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다연은 이미 일어나 있었다. 그녀는 방금 유강후가 사람을 때리는 모든 과정을 전부 지켜보았다.반항 한번 없이 맞고 있는 남자를 보며 그녀는 자신이 맞았던 광경이 떠올랐다.유하령과 그녀의 친구들에 의해 바닥에 쓰러져 맞고 있을 때, 자신도 이 남자처럼 비참하고 불쌍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역시 유씨 가문 사람들은 다 같은 핏줄이라 그런지 사람 때리는 모습마저 닮아있었다.한이준의 말에 웨이터들은 피범벅이 된 남자를 룸에서 끌어냈다.온다연은 끌려가는 남자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제 발로 들어온 거예요, 도련님.”도련님이라는 아주 익숙하고도 낯선 호칭이 들려왔다.유강후는 몸을 돌려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방금 날 뭐라고 불렀어?”온다연은 고개를 숙인 채 주먹을 말아쥐고 다시 말했다.“도련님이요.”유강후의 얼굴은 점점 더 차가워져 갔고 목소리는 점점 더 서늘해졌다.“누가 널 이곳으로 데리고 들어왔어?”온다연은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똑바로 마주쳤다.“제 발로 들어온 거예요. 혹시 제가 즐거운 시간을 방해한 걸까요, 도련님?”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말에 가시가 있었다.평소의 그녀와는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이제껏 유강후의 앞에서 이런 식의 태도를 보인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눈앞에 있는 여자는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말을 내뱉었다. 게다가 이 여자는 유강후의 손아귀에 있는 여자였다.거대한 분노가 가슴 속 깊이 밀려와 유강후는 위험한 분위기를 풍기며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갔다.“온다연, 방금 한 말 다시 해봐.”온다연은 손톱으로 손바닥을 아프게 긁으며 아까 유강후의 옆에 있었던 여자들을 힐끔 바라보았다.두 사람 모두 화장을 하고 있었지만 누가 봐도 어렸다.유강후는 어린 여자를 좋아하는 걸까? 마치 애완동물처럼 쉽게 다룰 수 있는 그런 여자를 좋아하는 걸까?그리고 그녀도 그의 후궁 컬렉션 중 한 명인 걸까?온다연은 순간 메슥거림이 밀려와 당장이라도 토하고 싶었다. 그리고 아까부터 줄곧 머릿속으로 이 세글자가
그때 집사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도련님께서 아가씨를 모시고 돌아가라고 하셨습니다.”이곳의 주인은 유강후이고 온다연도 그것을 알고 있기에 순순히 집사를 따라 다시 돌아갔다.도착해보니 언제 배달을 해온 것인지 흰색 장미가 거실과 침실 그리고 정원 테이블, 심지어는 온천 풀 안에도 놓여있었다.평소라면 꽃향기를 즐겼겠지만 지금은 속이 안 좋아 집사가 건네주는 약도 얼마 안 가 또다시 토해내고야 말았다.또한 간단한 디저트도 입에 넘기지 못한 채 그대로 뱉어냈다.저녁 식사 전에 맞춰 유강후가 돌아왔다.밖은 붉은 노을이 지고 있어 아직 밝았다.유강후는 정원 의자에 앉아 있는 온다연의 앞에 나타났다.흰색 스트라이프 셔츠에 검은색 바지, 그의 성격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한 아주 깔끔한 차림이었다.다만 겉은 이렇게 깔끔하고 고고하면서 잔인한 일을 아무렇지 않게 하고 다닌다.유시 가문 사람들은 하나같이 차갑고 매정하다. 유강후를 시작으로 유하령 그리고 유민준까지 모두 똑같은 인간들이다.찬 바람이 불어오자 온다연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 떨었다.유강후는 그런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표정이 어두운 것이 아까의 분노가 아직 가시지 않은 것 같았다.어색한 적막만 흐르고 두 사람 중 그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그러다 유강준이 발걸음을 옮겨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몇 분 후 다른 옷으로 갈아입고 나왔다.갈아입은 옷은 역시 흰색 셔츠였고 다만 스트라이프가 아닐 뿐이었다. 옷에서는 유강후 특유의 시원한 우디향이 풍겼고 지금 있는 정원과 절묘하게 어우러졌다.온다연은 시선을 내려 바닥을 바라보며 드디어 작은 입을 열었다.“이번에는 어떤 벌을 줄 생각이에요?”유강후는 차가운 목소리로 되물었다.“내가 더러워?”온다연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그를 바라보지 않았다.“내가 어떻게 감히 그런 생각을 하겠어요.”무려 유씨 가문의 셋째 도련님인데, 재력도 있고 권력도 있는 남자인데, 경원시의 여자들이 원해 마지않는 남자를 어떻게 감히 더럽다고 생각할
