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진은 스태프의 말을 들으며 황당했다.뭐라고 했더라? 신랑과 신부가 신혼여행을 떠났다고? 이렇게 많은 하객들을 남겨두고 말이야? 그리고 자기들에게 대신 손님들을 대접하라고?이 상황은 정말 역대급이다.“고생 많으십니다.”“네 분 이쪽으로 오세요. 이미 준비해 둔 술잔과 차가 있습니다.”스태프가 말했다.“...”...소이연과 육현경은 예식이 끝난 후 호텔을 바로 떠났다.소이연은 좀 당황했다. 그녀는 계속 육현경에게 이끌려 호텔 정문을 나왔다.문 앞에는 차가 대기 중이었다.육현경이 그녀의 차 문을 열어주며 복잡한 결혼 예복을 정리해 준 후 그녀를 차에 태웠다. 자신도 옆에 타더니 차는 그대로 출발했다.소이연은 차가 호텔을 멀어지는 걸 그저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지금 어디 가는 거야?”한참 후에야 소이연이 상황을 파악하고 물었다. 식사는 하지 않는 건가?이렇게 떠나버리면 저 많은 하객들은 어떻게 되는 거지?“신혼여행 가는 거야.”“뭐라고?”소이연이 육현경을 바라보았다.“신혼여행.” “지금? 이런 차림으로? 결혼식도 안 끝났는데 우리가 가버리겠다고?.”소이연은 믿기지 않았다. 육현경이 이렇게 충동적인 사람은 아닌데. 이런 일을 하면 생길 후폭풍을 생각이나 해봤을까?그녀는 상상이 가지 않았다.“걱정하지 마. 이미 너희 외할아버지께 미리 말씀드렸어.”“외할아버지께서 동의하셨어?”소이연은 놀랐다. 예절을 중시하는 천제진이 이렇게 비정상적인 일을 허락하다니.“동의하셨어.”육현경이 자랑스럽게 말했다.“도대체 뭐라고 말씀드린 거야?”“우리 결혼한 지 꽤 됐는데 아직 신혼을 제대로 못 즐겼다고 말씀드렸어.”“...”“너희 외할아버지께서도 남자라 이해하시더라고.”“...”“그리고 네 오빠한테도 얘기했어.”육현경이 말했다."천씨 가문 쪽 친척들은 네 오빠가 알아서 돌봐줄 테니 걱정 말고 신혼여행 다녀오라고 하셨어.”“혹시 오빠의 무슨 약점이라도 잡힌 거야?”소이연은 의심스러웠다.“아니야
육현경이 말했다.“지금은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곳에서 너와 단둘이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을 뿐이야.”“민이도 두고 가겠다는 거야?”“부정하지 않겠어. 이제 민이는 매우 밝은 큰 방해물이 되어버렸어.”“너를 그렇게 우러러보는 아들인데.”그런데 이 사람 아들을 완전히 속여넘겼다.“나중에 크면 이해할 거야.”변명은 이미 다 준비된 것 같았다.“아무 걱정도 하지 말고 편안히 우리 둘만의 세상을 즐기자.”소이연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이미 여기까지 준비한 육현경을 보며 소이연은 할 말이 없었다. 그냥 즐겨보자는 마음이었다. 다만 돌아가면 예수진에게 죽이려 들지도 몰라 걱정이 됐다....예수진은 진짜로 소이연과 육현경을 죽여버리고 싶었다. 손님이 80여 테이블이나 있었다.한 테이블씩 돌아다니며 술을 권하고 있었다. 술을 권하는 것뿐 아니라 신랑과 신부가 중간에 사라진 이유를 변명해 주는 일까지 해야 했다. 한 바퀴 돌며 술을 다 마시고 나니 예수진은 온몸이 완전히 지친 것 같았다.마침내 네 사람은 힘겹게 식탁에 앉았다. 계지원, 천우진과 심문헌은 이미 그곳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소이연에 있어 이들은 가장 중요한 친구들이었다. 천우진이 주최자로서 직접 이들을 대접하고 있었다.“진짜 죽을 것 같아. 몸이 거의 부서질 지경이야.” 예수진은 못 견디겠다는 듯이 말했다. “육현경과 소이연 그 둘 다신 돌아오지 않는 게 좋겠어. 정말로 이렇게 맘대로 떠나다니.”“둘이 겨우 다시 만났으니 결혼 후에 서로 일이 많아도 단둘이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하는 건 이해할 만해.” 하지수가 위로하며 말했다. “알아. 하지만...”예수진는 말하다가 멈추었다. “그만 얘기하고 밥이나 먹자. 진짜 배고프고 힘들어 죽겠어. 술이나 좀 마셔야겠어.” “배고프고 피곤한데 술을 마신다고?” “술 마시면 피로도 풀리고 스트레스도 해소되잖아. 몰랐어?” 예수진이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맞은편에 앉아 있는 천우진을
