한 번 열리고 소이연이 휠체어를 타고 나오자 육현경은 다급히 달려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고생했어.”“이제 돌아가서 쉬자. 우리 이제 아이는 그만 가지자.”소이연이 고생하는 게 마음 아팠던 육현경은 잔뜩 굳은 얼굴로 간호사에게서 휠체어를 받아 병실로 향했다.친구들도 그런 육현경을 따라 병실로 향하고 있었는데 성큼성큼 걷던 하지수가 휑한 옆자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송문수가 아직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왜 움직이지 않는지 의아해진 하지수가 그를 바라보자 송문수가 그녀와 시선을 맞추며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뭐라고요?!”놀란 예수진이 언성을 높이자 육현경도 표정을 굳히고 소이연을 바라보았다.늘 소리소문없이 일을 처리하던 육현경은 이번에도 다들 벙쪄있는 틈을 타 소이연을 안고 밖으로 나갔다.예수진도 그 뒤를 따라 나가려 하자 계지원이 그녀를 잡아 세웠다.“수진아, 오늘 이 자리 우리가 만든 거야.”“그래도 갈 거야. 당신은 엄마랑 현경 오빠 어머님한테 손님들 좀 부탁한다고 전해줘. 난 언니한테 가봐야겠어.”예수진을 말릴 수 없다고 생각한 계지원도 잠시 고민하다가 그녀의 뒤를 따라 나가자 상황이 심상치 않게 흘러감을 눈치챈 송문수와 하지수도 아쉬운 듯 서로에게서 떨어졌다.“키스 다 했으면 빨리 병원 가. 이연 씨 출산한대.”출산이라는 말에 하지수도 다급히 뒤 따르려 하자 송문수가 그녀를 잡으며 말했다.“천천히 가. 그래도 안 늦어.”그렇게 몇 분도 안 된 사이에 많은 사람들이 파티장을 빠져나갔다.예수진이 둘째를 위해 연 백일잔치는 사라진 엄마 아빠 때문에 아이 혼자 남겨진 채로 끝이 나버렸다.그들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양수가 터진 소이연이 분만실로 옮겨진 뒤였다.상황이 많이 급박한지 늘 침착함을 유지하던 육현경조차도 많이 초조해 보였다.아까부터 입구에서 서성이는 육현경을 보다 못한 예수진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오빠, 가만히 좀 있어 봐. 지금 다들 긴장하고 있는데 오빠 때문에 더 진정할 수가 없잖아.”직설적인 그녀의 말에 육현경이 예수진을 보자 계지원이 다급히 나서며 분위기를 풀었다.“아무 일 없을 테니까 걱정 마. 수진이도 그때 오래 걸렸잖아. 낳으면 된 거지 뭐.”말은 그렇게 해도 사실 계지원도 육현경 못지않게 초조해했었다.당장이라도 분만실로 뛰어 들어가 예수진 대신 아이를 낳아주고 싶어 했었다.그런데 그때, 분만실에서 소이연의 고통스러운 비명소리가 흘러나왔다.주먹을 쥐고 있던 육현경의 손이 점점 하얗게 질려감에 따라 지켜보던 친구들의 긴장감도 고조되고 있었다.다들 긴장하고 있는 와중에 송문수가 갑자기 하지수의 손
“임신 때문에 살쪄서 그런 거야. 문수 씨 탓 아니야.”하지수가 당황한 송문수를 달래주자 그는 벙찐 표정으로 물었다.“그럼 어떡하지?”“살 빼고 나서 다시 끼지 뭐.”“그래.”하지수에게 반지를 직접 끼워주는 건 송문수가 꿈에서도 그리던 장면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이유로 못하게 되는 그는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하지수가 자신과 결혼만 해준다면 앞으로의 날은 길 것이기에 송문수는 그만 몸을 일으켰다.그런데 그가 일어서자마자 사람들이 소리높이 외치기 시작했다.“키스해! 키스해!”갑작스러운 호응에 하지수의 얼굴이 빨개지자 송문수는 그녀가 난처해지지 않게 당분간은 자신의 욕구를 억누르기로 했다.사실 그날 밤, 하지수와의 잠자리는 송문수에게 많은 미련을 남겨주었다.잠을 자다가도 쉴 새 없이 흥분해서 밤에 속옷을 몇 번이나 씻기도 했었다.그렇게 그녀를 원했어도 자리가 자리인 만큼 송문수는 하지수의 손을 잡고 내려가려 했는데 그 순간, 하지수의 입술이 송문수에게 닿아왔다.그녀가 먼저 한 입맞춤은 송문수의 심장을 뒤흔들기 충분했다.