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이른 시간이라 라운지 바 안은 무척이나 조용했고 모든 룸의 문이 닫혀 있는 가운에 제일 안쪽에 있는 큰 룸 앞에만 두 명의 웨이터가 허리를 꼿꼿이 편 채 룸을 지키고 있었다.온다연은 자기가 왜 이곳으로 왔는지 몰랐다. 그렇게 다시 정신을 차리고 나가려는데 방금 봤던 그 룸 문이 거칠게 열렸다.“꺼져. 앞으로 이 근처에는 얼씬거리지 마. 내 말을 어기면 어떻게 되는지 잘 알고 있지?”천 쪼가리 하나만 입은 젊은 여자 한 명이 거칠게 땅바닥에 내쳐졌다. 문을 열어젖힌 남자는 오만하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어딜 감히 도련님 물건을 건드려? 죽으려고. 당장 꺼져. 앞으로 내 눈에 띄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그리고 너는 앞으로 이 바닥에서 끝이야.”내쳐진 여자는 그 말에 사색이 되어서는 바닥을 기며 싹싹 빌었다.“죄송합니다. 한 번만 봐주세요. 저한테 딸린 식구가 있어요. 그러니까 제발 불쌍한 사람 하나 구제하신다 생각하고 한 번만 봐주세요.”“안 꺼져?!”여자는 남자의 발에 의해 멀리 날아갔고 맞은편 벽에 허리를 세게 부딪혔다.룸 문이 매정하게 닫히고 여자는 이렇게 물러날 수 없다는 듯 몸을 힘겹게 일으키며 문을 두드리며 울며불며 빌었다.그러자 문밖을 지키고 있던 두 명의 웨이터가 그녀의 양팔을 붙잡고 질질 끌고 나갔다.온다연은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그 광경을 지켜보다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 하지만 그때 어떤 남자가 다가와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고 룸 쪽으로 끌고 갔다.“뭘 멀뚱멀뚱 보고 있어. 빨리 들어가지 않고.”그리고 어느새 뒤에는 두세 명의 남자가 더 서 있었다. 그들 뒤에는 젊은 여자들 여러 명이 예쁘게 단장한 채 서 있었다.남자는 거칠게 온다연의 손목을 잡고는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온다연은 지금 스포티한 옷을 입고 있었고 속살 하나 드러내지 않았다. 배를 까고 얇은 천 하나만 입은 여자들 사이에 그녀는 단연 눈에 띄었다.뒤에 있던 남자가 온다연의 어깨를 잡으며 물었다.“옷이 이게 뭐야? 왜 안 갈아입었어?
온다연은 다시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하지만 그때 두 명의 남자가 다가와 그들을 앞으로 끌고 가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건 너희들한테 기회야. 지금 제일 중앙에 앉아 있는 남자는 경원시 제일 유명한 유씨 가문의 막내 도련님, 유강후고 그 왼쪽에 있는 남자는 한씨 가문의 후계자 한이준이야. 그 옆의 두 명은 옆 나라의 재벌가 도련님들이고 오른쪽에 있는 두 명의 중동 남자는 석유 왕국의 왕자님들이지. 내가 이런 정보를 주는 이유가 뭔지 알지? 오늘 너희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미래가 바뀔 수도 있다는 뜻이야.”남자가 말을 마치자 어느새 온다연을 포함한 여자들이 남자들 가까이에 도착했다.뒤에 있던 남자는 어느새 앞으로 나와 허리를 꾸벅 숙이고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대표님들, 아까의 실수를 만회하고자 신입들을 데리고 왔습니다.”남자가 여자들을 소개할 때 온다연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뒤로 물러서 여자들 뒤에 숨더니 조용히 룸을 나가려고 했다.하지만 그때 인사를 마친 남자가 도망가는 온다연의 손목을 잡아 거칠게 끌어당기더니 제일 앞에 세워놓았다.“누구 손 한번 탄 적 없이 모두 깨끗합니다. 보다시피 이제 막 성인이 됐고요.”남자가 힘을 가한 탓에 온다연은 중심을 잡지 못하고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게다가 하필 넘어진 곳에서 고개만 들면 유강후가 보였다.순간, 룸 안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온다연에게로 쏟아졌다.온다연은 고개를 한껏 숙인 채 눈앞에 있는 남자의 구두만 바라보았다. 그건 유강후의 신발이었다.순간 비참하고 모욕적인 감정이 마음속에서 끓어올랐고 이대로 그냥 사라져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녀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주먹을 꽉 말아쥐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그때 남자가 아부하기 위해 유강후를 콕 집어 말했다.“도련님, 어떠십...”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유강후가 갑자기 몸을 일으키더니 남자의 무릎을 세게 걷어차 버렸다.뼈가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남자는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그리고 곧바로 유강후의 구두가
