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강후와 그녀는 처음부터 다른 세계의 사람이었다. 그녀는 그에게 다른 것을 바라서는 안 되었다.아무것도 하지 않고 의자에 앉아 멍을 때린 지 한참 지났을까, 어느새 그녀는 몸을 웅크린 자세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온다연은 온천방에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 유강후도 방 밖의 의자에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그는 온다연이 있는 방을 한참이나 빤히 보고 있었다. 날씨가 변하고 바람이 불 때까지도 온다연은 문을 열어달라거나 잘못을 비는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점점 더 세게 불어오는 바람에 바깥의 나무들은 사락사락 소리를 내며 흔들리고 있었다.집사는 열쇠를 들고 유강후에게 다가갔다.“도련님, 문을 열까요? 이미 4시간이나 지났습니다. 약도 안 드셨고요.”유강후는 검은색 문을 보았다. 그 순간 인내심이 거의 바닥을 보이는 것 같았고 어두운 기운을 내뿜으며 말했다.“약 한번 거른다고 해서 안 죽어. 언제까지 고집을 부리나 지켜봐야겠어!”집사도 고개를 돌려 온천방을 보다가 조용히 열쇠를 다시 주머니 속에 넣었다.이때 유강후의 핸드폰이 울렸다. 꺼내 보던 그는 바로 전화를 받았다.한참 지나고 통화를 마친 그는 핸드폰을 넣고 다시 방을 뚫어지게 보았다. 그의 눈빛엔 냉기가 돌았다.“난 잠시 나갔다 올 테니까 잘 지켜봐. 만약 잘못을 인정하면 꺼내주고 계속 고집을 부리면 계속 방안에 내버려 둬. 내 허락 없이 마음대로 문을 열었다간 너도 안에 가둬버릴 테니까!”말을 마친 그는 바로 거실로 몸을 돌렸다.집사는 굳게 닫힌 문을 보곤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이내 방으로 돌아가 핸드폰을 꺼냈다.“사모님, 강후 도련님의 병세가 다시 발작을 일으키는 것 같습니다.”“네, 나중에 오시겠습니까?”“네, 알겠습니다.”...얼마 지나지 않아 하늘엔 갑자기 먹구름이 가득해지더니 번쩍 번개를 치면서 비가 쏟아져 내렸다.의자에 웅크리고 있었던 온다연은 저도 모르게 추위에 몸을 떨었다.주한의 장례식을 치르던 날도 이런 날씨였다.습한 공기에 비 냄새가 섞여 환풍기 틈
놀란 온다연은 온 힘을 다해 버둥거렸다.그러나 이미 늦은 후였다. 방문이 달칵 소리를 내며 닫히고 한 손으로 그녀의 입을 꽉 막고 있었다.“조용히 해!”온다연은 자신의 입을 막아버린 그 손을 꽉 깨물었다. 남자는 고통에 바로 그녀의 턱을 확 움켜쥐더니 벽으로 밀쳤다.“움직이지 마. 난 널 해치러 온 게 아니니까.”낮게 깔린 남자의 목소리는 조금 허약하게 들려왔고 공기 중에는 짙은 피비린내가 섞여 있었다.피 냄새가 나든 말든 온다연은 발을 들어 마구잡이로 그를 차버렸다.남자는 다리로 그녀가 움직이지 못하게 압박하고는 차가운 흉기를 그녀의 허리춤에 가져다 댔다.“자꾸 움직이면 나도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남자가 들이댄 흉기에 온다연은 등골이 서늘해져 바로 행동을 멈추었다.얌전해진 그녀의 모습에 그녀의 어깨를 감싸며 안으로 데리고 갔다.어둠 속에서 남자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번개가 내리칠 때 언뜻 보게 된 남자의 덩치와 생김새, 그리고 까만 착장까지 좋은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겁을 먹은 그녀는 몸이 덜덜 떨리고 있었지만, 최선을 다해 진정하려고 애를 썼다. 그녀가 만난 납치범은 심지어 도망자 신세였다.이런 고급 호텔에 머무는 사람들은 대부분 부자였기에 그녀는 납치범이 돈을 노리고 자신을 납치한 것으로 생각했다. 정말로 그렇다면 사람을 잘 못 잡은 것이다.“전 돈도 없고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절 잡아도 아무런 소용도 없다고요.”남자는 작게 목소리를 내면서 그녀를 다시 벽으로 밀었다.“핸드폰은 어디에 있지?”날카로운 칼이 목으로 다가오자 온다연은 함부로 움직일 생각도 하지 못했다.“핸드폰 안 가지고 나왔어요.”남자는 믿지 않았다. 그녀의 몸을 더듬으며 핸드폰을 찾아보았지만 아무런 수확도 없었다.그는 나직하게 욕설을 내뱉은 뒤 다시 말했다.“난 널 해치지 않아. 하지만 네 도움이 필요해.”남자의 커다란 덩치에 온다연은 두려움을 느꼈다. 이 순간 절망을 느끼며 만약 남자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면 그도 함께 저승으로 끌고