온다연은 느껴지는 통증에 눈을 질끈 감았다. 입술은 여전히 앙다문 상태이다.유강후는 고집스러운 그녀의 모습에 화가 치밀었다.다만 그녀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그저 고통만 주는 것으로는 그의 성이 풀리지 않았다.눈을 가늘게 접었다. 두 눈에 담긴 음산한 한기는 더욱 짙어져 갔다.몸집도 아담한 온다연은 자꾸만 그의 곁에서 도망칠 뿐 아니라 성격도 앙칼진 고양이처럼 사나웠다.게다가 사람이 있을 수 있는 장소와 아닌 장소도 구분하지 못했다. 만약 오늘 그런 혼란스러운 곳에서 만난 사람이 그가 아니었다면 그녀는 무슨 짓을 당했는지도 모른다.그녀는 정말로 분별력이라곤 하나도 없는 걸까?그뿐만 아니라 그녀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주었으면서 이번에는 죽어도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정말로 고집스러웠다.보아하니 그 방법을 쓰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그는 두 눈을 질끈 감은 온다연을 보며 쌀쌀맞게 말했다.“이건 다 네가 자초한 일이야. 온다연.”손에 힘을 주자 메추리를 잡는 것처럼 그녀의 팔을 대롱대롱 들어 올려 우유를 가득 풀어둔 욕조가 있는 방 입구까지 왔다.집사가 뒤에서 나직하게 말했다.“도련님, 다연 씨는 아직 저녁을 먹지 않은 상태입니다. 벌을 주더라도 뭐라도 먹고 주는 것이 어떨까요.”유강후의 손이 멈추었다. 온다연을 내려놓으려던 순간 온다연은 유강후의 손에서 벗어나 도망가버렸다.그러나 고작 두 걸음 만에 다시 유강후에게 옷깃 잡혀버렸다.유강후의 분노는 더 심해져 갔다. 강아지를 들어 올리듯 그녀의 옷깃을 잡아 올렸다.싸늘하게 굳어버린 그의 얼굴은 꼭 얼음 동굴에서 금방 나오기라도 한 듯했고 목소리엔 짙은 분노가 서려 있었다.“문 열어!”집사는 고집이 센 두 사람을 보더니 살짝 고개를 저으며 열쇠를 꺼내 문을 열었다.안에는 크기가 조금 작은 온천탕이 있었다. 당시 유강후의 요구에 따라 임시로 만든 것이었기에 설비는 완벽히 갖춰지었지만 크기가 조금 작을 뿐이었고 아직 물을 틀어두지 않았다.유강후는 온다
유강후와 그녀는 처음부터 다른 세계의 사람이었다. 그녀는 그에게 다른 것을 바라서는 안 되었다.아무것도 하지 않고 의자에 앉아 멍을 때린 지 한참 지났을까, 어느새 그녀는 몸을 웅크린 자세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온다연은 온천방에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 유강후도 방 밖의 의자에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그는 온다연이 있는 방을 한참이나 빤히 보고 있었다. 날씨가 변하고 바람이 불 때까지도 온다연은 문을 열어달라거나 잘못을 비는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점점 더 세게 불어오는 바람에 바깥의 나무들은 사락사락 소리를 내며 흔들리고 있었다.집사는 열쇠를 들고 유강후에게 다가갔다.“도련님, 문을 열까요? 이미 4시간이나 지났습니다. 약도 안 드셨고요.”유강후는 검은색 문을 보았다. 그 순간 인내심이 거의 바닥을 보이는 것 같았고 어두운 기운을 내뿜으며 말했다.“약 한번 거른다고 해서 안 죽어. 언제까지 고집을 부리나 지켜봐야겠어!”집사도 고개를 돌려 온천방을 보다가 조용히 열쇠를 다시 주머니 속에 넣었다.이때 유강후의 핸드폰이 울렸다. 꺼내 보던 그는 바로 전화를 받았다.한참 지나고 통화를 마친 그는 핸드폰을 넣고 다시 방을 뚫어지게 보았다. 그의 눈빛엔 냉기가 돌았다.“난 잠시 나갔다 올 테니까 잘 지켜봐. 만약 잘못을 인정하면 꺼내주고 계속 고집을 부리면 계속 방안에 내버려 둬. 내 허락 없이 마음대로 문을 열었다간 너도 안에 가둬버릴 테니까!”말을 마친 그는 바로 거실로 몸을 돌렸다.집사는 굳게 닫힌 문을 보곤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이내 방으로 돌아가 핸드폰을 꺼냈다.“사모님, 강후 도련님의 병세가 다시 발작을 일으키는 것 같습니다.”“네, 나중에 오시겠습니까?”“네, 알겠습니다.”...얼마 지나지 않아 하늘엔 갑자기 먹구름이 가득해지더니 번쩍 번개를 치면서 비가 쏟아져 내렸다.의자에 웅크리고 있었던 온다연은 저도 모르게 추위에 몸을 떨었다.주한의 장례식을 치르던 날도 이런 날씨였다.습한 공기에 비 냄새가 섞여 환풍기 틈
놀란 온다연은 온 힘을 다해 버둥거렸다.그러나 이미 늦은 후였다. 방문이 달칵 소리를 내며 닫히고 한 손으로 그녀의 입을 꽉 막고 있었다.“조용히 해!”온다연은 자신의 입을 막아버린 그 손을 꽉 깨물었다. 남자는 고통에 바로 그녀의 턱을 확 움켜쥐더니 벽으로 밀쳤다.“움직이지 마. 난 널 해치러 온 게 아니니까.”낮게 깔린 남자의 목소리는 조금 허약하게 들려왔고 공기 중에는 짙은 피비린내가 섞여 있었다.피 냄새가 나든 말든 온다연은 발을 들어 마구잡이로 그를 차버렸다.남자는 다리로 그녀가 움직이지 못하게 압박하고는 차가운 흉기를 그녀의 허리춤에 가져다 댔다.“자꾸 움직이면 나도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남자가 들이댄 흉기에 온다연은 등골이 서늘해져 바로 행동을 멈추었다.얌전해진 그녀의 모습에 그녀의 어깨를 감싸며 안으로 데리고 갔다.어둠 속에서 남자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번개가 내리칠 때 언뜻 보게 된 남자의 덩치와 생김새, 그리고 까만 착장까지 좋은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겁을 먹은 그녀는 몸이 덜덜 떨리고 있었지만, 최선을 다해 진정하려고 애를 썼다. 