예수진은 아침의 느낌을 떠올리며 여전히 약간 불편했다. 다행히 이때 맥주가 도착했다. 그녀는 맥주를 보고 아침의 불쾌함을 잊고 바로 일어나 맥주를 한 잔 마시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가 잔을 들자마자 계지원이 갑자기 그녀의 잔을 가져갔다.“수진아, 너 이제 술 마시면 안 돼.”예수진은 멍하니 잠시 멈췄다가 곧바로 불만스럽게 물었다. “왜? 나 오늘 정말 힘들었는데 좀 쉬게 해주면 안 돼?” “네 몸 상태에 술이 맞지 않아.”“내 몸 상태가 왜? 걱정하지 마. 감기 안 걸렸어...” “너 임신한 것 같아.”계지원이 단호하게 말했다.예수진은 눈을 크게 떴다. 다른 사람들도 그녀를 바라보았다.“나... 그럴 리가? 우리... 그렇게 쉽게 되진 않잖아?”예수진은 흥분해서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지난달 생리는 며칠날에 시작했어?”계지원이 물었다.“지난달 10일쯤?”그녀는 가물가물했다.원래 생리 날짜를 잘 기억하지 않는 편이었다. 어차피 매달 오니까 구체적인 날짜는 신경 쓰지 않았다.“12일이었어.”계지원는 정확히 말했다.“그런 것 같아.”예수진은 살짝 당황했다. 계지원이 날짜를 이렇게 잘 기억하는 줄은 몰랐다.“그리고 오늘은 며칠이지?”“28일?”예수진은 휴대폰을 확인했다.맙소사!생리가 10일 이상 늦었는데 자신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다른 사람들도 긴장하기 시작했다. 오늘 예수진의 이상한 행동을 생각하면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설마?”예수진은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이번 달부터 피임을 안 하기 시작했을 뿐인데 이렇게 한 번에 성공할 줄이야?계지원이 그렇게 대단한가?사실 수진이가 하연을 가졌을 때는 더 놀라웠다.단 한 번에 성공했으니까.그녀는 어쩔 줄 몰라 하며 계지원를 바라보았다. “식사 후, 병원에 가서 검사해 보자.”계지원이 말했다.“만약 정말 임신이면 어쩌지?”예수진이 물었다.계지원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당연히 낳아야지.”“...” 그
올해 이미 서른을 넘었다. 서른이라니. 정말 청춘은 다 간 것 같다. “우리가 같아? 난 곧 애 둘 엄마가 되는데, 넌 아직 애가 어느 별에서 뭘 하고 있을지 모르잖아.”“...”예수진은 정말 하지수가 우울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걸까? 아무리 그래도 적당히 해야지.“이연을 봐봐. 우리랑 동갑인데 몇 년 지나면 시어머니가 될 수도 있겠지?”“그건 너무 과장 아니야.”하지수는 어이없어하며 반박했다. 육민이 겨우 십몇 살인데.“너 고령 임신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아?”예수진이 말했다. “나 아직 고령 임신은 아니잖아?” “계속 애 안 낳다 보면 결국 고령 임신 되는 거야.”“근데 애 낳고 싶다고 해서 바로 가질 수 있는 게 아니잖아.”“설마 송문수가 문제있는 거야?”예수진은 크게 말하며 송문수를 똑바로 쳐다봤다. 송문수는 옆에서 여유롭게 음식을 먹고 하도경, 천우진, 심문헌과 가끔 술잔을 기울이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그냥 혼자서 편안하게 즐기고 있는 모습이었다. 마치 예수진과 하지수의 대화에는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바로 옆에 앉아 있었지만 그들과 무관한 사람처럼 보였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송문수과 하도경이 연인 사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둘이 아주 가까이 앉아 있었다. 송문수는 일부러 하지수와 거리를 두려는 건가? 그때 예수진이 자신의 이름을 언급하자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입가에 능청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내가 어떤지 수진 씨가 더 잘 알지 않아?”“내가 뭘 안다고 그래? 내 명예 더럽히지 마.”예수진은 서둘러 말을 피했다. “내 말은 우리가 어릴 때부터 같이 자라왔고 연예계의 스타들이랑도 많이 일해봤잖아. 그녀들이 내 실력에 대해 말해준 적 없어?” “다 네가 그렇게 뻔뻔한 건 아니거든.”예수진은 짜증스럽게 말했다.그동안 송문수가 바람을 피운 것을 생각하면 하지수가 정말 안타깝다고 느꼈다. 자신이었으면 벌써 송문수와 여덟 번은 이혼했을
오찬 후, 예수진은 계지원에게 이끌려 병원에 갔다. 하지수는 연회장에서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사실 술을 꽤 많이 마셔 얼굴이 붉어졌고 조금 취했지만, 정신이 완전히 흐려진 건 아니었다.게다가 이연이 맡긴 일이니 당연히 소홀히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송문수를 보지 못했다. 그가 이런 모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공식적인 모임일수록 그는 더 꺼렸다.그는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먹고 마시고 노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하도경은 여전히 대기실에 남아 손님을 돕다가, 얼마 안 있어 자리를 떴다.