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아린? 네가 왜 여기 있어?”“저 사람 잡아요.”그 의사를 스쳐 지나오던 안준휘는 그녀의 말에 뒤를 돌아보았다.“누구? 누구를 잡으라는 거야?”도아린이 문 앞까지 쫓아왔을 때, 그 의사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차가운 눈빛으로 안준휘를 힐끗 쳐다보던 그녀는 그를 밀어내고 밖으로 나갔다.안전 통로의 뒤에는 로비였고 네 방향에 네 개의 출구가 있었다.가장 가까운 문으로 다가가니 쓰레기통에 의사의 흰 가운이 버려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병원에 오가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 의사를 찾을 수가 없었다.“누구를 찾고 있는 거야?”뒤따라온 안준휘가 주위를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그녀는 고개를 홱 돌리고 그를 쳐다보았고 안준휘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모르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그러나 침을 꿀꺽 삼키며 잔뜩 긴장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을 보니 뭔가 켕기는 게 있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이 중환자실로 돌아왔을 때, 문 앞에 있던 진경수가 엄청난 소식을 전했다.“조금 전에 돌아가셨어요.”“옥경아, 옥경아.”그 말에 안준휘는 울부짖으며 병실로 돌진했다.도아린은 진경수의 곁으로 다가가 목소리를 낮추며 방금 그 의사에게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진경수는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의사 선생님께서 고모가 위험한 고비를 넘겼다고 하셨는데...”한편, 안준휘는 울고불고하며 소란을 피웠고 병원에서 최선을 다해 환자를 구조하지 않았다고 하다가 진경수가 자신의 동의도 없이 구조를 포기했다고 난리를 쳤다. 병원에서 소란을 피우다가 끝날 줄 알았는데 그는 관을 들고 진씨 가문의 대문 밖으로 가서 계속해서 행패를 부렸다. 진씨 가문은 부자 동네에 살고 있었고 각 별장 사이에는 비교적 독립적인 공간이 있었다.일을 더 크게 만들기 위해 안준휘는 기자들도 데리고 왔다.그는 카메라 앞에서 울며 하소연하였고 딸과 사위가 사기 사건에 연루된 것을 인정하면서 이미 해결책을 생각하고 있는데 뜻밖에도 진씨 가문이 우물에 빠진 그들에
그녀는 도아린의 곁으로 다가가 딸아이의 손목을 잡았다.그 순간, 도아린은 그녀의 손을 맞잡고 살짝 힘을 주면서 그녀를 안심시켰다.하인이 들어와서 보고하는데 집으로 돌아오던 진수혁의 차가 안준휘에 의해 가로막혔고 그가 문 앞에서 소란을 피우고 있다고 하였다. 도아린은 윤명희를 따라 밖으로 나갔고 차화영도 잠시 고민하더니 그들의 뒤를 따라나섰다.그러나 너무 흥분한 나머지 다리에 힘이 풀려 하인에게 부축해달라고 했다.“진수혁. 처음에 내가 옥경이를 살리겠다고 하자 뭐라고 했어? 진씨 가문의 사람이니 진씨 가문에서 책임지겠다고 했잖아. 오늘 아침까지도 멀쩡하던 사람이 왜 오후에 갑자기 죽은 거야? 내가 빚이 많은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내 와이프만큼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리고 싶었어. 그러니까 똑바로 설명해 봐.”차에서 내린 진수혁은 주변에서 핸드폰으로 영상을 찍는 사람들을 슬쩍 훑어보고는 담담하게 안준휘를 쳐다보았다.“고모가 병원으로 이송되었을 때, 고모부의 전화는 연결이 되지 않았습니다. 뭘 하고 있었던 겁니까? 또 사람들과 술을 마시고 있었나요?”말투가 느리긴 하지만 또박또박 입을 열었다.안색이 어두워진 안준휘가 급히 해명했다.“내 딸이 남한테 협박을 당하고 사기 사건에 연루되었어. 딸의 빚을 갚기 위해 돈을 빌리러 갔던 거야.”“여자한테서 돈을 빌립니까?”그 말에 안준휘는 흠칫했다.“대표님이 여자야.”무표정한 진수혁의 얼굴은 어떤 핸드폰에서도 흠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완벽했다.유일한 흠이라면 믿기 힘들 정도로 조각상처럼 잘생겼다는 것이었다. 그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더니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돈을 빌리러 간 사람이 왜 셔츠에 립스틱 자국이 있는 겁니까? 고모부 나이에 돈 때문에 몸을 팔지는 않았을 테고.”안준휘는 자기도 모르게 옷깃을 감쌌다.옷깃을 움켜쥐고서야 오늘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이 티셔츠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셔츠는 이틀 전에 입었던 옷인데...그러나 그의 이러한 무의식적인 행동은 라이브 방송으로 지켜보고 있던