그녀가 만난 납치범은 심지어 도망자 신세였다.이런 고급 호텔에 머무는 사람들은 대부분 부자였기에 그녀는 납치범이 돈을 노리고 자신을 납치한 것으로 생각했다. 정말로 그렇다면 사람을 잘 못 잡은 것이다.“전 돈도 없고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절 잡아도 아무런 소용도 없다고요.”남자는 작게 목소리를 내면서 그녀를 다시 벽으로 밀었다.“핸드폰은 어디에 있지?”날카로운 칼이 목으로 다가오자 온다연은 함부로 움직일 생각도 하지 못했다.“핸드폰 안 가지고 나왔어요.”남자는 믿지 않았다. 그녀의 몸을 더듬으며 핸드폰을 찾아보았지만 아무런 수확도 없었다.그는 나직하게 욕설을 내뱉은 뒤 다시 말했다.“난 널 해치지 않아. 하지만 네 도움이 필요해.”남자의 커다란 덩치에 온다연은 두려움을 느꼈다. 이 순간 절망을 느끼며 만약 남자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면 그도 함께 저승으로 끌고
온다연은 반항도, 거절도 하지 않았다. 그가 끌고 가는 대로 얌전히 욕실로 들어갔다.들어가자마자 염지훈을 옷을 벗었다. 피 묻은 옷은 그대로 욕조 안에 대충 던졌다.“왼쪽 어깨 뒤에 있어. 난 팔이 안 닿으니까 네가 이 칼로 틈을 만들어서 손으로 빼내 줘.”말을 마친 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칼을 온다연의 손에 쥐여주며 욕조 안으로 들어가 온다연을 등졌다.온다연은 이런 것을 할 줄 몰랐다. 그저 학생 시절 실험실에서 개구리를 해부해본 게 전부였다.비록 대학 시절 응급처치 수업을 듣긴 했었지만, 이론만 배웠을 뿐 실탄에 맞은 환자를 어떻게 처치해야 한다는 것은 배우지 못했다.그녀의 손과 목소리가 같이 덜덜 떨렸다.“전 할 줄 몰라요.”염지훈은 이를 빠득 갈며 다소 다그쳤다.“빨리해. 시간 없으니까.”온다연은 덜덜 떨리는 손을 가져다 대며 칼로 염지훈의 어깨 상처 쪽을 그었다. 그러자 피가 흘러나왔다.“빨리하라고. 대체 뭘 꾸물대는 거야? 만약 온몸에 독이 퍼져 내가 죽게 되면 너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을 거야. 반드시 널 죽여버리고 눈 감을 테니까!”그의 목소리는 점점 더 사나워졌다.“빨리하라고!”상처에 피가 말라붙어 어느 것이 탄알인지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온다연의 손은 여전히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전, 전 정말로 할 줄 몰라요...”염지훈은 몸을 확 돌렸다.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사납게 온다연을 노려보았다.“지금 당장 빼내지 않으면 널 절대 이곳에서 내보내지 않을 거야. 그렇게 되면 나랑 이곳에서 죽는 건 물론이고 내가 죽기 전에 네 몸을 갈기갈기 찢어서 장기까지 전부 빼낼 테니 각오해!”온다연의 손은 더 심하게 떨려왔다. 쨍그랑, 결국 손에 있던 칼이 바닥에 떨어졌다.염지훈은 목에 핏대까지 세우며 이를 빠득 갈았다.“유씨 집안 사람이라고 했지? 유하령은 내 친구야. 네가 날 도와준다면 유하령을 도와준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좀 도와줄래?”온다연은 빠르게 진정했다.“당신과 유하령은 대체
유강후는 다급하게 문을 쾅쾅 두드리고 있었다.온다연의 안색이 창백해지고 고개를 돌려 염지훈을 보았다.“제가 방금 살려주었으니까 이젠 저를 살려주셔야겠죠?”염지훈은 눈썹을 치켜세웠다. 문 쪽을 힐끗 보곤 다소 어두워진 눈빛으로 혀를 찼다.“바깥에 있는 저 사람은 누군데?”온다연은 아랫입술을 틀어 물었다.“유강후에요.”염지훈은 다소 의외였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온다연을 화장실로 밀어 넣었다.그는 잘 감아둔 붕대를 다시 풀었다. 욕조에 담가두었던 옷도 건져내어 축축한 그대로 몸에 걸쳤다.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또다시 방 안에 울려 펴졌다. 염지훈을 짜증스레 혀를 찬 뒤 욕조 커튼 뒤로 숨은 온다연의 두 발을 보며 수건으로 가렸다.“소리 내지 마.”그는 몸을 돌려 문을 열었다.문을 열자마자 염지훈은 바깥에서 들어온 사람과 부딪쳐 비틀댔다.유강후와 몇몇 경호원이 문밖에 서 있었다. 다른 방도 하나씩 열어보는 중이었다.몇몇 경호원들은 염지훈을 밀치고 들어와 안을 대충 살펴보았다. 욕실로 들어가려 하자 염지훈이 막아섰다.염지훈은 욕실 앞에 서서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유강후를 보았다.“이러시면 안 되죠. 저도 체면이라는 게 있는데 그걸 무시하고 막 들어와서 수색하면 예의가 아니지 않나요?”하얀 셔츠에 까만 바지를 입고만 있어도 유강후는 담담하고도 고귀한 태가 났다.하지만 염지훈의 눈에는 그의 분노와 자신을 당장이라도 갈기갈기 찢어 죽여버리고 싶은 듯한 잔인함만 보였다.유강후는 가만히 서서 염지훈을 보았다.“온다연은 어디에 있지?”차가운 목소리엔 분노가 가득 느껴졌다.염지훈은 혀를 차곤 자신의 몸을 가리켰다.“만약 사람을 찾고 있는 거라면 다른 방에 가서 찾아보세요. 보다시피 지금 제 상태가 말이 아니라서요. 유강후 씨를 상대할 힘도 없네요.”그의 어깨에선 다시 피가 흘러내려 팔을 타고 그대로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방안에는 온통 피 냄새뿐이었다. 손에 들고 있던 흉기도 챙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유강후는 그를 빤히 보았다.
