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준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앞의 남자를 쳐다보았다.누구지? 낯이 익는데...그보다 키가 훨씬 더 큰 남자는 몸에 꼭 맞는 맞춤 정장에 사파이어가 박힌 고급스러운 넥타이핀을 하고 있었다. 남자는 보기만 해도 귀티가 철철 흘러넘쳤다. 그윽한 두 눈은 마치 얼음장처럼 차가워 보였고 사람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당신... 쓸데없는 일에 끼어들지 마.”안준휘는 말을 더듬었고 배건후는 그의 주먹을 쥐고 아래로 누르며 차갑게 입을 열었다.“여긴 경찰서입니다. 설마 여기서 사람한테 손찌검을 할 건 아니죠?”당황스러운 기색이 역력하던 안준휘는 그제야 상대방의 손을 뿌리치고 고개를 돌려 도아린을 쳐다보았다. “안씨 가문과 진씨 가문은 떼어내려고 해도 뗄 수 없는 관계야. 네가 한 짓들을 형님께서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 진씨 가문의 사람들이 널 경계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니?”도아린은 피식 웃었다.“고모가 살아있었다면 뗄 수 없는 관계인 건 맞죠. 하지만 고모는 이미 죽었고 고모의 죽음에 의문이 많아요.”피식 웃던 그녀가 이내 비꼬는 표정을 지었다.“만약 고모가 죽은 진짜 원인이 밝혀진다면 누구한테 더 손해일까요?”그 말에 안준휘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켕기는 것이 있는지 눈 밑에 빠르게 걱정이 스쳐 지나갔지만 이내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계획은 빈틈이 없었고 도아린은 결코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혹여라도 의심을 한다고 하더라도 증거가 없으니 딱 잡아떼면 그만이다.하지만... 조금만 더 기다려야 한다. “너랑 말싸움하기 싫다. 어디 두고 봐.”안준휘는 몸을 돌렸다.한편, 배건후가 그녀를 향해 뭔가 말을 하려는 순간 도아린은 그를 무시한 채 진경수를 쳐다보았다.“오빠, 이제 그만 가요.”“여기까지 왔는데 경찰에서 무슨 얘기를 할지 일단 들어나 보자.”진경수는 도아린을 끌고 맨 뒷줄에 앉았다. “우리가 가면 누군가 우리한테 죄를 뒤집어씌울 수도 있으니까.”안준휘한테 들으라고 한 말이었다.화가 난 안준휘는 빨간 눈을 들고 주먹을
“민재야, 도와줘...”“한 번 더 말해 봐!”도아린은 누군가에게 머리를 잡혀 억지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뒤에 있는 남자의 싸늘한 이목구비를 본 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건후 씨? 건후 씨가 왜 여기에...”남자는 안개가 자욱한 유리 벽에 도아린을 밀어붙이더니 그녀의 아래턱을 잡고 눈을 마주쳤다.“여긴 내 방이야, 누구이길 바라는데? 응?”도아린이 미친 듯이 발버둥 쳤다.“이거 놔요. 놓으라고요...”“날 건드렸으면 끝까지 버텨야지.”남자는 도아린의 허리를 감싸 안고 마구 더듬었다.“으악...”쿵!도아린은 차 유리창에 머리를 부딪치면서 꿈에서 깼다.앞에 교통사고가 일어났는데 버스가 미처 피하지 못하고 길가의 배수구에 빠지면서 옆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버스 안에는 온통 욕하는 사람들과 우는 사람들뿐이라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3년 전 그날 밤의 사고에 비하면 이번 사고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도아린은 그 사고만 생각하면 아직도 심장이 벌렁거렸다. 그날 밤 그녀는 배건후 때문에 병원에 가게 되었고 그러다가 배씨 가문 사모님이 되어 위기들을 해결하긴 했지만...“죽고 싶어요? 얼른 밖으로 기어 나와요!”누군가의 재촉에 도아린은 이미 망가진 케이크를 버리고 선루프로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구급차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도아린은 구급차가 멀지 않은 곳의 아우디 밴 옆에 멈춰 있는 걸 발견했다.의료진들이 구급차에서 내려 차 안의 다친 환자를 부축했다. 그때 훤칠한 키의 한 남자가 상체를 숙이고 차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조심스럽게 여자를 안고 나온 후 구급차에 태웠다.찰나였지만 도아린은 그 남자가 바로 결혼한 지 3년 된 남편이라는 걸 알아봤다. 그리고 남편의 품에 안겨 있는 여자는 늘 잊지 못했던 그의 첫사랑이었다. 그는 유학 간 그녀를 줄곧 잊지 못했다.도아린은 팔이 아픈 것도 참아가며 휴대전화를 꺼내 전화를 걸었다. 휴대전화 너머로 남자의 싸늘하고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용건만 간단히.”“오늘 집에 들어와
