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놔!”도아린은 필사적으로 반항했다.다만 워낙 덩치 큰 박규형이다 보니 그녀의 등을 확 짓누르고 어깨를 다잡더니 곧게 룸으로 향했다.스쳐 지나가는 종업원이 이상한 눈길로 쳐다볼 때마다 연예 기획사 매니저가 웃으며 해명했다.“좀 많이 취해서요. 괜찮아요, 아무 일 아니에요...”그 시각 도아린을 한참 기다리던 소유정이 그녀가 막 누군가에게 시달리는 걸 발견하곤 곧장 종업원의 손에서 술병을 건네받고 가차 없이 내던졌다.“그 손 안 놔?!”기획사 매니저가 그 술병을 잡고 소유정에게 으름장을 놓았다.“너 미쳤어? 이분은 해인 그룹 대표님이란 말이야!”빨간 와인이 소유정의 손목을 타고 거꾸로 흘러서 옷소매와 치마까지 빨갛게 물들였다.그녀는 대충 닦으며 분노 조로 쏘아붙였다.“대표든 뭐든 다 집어치워! 누가 감히 우리 아린이 건드리래?! 죽고 싶어 환장했어?”연예 기획사 매니저가 버럭하는 소유정을 잡아당겼고 박규형은 계속 도아린을 이끌고 룸으로 들어갔다. 도아린은 두 손이 꽉 잡혀서 하는 수 없이 뒤통수로 그의 턱을 맞받아쳤다.마침 머리에 핀을 꽂고 있어서 박규형의 턱에 피가 줄줄이 흘렀다.분노가 극에 달한 박규형은 그녀의 손을 확 비틀었다.“감히 나한테 손을 대? 팔을 확 부러트릴라!”그는 말하면서 룸 문을 걷어차고 도아린을 안에 밀쳐 넣었다.도아린은 그가 비튼 방향대로 빙그르르 돌아가면서 다른 손으로 재빨리 그의 귀싸대기를 내리쳤다.그의 뺨을 후려칠 수 있었던 이유는 사실 박규형이 제자리에 넋 놓고 서 있었기 때문이다.“배 대표님...”순간 도아린은 머리를 번쩍 들고 소파 한가운데 앉아 있는 남자를 바라봤는데 상대가 글쎄 배건후였다.그는 한없이 차갑고 예리한 눈빛으로 째려보며 입에 담배를 지그시 물고 있었다.도아린은 온몸이 싸늘하게 변해가고 손끝이 걷잡을 수 없이 떨렸다.그래도 부부의 연을 맺은 사이인데 제 사람이 이렇게 괴롭힘을 당하는 걸 아무렇지 않게 지켜보고 있다니.박규형의 협력 파트너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뜬금
“여기까지 왔는데 박 대표님이랑 한잔해야지.”그가 말을 마친 후 박규형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박규형은 힘겹게 침을 꼴깍 삼켰다. 배건후를 앞에 두고 한때 그의 가정부였던 여자와 술을 먹으라니, 그야말로 간이 배 밖에 튀어나올 노릇이었다.그날 에이트 맨션에 뇌물을 드리러 갔을 때 들은 바로 이웃 주민이 도아린을 채가려다가 회사 자금줄이 툭 끊기고 나중에는 집을 팔아서 겨우 빚을 갚고 종적을 감췄다고 했다.박규형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배건후를 쳐다봤다. 방금 대화를 어디까지 엿들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 말도 없는 걸 보니 정말 이 가정부를 해고한 듯싶었다.“저기... 배 대표님, 저희가 룸을 잘못 들어온 것 같네요...”한편 배건후는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차가운 시선으로 다시 도아린을 쳐다봤다.도아린이 휴대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려고 할 때 연예 기획사 매니저가 덥석 낚아챘다.“경찰에 신고하려거든 밖에 나가서 해요. 괜히 여기 계신 손님들 기분 잡치게 하지 말고.”말을 마친 후 심지어 도아린을 룸에서 끌어내려고 했다.도아린은 재빨리 돌아서며 휴대폰을 뺏어왔다.“저도 여기 손님이에요. 마땅히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고요!”이때 배건후가 담뱃재를 털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차갑게 말했다.“내가 룸에 잘못 들어왔나 보네.”이어서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그는 강압적인 포스를 내뿜으며 한 걸음씩 다가왔다. 도아린은 바로 문 앞에 서 있어서 외면할 수가 없어 마지못해 고개를 들었다.배건후가 담배를 지그시 물고 싸늘한 시선으로 바라봤다.‘빌어, 나한테.’다만 그녀는 입술을 앙다물고 단호하게 대응했다.‘그럴 리 없어.’그녀는 얼른 휴대폰 연락처를 뒤지면서 배건후를 건너뛰고 도성에서 출근하는 대학교 선배를 찾아 이제 막 전화를 걸려고 하는데 대뜸 그에게 잡혀버리고 말았다.이 남자는 두말없이 그녀를 이끌고 밖으로 나갔다. 도아린은 어깨가 문에 부딪혀 너무 아픈 나머지 눈물이 찔끔 나왔다.“건후 씨, 이 손 놔요. 나 놓으란 말이야!”