천씨 가문 사람들이 힘을 많이 실어주고 있는 걸 보고, 그도 어느새 사라졌다.“지수야, 피곤하면 가서 좀 쉬어도 돼. 여기는 내가 맡을게.” 천우진이 손님들을 맞이하다 하지수를 발견하고는 걱정스레 말했다. “오늘 아침부터 계속 일하느라 많이 피곤할 텐데.”“괜찮아요.” 하지수는 고개를 저었다. “여기에는 이연의 장안시 친구나 친척들이 많아서 내가 잘 알고 있어요. 내가 접대할게요.”천우진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아무튼 피곤하면 언제든 쉬어.”“알겠어요.” 하지수는 환하게 웃었다. 천우진도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른 쪽으로 갔다.사실 하지수가 쉬고 싶지 않은 것도 피곤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다만 지난번 송문수과 같은 방을 사용했던 일이 생각났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같은 방일 것이다. 그녀는 송문수와 어떻게 지내야 할지 정말 모르겠다. 정말 예수진이 말한 것처럼 일찍 포기해야 할까...그녀는 손님들 사이로 걸어갔다.하도경과 송문수는 호텔 방에서 샤워를 마치고 내려와 다시 손님을 맞이하러 나왔다. 육현경이 책임을 회피했지만 친구로서 맡은 일은 무조건 끝내야 했다. 그 순간 하지수와 천우진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았다. 둘이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지 하지수는 천우진에게 달콤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송문수의 얼굴에 미묘한 변화가 나타났다. 하도경은
다만 너무 무뚝뚝한 점이 문제였다. 웃지 않을 때는 정말 사람을 압도하는 느낌을 주었다. 하지수는 옆에 있는 휴게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지금은 시간이 애매해서 호텔로 돌아가 잠을 잘 수 없었다. 혹시나 푹 잠들어버릴까 봐 염려되었다. 저녁에는 만찬이 또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수는 휴게실 소파에 기대어 시간을 보내려고 핸드폰을 꺼내 들었지만 보다 보니 그만 잠이 들어버렸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저녁 6시가 되어 있었다. 단순히 잠깐 눈을 감았던 것 같았는데 어느새 한 시간 넘게 지나버린 것이었다.하지수는 놀라 황급히 일어났고, 그 순간 자신의 몸 위에 담요가 덮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핸드폰도 옆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신기했다.누가 들어왔던 걸까? 소파에서 일어나 휴게실 문을 열자마자 천우진을 발견했다.“만찬이 시작돼서 너를 깨우러 가려던 참이었어.” 천우진이 말했다.“아, 네.”하지수가 급히 대답했다.“오늘 만찬이 끝나면 시간 보고 퇴장해도 돼. 다른 손님들은 내가 알아서 배려할게. 하루 종일 고생했으니 오늘 밤은 일찍 쉬어.” 천우진이 덧붙였다.“네.”하지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밤은 진짜로 더 이상 버티기 힘들었다. 그리고 이런 만찬 자리에서는 놀고 싶은 사람들은 밤늦게까지 계속 놀기도 했다.“선배 고마워요.”하지수가 진지하게 말했다.“내가 더 고맙지. 이연에게 너 같은 친구가 있어서 정말 든든해.”“내가 하고 싶은 말은...” “우진아, 이리 와보게.” 천제진이 그를 불렀다.천우진은 서둘러 대답하고는 하지수에게 자유롭게 하라고 말한 후 떠났다.“네, 가서 바쁘세요.” 하지수는 타인에게 폐를 끼치는 것을 가장 싫어하는 성격이었다. 사실 방금 그녀에게 담요를 덮어준 것에 대해 고맙다고 말하려던 참이었다. 아마 천우진이 해준 것일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그녀가 여기서 쉬고 있는 것을 알 리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라면 굳이 이런 일을 하지 않