“대표님!”배건후의 차를 알고 있는 경비원이 허리 굽혀 인사했다.“대표님, 아린 씨도 자주 농땡이 치는 건 아니에요. 근데 다른 도우미로 바꾸고 싶다면 소개해드릴게요...”관리사무소 팀장은 웃으면서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냈다.배씨 가문의 도우미들은 좋은 것만 먹고 좋은 것만 썼다. 게다가 월급이 높을 뿐만 아니라 재벌 2세를 만날 기회가 많기에 도아린의 자리를 빼앗으려는 사람이 많았다.배건후는 차 안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카리스마는 모두를 압도해 버렸다.환하게 웃던 사람들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연성의 7월은 한창 무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지만 사람들은 마치 공기가 얼어붙은 것처럼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1분 후, 유리창이 서서히 내려오면서 배건후의 어두운 목소리가 들려왔다.“할 일 다 하고 여기서 수다질이야? 하기 싫으면 그만두고 꺼져.”관리사무소 팀장은 놀란 나머지 두 다리를 부들부들 떨었고 당장 무릎이라도 꿇을 기세였다.배건후의 언행은 상업계의 발전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그런 그가 관리사무소를 내쫓는다면 관리사무소는 연성에서 더는 발을 붙이기 어려울 것이다.사람들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고 배건후의 날카로운 시선이 도아린에게 머물렀다.“타.”“난 할 일이 있어서요...”그러자 배건후의 표정이 확 일그러졌다.“같은 말 반복하게 하지 마.”도아린은 하는 수 없이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차에 올라탔다. 그러고는 배건후와 거리를 유지하려고 차 문 쪽에 최대한 붙어 앉았다.마이바흐가 맨션을 나간 후 배건후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가 하얀 연기를 내뱉으며 싸늘하게 말했다.“평소에는 기고만장하다가 침대 위에서는 힘 한 번 쓰지 못하는 남자?”“...”도아린은 시선을 내리깔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담배를 다 피운 배건후가 서류를 툭툭 두드렸다.“이거 무슨 뜻이야?”도아린이 힐끔 쳐다보니 그녀가 작성한 이혼 합의서였다.“이혼하고 싶어요.”차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숨 막힐 듯이 답답해졌다.운전기사 조수현은 당장이라도 도망
전화를 받으면서 도아린을 쳐다보는 배건후의 두 눈에 경멸과 조롱이 가득했다. 관리사무소 사람마저 그녀를 안중에도 두지 않는데 무슨 자격으로 이혼 얘기를 꺼내겠는가?도아린은 배건후가 보는 앞에서 더러운 장갑을 팀장의 얼굴에 던져버렸다. 팀장은 미처 피하지 못하고 노트와 펜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관리사무소 팀장으로서 뭘 해야 하는지 모르겠으면 처음부터 다시 배워요! 날 내쫓는다고 해도 당신은 에이트 맨션에 못 들어가요. 배건후 씨는 여우같이 교활한 사람을 좋아하거든요. 당신도 여우 같긴 한데 나이가 너무 많아요!”어차피 곧 떠날 거라 참고 싶지 않았고 이참에 배건후를 한 방 먹이는 것도 나름 괜찮았다.배건후의 눈빛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고 휴대전화를 꽉 쥐었다.도아린은 집 안으로 들어가 물을 따라 마셨다. 방문이 열려있었는데 무언가가 현관의 거치대에 놓여있었다.짐 정리를 다 마치고 나와서야 거치대에 놓여있는 물건이 그녀의 휴대전화라는 걸 알았다.‘내가 휴대전화를 건후 씨 차에 떨어뜨려서 다시 들어온 건가?’이번에 도아린은 약삭빠르게 차고에 있던 카이엔을 몰고 나갔다.카이엔은 두 사람이 결혼할 때 배건후가 준 예물 중 하나였다. 평소 그녀는 별로 외출하지 않았고 또 연성에 차가 막혀 계속 차고에 가만히 세워두기만 했다.배건후의 재산을 나눠 가지진 못하더라도 이 차는 혼전 재산이라 그녀의 것이었다. 무뚝뚝하고 매정한 남자를 곧 떠날 거란 생각만 하면 도아린은 기분이 너무 좋아 액셀을 미친 듯이 밟았다.운전하는 중에 절친 소유정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기사를 보고 걱정돼서 전화한 것이었다. 도아린이 힘들어할까 봐 기분도 풀 겸 술 먹으러 가자고 하자 도아린은 모든 걸 정리한 다음에 다시 축하하자면서 거절했다.아파트 청소를 마치긴 했지만 도아린은 처음 자는 침대에 눕기 전에 침구청소기로 청소하는 버릇이 있었다. 침대 위에서 청소기를 돌리는데 부동산 중개인이 갑자기 들어왔다.“문 한참이나 두드렸는데 못 들은 것 같아서 문 열고 들어왔어요.”도