온다연은 반항도, 거절도 하지 않았다. 그가 끌고 가는 대로 얌전히 욕실로 들어갔다.들어가자마자 염지훈을 옷을 벗었다. 피 묻은 옷은 그대로 욕조 안에 대충 던졌다.“왼쪽 어깨 뒤에 있어. 난 팔이 안 닿으니까 네가 이 칼로 틈을 만들어서 손으로 빼내 줘.”말을 마친 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칼을 온다연의 손에 쥐여주며 욕조 안으로 들어가 온다연을 등졌다.온다연은 이런 것을 할 줄 몰랐다. 그저 학생 시절 실험실에서 개구리를 해부해본 게 전부였다.비록 대학 시절 응급처치 수업을 듣긴 했었지만, 이론만 배웠을 뿐 실탄에 맞은 환자를 어떻게 처치해야 한다는 것은 배우지 못했다.그녀의 손과 목소리가 같이 덜덜 떨렸다.“전 할 줄 몰라요.”염지훈은 이를 빠득 갈며 다소 다그쳤다.“빨리해. 시간 없으니까.”온다연은 덜덜 떨리는 손을 가져다 대며 칼로 염지훈의 어깨 상처 쪽을 그었다. 그러자 피가 흘러나왔다.“빨리하라고. 대체 뭘 꾸물대는 거야? 만약 온몸에 독이 퍼져 내가 죽게 되면 너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을 거야. 반드시 널 죽여버리고 눈 감을 테니까!”그의 목소리는 점점 더 사나워졌다.“빨리하라고!”상처에 피가 말라붙어 어느 것이 탄알인지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온다연의 손은 여전히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전, 전 정말로 할 줄 몰라요...”염지훈은 몸을 확 돌렸다.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사납게 온다연을 노려보았다.“지금 당장 빼내지 않으면 널 절대 이곳에서 내보내지 않을 거야. 그렇게 되면 나랑 이곳에서 죽는 건 물론이고 내가 죽기 전에 네 몸을 갈기갈기 찢어서 장기까지 전부 빼낼 테니 각오해!”온다연의 손은 더 심하게 떨려왔다. 쨍그랑, 결국 손에 있던 칼이 바닥에 떨어졌다.염지훈은 목에 핏대까지 세우며 이를 빠득 갈았다.“유씨 집안 사람이라고 했지? 유하령은 내 친구야. 네가 날 도와준다면 유하령을 도와준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좀 도와줄래?”온다연은 빠르게 진정했다.“당신과 유하령은 대체
유강후는 다급하게 문을 쾅쾅 두드리고 있었다.온다연의 안색이 창백해지고 고개를 돌려 염지훈을 보았다.“제가 방금 살려주었으니까 이젠 저를 살려주셔야겠죠?”염지훈은 눈썹을 치켜세웠다. 문 쪽을 힐끗 보곤 다소 어두워진 눈빛으로 혀를 찼다.“바깥에 있는 저 사람은 누군데?”온다연은 아랫입술을 틀어 물었다.“유강후에요.”염지훈은 다소 의외였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온다연을 화장실로 밀어 넣었다.그는 잘 감아둔 붕대를 다시 풀었다. 욕조에 담가두었던 옷도 건져내어 축축한 그대로 몸에 걸쳤다.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또다시 방 안에 울려 펴졌다. 염지훈을 짜증스레 혀를 찬 뒤 욕조 커튼 뒤로 숨은 온다연의 두 발을 보며 수건으로 가렸다.“소리 내지 마.”그는 몸을 돌려 문을 열었다.문을 열자마자 염지훈은 바깥에서 들어온 사람과 부딪쳐 비틀댔다.유강후와 몇몇 경호원이 문밖에 서 있었다. 다른 방도 하나씩 열어보는 중이었다.몇몇 경호원들은 염지훈을 밀치고 들어와 안을 대충 살펴보았다. 욕실로 들어가려 하자 염지훈이 막아섰다.염지훈은 욕실 앞에 서서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유강후를 보았다.“이러시면 안 되죠. 저도 체면이라는 게 있는데 그걸 무시하고 막 들어와서 수색하면 예의가 아니지 않나요?”하얀 셔츠에 까만 바지를 입고만 있어도 유강후는 담담하고도 고귀한 태가 났다.하지만 염지훈의 눈에는 그의 분노와 자신을 당장이라도 갈기갈기 찢어 죽여버리고 싶은 듯한 잔인함만 보였다.유강후는 가만히 서서 염지훈을 보았다.“온다연은 어디에 있지?”차가운 목소리엔 분노가 가득 느껴졌다.염지훈은 혀를 차곤 자신의 몸을 가리켰다.“만약 사람을 찾고 있는 거라면 다른 방에 가서 찾아보세요. 보다시피 지금 제 상태가 말이 아니라서요. 유강후 씨를 상대할 힘도 없네요.”그의 어깨에선 다시 피가 흘러내려 팔을 타고 그대로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방안에는 온통 피 냄새뿐이었다. 손에 들고 있던 흉기도 챙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유강후는 그를 빤히 보았다.