“너도 같이 갈래?”하도경이 송문수에게 물었다. 송문수는 그를 무시하고 오고 가는 손님들과 잔을 들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하도경은 어이없게 웃음을 지었다. 정말 잘 굴리네.얼마나 더 연기할 수 있는지 두고 보자. 하지수는 방에 돌아와 씻고 화장을 지운 후 호텔에서 준비한 편안한 가운으로 갈아입고 호텔의 고급스러운 침대에 누웠다. 분명히 피곤한데도 정작 잠이 오지 않았다. 오늘 밤 송문수는 어디서 머물게 될지 궁금했다. 호텔에 체크인할 때 숙박 정보를 확인해 보니 그들의 이름이 함께 등록되어 있었다. 그러니 같은 방에 머물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가 언제쯤 돌아올까? 하지수의 마음에는 잔잔한 떨림이 일었다. 결국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일어나 물 한 잔을 마신 후, 호텔의 통유리창 앞 의자에 앉아 서울의 아름다운 야경을 바라보았다. 역시나 나라의 중심 도시답게 네온사인이 반짝이며 눈부셨다. 하지수는 이 야경에 홀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휴대폰에서 카톡 알림이 울렸다. 그녀는 화면을 확인하며 잠시 멈췄다. 놀랍게도 송승우가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지수야, 서울에 있단 소식 들었어.” “네. 이연 언니가 결혼해서 서울에 왔어요.” “언제 돌아가?”“아마 내일쯤 돌아갈 것 같아요. 오늘은 너무 늦었고 이연이랑 육현경은 자기들만 신혼여행 떠나고 우리한테 잔치 뒷정리를 맡기고 갔어요.”하지수는 송승우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송승우는 웃는 이모티콘을 몇 개 보냈다.“나도 뉴스 봤어. 참 신기하더라.”“그나저나 내일 돌아가기 전에 내가 내일 시간이 좀 나니? 여기까지 온 김에 서울 구경할래? ” 송승우는 현재 서울에 발령받아 일하고 있고 1년이 넘게 여기서 생활하고 있었다. 이전에는 장안시에서 근무했지만 탁월한 능력 덕분에 본부로 전근되어 지금은 연구소에서 핵심 연구원으로 활약 중이다. 송씨 가문의 부모님은 항상 송승우를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국가에 공헌하는 사람이니
송승우는 아무 소리도 없이 조용히 떠났다.당시 송씨 가문 사람들은 매우 다급해졌다. 결혼식 준비는 모두 끝났는데 신랑이 갑자기 자취를 감췄으니, 소문이라도 나면 송씨 가문의 체면이 손상될 상황이었다. 그래서 송씨 가문은 급하게 송문수가 하지수와 결혼하도록 결정했다. 송씨 가문에서는 물론 그녀의 의사를 물었다. 그러나 하지수는 본래 기댈 곳이 없는 처지였기에 별다른 선택권이 없었고 송문수가 자신을 결혼 상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으로 생각해 결국 승낙했다. 그런데 그녀의 예상과는 달리 송문수 역시 승낙한 것이었다. 하지수는 송씨 가문 부모가 어떤 방법을 써서 송문수에게 강요한 것이라 생각했지만 어쨌든 그들은 결국 결혼식을 올렸다. 비록 매우 급작스럽고 어설픈 결혼이었지만 사회 상류층에서는 이 일은 두고두고 웃음거리가 되었다. 결혼 후 첫날 밤, 그녀는 송문수를 거절했다. 그녀는 그렇게 쉽게 마음을 열지 않았기 때문에 결혼식이 어수선했어도 첫 번째 밤만큼은 소중하게 생각하고 싶었다. 물론 송문수와의 결혼을 받아들였지만 감정을 천천히 키워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정말 어려웠다. 송문수는 결혼 후 더욱 자유분방하게 행동하며 최소한의 배려도 없이 외도하곤 했다. 둘 사이의 거리는 점점 멀어져 갔고 하지수는 매일 그가 일으킨 문제들을 수습할 뿐 감정적으로는 거의 진전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송승우가 한 번 돌아왔다. 그제야 하지수는 알게 되었다. 송승우가 떠날 당시 아무 말도 없이 사라진 이유는 긴급한 기밀 연구 프로젝트를 수행하게 되어서였고 송씨 가문 사람들조차 그를 찾을 수 없었다. 송씨 가문은 한때 그가 납치된 것이 아닌지 의심할 정도였다. 한 달 뒤에서야 송승우가 가족에게 무사하다는 소식을 전했지만, 여전히 갑작스러운 이별에 대한 설명은 하지 않았다. 1년 후, 연구가 끝난 뒤에야 그는 가족들에게 모든 사정을 설명했다. 하지만 그때는 하지수가 이미 송문수와 결혼한 지 1년이 지난 후였고 모
그 말에 분위기가 순식간에 어색해지자 예수진이 다급히 말을 받았다.“너랑 나랑은 다르지.”“뭐가 다른데?”“난 너 안 좋아하니까 친구로 지낼 수 있는 거야.”그런 아픈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예수진에 하도경은 충격받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헤어질 때 준 상처로는 부족했는지 만날 때마다 이렇게 하도경의 가슴을 후벼 파는 예수진이었다.“진짜 사랑했던 사람들은 친구가 될 수 없어, 내 말이 맞지 지수야?”일부러 하지수를 언급했지만 그녀는 입술만 말아 물고 있었고 오히려 송문수가 대답을 가로챘다.“그냥 친구로 지낼만한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고 판단해서 그럴 수도 있지.”하지수는 입까지 올라온 말을 삼켜냈고 예수진은 생각 없이 아무 말이나 막 뱉는 송문수를 노려보며 저 싹수면 이혼당할 만하다고 생각했다.“우리 진짜 오랜만에 모인다, 다음에 만날 때쯤이면 우리 애도 다 태어났겠어.”“도경아, 오늘은 진짜 취하기 전엔 아무도 집에 보내지 말자.”계지원이 분위기를 풀기 위해 말하자 하도경도 눈치 있게 대꾸했다.