온다연은 이미 일어나 있었다. 그녀는 방금 유강후가 사람을 때리는 모든 과정을 전부 지켜보았다.반항 한번 없이 맞고 있는 남자를 보며 그녀는 자신이 맞았던 광경이 떠올랐다.유하령과 그녀의 친구들에 의해 바닥에 쓰러져 맞고 있을 때, 자신도 이 남자처럼 비참하고 불쌍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역시 유씨 가문 사람들은 다 같은 핏줄이라 그런지 사람 때리는 모습마저 닮아있었다.한이준의 말에 웨이터들은 피범벅이 된 남자를 룸에서 끌어냈다.온다연은 끌려가는 남자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제 발로 들어온 거예요, 도련님.”도련님이라는 아주 익숙하고도 낯선 호칭이 들려왔다.유강후는 몸을 돌려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방금 날 뭐라고 불렀어?”온다연은 고개를 숙인 채 주먹을 말아쥐고 다시 말했다.“도련님이요.”유강후의 얼굴은 점점 더 차가워져 갔고 목소리는 점점 더 서늘해졌다.“누가 널 이곳으로 데리고 들어왔어?”온다연은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똑바로 마주쳤다.“제 발로 들어온 거예요. 혹시 제가 즐거운 시간을 방해한 걸까요, 도련님?”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말에 가시가 있었다.평소의 그녀와는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이제껏 유강후의 앞에서 이런 식의 태도를 보인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눈앞에 있는 여자는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말을 내뱉었다. 게다가 이 여자는 유강후의 손아귀에 있는 여자였다.거대한 분노가 가슴 속 깊이 밀려와 유강후는 위험한 분위기를 풍기며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갔다.“온다연, 방금 한 말 다시 해봐.”온다연은 손톱으로 손바닥을 아프게 긁으며 아까 유강후의 옆에 있었던 여자들을 힐끔 바라보았다.두 사람 모두 화장을 하고 있었지만 누가 봐도 어렸다.유강후는 어린 여자를 좋아하는 걸까? 마치 애완동물처럼 쉽게 다룰 수 있는 그런 여자를 좋아하는 걸까?그리고 그녀도 그의 후궁 컬렉션 중 한 명인 걸까?온다연은 순간 메슥거림이 밀려와 당장이라도 토하고 싶었다. 그리고 아까부터 줄곧 머릿속으로 이 세글자가
그때 집사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도련님께서 아가씨를 모시고 돌아가라고 하셨습니다.”이곳의 주인은 유강후이고 온다연도 그것을 알고 있기에 순순히 집사를 따라 다시 돌아갔다.도착해보니 언제 배달을 해온 것인지 흰색 장미가 거실과 침실 그리고 정원 테이블, 심지어는 온천 풀 안에도 놓여있었다.평소라면 꽃향기를 즐겼겠지만 지금은 속이 안 좋아 집사가 건네주는 약도 얼마 안 가 또다시 토해내고야 말았다.또한 간단한 디저트도 입에 넘기지 못한 채 그대로 뱉어냈다.저녁 식사 전에 맞춰 유강후가 돌아왔다.밖은 붉은 노을이 지고 있어 아직 밝았다.유강후는 정원 의자에 앉아 있는 온다연의 앞에 나타났다.흰색 스트라이프 셔츠에 검은색 바지, 그의 성격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한 아주 깔끔한 차림이었다.다만 겉은 이렇게 깔끔하고 고고하면서 잔인한 일을 아무렇지 않게 하고 다닌다.유시 가문 사람들은 하나같이 차갑고 매정하다. 유강후를 시작으로 유하령 그리고 유민준까지 모두 똑같은 인간들이다.찬 바람이 불어오자 온다연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 떨었다.유강후는 그런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표정이 어두운 것이 아까의 분노가 아직 가시지 않은 것 같았다.어색한 적막만 흐르고 두 사람 중 그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그러다 유강준이 발걸음을 옮겨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몇 분 후 다른 옷으로 갈아입고 나왔다.갈아입은 옷은 역시 흰색 셔츠였고 다만 스트라이프가 아닐 뿐이었다. 옷에서는 유강후 특유의 시원한 우디향이 풍겼고 지금 있는 정원과 절묘하게 어우러졌다.온다연은 시선을 내려 바닥을 바라보며 드디어 작은 입을 열었다.“이번에는 어떤 벌을 줄 생각이에요?”유강후는 차가운 목소리로 되물었다.“내가 더러워?”온다연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그를 바라보지 않았다.“내가 어떻게 감히 그런 생각을 하겠어요.”무려 유씨 가문의 셋째 도련님인데, 재력도 있고 권력도 있는 남자인데, 경원시의 여자들이 원해 마지않는 남자를 어떻게 감히 더럽다고 생각할