“갑자기 일이 생겨서...”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배건후가 그녀의 턱을 확 잡아당겼다.그는 음침한 눈길로 도아린을 째려봤다.“무슨 일? 도성에 남자 만나러 오는 일? 넌 대체 왜 그렇게 욕구불만이야? 무대에서 꼭 그렇게 끼 부려야겠어? 아예 옷을 다 벗어버리지 왜?”배건후의 비꼬는 말투에 그녀는 너무 굴욕스러워서 안색이 다 창백해졌다. 오해를 당한 서러움과 분노가 여린 마음을 단숨에 짓눌러버렸다. 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배건후에게 쏘아붙였다.“3년이나 굶었는데 당연히 허기지죠. 이제라도 남자를 찾아야지, 안 그러면 무슨 느낌인지조차 까먹게 생겼다고요.”“...”배건후가 손에 힘을 꽉 주었다.“그때 그 느낌으론 만족이 안 돼? 평생 못 잊을 텐데?”“그땐 건후 씨도 약 먹고 나도 술 마셨잖아요. 사실이 증명해주다시피 결혼 뒤엔 단 한 가지도 빠져선 안 돼요.”배건후가 턱을 너무 세게 짓누르다 보니 그녀의 이빨이 살에 긁혀 입안에 피비린내가 진동했다.“평생 못 잊죠. 좋았던 추억이 아니라 끔찍했던 기억으로 남을 거예요!”그녀의 도발에 배건후는 분노 게이지가 한 레벨 더 올라갔다.남자는 이마에 실핏줄이 튀어 오르고 이를 꽉 악문 채 그녀에게 쏘아붙였다.“그럼 그 선배한테 도움 청하기 전에 미리 술 좀 마셔야겠네?”배건후는 그녀를 뿌리치고 와인 캐비닛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위기감을 느낀 도아린이 재빨리 일어나 문 앞으로 달려갔지만 문손잡이에 손도 닿기 전에 배건후에게 뒷덜미가 덥석 잡혔다.그는 도아린을 확 잡아당겨서 품에 짓누르고 술잔을 입가에 갖다 댔다.“건후 씨... 켁켁...”배건후는 그녀의 거부를 아예 무시한 채 독한 보드카 한 잔을 억지로 들이부었다. 도아린은 사레에 걸려서 두 눈이 빨갛게 충혈됐고 이 모습을 본 배건후는 표정이 더 일그러졌다.도아린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다 젖은 티셔츠를 움켜쥐고 기침을 해댔다.한편 배건후는 거만한 자세로 그녀를 내려다보더니 넥타이를 풀어서 소파에 내던지고는 옷 단추를 풀고 완벽한 식스
물론 그 당시 도아린은 더 이상 갈 곳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하여 모든 희망을 배건후에게 거는 건 아니었다. 오늘날의 초라한 몰골에 이르기까지 전부 그녀가 잘난 척하며 자초한 일이다.이 남자에게 잘해주면 서서히 그의 마음을 녹여 내릴 줄 알았는데 모든 게 오산이었다.배건후의 숨결이 더 거칠어졌고 한없이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쳐다봤다.촤라락.너덜너덜해진 티셔츠가 휴지통에 버려졌다. 곧이어 배건후가 그녀를 번쩍 들어 올리더니 세면대에 앉혔다.도아린은 비틀거리다가 그의 품에 기댔고 배건후의 손은 그녀의 쇄골을 타고 서서히 아래로 흘러내렸다. 이에 그녀는 저도 몰래 몸을 움찔거렸다.“3년 동안 순하고 다정하게 내 의식주를 잘만 책임져주더니, 죽을 때까지 사랑하겠다고 맹세하더니... 불만 한 마디 없던 애가 육민재가 돌아왔다고 이젠 저 자신이 바보 같아 보이는 거야?”도아린은 그의 감미로운 목소리에 현혹돼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은밀한 부위가 터치 당하고 나서야 불현듯 두 눈을 부릅떴다.그랬다. 이건 환각이 아니었고 눈앞의 남자는 바로 배건후였다.그녀는 남자의 손목을 확 잡고 필사적으로 저항했다.“배건후, 나 건드리지 마!”배건후는 들끓어 오르는 분노를 줄곧 참다가 그녀의 거절에 끝내 폭발하고 말았다. 그는 도아린의 목을 꽉 잡고 이마를 맞댔다.“그럼 누가 건드리길 바라는데? 육민재? 박규형? 그것도 아니면 너한테 꽃 선물하던 그 선배?!”도아린은 문득 뭔가 생각난 듯 한심하다는 눈길로 배건후를 째려봤다.“건후 씨가 선배 손가락 부러뜨렸어요? 대체 왜?”배건후는 한 손으로 벨트를 풀었다.“네 그 선배 진작 결혼했어. 박규형도 아들이 곧 초등학교 들어가. 넌 내연녀가 그렇게 싫다면서 정작 본인이 그 짓거리를 하고 있네? 참 포부가 큰 여자야, 그치?”도아린은 그를 밀치고 비틀거리며 밖으로 달려나가다가 발이 미끄러져 바닥에 넘어졌다.무릎에서 전해지는 통증에 그녀는 정신을 번쩍 차리고 잔뜩 꼬인 혀로 뭐라고 얼버무렸다.배건후
