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어지는 여자의 뒷모습을 보며 배건후는 가슴이 답답했다.그는 손에 든 담배를 부숴버리고 빨갛게 달아오른 담뱃불이 고급스러운 구두 위에 떨어지도록 내버려 두었다.마이바흐가 떠난 직후, 도아린은 다시 아파트 단지를 나섰다. 집에 과일과 간식이 없다는 것을 떠올리고 근처 마트에 가려던 참이었다.“잘 생각했어?”그녀는 소유정과 통화하며 걸었다.“결정했어. 난 진혁을 데리고 은신처로 갈거야. 그는 내 파트너니까 그를 위험에 빠뜨릴 수는 없지.”이때 봉고차 한대가 도아린의 옆에 멈춰 섰다.불길한 예감이 들었던 그녀는 피하려 했지만 두 명의 건장한 남자가 길을 막아섰다.“너희는... 으읍!”누군가가 도아린의 뒤에서 입을 막았다. 수건에서 뿜어져 나오는 매캐한 냄새에 도아린은 금세 정신을 잃었다.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도아린은 서서히 의식을 되찾았다.그녀는 팔과 다리가 묶인 채로 바닥에 누워있었다. 멀리서 누군가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이쁘장하게 생긴 아가씨야. 몸매도 장난 아니잖아.”“십만 원은 너무 싸. 좀 가지고 놀다가 넘기자.”“보스가 먼저 해요. 우리는 밖에서 지키고 있을게요.”발소리가 멀어졌다.촤악!차가운 물이 얼굴에 쏟아지면서 도아린은 어쩔수 없이 눈을 떴다.낡고 허름한 창고 안이었다. 창문은 빛이 새지 않는 비닐로 덧대있었고 유일한 문은 반쯤 열려 있었다.“누구세요?”그녀는 멍하니 물었다.“넌 건드리면 안 될 사람을 건드렸어.”남자는 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아 얼굴에 붙은 머리카락을 넘겨주며 말했다.“어차피 시골 외딴집 노인네한테 팔려가서 고생할 건데 오늘 이 오빠가 맛좀 보자.”남자는 허리띠를 풀며 더러운 웃음을 지었다.도아린은 머리카락이 곤두섰고 속이 뒤집히는 기분이었다.그녀는 최대한 침착하려고 노력했다.침착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주방장이 당신들 두목인가요? 부탁드리지만 그에게 전해주세요. 오늘 제가 흥분해서 실수했어요. 시키는대로 다 하고요. 원하는건 다 들어줄게요.”도아린은 아첨하는 웃음을 지
그래서 그녀는 나무 몽둥이를 집어 들고 남자의 머리를 가격하는 수밖에 없었다.퍽!나무 몽둥이는 남자의 등을 가격하며 반으로 부러졌다.“형님!”그제야 밖에 있는 사람들이 이상함을 느끼고 소리치며 안으로 달려왔다.그녀는 손에 남은 반쪽 몽둥이로 다시 한번 내리쳤고 남자는 신음하며 쓰러져 꼼짝하지 않았다.그녀는 재빨리 빈 나무 상자 안으로 숨어들었다.이때 달려들어 온 두 명의 부하들은 이 장면을 보고 멍해졌다.두목은 피투성이가 되어 꼼짝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겨우 십만 원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사실에 두 남자는 공포에 질렸다.그들은 허둥지둥 두목을 밖으로 옮기고 문을 잠근 뒤 병원으로 갔다.도아린은 휴대폰으로 도움을 요청하고 싶었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아마 기절해 있는 동안 그들이 가져간 모양이었다.창고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그녀는 창문을 뜯기 시작했다.온몸에 땀을 흘리며 두 개의 나무판자를 간신히 뜯어내서야 겨우 한 사람이 나갈 수 있을 정도로 만들었다.이때 문밖에서 소리가 들렸고 문이 다시 열렸다.피부가 검고 누렇게 뜬 여자였다. 