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아린에 대한 차화영의 태도는 완전히 달라졌다.가는 내내 고향의 풍습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어떤 금과 어떤 은을 깔고 장례식에 어떤 물품들을 사용하는지 자세히 얘기했다.도아린은 그저 옆에서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못 알아들어도 반박하지 않고 그저 무슨 말은 하든 고개만 끄덕였다. 두 사람은 먼저 장례식장에 가서 상담을 받고 차화영의 지시에 따라 모든 것을 최고급으로 결정한 뒤, 장례 절차까지 모두 다 결정했다. “그럼 이대로 진행할까요? 고모부한테 어떻게 할 건지 물어볼게요. 고모부가 맡은 것 외에 나머지는 저희가 해요.”“결정적인 순간에 너밖에 없구나...”두 사람은 곧장 안씨 가문으로 향했다. 안씨 가문이 사기 사건에 연루된 이후, 안준휘는 공분을 사지 않기 위해 차를 팔았고 집에 있는 두 명의 하인들도 해고했다. 철문을 사이에 두고 안을 들여다보니 정원의 꽃은 아무도 관리하지 않은 탓에 모두 시들어져 있었다. 차화영이 전에 이곳에 살았을 때, 진옥경은 그녀에게 대문 열쇠를 주었었다. 그녀가 곧장 들어가려는데 도아린이 그녀를 막아섰다. “바로 들어가면 좀 아니지 않나요? 일단 전화부터 해볼게요. 어젯밤에 소란이 있긴 했지만 할머니를 봐서라도 문을 열어줄 거예요.”“전화는 무슨. 여긴 옥경이의 집이야. 내가 내 딸 집에 오는 데 전화까지 해야겠어?”말리면 말릴수록 차화영은 더 막무가내였다. “옥경이의 방부터 가자. 가서 옥경이가 하고 다니던 액세서리들부터 챙겨야겠다. 그건 민아의 몫이야. 안 서방이 그걸 가지고 빚이라도 갚으면 어떡해?”이제는 딸이 없으니 그녀가 외손녀를 챙겨주어야 했다.도아린은 결국 그녀를 설득하지 못했고 함께 안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거실에 거의 도착했을 때, 안에서 따져 묻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벌써 집에 다 얘기했는데 또 미뤄요? 당신 지금 나 속이는 거죠? 매번 이러지. 매번 기다리라고만 하고. 승현이도 벌써 17살이에요. 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거예요?”“이번에는 정말이야.”안준휘
“당신도 알잖아. 처음부터 난 진옥경과 결혼할 생각이 없었어. 진옥경이 먼저 나한테 자기 오빠가 엄청 대단한 사람이라고 하면서 앞으로 내 사업에 큰 도움이 될 거라고 했던 거야. 그래서 마지못해 결혼을 하고 된 거고.”안준휘는 재미도 없고 애교도 없고 허구한 날 신세 한탄만 하는 진옥경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차갑게 웃었다. “거짓말. 만약 진옥경이 아들이라도 낳았다면 당신이 날 만났을까요?”여자는 손을 뻗어 그의 가슴팍을 쓸어내리며 여우처럼 애교를 부렸다.“진옥경이 제왕절개 수술을 할 때 임신중절 수술을 시킨 게 정말 다행이에요. 그 여자는 죽을 때까지도 자신이 몸 때문에 임신을 못 하는 줄 알고 있었겠죠.”안준휘가 그녀의 손을 잡고 입가에 가져다가 뽀뽀했다. 여자의 눈에는 승자의 득의양양함이 가득 차올랐고 그녀가 조롱이 섞인 웃음을 지었다.“진옥경은 큰소리치는 걸 좋아하는 것 같더라고요. 진씨 가문에서 민아를 친딸처럼 여긴다더니 혼수도 제대로 받아내지 못했잖아요. 진씨 가문에서 당신한테 준 사업도 다 남들이 싫다고 해서 넘겨준 거 아닌가요?”“자존심은 또 어찌나 강한지. 기구한 팔자를 타고났으면서... 진씨 가문이 크게 성공한 건 형수님 덕분이야. 진옥경이 뭘 한 게 있다고? 집에서 몇 년 동안 애들을 돌봐주었다고 그들이 감사하게 생각하는 줄 아나 봐...”여자는 뒤돌아서서 안준휘의 턱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안준휘는 그녀를 소파에 눕히고 키스를 퍼부었다. “진옥경은 이용 가치를 다 한 사람이야. 이제부터 우리 두 사람은 당당하게 함께할 수 있어.”“엄마가 당신 때문에 화가 나서 죽었다는 걸 민아가 알기라도 하면...”여자의 말은 남자의 키스에 막혀버렸고 한껏 몸이 달아오른 여자는 손을 뻗어 남자의 벨트를 풀었다.안준휘는 도발적인 그녀의 행동을 즐기며 피식 웃었다.“난 그저 교통사고가 도아린과 관련 있다고 전해준 것뿐이야. 죽으면 민아가 큰돈을 챙길 수 있을 거라고 한마디 했을 뿐. 진짜 죽을 줄 누가 알았겠어.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라