염지훈이 말을 이었다.“넌 대체 누구지? 유강후랑 대체 무슨 사이인 거냐?”온다연은 시선을 내리깐 채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냥 삼촌 겸 아저씨예요.”염지훈은 다소 의외라는 듯 몸을 돌려 온다연을 보았다.“정말로 유씨 집안 사람이었어?”온다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그를 보았다.불빛 아래 그녀의 얼굴 윤곽은 더 선명해졌다. 검은 두 눈동자엔 꼭 깊은 애정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염지훈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넋을 잃고 보다가 몸을 돌려 피식 웃었다.“유씨 집안 사람들은 역시 미모가 뛰어나네.”온다연은 시선을 내리깐 채 계속 약을 발라주었다.염지훈도 더는 말을 걸지 않았다. 담뱃불은 어느새 꽁초까지 내려왔고 이내 새로운 담배를 꺼냈다. 그러나 입에 물며 불을 붙이기도 전에 온다연이 확 빼앗아 재떨이에 구겨버렸다.“몸에 안 좋아요.”염지훈은 웃는 둥 마는 둥 미묘한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날 이렇게나 걱정해 주는 거야?”온다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불어오는 바람에 흐트러진 머리 탓에 그녀의 표정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한참 지난 후 그녀는 하얀 손을 내밀며 그의 어깨에 묻은 피를 닦아주었다.“얼른 병원에 가 봐요. 세균에 감염되면 엄청 귀찮아지거든요.”목소리는 아주 부드러웠다. 꼭 갓 태어난 고양이 같은 목소리였다.두 사람의 거리는 너무도 가까워 염지훈은 그녀의 체향마저 맡을 수 있었다. 그녀의 체향은 달콤한 우유 사탕 같은 향이었다.그는 눈썹을 움찔거렸다. 온다연은 피를 닦은 티슈를 던지곤 염지훈을 보았다.“염지훈 씨 맞죠? 유하령이 새로 사귄 남자친구라고 들었는데 맞아요?”염지훈은 어깨를 으쓱였다. 대답하지 않았다.온다연의 눈빛에선 막막함이 느껴졌다.“두 사람 약혼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럼 저흰 친구가 될 수 없겠네요.”염지훈의 얼굴에 잠깐 흥미가 스쳐 지나갔다. 그는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왜 될 수 없는데?”온다연은 고개를 떨구었다. 하얀 손을 꼼지락대며 부드럽고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갑자기 확 당겨진 온다연은 휘청거리더니 그대로 그의 품에 안겨버렸다.피부가 맞닿은 순간 그녀는 위장 속에서부터 울렁거리는 느낌에 반사적으로 염지훈을 밀어냈다.그녀는 시선을 내리깔았다.“전 이제 정말로 가야 해요.”염지훈은 눈을 가늘게 뜨며 그녀를 한참 보다가 다소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날 이렇게 밀어낸 사람은 네가 처음이네.”온다연은 두어 걸음 물러나면서 옷자락을 꽉 쥐었다.“염지훈 씨, 전 다른 일이 있어 먼저 가볼게요.”하지만 몇 걸음 못가 염지훈에게 옷을 잡혀버렸다.“창문으로 가!”온다연은 의아한 눈길로 그를 보았다.염지현은 그녀를 창문 쪽으로 끌고 왔다.“유강후가 아직 복도에 남아 있어. 네가 문으로 나간다면 그건 자살행위나 다름이 없을 거야. 창문으로 나가서 앞에 있는 작은 정원을 지나면 바로 원하는 곳 어디든 갈 수 있는 길이 나올 거야.”말을 마친 그는 온다연을 한쪽 팔로 안아 올려 창턱에 앉혔다.“이젠 알아서 내려가.”온다연은 고민조차 하지 않고 바로 뛰어내렸다.바깥의 화단은 아주 축축했다. 온다연은 몇 걸음 못가 신발이 벗겨졌다. 허리를 굽혀 신발을 주우면서 뽀얀 속살이 드러나는 맨발로 젖은 잔디 위를 걸어 다녔다. 피부가 너무 하얀 나머지 눈에 튀었다.염지훈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2초간 빤히 보다가 목울대를 굴렸다.“혹시라도 갈 곳이 없으면 날 찾아와도 돼.”온다연은 감사 인사를 한 뒤 빠르게 신발을 들고 달렸다.호텔은 비록 아주 컸지만, 그녀가 갈 곳은 없었고 커다란 대문 밖도 나가지 못했다. 게다가 혼자의 힘으로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그녀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결국엔 아주 조용한 구석을 찾아 숨어 들어갔다.얼마 지나지 않아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번쩍이는 번개와 요란한 우렛소리에 덜덜 떨면서도 숨어 있었다.비는 계속 내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머리가 점차 어질거렸고 추위에 몸이 달달 떨려왔다. 온몸이 불덩이가 되어 버렸다.한 손으로 벽을 짚으면서 천천히 더 깊은 구석으로 들어갔다.또
