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로 돌아간 다음 날, 송문수와 하지수는 마침내 육현경이 보내준 돈을 받았다.비록 송문수한테 질책을 당했을 때는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돈을 받게 되자 이사들도 약간 흥분되는 듯했다. 그렇게 투자가 부족한 상황이었는데 송문수처럼 놀기만 하는 사람이 쉽게 해결해 버릴 줄은 상상도 못 했다.돈을 받은 후, 송문수는 이사들과 함께 논의하기 위해 회의실에서 모였다.“전 회사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어요. 그래서 그동안 많은 데이터를 봤죠. 지금 제 머릿속엔 전부 데이터뿐이에요. 화장실에서 볼일을 볼 때에도 데이터의 의미를 생각해요.”송문수가 말했다.이사들은 모두 입을 다물었다.‘이제 회사의 대리 회장님인데 말을 좀 더 품위 있게 할 순 없을까?’“인정할 건 인정해요. 사실 전 데이터를 다룬 경험이 적고 깊게 이해한 것도 아니에요. 하지만 제 개인적인 생각을 말해보자면 일단 직원들의 월급을 우선 해결해야 한다는 겁니다. 재무팀 보고에 따르면 일반 직원들 월급은 이미 한 달 반이나 밀렸고 관리직 분들 월급은 3개월이나 밀린 상태라고 하더라고요. 이게 말이 된다고요? 일은 시켜놓고 월급은 안 준다니... 이게 가능해요?”송문수는 자신의 입장을 말했다.“직원들의 월급은 오래 미뤄선 안 돼요. 점점 더 혼란스러워질 거니까요.”오 이사가 송문수의 의견에 동조하며 말했다.“그럼 관리직 월급은 일단 한 달 정도만 지급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이후에 자금이 충분해지고 나서 한 번에 지급하는 게 어떨까요?”“반대합니다.”송문수는 주저하지 않고 바로 반박했다.오 이사의 안색이 다소 어두워졌다.“문수 씨, 저희 의견도 좀 들어보시죠? 지금 회사는 돈이 부족한 상황이에요. 게다가 관리직들의 월급은 적지 않은 금액이고요. 이 돈을 남겨두면 만약의 상황을 대비할 수 있잖아요.”“그럼 오 이사님 말은 관리직들의 급여를 지급하지 않고 비상일 때를 대비해서 남겨둔다는 거죠? 특수한 상황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이 돈을 쓰지 않겠다는 거네요.”“예기치 못한 특수한 상황들
하지수는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전화를 받았다.“승우 씨.”“문수 지금 어디 있어요? 아버지가 또 응급실에 실려 갔어요!”송승우의 크고 화난 듯한 목소리가 전화 너머로 울려 퍼졌다.하지수는 잠시 멈칫했지만 곧바로 말했다.“저희도 바로 병원으로 갈게요.”“무슨 일이야?”하지수의 표정이 이상한 걸 알아챈 송문수가 물었다.“아버님께서 또 응급실에 실려 가셨대요.”하지수는 자신을 진정시키려 애썼다.송문수는 손에 들고 있던 일을 내려놓고 바로 사무실을 뛰쳐나갔다.하지수도 그 뒤를 따라 급하게 걸었다.두 사람은 한달음에 병원으로 달려갔다. 응급실 문 앞에 도착했을 때, 송기명은 이미 의사와 간호사에게 실려 나오고 있었다.송문수가 가까이 다가가려 했지만 송승우가 그를 막았다.“넌 아버지 앞에 나타날 자격도 없어!”송문수가 이를 악물었다.허영지는 송문수를 한 번 쳐다봤지만 지금은 송기명이 더 걱정되는 상황이었기에 곧바로 의사에게 물었다.“의사 선생님, 제 남편은 괜찮은 거죠?”“걱정 마세요. 큰 일은 아닙니다.”의사는 이렇게 말하며 그녀를 안심시켰다.“변비 때문이에요. 배변할 때 힘을 많이 주셔서 복부 압력이 증가하게 되거든요. 그러면서 혈압이 높아지고 뇌 부분에 흐르는 피가 일시적으로 부족해져서 기절하신 겁니다. 지금은 혈압이 정상으로 회복되었고 다른 문제는 없습니다. 수술을 받으셔서 몸이 조금 약해지셨겠지만 적당히 일어나서 걸어 다니는 게 좋을 듯합니다. 장운동에도 도움이 되니까요.”“감사합니다, 의사 선생님.”허영지는 한숨을 돌리며 말했다.그녀는 송기명이 쓰러진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던 것이다. 혹시라도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정말 무서웠었다. 다행히 그 타이밍에 송승우가 그들을 보러왔고 바로 의사를 불러 응급실로 모셨다.“별말씀을요.”의사는 그렇게 말하며 주의해야 할 점들을 전달했다.“평소에 식사도 좀 더 신경 써서 드셔야 해요. 식이섬유가 많이 들어있는 음식을 드셔야 합니다. 약도 조금 처방해 드릴 거예요. 만약 변비가