차화영은 몸이 좋지 않아 이런 곳에서는 하루도 지내기 어려웠다.그녀는 바로 도아린에게 도와달라는 눈빛을 보냈다.도아린은 그녀에게 당황하지 말고 침착하라는 눈빛을 보내고 앞에 있는 여자를 바라보았다.“우리가 여기로 왔으니 할 얘기가 있으면 다 얘기하시죠.”여자는 도아린의 압박에 거실로 돌아갔고 안준휘는 도아린을 노려보면서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소파에 앉았다.도아린과 차화영은 맞은편의 소파에 앉았다.“진옥경 씨의 장례에 관해 얘기해보죠.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사고의 책임은 이미 명백해졌다. 배지유한테는 뺑소니 혐의가 있었고 진옥경은 신호등을 무시하고 달리는 차를 향해 덮친 정황이 포착되었기 때문에 공갈하려는 고의성이 명백하다는 게 확인되었다.배지유는 도덕적으로 장례비용을 배상하면 이번 일은 마무리되는 것이다.안준휘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차화영을 힐끔 보더니 다시 도아린에게로 시선이 향했다.“내 안사람의 장례는 간소하게 치를 거야.”“안돼!”차화영은 화를 내며 그들이 미리 프린트해서 온 장례 절차를 꺼냈다.“내 딸은 너 때문에 화병이 나서 죽은 거야. 반드시 우리 딸의 장례를 크게 치러줘야 해!”안준휘의 곁에 앉아있던 여자는 종이를 들어서 한번 보더니 차갑게 웃었다.“어르신, 미쳤어요? 이것대로 진행하면 몇천만 원이 들어요. 당신 딸은 이미 죽었는데 무슨 금덩이라도 되는 줄 아세요?”“너는 입 닥쳐!”차화영은 그녀를 노려보았다.“옥경이는 너를 친구로 생각했는데 너는 친구의 남자를 빼앗기나 하고, 옥경이가 너에게 복수하러 찾아올까 봐 두렵지도 않아?”여자는 소리 내 웃음을 터뜨리고는 팔짱을 낀 채 소파에 기대앉았다.“그 애는 살아있을 때 답답한 애였으니 죽어서도 멍청한 귀신이 됐을 거예요. 감히 저를 찾아온다면 그 영혼까지 부숴버릴 거예요.”“너... 이 뻔뻔한 여우 같은 년!”차화영은 말다툼에서 밀리자 고개를 돌려 도아린을 쳐다보았다.도아린은 차화영의 손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주면서 시선은 안준휘와 그 여자의 얼굴을 훑었다
차화영은 테이블에 있는 핸드폰에 손을 뻗다가 그의 말을 듣고 손을 다시 거뒀다.그녀는 분노를 억누르며 말했다.“너한테 손을 댄 건 내 잘못이 맞아. 옥경의 장례는 상관하지 마. 우리가 알아서 할게.”“진옥경의 유골을 달라고요?”안준휘는 마지막으로 진옥경을 이용할 방법이 번뜩 떠올라 고개를 끄덕였다.“줄 수 있죠. 하지만 갖고 가려면 저한테 20억을 주세요.”“너, 너, 너 미쳤어?”차화영은 화를 내며 소파의 손잡이를 내리쳤고 손이 빨개져도 아픈 줄 몰랐다.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안준휘에게 손가락질을 했고 두 줄기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애초에 네가 먼저 옥경이를 좋아한다고 애정 공세를 했어. 옥경이한테 무조건 잘해주겠다고 맹세할 때는 언제고 아까는 옥경이가 너랑 결혼하고 싶어서 애원했다고? 어떻게 그렇게 뻔뻔할 수 있어!”“제가 먼저 좋아해서 애정 공세를 한 건 맞아요.”안준휘는 부인하지 않았지만, 무척 자랑스러운 듯 말했다.“이후에 저는 우리가 맞지 않는다고 생각이 들어 헤어지고 시연이랑 사귀었어요. 진옥경이 다시 저를 찾아와서 애원한 거예요. 저한테 자신과 결혼하면 진씨 가문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해서 제가 결혼하기로 한 거예요.”그의 곁에 있는 여자가 바로 곽시연이었다. 그녀는 의기양양해서 고개를 빳빳이 쳐들었다.“진옥경, 학력도 없고 능력도 없는 여자와 돈 때문이 아니면 제가 왜 결혼했겠어요?”“너희들이 내 딸이 다시는 아이를 못 갖게 했잖아!”“안민아가 딸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더는 아이를 못 가졌을 겁니다.”안준휘는 담배를 재떨이게 지져서 끄고는 솔직하게 말했다.“아이가 있어야 마음을 붙이고 오로지 저를 위해 뒷바라지를 하게 만들죠.”차화영은 더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감옥에 가는 게 두려웠다. 하지만 딸이 안준휘에게 이렇게까지 괴롭힘을 당하는데 그녀는 목숨을 걸고서라도 딸을 위해 나서야 했다.차화영은 벌떡 일어섰지만, 머리가 어지러워 다시 자리에 털썩 앉았다.“할머니, 화내지 말아요. 제가 얘기할게요.