손바닥 가득 느껴지는 뜨거움에 위압감이 흘러넘치던 기세는 사라지고 다정하게 그녀를 불렀다.“다연아.”온다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그의 품으로 꽈악 파고들었다.얼음장처럼 차가워졌던 심장도 녹아버리고 유강후는 몸을 굽혀 그녀를 안아 올렸다.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며 옆 사람에게 지시를 내렸다.“가서 의사 불러와!”온다연은 유강후의 목을 꼬옥 끌어안고 있었다. 번개가 내리칠 때마다 화들짝 놀라면서 덜덜 떨고 있었다.호텔까지 돌아가는 길은 멀지 않았지만 온다연을 안고 있던 유강후는 꼭 몇 년이 걸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집사가 문을 열었을 때 물에 빠진 듯한 모습의 두 사람이 시야에 들어오자마자 팔을 뻗어 온다연을 받으려고 했지만 유강후는 피하면서 직접 안고 욕실로 들어갔다. 바닥에는 두 사람의 몸에서 흘러내린 빗물로 가득했다.그는 직접 욕조에 따듯한 물을 담은 뒤 온다연을 내려놓고 깨끗하게 씻겨주었다. 부드럽고 커다란 수건으로 그녀의 몸을 감싼 뒤 침대에 눕혔다.온다연의 몸은 불덩이였다. 입술도 붉고, 건조해져 껍질이 일고 있었다. 작은 얼굴은 창백했고 아주 아픈 모습이었다.분명 아프면서도 그의 팔을 꽉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유강후가 막 그녀의 손을 떼어놓았을 때 그녀는 다시 감겨들었다.이번에는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그리고 힘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가지 마세요. 무서워요.”유강후가 나직하게 말했다.“가서 드라이기만 가져올게. 너 지금 머리 말려야 해.”온다연은 이미 정신이 흐릿한 상태였다.“절 혼자 두지 말아요. 무서워요.”유강후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달랬다.“그냥 드라이기만 가져올 거야. 저기 서랍에 있으니까 3초면 다시 올 수 있어.”그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등을 토닥이면서 손을 떼어냈다.“착하지, 얼른 가져올게.”“아니야, 싫어요.”“봐, 저기 서랍 안에 있어.”“안 돼요. 가지 마세요.”한참을 달래고 나서야 온다연은 팔을 풀었다.유강후가 막 드라이기를 들고 오던 순간 창밖으로 번개가 번쩍거렸다. 겁에
유강후의 말에 온다연은 가슴이 흔들렸다. 눈을 뜨니 더 이상 눈앞이 흐릿하지 않았다.그녀는 자신이 끌어안고 있는 사람이 유강후라는 것을 알아채고 당황한 모습으로 뒤로 물러났다.“아니요. 그 사람들이 아니에요...”유강후는 그녀의 손을 잡으면서 떨어지지 못하게 했다. 그의 눈빛을 보는 온다연은 등골이 서늘해졌다.“다연아, 앞으로...”“아저씨!”온다연은 갑자기 고개를 들더니 말허리를 잘랐다.“목, 목이 말라요...”유강후는 방금 가져온 생강차를 그녀의 입가로 가져다 대며 천천히 먹여주었다.온다연은 몇 모금 마시더니 밀어내고는 그의 얼굴을 만지려 했지만 결국 손이 힘없이 내려갔다.그녀는 유강후를 보면서 아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했다.“유하령이 부럽네...”유강후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유하령이 뭐가 부러운 거지?”그를 바라보는 온다연의 눈빛엔 막막함이 깃들어 있었다.“아껴주는 사람이 있잖아요. 괴롭힘당하지 않게 말이에요...”힘이 없는 그녀의 모습을 보니 유강후는 마음이 아팠다. 그녀의 손을 잡으며 입가로 가져가 뽀뽀를 한 뒤 부드러운 목소리로 나긋하게 말했다.“걔가 있는 건 너도 있어. 걔한테 없는 것도 전부 너에게 줄게.”온다연은 그를 빤히 보았다. 마치 그가 한 말의 진위를 판단하는 눈빛이었다. 그러나 모든 게 힘들고 벅찼던 그녀는 머리를 그의 어깨에 기대었다. 그녀는 더는 화내지 않았다. 오히려 애원하는 듯한 어투로 말했다.“유하령 너무 예뻐하지 말아주면 안 돼요...?”유강후는 꼭 지금 작은 동물을 품에 안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작고 연약하여 병들면 바로 버려지는 그런 작은 동물 말이다. 그녀는 그를 향해 애교를 부리고 있었다. 다른 사람을 예뻐하지 말라면서 말이다.얼어붙었던 심장은 사르르 녹아버리고 손을 들어 올려 부드러운 손길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유하령은 내 조카야.”온다연은 그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으면 웅얼거렸다.“나도 예전에는 조카였잖아요.”유강후는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전부 임정아에 관한 기사였다.온다연은 재빨리 연예계 카테고리를 눌렀고 순식간에 임정아에 관한 기사가 쏟아져나왔다.[대세 여배우 임정아, 영화 오디션 탈락이라니?][임정아, 앰버서더에서 물러나다? L사와 B사에서 돌연 계약 해지한 이유는?][드라마 대박 난 임정아, 정말 촬영장에서 텃세 부리며 조연을 괴롭혔나? 여주인공 전격 교체?][유명 여배우 임정아가 열애설에 휩싸인 내연녀라는 목격자의 증언이 잇달아...][사실 임씨 가문의 딸이 아니다? 임정아의 신분은...][임정아, 그동안 숨겨왔던 추악한 면모가 드러나자 팬들도 등을 돌려...]...기사를 본 온다연은 손발이 차가워졌다.임정아는 집안 배경이 탄탄하고 스스로 프로듀서와 감독할 만큼 능력이 뛰어났기에 아무리 구설수에 휩싸인다 한들 이렇게 한순간에 나락가지는 않을 것이다.