온다연은 느껴지는 통증에 눈을 질끈 감았다. 입술은 여전히 앙다문 상태이다.유강후는 고집스러운 그녀의 모습에 화가 치밀었다.다만 그녀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그저 고통만 주는 것으로는 그의 성이 풀리지 않았다.눈을 가늘게 접었다. 두 눈에 담긴 음산한 한기는 더욱 짙어져 갔다.몸집도 아담한 온다연은 자꾸만 그의 곁에서 도망칠 뿐 아니라 성격도 앙칼진 고양이처럼 사나웠다.게다가 사람이 있을 수 있는 장소와 아닌 장소도 구분하지 못했다. 만약 오늘 그런 혼란스러운 곳에서 만난 사람이 그가 아니었다면 그녀는 무슨 짓을 당했는지도 모른다.그녀는 정말로 분별력이라곤 하나도 없는 걸까?그뿐만 아니라 그녀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주었으면서 이번에는 죽어도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정말로 고집스러웠다.보아하니 그 방법을 쓰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그는 두 눈을 질끈 감은 온다연을 보며 쌀쌀맞게 말했다.“이건 다 네가 자초한 일이야. 온다연.”손에 힘을 주자 메추리를 잡는 것처럼 그녀의 팔을 대롱대롱 들어 올려 우유를 가득 풀어둔 욕조가 있는 방 입구까지 왔다.집사가 뒤에서 나직하게 말했다.“도련님, 다연 씨는 아직 저녁을 먹지 않은 상태입니다. 벌을 주더라도 뭐라도 먹고 주는 것이 어떨까요.”유강후의 손이 멈추었다. 온다연을 내려놓으려던 순간 온다연은 유강후의 손에서 벗어나 도망가버렸다.그러나 고작 두 걸음 만에 다시 유강후에게 옷깃 잡혀버렸다.유강후의 분노는 더 심해져 갔다. 강아지를 들어 올리듯 그녀의 옷깃을 잡아 올렸다.싸늘하게 굳어버린 그의 얼굴은 꼭 얼음 동굴에서 금방 나오기라도 한 듯했고 목소리엔 짙은 분노가 서려 있었다.“문 열어!”집사는 고집이 센 두 사람을 보더니 살짝 고개를 저으며 열쇠를 꺼내 문을 열었다.안에는 크기가 조금 작은 온천탕이 있었다. 당시 유강후의 요구에 따라 임시로 만든 것이었기에 설비는 완벽히 갖춰지었지만 크기가 조금 작을 뿐이었고 아직 물을 틀어두지 않았다.유강후는 온다
유강후와 그녀는 처음부터 다른 세계의 사람이었다. 그녀는 그에게 다른 것을 바라서는 안 되었다.아무것도 하지 않고 의자에 앉아 멍을 때린 지 한참 지났을까, 어느새 그녀는 몸을 웅크린 자세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온다연은 온천방에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 유강후도 방 밖의 의자에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그는 온다연이 있는 방을 한참이나 빤히 보고 있었다. 날씨가 변하고 바람이 불 때까지도 온다연은 문을 열어달라거나 잘못을 비는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점점 더 세게 불어오는 바람에 바깥의 나무들은 사락사락 소리를 내며 흔들리고 있었다.집사는 열쇠를 들고 유강후에게 다가갔다.“도련님, 문을 열까요? 이미 4시간이나 지났습니다. 약도 안 드셨고요.”유강후는 검은색 문을 보았다. 그 순간 인내심이 거의 바닥을 보이는 것 같았고 어두운 기운을 내뿜으며 말했다.“약 한번 거른다고 해서 안 죽어. 언제까지 고집을 부리나 지켜봐야겠어!”집사도 고개를 돌려 온천방을 보다가 조용히 열쇠를 다시 주머니 속에 넣었다.이때 유강후의 핸드폰이 울렸다. 꺼내 보던 그는 바로 전화를 받았다.한참 지나고 통화를 마친 그는 핸드폰을 넣고 다시 방을 뚫어지게 보았다. 그의 눈빛엔 냉기가 돌았다.“난 잠시 나갔다 올 테니까 잘 지켜봐. 만약 잘못을 인정하면 꺼내주고 계속 고집을 부리면 계속 방안에 내버려 둬. 내 허락 없이 마음대로 문을 열었다간 너도 안에 가둬버릴 테니까!”말을 마친 그는 바로 거실로 몸을 돌렸다.집사는 굳게 닫힌 문을 보곤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이내 방으로 돌아가 핸드폰을 꺼냈다.“사모님, 강후 도련님의 병세가 다시 발작을 일으키는 것 같습니다.”“네, 나중에 오시겠습니까?”“네, 알겠습니다.”...얼마 지나지 않아 하늘엔 갑자기 먹구름이 가득해지더니 번쩍 번개를 치면서 비가 쏟아져 내렸다.의자에 웅크리고 있었던 온다연은 저도 모르게 추위에 몸을 떨었다.주한의 장례식을 치르던 날도 이런 날씨였다.습한 공기에 비 냄새가 섞여 환풍기 틈