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입맞춤을 당한 송문수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고 있는데 그때 하도경의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뽀뽀 한 번에 바보 된 거야?”“...”그 말에 욱한 송문수였지만 여자친구도 없는 친구를 위해 한번은 참아주기로 했다.“신경 쓰지 마. 우리 내려갈...”그런데 그때, 하지수가 또다시 입을 맞춰왔다.하지만 이번에는 아까처럼 닿았다가 금방 떨어지는 입맞춤이 아니라 오래도록 이어지는 키스였다.작은 그녀의 혀가 불규칙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송문수의 몸은 그대로 굳어버렸고 그의 심장박동 또한 정직하게 빨라졌다.정말 자신을 죽이려 드는 하지수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송문수는 하지수의 뒤통수를 손으로 잡고 키스를 이어가기 시작했다.임신을 해도 작기만 한 체구의 하지수는 금방 송문수에게 주동권을 뺏겨버렸다.두 사람의 행복을 빌어주기라도 하듯 무대 위로 장미꽃잎이 흩날리고
다들 숨을 죽이고 송문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하지수의 눈엔 눈물이 가득해서 눈을 조금만 깜빡여도 쏟아질 정도였지만 그녀 역시 온 힘을 다해 참아내고 있었다.송문수는 그 정적 속에서 입술을 말아 물며 많은 고민을 거쳐 마침내 입을 열었다.“결혼하자.”그 대답이 들리기까지의 몇 분이 하객들에게는 한 세기만큼 길게 느껴졌다.송문수의 말이 끝나자마자 하지수도 기쁨의 눈물을 왈칵 쏟아냈고 송문수는 그런 그녀를 향해 한 번 더 소리높이 외쳤다.“하지수, 결혼하자. 너랑 결혼하는 게 내 평생의 소원이었어. 나중에 후회하더라도, 네가 지금 충동적으로 결정한 거라 해도 넌 이제 평생 내 여자야. 다시는 너 다른 남자한테 안 보내. 아주 박력 넘치는 남자가 될 거라고.”“난 후회 안 해.”송문수와의 결혼을 하지수가 후회할 리는 없었다.그때 예수진이 무대 위로 올라가자 송문수는 그제야 이 자리의 주인공이 예수진이었다는 걸 깨닫고는 다급히 하지수를 데리고 내려가려 했다.그런데 그때 예수진이 빨간 보석함 하나를 송문수에게 보여주었다.“이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는 알지?”그 안에 들어있는 건 송문수가 하지수를 위해 준비한 프러포즈 반지였다.익숙한 상자가 등장하는 순간부터 그 사실을 기억해낸 송문수였다.송문수는 하지수에게 가장 특별한 반지를 만들어주기 위해 세계적인 디자이너까지 초빙하며 큰 공을 들였었다.“이제 네가 가져.”예수진이 그것을 송문수에게 건네주자 그는 떨리는 손으로 받아들고는 천천히 보석함을 열어보았다.반짝이는 5캐럿의 다이아몬드가 마침내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눈이 멀어버릴 정도로 반짝이는 반지를 집어 든 송문수는 하지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자신이 상상해왔던 화면이 눈 앞에 펼쳐지자 하지수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는데 송문수 역시 눈가가 촉촉해진 채로 목멘 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지수야.”송문수의 부름에 하지수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예전에는 내가 진짜 나쁜 놈이었어. 맹세할게, 앞으로는 진짜 좋