이렇게 하루아침에 무너진 이유는 단 하나, 건드려서는 안 될 사람에게 미움을 샀기 때문이다.온다연의 머릿속에 떠오른 사람은 유강후뿐이었다.유선전화기로 걸어간 온다연은 유강후에게 왜 그랬는지 따지고 싶었지만 수화기를 들자마자 다시 내려놓았다. 왜냐하면 유강후와의 정상적인 소통이 불가능한 상태였으니까.한참을 생각한 그녀는 부엌으로 들어갔다.그곳에는 저녁 식사 재료를 준비하는 도우미 여러 명이 있었다.온다연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모두들 조심스럽게 인사를 건넸다.멀지 않은 테이블 위에 핸드폰 여러 대가 놓여있는 걸 발견한 온다연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저녁 메뉴가 뭔지 궁금해서 온 거니까 신경 쓰지 말고 할 일 하세요.”잠시 후, 부엌에서 나온 온다연의 손에는 핸드폰 하나가 들려있었다.다행히 비밀번호가 설정되어 있지 않았다.온다연은 재빨리 방으로 돌아가 임정아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온다연의 전화를 받은 임정아는 깜짝 놀라기도 했지만 목소리에는 피곤함이 가득 담겨있었다.그녀의 말투에서는 유강후에 대한 원망이 느껴졌다.온다연은 이 일이 자신 때문에 일어난 것임을 알고 있었기에 직접 끝내고 싶었다.그러
온다연의 말투는 한없이 싸늘했다.“그래요? 전 그냥 감시 같은데요? 사람을 가두고 내보내지 않는 게 사랑이라면 차라리 큰 새장을 만들어서 언제든지 옮기며 곁에 두는 게 더 편하지 않을까요? 항상 감시할 수 있잖아요.”집사는 발끈한 온다연의 모습을 보고선 감히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온다연은 유강후가 무슨 말을 하든 개의치 않고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만 골라서 먹었다.유강후 쪽에서 점심이 배달되었다.매우 단출한 식사여서 그런지 지금 온다연이 먹고 있는 음식과 매우 대비되었다.예전이라면 가슴이 미어졌을 텐데 이제는 그를 쳐다보고 싶은 마음조차 생기지 않았다.그들 사이에는 너무 많은 것들이 가로막혔고 이제는 돌이킬 방법이 남아있지 않았다.유씨 가문, 아이, 나은별, 바깥의 여자들까지 모두 넘을 수 없는 큰 장벽이다. 유강후가 이유를 대며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다 한들 깨진 그릇을 다시 붙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온준휘의 죽음과 허한의 부러진 손은 깨진 그릇을 붙이려는 희망마저 잃게 만들었다.게다가 유강후는 온다연의 기분과 생각은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유강후의 강요로부터 시작된 관계는 유강후로 인해 끝나게 되었다.물론 마음이 흔들릴 때도 있었지만 그동안 받은 상처를 회복하기에는 쉽지 않다.겉모습이 아무리 좋아도 천성적으로 악한 사람은 강탈과 협박에 익숙해져 있다.온다연은 유강후가 그런 사람일 거라는 의심이 들었다.어쩌면 연민의 감정이 무엇인지조차 모를 수도 있다.이제는 모든 걸 끝내야만 한다.식사를 마친 온다연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곧바로 유강후의 목소리가 들려왓다.“오후에 붙임머리 해주는 사람이 올 거야. 말 잘 들어. 퇴근하고 돌아왔을 때 네가 예전의 모습이었으면 좋겠어.”온다연은 사방에서 옥죄는 느낌에 숨이 턱턱 막혔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차가운 어조로 답했다.“내 머리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거네요? 우리 사이에 더 이상 희망이란 없잖아요. 제발 강후 씨에 대한 좋은 기억 좀 남겨줄 수는 없어요?”유강
집사는 솔직하게 답했다.“대표님께서 핸드폰은 사용하면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통화하려면 거실에 있는 유선전화기로 하면 됩니다.”역시나 예상대로다.온다연의 숨을 들이쉬며 마음속의 분노를 억눌렀다.“강후 씨는요?”집사는 정중하게 말했다.“대표님은 급한 일이 있으셔서 아침 일찍 회사로 나가셨습니다. 저녁쯤에 돌아온다고 하셨고 보고 싶으시면 언제든지 연락해도 된다고 하셨습니다.”“이 별장 안에서는 사모님이 하고 싶으신 대로 자유롭게 행동해도 됩니다. 아참, 그림 그리고 싶으시면 편하게 말씀해 주세요. 도구는 준비되었으니 원하시면 바로 화실을 정리하겠습니다.”“괜찮아요.”누가 봐도 감금하는 상황인데 듣기 좋은 말만 늘어놓았으니 어이가 없었다.‘이딴 것도 자유라고 하는 거야? 지하실에 갇혀있어야 감금이라고 생각하나 보네.’“컴퓨터는 있어요?”온다연의 질문에 집사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답했다.“대표님 서재에 있기는 한데 다만...”“다만 뭐요?”온다연의 집사의 말을 잘랐다.“인터넷 사용하면 안 된다고 하던가요?”집사는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그건 아닙니다.”집사는 이곳에 온 지 하루 만에 온다연이 유강후의 목숨과도 같은 존재라는 걸 눈치챘다.