“걔가 작정하고 접근하지만 않았어도 오빠는 걔랑 결혼하지 않았을 텐데.”배지유가 화를 내며 말했다.“엄마가 아무리 좋은 한약을 먹여봤자 무슨 소용이에요? 오빠는 그 여자랑 애를 가질 생각이 전혀 없는데.”손을 닦으면서 나오던 도아린은 두 사람의 얘기를 듣고 다시 뒷걸음질 쳤다.“오빠, 난 친구들 만나도 오빠가 결혼했다는 얘기를 못 하겠어요. 저런 여자라는 게 알려지면 오히려 망신이에요. 보미 언니 이젠 톱스타가 됐으니까 엄마도 더는 반대하지 않을 거예요. 오빠가 말만 하면 내가 엄마한테 말해줄게요.”“보미 지금 한창 일할 때야...”배건후가 담배에 불을 붙였다.역시 그녀의 예상대로 이혼을 동의하지 않은 건 손보미가 내연녀라는 욕을 먹을까 봐서였다. 배건후는 언제든지 항상 손보미의 이익을 가장 먼저 생각했다.도아린은 코끝이 찡하면서 눈물이 앞을 가렸다. 그녀의 존엄 따위는 이미 배건후에게 짓밟혀서 가루가 되고 말았다. 지금 이대로 나간다면 체면마저 모두 잃을 것 같았다.“으악!”차를 내오던 도우미가 도아린과 부딪히고 말았다. 도우미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사모님, 손이...”“괜찮아요.”도아린의 손이 뜨거운 물에 데어 시뻘겋게 됐다.그때 배건후가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잡더니 주방으로 끌고 가서 찬물로 헹궜다.가뜩이나 기분이 안 좋았던 배건후는 도아린이 데고도 찍소리도 하지 않자 더 답답하고 화가 났다.“내가 널 터치하지 않는다는 걸 여기저기 말하고 다녔어?”“...”도아린은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사실 그녀는 말한 적이 없었다. 배지유가 에이트 맨션에 갔을 때마다 배건후가 없는 걸 보고 배건후가 도아린과 함께 살지 않는다고 확신했던 것이었다.거의 사실이나 다름없었기에 도아린은 아니라고 설명하지도 않았다.“내 말이 틀렸나요?”“난 너한테 관심이 없어.”“관심이 없으면서 왜 이혼 안 하는데요?”아무렇지 않은 도아린의 태도에 배건후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담배를 꽉 쥐어 손등에 핏줄이 다 튀어
다들 잠이 든 시간이라 복도부터 문 앞까지 어슴푸레한 등이 두 개만 켜져 있었다.배건후가 현관 앞으로 나온 그때 거실 불이 갑자기 켜졌다.“이 늦은 밤에 어딜 가?”주현정이 걸어 나오면서 물었다.“무슨 급한 일이길래 아린이까지 버리고 가?”“...”배건후는 불편한 몸을 참으며 휴대전화를 꽉 쥐었다.주현정은 주부로 살아왔어도 사리 분별을 잘하는 사람이었다. 만약 회사 일로 핑계를 댔더라면 말리진 않았을 것이다.“그게...”배건후가 얘기하려는데 도아린이 다급하게 내려왔다. 그의 눈빛이 순식간에 싸늘해졌다.도아린은 하도 급하게 내려오는 바람에 계단을 헛디딜 뻔했다. 내려오면서 머리를 매다가 주현정을 보고서야 발걸음을 늦추었다.“어머님, 제 동생 상태가 안 좋아서 병원에서 오라고 해서요.”창백해진 그녀의 얼굴을 본 주현정이 다급하게 말했다.“그래? 그럼 얼른 가봐. 건후야, 운전 조심하고.”도아린은 그제야 문 앞에 서 있는 배건후를 발견했다. 그녀가 까발리기라도 할까 봐 두려웠는지 얼굴이 어둡기 그지없었다. 배건후가 망신당하든 말든 상관없지만 그녀는 망신당하기 싫었다.“얼른 가.”주현정이 문 앞까지 나온 바람에 도아린은 하는 수 없이 배건후의 차에 탔다.“건후 씨랑 같이 갈 생각 없으니까 저 앞에서 내려주면 돼요.”“아무리 화가 나도 그렇지 어떻게 친동생을 저주해?”배건후는 그녀가 한밤중에 집을 나오려고 핑계를 댄 거라고 생각했다.“...”도아린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너무도 피곤했고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그녀의 남동생에게 진짜 무슨 일이 생겨도 배건후는 신경도 쓰지 않을 것이다. 어쨌거나 그의 마음속에 그녀의 자리는 없었으니까.가는 길 내내 차 안은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도아린은 택시를 잡기 쉬운 곳에서 내린 후 빠르게 병원으로 달려갔다.“제 동생 어떤가요?”“환자분 의식 없이 3년이나 누워있어서 이젠 몸의 장기도 기능을 잃어가고 있어요. 아무래도 마음의 준비를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도아린은 몸