그녀는 분위기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정장을 입고 있었고 누렇고 숱이 적은 머리카락을 뒤통수에 동그랗게 말아 붙였다.“바로 네 이년이 내 사위를 꼬셨지!”하춘녀는 문을 막는 데 쓰는 막대를 들고 한 걸음씩 다가왔다.“네년의 다리를 부러뜨린 다음 산골짜기에 팔아넘겨 버릴 거야! 그럼 남자를 어떻게 꾀나 보자!”“아줌마, 분명히 오해가 있으세요.”도아린은 어색하게 손사래를 쳤다.“저는 이미 결혼했어요.”하춘녀는 남들이 자기를 아줌마라고 부르는 게 제일 싫었다.도시 사람들은 다들 '사모님', '부인'이라고 부르지 않는가?“너야말로 아줌마야. 너희 집안 전체가 다 아줌마들이야!” 하춘녀는 두말없이 몽둥이를 휘둘렀다.무거운 몽둥이가 옆에 있던 상자를 때리자 먼지가 풀썩 일어났다.도아린은 화급하게 피하며 말했다.“이모, 아가씨, 언니... 흥분하지 마시고 얘기 좀 해
도아린의 전화가 갑자기 끊기자 소유정은 뭔가 잘못되었음을 감지했다. 그녀는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다. 어쩔 줄 몰라 하던 중 배건후에게 연락했다.“건후 씨, 도아린이 보육원 사람들에게 납치당한 것 같아요. 얼른 손보미한테 연락해 보세요.”배건후는 여전히 그 찻잎 때문에 도아린에게 화가 나 있었다. 게다가 그는 도아린이 맨션으로 들어가는 것을 직접 목격하기까지 했다.고양이나 강아지도 맨션에서 길을 잃을 리 없는데 하물며 다 큰 어른이야.“유정 씨, 도아린의 체면을 봐서 이번만은 넘어가겠지만 다음에 또 그러시면 명예훼손으로 고소할 겁니다.”“상황이 너무 급해서 건후 씨한테 전화한 거예요. 지금 보니 우리 아린이가 아깝네요.”소유정은 전화를 끊고 다시 육하경에게 연락했다.배건후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의 깊고 어두운 눈동자에는 어느새 분노가 번졌다. 아무리 천사 보육원에 문제가 있다 해도 도아린이 친구들과 작당하여 손보미를 비방하는 것 또한 고상한 일이 아니었다.전화는 이미 끊긴 지 오래였다. 배건후는 핸드폰을 빤히 내려다보더니 뭔가를 기다리는 듯했다. 몇 분 후, 그는 핸드폰을 집어 들어 도아린에게 전화를 걸었다. “연결이 되지 않아 삐~소리 이후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되며 연결된 후에는 통화료가 부과됩니다.”그는 마음 한구석에 불안이 피어올랐다.“맨션으로 돌아가죠.” 배건후는 차갑게 말했다.마이바흐는 서서히 단지에 들어섰고 에이트 맨션은 불이 꺼져 있었다. 배건후는 단지의 CCTV 영상을 확인한 결과 도아린이 두 명의 덩치 큰 남자에게 끌려가 밴에 실린 장면을 보더니 온몸에서 살기를 내뿜었다.도아린이 사용하는 핸드폰은 배건후의 친구가 맞춤 제작한 것으로 전원이 꺼져 있어도 위치를 추적할 수 있었다. 그는 곧바로 백그라운드 데이터를 활성화하고 폐창고로 향했다.창고로 들어가는 길이 심하게 좁다 보니 마이바흐와 밴이 거의 스치듯 지나쳤다.“당신은 저 밴을 쫓아가세요. 전 들어가서 사람부터 찾을게요.” 배건
‘도아린, 네 머리엔 도대체 뭐가 들어찼어?’‘어떻게 그렇게 멍청할 수 있지?’‘이미 마음이 떠난 남자랑 사랑을 논하다니, 그냥 돈만 따지면 되는 거지.’도아린은 물을 두어 모금 마시고 나서 서서히 마음을 가라앉혔다. 경찰은 밴이 리조트에서부터 미행했다고 했지만 오늘 그곳에 갈 거라는 걸 그녀도 몰랐는데 그들이 어떻게 알고 있었을까.아마 손보미가 배건후의 일정을 알고 미리 사람을 보냈을 가능성이 제일 컸다. 도아린은 쓴웃음을 지으며 되레 소유정을 위로했다.“오늘 당한 건 꼭 배로 갚아줄 거야.”발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며 병실 문이 열렸다. 