영상을 찍던 사람은 재빨리 진씨 가문의 대문을 향해 카메라를 돌렸다. 도아린은 담담한 표정을 지은 채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러다가 관을 본 순간 그녀의 눈 밑에 안타까움과 동정이 스쳐 지나갔다. 안준휘는 계속해서 관에 엎드려 울었고 도아린을 힐끗 올려다보고는 다시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 돈이 우리한테는 엄청난 부담이었지만 너희들한테는 아무것도 아닌 거잖아. 네가 계획한 혼사에 민아가 불만을 품으니까 네가 이리 모른 척하는 거 아니니? 우리 집안이 너 때문에 풍비박산이 났어.”안준휘는 일부러 돈의 개념을 흐릿하게 만들었다.그는 이미 댓글 부대까지 구했고 일부러 사람들의 감정을 부추겼다. 돈을 사기당한 사람들은 그들 사이에 어떤 갈등이 있는지는 상관없었다. 그저 자신의 돈만 찾고 싶을 뿐이지. 진씨 가문에서 돈을 빌려준다면 그들이 어렵게 모은 돈도 돌려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동영상이 인터넷에 퍼지자 피해자들의 분노가 진씨 가문으로 향했다.“다시 한번 물을게요. 고모가 정말 공황장애를 앓고 있었어요? 그래서 교통사고가 난 거예요?”몇 사람이 핸드폰을 들고 자신을 찍는 것을 눈치챈 안준휘는 두리뭉실하게 대답했다.“진씨 가문에서 무정하게 나 몰라라 해서 그런 거잖아. 아니면 옥경이가 왜 상처를 받았겠어?”“무정하다고요? 당신 딸이 결혼하는데 우리가 왜 혼수를 해줘야 하는 거예요?”“혼수라니. 진씨 가문에서는 단 일 푼도 내놓지 않았잖아.”안준휘는 화를 벌컥 내며 주먹으로 관을 세게 내리쳤다.피식 웃던 도아린은 카메라로 고개를 돌리고 입을 열었다.“다들 내 말 좀 들어보세요. 딸이 결혼하는데 우리한테 혼수를 요구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이 세상에 이런 도리가 어디 있어요?’“도아린 너...”안준휘는 달려들어 그녀가 함부로 말하는 것을 막으려 했다.도아린은 부잣집 딸 아닌가?왜 이렇게 기가 센 여편네 같지?그때, 진수혁이 안준휘를 꽉 잡았고 도아린을 밀치려 했던 안준휘의 손은 결국 그녀를 건드리조차 못하였다.뒤로 몇 걸음
양쪽을 비교하니 너무 분명했다.진씨 가문은 진옥경의 죽음이 수상하다고 생각해 바로 경찰에 신고했지만 남편인 안준휘는 진씨 가문으로 달려와 소란밖에 피우지 않았다. 누가 진심이고 누가 가식인지는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한편, 오늘 같이 온 기자들 중에서 누군가 안준휘가 연이어 의심을 받고 여론의 방향이 진씨 가문으로 기울어지는 것을 보고 계속하다가는 안준휘의 정체가 다 드러날까 봐 급히 눈빛을 보냈다.안준휘도 계속하다가는 자신에게 불리하다는 것을 알고 그 자리에서 기절해 버렸다. 소란을 피운 자들은 관을 그대로 두고 안준휘를 차에 태우고는 이내 자리를 떴다. 한편, 딸이 수술을 받던 날 사위가 다른 여자들과 술을 마시고 놀아났다는 사실을 알고 차화영은 안준휘가 이리 소란을 피운 목적이 돈 때문이라는 걸 눈치챘다. 사위가 원망스러웠지만 사람들이 모두 흩어지고 관을 쳐다보니 참지 못하고 울음이 터져 나왔다.“옥경아. 왜 이렇게 허망하게 떠난 거야? 딸을 보내는 이 엄마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겠니?”차화영은 비틀거리며 관으로 달려가 대성통곡했다. 도아린이 하인에게 대문을 열라고 하자 진수혁의 차가 별장 안으로 들어왔고 도아린은 윤명희의 손을 잡고 자리를 떴다.아무도 차화영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혼자 자리를 뜨려니 체면이 서지 않았다.이때, 하인이 눈치채고 급히 입을 열었다.“어르신, 이 관은 소란을 피우기 위해 챙겨온 겁니다. 안에 사람이 없으니 그만 우세요. 어르신께서 아프시면 따님도 편치 못할 겁니다.”“자네 말이 맞아. 옥경이도 내가 아픈 건 바라지 않을 거야.”차화영이 눈물을 닦고 대문을 들어서는데 이때 진경수의 차가 마침 도착하였다. 거실 안, 진경수는 오늘 조사한 일에 대해 얘기했다. 도아린이 뒤를 따라간 그 의사는 진옥경이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이었고 그 사람이 진옥경한테 무슨 말을 해서 진옥경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하였다.병원 측에서 CCTV 영상을 확인하니 그 사람은 병원의 의사가 아니었고