배건후가 문을 열고 들어가니 도아린이 글쎄 바닥에 대자로 뻗어서 중얼거리고 있었다.“호텔 싫어. 호텔은 싫다고...”“침대 올라가 얼른.”배건후는 거만한 눈길로 그녀를 쳐다봤다.이때 도아린이 침대를 짚으며 겨우 일어나더니 그의 바지를 잡아당겼다.“그쪽은 유정이가 보낸 서프라이즈 선물이에요?”서프라이즈?소유정은 그녀에게 술을 사줄 뿐만 아니라 서프라이즈까지 준비해줬다고?!배건후는 기가 차서 말문이 턱 막혔다.“...”그는 도아린의 손등을 탁 내리쳤다.“역시 유정이밖에 없다니까. 내가 키 크고 잘생긴 남자 좋아하는 거 완전 잘 알아. 근데 그쪽은 얼마예요? 너무 비싸면 나 감당 못 하는데?”“...”배건후의 눈 밑에 서늘한 한기가 스쳤다.몇 분 전까지만 해도 열녀 납셨더니 이젠 또 이토록 음탕하게 변해버린다고?“얼마 줄 수 있는데?”배건후의 음침한 목소리에 아찔함이 섞여 있었지만 도아린은 머리가 워낙 어지럽다 보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그녀는 배건후를 붙잡고 겨우 일어서서 발꿈치를 들더니 잘생긴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생긴 건... 나름... 나름 내 스타일이고, 돈도 좀 있어 보이네.”배건후는 비틀거리는 그녀의 몸을 확 잡고 눈을 가늘게 뜨면서 지그시 바라봤다.한편 도아린은 눈앞의 이 남자가 마치 요술이라도 부리듯 얼굴이 길쭉해졌다가 또 넓어지기를 반복했다. 그녀는 머리를 휘젓다가 손을 번쩍 내밀었다.“40만 원 줄 테니 우리 한 번 해요!”배건후는 입꼬리를 씩 올리고 섬뜩한 눈빛으로 되물었다.“확실하지?”“키 커서 20만 원, 근데 또 잘생기기까지 했으니 그쪽은 40만 원 할게요...”도아린은 그의 엉덩이를 움켜쥐었다.“엉덩이도 탱탱하네. 20만 원 추가! 더는 안 돼요.”배건후는 마음 같아선 그녀를 욕조의 찬물에 확 담가버리고 싶었다. 정신을 차리고도 계속 이렇게 음탕하게 나올 수 있을지 지켜보고 싶었으니까.도아린은 그의 손에서 휴대폰을 꺼내 힘겹게 화면을 터치했다.“카... 카카오페이로 줄게요. 근데.
“건후 씨가 왜 여기 있어요?”그녀의 물음에 배건후가 피식 웃었다.“누가 60만 원 준다면서 나보고 한 번 하자던데?”“...”도아린은 일부러 못 알아들은 척 돌아누우며 침대에서 일어나려고 했지만 배건후가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냉큼 짓눌러버렸다.“어젠 울면서 잘못을 인정하더니 잠 깨자마자 모른 척 시치미 떼려고?”“무슨 잘못을 인정해요? 내가 뭘 잘못했는데!!”배건후가 목소리를 내리깔았다.“유부녀가 낯선 남자랑 침대에서 뒹구는 게 잘못 아니야?”“단순히 뒹굴었을 뿐 건후 씨 나한테 뭐 한 것도 없잖아요.”도아린은 언짢은 듯 그의 손을 뿌리쳤다.“건후 씨도 유부남이면서 밖에서 실컷 즐기고 다녔잖아요! 왜 이렇게 내로남불이야 진짜.”“너 지금 대체 뭐라는 거야?”배건후는 잔뜩 화나서 미간을 찌푸렸다.도아린도 뒤질세라 그에게 삿대질했다.“나쁜 짓 했으면 했지 뭘 또 발뺌이에요? 건후 씨는 나한테 이런 말 할 자격 없어요!”배건후가 손보미의 신비주의 남친이란 걸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데 그가 대체 무슨 체면으로 도아린을 질책하는 걸까?그녀는 침대에서 내려왔는데 시퍼렇게 멍든 무릎 때문에 선뜻 일어서지 못하고 또다시 배건후에게 허리를 휘감겨버렸다.배건후는 이번에 아예 그녀를 몸 아래에 깔아 눕혔다.“건후 씨 계속 발뺌할 거면 나 갈래요!”“으읍!”이때 배건후가 갑자기 그녀의 입술을 꼭 깨물었다.쓰라린 고통에 그녀는 필사적으로 몸부림쳤지만 그의 등을 두드릴수록 더 세게 깨물더니 끝내 입술을 벌리게 했다.도아린은 거부하지 못한 채 이 남자의 거침없는 키스에 온몸이 나른해졌다.배건후는 그녀의 입술을 탐하다가 귓불로 넘어가더니 나중에는 목을 타고 내려왔다. 그는 마치 드라큘라처럼 그녀의 피를 빨아먹지 못해 안달이었다.도아린은 끝내 몸부림을 포기했다.“건후 씨 지금 내 말에 정곡을 찔려서 이렇게 화내는 거죠?”순간 배건후가 동작을 멈추고 고개 들어 그녀를 쳐다봤다.이때 도아린이 머리를 들며 그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사모님!”박규형은 덩치 큰 체구로 차 문을 가로막으며 도아린을 간절히 쳐다봤다.“어제는 제가 잠시 정신이 나갔었나 봐요. 사모님께 그런 실례를 범하다니. 제발 저 한 번만 용서하시고 대표님께 잘 얘기해주실 수 있나요? 앞으로 더는 이런 일 없을 겁니다!”이때 맞은편에서 또 한 명이 불현듯 나타나더니 박규형과 나란히 서서 그녀를 가로막았다.“저희 아트 캠퍼니에 와주셔서 정말 영광입니다. 사모님 같은 분을 초대 가수로 모시다니, 제가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봐요! 이런 분을 몰라뵙고 어제는 너무 어리석게 실례를 범했어요. 제가 세상 물정 모르고 너무 설쳐댔습니다. 사모님의 은혜는 평생 간직하고 어제 일도 평생 사죄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겠습니다!”연예 기획사 매니저도 처참한 몰골로 말을 내뱉으며 스스로 뺨을 내리쳤다.옆에 있던 두 명의 벨보이는 멍하니 넋을 놓았고 그중 한 명이 재빨리 눈치채더니 들어가서 지배인께 알렸다.“건후 씨가 두 사람한테 뭘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과받을 마음 전혀 없습니다. 어제 일은 반드시 끝까지 추궁할 거예요.”도아린이 왼쪽으로 걸어가자 두 사람도 곧바로 따라오며 어떻게든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건후 씨 금방 나올 텐데 계속 내 앞길 막으면 뒷감당할 수 있겠어요?”두 사람이 머뭇거리고 있을 때 그녀는 재빨리 차에 올라탔다.“기사님, 얼른 출발해요!”