도아린은 홀로 쓸쓸하게 복도에 앉아있다가 응급조치를 마쳤다는 간병인의 말을 듣고서야 정신을 차렸다.도지현은 다시 한번 저승의 문턱에서 살아 돌아왔다. 하지만 의사는 도지현의 각 수치가 한계에 도달했다면서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다...도아린은 의사에게 허리 굽혀 인사한 후 병실로 돌아와 남동생의 팔을 어루만졌다.“이모, 가서 쉬세요. 지현이랑 단둘이 있고 싶어요.”간병인은 도아린이 자존심이 강해서 남들에게 연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럼 옆에 탕비실에 있을 테니까 무슨 일 있으면 불러요.”도지현은 무릎 밑으로 두 다리를 절단했고 허벅지 근육도 거의 다 수축해서 다리가 팔보다도 더 가늘었다.그녀보다 도지현을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 아픈 몸 때문에 힘들어도 늘 밝았던 동생이었다.장애인 농구팀에 입단한 후에는 열심히 운동하고 생활을 공유하기도 했다. 절대 시합을 한 게임 졌다고 목숨을 끊을 사람이 아니었다. 하여 그녀는 도지현이 깨어나서 그날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직접 말해주길 바랐다.두 팔을 다 마사지하고 나니 도아린의 손이 다 떨릴 정도로 저릿했다. 간병인이 와서 도지현의 몸을 닦아주었고 도아린은 옥상으로 가서 소유정의 전화를 받았다.“널 방해한 건 아니지?”“아니. 나 지금 병원이야.”도아린은 젖은 머리가 마르도록 풀어헤쳤다.“지현이...”“다시 살려냈어.”“그래. 의료 기술이 계속 발전하니까 언젠가 깨어날지도 몰라.”소유정은 그녀를 위로한 후 본론을 얘기했다.“나형욱 선생님이 또 날 찾아왔어. 네가 지난번에 수선한 자수 드레스가 엄청 마음에 든다면서 선생님 팀으로 들어오래.”나형욱은 수선 명인이었다. 그와 한 번만 손을 잡아도 몸값이 배로 뛰는 건 문제없었다. 그런 그가 도아린을 직접 스카우트하려 한다는 건 그녀의 실력을 인정한다는 뜻이었다.도아린의 솜씨도 업계에서는 손꼽히는 정도였다. 배건후와 결혼한 후에는 가정에만 충실하다 보니 그저 손이 굳어지지 않으려고 세컨드 계정으로 일을 조금씩 받
도아린은 나형욱을 만나러 가던 길에 유명한 인삼 가게에서 고급 인삼을 들여왔다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소유정은 전에 그녀에게 소유정의 능력을 알아준 송민혁이 야생 산삼을 무척이나 좋아한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이번에 소유정이 송민혁이 연출한 작품의 OST를 따냈기에 선물하고 싶었다.도아린이 후방 주차를 하려고 절반 정도 후진한 그때 뒤에 있던 빨간색 람보르기니가 먼저 주차했다. 여성 운전자는 차를 삐뚤게 세운 후 그냥 가버렸다.결국 도아린은 하는 수 없이 차를 좀 먼 곳에 세운 다음 걸어갔다. 그런데 아까 그 여성 운전자도 그 가게에 있었다.“안녕하세요. 어서 오세요.”점원이 열정적으로 맞이했다.“방금 들여온 백 년 된 야생 산삼 보여주세요.”“죄송한데 이미 팔렸어요. 장뇌삼도 괜찮은 게 있어요.”도아린이 고개를 내저었다.“아니요. 됐어요, 그럼.”그녀가 돌아서려는데 뒤에서 누군가 그녀를 불렀다.“도아린 씨죠?”여성 운전자가 다가왔다.“아린 씨가 운전한 그 카이엔 사실 손보미한테 선물하려던 거였어요. 차 번호도 손보미의 행운 숫자거든요. 그래서 알아요.”“...”도아린은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봤다.점원은 야생 산삼을 포장한 후 종이와 펜을 건넸다.“수취인의 성함과 연락처 적어주세요. 나중에 배 대표님한테 확인해야 하니까요.”도아린은 휴대전화를 꽉 쥐었다. 연성에서 야생 산삼을 살 수 있는 배 대표라면 생각하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여성 운전자는 팔짱을 끼고 오만한 태도로 도아린을 쳐다보았다.“청호상 후보에 오른 손보미 알죠? 배 대표님이 손보미를 위해 주문한 거예요. 연예인의 정보는 함부로 누설해서는 안 되니까 제 이름 적을게요. 전 손보미의 매니저 김지민입니다.”도아린의 얼굴에는 놀란 기색도, 분노한 기색도 없었고 차분하면서도 덤덤하기만 했다. 하지만 마음은 갈기갈기 찢어진 것처럼 아팠다.손보미는 이마가 살짝 긁혔을 뿐인데 배건후는 몸조리하도록 백 년 된 야생 산삼까지 사주었다. 역시 좋아하는 여자는 달랐다.도아
안준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앞의 남자를 쳐다보았다.누구지? 낯이 익는데...그보다 키가 훨씬 더 큰 남자는 몸에 꼭 맞는 맞춤 정장에 사파이어가 박힌 고급스러운 넥타이핀을 하고 있었다. 남자는 보기만 해도 귀티가 철철 흘러넘쳤다. 그윽한 두 눈은 마치 얼음장처럼 차가워 보였고 사람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당신... 쓸데없는 일에 끼어들지 마.”안준휘는 말을 더듬었고 배건후는 그의 주먹을 쥐고 아래로 누르며 차갑게 입을 열었다.“여긴 경찰서입니다. 설마 여기서 사람한테 손찌검을 할 건 아니죠?”당황스러운 기색이 역력하던 안준휘는 그제야 상대방의 손을 뿌리치고 고개를 돌려 도아린을 쳐다보았다. “안씨 가문과 진씨 가문은 떼어내려고 해도 뗄 수 없는 관계야. 네가 한 짓들을 형님께서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 진씨 가문의 사람들이 널 경계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니?”도아린은 피식 웃었다.“고모가 살아있었다면 뗄 수 없는 관계인 건 맞죠. 하지만 고모는 이미 죽었고 고모의 죽음에 의문이 많아요.”피식 웃던 그녀가 이내 비꼬는 표정을 지었다.“만약 고모가 죽은 진짜 원인이 밝혀진다면 누구한테 더 손해일까요?”