말은 감시라고 했지만 오늘 아침 회사로 가기 전 유강후는 아주 작은 세부 사항까지 명확하게 지시하며 신신당부했다.회사에 급한 일이 없었다면 하루 종일 곁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을 기세였다.유강후는 별장을 나설 때 핸드폰을 사용하면 안 되고 외부와 연락을 하면 안 된다고만 지시했지, 컴퓨터를 사용하지 말라고 강조하지는 않았다.게다가 온다연이 컴퓨터를 사용할 때 옆에서 어떤 걸 하고 있는지 지켜보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한참을 생각하다가 답했다.“외부와 연락하면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컴퓨터를 사용하지 말라는 지시는 없었으니 다른 도우미분들에게 서재에서 뭘 하려는 건지 말씀 안 하신다면 별일 없을 것 같습니다.”말을 마친 집사는 고개를 들어 온다연을 바라봤다.표정이 전보다 조금 풀린 듯한
집사는 충격을 금치 못했다.사실 이곳으로 오기 전 유강후와 온다연의 부부관계가 매우 좋으니 두 사람이 사랑을 나누고 있을 땐 눈치껏 행동하며 함부로 방해하지 말라고 교육을 받았다.그런데 오자마자 온다연의 몸에 키스마크가 가득한 걸 보게 되었으니 충격이 아닐 수가 없었다.하지만 아무리 좋아한들 피부가 찢겨질 정도로 물어뜯는 건 지나친 행동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잠깐 생각에 잠겼을 뿐인데 곧바로 유강후의 싸늘한 시선을 받았다.“이 집에서 나가지 못하게 잘 감시해. 실수하면 바로 해고야.”집사는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알겠습니다. 대표님.”‘분명히 사이가 좋다고 했는데 왜 감시하라는 거지?’유강후는 말을 이었다.“음식은 장 집사가 만든 식단표에 맞춰서 하면 돼. 그리고 지금 당장 조치해서 경호원이랑 도우미를 세 배로 늘려.”“알겠습니다. 대표님.”유강후는 온다연은 안고 방으로 데려가 침대에 눕혔다.반쯤 풀린 타올 사이로 그녀의 하얗고 여린 몸이 반쯤 드러났다.단지 쳐다보기만 해도 유강후는 목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혹시나 열이 나는건가 싶어 온다연의 체온을 재 보았지만 열은 없었다.그런데 웬일인지 평소보다 체온이 높았고 그 덕분에 유강후는 색다른 경험을 하게 되었다.게다가 흥분했음에도 불구하고 꾹 참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괴롭히고 싶은 욕망을 최대로 끌어올려 유강후를 미치게 만들었다.이런 생각을 하자 유강후도 몸이 뜨거워져 참을 수가 없었다.그는 온다연의 타올을 벗기고선 건장한 몸으로 순식간에 덮쳤다.날을 이미 어두워졌지만 그들의 밤은 이제 시작이었다.다음날, 온다연이 잠에서 깼을 때는 이미 점심이었다.습관적으로 핸드폰을 찾던 온다연은 그제야 핸드폰이 없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몸은 이곳저곳 쑤셨고 동시에 광란의 밤이 떠올랐다.처음에는 참을만했다. 유강후가 여보라는 호칭을 듣고 싶어 일부러 유인할 때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약기운이 점점 세졌다. 게다가 유강후는 그녀의 예민한 곳을 잘 알고 있었기
그러나 온다연이 입구에 다다르기도 전에 문이 쾅 닫혔다.문이 닫히는 둔탁한 소리는 온다연의 유일한 희망마저 닫아버렸다.필사적으로 문을 두드렸지만 밖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고개를 돌린 온다연은 자신을 향해 한 걸음씩 걸어오는 유강후를 보게 되었다.그녀는 겁에 질린 채 벽 모퉁이에 숨더니 두려움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마치 시간이 처음으로 되돌아간 것 같았다.유강후가 막 귀국했을 때 온다연은 지금과 똑같은 반응을 보였다.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향기를 맡아도 숨이 막힐 정도였으니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이제는 괜찮겠지 싶었지만 예상치 못하게 찾아온 두려움은 마치 처음으로 돌아간 느낌이었다.아니, 어쩌면 그때보다 더 절망적인 상황일지도 모른다.만약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온다연은 그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으로 멀리 도망칠 것이다.하지만 이 세상에 시간을 되돌릴 방법은 없다.어느새 유강후는 그녀의 앞에 도착했다.그는 온다연을 번쩍 안아 올려 다시 의사에 앉혔고 온다연도 더 이상 반항하지 않았다.그녀는 주삿바늘이 자신의 피부를 찌르는 것 지켜보며 차가운 액체가 몸속으로 들어가는 걸 느꼈다.아프거나 불편하지는 않았지만 왠지 모를 씁쓸함이 밀려왔다.눈앞의 이 남자는 그녀에게 희망을 주고 또 절망을 주었다.남에게 의지하는 것보다 본인 스스로 길을 개척하는 게 어쩌면 더 현명할 방법일지도 모른다.유강후가 스스로 두 사람의 관계를 벼랑 끝으로 몰아붙였으니 온다연도 마음을 독하게 먹을 수밖에 없다.안정제를 투여한 그녀는 곧바로 진정되었으나 두 눈은 초점이 없었고 공허함만 가득했다.유강후는 기운이 빠진 그녀를 바라보며 마음이 심란해졌다.예전처럼 순해졌지만 그때와는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알 수 없는 착잡한 기분을 뒤로하고 곧바로 이성을 되찾아 정신을 차렸다.이제부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온다연의 곁을 지키리라 마음먹었다.그녀에게 나쁜 물에 물들인 임정아를 어떻게 처리할지는 아직 고민 중이다.시술은 순식간에 끝났다.입술에