차가 떠나간 후에야 둘은 이상한 낌새를 알아채고 미친 듯이 쫓아갔다.“사모님, 천사 같은 마음으로 부디 한 번만 은혜를 베풀어주세요. 제발 우릴 살려달라고요!”“제발요. 사모님 말 한마디면 저희도 금방 풀려날 거예요! 한 번만 도와주세요, 네?”이때 교차로에 갑자기 차 한 대가 뛰쳐나와 두 사람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연예 기획사 매니저는 숨을 헐떡이며 박규형에게 말했다.“대표님, 저년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네요. 이참에 우리 그냥 배 대표님 찾아갈까요?”“멍청한 놈!”박규형은 커다란 나무에 기댄 채 씩씩거리며 대답했다.“배건후가 우릴 만나줬다면 굳이 쟤한테
“네 남동생 죽었어?”“아직, 하지만 별반 차이 없어.”도유준은 종업원을 불러 식당에서 제일 비싼 요리를 주문하고 술도 한 병 더 시켰다.“다들 마음껏 마셔! 이따가 가게에 내려가서 먹고 싶은 디저트 있으면 편하게 가져가고.”“도울 디저트 도련님께서 이미 허락하셨으니 사양하지 않을게.”곧이어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녀석들과 등을 대고 앉은 소유정이 몸을 숙이며 말했다.“건방진 자식 같으니라고, 양아들 주제에 가산을 물려받을 생각 하다니?”도아린이 콧방귀를 뀌었다.“저놈이 왜 도 씨인지 알아?”양아들인지 아닌지는 도정국 본인이 제일 잘 알 것이다.식사를 마칠 때쯤 도아린은 주현정의 연락을 받고 먼저 가봐야 한다고 일어났고, 소유정도 입을 닦고는 가려고 했다.도아린은 입만 벙긋거리며 계산하러 간다고 말하고는 테이블 위에 놓인 볼캡을 가리켰다.비록 유명한 편은 아니지만 소유정은 나름 얼굴이 알려진 가수였다. 게다가 아침에 병원에서 나와 안색도 창백하고, 화장도 안 했는지라 조금이라도 가리는 게 나았다.두 여자가 떠난 뒤 도유준과 친구들은 흥이 나서 술을 더 시켰고, 점심시간이 끝날 때까지 술판을 벌였다.도유준은 잘난 척하려고 일부러 종업원을 불러서 계산했다.종업원이 계산서와 카드 단말기를 건네주자 그는 비밀번호를 눌렀고, 이내 잔액 부족이 떴다.나머지 세 친구는 가정 형편이 썩 좋은 편은 아니라서 매달 생활비가 고작 40만 원에 불과했다. 한 끼 식사에 족히 60만 원이 나왔으니 더치페이하기 싫어서 갖은 핑계를 대고 빠져나갔다.“카드 단말기가 문제 있는 거 아니에요? 아까 신발 샀을 때만 하더라도 잔액이 200만 원 넘었는데?”종업원은 그가 산 신발 따위 관심이 없었고, 다른 카드 단말기로 결제했지만 결과는 똑같았다.계단 입구에 숨어서 기웃거리는 친구들을 보자 도유준은 점점 짜증이 났다.어렸을 적부터 출신 때문에 예민하고 의심이 많아진지라 사람들이 뒤에서 수군거리기만 하면 마치 아비 없는 자식이라고 놀리는 듯한 환청이
“그리고 나서...”윤명희는 말하다가 진범준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가 말하는 걸 허락했다.“그리고 나서 건후는 수술실로 들어갔어.”윤명희는 이런 말을 전하기가 어려운 듯했다.그녀와 도아린은 재회한 지 반년이 채 되지 않았지만 엄마로서 그녀는 딸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겉으로는 차분해 보여도 마음은 분명 요동치고 있을 것이었다.“아린아...”윤명희는 딸의 차가운 손을 꼭 잡고 그녀의 반응을 세심히 살폈다.도아린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맑고 투명한 눈에는 눈물이 어려 있었지만 표정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그럼 아직 중환자실에 있는 거예요? 아직 위험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거예요?”“아니, 상태가 안정되자마자 다른 병원으로 옮겨졌어. 현정 씨가 건후를 연성에 있는 병원으로 옮겼거든.”윤명희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좀 더 회복되면 엄마랑 같이 건후 보러 가자.”도아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겉으로 티를 내지 않았지만 윤명희의 말이 전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배건후가 정말 그녀보다 심하게 다쳤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국내 최고 의료 시설을 갖춘 해남 병원을 두고 굳이 그를 연성시에 있는 병원으로 옮긴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하지만 계속 추궁해 봤자 거짓말만 늘어날 뿐이었으니 도아린은 일찍 퇴원 해서 본인이 직접 알아보는 것이 나을 거라 생각했다.그런데 예상과 달리, 집에 돌아온 후에도 가족들은 계속 번갈아 가며 그녀 곁을 지켰다.겉으로는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했지만 사실상 그녀가 외부와 연락하는 걸 차단하기 위해서였다.그렇게 집에 돌아온 지 사흘째 되는 날, 도지현이 찾아왔다.그동안의 훈련과 적응 끝에 그는 드디어 의족을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도지현은 라이브 방송 계정을 개설해 자신의 신체적 결함을 거리낌 없이 드러냈고 팬들에게 자신의 의족을 보여주었다.그러면서 같은 상황에 놓인 사람들한테 포기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