그 말에 안준휘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켕기는 것이 있는지 눈 밑에 빠르게 걱정이 스쳐 지나갔지만 이내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계획은 빈틈이 없었고 도아린은 결코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혹여라도 의심을 한다고 하더라도 증거가 없으니 딱 잡아떼면 그만이다.하지만... 조금만 더 기다려야 한다. “너랑 말싸움하기 싫다. 어디 두고 봐.”안준휘는 몸을 돌렸다.한편, 배건후가 그녀를 향해 뭔가 말을 하려는 순간 도아린은 그를 무시한 채 진경수를 쳐다보았다.“오빠, 이제 그만 가요.”“여기까지 왔는데 경찰에서 무슨 얘기를 할지 일단 들어나 보자.”진경수는 도아린을 끌고 맨 뒷줄에 앉았다. “우리가 가면 누군가 우리한테 죄를 뒤집어씌울 수도 있으니까.”안준휘한테 들으라고 한 말이었다.화가 난 안준휘는 빨간 눈을 들고 주먹을
배지유는 단번에 수표를 낚아챘고 그 위에 적힌 20억이라는 숫자를 보고는 기뻐서 눈을 부릅떴다.“오빠 마음속에 내가 있는 거 다 알아요.”그녀는 수표를 잘 챙기고는 차 문을 열고 지팡이를 짚은 채 천천히 차에서 내렸다.차 뒤를 돌아가는데 남궁유민이 경찰서 입구에 서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그녀는 몸을 휘청거렸고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지만 우정윤이 그녀를 부축했다. 우정윤의 손을 뿌리친 그녀는 심호흡하고 계단을 올라갔다.대문으로 가는 계단이 그렇게 높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힘들게 걸어갔다.다리가 불편한 이유도 있지만 심리적 압박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오빠를 제 손으로 감옥에 보낼 생각을 하니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안고 들어가.”배건후가 우정윤을 쳐다보자 우정윤은 아무 말 없이 배지유를 덥석 안아 올렸다.비명을 지르던 그녀는 우정윤의 옷을 움켜쥐고 벌컥 화를 냈다.“오빠, 날 감옥에 보내고 싶어서 이리도 안달 난 거예요?”마음속에 있던 약간의 죄책감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예전에 도아린이 그녀를 구치소에 보냈을 때 배건후는 그녀를 한 번도 보러 오지 않았다. 도아린 앞에서 자신의 편을 들어주기는커녕 아빠가 자신을 돕는 것까지 반대했었다.이런 오빠는 차라리 없는 게 낫다.오빠가 감옥에 들어간다면 그녀 또한 면회를 오지 않을 것이다.감옥에서 사람들에게 구속받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똑똑히 알려주고 싶었다.배지유의 눈 밑에 음험한 기운이 스쳐 지나갔지만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남궁유민은 배지유와 함께 심문실로 갔고 배건후와 우정윤은 로비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그들이 앉자마자 도아린이 진경수와 함께 안으로 들어왔다.우정윤이 급하게 일어나서 인사를 하려고 하는데 도아린이 그들을 못 본 척 지나치는 것을 보고 다시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대표님, 도아린 씨... 오셨어요.”우정윤이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배건후의 시선이 태블릿에서 도아린에게로 향했다. 그녀는 포니테일에 옅은 색
“도아린.”성대호는 의자를 발로 차서 넘어뜨렸고 마치 사람을 잡아먹으려는 듯 빨간 눈을 부릅떴다.도아린이 배건후와 결혼하지 않았다면 여전히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는 평범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배건후와 결혼을 한 후에도 그녀는 부잣집 사모님들과 어울리지 못하였고 이혼한 후에는 그런 사람들과 더더욱 접촉할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또한 진씨 가문으로 돌아가긴 했지만 진씨 가문의 돈을 챙기지도 않았고 진씨 가문의 회사에 들어가지도 않았다.도대체 무슨 힘이 있어서 그와 맞설 수 있단 말인가?어젯밤 일파만파 닥쳐온 전술 때문에 그는 크게 당황하였다. 가까스로 실시간 검색어를 지웠는데 유명한 유튜버들이 다시 홍보를 하기 시작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유튜버들을 따로 연락하여 돈을 줄 테니 영상을 삭제하고 하였다. 그러나 매수한 사람은 몇 명에 불과했고 여러 개의 플랫폼에서 다시 영상들이 올라오기 시작했으며 동영상 앱을 다운로드한 모든 핸드폰에 메시지가 전송되었다.이렇게 대규모의 홍보는 근본적으로 만회할 여지가 없었다. 