배건후는 차가운 분위기를 풍기며 들어오더니 침대에 기대있는 도아린을 보고 잠시 멈칫했다.“깼네.” 그는 눈에 깊은 그림자가 드리운 채 가까이 다가섰다. “얘기 좀 해.”“아린이가 당신이랑 무슨 얘기를 나눌 게 있죠?”소유정은 겨우 멈췄던 눈물이 다시금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사람이 납치당했을 땐 돕지도 않더니 이제 와서 존재감을 과시하러 오는 것도 아니고.’그녀는 배건후를 조금 두려워했다. 그는 겉보기에 다가가기조차 어려운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도아린이 심하게 당하면서 그녀는 거의 각오를 다졌다. 연예계를 떠나는 한이 있더라도 친구가 괴롭힘 당하는 걸 참을 수 없었다.도아린은 담담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유정아, 나 밀크티 마시고 싶어. 토핑 가득 넣어서.”소유정은 자신을 내보내려는 핑계라는 걸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녀는 도아린과 눈빛을 교환하며 바로 밖에 있을 테니 무슨 일이 있으면 부르라고 했다. 그러고는 배건후를 흘겨보며 병실을 나갔다.배건후는 의자를 끌어와 병상 옆에 앉았다.“어제 사모님께서 해남으로 돌아왔어. 너도 함께 배웅하길 바랐는데...” 그는 잠시 멈췄다가 계속해서 말했다. “사모님께서 정신적으로 불안정하셔서 네가 사고를 당했다는 얘기는 아직 하지 않았어.”도아린은 비웃음을 흘렸다. “엄마도 모르겠죠?”“크게 다친 것도 아닌데. 엄마가 알면 병세
그는 손보미의 출생에 대해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었다. 배건후는 본능적으로 타고난 고고한 자태를 풍기며 도아린을 내려다보았다.“경찰은 결코 범인을 놓치지도 무고한 사람을 억울하게 만들지도 않을 거야.”도아린은 눈을 감은 채 창백한 얼굴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손보미가 그동안 고생한 게 지금 무슨 상관이지?’그녀는 감독과 밤늦게까지 대본을 논의하다가 평판이 망가지고 여러 곳에서 압박을 받게 되자 어쩔 수 없이 해외로 연수를 나갔다. 가엾은 사람에게는 미워할 점이 있기 마련이다. 누구나 힘들겠지만 그게 폭력의 이유는 될 수 없다.“그만 가세요. 혼자 쉬고 싶어요.”배건후는 무언가를 말하려 입을 열다 말고는 그대로 꾹 참아 누른 채 돌아섰다.소유정은 병실 맞은편 의자에 앉아 있다가 문이 열리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경계의 눈빛을 보냈다.“당신이 아직도 아린이를 와이프로 여긴다면 아린이가 푹 쉴 수 있도록 귀찮게 하지 말아주세요.”“소유정 씨, 당신 말에 책임질 준비 하세요.” 배건후는 차갑게 경고했다.소유정은 고집스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배건후 씨, 고소하고 싶으면 하세요. 당신이 저지른 일에 후회하지나 말고.”“지금 뭐하는 거야?” 갑자기 들려오는 육하경의 온화한 목소리에 두 사람은 실랑이를 멈추었다.배건후가 고개를 돌리자 손에 밀크티 두 잔을 들고 있는 육하경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가슴속에 쌓여 있던 답답한 감정이 점점 뚜렷해지는 것 같았다. 배건후의 눈빛은 마치 칼처럼 날카로웠다.육하경이 건넨 밀크티에 소유정은 즉시 환하게 웃어 보였다. 배건후를 대하던 태도와는 하늘 땅 차이였다.“아린이가 제일 좋아하는 토핑이 들어간 밀크티네요. 역시 세심한 분이라 그러신지 따뜻한 걸로 사 오셨네요.” 소유정은 일부러 배건후가 들을 수 있게 큰 소리로 말했다. “이제 들어가야겠어요. 아린이가 한참을 기다렸거든요. 하경 씨도 어서 들어와요.”배건후가 날카로운 눈빛을 던졌지만 소유정은 이미 병실로 들어가 버렸다.육하경은 배건후에