“오빠, 제 휴대폰 어디갔는지 알아요?”“너 휴대폰 고장 났더라고. 내일 새로 바꿔 줄게.”진수혁은 다시 소파로 돌아가 업무를 이어갔다.도아린은 심심해서 소파 옆에 놓인 가방을 뒤적였다. 그 안에는 세탁된 옷이 잘 정리되어 있었다. 지난 며칠 동안 진수혁은 도아린의 병실에 머물며 그녀 곁만 지키고 있었다.“오빠, 저 이제 괜찮으니까 돌아가서 쉬어요.”도아린이 말했다.“이제 와서 그 사람들이 다시 저를 건드리진 않을 거니까요.”“그럴 가능성이 작긴 해도 전혀 없는 건 아니야.”진수혁의 시선은 여전히 노트북 화면에 고정되었는데 손가락은 능숙하게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네가 해야 할 일은 휴식뿐이야. 몸을 회복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마.”...사흘 후, 도아린은 바닥에 발을 딛고 걸을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었다.“오빠, 저 건후 씨 보러 가고 싶어요. 과거 일은 제쳐둔다고 해도 이번에는 건후 씨가 절 구해준 거잖아요.”“건후 씨는 이 병원에 없어.”진수혁은 도시락을 열고는 그녀에게 숟가락을 건넸다.도아린은 반신반의하며 물었다.“제 기억엔 건후 씨도 손과 다리가 골절됐고 이마에도 상처가 있었던 걸로 알아요. 그리고 사람들이 말하기로 교통 사고는 겉으로 보면 얼마 안 다친 것 같지만 심하게 다친 경우가 많다고 하잖아요.”진수혁은 부주의로 숟가락을 바닥에 떨구고 몸을 숙여 숟가락을 집어 들었다.“이거 씻고 올게.”병실 안에도 세면대가 있었지만 진수혁은 굳이 숟가락을 들고 방을 나가버렸다.도아린은 뭔가 불길한 예감이 밀려왔다.‘설마, 내 말이 맞았던 걸까? 나보다 더 심하게 다친 걸까?’그녀는 당시 배건후의 상태를 떠올려 보려 애썼지만 사고 이후의 기억은 조각조각 흩어져 있어 알 수 없었다.‘더 심각한 상처를 입었다면 혹시 아직 의식을 찾지 못한 건가?’그때, 병실 문이 열리며 윤명희와 진범준이 들어왔다.“퇴원 준비 끝냈어. 밥을 다 먹으면 바로 퇴원하자.”윤명희는 남편을 힐끗 본 후 도아린에게 말했다.“아린
“너 쉬어야 해.”역시 진수혁은 도아린이 다른 사람과 단둘이 이야기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지금은 잠이 오지 않아요.”도아린은 변슬기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전에 말한 건 어떻게 됐어요?”그러자 변슬기의 귀가 순식간에 빨개졌다. 그녀는 입술을 꼭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오빠, 슬기 씨랑 여자끼리 할 얘기가 좀 있어요.”진수혁은 변슬기의 수줍은 얼굴을 보며 잠시 망설였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그를 힐끗 쳐다봤다.“도 선생님을 오래 방해하지는 않을게요.”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오래 방해하지 않는다’는 말은 도아린에게 ‘쓸데없는 말은 하지 않는다’는 말로 들렸다.그녀는 아무 말 없이 진수혁의 반응을 살폈다.“그럼 잠깐만 허락해줄게.”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병실을 나갔다.“도 선생님, 정말 죄송해요. 다 저 때문에 다친 거잖아요.”변슬기는 진심 어린 사과를 하며 눈물을 흘렸다. 도아린이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로 그녀는 한숨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꿈을 꿀 때마다 자신이 더러운 수술대에 눕혀져 있는 장면이 떠올랐고 깨어 있는 상태인데도 장기를 이식하겠다고 날카로운 수술칼을 들이대는 장면도 아주 소름 끼쳤다.그런 꿈을 꿀 때마다 도아린이 하늘에서 내려와 천사처럼 그녀를 구해 주었다.‘빨리 도망쳐요! 뒤돌아보지 말고요!’그렇게 매번 변슬기는 도아린의 도움으로 도망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러다가 뒤를 돌아보면 정작 도아린은 도망치지 못하고 그들에게 잡혀 있었다. 그럴 때마다 변슬기는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 혹시라도 그 꿈이 현실로 될까 봐 그녀는 너무 무서웠다.자기를 구해준 대가로 도아린이 나쁜 놈들에게 희생될까 봐 말이다.“울지 마요.”도아린이 천천히 손을 뻗어서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변슬기는 그녀의 손을 잡으며 울먹였다.“도 선생님, 제가 너무 멍청했어요. 안민아의 꼬임에 넘어가지만 않았다면 도 선생님을 이런 일에 끌어들이지도 않았을 텐데...”“피해자를 탓할 필요는 없어요. 안민아가