“오늘뿐이 아니에요. 어제도 야근했거든요. 병원에서 나와 바로 회사로 갔어요.”하지수는 큰 목소리로 말했다.“문수 씨는 정말 열심히 일하고 있어요.”송기명과 허영지는 깜짝 놀랐다. 그들이 송문수에게 편견이 있었던 것도 있지만 다들 송문수가 이렇게 많이 변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말했다.“문수야, 진짜 철이 들었구나?”송문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의 성격상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그건 사실이라는 걸 의미했다.“문수야, 네가 좋은 쪽으로 발전하다니 너무 좋은데? 엄마 정말 기뻐.”허영지가 말했다.“항상 회사를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이었는데 이제 네가 있으니까 안심이 되네.”“이틈을 타서 잘 배우도록 해”송기명은 엄격한 어조로 말했지만 그가 한 말은 분명 송문수를 인정하는 말이었다.송승우는 송문수에 대한 부모님의 태도 변화를 보고 마음이 복잡했다. 어린 시절부터 칭찬은 늘 송승우가 받아왔으니 말이다. 송문수가 부모님의 관심을 받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그는 불쾌한 감정을 내비치며 말했다.“문수야, 네가 좋은 쪽으로 발전하는 건 물론 좋지만 오래 가지 않을까 봐 걱정돼. 언제까지 계속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걱정하지 않아도 돼. 나는 하기로 했으면 끝까지 하는 사람이거든.”송문수가 단호하게 대답했다.“그건 두고 봐야 알지.”송승우는 다소 비꼬는 듯한 톤으로 말했다.“일을 하는 것과 잘하는 건 또 다른 문제니까. 말만 잘해서 성공하는 게 아니잖아.”하지수는 송승우가 송문수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하는 걸 듣고 바로 입을 열었다.“승우 씨, 회사 돈 문제는 이미 해결되었어요. 회사가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걸 의미하죠. 모두 문수 씨 덕분이에요.”송승우는 놀란 얼굴로 말했다.“은행에서 대출을 해준 건가요?”그 말을 들은 송기명과 허영지도 송문수를 쳐다봤다. 최근 허영지는 송기명이 회사 걱정을 할까 봐 그의 휴대폰을 압수했었다. 그러면서 본인도 회사 일을 멀리했기에 회사가 이미 정상적으로
송기명은 정말 마음이 놓인 듯했다.“돈만 제때 들어왔으면 됐어. 그러면 회사도 유지될 수 있으니까 말이야. 나머지 일은 천천히 해결해도 좋아. 문수야, 다 네 덕이야.”송기명은 송문수에게 고마움을 표현했다.송문수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그의 말에 답했다.“현경이가 힘을 많이 써줬어요. 돈이 필요하다고 했더니 바로 지원을 해줬고 그 후에도 회사를 운영하는 방법에 대해 여러 가지 알려줬거든요.”“현경이한테 많이 배우렴. 어릴 때부터 사업 재능이 있었던 친구야. 현경이와 친구가 된 건 잘한 일이야.”송기명은 안심한 듯 말했다.그 말에 송문수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자 옆에 있던 송승우는 더욱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그는 송문수가 이렇게 쉽게 회사의 문제를 해결할 거라고는 전혀 예상치도 못했다. 회사가 망하는 걸 원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마음속에 말러 표현할 수 없는 불편한 감정이 생겼다.그는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친구들이 언제나 널 도와줄 수는 없어. 이번에 도와줬다고 해도 네가 그 기회를 잘 잡지 않으면 두 번째 기회는 없을 거야. 현경 씨한테 계속 신세 지지도 말고. 현경 씨도 운영해야 할 회사가 있잖아. 그러니까 너도 스스로 독립해야 해.”“문수 씨도 스스로 독립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해외에서도 기획안을 잘 전달하고 돌아왔거든요.”아무 말도 하지 않는 송문수 대신에 하지수가 말했다.그녀는 송승우가 너무 송문수를 무시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지수 씨, 잘하고 있는지는 결과를 봐야 알 수 있는 거예요. 말로만 잘한다고 해서 결과도 좋은 게 아니잖아요.”송승우가 차갑게 말했다.“저는...”송승우의 말에 하지수는 조금 당황한 듯했다.맞는 말이었다. 결과가 좋지 않으면 아무 소용도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무슨 일이든 그 과정에서 최선을 다했다면 결과가 어떻든 인정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난 내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사실은 회사도 잘 관리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송문수가 솔직히 말했다.“하지만 적어