“도아린! 입 닥쳐!”안준휘는 분노하면서 일그러진 표정으로 도아린을 노려보았고 경고의 의미가 다분했다.도아린은 그에게 눈길을 한 번도 주지 않았고 말투는 여전히 느긋하고 단호했다.“쉬운 일을 굳이 돌아가는 게 안준휘 씨의 장점이에요. 허황한 희망을 심어주는 것도 안준휘 씨가 잘하는 일이고요. 이혼한 돈 많은 여자는 안준휘가 진씨 가문에 기대서 많은 자산을 얻은 줄 알고 기꺼이 세컨드가 되는 거죠.”“닥쳐! 너 입 닥치라고 했어!”“말하게 해요! 왜 말 못 하게 하는 거예요!”“허튼소리를 하고 있잖아. 우리 둘 관계를 이간질하려고 이러는 거 몰라?”“당신이 한 적 없는 일이었다면 어떻게 그걸 가지고 이간질을 할 수 있겠어요.”곽시연은 소리를 높여 안준휘의 말을 끊고는 분노한 눈으로 도아린을 쳐다보았다.“네가 감히 나를 속인다면 너 가만 안 둘 거야!”차화영은 본능적으로 반박하려고 했지만, 도아린이 그녀의 손을 잡아서 저지했고 그녀는 도아린이 담담한 목소리로 하는 말을 들었다.“그 돈 있는 여자들의 자세한 정보를 내일 택배로 보내줄게요.”“내 주소를 알고 있어?”곽시연은 깜짝 놀랐고 도아린은 실소를 지었다.“당신의 주소를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근 몇 년간 당신의 자산 흐름까지 샅샅이 알고 있습니다.”도아린은 차화영을 부축해서 일으켰고 시선은 안준휘를 향했다.“정식으로 말씀드립니다. 이혼소송을 준비하세요.”그들이 현관까지 갔을 때, 안준휘가 빠르게 따라가서 열리고 있는 문을 세게 닫았다.“도아린! 여지를 남기는 게 앞으로 모두의 관계에도 좋은 일이잖아.”그는 약점이 찔렸기 때문에 조급해졌다.차화영은 안준휘가 때리기라도 할까 봐 두려웠다. 물론 양쪽 다 두 사람이지만 그녀는 나이가 들어 힘에 부쳤다.“그럼 옥경의 유골을 나한테 줘. 진씨 가문에서 장례를 치러줄 거야.”안준휘의 서늘한 눈빛은 차화영을 향했고 눈에 비친 비열함을 조금도 숨기지 않았다.“어머님, 진씨 가문에서 옥경이의 장례를 치른다면 민아가 아버지인 저를 어떻게
차화영은 몸이 굳어버려서 비틀거리다가 도아린의 몸에 기댔다.도아린이 받쳐주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바닥에 주저앉았을 것이다.차화영은 눈물을 흘리며 흐느꼈다.“그러니까 아까 나한테 거짓말을 했던 거야. 나를 속였던 거였어. 너는 옥경이한테 장례를 치러줄 생각이 애초에 없었던 거야! 너는 유골함조차도 살 생각이 없었어. 옥경이의 유골을 버릴 생각이었지?”곽시연은 하이힐을 또각거리며 다가와서는 안준휘와 차화영 사이를 가로질렀다.“옥경이가 왜 그렇게 멍청한가 했더니 당신처럼 나약한 엄마가 있었기 때문이었군요.”“너!”차화영은 곽시연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안준휘를 째려보았다.“그래, 계속 그렇게 해. 너 딱 기다리고 있어. 내가 너 고소해버릴 거야!”안준휘는 순간 일그러진 표정으로 바로 문을 닫아버리려고 했다.문이 거의 닫히려고 할 때, 큰 힘에 막혔다.밖에 있는 사람이 힘을 주자 문이 벌컥 열렸다.안준휘는 그 힘에 밀려서 비틀거렸다.“뭐 하는 거예요? 지금 감금하는 겁니까?”진경수는 문 앞에 서 있었고 뒤에는 경호원 두 명이 있었다.안준휘의 표정에는 두려움이 스쳤고 얼른 웃는 얼굴을 하고 말했다.“그럴 리가요. 어머님께서 오해하실까 봐 제가 설명해드리려는 겁니다.”진경수는 도아린을 쳐다보았고 도아린은 자신과 할머니가 모두 무사하다는 의미로 고개를 살짝 저었다.“어떻게 설명하려는지 한번 들어보죠.”진경수가 성큼성큼 들어왔다.안준휘는 빠르게 뒤로 두 걸음 물러섰다. 진경수 한 명만 와도 이길 수가 없는데 경호원을 두 명이나 데리고 왔으니 그는 얼른 웃는 얼굴을 했다.그런데도 그는 연장자의 위엄을 풍기면서 모두를 데리고 거실로 갔다.“할머니, 고모의 방으로 가서 보고 싶다고 하지 않았어요?”도아린은 차화영에 눈짓했고 차화영은 바로 알아차렸다.“그래. 옥경이의 방으로 가서 봐야겠어. 장례를 치를 때 옷을 좀 태워줘야지.”안준휘는 감히 막지 못했고 진경수를 쳐다보는 눈빛에 드리운 살기를 애써 감췄다.차화영은 딸이 집에서 값이 가는 물
진경수는 금방 나왔고 뒤따라오는 안준휘는 불만이 많아 보였지만 감히 어쩌지는 못했다.진씨 가문의 사람들을 보내고 안준휘는 빠르게 안방으로 달려가서 옷장을 열었다.검은색 캐리어에는 여전히 옷이 덮여있었고 움직인 흔적이 없었다.그래도 그는 마음이 놓이지 않아 가방을 열어보았다. 보험계약서 두 개가 다 있는 것으로 보아 발각되지 않은 듯했다.그는 얼른 진옥경의 사망신고서를 가지고 보험금을 받으러 가고 싶었다.진씨 가문에서는 차화영이 숨넘어갈 듯 울고 있었다.안준휘의 기가 막힌 행보를 들은 윤명희는 남편과 눈을 맞추었고 두 사람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아린이 덕분이야! 아린이가 아니었다면 나는 계속 속고 있었을 거야. 내가 옥경이를 망친 거야. 다 내 잘못이야. 하늘이 도와서 아린이가 옥경이의 억울함을 풀어주게 한 거야.”“할머니, 제가 일부러 할머니를 안씨 가문으로 모시고 간 거예요.”도아린은 담담하게 말했다.차화영은 천천히 울음을 멈추더니 눈물을 닦고 망연하게 그녀를 쳐다보았다.