진수혁은 가볍게 헛기침을 하면서 말했다.“수술 때문에 다 잘라 버렸어. 금방 자랄 거니까 걱정하지 마. 아니면 비서한테 가발이라도 사 오라고 할까?”‘그래서 지금 내가 대머리라고?’손을 들어 가까스로 머리를 만져보자 얇은 망 같은 게 씌워져 있었다. 이렇게 오랫동안 혼수상태였던 걸 보면 부상이 꽤 심했던 게 분명했다.후유증만 남지 않는다면 머리카락 정도야 대수롭지 않았다.“건후 씨는... 괜찮아요?”그녀는 배건후가 차에서 굴러떨어지고도 절뚝이며 달려오던 모습으로부터 위험을 무릅쓰고 도로 한가운데에 차를 세워 도움을 요청하던 것까지, 그리고 구급차 안에서 했던 말마저도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병원에 도착한 후로부터는 의식이 흐릿했지만 눈을 뜰 때마다 그가 곁에 있는 걸 볼 수 있었다.배건후는 계속해서 그녀에게 버텨야 한다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해주었다.진수혁은 그녀의 질문을 못 들은 척하며 휴대폰을 들고 병실을 나갔다.“일 끝나면 가발 하나 사 와.”그는 병실 문을 닫고 나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밖에서 말다툼 소리가 들려왔다.누군가 벽에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병실 문이 갑자기 열렸다.“한 번만 보고 바로 나갈게!”강재민이 진수혁의 제지를 뿌리치고 병실 안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그는 도아린이 깨어나 있는 걸 보자마자 눈을 반짝였다.“아린 씨, 깨어났어요?”그를 막지 못한 진수혁이 한 마디 덧붙였다.“아린이는 휴식이 필요해. 그러니까 용건만 말해.”“나도 알아.”강재민은 성큼성큼 다가와서 몸을 숙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어디 아픈 데는 없어요?”도아린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절... 알아볼 수 있겠어요?”강재민은 순간 긴장하며 주먹을 꽉 쥐었다. 혹시라도 그녀가 누구냐고 묻기라도 하면 어쩌나 싶었다.“당연히 알죠.”도아린이 담담하게 말했다.강재민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병실 문가에 서 있는 진수혁을 바라보았다.“나 아린 씨랑 단둘이 몇 마디만 하면 안 돼?”“안 돼.”진수혁이 단호하게 거절했다.“방금 깨
“건후야...”주현정은 깜짝 놀라서 그의 팔을 붙잡았다. 그녀는 무심코 배건후의 상처를 눌러버리자 그는 숨을 들이마시며 얼굴을 찌푸렸다.주현정은 급히 손을 놓고 배건후를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건후야, 엄마가 의사를 부를 테니까 치료 좀 받아.”배건후는 고개를 돌려 차가운 시선으로 곁에 있던 진씨 가문 가족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직이 중얼거렸다.“여기가 어디죠?”“건후야, 엄마 놀라게 하지 마!”주현정은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윤명희가 다가와서 그에게 치료를 권하려 했지만 그는 의아한 표정으로 먼저 물었다.“왜 제가 병원에 있는 거죠?”“아린이랑 교통사고를 당했잖아. 너...”진경수는 혹시나 일부러 기억을 잃은 척하는 건 아닌가 해서 그의 눈을 주시했다.그러나 배건후의 눈빛은 완전히 흐려져 있었고 병원에 있는 이유뿐만 아니라 사람들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듯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피를 토하고는 그대로 뒤로 쓰러졌다.진경수가 급히 그를 붙잡았다.“배건후!”“의사 선생님, 제발 제 아들 좀 살려 주세요!”...눈을 떴을 때, 도아린은 침대 옆 소파에서 서류 작업을 하고 있는 진수혁을 보았다.“오빠...”그녀는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도아린이 깨어난 걸 본 진수혁은 노트북을 내려놓고 그녀에게로 다가왔다.“움직이지 마. 내가 물 가져올게.”그는 침대 각도를 살짝 올리고는 그녀에게 따뜻한 물을 가져다주었다. 그리고는 뒤통수를 조심스럽게 받쳐 주었다.목이 바짝 말랐던 도아린은 단숨에 물 반 컵을 마셨고 그제야 목 상태가 조금 나아진 듯했다.“그 사람들 말이야...”비록 증거는 없었지만 그녀는 트럭 운전사를 매수한 주범이 장기 매매 조직과 관련이 있을 거라 확신했다.그녀는 뭐라 더 말하려 했지만 진수혁이 말을 끊어 버렸다.“이미 잡았어.”그의 평소 같이 차분한 눈빛에는 왠지 모를 차가운 기운이 서려 있었다.변슬기를 구출한 다음 날, 그는 사람을 시켜 목장 근처의 CCTV 영상을 분석하게 했다. 그리고 도주할 가능성이