핸드폰 잠금을 해제한 후 그녀는 순간 당황했다.배지유는 재빨리 핸드폰을 잠그고 힘껏 움켜쥐며 얼굴에 띈 공포를 감추려고 애썼다. 그녀의 모든 반응은 배건후의 눈에 훤히 들어왔고 그는 손가락을 움직여 태블릿에 있는 파일을 넘기며 계속 쳐다보았다. 오빠가 더 이상 캐묻지 않자 그녀는 점차 마음을 진정시켰다.힘겹게 침을 꿀꺽 삼키더니 이내 말을 이어갔다.“더 달라고 안 해요. 10억만 줘요. 다른 게 아니라 의족을 새로 주문해야 해서 그래요.”많이 달라고 해봤자 오빠가 주지 않을 게 뻔했다. 그러나 돈을 달라고 하지 않으면 마음이 내키기 않을 것 같았다. 남궁유민이 건네준 증거들로 정말 배건후에게 유죄판결을 내린다면 그럼 내일 배건후는 그녀와 함께 경찰서에 갔다가 다시는 나오지 못할 것이다.오빠가 망하면 모건 그룹도 망하는 것이다. 그럼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오빠, 10억도 아까운 거예요?”그가 아무런 반응이 없자 배지유는 가여운 척 연기를 하며 눈시울을 붉혔다.“오빠, 전에 도아린한테 사준 액세서리만 해도 10억은 훌쩍 넘었을 거예요. 그런데 친동생인 나한테는 왜 이래요? 그렇게도 아까운 거예요?”“의족은 내가 이미 주문했어.”배건후는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 보고 있던 파일에 문제가 있는 것인지 그의 눈빛이 다소 어두워졌고 온몸에서 싸늘한 기운이 전해졌다. 배지유는 그의 기세에 눌려 약간 겁이 났다. 그녀는 어깨를 움츠리고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자수하겠다고 약속했잖아요. 오빠를 도와 도아린의 문제를 해결해 주었으니 작은 보상이라도 해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그가 눈꺼풀을 치켜올리는데 끝이 보이지 않는 검은 눈동자에 차가운 빛이 스쳐 지나갔다.그와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그녀는 이내 고개를 돌렸다.“아빠에게 준 생활비는 모두 김지민 그 여자가 다 쓰고 있어요. 차라리 그 돈을 나한테 줘요. 내가 아빠를 돌볼 테니...”“네가? 남한테 당한 줄도 모르는 네가?”그녀는 씩씩거리며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다시 태블릿
옆방에서 막 샤워를 마치고 나온 진수혁은 핸드폰에 뜬 영상을 보고 비서한테 전화를 걸었다.“각 유튜버들한테 연락하고 6억 투자하여 대대적으로 홍보해.”한편, 그동안 계속 진범준을 위로했던 윤명희는 남편이 일부러 불쌍한 척한 것을 눈치채고는 그를 외면했다. 진범준은 아내의 기분을 풀어주려고 애를 썼고 아내와 뜨거운 시간을 보내고 난 그는 핸드폰에 뜬 소식을 보게 되었다. “당신도 우리 세은이 도와줘요. 안 그러면 나 당신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당연히 그래야지.”딸은 아내한테 소중한 사람이었고 딸이 행복해야 아내가 행복한 거고 아내가 행복해야 그도 행복할 수 있었다. 일부 네티즌들은 한창 야근을 하며 안준휘에게 유리한 영상을 편집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 안으로 들어왔다.“대표님, 여론의 방향이 바뀌었습니다. 전부 다 안준휘가 욕심을 부리고 진씨 가문의 재산을 노리고 있다고 욕하고 있어요. 안씨 가문의 사람들은 배은망덕한 인간들이라고 비난하고 있습니다.”“그럴 리가?”성대호는 데이터 모니터링 플랫폼을 접속했다. 그들이 게시한 영상들은 재생수가 감소하여 점차 빅데이터에서 도태되고 있었다. 반면 새로운 영상들이 우후죽순처럼 갑자기 등장했고 좋아요와 영상 공유는 그들의 영상 재생수를 훨씬 초과했다.“이건 우리가 촬영한 자료인데 누가 유출한 거야?”성대호는 불같이 화를 냈다. 담당자가 급히 오늘 제출한 영상 내용을 확인했고 그 결과 바로 촬영한 사람을 찾게 되었다.그러나 상대방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누군간 저희 촬영팀에 끼어든 것 같습니다.”“그럴 리가 없어.”성대호는 책상을 두드리며 화를 냈다.“오늘 진씨 가문으로 가서 소란을 피우는 일은 임시로 결정된 일이야. 저들은 우리 사람들을 매수할 시간은 없었을 거라고.”“가기 전에 매수를 할 수는 없어도 돌아와서 매수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정의'를 내세운 유튜버들도 결국은 인기를 이용해 돈을 벌기 위한 것이니까. 만약 누군가가 직접 돈을 준다면 그들은 매우 기뻐할
“도아린.”성대호는 의자를 발로 차서 넘어뜨렸고 마치 사람을 잡아먹으려는 듯 빨간 눈을 부릅떴다.도아린이 배건후와 결혼하지 않았다면 여전히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는 평범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배건후와 결혼을 한 후에도 그녀는 부잣집 사모님들과 어울리지 못하였고 이혼한 후에는 그런 사람들과 더더욱 접촉할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또한 진씨 가문으로 돌아가긴 했지만 진씨 가문의 돈을 챙기지도 않았고 진씨 가문의 회사에 들어가지도 않았다.도대체 무슨 힘이 있어서 그와 맞설 수 있단 말인가?어젯밤 일파만파 닥쳐온 전술 때문에 그는 크게 당황하였다. 가까스로 실시간 검색어를 지웠는데 유명한 유튜버들이 다시 홍보를 하기 시작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유튜버들을 따로 연락하여 돈을 줄 테니 영상을 삭제하고 하였다. 그러나 매수한 사람은 몇 명에 불과했고 여러 개의 플랫폼에서 다시 영상들이 올라오기 시작했으며 동영상 앱을 다운로드한 모든 핸드폰에 메시지가 전송되었다.이렇게 대규모의 홍보는 근본적으로 만회할 여지가 없었다. 