송기명과 허영지의 모든 관심은 지금 송문수에게 집중시켰다. 송문수는 그들의 이런 대우에 약간 어색해하며 약간 당황스러워했다. 그는 그냥 고개를 끄덕이거나 침묵을 지키기만 했다.송승우는 그 모습을 보고 마음속이 찝찝했다.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에게 이런 대우를 받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그는 송문수가 항상 일을 잘하지 못한다고 생각했기에 기대가 클수록 결국 실망할 일이 많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송문수에게 별 기대를 하지 않았다.“늦었으니 너희도 돌아가. 너희 아버지가 무사하다는 것도 확인했잖아.”허영지는 다정하게 말했다.송문수도 거절하지 않았다.내일 아침 일찍 회의가 있어서 너무 늦게 돌아가면 아침에 일어나는 게 힘들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원래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게 어려운 사람이었으니 말이다.송문수와 하지수가 병실을 떠나자 송승우도 함께 나왔다. 세 사람은 함께 엘리베이터로 향했다.분위기는 갑자기 어색해졌다.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사이였지만 어느 순간부터 만나서도 말수가 적어졌다. 아무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새 사람은 지하 주차장에 도착했고 운전기사는 차 안에서 송문수와 하지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송승우는 개인 운전기사가 없는 상태였다. 송문수와 하지수가 차에 타자 송승우도 자연스럽게 같이 차에 탔다.하지수는 송승우를 쳐다보았지만 송문수는 신경 쓰지 않고 창밖을 바라보았다.“기사님, 저 좀 집에 데려다주세요.”송승우가 말했다.“안 돼요?”“아니에요, 아무것도.”하지수는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사실 그는 원래 송기명의 운전기사였다. 송기명이 병원에 입원 중이기도 하고 송문수가 회사 때문에 바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송문수의 운전기사로 된 것이었다.차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하지수는 송문수와 송승우 사이에 앉아 있었는데 이 상황이 왠지 모르게 불편했다. 차라리 조수석에 앉고 싶은 마음이었다.“회사는 요즘 어떻게 되고 있어?”송승우가 갑자기 물었다.하지수는 잠시 눈
“최선을 다한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송승우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만약 기술 투자가 실패하면 그다음에는 어떻게 하실 건가요? 생각해 본 적은 있으세요? 실패하면 회사가 또다시 위기에 빠지지 않을까요?”“그 문제에 대해서는 내일 이사님들과 논의할 예정입니다. 기술 투자가 실패할 경우 회사는 어떤 변화가 필요한지, 어떻게 개선해야 하는지에 대해 상의할 것입니다.”하지수가 설명했다.“기술 투자가 실패한다고 해도 다른 플랜을 준비할 예정이고요.”송승우는 갑자기 말을 잇지 못했다.순간, 무슨 말을 해도 하지수를 반박할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하지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문수 씨랑 생각하고 있었던 플랜이 있긴 하거든요. 만약 기술 투자가 정말 실패하게 된다면 그때는 신에너지 자동차에 대한 연구개발과 판매를 포기할 것입니다.”“그럼 손실은 어떻게 할 건가요? 육현경 씨한테서 돈을 빌렸다는 사실을 잊은 겁니까? 그냥 갚지 않을 생각인가요?”송승우는 다소 흥분하며 말했다.“당연히 갚아야죠. 문수 씨 친구이긴 하지만 업무적으로 엮이면 말이 또 달라지거든요.”하지수가 단호하게 말했다.“송씨 그룹이 지금까지 해오던 사업 분야에서 수익을 내면 되죠. 그러면 조금씩이라도 갚을 수 있잖아요?”“그렇게 많은 돈을 투자해 놓고 그냥 포기하겠다는 건가요?”송승우는 여전히 불만이 많았다. 포기해 버리면 완전히 손해를 본 것으로 되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다른 플랜으로 이득을 볼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니 말이다.“제때에 손실을 멈춰야죠.”하지수가 말했다.“사람들이 기술력을 의심하고 있는 데다가 기술 투자까지 받지 못하게 되면 앞으로 더 이상 기회는 없을 겁니다. 사회적 리스크도 많이 부담해야 할 거고요. 그럴 경우 회사 주식이 하락할 뿐만 아니라 손실이 커질 뿐입니다.”송승우가 또 뭐라고 말하려 했지만 하지수가 그의 말을 끊어버렸다.“물론 내일 이사님들과 함께 논의하고 나서 결정해야 되겠죠. 송씨 그룹이라고 해서 저희만의 회사가 아니니