놀란 온다연은 온 힘을 다해 버둥거렸다.그러나 이미 늦은 후였다. 방문이 달칵 소리를 내며 닫히고 한 손으로 그녀의 입을 꽉 막고 있었다.“조용히 해!”온다연은 자신의 입을 막아버린 그 손을 꽉 깨물었다. 남자는 고통에 바로 그녀의 턱을 확 움켜쥐더니 벽으로 밀쳤다.“움직이지 마. 난 널 해치러 온 게 아니니까.”낮게 깔린 남자의 목소리는 조금 허약하게 들려왔고 공기 중에는 짙은 피비린내가 섞여 있었다.피 냄새가 나든 말든 온다연은 발을 들어 마구잡이로 그를 차버렸다.남자는 다리로 그녀가 움직이지 못하게 압박하고는 차가운 흉기를 그녀의 허리춤에 가져다 댔다.“자꾸 움직이면 나도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남자가 들이댄 흉기에 온다연은 등골이 서늘해져 바로 행동을 멈추었다.얌전해진 그녀의 모습에 그녀의 어깨를 감싸며 안으로 데리고 갔다.어둠 속에서 남자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번개가 내리칠 때 언뜻 보게 된 남자의 덩치와 생김새, 그리고 까만 착장까지 좋은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겁을 먹은 그녀는 몸이 덜덜 떨리고 있었지만, 최선을 다해 진정하려고 애를 썼다. 그녀가 만난 납치범은 심지어 도망자 신세였다.이런 고급 호텔에 머무는 사람들은 대부분 부자였기에 그녀는 납치범이 돈을 노리고 자신을 납치한 것으로 생각했다. 정말로 그렇다면 사람을 잘 못 잡은 것이다.“전 돈도 없고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절 잡아도 아무런 소용도 없다고요.”남자는 작게 목소리를 내면서 그녀를 다시 벽으로 밀었다.“핸드폰은 어디에 있지?”날카로운 칼이 목으로 다가오자 온다연은 함부로 움직일 생각도 하지 못했다.“핸드폰 안 가지고 나왔어요.”남자는 믿지 않았다. 그녀의 몸을 더듬으며 핸드폰을 찾아보았지만 아무런 수확도 없었다.그는 나직하게 욕설을 내뱉은 뒤 다시 말했다.“난 널 해치지 않아. 하지만 네 도움이 필요해.”남자의 커다란 덩치에 온다연은 두려움을 느꼈다. 이 순간 절망을 느끼며 만약 남자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면 그도 함께 저승으로 끌고
온다연은 반항도, 거절도 하지 않았다. 그가 끌고 가는 대로 얌전히 욕실로 들어갔다.들어가자마자 염지훈을 옷을 벗었다. 피 묻은 옷은 그대로 욕조 안에 대충 던졌다.“왼쪽 어깨 뒤에 있어. 난 팔이 안 닿으니까 네가 이 칼로 틈을 만들어서 손으로 빼내 줘.”말을 마친 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칼을 온다연의 손에 쥐여주며 욕조 안으로 들어가 온다연을 등졌다.온다연은 이런 것을 할 줄 몰랐다. 그저 학생 시절 실험실에서 개구리를 해부해본 게 전부였다.비록 대학 시절 응급처치 수업을 듣긴 했었지만, 이론만 배웠을 뿐 실탄에 맞은 환자를 어떻게 처치해야 한다는 것은 배우지 못했다.그녀의 손과 목소리가 같이 덜덜 떨렸다.“전 할 줄 몰라요.”염지훈은 이를 빠득 갈며 다소 다그쳤다.“빨리해. 시간 없으니까.”온다연은 덜덜 떨리는 손을 가져다 대며 칼로 염지훈의 어깨 상처 쪽을 그었다. 그러자 피가 흘러나왔다.“빨리하라고. 대체 뭘 꾸물대는 거야? 만약 온몸에 독이 퍼져 내가 죽게 되면 너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을 거야. 반드시 널 죽여버리고 눈 감을 테니까!”그의 목소리는 점점 더 사나워졌다.“빨리하라고!”상처에 피가 말라붙어 어느 것이 탄알인지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온다연의 손은 여전히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전, 전 정말로 할 줄 몰라요...”염지훈은 몸을 확 돌렸다.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사납게 온다연을 노려보았다.“지금 당장 빼내지 않으면 널 절대 이곳에서 내보내지 않을 거야. 그렇게 되면 나랑 이곳에서 죽는 건 물론이고 내가 죽기 전에 네 몸을 갈기갈기 찢어서 장기까지 전부 빼낼 테니 각오해!”온다연의 손은 더 심하게 떨려왔다. 쨍그랑, 결국 손에 있던 칼이 바닥에 떨어졌다.염지훈은 목에 핏대까지 세우며 이를 빠득 갈았다.“유씨 집안 사람이라고 했지? 유하령은 내 친구야. 네가 날 도와준다면 유하령을 도와준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좀 도와줄래?”온다연은 빠르게 진정했다.“당신과 유하령은 대체
안윤희는 눈가가 붉어진 채 무언가 말하려다 문득 들어오는 유강후를 바라보았다.유강후는 잠을 제대로 못 잔 듯 피로가 얼굴에 드러났지만 강렬한 분위기와 또렷한 외모는 전혀 흐트러지지 않았다.그는 방 안에 있는 안윤희를 힐끗 바라봤고 단 한 번의 시선만으로도 안윤희의 온몸에 서늘한 전율이 퍼졌다.그의 눈빛은 차갑고 어두웠으며, 마치 독을 품은 칼날처럼 사람의 심장을 꿰뚫는 듯했다.안윤희는 자신이 수많은 남자를 만나봤다고 자부했지만 이렇게 무서운 눈빛을 가진 이는 유강후가 유일했다.안윤희의 마음이 급격히 흔들렸고 유강후가 뭔가를 눈치챘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였다.그러나 이내 스스로를 다독였다. 모든 일을 빈틈없이 처리했으며 관련된 사람들은 이미 모두 사라졌으니 불안할 필요가 없었다.죽은 사람은 비밀을 누설하지 않는 법이다.안윤희는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며 머리를 매만지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강 대표님, 안녕하세요.”