더 황당한 건 영상 속 도아린의 모습이었다. 영상 속 그녀는 담담한 얼굴로 차분하게 이 일에 대해 분석하였고 아름다운 얼굴 때문에 그녀는 급속도로 유명해지게 되었다. 누군가 그녀의 배경을 밝혀냈고 그녀가 제작을 맡은 도 덩달아 인기를 끌었다. 기회를 너무나 잘 이용할 줄 아는 여자다.이건 일석삼조가 아니겠나?에취.도아린은 재빨리 휴지를 꺼내 입을 가리고 재채기를 했다.“어젯밤에 감기에 걸린 거 아니야?”윤명희는 급히 젓가락을 내려놓고 하인을 불러 약상자를 가져오라고 했다. “오늘 비 온다고 하더라. 잊지 말고 우산 챙겨가. 비 오면 쌀쌀해지니까 외투도 챙겨가고.”한편, 차화영은 두 모녀를 지켜보며 마음이 매우 불편했다. 그녀의 손이 다시 떨리기 시작했는데 윤명희는 의사에게 약을 처방해 달라고만 하고는 그냥 내버려두었다.그런데 지금 도아린이 재채기를 하자 이리 긴장한 모습을 보이다니.이게 뭐 약까지 먹을 정도인
배지유는 단번에 수표를 낚아챘고 그 위에 적힌 20억이라는 숫자를 보고는 기뻐서 눈을 부릅떴다.“오빠 마음속에 내가 있는 거 다 알아요.”그녀는 수표를 잘 챙기고는 차 문을 열고 지팡이를 짚은 채 천천히 차에서 내렸다.차 뒤를 돌아가는데 남궁유민이 경찰서 입구에 서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그녀는 몸을 휘청거렸고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지만 우정윤이 그녀를 부축했다. 우정윤의 손을 뿌리친 그녀는 심호흡하고 계단을 올라갔다.대문으로 가는 계단이 그렇게 높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힘들게 걸어갔다.다리가 불편한 이유도 있지만 심리적 압박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오빠를 제 손으로 감옥에 보낼 생각을 하니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안고 들어가.”배건후가 우정윤을 쳐다보자 우정윤은 아무 말 없이 배지유를 덥석 안아 올렸다.비명을 지르던 그녀는 우정윤의 옷을 움켜쥐고 벌컥 화를 냈다.“오빠, 날 감옥에 보내고 싶어서 이리도 안달 난 거예요?”마음속에 있던 약간의 죄책감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예전에 도아린이 그녀를 구치소에 보냈을 때 배건후는 그녀를 한 번도 보러 오지 않았다. 도아린 앞에서 자신의 편을 들어주기는커녕 아빠가 자신을 돕는 것까지 반대했었다.이런 오빠는 차라리 없는 게 낫다.오빠가 감옥에 들어간다면 그녀 또한 면회를 오지 않을 것이다.감옥에서 사람들에게 구속받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똑똑히 알려주고 싶었다.배지유의 눈 밑에 음험한 기운이 스쳐 지나갔지만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남궁유민은 배지유와 함께 심문실로 갔고 배건후와 우정윤은 로비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그들이 앉자마자 도아린이 진경수와 함께 안으로 들어왔다.우정윤이 급하게 일어나서 인사를 하려고 하는데 도아린이 그들을 못 본 척 지나치는 것을 보고 다시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대표님, 도아린 씨... 오셨어요.”우정윤이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배건후의 시선이 태블릿에서 도아린에게로 향했다. 그녀는 포니테일에 옅은 색
누군가는 사진 한 장을 들고 나타나 말했다.“도아린 곁에 있는 꽃미남이 사실 강재민이래.”과거, 두 사람이 함께 음악 페스티벌에 참석했던 적도 있다는 이야기였다.그 말에 또 다른 누군가는 고개를 끄덕였고 소문은 꼬리를 물고 번져갔다.그러던 어느 날.도아린의 바로 뒷자리에 앉아 있던 한 신인 배우가 몰래 찍은 사진 한 장이 인터넷에 올라왔다.사진 속엔, 두 사람의 머리가 맞닿은 채 귓속말을 나누고 있었다.그 한 장의 사진은 결국 배건후의 정체를 증명하는 결정적 단서가 되었고 그는 다시 한번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다.이번에도 역시 온갖 의심과 루머 그리고 비난이 따라붙었다.하지만 며칠 후, 연성 경찰청에서 공식 공지문이 게시되었다.바로 얼마 전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장기 밀매 사건에 대한 수사 결과 공지였다.공지문에는 고성만, 손보미, 자상훈 등이 인신매매로 부당한 이익을 챙기다 결국 장기 밀매까지 손을 뻗친 사실이 요약되어 있었고 그 수사에 협조한 익명의 자원자들에게 감사의 뜻도 함께 담겨 있었다.그 단 하나의 공지로, 여론은 완전히 반전됐다.정월 대보름, 해남엔 보기 드문 큰 눈이 내리고 있었다.도로는 차들로 가득 막혀 10분이 지나도 백 미터를 채 움직이지 못할 정도였다.“천천히 가. 우린 여기서 내려서 좀 걸을게.”도아린은 조수석 창문을 내리며 일북에게 말했다.그리고 배건후와 함께 차에서 내려 레스토랑까지 걷기로 했다.배건후는 우산을 펼쳐 도아린의 머리 위에 씌웠다.도아린은 그의 팔에 팔짱을 끼고 두 사람이 맞잡은 손은 외투 주머니 속에 꼭 쥐어져 있었다.“춥지 않아?”그가 우산을 더 그녀 쪽으로 기울였다.“안 추워요.”도아린은 입김을 내뿜으며 활짝 웃었다.발밑에서는 바삭거리는 눈이 소리를 냈고 그녀의 머릿속에는 오래전 기억이 스쳐 갔다.돈을 마련하기 위해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던 시절.어느 회사 대표라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눈밭에서 몇 시간을 버텼던 그날, 발이 얼어 서 있지도 못하고 결국 쪼그려 앉았던 그 순간