차 안에 정적이 흘렀다.하지수는 뒷좌석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방금까지 송승우와 일 얘기를 나눴기에 지금 그녀의 머릿속은 온통 업무 생각으로 가득했다. 게다가 기술 투자 쪽에서도 아직 아무 소식 없었기에 걱정이 되었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송씨 그룹이 큰돈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왠지 모르게 불안해지기 시작했다.“방금 형이 너한테 같이 가자고 했었잖아. 왜 따라가지 않은 거야?”송문수가 갑자기 꺼낸 말에 하지수는 깜짝 놀라서 눈을 떴다.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바람에 송문수가 갑자기 말을 걸 줄 몰랐던 것이다.그녀는 잠깐 생각을 하고 나서야 송문수가 방금 무슨 말을 했는지 떠올릴 수 있었다.하지수는 미세하게 이마를 찡그리며 대답했다.“내가 왜 승우 씨를 따라가야 되는데?”“너 우리 형을...”송문수는 말문이 막혔다. 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손가락을 움켜쥐어지고 있었다.“더 이상 우리 형을... 좋아하지 않는 거야?”송문수는 이렇게 질문을 던졌다. 하지수가 어떤 대답을 할지 몰랐기에 그의 가슴은 요동치고 있었다.“응. 없어.”하지수는 아주 단호하게 대답했다.그 순간, 송문수는 가슴이 내려앉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전에 우리 형 많이 좋아하지 않았어?”그는 감정을 억누르며 말을 이어갔다.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지만 그 속에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섞여 있었다.“예전에는 그랬지.”하지수는 웃으며 말했다.“시간이 지나면서 나도 많은 일을 겪었잖아. 좋아하는 감정도 점점 사라지더라고.”그녀는 이어서 말했다.“사람의 감정이라는 건 세월의 흐름을 버텨내기 힘든 것 같아.”송승우에 대한 감정이 이렇게 빠르게 식을 줄은 그녀조차도 몰랐던 것이었다.송문수는 점점 목이 타들어 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이제 아무 감정도 없는 거면 우리 형이랑 가까이 지내지 마. 멀리 떨어져서 지내. 조금의 여지라도 줘서는 안 돼.”“알겠어.”하지수가 대답했다.그녀는 더 이상 송승우에게 어떤 기대나
회의실은 금세 떠들썩해졌다. 모든 사람의 관심이 송승우에게 쏠렸다. 그중 대부분 사람들은 송승우를 칭찬하고 있었다.그는 송문수와 달리 갑자기 회사로 찾아왔음에도 사람들의 비난을 받지 않았다.송승우가 갑자기 나타나는 바람에 이제야 겨우 인정받기 시작한 송문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된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하지수는 송문수를 흘낏 바라보며 그의 표정이 미세하게 변하는 걸 살폈다.송문수는 물론, 하지수도 마찬가지로 송승우의 갑작스러운 방문을 불쾌해하고 있었다.회사는 이미 송문수가 관리하고 있었고 그 덕분에 회사는 전보다 안정한 상태로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송승우가 합류하는 게 흐름을 방해할까 봐 하지수는 걱정이 되었다. 이사들도 분명 송승우를 더 믿는 듯했다.하지만 송승우는 회사를 관리해 본 경험이 전혀 없었다. 그는 지금까지 연구에만 집중해 온 데다가 회사를 경영하는 것과 과학 연구는 전혀 다른 분야였고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물론 하지수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말하지 않았지만 말이다.송승우도 좋은 마음으로 회사의 어려움을 함께 극복하려는 것이었기에 그녀가 불만을 늘어놓을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송문수도 아마 같은 생각일 듯했다.“문수야, 내가 왔는데 기쁘지 않아?”송승우가 송문수를 바라보며 물었다.“당연히 기쁘지.”송문수가 대답했다.“형이 와서 도와준다면 나야 당연히 좋지. 형은 머리가 좋잖아. 형이 있으니까 회사도 더 잘될 거야.”“그 말이 네 진심이길 바랄게.”송승우는 약간 비웃으며 말했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송문수에게 조금의 자비도 베풀지 않았다. 하지만 송문수도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그래서 그는 신경 쓰지 않고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저희는 지금 기술 투자에 대해서 논의하고 있습니다. 아직 저에게 연락을 주지는 않았지만 전 개인적으로 성공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다만 시간이 좀 걸릴 뿐이죠. 하지만 이렇게 기다리고만 있으면 저희의 프로젝트에 지장을 줄 겁니다.”“일단 첫째는 많은 직원들이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그 말에 분위기가 순식간에 어색해지자 예수진이 다급히 말을 받았다.“너랑 나랑은 다르지.”“뭐가 다른데?”“난 너 안 좋아하니까 친구로 지낼 수 있는 거야.”그런 아픈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예수진에 하도경은 충격받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헤어질 때 준 상처로는 부족했는지 만날 때마다 이렇게 하도경의 가슴을 후벼 파는 예수진이었다.“진짜 사랑했던 사람들은 친구가 될 수 없어, 내 말이 맞지 지수야?”