의사가 급히 다가와 도아린을 확인하더니 주사를 한 대 더 놓았다. 그리고는 운전기사에게 속도를 빨리라고 재촉했다.“환자의 상태가 매우 위급합니다. 빨리 가주세요!”“도아린, 너 절대 죽으면 안 돼! 나랑 이혼할 때는 그렇게 난리를 치더니 이렇게 죽으면 안 되지. 그렇게 자존심이 강하다며? 그럼 지금이 네 대단한 자존심을 보여 줄 때야!”배건후는 점점 더 초조해져서 말을 가리지 않고 마구 내뱉었다. 눈물은 통제할 수 없이 흘러내려 도아린의 이마 위로 떨어졌다.눈물이 상처에 닿자 그녀는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중상 환자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병원 쪽에서는 미리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구급차가 도착하자마자 다들 한마음 한뜻으로 도아린을 들것에 올리고는 병원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환자분도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한 의사가 배건후를 붙잡았다.“저는 괜찮습니다.”배건후는 의사의 팔을 뿌리치고는 다리를 절뚝이며 따라붙었다.“아내가 괜찮은지 먼저 확인해야 해요!”하지만 그 의사는 끝까지 배건후를 따라가면서 그의 상태를 관찰했다. 그는 팔과 다리에 골절 가능성이 있었고 귀에서 출혈이 있는 걸 봐서 뇌 손상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의사가 뭐라 하든 배건후는 듣지 않았고 오직 도아린 곁을 지키려 했다.진경수를 비롯한 진씨 가문 사람들도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달려왔다. 집으로 돌아가던 중 도아린의 사고 소식을 접한 윤명희도 서둘러 병원으로 왔다.“배건후, 이 개자식아!”진경수는 배건후를 향해 주먹을 날리려 했으나 경찰이 막아서며 상황을 설명했다.“건후 씨의 빠른 판단이 없었으면 아린 씨는 더 큰 부상을 입었을 겁니다. 그 자리에서 바로 사망했을 수도 있고요. 건후 씨가 트럭의 충격을 막아줘서 그나마 다행입니다.”“아린아, 조금만 버텨. 가족들도 다 너 보러 왔어. 아무 일도 없을 거고 무사할 거야. 우리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윤명희는 창백한 얼굴을 하고 도아린에게 손을 뻗으려 했지만 혹여 그녀를 아프게 할까 봐 조심스러웠다.“건후야, 너도 치료
어떤 사람은 차 문을 열자는 생각에 찬성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무리 힘을 써도 열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배건후의 간절함에 영향을 받았는지 다들 어떻게든 해보려고 애썼다. 모두가 차 안에 있던 도구를 꺼내 들고 힘을 합쳐 문을 열려고 했다.“하나, 둘, 셋! 하나, 둘, 셋!”“조금만 더 힘내요. 움직이기 시작했어요!”누군가가 이렇게 외치자 다들 이를 악물었고 어떤 이는 손에 들고 있던 도구를 부러뜨릴 정도로 힘을 썼다. 마침내 ‘쾅’하는 소리와 함께 차 문이 열렸다.“도아린!”문이 열리자마자 배건후는 앞으로 달려가서 안전벨트를 풀어주고 그녀의 몸을 일으켜주었다. 배건후는 그녀의 얼굴을 조심스레 감싸고는 쉰 목소리로 물었다.“어디 다쳤어? 어디가 아픈지 말해줘.”힘겹게 눈을 뜬 도아린은 배건후의 부어오른 눈, 갈라진 입술과 멍든 뺨을 바라보았다. 우아하고 단정했던 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배건후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다리가 끼이지는 않았는지 확인했다. 그때, 도아린은 그의 귀에서 피가 흐르는 것을 보았다.그녀는 손가락을 살짝 움직이며 그의 옷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배건후는 즉시 고개를 번쩍 들고 그녀를 바라보았다.“내가 있으니까 걱정 마! 곧 구급차가 올 거고 아무 일도 없을 거야.”배건후는 이렇게 말하며 직접 도아린을 안아 올렸다. 그러나 좌석에서 벗어나자마자 두 사람은 함께 바닥으로 쓰러졌다.그 모습을 본 주변 사람들이 다가와서 그들을 도왔다.어떤 이는 차량 뒤쪽에 경고 표지를 설치했고 어떤 이는 경찰에 신고를 했으며 또 어떤 이는 휴지를 찾아서 출혈을 막아주었다.구급차는 경찰차보다 먼저 도착했다.의사는 부상자가 두 명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구급차를 한 대 더 부르려 했다.“전 괜찮습니다! 제 아내부터 봐주세요. 부탁드립니다!”의사는 배건후가 걸을 수 있고 말도 조리 있게 할 수 있는 것을 보고 두 사람을 함께 태웠다.도아린은 산소마스크를 쓴 채로 몽롱하게 잠에 빠지려 했다.그녀를 살펴본 의사는 표정이 심각