“뭐라고?”“일부러 그런 거라고요.”도아린이 계속 말했다.“저는 누구의 억울함을 풀어주려는 게 아니라 할머니가 진실을 똑똑히 볼 수 있게 하기 위한 겁니다.”“너 그게 무슨 말이야?”차화영은 자신에게 보이는 도아린의 친밀한 태도가 하루도 채 가지 못할 줄은 생각지 못했다.반나절이 지난 사이에 또다시 서먹한 사이가 되어버렸다.하지만 앞서 그녀가 안준휘와 담판을 할 때는 분위기가 무척 엄숙했고 강단이 있었다.진옥경을 도와 이혼소송을 진행하고 억울함을 풀어주겠다고 했는데 설마 다 거짓말이었던 건가?차화영은 영문을 알 수가 없어 망연하게 진범준을 쳐다보았고 진범준은 아내의 손을 잡은 채 시선을 깔고 그녀를 쳐다보지 않았다.도아린이 설명했다.“저는 할머니께서 안준휘 씨의 진짜 모습을 알게 되기를 바란 겁니다. 할머니께서 고모의 죽음 때문에 아빠, 엄마한테 악한 감정이 생겨 마음이 멀어지는 걸 막기 위한 거죠.”“내가...”“처음 도움을 받았을 때는 고
차화영은 다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가정부가 물티슈로 얼굴을 닦아줄 때, 차화영은 슬며시 도아린을 쳐다보았다.아무래도 이 손녀는 자신과 정이 별로 없었다.만약 안민아가 결혼을 하지 않았고 그녀의 혼수를 위해 나설 일이 없었다면 몸이 안 좋다는 이유로 계속 시간을 끌며 도아린을 보러 오지 않았을 것이다.도아린을 차갑게 대하면서 그녀가 너무 오만하게 행동하지 못하게 하고 안민아를 괴롭히지 못하게 할 것이다.차화영 본인이 먼저 오랜 시간 잃어버렸던 손녀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손녀가 자신에게 살갑게 대하기를 바랄 수는 없었다.“그럼 옥경이의 장례는...”차화영은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세은이의 말이 맞아요. 먼저 소송을 진행하죠. 그전에는 안준휘가 어떻게 유골을 처리하든 저희는 간섭할 권한이 없어요.”윤명희는 남편과 손깍지를 낀 채 눈을 맞추고는 다시 차화영을 쳐다보았다.“만약 옥경 씨의 유골을 가져올 수 있다면 제가 장례를 치러드리죠. 크게 치를 겁니다.”차화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며느리가 옥경의 장례를 해준다니 만족해야 했다.“그럼 네 말대로 해. 소송을 진행해!”도아린은 바로 장수현에게 연락했고 그가 해남에 와있다는 것을 알고 당장 미팅을 잡았다.두 사람은 중식당에서 만나기로 했고 장수현이 먼저 도착한 다음 도아린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얼른 몸을 일으켰다.“오랜만이에요.”“죄송해요. 길이 막혔어요.”도아린은 종업원을 불러서 주문했고 장수현도 거리낌이 없이 자신이 좋아하는 요리를 두 개 주문했다.요리가 다 나오자 도아린은 종업원에게 필요할 때 호출하겠다고 하고 내보낸 다음 룸의 문을 닫았다.“이혼소송을 의뢰하고 싶어서요. 제 고모는 돌아가셨는데 할머니께서 고모를 대신해서 고모부와 이혼할 방법이 있을까요?”도아린은 일의 경과를 얘기하려고 했는데 장수현이 손사래를 치며 말을 끊었다.“제가 요즘 아주 중요한 사건을 맡았어요. 제가...”장수현은 숨을 깊게 들이쉬었고 표정은 흥분되기도 복잡하기도 했다.아무래도 그의
누군가는 사진 한 장을 들고 나타나 말했다.“도아린 곁에 있는 꽃미남이 사실 강재민이래.”과거, 두 사람이 함께 음악 페스티벌에 참석했던 적도 있다는 이야기였다.그 말에 또 다른 누군가는 고개를 끄덕였고 소문은 꼬리를 물고 번져갔다.그러던 어느 날.도아린의 바로 뒷자리에 앉아 있던 한 신인 배우가 몰래 찍은 사진 한 장이 인터넷에 올라왔다.사진 속엔, 두 사람의 머리가 맞닿은 채 귓속말을 나누고 있었다.그 한 장의 사진은 결국 배건후의 정체를 증명하는 결정적 단서가 되었고 그는 다시 한번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다.이번에도 역시 온갖 의심과 루머 그리고 비난이 따라붙었다.하지만 며칠 후, 연성 경찰청에서 공식 공지문이 게시되었다.바로 얼마 전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장기 밀매 사건에 대한 수사 결과 공지였다.공지문에는 고성만, 손보미, 자상훈 등이 인신매매로 부당한 이익을 챙기다 결국 장기 밀매까지 손을 뻗친 사실이 요약되어 있었고 그 수사에 협조한 익명의 자원자들에게 감사의 뜻도 함께 담겨 있었다.그 단 하나의 공지로, 여론은 완전히 반전됐다.정월 대보름, 해남엔 보기 드문 큰 눈이 내리고 있었다.도로는 차들로 가득 막혀 10분이 지나도 백 미터를 채 움직이지 못할 정도였다.“천천히 가. 우린 여기서 내려서 좀 걸을게.”도아린은 조수석 창문을 내리며 일북에게 말했다.그리고 배건후와 함께 차에서 내려 레스토랑까지 걷기로 했다.배건후는 우산을 펼쳐 도아린의 머리 위에 씌웠다.도아린은 그의 팔에 팔짱을 끼고 두 사람이 맞잡은 손은 외투 주머니 속에 꼭 쥐어져 있었다.“춥지 않아?”그가 우산을 더 그녀 쪽으로 기울였다.“안 추워요.”도아린은 입김을 내뿜으며 활짝 웃었다.발밑에서는 바삭거리는 눈이 소리를 냈고 그녀의 머릿속에는 오래전 기억이 스쳐 갔다.돈을 마련하기 위해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던 시절.어느 회사 대표라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눈밭에서 몇 시간을 버텼던 그날, 발이 얼어 서 있지도 못하고 결국 쪼그려 앉았던 그 순간