그 여자는 바로 그날 수상 레스토랑에서 진경수에게 벨트를 빌렸던 그 여자였다.하지만 오늘은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짧은 티셔츠와 청 반바지 대신 격식을 갖춘 정장 느낌의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얘, 내 여동생. 그리고 이 사람은... 우리 제부.”진경수는 ‘제부’라는 단어에서 말끝을 흐렸다.여동생이 혼인신고까지 해놓고 가족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못마땅한 듯 표정이 굳어 있었다.그건 진수혁도 마찬가지였다.“큰형님, 작은 형님.”배건후가 정중히 일어나 인사를 건넸고 도아린은 해맑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오빠들, 호칭 바꿨으니까 용돈 좀 주셔야죠?”“혼인신고도 우리 몰래 해놓고, 무슨 용돈이야?”진경수는 여전히 불만 가득한 얼굴로 배건후를 노려보다가 결국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도아린에게 내밀었다.“다시 내 동생 울리기만 해봐. 그땐 진짜 널 갈기갈기 찢어서 물고기 밥으로 줄 거야. 명심해.”“고마워요, 둘째 오빠!”도아린은 싱긋 웃으며 봉투를 받아들었고 이번엔 진수혁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진수혁 역시 말없이 봉투를 하나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도아린은 봉투를 슬쩍 비춰보며 속으로 웃었다.‘안 봐도 이건 수표네.’그녀는 배건후를 보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더니 말했다.“이건 제가 따로 보관할게요.”“감사합니다, 우리 아내님.”“...”진씨 형제들은 동시에 말문이 막혔다.‘쯧쯧, 벌써 아내한테 잡혀 사네...’하지만 상대가 도아린이라면, 뭐… 그럴 만했다.“근데, 여기 두 분은?”도아린은 일부러 모르는 척 눈을 반짝이며 물었고 진수혁은 변슬기를 소파에 앉히며 담담히 말했다.“예전 동료야.”변슬기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 순간, 진경수가 옆에 있던 여자를 품 안으로 확 끌어당기며 밝은 미소를 지었다.“부모님 말씀대로 아린이 일도 정리됐겠다... 이젠 내 차례지. 그래서 나도 결혼했어.”도아린과 배건후는 동시에 진수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둘째 오빠를 좀 본받으세요. 뭐 하세요, 진짜.’“작은 올
“...”집사는 조용히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배건후는 당연하다는 듯 도아린의 방으로 들어가 짐을 풀었고 도아린은 그런 그를 집사에게 소개했다.“이 사람은 제 남편이에요. 서재랑 아버지, 어머니, 큰오빠, 둘째 오빠 방만 빼고 어디든 자유롭게 다니게 해주세요.”두 사람은 짐을 정리하자마자 곧장 외출에 나섰다.“앞에 있는 만둣가게, 진짜 맛있어요!”가게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도아린의 시선은 창가에 앉아 노트북으로 일하던 진수혁에게 향했다.그 맞은편에는 변슬기가 앉아 있었고 다소 곤란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설득 중이었다.“여긴 패스트푸드점이에요, 카페가 아니라고요. 여기서 일하시는 건 좀...”“카페라고 생각하면 되잖아. 난 괜찮은데?”“그렇긴 해도 이렇게 계속 앉아 계시면 저희 가게 영업에 방해된다니까요!”그때 도아린이 문을 열고 들어오자 변슬기는 반가움에 벌떡 일어났다.“도 선생님! 대표님 좀 말려주세요!”그 말에 진수혁은 고개를 돌리며 태연하게 말했다.“밥은 먹었어? 여기 만두 꽤 괜찮더라.”도아린은 황당함에 헛웃음이 났다.‘사람을 회사에서 내쫓아 놓고선 정작 본인은 여기에 눌러앉다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진짜.’막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배건후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내가 말할게.”도아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변슬기와 함께 옆 테이블에 앉아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그사이 배건후는 주머니에서 혼인관계증명서를 꺼내 진수혁 앞에 내려놓았다.“제가 이겼어요.”“...”진수혁은 조용히 종이를 펼쳐보고는 이를 악물었다.“너 이거 반칙 아냐?”“우린 내기했잖아요. 졌으면 인정해야죠.”“유럽 연수 그 자리, 잊지 말고 제 이름으로 신청해 주세요.”진수혁은 고개를 돌려 도아린을 바라보았고 마침 도아린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둘의 눈이 마주쳤고 자연스레 미소가 번졌다.‘이 분위기 뭐야... 완전 닭살 돋게 하네.’그 순간, 배건후는 시선을 거두고 진지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형님도 제가 예전에