그런데 하지수가 이런 마음을 전하기도 전에 송문수가 그 먼 타지로 떠나버린 것이다.그래도, 송문수가 정말 자신을 싫어한다 해도, 정말 자신과 헤어지고 싶어 한다 해도 송승우와 함께하지 않겠다는 하지수의 마음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었다.물론 자신을 쉽게 포기하는 송문수에 잠깐 실망도 했었다.그러면서 송문수에게 자신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예수진과 소이연이 저 영상을 보여주지 않았더라면, 그들이 송문수가 준비해온 모든 것들을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하지수는 영원히 송문수가 오래도록 자신을 좋아했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눈에 눈물을 가득 매단 하지수를 보던 송문수는 가슴이 아파와 손을 뻗으려 했지만 다시 움츠러들었다.지금 송문수는 무슨 결정을 내려야 할 지 몰랐다.혹여나 자신의 선택이 하지수에게 부담으로 다가갈까 봐, 그녀의 모습을 보며 송문수는 괴로워하고 있었다.너무 괴로워서 생긴 착각인지, 송문수는 하지수도 자신을 사랑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하지만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그건 바로 하지수 배 속의 아이였다.물론 송승우의 아이라 해도 송문수는 상관없었지만 하지수도 개의치 않을 수 있을까가 그의 의문이었다.“나 너랑 결혼하고 싶어. 네가 나한테 잘해줘서가 아니고, 네가 오래전부터 날 좋아해서도 아니고, 날 위해 많은 걸 준비해줘서도 아니라 그냥 내가 좋아서. 그래서 결혼하고 싶어. 다른 거랑은 아무 상관없어.”하지수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송문수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네가 좋아하는 건 송승우잖아.”“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난 송승우 안 좋아해. 아주 오래전부터 이미 끝난 사이였어. 말했잖아, 그때 좋아한다고 느꼈던 감정은 그냥 습관 같은 거였다고. 내가 좋아하는 건 너야. 미안해서가 아니라 그냥 네가 좋아!”매번 좋아한다고 할 때마다 믿질 못하는 송문수 때문에 하지수는 화가 치밀어올랐다.물론 송문수가 자신을 믿지 못해서 화가 난 게 아니라 송문수가 본인한테 자신감이 너무 없는 것 같아
파티장 안의 모든 불빛은 송문수와 하지수에게 집중되어 있었다.무대 중앙에 선 하지수는 송문수를 바라보고 있었고 송문수도 사람들 틈에서 하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다.지금 하지수는 송문수가 그냥 가버릴까 봐, 그게 제일 무서웠다.하지수는 자신이 이런 용기를 내는 것도 마지막일 것 같았다.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마주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조용한 그 공간에서 송문수가 갑자기 무대로 향해 걸어갔다.한발 한발, 무거운 발걸음이었지만 그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확실했다.그래서 하지수의 심장박동도 빨라졌다.더 이상 컨트롤이 되지 않을 정도로.모두들 숨죽인 채 송문수와 하지수를 보고 있었지만 그중에서 가장 마음을 졸이는 건 예수진과 소이연이었다.겁이 많은 송문수가 도망이라도 갈까 봐 걱정하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송문수가 책임감은 있어서 하지수를 혼자 남겨두진 않았다.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송문수가 하지수에게로 다가섰고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송문수의 눈은 빛나고 있었고 울대는 잔잔히 떨리고 있었다.심경에 크나큰 변화가 일었지만 애써 본인을 진정시키려 하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지수야, 이건 마음에 담아두지 마.”그러다 갑자기 내뱉은 말에 하지수는 송문수를 빤히 쳐다보았다.“그때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런 걸 찍었는지도 모르겠어.”송문수는 이번에도 장난인 척 너스레를 떨며 상황을 넘기려 했다.