염지훈이 말을 이었다.“넌 대체 누구지? 유강후랑 대체 무슨 사이인 거냐?”온다연은 시선을 내리깐 채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냥 삼촌 겸 아저씨예요.”염지훈은 다소 의외라는 듯 몸을 돌려 온다연을 보았다.“정말로 유씨 집안 사람이었어?”온다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그를 보았다.불빛 아래 그녀의 얼굴 윤곽은 더 선명해졌다. 검은 두 눈동자엔 꼭 깊은 애정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염지훈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넋을 잃고 보다가 몸을 돌려 피식 웃었다.“유씨 집안 사람들은 역시 미모가 뛰어나네.”온다연은 시선을 내리깐 채 계속 약을 발라주었다.염지훈도 더는 말을 걸지 않았다. 담뱃불은 어느새 꽁초까지 내려왔고 이내 새로운 담배를 꺼냈다. 그러나 입에 물며 불을 붙이기도 전에 온다연이 확 빼앗아 재떨이에 구겨버렸다.“몸에 안 좋아요.”염지훈은 웃는 둥 마는 둥 미묘한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날 이렇게나 걱정해 주는 거야?”온다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불어오는 바람에 흐트러진 머리 탓에 그녀의 표정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한참 지난 후 그녀는 하얀 손을 내밀며 그의 어깨에 묻은 피를 닦아주었다.“얼른 병원에 가 봐요. 세균에 감염되면 엄청 귀찮아지거든요.”목소리는 아주 부드러웠다. 꼭 갓 태어난 고양이 같은 목소리였다.두 사람의 거리는 너무도 가까워 염지훈은 그녀의 체향마저 맡을 수 있었다. 그녀의 체향은 달콤한 우유 사탕 같은 향이었다.그는 눈썹을 움찔거렸다. 온다연은 피를 닦은 티슈를 던지곤 염지훈을 보았다.“염지훈 씨 맞죠? 유하령이 새로 사귄 남자친구라고 들었는데 맞아요?”염지훈은 어깨를 으쓱였다. 대답하지 않았다.온다연의 눈빛에선 막막함이 느껴졌다.“두 사람 약혼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럼 저흰 친구가 될 수 없겠네요.”염지훈의 얼굴에 잠깐 흥미가 스쳐 지나갔다. 그는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왜 될 수 없는데?”온다연은 고개를 떨구었다. 하얀 손을 꼼지락대며 부드럽고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유강후는 괴로워하면서도 이를 악물고 참았다.“10일.”“온다연, 너 계속 이러면 아기 퇴원하는 날에도 못 볼 줄 알아.”그 말을 듣고 얼어붙은 온다연은 재빨리 그의 손을 놓았다.유강후가 어떤 사람인지 온다연은 알고 있다. 정말 그를 화가게 한다면 아마 한 달 동안 아기를 보지 못할 수도 있다.온다연은 어쩔 수 없이 분노를 꾹 참고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고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억울해 눈물을 펑펑 쏟아냈다.심하게 때려서 그런지 유강후는 온다연의 걷는 자세가 살짝 잘못된 걸 발견했다.하지만 결혼반지를 던지고 걷어찼던 행동을 생각하면 여전히 분을 삭이지 못했다.온다연은 울며 겨자 먹기로 문을 열었는데 밖에는 수많은 경호원들이 서 있었다.이권도 그곳에 있었지만 감히 나서서 말을 건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엉덩이를 맞은 걸 모든 사람이 들었다고 생각하니 분하면서도 수치스러웠다그러나 반지를 주워 오는 것 외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다.유강후가 아기로 협박을 하니 그의 장단에 맞춰주는 게 현재로서는 최선이다.온다연은 유강후에 대한 호감이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전에는 70점이었다면 이제는 50점밖에 되지 않았다.온다연은 씩씩거리며 눈물을 닦고선 마지못해 바닥에 있는 반지를 주웠다.온다연이 휴게실로 돌아오자 유강후는 자연스레 손을 내밀었다.“끼워줘.”그 모습은 어찌나 무자비하고 싸늘한지 마치 인정머리 없는 제왕 같았다.온다연은 화가 나서 반지를 다시 던져 버리고 싶었지만 아기를 볼 수 없다는 생각에 울분을 참으며 유강후에게 반지를 끼웠다.유강후는 반지를 한번 꼼꼼히 확인하더니 스크래치가 없는 걸 보고선 마음속의 분노가 절반 가라앉았다.그는 자리에 앉아 온다연을 품에 끌어안았다.“뭘 잘못했는지 알겠어?”온다연은 대답하기 싫은 듯 고개를 숙이고 계속 눈물을 닦았다.온다연의 빨갛게 부은 눈과 눈물에 젖은 머리카락을 보니 유강후도 마음이 반쯤 풀렸다. 그는 손을 뻗어 온다연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잔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었다.“네가 말해봐.