일부러 하지수를 언급했지만 그녀는 입술만 말아 물고 있었고 오히려 송문수가 대답을 가로챘다.“그냥 친구로 지낼만한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고 판단해서 그럴 수도 있지.”하지수는 입까지 올라온 말을 삼켜냈고 예수진은 생각 없이 아무 말이나 막 뱉는 송문수를 노려보며 저 싹수면 이혼당할 만하다고 생각했다.“우리 진짜 오랜만에 모인다, 다음에 만날 때쯤이면 우리 애도 다 태어났겠어.”“도경아, 오늘은 진짜 취하기 전엔 아무도 집에 보내지 말자.”계지원이 분위기를 풀기 위해 말하자 하도경도 눈치 있게 대꾸했다.“좋아.”어차피 예수진 때문에 마음고생을 너무 해서 더 다칠 마음도 없었기에 하도경은 공허한 제 가슴에 술이나 퍼부으려고 맥주를 따기 시작했다.그렇게 남자들 앞에 한 병씩 놓아준 하도경은 여자들을 보며 물었다.“우리 여자분들은 물, 우유, 음료수 중에 고르세요.”“전 물 마실게요, 알아서 마실 테니까 신경 안 쓰셔도 돼요.”“전 맥주 주세요.”평소엔 술을 즐기지도 않고 예수진과 소이연이 마실 때만 한 잔씩 같이 마시던 하지수가 갑자기 맥주를 요구하자 다들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쳐다봤다.“오랜만에 보는 거니까 저도 한잔하고 싶어서요. 요즘 송승우 옆에만 있느라 또 언제 나올지도 모르잖아요.”“송승우는 좀 어때?”궁금한 건 못 참는 예수진이었기에 말 나온 김에 하지수를 향해 물었다.“아직도 죽겠다고 난리야?”“아니, 지금은 많이 좋아졌어.”“다 큰 남자가 왜 자기 목숨으로 가족들 협박하는 거야?”처음에는 송승우를 안타까워
그 한 달 동안 송문수는 하지수 앞에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부모님이 같이 밥이라도 먹자고 집으로 불러도 송문수는 회사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가족 모임에도 참석하지 않았다.말은 그렇게 해도 본인이 내키지 않아서 안 온다는 걸 허영지와 송기명은 알고 있었다.불행 중 다행으로 송승우의 회복속도는 눈에 띄게 빨랐다.송씨 집안 주치의가 매일같이 검사를 진행하며 회복속도를 체크하고 있었는데 이 정도면 두 달 뒤에 바로 의족을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소견도 듣게 되었다.그 말에 허영지와 송기명도 마침내 큰 시름을 덜었다는 듯 환하게 웃었다.송승우와의 교제를 약속한 하지수도 매일 그의 옆을 지키며 함께 재활 치료를 진행하고 있었다.그렇게 별장에서만 지내던 어느 날, 하지수는 예수진의 전화를 받게 되었다.곧 출산하는 데 그러면 산후조리원에 가야 해서 먹고 싶은 걸 마음껏 먹지 못하니 그전에 한 번 만나서 원 없이 밥이나 먹자는 연락이었다.그 말을 들은 하지수는 자신에게도 기분전환이 필요하다 싶어 더 고민할 것도 없이 그녀의 제안을 수락했다.지금 본인의 상태가 우울한 건지는 잘 몰랐지만 살아갈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어서 마음을 다잡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송문수도 가는 거야?”예수진과 밥을 먹으러 간다는 얘기를 송승우에게 했을 때 그가 던진 첫마디가 바로 저것이었다.송문수와 예수진의 사이가 돈독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송문수와 하지수가 따로 만날까 봐 걱정돼서 한 질문인 것 같았지만 하지수는 바로 대답했다.“몰라요, 그건 안 물어봤어요.”“그런데 문수 씨가 간다고 해도 내가 못 갈 이유는 없잖아요. 송문수 때문에 내 가장 친한 친구를 안 볼 순 없어요.”하지수가 너무 직설적으로 말해 당황했던 송승우는 멋쩍게 웃으며 대꾸했다.“그냥 한번 물어본 거야. 속 아프니까 술은 너무 많이 마시지 마.”“네.”그날 저녁 하지수는 바로 예수진의 집으로 향했다.그때 집에는 예수진의 가족뿐이었는데 안 본 사이 더 커진 배를 보니 두
이혼 시간까지 다 정하고 나니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진 둘은 가만히 소파에 앉아있었다.그 숨 막힌 정적 속에서 한참을 앉아있던 송문수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난 이만 가볼게.”말을 마친 송문수는 하지수가 대답하기도 전에 등을 돌려 집을 나서버렸다.서울을 떠날 때처럼 미련 없이 돌아서는 송문수에 하지수의 시야가 흐려졌다.하지수는 뿌얘진 시야에 끝까지 그의 뒷모습을 담았다.이튿날, 하지수는 약속대로 송문수와의 이혼을 위해 법원으로 향했는데 송문수는 먼저 와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는 하지수가 차에서 내리며 안에 앉아있는 또 다른 이와 뭐라고 말하는 걸 지켜보았다.그 안의 있는 사람은 당연히 송승우일 것이기에 송문수는 시선을 돌리며 라이터를 만지작거렸다.공공장소에서는 흡연이 금지된 상태였기에 그는 이런 식으로 담배를 피우고 싶은 욕구를 잠재우고 있는 것이었다.하지수는 대화를 마친 건지 종종걸음으로 송문수에게 다가가 말했다.