‘정말로 배고픈 거야? 아니면 날 원하는 거지?’도아린은 배건후를 흘끗 쳐다보며 가위를 테이블 위에 놓고는 끌려가 밥을 먹었다.배건후의 요리 실력은 한층 더 늘어 있었고 맛뿐만 아니라 음식의 모양새도 훨씬 좋아졌다.“이제 영양식은 안 드세요?” 도아린은 일부러 그를 자극했다. “전에 어떤 사람이 고기도 안 먹고 기름진 것도 안 먹고 오래된 것도 안 먹고 부드러운 것도 안 드셨잖아요!”배건후는 매운 닭 요리를 그녀 앞으로 밀어놓으며 진심으로 사과했다.“그때는 네 관심을 끌려고 그런 거야. 그리고 몸매가 망가져서 네가 싫어할까 봐 걱정도 됐고.”“그럼 이제는 몸매 망가지는 거 걱정 안 해요?”도아린은 고기 한 조각을 집어 입에 넣었다.배건후는 가볍게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두 사람은 원래 한 사람이 요리하면 다른 한 사람이 설거지하기로 했다. 하지만 배건후는 도아린에게 설거지할 기회를 주지 않고 바로 그녀를 안아 위층으로 올라갔다.도아린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큰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배건후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그녀를 삼켜버릴 듯한 눈빛을 보였지만 쉽게 다음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았다.도아린은 그가 마음속 어둠의 그림자와 싸우고 있음을 알았다.그녀는 그의 목을 감싸안고 몸을 들어 올려 그의 입술에 가볍게 입 맞추며 달랬다.“천천히 해도 돼요. 긴장하지 말고 편하게 하세요.”도아린의 위로는 곧 배건후에게 그대로 되돌아왔다.그의 이마에서 흐른 땀방울이 그녀의 흰 목 위로 떨어졌다. 그는 목소리를 낮추며 그녀의 귀를 깨물었다. “도아린, 힘 빼... 너무 긴장했어...”도아린은 그의 입을 막고 싶었지만 손가락은 그의 입에 물려 있었다. 그 후, 그녀는 머릿속이 멍해졌고 마치 거친 파도 위에서 흔들리는 작은 배가 된 것처럼 느껴졌다. 재미를 본 배건후는 그녀를 끈질기게 괴롭혔다. 도아린이 깨어났을 때는 이미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마치 어젯밤 온몸이 부서졌다가 다시 조립된 것처럼 사지가 말을 듣지 않았고 특히 허리
“배 대표님! 모든 자산을 도 대표님께 넘기신 것은 이전에 하신 일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셔서인가요? 손보미 씨가 형을 선고받았다고 들었는데 손보미 씨를 꺼내줄 계획이 있으신가요?”배건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기자들을 한 바퀴 둘러보더니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늘 인터뷰의 주제는 챔피언십 선수들의 숙식 안전입니다. 개인적인 질문에 대해서는 답하지 않겠습니다.”기자들이 더 질문하려 하자 도아린이 배건후의 손을 제치고 앞으로 나섰다.“숙식 문제에 대한 더 나은 제안이 있다면 제안서를 작성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수한 의견을 채택하고 그에 따라 보상을 제공할 예정입니다.”도아린은 카메라를 향해 당당하고 품위 있게 말했고 입가의 미소를 살짝 거두며 한층 위엄 있는 분위기를 자아냈다.“제 개인적인 문제로 여러분의 시간을 뺏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배건후 씨에 대해서는 몇 가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배건후는 눈빛이 살짝 흔들리며 걱정스러운 기색을 내비쳤지만 이내 담담한 표정으로 돌아왔다.도아린이 배건후에 대해 말하려 하자 기자들은 앞다투어 마이크를 내밀었다.도아린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배건후 씨는 여태까지 운영부의 팀장이었지만 오늘부터는 한경 그룹의 특별 자문입니다. 이후의 직책은 배건후씨의 능력에 따라 결정될 것입니다.”도아린의 시선은 배건후가 도아린의 말을 절대적으로 따를 거냐고 묻던 기자를 향했다.“과학 연구자, 의학 전문가, 스포츠 선수,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여성의 몸에서 태어났습니다. 여성을 존경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모욕해서는 안 됩니다.”그러자 그 기자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조용히 사람들 사이에서 빠져나갔다.다른 기자들도 더 이상 질문을 할 기세를 잃었고 도아린은 고개를 돌려 고유리를 보며 말했다.“기자분들 고생 많으셨으니 저녁 식사 후 차량을 준비해 안전하게 귀가할 수 있도록 해 주세요.”고유리는 기자들을 데리고 나가며 각자에게 돈 봉투를 나눠 주었다.그들은 어떤 내용을 발표할 수 있고