그는 전화를 끊고 육하경에게 함께 가자는 눈빛을 보냈다.“유정 씨가 날 찾아.” 배건후는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는 육하경을 들추어내고 싶지도 않았다. 비록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혼자 떠나야 했다.소유정은 육하경이 들어오자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잠깐만요! 오늘의 주인공께서 등장합니다!”육하경은 그녀의 농담에 약간 민망해하며 말했다. “그만 놀리세요. 별것도 아닌데요 뭐.”도아린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늘 일은 정말 고마워요. 하경 씨가 아니었다면 전...”“오늘이라니!” 소유정이 그녀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벌써 이틀 전이야. 너 꼬박 이틀이나 의식을 잃었엇어.”“...” 도아린은 눈이 휘둥그레졌다.소유정은 핸드폰을 꺼내 날짜를 보여줬다. 도아린은 이내 받아들이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제야어제 진 대표님과 사모님께서 해남으로 돌아갈 때 그녀에게 배웅하지 말라고 한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녀는 이틀이나 혼수상태에 빠졌던 것이다.“오는 길에 경찰서에 들렀어요. 이제 간단한 진술을 받으러 올 거예요.” 육하경은 온화한 시선에 약간의 엄숙함을 더한 채 말했다. “비록 그때의 일을 떠올리기 싫겠지만 아린 씨의 진술이 범인을 잡는 데 도움이 될 거예요.”도아린은 입에 빨대를 문 채 비웃음을 흘렸다. 굳이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도 없이 손보미만 주시하면 진범을 찾을 수 있는데 말이다. 그러나 경찰이 믿어줄까? 설령 믿는다 해도 출동할까? 배건후가 여전히 손보미의 편에 서 있는 한 손보미는 두려울 게 없었다.도아린은 계란으로 바위 치기와 같다는 걸 알면서도 한 번쯤 시도는 해보고 싶었다.“최대한 기억해 낼게요.” 도아린은 토핑을 한 입 크게 씹으며 물었다. “하경 씨는 어떻게 제가 폐창고에 있는 걸 알았어요?”“사실...”“내가 하경 씨한테 전화했어.” 소유정은 육하경의 말을 끊어버렸다. “그 인간이 너 죽든 말든 신경도 안 쓰길래 초조한 마음에 여기저기 헤매다 결국 하경 씨한테 연락
“네. 뭔데요?”“하경 씨, 아린이를 좋아하죠? 아린이랑 배건후는 곧 이혼할 거예요. 그럼 우리 아린이한테 고백할 마음 있어요?”육하경이 주저하는 모습에 소유정은 급히 덧붙였다.“결혼하고 3년 동안 배건후는 아린이한테 손 하나 대지 않았어요.”육하경의 온화한 눈빛에 순간 놀라움이 스쳐 갔다. “뭐라고요?”“결혼 3년동안...”갑자기 병실 문이 열리며 경찰이 나왔다. 육하경은 경찰을 배웅했고 소유정은 병실로 돌아가 도아린을 위로했다. 10여 분 뒤 육하경이 다시 병실로 돌아오고 세 사람은 함께 저녁을 먹었다.“대학교 때 생각이 나네요. 식당에서 토마토 소갈비에 옥수수나 사과 조각을 넣어 주곤 했죠. 진짜 악마의 요리였어요.” 소유정은 육하경을 바라보며 말했다. “근데 아린이는 그걸 가장 좋아했어요. 왜인지 알아요?”육하경은 도아린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린 씨가 과일을 좋아했나요?”