“오래 기다렸어? 미안해.”“아니야, 내가 빨리 온 거야.”그녀가 제게 다가오자 송문수는 라이터를 주머니에 찔러넣으며 말했다.“들어가자.”“그래.”그렇게 둘은 법원으로 들어가 대기하고 있었는데 그때 송문수가 합의서를 건네며 말했다.“내가 알아서 작성했는데 맘에 안 드는 거 있으면 바로 말해줘, USB 챙겼으니까 여기서 고칠 수 있어.”사실 어젯밤 송문수가 파일을 보내와서 하지수는 이미 확인을 마친 상태였다.둘 사이에는 자녀가 없으니 양육권 싸움도 없었고 이익을 따지는 사이가 아니니 재산분할에도 큰 문제 없었다.그럼에도 제게 40억을 주겠다는 송문수를 하지수는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어차피 큰돈도 아니라서 헤어지는 대가로 주겠다는 그의 말에 공감이 가 그저 받기로 했다.송문수한테는 정말 적은 돈이긴 하니까.그리고 돈으로서 둘 사이를 깔끔히 정리하는 걸 송문수도 원할 것 같아 하지수는 결국 그걸 받는 조건으로 서류에 사인을 한 것이다.이혼서류를 제출하자 직원이 한 달간의 이혼 숙려기간이 있다는
애써 태연한 척하고 있었지만 핸들을 잡은 손이 하얗게 질려가고 있었다.제멋대로 날뛰는 심장임에도 송문수는 그걸 애써 무시하며 집으로 향했다.차가 멈추자 하지수는 송승우를 부축하며 차에서 내렸는데 송승우의 몸은 껌딱지처럼 하지수에게 딱 달라붙어 있었다.그를 차에서 내려 휠체어에 앉히는 모든 과정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웠다.마치 매일 하던 행동인 것 마냥, 그래서 몸에 배어버린 것마냥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하지수, 송문수, 송승우가 집 안으로 들어가자 허영지와 송기명도 마침 도착해있었다. 나이 드신 분들이라 보름 동안 돌아오지 못했던 집이 그리웠던 허영지와 송기명은 바로 방으로 돌아갔다.아무리 편한 호텔에서 자도 제집만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은 먼저 잠부터 청했다.그리고 송승우도 피곤해해서 하지수는 휠체어를 밀며 그를 방에 데려다주었다.순식간에 혼자 남아버린 송문수는 소파에 앉아 하지수를 기다렸다.원래는 송문수를 데려다주고 나가려 했는데 저에게 할 말이 있다는 하지수 때문에 이렇게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솔직히 하지수가 언제 내려올지는 미지수였기에 송문수는 하지수가 잠에서 깬 다음에 내려올 수도 있다는 최악의 상황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다.그렇게 되면 하루를 꼬박 기다려야 할 수도 있었지만 송문수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듯 보였다.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2층에서 홀로 내려오는 하지수가 보이자 송문수의 심장박동은 저도 모르게 빨라졌다.몸에 힘이 자꾸만 들어가며 뭐가 그렇게 긴장되는지 몸을 가만둘 수가 없었다.하지수가 자연스럽게 송문수의 옆에 자리 잡고 앉기는 했지만 둘 사이에는 아직도 어색한 기류가 감돌고 있었다.부부인데도 부부답지 않았고 가족임에도 가족 같지 않은 둘의 애매모호한 사이 때문이었다.이렇게 보니 제 인생은 참으로 우습기 짝이 없는 것 같아 송문수는 바로 본론부터 꺼냈다.“나한테 할 말 있다며, 뭐야?”송문수는 더 이상의 희망을 품지 않기 위해, 하지수와 한 지붕 아래에서 얼굴을 맞대지 않기 위해,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난 충동적인 적 없어요, 그리고...”하지수가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송승우가 대뜸 소리를 질렀다.“그럼 너 나랑 다시 사귈 수 있어?”터무니없는 그의 말에 하지수는 적잖이 당황했는데 송승우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을 이어나갔다.“네가 내가 아닌 송문수를 좋아한다는 걸 난 못 믿겠어. 난 아직도 네가 그때 내가 말도 떠난 일로 화내는 것 같아. 그러니까 나랑 다시 사귀자. 6개월만 만나보고 그때도 네가 송문수를 선택한다면 나도 깔끔하게 포기할게.”하지수는 자신이 송승우를 다시 좋아할 리 없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가 완벽히 포기해야 끝나는 싸움이었기에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 버렸다.하지수는 이제 송승우와의 이 지긋지긋한 인연에서 벗어나고 싶었다.“좋아요.”하지수가 긍정적인 답을 하자 자신만만했던 송승우의 얼굴에는 바로 미소가 번졌다.자신이 한쪽 다리를 잃긴 했지만 송승우는 그래도 하지수의 사랑을 다시 거머쥘 자신이 있었다.송승우는 단 한 번도 송문수를 제 상대로 여겨본 적이 없었다.그리고 하지수도 바보가 아닌 이상 이렇게 완벽한 저를 놔두고 멍청한 송문수를 선택할 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조건이 하나 더 있어.”“말해요.”“문수랑 이혼부터 해.”