온다연은 뒤로 물러서며 고개를 가로저었다.“싫어요. 다시 찍고 싶지 않다고요.”유강후는 그녀의 손목을 잡고 도망치지 못하게 막았다.그는 자신의 소유물을 바라보듯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단호하게 말했다.“입술에 있던 점은 원래 위치에 그대로 찍어.”“눈가에 있는 점은 당장 지우고.”“그리고 머리도 다시 붙여.”말투는 차갑고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온다연은 호흡이 힘들 정도로 숨이 막혔다.온다연은 유강후가 강하고 지배적인 성향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하지만 그녀 또한 평범한 사람인데 이런 취급을 받으니 마치 유강후의 장난감이 된 것 같았다.유강후의 세계에서는 그가 왕이었고 온다연은 자신의 머리카락조차 마음대로 자를 권리가 없었다.사랑하지 않더라도 그의 소유물은 반드시 취향에 맞게 그가 원하는 모양이어야 한다.유강후에게서 벗어나려면 반항하며 심기를 건드릴 수밖에 없다.말 잘 듣는 순진한 사람을 좋아하니 이와 반대되는 행동을 하면 그만이다.온다연은 몇 걸음 뒤로 물러서며 의도적으로 그에게서 멀어졌다.“싫어요. 전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유강후는 그녀의 손목을 잡고 의사 바로 앞에 있는 의자에 강제로 데려갔다.“착하지, 말 들어. 아프지 않을 거야.”그의 말투는 매우 차분했으나 온다연은 그 속에 담긴 뜻을 알았기에 섣불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이런 말투가 가장 공포스럽다.온다연은 단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조금 했을 뿐인데, 유강후는 그것마저도 용납할 수 없어 그녀의 의지를 조금씩 억누르고 싶어 했다.이때 의사가 마스크를 쓰고 도구를 손에 든 채 다가갔다.온다연은 있는 힘껏 발버둥을 쳤다.“싫다고요.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강후 씨, 제발 나 좀 놔줘요.”유강후는 그녀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고정한 채 단호한 말투로 얘기했다.“금방 끝날 거야. 조금만 참아.”의사가 다가오자 온다연은 기다렸다는 듯이 작업대를 걷어찼다.이를 본 유강후의 표정은 한없이 어두워졌고 그는 강제
하지만 두 발짝도 못 내딛고 곧바로 유강후에게 붙잡히고 말았다.그는 온다연의 턱을 움켜쥐었다.가느다란 손가락은 그녀의 얼굴에 생긴 작은 점에 닿았다.유강후는 듣도보도 못한 싸늘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이거 뭐야?”온다연은 그에게 잡힌 턱이 이따금 아파졌다.그러나 이 정도는 마음의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온다연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입술을 꽉 깨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다만 눈에 담긴 분노와 원망은 그녀의 심정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유강후는 가슴이 미어졌고 숨 막히는 고통이 너무 괴로웠다.그는 온다연의 착함을 알았기에 늘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뜻밖에도 온다연은 임정아를 알고 있었고 게다가 두 사람은 친밀한 관계처럼 보였다.그 말인즉 온다연은 사실 일찍부터 유강후의 통제에서 벗어났고 보이지 않는 곳에는 그가 모르는 수많이 비밀이 숨어져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손에 잡히지 않고 완전히 통제할 수 없는 이 느낌은 온다연이 그에게 칼을 꽂는 것보다 훨씬 더 초조하고 불안하게 만들었다.온다연은 여전히 도발적인 눈빛으로 유강후를 바라봤고 그의 마음속에는 어느새 어두운 생각이 자라나기 시작했다.유강후는 손끝으로 그녀의 눈가에 찍힌 작은 점을 쓰다듬더니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그 사람을 기억하려고 이 점을 찍은 거야?”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안다.온다연은 여전히 침묵을 지키며 차갑게 그를 바라봤다.그녀의 고집스러운 모습은 유강후를 미치게 만들었고 당장이라도 모든 걸 산산조각 내버릴 충동이 밀려왔다.그는 손에 힘을 주며 이를 악물고 몰아붙였다.“말해.”온다연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단호하게 답했다.“맞아요.”동공이 급격하게 흔들린 유강후는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을 더했다.“온다연, 이제는 막 나가는구나.”“누가 찍으라고 했어?”“설마 이것도 임정아가 찍어준 거야?”온다연은 턱이 부서질 것 같은 느낌에 무의식적으로 그의 손을 긁었다