유강후는 그저 말없이 가만히 온다연을 쳐다봤고 온다연은 그의 손에 피가 날 정도로 세게 깨물고서야 힘을 풀었다.유강후는 곧바로 다시 그녀의 부드러운 엉덩이를 내리쳤다.심지어 전보다 더 무자비해졌다.고통에 얼굴이 하얗게 질린 온다연은 목 놓아 울부짖었다.“미워요. 이거 놓으란 말이에요.”“날 때릴 자격이 없잖아요.”유강후는 얼굴빛 변한 온다연을 보고선 가슴이 아픈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또 함부로 버릴 거야?”온다연은 유강후가 미워 죽을 것 같았다. 울분이 치밀어 올라 더욱이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버릴 거예요. 평생 찾지 못하게 바다에 던질 거라고요. 때려죽이든 마음대로 해요.”일말의 작은 연민은 온다연의 말에 순식간에 사라졌다.유강후는 화를 주체하지 못해 손까지 떨었다.결혼반지라는 중요하고 소중한 물건을 함부로 버렸으면서 이렇게까지 고집을 부리는 온다연이 이해되지 않았다.유강후는 손을 들어 세게 두 번 정도 내리쳤다.전보다 훨씬 힘을 주어서 그런지 온다연은 괴로움에 손발을 마구 휘저으며 숨이 넘어갈 지경으로 울었다.울면서도 잊지 않고 유강후를 비난했다.“분명히 은별 씨 편을 들었으면서...”“차라리 때려죽여요. 그러면 은별 씨랑 결혼해도 되잖아요.”“우리 이제 그만해요.”...온다연이 말할수록 유강후의 분노는 더욱 커져갔고 끝내 또 세게 때렸다.분노와 두려움, 공포와 고통의 감정이 뒤섞이자 저도 모르게 주한의 이름이 튀어나왔다.“너무 아파... 주한아, 나 좀 도와줘.”“그만 때려요.... 아픈단 말이에요.”...유강후의 손은 허공에 굳어버렸다.주한... 온다연은 주한에게 도움을 청했다.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유강후는 숨이 멎을듯한 고통이 찾아왔다.“방금 뭐라고 했어?”온다연은 심하게 울부짖은 탓에 목소리가 잔뜩 쉬었다.“뭐라 하든 상관할 바가 아니잖아요. 아저씨는 나 괴롭히고 때릴 줄밖에 모르잖아요. 싫어요. 아저씨같은 사람이랑 살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까 이거 놔요.”유강후는 이마에 핏줄이 솟을
온다연은 유강후에게 안긴 방금 전의 상황이 왠지 모르게 민망했다.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으니 마치 유강후가 키우는 고양이나 심심할 때 가지고 노는 장난감과 별반 다를게 없는 느낌이었다. 수치심과 분노가 한꺼번에 몰려온 온다연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채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싫어요. 필요 없다고 몇 번이나 말했잖아요.”유강후는 고집불통인 온다연의 모습에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눈앞에 있는 반지는 그가 이 생에 받은 것 중에 가장 소중하고 아끼는 물건이다. 이런 마음도 모른 채 온다연은 필요 없다는 말 한마디와 함께 바닥에 내팽개쳤다.마치 누군가가 그의 심장을 바닥에 내팽개치고 발로 여러 번 짓밟는 격이다.유강후는 머리가 피가 쏠릴 정도로 화가 나서 소리쳤다.“주우라고.”온다연은 유강후가 화난 걸 알았지만 그녀도 같은 상황이기에 신경 쓸 처지가 아니었다.분명히 나은별을 밀어낼 수 있었음에도 유강후는 기댈 수 있게 팔을 내어주었다.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고 그렇게 신경이 쓰이는 거면 차라리 두 사람이 결혼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온하랑은 얼굴을 붉히며 몸을 떨었다.“싫어요. 그리고 제가 나은별 씨를 먼저 때렸어요. 아저씨가 아끼는 사람을 때려서 가슴이 아파요? 그럼 다시 날 때리면 되겠네.”유강후는 점점 더 화가 치밀었다.“네가 언제 가슴 아프다고 했어?”욕하고 때리는 건 얼마든지 해도 되지만, 유독 이 반지를 떨어뜨린 건 용납할 수 없었다.이건 그의 마음과 진심을 짓밟는 것과 다름없는 해동이다.“주워서 깨끗하게 닦아.”유강후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온다연 마음속의 작은 화산이 완전히 폭발하였고 곧바로 눈앞의 반지를 발로 차버렸다.“주울 생각 없어요. 그리고 이렇게 싼 반지는 아저씨한테 어울리지도 않아요. 그러니까 나은별 씨한테 더 비싼 거로 사달라고 하세요.”온다연의 발차기에 반지는 더 멀리 날아갔다.유강후는 너무 화가 나서 목의 핏줄이 터져 나올 정도로 으르릉거렸다.“온다연, 넌 오늘 혼 좀 나야겠다.”그