“네가 나랑 사귀겠다고 했잖아. 난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수군거리는 게 싫으니까 당당하게 너랑 만나고 싶어.”송승우의 말에 하지수는 입술을 말아 물고 생각에 잠겼다.송문수와의 결혼 관계를 유지하며 송승우와 만나는 건 바람피우는 거랑 다를 바가 없는데 그건 서로에 대한 존중을 깨는 거라서 하지수도 썩 내키진 않았다.“알겠어요.”하지수가 이혼만 하면 저와 재결합을 할 가능성이 더 커지는 것이기에 송승우의 미소는 아까보다 더 선명해졌다.“대신 나도 조건이 있어요.”“뭐든 말만 해.”기분이 좋았던 송승우는 하지수가 제시한 조건을 고민도 없이 받아들였다.송승우는 하지수는 어차피 저 아니면 안 된다고 자신을 하고 있었다....일주일 뒤, 송승우가 퇴원하자 드디어 가족들이 전부
“네.”“회사 일을 이제는 문수가 다 책임지고 있으니까 빨리 가는 것도 맞지, 승우도 많이 좋아졌으니까 이제 매일 간호할 필요도 없잖아.”하지수를 직접 키워온 허영지는 그녀의 기분이 안 좋다는 걸 한눈에 보아낼 수 있었다.그래서 빈말이지만 기분을 조금이라도 풀어주기 위해 애를 썼다.“네.”그런 허영지의 노력을 보아낸 건지 하지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엄마, 아빠도 그동안 고생 많으셨어요. 저 이제 중환자실에서도 나오고 의사 선생님도 별문제 없다고 했으니까 두 분은 먼저 돌아가서 쉬고 계세요. 며칠만 더 있으면 퇴원도 가능하다고 하잖아요.”“그래.”송승우의 상태가 많이 좋아져서 마음을 놓을 수도 있었고 또 지금 하지수와 단둘이 있고 싶어 하는 아들의 속내가 너무 눈에 훤해서 허영지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우린 그럼 먼저 갈게. 지수야, 승우 잘 부탁해. 네가 고생이 많다.”말이야 친절하기 그지없지만 사실은 하지수의 발을 여기 묶어두는 거나 마찬가지였다.“네.”하지수 역시 제 시어머니의 의도를 알지만 거절하지는 않았다.하지수의 대답을 들은 허영지는 마음이 한결 놓여 송기명을 밀며 병실을 빠져나갔다.송기명은 등 떠밀려 나가면서도 끊임없이 한숨을 내쉬었다.상황이 이렇게 흘러가는 데에 대한 불만이 많아 보였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허영지와 송기명이 나간 병실에는 하지수와 송승우 둘뿐이었다.“과일 좀 먹을래요?”“응, 고마워.”하지수가 먼저 그 어색한 정적을 깨며 묻자 송승우도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배를 집어 든 하지수는 열심히 깎기 시작했는데 송승우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한참 지나 껍질을 다 깎아낸 하지수는 배를 작게 썰어 송승우의 앞에 놓아주었다.“천천히 먹어요.”“넌 안 먹어?”“입맛 없어요.”송승우는 입맛 없다는 하지수에게 굳이 권하지 않고 천천히 과일을 먹기 시작했다.도도하고 자신만만하던 송승우의 모습을 다시 본 하지수는 송승우의 말대로 거기에 자신의 공
하지수는 송문수를 따라 송승우의 병실을 빠져나왔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앞을 향해 걷기만 했다.병원 입구에 도착하자 송문수를 기다리고 있는 차량이 보였다.그래도 작별인사는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어 차 문도 열지 못하고 망설이던 송문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결국 그냥 차에 타려 했는데 그 순간 하지수가 그를 불러세웠다.“문수 씨.”“장안시로 돌아가면 서울엔 다시 올 거야?”“안 올 것 같아 아마. 송승우도 많이 나았으니까 얼마 안 있으면 퇴원하겠지. 그럼 엄마 아빠가 송승우 집에 데려가서 보살피려 할 텐데 내가 뭐하러 여기까지 와 힘들게.”“그래서 나 혼자 여기 버려두겠다는 거구나.”하지수가 내뱉은 담담한 한마디에 송문수는 심장박동이 멎는 것만 같았다.숨을 내쉴 수조차도 없이 가슴이 아파와서 그는 이를 악문 채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여전히 침묵만 유지하는 송문수에 마지막 기대도 사라져버린 하지수는 이제 그만 그를 보내주기로 했다.송문수 말대로 자신은 그저 그가 마음을 다잡을 때 마침 옆에 있었던 여자일 뿐이니, 여기서 뭘 더 바라는 것도 욕심인 것 같았다.아무리 노력해봐도 송문수의 마음은 저를 향하지 않으니 하지수는 이제 그와의 사이를 끝내려 했다.“조심히 가.”이렇게라도 서로의 마음을 제대로 확인했으니 하지수는 그거면 된 것 같았다.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아주 많았지만 저 짤막한 한마디만 내뱉고 웃으며 돌아섰다.그 작은 몸통이 외로이 돌아서는 걸 보던 송문수는 가슴이 아파왔다.정말 제가 하지수를 버린 것만 같아서, 또 하지수를 혼자만 남겨둔 것 같아서 가슴이 아려왔다.주먹을 꽉 말아쥔 채 온몸을 떨어대던 송문수는 당장이라도 그녀에게로 달려가 그녀를 품에 안고 싶었다.하지만 그럴 수 없었기에 그는 제 충동을 잠재우며 무거운 발걸음을 내디뎌 결국 차에 올라탔다.하지수에게는 송승우가 있었으니, 그녀는 한 번도 혼자인 적이 없었으니 이번에도 혼자일 리는 없을 것 같아서 그는 미련 없이 돌아서기로 했다.한편 한참을