유강후는 눈시울을 붉히며 단호하게 말했다.“놔. 그냥 마음대로 하게 냅둬.”그는 온다연이 아직 자신에 대한 감정을 가지고 있으니 총을 쏘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그러나 온다연은 결코 총을 내려놓지 않았고 오히려 총구를 그에게 겨누었다.“정아 씨는 잘못이 없어요. 제가 도와달라고 부탁한 거예요. 그러니까 제발 그 손 좀 풀어요.”임정아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고 금방이라도 질식할 지경이었다.온다연은 다급함이 밀려와 저도 모르게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순간 총알이 날아갔고 결정적인 순간에 경호원이 그녀의 손에 들린 총을 옆으로 쳐냈다.날아간 총알은 유강후 뒤에 있는 스크린을 명중했다.쨍그랑 소리와 함께 스크린이 산산조각이 났고 마치 지금 이 순간 유강후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그는 손을 풀고 꼼짝하지 않은 채 멍하니 온다연을 바라봤다.사실 온다연도 자신이 총을 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헛걸음 물러섰고 많이 놀랐는지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렸다.그 시각 숨통이 트인 임정아는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연거푸 기침했다.그제야 정신을 차린 온다연은 재빨리 달려가 임정아를 부축했다.“괜찮아요? 죄송해요. 괜히 저 때문에...”“찾아올 거라고 예상했는데... 정말 죄송해요...”임정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잘못한 건 다연 씨가 아니라 저 사람이죠.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요. 사람을 제멋대로 통제하고 괴롭히고 해치는 게 잘못된 행동이니까.”임정아는 싸늘한 눈빛으로 유강후를 째려봤다.“정말 너무하시네요. 대표님의 이런 행동이 두 사람의 관계를 더 망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겠어요?”“대표님은 제정신이 아니에요. 단언컨대 나중에 이 모든 걸 똑같이 돌려받을 거예요.”이때 문이 열리며 송지원이 사람을 데리고 황급히 뛰어 들어왔다.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유강후가 냉담한 목소리로 말했다.“임정아가 내 여자를 데리고 이딴 곳에 온 것도 모자라 남자까지 불러서 술 마셨어. 쟤를 어떻게 처리하든 내가 알바는 아니지만 다음부터는 조심
이때 경호원에게 제지당하던 임정아가 달려와 유강후를 가리키며 욕설을 퍼부었다.“내가 잘랐어요. 문제 있어요? 머리를 자르든 말든 다연 씨의 자유가 아닌가요? 대표님이 무슨 자격으로 다연 씨의 자유까지 통제하려는 거죠?”“그리고 아까 그분은 옆에서 술 마신 게 전부예요. 손을 짓밟아 부러뜨리는 건 너무 잔인한 행동이 아닌가요?”“대표님처럼 막무가내인 사람들이 아무런 시련도 없이 잘만 살고 있는 게 저는 솔직히 너무 억울해요.”“대표님도 봉현수랑 똑같은 미친X이잖아요. 당신들은 다른 사람의 진실한 마음과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어요.”유강후는 고개를 돌리더니 그녀를 매섭게 쏘아보았다.눈빛은 극악무도했고 마치 지옥에서 온 저승사자처럼 온몸으로 스산함을 뿜어냈다.그 모습에 임정아도 놀란 건 마찬가지였지만 결코 물러서지 않았고 더욱 분노하며 욕설을 퍼부었다.“다연 씨도 사람이에요. 대표님 소유의 장난감이 아니라고요. 왜 머리를 자르는 것까지 간섭하고 통제하는 거죠? 대표님이 뭔데요? 신이라도 되는 거예요?”임정아는 온다연을 자신의 옆으로 끌어당기며 말을 이었다.“다연 씨는 대표님을 좋아하지 않아요. 옆에 있는 것조차 싫어하는데 정말 모르겠어요?”“대표님이 능력 좋은 사람인 건 알겠어요. 이 바닥에서 대표님을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이 없는 것도 알지만 그게 뭐 어때서요?”“다연 씨는 언젠가 대표님을 버리고 도망칠 거예요. 이건 시간문제라고요. 아무리 잡고 있어도 소용없어요.”자신의 감정에만 충실한 임정아는 눈앞의 유강후가 눈이 뒤집혔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간신히 붙잡고 있던 이성의 끈은 임정아의 폭언에 끊어진 지 오래였고 순식간에 악마에 빙의되어 손을 뻗어 그녀의 목을 졸랐다.온다연을 조를 때와는 많이 달랐다. 지금의 유강후는 일말의 이성도 남아있지 않았으니까.그는 임정아를 죽이려는 마음뿐이었다.온다연을 데려간 건 둘째라 치고 머리를 자른 것도 모자라 클럽에서 남자까지 불렀으니 행동 하나하나 그의 마지노선을 넘어버렸다.특히나 마지막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