유강후는 더 이상 안윤희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곧장 온다연 앞으로 다가가 작은 약병을 건네며 말했다.“이건 곽 의사가 방금 보내준 약이야. 먹어봐.”그의 목소리에는 특유의 부드러움과 깊은 애정이 담겨 있었다.마치 세상에 수많은 아름다움이 있어도 그의 눈에는 온다연만이 유일하게 특별한 존재인 듯했다온다연은 병을 받아 뚜껑을 열고 냄새를 맡았다. 특이한 향이 풍겼고 어딘가 피 냄새와도 비슷한 기운이 섞여 있었다.온다연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유강후는 병을 다시 가져가 약을 꺼내 직접 하나 삼켰다.“봐, 문제없어. 이 약 총 20알이야. 곽 의사가 그러는데, 재료가 워낙 귀해서 자기한테도 40알밖에 없었대. 그중 절반을 나한테 준 거거든. 이거 먹으면 건강 진짜 좋아질 거야. 어쩌면 앞으로 약 안 먹어도 될지도 몰라.”그가 말을 마치자 진수현은 얼굴을 굳히며 차갑게 말했다.“약이 20알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 하나를 먹었다고? 대체 무슨 생각이야?”유강후는 아무 대꾸 없이 옆에 있던 곶감을 집어 온다연의 입가로
“너도 명색에 안씨 가문의 큰딸이야. 가문이 조금 어려운 상황이라지만, 여전히 명문가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좋은 물건이 부족할 리도 없는데 왜 이러는 거니...”안심은 말을 멈추고 온다연의 손을 잡으며 부드럽게 말했다.“다연아, 그저 한 세트의 장신구일 뿐이야. 너무 기분 상하지 말고, 엄마가 더 좋은 걸로 새로 준비해 줄게.”온다연은 안윤희 눈에 잠깐 스친 뚜렷한 분노를 보고는 가슴 한편이 서늘해졌다.배은망덕하다는 말이 딱 적합했다.“엄마, 더 큰 금고를 하나 마련해 주세요. 귀중한 물건들은 거기 보관하고 제가 직접 관리할게요. 앞으로 이런 일이 다시는 없었으면 좋겠어요.”안심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네 물건은 네가 직접 챙기는 게 맞지.”안윤희의 얼굴은 금세 붉어졌다.이건 분명 안윤희를 경계하려는 것이 분명했다.하지만 안윤희는 개의치 않았다. 고작 몇 개의 장신구일 뿐이었고 갚지 못할 정도의 거금도 아니었다. 대진 그룹의 부대표가 된다면 더 많은 이익을 챙길 수 있었다.그때가 되면 아무것도 모르는 온다연은 바보처럼 자신의 손에 놀아나게 되어 있을 것이다.안윤희의 눈에 스친 냉소는 온다연도 똑똑히 읽을 수 있었다.지난 3년간 아버지 진수현 곁에서 많은 것을 배운 온다연은 속으로 생각했다.회사 관리를 원하지 않는 것과 관리 능력이 없는 건 엄연히 다른 거라고.비록 회사를 직접 관리하는 것을 선호하지는 않았지만 가족의 사업을 결코 남의 손에 넘기고 싶지는 않았다.온다연은 진수현을 바라보며 결심한 듯 말했다.“아빠, 이제 제 신분을 세상에 알리고 싶어요. 대진 그룹을 정식으로 이어받아 앞길을 열어가고 싶습니다.”온다연의 말에 안윤희는 순간 얼굴이 창백해졌다. 안윤희는 당황한 표정으로 서둘러 말했다.“다연아, 아직 몸이 좋지 않잖아. 건강을 회복한 뒤 천천히 생각해도 늦지 않아. 회사 일은 우리한테 맡겨도 되잖아.”온다연은 안윤희의 말을 무시한 채 진수현을 향해 말했다.“아빠, 언제까지 아빠 뒤에만 숨을 수는 없어요. 이
안씨 가문도 명문가이긴 하지만 겉만 번지르르할 뿐 이미 속은 망가질 대로 망가진 상태였다. 만약 진씨 가문이 뒤에서 받쳐주지 않았다면 지금쯤 안윤희는 제대로 된 옷 한 벌도 마련하지 못했을 것이다.게다가 예전에 온다연에게서 가져간 물건 중 상당수는 이미 팔아버려 이제 와서 돌려줄 수도 없었다.그때 밖에서 익숙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안윤희의 눈빛이 잠시 차갑게 빛나더니 곧바로 울음을 터뜨렸다.“다연아, 이러지 마. 예전에 네가 선물로 줬던 물건들을 이제 와서 돌려달라니, 말이 돼? 난 우리를 자매처럼 생각했는데, 네가 이렇게까지 나를 몰아붙일 줄은 몰랐어...”온다연은 아무 말 없이 안윤희를 차갑게 바라보았고 그녀에 대한 혐오감이 더욱 깊어졌다.잠시 후, 진씨 부부가 방으로 들어왔다.안심은 안윤희가 온다연의 병상 앞에서 울고 있는 모습을 보곤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무슨 일이야?”온다연이 대답하기도 전에 안윤희가 먼저 말했다.“이모, 다연이가 제가 예전에 받았던 장신구들을 다 돌려달라고 해요. 그런데 제가 뭘 받았는지 기억도 잘 안 나고, 일부는 이미 다른 사람에게 줬어요... 어젯밤에 제가 다연이를 제대로 따라다니지 않고 혼자 둔 걸로 저를 원망하고 있어요. 하지만 저도 제 일이 있었는데 말이에요...”안심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안심은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온다연을 바라보며 물었다.“다연아, 정말 그런 거야?”온다연은 상체를 일으키며 안윤희를 차갑게 쳐다봤다. 보면 볼수록 짜증이 치밀었다.“언니, 연기 그만해. 그동안 언니가 내 물건 가져간 건 전부 언니 멋대로였잖아. 빌린다고 말했지만, 내가 준 적은 한 번도 없었어. 그리고 어제 언니가 가져간 건 내가 결혼식 때 쓰려고 준비해 둔 장신구였어. 한 번도 착용하지 않은 건데, 그냥 가져가더라. 난 허락한 적이 없었는데. 아니면 진씨 가문 물건은 언니가 마음대로 써도 된다는 뜻이야?”온다연의 말투에는 서늘한 기운이 담겨 있었다.“언제부터 진씨 가문이 안씨 가문과 한 식구가 됐는데?”