더 황당한 건 영상 속 도아린의 모습이었다. 영상 속 그녀는 담담한 얼굴로 차분하게 이 일에 대해 분석하였고 아름다운 얼굴 때문에 그녀는 급속도로 유명해지게 되었다. 누군가 그녀의 배경을 밝혀냈고 그녀가 제작을 맡은 도 덩달아 인기를 끌었다. 기회를 너무나 잘 이용할 줄 아는 여자다.이건 일석삼조가 아니겠나?에취.도아린은 재빨리 휴지를 꺼내 입을 가리고 재채기를 했다.“어젯밤에 감기에 걸린 거 아니야?”윤명희는 급히 젓가락을 내려놓고 하인을 불러 약상자를 가져오라고 했다. “오늘 비 온다고 하더라. 잊지 말고 우산 챙겨가. 비 오면 쌀쌀해지니까 외투도 챙겨가고.”한편, 차화영은 두 모녀를 지켜보며 마음이 매우 불편했다. 그녀의 손이 다시 떨리기 시작했는데 윤명희는 의사에게 약을 처방해 달라고만 하고는 그냥 내버려두었다.그런데 지금 도아린이 재채기를 하자 이리 긴장한 모습을 보이다니.이게 뭐 약까지 먹을 정도인
옆방에서 막 샤워를 마치고 나온 진수혁은 핸드폰에 뜬 영상을 보고 비서한테 전화를 걸었다.“각 유튜버들한테 연락하고 6억 투자하여 대대적으로 홍보해.”한편, 그동안 계속 진범준을 위로했던 윤명희는 남편이 일부러 불쌍한 척한 것을 눈치채고는 그를 외면했다. 진범준은 아내의 기분을 풀어주려고 애를 썼고 아내와 뜨거운 시간을 보내고 난 그는 핸드폰에 뜬 소식을 보게 되었다. “당신도 우리 세은이 도와줘요. 안 그러면 나 당신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당연히 그래야지.”딸은 아내한테 소중한 사람이었고 딸이 행복해야 아내가 행복한 거고 아내가 행복해야 그도 행복할 수 있었다. 일부 네티즌들은 한창 야근을 하며 안준휘에게 유리한 영상을 편집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 안으로 들어왔다.“대표님, 여론의 방향이 바뀌었습니다. 전부 다 안준휘가 욕심을 부리고 진씨 가문의 재산을 노리고 있다고 욕하고 있어요. 안씨 가문의 사람들은 배은망덕한 인간들이라고 비난하고 있습니다.”“그럴 리가?”성대호는 데이터 모니터링 플랫폼을 접속했다. 그들이 게시한 영상들은 재생수가 감소하여 점차 빅데이터에서 도태되고 있었다. 반면 새로운 영상들이 우후죽순처럼 갑자기 등장했고 좋아요와 영상 공유는 그들의 영상 재생수를 훨씬 초과했다.“이건 우리가 촬영한 자료인데 누가 유출한 거야?”성대호는 불같이 화를 냈다. 담당자가 급히 오늘 제출한 영상 내용을 확인했고 그 결과 바로 촬영한 사람을 찾게 되었다.그러나 상대방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누군간 저희 촬영팀에 끼어든 것 같습니다.”“그럴 리가 없어.”성대호는 책상을 두드리며 화를 냈다.“오늘 진씨 가문으로 가서 소란을 피우는 일은 임시로 결정된 일이야. 저들은 우리 사람들을 매수할 시간은 없었을 거라고.”“가기 전에 매수를 할 수는 없어도 돌아와서 매수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정의'를 내세운 유튜버들도 결국은 인기를 이용해 돈을 벌기 위한 것이니까. 만약 누군가가 직접 돈을 준다면 그들은 매우 기뻐할
핸드폰 잠금을 해제한 후 그녀는 순간 당황했다.배지유는 재빨리 핸드폰을 잠그고 힘껏 움켜쥐며 얼굴에 띈 공포를 감추려고 애썼다. 그녀의 모든 반응은 배건후의 눈에 훤히 들어왔고 그는 손가락을 움직여 태블릿에 있는 파일을 넘기며 계속 쳐다보았다. 오빠가 더 이상 캐묻지 않자 그녀는 점차 마음을 진정시켰다.힘겹게 침을 꿀꺽 삼키더니 이내 말을 이어갔다.“더 달라고 안 해요. 10억만 줘요. 다른 게 아니라 의족을 새로 주문해야 해서 그래요.”많이 달라고 해봤자 오빠가 주지 않을 게 뻔했다. 그러나 돈을 달라고 하지 않으면 마음이 내키기 않을 것 같았다. 남궁유민이 건네준 증거들로 정말 배건후에게 유죄판결을 내린다면 그럼 내일 배건후는 그녀와 함께 경찰서에 갔다가 다시는 나오지 못할 것이다.오빠가 망하면 모건 그룹도 망하는 것이다. 그럼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오빠, 10억도 아까운 거예요?”그가 아무런 반응이 없자 배지유는 가여운 척 연기를 하며 눈시울을 붉혔다.“오빠, 전에 도아린한테 사준 액세서리만 해도 10억은 훌쩍 넘었을 거예요. 그런데 친동생인 나한테는 왜 이래요? 그렇게도 아까운 거예요?”“의족은 내가 이미 주문했어.”배건후는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 보고 있던 파일에 문제가 있는 것인지 그의 눈빛이 다소 어두워졌고 온몸에서 싸늘한 기운이 전해졌다. 배지유는 그의 기세에 눌려 약간 겁이 났다. 그녀는 어깨를 움츠리고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자수하겠다고 약속했잖아요. 오빠를 도와 도아린의 문제를 해결해 주었으니 작은 보상이라도 해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그가 눈꺼풀을 치켜올리는데 끝이 보이지 않는 검은 눈동자에 차가운 빛이 스쳐 지나갔다.그와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그녀는 이내 고개를 돌렸다.“아빠에게 준 생활비는 모두 김지민 그 여자가 다 쓰고 있어요. 차라리 그 돈을 나한테 줘요. 내가 아빠를 돌볼 테니...”“네가? 남한테 당한 줄도 모르는 네가?”그녀는 씩씩거리며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다시 태블릿