“뭐라도 먹고 가자.”배건후는 구운 닭 날개는 도아린에게 건네주고 주현정에게는 구운 식빵을 건네주었다.주현정은 빵을 받아 들고는 돌아서며 말했다. “천천히 이야기 나누렴. 나는 물 좀 마시러 들어갈게.”도아린은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배건후가 그녀의 손을 붙잡아서 멈췄다.두 사람은 강가의 평평한 돌 위에 앉았다.“엄마는 진짜 다 내려놓으신 걸까요?”“적어도 시작은 하신 거지. 앞으로 진 큰아버지와 큰어머니와 함께 여행 다니면 점차 나아질 거야.”배건후는 핸드폰을 꺼내고는 방금 구 경관이 보내온 사진을 열었다.“남궁유민, 즉 고성만이야. 경찰이 고성만의 집을 수색할 때 이걸 발견했어.”도아린은 마지막 닭 날개를 입에 넣고 꼬챙이를 배건후에게 건네며 핸드폰을 받아서들었다.화면 속 사진에는 루비 목걸이가 찍혀 있었다.배건후가 큰돈을 들여 샀던 화려한 디자인의 목걸이지만 전에 잃어버렸던 목걸이였다.도아린은 배건후를 바라보며 말하려 했지만 입안은 닭 날개로 가득 차있어 눈만 깜빡였다.“내가 전에 너한테 줬던 그 목걸이야. 배지유가 몰래 차다가 잃어버렸던 거.”도아린의 입은 마치 발골 기계 같았다. 닭 날개가 입에 들어갔다 나올 때면 뼈만 남았다.도아린은 손바닥에 뼈를 뱉고는 차분하게 말했다.“배지유가 어떤 남자와 잤고 그 사람이 계속해서 그녀를 영상으로 협박했어요. 그 장본인이 바로 고성만이라구요!”“...”이번에는 배건후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성만이 배지유를 협박한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목걸이를 철저히 숨겨놓고 분해해서 이미 팔아버렸을 거로 생각했거든. 그런데 그걸 집에 보관해 놓았을 줄은 몰랐어.”그것은 고성만이 자신을 위해 남겨둔 마지막 보험이었다.궁지에 몰리게 되면 목걸이를 분해해 팔고 다른 도시로 가서 새 삶을 살 계획이었을 것이다.하지만 그는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체포당하고 말았다.다음 날, 도아린은 연성으로 돌아갔다. 배건후가 신청한 챔피언십 대회 접대 임무가 승인되었기 때문이다.진수혁 역시 변
그는 입가에 얕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괜찮아. 자고충이 하나가 될 때 이런 현상이 생기는 거야. 앞으로 잘못된 일을 하지 않으면 아프지도 않을 거야.”만약 사랑하는 사람을 배신한다면 그 고통으로 인해 결국 죽게 될 것이다.도아린은 배건후의 머리를 끌어안고 고개를 들고 흘러나오는 눈물을 억지로 참으려고 애썼다.배건후는 그녀의 품속에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육원의 중첩된 지분을 손에 넣어서 너에게 혼수로 바칠게. 네가 나를 원하지 않아도 상관없어. 그래도 나는 너를 평생 지켜줄 거야.”그녀가 결국 참지 못하고 흘린 한 방울의 눈물은 그녀의 볼을 타고 떨어져 남자의 머리 위에 떨어졌다.그렇게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 빛이 어두워질 때까지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를 안고 있었다. “돌아가자.”배건후는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감싸안고 다리를 움직이며 불편했던 자세를 바꿨다.“이 근처에 야생 동물은 없지만 해가 지면 안전하지 않아.”도아린은 처음에는 감정에 휩싸여 배건후의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가 몸을 움직이자 그녀는 즉시 이상함을 느꼈다.그녀는 급히 일어나며 말했다.“돌아갈 때 건후 씨 몸이 불편하니까 제가 태워드릴게요. 그리고 내리막길이라 힘도 덜 들 거예요.”“알았어. 네 말 들을게.”자전거 핸들이 비뚤어져 있었지만 배건후는 두 다리로 바퀴를 단단히 고정한 후 힘껏 돌려 단숨에 바로 고쳤다.도아린이 자전거 앞좌석에 타고 배건후는 그녀 뒤에 앉았다.그는 얼굴을 그녀의 등에 기댄 채 내리막에서 속도가 너무 빨라지면 긴 다리를 쭉 뻗어 마찰력을 늘리며 조절했다.그들이 별장에 도착했을 때 진수혁과 변슬기도 막 돌아오고 있었다.변슬기는 도아린을 의미심장하게 쳐다보았다.도아린은 그들이 뭔가 진전이 있을 줄 알고 가서 물어보려 했지만 배건후가 붙잡았다.그는 손을 뻗어 그녀 머리 위에서 붉은 잎 하나를 떼어냈다.“...”변슬기와 진수혁이 설마 자신과 배건후가 야외에서 뭔가를 했다고 생각하진 않겠지.배건후는 오직 도아린에게만 부