나은별은 손톱이 살을 피고들 정도로 주먹을 불끈 쥐며 나지막하게 말했다.“강후 씨, 이제 내 말은 믿지도 않는 거네? 이렇게 많은 사람이 다연 씨가 먼저 손쓴 걸 봤는데도 여전히 내 문제라는 거야?”유강후는 그 말을 가볍게 무시한 채 싸늘한 시선으로 조아영을 바라봤다.“조세진이 그쪽 아버지?”조아영은 극심한 고통에 식은땀을 흘렸지만 차마 유강후의 말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맞아요.”유강후의 말투는 단호했다.“아버지한테 전해. 파산할 거니까 미리 마음 준비하라고.”조아영은 너무 놀라서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로 울부짖었다.“대표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유강후는 무자비했다.“들리는 그대로야. 오늘부터 조씨 가문은 너 때문에 파산하게 될 거야. 기대해.”조아영은 고개를 번쩍 들고 마지막으로 발악했다.“분명히 저 여자가 먼저 때렸는데 왜 우리가 이런 불이익을 받아야 하죠?”유강후의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다.“먼저 때렸다고? 그래서 뭐? 내가 있는 한 다연이가 사람을 때려죽여도 잘했다고 칭찬할 거야. 너 같은 인간을 수없이 많이 봤어. 내가 너보다 지위가 낮았다면 그런 표정이랑 행동으로 말했을까?”이런 사람에게 더 이상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고 싶지 않았던 유강후는 곧바로 경호원에게 말했다.“은별이는 병원으로 데려가고, 다른 사람 전부 다 내보내. 당장.”나은별은 씩씩거리며 말했다.“강후 씨, 이럴 필요까지는 없잖아.”유강후는 못 들은 척 무시하고선 뒤를 돌아 성큼성큼 밖으로 나가며 경호원에게 말했다.“내가 왔을 때 여기에 사람이 남아있으면 너희들도 끝장인 줄 알아.”경호원들은 이구동성으로 답했다.“네, 도련님.”나은별은 멀어지는 유강후의 훤칠한 뒷모습을 바라보며 주먹을 불끈 쥐었고 눈에서는 악의가 번쩍였다.‘유강후, 날 이렇게 대한다는 거지? 두고 봐, 나도 더는 안 참아.’경호원들은 나은별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그저 의무적으로 그녀를 부축했다.“얼른 가시죠. 도련님이 분부했으니 저희는
유강후는 밀어내고 싶었지만 나은별을 중심을 잡지 못하는 듯 계속 비틀거렸다.밀어내려고 할수록 나은별은 그의 옷을 한사코 움켜쥐고 놓지 않았다.온다연의 눈에 비친 이 장면은 마치 서로에게 감정이 남아있는 연인 같았다.순간 어려서부터 각별한 사이로 자라온 소꿉친구 사이에 제3자가 끼어들 자리는 없다고 생각했다.나은별의 말대로 유강후는 어쩌면 일시적인 감정 때문에 지금처럼 행동하는 걸 수도 있다.온다연은 주먹을 불끈 쥐며 두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봤다.“내가 때렸어요. 왜요? 가슴 아파요?”그 말에 화가 난 유강후는 목소리마저 가라앉았다.“온다연,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온다연은 싸늘하게 웃었다.“말이 되는지 안 되는지는 당사자가 제일 잘 알겠죠.”이때 반지를 수정하려고 자리를 잠깐 비운 직원이 상황 파악을 못 하고 수정된 반지와 함께 걸어왔다.“다연 씨, 요청하신 대로 수정이 완료되었습니다.”온다연은 번쩍 돌리더니 큰 소리로 말했다.“이제 필요 없으니까 환불해 줘요.”유강후는 화가 치밀어 몸을 떨었다.“그러기만 해봐.”온다연은 시선은 여전히 그의 팔에 기대어있는 나은별에게 고정되어 있었다.“두 사람 결혼해요. 아주 천생연분이네.”그 말을 한 뒤 직원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환불해 줘요. 이제 필요 없어졌거든요.”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한 직원은 정석대로 안내했다.“죄송합니다. 이니셜이 새겨진 특별 제작한 반지라 환불이 불가합니다.”화를 주체할 수 없었던 온다연은 앞으로 걸어가더니 반지를 집고 땅바닥에 내던졌다.“그럼 버릴게요.”단단한 반지가 바닥에 닿자 몇 미터 높이로 튕겨 나갔다가 다시 쨍그랑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유강후는 자신이 더없이 아끼고 사랑하는 물건이 버려지는 것을 보고 화가 나서 몸을 떨었다.그는 단호하게 말했다.“온다연, 당장 주워.”온다연은 차가운 표정으로 힐끗 보고선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분노로 두 눈이 빨갛게 충혈된 유강후는 단번에 나은별을 밀어내고 앞으로 걸어갔다