“좋아.”어차피 예수진 때문에 마음고생을 너무 해서 더 다칠 마음도 없었기에 하도경은 공허한 제 가슴에 술이나 퍼부으려고 맥주를 따기 시작했다.그렇게 남자들 앞에 한 병씩 놓아준 하도경은 여자들을 보며 물었다.“우리 여자분들은 물, 우유, 음료수 중에 고르세요.”“전 물 마실게요, 알아서 마실 테니까 신경 안 쓰셔도 돼요.”“전 맥주 주세요.”평소엔 술을 즐기지도 않고 예수진과 소이연이 마실 때만 한 잔씩 같이 마시던 하지수가 갑자기 맥주를 요구하자 다들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쳐다봤다.“오랜만에 보는 거니까 저도 한잔하고 싶어서요. 요즘 송승우 옆에만 있느라 또 언제 나올지도 모르잖아요.”“송승우는 좀 어때?”궁금한 건 못 참는 예수진이었기에 말 나온 김에 하지수를 향해 물었다.“아직도 죽겠다고 난리야?”“아니, 지금은 많이 좋아졌어.”“다 큰 남자가 왜 자기 목숨으로 가족들 협박하는 거야?”처음에는 송승우를 안타까워
그 한 달 동안 송문수는 하지수 앞에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부모님이 같이 밥이라도 먹자고 집으로 불러도 송문수는 회사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가족 모임에도 참석하지 않았다.말은 그렇게 해도 본인이 내키지 않아서 안 온다는 걸 허영지와 송기명은 알고 있었다.불행 중 다행으로 송승우의 회복속도는 눈에 띄게 빨랐다.송씨 집안 주치의가 매일같이 검사를 진행하며 회복속도를 체크하고 있었는데 이 정도면 두 달 뒤에 바로 의족을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소견도 듣게 되었다.그 말에 허영지와 송기명도 마침내 큰 시름을 덜었다는 듯 환하게 웃었다.송승우와의 교제를 약속한 하지수도 매일 그의 옆을 지키며 함께 재활 치료를 진행하고 있었다.그렇게 별장에서만 지내던 어느 날, 하지수는 예수진의 전화를 받게 되었다.곧 출산하는 데 그러면 산후조리원에 가야 해서 먹고 싶은 걸 마음껏 먹지 못하니 그전에 한 번 만나서 원 없이 밥이나 먹자는 연락이었다.그 말을 들은 하지수는 자신에게도 기분전환이 필요하다 싶어 더 고민할 것도 없이 그녀의 제안을 수락했다.지금 본인의 상태가 우울한 건지는 잘 몰랐지만 살아갈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어서 마음을 다잡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송문수도 가는 거야?”예수진과 밥을 먹으러 간다는 얘기를 송승우에게 했을 때 그가 던진 첫마디가 바로 저것이었다.송문수와 예수진의 사이가 돈독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송문수와 하지수가 따로 만날까 봐 걱정돼서 한 질문인 것 같았지만 하지수는 바로 대답했다.“몰라요, 그건 안 물어봤어요.”“그런데 문수 씨가 간다고 해도 내가 못 갈 이유는 없잖아요. 송문수 때문에 내 가장 친한 친구를 안 볼 순 없어요.”하지수가 너무 직설적으로 말해 당황했던 송승우는 멋쩍게 웃으며 대꾸했다.“그냥 한번 물어본 거야. 속 아프니까 술은 너무 많이 마시지 마.”“네.”그날 저녁 하지수는 바로 예수진의 집으로 향했다.그때 집에는 예수진의 가족뿐이었는데 안 본 사이 더 커진 배를 보니 두
이혼 시간까지 다 정하고 나니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진 둘은 가만히 소파에 앉아있었다.그 숨 막힌 정적 속에서 한참을 앉아있던 송문수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난 이만 가볼게.”말을 마친 송문수는 하지수가 대답하기도 전에 등을 돌려 집을 나서버렸다.서울을 떠날 때처럼 미련 없이 돌아서는 송문수에 하지수의 시야가 흐려졌다.하지수는 뿌얘진 시야에 끝까지 그의 뒷모습을 담았다.이튿날, 하지수는 약속대로 송문수와의 이혼을 위해 법원으로 향했는데 송문수는 먼저 와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는 하지수가 차에서 내리며 안에 앉아있는 또 다른 이와 뭐라고 말하는 걸 지켜보았다.그 안의 있는 사람은 당연히 송승우일 것이기에 송문수는 시선을 돌리며 라이터를 만지작거렸다.공공장소에서는 흡연이 금지된 상태였기에 그는 이런 식으로 담배를 피우고 싶은 욕구를 잠재우고 있는 것이었다.하지수는 대화를 마친 건지 종종걸음으로 송문수에게 다가가 말했다.“오래 기다렸어? 미안해.”“아니야, 내가 빨리 온 거야.”그녀가 제게 다가오자 송문수는 라이터를 주머니에 찔러넣으며 말했다.“들어가자.”“그래.”그렇게 둘은 법원으로 들어가 대기하고 있었는데 그때 송문수가 합의서를 건네며 말했다.“내가 알아서 작성했는데 맘에 안 드는 거 있으면 바로 말해줘, USB 챙겼으니까 여기서 고칠 수 있어.”사실 어젯밤 송문수가 파일을 보내와서 하지수는 이미 확인을 마친 상태였다.둘 사이에는 자녀가 없으니 양육권 싸움도 없었고 이익을 따지는 사이가 아니니 재산분할에도 큰 문제 없었다.그럼에도 제게 40억을 주겠다는 송문수를 하지수는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어차피 큰돈도 아니라서 헤어지는 대가로 주겠다는 그의 말에 공감이 가 그저 받기로 했다.송문수한테는 정말 적은 돈이긴 하니까.그리고 돈으로서 둘 사이를 깔끔히 정리하는 걸 송문수도 원할 것 같아 하지수는 결국 그걸 받는 조건으로 서류에 사인을 한 것이다.이혼서류를 제출하자 직원이 한 달간의 이혼 숙려기간이 있다는