그 여자는 바로 그날 수상 레스토랑에서 진경수에게 벨트를 빌렸던 그 여자였다.하지만 오늘은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짧은 티셔츠와 청 반바지 대신 격식을 갖춘 정장 느낌의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얘, 내 여동생. 그리고 이 사람은... 우리 제부.”진경수는 ‘제부’라는 단어에서 말끝을 흐렸다.여동생이 혼인신고까지 해놓고 가족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못마땅한 듯 표정이 굳어 있었다.그건 진수혁도 마찬가지였다.“큰형님, 작은 형님.”배건후가 정중히 일어나 인사를 건넸고 도아린은 해맑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오빠들, 호칭 바꿨으니까 용돈 좀 주셔야죠?”“혼인신고도 우리 몰래 해놓고, 무슨 용돈이야?”진경수는 여전히 불만 가득한 얼굴로 배건후를 노려보다가 결국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도아린에게 내밀었다.“다시 내 동생 울리기만 해봐. 그땐 진짜 널 갈기갈기 찢어서 물고기 밥으로 줄 거야. 명심해.”“고마워요, 둘째 오빠!”도아린은 싱긋 웃으며 봉투를 받아들었고 이번엔 진수혁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진수혁 역시 말없이 봉투를 하나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도아린은 봉투를 슬쩍 비춰보며 속으로 웃었다.‘안 봐도 이건 수표네.’그녀는 배건후를 보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더니 말했다.“이건 제가 따로 보관할게요.”“감사합니다, 우리 아내님.”“...”진씨 형제들은 동시에 말문이 막혔다.‘쯧쯧, 벌써 아내한테 잡혀 사네...’하지만 상대가 도아린이라면, 뭐… 그럴 만했다.“근데, 여기 두 분은?”도아린은 일부러 모르는 척 눈을 반짝이며 물었고 진수혁은 변슬기를 소파에 앉히며 담담히 말했다.“예전 동료야.”변슬기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 순간, 진경수가 옆에 있던 여자를 품 안으로 확 끌어당기며 밝은 미소를 지었다.“부모님 말씀대로 아린이 일도 정리됐겠다... 이젠 내 차례지. 그래서 나도 결혼했어.”도아린과 배건후는 동시에 진수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둘째 오빠를 좀 본받으세요. 뭐 하세요, 진짜.’“작은 올
“...”집사는 조용히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배건후는 당연하다는 듯 도아린의 방으로 들어가 짐을 풀었고 도아린은 그런 그를 집사에게 소개했다.“이 사람은 제 남편이에요. 서재랑 아버지, 어머니, 큰오빠, 둘째 오빠 방만 빼고 어디든 자유롭게 다니게 해주세요.”두 사람은 짐을 정리하자마자 곧장 외출에 나섰다.“앞에 있는 만둣가게, 진짜 맛있어요!”가게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도아린의 시선은 창가에 앉아 노트북으로 일하던 진수혁에게 향했다.그 맞은편에는 변슬기가 앉아 있었고 다소 곤란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설득 중이었다.“여긴 패스트푸드점이에요, 카페가 아니라고요. 여기서 일하시는 건 좀...”“카페라고 생각하면 되잖아. 난 괜찮은데?”“그렇긴 해도 이렇게 계속 앉아 계시면 저희 가게 영업에 방해된다니까요!”그때 도아린이 문을 열고 들어오자 변슬기는 반가움에 벌떡 일어났다.“도 선생님! 대표님 좀 말려주세요!”그 말에 진수혁은 고개를 돌리며 태연하게 말했다.“밥은 먹었어? 여기 만두 꽤 괜찮더라.”도아린은 황당함에 헛웃음이 났다.‘사람을 회사에서 내쫓아 놓고선 정작 본인은 여기에 눌러앉다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진짜.’막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배건후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내가 말할게.”도아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변슬기와 함께 옆 테이블에 앉아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그사이 배건후는 주머니에서 혼인관계증명서를 꺼내 진수혁 앞에 내려놓았다.“제가 이겼어요.”“...”진수혁은 조용히 종이를 펼쳐보고는 이를 악물었다.“너 이거 반칙 아냐?”“우린 내기했잖아요. 졌으면 인정해야죠.”“유럽 연수 그 자리, 잊지 말고 제 이름으로 신청해 주세요.”진수혁은 고개를 돌려 도아린을 바라보았고 마침 도아린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둘의 눈이 마주쳤고 자연스레 미소가 번졌다.‘이 분위기 뭐야... 완전 닭살 돋게 하네.’그 순간, 배건후는 시선을 거두고 진지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형님도 제가 예전에