그때 유강후의 전화가 울렸다. 그는 화면에 표시된 번호를 확인한 뒤 자리에서 일어나 방 밖으로 나갔다.몇 분 후, 안윤희가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 병실로 들어왔다.안윤희는 연한 하늘색 발목 길이 드레스를 입고 하얀 장미 꽃다발을 품에 안고 있어 청순하고 사랑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그러나 침대 위에서 창백한 얼굴로 누워 있는 온다연의 모습이 훨씬 더 사람들의 연민을 불러일으켰다. 안윤희의 마음속에 묘한 질투심이 피어올랐다.안윤희는 방 안을 둘러보고는 유강후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실망한 기색을 보였다. 안윤희는 장미꽃을 창가에 올려놓으며 말했다.“다연아, 몸은 좀 괜찮아졌어?”하지만 온다연은 원래부터 백장미를 싫어했다. 온다연은 차가운 눈빛으로 안윤희를 쏘아보며 물었다.“왜 왔어?”안윤희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네가 깨어났다고 해서 와봤어. 그런데 아직 안색이 많이 안 좋아 보이네.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혹시 누가 진씨 가문을 노리기라도 했어?”온다연은 이번 일에 안윤희가 직접 개입하지 않았더라도 무관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내가 깨어난 게 언니랑 무슨 상관인데? 어젯밤에 일어난 일은 언니가 더 잘 알지 않아?”안윤희는 순간 당황했다.온순했던 온다연이 요즘은 마치 가시가 돋은 듯 상대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다연아, 혹시 어제 내가 목걸이를 빌려 간 것 때문에 아직도 화난 거야?”안윤희는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어제 급해서 미처 말 못 했을 뿐이야. 그리고 우리 사이에 이런 일은 예전에도 많았잖아. 그런데 오늘은 왜 이렇게 예민하게 구는 거야?”온다연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빌린 거라고? 그럼 어제 가져간 장신구 다시 돌려줄래? 내가 다시 쓸 일은 없겠지만, 그건 어머니가 내 혼수를 위해 준비해 주신 거라 남에게 줄 수는 없어.”안윤희는 속으로 분노가 치밀었다.돌려달라고 요구하다니, 감히!원래 그 장신구는 안윤희, 자신의 것이어야 했다. 온다연이 중간에
온다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제가 자리를 떠난 후, 모퉁이에 있는 빈방에 잠깐 머물렀어요. 그때 웨이터가 와서 음료랑 디저트를 좀 가져다줬길래 조금 먹었어요. 그리고...”그녀는 유강후를 힐끔 쳐다보고는 귀끝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그리고 창가에 앉아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구경했어요.”그때 유강후는 연시온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두 사람이 함께 서 있는 모습은 단연 돋보였다. 그 자리에 있던 여자 게스트들은 두 사람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온다연은 속으로 유강후가 더 잘생겼다고 생각했다.온다연은 황급히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창가에 잠깐 기대서 달을 보고 있었어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갑자기 졸음이 쏟아져서 잠들어 버렸죠. 깨어보니 냉동창고 안이었고 정말 추웠어요...”온다연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순간을 떠올리기만 해도 지옥에 다녀온 듯한 고통이 몰려왔다.유강후의 눈에 차가운 기운이 스쳤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모든 CCTV를 확인했지만, 2층의 녹화는 누군가에 의해 삭제됐어. 그리고 음료를 가져다준 웨이터는 오늘 아침 유람선 아래에서 발견됐는데, 이미 죽어 있더군.”유람선에서 확인할 수 있는 건 다 확인했지만 범인은 치밀하게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심지어 웨이터의 지문도 발견되지 않았고 그의 죽음으로 모든 단서가 끊겨버리고 말았다.온다연을 해치려는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닌 듯했다.지난번의 뱀 사건도 아마 그 사람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치밀하고 독한 사람의 짓이 분명했다.그 사람이 하루라도 살아 있는 한, 온다연은 위험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유강후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네 사촌 안윤희의 관계는 어때?”온다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언니와 관련된 일인가요?”사실 온다연은 안윤희를 좋아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안윤희가 어머니의 조카이자 안씨 가문의 큰 아가씨라는 이유로 지난 3년 동안 그럭저럭 무난하게 지내왔다.그런데 최근 들어 안윤희의 행동이 달라지기 시작했다.여러