“너도 알잖아 나 이상한 거. 충동적으로 무슨 짓이든 하는 사람이잖아. 그러니까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진 마.”말을 마친 송문수가 직원을 찾아가 영상을 지우려 하자 하지수가 입을 열었다.“난 이미 진지하게 받아들였어.”그 말에 발이 잡힌 송문수는 빨라지는 심장박동을 애써 늦추며 말했다.“미안해.”송문수의 갈등과 무력함을 보아낸 하지수의 눈에도 어느새 눈물이 차올랐다.“너 헷갈리게 해서 미안해. 만약 네가 신경 쓰인다면... 앞으로 네 앞에 안 나타날게. 너도 나 같은 사람 때문에 힘들어하지 마. 그럴 가치 없
오늘 온 손님들은 하나같이 외향형인지 호응도 아주 잘해줬다.“네! 궁금해요!”“한 여자를 위해선데요.”“누구예요?”“바로 하지수입니다.”영상 속의 자신이 한 자 한 자 내뱉는 말들을 듣던 송문수는 그제야 이게 자신의 프러포즈 영상이었음을 깨달았다.처음에는 이게 어떻게 여기 있는지 당황스러웠지만 항상 일 처리에 미흡한 예수진이 이번에도 실수한 거라 생각해 송문수는 무대 위로 올라가 영상을 멈추려 했다.그런데 그가 발을 내디디자마자 육현경과 하도경이 그 앞을 막아섰다.그리고 영상은 계속해서 재생되었다.“하지수는 제 아내입니다. 결혼한 지 몇 년이나 되었지만 한 번도 제대로 사랑해준 적이 없었죠. 사실 저는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라 사랑할 용기가 없었던 겁니다. 제가 너무 비겁해서 그 사람 앞에만 서면 저 자신이 쓸모없어지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늘 유치한 방법으로 그 사람에게 상처만 줬어요.”영상 속 송문수의 얼굴에는 미안함이 가득했다.“미안해 지수야. 나 지금 엄청 후회하고 있어. 괜한 질투로 널 몇 년 간 힘들게 한 걸. 매일 밤 널 안고 자고 싶었는데도 난 자존심 때문에 그런 말 한마디 못했어. 그래서 내 인생이 좀 덜 재밌었던 것 같아. 너라는 복지가 부족했잖아.”감동하며 영상을 보고 있던 사람들은 마지막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참 울지도 웃지도 못하게 하는 고백 영상이었다.“사랑해, 지수야.”뒤이어 마침내 사랑한다는 말이 나왔는데 그때 송문수의 눈은 확신이 가득 차 있었다.“널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했었어. 그런데 네가 좋아하는 게 내가 아니니까 점점 비참해지더라. 그래서 네가 싫어하는 방법으로 네 시선을 끌려고 했어. 그때만 생각하면 아무리 나라도 너무 멍청한 것 같더라.”“하지만 이젠 아니야.”“내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은 못 돼도 세상에서 너한테 가장 잘해주는 남자는 될 수 있어.”“더 이상 너한테 성질도 안 내고 부려먹지도 않을게. 괜한 질투 때문에 너 상처받게 하지도 않아. 우리 집은 이제 너한테 맡길 거야. 돈도
파티장에 들어와 보니 계지원과 예수진이 아들딸과 함께 와준 손님들에게 인사를 해주고 있었다.인사를 마친 예수진은 흥분된 목소리로 하지수를 불렀다.“이번에는 제 가장 친한 친구이자 우리 아들의 영원한 이모일 하지수 씨를 모셔보겠습니다.”파티장 한구석에 선 송문수는 무대 위로 올라가는 하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아까는 제대로 볼 엄두가 안 나서 애써 무시하려 했던 그녀의 배가 꽤나 불러온 것 같았다.옷을 입어도 다 가려지지 않는 게 이미 임신 몇 개월은 된 것 같았다.정말 자신은 안중에도 없었는지 이렇게 빨리 임신한 하지수가 송문수는 조금은 원망스러웠다.이어서 마이크를 잡은 하지수는 누군가를 찾는 듯 무대 아래를 훑어보았다.한참이 지나 자신에게로 향하는 그녀의 시선에 다급히 눈을 피하던 송문수가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하지수의 시선은 이미 사라져있었다.그에 송문수는 그녀가 찾던 건 아마 송승우일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그런데 끝까지 모습을 비추지 않는 송승우 때문에 그저 시선을 거둔 것 같았다.