‘정말로 배고픈 거야? 아니면 날 원하는 거지?’도아린은 배건후를 흘끗 쳐다보며 가위를 테이블 위에 놓고는 끌려가 밥을 먹었다.배건후의 요리 실력은 한층 더 늘어 있었고 맛뿐만 아니라 음식의 모양새도 훨씬 좋아졌다.“이제 영양식은 안 드세요?” 도아린은 일부러 그를 자극했다. “전에 어떤 사람이 고기도 안 먹고 기름진 것도 안 먹고 오래된 것도 안 먹고 부드러운 것도 안 드셨잖아요!”배건후는 매운 닭 요리를 그녀 앞으로 밀어놓으며 진심으로 사과했다.“그때는 네 관심을 끌려고 그런 거야. 그리고 몸매가 망가져서 네가 싫어할까 봐 걱정도 됐고.”“그럼 이제는 몸매 망가지는 거 걱정 안 해요?”도아린은 고기 한 조각을 집어 입에 넣었다.배건후는 가볍게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두 사람은 원래 한 사람이 요리하면 다른 한 사람이 설거지하기로 했다. 하지만 배건후는 도아린에게 설거지할 기회를 주지 않고 바로 그녀를 안아 위층으로 올라갔다.도아린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큰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배건후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그녀를 삼켜버릴 듯한 눈빛을 보였지만 쉽게 다음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았다.도아린은 그가 마음속 어둠의 그림자와 싸우고 있음을 알았다.그녀는 그의 목을 감싸안고 몸을 들어 올려 그의 입술에 가볍게 입 맞추며 달랬다.“천천히 해도 돼요. 긴장하지 말고 편하게 하세요.”도아린의 위로는 곧 배건후에게 그대로 되돌아왔다.그의 이마에서 흐른 땀방울이 그녀의 흰 목 위로 떨어졌다. 그는 목소리를 낮추며 그녀의 귀를 깨물었다. “도아린, 힘 빼... 너무 긴장했어...”도아린은 그의 입을 막고 싶었지만 손가락은 그의 입에 물려 있었다. 그 후, 그녀는 머릿속이 멍해졌고 마치 거친 파도 위에서 흔들리는 작은 배가 된 것처럼 느껴졌다. 재미를 본 배건후는 그녀를 끈질기게 괴롭혔다. 도아린이 깨어났을 때는 이미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마치 어젯밤 온몸이 부서졌다가 다시 조립된 것처럼 사지가 말을 듣지 않았고 특히 허리
“배 대표님! 모든 자산을 도 대표님께 넘기신 것은 이전에 하신 일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셔서인가요? 손보미 씨가 형을 선고받았다고 들었는데 손보미 씨를 꺼내줄 계획이 있으신가요?”배건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기자들을 한 바퀴 둘러보더니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늘 인터뷰의 주제는 챔피언십 선수들의 숙식 안전입니다. 개인적인 질문에 대해서는 답하지 않겠습니다.”기자들이 더 질문하려 하자 도아린이 배건후의 손을 제치고 앞으로 나섰다.“숙식 문제에 대한 더 나은 제안이 있다면 제안서를 작성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수한 의견을 채택하고 그에 따라 보상을 제공할 예정입니다.”도아린은 카메라를 향해 당당하고 품위 있게 말했고 입가의 미소를 살짝 거두며 한층 위엄 있는 분위기를 자아냈다.“제 개인적인 문제로 여러분의 시간을 뺏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배건후 씨에 대해서는 몇 가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배건후는 눈빛이 살짝 흔들리며 걱정스러운 기색을 내비쳤지만 이내 담담한 표정으로 돌아왔다.도아린이 배건후에 대해 말하려 하자 기자들은 앞다투어 마이크를 내밀었다.도아린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배건후 씨는 여태까지 운영부의 팀장이었지만 오늘부터는 한경 그룹의 특별 자문입니다. 이후의 직책은 배건후씨의 능력에 따라 결정될 것입니다.”도아린의 시선은 배건후가 도아린의 말을 절대적으로 따를 거냐고 묻던 기자를 향했다.“과학 연구자, 의학 전문가, 스포츠 선수,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여성의 몸에서 태어났습니다. 여성을 존경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모욕해서는 안 됩니다.”그러자 그 기자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조용히 사람들 사이에서 빠져나갔다.다른 기자들도 더 이상 질문을 할 기세를 잃었고 도아린은 고개를 돌려 고유리를 보며 말했다.“기자분들 고생 많으셨으니 저녁 식사 후 차량을 준비해 안전하게 귀가할 수 있도록 해 주세요.”고유리는 기자들을 데리고 나가며 각자에게 돈 봉투를 나눠 주었다.그들은 어떤 내용을 발표할 수 있고