송승우가 병실을 옮기고 나니 가족들은 그제야 한숨 돌릴 수 있었다.“엄마, 아빠 고생 많으셨어요. 저 걱정하느라 제대로 쉬지도 못하셨죠.”“너만 괜찮을 수 있다면 우린 뭐든 다 할 수 있어.”병원 침대에 누운 채 감성 어린 말을 하는 송승우를 향해 허영지는 감격에 겨워 말했다.허영지는 송승우가 중환자실에서 나온 뒤 정말 많이 변한 것 같았다.더 이상 나쁜 생각은 하지 않고 전과 다름없이 씩씩하게 본인의 생활을 이어나가는 것 같았다.“제가 하루빨리 마음 다잡아서 이제 엄마 아빠 실망시켜 드리지 않을게요.”“넌 한 번도 우릴 실망시킨 적이 없는 애야, 넌 계속 우리의 자랑이었어.”제 손을 잡은 채 저와 눈을 맞추며 말하는 엄마를 향해 송승우도 웃음을 지어 보였다.정말 눈물 나도록 다정한 모자지간이었다.송승우가 병실을 옮긴다는 소식에 병원으로 달려온 송문수도 병실 한쪽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하지만 그들의 대화에는 끼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라이터만 만지작거리는 그는 어쩐지 제 가족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한편 허영지와 대화를 나누던 송승우는 하지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그녀는 아직까지도 간호사에게 자신의 상태를 물어가며 앞으로는 어떻게 재활 치료를 진행해야 하는지에 대해 자세히 묻고 있었다.자신의 일에 이렇게 신경을 써주는 하지수를 보며 송승우는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고마워, 지수야.”“아니에요, 당연한 일인데요 뭘.”“네 덕분에 내가 이렇게 빨리 마음 다잡을 수 있었어. 너 아니었으면 현실을 이렇게 빨리 받아들이진 못했을 거야.”“나 응원해줘서 정말 고마워.”하지수는 결국 그 감사 인사를 받아들인다는 듯 웃어 보이고는 다시 간호사를 보며 디테일하게 보호자로서 해야 할 일들을 물었다.다들 제 자리를 잡은 듯한 모습에 송문수는 그만 병실을 나가려고 몸을 일으켰는데 그때 송기명이 그를 불러세웠다.“문수야, 어디 가?”“장안시로 돌아가야죠 이제.”담담히 말하는 송문수에 송기명은 놀란 기색을 내비쳤다.“지금
허영지의 말에 다들 그녀의 시선을 따라 눈을 돌렸고 그 시선 끝에는 하지수가 서 있었다.하얗게 질린 얼굴로, 멍하니 서 있던 하지수는 송문수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지수야, 여긴 어떻게 왔어?”그런 하지수를 본 허영지는 다급히 그녀에게로 달려갔다.하지수가 송문수의 말을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들었다면 둘 사이에 감정이 있든 없든 마음이 아플 것은 당연지사였기에 허영지는 하지수가 안쓰러웠다.하지수는 굳어버린 고개를 힘겹게 돌리며 허영지를 향해 말했다.“일어나보니까 호텔에 아무도 없어서 왔어요.”눈 떠보니 사라져버린 송문수에 빠르게 병원으로 달려온 거지만 혹시나 송문수가 자신의 몸 상태를 걱정하며 오지 말라고 말릴까 봐 연락은 하지 않았었다.하지만 송문수가 또다시 허영지와 싸울까 봐 말도 없이 온 건데, 오자마자 하지수는 송문수가 내뱉는 차가운 말들을 모조리 들어버린 것이다.저를 물건 취급하며 송승우에게 넘겨주겠다는 송문수의 말에 하지수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이제 좀 달라진 줄 알았는데, 송문수한테 저는 여전히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란 걸 이렇게 알게 될 줄은 몰랐는데...모든 게 다 저 혼자만의 착각인 것 같아 하지수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차올랐다.“아직도 많이 피곤해서 전 이만 호텔로 돌아가 볼게요.”그래서 그녀는 빠르게 고개를 돌리며 병원을 나섰다.자신들에게 우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등을 돌리는 하지수를 보며 허영지 역시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하지수가 친딸은 아니었지만 어릴 때부터 같이 키워왔던 아이였기에 허영지는 그녀를 친딸 이상으로 아껴주었다.부모도 잃은 아이가 저렇게 충격받은 모습으로 자리를 뜨는 게 가슴이 아팠지만 허영지는 끝내 송문수 더러 하지수를 위로하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허영지는 이번에도 이기적이게 송승우를 위해 송문수를 희생시킨 것이다.송승우가 나을 수만 있다면 송문수와 하지수 사이에는 아무 감정도 없다는 그 말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하지만 송기명은 그런 아이들을 두고 볼 수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