“꿈에서 제가 얼어붙을 듯한 방에 갇혀 있었어요. 너무 추워서 거의 죽을 뻔했는데 대표님이 나타나 저를 구해 주셨어요. 그리고 낯선 남자와 할머니가 저를 때리려 했는데 정말 무섭고 무자비했어요.”온다연은 고개를 갸웃하며 유강후를 쳐다봤다.“강 대표님은 대체 제게 어떤 사람이었나요? 왜 제 꿈에 자꾸 대표님이 나오는 거죠? 그것도 전부 나쁜 일들에서만요.”유강후는 속이 쓰린 듯 온다연을 한참 동안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네 남편이었다고 하면 믿을래?”온다연은 얼굴이 순간 빨개지더니 곧장 베개를 들어 유강후를 향해 던지며 화를 냈다.“정말 너무 싫어요! 그런 농담 하나도 안 웃기거든요!”유강후는 아침에 안심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마음이 서서히 무거워졌다.그는 온다연을 배신한 적은 없었지만 그녀가 입은 상처 대부분이 자신과 얽혀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유하령은 감옥에 갔고 유자성은 척박한 사막으로 발령이 났으며 강혜숙은 분노 끝에 중풍에 걸렸다. 하지만 그것으로 온다연이 받은 상처가 치유될 리 없었다.그리고 자신 또한 유씨 가문의 사람이었으며 그들과 같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어떻게 해야 온다연이 과거의 상처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을까?어쩌면 온다연의 기억 상실은 하늘이 준 새로운 기회일지도 몰랐다.유강후는 떨어진 베개를 주워 온다연의 등 뒤에 놓으며 낮게 말했다.“농담이었어. 하지만 우리가 전에 알던 사이였던 건 사실이야. 사실을 난 예전에 당신 팬이었거든.”그는 온다연의 침대 옆에 앉아 과거를 떠올리며 천천히 이야기를 꺼냈다.“처음 너를 알게 됐을 때, 너는 아직 어린 소녀였어. 나는 너보다 여덟 살이나 많았지. 너에게 다가갈 수 없어서 마음을 억누르며 매일 네가 빨리 성인이 되기만을 기다렸어.”온다연은 그의 말을 듣고 멍해졌다. 얼굴이 순식간에 빨개졌고 목까지 붉게 물들었다.온다연은 말을 더듬으며 겨우 말했다.“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유강후는 온다연의 얼굴에 흐트러진
유강후는 침묵했다.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온다연이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사람들은 시간이 상처를 치유한다고 말하지만, 유강후는 시간이 모든 진실을 드러낸다고 생각했다. 미래가 어떻게 될지, 어떤 일이 닥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다.하지만 단 한 가지, 온다연을 절대 놓을 수 없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안심은 유강후의 어두운 얼굴을 보고 더는 그를 곤란하게 하지 않기로 했다.“다연이가 깨어났어요. 한 번 가서 봐주세요. 강 대표님이 준 약 효과가 대단했나 봐요. 꾸준히 복용하면 건강이 훨씬 좋아질 것 같아요.”잠시 말을 멈췄던 안심이 다시 입을 열었다.“다연이 일에 관해서만큼은 제가 쉽게 넘어갈 수 없어요. 지금 강 대표님이 다연이를 만나는 걸 허락하는 건, 강 대표님이 다연이를 진심으로 아낀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과거에 다연이를 상처 준 적이 있다면, 제 딸이 그런 사람과 함께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겁니다.”유강후는 눈에 깊은 어둠을 띤 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진 사모님, 진 씨 부부에 관한 이야기를 저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두 분께도 젊은 시절이 열렬히 사랑했던 순간들이 있었다고요. 결국 두 분은 함께하시게 됐잖아요. 저와 다연이 사이에 오해가 있었던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저는 제 평생을 바쳐 다연이에게 보상할 겁니다. 저는 절대 다연이를 놓지 않을 겁니다.”말을 마친 유강후는 병실로 들어갔다.온다연은 침대 머리에 기대고 있다가 문소리가 들리자 엄마인 줄 알고 부드럽게 말했다.“엄마, 밤새 저 돌보시느라 눈이 빨개지셨잖아요. 얼른 가서 쉬세요. 그러다 예뻐지지 못하면 어쩌려고요.”유강후는 아무 말 없이 다가가 온다연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기운이 좋아 보여요. 약 효과가 정말 뛰어난 것 같네요.”유강후는 곽혜진이 준비한 약이 이렇게 효과가 좋을 줄은 몰랐다. 보통 이런 상태에서 6~7일은 회복이 어려울 만도 한데 온다연은 하룻밤 만에 상태가 많이 나아졌다