“뭐라도 먹고 가자.”배건후는 구운 닭 날개는 도아린에게 건네주고 주현정에게는 구운 식빵을 건네주었다.주현정은 빵을 받아 들고는 돌아서며 말했다. “천천히 이야기 나누렴. 나는 물 좀 마시러 들어갈게.”도아린은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배건후가 그녀의 손을 붙잡아서 멈췄다.두 사람은 강가의 평평한 돌 위에 앉았다.“엄마는 진짜 다 내려놓으신 걸까요?”“적어도 시작은 하신 거지. 앞으로 진 큰아버지와 큰어머니와 함께 여행 다니면 점차 나아질 거야.”배건후는 핸드폰을 꺼내고는 방금 구 경관이 보내온 사진을 열었다.“남궁유민, 즉 고성만이야. 경찰이 고성만의 집을 수색할 때 이걸 발견했어.”도아린은 마지막 닭 날개를 입에 넣고 꼬챙이를 배건후에게 건네며 핸드폰을 받아서들었다.화면 속 사진에는 루비 목걸이가 찍혀 있었다.배건후가 큰돈을 들여 샀던 화려한 디자인의 목걸이지만 전에 잃어버렸던 목걸이였다.도아린은 배건후를 바라보며 말하려 했지만 입안은 닭 날개로 가득 차있어 눈만 깜빡였다.“내가 전에 너한테 줬던 그 목걸이야. 배지유가 몰래 차다가 잃어버렸던 거.”도아린의 입은 마치 발골 기계 같았다. 닭 날개가 입에 들어갔다 나올 때면 뼈만 남았다.도아린은 손바닥에 뼈를 뱉고는 차분하게 말했다.“배지유가 어떤 남자와 잤고 그 사람이 계속해서 그녀를 영상으로 협박했어요. 그 장본인이 바로 고성만이라구요!”“...”이번에는 배건후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성만이 배지유를 협박한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목걸이를 철저히 숨겨놓고 분해해서 이미 팔아버렸을 거로 생각했거든. 그런데 그걸 집에 보관해 놓았을 줄은 몰랐어.”그것은 고성만이 자신을 위해 남겨둔 마지막 보험이었다.궁지에 몰리게 되면 목걸이를 분해해 팔고 다른 도시로 가서 새 삶을 살 계획이었을 것이다.하지만 그는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체포당하고 말았다.다음 날, 도아린은 연성으로 돌아갔다. 배건후가 신청한 챔피언십 대회 접대 임무가 승인되었기 때문이다.진수혁 역시 변
그는 입가에 얕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괜찮아. 자고충이 하나가 될 때 이런 현상이 생기는 거야. 앞으로 잘못된 일을 하지 않으면 아프지도 않을 거야.”만약 사랑하는 사람을 배신한다면 그 고통으로 인해 결국 죽게 될 것이다.도아린은 배건후의 머리를 끌어안고 고개를 들고 흘러나오는 눈물을 억지로 참으려고 애썼다.배건후는 그녀의 품속에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육원의 중첩된 지분을 손에 넣어서 너에게 혼수로 바칠게. 네가 나를 원하지 않아도 상관없어. 그래도 나는 너를 평생 지켜줄 거야.”그녀가 결국 참지 못하고 흘린 한 방울의 눈물은 그녀의 볼을 타고 떨어져 남자의 머리 위에 떨어졌다.그렇게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 빛이 어두워질 때까지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를 안고 있었다. “돌아가자.”배건후는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감싸안고 다리를 움직이며 불편했던 자세를 바꿨다.“이 근처에 야생 동물은 없지만 해가 지면 안전하지 않아.”도아린은 처음에는 감정에 휩싸여 배건후의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가 몸을 움직이자 그녀는 즉시 이상함을 느꼈다.그녀는 급히 일어나며 말했다.“돌아갈 때 건후 씨 몸이 불편하니까 제가 태워드릴게요. 그리고 내리막길이라 힘도 덜 들 거예요.”“알았어. 네 말 들을게.”자전거 핸들이 비뚤어져 있었지만 배건후는 두 다리로 바퀴를 단단히 고정한 후 힘껏 돌려 단숨에 바로 고쳤다.도아린이 자전거 앞좌석에 타고 배건후는 그녀 뒤에 앉았다.그는 얼굴을 그녀의 등에 기댄 채 내리막에서 속도가 너무 빨라지면 긴 다리를 쭉 뻗어 마찰력을 늘리며 조절했다.그들이 별장에 도착했을 때 진수혁과 변슬기도 막 돌아오고 있었다.변슬기는 도아린을 의미심장하게 쳐다보았다.도아린은 그들이 뭔가 진전이 있을 줄 알고 가서 물어보려 했지만 배건후가 붙잡았다.그는 손을 뻗어 그녀 머리 위에서 붉은 잎 하나를 떼어냈다.“...”변슬기와 진수혁이 설마 자신과 배건후가 야외에서 뭔가를 했다고 생각하진 않겠지.배건후는 오직 도아린에게만 부