양쪽을 비교하니 너무 분명했다.진씨 가문은 진옥경의 죽음이 수상하다고 생각해 바로 경찰에 신고했지만 남편인 안준휘는 진씨 가문으로 달려와 소란밖에 피우지 않았다. 누가 진심이고 누가 가식인지는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한편, 오늘 같이 온 기자들 중에서 누군가 안준휘가 연이어 의심을 받고 여론의 방향이 진씨 가문으로 기울어지는 것을 보고 계속하다가는 안준휘의 정체가 다 드러날까 봐 급히 눈빛을 보냈다.안준휘도 계속하다가는 자신에게 불리하다는 것을 알고 그 자리에서 기절해 버렸다. 소란을 피운 자들은 관을 그대로 두고 안준휘를 차에 태우고는 이내 자리를 떴다. 한편, 딸이 수술을 받던 날 사위가 다른 여자들과 술을 마시고 놀아났다는 사실을 알고 차화영은 안준휘가 이리 소란을 피운 목적이 돈 때문이라는 걸 눈치챘다. 사위가 원망스러웠지만 사람들이 모두 흩어지고 관을 쳐다보니 참지 못하고 울음이 터져 나왔다.“옥경아. 왜 이렇게 허망하게 떠난 거야? 딸을 보내는 이 엄마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겠니?”차화영은 비틀거리며 관으로 달려가 대성통곡했다. 도아린이 하인에게 대문을 열라고 하자 진수혁의 차가 별장 안으로 들어왔고 도아린은 윤명희의 손을 잡고 자리를 떴다.아무도 차화영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혼자 자리를 뜨려니 체면이 서지 않았다.이때, 하인이 눈치채고 급히 입을 열었다.“어르신, 이 관은 소란을 피우기 위해 챙겨온 겁니다. 안에 사람이 없으니 그만 우세요. 어르신께서 아프시면 따님도 편치 못할 겁니다.”“자네 말이 맞아. 옥경이도 내가 아픈 건 바라지 않을 거야.”차화영이 눈물을 닦고 대문을 들어서는데 이때 진경수의 차가 마침 도착하였다. 거실 안, 진경수는 오늘 조사한 일에 대해 얘기했다. 도아린이 뒤를 따라간 그 의사는 진옥경이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이었고 그 사람이 진옥경한테 무슨 말을 해서 진옥경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하였다.병원 측에서 CCTV 영상을 확인하니 그 사람은 병원의 의사가 아니었고
영상을 찍던 사람은 재빨리 진씨 가문의 대문을 향해 카메라를 돌렸다. 도아린은 담담한 표정을 지은 채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러다가 관을 본 순간 그녀의 눈 밑에 안타까움과 동정이 스쳐 지나갔다. 안준휘는 계속해서 관에 엎드려 울었고 도아린을 힐끗 올려다보고는 다시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 돈이 우리한테는 엄청난 부담이었지만 너희들한테는 아무것도 아닌 거잖아. 네가 계획한 혼사에 민아가 불만을 품으니까 네가 이리 모른 척하는 거 아니니? 우리 집안이 너 때문에 풍비박산이 났어.”안준휘는 일부러 돈의 개념을 흐릿하게 만들었다.그는 이미 댓글 부대까지 구했고 일부러 사람들의 감정을 부추겼다. 돈을 사기당한 사람들은 그들 사이에 어떤 갈등이 있는지는 상관없었다. 그저 자신의 돈만 찾고 싶을 뿐이지. 진씨 가문에서 돈을 빌려준다면 그들이 어렵게 모은 돈도 돌려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동영상이 인터넷에 퍼지자 피해자들의 분노가 진씨 가문으로 향했다.“다시 한번 물을게요. 고모가 정말 공황장애를 앓고 있었어요? 그래서 교통사고가 난 거예요?”몇 사람이 핸드폰을 들고 자신을 찍는 것을 눈치챈 안준휘는 두리뭉실하게 대답했다.“진씨 가문에서 무정하게 나 몰라라 해서 그런 거잖아. 아니면 옥경이가 왜 상처를 받았겠어?”“무정하다고요? 당신 딸이 결혼하는데 우리가 왜 혼수를 해줘야 하는 거예요?”“혼수라니. 진씨 가문에서는 단 일 푼도 내놓지 않았잖아.”안준휘는 화를 벌컥 내며 주먹으로 관을 세게 내리쳤다.피식 웃던 도아린은 카메라로 고개를 돌리고 입을 열었다.“다들 내 말 좀 들어보세요. 딸이 결혼하는데 우리한테 혼수를 요구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이 세상에 이런 도리가 어디 있어요?’“도아린 너...”안준휘는 달려들어 그녀가 함부로 말하는 것을 막으려 했다.도아린은 부잣집 딸 아닌가?왜 이렇게 기가 센 여편네 같지?그때, 진수혁이 안준휘를 꽉 잡았고 도아린을 밀치려 했던 안준휘의 손은 결국 그녀를 건드리조차 못하였다.뒤로 몇 걸음