“우선은 수진이 아들 이모가 될 수 있어서 너무 영광스럽고요.”“수진이가 제 배 속에 있는 아이가 딸이면 꼭 사돈을 맺자고 그러더라고요.”“저도 우리 조카 귀여워서 너무 사랑하거든요.”“하지만 사돈은 저 혼자 맺는 게 아니잖아요. 애 아빠 입장도 있고 하니까요.”그러자 예수진의 격앙된 목소리가 또 한 번 들려왔다.“그럼 얼른 애 아빠부터 불러서 오늘 사돈 한번 맺자!”“아이 아빠는...”그녀의 말에 담담히 웃던 하지수는 갑자기 말을 멈췄다.마른 침을 삼키며 그 모습을 보던 송문수는 정말 송승우를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가장 사랑하는 여자를 내어줬는데도 책임을 다하지 않고 이런 날에 하지수를 혼자 이곳에 보내고 또 혼자 무대 위에 올리는 게 어떻게 남편이라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짓인가 싶었다.“수진아, 내가 무대 좀 써도 돼?”“당연하지, 오늘 이 자리는 널 위한 거야.”“아, 아니다. 내 미래의 며느리를 위한 거지.”예수진의 한마디에
하지수의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의 시선이 맞물리자 송문수가 황급히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당연하지.”“진짜야?”“내가 왜 널 속이겠어?”“그런데 왜 안 데려왔어?”“이번엔 시간이 별로 없어서 괜히 고생만 할까 봐 안 데려왔어.”“나중에 기회 되면 데리고 올 거야.”“예뻐?”“내가 안 예쁜 여자 사귀는 거 봤어? 외국 여자들은 몸매도 좋아. 원래 S라인이 내 취향이잖아.”“사진 있어?”하지만 저 질문에는 송문수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몇 초 동안 침묵을 유지하다가 다시 능청스레 대답했다.“있지.”“내가 봐도 돼?”“왜? 뭐 심사라도 해주게?”“아니, 그냥 궁금해서. 네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여자는 어떻게 생겼는지.”“보면 너 상처받을까 봐 안 보여줄 거야.”“괜찮아.”송문수도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거절하려 했지만 하지수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다음에 직접 데려와서 보여줄게.”“지금 보고 싶어.”“카메라는 잘 안 받아서 실물보다 별로야.”“왜 안 보여주는 거야? 설마 없는 거야?”“설마 내가 너 못 잊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걱정 마. 난 원래 감정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거든. 절대 너한테 매달리지 않을 거야.”송문수가 확신에 찬 말을 하자 하지수는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매달린 적이 있긴 해?”그런 하지수의 모습을 보니 또 가슴이 아파왔지만 송문수는 꾹 참기로 했다.송승우의 아이를 가진 하지수는 이미 자신에게서 너무 멀어져 있으니까.“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하지수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멀어져가는 송문수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한편 화장실로 들어온 송문수는 물을 틀어놓고 손을 몇 번이니 씻어댔다.더 이상 손에 감각이 없을 정도로 아까부터 한 동작만 반복하고 있었다.“더 씻으면 손 터져.”그 모습을 본 하도경이 직접 물을 꺼주자 송문수는 넋 나간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이고는 하도경이 건넨 휴지를 받아 손을 닦아냈다.“고마워.”“이게 진짜 뭐 하는 짓이냐. 그렇게 좋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