애써 태연한 척하고 있었지만 핸들을 잡은 손이 하얗게 질려가고 있었다.제멋대로 날뛰는 심장임에도 송문수는 그걸 애써 무시하며 집으로 향했다.차가 멈추자 하지수는 송승우를 부축하며 차에서 내렸는데 송승우의 몸은 껌딱지처럼 하지수에게 딱 달라붙어 있었다.그를 차에서 내려 휠체어에 앉히는 모든 과정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웠다.마치 매일 하던 행동인 것 마냥, 그래서 몸에 배어버린 것마냥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하지수, 송문수, 송승우가 집 안으로 들어가자 허영지와 송기명도 마침 도착해있었다. 나이 드신 분들이라 보름 동안 돌아오지 못했던 집이 그리웠던 허영지와 송기명은 바로 방으로 돌아갔다.아무리 편한 호텔에서 자도 제집만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은 먼저 잠부터 청했다.그리고 송승우도 피곤해해서 하지수는 휠체어를 밀며 그를 방에 데려다주었다.순식간에 혼자 남아버린 송문수는 소파에 앉아 하지수를 기다렸다.원래는 송문수를 데려다주고 나가려 했는데 저에게 할 말이 있다는 하지수 때문에 이렇게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솔직히 하지수가 언제 내려올지는 미지수였기에 송문수는 하지수가 잠에서 깬 다음에 내려올 수도 있다는 최악의 상황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다.그렇게 되면 하루를 꼬박 기다려야 할 수도 있었지만 송문수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듯 보였다.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2층에서 홀로 내려오는 하지수가 보이자 송문수의 심장박동은 저도 모르게 빨라졌다.몸에 힘이 자꾸만 들어가며 뭐가 그렇게 긴장되는지 몸을 가만둘 수가 없었다.하지수가 자연스럽게 송문수의 옆에 자리 잡고 앉기는 했지만 둘 사이에는 아직도 어색한 기류가 감돌고 있었다.부부인데도 부부답지 않았고 가족임에도 가족 같지 않은 둘의 애매모호한 사이 때문이었다.이렇게 보니 제 인생은 참으로 우습기 짝이 없는 것 같아 송문수는 바로 본론부터 꺼냈다.“나한테 할 말 있다며, 뭐야?”송문수는 더 이상의 희망을 품지 않기 위해, 하지수와 한 지붕 아래에서 얼굴을 맞대지 않기 위해,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난 충동적인 적 없어요, 그리고...”하지수가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송승우가 대뜸 소리를 질렀다.“그럼 너 나랑 다시 사귈 수 있어?”터무니없는 그의 말에 하지수는 적잖이 당황했는데 송승우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을 이어나갔다.“네가 내가 아닌 송문수를 좋아한다는 걸 난 못 믿겠어. 난 아직도 네가 그때 내가 말도 떠난 일로 화내는 것 같아. 그러니까 나랑 다시 사귀자. 6개월만 만나보고 그때도 네가 송문수를 선택한다면 나도 깔끔하게 포기할게.”하지수는 자신이 송승우를 다시 좋아할 리 없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가 완벽히 포기해야 끝나는 싸움이었기에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 버렸다.하지수는 이제 송승우와의 이 지긋지긋한 인연에서 벗어나고 싶었다.“좋아요.”하지수가 긍정적인 답을 하자 자신만만했던 송승우의 얼굴에는 바로 미소가 번졌다.자신이 한쪽 다리를 잃긴 했지만 송승우는 그래도 하지수의 사랑을 다시 거머쥘 자신이 있었다.송승우는 단 한 번도 송문수를 제 상대로 여겨본 적이 없었다.그리고 하지수도 바보가 아닌 이상 이렇게 완벽한 저를 놔두고 멍청한 송문수를 선택할 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조건이 하나 더 있어.”“말해요.”“문수랑 이혼부터 해.”“네가 나랑 사귀겠다고 했잖아. 난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수군거리는 게 싫으니까 당당하게 너랑 만나고 싶어.”송승우의 말에 하지수는 입술을 말아 물고 생각에 잠겼다.송문수와의 결혼 관계를 유지하며 송승우와 만나는 건 바람피우는 거랑 다를 바가 없는데 그건 서로에 대한 존중을 깨는 거라서 하지수도 썩 내키진 않았다.“알겠어요.”하지수가 이혼만 하면 저와 재결합을 할 가능성이 더 커지는 것이기에 송승우의 미소는 아까보다 더 선명해졌다.“대신 나도 조건이 있어요.”“뭐든 말만 해.”기분이 좋았던 송승우는 하지수가 제시한 조건을 고민도 없이 받아들였다.송승우는 하지수는 어차피 저 아니면 안 된다고 자신을 하고 있었다....일주일 뒤, 송승우가 퇴원하자 드디어 가족들이 전부