유강후는 깊이 숨을 들이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지금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안심은 미간을 깊게 찌푸렸다.유강후의 대답은 온다연과의 관계를 간접적으로 인정한 것과 다름없었다.안심은 자신의 직감이 이렇게 정확할 줄은 몰랐다.안심의 표정은 점점 더 차갑게 굳어졌다.“3년 전, 다연이가 발견됐을 때 온몸에 상처투성이였고 폐 감염이 심각해 거의 목숨을 잃을 뻔했어요. 병원에서 한 달을 누워있다 깨어났죠. 하지만 다연이의 몸과 마음은 심하게 망가져 있는 상태였어요. 말을 하지도 않았고 아무도 믿지 않았어요. 특히 밤이 되면 상태가 매우 나빠져 여러 차례 자해를 시도하기도 했죠.”안심은 온다연이 처음 돌아왔던 모습을 떠올리며 울컥했다.“다연이는 우리의 진심에 대해서 여러 번 물으며 의심했어요.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자신은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고 했죠. 우리가 어떤 질문을 해도 대답 대신 눈물만 흘리며 모든 감정은 거짓이라고 되풀이했어요. 염지훈의 설명에 따르면, 양부모의 학대로 이런 일이 생겼다고 해요. 그 집안은 남아선호 사상이 강해서 다연이가 큰 상처를 받았죠. 결국 전문 심리치료사의 도움으로 상담을 진행하고 최면을 통해 과거를 조금씩 잊게 하면서 다연이가 지금처럼 정상적인 상태를 되찾을 수 있었어요.”“강 대표님, 우리는 다연이가 H국에서 겪은 일을 조사해 보려고 했지만 동남아가 아닌 그곳은 우리 영향력이 미치지 못하는 영역이라 제대로 된 정보를 얻지 못했어요.”“지금 우리는 그저 다연이가 더 이상 아프지 않고 행복하기만을 바라고 있어요. 양부모가 다연이에게 준 상처는 우리가 평생을 바쳐도 다 회복시키지 못할 만큼 크니까요. 그래서 저는 다연이가 과거를 떠올리지 않길 간절히 바라요.”안심은 유강후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강 대표님이 정말 다연이의 과거를 알고 있는 연인이나 친구였다면, 다연이가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왜 바다에 빠진 겁니까?”“왜 과거를 떠올리기만 해도 그렇게 고통스러워서
그때, 이권이 서둘러 안으로 들어왔고 손에는 두 병의 약을 들고 있었다.그 약은 며칠 전, 곽혜진이 준 것이었지만 유강후는 온다연에게 줄 기회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유강후는 약을 받아 한 병에서 한 알을 꺼내 직접 입에 넣고 삼켰다.그리고 조용히 말했다.“이 약은 다연이를 위한 겁니다. 다연이의 몸이 회복되는 데 큰 도움이 될 거예요. 일정 기간 복용하면 건강이 많이 좋아질 거고 지금 복용시키면 더 빨리 깨어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진수현은 화를 내며 말했다.“네가 준 물건 받지 않아. 당장 나가!”유강후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진 회장님, 혹시 곽 의사에 대해 들어보신 적 있으신가요? 지금 이 근처 섬에서 비밀 실험을 진행 중인 분입니다.”“이 약은 곽 의사가 직접 준 겁니다. 온다연을 위해 특별히 지은 약이고 매우 귀한 약입니다.”진수현은 잠시 분노를 억누르고 두 병의 약을 노려보며 말했다.“그 약이 진짜라는 걸 누가 증명하지? 다른 사람들은 이 약 한 알을 구하는 것도 하늘의 별 따기인데, 어떻게 두 병이나 구했지?”유강후는 사실대로 말했다.“우리 가문의 어르신께서 곽 의사 가문과 오래된 인연이 있으십니다. 저 역시 곽 의사의 남편과 약간의 교분이 있고 마침 이 근처에 머물고 있다고 하셔서 이렇게 약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유강후는 약을 안심에게 건네며 말했다.“진 사모님, 이 약을 한 알씩 다연이에게 복용시켜 주시길 바랍니다.”진수현은 여전히 불만스러운 듯했지만 안심이 그를 막았다.“이 약에는 문제가 없어요. 방금 강 대표님께서도 우리 앞에서 직접 복용하셨잖아요. 곽 의사의 약은 정말 구하기 힘든데, 강 대표님이 이런 약으로 우리를 속일 리는 없다고 생각해요.”안심은 약병에서 두 알을 꺼내 냄새를 맡아보았다.약에서는 은은하고 깊은 향이 풍겼으며 어딘가 신비롭고 오래된 느낌이 담겨 있었다.안심은 망설임 없이 앞으로 나아가 온다연에게 약을 먹였다.유강후는 옆에서 안심이 온다연에게 약을 먹이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