그녀는 도아린의 곁으로 다가가 딸아이의 손목을 잡았다.그 순간, 도아린은 그녀의 손을 맞잡고 살짝 힘을 주면서 그녀를 안심시켰다.하인이 들어와서 보고하는데 집으로 돌아오던 진수혁의 차가 안준휘에 의해 가로막혔고 그가 문 앞에서 소란을 피우고 있다고 하였다. 도아린은 윤명희를 따라 밖으로 나갔고 차화영도 잠시 고민하더니 그들의 뒤를 따라나섰다.그러나 너무 흥분한 나머지 다리에 힘이 풀려 하인에게 부축해달라고 했다.“진수혁. 처음에 내가 옥경이를 살리겠다고 하자 뭐라고 했어? 진씨 가문의 사람이니 진씨 가문에서 책임지겠다고 했잖아. 오늘 아침까지도 멀쩡하던 사람이 왜 오후에 갑자기 죽은 거야? 내가 빚이 많은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내 와이프만큼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리고 싶었어. 그러니까 똑바로 설명해 봐.”차에서 내린 진수혁은 주변에서 핸드폰으로 영상을 찍는 사람들을 슬쩍 훑어보고는 담담하게 안준휘를 쳐다보았다.“고모가 병원으로 이송되었을 때, 고모부의 전화는 연결이 되지 않았습니다. 뭘 하고 있었던 겁니까? 또 사람들과 술을 마시고 있었나요?”말투가 느리긴 하지만 또박또박 입을 열었다.안색이 어두워진 안준휘가 급히 해명했다.“내 딸이 남한테 협박을 당하고 사기 사건에 연루되었어. 딸의 빚을 갚기 위해 돈을 빌리러 갔던 거야.”“여자한테서 돈을 빌립니까?”그 말에 안준휘는 흠칫했다.“대표님이 여자야.”무표정한 진수혁의 얼굴은 어떤 핸드폰에서도 흠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완벽했다.유일한 흠이라면 믿기 힘들 정도로 조각상처럼 잘생겼다는 것이었다. 그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더니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돈을 빌리러 간 사람이 왜 셔츠에 립스틱 자국이 있는 겁니까? 고모부 나이에 돈 때문에 몸을 팔지는 않았을 테고.”안준휘는 자기도 모르게 옷깃을 감쌌다.옷깃을 움켜쥐고서야 오늘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이 티셔츠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셔츠는 이틀 전에 입었던 옷인데...그러나 그의 이러한 무의식적인 행동은 라이브 방송으로 지켜보고 있던
“도아린? 네가 왜 여기 있어?”“저 사람 잡아요.”그 의사를 스쳐 지나오던 안준휘는 그녀의 말에 뒤를 돌아보았다.“누구? 누구를 잡으라는 거야?”도아린이 문 앞까지 쫓아왔을 때, 그 의사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차가운 눈빛으로 안준휘를 힐끗 쳐다보던 그녀는 그를 밀어내고 밖으로 나갔다.안전 통로의 뒤에는 로비였고 네 방향에 네 개의 출구가 있었다.가장 가까운 문으로 다가가니 쓰레기통에 의사의 흰 가운이 버려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병원에 오가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 의사를 찾을 수가 없었다.“누구를 찾고 있는 거야?”뒤따라온 안준휘가 주위를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그녀는 고개를 홱 돌리고 그를 쳐다보았고 안준휘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모르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그러나 침을 꿀꺽 삼키며 잔뜩 긴장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을 보니 뭔가 켕기는 게 있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이 중환자실로 돌아왔을 때, 문 앞에 있던 진경수가 엄청난 소식을 전했다.“조금 전에 돌아가셨어요.”“옥경아, 옥경아.”그 말에 안준휘는 울부짖으며 병실로 돌진했다.도아린은 진경수의 곁으로 다가가 목소리를 낮추며 방금 그 의사에게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진경수는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의사 선생님께서 고모가 위험한 고비를 넘겼다고 하셨는데...”한편, 안준휘는 울고불고하며 소란을 피웠고 병원에서 최선을 다해 환자를 구조하지 않았다고 하다가 진경수가 자신의 동의도 없이 구조를 포기했다고 난리를 쳤다. 병원에서 소란을 피우다가 끝날 줄 알았는데 그는 관을 들고 진씨 가문의 대문 밖으로 가서 계속해서 행패를 부렸다. 진씨 가문은 부자 동네에 살고 있었고 각 별장 사이에는 비교적 독립적인 공간이 있었다.일을 더 크게 만들기 위해 안준휘는 기자들도 데리고 왔다.그는 카메라 앞에서 울며 하소연하였고 딸과 사위가 사기 사건에 연루된 것을 인정하면서 이미 해결책을 생각하고 있는데 뜻밖에도 진씨 가문이 우물에 빠진 그들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