온다연의 눈에 비친 살기는 두피를 저리게 했고, 손에 칼이 있었다면 주저 없이 나은별을 찔렀을 것이라고 모두가 확신했다.사람들은 온다연처럼 몸집이 작은 여자가 어디서 폭발적인 힘이 나왔는지 몰랐고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 큰 악의를 품고 있는데 이해되지 않았다.조아영은 체면을 잃었다는 생각에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온다연을 때릴 기세였다.“미친X. 남의 남자 친구를 뺏은 주제에 뭐가 그렇게 당당해서 사람을 때려?”“하여튼 가정 교육을 못 받으면 이렇다니까. 세컨드인 걸 아무리 즐겨도 그렇지 어떻게 당사자 여자 친구를 떄려?”“내가 오늘 너 죽여버릴 거야.”그러나 조아영의 손이 온다연에 닿기도 전에 손목이 잡혔다.우드득하는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나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조아영은 반대편 벽에 내동댕이쳐졌다.불과 몇 초안에 일어난 일에 다들 눈을 의심하여 그대로 얼어붙었다.그들 사이에 무슨 갈등이 있는지 주위 사람들은 몰랐으나 눈앞의 이 훤칠한 남자가 마치 조아영을 잡아먹으려는 것처럼 살벌하다는 건 단번에 알 수 있었다.누군가 핸드폰을 꺼내 영상을 찍기 시작했다.유강후는 온다연을 끌어당겨 몸 곳곳을 확인했다.다친 곳이 없는 걸 확인하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버럭했다.“왜 가만히 있어. 다른 사람이 때리려고 하면 소리라도 질러야지.”이때 옆에 있던 조아영이 극심한 고통을 참으며 말했다.“눈 잘못됐어요? 저 여자가 은별이를 때렸다고요. 은별이가 어떻게 맞았는지 두 눈 뜨고 똑바로 봐봐요.”유강후는 그제야 바닥에 앉아 있는 나은별이 눈에 들어왔다.평소의 매력적인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얼굴은 온통 피투성이이고 머리는 정신 나간 여자처럼 헝클어져 있었다.유강후는 온다연이 누군가를 때렸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우리 다연이는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야.”이때 옆에 있던 직원이 용기 내 입을 열었다.“대표님, 저희가 봤습니다. 이 여성분이 먼저 손을 쓴 게...”“닥쳐.”유강후는 버럭 호통을 쳤다.“내가 말하라고 했어?
온다연은 망설임 없이 여자의 손목을 덥석 잡고 뒤로 힘껏 밀쳤다.힐을 신은 여자는 두어 걸음 뒷걸음질 치더니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온다연은 싸늘한 눈빛으로 쳐다봤다.“누구신데 남 일에 참견하는 거죠? 경고하는데 가만히 있는 게 좋을 거예요. 안 그러면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겁니다.”넘어질 뻔하던 일행을 나은별이 부축했다.여자는 나약해 보이는 온다연이 감히 밀쳐낼 줄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듯 당황함을 감추지 못했다.그럼에도 분을 이기지 못하고 또 달려들어 온다연을 치려고 했다.이때 나은별이 팔을 붙잡았다.“조아영, 그만해. 때릴 가치조차 없는 사람이야.”나은별은 온다연에게 다가가 목소리를 낮추었다.“내가 화내면서 뺨 한 대 치길 바랐던 건 아니죠? 솔직히 그 모습을 강후 씨가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잖아요. 내가 유하령처럼 멍청해 보여요?”“온다연, 내가 너처럼 천한 여자를 한두 번 본 것 같아? 매달려도 소용없으니까 포기해. 유씨 가문이랑 강씨 가문에서 두 사람의 결혼을 응원할까? 너처럼 가진 것 하나없는 인간이 무슨 자격으로 강후 씨랑 만나.”“유하령이 말해줬으니까 순진한 척 그만해. 너 복수하려고 강후 씨를 만나는 거잖아. 엄청 친한 친구가 있었다며? 널 구하려고 다른 사람 손에 죽었다던데 맞아? 죽기 전에 영상까지 찍혔다며? 아참, 유하령이 그 영상을 나한테 보내줬어.”온다연은 고개를 번쩍 들어 죽일 듯이 나은별을 노려봤다.나은별은 대수롭지 않은 듯 피식 웃고선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그 남자애가 너한테 소중한 존재라고 들었어. 죽은 사람의 마지막 체면을 지켜주고 싶으면 좋은 말로 할 때 강후 씨 곁에서 떨어져. 안 그러면 내가 그 영상 인터넷에 확 뿌려버릴 거야. 죽어서도 고통스럽게...”짝.온다연은 나은별의 따귀를 세게 한 대 갈겼다.눈빛에는 독기가 가득했고 당장이라도 죽여버릴 듯 살벌했다.“유하령이랑 똑같은 인간인 줄은 몰랐네요. 당신 같은 인간은 살 자격도 없어요.”나은별은 그대로 얼어붙었다.어려서부터 지금까지