두 사람은 눈이 마주쳤다.도아린은 그의 눈동자 속에 가득한 붉게 물든 단풍잎과 맑고 푸른 하늘 그리고 마음속 깊이 즐거워하며 웃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그의 깊고 그윽한 눈이 가늘게 감기며 그 속에는 격렬한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듯했다.‘그래, 이거지!’그녀는 올해 겨우 25살이었다.어린 시절 양부모 곁에서 사랑받지 못했고 장애를 겪은 후 식물인간이 된 동생을 돌보며 결혼 생활에서는 남편의 감정적 학대 속에서 버텨야 했다.그녀는 너무도 많은 행복을 잃어버린 채 살아왔다.이게 맞는 일이다.그녀는 웃어야 한다. 크게 소리 내어 마음껏 웃어야 한다.고작 25살에 불과한 그녀가 이토록 많고 무거운 책임과 압박을 짊어질 필요는 없었다.눈앞 여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점점 사라지고 배건후의 심장도 저릿해 왔다.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거친 손끝이 그녀의 부드러운 피부를 스쳤고 천천히 그녀의 눈꼬리를 눌렀다.“웃어. 앞으로 나쁜 감정들은 전부 나한테 넘겨. 내 앞에서는 일부러 강한 척 버틸 필요도 없어. 속상하면 때리고 욕해도 돼. 대신에 절대 자신을 괴롭히지 마.”도아린은 코끝이 찡해지고 눈가가 뜨거워지더니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했다.그녀는 급히 일어나 뒤돌아 눈물을 닦으려 했다.그 순간 힘센 팔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았고 특유의 나무 향기가 그녀를 감쌌고낮고 깊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여태까지 내가 나쁜 놈이었어. 미안해. 앞으로는 모든 일을 너와 상의할게. 네가 싫어하는 건 하지 않을 거고 네가 속상해할 일도 만들지 않을 거야.”도아린은 팔꿈치로 그를 툭 쳤다.“입만 살아서!”배건후는 그녀의 어깨를 잡고 돌려세운 뒤 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도아린은 미간을 찌푸렸다.“아직 육원의 중첩된 지분을 손에 넣지도 못했잖아요. 그리고 저도 아직...”이후의 말은 더 이상할 수 없었다.배건후가 상자를 열었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은 청혼의 반지가 아니었다.작고 빨간 벌레가 들어 있었는데 다리가 없고 온몸이 부드러웠으며
변슬기는 바쁜 듯 뒤돌아보며 기대와 불안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좋아요." 진수혁은 흔쾌히 대답했다. 이미 옷을 갈아입었기 때문이다. 배건후는 세 사람을 보고 눈빛이 흔들렸다. 빌라에는 자전거가 두 대 있었는데, 도아린과 함께 드라이브를 나가기 위해 일부러 다른 자전거의 페달을 떼어 놓았던 것이다. 도아린은 자전거를 보고 그에게 너 정말 얄밉다'는 눈빛을 보내며 빨리 고치라고 신호를 보냈다. 자전거를 고치고 네 사람은 문밖으로 나갔다. "꽉 잡아."배건후는 도아린이 자신의 허리를 감싸 안자 힘껏 페달을 밟았고, 자전거는 비탈길을 미끄러져 작은 길로 향했다.변슬기는 진수혁에게 감히 손을 대지 못하고 자전거 뒤쪽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진수혁은 자전거 타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듯 비틀거렸다. 변슬기는 "저, 제가 밀어드릴까요...거의 정상에 도착하면, 그때 저를 밀어주세요."라고 제안했다. 진 대표님의 속도로는 누가 먼저 정상에 도착할지 내기는커녕, 저녁 식사 시간이 되어도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 진수혁은 아무 말 없이 계속 비틀거렸다. 변슬기는 거의 넘어질 뻔했고, 황급히 남자의 허리를 붙잡았다. 자전거는 갑자기 비틀거리지 않았고, 속도도 빨라졌다. 변슬기: "..."배건후는 도아린을 태우고 산길을 누볐고, 도아린은 뒤쪽 페달을 밟으며 일어섰다. 두 손으로 그의 어깨를 누르고, 짧은 머리카락은 바람에 휘날렸다. "산속 공기가 도시보다 훨씬 좋네요. 매연 냄새도 없고, 에어컨 냄새도 안 나고." 배건후는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살짝 몸을 일으켰다. "어제 비가 왔으면 더 좋았을 텐데." "당신도 비 온 뒤 흙냄새 좋아해요?" 도아린은 배건후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의 귓가에 웃으며 말했다. "나도 좋아해요! 비 온 뒤 흙과 풀이 섞인 냄새는 기분을 좋게 만들어요!" 배건후는 입꼬리를 올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아린은 잠시 침묵하다가 깨달았다. 배건후가 말한 것은 바로 그녀가 좋아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더욱 환한 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