“네.”“회사 일을 이제는 문수가 다 책임지고 있으니까 빨리 가는 것도 맞지, 승우도 많이 좋아졌으니까 이제 매일 간호할 필요도 없잖아.”하지수를 직접 키워온 허영지는 그녀의 기분이 안 좋다는 걸 한눈에 보아낼 수 있었다.그래서 빈말이지만 기분을 조금이라도 풀어주기 위해 애를 썼다.“네.”그런 허영지의 노력을 보아낸 건지 하지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엄마, 아빠도 그동안 고생 많으셨어요. 저 이제 중환자실에서도 나오고 의사 선생님도 별문제 없다고 했으니까 두 분은 먼저 돌아가서 쉬고 계세요. 며칠만 더 있으면 퇴원도 가능하다고 하잖아요.”“그래.”송승우의 상태가 많이 좋아져서 마음을 놓을 수도 있었고 또 지금 하지수와 단둘이 있고 싶어 하는 아들의 속내가 너무 눈에 훤해서 허영지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우린 그럼 먼저 갈게. 지수야, 승우 잘 부탁해. 네가 고생이 많다.”말이야 친절하기 그지없지만 사실은 하지수의 발을 여기 묶어두는 거나 마찬가지였다.“네.”하지수 역시 제 시어머니의 의도를 알지만 거절하지는 않았다.하지수의 대답을 들은 허영지는 마음이 한결 놓여 송기명을 밀며 병실을 빠져나갔다.송기명은 등 떠밀려 나가면서도 끊임없이 한숨을 내쉬었다.상황이 이렇게 흘러가는 데에 대한 불만이 많아 보였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허영지와 송기명이 나간 병실에는 하지수와 송승우 둘뿐이었다.“과일 좀 먹을래요?”“응, 고마워.”하지수가 먼저 그 어색한 정적을 깨며 묻자 송승우도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배를 집어 든 하지수는 열심히 깎기 시작했는데 송승우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한참 지나 껍질을 다 깎아낸 하지수는 배를 작게 썰어 송승우의 앞에 놓아주었다.“천천히 먹어요.”“넌 안 먹어?”“입맛 없어요.”송승우는 입맛 없다는 하지수에게 굳이 권하지 않고 천천히 과일을 먹기 시작했다.도도하고 자신만만하던 송승우의 모습을 다시 본 하지수는 송승우의 말대로 거기에 자신의 공
하지수는 송문수를 따라 송승우의 병실을 빠져나왔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앞을 향해 걷기만 했다.병원 입구에 도착하자 송문수를 기다리고 있는 차량이 보였다.그래도 작별인사는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어 차 문도 열지 못하고 망설이던 송문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결국 그냥 차에 타려 했는데 그 순간 하지수가 그를 불러세웠다.“문수 씨.”“장안시로 돌아가면 서울엔 다시 올 거야?”“안 올 것 같아 아마. 송승우도 많이 나았으니까 얼마 안 있으면 퇴원하겠지. 그럼 엄마 아빠가 송승우 집에 데려가서 보살피려 할 텐데 내가 뭐하러 여기까지 와 힘들게.”“그래서 나 혼자 여기 버려두겠다는 거구나.”하지수가 내뱉은 담담한 한마디에 송문수는 심장박동이 멎는 것만 같았다.숨을 내쉴 수조차도 없이 가슴이 아파와서 그는 이를 악문 채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여전히 침묵만 유지하는 송문수에 마지막 기대도 사라져버린 하지수는 이제 그만 그를 보내주기로 했다.송문수 말대로 자신은 그저 그가 마음을 다잡을 때 마침 옆에 있었던 여자일 뿐이니, 여기서 뭘 더 바라는 것도 욕심인 것 같았다.아무리 노력해봐도 송문수의 마음은 저를 향하지 않으니 하지수는 이제 그와의 사이를 끝내려 했다.“조심히 가.”이렇게라도 서로의 마음을 제대로 확인했으니 하지수는 그거면 된 것 같았다.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아주 많았지만 저 짤막한 한마디만 내뱉고 웃으며 돌아섰다.그 작은 몸통이 외로이 돌아서는 걸 보던 송문수는 가슴이 아파왔다.정말 제가 하지수를 버린 것만 같아서, 또 하지수를 혼자만 남겨둔 것 같아서 가슴이 아려왔다.주먹을 꽉 말아쥔 채 온몸을 떨어대던 송문수는 당장이라도 그녀에게로 달려가 그녀를 품에 안고 싶었다.하지만 그럴 수 없었기에 그는 제 충동을 잠재우며 무거운 발걸음을 내디뎌 결국 차에 올라탔다.하지수에게는 송승우가 있었으니, 그녀는 한 번도 혼자인 적이 없었으니 이번에도 혼자일 리는 없을 것 같아서 그는 미련 없이 돌아서기로 했다.한편 한참을