두 사람은 눈이 마주쳤다.도아린은 그의 눈동자 속에 가득한 붉게 물든 단풍잎과 맑고 푸른 하늘 그리고 마음속 깊이 즐거워하며 웃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그의 깊고 그윽한 눈이 가늘게 감기며 그 속에는 격렬한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듯했다.‘그래, 이거지!’그녀는 올해 겨우 25살이었다.어린 시절 양부모 곁에서 사랑받지 못했고 장애를 겪은 후 식물인간이 된 동생을 돌보며 결혼 생활에서는 남편의 감정적 학대 속에서 버텨야 했다.그녀는 너무도 많은 행복을 잃어버린 채 살아왔다.이게 맞는 일이다.그녀는 웃어야 한다. 크게 소리 내어 마음껏 웃어야 한다.고작 25살에 불과한 그녀가 이토록 많고 무거운 책임과 압박을 짊어질 필요는 없었다.눈앞 여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점점 사라지고 배건후의 심장도 저릿해 왔다.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거친 손끝이 그녀의 부드러운 피부를 스쳤고 천천히 그녀의 눈꼬리를 눌렀다.“웃어. 앞으로 나쁜 감정들은 전부 나한테 넘겨. 내 앞에서는 일부러 강한 척 버틸 필요도 없어. 속상하면 때리고 욕해도 돼. 대신에 절대 자신을 괴롭히지 마.”도아린은 코끝이 찡해지고 눈가가 뜨거워지더니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했다.그녀는 급히 일어나 뒤돌아 눈물을 닦으려 했다.그 순간 힘센 팔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았고 특유의 나무 향기가 그녀를 감쌌고낮고 깊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여태까지 내가 나쁜 놈이었어. 미안해. 앞으로는 모든 일을 너와 상의할게. 네가 싫어하는 건 하지 않을 거고 네가 속상해할 일도 만들지 않을 거야.”도아린은 팔꿈치로 그를 툭 쳤다.“입만 살아서!”배건후는 그녀의 어깨를 잡고 돌려세운 뒤 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도아린은 미간을 찌푸렸다.“아직 육원의 중첩된 지분을 손에 넣지도 못했잖아요. 그리고 저도 아직...”이후의 말은 더 이상할 수 없었다.배건후가 상자를 열었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은 청혼의 반지가 아니었다.작고 빨간 벌레가 들어 있었는데 다리가 없고 온몸이 부드러웠으며
변슬기는 바쁜 듯 뒤돌아보며 기대와 불안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좋아요." 진수혁은 흔쾌히 대답했다. 이미 옷을 갈아입었기 때문이다. 배건후는 세 사람을 보고 눈빛이 흔들렸다. 빌라에는 자전거가 두 대 있었는데, 도아린과 함께 드라이브를 나가기 위해 일부러 다른 자전거의 페달을 떼어 놓았던 것이다. 도아린은 자전거를 보고 그에게 너 정말 얄밉다'는 눈빛을 보내며 빨리 고치라고 신호를 보냈다. 자전거를 고치고 네 사람은 문밖으로 나갔다. "꽉 잡아."배건후는 도아린이 자신의 허리를 감싸 안자 힘껏 페달을 밟았고, 자전거는 비탈길을 미끄러져 작은 길로 향했다.변슬기는 진수혁에게 감히 손을 대지 못하고 자전거 뒤쪽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진수혁은 자전거 타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듯 비틀거렸다. 변슬기는 "저, 제가 밀어드릴까요...거의 정상에 도착하면, 그때 저를 밀어주세요."라고 제안했다. 진 대표님의 속도로는 누가 먼저 정상에 도착할지 내기는커녕, 저녁 식사 시간이 되어도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 진수혁은 아무 말 없이 계속 비틀거렸다. 변슬기는 거의 넘어질 뻔했고, 황급히 남자의 허리를 붙잡았다. 자전거는 갑자기 비틀거리지 않았고, 속도도 빨라졌다. 변슬기: "..."배건후는 도아린을 태우고 산길을 누볐고, 도아린은 뒤쪽 페달을 밟으며 일어섰다. 두 손으로 그의 어깨를 누르고, 짧은 머리카락은 바람에 휘날렸다. "산속 공기가 도시보다 훨씬 좋네요. 매연 냄새도 없고, 에어컨 냄새도 안 나고." 배건후는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살짝 몸을 일으켰다. "어제 비가 왔으면 더 좋았을 텐데." "당신도 비 온 뒤 흙냄새 좋아해요?" 도아린은 배건후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의 귓가에 웃으며 말했다. "나도 좋아해요! 비 온 뒤 흙과 풀이 섞인 냄새는 기분을 좋게 만들어요!" 배건후는 입꼬리를 올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아린은 잠시 침묵하다가 깨달았다. 배건후가 말한 것은 바로 그녀가 좋아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더욱 환한 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