도아린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그럼 양이 많아서?”소유정은 하마터면 밥을 뿜을 뻔했다. “식당 아줌마가 손을 한 번 떨면 절반이나 줄어들잖아요.”세 사람은 그렇게 한참을 웃다가 육하경이 다시 토마토 소갈비에 대해 물었다.“사실 토마토 소갈비의 국물에 밥을 비벼 먹을 수 있어서요.” 도아린이 웃으며 설명했다. 그녀는 도정국이 준 제한된 생활비로 하루하루 아껴 써야 했다. 게다가 동생의 병원비까지 마련해야 하다 보니 식비를 아낄 수밖에 없었다. 반찬을 조금만 담고 국물을 듬뿍 담으면 밥을 두 공기나 먹을 수 있었다.결혼 후에는 비싼 소갈비를 마음껏 먹을 수 있었지만 배건후는 식단을 조절하기 시작했고 그녀도 더 이상 옛날을 돌아보지 않게 되었다.지금까지도 배건후는 그녀가 왜 토마토 소갈비를 좋아하는지 모른다....가로등이 두 개나 나간 어두운 골목길이었다. 희미한 빛이 들어오는 골목길 한가운데에 술 취한 양아치 두 명이 비틀거리며 쓰레기통을 넘어뜨렸다.쾅!“젠장, 재수 없게!”“형님 눈이 먼 거 아니야? 겨우 10만 원 때문에 구치소에
육하경은 도아린을 차마 바라보지 못했다. 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혹시라도 그녀의 얼굴에서 실망하는 기색을 볼까 두려웠다. 더군다나 그녀의 신뢰를 잃을까 더욱 두려웠다.병실은 바늘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만큼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육하경은 티베트에서 마적을 만났을 때조차 겁을 내지 않았지만 지금은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눈동자를 몇 번 굴리다 도아린을 쳐다보곤 다시 시선을 내렸다가 갑자기 고개를 들어 그녀를 빤히 바라봤다.도아린은 입가에 미소를 띤 채 맑은 눈빛에는 선의와 따뜻함 그리고 약간의 장난기가 엿보였다.“아린 씨... 저한테 실망한 거 아니에요?”육하경이 긴장하며 물었다.“실망할 게 뭐 있어요?” 도아린은 피식하더니 말을 이어갔다.“하경 씨가 현장에 제일 먼저 도착했다는 사실은 하경 씨 입으로 말한 게 아니라 유정이의 오해일 뿐이잖아요. 하지만 나를 병원에 데려다준 건 사실이니까 제 은인이 맞죠.”육하경은 오히려 마음이 무거워졌다. 도아린은 이미 그들의 대화를 듣고 진실을 추측해 냈다. 그녀는 이를 굳이 드러내지도 않았고 육하경의 체면을 지키면서 배건후에 대한 미련도 남겨두었다. 만약 소유정의 말이 사실이라면 배건후가 그녀를 건드리지 않았음에도 도아린이 그와 3년을 함께한 걸 봐서는 그에 대한 감정이 깊다는 의미였다. 마음속에 그만한 자리를 차지한 사람을 대신하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육하경은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사실대로 말하길 잘했네요.”그렇지 않았다면 친구로 남지 못했을지도 모른다.“하경 씨 같은 친구가 있어서 다행이죠.”육하경은 그녀의 밝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배건후가 차에서 내리려는 찰나 병원 문을 나서는 육하경을 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드물게 순진하면서 어딘가 멍해 보이는 미소가 피어있었다. 배건후는 그 미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는 다시 다리를 거두어들였다.차는 점점 멀어져 갔고 고요한 침묵만이 흘렀다. 운전하던 조 기사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