나은별은 이권을 여러 번 찾아가 유강후가 왜 만나주지 않느냐고 물었다.이권도 처음에는 예의 바르게 대했지만 찾는 횟수가 많아짐에 따라 저도 모르게 피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더는 참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러 이실직고하게 되었고 온다연이 싫어해서 만나지 않는다고 얘기했다.그 후로는 나은별의 전화를 아예 받지 않았다.나씨 가문과 유씨 가문의 혼담이 취소된 걸 누가 소문냈는지 유강후에게 아기가 생겼고 그 상대가 나씨 가문의 아가씨가 아니라는 것까지 모든 사람이 알게 되었다.그 이후로 나은별과 나씨 가문은 경원의 가장 큰 웃음거리가 되었다.온갖 조롱과 유언비어가 난무했고 유강후와 결혼하는 건 나씨 가문의 일방적인 바람이었을 뿐 유강후가 좋아하는 사람은 나은별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고 사람들이 수군거렸다.소문이 퍼지는 가운데 나씨 가문의 투자자들은 하나둘씩 자금을 회수하기 시작했고 회사는 지금 매우 난처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가장 역겨운 점은 예전에 빌붙으려고 양손 가득 선물 챙겨서 찾아오던 사람들이 갑자기 증발이라도 한 듯 문전성시를 이루던 나씨 가문은 하루아침에 적막해졌다.배은망덕한 사람들의 행동에 화가 치밀어 오른 나씨 가문 어르신은 명절날에도 집에만 틀어박혀 있었다.나은별은 이런 상황이 발생한 근본적인 원인을 알고 있다.사람들이 추측하며 수군거릴 때 아무런 대처 없이 묵인한 유강후가 그 원인의 중심이다.그동안 나씨 가문을 통해 미래 그룹에 빌붙으려던 사람들까지 발걸음을 멈췄다.나은별은 그런 사람들을 미워하는 건 아니다.이익을 추구하는 건 인간의 본성이다. 하늘에서 땅이 아닌 지옥으로 떨어지는 케이스를 수없이 많이 봐왔기에 이런 우여곡절쯤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이익 때문에 등을 돌린 인간이 아닌 사건의 원흉이라면 말이 달라진다. 나은별은 온다연이 유강후에게 빌붙어 그녀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간 사람이라고 생각했다.초라한 자신에 비해 전보다 안색도 좋아지고 예쁜 얼굴마저 더 정교해진 온다연이 몹시 눈에 거슬렸다.게다가 입고 있는 옷의 패턴
온다연은 순순히 그의 품에 안겨 몰래 눈물을 닦았다.“보석상에서 가지러 가도 된다고 연락왔는데 아직 안 갔어요. 결혼식 며칠 전에 가려고요.”그 말을 들은 유강후는 설레는 마음에 심장이 뛰었다.“지금 가지러 가자. 어떤 건지 너무 보고 싶어.”옷 갈아입을 때 유강후는 특별히 가장 마음에 드는 슈트를 입었다.그러고는 온다연에게 넥타이를 골라달라고 부탁했다.온다연은 너무도 많은 넥타이에 흠칫하다가 다시 신중하게 골랐다.유강후는 캐비닛 앞에 서서 열심히 넥타이를 고르는 온다연이 귀여운지 입가에 웃음을 머금었다.온다연이 아직 성인이 되지 않았을 때 유강후는 이런 모습을 상상하곤 했다. 외출 준비할 때 아내인 온다연이 옷과 넥타이를 골라주며 신경 써주는 이 상황을 수년동안 기다렸다.긴 기다림 끝에 드디어 상상이 현실로 되었고 지금 그의 앞에 서 있는 온다연은 매우 열심히 넥타이를 골라주고 있다.그 모습이 어찌나 귀여운지 당장이라도 침대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어젯밤 너무 무리한 탓에 차마 그러지 못했다.유강후는 뒤에서 온다연을 끌어안고선 허스키한 목소리로 물었다.“골랐어?”온다연은 회색 넥타이를 꺼냈다.“오늘 입은 옷이랑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예뻐요.”유강후는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예쁜 건 딱히 중요하지 않아. 다연이가 좋아하면 그게 뭐든 나도 좋아.”온다연은 얼굴이 발그레해졌다.“아저씨, 그만해요.”빨갛게 달아오른 온다연의 귀를 본 유강후는 더 이상 참지 못했고 그녀의 머리를 잡고선 한참이나 키스를 한 후에야 놓아주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보석상에 도착했다.임정아는 안목이 좋을 뿐만 아니라 여러 주얼리 브랜드의 모델이기도 하다. 온다연은 가성비가 좋고 흔치 않은 남성용 반지를 골랐다.온다연이 집 사려고 모아둔 금액이었으니 싼값은 아니었다.하지만 유강후가 마음에 안 들어 할 수 도 있으니 긴장된 마음을 늦추지 못했다. 어쨌든 지금 입고 있는 옷과 시계에 비하면 훨씬 싼 값이니까.그런데 의외로 유강후는 매우 좋