송승우가 병실을 옮기고 나니 가족들은 그제야 한숨 돌릴 수 있었다.“엄마, 아빠 고생 많으셨어요. 저 걱정하느라 제대로 쉬지도 못하셨죠.”“너만 괜찮을 수 있다면 우린 뭐든 다 할 수 있어.”병원 침대에 누운 채 감성 어린 말을 하는 송승우를 향해 허영지는 감격에 겨워 말했다.허영지는 송승우가 중환자실에서 나온 뒤 정말 많이 변한 것 같았다.더 이상 나쁜 생각은 하지 않고 전과 다름없이 씩씩하게 본인의 생활을 이어나가는 것 같았다.“제가 하루빨리 마음 다잡아서 이제 엄마 아빠 실망시켜 드리지 않을게요.”“넌 한 번도 우릴 실망시킨 적이 없는 애야, 넌 계속 우리의 자랑이었어.”제 손을 잡은 채 저와 눈을 맞추며 말하는 엄마를 향해 송승우도 웃음을 지어 보였다.정말 눈물 나도록 다정한 모자지간이었다.송승우가 병실을 옮긴다는 소식에 병원으로 달려온 송문수도 병실 한쪽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하지만 그들의 대화에는 끼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라이터만 만지작거리는 그는 어쩐지 제 가족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한편 허영지와 대화를 나누던 송승우는 하지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그녀는 아직까지도 간호사에게 자신의 상태를 물어가며 앞으로는 어떻게 재활 치료를 진행해야 하는지에 대해 자세히 묻고 있었다.자신의 일에 이렇게 신경을 써주는 하지수를 보며 송승우는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고마워, 지수야.”“아니에요, 당연한 일인데요 뭘.”“네 덕분에 내가 이렇게 빨리 마음 다잡을 수 있었어. 너 아니었으면 현실을 이렇게 빨리 받아들이진 못했을 거야.”“나 응원해줘서 정말 고마워.”하지수는 결국 그 감사 인사를 받아들인다는 듯 웃어 보이고는 다시 간호사를 보며 디테일하게 보호자로서 해야 할 일들을 물었다.다들 제 자리를 잡은 듯한 모습에 송문수는 그만 병실을 나가려고 몸을 일으켰는데 그때 송기명이 그를 불러세웠다.“문수야, 어디 가?”“장안시로 돌아가야죠 이제.”담담히 말하는 송문수에 송기명은 놀란 기색을 내비쳤다.“지금
허영지의 말에 다들 그녀의 시선을 따라 눈을 돌렸고 그 시선 끝에는 하지수가 서 있었다.하얗게 질린 얼굴로, 멍하니 서 있던 하지수는 송문수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지수야, 여긴 어떻게 왔어?”그런 하지수를 본 허영지는 다급히 그녀에게로 달려갔다.하지수가 송문수의 말을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들었다면 둘 사이에 감정이 있든 없든 마음이 아플 것은 당연지사였기에 허영지는 하지수가 안쓰러웠다.하지수는 굳어버린 고개를 힘겹게 돌리며 허영지를 향해 말했다.“일어나보니까 호텔에 아무도 없어서 왔어요.”눈 떠보니 사라져버린 송문수에 빠르게 병원으로 달려온 거지만 혹시나 송문수가 자신의 몸 상태를 걱정하며 오지 말라고 말릴까 봐 연락은 하지 않았었다.하지만 송문수가 또다시 허영지와 싸울까 봐 말도 없이 온 건데, 오자마자 하지수는 송문수가 내뱉는 차가운 말들을 모조리 들어버린 것이다.저를 물건 취급하며 송승우에게 넘겨주겠다는 송문수의 말에 하지수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이제 좀 달라진 줄 알았는데, 송문수한테 저는 여전히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란 걸 이렇게 알게 될 줄은 몰랐는데...모든 게 다 저 혼자만의 착각인 것 같아 하지수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차올랐다.“아직도 많이 피곤해서 전 이만 호텔로 돌아가 볼게요.”그래서 그녀는 빠르게 고개를 돌리며 병원을 나섰다.자신들에게 우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등을 돌리는 하지수를 보며 허영지 역시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하지수가 친딸은 아니었지만 어릴 때부터 같이 키워왔던 아이였기에 허영지는 그녀를 친딸 이상으로 아껴주었다.부모도 잃은 아이가 저렇게 충격받은 모습으로 자리를 뜨는 게 가슴이 아팠지만 허영지는 끝내 송문수 더러 하지수를 위로하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허영지는 이번에도 이기적이게 송승우를 위해 송문수를 희생시킨 것이다.송승우가 나을 수만 있다면 송문수와 하지수 사이에는 아무 감정도 없다는 그 말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하지만 송기명은 그런 아이들을 두고 볼 수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