급커브를 빠져나가면 피할 곳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녀는 급하게 액셀을 밟았다.차량 속도가 너무 빨랐기에 커브를 돌 때 브레이크를 여러 번 밟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칫하면 차가 옆으로 넘어갈 뻔했다.도아린이 막 안도의 한숨을 돌리려는 순간, 맞은편에서 트럭 한 대가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뒤쪽 트럭도 경적을 울렸고 맞은편의 트럭도 그에 응답하듯 경적을 울렸다.맞은편에서 오는 트럭이 도아린의 차를 향해 정면으로 돌진해 왔다. 그녀는 순식간에 온몸의 혈액이 머리로 쏠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건 계획된 살인이었다.그녀는 필사적으로 침착하려고 했지만 몸은 이미 마비된 상태였다.옆에서는 또 다른 트럭이 밀어붙여서 도망칠 공간이 없었다. 브레이크를 밟거나 정면충돌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그렇다고 속도를 줄이면 뒤에 있는 검은색 밴에 부딪힐까 봐 걱정이었다.‘돌발 상황에 직면했을 때, 여자는 정말 남자보다 판단력이 약한 것일까?’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사실인 듯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지만 떠오르는 방법이 없었다.그 아슬아슬한 순간에 검은색 밴이 도아린의 차 앞으로 뛰어들었다. 검은색 밴은 급브레이크를 밟더니 도아린의 차와 트럭 사이를 가로막았다.맞은편 트럭 운전사는 이런 변수를 예상하지 못했는지 반사적으로 핸들을 꺾어 버렸고 도아린 옆에서 나란히 달리던 트럭과 충돌해 버렸다.두 대의 트럭은 세게 부딪히고 나서 절벽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하지만 그 와중에 트럭에 있는 트레일러가 검은색 밴을 세게 들이받았고 ‘쾅’하는 소리와 함께 도아린도 속도를 줄이지 못한 채 밴에 부딪혀 버렸다. 그 충격에 검은색 밴은 완전히 납작하게 눌려 버렸다.에어백이 터지면서 그녀는 온몸이 쑤셨다. 머리가 지끈거렸고 시야도 흐릿해졌다.그때, 부서진 검은색 밴의 문이 힘겹게 밀려 열리더니 한 남자가 굴러떨어졌다.배건후였다. 그의 팔은 피투성이였고 새하얀 셔츠도 온통 핏자국으로 물들어 있었다.그는 다리를 절뚝거리며 힘겹게 도아린의 차 앞으로 걸어왔다.“도아린,
배건후는 도아린을 따라 아래층 정원까지 내려왔다.“도아린...”그제서야 입을 열었지만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녀가 말을 끊어버렸다.“지금 소송 문제로 바쁘시잖아요. 더 이상 건후 씨 시간 낭비하지 않겠습니다. 안녕히 가세요.”“도아린, 우리 제대로 이야기 좀 해.”“그럴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만...”배건후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 앞을 막았다.“넌 그놈들의 이익을 건드렸어. 다들 널 가만두려 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경찰에게 내가 제공한 정보라고 말해. 그러면 나를 찾아올 거니까.”도아린은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눈빛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싸늘했다.어젯밤 그녀가 변슬기를 구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경찰뿐이었다. 경찰 측에서는 피해자의 신변 보호를 위해 도아린과 진수혁의 신분을 노출하지 않았다.주현정 역시 변슬기가 납치되었다는 사실만 듣고 그녀와 함께 병문안을 온 것이었다.하지만 배건후는 너무나도 정확히 알고 있었다.“유민 씨가 말해줬어요?”배건후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부정하지도 않았고 결코 인정하지도 않았다.그는 왠지 할 말이 많아 보였지만 단 한 마디도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배건후는 손을 뻗어 도아린의 어깨를 잡으려 했다. 하지만 그녀의 차가운 시선을 보고는 허공에서 망설이다가 결국 손을 거두었다.“도아린, 넌 지금 보호가 필요해.”“보호가 필요하다고 해도 배 대표님의 보호는 필요 없어요.”도아린은 그가 건드리지도 않은 어깨를 툭 털어내고는 싸늘하게 말했다.“저희는 감정적으로 얽힌 사이도 아니고 경제적으로도 더더욱 아무 관계 없는 사이에요. 그러니까 앞으로 제 앞에 나타나지 말아 주세요.”“그럼 법정에는 왜 간 거야?”그녀가 법정에 온 걸 보고 배건후는 몇 날 며칠 동안 설레발을 쳤다. 하지만 그의 설레는 감정은 결국 바닥에 내팽개쳐져 처참히 짓밟히고 말았다.“법정에 간 건 저희 할머니 소송 때문이에요.”도아린은 그를 지나치고는 앞으로 걸어갔다. 배건후가 뒤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